5.공과색(空과色)

 

舍利子

사리자

 

사리자여,

여기서도 금강경처럼 제일먼저 제자 이름이 나옵니다.

사리자는 사리불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첫번째 지혜제일의 제자입니다.

불경강의를 들으면서 최소한 10명의 부처님 제자 이름은 외워야 합니다.

1. 사리불 - 지혜제일

2. 목건련 - 신통제일

3. 마하가섭 - 두타제일

4. 가전연 - 논의제일

5. 부루나 - 설법제일

6. 우바리 - 지계제일

7. 수보리 - 혜공제일

8. 아란존자 - 다문제일

9. 라훌라 - 밀행제일

10. 아나율 - 천안제일

이렇게 1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분들이 있어서 부처님은 더 유명해졌어요.

왜냐면 이분들은 다 당시에 난다 긴다하는 유명한 철학자요, 종교가였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은 부처님보다는 1살이 많은 제자였어요.

일설에 오래전 어떤 왕국의 후손이었다고도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눈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인도는 서방과 동방의 접합점이라 사람들이 동양과 서양사람을 다 닮았잖아요.

달마스님도 인도에서 온 왕자인데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털이 많고 눈이 둥그렇게 생겨서 달마도를 그렇게 그리는 것입니다.

그후 달마의 禪을 수행하는 제자들을 눈푸른 제자라고 해요.

눈을 푸르게 뜬다라는 말은 진리의 골수를 뀌뚫는다는 의미죠.

禪의 바로 가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도에는 '사리' 라고 하는 새가 있어요.

그 새의 눈이 푸른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인도라고 하지만 여자가 눈이 푸른 것이 희한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딸을 사리라고 이름지어주었어요.

그러니까 사리자의 어머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리 처녀가 시집을 가서 애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또 눈이 푸른 애였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사리부인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사리자(舍利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리자는 커서 삶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출가하여 바라문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전통 승려를 바라문이라고 했어요.

부처님보다 먼저 출가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교단의 큰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35세에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는데

사리자는 대략 40세를 전후해서 이미 인도에서 유명한 선생이 되어있었어요.

그의 스승이 죽자 지혜가 출중한 사리자에게 교단을 넘겼기 때문에

대략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큰 교단의 교주가 된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500명의 제자를 거느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전에 구례 화엄사 조실스님께서 약 2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신기록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얼굴을 다 몰랐다고 해요.

누가 와서 절을 하고 안부를 물으면 "누구 제자시요? " 하고 물었대요 ^^

옛날이나 지금이나 500명은 대단해요.

사리불이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모르는 이치가 없었고 못 외우는 역사가 없었으며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가히 부처님 다음갈 정도로 뛰어난 제자입니다.

그런 사리불이 하루는 소문을 들으니 고오타마싯다르타라고 하는 마스터가

스스로 깨달은 붓다라하고 하면서 설법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서 듣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가보기로 했어요.

세상에 나보다 더 똑똑하고 깨달은 자가 있었단 말인가? 가서....토론해보고

나보다 훌륭하면 내가 스승으로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제도하여 내 제자로 삼으리라 했어요.

드디어 부처님 교단에 도착하여 보니까

부처님이 초창기라 제자도 별로 없고 집도 허술한데 연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서 북적댔어요.

거참 희한하다......제자는 없는데 말을 들으려는 사람들은 많구나 ....

그래서 가서 면담 신청을 하고 갖가지 이론을 들추어내면서...

천하의 지식을 다 내보이면서....토론을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장황한 사리자의 식견을 들어보고는 아무 말도 안하고 묵묵히 있다가

"여기서 1년만 내 옆에 있으라, 그 뒤에 네가 질문한 것에 대하여 대답해주리라" 했어요.

그러자 사리자는 붓다를 꺽을 심산으로 1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부처님은 사리자를 잊은 듯 그 쪽에는 신경쓰지 않고 평상시 대로 설법을 하셨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였으며 평범한 사람처럼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었어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제자가 되려고 몰려들어서 승단의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났어요.

드디어 1년이 되자 어느날 부처님은 사리자에게 물었습니다.

"자, 이제 물어라. 그대가 궁금한 것을 물어라"

"나는 그대를 위하여 질문에 답해주리라"

그러자 사리자는 얼른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 조어장부시어, 저는 여래에게 물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저의 궁금함이 저도 모르게 다 풀리고 말았습니다. 그대신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것이 오늘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리자는 곧 자기의 교단에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이제야 참다운 스승을 만났다. 나는 그의 제자가 되러간다.

그대들은 각자 좋은 스승을 찾아서 떠나라. 나는 붓다에게 가리라.

그러자 제자들이 모두 놀라면서 자기들의 스승보다도 더 훌륭한 스승이 있다면 자기

들도 가서 그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했어요.

그래서 500명의 수행자가 모두 달려가서 한꺼번에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9궁금한것이 없어지고.. 마음에서 모두 사라질때까지...!!)

그러니까 사리자의 교단이 인도에서 가장 큰 교단이었는데 그 수행자 그릅이 부처님

의 제자가 되니까

부처님의 교단이 갑자가 일도에서 제일 큰 교단이 되고 말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리불이 500명, 가섭이 250명, 목련존자가 그의 제자 500명등을 데리고 와서

부처님은 갑자기 1250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대수행자 그릅이 되었고

그 기폭제 역활을 한 사람이 바로 사리자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두고 사람들은 그때부터 부처님은 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禪은 말을 줄이고 생각을 줄입니다.

일상사가 선이고 평범해요.

졸부들은 형식을 세운 곳에 가면 그 형식 때문에라도 무슨 거대한 이치를 가지고 있

는 스승인가부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형식 속을 들여다 봅니다.

형식을 떠나서 참 도리를 보아요.

이것을 부처님의 지혜라고 해요.

묻지말고 말하지 말고 1년간만 내 진리를 들으라.

그리고 그뒤에 질문을 해라 그래야 내가 그대와 토론을 할 수 있다.

네가 불교를 모르고 도대체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옳은 지를 모르는데

네가 아는 것만 참진리라고 생각하고 고집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겠는가

어떻게 내 진리를 제대로 알겠느냐?

1년간 묵묵히 들어라 그리고 그 뒤에 토론하자.....

부처님도 영리한 분이지만 사리자도 영리한 사람이었어요.

묵묵히 기다렸고 그대신 부처님의 일상과 설법을 그대로 목격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중립적이고 그 무엇도 주장하지 않는 붓다의 정신은 다른 사람들이 이것이

진리이다 하고 주장하는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붓다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불교입니다.

다만 한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르다고 말할 뿐 붓다의 주장은 없어요.

오히려 쉬라고 해요.

그대는 스스로 만족하다 스스로 위대하다 하고 말해요.

이것에 사리자가 감동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있어야 반박할 것인데

주장이 없으니 편안하고 싸울 일이 없고 토론할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냥 붓다의 제자들은 와서 쉬고 참선하면서 아무것도 세우지 않고 찾지 않아요.

그러니까 평안하게 1년이 흘러갔던 것입니다.

사리자는 그새 더 지혜롭게 되었고 더 총명해졌어요.

마음은 더 평안해졌습니다.

자기의 스승도 이렇게 평안하게 해주지 못하였는데

자기에게 한 마디로 말하지 않는 저 붓다에게 와서는 매우 평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사리자와 목련존자는 이렇게 붓다에게 감화되어 다 제자가 된 사람들인데

모두 부처님보다는 1살씩 많았고 부처님보다 더일찍 열반에 들었습니다.

불교성전에 보면 붓다는 79세에 사리자와 목련존자가 먼저 열반에 들자 매우 서운해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8상록은 부처님을 신비의 인물로 부각했지만 불교성전은 붓다를 인간적으로 그렸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와서 처음에는 반박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불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불교에 완전히 정착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든지 그 학문을 이해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해요.

깨달음은 맨 마지막에 더이상 알 것이 없어졌을 때 문득 오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이 천천히 매주 여기에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생각이 달라지고 뜻이

달라진 위대한 붓다가 될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혹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급하게 맘먹고 휙 나가버린다든지 섯부르게 단정하

지 말고 차분하게 인생을 살아가듯이 불교속에서 시간을 보내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그 핵심을 관통하고 말 것입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을 대신해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주로 노년에 부처님을 대신해서설법했습니다.

그 책이 경전에 그대로 나오는 곳도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사리자를 다음 2대 붓다로 지목했는데 먼저 죽는 바람에

목련에게 넘어갔고 목련도 먼저 죽는 바람에 3번째 가섭에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2대 붓다가 마하가섭입니다.

그런데 저의 위에 가섭을 두타제일이라고 했는데 두타제일은 수행제일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참선하고 수행하기를 즐겨했던 가섭이 2대 붓다가 되는 바람에

불교는 처음에 완고하고 고지식하게 했어요.

그래서 이때를 소승불교라고 하고 수행주의 불교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500년 뒤에 대승불교, 즉 융통성있는 불교가 되면서

불교는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오늘날처럼 대중불교가 된 것입니다.

자, 이정도로 사리자에 대한 이야기와 부처님의 주변 제자들 이야기는 마치고....

여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먼저 사리자를 부릅니다.

그래서 '사리자여.....'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요.

왜냐면 부처님과 거의 같은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제자를 부른 것입니다.

즉 관세음보살은 사리자라면 내 말을 이해할 거야 하고 생각하고 특히 사리자하고

대화하듯이 이 경을 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의 서두에 사리자여! 하고 사리자를 부르는 말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옛날부터 많은 선사들은 관세음보살이

사리자를 불렀을 때 벌써 반야심경 마쳤다고 합니다.

하고 부르는 여기에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참 신비로운 견해인데 잘 생각해보면 옛선사들의 말이 맞습니다.

사리자여하고 불렀을 때 과연 무슨 뜻이 있기에 이 외침 속에 반야심경의 뜻이 다

들어있다고 한 것일까?

이것을 내내 강의들으면서 혹은 법당에서 기도하면서 읽어보면서 생각해보세요.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色)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오늘 첫 대목을 조금 나가봅니다.

반야경은 空과 色 이 두 글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먼저해야합니다.

공空=빔

색色=물질, 존재, 생각

공은 바로 여러분의 눈 앞에 있는 텅빔입니다.

여러분!

지금 눈 앞에 무엇이 있나요? 모니터와 자기 눈 사이에 모니터가 보입니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공이 있음을 알지요?

정말 눈 앞에 공이 있나요?

공이 보입니까?

연꽃님? 공이 보이나요?

안보여요

글치요.....

보이면 공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안보이니까 공이야요

그런데...없다하면 안되요.

공이 없다면 세상이 존재로 꽉 채워진 것이라고 해야하는데 실제는 공이 있으나

공은 존재가 아니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반야경을 공부하면서 우리 눈앞에 있는 공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 해야하고

왜 있는데 없다고 해야 하는지도 충분히 이해 되어야 합니다.

불교는 세상을 공과 색 이렇게 두가지로 설명했어요.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우선 빔은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거기서 존재가 나왔어요.

우주는 빔과 그리고 존재(色) 이 두가지의 모습입니다.

만약 빔이 없으면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존재가 있으려면 반드시 빔이 먼저 존재해야해요.

그 빔위에서 집도 짓고 꽃이 피고 사람도 태어나요.

여기서 法이 등장합니다.

法=진리, 법칙

도대체 무엇이 있어서 빔에서 만물이 생겼는가?

법이 있어서 만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만물이 있게된 원인은 무엇인가?

즉, 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빔' 입니다.

즉 만물이 있게 된 근원이 빔이어요. 빔이 있어서 만물은 생겨났느니라.

즉, 빔이 만물을 만들었느니라.

그러니까 빔은 우리가 그냥 아는 정도의 빔이 아닙니다.

우리는 빔을 아무것도 없음으로 생각해요.

그러나 실제의 빔은 그런 것이 아니고

만물을 잉태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빔입니다.

빔을 없음으로 이해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없음도 버려야 해요.

비기도하고 존재를 낳을 수 있는 빔이기도 해요.

여기서 바로 하나가 아니고 둘을 포함한 빔 空(공)으로 이론이 태동합니다.

즉 빔은 빔과 색을 다 가지고 있는 빔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빔의 모습이지만

그 내면에는 색을 잉태할 수 있는 빔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했어요.

즉 하나라는 것입니다.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사실은 이 둘이 하나여요.

자, 손을 들어서 한번 쳐다 보세요.

손에는 손등과 안(바닥)이 있어요.

그렇지요? 그럼 손등이 없는 손바닥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손바닥없는 손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손등과 손바닥은 둘이나 사실은 하나여요.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어서 손이라는 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주는 공과 색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주입니다. 우주는 두가지의 요소가 합하여 하나가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공은 곧 색이라고 했고 색은 곧 공이라고 결론내렸어요.

즉 둘이나 하나라는 말입니다. 어느 하나만이 존재할 수 없어요.

자, 이 논법을 잘 이해 해야해요. 불교는 바로 여기가 첫 출발입니다.

두 가지는 알고 보면 하나이다. 태극을 보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어요.

이처럼 우주도 하나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생각을 한 쪽에다 매어두면 안된다는 것을 배울수 있습니다.

근원을 말하면서 현실을 깨닫게 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돈에 집착해요. 이것 지나치면 병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에 집착해요. 그러면 이것도 지나치면 病이어요.

세상은 공과 색이 함께 적당히 어울어진 것이 세상인데

어떻게 공속에 들어가서 살려고 합니까?

육체가 존재인데 어찌 안 먹고 살려고 하나요?

매사 공에 집착하여 아무것도 안한다든지 무에 합리화시키면

우주를 모르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고 차에 집착하고 옷에 집착하고 평수에 집착하여도 병입니다.

매사 인생의 가치와 성공을 여기다가 기준하면 안되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병자의 삶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삶이 이상적인가? 어떤 삶이 진리적인가?

배고프면 적당히 먹을 수 있고 능력껏 일해서 얻은 집에 살고

능력껏 얻은 돈으로 차를 몰고 살지만

그 차와 집과 먹거리로 인생의 가치를 삼지 않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인의 삶이요, 진리적인 삶이고 그대로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무엇을 하되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소득에 맞는 인생을 사는것

그래서 서운 하다던지 비참 하다던지 최고라는 생각이 없는 무심으로 사는것

가치를 세우지 않는것 의미를 내세우지 않는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공과 색에 대하여 다음 시간에 좀더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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