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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의 설날 2020.02.05
- 망우산추억의길 2020.02.05
- 하루 일정 2020.01.29
- ○명상을 하는법 2020.01.22
- 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 2020.01.19
우리집의 설날
망우산추억의길
하루 일정
오늘 수요일 법회에 참석후 일을 볼까하고 계획을 했었는데 아침에 늦장을 부리다가 시간을 놓쳤다는 핑계로 법회를포기하고 용마산을 돌고 지부사무실에 들려서 무사고증명 발급받아서 중랑경찰서에가서 무사고 증명 신청을 하고 병원에들려 치료받고 하는등 일을 보기로 생각을 바꾸어 법회를 땡치고 말았다.
10:18분 집을 출발해서 테크를타고 용마산 순환 도로를 따라 동화천 옛길을따라 굽이치는 한강을 바라보며 순환도로를 걸었다
옛날에 자주 다니던 곳이였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와보게되니 감회가 새롭다.
망우산에는 독립운동가 지사 선생들이 잠들어 있는곳이다. 한용운 조봉암 방정환 오세창 유관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분들외 다수가 영면하고 있다는걸 알았다.
유명하게 업적이 크신분들이 묘비앞에 세워진 비문의 이름뿐 그분들의 실체는간곳이 없다.
세월이란 시간속에 이렇게 무상할 뿐이다.
늘 변화도는 가운데 고정된 불변의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몇일전 설날에 따분해서 얘들을 데리고 망우산에 왔었다.
7살된 손녀를 데리고 가면서 30년전 딸이 손녀딸 만큼일때 이길을 지금처럼 데리고 다녔는데 그 딸에 딸을 똑같이 데리고 다니는 나를보니 그때 나는 40대 젊은 청춘이였는데 지금은 70대 노년이 되였다는게 실감낙게 느껴진다.
그러나 몸은 물질이니 늙어 있지만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모양이나 소리가 없는데 무엇이 변하겠는가?
변 할래야 변 할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무엇인가?
동화천은 매말라서 겨우 매말라 겨우 낙수물처럼 한방울씩 떨어져 받쳐놓는 바가지를 언제나 체워질지 모르겠다.
관리사무소 지부사무실에 도착하니 거의 두시간이 걸렸다.
아침을 시원찮게 먹어서 그런지 배개 출출하다.날씨가 좋아 시야가 좋다.
경력증명을 발급 받아 신내 양원지구를 질려가다 공사장 함바집이 있어 점심을 먹었다
함바집 집밥이 맛이 있다 생선조림에 봄동 무침에 김을 겯들어 배고품을 양껏 채울수가 있었다.
마침 점심때라 근처 송곡 학생들 선생님들 그리고 아파트현장 노동자들이 많았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속도로 빠르게 전염이 되여간다는 뉴스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깨름직하다
나도 낼부터 마스크를 착용하고 일을해야 할것같다. 여러사람을 태우고 다니기도 하지만
요즘 중국 여행객들이 간혹 타기 때문에 불안하다.
예약된 병원시간이 촉박한 것같아 데시앙 건너편에서 버스를타고 경찰서에 갔다.
민원실에 30년 마지막 무사증명 신청했다 고무사고 증명은 30년이 마지막 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 무사고 증명을 신청하게 된것이다. 30년8개월이라고 안내해준다
버스를타고 하나 예약된 병원 (통증의원)에 도착 했다.
대기자들 모두가 노인들 뿐이다 오래 사니까 아푼데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요즘 통증 크리닉 병원이 많이 생겼다
그만큼 환자가 많기때문에 수효따라 병원이 늘어나는가 싶다
나이가 70이 넘으면 내 의지로 건강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약이나 치료로 그냥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똑같은 통증의원인데 이곳이 저럼하다보니 많은 환자들이 모이는것같다
노인들의 아품이나 병은 싹 낳을병이 아니다.
병원에 다니면서 임시 방편으로 신경 마취로 아품을 크리닉 할 뿐이다,
오늘은 걸을 만큼 걸어 다녔다. 이곳에 이사와서 두달이 되여갼다. 내 휴식공간으로 방하나를 만들었다
책상하나에 컴프터 하나 뿐이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곳이다.
3식구가 살고 있으니 모두 각각 자기방에 들어가면 깊은 산속에 암자처럼 고요하다
설명절때 20여명이 모였는데도 헐렁했다 공간이 넓으니까 마음도 넉넉하고 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지않고 부자가 된 느낌이다
아무래도 장남인 큰집은 보다 넓고 잘 살아야 떳떳 한것같다.
이곳 으로 이사하기 전 까지는 협소해서 동생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마음이 편치를 안았었다,
이제 조금은 나도 떳떳하고 편안 해진것 같다,
세배돈이 매년 수십만원씩 나간다, 금년에도 40만원이 나갔다,
일년에 한번인데 하면서 위안을 하지만 적은 돈이 아니다. 사실 내것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조카 손주들 까지 사임당 5만원짜라로 주다보니 그렀다.
큰 아들은 그래서 짐이 많는 것이다,
그렀지만 자식들이 용돈으로 주는돈이 있으니 사실 내 돈은 10만원만 나간 것이 되니 아쉽거나 아까울 것이 아니다.
이세상에 그 어떤것도 누구의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 한다면 내 것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쓰고 있을 뿐이다. 나다 내 것이다 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성냄이 일어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할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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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는법
○명상을 하는방법
“명상은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서 마음의 상태가 고요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명상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합니다.
둘째,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셋째, 그 집중된 것에 대하여 뚜렷한 알아차림이 유지돼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긴장하지도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안 되니까 그만둬야겠다며 물러서지도 말고, 그냥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갖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합니다. 지금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해보십시오. 내가 숨을 쉬고 있나, 숨을 안 쉬고 있나 한번 확인해 보세요. 확인해 보면 ‘숨을 쉬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숨이 들어오기도 하고 숨이 나가기도 합니다.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줄 알아차리고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아차립니다. 바깥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면 숨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모르고 호흡을 놓치게 됩니다. 경전에 보면 ‘바깥에서 천 개의 벼락이 쳐도 꿈쩍하지 않고 다만 호흡을 알아차린다’고 나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감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리가 아프다든지, 어디가 가렵다든지, 이런 데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졸음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과거 생각이나 미래 구상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든, 몸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 졸음이 오든, 머릿속에서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생각이 떠오르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만약에 나도 모르게 놓쳤다 하면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쳤다고 ‘실수했다, 잘못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놓쳤으면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먼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놓쳤구나’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꾸준히 해나갑니다. 처음에는 자꾸 놓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알아차림이 길어집니다.
자세는 왼발을 오른발 위에 올리든 오른발을 왼발 위에 올리든 먼저 반가부좌를 합니다. 그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읍니다. 오른발을 왼발 위에 올려 앉을 때는 오른손을 왼손 위에 올립니다. 반대로 왼발을 오른발 위로 올려 앉을 때는 왼손을 오른손 위로 올립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을 편안하게 감습니다. 몸에 긴장이 들어간다면 긴장을 풉니다.
그리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다시 합니다. 조금 된다고 들뜨지 않고, 조금 안 된다고 좌절하지도 않고, 그냥 꾸준히 해나갑니다. 죽비를 세 번 치면 명상을 시작하고 죽비를 세 번 치면 명상을 마칩니다.
죽비를 세 번 치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법당 안을 천천히 걷습니다. 걸을 때는 자기 동작에 깨어있습니다. 왼발이 나갈 때는 왼발이 나가는 줄 알고, 오른발이 나갈 때는 오른발이 나가는 줄 압니다. 일어설 때는 일어서는 줄 알고, 걸을 때는 걷는 줄 알고, 움직일 때는 움직이는 줄 알고, 설 때는 서는 줄 알고, 앉을 때는 앉는 줄 압니다. 이렇게 자기 동작에 깨어있습니다. 앉아 있을 때 죽비를 세 번 치면 호흡을 알아차리고, 죽비를 세 번 치면 가부좌를 풀고 조용히 걸으면서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을 지긋이 감습니다. 마음을 콧구멍 끝에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다시 알아차립니다.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몸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졸음이 오더라도,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콧구멍 끝에 집중해서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놓쳤구나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꾸준히 해나갑니다. 긴장하지도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고 말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다만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사념처에 의지하라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념처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몸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둘째, 느낌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려라. 우리는 기분이 좋다는 즐거움으로 행복을 삼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즐거움은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본질이 괴로움임을 보면 결국 모두 다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낌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은 항상(恒常)하지 않아서, 영원하지 않으며 늘 순간순간 변화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늘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차려라. 그러니 마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넷째, 법(法)이라는 것은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법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 네 가지를 올바로 알아차리고 있다면 늘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아난다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계율을 잘 지킨다면 항상 나와 있는 것과 같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설령 나와 함께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명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념처(四念處), 즉 네 가지 알아차림에 의지하라고 알려주신 것 중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첫 번째가 바로 몸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이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죽고 난 뒤 시신이 썩어서 흩어져 없어지는 과정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나빠나 사띠, 호흡 알아차리기
열반(Nirvana)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위빠사나(Vipassana, 觀)’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중에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고, 그중에서도 범위를 좁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부를 때는 ‘아나빠나 사띠(Anapan-Sati)’라고 합니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잘 유지되면 다른 것에 대한 알아차림도 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호흡을 여실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이런저런 기억들이 계속 떠오릅니다. 그리고 ‘내일 뭐 해야지’ 하고 미래에 대한 구상이 계속 떠오릅니다. 이렇게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구상을 하다 보면 호흡을 놓치고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망상을 피운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에 따라가면 안 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마음을 코끝에 딱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마음을 코끝에 모아서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줄 압니다. 숨이 길면 긴 줄 알고, 짧으면 짧은 줄 압니다. 숨이 가쁘면 가쁜 줄 알고,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줄 압니다.
내가 의지를 갖고 이러저러하게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호흡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 호흡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긴장도 하지 말고, 애쓰지도 말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호흡을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놓치면 ‘놓쳤구나’ 하고 다시 합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첫 번째는 먹고 싶다, 자고 싶다, 눕고 싶다는 등의 욕망입니다. 두 번째는 무언가 하기 싫다는 혐오입니다. 세 번째는 무언가를 하다가 잘 된다고 ‘이야, 이거 잘 되네’ 하고 들뜨는 마음입니다. 네 번째는 게으름입니다. 잘 안 되니까 그만두고 싶다는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다섯 번째는 회의적 의심입니다. ‘이걸 한다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정진하는 데 늘 장애가 됩니다. 그러니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부처님께서 이런 마음이 정진에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는 것을 알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코끝에 모아봅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몸에서 통증이나 가려움 등 여러 가지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머릿속에서 지나간 과거의 이런저런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구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다만 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가면 나가는 줄 압니다.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나갑니다. 그것처럼 호흡은 저절로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합니다. 호흡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압니다. 그것을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것에는 힘이 들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긴장하지도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고 말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다만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자 하는 자발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명상을 할 때는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잘하려고 애를 쓰거나 욕심을 내면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편안하고 한가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하다가 안 된다고 쉽게 그만두거나 좌절해도 안 됩니다. 이렇게 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세 번째, 긴장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네 번째,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마음을 코끝에 딱 모으면,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곧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실재하는 것은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여러분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환상이고 가상입니다. 내가 편안히 앉아서 이 순간 실재하는 것,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에만 깨어있도록 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다 환상입니다. 조금 전 지나간 일을 생각하는 것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도 다 환상입니다. 생각이 아니라 지금 경험되는 것에 집중합니다. 숨이 들락날락하면서 피부를 자극해서 내가 호흡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에 집중합니다. 콧구멍, 콧구멍 속, 윗입술 등 콧구멍 주위에서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면 다 환상입니다. 콧구멍 주위에 딱 정신을 집중해서 느껴지는 감각에 완전히 깨어있습니다.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명상하고 아무 관계없는 공상이나 망상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직 콧구멍 주위에 마음을 모아서 피부의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공상을 하다가 호흡을 놓치게 되면 ‘아! 놓쳤구나’ 하고 다시 콧구멍 주위에 집중해서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출처: <https://www.jungto.org/pomnyun/view/82423>
“호흡에 집중이 잘 안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은 여러분이 자꾸 딴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연습이 많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호흡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은 자꾸 딴생각을 해요. 딴생각에 빠져서 호흡을 놓쳐버립니다.
호흡은 항상 여기 있습니다. 앉아도 여기 있고, 서도 여기 있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여기 있고, 목욕을 하는 동안에도 여기 있고, 자는 동안에도 여기 있고, 언제나 여기 가까이에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면 호흡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관심을 안 갖고 늘 딴생각을 하니까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찾는 것이 아니에요. 호흡은 여기에 항상 있어요. 관심만 가지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딴 데 신경을 자꾸 빼앗기기 때문에 놓치는 거예요.
한마디로 산만하거나 집중력이 없는 거예요. 어떤 일을 할 때 한 군데에 딱 집중하는 힘이 없고 늘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정신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꾸 연습해서 호흡이 잘 알아차려지면 활쏘기를 해도 딱 집중이 되고, 총을 쏴도 딱 집중이 되고, 어떤 일을 할 때도 딱 집중이 됩니다. 이게 잘 안 된다는 것은 지금 여러분이 정신없이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어도 생각은 늘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도 눈은 상대의 눈을 보고, 귀는 상대의 말을 들으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눈과 정신을 딴 데 두고, 지나가는 소리로 들어요. 그러니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나중에 물어보면 모르고, 기억도 잘 안 나는 거예요. ‘뭐라고 했지?’ 이러잖아요. (모두 웃음)
그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하기 때문입니다. 호흡 관찰은 집중력을 키우는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러니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호흡에 집중하고 싶은데, 왜 자꾸 생각이 떠오를까요?”
“사람의 정신작용은 늘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오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면 좋겠다고 해도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잠잘 때도 생각은 계속 작용합니다. 의식을 잃어버려도 본인이 모를 뿐이지, 그럴 때조차 무의식은 계속 작용합니다.
그래서 집중이 가장 중요합니다. 짜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엄마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문제가 없고, 여자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음 생각으로 연
결되면 문제예요.
딱 집중이 되어 있으면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관심을 안 둡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떠올랐다가 조금 있다가 사라져요. 마치 우리가 시장통을 지나갈 때와 같습니다. 시장통을 지나가면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사람이 나와서 구경하고 가라며 날 붙잡잖아요. 그럴 때 끌려가서 이 가게에서 구경하다가 나오고, 저 가게에서 또 구경하고 나오는 것 같은 상태가 지금 여러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가게 상인이 아무리 팔을 잡아당겨도 내가 아무 신경 안 쓰고 똑바로 걸으면, 그 사람들이
‘우리 가게 와요’ 하고 몇 번 따라오다가도 가버립니다. 따라오다가 가버리고, 또 다음 사람이 와서 따라오다가 가버리고, 또 따라오다가 가버려요. 그런 가운데 나는 천천히 그 시장 골목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시장에 무슨 가게가 있었는지 안 들여다보고도 다 알죠. 사람들이 ‘옷가게
들어오세요’, ‘시계 가게 들어오세요’ 이렇게 부르는 말을 다 들으면서도 나는 그냥 지나가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처럼 한 가게에 들어가서 상인과 대화하고 얼마냐고 물어보면서 놀다 보면, 시장 골목을 아예 지나가지도 못하고, 그 시장에서 뭘 파는지도 다 몰라요. 가게 한두 개밖에 못 가봤으니까요.
호흡에 집중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온갖 생각이 일어나서 호객 행위를 하듯 나를 잡아당겨도 신경을 안 쓰고 호흡에 딱 집중하면, 어떤 무의식들이 떠올라서 나를 잡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어요. 30분만 딱 앉아 있어도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나가기 때문에 ‘아, 내 속에 이런 번뇌 망상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면, ‘없애겠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생겨나서 더 복잡해집니다. 그러니 생각이 떠올라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내버려 둔 채 오직 호흡에만 집중합니다.
지바카 병원 의사인 까미스왈 지의 예를 들어볼게요. 스님이 기침을 하면 이런 생각이 들죠?
‘아, 저렇게 기침하실 땐 이 약을 먹거나 이 주사를 놓아드려야 하는데. 잠시 후 수련 마친 뒤에 주사를 놓아드려야겠다.’ (모두 웃음)
이런 게 모두 망상입니다. 부처님이 생각나도 망상입니다. 명상 중에 일어나는 생각은 좋은 생각, 나쁜 생각 할 것 없이 전부 망상이에요. 오직 여기서 일어나는 감각, 다시 말해 호흡이 들어가고 나갈 때 코 언저리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제외하면 다 망상이에요. 어떤 생각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계속 호흡에 집중을 못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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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
○ 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
인과법이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은 지나간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현상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의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의 현상(나에게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이것은 진여眞如의 알아차리고(전지全知) 작용하는(전능全能) 우주의 경영(운영)원리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연이란 없다. 반드시 필연일 뿐이다.
인과의 원리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주고받는 상호관계성(원인과 결과의 연기緣起, 상호의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인연을 만나고 좋은 행위를 하면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인과법을 인간의 문제로 탐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적용된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 학습한 것에 의해 생각을 하고 모든 행위를 하기 때문에 생각이 똑 같은 사람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하는 행위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하는 생각과 행위를 총칭해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업業’이라 한다.
업 자체는 우리들이 마음먹은 대로(의식적으로) 쓸 수 없다. 업은 만들어지는 즉시 마음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제8아뢰야식)에 저장되며, 같은 업을 자주 되풀이하면 할수록 내 것(고정관념, 아상我相, 무명無明, 알음알이, 내 생각, 습관, 중독) 으로 굳어져 바꾸기가 어렵게 된다. 무의식은 우리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5%를 차지하고 있는 의식(제6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은 ‘업력業力(업이 작용하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전생에 지은 업은 지금(금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업은 윤회(순환)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과 같다.
인과의 원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과거로 인해 지금(현재)의 현상(나아가야 할 길)이 결정됨으로 이것을 우리는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데 주어진 길을 지금 내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새롭게 결정되기 때문에 가야할 길은 주어지나 그 길을 지금 내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는 결정됨으로써 바꿀 수 없는 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은 누구나 삶에 있어 많은 고통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해서 상담을 하거나 선각자를 만나 ‘즉문즉설’을 통해 해답을 구하거나 아니면 점집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렇게 방황하는 이유는, 인과법이 순환하는 원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인과법이 순환하는 원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을 과거(전생) 현재(금생) 미래(내생)로 나누지 말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인식하는 개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간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이(무시무종無始無終)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나눌 수 없는 것이나 인간이 편의상 나누어 놓은 것일 뿐이다. 한 찰나(약 구백 분의 일초)가 지나가면 과거(전생前生)라 하고 다가올 것이면 미래(내생來生)라 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는 시간은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오늘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면 갚을 날이 되면 갚아야 할 것이다. 만약 갚지 못했다면 언젠가는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죽으면 갚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다시 말해서 인과(업)의 순환 원리를 몰라서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는 시간에 대한 개념(고정관념, 내 생각, 아상我相, 무명無明)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오히려 더욱더 복잡해지는 원인이 된다. 까닭은 모든 삶이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업의 순환원리를 알면 결코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두려워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금생에 돈을 빌리고 갚지 않으면 반드시 내생에 그 돈을 갚기 위해 가까운 인연으로 다시 만나 어떠한 형태로든 갚아야한다는 말이다.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내가 그의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전생에 내가 다른 누구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내생에는 반드시 가까운 인연으로 다시 만나 이번에는 반대로 그에게 내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은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세생생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기 때문에 업은 윤회한다고 한다.
가까운 인연 중에서도 특히 가족 간의 인연은 전생에 서로 주고받을 것이 가장 많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그렇다면 업이 윤회하는 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하면 끊어질까요? 업(인과)의 순환 원리로 볼 때 지금 내 앞에 현상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내 탓’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여건(상황, 조건 가야 할 길)은 내가 그 원인(주인공)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거나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 불평불만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서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윤회(악연)의 고리는 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참회고 용서하는 일이다.
인과법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너의 과거전생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 너에게 주어진 여건(조건, 상황)을 보면 알 수 있고, 너의 미래(내생)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 네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원리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 과거전생을 훤히 꿰뚫어 아는 통찰력인 ‘숙명통宿命通’이 열린다.
업이 순환할 때 과거전생에 서로 주고받을 것이 많을수록 금생에 가장 가까운 사이로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에 부부, 부모 자식, 친구, 직장동료 등으로 인연지어진다.
인연이 멀면 멀수록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주관적으로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가까울수록 ‘나’라는 생각(내 부모, 내 친구, 내 형제)이 끼어들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고 바라는 마음은 욕심을 만들고, 우리들은 이 모든 마음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포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모든 일을 지혜롭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업(나의 모든 행위)은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서 내가지은 업은 오직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것은 마치 내배가 불러지려면 내가 먹어야 한다. 다른 어떠한 사람이 대신 먹어주어도 내 배는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은 항상 나를 바꾸는 일이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주어진 조건, 여건, 상황)은 과거전생에 내가 행한 것(업業)이 원인이 되어 그 과보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다 나에게 있다는 인과(업)의 순환원리(윤회)를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전생에 내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지금(금생)은 내가 반대로 그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고통을 주는 그(상대방)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참회(반성)함으로써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오히려 고통스럽게 하는 그에게 잘 대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일이며, 업장이 소멸됨으로써 비로소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는 것이다.
업장을 소멸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업이 작용하는 힘(업력業力, 업식業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법法(원리)을 깨달아 체득되는 법력法力(완성된 중도의 지혜)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信仰의 힘으로는 가벼운 업력은 이겨나갈 수 있으나 무거운 업력은 이기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해서 법력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업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비교하자면, 나에게 적은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잊어버리기도 할 수 있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용서하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무의식(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장을 소멸함으로써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원리를 체득하고 이루어지는 깨달음으로 ‘나(자아自我)’를 소멸시켜야 된다.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리 좋은 열쇠(해답, 조언)를 준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 날 유행하고 있는 즉문즉설卽問卽說의 한계점이다.
인과법의 핵심은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다(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온다.)”]
그래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이것은 마치 좋은 대학에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말과 같아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좋은 인연(선연善緣)과 나쁜 인연(악연惡緣)을 판단하는 기준은 과정에 있지 않고 결과에 있다.
예를 들어서 주방장이 주인 망하게 하려고 고기를 많이 넣어 주었는데 그 집에 가면 고기를 많이 넣어준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오히려 손님이 많아져 돈을 많이 벌었다면 좋은 인연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 잘되게 하려고 고기를 조금 넣어주어 식당이 망했다면 나쁜 인연이라는 말이다. 전자는 동기는 나쁘나 결과가 좋기 때문에 선연이고 후자는 동기는 좋았으나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악연이다.
모든 수행의 핵심(궁극)은 “나(자아自我, 주관)를 죽이는(소멸) 일이다.” 나를 죽이면 모든 것은 저절로 객관화됨으로써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지 않는 이상 바라는 마음 없이 늘 그냥 최선을 다하는 ‘무심無心’의 삶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심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대자유인이 되는 해탈解脫이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없는 열반涅槃이기 때문이다. 무심은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 함으로써 얻어지는 최고의 지혜다. 따라서 무심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궁극이다. 무심 하나면 어떠한 고통도 일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은 무심 하나로 다 해결되어진다는 말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무심으로 살아 갈 것을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무심으로 살았는지를 점검해 보는 일은 어떠한 수행(기도, 명상) 보다 나에게 더 이익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원인에 의한 결과의 나타남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재하는 별도의 주재자(절대자)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일 뿐 근본원리에는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오직 자기 자신이 진여의 성품(무상, 연기, 중도, 공)인 원리를 깨우쳐 완성되는 궁극의 지혜(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이 부처님의 유언인 "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스스로의 등불이 밝으니 스스로에게 돌아가 의지하고) 법등명 법귀의法燈明 法歸依:(법의 등불이 밝으니 법에게 돌아가 의지하라)"다.
이와 같이 우주의 순환 원리인 인과법을 확실하게 알아서 숙명통宿命通이 열리고 진여의 성품인 원리를 깨달아 지혜가 완성되면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고통을 헤쳐 나아가는 주인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고 물과 같은 대 자유인(해탈자解脫者)이 되는 것이다.
해탈자는 ‘나(자아)’를 소멸 시켰기 때문에 존재자체만 있을 뿐 나를 위해 필요한 어떠한 그 무엇도 필요치 않게 된다. 다만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필요할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다. 무엇을 하든 다만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이기 때문에 늘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생각은 있으나 번뇌 망상이 없는 무념無念, 어떠한 것도 내 것(아상我相, 무명無明, 알음알이, 고정관념)으로 삼지 않는 무상無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 즉 무심無心의 삶이다. 따라서 무심이 깨달음의 궁극이요, 해탈이요,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는 일이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무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죽여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목적의식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어떠한 경우(상황, 여건, 조건)에도 절대긍정의 마음이 만들어 지고, 다 사랑 할 수 있게 된다. 성경말씀의 핵심인 ‘할렐루야’ ‘아멘’도 ‘나’를 죽임으로써 가능해 진다. ‘나’를 죽여야 성령聖靈이 나에게 온전히 임臨하게 된다.
무심으로 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그냥 최선을 다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이 진여의 성품이다.
무심으로 행行한 것은, 행하기는 행하였으나 행한 바가 없기 때문에 삶의 찌꺼기인 업을 남기지 않으므로 윤회의 고리가 다 끊어진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어느 곳에도 마음을 머물지 않게 하여 마음을 일으키라’고 하는 것.)”의 의미다.
[출처] * 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작성자 여해 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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