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제아제 바라아제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고로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하노라 곧 설하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소승불교, 대승불교, 밀교....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두고도 이렇게 시대에 따라 다르게 신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승불교, 대승불교, 밀교는 단지 어느 한 시대의 불교신행 풍속이지 부처님의 말씀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5~6백년 주기로 불교 신행의 방법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대승불교에서 세계적으로 전파되었어요.
아쇼카왕이 인도를 통일할 때에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래서 만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여 참회생활하였고...또한 불교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해서 불교를 산간 벽지나 타국에까지도 전했던 것입니다.
이 때가 대승불교였고 이 대승불교는 중국과 한국에까지 전파되었어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해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6년인가 하니까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기원전 1세기에 시작되었고 그뒤 몇 백년이 지나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대승불교가 전해지고 얼마후 인도 변방에 있던 한 나라의 왕자가 스님이 되었는데 그가 달마스님입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와서 보니까 중국은 부처님께 기도하고 독경하고 경을 연구하는 것은 하는데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부족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중국에 왔다가 깨달음의 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선불교의 시작입니다.
달마스님은 무심론에서도 밖혔지만 깨달으면 바로 부처라면서 경전에서 수겁을 닦아야 성불한다는 기존의 통설을 깨고 바로 성불하는 법을 폈습니다.
중생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이 부처는 이미 되어있는 것이라 시간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으면 그대가 바로 붓다라고 하면서 중생이 곧 부처임을 가르쳤습니다.
불교는 대승불교에서 이미 인반인 즉, 보살을 부처님과 나란히 법상에 모셔놓는 불상배치로서 부처와 보통 사람이 거리가 없는 동등한 사람임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머리를 깍은 부처나 머리를 기른 보살이나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이다. 이 평등 사상이 대승사상입니다.
당연히 대승불교에서는 일반인도 성불할 수 있으니까 불교의 전파가 보다 적극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중국에 와서도 변함이 없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경전이 전해지고 진리를 연구하는 풍토였으나 얼마후 깨달음이 구체화되어 깨달은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달마스님 이후부터인데 처음에는 숫자가 적다가 점차 많아져서 수많은 선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나중에 원오스님,대혜스님 대에 와서는 일반인들에 까지도 참선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한 시대에만해도 수십명의 깨달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어요.
불교가 그 본래 사명을 충실히 다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던 불교가 중국의 왕조 변화와 함께 탄압을 받는 시대가 있었고...부흥하는 시대도 있으면서....
선불교는 가히 중국불교의 중심적인 불교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불교는 탄합하면 산으로 들어가서 참선하면서 은든하는 불교가 선불교가 불교가 부흥할 때는 대중에게도 전파되면서 잘 발전해왔고 핍박 받을 때는 산중에서 조용히 전해졌기 때문에 오래 이어왔습니다.
그러다 중국이 공산주의되면서 선불교도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선불교는 한국에 이미 삼국시대부터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고려때에는 완전히 정착되면서
나옹스님, 보조스님등 훌륭한 선사들이 나와서 고려 선불교를 주도했기 때문에 선불교의 전통이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는 선불교의 종주국이 되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중국 송나라부터 일반인들에게도 유행하던 선불교가 끊어지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을 받았고 현대에는 유신론자들이 극성을 피우면서 선불교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혜성같이 나타난 무불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과거 사대부들에게도 전해졌던 선불교를 전해보려고 선의 진수를 강의하고 전하고 있는데....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과거 송나라보다 더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거야요
최근 전문 선서보기가 힘들어졌어요.
제가 좀더 시간이 나면 자료를 찾아서 깨달을 얻은 사람들이라는 책도 내고....저아래 게시판에 하다가 말았잖아요..
돈오돈수도 좀더 보강하여 하나의 책으로 내어 바른 선불교....그리고 바른 깨달음에 대한 책을 내야 하는데 먹고 사는 것이 바빠스리....시간을 못내고 있으니....그것이 안타까버요...
누가 날보고 걍 책만 쓰고 강의만 하라고 하면 좋겠는데 이렇게 사는데 매달리니 자료가 자꾸 늦어져요....아무래도 몇년은 더 가야 그 책들이 나올거야요
다행인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전심법요 완능록 무심론등을 강의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언제라도 보게 된 것이 참 다행인 것입니다.
자...이렇게 해서 불교의 역사를 대강 흝어보았음다
현재는 선불교시대입니다. 선불교는 깨달으면 즉시 부처라 매우 매력적인 불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선불교는 더욱 퍼질 것이고 얼마 있으면 전세게로 퍼질 것입니다.
선불교가 일반화되고...그리고 저 먼 뒷 세상 후대 불교가 또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나 과거 불교가 이렇게 변화되어왔듯이 미래 불교도 반드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인간 중심 적인 불교로 바뀌게 됩니다.
다른 것도 그랬듯이 불교도 그동안 권위적이고 일반인들에게 부처를 신격화하였던 스님 중심적이던 것이 이제 세속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만간 이제 스님들도 깨달은 일반인에게 배우는 역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교는 대중화되고 깨달음도 대중화됩니다.
문제는 스님이나 일반인이나 부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의 길을 가야 용서하고 참고 고요해져요.
스님이 되어서 부처행을 포기하면 일반인보다 더 탁한 인생이 되는 것이고
불자도 부처행을 할 생각은 안하고 기도하고 신행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불교가 점점 쇠락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반드시 해야 업보가 줄고 부처행도 반드시 해야 이 땅이 아름다워집니다.
우주와 자연은 그대로 부처님의 몸입니다.
부처님이 주신 이 땅
이 땅 위에 살면서 부처행을 하지 않고 때묻은 중생의 길을 즐거워하고 간다면
고통은 줄어들지 않아요.
부처님의 땅에서 왜 부처행을 하지 못합니까?
부처행을 하면 편안하고 행복한데 왜 부처의 길을 포기해요.
부처행....이 정의부터 새롭게 내려야 해요.
언제 어디서라도 무심행을 한다면 부처행입니다.
용서, 화목, 자비, 행복, 기쁨은 부처행에서 나옵니다.
아직도 부처행을 안하고 입으로만 부처를 말하고 진리를 말한다면 어찌 불교가 발전하겠습니까?
불교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행이 필요한 종교입니다.
왜 행이냐?
행에서 또 행이 나오고 부처행에서 기쁨이 나오고 행복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말보다는 행이 나와야 해요
사람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감정!!
부정물하고 다른 것은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발전하고 미래 재앙을 막는 것도 이 감정이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감정은 살아있는 느낌이어요.
사랑하는 감정, 미운 감정, 자비, 복수...등등은 전부 감정이고 살아있음을 이것으로 느껴요
이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무심이 기본이 되어야 해요.
감정은 가족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사회를 만듭니다.
인간은 감정없이 살아 갈수 없어요
그러므로 감정을 버리려고 하기보다는 잘 사용해야 합니다.
감정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어요
불교는 감정을 버리지 않아요.
자비, 용서, 참회 ....이것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랑하는 감정에서 나오잖아요
돌이 되고 나무가 되는 종교가 아니고 감정을 잘 다스리는 종교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어차피 완전한 무심으로 살아가지 못해요.
무심이 감정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정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사용해야 해요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아요. 그래서 스스로 자살도 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아픈 경험이 있으면 남의 아픔도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가 위대한 점은 공동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멸망한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해요
12세기~13세기경, 북쪽 얼라신을 믿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인도에 쳐들어왔어요
당시 인도가 무방비였던 것은 불교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살생하는 도구와 훈련을 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주의자들이 쳐들어왔을 때 순순히 나라를 내주었던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은 코살라라고 하는 이웃나라가 쳐들어오자 3번이나 나가서 참선으로 막아있지만 4번째는 안 나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왕국 카필라는 멸망당했습니다
전투를 하지 않고 내준 것입니다
전쟁...이것 도대체 뭐야요?
결국 돈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위하여 수많은 순진한 백성들이 죽는 것입니다.
서민은 누가 이 나라를 통치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왜 한 나라 왕족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부처님은 반대야요. 오히려 네가 내 나라를 다스려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13세기에 인도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멸망 당한 것도 기원전 6백년경에 부처님께서 나라를 빼겼던 이유와 같습니다. 한쪽이 약하면 피해자가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최근 유신론 주의자들이 늘어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불교는 싸움을 싫어해요.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사람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전쟁없이 유신론자들은 많은 불자들을 유혹하여 데려갔던 것입니다.
만약 불교가 반대로 기독교도들이었다면
어떤 나라도 불교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없어요.
이땅에 절대 그렇게 빠른 시간안에 불교를 전파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신을 믿는 종교는 그 종교 때문에 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죽고 있습니다.
종교때문에 사람이 죽다니....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도 사람들은 그 종교를 믿습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미국에 빌딩을 폭파하여 6천명을 죽였어요
그러자 부시는 군사를 이끌고 수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자살폭탄이 등장하여 나라마다 또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수....복수.....
이것은 신들의 싸움이지 사람의 싸움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고 이념이나 주의나 신을 믿으면 이렇게 불행해지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를 알고 깨닫는다면 남도 부처임을 알아요.
어떤 이념에도 주의에도 신에게도 쫓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잃고 신을 쫓아가면 자기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남까지 잃게 되고 말아요.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다고 그럽니까?
신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사람이 세워 놓은 신들은 다 가공의 신입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창조한 신이라 그 신들 역시 불완전해요.
만약 신이 있다면 도대체 이 전쟁을 왜 중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고 그 가족들이 고통받아야 하나요?
왜 지구에 이상기온이 생기고 지진이 일어나고 자연 재앙이 닥칩니까?
과거에... 권의주의가 있던 시절...종이 있던 시절에 오늘날 처럼 이렇게 인간의 능력이 뛰어나지 못했을 때에 나약한 인간들이 믿었던 가공의 신을 왜 오늘날 이렇게 위대한 인간임을 알게 된 지금에도 그 신을 믿어서 모두가 고통받습니까?
불교는 내가 당해도 복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처의 행이어요.내가 이렇게 아픈데 상대는 얼마나 아플까 이것을 생각해요.
인간을 존중해요.
그래서 용서하는 무심행을 합니다.
내 가족이 죽었으나 ....슬퍼할 뿐....슬픔.....이것은 깨달은 자도 있어요.
부처님은 만년에 제자들이 먼저 죽자 쓸슬해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라한과를 얻고 깨달음을 얻었던 가섭존자는 나중에 부처님 대를 이어 제 2대 붓다가 됩니다.
그런 그 제자가 멀리 가서 불법을 전하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돌아오는 도중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장남이 없는 죽음과 같아요. 장자가 임종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도착해보니 벌써 관에 들어가셨어요
그러자 가섭존자는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웁니다.
앙~앙~ 부처님이시어, 어찌 저를 보지 않으시고 가셨습니까?
아라한과를 얻은 자,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도 인정했던 제자도 이렇게 울부짓는 장면이 팔상록에 나와요.
보통 중국의 선사라면 이때 벌덕 일어나 제자를 나무라고 야단칩니다.
실제 그랬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제자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부드러운 자비를 보입니다.
관 밖으로 발을 쑥 내밀어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자이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를 사랑하는 감정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하겠습니까?
제자도 울고 스승도 부드럽게 위로한 것입니다.
죽음은 없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크게 깨달았지만 인간은 이렇게 울고 위로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인간적일 때 이해받아요.
인간은 인간적일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인간적일 때 훌륭합니다.
공연히 신선이 되는것, 숨을 참는 것, 정신이 독해지는 것, 자기를 잃고 남의 종이 되는 것을 선망의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런 특이한 짓은 조작하는 것이지 순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감정을 잘 다스려라 라는 것입니다.
감정이 안 나올 수는 없다. 감정없는 것(무심)을 완성된 이후 시간은 짧고 감정이 들끓는 시간은 깁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부처는 되기 쉬우나 부처행을 하면서 부처를 회복하는 시간은 길다는 것입니다.
부처를 회복한 시점은 노년이라는 말입니다.
나머지 인생의 대부분은 감정을 다스리는 시간이지 감정이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가족이 죽었으면 슬퍼할 뿐.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 렇게 복수심이 들끓고 ....하염없는 분노가 일어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부처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제 모지 사바하"
그렇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묻지 마세요. 뜻이 없어요. 진언의 뜻을 찾는 사람은 조작하는 것입니다.
무심의 노래요, 천연의 노래이고, 부처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과거의 부처도 이렇게 불렀고 미래의 부처도 이렇게 부를 것이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불러야 되요.
그냥 이 무심의 노래를 부르세요. 무심이란 뜻이 없어야 하고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노래요, 헛되지 않는 주문이라고 했습니다.
부르면 행복이 일어난다
그러니....언제라도...그대가 슬플 때, 기쁠 때, 마음이 번뇌로울 때, 분노가 일어날 때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제 모지 사바하"
하고 부르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제 모지 사바하"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원하지 않은 채 세계가 행복해지고 가족이 행복해지고 그대가 행복해지는
이 노래를 부르면 반드시 영험을 보리라.
왜냐? 무심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무심은 모든 것이 나오는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부처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야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가 이 땅을 책임지는 참 부처임을 크게 깨닫고 그 누구에게도 그 무슨 사상에도 유혹됨이 없이 당당히 혹은 담담히 부처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아침마다 외치세요.
" 마음이 부처, 내가 부처이므로 내 길은 내가 간다. "
모두 당당한 붓다의 길을 포기하지 마시길 바라면서 반야심경강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강의 듣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이내용은 무불선원 석우스님의 강의입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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