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당하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제1구입니까?"
"3요(三要)의 도장을 찍어내니 붉은 점이 선명하고, 생각을 붙이기도 전에 주객이 분명하다."
오늘은 3구에 대한 것이네요.
3구는 한 마디로 체상용(體相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체상용(體相用)....
▶ 8.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을 자
▶ 체(體).....몸체, 중심적이고 보다 근원적인 것, 道의 실체
▶ 상(相).....모양, 체는 눈에 잘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모양, 만물, 체의 모양.
▶ 용(用).....작용, 체가 모양을 통하여, 혹은 물체를 이용하여 작용하는 것
그러니까 체는 만물의 근원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인데 그기서 현상계 相이 나왔으므로
갖가지 작용이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말하고, 움직이고, 계절이 있고, 꽃이 피고, 낙옆이 지고, 눈이 내리는 것은 다 用이라고 합니다.
동양철학은 체용(體用)으로 만물을 설명합니다.
마음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야요...
그렇지만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는 중요한 본질이고,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體라고 할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 마음이 작용하지 않을 때는 고요하나 사람을 만나서 작용할 때는 기쁘고,
슬프고, 괴롭고, 한심하고, 화나고, 우울하고 등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이것을 用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할 수 없는 고로 체이고
마음이 상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상입니다.
수행을 오래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은 얼굴이 고요하고 맑을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이나 행동을 보면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중요한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서로 뒤엉킨 경우에는 마음이 어디에 가도 편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혼 문제가 나오고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고 장차 혼자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만나도 웬지 편안하지 않고 얼굴에 수심이 있습니다.
기쁜 일이 없고 근심으로 지내다보닐까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딱딱하고 여유가 없어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相입니다.
대자연도 비오려고 하면 날이 찌프리고 기압이 떨어지고...맑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상입니다.
맑은 날씨도 그 자체가 상입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우주 현상계를 체용으로 설명하고 있고, 거기다 불교는 하나를 더 넣어 체상용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체는 눈으로 보이지 않으나 상은 눈으로 보이는 자연 그 자체이고
용은 자연이 변화되고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선서에서 체는 '심오한 법문' 입니다. 예를 들어
조주무자 화두나 뜰앞에 잣나무, 격외구 ...
등은 본질적인 것을 드러낸 것이고
할이나, 주먹이나 주장자를 들어보이는 것 등은 상을 드러낸 것이고
불자를 들어서 보이거나, 주장자로 때리거나, 멱살을 잡고 묻거나...등은 용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體를 보임은 격외구를 쓸 수 밖에 없고
예) 내일 말해주겠다, 서강의 물을 다 마시고 오라
相은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보여지는 것입니다.
예) 임제스님의 할, 주먹, 주장자
用은 직접 다가가서 상대에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니까
예) 멱살을 잡고 묻거나, 불자나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는 것, 주장자로 때리는 것 등입니다.
선은 원래 상등급 문답이기 때문에 체상용도 상등급중에서 이루어져 있으므로
선의 체상용 자체가 어렵습니다.
이 체.상.용을 삼요三要라고 합니다.
체는 보통 제 一句와 통합니다.
제 일구는 첫 마디라는 말인데
道의 핵심을 간단히 '한 마디' 로 보이는 것을 제일구라고 합니다.
군더더기가 빠지고 근원을 통한 골수적인 '한 마디' 입니다.
제2구도 있는데
첫 마디로 모르면 약간 설명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할을 하고 주먹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2단계이고 일종의 禪道의 相(象과 같음;모양상)을 보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한자에서는 相자와 象자는 같이 쓰입니다.
제 3구는 좀더 설명하는 것입니다.
삼요가 거의 다 본질을 설명하는 것 같아도 최후의 가르침은 듣는 자가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즉 설명하여도 본질은 말하지 않고 듣는자가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체.상.용. 제 3구까지 다 말하더래도 중요한 본질은 스스로 알아야지 그것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말안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옐들어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설명하는데
설명하는 사람은 단지 `마음이 고요해` 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어요.
고요한 것이 무엇이야 하고 물으면
"허공같아"
하고 말하거나, "씨끄럽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래도 모르면...."마음이 복잡하지 않단 말야 "
어디에 가도 움직이지 않고,.....도대체 마음이라고 끄집어 낼 것이 없어...
하고 가능한 고요한 상태를 설명해주지만
고요 그 자체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체험해야 해요.
그래서 나중에는 ....최후에 말하길
"설겆이 끝나고 흔들 의자에 앉아서 멕스웰 커피를 마실 때 스스로 알거야."
하고 말해줍니다.
그러면 그런 때를 당해보아야 압니다.
그런데 왜 하필 맥스웰이야? 왜 흔들 의자야? 왜 설겆이 끝 나고야? 하고 물으면
도대체 끝이 없어져요....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때에 따라서 체상용 삼요를 이리 저리 가져다 쓰지만 결국 깨달아 체득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지 선사가 가르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선은 가리키(直指)는 것이지
기르침(敎)이 아냐요.
선사는 가리키지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은 각자가 다 부처입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은 없어요.
기술이나 학문은 가르침이 있을 수 있지만 禪은 가리킬(指)뿐 가르치지 않습니다.
선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을 개발시키는 종교이고, 발명하는 종교입니다.
오늘 임제스님은 친절하게 제 1구와 제2구와 제 3구를 설명합니다.
선사들은 많은 말로 사람을 깨닫게 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짧고 간략합니다.
법문은 흔히 5분이나 10분 정도에 끝내고 법상에서 내려옵니다.
그렇게 간략하게 하는 이유는 간단 명료해야 사람들이 깊게 각인하고 깨닫기 쉽기 때문입니다.
말이 자꾸 많아지면 희석되어 본질을 이해는 하게 될지 몰라도 깨닫지는 못해요.
도는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는 깨달아야 자기 것이 되어요.
깨달아야 진리가 자기 몸과 같아지고 영혼과 같아져요.
그래서 선불교에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 듣고 마음이 훤히 열리게 되면 평생 그 진리는 안 잊어버리게 되므로 그 진리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선사들은 언제나 제 1구를 중시해요.
전강스님이 수행할 때 만공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제1구입니까?
만공스님이 지시하기를
영신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전강스님(속명:영신)이
네.
하고 대답하였는데
만공스님이 재차 지시하시길
"그것이 바로 제일구니라." 하고 말하셨어요.
이름을 부르자 네 하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일구라는 말입니다.
네....
라는 것에 8만사천 법문이 들어있고 일체 모든 도가 들어있고
예수님의 도도 있고, 공자님 도도 있고, 하나님도 있고, 브라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네' 가 제일구(핵심)입니다.
만공스님은 이렇게 쉽게 가리켰지만
오늘 여기 임제스님은 어떻게 가리켰는지 한번 봅시당... 제자가 묻기를
▶ "무엇이 제1구입니까?"
▶ "3요(三要)의 도장을 찍어내니 붉은 점이 선명하고, 생각을 붙이기도 전에 주객이 분명하다."
3요를 찍어낸다는 말은 3요 중에 아무 것이나 사용하니
3요는 아까 체상용이라고 했지요?
체를 쓰거나, 상을 쓰거나, 용을 쓰거나 ....어느 것을 쓰거나 상관없이
붉은 점은 도장의 색깔에 비유한 것인데 붉은 색이 분명하다는 것은 체가 언제나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체는 누가 말하거나 드러내거나 상관없이 항상 선명하고
사람이 한 생각 일으키기 전에 이미 주객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주객은 지난 번에 승 2명이 마주치게 되자 동시에 할할 때에도 말한 것인데
주는 주체자이고 객은 손님입니다.
주는 주인이고 선사이고 주지이고,,,,,객은 손님이고, 객승이고, 질문하는 자입니다.
부처님은 주이고 일체 중생은 객입니다.
그런데 통상 주객은 한 생각 일어나야 주객이 성립됩니다.
오늘의 주는 강의 하는 사람 저(무불)이고 여러분은 청중이요, 객입니다.
마음은 주이고 일어나는 생각은 객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주객이 분명하다니....
주객이라는 것은 항상 사람이 생각이 있고 난 뒤에 갈라지는 법인데
그렇잖아요. 누구는 주이고 누구는 객이구나 하고 분별이 서야 주객이 갈라지는 법이지
분별하지 않았을 때는 주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람이 생각하고 난 뒤에야 가치가 있게 되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무정물과 같다면 그 무정물에게 무슨 좋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석상과 같다면 자식이 무슨 소용 있고, 억지로 자식을 준다고 증명식을 한다하여도
그 자식이 네거리에서 돌로 맞아 죽는다고 하여도 하나도 안 슬퍼요.
왜냐? 생각이 없는 석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사람이 생각이 돌아와야 가치가 있고
부자이니, 가난이니, 슬프니, 우울하니 하지
생각없는 인간이라면 오늘날 이런 문명을 이룩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만드는 것도 마음이고
세상을 부수는 것도 마음이고
온갖 가치를 매기는 것도 마음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세상은 한 바탕 꿈이라고 하였어요.
인간의 마음이 만든 허망한 가치의 세계이기 때문에 세상 자체가 마음이 만든 꿈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본래 그런 가치는 없는 것인데 사람이 스스로 그 가치를 만들어 놓고 그 가치에 도달하면 기뻐하고
그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우울해합니다.
남아라면 한번 대통령이 되어야 해!
남아가 세상을 움켜쥐지 않으면 누가 움켜쥐겠어!
한번 태어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보는 거야.
라는 삶의 가치를 인간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허망한 마음이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런 허망한 가치에 매이지 말고 네 마음을 네가 스스스로 끌고 가는 자가 되어라.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어라.
가치를 네가 정할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너의 가치로 여기지 마라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남아로서 가장 행복한 것이다라는 가치에 이끌리지 마라
스스로 너는 완벽하고 가장 이상적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원래 너는 행복하고 붓다이다.
그 붓다의 즐거움이 고요이고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니 고요한 본성을 흔들지 마라
고요한 본성에 온갖 생각과 가치로 물들이지 마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너는 완벽하다.
라는 말을 수없이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야 주객이 있게 되요
주객자체가 비록 허망한 가치이지만...불교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그 주객이라는 가치가 서려면 생각이 일단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임제선사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아담과 이브가 탄생하기 전에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우주가 설립되기 전에
이미 주객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구라고 하였어요.
선은 여러분의 사념을 깨고 고정 관념을 깨버리게 해줍니다.
고정관념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항상 저변에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상식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임제스님의 제일구를 다시 한번 정리한다면
'무엇을 쓰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기 전에 주객과 체용은 이미 분명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제일구라' 고 하였어요.
이것이 이해가 안되는 사람은 만공스님의 제일구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영신아?
네.
그것이 제일구니라
`네` 라는 말에 일체가 들어있고 또한 일체가 끊어졌으니 여기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이번에 임제스님의 주객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과 통하는지 생각해보세요.
통하면 제일구를 알은 것입니다.
제일구는 선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제일구에서 다 깨달아야 해요.
제일구가 귀에 들어와야 합니다.
선에서 표현하는 격외구는 거의 모두가 제일구에 해당합니다.
상식과 이해를 넘어섰지만 그것이 어떤 중요한 것을 가장 핵심적으로 잘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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