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合理相分 第三十0

 

 

須菩提(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以三千大天世界(이삼천대천세계)를 碎爲微塵(쇄위미진)하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微塵衆(시미진중)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若是微塵衆(약시미진중)이 實有者(실유자)인댄 佛(불)이 卽佛說是微塵衆(즉불설시미진중)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佛說微塵衆(불설미진중)이 卽非微塵衆(즉비미진중)일새 是名微塵衆(시명미진중)이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所說三千大天世界(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도 卽非世界(즉비세계)일새 是名世界(시명세계)니 何以故(하이고)오 若世界(약세계)-實有者(실유자)인댄 卽是一合相(즉시일합상)이니 如來說一合相(여래설일합상)은 卽非一合相(즉비일합상)일새 是名一合相(시명일합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一合相者(일합상자)는 卽是不可說(즉시불가설)이어늘 但凡夫之人(단범부지인)이 貪着其事(탐착기사)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먼지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먼지를 많다고 하겠느냐?』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이 먼지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이것을 먼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오니,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먼지는 곧 먼지가 아니오라 이런 것을 먼지라 하신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므로 이것을 세계라 하신 것이오니,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온데,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로 된 것>은 곧 <하나로 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하나로 된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하나로 된 것>은 곧 말로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하느니라.』

 

 

第三十 一合理相分--이치와 상이 하나다

 

[科 解]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이란 이치와 상, 곧 진리와 현상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설명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혹 「일합이상분」이라고도 하나 이 대문은 본래 법신(法身)이나 화신(化身)이 하나여서 다르지 않다는 옛 보살님들의 논(論)에 따라 이(理)자 대신 이(離)자는 잘 쓰지 않습니다.

티끌이나 세계가 그대로 하나의 법신자리이고 현상계가 그대로 진여(眞如)의 마음자리이며 일체법이 개시불법(皆是佛法)이니 이치와 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하나의 진여에 통해서 하나로 된 일합상(一合相)임을 말씀한 대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합상에 집착해도 안 되는 것이니 그 일합상은 말이나 글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그것을 탐착한다고 크게 경계하기까지 합니다. 앞장에서 법신은 상이 아니고 32상 80종호의 화신으로 여래의 진신인 법신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상을 여읜 여래의 참 모습은 가고 오고 앉고 눕고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현상과 마음이 하나여서 여래는 하나에도 머물지 않으시고 이것 저것이 다른 데에도 머물지 않으심을 밝히시게 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天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卽不說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신통력이 높은 보살이 이 삼천대천세계의 전 우주를 쳐부숴서 원자시대 전자시대 내지 에너지 상태로 돌려보냈다고 하면 그 전자의 수는 그 먼지가루는 얼마나 되는 것이냐? 대단히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참 굉장히 많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그 미진중인 먼지가루가 참말로 있는 실물이라면 그것을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먼지가루라고 말씀하신 그 먼지는 모두 다 환으로 된 것이옵고 먼지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런 것을 미진이라 하고 먼지라고 이름을 붙여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 미진이 참말로 있는 것이라면 절대적 존재이고 불생불멸하는 그것을 미진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불생불멸하는 그런 먼지를 더구나 많다 적다 이렇다 저렇다 할 수도 없고 먼지라고 이름 지을 수는 더욱 없습니다.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는 그런 틈에서 모두 환으로 벌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그러다 보니까 그게 또 불가사의한 미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다 사구의 도리이고 사구백비(四句百非)의 도리인데, 예컨대 여기있는 이 초, 이 촛대를 두고 말하더라도 「분명히 초는 초지만 초가 아니니 그러므로 이름이 초다.」 그러면 이것은 역시 불가사의한 촛대가 됩니다. 또 이 촛불이 자꾸 타서 닳아지고 있지만 닳는 형태는 안 보입니다. 그렇게 닳는 것이 곧 안 닳는 것이기 때문인데 닳기 전이나 닳고 난 뒤나 그 근원을 따지면 하나이니, 그것이 닳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사구는 어디에다 붙여도 다 되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

 

原 文 :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天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解 義]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옵니다.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왜냐 하오면 저 세계가 참으로 실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합상, 곧 하나의 세계일 것이옵니다. 최초의 우주에 있어서 있는 것 없는 것이 하나가 되고 시간 공간이 하나로 된 때가 일합상이온데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합상이라 한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그러니 일합상이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 범부들이 공연히 그 일이 되는 것인 줄 알고 곧 생각으로 알 수 있고 학문하듯 되는 줄 알고 탐착하느니라.』

제망중중의 무진장한 현상들이 그대로 하나인 그런 세계라면 그 세계는 세계도 아닙니다. 유무·시방·중생·범부·부처·보살·아뇩다라삼먁삼보리·탐진치 삼독이 모두가 하나로 뭉쳐진 세계를 일합상이라 그럽니다. 그러다 보니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깨친 것도 미한 것도 아니고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중생들이 발심을 해 가지고 성불해 보려고 하는 것도 안 되는 생각입니다. 얻으려는 생각이 있으면 안 되고 공부를 해서도 안 되며 깨쳐서도 안 되고 방심을 해도 안 되고 까딱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나도 일합상이 되어 보겠다. 둘이 아닌 하나인 일합상의 마음이 되어야 하겠다. 가장 원만하고 구족하고 완전한 <참나>가 되어야 하겠다.」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일합상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일합상도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증득하려고 하느냐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발심해서 깨달으려 하고 증득하려 하므로 그것을 탐착기사(貪着其事)라 한 것입니다.

범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본 취지를 모르고 말에만 따라다니고 글에만 따라다니기 때문에 깨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경문에 맨 처음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을 설명할 적에 <여시>의 뜻을 숙제로 돌린 일이 있는데 그것은 <여시>의 참 뜻은 말과 글을 떠난 자리이므로 설명만 가지고는 다 풀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체법이 개시불법(皆是佛法)이고 일체불법이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는 것도 숙제였고 또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인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 이 말을 대답하지 못해서 덕산(德山)화상은 점심을 굶고 용담(龍潭)스님을 찾아 갈 수밖에 없던 일이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일합상>을 깨치려 해도 안 된고 얻으려 해도 안 되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일합상이 아닌 일합상 이런 일합상이라 하니 그만 숨통까지 막아 놨습니다. 이런 숙제는 설명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없고 직접 마음으로 깨달아 계합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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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儀寂靜分 第二十九

 

 

 

須菩提(수보리)야 若有人(약유인)이 言(언)하되 如來(여래)-若來若去若坐若臥(약래약거약좌약와)라하면 是人(시인)은 不解我所說義(불해아소설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無所從來(무소종래)며 亦無所去(역무소거)일세 故名如來(고명여래)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만약 왔다거나 간다거나 앉았다거나 눕는다거나」한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바가 없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하는 때문이니라.』

 

 

第二十九 威儀寂靜分--위의 또한 공적하다

 

 

[科 解]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팔상성도(八相成道)을 나투시고 열반해 보이시고 하는 것은 다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만행만덕(萬行萬德)을 지으신 복덕의 보응으로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시어 베푸신 자비연극입니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이란 말은 거래좌와(去來坐臥)의 네 위의가 다 공하여서 공적한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허깨비 놀음을 보인 것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여래의 법신인 마음자리에는 오고 가고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룸비니 꽃동산에 강탄하신 것을 오셨다(若來)하고 사라수 수풀에서 열반해 보이신 것을 가셨다(若去)하는데, 부처님은 오셔도 온 게 아니고 가셔도 간 게 아니며 그렇게 오셔서 오신 것도 가신 것도 아니란 뜻으로 위위적정분이라 한 것이니, 위의(威儀)라 함은 육신의 거동,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動靜)의 일체를 가리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解 義]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하거나 여래께서 열반을 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 하거나 부처님께서 가부좌하고 앉아계시다고 하거나 대중과 같이 누워 계시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가 설명하는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라.』

현재의 지구설(地球說)로 보더라도 우리는 지금 거꾸로 매어달린 것으로 됩니다. 따라서 누워 있는 때가 지구에 붙어서 서 있는 때입니다. 중생들이 각각 제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앉았다 섰다 누웠다 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고, 여기서 보니까 동쪽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고 저쪽에서 보니까 서쪽으로 보이지만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성립 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니까 이것은 머리고 발이고 그렇지, 부처님은 발가락으로 말씀도 하시고 음식도 잡수시고 대소변도, 듣기도 보기도 하시고 다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석가여래께서 앉고 서고 하시지만 이치로나 현상으로나 위 아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구나, 누우셨구나.」하고 말하는 사람은 불법같은 얘기도 못들은 사람입니다. 설사 들었더라도 두 귀의 고막이 다 없어진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어가지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들은 거나 한가지고 벼락소리 들은 거나 한가지입니다. 이렇게 들은 사람은 부처님 40년 동안 모시고 다녀도 부처님 법문 한마디 못들은 것이 됩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 그것을 마음의 성품 자리로 봐도 그렇고 현상적으로 보아도 그런 것이니 그래서 이름을 여래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바리때 들고 장삼 입으시고 탁발(托鉢)나가신다」고 하면 그것은 불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 부처님은 탁발을 하셨지만 사실은 탁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탁발이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밭 맸다고 치고 누가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 오늘 밭 매느라고 수고했소.」하는 사람은 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오늘 내가 누구하고 싸움을 했다 해도「싸움한 그게 싸움한 게 아닌데, 그런 싸움을 싸움했다 한다. 싸움 아닌 싸움이다.」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번에 금강경 법문을 들으신 분들은 누가 고약한 놈이라고 욕을 하더라도「그 욕이 욕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모든 일이 다 이 세 마디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하면 선정도 잘되고 성불도 빨리 됩니다. 그러니 사구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좋고 없다 해도 좋고 무슨 짓을 해 놓고도 이 세 마디만 하면 됩니다.

이 마음자리는 작기로 말하면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는 자리고 크기로 말하면 무한대의 우주가 되고 부처님의 화장세계인데 이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런 속에 필름만 돌리면 온갖 것이 다 나오는 영화의 화면처럼 가는 것 같은 것이고 오는 것 같은 것으로 벌어진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것이 오는 게 아니고 그렇게 오는 것이며, 가도 가는 게 아니고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說 義]

현상계의 모든 것이 환인 줄을 확실히 알면 현실에 구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통조화를 부리게 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제 마음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구속이 되고 속는데 사실은 속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물 긷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하는 것이 모두 신통묘유(神通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하면 용(用)이고 없다 하면 체(體)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 체와 용을 초월한 것이며, 「이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을 체와 용이라 이름 할 뿐이다.」하면 체와 용을 겸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구(四句)가 됩니다. 이것을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이 공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제일구(句)의 유문(有門)이라 하고, 모든 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보는 것을 제 이구의 공문(空門)이라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제 삼구인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이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 제사구의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라 그럽니다.

나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좋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합(正反合)의 서양 논리로는 이렇게 긍정 부정해서 그 양자를 종합해서 진보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론이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 더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야 마지막 이론이 끝납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보다 불교의 사구논법이 훨씬 완전한 논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모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 사구의 이론으로 하면 더욱 완전하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구에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까지가 아니다, 곧 온갖 것 온갖 이치를 다 부정하여 어떠한 존재나 이론, 원리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백비라 한 것이고 사구 자체에 이미 백 가지로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사구백비라 한 것입니다. 사구로 네 번 부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서 백비란 말을 붙였지만 사실은 사구 가운데 이미 백비의 원리가 다 들어있는데 그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풀이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에 있다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으로 봐서 제일비(非)가 되고 다음에 없다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란 <제이비>입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제삼비>가 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은 <제사비>가 됩니다. 그런데 또 중생들이 이 사구의 논법에 집착해서 사구의 본래 뜻을 바로 깨달을 줄은 모르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것만을 주장하니까 그런 주장을 부정하는 제 오비가 나오게 됩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물질의 본질은 에너지도 아니라고 했듯이 물질의 본질을 원소라고 하지만 원소의 근본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 연구돼야 하고 원자, 전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원자, 전자를 이루는 본질이 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끈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반합을 부정하고 사구를 부정하고 거기다 다시 아니 비(非)자를 하나 더 붙이면 긍정이 되는데 다시 또 비(非)자를 붙이면 부정이 됩니다. 이렇게 비차를 천자, 만 자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있는 비자를 붙여서 사고·관념을 초월하자는 궁극적인 듯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백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 자리, 산보고 높은 줄 아는 이 자리는 사구로도 설명될 수 없고 백구(百句)로도 안 됩니다. 말을 붙이면 붙이는 대로 모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하면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이 작고 몇 천만 억 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도 살펴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또 크다고 할 때는 몇 천만 억 배의 우주를 제망중중 무한대 수로도 비교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큰 이 마음자리는 작으면 작은 대로 큰 거고, 크면 큰 대로 작은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무엇이 가고 올 것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서 천 백억 세계에 부처님의 몸을 한 분씩 나누어 중생들을 모두 제도했지만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소승경전만 잘못 본 사람은 실달태자가 이 세상에 실제로 오셔서 팔상성도(八相成道)하셨고 79세에 진지를 잘못 잡수시고 혹은 돼지고기 잡수시고 잘못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승경의 도리를 아는 이 부처님의 참 모습, 마음자리를 아는 이는 부처님께서 몸뚱이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가셨어도 간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지혜, 대승의 지혜로 볼 때는 신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이 다 도깨비이고 설사 시방제불이 나타났다 해도 다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밖에 안됩니다. 상(相)으로 나타난 그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보면 속는 것이고 견성성불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 오시고 가시고 앉고 눕고 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의 육신상을 보고 하는 말이므로 참 부처를 본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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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受不貪分 第二十八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로 持用布施(지용보시)하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知一切法無我(지일체법무아)하야 得成於忍(득성어인)하면 此菩薩(차보살)이 勝前菩薩(승전보살)의 所得功德(소득공덕)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以諸菩薩(이제보살)은 不受福德故(불수복덕고)니라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云何菩薩(운하보살)이 不受福德(불수복덕)이니잇고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의 所作福德(소작복덕)은 不應貪着(불응탐착)이니 是故(시고)로 說不受福德(설불수복덕)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일체 법에 내가 없음을 알아서 참다운 진리를 이루어 얻었다면, 이 보살이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덕을 짓는 것은 탐착해서가 아니니 그러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第二十八 不受不貪分--보살은 복덕을 탐하지 않는다.

 

[科 解]

불수불탐(不受不貪)이란 주관·객관을 초월하여 선악을 여윈 자리에는 화복을 받는 주체도 객관도 없으며 미추호오(美醜好惡)가 붙을 수 없으므로 탐착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나와 남이 있고 부처와 중생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물질적인 복덕을 많이 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인과이므로 한계가 있고 생명이 있는 생사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없는 <참 나>의 자리, 상에 머무르지 않는 <응무소주>의 마음자리를 깨달아서 체득해야만 참다운 큰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말씀처럼 상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고 만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에 머무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서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하고 보시·지계·인욕을 하는 보살의 무심한 자리에 탐착이 있을 수 없고 복덕도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없으니 밥이 필요 없고 옷이 필요 없으며 돈, 생명까지 다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 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에게 보시한 보살이 있고, 또 다른 어떤 보살은 「일체법이 내가 없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지식이 참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아의 경계이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응무소주의 경계구나.」하는 진리를 깨쳐서 완전히 증득했다면 이 보살의 공덕이 앞에서 칠보를 보시한 공덕보다 더 많으리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에게 만법이 무아인 도리를 깨쳤습니다. 나만 무아가 아니라 만법이 다 무아이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도리를 깨쳤습니다.

인욕하는 것도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것도 자꾸 노력을 하고 무아의 도리를 닦아 나가면 도가 높아지는데 따라서 힘 안들이고 잘됩니다. 그 전에 어떤 노장님이 인욕을 아주 참 잘해서 평생에 노한 얼굴 한 번 안한 분도 있습니다. 성나는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도 참아야 하는데 몸을 톱으로 켜고 칼로 찌르더라도 아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력이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발심한 불자입니다.

내가 한 30년 전에 맨발로 짚신만 신고 다니며 방에 불도 안 때고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한동안 인욕공부를 하며 지낸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추위는 30년 전 추위에 비하면 훨씬 덜 춥습니다. 그때 장안에는 선학원에 장사 중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때 몸뚱이를 내 버리고 인욕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는 것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적에 가리왕에게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찢길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전당포라는 하늘나라의 고약을 가지고 와서 찢어진 육신을 완전하게 치료해 줄 그때에도 조금도 기쁜 마음을 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참는 것 없이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마음의 참 바탕자리를 튼튼하게 지키고 일체의 객관경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참 나>의 진리를 체득했다는 뜻을 가진 인(忍)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득성어인(得成於忍)의 <인>(忍)은 어긋나고 모순되고 거슬리는 경계를 잘 참고 성내지 않으며 좋다 싫다는 생각이 없어서 갚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생멸(生滅)이 없는 진리에 머물러서 그 마음이 도할양무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須菩提 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 說不受福德

 

[解 義] 『수보리야! 저 모든 보살은 한량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채워서 보시한 공덕보다도 더 큰 복을 지은 그런 보살들은 다 생멸이 없는 진리, 곧 무생법인을 체득했으니 그러므로 그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복을 받느니라.』 보살은 복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보리존자는 깜짝 놀라서 부처님께 여쭙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복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을 짓는 것은 무엇을 탐착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중생들 소견으로는 「복을 받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복은 지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살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 없이 된 분이고 수행을 하거나 불법을 할 필요가 없이 된 분입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니 밥이 필요합니까? 옷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생각이 아니니 지식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무량대복을 짓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복을 지을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이치(理)에만 착하지 말고 사(事)에도 자유롭자는 것입니다. 곧 원리로만 통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현상계에 대해서도 자유로워야 마지막 자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혜만 닦아 놓았을 뿐 복을 닦지 않은 것은 마치 열, 백가지 박사학위를 받은 대천재가 있다 치고 이 사람이 비록 아는 것은 세계 제일이지만 그러나 어느 백화점이던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바늘 한 개만 집어오면 당장 도둑으로 몰려 잡혀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서 구경을 하는 데는 백화점 주인이거나 거지나 한가지지만 그 물건을 직접 내가 소유해서 쓰려고 할 때는 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 <참나>의 본성자리에서는 복이니 복이 아니니 선이니 악이니가 또 생사니 열반이니가 붙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욕심으로만 살다 보니까 우주를 다 차지해도 만족이 안 됩니다. 본성을 깨쳐서 정혜(定慧)만 닦으면 욕심이 다 떨어져서 중생도 부처도 없으니 아침나절에 성불해 가지고 저녁때 열반합니다. 복을 안 지어서는 나한테 제도 받을 중생이 하나도 없으니 그러므로 그래서 복도 중생이라 그러는데 시방제불이 복을 갖추어서야 비로소 중생을 제도하시지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복에만 치우쳐도 안 되고 그래서 부처님은 복혜(福慧)를 쌍으로 구족하신다고 그럽니다. 곧 복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지혜로도 완전히 자유로우면 이것이 복혜구족(福慧具足)이고 성불입니다.

그래서 보살이 육바라밀을 닦고 복을 짓는데, 보살은 자기를 위해서 복을 짓지 않습니다. 자기 살림살이 늘리기 위해 복짓는게 아니고 보시를 해도 저절로 되고 아무 생각없이 오직 중생만을 위해서 살생 안 하고 도둑질 안 하고 일체의 악은 다 안 하고 꼭 선행만 하고 복을 짓지만 복에 탐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수복덕(不受福德)입니다.

 

 

[說 義]

부처님께서 어느 두 보살의 과거세의 역사를 말씀하셨는데, 그야말로 <일체법무아>의 법인을 체득해서 불수복덕(不受福德)의 무량복을 짓는 내용입니다.

이 보살이 어느 부처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을 심어 주기 위해 사법(邪法)과 싸우게 됐습니다. 그때도 지금 우리 한국과 같이 정법이 사법에 몰리는 말세였습니다. 석가세존 불법에는 정법(正法) 천 년, 상법(像法) 천 년, 말법(末法) 만 년인데 현재 불멸기원(佛滅紀元) 2500년이 세계통일년대이므로 말법의 운수는 아직도 구천 오백년이 남아 있고 지금은 말법의 초기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 우리 한국보다도 더한 말법시대가 되어서 비구승들이 전부 장가가고 술 고기 먹고 다 가짜 중 썩은 중들만 있고 정말 수행을 하는 참 비구는 이 보살 한 분만 남았습니다. 불교 신도도 말이 불자지 전부 마구니 신도고 그럴 때입니다. 그래서 술, 담배 먹고 곰탕, 불고기 먹어가며 참선도 하고 기도를 해야 속히 견성성불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저녁에 열 여자하고 자더라도 생각이 있으면 안 되지만 아무 생각 안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엉망으로 되어 마구니떼로 변해가고 있으니 이 보살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력을 세우고 정진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세밀한 계획을 잘 세워서 서울 같으면 먼저 파고다공원에서 법문을 한번 하고 다음에는 장충공원에서 한 번하고 역전에서, 시청 앞에서 이렇게 돌아가며 설법을 합니다. 청중들 가운데 신심이 있는 신도도 있고 불교를 연구하는 지식층 인사도 끼여서 들어보고는 「이제야 정말 참 불법 바로 하는 스님 한 분 우리가 만났다. 이 대사님을 옹호해 가지고 정법을 펴자.」 이렇게 하여 모여든 대중이 몇 만명이 됐습니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있는 삿된 무리들이 우리 한국 같으면 만신·무당·불법을 삿되게 하는 불교인들, 막행막식주의(莫行莫食主義)로 하는 불교인 천주교·기독교·천도교·유교 등 이런 것도 모두 삿되게 하는 무리들이 원체 많은데 전부 단결해 가지고 일거에 대항해 옵니다. 그 스님이 공부도 대단하고 원력도 커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데다 그 교세가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팽창돼 가고 있으며 자기네 신도들을 다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컨데 저쪽에는 몇 백만명이 되고 이쪽은 몇 십만 되는 많은 신도들이 도처에서 생명을 걸고 싸움질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정법의 신도들이 다 죽어 갑니다. 이때에 마침 그 나라 국왕은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으며 과거세부터 불법을 많이 공부했던 인연이 있는 이어서 경을 바로 보는 안목(眼目)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을 소집해 가지고 「이제 정법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혼란한 것도 다 불교가 이렇게 혼란한 때문이다. 이제 다행히 옳은 스님이 한 분 나오셨는데 무자비한 사도들에게 목숨을 잃을 직전에 있으니 다 같이 가서 구하자.」고 호소했으나 군중들은 그릇된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국왕의 호소에도 잘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의 당시 국법으로도 도와 줄 수 없고 국회 같은 회의나 조정대신들도 다 반대했으므로 국왕은 할 수 없이 자기의 직속 호위병들 정도만 이끌고 그 스님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쪽이 원체 수가 많아서 이쪽은 다 몰살당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스님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싸서 모셔 놓고 「우리는 다 죽더라도 이 스님만은 살려야 한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국왕도 왕위를 걸고 헌신적으로 나섰지만 이쪽은 자꾸만 밀리고 무너져서 이대로는 그 스님을 보호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국왕은 속임수로 진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우리는 다 죽어도 좋지만 스님 한 분만은 꼭 사셔야 합니다. 어서 피해서 누더기 옷이라도 입고 살아 계셔야만 저 마구니들이 이 나라를 다 점령하더라도 스님께서 이 나라에 생존해 계신 한 그만한 덕이 될 것입니다.」하며 피하도록 했습니다. 스님도 할 수 없이 그 길로 산으로 피해 가서 변형(變形)을 하고 공부만 하면서 기회를 보았으나 인연이 맞지 않아서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나라 국왕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두 보살의 과거의 보살행을 이렇게 설명하셨는데, 열반경(涅槃經) 같은 데도 보살이 과거에 어떤 나라의 국왕으로 있었다는 등의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보살님들의 다생겁래의 모든 행은 다 자기의 복덕이나 자기의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 생각 없이 무심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도할양무심의 행이기 때문에 탐착이 아니며 복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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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斷無滅分 第二十七

 

 

須菩提(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하되 如來(여래)-不以具足相故(불이구족상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아뇩다라삼먁삼보리)면 須菩提(수보리)야 莫作是念(막작시념)하라 如來不以具足相故(여래불이구족상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하되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 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說諸法斷滅(설제법단멸)가 莫作是念(막작시념)이니 何以故(하이고)오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於法(어법)이 不說斷滅相(불설단멸상)이니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여래는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도다.」하겠느냐,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께서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 말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이 단멸하는 것으로 말하는구나.」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에 대해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第二十七 無斷無滅分--단멸이 아니다

 

[科 解]

앞에서 제26 법신은 상이 아니란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을 말씀하실 적에 여래는 32상·80종호(種好)로 볼 수 없다고 하셨고, 또한 모양이나 소리로 부처님을 찾는다면 이것은 곧 사도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32상·80종호 같은 복된 상에는 아무 생각도 없고 일체의 법에 대해서 모든 진리는 아주 다 없어지는 것이란 단멸상(斷滅相)을 가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으시는 것인가 보다.」하고 잘못 생각할까봐 염려해서 이 잘못된 생각을 미리 막으시려는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須菩提 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解 義] 『수보리야! 네가 혹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부처님께서 구족한 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 여래께서 구족상에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너는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께서 구족한 상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해서, 곧 상에 아무 상이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래께서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가지고 오랜 세월 무량겁을 두고 육바라밀을 닦으셨습니다. 보시(布施)도 하고 지계도 하고 인욕도 하고 정진, 선정도 하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지혜바라밀을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세생생에 인격이 점점 향상해 왔고 일체 현상계에 이(理)로나 사(事)로나 두루 다 원만하게 통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량중생을 제도해서 많은 복을 지으므로 32상·80종호(種好)를 비롯한 구족상(具足相)을 갖추셨지만 이런 구족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구나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금강경을 배워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해라, 여하한 경우 여하한 조건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글귀의 뜻도 수없이 들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여기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상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구나.」하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등상불(等像佛)이나 실제 부처님 생존당시의 32상을 갖춘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더라도 「그게 다 상인데 볼 게 무엇이 있느냐?」하는 그런 소견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原 文 :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說 諸法斷滅 莫作是念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須菩堤 心者 於法 不說斷滅相

 

[解 義] 『수보리야! 네가 만일 이런 생각을 하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자는 모든 법이 단멸했다.」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 가령 여기 이 등상 위에 켜 놓은 이 초를 두고 말하는 경우에도 처음에는 새것이었던 것이 자꾸 달아서 더 있으면 다 달아 없어질 것인데 그러면 초는 다 달아서 단멸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늙어서 죽든지 병으로 죽든지 교통사고 같은 참변을 당해서 죽든지 한번 죽으면 그만이다. 육체적으로는 물론 생명의 본질, 영혼 같은 것이 있어서 내생(來生)이 영속(永續)된다든지 하는 것을 부인하고 한번 죽으면 그만이다. 아주 죽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사람 생명에 대한 단멸상(斷滅相)입니다. 또 반대로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가든지 천당에 가든지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상견(常見)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항상하다고 하여 보리·열반의 참다운 진리를 체득할 줄 모르면 이것도 구경법(究竟法)이 되지 못하는 때문에 불교에서는 제법을 단멸상으로 보는 단견이나 항상하다고 보고 마는 상견을 다 정견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여래께서 구족상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어서 모든 것을 끊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은 모든 법에 대해 말도 없고 생각도 없는 다 끊어 없어진 단멸이라고 생각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일체 만법에 아주 없어져서 아무 것도 없다는 단멸상을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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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身非相分 第二十六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不(관여래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이다 以三十二相(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佛(불)이 言(언)하사대 須菩提(수보리)야 若三十二相(약삼십이상)으로 觀如來者(관여래자)면 轉輪聖王(전륜성왕)도 卽是如來(즉시여래)로다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컨댄 不應以三十二相(불응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爾時(이시)에 世尊(세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사대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거나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하면 是人(시인)은 行邪道(행사도)라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32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러하옵니다. 32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뵐 수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32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제가 아옵기로는 32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사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第二十六 法身非相分- -법신은 상이 아니다

 

 

[科 解]

제26분에서는 법신(法身)은 거룩한 상, 즉 복상(福相)이 아니라는 도리를 말씀하시는 대문입니다. 우리의 참 마음이 곧 여래의 법신인데 이 참 마음자리는 선이니 악이니 복이니 죄니 하는 차별상이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지으면 복된 상을 받고 죄를 지으면 추한 세상에 나쁜 모습으로 태어나서 화를 받는데, 그러나 설사 아무리 복을 많이 짓고 아무리 거룩한 선행을 많이 해서 32상·80종호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 상만을 보고 여래를 식별한다는 것은 곧 현상계에 떨어진 것이고 생각·지식·망상에 집착된 중생경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여래를 찾으면 곧 사도를 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상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무상무위(無相無爲)에 열반적정에 가만히 앉아서 복도 짓지 말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解 義] 『수보리야! 네뜻이 어떠하냐? 32상으로 부처님을 본다고 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이렇게 물으셨는데 청중(聽衆) 가운데 누가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32상으로 부처님을 보겠습니까?

수보리존자님은 32상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이렇게 사뢰었습니다. 『그러하옵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뵈옵니다.』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설명된 것처럼 일체법이 다 불법인데(一切法 皆是佛法) 왜 32상으로 부처님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32상을 껍질로만 보니까 부처님을 못 보지 32상이 즉시 불법인 도리로 보면 곧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천만억겁을 두고 겉으로만 보고 겉만 알기 때문에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原 文 : 佛言 須菩提 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解 義]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만일 32상으로 여래를 보는 것이라면 전륜성왕은 32상을 갖추었으니 그러면 그도 곧 여래겠구나.』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또 이렇게 안 된다고 하셨는지 그 내용을 알고 넘어가야지 말만 따라다녀서는 안 됩니다. 일체제법 개시불법(一切諸法 皆是佛法)인데 전류성왕만이 유독 불(佛)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륜성왕은 인수(人壽) 2만세 때에 나타나서 온 세계를 통치하는 성왕(聖王)인데 보배수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므로 비행황제(飛行皇帝)라고도 하며 32상을 갖춘 아주 복이 많은 성왕입니다. 나이가 늘어나는 증겁(增劫) 때에는 이만세에서 나이가 줄어드는 감겁(減劫)때는 8만세까지 사이에 나타나는 복덕의 왕이고 성왕입니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고 부처인데 어찌 전륜성왕이 부처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수보리존자님이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사룁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뜻을 아는 것 같아서는 32상으로 부처님을 뵐 수는 없사옵니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말씀을 뒤집어서 수정을 합니다. 이때에 수보리존자님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이란 곧 32상의 껍질만 보고서 부처를 볼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대로 얼른 받아서 먼저의 말을 수정했던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解 義]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읊어서 말씀하시기를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어떤모양으로, 32상 80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 같은 겉모양으로 부처를 보거나,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다라니를 하거나 염불을 해서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하거나 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이 사람은 곧 사도(邪道)를 행하는 사람이고 정도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이런 사람은 천만 겁을 두고 공부를 해도 부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떡이며 돈이며 갖다 놓고 불공을 하거나 참선하는 수좌(首座)들도 화두를 말로만 외는 사람도 있고 경을 봐도 글자에 매어 달려서 불법을 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사람은 다 견성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說 義]

전에 한 수좌가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하는데 「무! 무!」하고 소리 내어 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화두의 뜻은 이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온갖 것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有情無情 皆有佛性)고 하셨는데, 조주(趙州)스님이라고 옛날 중국에서 유명한 선지식에게 어떤 학인(學人)이 찾아와서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적에 <무>(無)하고 없다고 하셨으니 「도대체 무슨 뜻으로 <무>라고 하셨을까?」하는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 수좌는 「무! 무!」하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큰 소리까지 내어서 「무! 무!」합니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옆 사람 참선에 방해가 되므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할 수 없이 수좌는 걸망을 지고 이 절 저 절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혼자 참선을 하는데 밑은 깊고 험한 낭떠러지어서 떨어지면 즉사(卽死)하게 될 그런 데 올라앉아서 마음 놓고 「무! 무!」하며 참선을 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결국은 견성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애를 쓰면 이런 정도로 애를 써야 합니다.

이 사람이 본래는 조그만 보따리장사였는데 만공스님 회상에 와서 법문을 듣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면 생명을 걸고 한번 해 봐야겠다고 발심을 해서 깨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 무」하고 소리를 내어 음성으로 부처를 구한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사람은 모양이나 말을 따라 부처를 구한 것은 아닙니다. 아둔해서 처음에 그랬지만 마음의 부처를 찾으려 한 수좌였습니다.

이렇게 견성을 해서 마음을 깨쳐 놓으면 32상을 갖추신 부처님께서 온갖 신통을 하시며 종로에 나타나셨다 하더라도 그래서 서울의 온 시민이 다 나와서 마중을 하시더라도 이 정도 된 사람은 왼눈 한 깜짝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 깨친 자리에서 보면 그런 부처님도 다 도깨비인데 거기 무엇 하러 갑니까? 이와 같이 근본 문제를 해결해 놓아야 부처님께서 고맙게 여기시지, 떡을 갖다 놓고 절을 하고 돈을 바치고 복을 많이 달라고 그래 봐야 불보살님은 고맙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이 보인다고 기도하다가 도통했다고 하고, 참선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하고 하면 이런 사람은 다 헛공부한 것이고 삿된 공부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제일 수제자(首弟子)인 가섭존자께서 본래 명문대가(名門大家)의 부잣집 아들이고 대학자 큰 인격자로 늦게 출가하신 분인데, 한번은 부처님께서 먼 데 어디 가셔서 설법해 주시고 한 달쯤이고 얼마쯤 계시다가 돌아오시게 되었는데, 그러면 대중들이 환희에 넘쳐서 모두 마중을 나갑니다. 그런데 가섭존자는 부처님 마중도 안 나가고 그대로 앉아 계십니다. 그러니 대중들이 한결같이 지탄을 합니다. 「가섭존자라는 이는 법도 모르고 어떻게 된 사람이냐?」하면서 대중들의 여론이 분분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들이 그런 불평을 하는 것은 다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여래를 환영한다는 것은 도깨비가 도깨비를 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섭은 여래를 정말 존경할 줄도 알고 참으로 환영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존자를 이렇게 칭찬해 주셨고, 시방제불이 석가여래의 상수(上首)인 가섭존자 참 거룩하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또 가섭존자께서는 이런 도리를 아시고 마중도 하시고 존경도 하시고 하니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도리를 알고 참선도 하고 경도 보고 염불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염불도 안 하고 기도도 필요 없고 경도 참선도 할 것 없다고 하면 이것이 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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