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본질本質과 의미意味 (고우 큰스님 법문)]
- 고우스님 (경북 봉화군 금봉암)-
참선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이렇게 물으면 “양반이 왜 쌍놈이 되려고 노력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선은 우리가 논의해서 말로 하거나 들을 때 우리 눈동자에 모래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머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깨달은 분이 선의 본질을 드러내 대중에게 설법함에,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옥 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낸 것과 같습니다. 즉, 법을 일러준 선사도 괜히 백옥 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만든 것과 같고 물어서 깨닫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게 선입니다. 이 일구(一句)의 세계는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어 진리라 하고 삶이자 사실이고 본래 모습인데, 여기에는 닦는다느니 증득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군더더기이며 사족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선은 대부분 화두 들고 참구하는 것으로만 아는데,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인가, 꼭 해야 하는가?
여러분 선은 왜 닦습니까? 과연 선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 신도님들이 제 말씀을 듣고 있는 것, 바로 그게 선입니다. 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제 말 듣고 보는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간화선이 위기다, 침체한다.’ 이런 소리는 누워서 침 뱉는 격입니다. 이는 특정인이 아닌 우리 전부의 책임이자 허물입니다.
내 자신이 선이기 때문에, 부처요 불성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부처님께선 깨치고 보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하고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했습니다. 존재가 연기이자 법이며 여래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선이고 부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되기 위해 참선한다는 생각을 내면 틀린 소리일 뿐더러 시간만 낭비됩니다. 이 존재 자체가 선이요 부처란 사실을 오늘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열반경>과 <아함경> 등 많은 경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이를 믿지 않으면 허송세월하기 십상입니다.
불성이 내 몸의 일부에, 잡초 속의 금덩어리처럼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듣고 보는 마음과 몸뚱이도 부처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여서 똑같은 작용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과 같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우리는 다 부처님입니다. 뒤에 계시는 불단 위의 부처님도, 이 마이크도 컵도, 이 법당도 다 부처님입니다. 물론 이해 없이 믿는 것은 맹신의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왜 부처인지 알면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법은 곧 연기이자 공이기에 무아인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입니다. 이를 철저히 깨는 것이 선종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연기를 가장 정확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선은 다만 체험을 강조할 뿐, ‘본래 성불’임을 철저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다른 종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지만, 선종은 진리와 사실 그자체인 달만 인정하기에 최상승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간화선 선수행자들이 많이 참석하셨지만, 그 화두를 정신통일이나 의심하기 위해 드는 것이라고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화두는 의심하기 위한 것도, 정신집중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간화선은 서기 1000년 전후 대혜 스님이 주창했습니다. 그 이전 250 여 년 전 마조 스님 시대에만 하더라도 ‘의심하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조 스님 당시엔 어떻게 의심했을까요?
어느 날 늑담법회(?潭法會) 스님이 마조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스님께서는 나지막히 속삭였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찾아오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법회 스님은 다음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은 돌아가고 내가 상당(上堂)할 때를 기다렸다가 나오게.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 스님은 여기서 바로 깨닫고 말했습니다.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가버렸습니다.
마조 스님은 법회 스님에게 여럿이 있을 때도, 단 둘이 있을 때도 ‘무엇이 선인가(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연 반대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분별심을 떠난 존재의 원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 법회 스님은 밤새도록 큰 의심을 낸 후 다음 날 질문했을 겁니다. 요즘 선사라면 “모르면 의심해라. 그리고 해답을 가져오너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조 스님은 자연스럽게 의심을 돈발시킨 것입니다. 결국 의심하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고, 답을 몰라서 저절로 의심이 드는 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 서장>의 저자인 대혜 스님도 무턱대고 의심하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의심하라 했지, 의심하기 위해 화두 들라 한 게 아닙니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 분별을 초월한 것이 화두입니다. 분별하는 한 화두를 타파할 수 없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꽝 부서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회 스님이 마조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초음파, 즉 ‘뭐’ 하는 순간에 깨달아야 합니다. 주객으로 나뉜 내 의식을 한방에 깨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이게 공부이고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식의 그 말을 통해서 바로 깨달으면 됩니다. 그런데 깨치라고 제시하는데 못 깨치니까, 하는 수 없이 의심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도 둔근기들에게는 깨치게 하는 방법이니까 그냥 놔두는 거죠. 의심하라고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될까봐 <선요(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고 했어요. 콩하고 보리도 못가르는 놈, 신랑하고 종을 못 가리는 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은 쑥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 그러니 선종은 철저히 상대 개념을 벗어나서 절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겁니다. 쑥맥도 모르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최상승 공부를 하고 있고 최고 근기다 하면 그 분상 의식구조에서는 목과 어깨에 기브스하게 되죠. 그런 스님과 신도가 많이 있잖아요. 폼으로 공부하기 위한 공부, 의심하기 위한 의심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어떤 고정관념도 무장해제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나니 내안에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내 안에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안거지요. 그래서 선어록에도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게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깨칠 것이 있고 얻을 게 있다는 공부는 그래서 잘못된 선 공부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라는 ‘본래 성불’임을 알고 공부 하는 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공부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고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어서도 안 됩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불교를 허무적인 종교로 표현했지만, 절대 그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그 자리로 돌아가면 하늘에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서 햇빛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지혜광명입니다. 그래서 이 공(空)을 깨달으면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서 평등하고 편안하게 끄달림도 없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좋은 것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아도 싫어하지 않는, 양변을 초월한 자유자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 성불’을 전제로 공부하는 것과 있다 없다를 구별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성불을 믿고 이해하면 금생에 확철대오는 못해도 정(正)과 사(邪)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재수, 삼수를 하더라도 알고 공부하면 내생에는 그 힘으로 재수하지 않고 합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불의 수행전통을 잘 이어오고 있는 것이 선종이고, 이런 조사선의 전통은 한국 불교만이 바르게 잇고 있습니다. 중국은 선종의 유적지만 남아있으며 참선하는 분들이 매우 적습니다. 일본의 선은 화두를 하나하나 타파해 가는 소위 ‘사다리 참선’으로 변형이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가 ‘손가락 불교’가 아닌 ‘달 불교’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세계적으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선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합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던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중국의 운문문언(?~949) 스님은 어떻게 하면 날마다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운문문언 스님이 어느날 대중에게 말하기를 “15일 이전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지만, 15일 이후에 대해서는 한 구절 말해보라” 하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매일매일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고 했습니다. 범부의 세계에서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가 양변으로 나눠집니다. 나다 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않고 초월한 사람, 즉 공을 깨달은 사람은 날마다 좋은 날인 것입니다. 무아, 연기, 중도를 체득하고 사는 삶은 매일 좋은 날인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부처인 줄 알면 생로병사마저 진리로 바라보는 눈이 생깁니다.
‘본래부처’ 자리를 알면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이혼율도 낮아지고, 전쟁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 전쟁비용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돕는 다면 예산이 남아 돌 겁니다. 구치소와 교도소에서는 범죄인들이 사라지고 남북통일도 하루아침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끝없는 갈등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을 나는 ‘부시형(型)’이라 합니다. 부시형, 그게 일반 세계의 대응논리고 삶이죠. 그게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이런 것이 모두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에서 나오는 거죠. 인류가 모두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가 부처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라와 사회 간의 갈등과 대립은 이 중도(中道)가 아니고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해 ‘틱낫한’ 스님의 서울 방문과 달라이 라마의 저서들은 한국의 수행 붐 조성에 일조하였습니다. 그걸 보고 느낀 것이 우리나라에도 한국불교의 특색을 가진 국제적인 선 센터를 만들어 한 5년 동안 프로그램을 짜서 국내인부터 교육시키면 외국인도 저절로 배우러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은 화를 삭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애초부터 화라는 게 없고 오직 연민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동네에서는 환대와 선물을 받고, 다른 동네에서는 모욕을 선물로 받았지만 좋은 선물, 나쁜 선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분별심을 여의었으니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욕했던 동네 사람과 욕을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하는 아난에게 모두 연민을 느낀 겁니다. 공을 깨달으면 분노와 미움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으로 반응합니다. 자(慈)는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비(悲)는 상대방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자비심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반대로 증오와 미움은 엄청난 자기 학대입니다.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인 적이 있지만, <육조단경>에는 “남의 허물 보지 말고 자기 허물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사랑’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하는 게 가능합니다. 결국 남을 돕는 것은 나를 위하는 일인 겁니다. 본래 부처의 효능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즐겁고 슬프고, 나다 너다, 천하고 귀하다 하는 양변의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버릴 때 스스로가 짓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똥 푸는 사람에게도 가치와 의미를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직업에는 천하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3D업종에 사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일하고 남을 돕고 사는 살면 귀하고, 국왕이라도 국민을 괴롭히면 천한 사람입니다. 비교 안하는 마음, 실체가 없다는 그 자리, 공空이라는 그 자리를 이해하게 되면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권력과 부를 부정적으로만 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달다’ 장자가 있었습니다. 장자는 재산이 굉장히 많은 부자였는데 부처님께서 무상(無相)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를 강조하시니까 고민이 되어 부처님께 “재산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쭈니까 부처님께선 “너는 더 가져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수달다’는 한역하면 급고독(給孤獨)입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에게 보시를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큰 것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절대 행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속되는 행복입니다. 생로병사까지 진리로 보고 해탈할 수 있는 행복 말입니다.
이런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한 참선은 판결을 잘못해 친구를 사형시킨 충격으로 출가해서 일심으로 공부한 ‘효봉’ 스님과 같은 큰 발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사연으론 ‘효봉’ 스님과 같은 발심의 지속은 불가능합니다. ‘고봉’ 스님은 제자의 멱살을 잡고 몽둥이질을 하며 “송장 끌고 다니는 그놈을 알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고봉’ 스님의 방만 쳐다봐도 머리가 아팠겠지만, 그 분심으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그렇게 발심을 내도록 때려가며 인도하는 스승이 적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스스로 발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행복하게 사는 길을 일러줍니다. 존재의 원리를 깨달아 바른 사고와 행위로 살도록 합니다.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멋진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한번 제대로 발심하여 참선공부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 고우 스님은>
1937년 성주 생으로 20살 때 청암사 수도암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운 후 제방 선원에서 정진. 1968~9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지는 등 봉암사 축서사 금영사 용주사 각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 법랍 47년.
< 즉문즉답(卽問卽答)>
고우 스님의 법문이 끝난 후 바로 즉문즉답(卽問卽答) 시간이 이어졌다.
한 50대 거사가 일어나 질문했다.
“아뢰야식(제8식)은 자성(自性)과 같습니까. 다른 것입니까?”
고우 스님은 좋은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아뢰야식과 자성은 같다고도 할 수 있지만 효능면에서는 다릅니다. 아뢰야식, 이 정도만 알아도 담담해서 악한 생각과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경지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를 극복해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뢰야식을 보고 착각해서 공부를 멈추고 맙니다.”
충주에서 올라왔다는 30대 거사의 두 번째 질문은 더욱 난해했다.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여 ‘무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입니까?”
고우 스님은 두 번째 질문에도 주저 없이 답변했다.
“세계의 학자들이 한평생 연구하는 분야가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 라는 ‘윤회와 무아’에 대한 주제입니다. 우리나라의 ‘호진’ 스님도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딴 걸로 압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에 평생 몰두하지만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풀립니다. 윤회의 주체는 아시다시피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그러나 아뢰야식 역시 연기된 현상이기에 이 윤회하는 식 역시, 무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연기된 것이기에 무아(제법무아)’라고 하셨듯이 전혀 이론적으로 상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공이자 연기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컵을 들며) 여러분은 이것이 꽉 찬 걸로 보이겠지만, 이 컵이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세 번째 역시 50대 거사의 질문.
“스님께서는 의심을 내기 위한 의심은 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참 의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래성불인 그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의심이 필요하겠지요. <선요>에서도 대분심, 대의심, 대신심을 공부의 필수요건으로 말했지만, 이를 다 갖추더라도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떨어져 있는 꼴입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도록 용맹정진해도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큰 의심이 든 것이고, 이걸 깨치면 성불입니다. 왜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가를 알면 얻은 게 없이 이미 다 갖춰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의심을 크게 하려면 분심과 신심이 바탕이 돼야 함은 물론입니다.”
<수행법>
고우 스님의 수행법은 ‘닦을 것이 없음을 닦는’ 무수지수(無修之修)의 단박깨침(頓悟)을 강조하는 정통 조사선, 즉 최상승선의 입장이기에 따로이 수행법이 없다고 해야 정답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굳이 설명하자면,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 한 생각 일어 난 그 자리를 돌이켜 비춰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공부로 요약된다.
“<선요>에서는 물을 져다가 우물에 붓듯이, 물에 비친 달 건지듯이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우물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더 차지 않고, 물에 비친 달을 아무리 건지려 해도 얻어지지 않듯이 깨달을 것이란 없습니다. 보고 듣는 그놈이 하는 일이니, 집착만 세탁해 버리면 됩니다.”
고우 스님은 여러 수행법을 닦더라도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꼭 믿고 해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참선뿐만 아니라 봉사, 주력, 염불도 좋다고 한다. ‘본래 성불’임을 믿고 근기에 맞게 공부하되 주의할 점은 자기를 비우고 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고우 스님은 선(禪)은 부처님의 오리지널 수행법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육조 스님의 제자인 ‘영가’ 스님은 사마타를 ‘적적성성(寂寂惺惺)’, 위빠사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으로 표현했습니다. 6바라밀 수행과 염불, 주력, 참선 등의 모든 수행법이 ‘적적’과 ‘성성’을 강조합니다. ‘성성’은 혼침(昏沈, 조는 것)하지 않는 것이며, 적적은 ‘도거(掉擧, 망상)’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외도는 적적(寂寂)만을 강조해서 삼매에 들면 모든 행위가 정지되지만, 불교 삼매(三昧)는 모든 행위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고우 스님은 늘 ‘성성적적’한 공부를 통해 삼매에 들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양쪽 다 삼매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특색이라고 말한다. 고우 스님이 <육조단경> ‘정혜불이품’ 에 “정혜(定慧)가 하나가 되더라도 도가 아니다. 하나가 되어 통류해야 한다”라는 대목을 보다가 안목이 열린 것도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행에 앞서 중도연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바로 보는 정견(正見)이 가장 중요하다”는 고우 스님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좋은날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분별심을 버리고 비우고 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고우 스님은 이날 법회에서 강정진 법사가 펴낸 <영원한 대자유인>과 관련, “그 책에서는 수행법도, 깨달음도 방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조사선에서는 그런 설명은 발도 붙일 수 없기에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 간화선 중흥을 위한 선원장 초청 대법회 -
출처 :수미산 원문보기▶ 글쓴이 : 시공
우리가 본래 부처(본래 성불, 본래 참 나, 자성불自性佛)라는 진실을 믿지 못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 학습한 것(무명無明, 아상我相, 내 생각, 고정관념, 알음알이, 지식)으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해서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하기 때문입니다.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에 이르기를.....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 지극한 도(최상의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다시 말해서 지극한 도는 사실상 어렵지 않다. 오직 좋다-나쁘다, 밉다-곱다, 옳다-그르다 등의 간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눈, 귀, 코, 혀, 몸(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분별도 없는데 이때 인식하게 하는 그놈이 바로 ‘참 나(진여)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 받아들이는데 이것도 ‘참 나’의 다른 모습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진여의 다른 모습일 뿐 그 본질(체體, 본성本性)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주관하는 그 주인공을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깊게 돌이켜 비추어보는 ‘반조返照’를 행하여야 합니다.
‘참 나’를 찾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참 나’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참 나’는 내가 나쁜 생각(악惡, 이기적)을 하면 나쁘게 작용하고 좋은 생각(선善, 이타적)을 하면 좋게 작용합니다. ‘참 나’는 작용만 있을 뿐 어떠한 것도 붙어있지 않아서 텅 비어있습니다. 텅비어있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무無의 개념이 아니라 대상(인연, 조건, 여건)을 만나면 그 대상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전지전능, 진공묘유眞空妙有)을 현상적으로 펼쳐 보인다는 뜻입니다.
‘참 나’자리에는 어떠한 것도 붙을 수 없다는 말은, 그 자리는 본래 열반涅槃이고, 본래 깨달아 있기 때문에 닦을 것도 없고, 어떠한 것을 해도 한 일이 없습니다. ‘참 나’는 마치 태양 빛과 같아서 늘 빛을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현상계 모든 것은 에고Ego(자아自我, 개개인의 존재)의 입장에서 있는 일입니다. ‘돈오돈수’라는 말도, 에고의 입장에서 깨닫고 보니 ‘참 나’는 본래 깨달아있고 본래 더 닦을 것이 없다는 진실을 알았다는 말일 뿐, 에고의 입장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깨닫는 즉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에고는 끝없이 관리해야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참 나’는 ‘무오무수無悟無修(본래 깨달을 것도 없고 본래 닦을 것도 없다. 본래 깨달음 그 자체고 본래 청정하다.)’입니다.
“모든 것을 ‘참 나’에게 맡기고 살아가라”는 말은 참 나의 성품인 원리대로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선문답禪問答이나 화두話頭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암구호와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나리”라고 했을 때 “진달래”라고 응답을 하면 아군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군임을 즉시에 알아차리는데 암구호의 의미가 있듯이, 툭 던지는 한 마디 말과 동시에 ‘참 나’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나야합니다(언하대오言下大悟, 조사선祖師禪).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의심을 품고 ‘이뭐꼬’를 하는 것이 화두선話頭禪으로 바뀐 것입니다.
깨달음의 대상은 ‘참 나(진여)’의 성품인 원리(진리)를 하나로 통합한 ‘중도中道’를 체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지혜’입니다. 이때의 ‘지혜’는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것을 이익 되게 합니다.
이것을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깨닫지 못한 상태로 그냥 나누기 때문에(상생相生) 보살행이라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결과로 나누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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