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회는 무엇을 하고자 설립되었는지 스님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된 세상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가 갈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토론을 한 끝에 정토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당시에 대안을 얘기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렴했고, 수많은 의견을 검토하고 토론을 거친 결과 저희는 네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첫째, 전지구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환경 문제’라고 봤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은 결국 환경 문제에 의해서 제동이 걸릴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생태적 가치를 기반으로 해야 지속가능한 문명이 될 수 있지 생태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문명은 유한한 문명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세계가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지구상에는 인구의 20%가 절대 빈곤 선상에 놓여있는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굶어서 죽는다든지, 간단한 질병으로 죽는다든지,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다는지, 이런 절대 빈곤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문제는 내 나라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야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다들 우리나라 문제에만 신경을 썼지 남의 나라의 고통에는 신경쓸 형편이 못 되었어요. ‘선진 강대국들이 우리를 착취해서 우리가 못 사는 것이다’ 이런 생각만 가졌는데, 이미 우리나라도 지구 전체로 보면 상위 20%의 기득권층에 속하게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나라도 하위 20%에 대해서 나라와 민족을 떠나서 인류적 관점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곤퇴치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셋째,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 문제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밥 먹고 살만 함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충돌, 종교적 충돌로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한과 북한, 중국과 대만,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의 민다나오, 스리랑카의 타밀족, 북아일랜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전세계 40여 곳에서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1,2위를 다투는 가장 큰 갈등이 우리의 처지이기도 한 남북 분단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평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 그 당시에 제일 잘 사는 나라가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자살율이 제일 높은 나라가 또한 북유럽이었어요.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데 자살율은 제일 높은 겁니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아무리 환경이 좋더라도 인간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 사회를 바꾸는 운동만 했지 인간의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앞으로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 인류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수행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수행에 대한 노하우는 불교가 가장 많이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러나 기존의 불교는 용어만 수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실제로는 수행적 관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복을 비는 것에만 치우쳐져 있던 불교의 모습은 부처님이 왕위와 재물을 버리고 출가한 정신과는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복을 빈다는 것은 결국 ‘왕위를 달라’, ‘재물을 달라’, ‘인기를 달라’ 하는 얘기 아닙니까. 부처님은 그것을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름만 불교이지 불교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세계 불교인들이 대부분이 그렇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 중에 개인 몇 명은 수행적 관점을 가진 분들이 우리나라 안에도 다른 나라에도 존재할 수가 있겠죠. 그러나 불교를 믿는 대중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전혀 근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이 수행을 새로운 문명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대중화할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특정한 한 사람이 위대한 수행자가 되어서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일상 속에서 그렇게 수행하자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파악한 것이 정토회가 설립되기 전에 저희가 세상을 바라본 모습이였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이 때도 ‘불교’란 이름을 쓸거냐 안 쓸거냐의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란 이름을 쓰는 순간 그 틀에 갇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불교가 경전, 교리, 복을 구하는 것, 사회에는 관여하지 않고 개인의 행복만 찾는 이런 이미지가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교란 이름을 쓰게 되면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전혀 맞지가 않게 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종교로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불교가 아닌 것으로 출발한다면 그것은 또 도대체 무엇이냐는 문제도 제기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종교 단체냐?’, ‘시민단체냐?’ 하고 물을텐데, 시민단체라고 하기에는 수행이 중심인 곳이고, 종교 단체라고 하기에는 환경운동, 구호활동, 평화운동 같은 사회실천활동들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지만 일단 새로운 불교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하는 곳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이 길면 오해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종교의 한 형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종교와 철학,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 정치 등이 각기 다 구분되는 사회였다면, 지금은 종교 안에서도 불교니 기독교니 내가 잘났느니 네가 잘났느니 하고 따지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습니다. 서로 좋아서 결혼한 두 부부가 갈등을 일으켜서 원수가 되고, 자기 몸으로 낳은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엄마와 아이가 원수가 되는 이런 문제들을 과연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겪는 구체적인 고통들, 즉 개인적으로는 부부 간의 갈등, 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 직장 동료 사이의 갈등, 사회적으로는 남북의 충돌, 여야의 충돌, 진보와 보수의 충돌, 노동과 자본의 충돌 등 여러 갈등을 도대체 무엇으로 해결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과연 이런 개인적 고뇌와 사회적 고뇌들을 해결하는데 얼마나 효용성이 있느냐는 것이죠.
예전에는 사회적 리더십을 종교가 다 갖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주와 천체에 대한 것은 과학이 다 가져가버렸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와 사회과학이 다 가져가버렸고, 육체의 아픔을 치료하는 것은 의학이 다 가져가버렸고, 정신적인 아픔을 치료하는 것은 정신분석학과 상담심리가 다 가져가버렸잖아요. 지금 종교가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종교에 남은 것이라곤 네 가지 밖에 없어요. 첫째, 권위주의예요. 둘째, 조직이 갖고 있는 힘이예요. 셋째, 신비주의예요. 넷째, 그들이 갖고 있는 돈이예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다 배격하시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서 우리는 만 명 중에 한 명 어쩌다가 나타나는 그런 수행자를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붓다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에 있어서 ‘대중주체’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스님이나 종교라는 형식과 이름을 갖고 사람을 줄세우는 문화는 없어져야 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역할이 나눠지는 것일 뿐인데, 스님, 법사, 처장, 국장 하는 역할이 지위가 되어 귄위주의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죠. 우리들의 오랜 습관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수행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할은 역할대로 하면서 평등성은 평등성대로 보장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이 부족하면 역할이 차별로 가고, 평등성이 무질서로 갈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 미래를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붓다의 길로 간다는 이런 대중주체의 길이 맞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길을 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숫제 승려나 종교지도자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확 이끌고 가는 것이 사람들을 더 많이 결집시킬 수 있고 파워도 있지 않느냐, 지금의 현실에서는 대중주체를 실현해내기가 굉장히 비효율이지 않느냐, 하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부처님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지만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서는 다시 종교화 되었고, 이것을 다시 극복하기 위해 ‘보디사트바’란 새로운 이름을 갖고 대승불교 운동을 일으켰지만 다시 또 종교로 돌아갔죠. 대승불교도 처음에는 재가자가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대중들로부터 권위가 안 서니까 다시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 실력을 갖고 지도자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실력만으로는 안 되니까 권위주의로 돌아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종교지도자에 대한 권위의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직분에 따른 역할분담을 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겸손하되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계속 가져나가려면 우리가 같이 모여서 함께 수행해 나가야지, 함께 하지 않으면 이런 관점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꿈을 갖고 우리가 모인 겁니다. 이런 꿈이 없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모였겠습니까. 스님들은 사찰에서 스님 생활을 오래하면 종회 의원도 하고 본사 주지도 하는 그런 꿈이 있을 수가 있는데,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정토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그런 게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과는 다른 이러한 꿈을 갖고 출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남편이 반대하고, 부모가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주위에서도 자꾸 ‘너가 그런다고 돈이 벌어지냐, 출세를 하냐, 인기가 있어지냐?’ 라고 묻잖아요. 그래서 만약 여러분들이 우리의 행복과 미래 사회에 대한 이런 원을 잃어버리게 되면, 이렇게 주위에서 문제제기하는 것들을 이겨낼 수가 없게 돼요.
그런데서 환경운동, 구호활동, 평화운동, 수행, 이 네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수행’입니다. 수행은 나머지 세 가지와 맞먹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을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두 가지로만 나누었어요. 즉 ‘하화중생’ 속에는 환경운동, 구호활동, 평화운동이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수행을 기초로 한다’, ‘수행을 근본으로 한다’ 하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수행만 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불교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 실천을 할 때마다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굶주리면 먹을 것을 주고, 아프면 치료를 해주고, 학교에 못가면 아이들에게 학교를 지어주고, 독재를 하면 독재에 저항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면 전쟁을 막고, 이런 실천들은 인연 따라 할 뿐인데, 이런 모습을 보고 대중들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 라고 시비할 수밖에 없거든요. 세상은 그런 시비를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들마저 이런 시비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정토회의 설립취지를 모르는 겁니다. 우리의 사회 실천은 인연을 따라서 몸을 나투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서 개개인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관점을 잘 잡아서 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행과 전법 활동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고통이 줄어들 수 있도록 환경을 잘 만들어주는 사회실천활동도 함께 중요한 겁니다.
1차 만일결사를 마무리짓고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2차 만일결사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우리가 당장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역량이 안 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인 수행 문제에 초점을 두면서 환경운동과 구호활동, 평화운동을 해나가야 할 겁니다.
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1차 만일결사에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1차 만일결사에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장 국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체와 쇠락의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요. 이 몰락을 조금 더 늦추든지, 상황을 개선해서 성장 국면으로 약간 방향을 전환하든지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은 이런 정체 국면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통일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문제가 됐습니다.
통일은 첫째, 경제적인 성장과 직결된 문제이고, 둘째, 국제관계의 역학 변화 속에서 우리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점점 갈등 국면으로 나아가는 형국에서 지금과 같은 분단 상태로는 아무런 전망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이런 정세를 읽기가 힘듭니다. 어떤 이유로 전쟁이 안 일어난 것인지, 어떤 이유로 경제적인 붕괴가 안 일어난 것인지, 개인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나 국민들이 알든 모르든 예견된 위기를 막아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보살이 해야 할 역할입니다.
우리가 장기적으로 보고 멀리 내다보면서 이뤄나가야 할 목표는 ‘문명 전환’이고,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교중흥’, ‘정토구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반면에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인연으로 단기적으로 해나가야 할 일은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입니다. 이것은 통일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통일을 통해서 평화문제도 풀고, 경제성장도 도모하고, 정치 갈등도 풀어나가는 계기를 만들고, 이 기운을 통해서 지금까지 서양을 모방해오던 시스템에서 새로운 창조시스템으로 전환해나가는 기회도 만들어내자는 뜻입니다.
이것이 1차 만일결사의 목표라면, 2차 만일결사가 되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문제에만 머물러서만 안 됩니다. 인류 전체를 보고 인류의 행복을 위한 구상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대에서 빨리 대한민국의 문제를 해결해줘서 다음 세대들은 세계의 문제를 갖고 정토회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길을 터줘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세대는 통일 문제의 해결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주위 상황도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게 되었고, 기회도 놓쳐서는 안 되는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조금 더 깊이 있는 토론을 해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