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의 진리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
즉 무상(無常)의 진리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른다.
어느 한 순간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변한다는 진리를 멈출수는 없다.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그렇듯 끊임없이 변화해 가기 때문이다.

고정된 진리는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할 뿐.
변화한다는 그 사실만이 변치않고 항상할 뿐.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우리 자체가 곧 진리의 몸이 되어 버린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는가.

변화한다는 진리,
무상이라는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면 된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그 흐름을 벗어나려 하지 말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변화는 진리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진리다운 현상이다.
그러니 변화를 붙잡으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은 두렵다.
변하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지위, 가족, 친구, 사랑......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는 곧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도된 망상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변화’한다는, 무상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지속’과 ‘안주’를 바란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변화만이 있을 뿐.
변화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온전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끊임없이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언젠가는 변하고 만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의 본연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이란
바로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나만 변치않고자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모두가 변화하는데 나는 변하기 싫고,
다 변하는데 내 것은 영원하길 바라며
내 생명, 내 소유, 내 사랑, 내 사상은 영원하길 바란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대로 두라.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붙잡아 두려고 노력하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한다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냥 놓아두라.

그 흐름에 들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이
‘변치않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다만 흐르도록 놓아두라.
변화하도록 그대로 두라.

‘나’라는 것도 붙잡지 말라.
‘나’도 끊임없이 변화할 뿐,
거기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안주할 내가 없다.

이 세상은 그냥 놓아두면 스스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그 때에
있어야 할 곳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는 뜻이다.

법계는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도 잡지 말라.
깨달음 또한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안주할 것이 없는 것, 항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깨달음은 잡았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놓았을 때 온다.
깨닫고자 애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조차 완전하게 쉴 때 온다.
깨달음 속에 안주하려 들지 말라.
안주하는 순간 깨달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느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대로 놔두라.

변화는 진리이니 그것을 따를 일이지
그것을 내 고집으로 붙잡고자 하지 말라.

이렇게 단순한 것이 불법이다.
단순한 진리를 공연히 머리굴려 어렵게 만들지 말라.
단순한 것은 단순하게 놓아두라.

그저 푹 쉬기만 하라.
푹 쉬면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함께 따라 흐르라.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놓아두라.
그저 놔두고 푹 쉬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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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法性偈)/법륜스님

(1)두 가지 모양없는 존재의 참모습

법성게는 불/법/승 삼보 중 법보(法寶)에 속하고,
경/율/론 삼장 중 논장(論藏)에 속합니다.
논장에는 대승의 논장과 소승의 논장이 있는데
법성게는`대승의 논장`입니다.
그 이유는 법성게가 대승경전인[화엄경]을
기본 경전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장(論藏)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쉽게 전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하거나 주석을 단 것 중에서,
그 시대의 붓다라 할 만한 선지식의 글을
논장이라 하여 法과 같이 취급합니다.
법성게는 이런 `논장`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이 「법성게(法性偈)」는 신라의 고승인 의상 조사께서 쓰신 글이지요.
7字로 이루어진 30구절, 그래서 총 210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그 양이 방대하고 내용이 깊다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을 축약해서 그 진수를 뽑은 글입니다.

불교는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경전이 있는데,
크게 소승 경전과 대승 경전으로 나누지요.
대승 경전은 방등부와 반야부, 법화 열반부,
그리고 화엄부의 넷으로 나누는데,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직후 설하신 경전이 이 화엄경입니다.
대중의 근기에 맞게 방편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3·7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바를 그대로 설하신 것이지요.

이 대방광불화엄경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본,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본,
그리고 반야가 번역한 40권본이 있는데,
법성게는 의상 대사께서 60권본을 모본으로 해서 축약해서 쓰신 글입니다.

중국에 화엄경이 들어오면서 많은 화엄행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서 화엄종은 독립적인 하나의 종파로 성립한 것이지요.
화엄종의 2대 조사로 지엄 화상이 계셨습니다.
의상 조사께서 중국에 건너가서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지엄 화상입니다.
동문으로 같이 공부하신 분이 현수 대사입니다.
이 현수 대사는 중국 화엄종의 3대 조사로서
화엄종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큰 공로가 있으신 분인데,
그 분께서 오히려 의상 조사를 높이 받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의상 조사께서는 그 내용이 깊고 복잡한 화엄경을
완전하게 이해하셔서 그것을 이 짧은 시구 속에 다 담았을 뿐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는 법계도(法界圖)에 210자로 딱 맞추어
그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법`이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성품`은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어서, 존재의 참모습,
진리를 노래한 것이 바로 `법성게`라 할 수 있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법의 성품, 존재의 참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노래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법성이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고,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며 이름도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으니
이것은 깨달음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지요.
또 성품은 극히 미묘하여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법의 참성품,
본래의 성품은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가 보는 세계,
우리가 보는 존재의 모습은 어떠냐?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모양이냐? 존재는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의 행동에는 착하고 나쁜 것이 있고 빠르고 느린 것이 있고,
선한 행위 악한 행위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을 봐도 그래요.
옳고 그른 생각이 있습니다.
또 존재의 모습에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어요.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고,
신령스럽거나 신성시 여기는 것이 있는 반면
보거나 만지기만 해도 부정 타는 깨끗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풀에도 약이 되는 것이 있나 하면 독이 되는 것이 있고,
큰 것 작은 것이 있고,넓은 것 좁은 것,
늘어나는 것 줄어드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법의 성품, 존재의 참모습은 두 모양이 없다 하니,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정반대 얘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지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을 말하지요.
불변하는 이치, 존재의 참모습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상식을 가지고 삶을 살고,
그 상식을 보편 타당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
남과 사회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상식은 옳다고 고집할 만한 불변의 진리인가,
아니면 한 단편적인 생각이고 주관인가.
하나의 주관이라면 그 상식을 잣대로 삼아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겠는가?
그렇다면 지혜롭게 사는 삶은 무엇이고
존재의 참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이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얼음 한 덩어리가 있어요.
세 살 먹은 아이에게 얼음으로 구슬을 만들어 돌구슬이나
유리구슬과 같이 주면 어린이는 같은 구슬이라 생각할 겁니다.
얼음 구슬을 포함해서 다섯 개의 구슬을 주면
아이는 자기 구슬이 다섯 개라고 알고 그릇에 담아 놓아요.
그러다가 밖에 나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다가
한참 만에 방안에 들어왔더니 구슬이 네 개밖에 없어요.
아이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구슬 하나가 없어졌어. 사라졌단 말이야."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그런데 누가 물을 부었지?"
구슬이 사라지고 물이 생겼다.

즉 아이가 얼음이 사라지고 물이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은
얼음 따로 물 따로 각각의 존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얼음이나 물이라는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얼음과 물이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얼면 얼음이 된다는 걸 어른들은 알지요.
얼음 구슬이 사라지고 누가 밖에서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
얼음이 물로 변했을 뿐,
단지 이 모양에서 저 모양으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사물을 조금만 관찰해도 무엇이 생기고
사라졌다는 말은 사실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이나 순간에
한정되었을 때만 맞다는 걸 알 수 있죠?

또 존재의 참모습은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아니에요.
같은 떡집에서 떡을 만들어서는 주문한 곳에 배달 갔는데,
한 곳은 절이고 한 곳은 초상집이었어요.
그래서 떡을 똑같이 썰어서 얹어놓았는데,
부처님 전에 올렸던 떡은 신성함이 깃들어 있어 먹으면 재수 좋고,
초상집에 올려놓은 떡은 먹으면 재수 없어
부정 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면 떡 속에 정말로 신성하고 부정한 것이 있을까?
떡 자체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요.
생각을 일으켜 모양 짓는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켜서 더럽다 깨끗하다,
신성하다 부정하다고 모양을 짓는 거지,
실제의 존재 그 자체에는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 놓아 버리면 신성한 것도 부정한 것도 아니니까
부정 탈 아무 일도 없지만,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그것을 하면 재수 좋고 또는 부정 탄다는 논리가 생겨나게 되요.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그들 관념 속에는 소는 여자보다도 더 좋은 업을 가졌다고 봐요.
그래서 여자가 죽으면 다음에 뭘로 태어납니까?
소로 태어나고,
그 다음에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쇠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교도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해요.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게 되면 몸이 더럽혀져서
좋은 곳에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강제로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그 사람들에게 먹이면 죽는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밖에서 보면 소가 신성한 것도
돼지가 부정한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일으킨 생각이나 관념이지
실제의 소나 돼지 자체는 신성한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이지요.
또 깨끗하고 더러운 것, 아름답고 추한 것도
정말 그 자체에 아름답다거나 추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맛 같은 것은 어떨까요?
전라도에 가면 홍어를 잡아서 푹 썩혀 놓은 음식이 있죠.
그 냄새를 맡으면 그 곳 사람들은
우와, 참 잘 익었다! 이래요,

익숙치 못한 우리가 냄새 맡으면 막 구역질이 날 정도인데 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징어 냄새나 청국장 냄새 좋아하죠?
미국 사람들은 그 냄새 맡으면 코 막고 야단법석입니다.
우리가 인도 가서 인도 카레 냄새를 맡으면
비위 약한 사람들은 먹었던 게 올라옵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은 한국에 와서 제일 못 맡는 게 뭐냐?
된장하고 김치 냄새입니다.
그런데 아프다가도 자기들 카레 한 그릇만 먹었다 하면 병이 탁 나아 버려요.
실재하는 존재 그 자체에 아름답고 추하다든지,
맛있고 맛없는 게 있어요?
우리의 습관, 관념에 따른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그려진 자기 관념이나 습관은 객관적일 수가 있어요?
주관적입니다.그런데도 이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절대화해요.
마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양 말이지요.
이 경우 우리가 알고 있다 하는 게 뭐냐?
전도 몽상된 것이지요. 잘못 알고 있다 이 말입니다.

가정 문제도 그래요.
직장 생활하는 거사님의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퇴근하려 하는데, 친구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말을 듣게 됐어요.
그래서 친구를 위로하고 돕기 위해 그 집에서
이야기도 해 가며 같이 보내 줍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옆자리에 근무하던 회사원 하나가 또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 해요.그래서 또 병문안 갑니다.
그 다음날은 누구 이사하는데 도와 주러 가.
그러면 사람들은 "이야~, 그 친구 진짜 보살이야, 보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지만 집에 가면 부인은 뭐라 그래요?
"정신 나갔어, 당신?" 이렇게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국에서 `깨달음의 장` 수련을 진행하는데,
저녁 8시에 입재하기로 한 보살님 한 분이 참가한다 하고는 안 와요.
30분 이상을 기다리니까 오셨는데,
이 분이 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자기는 결혼 생활 15년에
아직 한 번도 남편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당신 참 고집이 세군요. 하니까,
자기는 고집이 안 세다는 겁니다.
결혼 15년에 잘못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남편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게 왜 고집이냐는 겁니다.

그런데 `장`을 진행하기 전에 차에서 부인을 내려 주면서
그 남편이 저보고 저쪽으로 좀 가자고 그러더니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스님, 여기 와서 며칠 있다 가면 사람됩니까? 이러더라고요.
며칠 있으면 사람 되는지 물어보고 갔는데,
본인은 15년 동안 잘못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했어요.

조금 범위를 넓혀 사회적으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비를 가릴 때는 그 기준이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그 기준이 뭐냐?
그 나라의 윤리나 법 이런 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나라마다 다 같아요? 다 다릅니다.
같은 나라에서도 시대나 세대마다 다 달라요.
조선 시대에는 보통 십육칠 세가 되면 결혼했어요.
그래 여자가 스무 살이 넘으면
어휴, 노처녀가 되서 이젠 시집가기 글렀네. 라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스무 살짜리가 시집간다 하면 뭐라 합니까?
아니 저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벌써 남자 맛을 알아?
이렇게 말한다 이겁니다.

조선 시대에는 여자가 결혼식 올리고 첫날밤도 같이 자지 못하고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해도 그 집에서 살아야죠.
살지 못하고 딸이 친정으로 오면 친정에서는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고 호통치고는 시집으로 되돌려 보냈어요.
그래도 또 오면 `나쁜 여자`가 되고 제발 정신 차려
거기 붙어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서른이 되어 시집가도 그것도 1년 산 것도 아니고
3, 4년씩 살다 남편이 죽고 혼자 있으면 뭐라 그래요?

아직도 나이가 서른이라 앞날이 창창한데 왜 거기 사냐고?
그래도 집에 안 오고 그 집에 붙어 있으면 부처님한테 기도하죠.
`아이고, 저것이 미쳐서 저기 붙어 있는데,
제발이지 정신 차려서 다시 시집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요.
부처님이 어떤 기도를 들어 주어야 할까요.

동성 동본 문제도 그렇죠.
조선 시대에는 동성 동본인 남녀가 같이 결혼하면 짐승 취급했죠.
그런데 신라 때는 어땠어요? 왕족인 `성골`은 오히려
다른 성을 가진 사람하고 결혼하면 피가 섞였다,
더러워진다 해서 순수하게 자기들끼리 결혼하면 순종인 성골이라 하고,
한 번 섞이면 진골이라 해서 계급을 한 단계 낮추어 차별했어요.
그래서 `존재의 참모습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마음이 망념을 일으켜 만 가지 모양을 만들 뿐이지요.

법성계

법의성품 원융하여 두모습이 아니로세

모든법은 부동하여 본래부터 고요한데

이름없고 모습없어 모든것이 끊어지니

깨달아야 아는바요 다른경계 아님이라

참된성품 깊고깊어 지극히도 오묘하니

자기성품 지키잖고 인연따라 이뤄지네

하나속에 일체있고 일체속에 하나있어

하나가곧 일체이고 일체가곧 하나이네

작은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네

셀수없는 오랜세월 한생각   찰라이고

한생각   순간속에 무량세월 들어있네

구세십세 무량세월 걸림없이 상응하나

혼란하지 아니하고 서로가   뚜렷하네

초발심의 그순간이 바른깨침 그자리고

나고죽음 열반피안 서로같은 모양일세

이치현상 은은하여 분별할수 없음이여

열부처님 보현보살 대성인의 경계일세

부처님의 해인삼매 선정중에 깊이들어

부사의한 여의진리 마음대로 나투시고

중생위한 감로비가 허공중에 가득하니

중생들은 근기따라 모두이익 얻어지네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래자리 가고자면

망상심을 쉬지않곤 아무것도 못얻으리

분별없는 좋은방편 마음대로 취할지니

고향갈제 분수따라 노자를   얻는구나

신령스런 다라니는 한량없는 보배이니

온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어서

진여실상 중도자리 오롯하게 앉았으니

옛적부터 변함없어 이름하여 부처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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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모든 것은 무상해서 이것은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행(行)이란 12연기에서 첫째인 무명 다음에 오는 행입니다.

행은 신/구/의 삼행이 있죠.

몸의 행위, 입의 행위, 뜻의 행위!

 

이 세가지가 모두 다 무상하다는 의미입니다.

 

무상(無常)이란 영원함(항상함)이 없다는 뜻 입니다.

쉽게 말하면 변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다 변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가 다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왜 변하는지를 알아야하죠.

 

고정불변의 독립된 영원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변합니다.

조건으로 발생된 것은 결국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독립된 실체가 없죠.

 

그래서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삼법인 중에서 첫째입니다.

또는 사법인을 말하기도 하는데 사법인 중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첫째입니다.

 

부처님은 세속적인 진리(속제)와 절대적인 진리(진제)로 구분해서 설법하셨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세속적인 진리에 속합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속제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적용됩니다.

진제란 속제의 그 이면을 말합니다. 열반을 의미합니다.

속제의 본체가 바로 진제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절대적인 진리....즉 진제가 아닙니다.

진제에는 먹히질 않죠.

 

무상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것은 단멸론입니다.

 

만약 영원하지 않다면 사후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후세계가 있죠.

또한 죄를 지어도 뒷세상에 그 죄를 받지 않는다는 걸 말합니다. 말도 안되죠.

또 영원하지 않다면 윤회도 역시 불가능한겁니다. 윤회는 이어집니다.

이런 오류가 있는거죠.

 

무상은 그렇기 때문에 절대 진리가 아닌겁니다.

 

열반도 무상하다면, 그것은 열반이 아닌게 됩니다.

고로 무상이란 진제에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법인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첫째로 부처님께서는 넣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절대 진리가 아닌데, 왜 제행무상을 속제의 첫번째로 넣으셨을까?

 

답은 중생의 전도몽상을 깨버리기 위한 것 입니다.

중생은 모든 것이 다 영원하다라는 영원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하는것이거든요.

모든 것이 영원하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집착하는겁니다.

 

그래서 가장 최우선으로 이 영원하다라는 고정관념/전도몽상을 박살내야만 합니다.

이런 이유로 무상이 삼법인 중에서 첫째입니다.

 

불교를 배울 때 그래서 가장 먼저 깊게 고찰해봐야 하는 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라는 이 무상을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속제이지 절대 진리, 즉 진제가 아닙니다.

삼법인(三法印)에서 법인(法印)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의 뜻은

영원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인!

내가 있다는 데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내가 아주 없다는데도 집착하지 않는 걸 말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진제와 속제로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부처님 법을 깨부술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은 절대적인 진리인 空을 이해하고 깨닫는게 목적입니다.

해탈이란 결국 空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래서 순서가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고-->무아-->空-->무소유-->염-->무욕-->해탈-->해탈지견

 

제행무상(諸行無常)!

이거 이 세상을 잘 살펴보면 절대적으로 맞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니까요.

 

근데 모든게 영원한 줄 압니다.

깊게 관찰을 하지 않아서 그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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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 (諸行無常)일체유심조(一切唯 心造)

 

* 사법인(四法印)

 

° 제행무상(諸行無常) : 일체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화하고 유전 상속한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 일체 모든 법은 인연법에 의해서 모이고 흩어지므로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

 

° 열반적정(涅槃寂靜) : 모든 중생이 개시허망을 알아서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이 최상의

 

경지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주재자(主宰者)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의 모든 것은 다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이기에, 모든 것(諸法)은 시간적으로는 무상(無

 

常)하고,공간적으로는 무아(無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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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光返照( 회광반조)

回:돌아올 회光:빛 광返:돌이킬 반照:비칠 조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추다

회광반조라는 말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는데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욕심에 끌려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다가
죽을때가 임박하면 온전한 정신이 한번생기고 바로 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지나온 자기 일생을 돌아보며 반성한다는 의미이다 .

촛불은 다 타서 꺼지기 직전마지막으로 한번 확 타오르고
태양은 지기 직전에 화려한 색깔을 내뿜고
사람도 늙어서 죽기직전에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이걸 불교의 선종에서는
“자기밖의 욕망을 향하는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돌이켜서 자성을 직시한다”는
의미로 가다듬어 선의 방법론을 삼기도 하였다

일거수일투족이 내게서 비롯되는 것으로
일거수일투족이 마음 아닌 것이 없음이라
일상의 모든 것을
안으로 돌이켜 보는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할 때, 생각함을 알고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말함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언행을 알면 바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수행이 깊어져 닦을 것이 없으면
행 이전에 행을 알아 그르칠 일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화를 내면 화를 냄을 알고, 알면
그 화가 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일인줄 알아
화를 다스릴 것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일 없이
매사를 여여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이 아닌 타인의 언행을 볼 때도
누군가 그릇된 언행으로 주변의 눈쌀을 찌뿌리게 하면
그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지기 보다는
자신의 언행을 먼저 살펴 보는 것이다
자신은 어떠한가? 자신의 언행을 살펴보는 것이다

누군가 슬픔과 고난에 처했을 때도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보고
상대의 마음과 하나되는 슬픔으로
상대를 가슴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보고듣는 일상사를
내 일이 아닌 양 무관심하거나
남의 일로 치부하여 업수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 회광반조로서 역지사지하여 타산지석 삼는 것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내 허물을 먼저 보고 바로하는 것이다

 

 

① 회광반조 (回光返照)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밝은 생명자리 자신 잃지 않고 상황에 깨어 있어라

우리의 시선은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밖을 향해 헐떡이다가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신이 어

 

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상황과 대상에 끌려간다. 또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너무 긴장하여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굳어지는 순간에 허둥대며 곤경에 빠지곤 한다.


“스스로 돌이켜 비추어 보라”

그렇다면 어이할 것인가? 그럴 때는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밖으로 향하지 않고 자

 

신을 돌이켜비추어 보는 것을 선에서는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한다.

임제 선사는 말한다.

 

“그대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스로 돌이켜 비추어 보라. 다른데서 구하지 말지니, 그대 몸과 마음이 조사님

 

이며 부처님과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爾言下便自回光返照, 更不別求, 知身心與祖佛不別).”

 

《임제록(臨濟錄)》주변으로부터 나를 자극하는 어떤 말을 듣는 순간,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순간, 그 말과

 

상황에 사로 잡혀 허둥대거나

 

안절부절 말고 자신을 조용히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돌이켜 자신을 비추어보면 이리저리 날뛰던 마음이 멈

 

춘다.

우리 내면에는 때 묻지 않는 부처님 성품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진리 그 자체, 본래 모습, 신령

 

스러운 당체라고도 한다. 선에서는 우리 모두 본래 성불해 있다고 선언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보는 순간,본래 부처님 자리에 들어서게 되므로 감각의 부림이나 온갖 장난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성가신 소리, 정신 나간 소리, 화나는 소리를 듣고 마음

 

이 불같이 달아오르거나 맥 빠진 사람처럼 의기소침해 진다. 시비와 선악, 호오와 미추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혼비백산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렇게 허둥대면서 자신의 학대하고 남을 원

 

망하며 녹슬어간다.

경계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그러나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자신의 따스한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내면에

 

간직된 보물,영원히 녹슬지 않는 금덩어리가 자신임을 보고 그 순간 경계의 파도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다.

 

내면을 직시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그 고요한 마음속에서 활로를 모색한다.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출렁거리지 않고 세상을 차분하고 징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어렵지 않다. 자신을 돌이켜 보기면 하면 된다. 돌이켜 보는 순간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난다.

《능엄경》에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나온다. 소리를 듣는 성품을 다시 들어보라는 의미다.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다시 돌이켜 비추어 본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를 듣는 나가 있고, 그 어떤 소리를 듣는 나를

 

다시 들여다

 

보는 나가 있

 

다. 노래하고 소리치는 나가 있고 그렇게 노래하고 소리치는 나를 돌이켜 보는 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를 듣는 나는 외부 조건에 따라 오락가락 반응하는 나이다. 겉마음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나

 

를 돌이켜 보는 나는 오락가락하는 나가 아니다. 내면에서 파릇파릇하게 숨 쉬고 있는 진정한 나이며 본마

 

음이다. 그 본마음을 찾는 것이 선이다.

 

 

차별·분리의 아픔·경계는 없다

우리는 회광반조를 통해서 그 진정한 나와 만난다. 그 고요한 순간, 그 정적의 순간에 나는 너와 세상과 하

 

늘과 함께한다.

 

거기에 차별과 분리의 아픔과 경계는 없다. 바로 그 자리에 서면 우리는 소란스러운 외부 경계에 자신을 잃

 

어버리지 않고 상황에 깨어 있게 된다. 어떤 소용돌이에도 함몰되지 않고 호수처럼 맑은 정신으로 숨 쉬게

 

된다.

화두를 들 때도 회광반조하는 방법이 있다. “이 뭣고” 할 때 “이 뭣고” 하며 묻는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

 

이다. 나를 돌이켜 보며 도대체 “이 뭣고” 하면서 묻는 이놈은 무엇인가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화

 

두 의심을 지어간다. 나를 움직이는 이놈, 과연 이 당체는 무엇인가 하고, 의심을 일으키는 순간, 그 순간 모

 

든 판단과 생각의 작용이 사라지고 무념, 무아의 자리에 동참한다. 바로 그 자리에 모든 경계와 시비를 떠난

 

본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임제선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바로 돌이켜 비추어보는 그 자리가 부처와 조사의

 

자리니 달리 다른데서 찾지 말라고….

밖의 조건에 허둥대지 말라. 돌이켜 자신을 비추고 자신을 보라.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명징하고 투명한 시

 

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파도가 자고 비바람이 멈출 것이다.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선명하게 밝아지는 것도 회광반조라 말하기도 하나보다. 회광반조

 

란 그렇게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밝은 생명자리다.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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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사상의 이해

근본불교의 이해


근본 가르침은 부처님이 직접 가르친 것으로, 또한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것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 없이 그대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본 가르침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세계와 인생의 현상적 존재에 대해서만 매우 합리적인 고찰을 하였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여러 교리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연기설(緣起說)이며, 연기설의 응용 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삼법인(三法印), 오온, 십이처, 18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한 경전의 기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결국 연기(緣起)의 자각이 그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를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 가르침들은 모두 연기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연기의 의미를 아는 것이 불교의 사상 그 자체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기사상은 초기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초기대승, 중기대승에 있어서도 항상 불교의 중심문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기대승은 물론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발전한 불교에서도 각각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고찰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연기는 이치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여래가 이 세상에 나타나건 나타나지 않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이 연기의 법칙이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던 간에 진리로서 변함없는 것으로,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즉 연기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만약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면 곧 여래(부처)를 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연기를 법이나 부처님과 동일하게 간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서, 인연이란 조건이나 원인을 가르키는 말로서 인은 '직접적인 원인'을 가리키고 연은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연기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현상이 일어나는 이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과법, 인연법, 연생연멸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연기의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하나의 글귀를 들 수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어떤 것을 연(緣)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상주불변(常住不變)의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기설이란 모든 존재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고 다른 것이 어떤 것의 결과가 된다고 하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연기의 정의를 나타낸 구절 중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말은‘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연기의 관계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무시간적, 논리적 관계와 함께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가 고려되는 것이다. 연기설은 세계 인생의 일반적인 생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가 말하여진 본래의 목적은 단순한 일반적 현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고뇌가 어떠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어떠한 인연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가 하는 인생의 고락운명에 관한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이 문제되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악업과 그 과보로서의 고락과 같은 윤리 종교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연기의 인과관계에는 과거세로부터 현재, 미래 세에 이르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업보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불교의 근본주장은 크게 연기설로 일관된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고찰의 각도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설을 협의로만 이해하여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선후가 있는 인과 관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에 관계없는 논리적인 연기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연기라고 부르지 않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따라서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론과 실상론이 대립하여 양자는 별개의 교학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졌다.

십이연기

연기란 일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이지만, 부처님에 의해 자각된 이러한 연기설이 당시 인도 사상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불전(佛傳)에 의하면 부처님은 출가한 후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근교에 있던 알라라 카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 밑에서 선정을 하였지만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부처님은 다시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의 고행림(苦行林)에 들어가 모든 고행을 다하였지만 이것에 의해서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란자라 강물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먹고 몸과 마음을 회복한 후, 이윽고 보리수 밑에서 스스로 선정에 들어 정각을 얻어 불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부처님이 정각을 얻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버렸던 당시 철학이나 종교는 크게 바라문계와 육사외도 등으로 대표되는 사문계의 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바라문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이라고 한다. 바라문계 사상에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바라문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바라문이 자기자신을 전개시켜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한다. ‘일체는 바라문이다’라는 주장은 우파니샤드에서 자주 설해지는데 이러한 근본원리로서의 바라문은 개인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아트만과 동일시되고 점차 정신적 원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그러므로 전변설은 절대 유일의 정신적 원리가 전개하여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가 성립된다고 설하는 주장이다.

이 시대에는 종래의 바라문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가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육사외도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자유사상가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육사외도라 불려지는 사문들 가운데 아지타 케사캄바린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한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모든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다. 파쿠다 캇차야나는 7요설을 인정하였고, 막칼리 고살라는 살아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 12가지 원리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적취설(積聚說)이라고 한다. 이 적취설은 바라문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 있어서의 연기는 보편적인 법칙성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철학설로서 논의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인생의 괴로움에 번민하고 있는 인간의 문제로 설해진 것이다. 연기는 ‘무엇을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뜻이지만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났다고 하는 존재의 성립을 설할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 괴로움에 얽매인 인간 존재 또한 문제삼고 있는 것이며, 현실의 존재는 항상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된 것이라고 함은 곧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문계의 전변설이나 사문들의 적취설에 비해 연기의 입장은 세계관 적인 면에서 양자를 초월한 보다 높은 입장, 종교적 면에서 볼 때 깊은 실천적인 입장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있어서 연기는 항상 인간의 미혹과 깨달음을 문제로 설해지는데 보통 십이연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십이연기는 십이인연(十二因緣),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한다.

십이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십이지(十二支) 각각의 의미를 주로 경전 자체의 설명에 근거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무명(無明, avida)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行, samskara)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 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이 있다. 행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의 형태로 남게 된다.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 vijnana)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써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식이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꽃을 볼 경우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namarupa)이 있다.

명(名, 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 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식이 주관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는 데 반해 명색은 그 대상인 객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이 있다.

육입이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心]의 6가지 감각기관, 즉 육근(六根)이다. 이는 대상과 감각기관과의 대응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육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觸, sparsa)이 있다.

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촉(觸)에도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 6가지의 감각기관에 의한 육촉(六觸)이 있다. 촉은 육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육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육입(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 vedana)가 있다.

란 즐거운 감정, 괴로운 감정,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愛, trsna)가 있다.

란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보통 목이 타서 갈증이 나면 오로지 물을 구하기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충동적 욕망을 말한다.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取, upadana)가 있다. 취는 집착의 의미로서 인간의 미혹한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 것이다. 맹목적인 애증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有, bhava)가 있다.

(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 어렵다. 업설에 의하면 집착 때문에 업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有)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取)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生, jati)이 있다. 업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老死, jara-marana) 등 여러 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苦) 즉 근심, 비애, 고통, 번뇌, 번민이 발생하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계속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즉 순관은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流轉) 연기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苦)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還滅) 연기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써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법인(法印)이란 법의 규범이 되는 표식(標識)이라는 말이다. 삼법인은 불교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깃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상,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제행무상

제행(諸行)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무상(無常)은 anita 를 번역한 말로써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은 외견상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모여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고정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도 무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제법무아

제법(諸法)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고, 무아(無我)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我)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변적인 존재인 실체 또는 본체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는 비실체적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고정 불변한 실체적인 아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제법무아라고 해서 현상적인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뿐이다. 무아(無我)이론의 특징은 모든 것에는 고정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고정성이 없는 것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도 한다.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독립된 형이상학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정 불변한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근본불교의 기본적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아임을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열반적정

열반(nirvana)이라고 하는 것은 ‘불어서 끄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번뇌의 불을 끈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 분노의 사라짐, 어리석음의 사라짐,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당시의 열반설에서는 색계정(色界定)이나 무색계정(無色界定) 등의 여러 가지 선정의 상태를 이상적인 열반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락에 빠지는 세속적인 쾌락이 열반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었던 듯하다. 부처님이 수행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두 선인(仙人)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 뛰어난 무색계정이 열반의 이상이라고 하였는데 부처님은 곧바로 그들과 동일한 선정에 들어갈 수 있었어도 여전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무색계정도 실제로는 이상적인 열반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여기고 이 두 스승으로부터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6년간의 고행 후에 열반은 신체를 혹사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고행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이 고행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고행이나 욕락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 중용적인 생활과 심신상태 아래에서 세계 인생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열반은 단순한 고행이나 선정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생의 진리에 관한 올바른 지혜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한 것으로, 이를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경전에서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최상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은 불교의 이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


사성제에서 제(諦, satya)란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처음으로 설한 것이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중요한 교리이다.

① 고성제(苦聖諦)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무엇인가. 범어로 고라는 말인 두카(duhkha)는 일반적으로 괴로움, 고통, 슬픔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것은 고(苦)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사고(四苦) 또는 팔고(八苦)를 말한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의 네 가지 고(苦)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求不得苦], 오온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五取蘊苦] 등의 네 가지를 합쳐서 여덟 가지 고(苦)이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 등 3종으로 나누기도 한다. 고고(苦苦)란 주로 육체적인 고통을 말한다. 보통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괴고(壞苦)란 파괴나 멸망 등에서 느끼는 정신적 고뇌를 말한다. 행고(行苦)란 현상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느끼는 고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②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samuday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불러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집성제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힌다.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이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나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괴로움의 뿌리인 것이다. 또한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력일 뿐만 아니라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욕망은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등 세 가지로 나눈다. 욕애란 오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등의 욕망이다.

무유애는 죽어서 완전히 없어지고 싶은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③ 멸성제(滅聖諦)
멸(滅)이란 열반을 번역한 말이다 열반은 소멸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苦)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상이다. 열반은 현재의 생에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有餘依) 열반이라 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 열반을 이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無餘依) 열반이라고 한다. 이 무여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

④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

팔정도(八正道)는 여덟 가지 바른 길로서, 여기에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

① 정견은 바른 견해로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② 정사는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즉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③ 정어는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說],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④ 정업은 바른 행위이다.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⑤ 정명은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⑥ 정정진은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善)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善)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惡)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⑦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⑧ 정정은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이기 때문에 때로는 이를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오온설

오온에서 오(五)는 다섯을 의미하고 온((蘊, khandha)이란 구성요소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이 다섯 가지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色, rupa)은 물질로서의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4가지 기본요소인 사대(四大)와 사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사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대란 지, 수, 화, 풍으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 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 혈액, 오줌 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 같은 것을 가리킨다. 사대소조색이란 사대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눈, 코, 귀, 혀, 몸 등이다.

 (受, vedana)는 괴로움과 슬픔 등의 감수작용이다. 수는 내적인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상 세 가지가 있다. 즉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고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낙수란 괴로운 감정이고, 불고불락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想, sanna)은 개념표상의 취상작용(取象作用) 또는 심상(心象)이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行, sankhara)은 의지작용 및 그 밖의 정신작용이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생활을 할 수 있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현상이다.


 (識, vinnana)이라는 것은 인식 판단의 의식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 데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작용(注意作用)일 뿐이다.

이 오온설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 등 다섯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재목을 한 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라고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 축 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로 색 수 상 행 식 등 다섯 가지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오온 이론에 의하면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제외한 영혼과 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 상, 행, 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여섯 가지 대상[六境]이 합쳐 질 때 여섯 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오온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 불변적이거나 초월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십이처설

불교는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세계란 과연 어떤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인가.

한 때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一切)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잡아함 卷 13>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一切,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世界)나 세간(世間,loka)이라는 말과도 같은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각 종교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부처님은 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부처님은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十二處)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 卷13>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 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包攝)된다는 것이요, 그 열 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열 두 가지를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뜻을 취하여 처(處,ayatana)라고 부르고 이 교설을 십이처설(十二處說)이라고 부른다.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 존재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입장이 선언되는 사상적 배경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귀·코·혀·몸·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기관(六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대상(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실재가 종교적인 수행(修行)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증명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십이처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당시의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신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장아함 卷16 삼명경>

십이처설에서 우리는 둘째로,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六境)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主體)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志,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뜻의 의지와 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특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라문교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은 창조주인 범(梵)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存在)는 그 종속적 피조물에 불과하다.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것도 범(梵)의 의지에 의한다. 사문(沙門)측의 생활파(生活派)에서도 인간은 생사(生死)의 코스를 바꿀 수 없다는 무작용론(無作用論:決定論)을 펴고 있었다. 이들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십이처설(十二處說)을 볼 때 우리는 일견 소박한 듯한 그 세계관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단명한 것이며,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십팔계설

십팔계설이란 위의 십이처설이 주로 물질적인 색법(色法)의 분류인데 비하여 십팔계설은 여기에 심법(心法)을 추가하여 색(色)·심(心) 양면을 다 포함하는 일체 만유의 분류법이다. 界라는 말은 종족의 뜻도 있다고 하고 본생의 뜻도 있다고 하는데 먼저 종족의 뜻은 십팔계의 제법(諸法)이 그 자성에 있어서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다음 本生의 뜻은 이들이 곧 모든 심적 활동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십팔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 말한 십이처에 인식작용의 주체인 육식을 포함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열 여덟 가지를 말한다.

<십팔계>

①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여섯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②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생각의- 육경(六境)
③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六識)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렇다면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대할 때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하는 등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육식(六識)이라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 기관인 육근(六根)과 그의 대상인 육경(六境)과 인식주체인 육식(六識)과의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에만 일어난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우리의 심적 활동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육근과 육경은 다른 것이 자명하지만 육식은 과연 어떤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육식(六識)이란 별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심(一心)이 육근(六根)을 통하여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하여 심적 작용을 일으킬 때 각기 식(識)의 이름을 얻어 육식(六識)이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심(一心)이 눈을 통하여 색경(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안식(眼識)이 되고, 이근(耳根)을 통하여 성경(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이식(耳識)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육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과의 문제를 놓고 보면 앞의 십이처설에서는 육근이 주관이요 육경이 객관이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육경도 또한 물질적인 것이라 주관이 될 수 없는 점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십팔계에서는 육식이 더해지므로 육식이 참다운 주관이 되고 육경과 육근은 함께 객관이 된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앞에 나온 오온설(五蘊說)이 마음(心)에 치우치고 십이처설이 물질(色)에 치우친 데 비해 이 십팔계설은 색(色)·심(心) 양면을 고르게 통섭(統攝)하여 분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분류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상에 살펴본 바와 같은 오온설, 십이처설, 십팔계설의 셋은 다 같이 우리 인생을 중심으로 한 일체 만유의 분류법으로 흔히 삼과설이라 하여 한데 묶어져 설하여지고 있다. 이 삼과설(三科說)에는 극소한 부분 무위법(無爲法)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유위법(有爲法)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는 인연의 화합으로 모였다가 인연의 이산(離散)으로 흩어진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를 밝히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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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제는 『대광방불화엄경』「보살문명품」입니다. 보살문명품은 부처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보살들끼리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돼 있습니다. 다음은 그 중에서 첫 번째 부분입니다. 청량 국사는 이 부분을 ‘연기의 깊고 깊은 이치를 밝힘’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문수 보살이 각수 보살에게 묻습니다. “마음의 성품은 하나인데, 왜 가지가지 차별된 현상이 있음을 보게 됩니까.” 질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업(業)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은 업을 알지 못하며 받음은 과보를 알지 못하고 과보는 받음을 알지 못하며, 받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은 받음을 알지 못한다. 인(因)은 연(緣)을 알지 못하며 연은 인을 알지 못하며 분별하는 의식은 대상 경계를 알지 못하고 대상 경계는 분별하는 의식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마음은 무엇이고 업은 무엇일까요.

 

마음은 주체이고 업(業)은 마음의 작용

『대승기신론』에 보면 마음의 움직임을 업이라 했습니다. 마음은 주체고 업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체인 마음이 마음의 작용인 업을 알지 못하고, 업을 받는 마음이 업의 과보를 알지 못하고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대상 경계를 알지 못합니다. 왜 서로 알지 못하는가.

이 때 각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해 이르기를, “제법은 작용이 없으며 또한 체성도 없다. 그러므로 저 일체가 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諸法無作用 亦無有體性 是故彼一切 各各不相知)”. 말하자면 공(空)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합니다(緣起). 여러 가지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으며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방식이 마치 꿈속에서 본 금송아지와 같습니다. 꿈에 분명히 금송아지를 보긴 했지만 금송아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송아지가 꿈 즉 꿈꾸는 의식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꿈에서 깨어나도 현실에 존재한다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본 금송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꿈꾸는 의식에 의지해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합니다. 꿈에서 깨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현상이 현상이 아니고 허상이며 환상이라면 실제로는 현상도 없는 것입니다(無相). 현상이 없다면 현상의 생멸인 작용도 없는 것입니다(不生不滅, 無用). 이것이 공의 의미입니다. 연기(緣起)라는 말에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요약하여 경에서 ‘제법은 작용이 없으며 또한 체성도 없다’라고 설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삼라만상도 전적으로 우리의 업식(業識)을 의지해서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 있지 못하고 마음을 의지해서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도 꿈속에 본 금송아지처럼 본래 없는 것입니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인연을 통해, 여러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生起), 즉 일어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다른 것에 의지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도 자성도 없습니다.

 

삶은 있으나 사는 자는 없어

꿈이 그것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하듯이, 삼라만상도 마음을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이 현상만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이 삼라만상은 다 꿈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삼라만상은 마음에 의지해 있지만 마음은 또한 대상에 의지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똑같이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상(相)이 없고 상이 없기 때문에 용(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작용인 업은 있습니까. 당연히 없겠지요.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마음으로 있지도 않은 업을 지어서 있지도 않은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다 환(幻)입니다. 그러니 내가 마음을 일으켜 놓고도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마음이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제법은 환과 같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모릅니다.

“안이비설신의는 항상 유전하되 유전하는 자는 없다(眼耳鼻舌身 心意諸情根 以此常流轉 而無能轉者)”고 했습니다. 유전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작용하지만 작용하는 자는 없습니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 하는 자는 없습니다. 현상은 있지만 현상을 존재케 하는 자, 또는 현상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뭐꼬’ 화두를 들 때, 보고 듣는 이놈이 뭐냐고 찾지만 이 보고 듣는 놈은 없습니다. 보고 듣는 현상만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을 움직이는 놈, 마음, 정신, 영혼, 다름 아닌 내가 꼭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몸뚱이를 여기까지 끌고 온 이놈, 이것이 무엇인지 보라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놈을 위해서 끊임없이 번뇌, 망상, 욕심, 모든 나쁜 짓을 다하는 것인데 그것이 없다고 하면 번뇌 망상 욕심도 다 사라집니다. 그 놈이 있는 한, 그 뿌리를 뽑지 않는 한, 번뇌 망상은 아무리 없애도 마치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를 뽑지 않고 위에 올라온 가지만을 자른 것과 같이 언제든지 다시 나옵니다. 그러니 번뇌, 망상, 욕심을 일으키는 그 뿌리, 즉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그 뿌리가 없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있는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선정입니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삶은 있지만 사는 자는 없습니다.

선가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화엄경』에서 누누이 설명했듯이 성품은 없습니다(無自性). 달리 말하면 성품이 없다는 성품이 있습니다(無性之性). 이것이 진짜 성품입니다(眞性). 그래서 성품을 본다는 것은 성품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마음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의 성품에서 보면 본래 생멸이 없으나 현상적으로 보면 생멸이 있으니 이 가운데는 현상케 하는 자도 현상한 세계도 없다(法性本無生 示現而有生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 “눈, 귀, 코, 혀, 몸, 의식 육근인 내가 일체가 공하여 자성이 없거늘 망령된 마음으로 분별하여 있게 되었다(眼耳鼻舌身 心意諸情根 一切空無性 妄心分別有).”
“이치대로 관찰하면 일체가 다 자성이 없으니, 법안은 불가사의라. 이와 같이 보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如理而觀察 一切皆無性 法眼不思議 此見非顚倒).”

 

 나도 없고 세상도 없는 게 실상

지혜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사의입니다. 나도 없고 세상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우리가 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이것이 세상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법의 눈으로 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로는 불교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사의입니다.

그 다음은 또 더 재미있습니다. “진실이라고 말하건 허망하다고 말하건 세간의 진리이건 출세간의 진리이건 이 모든 것은 다 거짓말이다(若實若不實 若妄若非妄 世間出世間 但有假言說)”. 부처님 말씀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언설은 다 가언설, 즉 임시로 하는 말입니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상황, 그 사람에게만 맞는 말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방편설입니다(對機說法). 불변의 진리는 없습니다(無有定法). 모든 법칙은 조건으로 환원됩니다.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상황 하에서 어떤 사람에게만 맞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진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조건하에서만 어떤 상황 하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도 그러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영원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진리만이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연기, 공, 무아, 무생, 무자성이며 진리, 진아, 진성, 제법의 실상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6월 17일 부산 미타선원(주지 하림)에서 열린 ‘화엄경 강의’에서 오경 스님이 『대방광불화엄경』「보살문명품」을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오경 스님은


경북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출가 후 송광사 강원을 졸업하고 실상사 화엄학림 제 1기 출신으로 『화엄경』을 연찬했다. 제방 선원에서 10여 안거를 성만하고 서울 법련사 주지를 지냈으며,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를 지내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부산 미타선원 선원장을 맡아 재가불자들을 위한 참선 지도와 하안거 기간 동안 선원에서의 첫 번째 화엄경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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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란 무엇인가?


1) 연기법(緣起法)

세존께서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으신 내용이 바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현상은 무상(無常)하여
언제나 생멸변화(生滅變化)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궤도(軌度) 안에서
일정한 움직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의 법칙을 연기법이라 합니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고
모든 우주만물은 독자적인 힘으로
생기발전(生起發展)할 수 없으며,
반드시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보조원인인
연(緣:조건)의 결합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연기란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잡아함경(권 15)에는 다음과 같이 연기를 설하고 있습니다.

此有故彼有 차유고피유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此生故彼生 차생고피생
이것이 생김으로 해서 저것이 생긴다.
此無故彼無 차무고피무
이것이 없음으로 해서 저것이 없고
此滅故彼滅 차멸고피멸
이것이 사라짐으로 해서 저것이 멸한다.

예컨대 인간은 왜 병들고 늙고 죽어 가는가?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생(生)이 있기에 늙음, 병,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自然科學)은 자연의 현상을 탐구하는 데 반해
불교(佛敎)는 인간의 고통(苦痛)이라는
존재론적(存在論的)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모든 권위를 철저히 부정하며
진리(眞理)를 밝혀 나간다는 점에서는
공통점(共通點)을 갖고 있습니다.

초월적(超越的) 실재(實在)나
신(神), 불멸(不滅)의 영혼(靈魂) 등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세계(世界) 안에서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고뇌(苦惱)하면서
고통의 실상을 봄으로써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유추해 나가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基本的) 입장이고,
자연과학의 기본적인 입장은
현대과학이 축적한 지식을 통해서
이 세계의 실상을 정확히 봄으로써 세계의
기본구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데도
천장에 달려 있는 전등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천장이 전등을 들어 올려주고 있기 때문이고,
천장이 전등을 들어 올려 주고 있는 만큼
전등은 천장을 끌어내리고 있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내려앉지 않는 것은
천장을 집의 벽면과 기둥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천장이 집의 벽면과 기둥을 끌어내리고 있지만
벽면과 기둥이 내려앉지 않는 것은… ” 하고
이처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무한히 계속 적용해 나가면
하나의 전등이 천장에 걸려있기 위해서는
전 우주가 동시에 이 사건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서로가 있음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이 전 우주적 상호 참여,
전 우주적 상호 투영을 상입(相入)이라 하고
상의성(相依性), 상관성(相關性)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의 모습입니다.

뉴턴의‘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이렇게 불교의 연기론을 설명해 주고,
길가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
우주 전체가 연관돼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자연과학적 접근을 통해
자연의 진리를 설명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있어 인간은 이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의 한 구성원일 뿐임을 지적하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윤리관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론입니다.

이러한 연기론은 세존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든 안하시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존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부처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은 이 연기의 법을 깨달음으로써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원리도 깨달은 것입니다.

이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생멸하는 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영원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我)라는 것도 있을 수 없으므로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緣起法)을 논리적(論理的)으로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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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송(한국선사)



九山禪師(구산선사)
深入普賢毛孔裡 (심입보현모공리)

깊이 보현의 터럭 속에 들어가
捉敗文殊大地閑 (착패문수대지한)

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冬至陽生松自綠 (동지양생송자록)

동짓날에 소나무가 스스로 푸르르니
石人鶴駕過滿山 (석인학가과만산)

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가네

曉峰禪師(효봉선사)
海底燕巢鹿抱卵 (해저연소녹포란)

바다 및 제비집에는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 (화중주실어전차)

타는 불 속 거미집엔 물고기가 茶를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 (차가소식수능식)

이 집안의 소식을 뉘가 알리요
白雲西飛月東走 (백운서비월동주)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鏡虛禪師(경허선사)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콧구멍이 없다는 사람의 말을 갑자기 듣고
頓覺三千是我家 (돈각삼천시아가)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내 집임을 순식간에 깨쳤네
六月鷰岩山下路 (육월연암산하로)

유월 연암산 밑 조용한 길에서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野人(야인)은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香谷大宗師(향곡대종사)
忽見兩手全體活 (홀견양수전체활)

홀연히 두손 보고 전체가 들어났네
三世諸佛眼中花 (삼세제불안중화)

삼세 제불들이 눈 속에 허깨빈데
千經萬論是何物 (천경만론시하물)

천경과 만론들 이게 다 무슨 물건!
從此佛祖總喪身 (종차불조총상신)

이로 좇아 불조사가 상신실명 하였구나

鳳岩一笑千古喜 (봉암일소천고희)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曦陽數曲萬劫閑 (희양수곡만겁한)

희양산 몇 곡조는 만겁에 한가롭다
來年更有一輪月 (내년갱유일륜월)

내년에도 둥근달은 다시 있겠지
金風吹處鶴唳新 (금풍취처학려신)

가을바람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彦機禪師(언기선사)
雲邊千疊嶂 (운변천첩장)

구름가엔 천겹의 번뇌 산봉우리요
檻外一聲川 (함외일성천)

해탈한 난간 밖엔 철철철 시원한 개울물 소리
若不連旬雨 (약불연순우)

만일 장마비가 아니였던들
那知霽後天 (나지제후천)

어찌 비 개인 뒤에 하늘을 알리

太古國師(태고국사)
趙州古佛老 (조주고불로)

趙州(조주)에 사는 옛날의 祖師(조사)
坐斷千聖路 (좌단천성로)

앉은 채 千聖(천성)의 길을 끊었네
吹毛覿面提 (취모적면제)

칼날을 눈앞에 바로 대어도
通身無孔竅 (통신무공규)

온 몸에 구멍 하나도 없네
孤兎絶潛蹤 (고토절잠종)

여우나 토끼 자취 감춘 가운데
翻身獅子露 (번신사자로)

문뜩 뛰어드는 사자 한 마리
打破牢關後 (타파뢰관후)

철벽같은 그 관문 때려 부수니
淸風吹太古 (청풍취태고)

태고 때 불던 그 바람! 맑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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