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차도를 지나는데 차가 몹시 정체 되였다

앞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 2차선 차로가 1차선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2차선을 가던 차들은 1차선으로 차로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서서히 한대 한대 손 깍지 끼듯이

끼어들어 가기때문에 1차선을 가던 차들이 양보를 해주어야만 하는 상황 이였다.

앞 차들이 한대한대 끼어어들어 차선을 바꾸어 나가고 내 차례가 되여 왼쪽 깜박이를 켜고

끼어드는데 1차선에 있는 차가 양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 온다.

양쪽 비상 깜박이를 캄박거리며 조심스래 들어가면서 빽미러를 바라보는데 여전히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밀어 붙힌다,

이러다가는 사고가 발생 할것 같아 멈추어 그차를 보내고 다음 차의 양보를 받아 빠져 나갔다,

도대체 매너가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그차 옆으로 가면서 왼쪽 창문을 내리고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그랬나 싶어 쏘아 보았더니

"뭐가 어떼서" 라듯이  창문을 내리고 상대도 나를 뻔뻔스런 얼굴로 쏘아본다,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나이지만 나만 생각하는 요즘 신세대들의 이기적인 그런 인상이였다.

그럼 그렇지 그래서 양보를 안해주고 밀어 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런 말도 없이 창문을 올렸다,

어쨌던 상대는 해주기 싫어서 그렀겠지만 그렇다고 왜 상대를 얄밉다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내가 스스로

짜증을 내며 화를 낸단 말인가?  그것은 당연히 양보를 해주기를 바랜는데 안해줘서 그랬던 것이다,

바라는 것은 내 생각이였고 안해준것은 상대의 생각인것이다,

이렇게 바램이 있어 안 되면 화가 난는 것이다,

화를 내고 있는 내 자신이 어리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보는 상대의 선택일 뿐이고. 난 상황에 따라 해결하면 되는데 내 욕구데로 안됐다고 상대를 원망하면서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를 내면 상대가 괴로운것이 아니고 내가 괴로운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을 취하지 말고 괴로움이 없이 여여부동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다.

열반은(행복한 마음) 즉 상이 없는 마음이다. 

분별심이나 차별심 간택심을 버리고 이타심[利他心]을 갖는 것이 보살의 정신이다,

이럴때 그래 바쁜 모양이다, 내가 양보를 받아야 하지만 이럴 땐 내가 양보를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괴로운게 아니고 행복할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 유심조다.

한생각 바꾸면은 괴로움이 편안함으로 전도 되는 것이다.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오는 인과의 법칙은 좋지 않은 나뿐 생각은 해가 되지만 좋은 생각은 득이된다,

남을 탓하기전 먼저 자신을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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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고통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의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것이 다 인연으로 인하여 발생 된다고 보면 될것이다.

곧 인연이라고 하면 "인"이라는 종자가 "연"이라는 간접적 원인이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나타나는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반듯이 주고 받는 관계속에서 인연이 맺어지게 되며 이 인연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두터워지고 가까워져서 서로가 호감을 갖게되고 뭔가 좋아지고 이익이 될것 같아서 결혼을 하게

될수도 있고 결과로 가정이 만들어지게 된다.

 

인연은 우연은 없다고 볼수있으며 어쩌면 필연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서로가 주고 받을것이 많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주고 받을 것이 많다는 것은 관심과 생각이 많아 오가는 인연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연이 맺어지게 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과거의 어떤 인연이 무의식에 저장되여있는

업식으로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포장이 되여 좋아하게 되면서

이루어지게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인연도 어떤 인연이 됐던 만날수 밖에 없는 과거의 결과라고 볼수 있다.

 

살아가면서 서로 맘에 들지않고 기대치에 어긋나면 미워지게 되고 

아니면 그냥 보고 살자니 답답하고 어떻게 고쳤으면하고 바라지만 안고쳐지니 

어떻게 하면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살수 있을까? 

 

괴로운 것은 내가 나를 괴롭힐 뿐이지 누가 나를 괴롭게해서 괴로운 경우는 드문일이다,

비가오면 온다고 불만이고 눈이오면 온다고 바람이불면 분다고 투정을 부리면서 자신을

괴롭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밖으로부터 괴로움이 오는줄 알고 대상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힘들어 하는데

이것도 자업자득 이라고 할수 있다, 

 

내가 있고 내것이 있고 내생각이 올다라고 고집하게 되면 반듯이 상이라는 찌거기가 남게되여

내생각대로 남을 고치려하고 내 생각데로 되여(바꿔)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여

바로 괴로움의 씨앗이 발연이 되고 내가 힘들어지게 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 물질 즉 지수화풍으로 형성되여

있으므로 "이것이 나다" 라고 할수가 없는 것이기에 무아 즉 비아라고 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자세히 분석해보면 오온으로 되여있다,

오온은 반야심경에 색수상행식이며 색은 형상 즉 지수화풍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작용을 말한다,

이와 같이 나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속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연생하면서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나를 지켜보고 상대를 이해하고 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꿀수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부관계도 서로 생각이 안맞아 다툴때가 있다

곧 내 생각이 올고 상대 생각이 맞지 안다고 나를 고집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감정적 경계가 일어날때  알아차리면서 "그래 나는 무아다" 라고 생각을 바꾸면서

"실체가 없는 공이며 연기 중도다"라고 한생각 바꾸면 싸울일이 없어지고 나도 좋고 상대도

좋고 서로 좋아 이것이 중도의 생각인 것이다, 

 

원리와 이치 알고보면 괴로워 할것이 아닌데 인식상의 착각으로 자기생각에 사로잡혀

원망하게 되고 짜증을 내면서 자신만을 학대하는 것이다,

내가 괴로우면 옆에 가족들도 괴롭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있는 방이 밝으면 같이 있는 사람도

같이 밝아지는 것이다,이왕에 살바에야 행복하게 살아야지 왜 굳이 괴롭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두운 곳에서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내 자신의 주인이 되여 밝고 행복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생각할수 있다

뜨거운 감자를 들고 괴로워 할것이 아니라 바로 놓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한 생각만 놓아 버리면 된다. 아 그럴수도 있겠다, 다행이다,

그런데 먹고싶은 용망에 놓지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괴로워 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것인데 이미 사라져버린 생각에 묶여서

목을 맨 강아지처럼 캥캥거리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생각이 내 생각과 어긋나거나 행위가 거슬리면은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를 하던지

아니면 "내가 화가나고 있구나"하고 자신을 알아차리고 놓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왜 저럴수가 있어 나하고는 정말 안 맞어" 하면서 오해와 분노를 만들고 자꾸 가지를

치고 세끼를 치면서 고리를 만들어 나가면 엉켜진 실타래처럼 더욱더 복잡하게 되면서 곧 내 자신이

괴롭게 되는 것이다, 내가 행복 할려면 나를 방어하라.

괴로움이 침투하는 생각의 길을 막아버려라.

그리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럴때는 한번에 싹 잘라 버리던지 아예 "에이 모르겠다" 하면서 멀리 던져 버리면 되는 것이다,

모든것은 연기중도다, 실체가 없는 공이다」라고 한 생각을 싹 돌려 버리면 되는 것이다,

유위법은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모든것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개불처럼 허망하고 무상하게 여기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한 마음 한생각으로 웃기도하고 울기도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놈을 본적은 한번도 없지만

이것이 만상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 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일뿐이다, 나와 상대를 비교하면서 올다 그르다 판단을 하는것은 곧 시비를 만드는 것이다,

대상을 보면 있는 그대로 볼뿐 내 생각대로 보면서 스스로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강건너 불을 보듯이 남의 일은 참견하지 말고 그냥 지켜만 봐야한다. 

내 생각데로 그를 고치려 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괴로울 뿐이므로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생각을 버리면 시비할 일이 없으므로 불취어상 여여 부동 할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이라고 했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도

소리도 없어 감히 얻을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 내가 올다는 생각 즉 집착하는 마음(생각)이 나를 괴롭게 하는 원인인 것이다

세상에는 올은 것도 그른것도 없다해서 무유정법이라고 한다,

내 생각을 버리면 세상과 나는 둘이아니다. 나라는 생각을 하면 상대와 내가 둘이 되며 양극이

되기 때문에 마찰이 일어날수 있다, 한생각이 일어날때 이뭣고로 돌리면서 알아차려라.

수행은 곧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내 잘 못된 습관을 고칠수 있는것이다,

 

모든것은  본래 무상하고 무아이며 연기 중도로 되여 있다는 원리를 알면 내가 괴로워 할께 없는 것이다,

괴로움은 바로 집착으로 부터 발생하는 것이므로 원리(연기중도)를 알면  집착 할것이 없는 것이다

본래 없는 것을 꿈속에서 처럼 있다고 착각하는데서 괴로워 하고 있으므로 무상 무아 무주로서 살아가는

지혜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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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모든것이 다 부처다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

 

일미진중 함시방

일체진중 역여시

 

일체만법 개시불법

일체중생 개유불성

 

일념즉시 무량겁

무량원겁 즉일념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유즉시무 무즉시유

생즉시멸 멸즉시생

응무소주 이생기심

 

 정견 이란 :바르게본다

양변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본다

 

정견은 곧 중도라고 할수있고 정도라고 할수있고 

팔정도 사성제 삼법인 연기 무아 무상 공과 반야 지혜와 다르지않다,

 

우리는 아니 일체는 텅비워있는 우주공간에 묘하게 존재하고있다,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아니다

옳은것도 아니고 그른것도 아니다

좋은것도 아니고 싫은것도 아니다

 

본래 정해져 있는것이 아니고 인연에 따라 정해질수도 있기때문에 진공묘유라고한다,

 

우리가 생활을 중도로 살면은 마음이편하다,

즉 내생각을 정해놓고 고집하지않고 내려놓고 살아간다면 굳이 다툴일이없다,

이렇게 살아갈려면 내가 없음을 알아야한다,

즉 무아 공 연기 중도라고 이해하고 현실에 생가을 적용하면서 실천행을 하면 되는것이다.

이것을 체험을 하면 모든것이 툭 터져서 자동으로 자비사상이 나온다지만 우리수행 중생들은

아직 미혹하기 때문에 목표를 여기에 두고 공부를 해야 할것이다,

 

 

원리를알고 이치를알고 정보를 알고 실천하면 괴로울 일이

없게되여 행복하게 살수있다. (법성 원융 무이상)

 

유즉시무 무즉시유 (有卽是無 無即是有)

있는 것은 곧 없는것이며 없는것은 곧 있는것이다,

 

있는것도아니고 없는것도아니다 즉 있을수도있고 없을수도있다

이것이 바로 중도적으로 표현을 한것이다,

 

 

손벽을치면 소리가 나면서 사라진다     

그러니 있기도하고 없기도 한다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다

이것이 곧 연기 중도라고 한다.

 

인연따라(조건) 이뤄졌다가 인연따라 사라진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것은 항상함이 없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즉 시간적 차원에서 무상이라하고 공간적 차원에서 무아라고 한다

진아다 참나다라는 것은 이름일 뿐이지 실체가 없어 있다고 할수도 없고

없다고 할수도 없는 것이다,(진공묘유)

 

 

제상이 비상이다.

제상은 곧 있는것이며 즉 색이며 비상은 있지않는것이다, 즉 공이라고한다,

 

즉견여래 고정된 실체(상)가 없는것을 부처라 하는데 부처를 본다 즉 부처라 한다.

상이 없는것을 부처라 한다 일체 상을 떠나면 그 이름을 부처라한다,

 

일체의 모든 것들은 다 중도로 되여있는데 편견과 변견 그리고 분별과 간택으로 

한편에 치우치기 때문에 정견 곧 중도를 외면하고 있는것이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 중도를 잘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즉비 논리로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중생이라면 중생의 모양(실체)이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라고 설명하는것이다. 모든상은 허망하기 때문이다, 즉 실체가 없기때문이다,

궁정을 부정해 버리고 다시 궁정과 부정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사실 중생이라는 것은 중생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이다 부처다 양변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있다 없다. 생이다 사다. 옳다 그르다. 극단적 양극으로 성립되여 있지만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공 처럼 양극이 둘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양변을 떠난것이 쌍차라면 있는것이 없는것이요 없는것이 있는것이다. 

이것이 상호상관 관계로 서로 통하게 되므로 쌍조라 한다

 

 

부분은 곧 전체요 하나는 곧 전부요,전체는 즉 부분이며 전부는 곧 하나이다.

이세계는 원자로 되여있다, 즉 미진으로 되여있다 소립자로 되여있다,

소립자가 덩어리로 모이고 뭉처서 이세계가 되여있기에 의상스님의 법성게에서 볼수있다,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

일미진중 함시방

일체진중 역여시

 

 

어둠이 있으므로 밝음이있다. 이것은 둘이 아니고 다르지않다 이것이 중도다. 

반야심경에 즉(곧)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나 

금깅경에 여래설 바라밀이 즉비 바라밀 시명 바라밀 이 중도를 설명한것이다

 

이 세계는 부분적으로 보면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전체로보면 다르지않고 둘이 아니다,

왜? 연기 중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곧 너고 너가 즉 나다 라고 할수있다

 

각각 다른모습 다른 생활을 하고있지만 우리는 실체가 없이 지수화풍의 연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지수화풍 4대가 곧 나라고 할수있다. 그렇다고 지수화풍이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수화풍도 연기로서 되여있기 때문에 공이라고 한다 (오온개공)

 

우리의 본질은 색이면서 공으로 공이면서 색으로 동시에 존재하고있다. 

이둘은 땔래야 땔수가 없다 ,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기 때문이다,

색은 공이 있으므로 나타낼수있고 공은 색이 있으므로 드러낼수 있기 때문이다,

생과 사도 그렇고 있다 없다도 그렇다, 모든것은 양극이면서 하나의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하고 다르지 않다라고 한다, 이것이 연기 중도로 되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상은 곧 둘이 아니면서 하나다, 

그러면서 무자성으로 무상 무아로서 영원한 것이 아이므로 그냥 공이라 할 뿐이다,

 

곧 부처가 아닌게 없다. 세게 17억 인류를 넘어서 우주에 있는 일체의 모든것은 그물코처럼

서로 연관되여 있으면서 소립자로 되여있고 연기로 되여있고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연기설로 보면 하나님도 부처요. 흰두교도 부처요. 이슬람교도 부처다,  

모든것이 하나 이며 부처라 할수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다,

 

나는 곧 부처이면서 무명에 의해서 (생각.습관.관념.지식.)중생적으로 삶을 살고있을 뿐이다,

 

완성된 부처로 살기위해서 내가 없고 내것이 업고 아집이 없다는것을 자각하고 실천하면서

중생의 업식 습관과 버릇을 고쳐 나아가기위한 수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팔정도

 

1,정견 / 바른견해

2,정사유 / 바른 생각과의지

3,정어 / 바른 말

4,정업 / 바른 해위

5,정명 / 바른생활

6,정정진 / 바른정진노력

7, 정념 / 바른 생각

8,정정 / 바른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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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이란 무엇인가? 선은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이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명상하여 불생불멸하는 진리를 깨쳤다. 이 깨달음으로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인간이 생로병사의 상대 세계에서 깨어나 영원한 행복의 절대 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불교의 성립이고 출발이다.

 

부처님이 깨치기 이전에도 요가와 명상이라는 다양한 수행이 있었다. 부처님이 깨친 마음을 표현한 선(禪)은 범어로 디야나(dhya-na), 팔리어로는 쟈나(jha-na)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가 다른 지역으로 전해질 때 그 지방의 말로 표현되어야 했다.

 

“안으로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으니”

“그림자가 마당을 쓸어도 움직이지 않아”

 

디야나는 한자문화권에서는 선나(禪那)라 음사하였고 줄여서 선(禪)이라 한 것이다. 禪(선)이라는 문자는 한국에서는 선, 중국에선 찬(chán), 일본에선 젠(ぜん)이라 발음한다.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은 다양한 말로 표현되지만, 그 깨달음은 하나이다.

 

6조 혜능스님은 <단경> 좌선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안으로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다.” 예컨대 선이란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고 안정됨을 말한다. 6조의 제자 영가스님은 <증도가>에서 “다녀도 선(禪)이요 앉아도 선이니 말하고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하거나 본체가 편안함”이라 했다.

 

즉, 우리가 부처님이나 조사들처럼 깨치면 분주히 일상생활을 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이다.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은 이렇게 표현한다.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禪)이다(<돈오입도요문론>).”

 

조사 스님들의 말을 종합하면, 선이란 결국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고 번뇌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깨달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조스님은 이것을 평상심(平常心)이라 했다. 그런데, 평상심이라 하니 화내고 욕심 부리고 술 마시고 남 욕하는 그대로가 평상시의 일이니 그대로 선이고 수행이라 하는 분도 흔히 본다. 그것은 아니다. 큰 착각이다.

 

성철스님 강설(증도가, 돈오입도요문론)에 보면, 우리가 이로움과 손실, 비방과 받듦, 칭찬과 비웃음,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팔풍(八風) 경계에 직면하더라도 마음이 여여해야 선이라고 한다. 즉, 선이란 나에게 팔풍이 거세게 불어 닥쳐도 가나 서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고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하거나(행주좌와 어묵동정), 자나 깨나 꿈에서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누구나 의문이 생기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남이 나를 욕하고 비웃고 내 것을 빼앗아 가고 헐뜯고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도 내 마음이 과연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부처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부처님은 명상을 통해 선을 체득해서 그런 삶을 살고 가신 것이다.

 

부처님뿐 아니다. 달마, 혜능, 마조, 조주, 임제, 도의, 보조, 태고, 나옹, 서산, 사명, 경허, 용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역대 조사 선지식들이 그런 분들이다. 그러한 깨달음 세계, 경지를 선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재가자들도 가정과 직장의 일상생활에서도 수많은 팔풍을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선을 해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롭겠는가. 가정과 직장, 사회에는 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극락과 천당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 선(禪)의 세계에 극락이 있다.

 

그래서 송나라 때 야보스님은 선의 세계를 이렇게 노래한다.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쓸어도 티끌이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물 바닥까지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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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가정 공원 중랑체육관옆 동아아파트 뒷쪽에 있는 계곡으로 사가정 공원으로 올라가다

체육관과 동아아파트 뒷쪽으로 철망울타리를 타고 걸어가면 계곡입구가 시작 되며 

산로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를 않아 소로길로 되여있습니다. 

계곡을 따라 폭포 오르막길을 지나 계곡 암반길을 지나 올라 가다보면 

약수터가를 지나서 오른쪽 능선길로 오르막을 오르면 용마산 정상 체력장이 나옵니다.

이곳은 대체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곳으로 탐방객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어느 노년의 거사님이 오랜세월동안 홀로 수행차 수많은 탑을 쌓은 것으로 알고 있을뿐

한번도 만나거나 뵈온적은 없습니다,

탑골짜기의 이름은 탑이 많아 저자가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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