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不增不減 (부증불감 )

늘어남도 아니고 줄어듬도 아니니라.

불교의 법문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不二法이란 둘이 아닌 법이라는 뜻입니다.

둘이란 상대적인 양변의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는 존재하는 모든 현상계를 다 부정합니다.

그것이 형체가 되었건 비물질적인 무형체가 되었건 상관없이 다 부정합니다.

특이 둘(二)을 부정하는 법으로 유명합니다.

둘이란...생과 사,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 더러움과 깨끗함,

부자와 가난한 자, 부처와 중생....등 상대적인 세계를 말해요.

세상의 모든 개념은 결국 상대적인 언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가난한 자와 부자 영리한 자와 똑똑한 자 보살과 평범한 사람...

이 모든 것을 한마로 둘(二)이라고 해요.

그런데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부정합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불교의 심오한 세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무와 유를 다 부정하는데 여기 반야심경에서 색(존재)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라는 말도 일종의 양변을 부정한 말이고 유와 무를 부정한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경전에 유를 부정한 경우는 많이 나오나 무를 부정한 경우는 적게 나옵니다.

없는 것이 아니고 有를 부정하는 끝에 항상 無도 부정해야 한다고 앞을 유추하여 알라고 짧게 말할 뿐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상을 타파하라는 말이 수없이 나옵니다.

相(象과 同字)은 형상을 가진 것이든지

마음에서 생각하고 정해놓은 정신 세계든지 상관없이 다 상(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중생이 상에서 부처를 찾거나 음성에서 부처를 찾으면 절대 부처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어요.

부처는 상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형체를 말하기도 하나 마음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상입니다.

금강경은 철저히 상을 부수므로 해서 참 자기를 깨달아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상을 부정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러한 이유가 바로 불교는 무와 유를 부정하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모태로하고 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로 有, 즉 相이나 色(물질)을 부정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설법하셨습니다.

중생은 눈에 보이는 형상에 많은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눈앞에 어떤 현상에 유혹되는 삶을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 형상이 아침 이슬과 같이 허망한 것이고....

인생이 한낱 꿈과 같은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 조차도 원래 없는 것이니 그것을 깨닫고... 지금 몸뚱이는 업신이요,

연기처럼 하늘에 떠가는 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니 삶에 큰 의미를 두지 말고 .

삶은 꿈과 같은 것이니 집착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명예에도 집착하지 말고,

처나 자식에도 집착하지 말고 고요하게 무심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거의 모든 경전에 이렇게 有를 부정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어 설법하십니다.

이것은 중생의 병(病)이 유有쪽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여기서 혼란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전쟁도 유의 집착때문에 일어나잖아요.

일종의 有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유에 집착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웬만큼 불교 공부를 하면 모두 인생을 허망하게 보고 꿈 처럼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번에는 無病이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정신적인 고상한 것을 찾게 되요.  정신적인 고상한 것.....

바로 니르바나요, 깨달음의 세계요, 극락세계이고, 청정 불국토입니다.

그래서 그 니르바나(涅般)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은 病일 뿐입니다. 무엇을 찾고 얻는다는 것.....

이것 부처님의 눈에는 가소로운 것이고 무엇인가 조작하는 것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얻을 만한 가치있는 것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사들도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던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깨달으면 남이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사들이 그것조차도 버리라고 끝없이 쉬고 쉬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가르침 속에서 또 無病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병.....이것이 無病입니다.

분명 밥먹고 잠자고 걸어가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어찌 없다는 無에 걸려있는

것이 올바로 가는 것이겠습니까?

여기 가끔 와서 불교에 대하여 아는 소리를 한다는 사람들 가만히 하는 말 들

어보면 전부 無病에 빠져있어요.

그걸 가지고 뭘 좀 알았다고....깨달았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無病도 有病(존재가 사실이라고 집착하는 증세)만큼 심각한 병입니다.

그래서 선사들이 그것 無조차 버리라고 닥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무 아니면 유 를 선택하는 습관이 자동으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무병을 고치라하면 유병에 빠지고 유병을 벗어나라하면 무병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세계가 버젖이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무아니면 유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병도 벗어나야 합니다. 유무에 상관하지 말아야 해요.

동시에 두 측면을 다 버려야 합니다.

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면 어디가 無도 아니고 有도 아닌 세계이냐하면 바로 마음의 세계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 존재처럼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고 내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마음은 굳이 표현한다면 무심이라고 하지만 무심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니 무심이지요.

무심이라는 글자가 마음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찌 마음을 무심이라고 합니까.

문자에 매여있는 초심자는 무심이라고 말할 지 몰라도

말과 뜻을 벗어난 장부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무심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인데

그 놈은 모든 것을 맘대로 그렸다가 지웠다가 하고(생멸)

신도 만들고 우상도 만들고 존귀함도 만들고 미천함도 만들어요.

모든 것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허상을 세운 것입니다.

형체없는 마음이 우주의 주인입니다.

바로 붓다입니다.

그 붓다가 저마다 사람에게 들어가 있는데 자기가 누군인지 모르고 허상을

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선사나 선생님은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우주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다고 무無병에 빠져들면 안되요.

부처님 말씀은 없다는것이 아니고 '아니라'라는 말입니다.

수없이 그대들이 단정하고 결론 짓는 것

그것은 허망한 마음이 지은 것일뿐 더럽다 깨끗하다,

늘어났다....줄어들었다

부자다 가난하다....

그것은 모두 자기가 지은 것입니다.

나도 없는데....도대체 누가 부자이고 가난한 자입니까?

우주가 본래 공에서 탄생된 것이라 안개처럼 허망한 것인데

온갖 명칭을 스스로 세워놓고

가지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있고

조금 가지고 있으면 있다고 헛되이 남에게 뽐내고 자랑합니다.

엊그제 산에 올라가니까 산에 말없이 서있는 소나무들을 보니까

사람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나무는 무심으로 살아가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소나무보다 덜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나무는 생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뿌리가 잘려져 나가도 자존심을 상해하지 않습니다.

공해도 소음도 짜증내지 않고 잘 견디고 있고 나무를 잘라가면 못생긴대로

살아갈 뿐 못생겼다고 ....우울하다고,,,,

가을이 되어서 쓸쓸하다고 남괴롭히고 소주먹고 싶다고 강짜내지 않아요.

소나무에게는 깨달음도 한낱 욕망이 일어난 한 티끌일뿐 필요하지도 원하지 않은 채

죽는 날까지 왜 사냐고 묻지도 않고 왜 죽어야 하느냐고 묻지도 않은채

그냥 고요하게 살아갑니다.

뿌리가 잘려져나간채 흉물스럽게 몇가닥 뿌리로 겨우 지탱하고 있어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먼 바위 벼랑에 몇백년 난쟁이로 찬바람 거칠은 비바람을

맞으면서 고독하게 살아가도 고요하게 살아갑니다.

다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뿐 고요하고 고요합니다.

사람처럼 고통이 없고 삶의 애환이 없이 평생 살다가 죽어서 본래 없던대로 돌아갑니다.

마치 붓다의 삶처럼.....

그래서 만물이 부처님의 분신이라고 했어요.

알고 보면 모두가 부처님의 일생을 살아가요.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기 전까지는 늘 고통속에 살아갑니다.

다른 고통이 아니고 자기가 세워 놓은 개념이나 명칭에 빠져서 괴로워합니다.

스스로의 앎때문에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니 불쌍한 중생이지요.

왜 울어야 하는지 모르고 울고 왜 슬퍼해야하는지 모르고 슬퍼해요.

그래서 고통을 벗어나라고 부처님은 양변을 부정한 것입니다.

앎을 바꿔주고 있는 것입니다.

不二法!

둘이 아니다...... 하나도 아니다.......

둘은 없느니라....없다는 그 하나조차 없느니라...

그런 개념에 끄달리지 마라.....

無에도 有에도 떨어지지 마라

무엇을 먹던 무엇을 행하던 그 의미에....허망한 뜻에 떨어지지 말고 항상 고요해라.

무엇이든지 하라.... 해야하는 것이라면 다 하라.

그러나 무에도 유에도 집착함이 없이 고요하게 하라.

이것이 마음이 행복한 자의 행이다.

유가 좋으니 무가 좋으니 집착하지 말고 떨어지지 마라

그런 개념을 아예 지워버려라.

더럽다 깨끗하다, 부자다 가난하다, 그런 개념을 다 지워라.....

단지 있는 그대로 열심히 일하여 얻은 소득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소득에 맞게 먹고 살고 여행갈 뿐. 여행을 꼭 가야 행복하다든지....

가지 못하여 불행하다든지 하는 생각을 내지 마라.....

갈 수있으면 가고 못하게 되면 못가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을 두문불출하고

산에서만 살았어요.

그 뒤로 57세경에 해인사 방장이 되었는데

82세 사망할 때까지 근 20여년을 역시 어디 가지 않고

산속 암자에서만 살았습니다.

남들은 큰스님이라 해도 스리랑카, 인도, 중국, 유럽여행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어도 성철스님은 아무데도 안갔습니다.

20년간 오직 해인사 백년암에서만 고요하게 ...

아무 원함도 없는 채.....해가 뜨면 밝다 하고 해지면 어둡다면서 잠자고....

고요하게 고요하게 살았어요.

답답해하지 않고....그런데 저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 방학동에 들어온지 지금 벌써 15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무데도 안갑니다. 우선 가고 싶은 데가 없어요.

도대체 움직이기 싫습니다.

그래서 여행도 안가고....해외도 안가고....제주도도 아적 안가봤습니다.

남들 다니는 것 부럽지도 않고 굳이 가고 싶다하는 데가 없어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마음이 자꾸 쉬어지기 때문입니다.

한해 다르고 또 한 해가 달라요. 점점 고요해집니다.

늘 고요한 마음 가득하니 아침에 일어나면 고요하고

저녁에 잘때까지 하루종일 고요하니

나날히 알수없는 충만으로 가득하고 마음은 항상 든든합니다.

생각속에 빠지지도 않고 참선하고 책읽는 재미로 그냥 그렇게 하루를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참다운 진리를 제대로 안다면 도대체 무엇에....

어떤 의미에.....어떤 개념이나 명칭에 유혹되겠습니까?

남말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 많이 하세요.

매순간 한생각 일어날 때마다 잡아채서 싹싹 비벼버리세요.

그렇게 습관되면 한 생각 일어나기도 전에 바로 쉬어버립니다.

여러분이 그런 훈련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한번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

혹 자신의 말에 대하여 부인이 이상하게 반박하고 대들면 곧 성질이 나고

나중에는 욕설이 오고 가고.....서운했다가 삐겼다가 수시로 반복합니다.

며칠은 조용하다가 며칠은 괴롭다가 .....

한 달은 잘되었는데 어느날 말짱 도루묵이 되고.....

이것 모두 평상시에 한생각 일어나는 것 잡아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잡아내고 잡아내어 용납하지 마세요.

처음에는 곤욕스럽고 힘들어도 자꾸 하다보면 남의 말에 반응하지 않게 되고

자기 생각에도 끄달려가지 않게 됩니다.

남말에는 유혹되지 않아도 자기 생각에 유혹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것도 용납하지 마세요.

오직 모든 것은 부처님께 턱 맡기고 고요하게...고요하게....

그리 살다 보면 어느날 마음이 크게 열려서 우주의 비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교는 요가처럼 무슨 쿤탈리니 같은 기가 도는 현상 같은 없습니다.

누구나 부처라해도 지극히 정상인과 같습니다.

운기현상은 상을 찾아서 수행하는 이상세계입니다.

그런 세계를 설정하면 작은 것에는 통달하게 될지 몰라도 큰 깨달음은 얻지 못합니다.

오직 쉬어가세요. 당신이 부처이니 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납니다.

부처행을 하면서 고요하게 고요하게 시간을 보내세요......

억지로가 아닌 저절로 당신이 정말 고요한 것을 체득하고 더이상

구할 것도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선문답의 뜻도 즉시 드러납니다.

그러거들랑 멋들어지게 여기에다 꾀꼬리처럼 깨달음의 노래 한번 짓고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가세요.

그 어떤 사상이나 뜻이나 생각에서 끄달리지 않는 자유로운 삶.......

그런 삶을 붓다의 삶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겸손한 삶... 잊지 마세요.

생과사, 공과 색,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과 줄어듦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런 뜻에 끄달려서 부처가 어리석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붓다라하고

당당하게 붓다의 행을 하나하나 실천해가세요.

모두 행복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저 오래전부터 얻은 그 행복 맘대로 사용하다가 즐겁게 살다가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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