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걸림이 없는 까닭으로 두려움이 없고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故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얻음이 없는 까닭으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나니

 

지난 시간에 얻음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원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더 보태고 늘리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가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하심으로 버리고 겸손하다가도 어느 정도 불교를 알게 되면 거만하고 도도한 것을 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잘못 공부한 것인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공부할 수록 더 겸손해지고 얼굴이 편안해지고 아무 주장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맑은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버리고 주장을 버리고 2변(양변)을 버린 사람은 눈동자가 맑아질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누가 보아도 청정한 느낌이 들어야 하고 단순하고 마음 씀이 넓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를 잘못하면 아상만 늘어나지고 나는 아는 자다 라는 아만이 생겨서

웬만한 스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기와 상관없는 스님을 공연히 무시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더러 있어요.

반야바라밀 수행을 한 것이 아니고 머리에 덕지덕지 지식의 때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 교리나 지식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들어야지 머리에 쌓아두려고 읽으면 안됩니다.

글자에는 도가 없고 깊은 뜻이 없어요. 언어나 글자 밖에 있는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문자의 뜻을 캐야지 문자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어찌 조그마한 알음알이라도 가슴에 남겨두겠습니까

반야는 지혜라는 말인데 지혜는 지혜로되 철저히 비워서 얻는 지혜입니다

첫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혜는 보리가 있고 반야가 있어요.

보리는 깨달음을 통하여 수많은 지식을 뛰어 넘어서

바로 깊은 오의를 터득하여 이룬 지혜입니다.

반야는 앎을 전부 버린 후에 얻는 지혜입니다.

앎뿐만 아니고 2변을 여의고 마음에서 단 한 가지라도 세우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서 저절로 터득되는 지혜를 반야라고 해요

반야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비워서 얻는 지혜'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버려서 도대체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겠으나 부처님은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창의적이고 참다운 지혜가 나온다 하였어요.

앎을 버리지 않으면 그 앎에 가로막혀 세상을 잘 살수 있는 지혜가 나오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은 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다만 언어를 통용하기 위한 도구적 단어로 있을 뿐 그 언어의 뜻이 결코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수 차례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반야심경뿐이 아니고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수없이 말의 뜻이 잘못 되었음을 누누히 지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와 불행을 불러옵니까?

말을 잘못해서 말을 들어서 온갖 감정을 일으키고 결정하고 단절하고 싸웁니다

그 말은 불완전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표현일 뿐이고 거짓인줄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에 속지말라고 끝없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깨끗하다....부귀하다....가난하다.....

옳다....그르다....이 모든 개념들은 허망한 개념입니다.

70세 할아버지가 13개월 동안 애를 잉태해서 애를 낳았다하면 여러분은 그대로 믿겠습니까?

10개월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할아버지가 13개월을 배부르다가

애를 낳았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말야요

모두 진실이라고 인정하고 기뻐하거나 수고했다고 위로 하시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7살먹은 아이라면 할아버지에게 가서 할아버지 축하해요,

수고하셨어요, 미역국 많이 드시고 몸 푸세요

하겠으나 성인이라면 그 말에 전혀 반응을 안보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들은 모두 헛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일 뿐야요

그런데 더럽다 깨끗하다

옳다 그르다 하는 말에 어찌 반응을 보이고 이끌려가겠어요

이 들 말들은 70세 할아버지가 13개월만에 애를 낳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혀 관심가질 말들이 아냐요

그래서 보살은 보리살타는 원래 보살이라는 말의 원어입니다.

원래 보리살타여요

보리=지혜

살타=큰 수행자

이것을 줄여서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진정한 수행자를 말해요.진정한 수행자라면 얻음이 없어야 해요

30년을 수행해도 50년을 수행해도 전혀 얻은 바가 없어야 합니다.

어떤 수행자가 40년을 참선하고 한 숨을 쉬는 것을 보았어요

73세되는 노승이지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40년을 참선했는데 무엇하나 얻은 것이 없데요

남들은 도를 얻었네....화두의 뜻을 알았네...

인가를 받았네...조실을 하네....하는데

그 스님은 선방에서 40년을 참선했는데도 도대체

무엇하나 얻은 것 없이 세월만 가고 말았다면서

저더로 부지런히 참선해서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그 노스님과 3개월을 함께 참선한 적이 있었는데

무슨 일로 그 스님의 본전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화를 내고 책을 태우고

어떤 스님을 막 나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아~ 40년 수행이 어찌 저 정도일까 하고

매우 심란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뒤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고 경전에 그렇게 수없이 말했는데도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서 ....

그 찾는 마음이 마음을 쉬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역정을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십년 닦아도 제대로 못닦으면 그 노스님처럼 됩니다.

사실은 40년동안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 정상이어요.

얻을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항상 편안해야 해요. 그래야 마음이 쉬어집니다.

무엇을 얻었다하면 그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누가 무엇을 얻었다고 하거들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가서 멱살을 쥐고 물어보세요.

정말 얻었냐고... 그래서 못얻었다고 실토하면 놓아주되 얻었다고 더 큰소리치거들랑 부처님 대신 경책하노라 하면서 사정없이 두둘겨 패주어야 합니다.

이 마군아! 하면서

거듭 말하건데 이 법은 무엇을 얻는 종교가 아닙니다.

충분해요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또 뭘 얻었다하고 알았다하면 그 놈은 천하의 큰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고

부처님 법을 팔아먹는 도둑놈이고 그런 도둑놈이 있으면

불교는 조만간 망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자입니다. 즉 버리는 것을 수행하는 자여요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입차문내막존지혜(入此門內莫存知解)라했어요

절 입구에 들어서면 주련글씨에 이런 글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입구에 걸려있어요

이 문 안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앎)를 두지 마라

지해를 두면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학력, 지위, 앎, 도, ....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해요.

선문에서는 이런 말도 있어요.

길에서 도인을 만나거든 도를 묻지 마라

왜냐?

도인이란 길을 가는 자라는 뜻인데 그런 사람에게 굳이 도를 물어서 무엇합니까

길가는 사람은 다만 가는 길을 알려줄 뿐 도를 말하지 않아요.

도란 마음이기 때문에 따로 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멍청이가 도인에게 도를 묻는다면 멍청이니까 멍청이 짓을 한 것이고

거기에 또 어떤 자가 도라는 것은 넓고 크고 한 없으며...

세상을 다 담고도 남는 데고 있고 ...사람이 감히 근접할 수 없어서 도라하는데.... 어쩌구 하고

도를 설명해주는 도인이 있으면 그는 도인이 아니고 사깃꾼인줄 알아야 해요.

에잇! 사깃꾼아!!!

하고 소리쳐주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이 말했어요.

길에서 도인을 만나거든 도를 묻지 마라

도를 물음도 잘못된 것이고 진정한 도인이라면 절대 도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도 두지 않음!

이것이 도입니다.

그렇게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턱 그렇게 써있는데도.... 절에 와서 각종 지식을 내보인다면

그것은 공부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익을수 록 아는 척하지 않고 남에게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살아가는 것을 말할 뿐

가을이 되니 마당에 낙엽이 쌓이고

선재는 구르는 낙엽에 김장 걱정하고 산비들기 어려운 집을 더 잘 알고 찾아와서 모이를 먹는구나

가지가 가늘어지면 가난해지는 법인데 나는 솜 옷으로 쌀찌고 있으니 어느 해에 도를 볼거나.....어헝~

하고 개짓는 소리 한번 할 뿐입니다

절에 가면 누구나 스님들이 일하고 빨래하고 농사짓는 것만 보여요.

도를 찾는 자는 이 절에는 도가 없구나하고 떠나가지만

누가 알랴....그곳이야 말로 도로 가득한 것을 자기 눈에 티끌이 들어간 즐 모르고 남보고 더럽다하니 그렇게 찾아서는 죽을 때가 되어도 도를 보지 못하고 죽을 뿐입니다.

도는 아무도 보지 못했으나 1년 365일 도가 가득함을 아는 사람만 알 뿐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아는 것을 놔버립니다.

놔버리는 공부를 해요. 그래야 도가 보이니까...

그것을 반야바라밀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런 수행을 하는 자라면 어찌 마음에 단 반개라도 아는 것을 두겠습니까?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으로 두려움이 없으며 마침내 뒤바뀐 몽상을 멀리 여의느니라.

보살이 버리고 비우고 놔버리는 공부를 하다가 하다가 보면 본심에 돌아갑니다.

원래 아무 것도 없는 자기 본 마음인 텅빈 세계에 들어가요.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비우고 비워서....더이상 비울 것이 없는 곳까지 들어가면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남들은 하나라도 더 내놓지 못하여 안달하고 자기 지식을 자랑하지만 보살은 더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철저한 빔에 도달해요.

그러다 어느날 이젠 더이상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음을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깨달음의 극치입니다.

어떤 선사가 물었어요

입이 있으면 말을 하고 손이 있으면 지시하라고 했어요.

도에 대하여 한마디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스님이 선사를 늘 옆에서 모시는 시자스님을 탁 때리면서 왜 빨리 말하지 않느냐 고 소리치고는 휙 돌아서서 가버렸어요.

나중에 선사가 그 스님을 찾으니 그때 바로 걸망을 매고 가버렸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사가 그 스님 어디가서 크게 가르침을 펼 것이다 했어요.

자, 왜 시자를 때리면서 왜 빨리 말하지 않느냐고 다구쳤을 까요

이것을 풀어야 참으로 비워진 보살의 경계를 알수 있습니다.

보살이 이렇게 한번 깨닫고 더이상 내세울 것이 없어지니까

비로소 마음에 걸림이 없어졌어요.

그 전에는 고기를 먹어도...집신을 신어도 치마를 입어도....곡주를 한잔 먹어도

마음에 걸림이 많았는데 이제는 전혀 불교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걸림이 없어진 것입니다.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비로소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되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부르르 떨면서.... 스발느무새기, 더러분 자슥 ! 하며

자유롭지 못한데 비로소 유혹되지 않는 자유를 얻다....

이것은 우리 모두 찾는 경지입니다.

大人대인!

이런 사람을 대인이라고 해요.

그 어떠한 것으로도 보살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큰 사람이어요.

돈으로도.... 명예로도....분노로도....

그래서 대인이고 걸리없는 경지를 얻었다해요.

우리가 무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경지, 걸림없는 경지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단 들어가면 되돌아오지 않게 되요.

걸림없이 없어지면 다음으로 두려움이 떠납니다.

두려움!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

저도 가끔 저 자신에게 물어요.

과연 죽음의 순간에도 초연할 수 있을까?

얼마전 대구 파티마 병원 근처에서 6.25때

그래서 국군이 마을 사람을 한데 모아놓고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나봐요.

그 마을은 인민군 편을 든다라는 말이 나돌았답니다.

빨갱이를 감추어주었다고 국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람이 사람을 살려주었는데 죽음을 당해야 했던 당시 양쪽의 현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그때 내가 저기 있었다면

그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총소리에 정말 두려움이 없을까?

하고 자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공부 점검입니다.

여기 새소리님, 눈송이님, 연꽃님, 여래장님....하노백년님과 함게 혹시 어디 끌려가서

총맞게 되었을 때 나는 스님이라면서 ....

스님은 중생제도해야 되니까 좀더 살아야돼 하고 뒤로 서는 비겁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하하....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죽음이던지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가 보살이요, 두려움을 떠난 자입니다.

병원에서 ....비행기 속에서 그 어디서고

두려움을 떠난 자는 보살처럼 비워진 자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어요.

오ㅐ냐? 죽음은 없으니까....그것을 잘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마침내 뒤바뀐 몽상을 여의고

영원히 대해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몽상은 헛된 생각들입니다.

영원히 망상을 여의고 대안락을 얻었다

명심하세요. 여기 관세음보살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대해탈을 얻은 것입니다.

반야바라밀 수행, 즉 비우는 수행을 한 것이지

무엇을 얻는 수행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겉에서 때뭍어 덕지 덕지 쌓여있는 때를 벗겨냈을 뿐입니다.

그래서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드러나 빛난 것이지 무엇을 새로 얻은 것은 없어요.

이것은 반야심경에서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에서도 그랬고 화엄경에서도 다 똑같이 설했습니다.

얻음이 없어야 진정한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또한 선서에서도 조사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 그말입니다.

네가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야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말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오셔서 강의 듣는 모든 붓다들이시여

그대로 만족하니 더이상 찾지 말고 그대로 안락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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