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 應化非眞分 (응화는 진이 아님)

 

須菩堤, 若有人以滿無量阿僧祈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수보리, 약유인이만무량아승기세계칠보 지용보시 약유선남자선녀인

 

發菩薩心者 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 演說其福勝彼 云

발보살심자 지어차경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 위인 연설기복승피 운

 

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하위인연설. 불취어상 여여부동 하이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佛說是經已 長老須菩堤 及諸比丘 比丘尼優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불설시경이 장로수보리 급제비구 비구니우

 

婆色 優婆夷 一切世間天人 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바세 우바이 일체세간천인 아수라 문불소설 개대환희 신수봉행.

 

부처님께서는 닦은 공덕으로 때에 따라 몸을 나투시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남에게 베풀고,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마음 닦는 신심을 내서 이 경 내용 중 '사구게'를 스스로 지니고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명한다면 그 복은 앞에서 이야기한 복 보다 매우 많으니라. 이렇게 남을 위하여 설명함도 사람 마음을 밝게 해주기 위해서 그 때 그때에 이경을 읽을 지언정 자기가 경읽는다는 생각이 없으면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여 오래오래 움직이지 아니하게 되느니라.

'일체의 모든 형상이 있는 것들은 꿈과같고, 탈춤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이것이 바로 우주의 진리이니라'

부처님이 이 경 설 하시기를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 하늘, 인간, 아수라 들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몹시 즐거워하며 믿고 가지고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

 

 

여기서 진이란 '참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眞身이 아니고...

그냥 진이 아니라해야해요.

수정하면..... 應化非眞分 第三十二(응화는 眞이 아님) 이래야 맞습니다.

應化란 응해준다...원인에 결과를 나타낸다.... 라는 뜻입니다.

불교는 因果法이니까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과법은 다 허망하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고생 끝에 성공을 하고....하지만

인생이 한 바탕 꿈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應化非眞이라는 말입니다.

"수보리야 "

금강경 시작할 때부터 나오던 이 부름에 모든 답이 있다고 하였어요.

오늘 끝나는 날인데 모두 그 이유를 아셨습니까?

모든 답이란 인생에 대한 답이요, 철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요,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이고, 화두에 대한 답이고,,,,여러분이 알고 싶은

그 어떤 것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전심법요와 완능록을 기록하였던 배휴가 불교 공부를

한참하다가 나중에 禪에 대하여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여러 선사들의 법을 들었어요.

기록에는 규봉스님도 모셔서 들었다합니다.

규봉스님은 도서를 지은 스님이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던 교학자입니다.

앞으로 禪學者들이 계속 밝히겠으나

돈오돈수, 돈오점수...등의 말은 전통 선가의 말이 아닙니다.

교학자, 즉 원각경을 보고 깨달은 규봉스님의 글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도 자기 생각이 아니고 스승 청량스님의 말을 그대로 원각경소초에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들은 두고두고 선문에 문제를 일으켰던 말인데

원칙적으로 선문의 용어라고 할 수 없어요.

아마 앞으로 언젠가는 학자들이 세밀하게 그 문제점을 밝히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용어 하나가 선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해요.

그 말이 있으므로 해서 혼동을 주고 있고

옛 선사들의 가르침이 일관되지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혼란을 주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용어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 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저입니다.

저도 한 때 과거에는 옛 선배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기 때문에

책에서 나온 것은 전부 무조건 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혼란이 왔어요,

아니, 어떤 선사는 단번에 깨달으라 했고 실제로 그렇게 돈오를 얻은 사람이 부지기 수로 많은데

어찌 배반되는 말들을 옛 선배들이 했을까....

항상 궁굼했어요.

그렇게 궁금함을 가지고 수십년 화두 들고 공부하다가...어느날 ...의문이 풀린 끝에

규봉스님의 이 말이 문제가 있는 말임을 알았습니다.

어찌되었든 배휴는 나중에 황벽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입문 동기가 있습니다.

나라의 재상인 배휴가 하루는 어느 절에 갔는데 조사들의 영정이 죽 걸려있는 것을 보고

옆의 주지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큰 스님들께서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문득 어려운 질문을 받자 주지스님은 답을 못하고...있다가

여기 산 위에 조금만 가면 황벽스님이라는 분이 계시는 곳이 있는데 그분은 아실 것입니다.

했어요. 그래서 그 스님을 모시고 재차 물으니

황벽스님이 배휴? 하고 불렀어요.

그러자 배휴가 네. 하고 답을 했었는데 순간 황벽스님이 한 마디로 답을 해줍니다.

" 바로 거기에 있느니라." 이때에 배휴가 무엇인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절을 하고 물러나서 선의 요체는 무엇인가 화두를 들고 다니다가

드디어 황벽스님을 도시 사찰로 모시고 조석으로 찾아다니면서

법을 묻고 들은 것입니다. 그것이 전심법요, 완능록입니다.

이 선서들은 일반인을 위하여 설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하고 있는 것 그대로 설해서

다른 선서들과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선을 배우는 초심자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됩니다.

그런데.그러면 그때 황벽스님이 배휴야! 하고 물은 것과

여기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하고 부른 것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만약 같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어서 같고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가 우리가 분석해야할 바입니다.

만약에 저에게 같은가 다른가 묻는다면

산너머 산을 물어서 무얼하시렵니까? 하고 반문하고

수보리야 하고 물은 뜻을 말해보라 하면

연꽃님? 하고 부르겠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할지라도

만약 또 어떤 선남자 선여인 중에 보살심을 발한 자가

남에게 보시하는 것 참 좋은 복을 짓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그러나 남에게 베풀어서 복을 짓는 것도 여러종류가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품은 집착을 여의는 공부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남에게 주는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남에게 줌은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주면 많은 사람에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보시와 함께 ....불자들은 또 한가지 더 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이것 참 따분하고 돈생기는 것이 아닌데

왜 자꾸 베풀라고 말하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리심을 발한 자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입니다.

깨달음은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아는 것이 첫째로 해야할 과제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너는 부처니라....' 하고 가르칩니다.

이것 대단한 선언입니다.

다른 곳은 다 너는 종이다, 범부이다, 사람이다....이렇게 가르치는데

불교는 너는 부처라고 가르쳐요

물론 처음에는 선듯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렇게 나 자신을 깨달아가면 정말 편안한 인생을 살수있습니다.

항상 담담하고,,,당당하고....고요하고....기쁨으로 가득한 삶이 됩니다.

그리고 이끌리는 자가 아니고 이끄는 자가 되요.

매사 능동적인 사람과 피동적인 사람은 삶의 질이 달라요.

무엇을 해도 능동적으로 하기 땜에 능률이 오르고 창의성이 발휘됩니다.

이런 삶은 미래에 부처님의 세계를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를 재생하는 연구를 하니까

우리나라 일부 종교에서도 윤리적인 문제를 들고 나왔어요.

이것은 2백년전의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서양의 코페르니쿠수가 지구는 돈다고 했더니

신성모독이라면서 비판했어요.

또 500년전에는 유럽에 콜레라가 유행하였는데

신은 절대 이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녀가 마술을 부려서 그렇다고 하면서

마녀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좀 똑똑하고 대가 센 여자들은 다 색출해서 태워죽였어요.

나무아미타불....

몇 백년이 지난 오늘날 사과해보아야 무슨 소용입니까?

당시에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였겠습니까?

그 가족의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기분을 누가 알겟어요?

저는 오늘 금강경 강의 마지막날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이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흑사병이 돌 때인 500년 전의 유럽은 기독교의 교리가 큰 지식이었어요.

그것만 알면 최고로 유식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선악의 판단을 기독교식으로 했어요.

그것들이 오늘날 우리가 보면 얼마나 허황된 것들입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지식...

그 생각의 위험성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종교가 뒤로 가고 과학이라는 신지식이 사람들을 많이 객관적으로 서게 하였지만

이 신지식 또한 허망한 단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물리학에서 물체는 빈 공간에 에너지가 돌고 있는 원소들의 집합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위라는 개념, 아래라는 개념, 이것도 영원한 개념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가끔 밤 하늘의 별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쳐다 보면서 위에 있는 저 별은 사실 위가 아니라 아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있어요.

아니, 분명 위를 쳐다 보아야 별이 보이는데

어떻게 저것이 아래일수가 있을까...굼금하겠으나

우주는 위라는 개념이 없어요. 오직 지구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물체를 지구로 잡아당기기 땜에 사람도 땅으로 잡아당기고 있으니까

머리가 있고 발이 있고 그래서 상하가 있어요.

상하는 오직 사람이 통하는 말이지 절대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우주는 위 아래가 없어요. 그렇다면 진실은 위아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물체는 공이니 헛된 것이 뭉쳐서 된 것이고 사람도 헛된 것이 뭉쳐서 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위대하고 천합니까? 오직 평등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없이 지식에 의존하고 습관에 의존하여

그 지식과 습관이 마치 올바름을 평가하는 잣대인 것처럼

남을 무시하고 ....욕하고....평가합니다.

각종 관습과....지식을 벗어나지 못하고...거기에 노예가 되어서

남을 평가하고 사람을 평가하고 자기를 평가합니다.

부족한 언어....완전하지 못한 의미로 단정하고 그렇다고 확신해요.

이것이 바로 마녀사냥이 있었던 500년전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불교에서는 이미 2천 5백년전부터

붓다가 말에 의존하지 말고 뜻에 따라가지 말라고 하였어요.

모든 것은 물거품이요, 환영과 같다고 햇어요.

이것, 대단한 선언입니다.

모두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부와 빈을 나누어놓고

귀와 천을 나누어놓을 때 부처님은 인간은 평등하다고 했서요.

확신은 참 위험한 것입니다.

특히 철학이나 종교에서 확신은 곧 얼마가지 않아서 파괴되고 맙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뒤에 가서 사죄하고 새로운 이론을 세워서 스스로 존립하려고 합니다. 처세술이 대단해요.

불교와는 달라요. 불교는 무엇도 세우지 마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끝없이 새로운 것을 세우고 과거를 비판합니다.

얼마전 휴거라고 하면서 하늘에 올라간다고 날개옷을 입고 산상에서 기도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한때 방송에서 큰 뉴스가 되었었지요.

그때 기독교 분위기는 전 나라가 휴거에 들떠서 안믿는 자는 최후의 심판을 준다면서

연신 사람들을 유혹햇어요.

당시 그런 기독교를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고 교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동조했어요.

드디어 심판의 날이 다가오자 하나 둘씩 그 대열에서 벗어나는 교인들이 있었고

미친 듯이 예언을 믿고 산 위에 올라가

데려가 달라고 날아가려고 했으나 그날.....아무일도 안 일어났어요.

그러면 또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또 새로운 것을 새웁니다.

이렇게 의미에....말에...예언에 쫓아가다보면 항상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배부르게 되고

무지한 사람은 어리석게 쫓아다니는 일이 생겨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유용하고 편리한 도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으로 인하여 사람을 미워하거나 핍박한다면 지식은 불행을 불러오는 도구일뿐입니다.

어떠한 앎도 절대적으로 맞는 앎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알고 있는 앎일 뿐입니다. 지식은 허망한 것이고 사람은 고귀합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불행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지식을 잘 사용해야지 끌려가면 안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널리 신행하는 것 참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전파하고 깨달음을 전파하는 일은 너를 찾으라는 선언이요, 진실을 전파하는 운동입니다.

이런 전파는 자신 있게 해야하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알아야하는 것은

제가 여기서 근 6개월간 열심히 전했듯이 여러분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큰 복이 되지 금은 보화를 남에게 준 것이 무슨 그리 큰 복이 되겠습니까?

금은 보화를 남에게 주는 것은 그때만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살리는것은 천년 만년동안 위대한 나라, 생각하는 나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이 땅의 주인이 되어서 내가 한 것을 책임질 줄 알고 사람을 존중하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큰 복을 지으려면 부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쑥스럽다 하지 마시고 언제 어디서나 각자 부처가 되어서 당당하게 전파하세요.

이 경전을 가지되 내지 사구게 등이라도 수지하고 독송하여 남을 위해 연설하면 그 복이 저보다 수승하리라.

부처님의 말은 그냥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따로 없어요. 단 한 마디만 알고 있으면 되요.

네가 부처니라...그러니까 부처의 길을 가라.

여기 금강경에서는 4마디만 외워도 큰 복이 된다고 했어요.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최소한 4마디라도 지니거나 외우거나 남에게 연설해주라는 것은

그만큼 진실을 강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자라면 단 4마디만은 외워야 합니다.

다행히 금강경 전 구절을 외우는 분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최소한 4마디는 다 외우도록 하세요.

전파하는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남을 위해 연설하는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히 동하지 않느니라.

남에게 경을 전할 때는 如如不動의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데 조금만 다른 이견을 내면 마음이 동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여러분이 고요해야 합니다.

금강경의 대의는 척사견 현정법(斥邪見現正法) 입니다.

삿된 견해는 물리치고 바른 진리는 드러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지 한 생각 세우고 말하면 그것은 삿된 견해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되 내부는 항상 고요해야 해요.

이것을 평상시 자꾸 수행해서 나중에는 전혀 어떤 말에도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전파해야 바르게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꺼번에 다 말하지 말고

쉽게....상대의 입장에 들어가서 하나 하나 하다가

점점 깊은 것을 드러내세요.

깊은 것, 이것은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아야 금강경을 잘 아는 것입니다.

저 또한 강의하면서 아무것도 드러낸 적이 없어요.

잘 살펴보세요.

조금이라도 들러낸 것이 있으면 사도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부처님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았어요.

드러냈으면 부처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무슨 까닭인가.

一切有爲法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如夢幻泡影

꿈과 같고 환상과 물거품과 같고

如露亦如電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應作如是觀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부처님의 마지막 선언입니다.

모든 것은 꿈과 같고 이슬과 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 번개와 같아요.

인생이 길다고 하나 절대 길지 않습니다. 짧아요.

그래서 번개와 같다고 합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우리중에 먼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크게 가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크게 집착하고, 대단한 의미를 둘만큼 가치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한편의 꿈입니다. 꿈은 깨고보면 허망하잖아요.

그처럼 우리 인생도 큰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하니 어떤 말에도 꿈 속의 말이요, 의미인 줄 아셔야 합니다.////

어떤 행동도 꿈 속의 사건입니다.

생도 죽음도 다 꿈이어요.

항상 매사 고요한 가운데 과일 맛을 보시고

아름다운 꽃을 보시고 웃음을 보고 ....산을 보고....강을 보세요.

그리고 웃어도 무심으로 하시고 전파도 무심으로 하시고

밥도 무심, 일도 무심, 교육도 무심, 이혼도 무심으로 하시고

만나고 헤어짐도 항상 무심 속에서 하세요.

그렇게 연습하시면 항상 고요하고 행복한 자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알게 됩니다.

아, 이놈은 원래 행복하구나....

이놈은 원래 부처구나....

친구들 하고 대화할 때 뭘 생각하고 합니까? 옐들어 승현이 옷대려야하는데....

남편 장봐야하는데....하면서 대화해요?

그러면 유심입니다.

무심은 오직 그것을 하고 있으면 무심이어요.

옐들어 열심히 일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면서

오직 그 일만 하면 무심이고 웃을 때는 웃으세요.

웃으면서 슬퍼하지 말아요.

그러면 유심,

대화할 땐 오직 대화

걸을 때는 오직 걸음

책볼 때는 오직 책봄

기도할 때는 오직 기도함

망상이 들면 유심입니다.

무엇을 해도 오직 그 일만 하면 무심이고 붓다의 마음이어요.

그러니까 무심을 허공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일상사가 무심입니다.

일상속에 공부하세요.

일념이라도 흩어지는 것을 버리고

한 곳으로 모으는 연습을 자꾸 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저절로 잡념은 없고 하는 일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치를 크게 깨달으면 잡념은 없어져요.

잡념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영혼이 알아요.

담 시간은 반야심경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금강경 대단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제 강의 마이 사랑해주시고 소개 마이 하시고

모두 붓다의 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