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諸行無常)과 불생불멸(不生不滅)>

 

제행무상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라는 삼법인의 하나로서,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고,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행에서, 제(諸)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인데, 빠알리어 sabbe가 ‘일체’ ‘모든’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행(行)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빠알리어 san(skt. sam)이라는 말과 kh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진 말로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 형성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 ‘행(行, saṅkhāra)’은 ‘만들어진 모든 존재’ 혹은 ‘형성된 모든 것들’이란 의미로서의 ‘존재-법(法)’란 뜻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제행무상(pali. Sabbe saṅkhāra anicca)이란 모든 것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므로 실체가 없으며, 모든 법에는 자아(自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제행(諸行)이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어떤 존재를 만들고, 어떤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제행무상이란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며, 무상하고, 고정불변의 독립된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데, 조건으로 발생된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 조건이 해체되면 실체라고 했던 것도 사라져버리니까. 그래서 독립된 실체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금강경>에서는 “인연에 의해서 생긴 모든 사물은 한바탕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위의 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풀잎의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는 흐른다는 뜻이고, 변화하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진화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변화를 낳으며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무상(無常)이라는 말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지, 허망하다, 허무하다, 인생은 덧없다는 식의 말은 아니다. 즉, 제행무상은 일체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 마음의 형상이 12연기에 의해 시시각각 생멸 변화해 흘러갈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무상은 고유한 존재가 없다는 말이다. 어떠한 존재도 어느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사물, 심지어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 그리고 관념 감정 등 제행 모두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경망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같이 왔다갔다 움직이고 변한다.

 

예컨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은 분자가 합성돼 형성됐고, 따라서 다시 분해된다. 이런 과정이 흐름으로 이어진다. 예쁜 얼굴을 아무리 오래도록 지속하려고 성형도 하고, 화장도 하고, 약을 먹고, 하더라도 나이 들면 피부가 늘어지고 쭈글쭈글 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나이 들면 다 늙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무상하다는 말은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는 얘기다. 어떤 무엇이 결정 지워져서 영원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영원한 흐름 속에서 변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한편 그러하니까, 즉 영원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므로 이 세상은 가만있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것이다.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넘어가고, 따라서 무상(無常, anicca)은 발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곧 무아(無我, anatta)를 의미하기도 한다. 항상 변하니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무상(無常)은 시간적 개념이고 무아(無我)는 공간적 개념으로서, 무상과 무아는 분리할 수가 없다. 무상하기 때문에, 즉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이다.

 

제행무상은 불교적 존재론인 동시에 연기법에 대한 시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관점에서 인과 연에 의해 잠시 잠정적으로 현재의 모습을 띠지만 그것이 고정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영원할 수는 없고, 무상해서 변한다는 말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됐을 때 얼음과 물은 별개가 아니다. 얼음과 물은 다만 변화했을 뿐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원리, 이것이 ‘불이(不二)’이다. 그 모양과 형태가 다르므로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불일불이(不一不二)로 변화하는 측면을 ‘무상’이라고 한다.

 

무상은 고정됨이 없음을 말하는데, 만약 고정돼 있다면 어떻게 물이 얼음이 될 수 있으며, 어린이가 어른이 될 수가 있고, 나무가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고정돼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은 세상일 것이니, 그런 ‘고정돼 있다’는 이치란 있을 수가 없다. 이 사회가 점점 발전하는 것도 무상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변해가기에 또한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부자가 영원히 부자이고 가난한 자가 영원히 가난하다면 이 세상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할 것 없다.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라. 무소의 뿔처럼 열심히 나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의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일순간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화가 불끈 솟을 때가 있다. 그런데 화가 났을 땐 분명 화가 나 있었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해서 기분을 되돌리고 나면 어느 새 화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화의 실체란 무엇인가. 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슬픔, 불행뿐만 아니라 기쁨, 행복 같은 감정도 어느 순간 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했지만 어느새 사랑이 식어버려 헤어지게 되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상하기에 고(苦)의 측면도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항상 하는 유일신(唯一神)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무상에 있다. 무상의 이치는 불교의 기준이요, 근거요, 법인(法印)인데, 절대 독존의 변치 않는 유일신은 바로 이 무상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석가모니께서도 무상하기 때문에 반열반에 드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므로 영원한 유일신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즉,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해 결국 소멸되고 만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마찬가지다. 현재 이 우주도 성주괴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제행무상에서 무상은 생ㆍ주ㆍ이ㆍ멸(生住異滅) 하고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하는 현상을 말하며, 생멸의 이치[시생멸법(是生滅法)]를 말한다.

 

헌데 수행을 통해 열반에 들어 이러한 생멸의 도리 자체를 없애면[생멸멸이(生滅滅已)],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경지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 적멸위락(寂滅爲樂)의 경지가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것이 <열반경>에 나오는 무상과 적멸에 대한 게송이다.

 

그런데 제행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고 했으면서 「생멸의 도리 자체를 없애면」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지 않은가. 어떻게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인가?

 

현상의 세계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고, 나고 죽음이 뻔히 눈에 보이므로 제행무상이라 하는데 어째서 또 불생불멸인가? 깨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불법(佛法)이라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 생자필멸의 원리를 따르는 듯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제행무상이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죽거나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이라 했을까? 불생불멸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부처님의 근본교설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의 분별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오히려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 변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이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천삼라(天森羅)는 지구를 제외한 대기권 전체를 말한다. 물론 태양을 포함한 달과 무수한 별들을 비롯한 무한한 우주공간이 모두 포함된다. 지만상(地萬象)은 지구 표면에 존재하는 생물ㆍ무생물, 그러니까 산하대지를 다 포함한 무생물, 거기에 사는 생물, 그리고 지하의 세계와 거기에 있는 생물ㆍ무생물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즉, 우주를 동양식으로 말한 것으로 공중에 떠 있는 천삼라와 땅위에 붙거나 땅 아래까지를 포함한 지만상의 조화로운 운행을 우주라 한다. 이 동양식 우주가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萬象)이다.

 

그러한 우주의 모습을 불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본래모습 그대로”라고 파악한다. 이러함을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 -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 - 세간(世間)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이 법’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한다. 곧,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萬象)이 모두가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만법의 참모습으로 불법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한다.

 

또 <화엄경>에서는 불생불멸 제법실상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한다. 한 없이 한 없이 연기할 뿐 근본모습은 모두 다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萬象) 전체가 다 융화해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변만화한다 해도 상주불멸(常住不滅) 그대로라는 말이다.

 

이법계(理法界) 중에 사법계(事法界)가 있는 것이고, 사법계 중에 이법계가 있는 것이지, 이법계 사법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법계 사법계를 따로 세웠지만 각각 이법계 중에 사법계, 사법계 중에 이법계, 이렇게 해서 이사(理事)가 무애(無碍)하다. 이사가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滿象)이 하나도 무애법계 아님이 없다. 그리하여 온 시방세계의 모든 존재가 중도(中道)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절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내려진다. 이것이 <화엄경>과 <법화경>의 근본이론이다.

 

따라서 우주의 진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우주의 진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창조도 없고 멸망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함을 바로 알려면 도를 확연히 깨쳐야 한다.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아는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우주의 진리를 깨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천삼라 지만상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법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진리)의 세계라는 말이다.

 

’천삼라 지만상‘ 개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소멸하지만 그 전체는 불생불멸의 위치에 있어서 세상의 모습이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진볍계(無盡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무진법계란 세상의 무한한 다양성과 연관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무진연기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철학이라기보다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철학이다. 현상세계와 진리세계의 조화를 밝힌 것이다.

 

즉, 삼라만상 개개는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고 하는 말은 현상세계를 의미하며, 진리의 세계는 그렇게 계속 변화하지만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조금도 변화하는 것 없이 - 늘고 주는 것 없이 그대로 불생불멸인 상주법계(常住法界), 곧 제법실상이란 말이다.

 

한 납자(衲子-승려)가 큰 스님께 물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는데 어찌 불생불멸이 있습니까?"

 

"존재의 근본을 모르고 개별 존재에 집착하는 중생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생멸로 보이지만 우주 전체의 이치를 알고 보면 변화가 있을 뿐, 불생불멸이라네..."하셨다.

 

마치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마는, 그리고 법정 스님의 육신(肉身)이 다비 장에서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육신을 이루었던 성분(원소)은 본래의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간 것이니… 우리는 살아도 지구라는 동네에 있고 죽어도 지구라는 동네에 있다는 뜻이다.

 

외도(外道)들은 불생불멸이라고 하지 않는다. 생겨나기는 했지만 불멸하다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나'라는 영혼이 만들어졌으니 생한 것인데, 이것이 다시 신에게 돌아가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 불멸이고 영생이라는 사상이다. 즉, ‘나’라는 것이 생겨났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영생한다는 말이다. 시작은 있으되 끝이 없다는 뜻이니 우주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

 

역시 한 납자가 큰 스님께 물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외도(外道)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외도에서 말하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허위 창조신(創造神)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세뇌된 맹목적 신앙일 뿐이고, 만법의 근본인 성품은 공하여 불생불멸이며, 다만 이 성품이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우주법계이다. 오직 불생불멸하는 것은 공한 것뿐이다. 공한 것은 우주의 진리이다.

 

무명 중생은 스스로의 업을 따라 원융무애하게 나투고,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은 스스로의 뜻을 따라 원융무애하다. 업을 따라 원융무애한 것은 무명해서 그렇게 본 것이므로 아집의 고(苦)이고, 깨달음으로 원융무애함은 아집을 떠났으므로 법락(法樂)의 세계로세!”라고 말했다.

 

우주에는 브라만(Brahman, 梵)이라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실체가 있고, 이것이 분화돼 각 개체에 아트만(Atman)이라는 실체가 생겼으며, 이 실체는 불생불멸이라고 했다. 여기서 보듯이 외도들은 증득한 것이 아니다. 실체가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공성(空性)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오직 수행을 통해 증득할 수 있을 뿐이다.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이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 역시 논리적 추리를 통하거나, 상상으로 한 것이며, 이런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가정하고,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에 대한 도리를 강조하는 것은 범부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도깨비가 산에 살고 있으니, 혼자 산에 가지 말고, 늦은 시간에 산에 가지 말며, 도깨비를 만나면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외도의 불생불멸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은 믿음 곧 신앙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불생불멸 곧 열반은 개개인의 실천적 수행으로 가능하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본성을 봐야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본래자리를 허공에 비유한다. 허공을 보면, 구름도 떠가고 해와 달, 별들이 있고, 새들이 날아가고, 바람이 분다. 그러나 허공 그 자체는 늘 그대로 텅 빈 모습이다. 모습이라고 하나 모습도 없다. 본래자리 그 자체는 늘 그대로다. 그러니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착각은 사물을 잘못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릇에 담긴 얼음을 두고 밖에 나갔다가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그릇에 물만 담겨있다면 어린아이는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얼음과 물이 서로 별개의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 하나하나를 별개의 것으로 보는 탓이다. 전체를 알고 보면 얼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인간 개개, 삼라만상 하나하나를 보면 생멸이 있는 것 같지만, 우주 전체를 두고 보면 작은 존재 하나하나에 생멸이 있는 것 같은 모습도 하나의 작은 변화일 뿐 우주 전체엔 변화가 없다. 일체만법이 이와 같으므로 우주는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불생불멸한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중생은 생멸의 세계에 빠져 있다. 생겨난다, 사라진다는 현상(겉보기)만을 놓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제법의 공(空)한 도리를 모른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볼 줄 알면 생은 생이 아니요, 멸은 멸이 아님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언설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 우리 범부들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제로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고(苦)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생(生)과 멸(滅)을 부정하는 것이다. 낳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것이다. 작은 개개를 보지 말고, 크게 보란 말이다. 넓게 보란 말이다.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보란 말이다. 즉, 공(空)으로 보란 말이다.

 

 

여러 경전들에서 불생불멸에 관해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경전 말씀을 골라 살펴보자.

 

 

*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一切法不生(일체법불생) -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一切法不滅(일체법불멸) -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若能如是解(약능여시해) -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諸佛常現前(제불상현전) -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

 

 

“모든 존재는 생기지도 않으며 또한 소멸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러한 이치를 알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음을 보리라.”고 했다. 일체만법은 생겨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은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와 같은 내용을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신다,

― 깨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하는 말이다.

 

여기서 불생불멸하는 우주의 섭리가 항상 존재하는 현상을 ‘부처가 나타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섭리가 곧 부처이며, 이 현상을 이해하면 곧 부처가 보인다, ― 깨침을 얻는다는 말이다. 우주의 섭리와 부처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원칙을 말한다. 삼라만상의 원칙을 노자는 도(道), 공자는 성(誠), 불교에서는 부처(佛)로 표현했다.

 

따라서 성철((性澈, 1912년~1993) 큰스님은 불생불멸이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이라 하셨으며, 팔만대장경 안에 부처님 말씀이 그렇듯 많고 많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쳤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원리인 것이고,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된다고 하셨다.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다행히 요즘은 과학만능시대이니까 과학이 불생불멸의 열쇠를 풀어주고 있다. 현대물리학인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이 등장하면서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 했다. 이들 소립자들은 다시 수많은 소립자들로 형성돼 상호의존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밝혀냈다. 즉, 우주는 양자적(소립자)으로 서로 얽혀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로서, 소립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생불멸(진여의 작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학적실험이 화엄사상과 법화사상을 너무나 확실하게 잘 말해주고 있다.

 

 

* 과학으로 증명되는 불생불멸 - 등가원리(等價原理)

 

 

인류역사에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돼 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해서 요즘은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됐다. 그만큼 불교원리는 과학적이란 말이기도 하다.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돼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質量), 이 두 가지로 구성돼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봤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로서, 서로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설명했으나, 요즘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한다. 질량이라는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이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서로 전환한다는 것은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리하여 50여 년 전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라 했다.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원자탄, 수소탄이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키면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이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 이것이 수소탄이 된다.

 

이로써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왔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앤더슨(Anderson, Carl David, 1905~1991)이다.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했다.

 

그 뒤에 세그레라(Emilio Segre)는, 독재자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에게 쫓겨 미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학자였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다.

 

이와 같이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 그대로이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돼 조금도 증감이 없다. 곧 부증불감이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法界)라고 한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이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이며 상주법계이다.

 

 

*맺는 말

 

 

현대과학계에서도 질량은 완전히 없앨 수 없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완전히 새로운 물질도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은 <반야심경>의 제법공상 불생불멸(諸法空相 不生不滅)과 잘 들어맞는다.

 

주인과 나그네가 있다고 하자. 항상 머무는 게 주인이고, 항상 왔다 갔다 하는 게 나그네이다. 중생은 항상 왔다 갔다 하는 그 나그네를 ‘나’로 여긴다. 변화 없이 항상 머무는 불생불멸의 진여불성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이 생멸하는 생각을 ‘나’로 여기는 한, 절대로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다. 자존심을 버려야 고통이 사라지는데, 불생불멸의 진여를 깨닫지 못하는 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과 얄팍한 자존심은 버리지 못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깨달음에는 먼 사람이다. 아상(我相)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여-불성-공」을 깨닫는 것만이 대안이다. 이 길밖에 없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불생불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 난해해 부처님의 혜안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과학이 고도로 발달돼 현대과학의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돼 있음을 증명해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2천 600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했고, 과학은 2천 600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해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한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다. 다만 부처님 혜안의 탁월함에 감탄할 뿐이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住法界)에는 증감과 거래(去來)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의 실상(實相)이다.

 

이상과 같이 이 세상 천삼라 지만상은 제행무상이다. 그런데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불생불멸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으므로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때문에 고(苦)이고, 무아(無我)이다.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라는 실체가 있을 수 없으니 무아인 것이다. 그런데 범부중생은 무상한 ’나‘를 두고 무상하지 않다 영원하다고 집착하니 고(苦)가 따른다. 따라서 제행무상이 범부중생에겐 고(苦)로 비치는 것이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거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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