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牛圖  
           
           一. 尋牛(심우)
           1. 첫번째는 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심우(尋牛)의 의미는 소를 찾는다는 것으로 여기서 소는 곧 내 마음,

            

                 나 자신 또는 어떤 목표를 말한다.그러나,

 

                우선 중요한 것은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것,

 

                 즉 우리가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의 본성을 잊고

 

                 수많은 유혹 속에서소의 발자취를 잃어 버린 것이다.

 

   


 

 

二. 見跡(견적)

 

 

2. 두 번째는 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견적(見跡)이란 흔적을 보았다는 것으로 소의 발자국을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스승들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향기로운 풀밭에도, 마을에서 먼 깊은 산 속에도 소 발자국이 있다.

 

마치 하나의 쇠붙이에서 여러 가지 기구가 나오듯이 수많은 존재가

 

내 자신의 내부로부터 만들어짐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三. 見牛(견우)

 

 

3. 세번째는 동자승이 소의 꼬리를 발견하는 그림이다.

 견우(見牛)란 소를 보았다는 것으로 우리의 각작용에 몰입하면 마음의

움직임을 뚜렷이 느낄수 있으며, 우리는 소의 꼬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四. 得牛(득우)


4. 네 번째는 득우(得牛), 즉 '소를 얻다' 이니,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발견하긴

 

 했지만 아직도 마음은갈 길을 잡지 못하고 헤메고 있다.

 

 


五. 牧牛(목우)


5. 다섯 번째는 동자 승이 소에게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가고

 

있는 모습으로 이제 우리는 마음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오랜 동안의 습관으로 제멋대로인

 

마음을 고행과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길들여 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소를 기른다는 의미로 목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 또 이 소가 어떤 진흙탕, 어떤 삼 독(三毒)과

 

 유혹 속에 빠질지 모른다. 길을 잘 들이면 소도 점잖아질 것이다.

 

그때에는 고삐를 풀어줘도 주인을 잘 따를 것이다.

 



 

 

六. 騎牛歸家(기우귀가)

 

 

6. 동자승이 소에 올라타고 피리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소를 잡아서 채찍과 고삐를 달고,

 

드디어 그 소를 타고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모든 투쟁은 끝났다.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

 

아니 본래 그러한 것들이 없었던 것이다.

 

 


七. 忘牛存人(망우존인)

 


7. 일곱 번째는 소는 없고동자승만 앉아 있다.

 

망우재인,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 이제 때가 왔으니 우리는 채찍과 고삐를

 

 다 내버리고, 초가집에서 살아간다.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八. 人牛具忘(인우구망)

 


8.인우구망, 사람도 소도 완전히 잊었다.

 

모든 것이 무(無) 속으로 사라졌다. 무(無)는 바로 한계가 없음이요,

 

모든 편견과 벽이 사라진 자리이다. 하늘은 너무나 광대하며

 

 어떤 메세지도 닿을 수 없다. 의심, 분별, 차별은 지혜속에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는 수많은 스승들의 발자취가 있으며, 범용한 것은 사라졌다.

 

마음은 한없이 한없이 열려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깨달음 같은 것은 찾지 않는다. 또한 나에게 깨닫지 못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않다. 나는 어떠한 상태에도 머물지 않아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

 



 

九. 返本還源(반본환원)

 

 

9.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빨갛게 피어 있는 여실한 모습,

 

진리는 맑디 맑습니다. 고요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형상들을 바라 본다.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떠한 꾸밈도,

 

성형(成形)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근원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또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참된 집에 살게 되어 그 무엇도꺼릴 것이 없는 소중한 나를 찾았다.

 

 

 


                               十. 入廛垂手(입전수수)

 


 

10. 손을 드리우고 세상에 나간다.

 

옷은 누더기, 때가 찌들어도 언제나 지복으로 넘쳐 흐른다.

 

 술병을 차고 시장바닥으로 나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

 

술집과 시장으로 가니,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도(道)를 세상에 돌리니, 남과 내가 하나가 된다.

 

 

 

 

 

소 등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소를 잘 길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경허선사께서 후학들을 생각하여 심우송(尋牛訟)을 남기신 것같습니다.

소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소가 어디를 헤메고 있는지, 소의 행방부터 찾아야합니다.
소를 찼았으면 소를 항상 지키고 있어야합니다.
앉아 있을 때는 소를 호흡에 둡니다.
들숨과 날숨에 소를 두고 지킵니다.
걸을 때는 소를 발에다 둡니다.
오른발, 왼발 하면서 소를 지킵니다.
발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소를 지켜봅니다.
소는 기회만 있으면 달아나 버립니다.
달아나면 즉시 달아났음을 알아차립니다.
소가 생각에 가 있으면 생각을 지켜봅니다.
생각이 사라지면 소를 다시 호흡이나 발에 둡니다.
세수를 할 때는 세수하는 행위에 소를 둡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먹는 행위에 소를 둡니다.
잠 들기 전에도 호흡에 소를 둡니다.
소는 강한 자극을 주는 대상이 있으면 그곳으로 달아납니다.
그러면 그 강한 자극이 사라질 때까지 그 대상을 지켜봅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다시 소를 호흡에다 둡니다.
항상 소가 어디 있는지 소의 행방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실제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른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다보면 최소한 소 등위에서 떨어져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 또 소가 달아났습니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봉(淸峰)스님 화두드는법  (0) 2006.08.02
만해(한용운)의尋牛詩  (0) 2006.07.21
부모미생전 여하시아 본래면목  (0) 2006.07.06
선공부  (0) 2006.07.06
견성 (見性) 2  (0) 2006.07.05


우리는 일상적으로 화두라는 말을 자주 접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본래 선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를테면 수행하는 스님들이 궁극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선불교에는 간화선이니 묵조선이니 하는 분류가 나오지만 그런 복잡한 관계를 떠나서 옛 선사들이 나눈 선문답은 바쁜 일상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깨우침을 줍니다.
앞으로 이 페이지에는 날카롭게 번뜩이는 선사들의 선문답을 게재할 계획입니다. 비록 옛 선사들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적절한 상황에 맞는 문답을 나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상의 공허함을 털어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만나는 화두는 어쩌면 '사자상승'이라는 깨달음의 폐쇄적 성격을 극복하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DIGITAL / 조 / 사 / 어 / 록 · · · · · · · · · · · · · · ·
가 / 려 / 뽑 / 은 / 조 / 사 / 어 / 록 · · · · · · · · ·
x-text/html; charset=iso-8859-1" autostart="true" loop="true">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해(한용운)의尋牛詩  (0) 2006.07.21
尋牛圖의 설명  (0) 2006.07.19
선공부  (0) 2006.07.06
견성 (見性) 2  (0) 2006.07.05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란 곧 깨달음입니다(心卽是佛 佛卽是覺). 이 깨달음의 성품(覺性)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 고요하여 도무지 한 물건도 없고, 한 법도 받을 수 없으며, 닦아서 증득할 수도 없습니다. 신령스럽게 밝아 만덕(萬德)을 구족(具足)했으며, 묘용(妙用)이 항하사 같아서 수행과 증득을 요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중생이 미혹하여 생사에 빠져 오랜 겁이 지나도록 탐진치애(貪瞋痴愛)와 망상집착에 사로잡혀 오염(染汚)이 깊은 까닭에 부득이 수행과 증득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른바 수행이란 것은 고인이 하는 말로 상서롭지 못한 물건(不祥之物)이라서 부득이한 경우에나 쓴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타칠(次打七)에서 이미 3주 반이 지나갔고 이제 3주 반이 남아 있습니다. 남은 3주 반은 몸과 마음이 보다 순숙(純熟)하여 공부하기가 전에 비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처럼의 인연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됩니다. 남은 3주 반 내에 물이 말라서 돌이 드러나듯이(水落石出) 마음자리를 밝혀냄으로써(發明心地), 이처럼 얻기 어려운 기연(機緣)을 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0여 일 동안 여러분은 하루같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애써 공부했으나 그 결과는 다음의 네 가지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공부 길(路頭)에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화두가 잘 들리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대중을 따라 꾸벅거리며 졸고 있으니, 망상이 분분하게 일지 않으면 혼침에 떨어져 흔들리는 것입니다.

 

둘째, 화두가 제대로 들려서 좀 잡히는 것이 있으나, 다만 죽도록 문 두드리개 하나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마음속으로 염(念)하고만 있으니, 이러한 화두는 염화두(念話頭)가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의정이 일어나서 깨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화미(話尾) 상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며 생멸법(生滅法)이어서 결국 일념무생(一念無生)의 경지에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잠시 해 보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만약 구경의 실다운 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깨달음을 어찌 기약하겠습니까? 요즈음 선종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 이유도 이처럼 화미에 마음을 쓰는 잘못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떤 이는 화두를 제대로 볼 줄 알아서 현전하는 일념무생(一念無生)을 비추거나, 혹은 염불하는 것이 곧 마음인 줄 알아서 이 일념이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곧장 한 생각도 없는 마음의 경계를 봅니다. 그리하여 차츰 적정(寂靜)을 체험하니 거친 망상이 이미 쉬어져 가뿐함(輕安)을 얻게 되고 이내 갖가지 경계가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몸이 가볍게 둥실둥실 날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환희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두려운 경계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공포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음욕심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이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요는 이것이 모두 마(魔)이므로 집착하면 바로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어떤 이는 업장(業障)이 비교적 가벼워 공부 길이 분명히 이해되고 공부가 뜻대로 되어 이미 정상 궤도를 걷고 있습니다. 아주 맑고 상쾌하며 망상이 다 쉬어진 것 같고, 몸과 마음이 자재하며 어떤 경계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어 앞으로 나아가기에 꼭 좋습니다. 다만 마른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 같은 경지 앞에 많은 갈림길이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혼침에 빠져 머물러 버리며, 어떤 이는 약간의 알음알이를 얻어 시문(詩文)이나 지으면서 스스로 만족하며 아만을 드높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경계가 다 병이니, 제가 이제 여러분에게 이를 다스리는 약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화두가 아직 잘 들리지 않고 망상과 혼침이 많은 사람은,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할 때의 그 '누구인가(誰)?'를 보십시오, 망상과 혼침이 적어질 때까지 보다가 '누구인가'가 사라지지 아니할 때, 곧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보십시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되면 무생(無生)이니, 능히 일념무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참으로 '화두를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하는 말에 집착하여, 화미(話尾)에 마음을 쓰며 생멸법을 올바른 공부로 여기는 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런 이들도 위에서 설명한 뜻에 비추어 공부하십시오. 즉,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서 일념무생법을 보도록 하십시오.

 

(셋째) 무념(無念)을 관하여 이미 적정(寂靜)과 경안(輕安)을 얻어 어떤 경계에 도달한 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런 이들은 다만 본래 참구하던 화두만을 비추되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고 마군이 오면 마군을 베어, 한결같이 문제로 삼지 않기만 하면, 자연히 일이 없고 온갖 삿된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넷째) 망념(妄念)이 이미 다하여 상쾌하고 몸과 마음이 자재(自在)한 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런 이들은 마땅히 옛사람이 설한 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할 때처럼, 하나(一)로부터 지극한 곳(至極處)을 향해 힘써 나아가되, 곧장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내려가서, 두 손을 놓고 거침없이 나아가십시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모두 말법(末法) 시대의 근기가 둔한 사람(鈍根人)들을 위해서 설한 방법이지만, 실은 종문의 상상일승(上上一乘) 법문입니다.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뜻으로서 경전밖에 따로 전하시고(敎外別傳), 역대 조사들이 오직 일심(一心)을 전하신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直指人心 見性成佛)'이 모두 계급(階級, 수행단계)에 떨어지지 않고 수행과 증득을 요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고 한 법도 가히 닦을 것이 없음을 알아서 곧 허망한 인연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여여한 부처이니, 여기에 무슨 군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尋牛圖의 설명  (0) 2006.07.19
부모미생전 여하시아 본래면목  (0) 2006.07.06
견성 (見性) 2  (0) 2006.07.05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견성하는 법-석우스님  (0) 2006.05.28
      
      
        견성 (見性) 2 종소리가 울릴 때 잘 돌이켜 보십시오. 뎅~ 뎅~ 당신은 분명 이 소리를 듣습니다. 이 종소리를 듣는 자가 바로 부처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자는 원래 비어서 볼 수는 없지만 당신이 알 수는 있습니다. 종소리를 통하여 듣는 자를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아! 종소리를 듣는 이 사람이 바로 참 나요, 부처로구나 하고... 나는 보이지 않으므로 볼 수는 없지만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항상 내게 있으면서 이 몸을 움직이는 주인공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 좋은 하루 되십시오. 석우 합장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모미생전 여하시아 본래면목  (0) 2006.07.06
선공부  (0) 2006.07.06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견성하는 법-석우스님  (0) 2006.05.28
*활구 참선법*-松潭  (0) 2006.05.20
 

3. 禪修行의 기본

가) 자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가부좌, 오른 다리를 구부려서 왼쪽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고, 또 왼쪽 다리를 구부려서 오른쪽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습니다. 지금 해 보셔도 좋습니다. 다리가 굳어서 잘 안되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만 자꾸 해 버릇하면 차츰차츰 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일생 동안 의자 생활만 해서 이 책상다리를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지마는 그 사람들도 얼마 동안만 연습하면 가부좌를 우리보다도 더 오랫동안 잘 하는 것을 봤습니다.

가부좌하는 것이 참선의 기본 자세입니다. 자꾸 익혀서 되도록 하면은 그 굳어져 있던 힘줄이 서서히 늘어짐으로 해서 건강에도 좋은 것이니까 틈틈이 가부좌를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꼭 가부좌를 해야만 참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가부좌를 해도 좋습니다.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하다가 다리가 저리거나 아프면 발을 바꾸어 놓고 반가부좌를 해도 무방합니다.

다리를 그렇게 한 다음에는, 오른 손바닥을 위로 해서 왼쪽 발 복숭아뼈 위에다가 올려놓고, 그 다음에 왼손을 펴서 오른손 위에다가 포개 놓은 다음, 양 엄지손가락 끝을 가볍게 맞댑니다. 너무 힘 주어 맞대려고 하지 말고, 또 떨어지지도 않도록 하되 엄지손의 모습이 아주 곱게 되어야 합니다. 위로 삐쭉 올라가거나 삐뚜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손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생각이 안정이 되었나, 어떤 망상 속에서 곤두박질을 치고 있나, 또는 졸음에 빠져 있느냐, 그런 것을 이 손 모습만 보고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참 딴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에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두서 없이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손을 가지고 장난하기도 하고, 손이 삐끄러져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 손만 보면은 그 사람이 옳게 화두를 들고 있나, 안 들고 있나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손 모습을 잘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앉은 자세가 뒤로 넘어 가거나, 앞으로 기울어지거나,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두 귀는 어깨 위에, 수직으로 놓이도록 하고 고개도 전후좌우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코끝은 단전 위에 수직선상에 놓이도록 합니다 . 몸도 바르게 해야 하고, 고개도 바르게 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금니부터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가 대는 것입니다.

눈은 평상으로 뜹니다. 너무 뚝 부릅뜨면은 생각이 산만해지기가 쉽고, 너무 가늘게 뜨면은 졸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성하고 적적(惺惺寂寂)하며, 적적하면서 성성(寂寂惺惺) 해야 하므로 처음 시작할 때부터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합니다. 눈은 평상으로 뜨되, 자기 앉은자리로부터 3미터 전방에다 시선을 떨구면 되는 것입니다. '시선을 떨군다' 하는 것은 보려고 하면은 거기가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지 3미터 지점의 어떤 한 점을 의식적으로 응시하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 호흡

1) 단전호흡


우리의 의식은 오직 배꼽 밑에 일촌 삼푼에다가 집중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집중을 하느냐? 보통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만, 참선하는 사람은 단전(丹田)으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마시되 너무 가뜩 들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이마시되, 숨을 들이마심에 따라 단전 부위가 볼록해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단전이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온 의식이 거기에 집중이 돼야 합니다. 너무 무리하게 잔뜩 들이마신다든지, 들이마신 상태에서 너무 오래 억지로 참는다든지 하면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부작용이 일어나는 수가 있으니까 무리가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

이렇게 단전호흡을 잘하면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회복이 되며 정신이 안정이 되고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앉아서 하는 것이 기본 자세이지마는 매우 피로했을 때나, 정신이 착잡할 때, 그리고 잠이 안올 때는 누워서 하는 것도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2) 수식관(數息觀)

팔·다리를 뻗고 편안하게 누워서 단전 부위에다가 두툼한 책 한 권을 올려놓습니다. 그래 가지고 숨을 들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니까 책이 약 3센티 가량 위로 올라가고, 올라간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무른 뒤 조용히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지니까 따라서 책도 한 3센티 내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마다 '하나... 둘...'하고 세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세어 올라가고, 열에서 하나까지 세어 내려옵니다. 이것이 수식관(數息觀)입니다.

중간에 딴 생각이 나서 몇까지 했나 막연하면, 다시 하나에서 시작하고 해서 잘 되면 20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또 그게 잘 되면 30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합니다. 해서, 100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도록 아무 실수 없이 되면 참선해 나가는데 기초가 아주 훌륭하게 닦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건물을 지으려고 할수록 암반이 나오도록 깊이 파서 기초공사를 잘 해야만 하는 것처럼, 대도를 성취하려면 그 기초인 자세와 단전호흡을 완벽하게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기초를 허술하게 하고 건물을 아무리 잘 지어봤자 얼마 안가서 와우아파트와 같은 무서운 사고가 나게 되는 것처럼, 참선도 기본 자세와 호흡법을 잘 모르고 덮어놓고 화두만 맹렬히 들고 나가다가는 백이면 백, 위장병이나 상기병(上氣病)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기본 자세와 호흡법을 바르게 알고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화두

1) 생각의 기멸


그 다음 셋째번에 가서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느냐?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무엇인가 생각 아니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사그러지면 또 딴 생각이 생겨나고, 쓸데 있는 생각· 쓸데 없는 생각· 지나간 생각· 현재 닥치고 있는 생각· 앞으로 다가올 생각. 그러한 생각 속에서 일분 일분을 지내고, 하루 하루를 지내고 , 그러면서 일생이 지나가게 됩니다. 심지어 잠이 들어 있을 때도, 꿈속에서도 그 생각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서 행동화되면 좋은 행동을 하게 되고, 삿(邪)된 생각이나 착하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이 행동화되면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의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육도윤회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안하게 하려면, 죽으면 안하게 될 것 같지만 죽는다고 한들 이 현재 가지고 있는 그 몸을 가지고서는 끝나지마는 이 몸 버린다고 해서 그 생각의 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또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나 게 되고, 설사 다음 몸을 받아날 때 까지 몸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중음신의 상태에서도 우리의 생각의 기멸(起滅)은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송(頌)에, "참선은 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이요, 묘오는 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종요로이 마음길이 끊어져야 한다> 하셨습니다.

2) 활구참선의 법맥

삼 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하시고,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아난존자는 상나화수존자에게, 이렇게 해서 28대 달마대사까지 전해 왔습니다.

달마대사는 일백 오십 세가 되도록 인도 천지를 두루 다니시면서 이 정법을 펴시다가, 그 이전에 중국에 불법이 건너갔다고는 하지마는, 경전이나 불상이나 그런 상법(像法)만이 건너갔지, 내가 나를 깨닫는 부처님의 최상승법은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백 오십 세의 고령으로 3년간의 항해 끝에 중국 남해안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맨 처음에 양무제를 만나니, "짐이 절을 많이 짓고, 경전을 보시하고, 스님네 봉양을 많이 한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달마대사께서는, "공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대사께서, "확연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그러면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不識)!"하고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거기에서 대화가 끊어져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서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들어가 9년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다가 혜가(慧可)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 법을 전하셨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 33대가 되고, 육조스님 이후로 오종가풍이 벌어져 중국 천지에 선풍이 크게 진작을 했습니다. 그 오종가풍 가운데 임제종의 활구참선법이 한국에 전해졌습니다.

조선에 와서 수 백년 간 교풍(敎風)이 성하고 선풍(禪風)이 다소 침체한 감이 있었으나, 백여 년 전에 경허선사가 대강사로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시어 종풍(宗風)을 중흥하셨습니다. 그 밑에 만공선사를 비롯한 육대 선지식이 배출되고, 오늘날 활구참선법이 이 땅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3) 화두란 무엇인가?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나는 누구인가?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 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성품이다· 주인공(主人公)이다·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놨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 천만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 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 천만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 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 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덥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 갔다 하고, 또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 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 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들도 일생, 이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 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 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우리 밖의 모든 사물)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 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앉었을 때도·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 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5) 이뭣고 화두법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 라고 합니다. 표준말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확히 쓰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석자입니다. 그래서 참선 해나가는 데에는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왔습니다.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뿐이어야 합니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 때는 슬픔에 빠져 가지고, 점점 슬픈 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묵은 생각을 일으켜 내 가지고 점점 더 슬픔에 빠집니다.
어떤 괴로운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앨려고 하지를 않고, 점점 근심이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더욱 더 연상을 해내서 더 근심에 빠집니다.

성이 날 때에는 빨리 그 생각을 돌이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앉도록 해야 자기에게 유익할 텐데, 점점 성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고약한 그 지나간 생각을 되살려 내 가지고 더 깊이 그 성나는 생각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 들어갑니다.

이래 가지고 중생은 불붙은 데다가 스스로 석유와 휘발유를 끼얹어 가지고 점점 더 불을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 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에 빠져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 한 생각이 원인이 돼 가지고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좋지 않은 생각을 터뜨려 가지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괴롭히고 일까지 그르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니 생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습니까?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번 일어난다 허드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성나는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현재 생각이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뭣고......?" 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합니다.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서 성이 푹 솟구치더라도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뭣고 ?'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쪼꼼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며 참선을 하는 지성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 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스르르 숨을 들이마시되, 들이마시면서도 아까 그 '이뭣고' 한 그 의심의 그 여운이 그때까지 오도록 그렇게 조용하게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3초 동안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다가 조용하게 내쉴 때에 다시 또,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다가 차츰차츰 딴 생각은 줄어들고 '이뭣고 ?' 가 잘 되어지면, 두 번 들이마셨다 내쉴 때 한 번씩만 '이뭣고?'를 들다가, 나중에 더 익숙해지면 다섯 번 호흡하는 동안 '이뭣고?' 한번의 의심으로 쭉 이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부가 더욱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떴을 때, "이...뭣고......?" 한 번 해놓으면 하루 종일 그 ' 이뭣고?' 한번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될 때가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깨달을래야 안 깨달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이 바로 알 수 없는 화두 하나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를 들고서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팔만 사천 마구니(魔軍)가 엿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팔만 사천 마구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인데, 화두가 독로(獨露)한 사람한테는 와서 들어 붙지를 못합니다.

잠깐 잠깐 필요 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필요한 일을 적절히 처리하되, 나의 이 화두 일념은 근본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요, 우주법계의 주인공이 되어서 우주법계를 내가 요리해 나가고,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바로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많은 법문이 있지마는 그 말씀을 하나로 뭉치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공부  (0) 2006.07.06
견성 (見性) 2  (0) 2006.07.05
견성하는 법-석우스님  (0) 2006.05.28
*활구 참선법*-松潭  (0) 2006.05.20
참나(주인공)를 찾아라  (0) 2006.05.20

견 성 (見性) / 석 우


새해가 되었으니 견성하는 법을 올립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부처입니다.
깨닫던지 못깨닫던지 그 본질이 부처입니다.
금년에는 자기를 깨달아 행복하고 즐겁게 한세상 살아봅시다. 

그런데 지금부터 하는 제 말을 듣고 바로 견성하려면
마음이 정성스러원야 합니다. 혹시라도 무시하는 마음이 있거나
지나치게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하면 안됩니다.

마음을 열고 조용히 읽다 보면 제 말이 이해될 것이고
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러 종소리를 넣어두었으니까 이 종소리를 듣는 자가
바로 자기이고 부처임을 한순간 깨닫기 바랍니다.

깨달으면 견성이고 견성하면 바로 부처입니다.
깨달을 때 몸에서 스파크현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은 단지 이해함이 깊은 것이고 머리를 치는 것일 뿐입니다. 

이해가 안되는 사람은 여러번 읽어보시고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 사람은
꼬릿말에 무엇이 이해안되는 것인지 질문해주십시오.

혹시 견성에 대하여 다른 데서 다르게 이해한 사람이 질문하고 싶으면
꼬릿말에다 하지 마시고 스님과의 대화방에다 질문해주십시오.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 예컨대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
더러움과 깨끗함 등은 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마음 깨달으면 천하가 태평해지지만 한마음 어두우면 천하가 어두워집니다.
오늘은 견성을 주제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옛날 육조스님은

"자기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을 본성을 본다고 말한다(自識本心是見本性)",
"자기 성품을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미혹을 벗어나면 곧 깨달음이고
이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自性迷卽是衆生離迷卽覺覺卽是佛)"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본성을 알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고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대만족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바로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자기를 알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요,
자기를 모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 이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견성에 대하여 황벽스님은 완릉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성품이 곧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이 곧 성품이니 성품으로써 다시 성품을 보려고
하지 말라. 또 들음이 그대로 성품이니 성품으로써 다시 성품을 들으려 해서는 안된
다."

여기서 성품은 사람의 심성(心性)을 말합니다. 위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은볼 수 없으나 보는 작용이나 듣는 작용을 통하여 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니
심성을 보아서 알려고 하지 말라'

는 말입니다.

왜냐면 심성은 형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수천년을 들여다보아도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성품을 보려는 것은 헛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본성,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성품(心性)은 본래 비어서 볼 수 없고
다만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물건이 보일 때 그것은 바로 마음이 보는 것이므로 바로 이때 마음을 알 수 있고,
종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를 듣는 자가 바로 마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은 그 작용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
마음의 실체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은 비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마음은 비었다고 아무 작용 안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만 가지 작용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오묘함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여러분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참 자기는 물체처럼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유추해서 '아, 이것이구나!'
하고 깨달아 아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견성이라 하고 자기 성품을 알았으면 바로 부처를 회복한 것입니다.

나는 우주 그 자체입니다. 우주를 감싸고 있는 태허공(太虛空)이 바로 나입니다.
조용히 빔으로 돌아가 공(空)을 느껴보십시오. 공이 나입니다. 공은 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공은 마음의 뿌리(心性)가 되었습니다. 몸은 빈 성품을 바탕으로 해서 갖가
지 마음의 세계를 만든 것입니다. 바로 행복과 불행, 전쟁과 평화, 더러움과 깨끗함
등이 그것입니다.

위의 말을 확실히 이해하였으면 그대는 이제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똑같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당신 자신을 깨달았다면 마음이 만들어 놓은 갖가지 세계는 단지 당신이
만든 환상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갖가지 개념과 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 가치와 개념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래 빈 것입니다. 빔은 고요합니다. 고요한 세계는 고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원래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원래 행복합니다. 그동안 당신은
자기 본성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허상에 집착하였고 욕망을 일으켜 행복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당신의 본 모습을 깨달음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회복한 것입니다.
당신은 일순간 미혹을 벗어나 바로 부처가 된 것이고 동시에 모든 의혹을 씻어내고
대평온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제 그 어떤 유혹에도 끌려가지 말고 당당하게 우주의 주체로써 살아가십시오.
그 어떤 존재나 어떤 사상이나 개념에도 유혹되지 말고 빔 그 자체를 지키며 부처로서
부처의 행을 하면서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지식과 행동을 사용하기 바랍니다. *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견성 (見性) 2  (0) 2006.07.05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활구 참선법*-松潭  (0) 2006.05.20
참나(주인공)를 찾아라  (0) 2006.05.20
자연 그대로가 진상[眞理:진리]이다.  (0) 2006.05.20


*활구 참선법* 활 구 참 선 법 * 참 선 파수오경간월출 芭峀午更看月出 두견성리목장려 杜鵑聲裡牧將驪 원앙수출종교간 鴛鴦繡出從敎看 불파금침도여인 不把金針渡與人 뾰족한 산봉우리에 달뜨는 것을 보고,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 원앙새 수 놓은 것 보여주어도, 수놓은 금침은 주지 못하네. '파수오경'의 오경은 낮 '오'(午)자 오경입니다. 달은 밤에 뜨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낮 오경에 달뜨는 것을 보느냐? 이 '파수오경 간월출'은 볼래야 볼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수 없고, 만져볼래야 만져볼 수 없는 한 물건을 깨닫는 도리를 표현한 것이고 ,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 하는 것은 내가 나를 깨닫고 그 도리에 입각해서 깨달은 뒤에 수행해 나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원앙새' 수놓은 것 보여주어도 수놓은 금침은 주지 못하네.' 참선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며, 그 길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해탈을 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음으로써 나도 영원히 행복하고 모든 중생도 영원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소원이 있다 하더라도 바른 수행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바른 길을 알았다 하더라도, 쉬지 아니하 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가지 아니한다면 도업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천년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불교를 펴 시기 이전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참나'는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지 도 모르면서도 어려서부터 '대관절 이 인생이란게 무엇이냐?'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디에서부터 와가지고 한평생을 희노애락의 많은 고비고비를 겪으면서 마침내는 일생을 하직하고 어느곳으로 또 가느냐?' 생각하면 생각해 볼수록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성현들도 이 문제를 위해서 많은 힘을 거기에 쏟았던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말로써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고 귀를 통해서 들어가지고 해결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이론으로 따져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생의 힘을 다 소비한다 하더라도 이론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선법 을 통해서 깨달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아는것에 불과한 것이고, 참선을 통해서 도달하는것, 그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과 아는 것과는 전혀 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론을 통해서 불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마침내 중생의 사량 분별심(思量分別心)을 조장하는 결과 밖에는 안되는 것이라 그걸 가지고는 생사해탈이 아니되는 것입니다. * 활구선(活句禪), 사구선(死句禪) 요새 우리 나라 뿐만아니라 서양에서까지도 널리 보급이 되고, 붐이 일어나서 너도 나도 참선을 하려고 하고, 또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 만은 참선은 두가지 경향이 있읍니다. 하나는 - 살 활자 글귀 구자 - 활구참선(活句參禪)이고, 또 하나는 - 죽을 사자 글귀 구자 - 사구참선(死句參禪)입니다. 사구 참선은 무엇이냐? 참선을 하되,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하는 그런 참선, 공안 또는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 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참선, 그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활구참선은 선지식으로부터 공안 하나를 받 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은 당장 처음 시작할 때부터 꽉막혀서 뒤를 돌아봐도 꽉막히고, 왼쪽 오른쪽을 둘러봐도 꽉막혀서 한걸음도 나아갈래야 나아갈수 없는 상 태로 지어가되, 한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참 나를 깨닫는 길인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차츰 발달해감에 따라서 사람들은 점점 약아져서 힘을 적게 들이고 쉽게 목적한 바에 도달하려는 생각들을 많이하 게 됩니다. 참선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런 약은 생각을 가지고는 되지않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보가 되어가지고, 다만 목적지 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기의 온갖 지식, 상식을 다 내버리고 백지 상태로부터 공부를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공부 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해감에 따라서 차츰 무엇인가 얻어지는 바가 있어야만 되지만, 이 참선공부는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에 다 버릴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만큼 공부에 빨리 힘을 얻게되는 것이고, 미련 때문에 버리지를 못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그만큼 늦어지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 입니다. 활구참선을 하려면 그동안에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것 - 불교에 관한 것이건,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의 말씀까지도 - 전부를 다 놓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만 바보가 되어서 하라는 대로만 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 자 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가져라.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하라. 셋째, 생각을 옳게 지어가라.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있는 가부좌, 오른다리를 구부려서 왼쪽무릎위에다가 올려놓고, 또 왼쪽다 리를 구부려서 오른쪽 무릎위에다가 올려놓는 것입니다. 다리가 굳어서 잘 안되는 분도 있을줄 압니다만, 자꾸 해 버릇하면 익 숙해지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일생동안 의자생활만 해서 이 책상다리를 할 수 없을만큼 굳어져 있지만은, 그사람들도 얼마 동안만 연습하면 가부좌를 우리보다도 더 오랜 동안 잘 하는 것을 봤읍니다. 가부좌하는 것이 참선의 기본자세입니다. 자꾸 익 혀서 되도록 하면 그 굳어져 있던 힘줄이 서서히 늘어지므로 해서 건강에도 좋은 것이니까요. 틈틈이 가부좌를 연습하시기를 바 랍니다. 그러나, 꼭 가부좌를 해야만 참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가부좌를 해도 좋습니다. 오른발을 왼쪽무릎위에다 올려놓 고 하다가, 다리가 저리거나 아프면 발을 바꾸어 놓고 반가부좌를 해도 좋습니다. 오른발을 왼쪽무릎위에다 올려놓고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발을 바꾸어 놓고 반가부좌를 해도 무방합니다. 다리를 그렇게 한다음에는, 오른손바닥을 위로하여 왼쪽발 복숭 아뼈 위에 올려놓고, 왼손을 펴서 오른손위에 포게 놓은 다음, 양 엄지손가락끝을 가볍게 맞댑니다. 너무 힘주어 맞대려고 하지 말고 또 떨어지지도 않도록 하되 엄지손가락의 모습이 아주 곱게 되어야 합니다. 위로 삐쭉 올라가거나 삐뚤어지지 않아야 합 니다. 손의 모습을 보기만해도, 지금 그사람의 생각이 안정되었나, 어떤 망상속에서 곤두박질을 치고 있나, 또는 졸음에 빠져있 느냐, 그런 것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참 딴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에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두서없 이 이 생각 저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손장난을 하기도 하고 손이 삐뜰어져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 손만 보면 그 사람이 옳게 화두를 들고 있나 안들고 있나를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손모습을 잘갖는 것이 대단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앉은 자 세가 뒤로 넘어가거나 앞으로 기울여지거나 좌우로 기울여지지 않아야 합니다. 두 귀는 어깨위에 수직으로 놓이게 하고 고개도 전후좌우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코끝은 단전위에 수직선상에 놓이도록 합니다. 몸도 바르게 해야하고 고개도 바르게 해 야 한다 그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금니부터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가 대는 것입니다. 눈은 평상으로 뜹 니다. 너무 똑 부릅뜨면 생각이 산만해지기가 쉽고 너무 가늘게 뜨면 졸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성하고 적적하며(惺惺寂寂), 적적하면서 성성해야 하므로(寂寂惺惺), 처음 시작할 때부터 평상으로 뜨는 습관을 들이도록 합니다. 눈은 평상으도 뜨되 자기 앉은 자리로부터 3미터 전방에다 시선을 떨구면 되는 것입니다. 시선을 떨군다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거기가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지, 3미터의 어떤 한점을 의식으로 응시하라, 그런것은 아닙니다. * 단전호흡 우리의 의식은 오직 배꼽밑에 1촌 3푼, 단전(丹田)에다가 집중해야 합니다. 어떻게 집중해야 하느냐? 보통 가슴으로 호흡하 지만 참선하는 사람은 단전으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 마시되, 너무 가득 들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이마시되, 숨을 들이마심에 따라 단전부위가 블룩해지고, 3초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단전이 차츰차츰 훌쭉해지도록 온 의식이 거기에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무리하게 잔뜩 들이마신다든지, 들어마신 상태에서 너무 오래 억지로 참는다든지 하면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부작용이 일어나는 수가 있으니까, 무리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단전호흡을 잘하면 육체적 피로 와 정신적 피로가 회복이 되며 정신이 안정되고 몸이 가벼위지고 머리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 수식관 앉아서 하는 것이 기본자세이지만, 매우 피로 했을때나, 정신이 착잡할때 그리고 잠이 안올 때는 누워서 하는 것도 효과적입니 다. 팔다리를 뻗고 편안하게 누워서 단전부위에다가 두툼한 책 한권을 올려놓습니다. 그래가지고 숨을 들이마시면, 아랫배가 불룩해지니까 책이 약3센치가량 위로 올라가고, 올라간 상태에서 악3초 동안 머물렸다가, 조용히 내쉬면 아랫배가 홀쭉해지니까 따라서 책도 한3센치 내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마다 하나, 둘,.. 하고 세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세어 올라 가고, 열에서 하나까지 세어내려옵니다. 이것이 수식관입니다. 중간에 딴 생각이 나서 몇까지 했나 막연하면, 다시 하나에서 시작하고 해서, 잘되면 이십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또 그게 잘되면 삼십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합니다. 해서 백까지 올라갔 다가 내려오도록 아무 실수없이 되면 참선해 나가는데 기초가 아주 훌륭하게 닦아졌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큰 건물을 지우려고 할 수록 암반이 나오도록 깊이 파서 기초공사를 잘해야 하는 것처럼, 대도를 성취하려면 그 고초인 자세와 단전호흡을 완벽하게 해 나갈 필요가 있읍니다. 이런 기초를 허술하게 하고 아무리 건물을 잘 지어봤자 얼마안가서 와우아파트와 같이 무서운 사고 가 나게 되는 것처럼, 참선도 기본자세와 호흡법을 잘 모르고 덮어놓고 화두만 맹렬히 들고 나가다가는, 백이면 백 위장병이나 상기병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기본자세와 호흡법을 바르게 알고 해 나가야만 되는 것 입니다. * 생각의 기멸 그 다음 세번째에 가서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느냐?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무엇인가 생각을 아니하고 있을수 는 없읍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사그러지면 또 딴생각이 생겨나고 -쓸데없는 생각, 쓸데있는 생각, 지나간 생각, 현재 닥치고 있는 생각, 앞으로 다가올 생각- 그러한 생각속에서 일분일분을 지내 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그러면서 일생이 지나가게 됩니다. 심지어 잠이 들어 있을때도, 꿈 속에서도, 그 생각은 쉬지 않고 움직 이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서 행동화 되면 좋은 행동을 하게 되고, 바르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이 행동화 되면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는 잠시도 쉬지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육도 윤회의 근원이 되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안하게 할려면 죽으면 안하게 될것 같지만 죽는다고 한들 현재 가지고 있는 이몸을 가지고서 는 끝나지마는, 이 몸 버린다고 해서 그 생각의 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또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나게 되고, 설 사 다음 몸을 받아 날때가지 몸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중음신의 상태에서도 우리 생각의 기멸(起滅)은 계속하고 있 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 참선만이 생각의 기멸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고인( 古人)의 송(頌)에, 참선수투조사관 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 妙悟要窮心路絶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종요로이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 활구참선의 법맥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하시고, 가섭존자는 아난 존자에게, 아난존자는 상나화수존자에게, 이렇게 해서 28대 달마대사까지 전해왔읍니다. 달마대사는 일백오십세가 되도록 인도 천지를 두루 다니시면서 이 정법을 펴시다가, 그 이전 에 중국에 불법이 건너갔다고는 하지마는 경전이나 불상이나 그런 상법(像法)만이 건너갔지, 내가 나를 깨닫는 부처님의 최상승 법은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백오십세의 고령으로 3년간의 항해 끝에 중국 남해안에 도달하셨읍니다. 그래가지고 맨처음에 양무제를 만나니 '짐이 절을 많이 짓고, 경전을 보시하고, 스님네 봉양을 많이 한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었읍 니다. 달마대사께서는 '공덕이 없읍니다. ' 그러면 어떤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가?' 달마대사께서 ' 확연해서 성스러운 것도 없읍니다' '그러면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읍니다!'하고 달마대사가 답했읍니다. 거기에서 대화가 끊어져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서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들어가 9년간 면벽 관심 을 하다가 혜가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 법을 전하셨읍니다. 부처님께서 육조 혜능스님까지 33대가 되고, 육조스님 이후로 오종 가풍이 벌어져 중국 천지에 선풍이 크게 진작을 했읍니다. 그 오종 가풍 가운데 임제종의 활구 참선법이 한국에 전해졌읍니다. 이조에 와서 수백년간 교풍(敎風)이 성하고 선풍(禪豊)이 다소 침체한 감이 있었으나, 백여년 전에 경허선사가 대강사로 확철대오 하시어 종풍(宗風)을 중흥하셨읍니다. 그 밑에 만공선사를 비롯한 육대 선지식이 배출되고, 오늘날 활구 참선법이 이 땅에 전해지게 된것입니다. 그러면 그 활구 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막힌, 알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 하는 참선법입니다. * 화 두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다음, 세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 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 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막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 심으로 내 가슴 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 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차를 탈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밥을 먹을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 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 물을 가득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며는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 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참선을 해나가는데 가장 핵심 이 되어야 할 화두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읍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읍니다. 여러분을 이끌고 계 시는 만덕장보살이 가자고 해서 왔다고 혹 생각할른지 모르지만, 그것은 표면에 나타난 한 조건에 지나지 못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에 온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 놈 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 구 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말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 에 지나지 못합니다. 마음이다. 성품이다. 주인공이다.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맣고, 중국에서 붙인 이름도 많고, 서 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려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만,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 을 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 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 부터 이몸을 받아나기 이전 에 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 천만번을 그 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 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 버리고, 사람 옷도 몇백만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 천만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 다녀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읍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에 온 그 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 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갑고 덥고 부드럽고 껄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리 이백리, 저 광주나 부산일도 생 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또 십년전, 이십년전, 삼십년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해서 시 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 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읍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 밖에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작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 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열반하신뒤 3천년이 된, 이 말세에 겨우 이 문제를 알고 이제야 그것을 하려고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있읍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읍니다. 금생에라도 알게된 것 은 천만 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 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겁 미래 언제 또 사람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의 어느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만은 금생에 일생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들도 일생 이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 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가지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이만 해 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다 하더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고 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 진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 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놓았으면서도, 그죽은 날만은 알지 못한채 살고 있 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에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 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 작용하는 바로 이 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 대관절 이 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아가지고 이승을 하직 할 때까지 단 일초동안도 이몸으로 부터 떠나보지 못한채 같이 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 놈의 모습을 본적이 없읍니다. 단 일초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 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 번도 본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 - 우리 밖의 모든 사물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 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 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차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 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 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 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 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 갈때에는 바로 그 걸어 가는 놈, 성 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 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때도, 슬플때 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앉았을 때도, 누웠을 때도, 바로 그 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 가 없읍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생각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이뭣고'라고 합니다. 표준말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확히 쓰면 일곱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 이뭣 고? 석자 입니다. 그래서 참선해 나가는 데에는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왔읍니다.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뿐이어야 합니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때는 슬픔에 빠져 슬픈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묵은 생각을 일으켜 내어 점점 더 슬픔에 빠집니다. 어떤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점점 근심이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연상해서 더 근심에 빠집니다. 성이 날 때에는 빨리 그 생각을 돌리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앉도록 해야 유익할텐데 점점 더 성이 일어나도록 고약하게 지나간 생각을 되살려 깊이 그 성나는 생각에 빠져 들어 가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불붙은 데다가 스스로 석유와 휘발유를 끼얹어 점점 더 불이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읍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 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에 빠져 들어가, 나중에는 그 생각이 원인이 되어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좋지 않은 생각을 터트려 다른사람 마음까지 괴롭히고, 일까지 그르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니 생 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읍니까?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번 일어난 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읍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것이건, 나쁜것이건, 슬픈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성나는 생각이건 , 과거 생각이건, 현재 생각이건, 그것도 상관이 없읍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자 마자 바로 이뭣고? 이렇게 합니다. 무슨 기 분 나쁜 소리를 들어서 성이 푹 솟구치더라도 숨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 참선의 효과 지극히 간단한 이 한마디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깊이 명심하고 생활속에 응용해 나가고 실천해 나간다면 여러분은 한 달을 못 가서 차츰차츰 이 공부가 얼마만큼 소중하고 훌륭한 것인가를 느끼게 될 것 입니다. 두달, 석달, 반년, 일년 가노라면 여러분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있는 것을 느끼게 되고, 여러분 가족이나 친구 간에도 '하! 저 사람이 딴 사람이 됐다. 그렇게 신 경질을 잘 내고 경솔하고 괴벽한 성질을 가졌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저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라고 말할 것 입니 다. 물론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말할 것도 없지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수십가지 좋은 이득을 얻게 되는 것 입니다. 오늘 시간상 그것을 낱낱이 다 애기할 수는 없지만 우선 피가 맑아지고 피로가 풀리고 정신이 안정되고 정신통일이 됩니다. 여러분은 학생이니까 학생으로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고, 회사나 관공서에 나가시는 분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게 마련인데, 아까 말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과 아울러 화두를 잘 관조해 나가면 피로회복이 빨리 되고, 온갖 짜증 이 쉽게 풀어지며 정신이 맑고 안정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공부를 알고서 열심히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 활구 '이 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것인가 저런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에 가득 차있는 것입니다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의 고인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뭣고'하는 화두 하나 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1700 공안이 일시에 타파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조금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를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되어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며 참선을 하는 지성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읍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 놓았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 생사해탈을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 있겠읍니까? 이것은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 내쉴때 '이뭣고?' 다 내쉬면 스르르 숨 을 들이 마시되 들이마시면서도 아까 그 '이뭣고?'한 의식의 여운이 그 때까지 오도록 그렇게 조용하게 관조하는 것입 니다. 3초를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다가 조용하게 내실 때 다시 또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들이셨다가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다가 차츰차츰 딴 생각은 줄어들고 '이뭣고?'가 잘 되어지면, 두 번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 한 번씩만 '이뭣고?'를 들다가 나중에 더 익숙해지면 다섯번 호흡하는 동안 '이뭣고 ?' 한번의 의심으로 쭉 이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부가 더욱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떴을 때 '이뭣고? ' 한 번 해놓으면 하루종일 '이뭣고?' 한번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될 때가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깨 달을래야 안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이 바로 알 수 없는 화두하나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를 들고 서 밥을 먹고 똥도 누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팔만사천 마구니가 엿보지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팔만사천 번뇌망상인데, 화두의단이 돈독한 사람 한테는 와서 달라붙지를 못합니다. 잠깐 필요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 필요한 일을 적절히 처리하되 나의 이 화두 일념은 근본적 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는 것이요, 우주법계의 주인공이 되어서 우주법계를 내가 요 리해 나가고 내가 살아 가는 것옵니다. 내가 운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바로 불법이요 최 상승법 입니다.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많은 법문이 있지마는 그 말씀을 하나로 뭉치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법밖에 는 없는 것입니다. * 말세와 근기 말세다. 중생의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 이런 것을 주장하는 분 들이 있읍니다마는, 말세라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 이렇게 말씀을 해왔지마는 최상승법을 믿고 실 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 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 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면 그 사람 은 바로 정법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달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때 여러분은 정법시대를 만난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 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고 도업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 맺 음 시작할 때에 일은, 원앙수출종교간(鴛鴦繡出從敎看), 불파금침도여인( 不把金針渡與人)하는 것은 원앙새 수놓은 것은 여러분에 게 보여줄 수 있지마는, 원앙새 수 놓은 그 바늘은 여러분에게 줄 수 없다'. 이러한 내용의 게송이었읍니다. 여러분에게 '참나 '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이야기 해 드릴 수 있지마는 깨달음 그 자체는 여러분에게 줄 수가 없읍니다. 깨달음은 여러분 자신 이 깨달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줄 수 없읍니다. 여러분 자신이 실천을 통해서 깨달을 수 밖 에 없는 것 입니다. 금생약불종사어 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 後世當然恨萬端 금생에 이 자리에서 들은 말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내생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여러분에게 더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고 여러분들도 더 자세한 것을 듣고자 하시겠지마는, 오늘은 이것으로 말씀을 맺고 자 합니다. ***송담스님법문***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견성하는 법-석우스님  (0) 2006.05.28
      참나(주인공)를 찾아라  (0) 2006.05.20
      자연 그대로가 진상[眞理:진리]이다.  (0) 2006.05.20
      무심이도다  (0) 2005.12.01


       
      참나(주인공)를 찾아라
      주인공은 밝고 영원하고 지극하다. 
      주인공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도 있었고 
      설사 이 우주가 무너지더라도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다. 
      주인공은 본래 태어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다. 
      그 이름이야 뭐라하든, 
      불성 이라하든 자성불 이라하든 주인공은 영원한 생명의 실상, 
      자기의 실상이다. 
      주인공은 나의 주인이며 근원인 동시에 
      일체 만유의 주인이자 근원이며. 
      또,주인공은 삼계의 주인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울고 웃고 성내고 욕심부리고…. 
      이것을 다 누가 하는가 ? 
      누가 보고 누가 듣고 누가 말하고 누가 울고 웃는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나"이지 누구긴 누구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그게 "나"다. 
      보고 듣고 말하는 주체는 분명 "나"다. 
      그러나 그 "나"를 설명해보라고 하면 과연 설명이 가능 하겠는가? 
      영혼? 마음? 의식? 
      우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딱히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찾을 수도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설명하지 못하는 그 "나"를 우리는 "나"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사물을 본다고 할 때 보는 주체는 눈이 아니다. 
      눈은 다만 카메라 렌즈와 같은 장치요 기관일 뿐 눈이 보는 것은 아니다. 
      눈이라는 장치에 비친 영상을 보는 놈은 따로 있다. 
      따라서 눈이 보는 게 아니라 영상을 보는 그 놈이 진짜 눈이다. 
      눈 아닌 눈이다. 
      듣는 것도 귀라는 장치가 듣는게 아니다. 
      듣는 진짜 귀가 따로 있다. 
      몸 동작도 이 육신이라는 장치가 하는게 아니다. 
      움직이게 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 
      눈이나 귀나 육신은 다만 도구일 뿐인 것이다. 
      그 도구를 작동케 하는 데는 물론 신경조직과 두뇌의 작용이 따른다. 
      그러나 그런 신경세포를 움직이게 하는 주체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누구일까?, 
      영혼일까?.... 
      마음일까?..... 
      방금 죽은 사람의 경우 그 생사의 고비에서 
      삶과 죽음을 갈라 놓은 주체는 무엇일까? 
      기관이나 장치로만 보면 생사가 갈리는 그 찰나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육신은 생명체와 주검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변한 것은 무엇인가. 
      비유컨대 주검은 자동차를 버리고 운전수가 떠난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육신이라는 차를 버리고 떠난 운전수는 누구일까? 
      그것이 바로 "나"라면 그걸 영혼이라고 해야하나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나이지 누군긴 누구냐 하고 만다면 더는 말할 나위가 없다. 
      나의 정체를 모르고 그냥저냥 살겠다면 그뿐이다. 
      그러나 "나"를 모르면서 세상 온갖 일에 대해서는 아는 체하고 
      분별을 일으킨다면 모순이 아닌가?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는 줄 알고 세상 벌어진 것을 아는데 
      그 아는 주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태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의 주체를 알아야 남의 주체도 알 수 있고 동물, 
      식물의 주체도 알 수 있고 이 우주의 주체도 알 수 있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그 주체에 대해 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색깔도 맛도 모양도 없고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천지가 갈라지기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이름 붙일 수 없는 일체의 근본 이라고 하셨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나의 근본 주인이요 
      모든 것의 주인이며 
      일체의 형상법은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 하다고 하셨다. 
      고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그 주인자리가 한 생각 인연의 도리를 따라 
      형상을 나투었다가 사라졌다하는 
      나툼과 쓰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내가 나이지 누구긴 누구냐하는 그 나의 주체를 
      이름하여 주인공이라 한다면 이 육신의 나, 
      마음이다 영혼이다 하는 것은 
      저 허공같은 주인공의 나툼이다. 
      고로 주인공을 알아야 
      나의 정체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만 보고 
      남들이 말하는 말만 믿고 주절대지 말고 
      오직 실참으로 정진하고 정진하여 
      내 스스로 맛보아 느낄수 있는 
      참된 주인공의 의미를 알기 위해 
      우리,노력하고 노력 할수밖에....... 
      ***성불하소서()()()***
      ***화곡산 화엄정사 원오 합장***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견성하는 법-석우스님  (0) 2006.05.28
            *활구 참선법*-松潭  (0) 2006.05.20
            자연 그대로가 진상[眞理:진리]이다.  (0) 2006.05.20
            무심이도다  (0) 2005.12.01
              자연 그대로가 진상[眞理]이다.
              
            
              ◈[한 소리] 자연 그대로가 진상[眞理:진리]이다. 자연 그대로가 진상[眞理:진리]이다. 꽃이 피고 새가 날고 애들이 뛰놀며 한없이 소리치네.. 시냇물은 낮은데로 흐르고 불길은 위로만 타고 있다. 불은 뜨겁고 물은 차다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이 모자라는가 자연 그대로가 그대로 여여(如如) 함이 거늘... 뭇 생명들이 이 진리 안에서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계속하나 진리 자체는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자연스러움은 유일한 것이며 붓다의 지혜(智慧)로 가득차 있다. 말로서 표현 못한다면 그것은 만족한 것이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자체가 축복임에 틀림없다. 꽃의 향기는 손으로 만져 볼 수 없지만 온 누리 그윽히 그 향기 퍼져 가듯 진상 그 자체는 보이거나 만져 볼 수 없지만 아 아 그래도 지금 느끼고 있네... 진상을 싸고 도는 신비한 이 향기를... 한 마리 벌은 꽃 향기를 알고 저 꽃 속의 깊숙한 곳에 꿀이 있음을 아는 구나.......! 이 이치를 어떻게 하면 알겠는가! 있는 그대로가 진상(眞相)이며 그대로가 한 마음인 것을......... ***성불하소서()()()*** ***화곡산 화엄정사에서 원오 합장***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견성하는 법-석우스님  (0) 2006.05.28
            *활구 참선법*-松潭  (0) 2006.05.20
            참나(주인공)를 찾아라  (0) 2006.05.20
            무심이도다  (0) 2005.12.01

            평상심이 도이다

            ◈마음◈  평상심이 도이다- 마조 

            <평상심이 도이다>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汚染)되지만 말라.

            어떤 것이 오염되는 것인가?
            생사심(生死心)을 가지고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 모두 오염(汚染)이다.

            곧바로 도(道)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造作)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취하고 버림이 없고, 
            일시적이거나 영원함이 없고,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는 것이 
            평상심(平常心)이다.

            경(經)에 말하기를, 
            [범부(凡夫)의 행(行)도 아니고 
            성현(聖賢)의 행도 아닌 것이 
            바로 보살(菩薩)의 행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가고·머물고·앉고·누우며 
            때에 따라 사물을 대함이 모두 도(道)이다.

            왜냐하면 도(道)는 곧 법계(法界)인데, 
            온갖 묘한 작용이 

            모두 법계(法界)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조어록}-
             

            도는 법게이며 중도요 연기요 무아 공이므로 걸림이 없는 것이다

            평상심은 연기중도로서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양변을 떠난 마음이 곧 도요 평상심이요 무심이라한다,

            무심이 부처요 여래라한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禪 修行의 기본  (0) 2006.06.14
            견성하는 법-석우스님  (0) 2006.05.28
            *활구 참선법*-松潭  (0) 2006.05.20
            참나(주인공)를 찾아라  (0) 2006.05.20
            자연 그대로가 진상[眞理:진리]이다.  (0) 2006.05.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