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2018년 열반재일입니다. ‘열반재일’이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열반(涅槃)’이라는 것은 산스크리스트어로는 ‘니르바나(Nirvana)’, 빨리어로는 ‘닙빠나(Nibbana)’를 발음 그대로 따서 중국식으로 옮긴 후 한국식으로 읽은 겁니다. 이것을 두고 ‘무슨 열자냐? 무슨 반자냐?’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의 어원이 인도어 니르바나와 닙빠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멸(滅)’ 또는 ‘적멸(寂滅)’이라고 번역합니다. ‘괴로움이 소멸되고 고요적정하다’는 뜻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셨을 때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경지인 ‘열반’을 증득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데, 그런 경지를 바로 열반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으시고 부처님께서는 이 좋은 소식을 괴로워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교화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인도 달력으로 바이사카월 보름날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때 ‘열반에 드셨다’는 건 우리식으로 말하면 ‘돌아가셨다’는 뜻이에요. 부처님께는 ‘돌아가셨다’고 표현하지 않고 ‘열반에 드셨다’고 표현합니다. ‘돌아가셨다’는 말은 육체를 기준으로 표현하는 말이라 부처님을 표현할 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열반을 증득하셨다’고 할 때 그것은 ‘정신적으로, 마음이 고요적정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인 것처럼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다’고 할 때도 ‘고요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고요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몸에 병이 나면 육체에는 통증이 있지요. 또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약간의 슬픔이 잠시나마 있을 수도 있지요.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기에는, 그것이 누구라 하더라도 좀 부족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육신을 버리심으로써 완전히 고요적정한 경지에 들었다’고 해서 이것을 인도말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건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많은 사람들이 울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건 울 일이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육신을 보고, 그 형상에 집착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형상이라는 것은 항상 변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가르치셨잖습니까. 즉, 나뭇잎이 피어나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의 자연현상, 자연의 이치입니다. 나뭇잎이 핀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나뭇잎이 떨어진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지요. 그냥 이것은 자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이 우주의 질서를 아는 분은 아이가 태어난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사람이 죽는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지요. 그것은 마치 봄이 되어 새싹이 돋는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낙엽이 떨어진다고 슬퍼할 일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 잎이 떨어져야 이듬해에 새 잎이 피고, 또 잎이 피어야 낙엽이 되어 떨어지기도 하는 거니까요. 나뭇잎 하나로 보면 잎이 피어나는 시작이 있고, 잎이 떨어지는 끝이 있는데, 나무 전체로 보면 그냥 나무가 자라는 거잖아요. 그러니 ‘생겨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생겨난 것도 아니고, ‘멸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멸한 것도 아니고, 엄격하게 말해서 ‘변화’만 있는 거예요. 기온이 떨어지면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고, 기온이 높아지면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지요. 얼음이라고 하는 형상을 중심으로 관찰하면 얼음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본질에서 보면 그것은 물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물의 상태가 온도에 따라서 그냥 변화했을 뿐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진실이에요. 더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표현하면 존재가
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거예요. 변하지 않으면 시간이라는 관념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 변화하는 속도를 측정해서 우리는 시간이라는 걸 말하지요. 해가 뜨고 지는 이 운동을 가지고 ‘하루다’, ‘1년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달이 기울어지고 차는 걸 가지고 ‘한 달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란 말이에요. 변화를 가지고 측정을 해서 시간 개념이 생겨난 거예요. 그러니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시간에 따라서 변하는 게 아니라 원래 변하기 때문에 시간 관념이 생겨난 거예요.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가 빠르냐 더디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줄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고요적정의 경지인 열반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 나이로 80세 되던 해에 쿠시나가르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사과나무 숲속으로 들어가셔서 자리를 깔고 누우셨어요. 그러고 하신 말씀이 ‘오늘 밤에 내가 열반에 들겠다. 그러니 아난다여, 쿠시나가르 성 안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여래가 오늘 열반에 드니 여래를 친견할 사람은 친견하라고 알리라’고 하셨어요. 임종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오라고 안내하라는 말씀이셨던 거예요.
아난다가 ‘부처님, 왜 이 외진 곳입니까?’라고 말했어요. 아난다는 부처님의 출가제자, 재가제자가 많이 있는 라즈길도 있고, 바라나시도 있고, 쉬라바스티도 있는데, 왜 하필 쿠시나가르냐 하고 물은 것이지요. 또 쿠시나가르의 왕궁 안으로 들어가셔서 열반에 드시면 안온하실 텐데, 왜 성 근교의 숲이냐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그런 소리하지 마라. 이곳은 비록 지금은 외진 곳이지만 미래에 성스러운 곳이 될 곳이다. 그리고 성 안에서 열반에 들면 누구나 다 나를 보러 올 수가 없지 않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숲에서 열반에 드시면 천민들도 와서 친견할 수 있지만 왕궁 안에서 열반에 들면 왕족밖에 친견을 못할 것 아닙니까? 천민이 왕궁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자 그때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고 꽃비가 내렸습니다. 너무너무 신기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또 사과나무는 때가 아닌데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아난다가 ‘부처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이것은 하늘의 신들이 여래께 마지막으로 올리는 공양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서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수행, 정진이다’ 라고 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천금을 공양 올리는 것보다 수행, 정진하는 것을 더 훌륭한 공양이라고 말씀하신 거죠. 그래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본분이 수행 정진’이라는 것입니다.
아난다가 쿠시나가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돌아와서는 열반에 드실 부처님을 생각하며 혼자 슬피 우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불러서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지금 너의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의 곁에 남아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지금 너의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의 곁에 남아있으리라.’
그런데 아난다가 또 질문을 했어요. ‘저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됩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서는 사념처(四念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념처는
첫째, 관신부정(觀身不淨) 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성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알아야 된다, 즉 몸에 집착하지 마라는 얘기지요.
두 번째, 관수시고(觀受是苦) 느낌, 즉 기분이라는 것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기분에 너무 집착하지요?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세 번째, 관심무상(觀心無常)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해 보니 항상함이 없이 늘 변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집착할 게 못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네 번째가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법, 즉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관해 보니 거기에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실체가 없다는 거지요. 이런 진실을 꿰뚫고 있어야 된다는 말씀이셨어요.
또 아난다가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누굴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라’고 하셨어요. 또 아난다가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누굴 생각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부처님께서는 ‘사성지四聖地)를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사성지란 부처님께서 나신 곳, 성도하신 곳, 처음 설법하신 곳, 열반에 드신 곳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 위신력은 어떠했는지, 도를 이루신 내용은 무엇인지, 설법하신 내용은 무엇인지, 열반에 드신 모습과 의미는 어떠했는지를 늘 잊지 않으면 수행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는 뜻이지요.
또 아난다는 ‘우리는 부처님이 계실 때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으로 해서 한량없는 공덕을 지었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걱정마라. 네 군데에 공양을 올려라. 이 네 군데에 공양을 올리면 여래에게 공양을 올린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셨어요. 첫째, 배고픈 자에게 밥을 공양하는 겁니다. 둘째, 병든 자에게 약을 공양하는 겁니다. 셋째,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는 겁니다. 네 번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외호, 즉 보살피는 겁니다. 앞에 ‘청정’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모두 웃음)
이 네 가지 공양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과 똑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첫째, 둘째, 셋째를 따서 우리 제이티에스(JTS)의 이념으로 삼은 겁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때에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가난하면 제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치지 못 하겠느냐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스님이니까 네 번째도 따서 ‘스님을 잘 돌보라’는 말은 제가 할 수가 없잖아요.(모두 웃음) 그런데 원래는 네 가지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설법하고 계신데 사람들이 부처님을 마지막으로 친견하고자 찾아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왔습니다. 원래는 한 사람씩 부처님께 꽃 한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하도록 할 계획이었는데, 너무 많아서 가족 단위로, 그룹별로 친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밤이 깊어서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다 가고, 부처님께서는 마치 꺼져가는 불이 마지막 빛을 발하듯 하니까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고요히 열반에 들도록 친견을 마감했어요. 그런데 어떤 영감이 지팡이를 짚고 늦게 나타나서 ‘부처님을 친견해야 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난다가 ‘안 된다. 이제 부처님께서는 좀 편안히 계셔야 된다’고 했는데도 영감은 ‘내가 물을 게 있는데 오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면 못 묻지 않느냐?’며 친견을 고집하는 거예요.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고 안에 계시던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그는 나를 귀찮게 하려 온 게 아니고 나에게 법을 물으러 온 사람이다. 나는 괜찮으니 들여보내라’고 하셨어요.
이 노인의 이름이 수바드라인데, 수바드라가 부처님께 ‘누구는 뭐라고 주장하고, 누구는 뭐라고 주장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은 틀렸다, 틀렸다고 한다’며 말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당시 인도에 그런 견해가 크게는 6가지, 중간으로는 62가지, 작게는 360가지 있었거든요. 그걸 다 열거하면서 ‘누구의 말이 맞고, 누구의 말이 틀렸느냐? 다 틀렸다면 진실이 뭐냐?’며 복잡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수바드라여, 마음에 탐진치가 있다면 뭐라고 주장하든 그것은 신뢰할 게 못된다. 나는 그들을 다 만나봤고, 얘기해 봤다. 다 안다. 그러니 누구 말이 맞느냐, 안 맞느냐고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고, 항상 깨어있고, 부지런하고, 그래서 항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며 팔정도(八正道)를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수바드라가 마치 꿈에서 깬 사람처럼 깨달음을 얻은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저를 출가시켜주십시오. 출가수행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저 노인을 출가시켜라’고 하셨어요. 이 사람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입니다.
그러고 나서 고요한 가운데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분처럼 너희도 나에게 물을 게 있으면 물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도 답을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두 번째로 부처님께서 ‘물을 게 있으면 물어라.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편안하게 물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세 번째로 말했는데도 답이 없자 아난다가 ‘부처님, 부처님께서 이미 법을 다 설하셨고 저희는 그 법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물을 게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세상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라고 하셨어요. 한번 따라해 보세요.
‘세상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여러분도 지난 일주일간 부지런히 정진하셨습니까?”
(대중들) “예.”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마지막 유훈을 남기시고 고요적정에 드셨습니다. 이것이 열반의 모습입니다. 삶과 죽음에 아무 차이가 없는, 오늘 저녁에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일어날 듯이 열반에 드신 거예요. 살고 죽는 걸 너무 크게 생각하는데, 우리는 수행자이니까 어제나 오늘이 항상 같은 날인 것처럼 여여한 마음으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법문을 마치시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백악관 평화협정 청원 서명운동에 대해 거론하시며 다시 한번 지금이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하고 대중들의 참여를 독려하셨습니다.
“여러분들, 백악관에 한반도 평화협정을 청원하는 서명 다들 하셨죠? 한국시간으로는 4월 14일, 미국시간으로는 4월 13일까지 서명자가 10만 명이 넘도록 주위에 많이 권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조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어쨌든 지금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괜찮은 것 같지요?”
(대중들) “예.”
“그런데 밑에는 아직 얼음이에요. 안보보좌관 존 볼튼이라는 사람은 과거 이라크 전쟁부터 여러 전쟁을 밀어붙였던 사람이거든요. 미국에서는 이번 회담을 통해서 평화협상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일단 회담을 하자고 해놓고 만일 자기네 뜻대로 안 되면 전쟁을 하기 위한 빌미로 삼으려는 건 아닌지 많이 우려하고 있어요. 그런데 비록 그런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쨌든 결과가 좋도록 힘써야 될 거 아니에요? 그렇죠?”
(대중들) “예.”
“그러나 너무 방심해서 ‘요즘 분위기 좋은데 뭘 이런 걸 더 하라고 하느냐’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태도는 좀 곤란합니다. 봄이 왔다고 화분을 빨리 빨리 내놨다가 냉해로 망치는 경우가 있거든요. 잠깐 방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기도는 계속 합니다. 요새 기도할 만하지요?
(대중들) “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걸 보세요. 기적이 일어났잖아요. 지금 눈 속에 꽃이 핀 격이잖아요. 그러니 기도는 계속하고,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명도 독려해 주세요. 연세 드셔서 그런 걸 할 줄 모르면 자녀들한테 전화해서 ‘할매 마지막 소원이다. 나 죽은 다음에 와서 울지 말고, 지금 이거 해 줄 거야, 안 해 줄 거야? 장례 잘 치러줄 생각하지 말고, 산소 잘 써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너희 1명당 10명씩 이 서명을 받아라. 이게 내 소원이다.’ 이렇게 한번 해 보세요. 노보살님들, 아셨어요?” (모두 웃음)
(대중들) “예.”
“그러면 우리가 해낼 수 있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티끌만큼이라도 기여를 하자는 정성을 모아주세요. 정성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잖아요. 정성이 지극하면 눈 속에서도 꽃이 피는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번에 잘 되면 전쟁위험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냉전체제가 해체되어서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들어설 수도 있는 거예요. 잘못되면 전쟁으로 가겠지만요. 그러니까 사실 지금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법문 후, 강보금 님은 “아직은 보이고 들리는 것에 끄달리는 중생이지만 부처님의 열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번 울컥했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정진하겠다”라는 소감을 남겨주셨고, 최수진 님은 “자귀의, 법귀의가 가장 기억에 남으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여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수행정진 하겠다”는 소감을 전해주셨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이 봄꽃처럼 환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슬퍼하는 아난존자를 위해 설하신 법을 들으며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사념처에 의지해 수행하고 사성지를 생각합니다. 해마다 인도 성지순례를 가며, JTS 구호 활동을 하는 등 정토회 내의 모든 활동이 그 법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음에 감동과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처님 열반에 관한 오늘 스님의 법문은 몸의 편안함에 쉽게 끌려가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일깨우며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법을 만나 수행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인연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죽음 앞에서도 특별할 것 없이 고요하고 여여했던 부처님의 모습처럼, 세상의 그 무엇도 집착할 바 없음을 마음 깊이 새기며 부지런히 수행정진 하길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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