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심(無心)이 도(道)

강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 한 사람에게 공양 올리는 것만 못하다. 그것은 무심한 사람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眞如) 그대로인(如如) 몸이 안으로는 목석 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주관 객관의 나뉨은 물론 일정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에 떨어져 닿아 쉴 곳이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런 태도는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거기다가 널리 지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쇠털처럼 많아도 정작 도를 깨친 이는 뿔과 같이 드물 것이다.

문수보살은 이치(理)에, 보현보살은(行)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공(眞空)으로서 걸림 없는 도리이고, 행실이란 형식을 벗어난 끝없는 실천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한다. 유마(維摩)는 깨끗한 이름[淨名]이란 뜻인데, 깨끗하다는 것은 성품을[性]을 두고 하는 말이고, 이름은 모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 성품이 모양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를 정명거사(淨名居士)라 한 것이다. 대 보살들로 상징된 위의 것들은 누구나가 가진 성품으로, 한마음을 여의지 않으니 깨치면 곧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서 깨달으려 하지 않고 마음 밖의 경계인 모양에 집착하여 오히려 도를 등지고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란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모래는 모든 불·보살과 제석, 범천 및 하늘 무리들이 자기를 밟고 지나간다 해도 기뻐하지 않고, 소나 양·벌레·개미 등이 자기를 밟고 지난다 해도 성내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갠지스강의 모래는 보배나 향기를 탐하지도 않으며, 똥·오줌 냄새나는 더러운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한 마음으로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를 것이 없으니, 이렇게 무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그 당장 무심한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여러 겁 동안 수행해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단계적인 공부에 얽매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듣는 즉시 한 생각에 무심(無心)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廻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심을 얻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디거나 빠르거나 무심을 얻으면 그만이지 거기에 더 닦고 증득할 것이 없으며, 참으로 얻었다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는 것이니 당장 한 생각에 깨친 것과 10지를 거쳐 깨친 것이 효용에 있어서는 꼭 마찬가지여서 다시 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긴 세월 동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선악(善惡)을 짓는 것은 모두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모양에 집착하여 선악을 짓게 되면. 허망하게 윤회(輪廻)의 수고로움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한마디 말에 본래의 법을 문득 스스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는 또한 마음이라 할 것도, 무심(無心)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앤다면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된다. 다만 묵묵히 계합(契合)할 따름이다. 모든 사유(思惟)와 이론이 끊어졌으므로 말하기를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가는 곳이 없어졌다〔言語道斷 心行處滅〕'고 하였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인데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지녔으며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불 보살과 한 몸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를 지을 뿐이다.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황벽(黃檗: ?-850) 스님이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육도만행(六道萬行)과 항하사(恒河沙) 같은 공덕이 본래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어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 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 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한 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모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2010년 12.31일 송년 모임을하다 부안용종이와 통화를. 하면서 갑자기 그밤에 부안까지 성돈이 아반떼를 타고  갔었다. 다음날 내장산에가서 겨울을 만킥하고 돌아왔던 추억이있었다

오랜만에 누라가. 휴가로 쉬어서 모시고. 아들과  큰딸을 동반하여 장모님산소로 유명산으로 한바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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