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 이라는 개념은 세 가지 개념인데, 원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의 개념은 정신작용에 대한 개념이에요.

이 세상은 첫째 물질적 존재, 둘째 물질을 기반으로 한 생명존재, 셋째 생명작용을 바탕으로 한 정신작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작용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게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자연과학, 물리학, 천문학, 화학, 이런 분야이고, 생명작용에 대해서 연구하는 게 생물학, 의학, 요즘 말하는 바이오에 대한 연구 등의 분야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물질을 연구하신 것도 아니고, 생명을 연구하신 것도 아니고, 바로 우리의 정신작용, 즉 마음에 대해서 연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우리 마음의 실체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나만이 갖고 있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 이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윤회나 내생’ 개념이 성립됐고, ‘하나님에게 벌 받는다’는 개념도 성립이 됐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불변하는 나만의 나’라는 실체가 있어야 그 ‘나’가 다음 생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개가 됐다가 소가 됐다가 한다거나 지옥에 갔다가 천당에 갔다가 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부분을 깊이 연구하시다가 그런 영원한 존재라거나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건 사실이 아님을 깨달으신 거예요.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낄 뿐이지 분석을 해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항상 한 것, 영원한 것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게 철학적인 본질이에요.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괴로울 일이 없는 거예요. 괴로움이라는 것은 상(想)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건데, 바로 그 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은 그런 실체를 인정할 때 생기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자연과학에 적용해도 잘 들어맞는다는 거지, 부처님께서 자연과학을 연구하셨던 건 아니에요. 자연과학에도 똑같이 영원한 것이 있고, 물질의 실체가 있다, 이런 것이 옛날의 물질관(物質觀)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연구를 거듭 한 끝에 오늘날 물질관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물질에서 ‘물(物)’의 본질, 즉 물의 근본 알갱이가 뭐냐 했을 때 과학자들은 ‘분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불변하는 성질을 가졌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더 분석해 보니까, 분자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원자는 불변하는 거라고 했는데, 원자를 더 연구해 보니까 원자는 또 소립자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소립자는 또 쿼크로 이루어져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물질의 실체도 공하다, 즉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물질작용이 없는 게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리의 생명작용도 마찬가지예요. 옛날에는 개는 개 종자가 있고, 콩은 콩 종자가 있고, 토마토는 토마토 종자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려면 종자별로 다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윈의 진화설이 나와서 ‘시간에 따라 종이 변해 가는 것’이라고 하니까 기존의 종자설에 반대되니까 처음에 저항이 많았던 거예요. 그런데 생물들이 왜 진화를 하는지 그 진화의 원인에 대해 사람들이 몰랐어요.

 

그래서 ‘가만 내버려두면,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변하는 거냐? 말이 안 된다.’ 해서 더 연구를 하다 보니까 돌연변이설이 나왔고, 돌연변이가 

왜 일어나는지 연구하다 보니까 ‘종자의 근본은 유전자다.’ 하는 이론도 나오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설계도가 바뀌면 종자가 달라진다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날은 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것처럼 생명도 새로운 종을 합성할 수가 있게 됐죠. 그렇게 조작을 하면 다른 제3의 생명이 나올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감자 따로, 토마토 따로인 것 같지만 적당하게 감자와 토마토의 유전자를 조작하면 위에서는 토마토가 열리고, 뿌리에는 감자가 달리는 생명이 만들어지는 게 가능해졌어요. 과학적으로도 종자의 실체는 없다는 게 되니까,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물질에도, 생명에도 적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는 과학’이라 하지만 그게 부처님께서 과학을 연구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무아(無我)를 설명할 때 과학적 사실을 빌려서 설명하는 건데, ‘제법이 공하기 때문에, 물질이 공하기 때문에 우리 몸이 공하다고 생각하면 우리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질문자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래 말씀에 따르면 ‘크다, 작다’가 물질의 본질인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보통 ‘이건 큰 거고, 이건 작은 거 아니냐? 크니까 크다고 하고 작으니까 작다고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크다, 작다’는 것은 물질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인식, 정신작용에 있는 거예요. 즉 어떻게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하나의 존재를 우리가 ‘크다’ 또는 ‘작다’고 인식하게 된다는 거죠. 160센티미터인 사람이 180센티미터인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작은 사람으로 인식이 되고, 140센티미터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크다고 인식이 되는 것이지, 본래 160센티미터인 사람은 큰 사람도 아니고, 작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큰사람, 작은 사람이라고 말할 뿐인 거예요. 그래서 그건 객관이 아니라 주관을 말하는 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건 ‘병이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다’는 뜻으로 마음이 만들었다는 게 아니고, ‘내가 열등한 존재다, 나는 우월한 존재다’라는 게 마음의 작용이라는 얘기예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에요. 그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하니까 객관적으로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건 없고, 우리가 느낄 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뿐이라고요. 


그러니까 그 실체를 우리가 이해하게 되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분별, 즉 좋은 사람이라고 집착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싫어하는 이 감정의 상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의 세상, 실제의 존재를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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