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발표한 4박 5일 동안의 명상수련 소감을 잘 들었습니다. 명상의 목표는 무념무상의 상태입니다. 무념무상이란 아무런 상념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만 뚜렷한 알아차림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화두선에서는 오직 ‘이 뭐꼬’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고, 호흡 알아차림에서는 다만 호흡만 알아차리는 것이고, 느낌 알아차림에서는 다만 느낌만 알아차리는 거예요. 마치 서치라이트를 딱 비추듯이 그냥 비추고만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 비추고 있다는 생각도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호흡 알아차림의 세 단계

 

명상의 단계를 굳이 나눈다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명상을 시작할 때는 지금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도가 약간 들어가게 돼요. 처음에는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면서 코끝에 집중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지나면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의도를 갖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다만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겁니다. 즉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에서 ‘호흡을 알아차린다’로 넘어가는 거죠. 그다음에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자도 없어져야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다만 호흡을 할 뿐이에요.

 

첫째,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

둘째, 호흡을 알아차린다.

셋째, 호흡을 한다.

 

이렇게 세 가지 단계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면서 알아차리는 것도 지금 안 되잖아요. 연습을 꾸준히 해서 호흡이 뚜렷이 알아차려질 때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그 의도도 다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다만 호흡을 알아차릴 뿐이에요. 더 나아가면 호흡만 하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출발점에 서서 바라보면 목표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보입니다. 이제 출발점에 서게 된 여러분들은 상념이 떠오르고, 상념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를 만들어서 망상을 피우죠. 그러나 망상을 피우는 걸 합리화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합리화하는 것은 목표가 없어진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에도 의미 부여하지 않기

 

그렇다고 해서 ‘망상을 피우는 건 나쁘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됩니다. 방금 출발한 내 수준에서는 나도 모르게 망상에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나도 모르게 망상으로 끌려가는 건 ‘잘했다’, ‘잘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일부러 망상을 피우면 건 잘못한 거예요. 그러나 나도 모르게 망상에 끌려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어느 순간 망상을 피우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는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망상으로 가 있으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이걸 꾸준하게 연습해야 됩니다.

 

어떤 때는 저만큼 갔다가 돌아오고, 어떤 때는 이만큼 갔다가 돌아옵니다. 그러나 연습하는 시간이 자꾸 많아질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요. 자꾸 연습하다 보면 상념은 일어나지만 스토리는 만들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욕구가 있다 보니까 자꾸 의미 부여를 하게 됩니다. 의미 부여를 하기 때문에 자꾸 스토리를 만들게 되고, 스토리를 만드니까 거기에 골똘히 빠지게 되는 거예요. 결국 명상을 하는 게 아니라 사색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쁜 건 아니에요. 결과적으로는 이런 것도 소득이 되는 이유는 ‘내가 이런 것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끌려가는 걸 보면서 ‘아, 내가 여기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쁘다’, ‘좋다’ 이렇게만 볼 게 아니에요. ‘내가 이런 점에 상처가 있었구나’ 하고 체크할 수 있는 소득이 분명히 있습니다.

 

넘어진 김에 동전 줍기

 

그런데 상처가 떠오르더라도 그것대로 소득이 있다고 제가 법문을 하니까 여러분 중에는 ‘왜 나는 상처가 없을까?’ 이렇게 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들으면 안 됩니다. 넘어지더라도 반드시 나쁜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넘어진 김에 동전을 주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왜 나는 안 넘어져서 동전을 못 주울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넘어지지 않는 게 목표이지만 하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잖아요. 넘어진다고 해서 꼭 나쁜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말귀를 자꾸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웃음)

 

 

다리가 안 아프면 좋죠. 일부러 다리가 아파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일부러 다리를 아프도록 해놓고 아픈 걸 이겨내야 한다면 그건 고행이에요. 그렇다고 다리가 안 아파야 된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건 쾌락주의예요. 다리가 아픈 것은 명상을 할 때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등산을 하면 쭉 오르막만 있든지, 오르막 내리막이 있든지, 평지로 쭉 가다가 막판에 오르막이 있든지, 그건 산마다 다 다르잖아요. 출발할 때 평지이면 ‘이 산 등반하기 좋다’ 이랬다가 막판에 오르막이 나타나면 ‘이 산 등반하기 어렵네’ 이랬다가 하는데, 오르막은 언제 나타나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산은 1부 능선에서 가파르게 올라갈 때도 있고, 어떤 산은 1부 능선까지는 편안하게 오르다가 2부 능선에서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도 있고, 막판에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도 있는 거예요.

 

일상 속에서 평정심 유지하기

 

졸리는 것도 몸이 피곤하니까 졸리는 거예요. 졸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졸리는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고, 다리가 아픈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고, 망상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수많은 연습을 통해 그런 것에 대해 구애를 받지 않게 되어야 남이 욕설을 하는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이익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지위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죽음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살다 보면 온갖 것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잖아요. 우리는 거기에 끄달려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귀찮아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개수로 따지면 수백 수천 가지예요. 여러분들은 거기에 다 의미를 부여해서 ‘누가 죽어서 슬프다’, ‘뭐 해서 화났다’ 늘 이러고 있는 겁니다.

 

다리가 아픈 가운데도, 졸음이 오는 가운데도, 과거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도, 미래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거기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꾸준히 연습해 가면 됩니다. 앉아서 호흡만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안 가는 자전거를 열심히 타면서 운동을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몸이 건강해진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것처럼 호흡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리 말씀을 마치고 10분 간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경 수련원에는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8시 50분부터 온라인 설 명상수련 회향식이 이어졌습니다. 청법가와 삼배를 한 후 참가자들은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4박 5일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왜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거친 비바람과 폭풍이 지나가면 다시 밝은 해가 비치고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그것처럼 지난 5일을 돌아보면 첫날은 졸음의 폭풍이, 그다음에는 다리 통증의 폭풍이, 그다음에는 번뇌와 망상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지나갔습니다.

 

그때는 못 견딜 것 같고, 그만두고 싶고, 이런다고 되나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사실은 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몸이 피곤하니 졸음이 오고, 평소에 이런 자세로 앉지 않았기 때문에 몸의 저항이 통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오지도 않는 미래를 염려하면서 근심 걱정을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왜 편안하지 못할까요?

 

제가 편안하게 있으라고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여러분은 편안하게 있지 못하고 난리를 피웠잖아요. 조금만 살펴보면 이게 다 나 스스로 혼자서 난동을 피운 것과 같단 말이에요. 잠꼬대하면서 난리를 피운 것과 같습니다. 명상 중이 아니고 일상생활이었다면 전부 다 남편 탓, 아내 탓, 자식 탓, 부모 탓, 친구 탓, 세상 탓이 되었을 거예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늘 남을 탓하고 살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도 안 만나고 가만히 있으면 편안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편안해지지가 않잖습니까?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도 편안해지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 가운데 편안해질 수가 있겠어요?

 

 

이 모든 괴로움이 자기 문제임을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 명상을 할 때는 외부를 차단하는 거예요. 명상수련을 할 때 깊은 숲 속이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 이유는 이게 다 내 문제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깨달아도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 관점이 또 흔들려요. ‘내 문제가 아니고 네 문제다’ 이렇게 됩니다. 이치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루 만에 깨칠 수도 있고, 삼일 만에 깨칠 수도 있고, 일주일 만에 깨칠 수도 있고, 한 달 만에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선사들의 경우에는 다 3년 안에 깨쳐야 될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게 일상에서는 잘 유지가 안 됩니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보림(保任)’이란 말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평정심이 유지되도록 연습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보림을 할 때는 주로 거지 생활을 많이 합니다. 남의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다녀 보면 엄청나게 천대받습니다. 천대받는 중에도 마음이 편안해야 돼요.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해봅니다. 시장에서 생선 가게 종업원도 해봅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온갖 천한 직업을 다 해보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도 마음이 여일한가를 확인해보는 게 보림입니다. 깨닫는 시간은 짧으면 하루이고 길어야 3년이에요. 그런데 보림은 보통 10년 내지 20년을 합니다. 육조 혜능 대사도 언하에 깨쳤다고 하잖아요. 스승한테 인가를 받는데도 6개월밖에 안 걸렸어요. 그런데 보림은 16년을 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여러분들은 정말 좋은 조건 속에 있어요.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이 보림이잖아요. 스님은 보림을 하기 위해 새로 결혼도 해보고, 애도 키워보고, 사업도 해보고, 이러면서 잘 되는지 연습을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벌써 보림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깨닫지도 못한 사람들이 보림부터 먼저 하고 있는 거예요. (웃음)

 

 

자꾸 남편 탓, 아내 탓만 하지 마세요. 그런 남편, 그런 아내, 그런 자식, 그런 부모, 그런 환경, 그런 직장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겨울을 탓하거나 여름을 탓할 게 아니라, 겨울에 내가 어떻게 대비하고, 여름에 내가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음식에 맛이 있니 없니 불평하지 말고, 그 음식은 그대로 두고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돈을 빌려주었더니 안 갚는 사람이 있다면, ‘그놈은 나쁘다’ 이러지 말고, 상대가 안 갚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포기하는 게 좋겠는가? 어떻게 해야 받아낼 수 있겠는가?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을 것인가? 돈도 사람도 다 잃을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관점을 갖는 것이 주인 된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 노릇을 못하고, 늘 경계에 끄달리며 남의 속박을 받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명상을 하는 거예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게 명상의 목적이겠어요? 온갖 장애가 있는 가운데서도 호흡이 뚜렷하게 알아차려진다는 것은 온갖 경계에 부딪쳤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해서 나를 딱 지켜낸다는 겁니다. 내 호흡을 알아차리고, 내 기분을 알아차리고, 내 욕망을 알아차리고, 내 성냄을 알아차려서 거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 휘둘려봐야 나만 손해잖아요. 온갖 장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행복

 

부처님이 살았던 당시 사회는 그가 브라만 계급인지, 크사트리아 계급인지, 바이샤 계급인지, 수드라 계급인지 혈통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되고, 또 전생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된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걸 부정하셨습니다.

 

‘자유와 행복은 신에 의해서도 아니고, 전생에 의해서도 아니고, 혈통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직 네가 지금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내거나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과거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 내가 살아온 삶의 습관이 지금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다겁생래로 지어온 업장이라고 표현하는데, 인도 사람들은 전생을 믿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사람도 그것을 전생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 사람들은 사유 체계가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삶이 오늘의 삶을 규정짓고, 오늘 내가 한 행동이 내일의 삶을 규정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 형성된 습관 중에 지금 나한테 괴로움이 되는 것은 멈출 줄 알아야 됩니다. 과거에 너무 매이면 안 돼요. 맹목적으로 반응해서도 안 됩니다. 충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습관에 노예 노릇을 하는 거예요. 나의 현재와 미래가 과거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도 나는 현재와 미래를 주인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즉 자유와 행복을 늘 간직해야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면 나의 자유와 행복이 없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다리를 못 쓰면 휠체어에 앉아서 자유와 행복을 누려야 하는 거예요. 허리를 다쳐서 누워 있다면 누워 있으면서도 자유와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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