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들어야 할까요, 호흡을 관찰해야 할까요?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 호흡을 관찰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먼 과거에 강렬한 화두 참구 경험이 있었는데 제가 그 상에 붙들린 것이라고 생각해서 화두는 잊고 호흡 명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화두와 관련한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계속 가슴에 답답함이 있어서 화두 참구를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수행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셋째,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윤리를 지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더 나아가 선정을 닦는 정도까지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수행법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가는 주로 선정을 닦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를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만 증득하면 계율은 안 지켜도 되고, 선정은 안 닦아도 될까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선정을 닦지 않으면, 지혜가 증득 될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은 지혜를 증득하는 바탕이 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남이 보기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선정을 닦는 것은 자기 스스로 편안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가 없고 모든 사물의 근본 이치를 통달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을 기초로 해야 됩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선불교, 밀교 등 각 불교마다 계율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계율은 소승불교의 계율이 기본입니다. 소승은 계율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너무 중요시하다 보니까 계율을 좀 덜 중요시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승 중에 청정한 계율을 지켜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드물고 막행막식 하거나 욕하고 화내고 술을 먹어도 저분은 깨친 사람이다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계율을 청정히 지켜서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고 이익을 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이라는 수행의 목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계율을 지키는 것은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선정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어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자기 상태에 뚜렷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몸에 깨어있고, 느낌에 깨어있고, 마음에 깨어있고, 법에 깨어있고, 이렇게 네 가지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해서 사념처관이라고 합니다. 호흡에 깨어있기는 그전에 해야 할 수행입니다. 초심자들에게는 소승의 기본 계율을 지키는 것과 소승의 기본 수행법을 행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관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을 염불로 닦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그 소리에 집중하지요. 밀교에서는 옴마니 반메홈을 반복해서 염하는 주력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선불교는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참구 합니다. 각 종파는 자신들이 닦는 선정 수행법이 제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면 화두를 들어서 깨어있든, 호흡에 깨어있든, 동작에 깨어있든, 염불에 깨어있든, 주력에 깨어있든, 선정을 닦는 수행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저는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선사입니다. 선불교는 통합 불교이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부터 선정을 닦는 방법으로 참선도 배우고, 주력도 배우고, 염불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불교이기 때문에 화두에 깨어있는 화두 참구를 기본 수행법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법문을 할 때 화두를 참구 하는 수행법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정토경전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선불교의 발생 원인과 선불교의 장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화두 참구란 참선 방법의 한 종류인데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모두 내려놓고, 불교라는 생각이나 부처님이란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화두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부처님이라는 생각이나 불법이라는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호흡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앉아서 머릿속으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생각하면, 그것은 화두 참구가 아니라 번뇌와 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원효대사 이후로 통불교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자기 종파만 옳다고 주장하는 종파불교가 아니라 다른 종파도 인정하자는 지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해도 좋습니다. 이를 근간으로 용성조사님께서는 5대 수행을 정립하셨어요. 첫째,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에 깨어있어야 하고, 둘째, 염불 하는 사람은 염불에 깨어있어야 하고, 셋째,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에 깨어있어야 하고, 넷째, 간경 하는 사람은 간경에 깨어있어야 하고, 다섯째, 불사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일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불사 수행이란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데에 깨어있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이런 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조계종은 화두에 깨어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수행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 참구를 하든, 다른 네 가지 중 하나를 하든, 어떤 것을 해도 좋습니다. 저는 출가했을 때 먼저 스승으로부터 화두 참구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선정을 닦는 방법을 가르칠 때는 우선 호흡에 깨어있기를 가르칩니다. 화두 참구든 호흡에 깨어있기든 편안한 가운데 한곳에 집중해서 깨어있는다는 측면에서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먼저 호흡에 깨어있기가 되면 나중에 화두 참구를 할 때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안 좋아서 운동을 좀 하려고 할 때 무슨 운동이 좋을지 정한다고 합시다. 그때는 인연을 따라서 농구를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등산을 하든지 어떤 운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어느 한 가지 운동을 콕 집어서 이 운동이 제일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누가 가까이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거나, 자신이 사는 환경이 그 운동을 하기에 적당하거나, 이렇게 인연을 따라 하면 되는 것처럼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지 수행법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것은 종파적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질문자가 어릴 때 화두 참구하는 습관이 생겨서 화두 참구가 수월하다면 화두 참구를 해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거 좀 했다가 저거 좀 했다가 이렇게 섞어서 하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마음을 집중시킬 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했다가 그다음에 저절로 이 뭣고!’ 하는 화두가 참구 되면 거기에 집중해도 좋습니다. 간화선은 깨어서 화두를 참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를 하다 보면 화두에 깨어있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생각에 빠질 위험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는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고 착각할 소지가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호흡 알아차리기는 생각이 일어나면 제가 망상을 피웠습니다하고 비교적 구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는 이 뭣고!’ 하고 참구를 하지 않고 이게 뭐지?’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그걸 화두 참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 참구를 잘못하는 승려들을 향해서 선방에 앉아서 망상만 피운다이런 비판을 하기도 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도 좋습니다. 그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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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스러운 마음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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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정자씨 남은 인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삽시다.


“저는 상을 짓지 말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어려운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상을 지어야 돕는 마음이 생기고, 법륜 스님을 보고도 ‘존경할 사람이다’라는 상을 지어야 스님을 배우고 따르는 마음이 생기는 것 아닌가요? 상을 짓지 않고도 이런 마음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질문자의 말에 일리가 있어요. 어려운 사람을 보고 ‘아이고, 불쌍하구나’ 하는 마음을 내야 도와주려고 하고, 또 마음이 아파야 아까운 돈도 기꺼이 내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참 훌륭하구나’ 하는 상을 지어야 존경하는 마음을 내게 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공부는 그 사람은 본래 불쌍한 사람도 아니고, 존경할 만한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이 사람도 사람일 뿐이고, 저 사람도 사람일 뿐이에요. 이렇게 상을 짓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공부입니다.

그다음으로 좋은 공부는 설령 상을 지어서 ‘이 사람은 불쌍하구나’, ‘저 사람은 존경할 만하구나’ 하고 상을 지었더라도 그 상에 집착을 하지 않는 겁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고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여 ‘무주(無住)’라고 표현합니다.

가장 좋은 공부는 ‘무념(無念)’입니다. 즉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다음 공부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상을 짓지 않는 ‘무상(無相)’입니다. 그다음 공부는 상을 짓더라도 그 상에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는 ‘무주(無住)’예요. 우리가 경전을 통해 계속 배우는 것이 바로 무념, 무상, 무주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도 무념(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本)을 삼는다고 요약할 수 있어요.

이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면 한마디로 좋고 싫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수행은 ‘좋다’, ‘싫다’ 하는 마음 자체를 내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느낌이 이미 일어나 버리기 때문에 설령 그런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기분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 하는 상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상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뜻해요. 즉, 수(受)라는 느낌은 일어나지만 그것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거죠.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바로 알아차려서 감정까지 확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도 놓쳐서 감정까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감정을 따라서 행동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만약 행동도 해버렸다면, 그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화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말과 행동으로 옮기지는 말아야 하는데, 만약 화를 내버렸다면 ‘아, 내가 놓쳤구나’하고 참회를 해야 해요.

이처럼 수행은 어느 한 단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가장 앞 단계인 수(受), 즉 느낌이 일어날 때 막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만약 그 단계에서 놓쳤다면 그다음 단계에서 막아야 하고, 거기서 또 놓쳤다면 그다음 단계에서라도 막아야 하고, 만약 그것마저도 놓쳤다면 마지막에 반성하고 참회라도 해야 하는 거예요.

가장 핵심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명상을 할 때도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나지만 오직 알아차리기만 할 뿐 일어나는 생각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해요. 만약 생각을 이미 일으켰다면 그 생각으로 인한 상을 짓지는 말아야 합니다. 만약 상을 이미 짓고 말았다면 그 상에 집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상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질문자는 지금 법륜 스님이 훌륭하다는 상을 짓고 있는데, 만약 내일 신문에 법륜 스님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다거나, 어디 가서 사기를 쳤다거나, 어떤 여자를 성추행했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해봐요. 그러면 질문자는 어떨 것 같아요?”

“실망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오늘은 훌륭한 사람인데, 내일은 나쁜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법륜 스님은 오늘도 내일도 같은 사람일까요, 오늘까지는 좋았다가 내일 갑자기 나쁜 사람이 되는 걸까요?”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은 내가 그 사람의 좋은 면만 보고, 내일은 나쁜 면만 볼 뿐인 거예요. 이것은 마치 오늘은 화장한 얼굴을 보고 내일은 화장을 지운 얼굴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화장을 한 때나 안 한 때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오늘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가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고, 내가 내일의 모습을 보고 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가 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오늘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아름답다’ 하고 상을 지을 뿐이고, 내일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추하다’ 하고 상을 지을 뿐인 거죠.

설령 아름답다는 상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저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고 정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상은 지은 거예요. 그렇지만 상에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한 게 맞다고 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을 짓더라도 집착은 하지 않는 건 어찌 보면 가장 늦게라도 괴로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보다 앞 단계에서 해결하려면 ‘지금 좋은 일을 하시는구나’ 이렇게만 볼 뿐이지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이렇게 상을 짓지 않는 거예요.

꽃을 봤을 때 ‘나한테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하고 말아야지 ‘이 꽃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꽃이 시들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시드는 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은 상으로 인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꽃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꽃을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고, 누군가 훌륭하게 느껴지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누군가 불쌍하게 느끼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훌륭한지 아닌지, 불쌍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어요. 다만 지금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죠.

남편이 뭐라고 해서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남편의 어떤 행동을 보고 내가 기분 나빠하는 것이지 그걸 갖고 ‘남편이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상을 짓지 않는 거예요.

다만 내가 그렇게 인지할 뿐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무언가가 진짜로 아름다운 건지 추한 건지, 그건 알 수가 없어요. 상을 짓는다는 건 나에게 인식되는 걸 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인식했으니 이건 이런 거야’라고 객관화 하는 걸 말합니다.


태양을 볼 때도 ‘내 눈에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을 해야지,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거야’라고 객관화 시키면 그게 바로 상을 짓는 거예요. 실제로 태양은 지는 것도 아니고 뜨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구가 자전을 하는데 내가 지구 위에 서있으니까 내 눈에 태양이 보이기 시작하면 태양이 뜬다고 말하고, 태양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 태양이 진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에게 그렇게 인식될 뿐이기 때문에 실제인 것으로 객관화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에게 인지되는 것을 객관화시키는 것을 두고 상을 짓는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인지하는 걸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을 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니까 집착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내 말이 사실이잖아’라고 할 때는 이미 집착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단정하지 말고 ‘나는 이렇게 봤어’, ‘나는 그렇게 느꼈어’,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이렇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상대방에 대해서도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기분이 나빠’ 이렇게 말하기가 쉬운데, 상대방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나쁜 짓을 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하고 말할 게 아니라 ‘당신의 어떤 말을 듣거나 행동을 볼 때 내 마음이 기분 나쁘게 반응하더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상을 지으면 집착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집착하게 되면 반드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상을 짓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집착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에 늘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지은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하는데도 ‘아니야,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이렇게 고집하게 될 수 있고, 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금방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구나’ 하고 다른 상을 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나는 좋게 생각했는데 나쁘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내가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 이렇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누가 좋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금방 좋다고 결정하지 말고, 누가 나쁘더라 하는 이야기를 해도 금방 나쁘다고 결정하지 말고, ‘지금까지는 내가 좋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쁘게 생각했다’ 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정말 좋은지 나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남편이나 아내를 두고 ‘결혼하고 나서 사람이 변했다’ 이렇게 말하곤 하는데,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쪽 면만 보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 저쪽 면도 보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이치를 알면 내 감정에 내가 덜 흔들리게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못 봤는데 이 사람한테 이런 면이 있었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 사람이 나쁘다거나 그 사람이 변했다는 생각을 덜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동산을 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격이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건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지 부동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가격이 오르는 것만 생각하고 아파트를 덜컥 샀다면 ‘아,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 수도 있구나’ 하고 배울 수가 있는 거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손해가 나더라도 그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내가 산 다음에 가격이 떨어지는 건 내가 다양한 면을 생각하지 못하고 섣불리 판단한 결과이지, 그건 하늘의 벌도 아니고, 전생의 죄도 아니고, 사주팔자도 아니에요.”


“그러면 법륜 스님께서는 인도에 불가촉 천민들처럼 누가 봐도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때 어떤 마음으로 돕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그들은 꼭 돕지 않아도 됩니다. 다들 자기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명이라면 제대로 먹지 못할 때 죽지 않습니까? 사람이라면 병들었을 때 치료를 받아야 하고, 적어도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이라도 받아야 합니다. 기초적인 셈을 할 줄 알고, 기본적인 글을 읽을 줄 알아야 사회에 나가서도 장사를 하든지 기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래야 한다고 강요할 건 아니지만, 저는 기본적인 먹을거리, 기본적인 의료, 기본적인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인도에 가보니까 아이들이 먹는 걸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영양실조 상태가 되어 있고, 입는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고, 병도 제대로 치료를 못하고 있고, 학교도 못 가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우선 학교를 만들어서 공부를 시키고, 급식을 해서 음식을 먹게 하고, 교복을 줘서 옷을 입히고, 학용품을 줘서 배울 수 있게 한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불쌍하지는 않아요. 아이들 나름대로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는데 왜 불쌍하다고 생각을 해요? 설령 불쌍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저런 아이들을 보니 내 마음이 불쌍하게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죠.

사람을 도울 때는 그들의 필요에 의해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불쌍해서 돕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음식이 필요하니까 음식을 주고, 그들에게 옷이 필요하니까 옷을 주는 것입니다. 불쌍하다고 도와주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을 도울 때도 북한에 식량이 부족하다고 할 때 식량을 주는 건 괜찮은데,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주면 북한 정부에서는 오히려 자존심 상한다고 거부해요. ‘식량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식량을 지원해 주겠다’, ‘옷이 필요하니까 옷을 지원해 주겠다’, ‘약이 필요하니까 약을 지원해 주겠다’ 이렇게 해야 북한 정부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도 괜찮아요. 다만, 불쌍한 마음이 들 때 ‘그들을 보고 내 마음에서 불쌍함이 일어나는 것이지 실제로 그 사람이 불쌍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람들을 보니 딱한 마음이 들어서 지원을 해도 되고, 그 사람들한테 이게 필요하구나 해서 지원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불쌍해 보여서 돕기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게 좋습니다. 불쌍함을 느끼는 건 내 문제이지만 ‘이게 필요하구나’ 해서 돕는 건 그들의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때는 꼭 그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식량이 필요합니까?’ 하고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지원을 하고, ‘옷이 필요합니까?’ 하고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지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도와줄 때는 묻지도 않고 그냥 내가 주고 싶은 걸 줘버립니다.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지 안 하는지 관계없이 그냥 내 마음대로 주는 거예요.


요즘 시어머니들이 며느리한테 준다고 시골에서 김치를 담고 반찬도 만들어서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는데, 포장을 열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그냥 갖다 버리는 일이 기사로 나올 정도로 비일비재합니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지 먼저 물어본 후 필요하다고 하면 그걸 갖다 줘야 하는데, 상대방은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내 마음만 생각하고 갖다 주니까 벌어지는 일입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바탕에 깔리지 않은 사랑은 폭력이에요. 상대가 원하지 않는 말과 행동은 상대방에게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항상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상대가 필요로 하는 걸 해줘야 합니다.”

선불교를 공부하는 이유
나중에 보리수와 같은 거대한 고목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근본 씨앗이 되는 DNA가 만들어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령 그런 DNA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금방 세상의 호평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절인연을 만나야 그때 가서 호평을 받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중국의 선사들도 역사적으로는 위대한 스승이라고 불리지만 당나라 당시에는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교종에 해당하는 화엄종, 천태종, 정토종 등 각종 불교 종파가 100이라면, 그중 선종(禪宗)은 1도 안 되는 수준이었어요. 그 1도 안 되는 작은 세력의 선(禪)을 10이라고 하면, 그중에 1도 안 되는 것이 혜능 문하의 남종선(南宗禪)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미미한 세력이었는데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주류로 등장했는지 알기 위해 과거 역사를 공부하는 거예요. 그걸 통해 우리가 미래에 어떤 길을 가야 되겠느냐 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세속과 타협하면서 가야 될까? 아니면 어렵더라도 근본을 유지하면서 가야 될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지금 선불교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지, 옛날 역사에 불교 종파가 어땠는지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얘기를 해야 하니까 여러분에게 이렇게 자료를 보여주면서 얘기하는 겁니다.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선불교는 점점 확산이 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선종은 자신들의 절도 하나 없었어요. 마치 대승이 소승의 절에서 살다가 쫓겨났듯이, 당시 선종은 교종이나 율종의 절에 가서 얹혀살면서 수행을 한 수준이었어요. 그러다 백장 회해(百丈懷海) 선사 때 가서야 참선을 하는 자신들의 사찰을 독립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때 청규(淸規, 청정한 규율)라는 것이 나옵니다. 백장 선사가 기존 불교의 규율을 집대성하고 보완하여 선불교 수행자가 지켜야 할 생활 규범을 정리한 것이 백장 청규입니다.


당시 선사는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스님(출가수행자)들이 일을 해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스님들이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일도 해서 생활을 꾸렸습니다. 백장 선사는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뜻으로, 노동을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동하는 가운데 선을 한다는 소위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말도 나오고, 차를 마실 때도 선을 한다는 ‘다선일여(茶禪一如)’라는 말도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당시 선불교는 조금씩 자리를 넓혀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기존 불교에 비해서는 세력이 미미했습니다.

시절 인연을 만난 선불교
당나라 말기 840년에 무종이 황제로 즉위를 했는데, 무종은 도교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창폐불(會昌廢佛, 회창은 무종의 연호)이라고 불리는 불교 탄압을 했는데, 4600개나 되는 절을 폐쇄시켰고 당시 30만 명 정도 되던 승려 중 26만 명을 강제로 환속시켰습니다. 낙양이나 장안 같은 수도에 있던 많은 절이 다 없어지고 4개만 남을 정도였고, 각 성이나 주에는 절이 1개만 남을 정도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서울 안에 있는 절을 다 없애버려서 산속에 있는 절만 남게 됐듯이 폐불 정책을 펼쳤습니다.

폐불을 한 이유는 무종이 선약을 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도교의 사술에 심취한 것도 있지만, 당시 불교의 지나친 사찰 건립, 사찰에 땅이나 재물이 많이 보시되면서 세수에 차질이 생긴 문제, 군역을 기피하려고 출가한 승려들이 많아진 현상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부작용이 동시에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창폐불로 인해 기존의 불교는 일시에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종은 폐불 정책에 별로 영향을 안 받았어요. 선종은 국가나 고관대작, 부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적인 불교 탄압에 큰 영향을 안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무종이 즉위 후 6년 만에 갑자기 죽고, 다음 황제로 선종(宣宗)이 즉위했습니다. 이 분은 폐불령을 없애고 불교를 다시 복원을 시켰는데, 특히 선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폐불 정책이 없어지고 불교가 다시 활발하게 되니까 선종(禪宗)은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기득권에 안주했던 주류 불교인 교종은 다시 일어나기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비해서 선종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선종 귀의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당나라 말에서 송으로 넘어올 때는 결국 선종이 주류 불교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선종이 급격하게 흥기를 하니까 당연히 종파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말기에 가면 다섯 개의 큰 종파인 오종이 생기게 됩니다. 오종이 송 대로 넘어오면서부터 임제종의 세력이 아주 커지고, 나머지 4개는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다시 임제종 안에 황룡파와 양기파 두 개의 파가 나오게 되었고, 이를 합해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고 부릅니다. 선종도 다시 크게 일곱 가지 종파로 분류가 된 겁니다.”


이어서 스님은 선불교의 오가칠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각 종파가 가르친 핵심 사상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선종의 다섯 개 종파는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선(禪)의 종지(宗旨)는 모두 같습니다.

임제가 말했다. 불법에는 인위적인 꾸밈이 없다. 오직 여기에서 꾸며대지 않는 평상시의 생활일 뿐이다. 변소에 가고 옷 입고 밥 먹고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자는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이르는 곳마다 주체적이면 머무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거기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디를 가도 주인이 안 되잖아요. 자기가 주인이 되는 자세를 갖지 않고 항상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가죠.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제가 스승을 만나서 경험한 것을 얘기해 드릴게요. 오래전에 도문 큰스님께서 저에게 인도성지순례를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작년에 갔다 와서 안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듣고 아무 준비도 안 하고, 맡은 책임도 없이 큰스님을 따라갔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날이었는데, 공항에 가서 보니 비행기가 없었어요. 그러자 같이 갔던 신도들이 ‘스케줄에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비행기가 없다잖아요!’ 하면서 도대체 누가 이 스케줄을 짠 거냐고 웅성웅성 불평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일에 관여를 안 했고 그냥 따라간 거니까, 비행기를 타든 기차를 타든 버스를 타든 나는 이 일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큰스님이 저를 부르시면서 벽력 같은 소리로 야단을 치셨어요.

‘이 놈! 내가 너한테 비행기가 없다고 몇 번을 얘기했느냐? 그런데도 네가 계속 비행기가 있다고 고집을 했는데, 와 보니 없지 않으냐!’

이렇게 야단을 치시고 사정없이 제 뺨을 때리셨어요. 그러자 신도들이 옆에서 그걸 보고 ‘아이고, 스님! 저희가 그냥 버스 타고 갈게요’ 하면서 불평이 쑥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원래 인도에 오려고도 안 했고, 그냥 오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왔는데 날벼락을 맞은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마음이 안 좋으니까 몸까지 아팠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행이 같이 나가자고 하는데 저는 몸이 아파서 오늘은 그냥 누워있겠다고 했습니다. 매일 이동하는 일정이었는데 마침 그날은 같은 숙소에서 하루를 더 묵는 일정이었거든요. 저는 전에 가봤으니 쉬겠다고 얘기하고 숙소에 남아 있었는데 큰스님께서 오셨습니다.

‘많이 아프나?’
‘감기가 심한지 몸이 안 좋습니다.’

그때 큰스님께서 살짝 제 귀에 대고 말씀하셨어요.

‘너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느냐?’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어요? 제가 아직도 어제 그 일에 딱 사로잡혀서 마음이 안 풀렸다는 거죠. ‘나는 인도에 안 오겠다고 했는데 왜 나한테 죄를 덮어씌우나’ 이런 생각을 움켜쥐고 있으니까 아직도 그 생각을 하느냐고 일침을 가한 겁니다. 이렇게 문답을 통해 자기 마음의 상태를 보도록 하는 것이 선불교입니다.

내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인도에 왔든 일단 인도에 왔으면 당연히 주인 된 자세로 살피고 필요한 일을 해야 되는데, ‘그냥 따라만 오면 된다’ 하는 그 말에 집착해서 아무런 책임도 안 지고 있다가 된통 혼이 난 거죠. 우리는 어떻게 왔든 일단 왔으면 주인으로서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건방지게 나서라는 게 아니라, 어디를 가든 항상 주인이 된 자세로 임해야 된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이 ‘저건 남의 일이니까’, ‘저건 내 책임이 아니니까’ 이렇게 핑계를 대고 주인 된 자세를 갖지 않죠. 한 편으로는 ‘내 아들이니까’, ‘내 남편이니까’, ‘내 부모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너무 집착을 해서 문제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내 아들이 아니니까’, ‘내 남편이 아니니까’, ‘내 부모가 아니니까’ 하는 생각으로 너무 외면해서 문제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양 극단에 치우치는 병폐입니다. 집착하지 않되 항상 주인 된 자세로 모든 것에 임해야 합니다.

중국 불교의 과거와 현재
역사 속에서 보면 선불교는 크게 두 개의 다른 특징을 갖고 발전해 나갔습니다. 하나는 간화선이고, 다른 하나는 묵조선입니다.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참구 하는 수행법이고, 묵조선(默照禪)은 오직 묵묵히 마음을 관찰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경지에 가면 저절로 맑아진다는 수행법입니다. 우리나라는 간화선이 주류이고, 일본은 묵조선이 주류입니다. 간화선은 임제종의 일부에서 형성되어 나왔고, 묵조선은 조동종의 일부에서 형성되어 나왔습니다.


물론 현재 선불교의 모습은 여러 가지 부작용과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여러 종파들의 지금의 모습을 보지 말고 처음 출발했을 때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정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은 처음 출발할 때 남녀, 계급, 빈부 등 아무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고 인간 자신의 마음을 소중하게 하는 관점을 가졌습니다. 우리 역시 선불교가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갈 때 본래 붓다의 가르침을 이 땅에 실현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불교는 송나라 다음에 원나라, 명나라 대까지 중국불교의 주류로서 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혼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졌거나 소수로 전락했고, 결국은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정토종만이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남았습니다. 그 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안에서 불교가 많이 쇠퇴했다가 요즘 다시 중국에서 불교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선지(禪旨)가 사라지고 주로 복을 비는 정토종 계열이 부흥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작용을 알아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오늘 강의를 듣고 종파의 역사가 어떤지, 다섯 개 종파의 이름이 무엇인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런 걸 외우라는 게 아니에요.

‘불교의 본질이 무엇을 믿고, 죽어서 어디 가고, 이런 게 아니구나.’
‘책을 많이 보고 공부하는 게 불교가 아니구나.’
‘내가 내 마음의 작용을 알아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불교이구나.’

여러분들이 이것을 자각하기 바랍니다. 무엇을 믿느냐, 누가 어떤 얘기를 했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런 관점에 대해서 선불교에서는 더욱더 아니라고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실에서 여의도방향 청담동 영동대교
근처 올림픽대로 에서 뒤따라오던 1톤화물차가  내차 후미 번호판 트렁크를 추돌하였다.
수리비 250만원정도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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