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언어

<종문무고(宗門武庫)>에 보면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종고의 스승인 원오극근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를 묘사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를 통하여 선의 깨달음에서 화두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펴보자.

원오극근의 스승인 오조법연은 어느 날 진제형이라는 거사에게 말했다. “제형은 어린 시절에 ‘소염시(小艶詩)’를 읽어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다음 두 구절은 제법 우리 불법(佛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따름이다.” 진제형은 연신 “네!” “네!” 하였고 법연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때마침 원오가 밖에서 돌아와 물었다. “스님께서 ‘소염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 진제형 거사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그는 소리만 알아들었을 뿐이다.”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뿐이라면, 그가 이미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데 어찌하여 옳지 않습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악!” 원오는 이 말에 문득 느낀 바가 있었다. 방문을 나서니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날개를 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다시 혼자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소리가 아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법연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소염시’는 당나라 현종이 총애했던 양귀비를 소재로 한 시다. 낭군의 정이 그립지만 낭군을 바로 불러올 형편은 아니기 때문에 일 없는 몸종 소옥이를 부름으로써 낭군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어 자신의 심정을 알아채도록 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이다. 여기서 법연이 잘 살펴보라고 하는 부분은,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를 때 낭군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의미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즉 말을 듣고서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라가지 않고, 현상으로서의 그 말이 생겨나는 근원을 파악함이 곧 불법(佛法)이라는 것이 법연의 가르침이다. 법연의 이 말을 듣고 원오는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알아들었으면 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고, 법연은 원오가 견성하는 길을 찾았다고 보고서 즉각 ‘뜰앞의 잣나무’라는 공안을 제시하여 이것도 같은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 원오는 공안을 타파하고 견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줄탁동시의 한 장면이다. 원오는, ‘소옥아! 소옥아!’하는 말이나 ‘뜰앞의 잣나무’하는 말이나 ‘악!’하는 외침이나 ‘꼬끼요!’하는 닭의 울음 등에서 동일한 그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즉 만법(萬法)에 공통되는 그 무엇, 만법이 귀일하는 그 하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를 선불교에서는 마음[心] 혹은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체험을 두고 ‘자성을 본다[見性]’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은 제각기 다르다. ‘소옥아! 소옥아!’는 부르는 말이고, ‘뜰 앞의 잣나무’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말로서, 이 둘은 소리이면서 동시에 의미를 가진 언어이다. 그러나 고함소리인 ‘악!’과 닭의 울음소리인 ‘꼬끼요!’는 의미를 가진 언어라기 보다는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의미가 아니라, 바로 ‘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는 의미를 담을 수도 있고 담지 않을 수도 있는, 의미 이전의 것이다. 즉 소리는 의미로 형상화되기 이전의 자성의 움직임인 것이다.

이 까닭에 원오가 말을 듣고 말이 아니라 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뜻을 이해했을 때, 법연은 화두와 할(喝)을 사용하여 원오의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두는 의미있는 말을 통하여 의미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성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직지(直指)의 방편이다.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은 간단히 줄여서 『법화경』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법화경』은 부처님의 묘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해서 ‘묘법’이라고 합니다. 묘법은 마치 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수면 위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은 것입니다. 혼탁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불법의 진수를 체험하고 꽃피울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수행을 하려면 세간을 떠나야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법화경』에 의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세간 속에서도 얼마든지 수행은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대사인연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에게 불지견(佛知見)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지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로서의 지견, 즉 깨달음의 지견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도 이미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이제부터 닦아나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미 갖추고 있음을 확신하고 무한대로 써나가면 될 따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삼승(三乘)은 방편이요, 일불승(一佛乘)만이 진실이라고 하는 방편품의 핵심입니다.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 즉 법화 7유는 모두 이러한 내용을 부연 설명해주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첫 번째, 불난 집의 비유는 불타는 집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아들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온갖 수레를 준다고 해서 밖으로 끌어내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가장 훌륭한 수레를 주게 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소원성취나 마음의 평화 등을 얻기 위해 불도에 입문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부처님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난한 아들의 비유는 자신이 본래 장자의 아들임에도 이를 모르고 궁핍한 거지생활을 하는 사나이를 다시 집안으로 끌어들여 가업을 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본래 부처님의 아들로서 가업을 잇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세 번째, 초목의 비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저 단비와 같이 한 맛이지만,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각각 빗물을 받아 들이듯이 중생들도 근기에 따라 부처님 가르침을 다르게 받아 들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한 맛인 일불승에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지요.

네 번째, 가짜 도성의 비유 역시 성불의 길에 지레 겁먹는 이들을 위해서 방편으로 중간에 가짜 도성을 만들어 용기와 희망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옷 속 보석의 비유는 자기 옷 속에 천금이나 되는 보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핍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들이 스스로 불성을 이미 간직하고 있음에도 다만 중생지견(衆生知見)에 머물러 있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이것은 실제로 외부에 있는 관세음보살이 고뇌를 해탈케
여섯 번째, 상투보석의 비유는 전륜성왕이 오직 자신의 후계자에게만 상투속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보석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우리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모든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사 아들의 비유 또한 뛰어난 의사인 아버지만 믿고 약을 복용하지 않는 아들들을 위해서 짐짓 다른 나라에 가서 머물며 죽었다는 말을 전해 약을 복용토록 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도 열반의 모습을 보여주시지만 여래의 수량은 본래 한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성불하셨으며, 다만 중생제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가시는 모습을 보이실 따름이지 실로 오고 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모두를 부처님으로 만들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일대사인연입니다.

상기 일곱 가지 비유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중생지견에 머무르지 말고 어서 불지견을 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중생이란 생각에 빠져있는 한, 어쨌든 중생인 것입니다. 아무도 건져줄 수 없습니다. 비록 미흡하긴 하더라도, 내가 본래 부처란 확신을 가져야 비로소 성불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육조스님은 사람의 마음이 사량 분별치만 않으면 본래 근원이 공적해서 잘못된 견해를 여의는 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한 생각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대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바로 「관세음보살 보문품」입니다.
해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이미 갖추어져 있는 대자대비심을 불러일으킬 때 사소한 시비와 고뇌는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가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면, 큰 불 속에 들어가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며, 큰 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크게 화나는 일이 생기거나 아주 우울한 경우가 닥친다고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지송하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염하는 힘(念彼觀音力)으로 성냄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로 새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오묘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법화경』은 참으로 희유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받아 지녀 읽거나 외우거나 바르게 생각하거나 수행하고 배우거나 옮겨 쓰면, 이는 곧 석가모니불을 만나 뵙고 그로부터 직접 경전을 들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석가모니불을 공양함이 되며, 부처님께서 착하다고 칭찬하심을 받으며, 또한 석가모니불께서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져주심이 된다고 합니다. 어찌 수지 독송하거나 베껴 써서 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월호스님>

공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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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오온
무아
공(空)은 순야타(산스크리트어: शून्यता, Śūnyatā, →비어 있음 · 공허(空虛))를 번역한 것으로,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는 공 사상(空思想)은 불교를 일관하는 기본 교의 또는 사상이다.


공 사상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흥기하게 되자 특히 《반야경(般若經)》 계통의 근본사상으로 강조되었다. 원래, 공 사상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서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중심으로 주장된 법유(法有)의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 서로 의존함)라는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파악하며, 일체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배격한 무애자재(無礙自在)의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다.

《반야경(般若經)》과 용수의 《중론(中論)》 등에 나오는 공 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인도 불교의 종파가 중관파이다. 중국 · 한국 · 일본 불교의 삼론종은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을 연구 · 강술하는 종파로 인도 불교의 중관파에 해당한다.

공 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의 이대조류인 중관파와 유가유식파 모두의 근저가 되는 사상이다. 유가유식파에서도 공 사상이 중시된 것은 유가유식파와 법상종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서두에서 논의 저술 목적 중의 하나로, 이공(二空: 두 가지 공)에 대해서 미혹된 견해나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이공(二空)의 교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그들이 해탈(열반)과 보리(반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 한국 · 일본 · 티베트 등의 대승불교는 모두 인도의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하므로, 공 사상은 대승불교 전체의 기초적인 또는 근본적인 교의라고 할 수 있다.

공 사상
대승불교에서 공은 여러 가지 뜻으로 설명되는데, 특히 허무적(虛無的)인 뜻으로 이해하는 것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은 만유의 모든 현상은 그 성품으로 보면 다 공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반야경(般若經)》 계통의 경전과 중관론의 주장이다. 이러한 불교 교의를 공 사상(空思想)이라고 한다.

공(空)은 존재물(存在物)에는 자체(自體) · 실체(實體) · 아(我)라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이 교의는 이미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불교에서, 모든 현상은 인연소생(因緣所生), 즉 인(因)과 연(緣)이 가적(假的)으로 화합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我)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인 제법무아(諸法無我)에 해당한다.

즉, 각 개인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존재("법 · 法")는 인연(因緣)에 따라 생기(生起)한 것이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만 그 존재성이 가적(假的)으로(임시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오온의 가화합")이며, 실제로는 거기에는 어떠한 항상불변(恒常不變)한 자아(自我)나 실체(實體) 같은 것은 없는 제행무상 · 제법무아이며, 때문에 모든 것은 "공(空)"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 사상에서는, "공(空)"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中道)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또한 대승불교 실천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대승경전 중 《반야경(般若經)》과 이에 입각하여 용수(龍樹)가 저술한 논서인 《중론(中論)》에서 명백하게 밝혀 두고 있다. 《중론》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에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법 · 존재 또는 현상은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난다)"의 게송이 있다.

諸法有定性。則無因果等諸事。如偈說。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無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眾因緣生法。我說即是空。何以故。
眾緣具足和合而物生。是物屬眾因緣故無自性。
無自性故空。空亦復空。但為引導眾生故。
以假名說。離有無二邊故名為中道。

是法無性故不得言有。亦無空故不得言無。
若法有性相。則不待眾緣而有。
若不待眾緣則無法。是故無有不空法。

각각의 법이 고정된 성품(定性)을 지니고 있다면 곧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일이 없어질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한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법(法: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공하다(無)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도 말하며,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말한다.
단 하나의 법(法: 존재)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 법(法: 존재)을 공하다(空)고 나는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 인과 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물은 여러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하다. 그런데 이 공함도 또한 다시 공한데, (이렇게 공함도 다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공하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과 공함도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에 의해) "있음(有)"과 "없음(無)"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나기에 중도(中道)라 이름한다.

법(法: 존재)은 고정된 성품(性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있음(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법(法: 존재)은 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없음(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법(法: 존재)이 고정된 성품(性相 · 성상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법은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기의 법칙에 어긋난다).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므로 생겨날 수 없고, 따라서) 그 법(法: 존재)은 없는 것(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러한 모순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다음을 대전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즉, 연기하지 않는 존재 또는 고정된 성품을 가진 존재)이란 존재할 수 없다.

— 《중론(中論)》 4권 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모든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해서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이 문장은 대승 보살의 수행인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해서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성불했기 때문입니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수행은 가장 신비한 주문이자, 가장 밝은 주문이고, 가장 높은 주문이며, 같다고 비교될 만한 것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네 가지 요소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왜 이렇게 네 가지로 표현을 했을까요? 네 가지는 반야바라밀다가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나아가는 데는 네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마음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이 마음을 일으켜야 행위로 옮겨갑니다. 마음을 일으키는 가장 기본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믿음이 생겨야 합니다. 거짓이라고 하면 아무도 따라 하지 않겠죠. 믿음이 없는 데 따라 할 리 만무하잖아요. 그래서 이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제 말을 어느 정도 믿으니까 이렇게 듣고 있죠. 제 말을 불신한다면 아예 듣지도 않을 거예요.

 

둘째, 믿음만 있고 이해가 없으면 어떨까요? 주위에서 믿음은 있는데 이해가 없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이해가 없는 것을 맹신이라고 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밝음이 없어서 어리석게 믿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소중하지만, 맹신이나 미신은 매우 위험합니다. 맹신이나 미신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도 있고, 앎도 있어야 합니다. 맹신이나 미신에 빠지게 되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할 위험이 있어요. 이것이 종교가 갖는 큰 오류입니다. 그것이 진리라면 믿음과 앎이 동시에 있어야 해요. 앎은 없고 믿음만 있다면 큰 화를 불러옵니다. 이와 반대로 아는 건 많은데 믿음이 없으면 어떨까요? 이런 사람은 지식은 많아서 아는 것은 많은데 반면에 실제로 행함이 없죠. 행위가 안 따라오기 때문에 사량 분별이 많은 사람’, ‘생각이 많은 사람’, ‘실천이 없는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렇게 비판을 받게 됩니다.

 

셋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해서 언행일치가 돼야 해요. 실천이 없으면 공허한 말에 불과합니다.

 

넷째, 체험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하는데 소득이 없으면 헛일이잖아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접 경험해서 증득을 해야 합니다.

 

진리로 나아가려면 믿음, 이해, 실천, 증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신해행증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병에 걸렸다고 해 봅시다. 먼저 치료하면 내가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약을 먹으면 낫는다’, ‘치료하면 낫는다하는 믿음이 있어야 치료를 하거나 약을 먹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그 약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어떻게 치료되는지를 모른다면 약을 잘못 먹고 죽을 수도 있고, 병이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원리에 의해서 치료가 되는지를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원리를 알기만 하고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되죠. 꾸준히 약을 먹고,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병이 나아야 합니다. 약을 먹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치료만 받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병이 낫는 체험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이라고 합니다.

 

종교의 문제는 믿음만 있고 이해가 없는 겁니다. 철학은 이해만 있고 믿음이 부족하거나 실천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해(信解, 믿고 이해하는 것)가 겸해져야 합니다. 거기에 행()이 겸해져야 해요. 신해행(信解行)이 겸해져서 마지막으로 증득을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수행자라고 할 수 있어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은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젊은이들은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는 있는데,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그래서 올바른 행이 나올 수 없고, 체험은 더욱더 하기가 힘듭니다.

 

간절하게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도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수많은 영험담이 있습니다. 믿고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다거나, 믿고 기도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깊은 믿음은 보통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확연히 알아버리는 이 깨달음보다 더한 믿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대신주(是大神呪)라고 표현한 겁니다.

 

시대신주(是大神呪), 큰 신비한 주문이고

신비하다는 뜻의 ()’을 쓴 것은 믿음을 뜻합니다. 가장 신비하다는 말은 가장 깊은 믿음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그런데 가장 깊은 믿음은 깨달음입니다. 확연히 깨달은 것보다 더한 믿음은 없어요. 어떤 믿음이라고 해도 우리가 말하는 믿음에는 약간의 의혹이 있습니다. 그 믿음에는 아닐 수도 있는 미진함이 있어요. 그런데 확연히 알아버리면 어떤 의혹도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최고의 믿음에 속해요. 굳이 종교적으로 말하면 깨달음보다 더한 믿음은 없습니다.

 

시대명주(是大明呪), 큰 밝은 주문이며

사람들이 보통 어떤 문제에 대해 최고로 잘 아는 사람에게 해박하다고 말하잖아요.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 훤히 안다이렇게 말하죠. 밝을 ()’을 쓴 것은 앎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 깨달음보다 더한 앎은 없습니다. 확연히 깨달아버리는 것은 어떤 앎보다도 위대한 앎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거기에는 아닐 수도 있다는 약간의 의혹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확연한 앎이 됩니다.

 

시무상주(是無上呪), 이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고

우리가 어떤 실천을 할 때는 단계가 있습니다. 태권도를 하든, 검도를 하든, 어떤 실천에는 단계가 있어요. 그래서 누가 제일 높다라든지 누가 최고다이런 말을 많이 쓰지요. 그런데 최고의 실천은 확연한 앎입니다. 반야는 확연한 깨달음입니다. 확연한 깨달음은 그 어떤 높은 단계의 실천보다 더 높은 단계이므로 반야는 최고의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고수가 수련을 계속해나가다 최고의 단계에 올라가면 문리가 터졌다’, ‘통달했다라고 말합니다. 통달했다는 말은 확연히 알아버렸다는 거예요.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더는 비교할 바가 없다

무엇을 최고로 얻었다고 할 때는 비교의 결과잖아요. 우리는 누가 더 높은지, 어느 것이 더 큰지, 어느 것을 더 많이 얻었는지를 비교합니다. 그런데 무등등은 같다고 말할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 말은 확연히 더 높아서 비교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천상천하 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라고 합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신들과 인간계를 통틀어서 부처님과 비교될 만한 존재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비교할 바 없는 분이다이렇게 말합니다. 네 가지는 반야 바라밀다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명하는 겁니다.

 

반야는 최고의 믿음이고, 최고의 앎이고, 최고의 실천이고, 최고의 증득이다.’

 

신해행증을 빌려서 이렇게 강조한 거예요. 깨달음보다 더 한 종교적 믿음도 없고, 깨달음보다 더 밝은 철학도 없고, 깨달음보다 더한 사회적 실천도 없고, 깨달음과 비교할 그 무엇도 없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든 종교, 모든 철학, 모든 사회적 실천을 능가합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 수행 또는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제법이 공한 도리를 증득하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수행 방법

육바라밀 수행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뭐든지 얻겠다고 하잖아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야 기분이 좋죠. 그게 뜻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빠요. 오늘도 그렇고,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겁니다. 얻어서 행복을 구하기 때문에 얻지 못할 때 불행은 필연적이에요. 그래서 괴로움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얻는 행복은 구걸하는 행복입니다. 그것을 얻지 못하면 바로 괴로움이 따라오기 때문에 자기를 스스로 옭아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주겠다고 마음을 내보세요.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이해받으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는 마음을 내보세요. 남에게 도움을 얻겠다고 하지 말고 도움 주는 사람이 되면 사실은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거예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겠다는 사람이 남을 죽일 리는 만무하잖아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내는 사람이 남에게 손해 끼칠 리는 만무하잖아요. 남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즐겁게 해 주겠다는 사람이 남을 괴롭힐 일은 만무하잖아요. 진실을 말하겠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맑은 정신을 갖겠다는 사람이 술 먹고 취할 일은 만무하잖아요. 소승불교의 수행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소극적 행동을 방패로 삼는다면, 대승불교의 수행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내는 겁니다. 그래서 소승은 계율을 중요시하고 대승은 발원을 중요시합니다.

 

반야심경을 배운 오늘부터는 마음을 낼 때 자꾸 무엇을 안 하겠다는 마음을 내지 말고 도움을 주겠다고 마음을 내고, 이해하겠다고 마음을 내고, 사랑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내봅니다. 마음을 자꾸 부정적으로 내지 말고 긍정적으로 내보는 거예요. 그랬을 때 여러분들의 삶이 어떻게 변할까요?”

 

날씨가 많이 춥죠? 올 가을은 유난히도 따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한파가 몰려왔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평온한 삶을 살다가 이렇게 한파가 몰려오듯이 어느 날 인생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파는 얼마 있으면 또 지나가고, 날씨는 곧 평년 기온을 회복했다가, 또 더 추웠다가, 그러다가 대한, 소한을 지나면 다시 따뜻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날씨와 같은 우리들의 인생

사람들은 인생살이가 늘 이렇게 봄날 같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여름처럼 더울 때도 있고, 때로는 겨울처럼 추울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여름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겨울이 더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게 인생인 줄 알면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대응해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매일 봄날 같기를 원하지만 매일 꽃이 피는 하와이 같은 곳에 산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니에요. 사계절이 있으면 또 거기 나름대로 계절의 맛이 있습니다.

 

인생도 늘 평온하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바깥의 환경은 어찌 되든 내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주어진 조건이 어떻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사실은 별 일이 아닙니다. 늘 있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 겪는 일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과 좀 안 맞았을 때, 분하기도 하고, 원망도 생기고, 괴로움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내용을 대승불교사상, 특히 그 가운데 반야(般若) 사상 또는 공() 사상에서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문장을 배울 차례입니다. 스님이 맨 마지막 문장을 직접 읽은 후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苦提娑婆訶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는 뜻이 고설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확 깨달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야바라밀다주는 반야바라밀다의 진실한 말씀이라는 뜻이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말합니다. 이 구절은 반야심경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제아제는 한문을 우리말로 읽은 거예요. 인도말로는 갓떼 갓떼이고, 우리 말로는 가세 가세이런 뜻입니다. ‘바라아제에서 바라저 언덕이라는 뜻이고, 한문으로는 피안입니다. 그래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이런 뜻입니다. ‘저 언덕은 괴로움이 없는 세계 곧 열반의 세계입니다.

 

그동안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긴 시간 동안 배웠는데 이제 남은 과제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백 번 말해봐야 소용없잖아요.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깨달음을 이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바라승아제는 인도말로 빠라상갓데라고 읽는데, 빠라는 저 언덕이고, ‘갓데(아제)’ 앞에 ()’이 붙어서 가자의 완료형이 됩니다. ‘가자가 현재형이기 때문에 완료형이 되면 저 언덕에 도달하여이런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지보리(菩提, Bohdi)’를 우리 식으로 읽어서 모지가 된 거예요. ‘사바하(스바하)’하소서라는 뜻으로, 기도를 할 때 마지막 구절로 들어가면 뭐뭐 하게 하여 주소서이런 뜻이 됩니다.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굉장히 힘찬 표현입니다. 반야심경의 전체적인 경구를 다 이해하고 난 결론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전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3.1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먼저 세계사를 주욱 설명하고,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고 난 뒤에 맨 끝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하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반야심경도 결국 어떻게 하자는 거냐?’ 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마지막에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 문장은 힘 있게 읽어야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그 뜻을 모르니까 하기 싫은 사람이 억지로 하듯이 힘 빠진 소리로 읽는 경우가 많아요.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공약삼장처럼 아주 힘 있게 읽어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결론은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자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자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이 반야심경 전체를 이해한 사람이 도달해야 할 결론이에요.

 

 

네 가지 진리의 차원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화엄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신해행증에 기초해서 화엄경에서는 4가지 진리의 차원인 4법계(四法界)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첫 번째인 사법계(事法界)는 현상계를 말합니다. 두 번째인 이법계(理法界)는 본질계입니다. 세 번째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는 현상과 본질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차별 현상계에서 자유로워진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찌들고, 성질에 사로잡히고, 어리석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괴로움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것처럼 자업자득의 인생을 삽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만, 사실은 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자기의 고통을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사법계(事法界)입니다.

 

이런 걸 더 깊이 관찰해서 시류에 물들거나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은거를 하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자연인처럼요. 아니면 머리 깎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기도 하죠. 그것이 이법계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문제가 해결될까요? 자기가 물들지 않는 건 좋은데, 세상은 그냥 흘러가죠. 그리고 자기는 갇혀 있습니다. 새가 새장에 갇혀 있듯이, 물고기가 연못에 갇혀 있듯이,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서 배를 젓는 사람과 같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지는 일은 없지만, 그 배는 호수 밖을 나가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새장의 새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법계(理法界)입니다.

 

세상 속에서 걸림 없는 삶을 사는 방법

이사무애법계라고 하는 세 번째 세계는 보살의 세계입니다. 보살의 세계는 원을 갖고 큰 배를 만들고, 풍랑을 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바람을 이용하는 돛을 만들어서 바다를 항해합니다. 호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를 마음껏 항해합니다. 보살은 욕망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유유자적(悠然自適)하게 세상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활동을 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세계입니다. ()이 즉 공()이고, ()이 곧 색()인 이사가 무애한 세계죠.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절에 가면 일주문(一柱門)이 있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해서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해서 일주문(一柱門)이라는 말도 씁니다. 이것이 이사무애법계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이사(理事)가 무애(無礙)한 세계, 즉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 가면 사사무애법계가 나옵니다. 현상 속에 있으면서도 걸림이 없는 세계입니다. 삶이 그냥 이 세상 속에서 걸림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배를 갖고 바다를 항해한다 하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법계 는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세계이고, 이법계는 물에 안 빠지려고 호수에 사는 세계이고, 이사무애법계는 바다에는 가고 싶고 물에는 안 빠지고 싶어서 큰 배를 갖고 바다에 나가는 세계입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물에 안 빠지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물에 안 빠지는 게 좋은데 첫 번째는 물에 빠져서 괴롭고, 두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울타리를 치고 살고, 세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큰 배를 탑니다.

 

바다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고

그런데 사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안 해요. 어차피 바다에 있는 진주조개를 줍기 위해서는 내 발로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빠지려고 했는데 빠지면 고통이지만, 이 사람은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내 발로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물에 빠졌지만 본인은 물에 빠진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원입니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옥에 갔는데, 우리가 볼 때는 바보 같죠. 다른 사람은 지옥에 안 가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지장보살은 안 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발로 가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고

사사무애법계라는 경지는 이 세상에서 남이 울 때 같이 울고, 남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남들과 똑같이 삽니다. 남이 울 때도 안 울고, 남이 웃을 때도 안 웃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물듦으로 해서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법계는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물드는 존재, 이법계는 깨끗하게 살려고 더러운 곳에 가까이 안 가는 존재, 이사무애법계는 가까이 가도 물 안 드는 존재인데, 마지막 단계인 사사무애법계는 내가 물 들고 상대를 살리는 존재입니다. 내가 지옥에 가고 상대를 지옥 밖으로 내보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여요. 그런데 본인의 마음속에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현현(顯現)한다’, ‘천백억 화신(千百億 化身)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이렇게 말합니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잣대로 저 사람은 수행자이다이렇게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졌나, 안 빠졌나하는 잣대가 있는데, 사사무애법계는 기준이 없으니까 잣대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삶으로 해서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느냐?’

 

본인은 괴로워하느냐?’

 

이런 걸 봐야 돼요. 운다고 다 괴로운 건 아니에요. 남이 슬퍼하니 함께 슬퍼해 주고, 남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니 같이 가서 들어주고, 남이 감옥에 갇히니 같이 가서 감옥에 갇혀도 주지만 본인은 괴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표시가 안 납니다. 그것을 화작(化作) 또는 화현(化現)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아직 부처의 길과 보살의 길이 다릅니다. 보살은 아직 부처가 못 된 단계로 설정되어 있는데, 화엄경의 사사무애법계에 가면 보살은 이미 부처가 됐지만 부처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모습까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공부하는 것이 다음 시간에 배우게 될 화엄경입니다.

 

 

반야심경의 요지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주인공이 스님이 아니고 보살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원을 세운 선남자, 선여인, 누구든지 다 주인공입니다. 둘째, 이들이 행하는 수행은 반야바라밀다행입니다. 확 깨달아서 눈을 떠버리고 진실을 아는, 그런 수행입니다. 셋째, 그렇게 확연히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제법이 공하다하고 공을 체험합니다. 넷째, 실체가 없고 항상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니까 괴로울 일이 없어져 버려요. 반야심경 첫 문장에 이 네 가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반야심경은 한문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내용이 아주 짧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마다 이런 요지를 항상 마음에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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