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사상의 이해
근본불교의 이해
근본 가르침은 부처님이 직접 가르친 것으로, 또한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것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 없이 그대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본 가르침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세계와 인생의 현상적 존재에 대해서만 매우 합리적인 고찰을 하였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여러 교리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연기설(緣起說)이며, 연기설의 응용 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삼법인(三法印), 오온, 십이처, 18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한 경전의 기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결국 연기(緣起)의 자각이 그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를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 가르침들은 모두 연기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연기의 의미를 아는 것이 불교의 사상 그 자체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기사상은 초기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초기대승, 중기대승에 있어서도 항상 불교의 중심문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기대승은 물론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발전한 불교에서도 각각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고찰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연기는 이치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여래가 이 세상에 나타나건 나타나지 않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이 연기의 법칙이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던 간에 진리로서 변함없는 것으로,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즉 연기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만약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면 곧 여래(부처)를 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연기를 법이나 부처님과 동일하게 간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서, 인연이란 조건이나 원인을 가르키는 말로서 인은 '직접적인 원인'을 가리키고 연은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연기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현상이 일어나는 이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과법, 인연법, 연생연멸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연기의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하나의 글귀를 들 수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어떤 것을 연(緣)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상주불변(常住不變)의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기설이란 모든 존재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고 다른 것이 어떤 것의 결과가 된다고 하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연기의 정의를 나타낸 구절 중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말은‘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연기의 관계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무시간적, 논리적 관계와 함께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가 고려되는 것이다. 연기설은 세계 인생의 일반적인 생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가 말하여진 본래의 목적은 단순한 일반적 현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고뇌가 어떠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어떠한 인연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가 하는 인생의 고락운명에 관한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이 문제되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악업과 그 과보로서의 고락과 같은 윤리 종교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연기의 인과관계에는 과거세로부터 현재, 미래 세에 이르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업보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불교의 근본주장은 크게 연기설로 일관된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고찰의 각도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설을 협의로만 이해하여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선후가 있는 인과 관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에 관계없는 논리적인 연기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연기라고 부르지 않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따라서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론과 실상론이 대립하여 양자는 별개의 교학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졌다.
십이연기
연기란 일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이지만, 부처님에 의해 자각된 이러한 연기설이 당시 인도 사상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불전(佛傳)에 의하면 부처님은 출가한 후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근교에 있던 알라라 카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 밑에서 선정을 하였지만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부처님은 다시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의 고행림(苦行林)에 들어가 모든 고행을 다하였지만 이것에 의해서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란자라 강물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먹고 몸과 마음을 회복한 후, 이윽고 보리수 밑에서 스스로 선정에 들어 정각을 얻어 불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부처님이 정각을 얻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버렸던 당시 철학이나 종교는 크게 바라문계와 육사외도 등으로 대표되는 사문계의 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바라문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이라고 한다. 바라문계 사상에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바라문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바라문이 자기자신을 전개시켜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한다. ‘일체는 바라문이다’라는 주장은 우파니샤드에서 자주 설해지는데 이러한 근본원리로서의 바라문은 개인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아트만과 동일시되고 점차 정신적 원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그러므로 전변설은 절대 유일의 정신적 원리가 전개하여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가 성립된다고 설하는 주장이다.
이 시대에는 종래의 바라문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가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육사외도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자유사상가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육사외도라 불려지는 사문들 가운데 아지타 케사캄바린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한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모든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다. 파쿠다 캇차야나는 7요설을 인정하였고, 막칼리 고살라는 살아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 12가지 원리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적취설(積聚說)이라고 한다. 이 적취설은 바라문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 있어서의 연기는 보편적인 법칙성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철학설로서 논의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인생의 괴로움에 번민하고 있는 인간의 문제로 설해진 것이다. 연기는 ‘무엇을 연(緣)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뜻이지만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났다고 하는 존재의 성립을 설할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 괴로움에 얽매인 인간 존재 또한 문제삼고 있는 것이며, 현실의 존재는 항상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된 것이라고 함은 곧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문계의 전변설이나 사문들의 적취설에 비해 연기의 입장은 세계관 적인 면에서 양자를 초월한 보다 높은 입장, 종교적 면에서 볼 때 깊은 실천적인 입장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있어서 연기는 항상 인간의 미혹과 깨달음을 문제로 설해지는데 보통 십이연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십이연기는 십이인연(十二因緣),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한다.
십이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십이지(十二支) 각각의 의미를 주로 경전 자체의 설명에 근거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무명(無明, avida)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行, samskara)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 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이 있다. 행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의 형태로 남게 된다.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 vijnana)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써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식이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꽃을 볼 경우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namarupa)이 있다.
명(名, 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 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식이 주관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는 데 반해 명색은 그 대상인 객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이 있다.
육입이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心]의 6가지 감각기관, 즉 육근(六根)이다. 이는 대상과 감각기관과의 대응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육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觸, sparsa)이 있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촉(觸)에도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 6가지의 감각기관에 의한 육촉(六觸)이 있다. 촉은 육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육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육입(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 vedana)가 있다.
수란 즐거운 감정, 괴로운 감정,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愛, trsna)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보통 목이 타서 갈증이 나면 오로지 물을 구하기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충동적 욕망을 말한다.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取, upadana)가 있다. 취는 집착의 의미로서 인간의 미혹한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 것이다. 맹목적인 애증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有, bhava)가 있다.
유(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 어렵다. 업설에 의하면 집착 때문에 업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有)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取)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生, jati)이 있다. 업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생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老死, jara-marana) 등 여러 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苦) 즉 근심, 비애, 고통, 번뇌, 번민이 발생하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계속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즉 순관은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流轉) 연기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苦)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還滅) 연기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써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법인(法印)이란 법의 규범이 되는 표식(標識)이라는 말이다. 삼법인은 불교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깃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상,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제행무상
제행(諸行)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무상(無常)은 anita 를 번역한 말로써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은 외견상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모여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고정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도 무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제법무아
제법(諸法)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고, 무아(無我)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我)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변적인 존재인 실체 또는 본체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는 비실체적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고정 불변한 실체적인 아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제법무아라고 해서 현상적인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뿐이다. 무아(無我)이론의 특징은 모든 것에는 고정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고정성이 없는 것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도 한다.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독립된 형이상학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정 불변한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근본불교의 기본적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아임을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열반적정
열반(nirvana)이라고 하는 것은 ‘불어서 끄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번뇌의 불을 끈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 분노의 사라짐, 어리석음의 사라짐,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당시의 열반설에서는 색계정(色界定)이나 무색계정(無色界定) 등의 여러 가지 선정의 상태를 이상적인 열반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락에 빠지는 세속적인 쾌락이 열반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었던 듯하다. 부처님이 수행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두 선인(仙人)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 뛰어난 무색계정이 열반의 이상이라고 하였는데 부처님은 곧바로 그들과 동일한 선정에 들어갈 수 있었어도 여전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무색계정도 실제로는 이상적인 열반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여기고 이 두 스승으로부터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6년간의 고행 후에 열반은 신체를 혹사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고행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이 고행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고행이나 욕락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 중용적인 생활과 심신상태 아래에서 세계 인생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열반은 단순한 고행이나 선정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생의 진리에 관한 올바른 지혜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한 것으로, 이를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경전에서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최상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은 불교의 이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
사성제에서 제(諦, satya)란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처음으로 설한 것이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중요한 교리이다.
① 고성제(苦聖諦)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무엇인가. 범어로 고라는 말인 두카(duhkha)는 일반적으로 괴로움, 고통, 슬픔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것은 고(苦)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사고(四苦) 또는 팔고(八苦)를 말한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의 네 가지 고(苦)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求不得苦], 오온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五取蘊苦] 등의 네 가지를 합쳐서 여덟 가지 고(苦)이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 등 3종으로 나누기도 한다. 고고(苦苦)란 주로 육체적인 고통을 말한다. 보통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괴고(壞苦)란 파괴나 멸망 등에서 느끼는 정신적 고뇌를 말한다. 행고(行苦)란 현상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느끼는 고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②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samuday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불러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집성제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힌다.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이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나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괴로움의 뿌리인 것이다. 또한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력일 뿐만 아니라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욕망은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등 세 가지로 나눈다. 욕애란 오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등의 욕망이다.
무유애는 죽어서 완전히 없어지고 싶은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③ 멸성제(滅聖諦)
멸(滅)이란 열반을 번역한 말이다 열반은 소멸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苦)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상이다. 열반은 현재의 생에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有餘依) 열반이라 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 열반을 이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無餘依) 열반이라고 한다. 이 무여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
④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
팔정도(八正道)는 여덟 가지 바른 길로서, 여기에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
① 정견은 바른 견해로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② 정사는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즉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③ 정어는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說],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④ 정업은 바른 행위이다.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⑤ 정명은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⑥ 정정진은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善)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善)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惡)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⑦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⑧ 정정은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이기 때문에 때로는 이를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오온설
오온에서 오(五)는 다섯을 의미하고 온((蘊, khandha)이란 구성요소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이 다섯 가지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① 색(色, rupa)은 물질로서의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4가지 기본요소인 사대(四大)와 사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사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대란 지, 수, 화, 풍으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 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 혈액, 오줌 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 같은 것을 가리킨다. 사대소조색이란 사대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눈, 코, 귀, 혀, 몸 등이다.
② 수(受, vedana)는 괴로움과 슬픔 등의 감수작용이다. 수는 내적인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상 세 가지가 있다. 즉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고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낙수란 괴로운 감정이고, 불고불락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③ 상(想, sanna)은 개념표상의 취상작용(取象作用) 또는 심상(心象)이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④ 행(行, sankhara)은 의지작용 및 그 밖의 정신작용이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생활을 할 수 있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현상이다.
⑤ 식(識, vinnana)이라는 것은 인식 판단의 의식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 데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작용(注意作用)일 뿐이다.
이 오온설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 등 다섯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재목을 한 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라고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 축 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로 색 수 상 행 식 등 다섯 가지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오온 이론에 의하면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제외한 영혼과 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 상, 행, 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여섯 가지 대상[六境]이 합쳐 질 때 여섯 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오온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 불변적이거나 초월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십이처설
불교는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세계란 과연 어떤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인가.
한 때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一切)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잡아함 卷 13>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一切,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世界)나 세간(世間,loka)이라는 말과도 같은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각 종교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부처님은 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부처님은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十二處)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 卷13>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 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包攝)된다는 것이요, 그 열 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열 두 가지를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뜻을 취하여 처(處,ayatana)라고 부르고 이 교설을 십이처설(十二處說)이라고 부른다.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 존재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입장이 선언되는 사상적 배경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귀·코·혀·몸·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기관(六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대상(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실재가 종교적인 수행(修行)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증명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십이처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당시의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신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장아함 卷16 삼명경>
십이처설에서 우리는 둘째로,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六境)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主體)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志,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뜻의 의지와 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특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라문교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은 창조주인 범(梵)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存在)는 그 종속적 피조물에 불과하다.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것도 범(梵)의 의지에 의한다. 사문(沙門)측의 생활파(生活派)에서도 인간은 생사(生死)의 코스를 바꿀 수 없다는 무작용론(無作用論:決定論)을 펴고 있었다. 이들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십이처설(十二處說)을 볼 때 우리는 일견 소박한 듯한 그 세계관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단명한 것이며,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십팔계설
십팔계설이란 위의 십이처설이 주로 물질적인 색법(色法)의 분류인데 비하여 십팔계설은 여기에 심법(心法)을 추가하여 색(色)·심(心) 양면을 다 포함하는 일체 만유의 분류법이다. 界라는 말은 종족의 뜻도 있다고 하고 본생의 뜻도 있다고 하는데 먼저 종족의 뜻은 십팔계의 제법(諸法)이 그 자성에 있어서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다음 本生의 뜻은 이들이 곧 모든 심적 활동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십팔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 말한 십이처에 인식작용의 주체인 육식을 포함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열 여덟 가지를 말한다.
<십팔계>
①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여섯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②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생각의- 육경(六境)
③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六識)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렇다면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대할 때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하는 등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육식(六識)이라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 기관인 육근(六根)과 그의 대상인 육경(六境)과 인식주체인 육식(六識)과의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에만 일어난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우리의 심적 활동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육근과 육경은 다른 것이 자명하지만 육식은 과연 어떤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육식(六識)이란 별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심(一心)이 육근(六根)을 통하여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하여 심적 작용을 일으킬 때 각기 식(識)의 이름을 얻어 육식(六識)이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심(一心)이 눈을 통하여 색경(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안식(眼識)이 되고, 이근(耳根)을 통하여 성경(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이식(耳識)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육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과의 문제를 놓고 보면 앞의 십이처설에서는 육근이 주관이요 육경이 객관이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육경도 또한 물질적인 것이라 주관이 될 수 없는 점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십팔계에서는 육식이 더해지므로 육식이 참다운 주관이 되고 육경과 육근은 함께 객관이 된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앞에 나온 오온설(五蘊說)이 마음(心)에 치우치고 십이처설이 물질(色)에 치우친 데 비해 이 십팔계설은 색(色)·심(心) 양면을 고르게 통섭(統攝)하여 분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분류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상에 살펴본 바와 같은 오온설, 십이처설, 십팔계설의 셋은 다 같이 우리 인생을 중심으로 한 일체 만유의 분류법으로 흔히 삼과설이라 하여 한데 묶어져 설하여지고 있다. 이 삼과설(三科說)에는 극소한 부분 무위법(無爲法)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유위법(有爲法)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는 인연의 화합으로 모였다가 인연의 이산(離散)으로 흩어진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를 밝히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