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채식주의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집안에서 자라났다면
고기를 먹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가족들은 채식주의에 대해 말했다 해도
채식주의자를 비웃는 의미로 말했다.
"흥, 그 어리석은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됨으로서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그런 가정에서 성장했다면
고기를 먹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순수한 채식주의 집안에서 성장했다면
그때엔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괴물로 보일 것이다.
"그들은 인간도 아니다.
그들과 털끝 하나 닿아서도 안된다.
그들은 짐승이다."

그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한다.
스스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를 뿐이다.
이런 방법으론 정상(正常)이 될 수 없다.
그대는 더 주위 깊고 더 깨어 있어야 한다.
그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대는 남에게서 빌려온 삶을 살고 있다.
그대는 스스로 사물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예리하고 정확하게 관찰할 때,
스스로 판단하고 가치를 매길 때,
그대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행복을 가져다 준다.

자유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어떤 부분은 어머니에게 속하고,
어떤 부분은 아버지에게, 어떤 부분은 삼촌에게,
어떤 부분은 목사에게, 어떤 부분은 선생님에게.
그렇게 게속된다.
그대는 전세계에서 조각들을 긁어모았다.
책에서 영화에서 뉴스에서 잡지에서 친구에게서..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대는 감짝 놀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어떻게 진실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것저것 편집된 현상에 불과하다.
다양한 출처에서 유래한 여러 조각들이
그대를 이룬다.

그 조각들은 서로 용화되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빌려오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대의 의식과 각성이다.
그것은 내면의 핵심에 속한다.
그 의식과 각성에 의존하라.
마음에 의존하지 말라.
마음에서 독립하라.
그리고 의식에 전적으로 의지하라.
그러면 그대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걸음을 성큼 내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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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론(無心論 )

 

 


1. 무심

 지극한 이치는 말이 없으나 말을 빌려야 그 이치가 드러나고, 큰 도는 모양이 없으나 사물을 통해서 그 형제를 드러낸다. 이제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무심’에 대해서 함께 논한다.

 

 2. 무심

 제자가 스승께 물었다.

 “마음이 있습니까?”

 “마음이 없다.”

 마음이 없다고 하신다면 무엇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알며, 무엇이 무심인 줄을 압니까?“

 “도리어 이는 무심이다. 이미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도리어 이 무심이  무심임을 능히 안다. ”

 “마음이 없다면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없어야 할 텐데,

어째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있게 됩니까?”

 “나는 마음이 없으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마음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습니까?”

 “그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대로가 무심이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말고 어디 따로 무심이 있겠느냐, 그대가 이해하지 못할까 하여, 내 낱낱이설명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겠다.

 가령 보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종일토록 보나 그것은 보는 것 없는 데서 나오므로, 보는 것 역시 무심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일토록 들으나 그것은 듣는 것 없는 데서 나오므로 듣는 것 역시 무심이다. 느끼는 것도 종일토록 느끼나 그것은 느낌 없는데서 나오므로 느끼는 것 역시 무심이다.

알아보는 것도 종일토록 무엇을 알아보지만 그것은 느낌 없는 데서 나오므로 느끼는 것 역시 무심이다.

알아보는 것도 종일토록 무엇을 알아보지만 그것은 앎이 없는 데서 나오므로 아는 것 역시 무심이다.

또 종일토록 짓고 만드나 짓는 것이 지음이 없으므로, 지음 역시 무심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이 모두가 무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3. 무심

 “어떻게 무심인 줄을 알 수 있습니까?”

 “그대가 자세히 추구해보면 된다. 마음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마음이란 것이 과연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인가, 마음이 아닌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아니면 중간에 있는가? 이렇게 세 군데로 따져서 마음을  찾아보나 전혀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어디서나 찾아보아도 아무데서도 얻을 수 없으니, 무심인 줄을 알아야 한다.


 4. 무심

 “스님께서 모든 것이 다 무심이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죄도 복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중생들은 육취에 윤회하며 생사가 끊어 기지 않습니까?”

 “중생이 어리석어 무심 가운데서 헛되이 마음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헛되이 있다고 집착하여, 마침내는 육취에 윤회하며 생사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어두운 데서 나무 그루터기를 도깨비로 보거나 새끼줄을 뱀으로 보아 공포심을 내는 것과 같다. 중생의 망집도 그러해서 무심 가운데서 헛되이 마음이 있다고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지으나, 실제로는 육취에 윤회하지 않음이 없다. 이런 중생이 만일 대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고 좌선을 하여 무심을 깨치면, 모든 업장이 다 녹아 없어져 생사가 끊긴다. 마치 어두운 곳에 햇빛이 한 번 비치면 어둠이 싹 가시듯, 무심을 깨칠 때 모든 죄가 없어지는 것도 그러하다.”


 5. 무심

 ‘제가 어리석어 마음이 아직도 석연치 않습니다. 6근이 작용하는 모든 곳, 즉 대답하고 말함과 갖가지 움직임과 번뇌, 보리와 생사. 열반이 무심이란 말이니까?“

 “그럼, 무심이다. 다만 중생이 마음이 있다고 헛되이 집착하여 번뇌, 생사. 보리. 열반 등 모든 것이 있게 된 것이니, 만일 무심을 깨기만 한다면 번뇌. 생사. 보리. 열반 등이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래는 마음이 있는 자를 위해 생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찬 가지로 보리는 번뇌를 상대로 생긴 개념이고 열반은 생사를 상대로 생긴 개념으로서, 모두가 다스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얻을 마음이란 것이 없다면 번뇌. 보리도 얻을 것이 없고, 나아가 생사.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


 6. 무심

 “보리도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과거 부처님들이 모두 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습니까?”

 “다만 세속 이치인 문자로 말해서 얻었다는 것이지, 진실 된 이치에서는 사실상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도 ‘보리란 몸으로도 얻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 하였고,

『금강경』에서도 ‘조금도 얻을 법이 없으니, 모든 부처 여래는 다만 얻을 것 없음으로 얻어 신다’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7. 무심

 “스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나 돌도 무심인데 어째서 (마음은) 목석과 다릅니까?”

 “내가 무심이라 할 때 그 마음은 목석과는 다르다. 어째서 그런가? 마치 하늘 북이 전혀 마음이 없으나 갖가지 묘한 법을 저절로 흘려 내어 중생을 교화하듯, 여의주가 전혀 마음이 없으나 갖가지 묘한 법을 저절로 흘려내어 중생을 교화하듯, 여의주가 전혀 마음이 없으나 갖가지 변화된 모습을 자연히 지어 보이듯, 나의 무심도 그러하여 비록 마음이 없으나 제법실상을 잘 깨달아 참된 반야를 갖추어, 3신이 자재하여 응용에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보적경』에, ‘마음이 없이 행동을 나툰다’고 하였으니, 어찌 목석과 같겠는가. 이 무심이란 곧 진심을 말하다. 진심이 바로 무심인 것이다.”


 8. 무심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마음속에 짓는 것이 있으니, 어찌 수행해야 합니까?”

 “무엇이든지 무심을 깨닫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이지 따로 수행을 둘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일체가 적멸하여 그대로가 무심이다.”

 제자가 여기서 홀연히 크게 깨쳐, 마음 밖에 물건 없고 물건 밖에 마음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모든 행동에 자재를 얻어 의심의 그물을 끊고, 다시는 걸림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어나서 절을 하고 무심을 마음에 새기고는 노래로 읊었다.


신령한 마음 아주 고요하여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나니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소리 없어라.

어두운 듯하나 어둡지 않고 밝은 듯하나 밝지도 않아

버려도 없어지지 않고, 가져도 생기지 않네.

크기로는 법계를 감싸고 작기로는 털끝도 용납지 않나니

번뇌로 뒤섞어도 흐려지지 않고 열반으로 맑혀도 맑아지지 않네.

진여는 본래 분별이 없으나 유정과 무정을 가려내니

거둬들이면 아무것도 설 자리 없고 흩어놓으면 모든 중생에 두루하여

그 신묘함은 앎으로 헤아릴 바 아니며 정각에는 수행이 끊겼네.

없어져도 그 무너짐을  보지 못하고 생겨나도 그 이뤄짐을 보지 못하니

대도는 고요함이여! 모양이 없고 만상은 그윽함이여! 이름 없어라.

이처럼 자재한 운용이 모두가 그대로 무심의 정묘함이로다.


 9. 무심

 스님께서 다시 일러주셨다.

 “여러 가지 반야 중에 무심반야가 으뜸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는 ‘심의도 없고 수행도 없으나 외도를 모두 꺽어 버린다’고 하였다. 또『법고경』에서는 ‘만일 얻을 마음이 없음을 알면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죄도 복도 얻을 것이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 나아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니, 얻을 것 없다는 그것마저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노래로 말씀하셨다.


지난날 미혹할 때는 마음이 있더니

이제 깨닫고 나니 무심이어라.

무심이긴 하나 비추고 쓰나

항상 고요한 비춤과 쓰임은 그대로 여여 하여라.


다시 노래로 말씀하셨다.


무심하여 비춤도 없고 쓰임도 없나니

비춤 없고 쓰임 없는 그것이 바로 무의로다.

이것이 여래의 진실 된 법계라

보살. 벽지불과는 같지 않도다.

 

여기서 무심이란 망상 없는 마음을 말한다.

 

 10. 무심

 또 물었다.

 “무엇을 태상(太上)이라 합니까?”

 ‘태(太)는 크다는 뜻, 상(上)은 높다는 뜻이다. 가장 높은 묘한 이치로 태상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태는 크게 통달한 지위를 말한다.

3계의 하늘들이 수복강녕을 누리나 복이 다함으로써 결국 6취에 윤회하게 되니,

크다 할 수는 없다.

 10주 보살도 생사는 벗어났지만, 묘한 이치를 다하지는 못했으므로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10주 수심도 유를 없애고 무에 들어가, 유무를 동시에 떨쳐버리는 것 마저 없긴 하나,

중도를 잊지 못했으므로 그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나아가 중도를 잊어 세 곳이 모두 다해야만 묘각의 지위인데,

보살이 세 곳을 다 떨어버리기는 했으나 묘하다는 당처를 없애지는 못했으므로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그 묘함을 잊으면 지극한 불도라도 설 자리가 없고,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면 생각 없다는 것마저도  함께 잊어서, 심(心)과 지(智)가 영원히 쉬고 각(覺)과 조(照)가 동시에 다하여 적연무위하니, 이것을 크다고 하는 것이다.

 태는 이치가 극에 다다랐다는 뜻이며, 상(上)은 견줄 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태상이라 하는 것이니, 바로 부처. 여래의 다른 이름이 다.

 

 

<조사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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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심법요 (傳心法要)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너의 마음이 부처이니라.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과 부처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만약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 한다면,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시어 어떻게 그것을 전수하셨습니까?”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셔서 전한 것은 오직 마음의 부처이니라. 즉 너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바로 가르쳐 주신 것이며,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조사라 부르느니라. 만약 곧바로 이 뜻을 깨닫는다면, 곧 3승의 모든 지위를 단박에 뛰어넘어서 본래의 부처인 것이니, 결코 점차로 닦음에 의지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그러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무슨 법을 말씀하십니까?”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시사 오로지 한 마음의 법만을 말씀하시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마하대가섭에게 그것을 은밀히 부촉하셨느니라. 이 마음법[心法]의 본체는 허공계를 다하여 온 법계를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이치라고 부른다. 이러한 법을 논하건대 너는 어찌 언어, 문자로써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한 기틀, 한 경계 한 기틀, 한 경계[一機一境] : 기(機)란 납자를 지도하는 한 수단 또는 한 관문을 뜻하며, 경(境)이란 외부의 사물을 빌어서 진리를 표현하는 형태를 듯한다. 위에서 결코 심법([心法)을 볼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니라. 이 하나의 문을 얻는 것을 이름하여 하염없는 법의 문[無爲法門]이라 한다. 만약 깨쳐 알고자 한다면 다만 무심을 알아야 한다. 홀연히 깨치면 곧 되는 것이요, 만약 마음을 써서 배워 깨달으려 하면 그럴수록 더욱더 멀어지느니라. 갈라진 마음과 모든 취사(取捨)하는 마음이 없어서, 나무와 돌같은 마음이 되어야만 비로소 도를 배울 분(分)이 있느니라.” “지금 갖가지 망념이 있는데, 스님께서 어찌하여 없다고 하십니까?” “망념은 본시 본체가 없는 것인데, 너의 마음이 허망하게 일으킨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이 부처임을 안다면, 마음은 본래 허망함이 없는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일으켜 다시 망념을 알려 하느냐? 네 만약 마음을 내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자연히 망념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지금 바로 망념이 일어날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네 지금 망념이 일어난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깨달음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런 가운데 망념이 없다면, 부처 또한 없느니라.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네가 마음을 일으켜 부처의 견해를 지어서 문득 이룰만한 부처가 있다고 하며, 중생의 견해를 지어서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모조리 너의 견해가 작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일체의 견해가 없다면 부처는 어느 곳에 있겠느냐? 마치 문수가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키자마자 바로 두 철위산 지옥에 떨어진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제 바로 깨달았을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깨달음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났느냐? 일상의 어묵동정간에 모든 소리와 빛깔이 모두 불사(佛事) 아님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겠느냐? 머리 위에 머리를 얹지 말며, 부리 위에 부리를 더하지 말라. 그저 다른 견해만 내지 않으면 산은 산, 물은 물, 승(僧)은 승, 속(俗)은 속일 뿐이니라.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너의 본래 면목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 허다한 일들이 있겠느냐?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니라. 허공세계가 밝고 깨끗하여 한 터럭만큼도 너에게 견해를 짓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소리와 빛깔들이 그대로 부처님 지혜의 눈이니라.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를 의지해야만 비로소 생긴 것이니, 경계 때문에 그 많은 지혜가 있는 것이다. 종일 말하나 일찍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종일 들으나 일찍이 무엇을 들었느냐? 그러므로 석가세존께서 49년 설법하셨어도 일찍이 한 글자도 결코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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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반야바라밀경

             

 

 一.법회를 이루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대비구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마침 공양 때가 되어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으로 가시어

 

 한 집씩 차례로 걸식을 하시었다.

 

 정사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걷우시고 발우를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으시었다.

 

 

 

 二.수보리가 법을 청함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의 옷을 걷어메고

 

 오른쪽 무릎을 꿇어 합장하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옵니다.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보살들에게 중생을 잘 제도하도록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는

 

 마땅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가짐을 다스려야 하옵니까?」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야,

 

 그대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보호하며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맡기고 당부하느니라.

 

 자세히 듣거라. 내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면

 

 마땅히 이와같이 머물며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예,세존이시여.기꺼이 듣겠습니다.」

 

 

 

 三.대승의 바른 뜻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느니라.

 

 이 세상의 생명 중 알에서 깨어난 것이거나

 

 태로 생긴 것이거나 습기로 생긴 것이거나

 

 화(化)하여 생긴 것이거나

 

 형상이 있건 없건,생각이 있건 없건

 

 그리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건 가리지 않고

 

 모두 제도해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이처럼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였으되

 

 실로 제도를 얻은 중생은 없다 할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 마음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四.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그리고 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법에 얽매이지 않은 채

 

 보시를 행할지니

 

 색에 얽매이거나

 

 성.향.미.촉.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보시하되 상을 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냐?

 

 동쪽 하늘의 허공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수보리야 동서남북

 

 그리고 4유와 상.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을 내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이

 

 마치 이와같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나의 가르침대로 행해야 하느니라.」

 

 

 

 五.참된 이치를 바로 봄

 

 

 

 「수보리야,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냐?

 

 나의 외모를 가지고 여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세존이시여.

 

 외모를 가지고는 여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여래께서 설하신

 

 신상이란 외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무릇 형상을 지닌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六.올바른 믿음을 희유하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먼 뒷날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을

 

 진실이라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걱정하지마라.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난 뒤 5백세가 지나가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만 있으면

 

 능히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람이 한 부처님이나

 

 몇 분 부처님에게만 귀의하고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부처님 밑에서

 

 갖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 경전을 듣고 보거나 잠깐 생각만해도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야,여래는 이런 것을 다 잘 알고 보시므로

 

 중생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누리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그들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법상도 없고

 

 또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니라.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상이 있으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만약 법상에 집착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얽매이게 될 것이며,

 

 만약 비법상에 집착한다 해도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 집착하지 말 것이며

 

 비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치가 이러하므로 여래께서는 늘

 

 <너희 비구는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아차려,

 

 법 마저도 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랴>

 

 하고 설하느니라.」

 

 

 

 七.얻을 것도,설할 것도 없음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을 이름지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오며,

 

 또한 정한 바 없는 것을 여래께서 가히 설하셨나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이해할 수도 없으며,말할 수도 없으며,

 

 또한 법이 아니며,법이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성현(聖賢)이

 

 다 무위의 법으로써나타내기 때문입니다」.

 

 

 

 八.법에 의해서 나다

 

 

 

 「수보리야,그대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모두 보시한다면

 

 그 사람이 지은 공덕이 과연 많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했다.

 

 「매우 많사옵니다.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복덕이 곧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다만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사람에게 설명해 준다면

 

 그 복덕은 저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클 것이다.

 

 수보리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다 이 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이른바 불법이라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니라.」

 

 

 

 九.하나의 상도 없어야 함

 

 

 

 「수보리야,어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축에 든다는 뜻으로

 

 일컬을 뿐이지 실은 들어간 바 없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컬어

 

 수다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네 생각은  어떠냐?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세존이시여.

 

 왜냐하면,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다시 온다는 뜻을 일컬음이나

 

 실은 가고 오는 바가 없으며,

 

 다만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일컬을 뿐입니다.」

 

 「수보리야,또 어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그런 생각을 능히 하겠느냐?」

 

 수보리가 다시 아뢰었다.

 

 「아니옵니다.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오나

 

 실은 오지 아니함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어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능히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니옵니다.세존이시여.

 

 왜냐하면,실로 법이 없음을 깨달은 이를

 

 아라한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만약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될것입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욕망을 떠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라고는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수보리가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라고 일컬어 주시는 것입니다.」

 

 

 

 十. 정토를 장엄함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내가 전생에 연등여래불 회상에 있을 때에

 

 법을 얻은 바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연등불 회상에 계실 때에

 

 법에 대하여 실은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이는 또 어찌 생각하느냐?

 

 보살이 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니 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불국토를 장엄한다 함은

 

 곧 장엄이 아니오며 다만 장엄이라고 일컬을 따름입니다.」

 

 「수보리야, 그러므로 모든 보살과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니라.

 

 결코 색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되면

 

 결코 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등

 

 마땅히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 몸집이 크다고 하겠느냐? 크지 않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큰 몸은

 

 몸이 아니라 이름이 큰 몸이기 때문입니다.」

 

 

 

 十一.무위복덕이 으뜸이다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다면 그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수가 많다고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세존이시여.

 

 다만 여러 항하만 하여도 무수하온데

 

 하물며 그 모래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수보리야,내 이제 그대에게 진실한 말로서 이르노니,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그 항하의 모래 수만큼이나 되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보시한다면

 

 얻는 바 복덕이 많겠느냐? 적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매우 많습니다.세존이시여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거듭 일러 말씀하시었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다만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또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덕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수승하니라.」

 

 

 

 十二.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또 수보리야 이 경을 설해 주거나

 

 다만 사구게만이라도 설명해 들려 주면,

 

 온 세상의 천.인.아수라들이 공양하기를

 

 마치 부처님 탑에 공양하듯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함에 있어서랴.

 

 수보리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가는,

 

 세상에서도 드문 법을 얻게 될것이니

 

 이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제자가 머무는 곳이니라.

 

 

 

 十三.법대로 받아 지님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오며

 

 우리들이 어떻게 받들고 지녀야 하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그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그 까닭은 내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냐?

 

 여래가 말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으십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의 수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엄청나게 많습니다.세존이시여」

 

 「수보리야,여래는 모든 티끌이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이라고 말하였으며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을 세계라고 말하였느니라.

 

 수보리야. 네생각이 어떠하냐?

 

 외모로서 여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32상만 보고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32상은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에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저 항하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몸과 목숨을 바쳐 보시했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지니고

 

 이것을 남을 위해 설명해 준 복덕 많은 못하니라」

 

 

 

 十四.상을 여의고 적멸에 이름

 

 

 

 이때 수보리는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합니다.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처럼 뜻이 깊고도 깊은

 

 경을 설하신 것은 처음이옵니다.

 

 닦아온 저의 혜안으로도

 

 일찍이 이런 경을 듣지 못했던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곧 그 실상을 깨닫고 마땅히 세상에서도

 

 드문 공덕을 성취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도

 

 실은 상이 아니므로 세존께서는 다만

 

 그이름이 실상일 뿐이라고 설하시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같이 경을 듣고

 

 믿고 깊이 깨달아 받아 지니기는 어렵지 않사오나,

 

 만약에 내세 오백세후가 되었을 때

 

 중생들이 이 경을 듣고

 

 믿고 깨달아 받아 지니면 그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도 없고,인상도 없으며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이 곧 상이 아니고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었다.

 

 옳다, 그러하다. 혹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매우 훌륭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야,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는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수보리야, 내가 전생에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리고 할 때에

 

 나에게는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전생에 내가 온몸의 마디마디와 사지를 찢길 때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마땅히 성내고 원통한 마음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또 전생 오백세에

 

 인욕선인이었을 때를 생각하니  

 

 그 세상에서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색에 머무르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머무르는 마음이

 

 있어서도 안된다.

 

 마땅히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만약에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면

 

 그것은 곧 머무름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보살의 마음은

 

 마땅히 색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 중생에게

 

 이익되는 이런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여래가 말씀한 일체의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 일체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여래는 진리를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실상대로 말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이 법은

 

 실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수보리야,만약에 보살이

 

 법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만약에 보살이 법에 머무르는 마음없이 보시하면

 

 마치 눈 밝은 사람이 밝은 햇빛 아래서

 

 모든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수보리야, 장차 오는 세상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이 이경을 수지 독송하면

 

 여래가 부처님의 지혜로써

 

 그 사람을 보나니

 

 모두가 한없는 공덕을 얻느니라」.

 

 

 

 十五.경을 지니는 공덕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

 

 한량없는 긴 세월 동안을

 

 아침마다 항하의 모래수만큼의

 

 몸을 나투어 보시하고,

 

 낮에도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나투어 보시하고,

 

 저녁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수만큼의

 

 몸을 나투어 보시하고,

 

 이와같이 하여 백천만억겁의 세월동안

 

 몸을 나투어  

 

 이 경전을 듣고 삿된 마음없이

 

 믿는 이가 있다면

 

 그 복덕이 훨씬 뛰어날 것이니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베끼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다른 사람을 위해

 

 알기 쉽도록 설명해 줌에 있어서이겠느냐.

 

 수보리야,

 

 이 경은 실로 불가사의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가이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대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이 경을 설명하며,

 

 최상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해

 

 이 경을 설하는 것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널리 다른 사람을 위해 들려 주면

 

 여래는 그 사람을 낱낱이 보시기 때문에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이루 말할 수 없고

 

 가이없는 불가사의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작은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하여

 

 이 경을 알아듣지도 못하며

 

 받아 지니지도 못하고

 

 읽고 외우지도 못하므로

 

 따라서 남에게 설명해 주지도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어디서든지 이 경만 있으면

 

 하늘 사람.세상사람.아수라가

 

 반드시 공양할 것이니라.

 

 이곳은 곧 부처를 모신 탑과 같아

 

 응당 모두 와서 공경하고 절하고

 

 둘레를 돌며 온갖 아름다운 꽃과 향을

 

 뿌리게 될 것이니라.

 

 

 

 十六.능히 업장을 깨끗이 함

 

 

 

 「또 수보리야,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하여도

 

 혹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게 된다면,

 

 그는 전생에 악도에 떨어질 죄를 지은 때문이며,

 

 금생에 이런 경멸.천대를 받으므로 해서

 

 전생에 지은 그 죄업은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지니라.

 

 수보리야, 내가 지난날의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겁 동안을 생각해 보면

 

 연등불회상에서

 

 8백 4천만억 나유타의 여러 부처님을

 

 다 만나 뵙고, 모두 공양하고,

 

 그 뜻을 받들어 섬기고 하여

 

 한 분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뒷날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 공덕을 얻는다면

 

 내가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한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천만억분 내지 어떤 숫자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리라.

 

 수보리야,

 

 뒷날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하여 받는 그 공덕에 대하여

 

 내가 다 설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어지러워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그대는 명심하라.

 

 이경은 그 뜻이 가히 불가사의할 뿐 아니라

 

 그 과보 또한 능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十七.마침내 무아가 됨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 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마땅히 <내가 일체의

 

 중생을 열반에 이르도록 제도하니라>고 마음 먹고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고 나서는

 

 <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왜냐하면 만약에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이냐 하면 수보리야, 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법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연등부처님 회상에 있을때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에 따르면,

 

 세존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 계실 때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떤 법이 있어

 

 얻은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옳다.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실로 법이 없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니라.

 

 수보리야, 만약에 법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그대는 장차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며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하고

 

 수기를 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실로 법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며

 

 그러므로 연등부처님께서 <그대는 내세에

 

 반드시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라>고 말씀을 하셨느니라.

 

 여래란 곧

 

 <모든 법이 진실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실로 법이 없기 때문에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니라.

 

 수보리야, 부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는 실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이 다 불법>이라고

 

 여래가 설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일체법일 뿐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여 말하면

 

 사람의 몸이 크다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크다고 하신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인 것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내가 반드시 무수한 중생을 제도 하리라>

 

 하고 말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할 것이니

 

 수보리야, 왜냐하면

 

 실로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보살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은 <일체법이란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라고>설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국토를 장엄하니라>고

 

 말한다면 보살이라고 일컫지 않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했다면 여래는 <이야말로 진실한

 

 보살> 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十八.한몸이 되어 한가지로 봄

 

 

 

 「수보리야,그대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육안이 있습니다.」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천안이 있습니다.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혜안이 있읍니다.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그렇다면 여래에게

 

 「불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불안이 있습니다.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알>이라고

 

 부처가 모래 이야기를 한 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이모래 이야기를 하신 일이

 

 있읍니다.」

 

 「수보리야, 그렇다면

 

 만약 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고 그 모래알 수대로 부처의

 

 세계가 있다면 가히 많다 하겠느냐?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었다.

 

 「그렇게 많은 국토 가운데의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낱낱이 다 알고있느니라.

 

 여래가 말하는 갖가지 마음이란

 

 마음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왜 그러냐 하면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十九.법계를 통하여 교화함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보시한다면 그 인연으로 해서

 

 얻는 복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이 보시의 인연으로 얻는 복덕이

 

 심히 많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에 그 복덕이 실로 있다면

 

 여래는 <복덕을 많이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복덕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는 <복덕을 많이 얻을 것>

 

 이라고 말하느니라.」

 

 

 

 二十.색과 상을 여의다.

 

 

 

 「수보리야,

 

 부처가 색신을 갖추고 있다고 보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여래께서는

 

 색신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색신을 갖추고 있다함은

 

 곧 색신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색신을 구족하였다>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가히 모든 상을 갖추고 있다고 보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모든 상을 갖추고 있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모든상을 갖추고 있다>함은

 

 곧 상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모든 상을 갖추었다고 할 따름입니다.

 

 

 

 二十一.설하되 설한 바 없다.  

 

 

 

 「수보리야,

 

 <여래가 법을 설한 바 있다>고 말하지 말며

 

 그런 생각도 하지 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바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비방하는 일이 된다.

 

 이는 내가 설한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한 때문인 것이다.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 함은

 

 설할 법이 없으되

 

 다만 그 이름을 설한다고 일컬을 뿐이니라.」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많은 중생들이 다음 세상에 있어서

 

 여래께서 설하신 이법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시었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님도 아니니라.

 

 중생,중생하는 것은

 

 여래가 중생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만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니라.

 

 

 

 二十二.법은 얻을 것이 없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으신 바가 없음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시었다.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조금도 얻음이 없으니  

 

 그 이름이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 뿐이니라.」

 

 

 

 二十三.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함

 

 

 

 「수보리야, 또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그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그러므로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상으로

 

 일체의 착한 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것이다.

 

 수보리야, 좋은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래가 말하는 것이 좋은 법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착한 법일 뿐이니라.」

 

 

 

 二十四. 복덕과 지혜는 비교가 안됨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 가운데에 있는

 

 수미산 왕만한 칠보의 더미를 모두 보시한 것과,

 

 또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

 

 또는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도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 것을 비교한다면

 

 앞서 말한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 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라.

 

 

 

 二十五.교화하나 교화한 바가 없음

 

 

 

 「수보리야,

 

 <여래가 응당 중생을 제도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런 생각도 하지 마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은 없기 때문이니라.

 

 만약에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면

 

 이는 곧 여래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는

 

 뜻이 되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아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아상이 있음이 아니라

 

 다만 범부들이 아상이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의 말한 바는 범부가 아니나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니라.」

 

 

 

 二十六.법신은 상이 아님

 

 

 

 

 

 「수보리야, 가히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그러합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읍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만약 32상으로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대답하여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바에 따르면

 

 32상만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

 

 「만약 형상을 통해 나를 보거나

 

 음성을 통해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가질 뿐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리라.」

 

 

 

 二十七. 끝남도 멸함도 없음

 

 

 

 「수보리야, 그대는 <여래가 32상호를

 

 갖추므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여래는 구족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모든 법이 끊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마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낸 사람은

 

 법이 끊어졌느니 멸했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二十八.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음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이

 

 항하에 가득찬 모래와 같은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보시하더라도,

 

 일체법이 무아임을 알고

 

 또 인욕바라밀을 성취한다면

 

 이 공덕이 훨씬 뛰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지은 바 복덕을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二十九. 거동은 안정되고 고요함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혹은 온다, 간다, 앉는다,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본래 여래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며,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래라 일컫는 것이니라.」

 

 

 

 三十. 모두가 하나인 이치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내어 티끌로 만든다면

 

 그 티끌의 수가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그 티끌의 무리가 정말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티끌의 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끌의 무리는

 

 곧 티끌의 무리가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의 무리인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세계가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티끌들이 모여

 

 잠시 세계라는 형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어서

 

 여래께서 설하신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일합상이라는 것은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거늘

 

 다만 범부들이 일합상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을 따름이니라.」

 

 

 

 三十一. 알음알이를 내지 않음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아견.인견.

 

 중생견.수자견을 부처가 설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참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잘 알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곧 그 이름이 아견.인견.중생견.

 

 수자견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일체 법에 대해서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고 깨닫되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여래는 법상이 아닌 것을 말하나

 

 다만 그 이름이 법상일 뿐이니라.」

 

 

 

 三十二. 응화는 진실이 안님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무량 아승지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보시하더라도

 

 이 경의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또 남을 위해 설하는 이가 있다면

 

 그 복이 칠보로 보시한 보덕보다 훨씬 수승하니라.

 

 그러면 남들을 위해 어떻게 설할 것인가?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본래 모습 그대로

 

 흔들리지 말지니라.

 

 일체의 현상계는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같고, 번개불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부처님께서 이경을 설해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를 비롯하여 모든 비구.비구니.

 

 우바새.우바이 그리고 온 세상 천지에 있는

 

 하늘사람.세상사람.아수라들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고 즐거워

 

 하며 이를 받들어 믿고 행하느니라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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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

 

 

참선은 화두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언제 어디서 어떤 상태로 있든지

오직 그것에만 몰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활 그 자체가

화두를 참구하는 일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깨달음이라고 하는 문제가

어느 한순간에 해결되는 것입니다.

참선은 끈질긴 마음이 없으면

좀체로 이루기 힘든 수행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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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중에서

생각과 생멸이 부처이며 궁극의 경지이고 바람직한 삶이다.

생멸속에서 불생불멸을 보아야하고 無念이 필요하다면 有念속에서 無念을 보아야 한다.

불교를 알든 모르든 현재 수용하고 있는 삶이 완전무결한 모습 그대로다.

나무로 만든 사람(機關木人)을 불러서 물어보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푸는일(육바라밀,참선,기도,經)로서 언제 될것인가?

부처는 그런 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사람 사람이 본래로 갖추고 있고 個個圓成이다.

세속적인 안목,我田引水격인 방향으로 부처를 계산하는 것은 곤란하다.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이 구절에 증도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열쇄가 있다..

無念 無生이 되려고 애를 쓰는것이 아니다.

四大(지수화풍으로 이뤄진 肉身)를 놓아 버려서 잡지 마라.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飮啄(마음 의 경계)을 따라라.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린다.

남악회양 선사와 마조스님의 대화-"

수레가 가지 않을때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한는가?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지말인지를 알아야 한다.

諸行이 無相하여 일체가 空한것, 그것이 곧 여래의 大圓覺이다.

諸行無常 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  일체공  즉시여래 대원각

凡所有相 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허망(虛常) 속에서 허망하지 않은(實常) 영원 불멸을 보게되는

그 이치가 여래의 大圓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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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드는 법 - 성철스님
2006.02.23 18:47
http://tong.nate.com/avalokiteshv/13064731

 

 

 

1. 화두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하라.


화두 안 배운 사람 없지? 흔히 보면 안 배운 사람 더러 있거든.

안 배운 사람 더러 있는데. 안 배운 사람은 이제 결정코 화두를 배워서 참선을 해야되지.

화두는 딴 것하고 달라서 우리 공부하는 수좌들의 생명이지. 생명인데,

지금 참선하는 사람 여러 수백 명 아니라 참 많이 봤어 근간에도 많이 봤거든.

많이 봤는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면, 배우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뭘 갖다 화두로 만들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

자기 마음대로 책을 보다가 뭐 의심이 났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뭐 생각을 해서 만들어 가지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화두라는 것은 반드시 배워서 해야되지,

자기 마음대로 책을 보고 한다든지, 뭘 보고 생각해서 한다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야.

혹 상식이 좀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니까, 책같은 걸 보고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들고 하는데, 어떤 때는 잘 안된다 말이여.

어떤 사람을 보면 하다가 병이 나는 수가 생긴다 말이여.

그러니 화두하다가 병이 나고 고민이 생기고 하는 것이, 배우지 않고 아무 지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말이여.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갖다가,

'나는 아무것도 안 배워도 자신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말이여, 설사 (화두한지) 몇 해가 됐다해도 화두를 다시 배워야되지, 자기 마음대로 뭘 갖다 (화두로 해서 하면) 공부가 안된다 말이여.

오래 하다보면 나중에 고장이 나고 이러거든.

어떤 사람은 큰 병이 나는 사람이 더러 있거든. 하지만 결국 모두 내버리고 새로 배워 가지고 하면 괜찮다 말이여. 그러니 화두는 배워서 해야되지 자기 마음대로 이래 선택하면 못쓴다 말이여.


2. 본래부터 참구하던 화두를 바꾸지 말라.


또 그전에도 보면 화두를 갖다 배우면 그 화두를 오래 계속 해야 되는데,

이 화두를 하다가 좀 안될라하면 저 화두 좀 배워 저 화두 좀 해보고...(하는 식으로)

자꾸 바꾸는 사람이 있단 말이여. 그래 그것도 못쓰는 것이여. 화두를 배워 가지고 하다가 보면 잘 안되거든? 또 하나 배워서 하면 잘될까 싶어서 다시 배워서 해본단 말이여. 해보면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좀 하다보면 도루묵이여.

안되는 것은 똑같다 그말이여.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화두를 몇 가지를 배워서는, 이놈 쪼금 해보다 저놈 쪼금 해보다 (그러는데),

그렇게 하면 죽도 안되고 밥도 안되고 아무 것도 안되는 것이여!


그러니 화두하는 방법이

첫째, 화두를 자기 마음대로 하지말고 배워서 할 것.

둘째는 하나를 배우면 좀 그대로 계속해야 되지 이리저리 화두를 변경시키지 말라 이 말이여.

변경시키면 안돼! 흔히 그런 사람 많거든. “하이구 스님, 이걸 해 보면 좋을성 싶은데 이걸 하고 싶은데...”

“그래 해봐라” 얼마 안가서 말이지 “ 매 한가지입니다” 이러거든.

또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말이여. 그전에 배워하던 그 공부만 혼돈되고 말거든. 그러니 화두를 갖다가 이리저리 갈지말라 이기여. 그러면 못써.


3. 공부의 표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


또 화두를 하다가 깨쳤다고 와서 말하는 사람도 여러 수십 명 수백 명을 봤어요.

어떤 젊은 수좌 하나는 말이야. 오대산 그쪽에 있다가 토굴지어 사는데, 한 해 여름에 그 천리길을 세 번이나 왔어.

신심이 참 있어. 보니까. 처음에 와가지고는 공부를 하다보니 자기가 깨쳤다고 그러길래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줬어.

그래 다시 가서 공부하다보니까 또 뭐 알았는 것 같아.

아! 이번에는 참말로 깨쳤지 싶어 또 쫓아왔다 말이여.

세 번이나 오는 사람 봤어. 세 번이나! 내가 볼때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그 사람뿐 아니라 흔히 보면 공부하다가 깨쳤다 이래 가지고 와서 묻는 사람 더러 봤거든.

더러 봤는데 깨쳤다고 하는 사람도 여러 수십 명 봤어.

그래서 공부하다 보면 인자 그냥 의심난다고 하는 사람도 뭐 지견이 나고 뭐 경계가 나타나고 하면 깨쳤다고 한다 말이여.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내 몸이 고달프고 아파도 꼭 만나 줬거든.

만나 줬는데 여러 해를 그러다 보니 아무 소용없어!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어.

처음에는 뭐 예! 예! 하더라도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이여.

자기 마음대로 해버려. 그래서 요새 근래 와서는 공부하다가 뭐 깨쳤다는 그런 사람들은 전부 그 다음부터 안 만나 주거든?

아무도 안 만나는데, 그래 바로만 깨치면 얼마나 좋노? 바로만 깨치면 말할 것 없는기라.

중간에 가다가 병이 난 것을 깨쳤다고 이러니...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내 혼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종문(宗門)에 불교 근본 법칙이 있어,

법칙이 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우리가 강당에서 배우는 선요(禪要)가 있어,

선요. 고봉(高峰)스님이 공부를 하다가 (자기 딴에는) 깨쳤단 말이여. 이래가지고 인자 설암스님한테 갔는데,

뭐 법문을 물어보면 대답을 얼마나 잘하나. 설암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저놈이 공부를 하다가 바로 깨친 것이 아니고

병이 났는데 아무리 아니라해도 소용이 없거든.

그땐 부처님이 아니라해도 안들어. 자기가 옳다 말이여. 자기가 옳다 이러면 안듣는다 말이여. 그러니 한 삼 년 가만히 그대로 두었어.

그대로 뒀단 말이여. 말 안들으니까. 그러니 (고봉스님은) 한 삼 년동안은 자기가 천하 제일로 깨친 것 같고 자기스님보다 나은 것 같고 말이지.

그래 인제, 한 삼 년 지나서 설암스님이 보니까 어지간히 그 객기말이여,

그 병증이 좀 가라앉은 것 같거든? 그래서 이제 오라고해서 물었어.

“내 지금 뭐 법문, 법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뭘 물으면 (네가) 대답 못하는 것이 뭐 있노? 환하니 물을 필요 없잖아!

내 그런 걸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래 니가 실제 공부하다 깨쳤다고 큰 소리 치는데,

니 공부한 그것이, 보통 밥먹고 옷입고 활동하고 다닐 때, 그때, 일간호호시(日間浩浩時)적에, 아무리 (분주하게) 활동하더라도 그대로 일여(一如)하냐?

이렇게 물었거든. 자기가 생각해 보니 아무리 그 경계로 설치고 하더라도 자기가 공부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거든. 그대로 일여한기라.

“그럼 꿈에도 일여하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꿈에도 일여하거든. 경계가 없단 말이여.

그래 또 물었어.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 말이여 꿈도 없을 때, 그때도 니가 일여하냐?”하니,

그땐 캄캄하단 말이여. 그래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랬거든.

중생생활이 어떠냐 하면, 일간(日間) 잠 안잘 때 생활하고, 잠들어서 꿈꿀 때 생활하고, 잠이 들어 꿈도 없는 말이여,

아주 잠이 꽉 들었을 때 생활하고 그 세 가지 생활이 평생 전체 생활이거든.

그러니 설암스님이 묻기를 “꿈에도 일여하면 그럼 잠 들어서는? 잠이 꽉 들어서는?” 잠이 꽉 들어서 꿈도 없단 말이여.

그때는 마 캄캄하니 “아무 것도 없다” 이랬거든 “그럼 그것이 아니다 그래 니 공부가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니, 니 오늘부터 무조건 말이여 다시 발심을 해서 공부를 잠 꽉 들어서 일여

한 거기에서 깨쳐야 되지. 꿈에 일여한 그것 가지고는 안돼.

잠 꽉 들어서 깨쳐야 되지 말이여 일여한데서 깨쳐야 되지, 아니니까 공부한 것 다시 공부해라.”

그러니까 그땐 인자 미친 기운, 병난 기운이 많이 가라 앉아 설암스님 말을 믿었거든

이래가지고 그래 또 삼 년을 살며 또 죽자하고 했어. 죽자하고 해가지고 그때가서 참말로 깨쳤단 말이여.

응!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한, 이 실지 오매일여라하는기야.

꿈에서 일여한 것은 몽중일여라하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한 것은 숙면일여라 하는기여.

그때선 인자 깨쳐보니 몽중일여 들어가고, 숙면일여 들어 가서 바로 깨쳤거든.

그래 설암스님이 인가를 했단 말이여. 그렇게 돼서만 바로 깨친 것이여! 요새 깨쳤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이여. 보면은 “마 그것은 그만 두고 니는 모든게 환한 것 같고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제?”

아! 석가 그까짓 것 뭐 똥만도 못하고, 지가 자기가 천하 제일이라고 이러거든.

“그래! 석가가 똥만도 못하고 금만도 못하든 그런 소리 하지말고 그럼 니 공부한 것이 보통 생활하는데도 일여하냐?”

“아, 그건 안됩니다.” 이러거든?

“ 아, 그럼 서서도 말하자면 보통 생활할 적에 일여하지 못한 그걸 가지고 부처님보다 낫다고 생각하나.”

“그럼 뭘 갖고 아는데요?” “그래 공부라는 것은 동정에도 일여해야되.

동정에, 동할 때나 정할 때나 일여해야 되고, 몽중에도 일여해야 되고 숙면에도 일여해야돼.

숙면에 일여해도 거기서 깨쳐야 공부지. 바로 깨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병이지 공부가 아니야.”

“아! 그럼 큰일났네! 난 꿈에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안된다” 이러거든. ”그럼 너 어쩔래?“ ”그럼 스님 말 믿고“ ”이놈아 내 말이 아니여.

이건 이전 조사스님도 다 말씀하신거지.

이 도둑놈아. 내가 뭐 잘났다고 내가 내 법 세우면 되나? 응 자고로 어떤 큰스님이든지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한 거기서 깨쳐야 참으로 바로 깨친 것이지,

그러기 전에는 절대 깨친게 아니라고 부처님도 그리 말씀했고 조사스님들도 다 그리 말씀했단 말이여.

잠이 꽉 들은 것은 고사하고 또 꿈에는 고사하고 동정에도 일여하지 않는 그것을 가지고 니가 뭘 깨쳤다고 할끼고?

그건 순전히 병난 것이지 깨친 것이 아니다, 그래 가만히 들어보니 마 지 공부는 틀려버렸거든?

"아이고! 이전에 잘못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표준을 삼고,

거---- 몽중에도 일여하고 숙면에도 일여한 거기에서 깨쳐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그런 사람 더러 봤는데 동정일여 이건 보통 보면 쉬운 것 같지만 그것도 참으로 어려운기여.

동정일여가 뭐 쫓아 다닐 때 저기 화두가 일여하던가?

응? 안 일여하단 말이여. 좀 지견이 났다고 하면, 화두는 있고 없고 하고 안하고 관계없이 일여한 경우가 더러 있어.

그래 난 이때것 봐도 몽중에 일여한 사람 난 아직 못봤어. 몽중에! 몇사람 인제 몽중에 좀 일여할라하는데 말이제,

그만 아이구마, 깨친기다싶어 공부 안했뿐다 말이여.

그러믄 그것은 나중에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거야.

여기 우리 대중 한 번 생각해 봐라. 양심을 다. 그건 양심이 안 있겠나.

그까짓것 뭐 법문을 대답하고 뭐 법문을 알고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

그건 아무 소용, 그건 뭐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없는 것이고 실지 내 공부가 말이여 돌아다니다 보면 알 것 아니여? 얘기할 때 밥 먹을 때 말이여

. 동정에 일여라 하거든 얘기할 때 밥 먹을 때까지 얘기하는 소리지.

그 빼놓고는 아무리 분주하고 아무리 말한다면 또 바쁘고 아무리 몸뚱이를 아무리 움직이고 하더라도 그대로 간단이 없이 일여한 그런 경계가 있어.

동정일여 한 사람들 저기 저.......여간해서 되는게 아니야

.그기 그란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몽중일여라하면 그건 참으로 어려운기여.

몽중일여는 참으로 어렵단 말이여. 그건 참으로 어려운기여. 그래 몽중에 화두를 들어 되는 사람이 있거든.

손 한번 들어봐. 그 참 어려운기여.

그전에 인자 사람으로 치면 말할 수 없이 좋은 사람인데, 그 조실스님이 점잖은 분이야.

점잖은 분인데 그 조실스님하고 이것 저것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 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지 말이여.

공부라는 것이 동중에 일여해야 되고 몽중에 일여해야 되고 스???면에 일여해야 되지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말이여.

”스님 어떻습니까? “ 꿈에도 좀 뭐합니까?” 이란께. 아이구참, 그란께 말이여. 꿈에도 안된다 그라거든. 꿈에도 안된다 이기라.

아니 꿈에도 안되는 그걸 갖고 조실이라하면 되겠나 어데. 그걸 말씀을 드리니 “조실해라 자꾸 이라는데 뭐” 그말도 옳거든.

암만 안할려고 해도 자꾸 와서 조실하라고 하니 할 수 없는게지.

꿈에 꿈에 인되는 그런 사람도 큰스남들 중에 보면 더러 있거든.

어떤 사람은 또 안그래 “그걸 말이라고 해? 난 벌써 숙면이 지나갔어!” 내용은 안그렇거든? 내용은 안그런데 벌써 다 지나갔다고 한단 말이여.

이건 또 뭐 더 말도 못한다 어찌 더.... 그치만 자기 양심은 안있겠어?

그란께 뭐 예전 스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예를들자면 그럴 수가 있다 그말이라!. 양심 있는 스님들은 참 꿈에도 안된다고 그래 말씀 많이 해 들었거든.

나는 인자 공부하라는 것은 그냥 무턱대놓고 가다가 무슨 한 생각이 나면 한소식 했다고 말이여.

까직거 다 알아 버렸다하고 무슨 경계가 나타나면 아---! 부처나 뭐 달마보다 내법이 더 깊으다.

그러고 실데없는 망상을 가진단 말이여.

동중에도 일여한가 몽중에도 일여한가? 그래놓으면 다 고마 무너져버리거든? 언제 한번은 큰법당 법문을 하고 내려오니까 웬 사람 하나 수좌가 나를

보고 dorl하는게 뭐냐? 나보고 절을 자꾸했사, “와? 절을 와 하노?

” 이러니께, “아이구 스님 법문을 하시는데 고마 일언지하에 확철대오 했습니다!” “허 참 반갑네. 이 초단법칙이로구만. 그래 일언지하에 뭘 깨쳤길래 깨쳤다고 하노?”

허-마마 ! 온 천칠백 공안이 훤하다고 했싸.

그래그래 뭐 천칠백공안이 훤하고 그건 그만두고 지금 니 얘기할 때 지금도 말이지 그대로 공부가 그대로 되냐?

그만 생각해 보니 얘기할 땐 없다 그래.

“허허허! 에이 도둑놈의 자식 말이야 앙--? 니는 마 공부 깨치는게 그런 것인줄 아나? 쌍놈의 새끼 말이여!” 그래가 몽둥이로 탕!탕! 때려줬제

.“ ”임마 그것이 공부 아니야. 우찌 가다보면 우찌 뭐 망상이 좀 생기고, 어떻게하다 경계가 조끔 비친단 말이지.

그기 깨친게 아니다 말이여 응? 동정일여 해가지고 몽정일여 숙면일여 한데서 깨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깨친게 아니여.

이것은 내 법이 아니고 우리 불법근본은 거기 서가 있단 말이여

“ 그란께 당장 잘못했다고 해.

그래서 인자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을 봤는데, 그래 공부라고 하는 것은, 뭐뭐 공부하는체 하고, 뭐 묵언하고, 뭐를 하고, 묵언을 뭐, 뭐뭐.... 장좌를 했싸도 말이여 속을 보면 동정일여도 안되거든.

몽중에도 되는 사람. 내 그기 저 직접 본 사람, 뭐 거- 알았다고 하는 사람 더러 안봤어?

더러 봤는데, 몽중일여 그기 참 드물다 그말이여. 그걸 알아야되.

그란께네, 아무리 해도 우리가 인제 공부를 하면 말이지 그래도 저 선방밥을 먹을라면 몽중일여는 돼서 그 선방밥도 먹을 수 있는 것이지

저, 가사를 입고 앉았다 해도, 속은 아무 것도 아닌데 그 뭐 수좌 그 뭐 수좌 할 수 없거든?

그러니 공부의 표준이 동중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그것이 표준이 된단 말이여.

그건 내 말이 아니고 우리 불법 선가의 근본생명이 내려오는 것이니까 말이지.

이렇게 해가지고 , 이제 화두 예기를 해야 되지 말이지,

보면 마 선방에 나와 가지고 한 두철 안돼 말짱 다 깨쳐 버리고 마 말짱 자기 소견 하나 다 가진 사람 많거든 그런 병 가진 사람 쌨단 그말이여.

생각을 해봐. 속에 마, 여기 깨친 사람 안 쌨나? 속으로! 지 속으로 깨쳤다 그말이여. 바로 깨친게 아니고,

그래서 동종일여한지 몽중일여한지 숙면일여한지 그걸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여.

그 세 가지 조간에 안들었으면 깨친게 아니고 병이여.

그라믄 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거든.

말할 필요도 없는데, 그러면 인자 동종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고 그걸 말한다면 참 애를 많이 쓰야 되지 말이여

. 또 그 화두하는 방법도 잘못되면 안된단 말이여.

 

 

 

6) 올바른 話頭參究法 : 항상"어째서?"를 넣어라.

 

(그리고)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또 안된단 말이여.

역사적으로 보면 "無"字(를), 그냥 "무(無)-"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쌨거든.

"佛性이 있나 없나, 무-, 무-, 무- 무-" 하면 된다 이거라.

 

한가지(예를 들면) 어떤 원로스님이, 웬 나이 많은 노인 하나가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데,

이리 꾸뻑 졸면서 "무-"

저리 꾸벅 졸면서 "무-",

자꾸 "무-"만 하면서 이리꾸뻑 저리 꾸뻑 (졸더 라면서)흉내를 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선 만년을 해도 안돼!

자꾸 "무, 무" 하면서 꾸뻑꾸뻑 졸기만 하는데 그 病이 제일 큰 병이라.

자고로 "무-"이렇게 하라는 祖師스님네가 하나도 없었어.

 

"무-하면 그만이지 어디 딴 거 뭐 있나"하는 그런 소리 더러 들었는데,

예전 스님들이 다 말씀하시기를,

"趙州因其道無?" 조주는 어째서 無라 했나?

조주가 어째서---? (하는 식으로)

"어째서"를 장(늘) 넣으라고 했어.

 

(화두에) 庭前柏樹子니 麻三斤이니 무슨 무슨 화두, 화두가 안쌨어?

(하지만 어떤 화두를 하든지, 예를 들어)

정전백수자(뜰앞의 측백나무)를 화두로 하는 사람은

"정전백수자" 이러지 말고,

정전백수자(라고 한 이유)를 모르니까 의심이 있는데,

그러니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또 마삼근을 하면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無자를 하면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런 식으로) "어째서? 어째서?" 이걸 장 붙혀야 된단 말이여.

 

어떤 사람은 "어째서?"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러지만, 그런 게 아니야.

그냥"무-"하거나, 그냥 "정전백수자"하거나, 그냥 "마삼근"하면,

그건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된 거라.

그렇게 해서는 깊이 못들어 가.

절대 깊이 못들어 가 !

그런 사람 더러 있거든.

 

 

7) 잘못된 공부법으로 인한 病의 事例

 

그 處士 나이가 40 넘은 사람인데,

공부하다가 딱 앉아서는 定에 들어가 버리는 거라.

화두는 "무"자를 했는데,

(공부가 어떠했냐면) 처음에 "무-"하면서 이렇게 떡- 앉아 있으면 모든 생각, 모든 煩惱妄想이

다 떨어져. 그냥 무-하면 그만 定에 들어가 버린단 말이여.

定에, 그리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이거야.

 

"그래, 니 그게 공부가?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됐어"

처음엔 말을 잘 안들을려고 해.

그러니깐 그냥 "무-"하지 말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해야지,

그냥 "무-"하면 결국 無記에 빠지고 말아. 그런 일이 많이 있어.

 

또 어떤 처사는, 한 20년전에 금용사 있을 때 찾아왔었는데, 지금 살아 있으면 80이 넘었을 거라.

도리사에 가서 6년을 공부했고 어디 가서 공부를 많이 했어.

나중에 돌아 다녀 보니간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자기보다 더 크게 깨친 사람도 없어.

그래서 중(僧)도 상대하지 않고 자기가 天下第一이라.

그래 자기 語錄을 만들어서 이만큼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누구의 말이든 안 들으려 한단 말이야.

 

(그러다가)누가 " 그러지 말고 성철스님을 한번 찾아가 보라"고 그러드래.

"그분도 별수 있을까? 하지만 한번 가보지" 그렇게 해서 (나를 찾아) 왔는데,

만나보니 我慢이 충천하고---

그처사가 딱 이렇게 앉았는데,(말하기를) 이렇게 앉으면 定에 드는데,

定에 들면 한 일곱시간 여덟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언제 지나 갔는지 몰라.

그런 자기경계를 가지고 큰스님네들한테 가서 물어봐도 모른다거든?

그럼 자기가 最高다 이거야.

자기 경계를 모르니까, 그래 가지고 자기가 바로 見性했고,

神仙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으며,

대통령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나?

무엇보다 자기가 定에 들었을 때 定에 든 경계 그건 다 할 수도 없고,

또 어디 물어보니 잘 모르고,

이러니까 (남들이)자기보다 못하다 이거라, 그래 내가

"그 참 공부 많이 했구먼, (그런데) 그 경계가 꿈에도 있나,없나?"

가만히 있더니 꿈에는 없다고 그래,

(定에 드는) 그것 갖고는 꿈에(는 공부가) 안되는 거라.

 

"에이 도둑놈의 자식! 그게 定에 든 病이지,

꿈에도 없는 그게 무슨 공부라고 니가 공부라고 그래?

니 생각해 봐라.

공부라면 動靜에든지, 夢中에든지,熟眠에 든지, 一如해야지

꿈에도 없는 그것 갖고 그게 공부라고, 天下第一이라 해?"

 

그만 몽둥이로 두둘겨 줬어.

보통들 보면 定에 든다거나,

7-8시간이 눈 깜짝 할 새에 지나가 버리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지).

자기도 그렇게 알고,

(하지만 이 처사는) 공부를 많이 하고 애쓴 사람이라 머리는 영리해.

(그리고 ) 양심이 있으니까, 利害타산이 없거든?

俗人이다 보니 어디 가서 祖室 앉을 그런 생각도 없는 사람이고,

만일 祖室이나 그런 데 생각이 있었으면

또 " 꿈이 뭐꼬, 내가 熟眠一如 되는데!"하고 꿉뻑 쎄울끼라.

안된다고 하면 祖室 안해야 되니까, 그런 이헤관게가 없으니까, 양심적으로 "잘못?다"고

그래서 결국 내게 절하고 (전에 하던 화두 버리고) 화두를 새로 배워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사람도 보니까 (잘못된 원인이)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됐어.

그래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를 붙여서

(화두를) 하니까 자기가 말한 定이 안 나타난단 말이야.

자꾸 화두만 惺惺해서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하게 되면

定이 안나타나거든.

 

그러니깐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그만 딴길로 들어가 버린단 말여.

영 잘못되 버린단 말이여.

그럼 아무리 죽자고 애를 써도 헛일이여.

헛일이기만 하면 괜찮지, 도리어 병만 생기고 만다 그말이여.

 

아까 말한 고봉스님도 처음엔 그냥 "무-"했거든.

그냥 "무-무-"이렇게 3년을 해도 아무런 진척도 없고, 공부가 안된다 말이여.

그래서 자기가 出世한 뒤에는 도데체 無字를 못하게 했어.

(사람들이) 자꾸 "무-,무-" 하고 앉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首弟子인 中峰國師(말씀)이

(無字를 못하게 할게 아니라) 무자(를 참구하는) 방법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무라 했는가? (라고) 고치면 된다 이거라.

그래 이 "趙州因其道無"하는 것이,

(비록) 그전(중봉스님 이전)에는 (그렇게 했다는)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그 전에도 다 그런 식으로 했는데, 거기서 내려온 거라.

내가 특별히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래서 天下禪知識, 祖師스님들이 공부하셨던 방법이,

"정전백수자" "마삼근"이나 (그 밖의 다른) 무엇이든 할 것 없이,

언제든지 화두할 때.

"어째서"가 들어 가야지 안들어가면 공부가 안된다 이거라.

이게 공부하는 근본 요령이가든.

 

 

8) 參意와 死句라는 誤解.

 

또 그냥 흔히 "무-"라고 하든지, 그냥 "정전백수자"라고 하든지,

이렇게 하면 參究가 되고,

"어째서"를 넣으면 參意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미친소리 구먼.

 

參意니 參究니 하는 것은 나중에 깨친 사람이 깨친 分上에서 이런말 저런말 한 것이지,

공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못쓴다 이말이여.

그리구 또 그냥 "무-"하면 活句고

"어째서"하면 死句라고 하는 소리도 듣는데,

이건 活句고 死句고 참으로 꿈에도 모르는 소리야.

그럼 趙州無字 같은 것은 (예전의)여러 큰스님들이 그걸 몰라서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어째서?" 이렇게 했을까?

 

그럼 대강의 요점은 내 얘기 했으니까,

개별적으로 의심나는 사람 있으면 간단하게 얘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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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ong.nate.com/avalokiteshv/13064731

 

 

 

1. 화두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하라.


화두 안 배운 사람 없지? 흔히 보면 안 배운 사람 더러 있거든.

안 배운 사람 더러 있는데. 안 배운 사람은 이제 결정코 화두를 배워서 참선을 해야되지.

화두는 딴 것하고 달라서 우리 공부하는 수좌들의 생명이지. 생명인데,

지금 참선하는 사람 여러 수백 명 아니라 참 많이 봤어 근간에도 많이 봤거든.

많이 봤는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면, 배우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뭘 갖다 화두로 만들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

자기 마음대로 책을 보다가 뭐 의심이 났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뭐 생각을 해서 만들어 가지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화두라는 것은 반드시 배워서 해야되지,

자기 마음대로 책을 보고 한다든지, 뭘 보고 생각해서 한다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야.

혹 상식이 좀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니까, 책같은 걸 보고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들고 하는데, 어떤 때는 잘 안된다 말이여.

어떤 사람을 보면 하다가 병이 나는 수가 생긴다 말이여.

그러니 화두하다가 병이 나고 고민이 생기고 하는 것이, 배우지 않고 아무 지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말이여.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갖다가,

'나는 아무것도 안 배워도 자신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말이여, 설사 (화두한지) 몇 해가 됐다해도 화두를 다시 배워야되지, 자기 마음대로 뭘 갖다 (화두로 해서 하면) 공부가 안된다 말이여.

오래 하다보면 나중에 고장이 나고 이러거든.

어떤 사람은 큰 병이 나는 사람이 더러 있거든. 하지만 결국 모두 내버리고 새로 배워 가지고 하면 괜찮다 말이여. 그러니 화두는 배워서 해야되지 자기 마음대로 이래 선택하면 못쓴다 말이여.


2. 본래부터 참구하던 화두를 바꾸지 말라.


또 그전에도 보면 화두를 갖다 배우면 그 화두를 오래 계속 해야 되는데,

이 화두를 하다가 좀 안될라하면 저 화두 좀 배워 저 화두 좀 해보고...(하는 식으로)

자꾸 바꾸는 사람이 있단 말이여. 그래 그것도 못쓰는 것이여. 화두를 배워 가지고 하다가 보면 잘 안되거든? 또 하나 배워서 하면 잘될까 싶어서 다시 배워서 해본단 말이여. 해보면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좀 하다보면 도루묵이여.

안되는 것은 똑같다 그말이여.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화두를 몇 가지를 배워서는, 이놈 쪼금 해보다 저놈 쪼금 해보다 (그러는데),

그렇게 하면 죽도 안되고 밥도 안되고 아무 것도 안되는 것이여!


그러니 화두하는 방법이

첫째, 화두를 자기 마음대로 하지말고 배워서 할 것.

둘째는 하나를 배우면 좀 그대로 계속해야 되지 이리저리 화두를 변경시키지 말라 이 말이여.

변경시키면 안돼! 흔히 그런 사람 많거든. “하이구 스님, 이걸 해 보면 좋을성 싶은데 이걸 하고 싶은데...”

“그래 해봐라” 얼마 안가서 말이지 “ 매 한가지입니다” 이러거든.

또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말이여. 그전에 배워하던 그 공부만 혼돈되고 말거든. 그러니 화두를 갖다가 이리저리 갈지말라 이기여. 그러면 못써.


3. 공부의 표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


또 화두를 하다가 깨쳤다고 와서 말하는 사람도 여러 수십 명 수백 명을 봤어요.

어떤 젊은 수좌 하나는 말이야. 오대산 그쪽에 있다가 토굴지어 사는데, 한 해 여름에 그 천리길을 세 번이나 왔어.

신심이 참 있어. 보니까. 처음에 와가지고는 공부를 하다보니 자기가 깨쳤다고 그러길래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줬어.

그래 다시 가서 공부하다보니까 또 뭐 알았는 것 같아.

아! 이번에는 참말로 깨쳤지 싶어 또 쫓아왔다 말이여.

세 번이나 오는 사람 봤어. 세 번이나! 내가 볼때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그 사람뿐 아니라 흔히 보면 공부하다가 깨쳤다 이래 가지고 와서 묻는 사람 더러 봤거든.

더러 봤는데 깨쳤다고 하는 사람도 여러 수십 명 봤어.

그래서 공부하다 보면 인자 그냥 의심난다고 하는 사람도 뭐 지견이 나고 뭐 경계가 나타나고 하면 깨쳤다고 한다 말이여.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내 몸이 고달프고 아파도 꼭 만나 줬거든.

만나 줬는데 여러 해를 그러다 보니 아무 소용없어!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어.

처음에는 뭐 예! 예! 하더라도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이여.

자기 마음대로 해버려. 그래서 요새 근래 와서는 공부하다가 뭐 깨쳤다는 그런 사람들은 전부 그 다음부터 안 만나 주거든?

아무도 안 만나는데, 그래 바로만 깨치면 얼마나 좋노? 바로만 깨치면 말할 것 없는기라.

중간에 가다가 병이 난 것을 깨쳤다고 이러니...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내 혼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종문(宗門)에 불교 근본 법칙이 있어,

법칙이 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우리가 강당에서 배우는 선요(禪要)가 있어,

선요. 고봉(高峰)스님이 공부를 하다가 (자기 딴에는) 깨쳤단 말이여. 이래가지고 인자 설암스님한테 갔는데,

뭐 법문을 물어보면 대답을 얼마나 잘하나. 설암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저놈이 공부를 하다가 바로 깨친 것이 아니고

병이 났는데 아무리 아니라해도 소용이 없거든.

그땐 부처님이 아니라해도 안들어. 자기가 옳다 말이여. 자기가 옳다 이러면 안듣는다 말이여. 그러니 한 삼 년 가만히 그대로 두었어.

그대로 뒀단 말이여. 말 안들으니까. 그러니 (고봉스님은) 한 삼 년동안은 자기가 천하 제일로 깨친 것 같고 자기스님보다 나은 것 같고 말이지.

그래 인제, 한 삼 년 지나서 설암스님이 보니까 어지간히 그 객기말이여,

그 병증이 좀 가라앉은 것 같거든? 그래서 이제 오라고해서 물었어.

“내 지금 뭐 법문, 법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뭘 물으면 (네가) 대답 못하는 것이 뭐 있노? 환하니 물을 필요 없잖아!

내 그런 걸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래 니가 실제 공부하다 깨쳤다고 큰 소리 치는데,

니 공부한 그것이, 보통 밥먹고 옷입고 활동하고 다닐 때, 그때, 일간호호시(日間浩浩時)적에, 아무리 (분주하게) 활동하더라도 그대로 일여(一如)하냐?

이렇게 물었거든. 자기가 생각해 보니 아무리 그 경계로 설치고 하더라도 자기가 공부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거든. 그대로 일여한기라.

“그럼 꿈에도 일여하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꿈에도 일여하거든. 경계가 없단 말이여.

그래 또 물었어.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 말이여 꿈도 없을 때, 그때도 니가 일여하냐?”하니,

그땐 캄캄하단 말이여. 그래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랬거든.

중생생활이 어떠냐 하면, 일간(日間) 잠 안잘 때 생활하고, 잠들어서 꿈꿀 때 생활하고, 잠이 들어 꿈도 없는 말이여,

아주 잠이 꽉 들었을 때 생활하고 그 세 가지 생활이 평생 전체 생활이거든.

그러니 설암스님이 묻기를 “꿈에도 일여하면 그럼 잠 들어서는? 잠이 꽉 들어서는?” 잠이 꽉 들어서 꿈도 없단 말이여.

그때는 마 캄캄하니 “아무 것도 없다” 이랬거든 “그럼 그것이 아니다 그래 니 공부가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니, 니 오늘부터 무조건 말이여 다시 발심을 해서 공부를 잠 꽉 들어서 일여

한 거기에서 깨쳐야 되지. 꿈에 일여한 그것 가지고는 안돼.

잠 꽉 들어서 깨쳐야 되지 말이여 일여한데서 깨쳐야 되지, 아니니까 공부한 것 다시 공부해라.”

그러니까 그땐 인자 미친 기운, 병난 기운이 많이 가라 앉아 설암스님 말을 믿었거든

이래가지고 그래 또 삼 년을 살며 또 죽자하고 했어. 죽자하고 해가지고 그때가서 참말로 깨쳤단 말이여.

응!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한, 이 실지 오매일여라하는기야.

꿈에서 일여한 것은 몽중일여라하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한 것은 숙면일여라 하는기여.

그때선 인자 깨쳐보니 몽중일여 들어가고, 숙면일여 들어 가서 바로 깨쳤거든.

그래 설암스님이 인가를 했단 말이여. 그렇게 돼서만 바로 깨친 것이여! 요새 깨쳤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이여. 보면은 “마 그것은 그만 두고 니는 모든게 환한 것 같고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제?”

아! 석가 그까짓 것 뭐 똥만도 못하고, 지가 자기가 천하 제일이라고 이러거든.

“그래! 석가가 똥만도 못하고 금만도 못하든 그런 소리 하지말고 그럼 니 공부한 것이 보통 생활하는데도 일여하냐?”

“아, 그건 안됩니다.” 이러거든?

“ 아, 그럼 서서도 말하자면 보통 생활할 적에 일여하지 못한 그걸 가지고 부처님보다 낫다고 생각하나.”

“그럼 뭘 갖고 아는데요?” “그래 공부라는 것은 동정에도 일여해야되.

동정에, 동할 때나 정할 때나 일여해야 되고, 몽중에도 일여해야 되고 숙면에도 일여해야돼.

숙면에 일여해도 거기서 깨쳐야 공부지. 바로 깨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병이지 공부가 아니야.”

“아! 그럼 큰일났네! 난 꿈에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안된다” 이러거든. ”그럼 너 어쩔래?“ ”그럼 스님 말 믿고“ ”이놈아 내 말이 아니여.

이건 이전 조사스님도 다 말씀하신거지.

이 도둑놈아. 내가 뭐 잘났다고 내가 내 법 세우면 되나? 응 자고로 어떤 큰스님이든지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한 거기서 깨쳐야 참으로 바로 깨친 것이지,

그러기 전에는 절대 깨친게 아니라고 부처님도 그리 말씀했고 조사스님들도 다 그리 말씀했단 말이여.

잠이 꽉 들은 것은 고사하고 또 꿈에는 고사하고 동정에도 일여하지 않는 그것을 가지고 니가 뭘 깨쳤다고 할끼고?

그건 순전히 병난 것이지 깨친 것이 아니다, 그래 가만히 들어보니 마 지 공부는 틀려버렸거든?

"아이고! 이전에 잘못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표준을 삼고,

거---- 몽중에도 일여하고 숙면에도 일여한 거기에서 깨쳐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그런 사람 더러 봤는데 동정일여 이건 보통 보면 쉬운 것 같지만 그것도 참으로 어려운기여.

동정일여가 뭐 쫓아 다닐 때 저기 화두가 일여하던가?

응? 안 일여하단 말이여. 좀 지견이 났다고 하면, 화두는 있고 없고 하고 안하고 관계없이 일여한 경우가 더러 있어.

그래 난 이때것 봐도 몽중에 일여한 사람 난 아직 못봤어. 몽중에! 몇사람 인제 몽중에 좀 일여할라하는데 말이제,

그만 아이구마, 깨친기다싶어 공부 안했뿐다 말이여.

그러믄 그것은 나중에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거야.

여기 우리 대중 한 번 생각해 봐라. 양심을 다. 그건 양심이 안 있겠나.

그까짓것 뭐 법문을 대답하고 뭐 법문을 알고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

그건 아무 소용, 그건 뭐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없는 것이고 실지 내 공부가 말이여 돌아다니다 보면 알 것 아니여? 얘기할 때 밥 먹을 때 말이여

. 동정에 일여라 하거든 얘기할 때 밥 먹을 때까지 얘기하는 소리지.

그 빼놓고는 아무리 분주하고 아무리 말한다면 또 바쁘고 아무리 몸뚱이를 아무리 움직이고 하더라도 그대로 간단이 없이 일여한 그런 경계가 있어.

동정일여 한 사람들 저기 저.......여간해서 되는게 아니야

.그기 그란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몽중일여라하면 그건 참으로 어려운기여.

몽중일여는 참으로 어렵단 말이여. 그건 참으로 어려운기여. 그래 몽중에 화두를 들어 되는 사람이 있거든.

손 한번 들어봐. 그 참 어려운기여.

그전에 인자 사람으로 치면 말할 수 없이 좋은 사람인데, 그 조실스님이 점잖은 분이야.

점잖은 분인데 그 조실스님하고 이것 저것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 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지 말이여.

공부라는 것이 동중에 일여해야 되고 몽중에 일여해야 되고 스???면에 일여해야 되지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말이여.

”스님 어떻습니까? “ 꿈에도 좀 뭐합니까?” 이란께. 아이구참, 그란께 말이여. 꿈에도 안된다 그라거든. 꿈에도 안된다 이기라.

아니 꿈에도 안되는 그걸 갖고 조실이라하면 되겠나 어데. 그걸 말씀을 드리니 “조실해라 자꾸 이라는데 뭐” 그말도 옳거든.

암만 안할려고 해도 자꾸 와서 조실하라고 하니 할 수 없는게지.

꿈에 꿈에 인되는 그런 사람도 큰스남들 중에 보면 더러 있거든.

어떤 사람은 또 안그래 “그걸 말이라고 해? 난 벌써 숙면이 지나갔어!” 내용은 안그렇거든? 내용은 안그런데 벌써 다 지나갔다고 한단 말이여.

이건 또 뭐 더 말도 못한다 어찌 더.... 그치만 자기 양심은 안있겠어?

그란께 뭐 예전 스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예를들자면 그럴 수가 있다 그말이라!. 양심 있는 스님들은 참 꿈에도 안된다고 그래 말씀 많이 해 들었거든.

나는 인자 공부하라는 것은 그냥 무턱대놓고 가다가 무슨 한 생각이 나면 한소식 했다고 말이여.

까직거 다 알아 버렸다하고 무슨 경계가 나타나면 아---! 부처나 뭐 달마보다 내법이 더 깊으다.

그러고 실데없는 망상을 가진단 말이여.

동중에도 일여한가 몽중에도 일여한가? 그래놓으면 다 고마 무너져버리거든? 언제 한번은 큰법당 법문을 하고 내려오니까 웬 사람 하나 수좌가 나를

보고 dorl하는게 뭐냐? 나보고 절을 자꾸했사, “와? 절을 와 하노?

” 이러니께, “아이구 스님 법문을 하시는데 고마 일언지하에 확철대오 했습니다!” “허 참 반갑네. 이 초단법칙이로구만. 그래 일언지하에 뭘 깨쳤길래 깨쳤다고 하노?”

허-마마 ! 온 천칠백 공안이 훤하다고 했싸.

그래그래 뭐 천칠백공안이 훤하고 그건 그만두고 지금 니 얘기할 때 지금도 말이지 그대로 공부가 그대로 되냐?

그만 생각해 보니 얘기할 땐 없다 그래.

“허허허! 에이 도둑놈의 자식 말이야 앙--? 니는 마 공부 깨치는게 그런 것인줄 아나? 쌍놈의 새끼 말이여!” 그래가 몽둥이로 탕!탕! 때려줬제

.“ ”임마 그것이 공부 아니야. 우찌 가다보면 우찌 뭐 망상이 좀 생기고, 어떻게하다 경계가 조끔 비친단 말이지.

그기 깨친게 아니다 말이여 응? 동정일여 해가지고 몽정일여 숙면일여 한데서 깨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깨친게 아니여.

이것은 내 법이 아니고 우리 불법근본은 거기 서가 있단 말이여

“ 그란께 당장 잘못했다고 해.

그래서 인자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을 봤는데, 그래 공부라고 하는 것은, 뭐뭐 공부하는체 하고, 뭐 묵언하고, 뭐를 하고, 묵언을 뭐, 뭐뭐.... 장좌를 했싸도 말이여 속을 보면 동정일여도 안되거든.

몽중에도 되는 사람. 내 그기 저 직접 본 사람, 뭐 거- 알았다고 하는 사람 더러 안봤어?

더러 봤는데, 몽중일여 그기 참 드물다 그말이여. 그걸 알아야되.

그란께네, 아무리 해도 우리가 인제 공부를 하면 말이지 그래도 저 선방밥을 먹을라면 몽중일여는 돼서 그 선방밥도 먹을 수 있는 것이지

저, 가사를 입고 앉았다 해도, 속은 아무 것도 아닌데 그 뭐 수좌 그 뭐 수좌 할 수 없거든?

그러니 공부의 표준이 동중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그것이 표준이 된단 말이여.

그건 내 말이 아니고 우리 불법 선가의 근본생명이 내려오는 것이니까 말이지.

이렇게 해가지고 , 이제 화두 예기를 해야 되지 말이지,

보면 마 선방에 나와 가지고 한 두철 안돼 말짱 다 깨쳐 버리고 마 말짱 자기 소견 하나 다 가진 사람 많거든 그런 병 가진 사람 쌨단 그말이여.

생각을 해봐. 속에 마, 여기 깨친 사람 안 쌨나? 속으로! 지 속으로 깨쳤다 그말이여. 바로 깨친게 아니고,

그래서 동종일여한지 몽중일여한지 숙면일여한지 그걸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여.

그 세 가지 조간에 안들었으면 깨친게 아니고 병이여.

그라믄 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거든.

말할 필요도 없는데, 그러면 인자 동종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고 그걸 말한다면 참 애를 많이 쓰야 되지 말이여

. 또 그 화두하는 방법도 잘못되면 안된단 말이여.

 

 

 

6) 올바른 話頭參究法 : 항상"어째서?"를 넣어라.

 

(그리고)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또 안된단 말이여.

역사적으로 보면 "無"字(를), 그냥 "무(無)-"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쌨거든.

"佛性이 있나 없나, 무-, 무-, 무- 무-" 하면 된다 이거라.

 

한가지(예를 들면) 어떤 원로스님이, 웬 나이 많은 노인 하나가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데,

이리 꾸뻑 졸면서 "무-"

저리 꾸벅 졸면서 "무-",

자꾸 "무-"만 하면서 이리꾸뻑 저리 꾸뻑 (졸더 라면서)흉내를 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선 만년을 해도 안돼!

자꾸 "무, 무" 하면서 꾸뻑꾸뻑 졸기만 하는데 그 病이 제일 큰 병이라.

자고로 "무-"이렇게 하라는 祖師스님네가 하나도 없었어.

 

"무-하면 그만이지 어디 딴 거 뭐 있나"하는 그런 소리 더러 들었는데,

예전 스님들이 다 말씀하시기를,

"趙州因其道無?" 조주는 어째서 無라 했나?

조주가 어째서---? (하는 식으로)

"어째서"를 장(늘) 넣으라고 했어.

 

(화두에) 庭前柏樹子니 麻三斤이니 무슨 무슨 화두, 화두가 안쌨어?

(하지만 어떤 화두를 하든지, 예를 들어)

정전백수자(뜰앞의 측백나무)를 화두로 하는 사람은

"정전백수자" 이러지 말고,

정전백수자(라고 한 이유)를 모르니까 의심이 있는데,

그러니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또 마삼근을 하면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無자를 하면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런 식으로) "어째서? 어째서?" 이걸 장 붙혀야 된단 말이여.

 

어떤 사람은 "어째서?"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러지만, 그런 게 아니야.

그냥"무-"하거나, 그냥 "정전백수자"하거나, 그냥 "마삼근"하면,

그건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된 거라.

그렇게 해서는 깊이 못들어 가.

절대 깊이 못들어 가 !

그런 사람 더러 있거든.

 

 

7) 잘못된 공부법으로 인한 病의 事例

 

그 處士 나이가 40 넘은 사람인데,

공부하다가 딱 앉아서는 定에 들어가 버리는 거라.

화두는 "무"자를 했는데,

(공부가 어떠했냐면) 처음에 "무-"하면서 이렇게 떡- 앉아 있으면 모든 생각, 모든 煩惱妄想이

다 떨어져. 그냥 무-하면 그만 定에 들어가 버린단 말이여.

定에, 그리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이거야.

 

"그래, 니 그게 공부가?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됐어"

처음엔 말을 잘 안들을려고 해.

그러니깐 그냥 "무-"하지 말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해야지,

그냥 "무-"하면 결국 無記에 빠지고 말아. 그런 일이 많이 있어.

 

또 어떤 처사는, 한 20년전에 금용사 있을 때 찾아왔었는데, 지금 살아 있으면 80이 넘었을 거라.

도리사에 가서 6년을 공부했고 어디 가서 공부를 많이 했어.

나중에 돌아 다녀 보니간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자기보다 더 크게 깨친 사람도 없어.

그래서 중(僧)도 상대하지 않고 자기가 天下第一이라.

그래 자기 語錄을 만들어서 이만큼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누구의 말이든 안 들으려 한단 말이야.

 

(그러다가)누가 " 그러지 말고 성철스님을 한번 찾아가 보라"고 그러드래.

"그분도 별수 있을까? 하지만 한번 가보지" 그렇게 해서 (나를 찾아) 왔는데,

만나보니 我慢이 충천하고---

그처사가 딱 이렇게 앉았는데,(말하기를) 이렇게 앉으면 定에 드는데,

定에 들면 한 일곱시간 여덟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언제 지나 갔는지 몰라.

그런 자기경계를 가지고 큰스님네들한테 가서 물어봐도 모른다거든?

그럼 자기가 最高다 이거야.

자기 경계를 모르니까, 그래 가지고 자기가 바로 見性했고,

神仙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으며,

대통령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나?

무엇보다 자기가 定에 들었을 때 定에 든 경계 그건 다 할 수도 없고,

또 어디 물어보니 잘 모르고,

이러니까 (남들이)자기보다 못하다 이거라, 그래 내가

"그 참 공부 많이 했구먼, (그런데) 그 경계가 꿈에도 있나,없나?"

가만히 있더니 꿈에는 없다고 그래,

(定에 드는) 그것 갖고는 꿈에(는 공부가) 안되는 거라.

 

"에이 도둑놈의 자식! 그게 定에 든 病이지,

꿈에도 없는 그게 무슨 공부라고 니가 공부라고 그래?

니 생각해 봐라.

공부라면 動靜에든지, 夢中에든지,熟眠에 든지, 一如해야지

꿈에도 없는 그것 갖고 그게 공부라고, 天下第一이라 해?"

 

그만 몽둥이로 두둘겨 줬어.

보통들 보면 定에 든다거나,

7-8시간이 눈 깜짝 할 새에 지나가 버리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지).

자기도 그렇게 알고,

(하지만 이 처사는) 공부를 많이 하고 애쓴 사람이라 머리는 영리해.

(그리고 ) 양심이 있으니까, 利害타산이 없거든?

俗人이다 보니 어디 가서 祖室 앉을 그런 생각도 없는 사람이고,

만일 祖室이나 그런 데 생각이 있었으면

또 " 꿈이 뭐꼬, 내가 熟眠一如 되는데!"하고 꿉뻑 쎄울끼라.

안된다고 하면 祖室 안해야 되니까, 그런 이헤관게가 없으니까, 양심적으로 "잘못�다"고

그래서 결국 내게 절하고 (전에 하던 화두 버리고) 화두를 새로 배워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사람도 보니까 (잘못된 원인이)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됐어.

그래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를 붙여서

(화두를) 하니까 자기가 말한 定이 안 나타난단 말이야.

자꾸 화두만 惺惺해서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하게 되면

定이 안나타나거든.

 

그러니깐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그만 딴길로 들어가 버린단 말여.

영 잘못되 버린단 말이여.

그럼 아무리 죽자고 애를 써도 헛일이여.

헛일이기만 하면 괜찮지, 도리어 병만 생기고 만다 그말이여.

 

아까 말한 고봉스님도 처음엔 그냥 "무-"했거든.

그냥 "무-무-"이렇게 3년을 해도 아무런 진척도 없고, 공부가 안된다 말이여.

그래서 자기가 出世한 뒤에는 도데체 無字를 못하게 했어.

(사람들이) 자꾸 "무-,무-" 하고 앉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首弟子인 中峰國師(말씀)이

(無字를 못하게 할게 아니라) 무자(를 참구하는) 방법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무라 했는가? (라고) 고치면 된다 이거라.

그래 이 "趙州因其道無"하는 것이,

(비록) 그전(중봉스님 이전)에는 (그렇게 했다는)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그 전에도 다 그런 식으로 했는데, 거기서 내려온 거라.

내가 특별히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래서 天下禪知識, 祖師스님들이 공부하셨던 방법이,

"정전백수자" "마삼근"이나 (그 밖의 다른) 무엇이든 할 것 없이,

언제든지 화두할 때.

"어째서"가 들어 가야지 안들어가면 공부가 안된다 이거라.

이게 공부하는 근본 요령이가든.

 

 

8) 參意와 死句라는 誤解.

 

또 그냥 흔히 "무-"라고 하든지, 그냥 "정전백수자"라고 하든지,

이렇게 하면 參究가 되고,

"어째서"를 넣으면 參意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미친소리 구먼.

 

參意니 參究니 하는 것은 나중에 깨친 사람이 깨친 分上에서 이런말 저런말 한 것이지,

공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못쓴다 이말이여.

그리구 또 그냥 "무-"하면 活句고

"어째서"하면 死句라고 하는 소리도 듣는데,

이건 活句고 死句고 참으로 꿈에도 모르는 소리야.

그럼 趙州無字 같은 것은 (예전의)여러 큰스님들이 그걸 몰라서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어째서?" 이렇게 했을까?

 

그럼 대강의 요점은 내 얘기 했으니까,

개별적으로 의심나는 사람 있으면 간단하게 얘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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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참법문 1 ; 화두 하는법

 

* 질문과 대답

 

스님1 : 화두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읍니다.

조사스님 말씀이나, 큰스님 말씀에, 화두를 들어서 동중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가 되어

가지고 깨친다고 하셨지 않읍니까?

그런데, '一超直入如來地'(즉각적인 깨달음) 라고, 그냥 한마디 듣고는, 바로 들어가시는 분들이 있잖읍니까?

 

1) 공부의 필수관문 : 熟眠一如

큰스님 ; 그래, 바로 들어가는 분이 있는데, 그건 경우가 없다는 것은 아니야.

누구든지 사다리를 (올라가듯 한 단계씩) 꼭꼭 밟고 올라가라는 말은 아니야, 아닌데,

일초직입여래지한 사람도 말이야,

동정에, 몽중에, 숙면에 一如한 그단계를 초월해 버려야 되지,

거기에 걸리면 안된다 그 말이야.

 

一超直入如來地 했다해도 熟眠에 一如하지 않다든지 하면 안된다 그말이야.

이전에 일초직입여래지했다는 스님들을 보면

모두 다 숙면에서 일여한 그 경계를 지나갔다 그말이야.

 

공부의 단계를 자세히 말하자니까 動靜과 夢中과 熟眠을 얘기했는데,

이전 스님들은 대개 뭣을 말했느냐 하면,

제일 끄트머리인 숙면일여만 얘기했거든.

 

玄沙스님같은 유명한 大道人 스님은 장 숙면일여만 말씀하셨거든.

숙면일여 밑의 (단계같은) 건 말할 필요 없는 것 아니가?

'니가 큰소리치고,니가 조사라 하고, 일초직입여래지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도 네 경계가 그대로 일여하냐?' 하고 묻거든, 알겠어?

 

그러면 일초직입여래지, 이것이 없는 건 아니야,

있지만 숙면에서 일여한 그경계에서 반드시 살아나야 되지,

그게 안되면 안된단 말이여.

자기가 아무리 크게 깨쳤더라도, (그래서) 일초직입했더라도

숙면일여가 안되면 안돼. 소용없단 말이여.

그건 쓸대없는 망상이고 생사의 근본이니 아무 소용없는 거라고

이전의 조사스님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렇다고 꼭 계단을 밟아 올라 가라 그말은 아니야.

 

어떻게 했든지 - (단계를) 밟아 올라 왔든지,一超直入, 한번에 꽉 뛰었든지 -

이랬든 저랬든 간에, (중요한 것은) 숙면에 일여한 경계를 반드시 통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이여.

그럼 알겠어? 이전에 조사스님들 치고 숙면일여를 통과하지 않은 스님은 없어.

 

사람도 여러 질이어서 고봉스님처럼 몽중일여된 뒤에 숙면일여를 통과한 스님도 있고,

그만 한번에 숙면일여를 통과한 스님도 있고,

어떤 스님은 또 (공부)하다가 몽중일여도 안되가지고 확철했다고 하는 스님도 있고,

그러니 사람이 그근기에 따라서 3段을 다 밟아 나가는 사람도 있고,

한번만에 뛰어 넘어가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결국 잠이 꽉 들어서도 一如하냐,

그게 根本이거든.

숙면에서 일여하지 못하면 자기가 아무리 크게 깨쳤다고 해도 소용없어.

또 화두하는 방법(에 의문이 있는 사람)?

 

2) '이 뭣고? ' 화두의 바른 參究法.

 

스님2 : 저는 '이뭣고?'를 잡고 있읍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것이 무엇인고?'하면, 이것이 잘못된 데는 없읍니까?

 

큰스님 : 그런데, 내 '이뭣고?'하는 사람 참으로 많이 봤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 아니가? 니 이화두한지 몇 해나 �노?

스님2 : 3년---

 

큰스님 : 3년 돼? 어떤 사람은 오래해도 안되는 사람 봤어.

그러니까 '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무엇인고,이것이 무엇인고? ' 이러는 것이,

아까 말한 그 처사라는 사람이 '이뭣고?'를 했어.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이것이 무엇이고?'하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앉아 있는 식이 되버렸어, 그만.

이런 식이 되어 가지고는 그만 定에 들어가 버려.

그런 사람 많거든.

이러한 病廢가 따르는 수가 있고.

또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러면,

보고 듣고 하는데 따라서,경계에 따라서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이냐?

(하게 되어) 산만해 지는 병폐도 붙게 되거든, 알겠어?

 

그래서 이병폐 저병폐를 없애기 위해,

예전 조사스님들은 어떻게 장 주장했냐 하면,

 

" 마음도 아니요,물건도 아니요,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이뭣고?'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하라 했어!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란 말이여, 그럼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면) 경계를 하나 잡아 갖고 (이뭣고--? 하면서) 들여다 볼 수도 없고, 경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따라 갈 수도 없고,

그런데 한 20년 '이뭣고?'를 하다가 내버리는 사람 더러 봤어.

자꾸만 '보고 듣고 하는 이건 무엇인고?--' 하고 따라 다니다 보니까 자꾸 산만해 지고,

그만 안된다 이거라.

 

보고 듣고 하는 '이것'만 바로 알면 그만이야.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이나 물건이나 부처나 이런 걸 바로 알수가 있는데 말이여.

(화두하는)방법에 있어서는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자꾸 산만해 진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이뭣고?'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뭣고를 아주 내버리지는 마라' 하는 소리는 잘 안하거든.

아까 그처사처럼 (오래도록 해서 病이 깊은) 그런 사람 한테는 아주 완전히 내버리라고 하고,

완전히 딴 화두를 가르쳐 줬는데,

(너는)아직 初學人이고 하니, (방법을 바꾸어서)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해보면,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하는 것과는 좀 달라.

그럼 내 말 알겠나?

 

 3) 호흡과 화두

 

스님3 : 저는 無자를 드는데요, 호흡에 맞춰서, 호흡을 가늘게 하면서 들이 마시고 내쉴 때---,

 

성철스님 : 그래, 화두를 하는데 흔히 뭐  호흡을 하느니 丹田을 觀하는니 하는 그런 사람 있거든?

그런데 丹田을 觀한다는 것은 上氣가 나서 머리가 아파 공부를 못 할적에 일이고 알겠어?

丹田을 觀하면 좀 내려 가거든.

 

(하지만) 丹田, 그것도 上氣가 되게 나면 머리가 더 아파 버려.

혹 病과 관련해서 丹田을 觀하고 그러는데,

본래호흡하고 화두(참구법)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라.

 

자기 몸뚱이도 잊어 버려야 되는데,

호흡에 맞추고, 丹田에 맞추고 그러면, 話頭에 專念이 안돼,

(上氣가 되어서) 머리 아파 못하는 사람은 할 수 없어서 丹田으로 하는데,

그것도 나중에 上氣가 너무 심해지면, 더 아파 버려!

내 그런 사람 더러 봤어.

그래서 영원히 공부 못하게 되는 사람 쌨거든?

 

화두할 때 누구든지 그런 病廢가 없으면,

호흡에 맞출것도 없고,

단전에 맞출것도 없고,

다만 화두만 생각해 보란 말야,

어째서 무라 했는지 그것만 생각해야 돼.

 

어떤 사람은 호흡을 이래할 때 이래하고 저래 할 때 저래하고,

그런 소리 더러 하거든,

그런 거는 본래 禪門에서는,

祖師門中에서는 배척하는 거라, 호흡이고 그런 거는.

화두만 하는 거라 알겠어?

이 생각 저 생각하지 말고 화두만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야 되는 거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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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本來面目' 화두의 바른 참구법

 

스님 4 : 저는 ' 父母未生前本來面目' (네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 너는 원래 어떤 것 이었나?)화두를

드는데요

성철스님: 어떻게 안되드노?

 

스님 4 : 부모한테서 몸 받기 전에는 내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잡고 있읍니다.

성철스님 : 내가 뭐였든가? 개였든가, 짐승이 었든가 사람이었던가? 허허!

그래 ' 父母未生前' 같은 것도,

그냥 "뭐였든가?" 이러는 것 보다도,

어떤 것이 너의 本來面目이냐 (如何是汝本來面目고)?" 이렇게 묻거든, 알겠어?

 

우리 六祖스님도 道明스님 보고 물었거든,

善도 생각하지 말고 惡도 생각하지 마라(不思善不思惡하라).

바로 이러한 때에(正與摩時에)

어떤 것이 너(明上座)의 本來面目인고?(如何是明上座의 本來面目고)?"

이렇게 물었단 말이여.

 

本來面目(화두)가 거기서 시작됐고,

(그 뒤로) 예전 스님네가 더러 본래면목을 물었는데,

어떤 것이(如何是) 하는 이것이,

"어째서?"하는 것과 같은 식이라.

니 말하는 것은 좀 틀리는 것 같네? 니 뭐라 했노 금방?

 

스님 4 : 부모한테 몸 받기 전에는 나는 뭐였는가?--

성철스님 : "뭐 였는가?" 그것도 통하긴 통하는데,

그럼 소였든가 개 였든다? 이렇게 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냔 말이야.

알겠지 그 소리?

그러니 그렇게 하지마!

"그 뭐였든가?" 이렇게 하지 말고,

"어떤 것이 나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냐? 어떤 것이, 어떤 것이?"

"어떤 것이"를 잊지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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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趙州無字 화두 참구법

 

스님 5 : 趙州無字를 드는데요, 아예 의심을 내기 위해 "無字의 意旨는 무엇일까?"

하고 疑心을 냅니다.

성철스님 : 그런데,

無字의 意旨는 무엇일까? 이렇게 해도 아주 나쁜 것은 아닌데,

"趙州意는 作摩生고?"하는 것도 있거든?

나쁜 것은 아닌데, 화두 할 때는 그냥 "無字 意旨는 무엇일까" 이러지 말고,

조주가 無라 했는데,어째서 無라 했나?

자꾸 이렇게 하는 게 화두하는 근본정신이야.

 

또 흔히 "一切含靈이 전부 다 부처님은 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趙州는 어째서 개는 佛性이 없다고 했나?" 이렇게 많이 하는데,

그러면 疑心 생기기가 天下 쉽지.

하지만 이렇게 하면 有無 相對가 되어 버린단 말이여.

 

그런데 趙州의 無라는 것이,

예전 스님도 하신 말씀이 "有無의 無도 아니며 眞無의 無도 아니다.

(不是有無之無이며 不是眞無之無니라) (라고 하셨으니)

有無를 가지고 따지면 話頭가 깨져 버린단 말이여.

 

그러니깐 그 有無를 떠나서,

"조주가 분명히 無라 했는데, 어째서 無라 했는지 그이유를 알아라, 이거야.

有無고 相對고 (유무를) 떠난 것이고 할 것 없이,

조주가 無라고 한 이유는 분명히 안 있나 이 말이여.

알아 듣겠어 그소리?

그러니 "그 뜻이 무엇인고?" 이렇게 되새기기 보다도

조주가 無라 한 이유를 모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그렇게만 자꾸 해나가야지,

"그 無의 뜻이 무엇인고?" 하고

자꾸 분석하는 식으로 하는 건 좀 덜 좋은 거라.

(다만)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만 하면 좋단 말이야.

그래 또 그 옆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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