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正覺에 대하여

 

三世諸佛삼세제불

삼제의 모든 부처님도

3세는 과거 현재 미래이고

3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인데...

요점은 반야바라밀다에 있습니다.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금강경과 여기 반야심경은 똑같이 '반야'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반야는 지혜를 말하고 지혜중에서도 자기를 비웠을 때 얻어지는 지혜를 말해요.

이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이 반야바라밀다이고

반야바라밀은 보시바라밀과 함께 불교의 큰 수행이 됩니다.

보시는 베풀다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므로 해서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비우고 버리는 연습을 자꾸 해야해요.

원래 수행자는 여섯가지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시바라밀...베풀다

지계바라밀...약속을 지키기

인욕바라밀...참다

정진바라밀...부지런함

선정바라밀...삼매를 얻다

반야바라밀...지혜를 얻다

이것이 6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이나 '바라밀다'나 같은 의미입니다.

이 중에서는 '반야바라밀'이 깨달음의 완성이라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반야바라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한 경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모두 지혜를 얻어야 해요.

그것도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에서 부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 한결같이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였어요.

여러분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면다면 그렇게 됩니다.

무엇이 반야바라밀입니까?

바로 마음에 단 하나라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반야라는 말 자체가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비울 것인가하면 하나라도 세우는 바가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일상사에 자꾸 세우면 버리고....세워지면 버리고.....해서 버리는작업을 수없이 해야 합니다.

화두 공부하다 보면 화두를 잃어버리면 다시 붙들고 하기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화두와 내가 일치되는 순간을 만나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화두 하나만 남아있습니다.

혹 아무리 힘겨운 일이 생겨도.....당혹 스러운 일이 생겨도....유혹하는 사건이 생겨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때가 옵니다.

3일 이고 7일이고 유혹되지 않고 계속 화두가 들려있어요.

그때라야 비로소 바로 반야바라밀을 이룬 것입니다.

제가 간혹 여기에 점검하러 오는 분들이 '제가 깨달았으니 이제 어떻해야 합니까?'

하고 물어오면 화두를 들으라 해요.

그래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이루라해요.

그러면 모두 멍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스님 제가 깨달았다니까요.....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뭘 또 화두를 들으라 합니까?? ' 라는 식야요.

그런데 정말 깨달아서 마음에 한 점의 오점도 없는 사람은 척 첫 말을 던지는 것이 달라요.

그래서 척 보고 대답한 것입니다.

임제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 조주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조주스님이 마침 발을 씼고 있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턱 들어서서.....

"입이 있으면 짓이겨주고 귀가 있으면 쳐버리겠네...."

임제스님이 들어서면서 "무엇이 도입니까? "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주주스님이 "나 지금 발을 씼고 있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발가까이 귀를 갔다대자

조주스님이 "입이 있으면 짓이겨주고 귀가 있으면 쳐버리겠네...."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휙 나가버렸어요.

여기서 우리는 두 도인들의 도의 경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임제스님은 들어서자 마자 질문해요.

무엇이 도입니까?

이렇게 질문하잖아요. 지지하게 안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경지를 한번 알아보려고 던져보는 것입니다.

몰라서 묻는 겨우도 있겠으나 깨달은 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턱 던지는 질문이 달라요.

그러자 도인도 대답이 다릅니다.

"나 발씼고 있네....."

이것이 대답이었습니다.

멋있고 대단한 말이잖아요.

던지면 자연스럽게 답이 툭 뛰어나옵니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좀더 확인해보려고 발에다 귀를 갔다댔던 것입니다.

이것은 '뭐라고 하시는 것인지 못들었습니다....'라는 뜻야요.

나 발 씻고 있네....라고 대답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재차 설명부탁합니다 라는 말이지요.

새소리님처럼 발에다 뽀뽀하면 조주스님이 바로 발로 쳐버려요.

이 요망한 것이!.....하면서....ㅎㅎ

그러자 조주스님도 알아듣고

"입이 있으면 짓이겨주고 귀가 있으면 쳐버리겠네...."

라고 한번 더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임제스님은 '음 과연 도인이군....'하면서 한번 배우고 휙 나가버린 것입니다.

도담할 때는 번개와 같이 속을 드러내기도 하고

상대의 허점을 잡아채서 내팽개치기도 하는 법인데

질문자가 끈끈한 정덩이리를 가지고 물어오면....

스님 제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후로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화두들 들고 일행삼매를 수행하세요. 합니다.

그러면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채고 감사합니다 하고 물러가요.

그러나 도를 모르는 사람은 네? 뭐라구요....제가 깨달았다니까요....

하고 제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제가 '글쎄 그대가 깨달았다는것을 아네 ....

그러니가 일행삼매를 수행하라는 것이야....

.'하고 말해주면 대개 못알아들어요.

그래서 휙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라고 반박하면서 장황설이 늘어집니다.

쯧쯧 ....도를 보여주어도 모르다니....하고 더이상 대답안해요.

반야바라밀을 얻은 자는 마음에 유혹되지 않는 자입니다.

작은 것에 유혹되는 사람은 깨달음후에도 계속 화두를 들고 수행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데 일상사에서 작은 것에 유혹되지 않도록 그때 그때마다 점검해도 되지만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생활속에서는 일단 유혹되고 반성하거나 유혹되려고 할 때 괴롭게 참고 있자나요.

괴로울 것도 없는 법인데 괴롭게 참고 있으니 이 또한 수행이 아니고 고행이 되어요.

대부분 말입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에 화두를 들고 수행해서 화두가 지속되게 수련해놓으면 일을 당했을 때 잠깐 유혹되려 하다가도 금방 돌아오게 됩니다.

달아난 화두를 잡아채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후에도 화두를 들라는 것입니다.

깨달음 후에.... 공부를 끝내어도 좋은가? 질문하기 전에 조용히 화두를 단 30분만 들어보면 금방 자기 할 일을 알수 있습니다.

'스님, 마음이 맑은 물처럼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화두를 들어보라고 하면 되요.

화두 이것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것인데 턱 들으면서 요놈이 재미없다는 분별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지루하다는 분별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30분간 지속된다면 그사람은 평생 무심을 얻은 사람입니다.

수행할 필요없는 경지에 들어갔으니 더이상 닦을 것이 없어요.

그러나 30분동안 오만가지 잡동사니까 왔다 갔다하고 집중도 되지 않는다면 아직 부처행을 닦아야 되요. 매일 하루에 어떻게 하든지 15분에서 1시간씩 꼭꼭 참선수행 해야 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2시간을 앉아있어도 금방 지나가듯이 지나가고 지루함도 없이 쭉 화두로 이어진다면 비로소 마음에 원함이 끊어지고 특별함이 끊어지고 지루함도 끊어진 무심을 체득한 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감히 일상사에서 무심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조그마한 일에도 흔들리고... 괴로워지고.... 이끌리고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은 편안 하였다가 내일은 불안하고 .....

말은 청산 유수로 하여도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그렇게 평생 지내면 불교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세월만 가고 맙니다.

물론 염불도 좋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하나로 통일되어 마음이 모아진다면 어찌 천문(天門)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전에는 하루종일 화두 드는 공부가 참 오랫동안 해야 되는 것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제가 4일간 밤낮 주야로 화두가 들리는 것을 체험해보니까

그 핵심은 의심이었습니다.

궁금함이 극에 다다르니까 공부는 저절로 되고 24시간 화두가 떠나지 않아요.

급기야 어느날 밤부터는 밤에 잘 때도 밤새로록 잠시 틈도 없이 화두 하나로 몰두되는 것을 겸험했어요. 그렇게 하나에 몰두되니까 답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드라구요.

한순간 답이 알아져요.

음... 이것은 하나로 몰두하라는 말이 다 이유가 있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로 지속되면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말도 이해되었어요.

동시에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한 뜻도 알게 되었습니다.

◆一以貫之= 하나로써 모든 것을 통한다.

하나를 아니까 모든 것이 그야말로 주마등같이 다 보여요.

그렇게 4일간 밤맞 주야로 단련하고도 일상사를 하는 것은 또 달라요.

일상사는 섬세하고 예민한 삶이라 때로는 화내고 때로는 그냥 지나가고 하지만

혹시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가....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친구 말에 서운하지 않는가...모친의 말이 귀에 거스르지 않는가.....

물건 사러갔다가 친절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마음에서 찜찜함이 없고 고요한가...

쓸 돈이 없어서 가난해도 걱정이 되지 않는지....

남이 와서 시비를 걸어도 마음이 고요하게 대처하는지....

친한 사람이 남에게 나를 나쁘게 말하여 그 말이 나중에 내 귀에 들려올 때

그 마음이 고요한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화를 안내는지....

공연히 많이 안다고 우쭐대거나....도를 안다고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는지...

평범한 일상이 아니고 쓸데없는 상을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매일 매사에 점검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렇게 보림하면서 ...시간이 가고 가고 가다보면

어느날 매사에 비로소 편안 해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공부의 길은 이렇게 험난하고 예민하고 깁니다.

일단 화두를 타파하면 그 뒤론 평생 살아가면서 하는 공부이니까 삶이 공부입니다.

그런데....혹 도를 알았다 해도

평범함을 못 떠나는 것이니 혹 여기 계신 분들이 도를 몰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부처는 되어있는 것이고 마음이 나가면 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 무불선원에 왔을 때 이미 부처입니다.

확실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곳에 가서는 참 자기를 알기 어려워요.

아무도 여러분을 안 알아줍니다.

그러나 여기는 바로 여러분을 알아주어요.

참부처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불에 오면 온 즉시 부처입니다.

더이상 부처가 되려고 닦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행을 수행함은 있어요.

여러분은 즉시 바로 부처의 길을 갈 것이지 다른 길은 가지 마세요.

여러분이 걷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바로 부처의 행입니다.

그러니 운명적으로 부처의 행을 안할 수 없어요.

어떻튼 운명적으로 매순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인줄 알고 바로 부처의 길을 가면 보림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부처가 되어서 부처의 길을 가는 보림자이니 고민하고 말고 더 얻으려 하지도 말아요.

8만4천대장경을 다 뒤져도 특별함은 없고 부처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온 곳도 없습니다.

다만 이것만 있어요. 깨달으라, 그대가 부처임을.....

이 말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원래 부처이니 단지 깨어나라!"

이 말만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가는 길인 부처행에 대한 것은 수없이 많아요.

발닺는 것....손을 드는 것이 바로 부처행인 줄 아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잘 살아가도록 하세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이라는 말입니다.

정등(正等)에 대한 것='깊다' 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했지만

바른 깨달음....정각(正覺)에 대한 것은 오늘 말했습니다.

올바른 깨달음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자꾸 2500년전의 석가를 연상하지 마세요.

그 부처는 그렇게 살다 갔고

여러분은 여러분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갔을 때

사람으로써 자기

한 인간으로서 자기

한 여성으로서 자기

한 남성으로서 자기 이시대의 한 사람, 한 불자로서의 자기.그 자기의 길은 다 달라요.

자기 환경과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도 다르고

어떤 일을 하던지 죄안짓고 선행하면 바로 부처행이고 죄를 지으면 부처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참부처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어요.

인도의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것을 외쳤어요.

아무리 정당하다해도 폭력은 잘못입니다.

물론 우치하고 미련한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폭력이 필요하겠으나

인간 사회에서는 비폭력이 원칙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정당함을 위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수면 폭력을 써도 된다는 힘의 논리는 우치한 자들의 행태입니다.

소수가 옳은 경우가 있어요. .....소수가 옳아도...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배우잖아요.

대통령 선거할 때 우리는 항상 다수를 인정해주잖아요.

살림을 잘못해도 기한을 인정해주고 기다리잖아요.

다수가 절대 옳지 않아요.

어리석은 자 다수라면 어찌 옳겠습니까?

그러나 소수의견도 무시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다수의 의견을 무시 할수 있겠어요?

어리석은 자 다수가 사는 것은 이 시대의 운명이기 때문에 나라가 잘못가는 것도,

사이비가 득세하는것도 그냥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옳은 소수의견을 내야 해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계몽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가득한 날이 될 때까지 우리의 대승운동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지혜를 전하고 갈고 닦는 것입니다

과거의 보살도 이렇게 붓다의 행을 하였고

지금 우리도 이렇게 붓다의 행을 하는 것이고

미래의 우리 후배도 이렇게 붓다의 행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부처라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바로 정각(正覺)입니다.

더이상 의심하지 마시고 부처행을 하시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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