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한국불교 조계종 종지(宗旨)로서, 선종에서 깨달음을 설명한 말이다. 즉, 교학에 의지하지 않고, 좌선에 의해서 바로 사람의 마음을 직관해, 불(佛)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4구가 하나로 연결된 언구이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해야 견성성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의 세 구절은 모두 견성성불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며, 꼭 실천해야 하는 선(先) 수행의 단계이다. 이를 무시하고서는 선(禪)의 근본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며, 선 수행의 적격이라고도 할 수 없고, 물론 견성성불도 불가능하다. 마치 공중에다 ‘견성성불’이라는 누각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말이 선종과 교학종파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선종의 독특한 ‘구원론’을 담고 있다. 즉,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와 ‘어떻게 부처님의 마음 그 자체와 다시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은 곧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문자나 언어를 빌리거나 외적 대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마음을 잘 응시해서 직접 단번에 마음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마음 깊숙이 내재하는 순수한 본심, 순수한 본성에 투철(透徹)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구명(究明)하는 것이며, 자기에 투철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본마음을 직접 파악하는 것을 직지인심이라 한다.
직지(直指)의 대상은 자기 밖이 아니라 자기 속에 존재한다. 때문에 밖에서 구하지 말고 안에서 구해야 한다. 마음 밖에서 찾는다면 외적 대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결과 망상과 미혹된 마음이 일어나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혜능(慧能) 대사나 임제(臨濟) 선사 등 여러 조사들은 밖을 향해 구하지 말라[막멱외구(莫覓外求)], 즉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경계의 말을 했다.
본래 중생과 부처는 하나이다. 마치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다. 물을 떠난 얼음이 없듯이 중생 밖에 따로 부처는 없다. 바로 중생에게서 부처를 구해야지 멀리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말은 마음 밖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곧바로 본심, 본성에 투철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직관(直觀)은 즉각적으로 안다는 뜻이지만 불교의 직지(直指)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본래부터 갖고 있는 부처의 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 것을 일컫는다. 도(道)를 안다고 하지 않고 통(通)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지는 우주와 하나가 돼 소통하는 것인데, 그것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니라 분별심이다. 따라서 분별하지 말고 직지 하라는 말이다.
불경의 가르침을 방편설(方便說)이라고 한다. 본래의 실법(實法)은 말로써 나타낼 수 없는데, 말을 수단 방편으로 삼아 실법을 암시한다고 해서 방편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설법(說法)을 듣고서 그 말의 뜻만 이해해서는 실법을 알았다고 할 수가 없고, 말 너머에 숨겨진 실법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방편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배우는 자는 손가락에 머물러 있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조사선(祖師禪)은 방편과 실법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그것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마음법을 바로 가리켜 보일 뿐, 달리 방편을 두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석가세존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린 것은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지, 꽃을 들어 올리는 행위 뒤에 숨어 있는 비밀한 뜻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趙州)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이다.(庭前柏樹子)”라고 답한 것이나, 운문 문언(雲門文偃) 선사의 ‘호떡(餬餠)!’이나 간시궐(乾屍厥-마른 똥 막대기), 이러한 말들은 모두 과거 부처님과 선대 조사(祖師)들이 똑같이 부른 멋진 교외별전의 곡(曲)이다. 이런 말들은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지, 잣나무나 호떡, 혹은 간시궐을 통해 다른 비밀한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찾아야 할 비밀한 뜻이 따로 있다면, 법(法)은 이법(二法)이 돼 분별심으로 떨어지게 되고, 불이법(不二法)과는 어긋나버린다. 직지인심은 그만큼 명쾌한 언어이다.
그리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기본성을 보면, 즉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참나]을 깨쳐서 알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이 ‘견성성불’은 자기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쳐야 한다는 선종(禪宗)의 이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견(見)’이란 눈으로 본다, 돌이켜 본다, 터득 한다, 생각, 변별, 견해라고 하는 뜻이 담겨있다. 보는 것과 깨쳐 아는 것이라는 뜻이 함께 함축된 글자이다. 그리고 견성(見性)의 ‘성(性)’은 본심(本心), 본성(本性)을 말한다. 마음의 본질, 마음의 주체, 마음의 실체로서 선문에서는 불성(佛性), 자성(自性) 또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는데, 달마(達磨) 대사가 말한 마음도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본심,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견과 성이 합쳐진 말이 견성인데, ‘견성(見性)’이란 ‘견불성(見佛性)’의 준말로 “불성을 본다 - 깨친다”는 뜻이다. 불성은 곧 ‘중도(中道)’를 의미하며, 견성은 ‘중도의 자각’이다. 따라서 견성성불은 중도를 자각해 자기본성(본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본래의 자기면목(自己面目), 본시 그대로의 자기본성을 깨치면 성불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리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자기 본래면목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성불이 된다는 말이다.
보통 깨달음의 경우 견성(見性)이라 하고, 일반적인 식견은 견해(見解)라 한다. 즉, 진리의 영역을 견성이라 하고, 지식의 영역을 견해라 한다.
‘견성(見性)’이란 말은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연 달마(達磨, ?~528) 대사가 중국에 와서 "이심전심 견성성불(以心傳心 見性成佛)"이란 말을 했는지 역사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혜능 이전엔 ‘관조(觀照)’ 또는 ‘적조(寂照)’란 말로서 깨달음을 보편화하고 있었다. 이를 혜능이 "조(照)" 대신에 ‘견(見)’을 넣어 "견성"이라고 한 것이다.
<육조단경> ‘반야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 본래 스스로의 성품이 청정하니 만약 자신의 이 마음을 알면 그대로 견성이라, 모두 도를 이루리라(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부처이며, 이 본래 성품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本性是佛 離性無別佛)”
이러한 생각은 부처는 하나가 아니라 ‘모든 중생이 스스로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승의 불성설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을 선불교에서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며, ‘자성이 부처(自性是佛)’라는 심성(心性) 이해로 받아들여 성립시킨 사상이 곧 견성성불설이다.
세상을 지식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형상에는 변함이 없지만 다른 점도 있다. 우리의 인식, 다시 말해서 안식(眼識)의 허망함을 알고, 안식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무상(無想)의 상태가 견성이다. 본연의 자기는 항상 존재하는데 어째서 보지 못할까, 생각에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 구름이 계속 덮여 있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그 흐림을 걷어내고 본성을 보는 것이 견성이요, 진리의 발견이고, 깨달음이다. 결국 견성(見性), 성불(成佛), 해탈(解脫), 득도(得道), 돈오(頓悟), 혜오(慧悟), 확철대오(廓徹大悟), 깨침 등이 모두 같은 말이다.
달마(達磨) 조사, 그리고 육조 혜능(慧能) 선사도 성품을 보면 ― 각자의 본래면목(본성)을 보면, 부처를 이룬 것과 같다[견성성불(見性成佛)]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불성 그대로인데, 경계에 따라 본성이 흐려지는 것이므로, 그 흐림을 걷어내고 본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라 했다. 즉 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불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 견성이다.
부처의 성품이 있는 것과, 부처의 성품을 발견하는 것과, 부처의 성품을 완전히 드러낸 것에는 차이가 있다. 부처의 성품을 한번 힐끗 봤다고 부처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중생에겐 불성이 있지만 가려져 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불성이 가려져 있느냐, 완전히 드러나 있느냐 하는 차이다. 뭐가 가리느냐, 바로 망념에 물든 내 마음이 가리고 있다. 그래서 자꾸 마음을 비워라,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이 마음, 움직이는 이 마음은 허상이고, ‘나’가 아니다. 그냥 생겼다가 사라지는 생각의 파편들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구름에 가린 하늘과 같다. 그래서 하늘의 태양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거기에서 빛나고 있다. 그 구름을 단 한방에 모조리 치워버리는 것이 돈오(頓悟)이고, 꾸준히 수행을 하면서 조금씩 치워나가는 것이 점오(漸悟)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보통 일반적으로 말하는 마음과는 어느 정도 다른 것이다. 보통 말하는 마음은 마음의 본질이나 본체의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견성은 마음의 본질로서의 자기 본심, 자기 본성, 자기 불성을 투철히 보는 것이다. 따라서 견성은 불성이라고 한다. 이때의 견성(見性)은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견성 그대로 마음이자 본성이자 불성인 것이다. 육조 혜능(慧能) 대사가 말한 견성은 바로 달마 대사가 말한 마음이다. 봄(見)이 곧 마음이요, 봄(見)이 곧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불은 중생이 수행을 통해 미혹이나 망상을 없애고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선문(禪門)에서는 단박에 깨달아 부처를 이룬다(頓悟成佛)고 해서 단계적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깨달아 정각(正覺)을 성취한다고 설하고 있다. 성불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문에서 말하는 성불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불(佛)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는 붓다(Buddha)이며, 한역으로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각(覺)은 자기를 주시하는 것이며, 자각하는 것이며, 깨닫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발심해 깨달은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성불은 쉽게 말하면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견성성불은 그 불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인간의 원점에 자리 잡는 것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희들 본성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니,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정견(正見)이라 하고,…… 오직 본원(本源)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과 깨달음의 본체가 원만하고 밝다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것을 일컬어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었다[견성성불]고 한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본성을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선종(禪宗)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본성[불성]을 밝고 바르게 보아 앎으로써 정각(正覺)을 이루면 성불한다는,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 교종(敎宗)이라면, 선종은 부처님의 마음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학수행이나 계율을 통해 마음을 맑게 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교종과는 달리, 선종에서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단번에 깨쳐서 - 돈오(頓悟)하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문득 깨쳐서 자기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면, 그렇게 해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찾으면, 즉 견성하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달마의 견성성불설을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달마 스님은 사람들이 헷갈리기 좋도록 교묘하게 암시와 최면을 걸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구절 속에 들어있는 ‘성불(成佛)’이 그것이다. 이 한 마디 때문에 사람들은 달마의 선이 마치 성불의 첩경인 줄로 깜빡 속고 말았다.…
달마는 직지인심(直旨人心)해서 견성(見性)하면 그 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헛소리를 했다. 공부도 필요 없고, 경전도 소용없으며, 근기도 막론이고, 아저씨나, 아줌마나 할배나 할매나, 심지어 개나 소나 전부 자기 마음 하나 척 바로 보고 자기 본성을 척 보면 곧바로 부처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달마 이후 천년이상 지나도록 마음 하나 바로 보고 곧바로 앉은 자리에서 성불한 사람이 과연 있는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가 하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견성성불은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阿羅漢)이 되는 것을 말한다는 주장도 있다.
인간은 구조상 아라한(阿羅漢) 이상은 오를 수 없다. 중생은 아라한이 한계이다. 따라서 견성즉성불(見性卽成佛)이란 위험한 표현이다. 화두 참구를 통해 얻은 견성은 이제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다. 자성(自性)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으나 시작도 없는 옛날부터 무시겁(無始劫)으로 내려오면서 쌓아온 기(氣)와 습(習)은 그렇게 단박에 사라지지 않는다. 업장도 자기 힘만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백겁동안 지은 죄업이라도 한 생각 깨쳐 광명을 보면 찰나에 없어진다 ―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라 하는 말도 이치상으로는 말이 되는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오직 붓다의 화신에게만 가능하다.
흔히 선가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새벽 별을 보고 깨쳐 붓다가 되셨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확철대오 했다고 해서 붓다라고 할 수 없다. 오랜 생(生) 동안 여러 단계와 관문을 통과해서 불신(佛身)을 얻어야 붓다가 되는 것이다. 대오견성은 아라한 자리에 이른 것에 불과하다.
부처님 입멸 후 수백 년이 지나자 부처님 당시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달해 윤회를 끊는 것보다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보살행을 하며 모든 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윤회를 끊지 않고 어딘가에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를 반복하는 사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시지 않은 수많은 보살이 출현하고 수만 억 불국토와 수만 억 부처님이 출현하고, 드디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이론까지 나왔다. 헌데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아론(無我論)에 완전히 반대 되는, 재생이 아닌 환생이론으로 바뀌면서, 힌두교의 자아(아트만)사상이 삽입된 변질된 불교가 됐다.
윤회를 끊어 완전히 소멸되는 것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이라는 근사한 삶을 사는 환생을 중생들이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이러한 현란한 이론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게 돼,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선불교(禪佛敎)가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불교는 대승불교에서 보살행을 강조한 것에 반발해 마음만 깨치면 부처라는 견성성불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성불은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阿羅漢)’을 지칭하는 것이다. 결코 18불공법을 지닌 부처님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불교의 견성성불은 오온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성과 탐 ․ 진 ․ 치라는 모든 번뇌나 집착을 소멸한 아라한의 경지를 성불이다.
부처님 입멸로 불교가 힘을 잃게 되면서 해탈 열반보다는 보살행을 주장하는 대승불교가 일어났고, 다시 이런 대승불교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선불교가 일어나면서 보살행을 강조하지 않고 우선 자신의 견성성불을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있으나 이런 주장들에는 지나친 비약의 논리들이 잠재해 있다. 더구나 견성성불이 곧 아라한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궤변이다. 선가에서 그런 말을 한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창작적 주장일 뿐이다. 일면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선가에서 보살을 폄하하지도 않으며, 소승의 아라한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치 선불교가 대승불교에 반발해서 출현한 것처럼 말하는데, 허긴 불교(대승)가 힌두화 하는데 반발해서 달마가 중국으로 왔겠지마는 어디까지나 선불교도 대승불교의 하나이고, 크게 대승불교 틀 안에 있는 종파일 따름이다.
이런 오해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견성성불(見性成佛)’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견성성불에서 ‘성불(成佛)’이라 하지만 감히 석가모니부처님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성불’이라고 하니, 어떤 사람은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문에서 말하는 성불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그리고 본래 중생과 부처는 하나이다. 마치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다. 물을 떠난 얼음이 없듯이 중생 밖에 따로 부처는 없다. 바로 중생에게서 부처를 구해야지 멀리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중생 중에서 부처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 수준의 부처란 말이다. 부처라 하니까 석가모니부처님만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에 나왔던 말들을 정리를 해보자.
• 자기 본래면목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성불이 된다는 말이다.
• 견성은 ‘중도의 자각’이다.
• 따라서 견성성불은 중도를 자각해 자기본성(본마음)을 깨치는 것을 말한다.
• 진리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자기 본래면목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성불이다.
• 본시 그대로의 자기본성을 깨치는 것이 성불이다.
• 자기 본래의 성품인 불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 견성이다.
•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다.
• 성불은 본래의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참나]을 깨쳐서 알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위에 적혀 있는 말들의 공통점은 결코 석가모니부처님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성불(成佛)에서 ‘불(佛)’을 석가모니부처님 정도로 너무 크게 생각하니 여러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가 보니 수천 년 동안 부처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 소리를 하게 된다.
위에서 말하는 ‘성불’은 다만 본래면목을 찾는 것, 중도의 자각, 자기 본성을 깨치는 것, 불성을 깨치는 것, 본래의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이룬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아미타불 그런 부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성불은 쉽게 말하면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때문에 성불(成佛)에서 ‘불(佛)은 글자 원래의 뜻에도 있듯이 ‘깨친 사람’, ‘견성한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니다. 다만 깨친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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