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사구게

 

 

제 일 사구게: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第五

 

 

                  " 범소유상 (凡所有相 )

 

                    개시허망 (皆是虛妄 )

 

                    약견제상비상 (若見諸相非相 )

 

                    견여래 (卽見如來)"

     

 

제 이 사구게;장엄정토분(葬嚴淨土分) 제10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其心)"



제 삼 사구게;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6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 (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 (不能見如來)


제 사 사구게;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제32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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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라! 그리고 또 놓아라!! 200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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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보면 허씨 범지(바라문)가 오신통을 갖춰서 꽃이 가득 핀 오동나무 두 그루를 신력으로 뽑아가지고 부처님께 문안드리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놓아라.” 하십니다. 그래서 나무를 놓으라고 하시는 줄 알고 오동나무꽃을 놓았습니다. . 또 “놓아라.”하십니다. 그래서 이쪽 오동나무도 놓았습니다. 또 “놓아라.”하십니다.

놓을 것이 없으니까! “부처님 저는 손에 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놓으라 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내가 그대에게 손에 들고 있는 그 꽃을 놓으라 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육근의 감각을 놓고 육진을 놓고 중간에 육식을 놓아서 다시는 놓을 것이 없는 데 가면 그때 네가 생사가 없는 데 가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뭇 이해하기가 쉬운 대목입니다. 우리 생각,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이라는 십팔계(十八界)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인 이것으로는 진리의 무한성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육근·육진·육식이라는 이 마음이 무너져버리고 끊어져버렸을 때 그때 바로 완전무결한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무한성, 그 무한성을 직접 제시한 것이 화두(話頭) 즉 공안(公案)입니다. 참선공안입니다.

그런데 이 참선공안은 이론으로 따져서는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오직 알려고만 하는 이 모르는 마음으로 참구해들어갈 때 마침내 육근·육경·육식 이것이 무너지면서 자기 진리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입니다.

옛날 당나라 중기에 저 유명한 마조스님과 방거사의 얘기입니다. 방거사가 마조스님께 여쭙기를,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삼라만상이 다 무너지고 변해가고 늙고 병들고 세상이 다 변해가고 어떤 것도 변치 않는 것은 없는 것인데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과 상관 없는 자, 죽지 않는 자, 불멸의 자, 진리 그 자체는 무엇입니까? 하는 대진리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 물음입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방거사 묻자. 마조스님의 대답이 “단숨에 서해바다를 다 마시고 오너라. 그러면 내 일러주마.”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일성(一聲)입니다. 이에 대해서 말을 붙여서 설명하게 되면 그 본의를 일어 버리게 됩니다. 억지로 설명을 하자면 한 잔의 물도 다 못 마시는데 서해바다를 다 어떻게 마신답 말입니까? 이것은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는 개소리, 닭소리, 말소리, 새소리 입니다. 그런데 서해 바닷물을 다 마신다? 상식 이론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된다. 안 된다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경험된 상식이나 지식, 놀리적인 이론으로 하려고 해봐야 모두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생각길이 끊어질 때 정말 단숨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는 도리가 거기서 나옵니다. 입은 자그맣고 배는 적고 서강의 물은 한없이 크고 그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논리적인 생각들을 내는 것, 그러한 우리의 인식구조 의식구조 모두가 끊어져버려야 그 때에 정말 비로소 서강의 물을 마시는 도리,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도리, 천지 삼라만상 일체가 변해도 변치 않는 도리, 그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에서는 이와 같이 일체가 걸림없는 근본적인 진리의 실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는 자타(自他)의 주관과 객관, 신심(身心)이란 주체와 객체로 미치지 못하는 바다, 즉 우리 스스로나 남의 마음, 그 몸과 마음, 생각이나 이론 가지고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생수명이 뜬생각이라고 했듯이 중생이고 오래 살고 하는 이런 생각들이 뜬생각들입니다. 이 맑고 투명한 무한대의 본성, 이 진리, 이것을 닦아가는 것이 선나(禪那), 즉 선(禪)입니다. 즉, 선은 마음의 분별적 이해를 내려 놓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나라는 한계, 인간이라는 한계, 고정된, 인식의 한계, 오주와 내가 떨어져 있다는 단절된 생각을 내려 놓을 때 바로 우주가 바로 나요. 바다가 바로 나의 작용인 것입니다.

구름이 가고 구름이 오니
저 허공에 무슨 더하고 덜할 것이 있을 것인가?
물거품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큰 바다에
바닷물이 늘고 주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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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심명(信心明)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 하니라. 텉끝 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사이로 벌어지나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현명한 뜻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둥근 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치하고 버림으로 말미하마 그 까닭에 여여 하지 못하도다.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2007. 05. 18. 심우

      출처 : 백룡초등학교3회
      글쓴이 : 尋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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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禪修行의 기본

      가) 자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가부좌, 오른 다리를 구부려서 왼쪽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고, 또 왼쪽 다리를 구부려서 오른쪽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습니다. 지금 해 보셔도 좋습니다. 다리가 굳어서 잘 안되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만 자꾸 해 버릇하면 차츰차츰 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일생 동안 의자 생활만 해서 이 책상다리를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지마는 그 사람들도 얼마 동안만 연습하면 가부좌를 우리보다도 더 오랫동안 잘 하는 것을 봤습니다.

      가부좌하는 것이 참선의 기본 자세입니다. 자꾸 익혀서 되도록 하면은 그 굳어져 있던 힘줄이 서서히 늘어짐으로 해서 건강에도 좋은 것이니까 틈틈이 가부좌를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꼭 가부좌를 해야만 참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가부좌를 해도 좋습니다.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하다가 다리가 저리거나 아프면 발을 바꾸어 놓고 반가부좌를 해도 무방합니다.

      다리를 그렇게 한 다음에는, 오른 손바닥을 위로 해서 왼쪽 발 복숭아뼈 위에다가 올려놓고, 그 다음에 왼손을 펴서 오른손 위에다가 포개 놓은 다음, 양 엄지손가락 끝을 가볍게 맞댑니다. 너무 힘 주어 맞대려고 하지 말고, 또 떨어지지도 않도록 하되 엄지손의 모습이 아주 곱게 되어야 합니다. 위로 삐쭉 올라가거나 삐뚜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손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생각이 안정이 되었나, 어떤 망상 속에서 곤두박질을 치고 있나, 또는 졸음에 빠져 있느냐, 그런 것을 이 손 모습만 보고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참 딴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에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두서 없이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손을 가지고 장난하기도 하고, 손이 삐끄러져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 손만 보면은 그 사람이 옳게 화두를 들고 있나, 안 들고 있나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손 모습을 잘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앉은 자세가 뒤로 넘어 가거나, 앞으로 기울어지거나,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두 귀는 어깨 위에, 수직으로 놓이도록 하고 고개도 전후좌우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코끝은 단전 위에 수직선상에 놓이도록 합니다 . 몸도 바르게 해야 하고, 고개도 바르게 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금니부터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가 대는 것입니다.

      눈은 평상으로 뜹니다. 너무 뚝 부릅뜨면은 생각이 산만해지기가 쉽고, 너무 가늘게 뜨면은 졸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성하고 적적(惺惺寂寂)하며, 적적하면서 성성(寂寂惺惺) 해야 하므로 처음 시작할 때부터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합니다. 눈은 평상으로 뜨되, 자기 앉은자리로부터 3미터 전방에다 시선을 떨구면 되는 것입니다. '시선을 떨군다' 하는 것은 보려고 하면은 거기가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지 3미터 지점의 어떤 한 점을 의식적으로 응시하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 호흡

      1) 단전호흡


      우리의 의식은 오직 배꼽 밑에 일촌 삼푼에다가 집중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집중을 하느냐? 보통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만, 참선하는 사람은 단전(丹田)으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마시되 너무 가뜩 들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이마시되, 숨을 들이마심에 따라 단전 부위가 볼록해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단전이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온 의식이 거기에 집중이 돼야 합니다. 너무 무리하게 잔뜩 들이마신다든지, 들이마신 상태에서 너무 오래 억지로 참는다든지 하면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부작용이 일어나는 수가 있으니까 무리가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

      이렇게 단전호흡을 잘하면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회복이 되며 정신이 안정이 되고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앉아서 하는 것이 기본 자세이지마는 매우 피로했을 때나, 정신이 착잡할 때, 그리고 잠이 안올 때는 누워서 하는 것도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2) 수식관(數息觀)

      팔·다리를 뻗고 편안하게 누워서 단전 부위에다가 두툼한 책 한 권을 올려놓습니다. 그래 가지고 숨을 들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니까 책이 약 3센티 가량 위로 올라가고, 올라간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무른 뒤 조용히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지니까 따라서 책도 한 3센티 내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마다 '하나... 둘...'하고 세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세어 올라가고, 열에서 하나까지 세어 내려옵니다. 이것이 수식관(數息觀)입니다.

      중간에 딴 생각이 나서 몇까지 했나 막연하면, 다시 하나에서 시작하고 해서 잘 되면 20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또 그게 잘 되면 30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합니다. 해서, 100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도록 아무 실수 없이 되면 참선해 나가는데 기초가 아주 훌륭하게 닦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건물을 지으려고 할수록 암반이 나오도록 깊이 파서 기초공사를 잘 해야만 하는 것처럼, 대도를 성취하려면 그 기초인 자세와 단전호흡을 완벽하게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기초를 허술하게 하고 건물을 아무리 잘 지어봤자 얼마 안가서 와우아파트와 같은 무서운 사고가 나게 되는 것처럼, 참선도 기본 자세와 호흡법을 잘 모르고 덮어놓고 화두만 맹렬히 들고 나가다가는 백이면 백, 위장병이나 상기병(上氣病)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기본 자세와 호흡법을 바르게 알고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화두

      1) 생각의 기멸


      그 다음 셋째번에 가서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느냐?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무엇인가 생각 아니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사그러지면 또 딴 생각이 생겨나고, 쓸데 있는 생각· 쓸데 없는 생각· 지나간 생각· 현재 닥치고 있는 생각· 앞으로 다가올 생각. 그러한 생각 속에서 일분 일분을 지내고, 하루 하루를 지내고 , 그러면서 일생이 지나가게 됩니다. 심지어 잠이 들어 있을 때도, 꿈속에서도 그 생각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서 행동화되면 좋은 행동을 하게 되고, 삿(邪)된 생각이나 착하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이 행동화되면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의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육도윤회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안하게 하려면, 죽으면 안하게 될 것 같지만 죽는다고 한들 이 현재 가지고 있는 그 몸을 가지고서는 끝나지마는 이 몸 버린다고 해서 그 생각의 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또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나 게 되고, 설사 다음 몸을 받아날 때 까지 몸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중음신의 상태에서도 우리의 생각의 기멸(起滅)은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송(頌)에, "참선은 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이요, 묘오는 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종요로이 마음길이 끊어져야 한다> 하셨습니다.

      2) 활구참선의 법맥

      삼 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하시고,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아난존자는 상나화수존자에게, 이렇게 해서 28대 달마대사까지 전해 왔습니다.

      달마대사는 일백 오십 세가 되도록 인도 천지를 두루 다니시면서 이 정법을 펴시다가, 그 이전에 중국에 불법이 건너갔다고는 하지마는, 경전이나 불상이나 그런 상법(像法)만이 건너갔지, 내가 나를 깨닫는 부처님의 최상승법은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백 오십 세의 고령으로 3년간의 항해 끝에 중국 남해안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맨 처음에 양무제를 만나니, "짐이 절을 많이 짓고, 경전을 보시하고, 스님네 봉양을 많이 한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달마대사께서는, "공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대사께서, "확연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그러면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不識)!"하고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거기에서 대화가 끊어져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서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들어가 9년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다가 혜가(慧可)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 법을 전하셨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 33대가 되고, 육조스님 이후로 오종가풍이 벌어져 중국 천지에 선풍이 크게 진작을 했습니다. 그 오종가풍 가운데 임제종의 활구참선법이 한국에 전해졌습니다.

      조선에 와서 수 백년 간 교풍(敎風)이 성하고 선풍(禪風)이 다소 침체한 감이 있었으나, 백여 년 전에 경허선사가 대강사로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시어 종풍(宗風)을 중흥하셨습니다. 그 밑에 만공선사를 비롯한 육대 선지식이 배출되고, 오늘날 활구참선법이 이 땅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3) 화두란 무엇인가?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나는 누구인가?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 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성품이다· 주인공(主人公)이다·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놨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 천만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 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 천만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 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 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덥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 갔다 하고, 또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 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 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들도 일생, 이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 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 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우리 밖의 모든 사물)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 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앉었을 때도·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 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5) 이뭣고 화두법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 라고 합니다. 표준말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확히 쓰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석자입니다. 그래서 참선 해나가는 데에는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왔습니다.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뿐이어야 합니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 때는 슬픔에 빠져 가지고, 점점 슬픈 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묵은 생각을 일으켜 내 가지고 점점 더 슬픔에 빠집니다.
      어떤 괴로운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앨려고 하지를 않고, 점점 근심이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더욱 더 연상을 해내서 더 근심에 빠집니다.

      성이 날 때에는 빨리 그 생각을 돌이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앉도록 해야 자기에게 유익할 텐데, 점점 성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고약한 그 지나간 생각을 되살려 내 가지고 더 깊이 그 성나는 생각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 들어갑니다.

      이래 가지고 중생은 불붙은 데다가 스스로 석유와 휘발유를 끼얹어 가지고 점점 더 불을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 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에 빠져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 한 생각이 원인이 돼 가지고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좋지 않은 생각을 터뜨려 가지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괴롭히고 일까지 그르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니 생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습니까?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번 일어난다 허드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성나는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현재 생각이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뭣고......?" 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합니다.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서 성이 푹 솟구치더라도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뭣고 ?'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쪼꼼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며 참선을 하는 지성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 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스르르 숨을 들이마시되, 들이마시면서도 아까 그 '이뭣고' 한 그 의심의 그 여운이 그때까지 오도록 그렇게 조용하게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3초 동안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다가 조용하게 내쉴 때에 다시 또,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다가 차츰차츰 딴 생각은 줄어들고 '이뭣고 ?' 가 잘 되어지면, 두 번 들이마셨다 내쉴 때 한 번씩만 '이뭣고?'를 들다가, 나중에 더 익숙해지면 다섯 번 호흡하는 동안 '이뭣고?' 한번의 의심으로 쭉 이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부가 더욱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떴을 때, "이...뭣고......?" 한 번 해놓으면 하루 종일 그 ' 이뭣고?' 한번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될 때가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깨달을래야 안 깨달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이 바로 알 수 없는 화두 하나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를 들고서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팔만 사천 마구니(魔軍)가 엿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팔만 사천 마구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인데, 화두가 독로(獨露)한 사람한테는 와서 들어 붙지를 못합니다.

      잠깐 잠깐 필요 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필요한 일을 적절히 처리하되, 나의 이 화두 일념은 근본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요, 우주법계의 주인공이 되어서 우주법계를 내가 요리해 나가고,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바로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많은 법문이 있지마는 그 말씀을 하나로 뭉치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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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음력 11월 초하루 법문

       

                                         貞和 스님

       

      마음(心)

      알고, 좋고 나쁜 것을 알며 온갖 생각을 할 줄 아는 者(자),

      말하자면 의식작용의 본체를 이름 하여 마음이라 한 것이다.

      마음은 모양이 없고 물체가 아니니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의식작용의 일체 생각이 끊어진 곳이니 생각으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어떻기에 마음을 봄으로서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는가?

      마음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고 마음으로 돌아간다.

      과거, 현재, 미래의 무한한 시간과 공간과 유무(有無), 장단(長短),

      대소(大小), 피차(彼此)의 한없는 차별상과 희비고락(喜悲苦樂)등

      무한한 감정의 생멸 모든 것이 한 마음 속에서 기멸(起滅)하는 것이니

      마음은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즉,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모양도 없고 생각도 아닌 곳에

      신령스러운 지혜(靈智,영지)가 소소영영(昭昭靈靈) 뚜렷이 밝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자기의 참된 모습이다.

      수도(修道)란 마음을 닦는 것인데,

      마음 그릇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함부로 아무것이나,

      돌맹이나 잡고 닦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의 정체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릇된 생각으로 마음인 줄 알고 닦고 있으면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알고자 하는 자체가 바로 마음인 것이다.

      알고자 하는 생각을 좇아가면 끝이 없다.

      아무리 알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고 생각을 많이 해도

      점점 어지러워지고 괴롭고 헛수고만 하게 된다.

      그러니까 생각을 좇지 말고 생각하는 자체를 돌이켜 봐야한다.

      생각을 돌이켜 보면 곧 생각을 찾을 수 없다.

      생각을 찾을 수 없는 그곳에 생각 아닌 영지(灵智)가 밝아

      소소영영(昭昭靈靈)하지 않는가. 이 영지(靈智)가 모든 의식작용의 근본이다.

      생각을 돌이켜 생각 아닌 영지를 보게 되니

      이 영지는 이제 비로소 얻은 것이 아니고 본시 있었던 것이다.

      다만, 마음속의 생각을 집착해 있는 바람에 생각 아닌 마음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환상(幻想)이라 하겠다.

      이 환상이 장애물이 되어 생각 아닌 본 마음을 못 본 것이다.

      이 환상을 놓아 버리면 환상 아닌 진심(眞心)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환상은 생멸이요 허망하다. 진심은 생멸이 아니요, 영원 불멸이요 진실이다.

      이 진심이 자기의 참된 모습이요 부처라고도 한다.

      이 진심은 나고 죽은 일도 없다.

      생각이 천만번 나고 죽더라도 마음은 나거나 멸하는 일이 없으니

      생사(生死)와 관계없는 것이다.

      생각을 돌이켜 생각 아닌 마음을 보면

      마음에는 일체 망념(妄念)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으니 공적(空寂)이요,

      그 가운데 싱그럽게 영지(靈智)가 있으니,

      진공묘유(眞空妙有) 또는 공적영지(空寂靈智)라고 한다.

      공적영지의 마음은 극히 고요하고 신령스럽다.

      어지러운 것이 아니니, 공적(空寂)이라 하고,

      목석(木石)과 같이 느끼고 알 수 없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영지(靈智)라 한 것이다.

      공적하고 신령한 마음속에 한 생각이 일어나

      그 생각을 쫓아가고 집착하는 바람에 본래의 공적영지한 마음을 잊어버리고

      생각은 다음 생각으로 쫓고 쫓아 마음은 점점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운 생각이 마음을 가리니, 점점 어두워진 것이다.

      어지러우니 불안하고, 어두우니 어리석은 것이다.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발버둥친 것이

      더욱 마음을 어지럽게 했으니 점점 더 어두워져서 공적영지했던 마음이

      혼침과 산란으로 변한 것이다.

      혼침과 산란 속에 젖어 있는 생각이 생사(生死)가 되어

      원인에서 결과로 되풀이 되니,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되어

      한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한 없이 생사(生死)에 윤회하게 된 것이다.

      한 없이 윤회하고 있는 동안에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나쁜 일도 있고,

      좋을 때는 행복하여 좋아하고, 나쁠 때는 재앙이라 하여 슬프고,

      괴로워하기도 하여(喜悲苦樂,희비고락) 모든 감정의 변화와 길흉화복의 온갖 일들이 있었다.

      이 좋고 나쁜 일들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면 다 과거 자기가 지은 행위가

      원인이 되어 현재의 자기에게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또 현재 자기가 짓고 있는 행위가 또한 원인이 되어

      미래의 자기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 어느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나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도리를 깊이 마음에 새겨 똑 바른 마음공부를 하여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은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인 공적영지한 본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

                            -성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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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놓아버려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많다 적다를
      분별하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옳은 것도 놓아 버리고
      그른 것도 놓아 버려라

      긴 것도 놓아 버리고
      짧은 것도 놓아 버려라

      하얀 것도 놓아 버리고
      검은 것도 놓아 버려라

      바다는
      천개의 강
      만개의 하천을 다 받아 들이고도
      푸른 빛 그대로요
      짠 맛 또한 그대로이다

      - 원효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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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발심 자경문

       

       

      1. 탐욕을 끊고 수행하라.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궁을 아름답게 꾸미신 것은 오랜 세월동안 욕심을 끊고 수행하신 까닭이요, 수많은 중생들이 불타는 집(火宅)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끝없는 세상동안 탐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막는 사람이 없는데도 천당에 가는 사람이 적는 까닭은 탐욕, 분노, 무지의 삼독심으로 자기의 재물을 삼기 때문이요, 유혹하는 사람이 없는 악도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과 온갖 욕심을 헛되이 마음의 보배로 삼은 까닭이다.
      어느 누가 고요한 산에 들어가 깨달음을 닦으려 하지 않을까마는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달콤한 일들에 대한 애욕에 얽매인 탓이다.
      비록 산사에서 마음을 닦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힘과 능력에 따라 착한 선행을 버리지 말라. 자기 한 몸의 욕심과 쾌락을 버리면 다른 사람이 성인처럼 존중할 것이요, 어려운 일을 참고 이기면 부처님처럼 받들 것이다.
      재물을 쌓아두고 탐내는 것은 악마의 무리와 같은 것이요,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것은 참된 부처님의 제자되는 길이다.

       

      2. 출가하여 용맹정진하라.
      산사가 있는 높은 산과 험한 바위가 있는 곳은 지혜있는 수행자가 살 만한 곳이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깊은 골짜기 또한 수행하는 사람이 머무를 만한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힌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애지중지 보살피더라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비단옷을 입어 보호하더라도 이 목숨은 반드시 마칠 때가 있는 것이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 굴을 법당으로 삼고, 슬피 우는 새 소리를 마음의 벗으로 삼아라. 추운 법당에서 절할 때 무릎이 얼음장 같이 차가워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여도 먹을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잠깐이면 백 년이 지나는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얼마나 살 수 있기에 수행하지 않고 졸기만 할 것인가.

       

      3. 참된 수행자가 되라.
      마음 속의 애욕을 모두 여읜 수행자를 사문(沙門)이라 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도를 닦는 수행자가 호화스런 비단옷을 입는 것은 개에게 코끼리 가죽을 입힌 것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수행자가 이성에게 연정을 품은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든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쾌락의 유혹에 가까운 세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내시고, 설사 도를 닦는 힘이 모자라더라도 산사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모두 성현들께서 그를 기쁘게 여긴다.
      재주와 학문이 있더라도 계율을 실천하지 않으면 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도 길은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비록 부지런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목적지가 동쪽인데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다.

       

      4.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라.
      정성어린 시주를 받고 축원하면서도 그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보시한 시주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며, 공양을 받고 경전을 외우며 축원하면서도 그 깊은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불보살님께 부끄럽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더러움과 깨끗한 것을 가리지 못하는 벌레를 싫어하듯이 성현께서도 출가 사문이 깨끗하고 더러움을 판별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네.
      세상일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데는 청정한 계율이 좋은 사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지 않고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등에 태우고 하늘에 오르려는 것과 같다.
      자신의 죄도 벗지 못하고서 어떻게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고서는 다른 사람의 공양이나 시주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수행이 없는 헛된 몸은 아무리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무리 아끼더라도 보전하지 못한다.
      용상(龍象)과 같은 큰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아 있는 부처가 되고 싶거든 세상의 향락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모든 천신까지도 다같이 찬탄하나, 그렇지 않고 수행자가 여인을 그리워하면 착한 신장들도 글 버리고 떠난다.
      흙, 물, 불, 바람의 사대(四大)로 구성된 몸은 곧 흩어지는 것이므로 오래 살 수가 없다. 오늘도 벌써 저녁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세상의 향락 뒤에는 고통이 따르거늘 무엇을 탐내랴.
      한번 참으면 오랜 즐거움이 되는데. 어찌 도를 닦지 않는가. 도를 구하는 사람이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자들에게 수치스러운 행위요, 출가한 사문이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려는 행위 또한 군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5. 늙으면 수행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막는 말이 끝없이 많은데 집착과 탐욕을 끊지 못하며, 닦아야 할 수행은 끝이 없는데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며,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끊을 마음은 일으키지 않는다.
      오늘 하루는 끝이 없것만 오늘 한 번만 행한다는 생각에 악한 죄는 많아지고, 내일 내일 하고 미루는 내일은 끝이 없지만 착한 일은 날마다 줄어들며, 금년이란 한 해가 다함이 없거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하루가 지나가고 하루하루가 흘러서 어느덧 한 해 한 해가 바뀌어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망가진 수레는 굴러갈 수 없듯이 사람도 늙으면 수행할 수 없으니, 누우면 게으름만 생기고 앉아 있어도 어지러운 생각먄 일어난다.
      몇 생애를 닦지 않고 낮과 밤을 헛되이 세월만 보냈는데 또 헛된 몸을 얼마나 살리려 이 한 생을 닦지 않겠는가. 이 몸은 반드시 마칠 날이 있는 것인데 죽어서 다시 받는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 급하고 또 급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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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학인이 화두 공부하는법에 대한 경책.. 

       

      무릇 수행하는 일이 적은 일이겠는가.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하여

      일대사를 해결 하고자 하는 것이니, 성불하려면 자기(自己)마음을

      참구하여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로소이다.

       

      자기 마음을 찾으려면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 않으나 모두가 꿈임을 알고,

      사람 죽는다는 것이 아침이슬과 같아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가는 줄 알고, 죽으면 지옥에도 가고,

      짐승도 되고, 귀신도 되며, 한없는 고통을 받는 줄 생각하여

      세상만사 다 잊어버리고 항상 자기 마음을 궁구하되,

       

      선지식으로부터 간택 받은 화두를 의심을 내어 참구하되,

      읽어버린 물건 찾듯,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하며, 닭이 알을 품듯 하며,

      늙은 쥐가 쌀 궤짝 좇듯 하여 항상 마음을 한 군데 두어 궁구하되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잊어버리지 말고,

      의심하여 나가되 일을 하더라도 의심을 놓지 말고,

       

      그저 있을 때라도 의심하여 지성으로 하여가면

      필경에는 내 마음인 자성(법계성품)을 몰록 깨달을 때가 있으리니

      부디 신심과 분심을 내어 공부(의심) 하여야 하는 것이올시다.

       

      무릇 사람되기 어렵고, 사람되어도 수행하기 어렵고, 수행을 하되 부처님의 바른 법 만나기 어려운 것임을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이올시다.

       

      옛날 권선사라는 스님같은 이는 공부를 하다가 해가 질 때면 다리를 뻗고 울며,

      "오늘 해도 공연히 지내고 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다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하리다.

       

      예전에 동산스님이 글을 지어 이르기를,

      "출가 수행이라면 거룩하다는 이름도 구하지 말고, 재물도 구하지 말고

      그럭저럭 인연을 따라 지내면서 옷은 떨어지면 거듭거듭 기워 입고,

      양식은 없거든 가끔가끔 구하여 먹을지어다.

      턱밑에 세 마디 기운이 끊어지면 문득 송장이요,

      죽은 뒤에는 헛 이름 뿐이로다 .

      항상 허황한 몸이 몇 일이나 살 것인데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고

      내 마음을 캄캄하게 하여 공부하기를 잊어버리랴” 하셨소이다.

       

      내 마음을 깨달은 후에

      항상 그 마음을 보존하여 깨끗이 하고 고요히 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고 나아가면 한없이 좋은 일이 너무도 많을 것이니,

      부디 깊이 믿고 닦아나가면 죽을 적에도 죽음에 끄달려 가지 않고,

      내 임의대로 할 것이며,

      마음대로 극락세계에도 가고 가고싶은 데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올시다.

       

      오조 홍인대사 말씀에,

      "맹세하시되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세세생생 호랑이에게

      죽을 것이요, 내가 만약 너희를 속인다면 후세에 지옥에 떨어지리라”하시었으니,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 움직이지 않기를 산과 같이 하고

      마음 넓게 쓰기를 허공과 같이 하고,

      지혜로 불법 생각하기를 해와 달 같이 하여

      다른 사람이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내 마음으로 분별하여 참견말고,

      좋은 일을 당하든지, 좋지 아니한 일을 당하든지 마음을 편안히 하며

      무심히 가져서,

      화두 들어 의심하기를 남이 볼 때 등신같이 지내고,

      바보같이 지내며, 벙어리같이, 소경같이, 어린아이같이 지내면 마음에

      절로 망념이 없어 지게 되는 것이올시다.

       

      설사 세상일을 똑똑히 분별하더라도

      비유컨대 똥덩이를 가지고 음식 만들려는 것과 같고,

      진흙 가지고 흰옥을 만들려는 것과 같아서

      성불하여 마음 닦는데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이니,

      부디 세상일을 가리려고 시비하지 말라.

       

      다른 사람 죽는 것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여

      내 몸은 항상 튼튼할 것으로 믿지 말고,

      절대로 마음 찾아 깨우치기를 놓지 말라.

       

      한결같이 화두를 들어 의심하여 보고, 의심하여 가되,

      간절히 생각하기를 배고픈 사람이 밥 생각하듯

      잃어버린 물건 찾듯 하여 잊지 말고 간절히하라.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체 세상일이 다 허망하다 하시고, 중생의 모든 하는 일이 다 나고,

       죽는 법이라 오직 제 마음을 깨달아야 진실한 법이라” 하셨소이다.

       

      부처님 말씀에 “한번 진심을 내면 백만 가지 죄가 생긴다” 하셨으니

       

      첫째 화내는 마음을 끊으라.

      예전 스님네 말씀에 “화내는 마음은 호랑이와 뱀과 벌과 같이

      독한 것이 되고 가벼운 마음은 나비와 새가 되고,

      좀스러운 마음은 개미와 모기 같은 것이 되고,

      탐심 내는 마음은 배고파 우는 귀신이 되고,

      탐심과 화내는 마음이 많고 크면 지옥으로 가고,

      일체 마음이 모든 여러 가지 것이 되어가나,

      일체 여러 가지 마음이 일지 않으면 부처님이 되리라” 하셨다오.

       

      착한 마음도 어리석으면 지옥이나 축생이 되는 것이니,

      일체 마음(분별심)을 없애면 다른 데로 갈 것 없고,

      마음이 깨끗하여 혼곤하지 아니하면 캄캄한 데로 가지 아니하니,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이 부처님이 되어 가는 길이올시다.

       

      내 마음을 항상 의심하여 궁구하면 자연히

      고요하고 깨끗하여 지는 것이니 이 깨끗한 마음이 부처인것니라.

       

      화두의심이 간절하여 일체가 끊어질 때 고요하고 깨끗하여

      절로 마음을 보아 깨달아서(證悟) 부처를 이룸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곧게 가는 길이니 이렇게 하여 가도록하라 하리다.

       

      이 법문을 가끔 보고, 읽어 남에게 일러주면

      팔만대장경을 본 덕과 같고, 그대로 공부하면 일생에 성불할 것이로소이다.

       

      산은 깊고 물은 흐르고,

      각색초목은 휘어져 있어 이상한 새소리는 사면에 울고 적적하여

      세상사람은 오지 않는데 고요히 앉아 내 마음을 궁구하니

      내게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인가?

       

      공부를 지어감에 마음을 너무 급히 쓰면

      신병(상기병)이 날수 있으므로,

      마음을 가라앉혀 머리로 애써 계교하지 말고,

      편안하되 간절하게 참구하여 가도록 하라.

       

      오로지 간절하게360골절(骨節)과 84,000모공(毛空)의 전신으로

      의문을 일으켜 사량분별과 악지악각(惡知惡覺)의 번뇌 망상을

      던져 버리고 평생의 기력(氣力)을 다해 오로지 화두을 잡아야 할 것이오.

       

       

      화두 하나를 의심하여 부처가 오면 부처를 치고, 보살이 오면 보살을 치며, 밝음이 오면 밝음으로 치고, 어둠이 오면 어둠으로 쳐 의문을 일으키되

      의심하는 나와 의심되어지는 화두가 둘이 아닌 큰 의문 덩어리(大疑団)가 현전(現前)하게 되면, 나와 우주 전체가 의문의 덩어리가 되는 것이올시다.

       

      다시 말해 의심하는 나와 의심되어지는 화두가 온전히 하나 되어,

      하나 되었다는 것마저 없어지는 가운데서 화두 공부의 묘미와 비결이 있는 것이로소이다.

       

      절대 공(空)한 것까지 훌쩍 뛰어넘어 버릴 때

      대아(大我: 眞我)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니,

      마치 죽간(竹間)에 들어간 쥐가 앞으로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곳에 이르는 것같이

      화두의단 가운데 은산철벽에 이르러 한번 크게 죽고

      다시 크게 되살아나야 하는 것이올시다.

       

      화두를 들고 의심하되 좌선(坐禪)할 때뿐만 아니라

      행주좌와 어느곳 어느 때나 잊어버린 귀한 물건을 찾듯

      끊임없이 집중하여 의심하되,

      능동적(能動的)에서 수동적(受動的) 경지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량분별의 사고(思考)의 세계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올시다.

      화두를 의심하는 가운데 번뇌 망상이 생기면 그것을 쫓으려 하면

      그것 또한 망상이 되는 것이니

      세간의 법뿐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이외에는

      불법 안의 온갖 좋은 일 부처님의 말씀 까지도 모두가

      딴 생각(別念,잡념, 망념)이기  때문인 것이올시다.

       

      參學에는 화두말 가운데서 의심할뿐 어떤 현란한 말씀도 진리도

      불필요한 망념이요, 장애가 되는 것들인 것이로소이다.

       

      따라서 장황한 설명으로 법리를 내세울것도 없는 것이올시다.

      불법은 참으로 간단명료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아는것들로써 대비 대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로소이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화두의 도리를 알려고 의심을 깊이 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올시다.

       

      화두의 뜻을 알려고 간절하게 의심하는 思惟(一心으로 그것만을

      알려고 의심하면 선定으로 들게됨)가 참선 參究요,

      思量 計較(巧)는

      아는것으로 맞춰 들어가는것의 큰차이임을 알기를 당부하리다.

      이렇게 사량 계교하는 공부는 병든 공부요,

      잘못하는 轉到된 공부라 하는것이올시다.


      오로지 화두를 들어 반성하고 한가지로 깊이 의심하여

      회광반조(廻光返照, 한 생각 일어난 곳을 돌이켜 살피는 것)하면

      통발의 밑통이 빠지듯 할 것이올시다,

      이때가 오도(悟道)하는 찰나이며 일컬어 大悟見性이라 하는 것이로소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가지 경계를 보게 되기도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선(禪)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희경계(歡喜境界)의 증세이며 환마(幻魔)라고도 하는 것이올시다.

       

      경에 이르기를 변마(辯魔;幻魔)라 했으니

      이에 집착하거나

      이를 일대사(一大事)를 마친 결과로 착각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리다.()

       

      화두는 의심하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올시다.

      간절히 참구하노라면  일체가 끊어지는 경계에서 오직 그 화두의단만이 독로되어

      定에 이르게 되며 그때 의심이 깨어지고 확철하여 오도견성을 하게 되는 것이니

      분명히 명료(明了)하게 화두의 도리가 밝혀지는 것이올시다.

      이러할때 밝게 화두의 답이 절로 나게 되는 것이외다.

      간절히 닦으셔서 대오견성하시기를 바라겠소이다.

       

      화두간택은 아무렇게나 바겐세일 하듯이 받는것이 아니올시다.

      요즈음 흔히 자기도 확철히 깨닫지 못한 스님들이 쉽게 화두를 주곤 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우미한 처사인 것이니 숙제를 내어주는 선생이 자신도 알지 못한 문제를 숙제로 준뒤 그다음은 어찌 감당하겟소이까?

      봉사가 길안내 한다고 나서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자신의 근기를 살펴 그에 맞는 화두를 머리속에 징을 박듯 각인시켜 받아야 할것인즉

      반드시 명안종사를 직접 참문하여 받아서 그 지도아래 공부를 지어나가야 할 것임을 아시고, 바른 스승 만나 바르게 닦아 나가시기를 당부하오이다.

       

      화두를 단전에 두라, 1m앞에 두라, 머리에 두라는 등으로 가르쳐 주는 이들이라면 그 견처와 수행행각을 가히 알만하겠소이다.
      某甲이 일러준다면 "화두는 의심하는데 두라(둘것도 없지만...)"하겠소이다.

      화두는 오직 간절히 의심지어 갈뿐 두어야할 처소가 있을수 없는것이 아니겠오?

      처소를 둔다하면 의식을 나뉘게 되는 것이니 잘못된 공부가 되는 것이오.

      화두의심 외에는 일체 사량분별이 끊어져야 하는것이거늘 어찌 스스로 둘을 짓겠소이까?

      되묻겠는데 그럼 행주좌와 가운데 누워서는 그리고 공부가 간절하면 꿈에서도 이어져 하게 되는데 그때는 어디에 화두를 둘것인가요?

       

      다만 모르는 그것을 꼭 알겠다는 굳은 각오로 분심을 내어 가고옴에 항상 간절하면 놓으려해도 놓아지지 않을 것이니.
      크게 의심하시면 그 의단이 커져 인연이 도래하면 밑둥이 펑!뚤리듯 몰록 깨처들것이올시다.
      반드시 화두 가운데 알아야 할 낙처를 살펴서 의심지어 나가야 할 것이며,
      어떠한 아는것으로도 그 가운데서 알려고 계교하시면 않될것인즉 모두를 놓으시고

      단순히 그 화두의 도리만을 꼭 알겠다는 마음만으로 사유하시기 바라겠소이다.

       

      또 상기병 운운들 하는데 이것은 공부를 바르게 하지 못한 병이므로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받는다면 이런 병이 본래 없거늘 어찌 참선공부하는 이에게 생길것이리오.
      화두를 순일하게 의심지어 가지 못하고 안간힘을 써서 계교로 알아 맞추려 하는 잘못된 공부가 이름하여 상기병이라는 병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이니 이런 걱정하지 말고 처소와 능소를 여의고 다만 화두만을 왜? 또는 어째서? 하고 의심 의심지어 가도록 하오.

       

      화두는 실은 화두에 경중이 없소이다.
      그러나 의정이 쉽게생하고 않고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며 구경의 깨달음이란 달리있는 화두가 없소이다.
      다만 화두 하나로 확철대오 하고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공부지어가는 근기에 따름이올시다.

       

      첫째 화두는 반드시 답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외다.

      잘못들 알고 "화두는 답이 없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크게 모르는 소치이외다.

      화두가 답(법리)이 없다면 무엇을 의심 하며 무엇을 깨달아 알 것이리오?.

      화두를 타파하면 곧 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깨닫게 되면 자연 그 법리를 알것이요 그 안 도리를 방편으로 이를수 있는 것이로소이다.

      둘째 "아픈 것도 잊는다는 말에 대해서 일러주겠소.
      아픈 것은 아픈것이요. 어찌 잊고 참을수 있겠소. 잊는다 참는다는 것은 개인에 따라 인욕의 차이가 있을뿐이외다.

      공부를 참으로 이룬 선지식의 경계에는 참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과 하나되는 경지인 것이외다. 곧 "불이 불에 들어도 뜨거움을 모르는 것과 같다"한 것이외다.

      신심 의심 분심으로 크게 깨치시기를 기원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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