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佛(불)을 可以具足色身(가이구족색신)으로 見不(견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色身(불응이구족색신)으로 見(견)이니이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具足色身(여래설구족색신)이 卽非具足色身(즉비구족색신)이요 是名具足色身(시명구족색신)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를 可以具足諸相(가이구족제상)으로 見不(견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諸相(불응이구족제상)으로 見(견)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諸相具足(여래설제상구족)은 卽非具足(즉비구족)이니 是名諸相具足(시명제상구족)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한 육신이 곧 구족한 육신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한 육신이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몸매의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옵고 그 이름이 몸매의 구족이기 때문이옵니다.』

 

 

第二十 離色離相分--색상을 여의다

 

[科 解]

모든 부처님은 다 무위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부처라 하는 것이고 상호를 성취했기 때문에 부처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이 아무런 티도 없어서 모든 물건을 비칠 수 있는 이치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필경은 육신이 아닌 것이며 따라서 상호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상호 두 가지가 부처 아닌 것도 아니어서 법신을 여읜 것도 아니므로 여래는 색신이 아니라 법신이란 뜻으로 「색신이 아니라」했고 또한 색상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이름을 구족할 색신, 구족할 제상이라 한다.』고 하셨던 것이니 색상을 여읜 법신의 여래를 말씀한 대문이란 뜻으로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인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見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부처님은 가히 구족색신으로 볼 수 있느냐? 32상과 80종호가 구족한 그런 색신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거룩한 몸의 구족한 모습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구족색신이라고 설명하시는 것은 곧 그게 구족색신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아무리 부처님께서 거룩하셔서 눈썹사이에 백호상(白毫相) 금빛으로 된 몸이나 머리 위에 열 길의 광명이 항상 따라 있는 등의 거룩한 32상이나 80종호는 그것은 오직 육체적인 것이고 현상적인 것으로 구족한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구족색신이라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그것은 물질로 있는 것이고 환(幻)으로 있는 것이므로 그런 내용은 참으로 구족한 게 아니고 이 말 듣는 이 마음자리만이 참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환으로 부처님을 보려고 해선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구족색신이라고 설명하신 것은 그게 사실로 있는 구족색신이 아니고 불생불멸하는 구족색신이 아니므로 아무리 부처님의 몸일지라도 물질적 요소를 갖추면 있고 흩어지면 없고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신(法身)만이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보신(報身)이나 화신(化身)은 다 우리 중생 몸뚱이나 한가지로 생멸합니다. 그러니 환으로 봐서도 그렇고 모양으로 설명되는 것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존재이므로 그런 것으로는 부처님 비슷한 것도 볼 수 없습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見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를 가히 구족제상으로 볼 수 있느냐?』 아까는 몸뚱이를 말한 것이고 이것은 어떻게 묘하게 생긴 온갖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는 뜻이니 이것은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뜯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수보리존자는 『안될 말씀이옵니다. 여래를 구족제상으로는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눈은 어떻고 코는 어떻고 살결은 어떻고 손가락 발가락은 어떻고 낱낱이 모두 설명을 하셨는데 그런 구족상이란 참말로 있는 구족상이 아니옵니다. 참말로 눈이라고 할 만한 눈이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렇게 생긴 눈은 없고 그렇게 생긴 얼굴이라는 것도 없사옵니다. 그런걸 구족한 상이라 하옵니다.』

그렇게 별로 오래지 않은 왜정 때 한량으로 잘 놀고 하던 분이 출가했는데 이 이는 저녁 9시가 되어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밤새도록 노래를 부릅니다. 육자배기도 하고 온갖 노래를 밤새도록 하는데 아침에 깨어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 것도 심리학적으로 전부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전혀 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닌데 몸뚱이 저 혼자는 그렇게 못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몸이 아무리 거룩해서 광명이 나고 금빛으로 빛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육신 그것은 물질에 불과하고 허깨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니 그러므로 그 색상(色相)을 가지고 부처님을 볼 수는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중생들은 색상에만 떨어질 뿐만 아니라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법에도 걸립니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없는 그런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하면 중생들은 그 말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 말에도 떨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좋다고 눈에 걸려 넘어지고 귀에 걸려 넘어지고 맛에 걸리고 몸에 걸리고 전부 이럽니다. 그래서 자꾸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십니다. 우리의 신념, 사상이 확고부동해지고 어떤 방해에도 걸리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술 보면 마시고 싶은 사람은 벌써 술에 걸린 사람이고, 남녀끼리 서로 만나면 좋아지고 싶은 사람은 여자한테 걸린 사람이니 그러면 그 마음에 벌써 애착이 있어서 인과가 있는 사람이므로 인과를 초월한 무가애(無?碍)가 아닙니다. 술에도 밥에도 옷에도 남자한테도 여자한테도 명예에도 돈에도 무엇에도 뜻이 없고 세상만사에 뜻이 없는 것이 그게 무가애입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고기 생기면 고기 먹고 안 생기면 억지로 먹으려고 할 것도 없으며, 술도 생기면 마시고 안 생기면 안 먹고 이런 것을 무가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한테 하면 말씀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게 먹은 게 안 먹은 거고 사람을 죽여도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러니 화엄경(華嚴經) 53선지식 가운데 어떤 보살은 국왕인데 선재동자가 그분을 한 번 만나 보니 아주 폭군이 돼 가지고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목을 베고 하루에도 수백명을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선재동자가 보니 도무지 선지식이 아닌 것 같아서 「아무래도 마귀굴로 내가 잘못 찾아왔구나.」하고 의심하다가 먼저 선지식으로부터 「그렇게 의심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서 법을 물으라.」는 당부를 재차 듣고 할 수 없이 들어가서 절을 하고는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무량삼매를 깨달을 수 있는 큰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래 놓고 보니 참말로 선지식임을 깨닫고는 「그 중생 제도하는 데 가지가지 방법이 있겠지마는 어째서 보살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을 쉽게 죽여야 되겠습니까?」그러니까 그 보살님이 웃으면서 「너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내가 살인 안 하는 사람이다. 내가 금생 뿐 아니라 내생에도 과거에도 백천만생을 돌아다녀도 개미 한 번 밟아 본 적이 없느니라.」 「그러면 지금 이렇게 살생을 하시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일 년만 해도 사람이 여러 수십만 명이 죽는데 그래도 안 죽였다 하시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것은 모두 내 화신이다. 내 화신이 남의 집 아들로 태어났고 딸로 태어났고 그래서 80년 전에 태어나서 지금 80세가 된 것도 있고 그러하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한 자리니까 그 보살님으로 봐서는 지금 곧 하고 앉아 있는 건데 우리가 보기에는 남의 집 아들이 80년 되었으니까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 보살이 그렇게 화신을 보내서 역사적인 인간이 되어가지고 일만 저지릅니다. 부모한테 불효하고 국가에 위법하고 탐진치 해탈 안하면 그걸 잡아다가 사정없이 목을 베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중생들이 비린내 나는 피가 푹푹 쏟아지는 것을 보도록 만들은 눈가림입니다. 그러니 이게 다 환입니다.

불보살님 경계에서는 이와 같이 마음이 색상(色相)을 다 떠나 있기 때문에 육신이나 현상계를 자유자재로 전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 색상이 아닌 말 듣고 생각하고 하는 주체, 마음자리인 법신을 확실하게 깨달아서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를 참으로 본다는 것은 곧 자기의 법신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32상 80종호(種好)를 가지고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법신의 그림자이고 마음의 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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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若有人(약유인)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써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是人(시인)이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多不(득복다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此人(차인)이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甚多(득복심다)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若福德(약복덕)이 有實(유실)인댄 如來不說得福德多(여래불설득복덕다)니 以福德(이복덕)이 無故(무고)로 如來說得福德多(여래설득복덕다)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해서 받는 복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께서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할 것인데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 말 하느니라.』

 

 

第十九 法界通化分-법계를 통화한다

 

[科 解]

칠보를 보시한 인연으로 받는 복덕은 인간세상이나 천상에서 받는 유위적인 복을 말하며, 이에 대해 함이 없는 절대의 복덕은 범부와 성인을 초월하는 통화의 공을 말한다. 그러나 유위(有爲)의 상대적인 복이라 하여 그것을 버리면 공행(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무위법이 비록 참되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기대려 하면 성과(聖果)는 증득할 수 없다. 그러니 기대지도 말고 버리지도 않는 보살만행이라야 이것이 구경의 진리이고 성불하는 법이 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현상계와 본체계를 다 통하는 통화의 공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이라 했다. (청담스님의 설법이 누락되어 종경(宗鏡)선사의 제강(提綱)중에서 추림)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如是世尊 此人以是 因緣 得福甚多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다 보시했다고 하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해서 얻은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해서 얻은 복이 심히 많사옵니다.』

삼천대천이 숫자의 단위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이번에는 범망경(梵網經)에 있는 백억화신불(百億化身佛)의 말씀과 견주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삼천대천은 곧 백억이란 말인데 석가모니 한 부처님의 화신의 숫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한 부처님께서 성불하시면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세세생생으로 닦은 과보로 생긴 보신(報身)이 생깁니다. 만척이나 되는 신장에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보신>이 나타나는데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보신>의 천백억분의 하나인 화신(化身)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처님께서 나시면 연꽃자리가 생깁니다. 연꽃을 불교의 이상화로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 꽃은 더러운 썩은 물에서만 크지만 그 꽃과 잎은 더러운데 물들지 않으면서 향기가 좋고 활짝 깨끗하게 피는 뜻이 깊은 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꽃들은 비 한 번 맞으면 다 시들게 되지만 연꽃이나 잎은 물방울을 또르르 굴려서 떨어뜨립니다. 이와 같이 연꽃은 제일 더러운데서 생겨나서 더러운데 물들지 않고 제일 고귀한 꽃으로 피기 때문에 불보살이 중생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을 구제하지만 중생들의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이치와 같은 뜻을 지니기 때문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색구경천 하늘에 만척이나 되는 <보신>이 생기고 연꽃 천 잎에 당신의 일천 화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천불의 화신을 소집합니다. 범망경(梵網經) 심지품(心地品)에 자세한 얘기가 나와 있습니다. 보신인 노사나불이 천불의 화신에게 범망경의 보살계 십중48경계(十重四十八輕戒)를 설법하시면서 이 계를 가지고 가서 천당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 가르쳐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천 연꽃의 천 화신불이 또 낱낱이 백억화신이 나타나서 무수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으니 어서 가서 이 법으로 구제해 주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신 분 중의 한 분이 실달태자이시니, 일부러 발심 출가해서 6년 고행 끝에 성불하는 것도 보여 주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49년 동안 가르쳐 주셨으니 이것이 방편입니다. 그래서 절에서 예불할 때에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며, 이렇게 한 부처님께서 한 교구씩 맡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바세계를 맡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신자리에서 마음은 본래 무한대이어서 무한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공간을 부처님 마음에 비하면 허공에 뜬 구름 한 점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을 제자들을 중생하시려니까 삼천대천세계니 아승지니 무량아승지니 하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 한 그릇만 떠 줘도 큰 복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천백억 세계를 보물을 가득 채워서 보시했으니 그 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得福德多

 

[解 義] 『수보리야! 보배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중생을 위해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인 복덕이니 그것은 절대적인 복덕이 될 수 없고 마음의 복이 될 수 없다. 물질은 거짓된 것이고 마음의 그림자이므로 물질에 끄달린 복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복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수보리야! 만일 그 복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내가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복덕이 많다고 하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위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과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에서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참말로 있는 복덕이 뭘 가리키는 뜻입니까? 키가 작다 하면 크다 작다 하는 생각에 떨어지는 것이고 많다 적다하면 우리는 많다 적다는 생각에 그만 구속이 되어 머리가 자꾸 안 돌아갑니다. 여기 많다는 말은 안 많다는 말이고 작다는 말은 크다는 말이고 실제가 그런 것입니다. 복덕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若福德有實)하는 뜻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복덕일진댄」 그런 뜻입니다. 불생불멸하는 그런 자기 마음이 복이지 진복(眞福)은 복이라고 할 수 없으니 많다 적다는 말도 못합니다. 그래 놓고는 「그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 복덕이 많다고 한다.」하셨으니 앞에 말씀과 전혀 반대로 모순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이면서 같은 말씀입니다. 「복덕이 참말로 있는 복덕이라면 그게 정말 불생불멸하는 복이니까 그것은 진복(眞福)이고 그 진복은 내 마음 밖에 없고 자성자리는 어떻게 많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많다고 한다.」 그런 말씀이 얼른 껍데기 보면 그 뜻이 금방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말씀 같지만 정말 복덕이 아닌 복덕은 진복이고 자성자리이므로 많다고 할만도 한 것입니다. 이 복은 불생불멸하는 복이고 많다 적다를 초월한 복이며 항상 할 수 있는 복이니 많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많다는 말은 많다고 할 수 없는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쌀가마니나 돈 보따리처럼 있고 없는 것도 있는 복이 아니라 정말 이런 복덕이 없는 자성자리입니다. 지금 말 듣고 말하는 이 자리, 온 우주의 주인공 자리, 그게 참 복덕이지 복덕이 아니면 그런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정말 복덕이 많다고 할 만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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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體同觀分 第十八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오(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肉眼不(유육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肉眼(여래유육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天眼不(유천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여래)-有天眼(유천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慧眼不(유혜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慧眼(여래유혜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法眼不(여래유법안)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法眼(여래유법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佛眼不(여래유불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佛眼(여래유불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恒河中所有沙(여항하중소유사)를 佛說是沙不(불설시사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說是沙(여래설시사)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一恒河中所有沙(여일항하중소유사)히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하고 是諸恒河所有沙數(시제항하소유사수)로 佛世界(불세계)-如是(여시)하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爾所國土中(이소국토중)에 所有衆生(소유중생)의 若干種心(약간종심)을 如來悉知(여래실지)하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諸心(여래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이요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일새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육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법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아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불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해 부처님께서 그 모래를 말한 적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이 모래를 말씀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와 같은 수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의 모래와 같은 수의 불세계가 있다면, 참으로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 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께서 다 아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께서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第十八 一體同觀分--온갖 것 하나로 보다

 

[科 解]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일체의 현상계가 다 곧 마음 하나이므로 마음과 객관을 떼어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의 마음도 그 근본을 살펴보면 중생이 아니고 알고 보면 다 부처님의 마음과 같은 자리에서 나온 한마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다섯가지 신통도 따지고 보면 마음 하나고 중생들의 온갖 번뇌망상도 과거심·미래심·현재심도 다 한가지 마음일 뿐이므로 하나로 봐야 한다는 뜻에서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世尊 如來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世尊 如來有法眼

 

[解 義]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다섯가지 눈을 가지고 물어 보십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육안(肉眼)이 있느냐? 고깃덩이 눈, 짐승 같은 눈이 있느냐?』하고 물어 보십니다.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도 육안이 있으시옵니다. 마야 부인의 몸에서 받아 나온 그런 육안이 우리 같은 육안이 있으시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부처님께서 천안(天眼)이 있느냐?』 천당사람이 가진 눈은 땅 속도 들여다보고 극락세계도 보고 지옥도 보고 다 보는 눈입니다. 눈앞에 구슬을 들여다보듯이 삼천대천세계를 우리가 앞에 있는 물건 보듯이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 천안이 부처님한테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런 천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혜안(慧眼)이 있느냐?』 혜안이라 하는 것은 근본 자성자리를 통달해서 일체 만법이 둘이 아닌 것을 아는 지혜의 눈입니다. 있는 것 없는 걸 다 초월해서 아공·법공·구공까지 들어가면 없는 것 조차 없어졌고 부처님도 중생도 모두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자기 정신만 있어서 만법이 평등해진 근본지혜를 보는 눈을 <혜안>이라 그럽니다.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런 혜안이 있으시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법안(法眼)이 있느냐?』 <법안>이란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은 산이 아니며 촛대는 책상이 아니고 책상은 촛대가 아니며 안경이 시계가 아니고 시계도 안경이 아닌 그런 차별상을 잘 알아서 미한 건 중생이고 깨달은 건 부처고 그런 현상계의 차별원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아시는 밝은 눈을 말합니다. 만고 평등하여 구별이 없는 그 가운데 또 구별이 분명히 있어서 확실히 하나는 둘이 아니고 둘은 하나가 아니란 그런 걸 아는 눈을 <법안>이라 그럽니다. 그러므로 혜안으로 볼 때는 여자니 남자니 하는 구별이 붙을 데가 없고 그렇지만 현상계로 보면 남자, 여자의 확실한 구별이 있어서 육체조직부터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종소리를 듣는 경우에도 한국 사람은 댕댕으로 듣고 일본 사람들은 강강으로 듣고 하지만 그러나 종소리는 강강도 땡땡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댕댕으로 들으면 댕댕으로 들리고 강강으로 들으면 강강으로 들리지만 그건 사실 참다운 종소리는 아니며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강강도 아니고 땡땡도 아닌 참 종소리, 본래의 종소리를 들으실 줄도 아시지만 또 강강으로 우리가 들은 그대로도 들을 줄 아시니 틀린 대로도 알고 안 틀린대로도 아시어서, 본체계(本體界)의 진실일여상(眞實一如相)과 현상계의 만법차별상(萬法差別相)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는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으시옵니다.』그랬습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如來有佛眼

 

[解 義] 다섯가지 눈 가운데 마지막 눈인 부처님 눈(佛眼)에 대해서 물어보십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계시옵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눈, 곧 혜안·법안·천안·육안을 다 하나로 합한 것을 불안이라 합니다. 조각 조각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이면서 그렇게 차별이 있습니다. 만법을 다 차별로 알고 차별 아닌 것도 다 아는 근본 마음은 하나이지 눈이 여럿이 달린 것은 아닙니다. 육안이 불안이고 법안이고 혜안이고 천안이지 육안은 고깃덩어리고 흙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게 홀로 어떻게 무엇을 봅니까? 그러니 모두 부처님께서 되어 놓으면 육안·천안·법안·혜안·불안의 5안을 다 갖춥니다. 천당 사람들의 천안도 자기 공부한 만큼 그 한계만 보이고 그 이상은 못 봅니다. 그래서 천당에도 28천의 구별이 있게 되어있습니다. 신선이 돼도 정신통일해서 어느 정도 공부만 돼도 그렇고 정신통일한 사람도 그렇고 이 혜안, 법안이 다 있기는 있는데 그 능력이 얼마 안 됩니다.

부처님처럼 철저히 깨닫고 보면 우리가 과거에 잘못 생각했던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심지어 불법도 팔만대장경까지도 배운 것 다 잊어버립니다. 평등청정한 자성이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대로 돌아가면 쓸데없는 망령을 낼 필요가 없고 기억할 것도 없고 그러니 자꾸 무심해 갑니다. 중생은 꽁해서 듣기 때문에 천만년 가도 안 됩니다. 꽁한 그것만 내버리면 영감이 옆에서 아무리 욕을 해도 「제욕 제 마음대로 실컷 하고 욕만 해서 시원치 않으면 마음껏 때리시오.」하고, 꽁한 것만 없으면 그만 만사태평입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복 받고 집안이 조용하고 동네가 조용하고 세계가 평탄해집니다.

그러니 이 꽁해서 이 방정맞은 놈이 이것이 버릇이 되어 가지고 문제니 이걸 두드려 부숴야 합니다. 이 꽁한 생각이 나오거든 사정없이 쳐부숴서 이렇게 항복기심하는 것입니다. 이게 항복하는 방법이니 망상이 움직일 수 있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중이 남이 나를 욕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골을 내고, 신도들이 좀 잘해준다고 그게 내 신도라고 다른 절에 가지 말라 하고 남의 법문 소리 듣는다고 샘을 하고 그러면 그것은 중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는 것이며 승속 간에 이대로 번뇌망상을 다스려 나가야 올바른 신도가 되고 승려가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제망중중(帝網重重)의 현상계가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고 하나라 해도 안 되고 여럿이라 해도 안 되고 그런데 이런 제망중중의 촛대요, 시계요, 종이요, 목침이요 이런 것을 낱낱이 아시는 것이 육안이요, 법안이요 그런데 이게 혜안이요, 사실은 모두 불안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도 불안이 있어서 실제로는 마음 자신이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있느냐?』하시니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있으십니다.』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 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寧爲多不 甚多世尊

 

[解 義] 『수보리야! 네 마음에 어떠하냐? 여러 만리나 되는 항하 가운데 있는 강 모래를 부처님께서 그걸 모래라고 설명했느냐? 설명하지 안했느냐?』 『옳습니다. 부처님은 그걸 모래라고 하셨습니다. 항하에 한량없는 모래가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한 항하 강 가운데 있는 모래 수만 해도 한정이 없겠는데 그 모래 수와 같은 항하강이 또 있다고 하고 그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은 그런 부처님 세계가 있다고 하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것이냐?』 『예, 그 참 많사옵니다. 부처님, 그건 굉장하게 많습니다.』하고 수보리가 대답했던 것입니다.

 

原 文 :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解 義] 항하사수 모래와 같은 항하강, 이렇게 한량없는 이 많은 강에 있는 모래 수처럼 많은 세계 그 가운데 사는 중생들의 마음 씀씀이, 그 낱낱의 심리를 부처님께서는 한 몫에 일목요연 하게 탁 보면 다 알아 내십니다. 누구는 무얼하고 누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이 다 말로 되어 가지고 들리기도 하고 모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근본자리에서는 생각이 말이고 음성이 생각이기 때문에 말로도 들리고, 생각이 보이고 촉감처럼 느껴서도 다 아십니다. 밤에 꿈속에서 말하는 음성, 그게 목소리가 아니고 마음 소리이고 생각 소리입니다. 생각 그 자체가 소리로도 들리고 또 그 생각이 냄새로도 되어 알아집니다. 생각 따라서 욕심내서 나는 냄새가 다르고 또 진심으로 화를 내는 냄새가 다르고 그런 것이어서 한 마음이 냄새도 나고 소리도 되고 빛깔도 됩니다. 꿈을 보면 마음이 모두 눈도 되고 코도 되고 온갖 피부도 되고 동시에 코로 맡는 냄새도 되고 그럽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탐진치가 다 냄새로 되고 빛깔도 되고 소리도 되어서 다 아시게 되는데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한 한량없이 많은 모든 중생들의 온갖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한 두 중생의 마음만 해도 제8장식(第八藏識)에 붙어서 움직이는 미세한 번뇌망상의 용심(用心)만 다 세어서 알려고 하더라고 우리 중생이 다 달려들어서 여러 겁을 센다 하더라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분해한다는 것은 그건 곧 우주 전체의 분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물질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곧 우리 마음의 지적활동, 그 가운데 우리가 사는 그것이 이 지구덩이 하나만 없애 가지고 전자시대로 돌려보내더라도 그 수가 한 없이 많을 텐데 그것이 다 마음이 움직여서 만들어진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한 사람 망상만 해도 그러니 그 수없이 많은 무한 수의 우주세계에 가득 찬 온갖 중생의 굵은 생각, 미세한 생각 온갖 생각을 다 안다는 것은 정말 참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걸 다 아십니다. 그 이유를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解 義]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의 온갖 마음을 다 아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십니다. 「일체 중생이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는 건 그건 생각이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것을 곧 마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논법으로는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부처가 되면 온갖 중생의 마음, 망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보기도 하고 모양도 나타나고 냄새로도 알고 생각으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알고 남김없이 다 아시는데, 그것은 왜 그렇게 알게 되느냐 하면 그게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말씀의 조리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금강경을 천독 만독을 자꾸 하면 그 뜻이 풀어져서 이런데 걸리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온갖 생각이 아니라 물위에 떠 있는 파도나 한가지란 뜻입니다. 중생이 아무리 그 마음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멸(生滅)이 있어서 가령 「여기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게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껍데기 그림자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또 그런 사람이면서 그건 또 진실한 사람이란 말도 되고 부처란 말도 되고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큰 적멸(寂滅)에 드시어 대열반(大涅槃)에 계시니까 다른 중생은 다 부처님의 대열반의 마음이 바다 위에 떠 있는 파도처럼 드러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며, 내 몸 위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환히 알게 되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중생이 한생각도 까딱 안하고 모두 성불해 가지고 중생제도도 하지 않은 채 모두 본연자세 그대로만 있으면 부처님도 그걸 볼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아니고 모양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니까 일체가 다 떨어진 자리를 불불(佛佛)이 서로 볼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볼 수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은 벌써 어떤 형태의 존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진치의 생각에 얽매인 이 마음, 그것은 참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解 義]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일체 마음을 마음이 아니라고 한 것은 과거의 마음도 얻기 어렵고 현재의 마음도 얻기 어렵고 미래의 마음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마지막 결론을 하십니다.

과거심이란 아까 내가 무엇을 물었을 때는 묻고 싶은 그 마음을 가지고 물었지만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한 번 지나가 버린 그 생각은 다시는 거두어들일 도리가 없으니 과거는 현실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그 시간에 일어나서 그렇게 설명하고 다른 생각으로 넘어올 때 벌써 완전히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걸 생각하게 됩니다. 예컨대 경을 새기는 데 있어서도 한 자 한 자 새겨 내려가면 먼저 새기던 마음은 자꾸 과거심이 되어 없어지니 그게 불가득입니다.

또 현재심도 불가득입니다. 지금 현재 이렇게 설명하는 이 마음이 한 자 한 자 새길 적마다 과거심으로 자꾸 넘어갑니다. 과거심이라 하는 경우에도 과(過)하는 생각 다르고 거(去)하는 생각 다르고 이렇게 찰라 찰라 변하는 이것이 현재심입니다. 말을 열 마디 하면 생각이 열 번 지나가게 되니 마치 한강 물처럼 자꾸 흘러가는 것의 연속일 뿐이어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을 한강 물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한강에 흐르는 물은 인천 바다에 들어가느라고 흘러가는 동안 지금 잠깐 통과하는 것뿐이고, 이것이 한강 물이라고 할 만한 물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시아문(如是我聞)」 첫 번부터 금강경을 쭉 읽어 보든지 강의를 해도 역시 글자 한 자 한 자를 설명할 때 마다 그 뜻이 다르므로 그걸 우리가 소위 현재심(現在心)이라고 하지만 글자마다 뜻이 다르니 천 자나 만 자나 벌써 과거로 흘러서 현재·과거·현재·과거로 넘어갔으므로 어느 것을 지적해서 이것이 현재라고 할 만한 현재는 없이 과거로 되어 버립니다. 마음심(心)할 때도 ‘마음심’의 심까지 읽고 난 순간 벌써 과거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각 상(想)할 차례라면 생각 상은 아직 안 나왔으므로 미래이니 <마음 심>은 과거로 떨어지고 <생각 상>은 미래로 남아 있고 이러다 보니까 현재는 항상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범부가 생각하면 현재심이 있는 것으로 봤지 사실 <현재심불가득>이란 말은 지금 당장 이 마음도 잡아 쥐어 볼 수 없고 챙겨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과이부지(過而不止), 곧 자꾸 지나가고 머물지 않으니 지나간 마음, 아직 오지 않은 마음, 금방 현전해서 자꾸 지나가는 마음이니까 다음 생각 다음 말이 머리를 내 밀면서 붙잡을 수 없이 광선 모양으로 달아납니다. 그래서 현재심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미래심(未來心)은 마음이 나오기 전이니 예컨대 유심(有心)의 두 글자를 새기는 경우에 지금 위에 있을 유(有)자를 새기고 있으면 아직 마음심(心)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래 마음은 생기지도 않은 것이므로 그것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 곧 과거심·현재심·미래심의 삼세심(三世心)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說 義]

 

▶참 마음은 볼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서양 철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이 적어도 철인의 말이라면 심히 서글픈 일입니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나로부터 창조되어진 2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아닙니다. 당나라 때 인도에서 스님 한 분이 오셨는데 이 분이 모르는 게 없어서 뭐든지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일체중생의 마음을 다 알아맞히는 신통을 얻은 이입니다. 이것을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고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합니다. 그때 남양혜충국사(南陽慧忠國師)라고 육조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조사님이 계실 때입니다. 이 어른이 국사로 계실 적에 그런 소문이 나서 인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혜충국사 말씀이 「소문을 들으니 스님께서 타심통까지 하셔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데 사실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 마음 좀 알아맞혀 보십시오, 자 그럼 내 마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혜충국사는 강가에 배를 타고 놀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국사님께서는 지금 아무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십니다.」 혜충국사는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대선사님이시고 일국의 국사님이 어떻게 원숭이하고 같이 노십니까?」 그때 혜충국사는 창경원 같은데서 보던 원숭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이번에는 다시 마음을 대 선정에 두시고는 「지금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알아맞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혜충국사에게 귀의하여 정법(正法)을 닦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만 알아도 안 됩니다. 우리가 흔히 체니 용이니 하고 말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게 자기 근본성품이다. 이것을 발견해서 깨달아 가지고 나중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알고 있고 이 반야경도 그렇게 새겨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실제로 체득하신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시다가 「얻긴 얻었지만 참말로 얻은 건 아니다. 그게 무실무허한 법이라 실로 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무한 것도 아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 또 하신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과거·현재·미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는 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오후 6시라면 6시 1분 뒤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니 미래의 시간이고 5시 59분까지는 지나갔으니 과거라 하겠고, 그러면 5시 59분 1초부터 6시 0초까지는 현재가 되는데 그 1분을 60초로 나누어 생각할 때 59분 30초가 현재라면 59분 29초는 과거고 59분 31초는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1초를 현재라고 하더라도 1초의 시간을 만분의 1초 백만분의 1초로 나누어 생각할 때는 그것도 현재라고 지적할만한 시간의 표준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므로 흐름의 연속일 뿐 어느 순간도 정지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시간이 흘러갈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의 물질이어야 합니다. 최소한 에너지라도 되어 가지고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너지나 물질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의 운동법칙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치하는 표준이 없으면 같은 한 시간이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의 움직임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므로 어느 순간을 가리켜 현재라고 할 만한 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과거나 미래는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진실 그대로를 말한다면 삼라만유의 모든 존재가 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것입니다. 물질 그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억한다는 말이지만 작년은 이미 작년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작년 365일 다 흘러가 버린 것이므로 작년이라고 하는 사실은 다 소모되고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을 현실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현실 현실하고 현실주의를 내 세우지만 우리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그 내용을 따지고 보면 사실 그런 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있는 것만이 현실이지 지나가 버린 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추억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어제를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제라는 것은 생각뿐이지 어제란 확실한 시간이란 게 없습니다. 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바늘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한 바퀴를 돕니다. 죽순(竹筍)이 밤사이에 한 길을 크지만 크는 모습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순이 크는 속도나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속도가 최고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어느 정도의 속도는 볼 수 있지만 속도 이전의 움직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프로펠러가 처음 돌기 시작할 적에는 확실히 보이지만 빨리 돌면 차차 안 보이다가 나중에는 동그라미만 보이게 됩니다.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되어가고 있으니 현실을 볼 수 없고 1초라도 머물러 있는 순간이 없어서 과거나 미래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뿐이므로 현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 본래의 형태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게 돌아가는 시계 바늘이 어떤 장소에 잠시도 머무르지 않듯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꾸 커가고 나중에는 없는 데로 자꾸 돌아가는 한 개의 과정을 보는 것이지 현실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볼 수 있는 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객관세계인 이 우주에는 현실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이 절대존재가 아니라는 확실한 안목을 가지고 현실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염세철학(厭世哲學)이 되어서 「염세다. 우상이다. 무상이다.」하여 현실을 무시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것으로 있는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중생들은 자꾸 속아서 고해의 길을 세세생생을 잘못 살아가게 마련인데, 이런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현실을 바로 살게 하며 속지 않게 해서 복과 지혜가 원만한 정토(淨土)의 참다운 현실을 살게 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런 뜻에서 현실이란 무엇인가 하고 뚜렷하게 말하자면, 현실이라 할 수도 없고 무엇이라 대답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덕산화상과 삼세심(三世心) 불가득

당나라 때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던 덕산(德山)스님이란 유명한 조사스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고 했는데,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공부한 이들은 모두 제 나름대로 주석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간단하면서 뜻이 한량없이 깊기도 하므로 불법 전체의 대의를 금강경에서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여기에 붓대를 듭니다. 그래서 팔백대가(八百大家)나 되는 많은 이들이 금강경 주석을 해 놓았는데 주금강도 자신이 직접 주석하여 짊어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남방에 육신보살(肉身菩薩)이 한 분 나왔는데 일자무식한 나무꾼으로 견성을 해서 그 종지를 크게 떨친다는 소문을 들은 주금강은, 「여러 백천만겁 아승지겁을 닦아서 구공을 얻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고 일체 경전에 쓰여 있는데 땔나무꾼이 견성을 하다니 그리고 또 쉽게 성불한다고 하니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마구니가 왔는가 보다. 내가 한 번 가봐야겠다.」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팔백여가를 집대성하고 자기가 쓴 것이 제일 완전하게 됐다고 하여 항상 「금강경은 나한테 물어라.」하며 돌아다니는 판인데, 육조대사가 나와서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여 부처님 뜻에 어긋나는 내용을 가지고 수많은 제자가 있다니 이들한테 항복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짊어지고 남방 양양 밑에 광동(廣東)으로 수만리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한 노파가 길가에서 호떡을 팔고 있는 집을 보고 「점심을 좀 먹어야겠으니 호떡 좀 팔으시오.」했습니다. 그 노파 말이 「호떡은 팔기가 어렵지 않은데 스님 짊어진 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 대해서 내가 의심나는 게 있는데 물어 보면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 금강경이라면 다 잘 알고 있으니 무엇이나 물으시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그걸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지금 내가 설명한 것처럼 우리 모두 삼세심뿐인데 이름이 삼세심이지 과거심 미래심뿐입니다. 그러니 삼세심이 불가득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듣고 있던 노파가 묻기를,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삼세심이 불가득인데 점심이라 하셨으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합니까?」하고 추궁합니다. 점심이란 배고프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에 점을 찍는다. 잠깐 요기한다는 말인데, 그러니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금강경 대강주(大講主)인 주금강의 입이 탁 틀어 막혔습니다. 과거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현재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말도 실수고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라면 자기 혼자 하는 판인데 그야말로 무식한 호떡장수 할머니에게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 호되게 방망이를 맞은 주금강은 태도를 고치어 「이 근방에 어디 선지식이 계신 절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용담선사(龍潭禪師)라고 아주 큰 선지식이 있습니다.」하고 가리켜 줍니다.

그래서 자못 심각해져 가지고 거길 들어가서 여러 가지 얘기 많이 하고 금강경 펴 놓고 그 얘기를 저물도록 하다가 어두워서 자기가 잘 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용담스님이 등불을 하나 켜 줬습니다. 덕산스님은 고맙게 받아서 들고 문을 열고 막 나가려고 하는 찰나에 용담선사가 등이 깨지도록 쳐서 불을 홱 껐습니다. 그 바람에 덕산스님은 확철대오해서 그 이튿날로 자기의 손수 쓴 금강경주석을 뒷산에 올라가서 다 불 질러 버렸습니다. 「내가 큰 죄를 지을 뻔했다.」고 그러면서 문자법사니까 글을 잘 새기고 불법종취(佛法宗趣)가 이렇다 하는 정도지 견성한 이가 아닙니다. 실상반야 없이 문자반야란 말입니다. 문자반야도 그대로 잘하면 문자견성(文字見性)으로 그 조리를 잘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껍데기만 해석하는 데는 잘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견성하면 그렇다 하더라, 부처가 되니까 이렇다 하더라.」하는 정도였지 실제로 자신이 깨달아 보지는 못했는데 이제 참 깨치고 보니 참 굉장한 이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선방에 가면 선지식 같은 이가 혹 견성을 했다거나 뭣 좀 아는 것같이 하는 학인이 있으면 이것을 물어 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덕산스님이 그 노인한테 호떡을 얻어먹었겠느냐?」는 겁니다. 과거심불가득·현재심불가득·미래심불가득이고 모두 불가득인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 그걸 대답하면 내가 떡을 거져드리고 그걸 대답 못하면 떡을 안 준다는 그 노파의 말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시험합니다. 인제 어떻게 해야 떡을 얻어먹겠느냐는 겁니다. 여기 꼼짝 못하고 떡을 내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숙제가 하나 더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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究竟無我分 第十七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되 世尊(세존)하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發阿?多羅三?三菩提(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면 云何應住(운하응주)하며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하리이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當生如是心(당생여시심)이리니 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하리라 滅度一切衆生(멸도일체중생)이되 而無有一衆生(이무유일중생)도 實滅度者(실멸도자)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이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이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於燃燈佛所(어연등불소)에 有法(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不(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하여는 佛於燃燈佛所(불어연등불소)에 無有法(무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득라뇩다라삼먁삼보리)하니이다 佛言(불언)하사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有法(약유법)하야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者(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일댄 燃燈佛(연등불)이 卽不與我授記(즉불여아수기)하사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야 號釋迦牟尼(호석가모니)련마는 以實無有法(이실무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새 是故(시고)로 燃燈佛(연등불)이 如我授記(여아수기)하사 作是言(작시언)하시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야 號釋迦牟尼(호석가모니)라하시니라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卽諸法如義(즉제법여의)니라 若有人言(약유인언)하되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면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佛得阿?多羅三?三菩提(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於是中(어시중)에 無實無虛(무실무허)하니라 是故(시고)로 如來說一切法(여래설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言一切法者(소언일체법자)는 卽非一切法(즉비일체법)이라 是故(시고)로 名一切法(명일체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譬如人身長大(비여인신장대)이니라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世尊(세존)하 如來說人身長大(여래설인신장대)는 卽爲非大身(즉위비대신)이요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도 亦如是(역여시)하야 若作是言(약작시언)하되 我當滅度無量衆生(아당멸도무량중생)이라하면 卽不名菩薩(즉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이 名爲菩薩(명위보살)이니 是故(시고)로 佛說一切法(불설일체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라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作是言(작시언)하되 我當莊嚴佛土(아당장엄불토)라하면 是不名菩薩(시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莊嚴佛土者(여래설장엄불토자)는 卽非莊嚴(즉비장엄)이요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通達無我法者(통달무아법자)면 如來說名眞是菩薩(여래설명진시보살)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이와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여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된 자가 없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것은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아는 바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곧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서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인데,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하셨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은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가운데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하기를 「일체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이름이 일체법이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아주 큰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이옵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일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노라.」하고 말하는 이라면 곧 보살이라 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도 두지 않는 것이 보살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살이>도 없고 <오래산다는 것>도 없다.」고 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노라.」하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곧 보살이 아니니, 왜 그러냐 하면 여래께서 말씀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없는 진리를 통달했다면, 여래께서 「참으로 이것이 보살이라」 말하리라.』

 

 

第十七 究竟無我分--마침내 나 없다

 

[科 解]

여기서는 처음에 선현기청분 제2(善現其請分 第二)에서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던 금강경의 최초의 문제이며 근본문제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심한 이가 「어떻게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냐」에 대한 법문을 다시 한 번 여쭈어 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법문을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되풀이하여 여쭈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은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한 번뇌망상 속의 범부들이므로 「마음을 가지는 법과 번뇌망상 항복하는 법」을 한두 번 말씀했더라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 요령과 핵심을 마음 깊이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거듭 여쭈어 본 것입니다. 수보리존자는 아공·법공·구공의 도리를 남김없이 완전무결하게 깨달으신 해공제일(解空第一)의 부처님 상수제자(上首弟子)이시므로 이미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의 닦는 길을 다 알고 계시지만, 그렇지 못한 당시의 대중과 미래 중생들을 위해 거듭 여쭈어 보는 것이며, 동시에 <항복기심>하고 닦는 자가 누구인가를 거듭 밝혀 주시기를 여쭈어 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량중생을 제도 하셨지만 한 중생도 제도되었음을 보지 않으시니 보살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의 대의를 말씀하시고,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일체법이 다 불법이어서 마침내는 불법이니 일체법이니의 구별이 없으며,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도 없다는 말씀을 차례대로 연결하여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말씀하신 금강경 상권을 종합정리해서 함축성 있게 말씀해 주신 것이 이 <구경무아분>입니다. 발심한 <나>도 없고 중생을 제도한 <나>도, <중생>도 없어서 이 <무아>의 진리를 통달해야 한다는 뜻으로 <통달무아분>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解 義] 그때 수보리께서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마음에 머물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하겠습니까?』하고 사뢰었습니다.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려면 이렇게 새길 수도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것을 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토를 그렇게 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려고 하면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며 어디다 그 마음을 두며 어떻게 우리가 한량없는 번뇌망상을 항복 받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나중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여쭈어 본 것으로 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범부로서 불교가 지금 어디가 붙었는지, 견성한다는 것이 무엇을 깨닫는 것인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묻는 소리인데 범부로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는 있습니다. 견성하기 전에 선지식을 만나고 훌륭한 법사스님을 만나 가지고 지도를 받아서 「아! 이 말하고 말 듣고 하는 이것이, 배고프면 밥 생각하는 이것이 영원불멸의 <참 나>의 존재이겠구나.」 이렇게 알아서 아직 깨치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그렇게 믿을 수 있도록 이론을 배웠다고 하면, 그래서 「사람이 다른 거 하는 것보다 견성을 해서 해탈해야 하겠구나.」하는 도리를 확실히 알았고 「지금 말하고 밥 먹고 남과 싸우고 온갖 짓을 다 하는 이것이 곧 이미 성불한 것이로구나.」하는 이런 이론에 아무 의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역시 범부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얻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것을 확실히 안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40여년 동안을 이렇게 횡야설 수야설(橫也說竪也說)로 해서 잠시도 쉴 새 없이 말씀을 해서 남겨 놓으신 것이 대장경(大藏經)입니다. 그래서 자꾸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설명하지만 못 알아차리니까 말씀을 하셔서 자꾸 여기까지 몰고 오는데, 이제 내가 어지간히 알기는 알았는데 한 부처님 뜻을 확실히 알아서 내가 부처님한테 배운 것도 없고 증득한 것도 없고 확실히 내가 그렇게 된 줄 알고 있는데, 그래도 행여나 싶어서 한 번 더 여쭈어 보는 겁니다. 내가 혹 어디 결점이 있나 하고 조심하는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정신자세가 돼야 할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수좌들은 완전히 알았다 싶어도 또 선지식한테나 도인 스님네 한데 또 물어 보고 물어 보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소리를 가지고 이리도 묻고 또 달리도 물어보고 같은 소리로 또 물어 보기도 하고 이런 것이 그게 참 조심성 있게 공부하는 태도입니다.

호리유차(毫厘有差)면 천리현격(千里懸隔)으로 약간만 틈이 있어도 천리가 멀어지는 것이니 부처님 성불하는데 그만 뒷걸음이 됩니다. 또 하나는 나는 위대한 법을 똑바로 알아듣고 깨달았지만 후세의 중생들이 내가 깨치듯이 깨칠 수 있을까? 그게 염려되어 또 물으시고 부처님께서 되풀이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은 다른 것 같아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시아문부터도 내내 그 소리가 그 소리인데 그게 모두 조금조금 달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렇게 법문을 들을 때는 그럴 듯해도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그냥 탐진치로 중생심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좋은 거 궂은 거 우리가 구별할 수 없는 건데 평소에 좋은 거라고 생각하던 게 앞에 나서니 관습적으로 좋다는 생각을 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 볼 때에 보기 싫다는 미운 생각이 앞에 나와 놓으면 미워하게 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산림을 하기 전이나 마찬가지가 되니 육두문자(肉頭文字)로 금강경 들으나 마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제자나 가르치는 스승이나 이 수보리존자처럼 이렇게 묻고 저렇게 대답하고 하여 철두철미하게 해야 합니다.

 

原 文 :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 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 已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解 義] 수보리존자가 마음 가지는 법과 번뇌 항복 받는 법을 다시 또 여쭈어 본 데 대해 부처님께서는 앞에서와 똑같이 대답하신 것입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마땅히 한 중생도 남기지 않고 일체 중생을 다 제도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 같은 분은 처녀 때 이런 법문을 듣고는 어디를 가다가 옷을 벗고 떠는 거지를 만나서 옷을 홀딱 벗어 줍니다. 그리고 자기는 벌거벗은 나체의 몸을 남한테 보일 수 없으니 땅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몸을 감추었다고 해서 <지장보살>이라고 합니다.

중생도진아성보리(衆生度盡我成菩提) 「중생을 다 제도해서 마친 뒤에라야 내가 대보리를 증득하리라」하는 원리입니다. 지장보살은 일체 사생육도(四生六道)의 분신(分身)으로 변화신(變化身)까지 나타내시어 제도하시지마는 치우쳐서 지옥을 많이 가십니다. 지옥 문 앞에 딱 섰다가 들어가는 중생보고 개심(改心)을 시켜서 알아듣고 착한 생각 내도록 해 가지고 도로 인간 세상이나 천당에 올라가게 하는데 그렇게 내 보내 놓으면 금방 눈 깜박할 사이에 또 되돌아오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문전에 지장보살이 눈물 마를 새가 없다고 합니다.

지장보살님처럼 우리도 보리심을 발했거든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다 제도하리라」고 마음먹고 또 「일체중생을 다 제도해 마치고 나서는 실로는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제도된 중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라.」 그러셨습니다.

대용맹심을 내서 인간적으로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되고 한 번 아무 생각 없이 되어 남보다 잘났다고도 안하고 뒤 떨어지려고도 안하고 무심경계에 들어가서 천지가 내 집이라 하는 게 도리어 약한 소리입니다. 천지가 그만 내 주머니 가운데 들어있는 이런 배짱으로 해야 합니다. 사실이 또 그런 것입니다. 밥은 아무데서나 얻어먹고 방방곡곡 다니며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일러 주어서 중생교화를 하지만 교화했다는 생각도 없고 교화한 중생도 없이 해야 합니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생각 없이 일하자」하는 간단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런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해서 마쳤지마는 다 제도된 걸 보고는 역시 「한 중생도 제도했거니」하는 생각을 안 합니다. 실제로 사실 중생이 제도 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解 義] 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했는데도 아무도 제도한 이도 없고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사람도 없는 까닭을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아상>이 있거나 <중생상>이 있거나 <수자상>이 있으면 이런 이는 곧 보살의 자격이 없는 때문이니,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이 없느니라.』

<아상> 하나만 있으면 밑에 삼상(三相)이 따라 나옵니다. 찰나에 연기법(緣起法), 곧 상대법으로 일어납니다. <나>라고 할 때 벌써 저쪽을 상대로 해서 또 저쪽 때문에 <나>라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저쪽과 동시에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생상>이 벌어지는 것이니 사람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단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서로 어울려 가지고 <중생상>으로 중생놀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또 칠팔십은 넘도록 살아야겠다고 또 살 것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 그게 <수자상>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까 아무리 견성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보살하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야 보살이라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그게 만일 아상이 있을 때에는 무생법인을 증득한 채 그대로 중생이고 깨쳐 놓은 그게 그만 사도(邪道)가 됩니다. 그러니 불법 깨친 게 아니라는 그말인데, 이런 것은 용심(用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금방 사도가 됐다가 번쩍 정도가 됐다가 들락날락하는 게 초심보살(初心菩薩)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수보리야! 「사실 어떤 법이 있어서 그런 발심을 할만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만한 그런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어떤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고 어떠한 발심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본래부터 보리심 발했다, 나중에 견성해야 보리심 발한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확실히 될 때에야 사실 보리심이 증득된 것이다」하는 말은 했지마는 사실 그런 법은 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 이유를 누가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대중대답생략>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 겁전의 과거세에 연등불(燃燈佛)한테 법문 듣고 발심해서 견성하고 수행해서 성불했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어떠냐?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에 대해 수보리존자는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이것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다.」하고 내세울만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석존께서 범부 때 처음으로 연등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적도 있지만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전이고 도깨비 소리를 도깨비가 들은 것이며 꿈 속에서 꿈 사람이 꿈 얘기 하는 것이니, 꿈 가운데 부처, 꿈 가운데 중생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닙니다.

석존께서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 전의 과거 연등불한테 법문 듣고 발심 수행하고 참선해서 견성했습니다. ‘일체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부처다. 그러니까 법문 하신 법문도 없고 법문 들었다고 하면 나는 벌써 도깨비 말을 들은 것이니, 도깨비 말 듣고 도깨비 사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한 가지는 정리가 되어야 할 판인데 이런 얘기는 뚝 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뚝 떨어진게 글자 한자 한자를 전부 다 그렇게 배우고 나면 자꾸 그 뜻을 외워야 합니다. 하루 한 번씩이라도 경책을 펴지 않고 외우게 되면 그때는 눈을 감고 앉아서 「여시아문하사오니」이렇게 죽 외워야 합니다.

이때 「여시는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고 이건 참 뭐라고 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 있겠다」하는 걸 배웠습니다. 그런 <여시>자 부터 끄덕이면서 읽어야 합니다. 「참 그렇다. 부처님한테 옳은 말씀 들었고, 세상 어디를 다녀 봐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몇 억만생을 살면서 오묘한 진리의 법문 처음 듣는 법문이로구나. 꼭 그렇겠구나.」 하면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原 文 : 佛告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 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是故 燃燈佛 如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解 義] 수보리존자의 대답을 들으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그렇고 말고, 옳은 말이다. 수보리야!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만일 내가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네가 참 불법을 바로 깨달았으니 이 다음 세상에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되어 팔만사천 법문의 법문의 장광설(長廣說)을 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고 <수기>(授記)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실로 얻은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불께서 나에게 예언하시기를 「네가 이 다음 세상에 많은 보살행(菩薩行)을 닦아서 무한한 공덕을 쌓고 사바세계에 나아가서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되어 그 첫 번째 법회에서 다섯 비구를 설법하여 도를 깨닫게 하고 또한 많은 중생을 제도 하리라」고 <수기>를 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왜 내가 얻은 게 없기 때문에 그 수기를 받게 됐다.」고 하겠는가. 내가 얻은 게 있으면 불법적멸(佛法寂滅)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니 수기를 줄 수 있습니까?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불법과는 십만 팔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저 밖에 일주문(一柱門) 안에는 못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테 보시도 안하고 지계 . 수행도 다 집어치우느냐 하면 그건 또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안 한다고 하면 복도 안 짓고 열반에만 주하는 나한이니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자기가 진보했다 하더라도 중생제도를 안 한 사람이므로 불법을 성취할 수 없고 또 그건 발심 못한 사람이며 이생기심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불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시 발심해야 하고 일체중생을 아무 생각없이 제도해야 합니다.

일체보살이 즉비보살 시명보살(一切菩薩 卽非菩薩 是名菩薩)로 모든 보살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는 것이며, 일체세계가 즉비세계니 시명세계(一切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곧 일체 우주는 곧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우주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래께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안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법신에도 육신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왔다 하면 법신에 치우치고 열반 . 적멸에 치우친 것이며, 안 왔다 하면 현상계 . 중생세계에 치우친 것이 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둘 다 분별 못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해서 성불하는 부처님한테도 뜻을 두지 말고, 또 그렇다고 해서 망상 탐진치에도 이끌리지 말라, 거기에도 뜻을 두지 말라, 만일 마음을 생사나 열반이나 어느 한곳에 주하거나 하면 그것은 한쪽에 떨어진 것이니, 하나는 없는 데 떨어지고 하나는 있는 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응무소주(應無所住)가 아닙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 如義

 

[解 義] 부처님께서 실무유법(實無有法)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여래>(如來)의 뜻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왜그러냐 하면, 여래 곧 불께서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있으면 수기를 안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래(如來)라 함은 같다는 뜻인데 한문 5만자 가운데 하필 왜 여(如)자를 놓았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글자는 같을 여(如)자 인데 같다는 말은 첫째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제도 그 모양, 오늘도 그 모양, 내일도 그 모양, 늙기 전에도 그 모양, 늙은 뒤에도 그 모양, 죽은 뒤에도 그 모양, 여기 사바세계에 있을 때도 그렇고 극락세계 갔을 때도 그렇고 성불해 놓아도 그것이어서 안 변한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게 같다는 말이고 같다 하는 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게 또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뜻입니다. <여래> 이 두 글자에 불법의 뜻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하고 많은 글자 중에 이 두자를 갖다 놓았을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꾸 같아서 참말로 같다는 말이니, 이 <여>라는 건 물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요, 엄연한 진공도 아닌 이 말 듣는 그 자리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이것도 움직일 수 없는 건데, 이건 허공 보다도 더 없는 겁니다. 그런데 래(來)는 <올래>(來)자이니 온다는 뜻인데 변동을 할 수 없는 그게 어떻게 오고가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는 것 같으면 오고가고 하겠는데 없는 것이 오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 그러고 보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고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이러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그게 그런걸 주장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기도 하고 앖어지기도 하니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니 여기 온거다. 그러니 오고가는 자체가 있어서 여기에 오는 게 아니라 와도 온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이 <여>는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말이니 이 온다는 말이 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는 게 곧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오는 거라고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래는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다」하셨는데, <여래>(如來)란 <여>는 모든 법이 <여래>(如來)하다는 뜻이므로 부처님께서 성불하셨기 때문에 성불해서 오되 그 <여>가 왔지 온 걸로 온 게 아니다. 그래서 일체법이 다 그와 같다(諸法如意)고 한 것입니다. 곧 모두가 불생불멸한 존재라는 뜻이니 이것도 이 초도 불멸(不滅)이라는 것입니다. 초를 여기다 켜 놓으면 한 치 이상 탔지만 하나도 안 탔다는 것입니다. 이 초는 공장에서 만들기 전에 여기 벌써 서 있는 것이고 공장에서 만든 초가 온 게 아닙니다. 여기서 타는 것은 본래 있던 게 타고 있는 것이고 타도 타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장에서 초를 가지고 온 것 같지만 사실은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착각으로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법여의이며 이번 금강경 살림을 통해서 그런 것 쯤은 누구나 쉽게 알 게 됐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금강경을 이렇게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또 되풀이하고 이러는 데 따라 한국 불교가 바로 됩니다. 이것이 참 기도이고 부처님께서 춤을 추실 것입니다.

 

原 文 : 若有人言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解 義] 부처님께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를 얻었느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그 법은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망한 것도 아니니라.』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시방세계에다 공포하고 떠들었지만 설사 내가 그렇게 선전하지 안했더라도 내가 깨달았다는 것 때문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다 아신다. 사실 또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없는데 그렇지만 또 얻긴 얻었지만은 얻은 그게 실지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라」고 하셨으니, 없다 해 놓고 있다고 했다가 하여 이리저리 잡아 떼십니다. 「실도 없고 허도 없어서 참말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 했으니 얻었다는 말씀도 이상한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말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셨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긴 얻었는데 그 얻은 것이 내용으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무인무과(無因無果)이니 그러기 때문에 또 일체만법이 그대로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됩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아무 쓸데 없는 경이니, 그러기 때문에 누가 경을 밟으려고 하면 우리가 밟지 못하게 말립니다. 가만히 있으면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니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내 목숨이 죽었으면 죽었지 경전을 어무렇게나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불법이 즉비불법이니 시명불법(一切佛法 卽非佛法 是名佛法)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는 얻었는데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헛 것도 아니다.」 하는 말씀은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얻었다는 말이 참 심원(深遠)한 뜻이 들어 있어서 깊다면 한량 없이 깊은 것이고 얕다면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이 깊이가 없는 도리입니다. 그러니 발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이름만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니 그것은 정법(正法)도 아니고 사법(邪法)도 아닙니다. 여기 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다 가실 줄 압니다만, 그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한다.」한 이 말씀은 또 엉뚱한 말씀이고 생소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은 염주 알을 차례대로 쭉 꿰듯이 그 조리가 딱 들어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알아 듣는 사람은 틀림 없이 성불합니다. 이런 사람은 머리깍고 중이 되거나 농사하고 장사하는 신도로 있거나 성불 안 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49년 설법하신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됐는데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는 말은 세속의 법도 불법이고 출가의 법도 불법이라는 말이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불법이고 초도 불법이라는 뜻이며 또 불법이란 그 말은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 됩니다. 근본 마음자리가 불교라는 그건 한쪽 얘기는 다 됩니다. 물이 파도고 파도가 물이라 해서 우리 탐진치 번뇌망상이 직접 보리와 열반이라 그런 말이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 다른 것이 아니며(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현상계와 본체계(本體界)인 마음의 경계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다운 것도 허망한 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설사 중생들이 싸운다 하더라도 싸우고 싶은 마음을 내는 그 자리는 변동이 없으니 그러므로 이 자리에선 싸운다는 것이 불세계에서 싸운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자리 하나만 얘기하는 데는 통과가 되는데 일체법(一切法)이라고 할 때는 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부처가 되는 불법과 생사법과의 두 가지를 말해 왔습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다 읽고 성경 . 도덕경(道德經) 아무리 해 봐야 그것은 다 생사법이고 세속법이어서 생사 안에 있는 일일 뿐입니다. 과학이니 심리학이니 철학이니 다 생사법이지만 오직 그렇지 않은 것은 불법입니다. 팔만대장경 어디를 펼쳐 보든지 생사 밖에 일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들은 게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얘기이고 확실히 선도를 행하는 근본 . 실상(實相) 자리이고 아무 생각없는 이것이 모든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성인이 될 마음으로 발심해서 중이 되도록 수도해서 불쌍한 중생제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늙은 때나 젊은 때나 변하지 않는 이 자리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자성자리가 착한 마음을 내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해서 복을 받고 악한 생각을 내 가지고 악한 행동을 해서 고생을 하니 인과가 다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선할 때나 악할 때나 한 사람이 하지 두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건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악도 선도 아니니 아무것도 안 하는 가운데서 악은 안 하고 선만 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풍(家風)이니 이렇게 해서 복과 지혜를 닦아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악한 생각을 내어 극악하게 되면 서울 사람 다 때려 죽이는 그런 짓을 능히 하는데, 이런 생각이 다른 데서는 나올 곳이 없습니다. 육체에서도 나올 수도 없고 나만 알지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면 무었이냐?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실재이고 실상 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문제이고 말로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체법(一切法)이라는 것은 유정무정(有情無情)을 다 통해서 하는 소리인데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것은 다 공한 것이고 실재(實在), 곧 실상자리의 그림자라고 하지만 이 초 대 현상계의 근본 도리를 이대로 불법이락고 할 때에는 조금 아름해집니다. 이것도 온갖 생각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나>로부터 나왔고 실상자리인 여(如)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듯이 만법 이대로 다 불법이라는 도리도 설명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논법 역시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解 義] 부처님께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소언 일체법자(所言一切法者)는 일체법이라 하는 것은 즉비일체법(卽非一切法)이니, 곧 그것이 일체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걸 일체법이라 이름했다.』 하셨습니다.

「일체법이 불법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삼단논법이 딱딱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비유로 그 실례를 하나 들면, 사람 몸뚱이가 굉장히 커서 9척 장신만하다든지 백두산만하다든지 그렇게 몸뚱이가 큰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비유도 이상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보리존자의 대답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뚱이가 큰 것을 보고 크다고 설명하신 것은 곧 몸뚱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을 큰 몸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과 수보리존자가 물으시고 대답하시는 내용이 시비사정(是非事情)에 척척 잘 들어맞습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결국 따지고 보면 물질적 요소로 묘하게 만들어진 구성체(構成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적 현상은 본체를 캐어보면 아무것도 없는 공한 것이므로 그것을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실체(實體)를 보지 못하고 거짓 모습인 겉만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또 크다는 것은 작은 것에 비유해서 하는 소리고 작다는 것도 큰 것에 비유해서 하는 소리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설사 지구만하고 우주만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수보리존자는 여래께서 크다고 하신 말씀은 큰 몸이 아니라 이름을 크다고 하는 것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다 비유로 하신 말씀이고 실제로 크다는 뜻은 아닙니다.

 

原 文 :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 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解 義] 『수보리야! 보살이 또한 이와 같아서, 보살의 사상 . 내용 . 정신 가짐 곧 소주지처(所住之處)가 이와 같고 마음 항복하는 법이 이와 같아서 만일 어떤 보살이 「내가 마땅히 한량 없는 중생을 제도 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곧 보살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보살의 용심(用心)을 설명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사실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성취해야 보살이다 할 만한 내용이 없다. 이렇고 이런 것이 보살이다, 초견성(初見性)을 해야 보살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체득해야 보살이다 그러는데 어떤 내용이 마하반야바라밀이냐 하면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법에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 살림살이>도 없고 <오래 살려니 하는 생각>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느니라.』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解 義] 부처님께서 또 보살이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세계를 이루는 것도 없는 가운데 무심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은 말을 하기를,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다. 자꾸 공부를 하고 정진을 하고 보시하고 지계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서 내가 사는 세상이 모두 극락세계처럼 되고 천상국토가 되어 장엄되고 있다. 지옥을 가도 불세계요, 천당을 가도 불세계요, 오탁악세도 불세계요, 우리 중생의 사바세계가 모두 불세계다. 내가 중생일 때에는 모두 험악한 세상이 되고 모진 고통과 불평과 불안과 고독함만 느끼던 험한 세상이더니 이제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건 보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부처님께서 불국토를 장엄하신다는 말씀은 곧 장엄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엄하는 생각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無心)히 체득되어 있기 때문에 생사나 열반에 주하지 않고, 불법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생법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지 그걸 발견해야 할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심하기 때문에 없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꾸 업장이 녹아 없어지는 동시에 중생되기 전 미하기 전에 본래 있던 불세계가 자꾸 드러나는데 이것이 굉장한 장엄입니다. 굉장한 화장찰해(華藏刹海)의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으면 절대 그런 화장찰해의 불세계가 안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장엄한다는 게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는 그걸 가지고 장엄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장엄도 아닙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장엄이 되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解 義] 부처님께서 이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의 결론으로 <무아>(無我)를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나>없는 진리를 확실히 통달하면 그래서 「육체가 내가 아니로구나」하는 진리를 통달하면 그것이 참된 보살이니라.』하셨습니다.

온갖 지식이나 사상이 모두 망상이고 과학자니 철학자니 하는 사람들 정신 빠진 사람들이어서 뭐가뭔지 모르고 도깨비 얘기하고 글 써 놓은 것이니, 만일 그것을 내가 배웠다면 그래서 내가 대학에까지 졸업하고 석사 . 박사가 됐더라도 그것은 모두 가질 바 지식이 못되니 다 포기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일자무식인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걸 내가 옳게 배웠다고 남에게 얘기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식도 버리고 버릴 것 다 내 버려서 버릴 망상이 없어진 상태의 번뇌장(煩惱障)이 아닌 소지장(所知障)까지 다 버리고 나면 이런 거 딱 떼어 놓고 보니 정말 참 통달무아(通達無我)입니다. 진실한 마음자리 이것은 <나>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또 불법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무아법(無我法)인데 그러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참선도 하고 경전도 보고 염불도 하고 모두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통달무아하면 그게 정말 진실한 보살이다. 틀림 없이 성불해 가는 사람이다. 정말 내 제자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 없이 공연히 머리만 깍아 가지고 「중입니다.」하고 「신도입니다.」 그래봤자 정말 큰 일 납니다.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집니다. 머리를 깎지 않아 껍질까지 다 깎았더라도 큰일납니다.

 

 

[說 義]

 

▶ 부주열반 부주생사

「그 마음을 어떻게 두고 어떻게 가져야 하며 번뇌 망상을 어떻게 항복 받느냐?」(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하는 데 대해서 이론적으로 「내가 꼭 불법을 체득해야 하겠다. 확실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증득해야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결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묻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또 실제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초심보살(初心菩薩), 곧 견성한 입장에서 묻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는 도리를 여러 백번도 더 말했지만 이것은 생사에도 주하지 말고 열반에도 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말 진실하게 발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까딱하다가는 열반에 주하지 않으면 생사에 주하거나 두 군데 다 주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가 대아라한(大阿羅漢)이니 욕심을 떠난 아라한 가운데 제일 가는 이욕아라한(離欲阿羅漢)이라」고 하셨듯이 수보리존자는 이미 팔만사천대겁(八萬四千大劫)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일초 동안에 지나간 것처럼 잠깐 지낼 수 있는 공부가 된 분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는 열반에 들어가 있지만 나는 나한이라는 생각도 없고 이런 걸 증득했다는 생각도 없고 생각 없다는 것도 없고 그런 줄 알고 앉아 있는데 그렇게 된 수보리를 지금 아상 . 인상 . 중생상이 있다는 걸로 부처님께서 몰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보고 저렇게도 말해 보고 갖은 짓을 다해 가지고 수보리가 알아챘습니다. 이제는 생사열반에 주하지 않고 그리고 나한들처럼 중생제도 집어치우고 염세주의자로 앉아 있지 않고 이제는 보살행을 해야 하겠으니 세상에 나와 보시도 하고 계행까지도 낱낱이 잘 지켜서 여자를 대하여서도 아무 생각이 없이 지킬 수 있는 분이 된 것입니다. 나한만 되면 일체 생각이 뚝 끊어지지만 이 현상계 생사고해에는 안 나가려고하여 열반에 애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진짜 열반이 아니다. 진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도 아니고 생사도 아니고 부주열반 부주생사(不住涅槃 不住生死)하는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게 어떤 것이냐, 한 생각도 없는 열반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망상 번뇌에도 머물지 않고 그러면 그런 보살의 주체가 어떤 것이냐? 그것은 지금 자꾸 따지고 캐내려는 게 그겁니다.

일체 중생이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중생이고 또 일체 부처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고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고 이러는 것이 지금 열반에도 주하지 않고 생사에도 주하지 않는 그걸 알아차리도록 하느라고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다.」 하는 말이 여기저기 도 주하지 않고 지도한다는 그 말인데 이 말이 어디로 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 자셔야 자신거죠

생각으로 아무리 생각해 봤자 될만큼 되고는 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러니저러니 망상 내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해라. 망하든지 흥하든지 집착할 것 없이 농사짓게 되거던 농사짓고 장사하게 되거던 장사해야 합니다. 흉년이 들던지 풍부하게 되려는지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볏단 거두어 놓고도 그렇고 타작 다 해서 곳간에 들여 놔도 그런줄 알고 하면 아무렇게 해도 안심이 되는 겁니다.

여기 인과를 믿는 기이한 얘기가 있습니다. 스님이 상좌를 하나 뒀는데 이 상좌가 꼭 스님에게 어겨서 반대로 말을 합니다. 무슨 뜻이 있는 말인데도 그렇게 합니다. 봄에 산 한쪽에 밭을 일구어 가지고 모밀을 갈았는데 그것을 갈아 놓고 와서는 「야, 야, 금년 가을에는 모밀은 실컷 먹겠다.」 그러면 그 상좌는 「자셔야 자신거죠.」하고 빗대서 대답합니다. 「네, 그렇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마음이 편할 건데 이것도 수양이 덜 돼서 그런 겁니다. 「저놈이 꼭 내가 말을 하면 긍정을 안하고 반대로만 하고 고약한 놈이다.」 속을 썩입니다.

그 뒤에 모밀이 꽤 커서 김 매고 거름을 뿌려 주고 나서 「이만큼 잘 됐으니까 가을엔 꼭 먹는가 보다.」 이러니까 이놈이 또 「암만 해도 자셔야 자신겁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은 옳아서 나무랄 수도 없고 속으로만 꽁해 가지고 그럭저럭 모밀이 다 익어서 다 베어가지고 와서 타작해 가지고 마당에 널어 놓고는 두들기면서 스승이 하는 소립니다. 「인제 내년까지는 잘 먹겠다.」 「암만 그러셔도 자셔야 자신거지요.」 그 말은 그렇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어른 대접을 하여야 할텐데 속이 상해서 빨리 말려 가지고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는 「오늘 저녁은 많이 먹어 놨구나.」하니 상좌가 또 「암만 그러셔도 자셔야 자신 겁니다.」 반죽을 하고 물을 뿌려 가며 연방 누루면서 「참 오늘 저녁에 냉면 한 그릇 잘 먹겠구나.」 「암만 그려서도 자셔야 자신 거지요.」 그래서 이놈 봐라 두고 보자 하고는 냉면을 실제로 좋은 동치미국에다 말아 놓고는 「너도 냉면 먹고 나도 이렇게 참 냉면 한 번 잘 먹는 게 아니겠느냐?」하니 역시 「그래도 자셔야 자」 거지요.」 그래서 냉면 그릇을 밀뜨리면서, 「이놈의 자식 어른을 놀리느냐?」 그러니까 「보십시오 자셔야 자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 말이 옳은 겁니다. 세상에 믿을 게 하나도 없는거지요, 그게 스님이 아이한테 딸리는 겁니다. 인격적으로 모자라고, 하는 것도 딸리고 생각도 딸리고 아이가 웃을 일입니다. 스님도 그런 줄 알고 말이 옳은 줄은 첫마디부터 알긴 알지만 내가 어른이라는 그런 <아상>이 있어서 그 <아상> 때문에 그러다 결국은 그만 국수를 못 먹었습니다. 「아 ! 거 네말이 옳구나.」 그랬으면 마음이 편히 지냈을 건대 서로 안 지려는 <아상> 때문에 둘이 똑같긴 같습니다. 나중에는 생기든지 말든지 사발이 깨질 때 깨지더라도 농사를 또 부지런히 지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누가 먹더라도 그것도 먹는거니 아무 생각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누가 먹도라도 그것도 먹는거니 아무 생각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장사를 하고 오고가는 데도 난리가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남이 뛰면 나도 뛰어서 피난간다고 가도 그게 죽으러 가는 건지 어떻게 압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갑니다. 중국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집 외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산에 들에 놀러 다니다가 좋은 천리마(千里馬)를 얻어서 기뻐하니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한테 와서 좋은 경사(慶事)라고 치하를 하러왔습니다. 그러니 그 영감도 「먹어야 먹는 거라」 는 사미 모양으로 「어찌 그게 화근(禍根)이 아닌 줄 알겠느냐」 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모두 인사 간 사람들이 싱거워졌습니다. 수천 냥짜리 좋은 말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타고 밤이고 낮이고 만날 좋다고 돌아다니다가 나무에 걸려 떨어져 가지고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동네 사람들이 「그 영감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다리가 부러질 것을 미리 알고 대답한 것 같았다.」 고 하면서 모두들 가서 「참 안 됐습니다.」 하며 위로하니까 그 영감 말이 「그것을 어찌 복의 근본이 아닌 줄 알 수가 있겠느냐?」 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 놈의 영감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말은 어찌 저렇게 하느냐고 투덜거리며 모두 돌아갑니다. 그 뒤에 난리가 나서 젊은 사람은 다 군대에 불려 나가는데 그 아들은 군대를 안 갔습니다. 이때는 다리가 부러진 게 덕이 됐습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때그때 어떻게 됐다고 해서 그게 아주 망하는 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거고, 지금 한참 잘된 것이 나중에는 큰 화근이 되어 백 년 살 것을 십년도 못 살고 죽는 일이 생겨 날지도 모르는 겁니다. 좋은 일이 아무리 생겨도 그것을 좋다고 생각 안 하고 아무리 지금 불행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도 나중에 복 받을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오히려 조작이 붙은 속입니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 도대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 무소주(無所住)입니다.

 

▶ 현실은 마음의 그림자

옛날 공자나 맹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장자 남화경(南華經)이나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많이 보든지 하면 마음이 벗어납니다. 이 인간 세상살이에 꽁꽁 얽매여서 그만 장아치로 사는 게 중생인데 이것을 털고 세상을 훨훨 살아 보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람이 일을 거칠게 하느냐 하면 안 그럽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일을 야무지게 합니다. 몸을 아끼지 않으니까 종일 일해도 피곤을 모르기 때문에 훨씬 잘 합니다. 또 억세다 하더라도 이제 무심한 사람처럼 억센 사람이 없습니다. 무심해야 이렇게 끝까지 나오는 기운이있지 무심치 못하고 무슨 조건이 붙어 가지고 있는 사람 같으면 그렇게 최후까지 큰 힘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무심한 사람이 되면 그 마음이 무한 동력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명대사(四溟大師)께서 처음으로 승려의용군(僧侶義勇軍) 육천명을 데리고 수십만 왜군을 평양서 부산까지 밀었습니다. 일본사람 가등청정(加藤淸正)이고 누구고 만나는 대로 칼을 다 빼 놓고 갑니다. 그런 이는 다 마음을 깨친 높은 도인이니까 생각하는대로 제대로 됐지만 대중 범부는 이런 금강경 법문을 듣고서 마음을 쉬어 버리면 훨씬 편해집니다. 조그마한 생각들 그 개미 생각, 개미 발톱 같은 생각, 오냐오냐 만날 해봐야 뭐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밤낮 해 봐야 나한테 돌아오는 것은 밥 세 그릇 뿐이지 아무 딴 것이 없습니다. 밥 세 그릇 옷 한 벌 밖에 아무것도 더 되는 것도 없는데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이 괜히 동네 사람이 다 굶어 죽어도 밥 한 그릇 안 내 놓으려 하고 거기에 애착이 돼 가지고 행여나 죽을까 싶어 그러니, 이렇게 사람이 궁색하게 비열하게 살 게 뭐 있습니까? 여기 중들이 걸망 하나 지고 돈 없이 다니는 그런 사람을 운수객(雲水客)이라 하는데, 구름 같고 물같은 손님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절도 내 집이 아니라 잠깐 여기 와서 공부하고 가는 곳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옆에 도반(道伴)이 감기 몸살을 앓든지 중병을 앓든지 하여 한달 두달 앓고 이러면 우리가 전부 약을 끓이고 혹시 어떻게 쓰려고 감추었던 돈 십원 . 백원 비상금을 모아서 한쪽에다 놓아 둡니다. 그래서 밤중이라도 약 지으러 가고 그래서 구원하게 됩니다. 약 지어 오면 내가 다리겠다고 제일 잘 다린다고 이러면서 하나같이 그럽니다. 그래 복 짓는 거고 내가 하심(下心)하는 것도 지혜를 닦는 거고 모두 이런 것입니다.

그래도 돈이 누구보다도 많은 건 누구인지 대중이 다 아는데 탐심이 많은 사람은 십원 한 장 없다고 안 내 놓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병이 들든지 그래도 남이 도울 수 없는 그런 장소에 가서 앓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비쳐 가지고 대중은 아무도 도와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옷도 한 두서너 벌 있으면 없는 사람과 나누어 입고 그런 사람은 아무데 나가서도 의식주 걱정이 안 됩니다. 또 서로가 그래집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 가운데서 인색하여 양말 한 켤레라도 떨어진거 꼭꼭 집어 넣어 쌓아 놓습니다. 당초 남한테 보이지도 않게 돌아앉아 일하고 남을 도울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은 평생 남의 덕을 못 봅니다. 인과는 틀림없이 그림자와 한가지입니다. 꼿꼿한 놈은 그림자도 꼿꼿하고 굽은 놈은 그림자도 굽듯이 꼭 그럽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어떤 귀부인들 스물 다섯명이 있었는데 인도 사람처럼 새까만 깜둥이고 눈도 코도 없고 무슨 흙으로 뭉쳐 놓은 것같이 이상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이 하나도 들리지 않고 거룩하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아 그게 인과가 있다. 과거에 저희들이 창녀들인데 그때 마침 어떤 나한이 바리때를 들고 다니는 길에 밥을 얻으러 그 집을 들르게 되었느니라. 그러니 창녀들이 되어 놓으니 남성 만났다고 놀리는데 얼굴이 못생겼다, 떨어진 누더기에다 거지처럼 꾸몄다, 아이고 얼굴도 못났지만 저렇게도 못났느냐 하며 온갖 흉을 다 봤습니다. 눈도 눈같지 않고 코도 코같지 않다고 하면서 갖은 욕을 다 했다. 그러다가 밥을 좀 달라고 그러니깐 복 지으려는 마음으로 공양은 서로 많이 줘서 바리때로 하나 가득 담아 올렸는데, 그러니 이 노장이 바리때를 들고 시방 삼보에 공양을 하고는 그 창녀들을 위해서 ‘오늘 나를 위해 공양한 인연으로 해서 죄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고서 마당 한 가운데서 바리때를 들고 공중으로 날라서 부처님 처소에 간 일이 있다. 창녀들이 그만 그 자리에서 놀래가지고 우리가 성인에게 잘못 했다고 하며 마당에 내려가서 무수히 배례를 하고 참회를 했다. ‘이제 그 과보(果報)로 한량 없는 지옥고(地獄苦)를 받은 뒤 그 나한 마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제가 죄짓고 자기발로 지옥에 들어가서 그 고생을 했고 아귀(餓鬼)가 되고 축생이 되어 돌아다니며 고생하다가 그래도 그때 참회를 하고 또 예배를 드리고 또 밥을 많이 올렸으므로 여럿이 나누어 먹었는데, 그 공덕으로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났고 참회한 공덕과 또 밥을 많이 시주한 공덕으로 이제 저 사람들이 부자로 사는 것이며 그때 나한을 비방했기 때문에 평생에도 내 얼굴울 보지 못한 것이다.』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던 대중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저 중생을 위해서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있다, 그때 그 나한이 대승불교를 해 가지고 보살이 되었으니 그때 나한으로 있던 그 이름을 부르고 백일기도를 하라. 그러면 나의 장륙금신(丈六金身)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이 참회를 하고서 곧 백일기도를 충실히 했더니, 기도 마치는 날 밤 꿈에 좋은 상서가 보이고 그 이튿날부터 부처님의 거룩한 얼굴을 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생의 죄업이 녹아서 마음의 나쁜 그림자가 사라져서 그렇다는 것인데, 이런 얘기가 마음을 항복 받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일체가 오로지 꿈

인생은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입니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 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입니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 입니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거지 성불 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입니다. 정말 실상(實相)자리에서 보면 본래 제대로 돼 있으니 누가 꿈꿀 사람도 없습니다. 조신대사가 눈 깜빡하는 사이에 눈 뻔히 뜨고 잠도 아니고 정신이 희미해진 것도 아니고 부처님 법을 배우려는 이 생각 그대로 팔십이 돼 버린 것입니다. 이건 깜빡 잠자는 순간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사실로 꿈에서 한 일이니 거짓말이고 헛일입니다. 그러므로 또 일초 동안에 꿈을 꾸어서 그 일초 동안에 했다는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했다는 것도 엮시 그런 내용이고 나중에 아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확실히 체득해서 부처가 됐다는 것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몽중지사(夢中之事)입니다.

그런데 몽중가외몽중몽(夢中可畏夢中夢)이라, 꿈 가운데 겁낼만한 꿈은 꿈 속에서 또 꿈꾸는 일입니다. 홋꿈도 겨운 일인데 꿈속에 또 한 겹 더 들어가서 또 꿈을 꾸니 언제 생사를 면할는지 그것 참 큰일 날 일입니다. 몽중막작몽중몽(夢中莫作夢中夢)하소. 꿈 가운데서 또 꿈울 꾸는 것은 아예 하지마소. 헛 꿈이나 꾸라는 것입니다. 일초에 일초돈파생사몽(一超頓破生死夢)하면 하루 아침에 몽땅 생사대몽(生死大夢)을 탁 부수고 나면 산하진처역무몽(山河盡處亦無夢)이라 산하대지 없어진 곳에 또한 꿈도 없어졌다. 전부 꿈만 가지고 마음 깨치는 글을 지은 시인데, 우리가 돌아다니는 이 현실이 모두 그런 형편이란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어떤 결정된 모양을 갖고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할 뭐가 있느냐?」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다 됐다고 하시지만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은 이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저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립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존재이고 제망중중(帝網重重)의 존재이고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완전합니다.

돌이 되고 바윗덩이가 되어 가지고 길 가에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돌이 아닙니다. 또 돌 중에도 완전한 돌이고, 바위 그대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그런데도 두들겨 부셔서 가루로 만들어 봐도 돌 가루지 그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망중중도 없고 그것도 하나의 신통(神通)입니다. 이미 중생이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있고 부처님도 역시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와 같이 아무리 나무를 쪼개 봐도 오동나무는 오동나무고 감나무는 감나무지 오동나무 속에 감나무 성질이 안들어 있고 돌은 돌이고 나무는 나무입니다. 우리 중생과 똑 같이 신통을 부립니다. 그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그게 단불(單佛)이냐 하면 단불이 아니고 제망중중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체가 곧 하나로만 보이고 하나가 일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 결정할 수 없는 법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또는 어떤 모양을 쳐들어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법이다 진리다.」 그렇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된 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결정된 법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말면 또 그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즉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러한 실재이고 실상자리입니다.

범부가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는데 그것을 얻어서 내가 성불해야겠구나, 견성해야 겠구나.」하는 이런 이론을 확실히 믿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런 생각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론을 의지해서 그런 개념을 얻어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으니 성불할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견성을 할 수 있고 참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시 성불하는 마음이지 딴 마음은 아닙니다. 도둑질 하는 마음도 아니고 협잡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성불하려는 마음이니까 그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닌 것도 아니고 범부로서 마음을 낼 수도 있는 겁니다. 또 그래 가지고 견성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것이 또 한쪽 견성(見性)이지만 보살초심(菩薩初心)까지 이룰 수 있겠다 생각하고 애를 쓰고 그렇게 견성을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떤 내용이냐 하고 정면으로 따져 들려면 또 범부가 처음에 이론으로 발심한 것도 딱 맞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그 발심을 가지고 근기(根氣)가 약해서 참선하다가는 미쳐 나가는 수도 있습니다. 뭐 어디 조그만 이상한 게 보이면 「아 이제 다 된 게 아니냐?」 이래가지고 방향없이 덤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 근사하게 발심을 가졌지만 그게 도깨비도 되고 미친 놈도 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견성한다.」 그렇게도 못 믿어 집니다. 이를테면 배우기는 똑같은 선생한테 똑 같이 배워가지고 열이 앉아서 참선 한다고 하더라도 열이면 열이 다 같이 옳게 견성을 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이면 아홉은 견성을 하고 하나는 잘 못 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다음 생에 어느때인가는 잘 못된 그 한사람도 견성해서 성불하는 날이 있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 법이 꼭 결정된 법이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금생에 성불해야 할 것이며 만의 하나라도 낙오자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기에도 달려있고 또 발심을 부족하게 한 데도 달려 있어서 그런 것도 알아야 합니다.

 

▶ 무실 무허(無實無虛)

이 금강경 三十二分의 말씀이 비슷비슷하여 같은 말씀 같은데 자세히 보면 약간씩 다릅니다. 약간 다른 게 아니고 많이 다르지만 나중에 결론을 맞춰 보면 똑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한소리를 되풀이 하지만 거기 있는 말의 조리가 각각 달라서 마치 서울역에서 하는 안내와 대구역에서 안내하는 말소리와 평양역에서 하는 안내소리가 조금씩 다르듯이 경문의 소리도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때는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있느냐?』고 물으시면 수보리 존자께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일이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런 법도 없고 사실 얻은 일도 없으십니다.』하고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사실 얻긴 얻었지만 그 얻은 법이 그건 무실무허(無實無虛)해서 실다운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부처님께선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조리는 결국 따지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게 어떤 걸 꼭 꼬집어서 「요것이다」 할 수도 없고 또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며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것을 몽뚱그려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렇게 말할 수도 없으며 또 「그것도 저것도 전부 아니다.」 그렇게 해도 안 맞고 이래도 안 맞고 저래도 안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물질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변동조화가 있는 무상의 존재일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변동하는 어느 한 모퉁이를 집어서 이거다 저거다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치 꿈을 깨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 허망이지만 꿈을 깨기 전엔 확실히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꿈을 꾸고 있을 때 꿈 가운데 있는 그게 참으로 있는 거냐 하면 그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닙니다. 꿈속에서도 전혀 허무한 것은 아니어서 사실 배가 부르면 배가 뿌듯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말로 진실한 불변의 존재냐 하면 또 그런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그런데 꿈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천지만물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무실무허한 것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시는 것은 범부가 「이 마음자리, 말하는 이것은 불생불멸의 존재구나 하는 원리를 의지해서 그걸 한 번 깨달아 봐야겠다.」고 확실히 인식이 돼서 하나서부터 열까지 목숨을 걸고 할 일이 이것뿐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작정이 되면 이것은 범부의 발심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정진해서 계행을 지키고 만행(萬行)을 닦아 점점 깊어져서 아공 . 법공 . 구공을 초월해서 뭐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르면 그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럽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나중에 일여(一如)하게 되어 구공의 일심을 체득했다고 해서 불법이 여기까지만 되고 말았다면 그건 소승불교 밖에 안 됩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외도(外道)까지라도 이 적멸(寂滅)하는 정도가 얕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도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지고 모양도 끊어지고 일체 것이 다 끊어진 그 속에 들어가 놓으면 팔만 사천 외도가 서로 모여 살며 너나 내가 똑 같다 하고 그 때는 다 실력행사합니다. 그렇지만 정도(正道) 앞에 사도가 꼼짝 못하는 것은 외도는 공을 얻어도 상대적인 내용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서 정도의 정력(定力)에는 비교되지 못합니다. 정도의 정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까지 떨어져서 그 신통이 비교도 안 되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마왕파순(魔王波旬)이 백만억 마구니 권속을 데리고 와서 온갖 짓을 다 해도 부처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요히 앉아 계셨는데, 마왕의 하는 꼴이 하도 안타까와서 부처님께서 마왕 파순에게 「네가 아무리 그래봐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네 신통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한 번 시험해 볼테니 네가 날 이기면 내가 너한테 항복하고 법문도 안 하고 그냥 내가 열반하마.」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물 떠 자시는 물병 같은 빈 수통을 촛대처럼 세워 놓으시고는 「너 혼자 하든지, 네 권속을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또 삼천대천세계 중생을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네 재주로 시방제불을 다 모시고 올 수 있으면 일체 부처님 보살님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이 통을 한 번 넘겨뜨려 보아라.」 마왕은 「뭐 그것쯤이야 가만히 앉아서 넘어가라 하면 넘어갈 텐데.」 생각하고는, 자기 신통을 다 발휘했지만, 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쇠줄 같은 것을 걸어가지고 마귀 권속을 다 데리고 와서 소 . 말 몰 듯이 채찍질해서 수억만명이 끌어도 끄덕도 안합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선 아무 생각도 없는 적멸을 증득했기 때문에 적멸 속에 들었을 그때에 어떤 생각을 해서 이것을 안 넘어 가게 한다든지 한 번 정해 놓으면 마음 전체, 우주 전체의 힘이 그렇게 하나가 되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부처님께서 한 번 마음에 정하면 시방제불(十方諸佛)이 다 와서 같이 힘을 합해서 하는 것과 같이 됩니다. 이것이 제망중중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든지 듣던지 하는 것이 온갖 망상의 틈바구니에서 요것도 하나 해보자 하는 일부의 쪼각 힘이므로 그것은 망상의 힘일 뿐입니다. 와도 이 병은 안 넘어 갑니다. 그러니 마왕 파순은 할 수 없이 필경에는 항복을 하고 맙나다.

우리 육체의 힘도 실제로 알고 보면 참는 데서 나옵니다. 금생에 많이 참으면 내생에는 아주 장사가 됩니다.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있다가 죽을 시간이 되면 앓지도 않고 돌아앉아 죽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정력을 얻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었다 하는 것은 즉시비득 곧 얻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所謂得法卽是非得).

 

▶ 일체 유심(一切唯心)

단유언설도무실(但有言說都無實)이란 말로만 있지 실제는 그런 일이 없다. 도무지 실다운 뜻이 없다는 뜻입니다. 연기법칙(緣起法則) 상대성 원리로 보아도 그렇게 됩니다. 많다고 하면 벌써 부분입니다. 정말 마지막 말로 전체를 많다고 하더라도 그건 하나뿐이니까 많은 것도 아니고 사실 또 하나도 아닙니다. 더구나 많다 적다는 안 됩니다. 벌써 많다고 할 때는 적은 것, 많지 않은 것을 이미 상대하고 있으므로 그건 전체에서 그만한 부분을 빼고 하는 말이므로 그것은 전체에 비하면 적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작다고 하는 그것이 작은 것도 아니고 작다 했으니까 그건 크다는 말도 되고 또 작지도 않다는 말도 되고 그런게 아니란 말도 되고 그럽니다. 그것은 다 환(幻)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선 꿈 밖에서 꿈을 깨어 가지고 「그대로 전체가 꿈 아니라」고 하신 그게 바로 무실무허(無實無虛)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말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환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망하다 실답다 하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것도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다가도 그 경지에 들어서 놓으면 참다운 것도 있고 허망한 것도 있고 그렇게도 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어진 그 경지는 시간을 여의어 일체 생각이 다 끊어진 때고 무분별지(無分別智) 본래의 실상자리인데 그러면서 거기서 내내 중생살림살이와 똑같고 하지만 보고 듣고하는 마음을 지어서 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무위(無爲) 무심으로 하는 겁니다. 그 경지에 가면 부처님 살림살이일 뿐이고 마음 하나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러는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一切唯心)이라 지을 조(造)자 하나를 빼 버려야 알기 쉽습니다. 「오직 마음 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그런 뜻이 됩니다.

주관이 곧 객관이고 거리가 없습니다. 거울 가운데 동서남북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빛으로 그림자로 거울 면에 나타난 것이지 거울을 뚫고 들어가서 동서남북 상하 중간이 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전체 그대로가 거리가 없는 거고 실제로 멀어 거리가 있으면서 또 그대로 없는 거고 그대로 전체가 마음이고 그러니 일체법이 개시불법(一切法皆是佛法)이고 무실무허(無實無虛)한 지경까지 하나가 되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주관 . 객관의 관념이 없어져서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없어지면 구공(俱空)인데 그래도 구공됐다는 잠재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공의 도리가 하나로 쉽게 활용되지 않다가 점점 닦아서 수치(修治)돼 들어가면, 참 그야말로 미세한 습기(濕氣)까지 전자가 움직이고 에네르기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미세한 폭으로 움직이는 그 <습기>까지 마음에서 다 끊어지면 그때는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체를 뭉뚱그려 한덩어리로 만들어 놓는 거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제망중중(帝網重重)의 도리로 그 가운데는 모래도 있고 흙도 돌도 있지마는 모래 한 알 그게 또 우주 . 인생 전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큰 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 먼지 한알이 그와 같아서 그 가운데 어떤 거 하나를 들추어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전제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면서 또 차별이 있고 고금이 있고 동서가 있습니다. 또 그대로가 없는 것이어서 고금이 아니고 현상이 아니고 모두가 아닙니다. 이 촛대가 모두 이렇게 섰는데 우주전체가 모두 이 촛대 선 자리에 같이 서 있습니다. 그 거리가 있는 게 아니고 이 촛대가 선 곳이 내내 모든 것이 선 자리이고 저기 선 것이 여기 입니다. 이와 같이 포개 있는 거리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불가사의한 신통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과학적 . 철학적 . 종교적으로 따져 가지고 그 실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도 끝이 안 납니다. 자기 실상 . 마음자리만 깨쳐 버리면 그게 참 진공묘유(眞空妙有)이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중생처럼 중생이 본 그런 자리 한바탕 있고 또 그러면서 원융무애한 그대로의 소식으로 제망중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란하냐 하면 조금도 그런 것이 없고 또 질서정연하냐 하면 또 거리가 없으니까 질서정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란 소리가 일체가 다 불법이란 소리와 한가지이니 일체법이 다 불법이고, 일체법이 다 불법이란 소리가 일체가 다 마음이라는 뜻이고 마음이 부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변해서 제망중중으로 이 초 하나에 한량없는 백성이 들어가 있는 그것이 한 번에 봐도 낱낱이 따로따로 보입니다.

오색물감을 물에 떨어뜨려 놓으면 그 빛이 무슨 물감인지 우리가 이름지을 수가 없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걸 낱낱이 보십니다. 또 부처님은 만고에 불변하는 중생의 근본불성도 보시고 중생의 이런저런 용심도 보시고 다 보십니다. 마음을 깨닫고 보면 제 자체가 그러는 게 아니고 전부 우리 관념이고 생각이며 우리 마음이 모두 그런 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얻은 게 아니라 실제로 얻은 게 아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됐다.‘ 그 말인데, 또 됐다 하는 것은 마치 무슨 작품을 만들 듯 새로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본래 그대로 부처였다는데 쓸데 없는 딴 생각을 한 번 냈던 것을 놓아 버리니까 제자리로 됐다, 본래 그렇더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그런 일체법이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것을 일체법이라 한다.”고 하신 것이니, 경전 다르고 촛대 다르고 접시 다르고 책상 다르고 그런 게 아니라 그건 모두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일체가 다 아니니까 하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또 그걸 이름해서 일체라 한다는 것입니다.

 

▶ 환으로 크고 환으로 작다

사람 몸뚱이가 크다는 말은 안 크다는 말이니 크다고 할 때는 벌써 작은 걸 상대로 해서 작은 걸 떼어 놓은 큰 것이므로 참말로 큰 것은 아닙니다. 또 사실로 현상은 환으로 있는 것이므로 정말 크거나 정말 작거나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그만 종지 속에 독을 집어 넣어도 종지가 넓어지지도 않고 독은 줄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독이 참말로 크냐 하면 환으로 큰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종지가 작은 게 아니라 작은 것같이 보이는 환이니까 정말로 큰 게 아닌 독이 정말로 작은 게 아닌 종지 속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고, 안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못 들어갈 수도 없는 겁니다. 또 종지가 깨지거나 터지면 터졌지 독을 그 안에 집어 넣을 수 없는 법도 있고 도대체가 모두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의 짓입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놓고 보니 크다 하면 벌써 큰 게 아니고 크다 할 수 있는 건 어떤 존재적 한계가 있는 것이므로 설사 우주 전체라 해도 우주 전체가 아닌 것을 상대로 전제한 관념이고 모자라는 것 제외해 놓고 크다는 뜻이며, 그러니 그건 정말로 큰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큰 것은 전체하나뿐일 때는 크다고 이름지을 수도 없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크다 하면 벌써 크지 않다는 말이고 전체도 아니란 말이고 또 실제가 환으로 된 것입니다.

손바닥만한 거울을 가지고 서울을 비치면 동서남북으로 이십리 이상되는 큰 서울이 입체적으로 다 들여다 보입니다.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손바닥만한 거울 안으로 서울이 들어가면 큰 빌딩이 깨알보다도 작게 축소해서 보여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손바닥만한 거울 안에 몇 억만배나 되는 서울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 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구애 없이 들어갑니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40년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익혀서 공의 원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현상계의 모든 존재가 다 환으로 있다는 진리를 부처님 다음으로 잘 아시는 수보리존자이므로 그 진리를 한 마디에 다 알아들으시고 몸이 큰 것은 큰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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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淨業障分 第十六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受持讀誦此經(수지독송차경)하야 若爲人輕賤(약위인경천)이면 是人(시인)이 先世罪業(선세죄업)으로 應墮惡道(응타악도)언마는 以今世人(이금세인)이 輕賤故(경천고)로 先世罪業(선세죄업)이 卽爲消滅(즉위소멸)하고 當得阿?多羅三?三菩提(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리라 須菩提(수보리)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하니 於然燈佛前(어연등불전)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하야 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하야 無空過者(무공과자)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能受持讀誦此經(능수지독송차경)하면 所得功德(소득공덕)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어아소공양제불공덕)으로 百分不及一(백분불급일)이며 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천만억분내지산수비유)로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有受持讀誦此經(유수지독송차경)하야 所得功德(소득공덕)을 我若具說者(아약구설자)댄 或有人聞(혹유인문)하고 心卽狂亂(심즉광란)하야 狐疑不信(호의불신)하리니 須菩提(수보리)야 當知是經(당지시경)은 義不可思議(의불가사의)며 果報(과보)도 亦不可思議(역불가사의)니라

 

『또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선세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천히 여김으로써 선세의 죄업이 곧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생각하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겁 전에 저 연등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나유타 수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그냥 지나쳐 버린 적이 없었느니라.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그 공덕은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 내지 어떤 수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어 독송하는 이가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 여우처럼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그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그 과보 또한 가히 생각할 수 없느니라.』

 

 

第十六 能淨業障分--업장을 밝힘

 

[科 解]

 

이 대문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으로 능히 지난 세상에 지어온 많은 죄업이 깨끗이 소멸된다는 뜻을 밝힌 대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남의 천대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남의 천대를 받는 일이 있게 되는가. 그것은 다 깊은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니 곧 그 사람이 지난 세상에 지은 죄업으로 장차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금강경을 읽어 외운 인연 공덕으로 그 무거운 죄업이 소멸되어 이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 받는 과보로써 그 지옥 죄과를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업을 가볍게 받는다고 하여 이것을 중업경수(重業輕受)라고 그럽니다.

왜 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운 공덕이 그처럼 신비로운가. 금강경은 모든 부처님의 최상승(最上乘)으로서 <나라는 생각>·<사람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조차 초월하여 주관적으로 나라는 관념이 텅 비고 객관적으로 법(진리)이라는 생각도 공하고 주관 객관이 다 공한 절대의 경계를 설한 경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경이 이러한 위대한 신력을 지닌 경전이므로 이 경을 모셔 둔 곳에는 부처님의 큰 제자나 부처님의 사리탑을 모신 것과 같다고 하였고, 이러한 위신력을 지닌 경이므로 능히 지옥에 떨어질 죄를 지었더라도 이 세상에서 사람의 천대를 받는 과보로써 대신한다고 하셨는 바 이것이 능히 업장을 맑힌다는 대문의 대의입니다.

 

原 文 : 復次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또한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도 하고 또한 남을 위해 해설도 잘 해 주는 어떤 사람이 남한테 천대를 받는 수가 있으니, 이 경전을 아수라 . 인간 . 천상 사람이 모두 호위를 하고 공경을 한다는데 도리어 역효(逆效)가 난다면 이것은 어찌된 것인가. 그것은 이 사람이 과거의 선세, 저 전생의 전생으로부터 지어 온 한량없는 죄업 때문에 삼악도(三惡道)에 저 깊은 지옥으로 갈 사람이니 이 몸뚱이가 죽고 나면 당장 그대로 곧 삼악도로 갈 것인데 이 경전을 읽는 공덕으로 해서, 인간 세상에서 천대를 받는 그걸로 해서 지옥으로 갈 죄를 면해 버리게 되느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는데 그 길로부터 금강경을 알고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금강경의 지취가 어디로 간다 하는 것, 곧 마음 씀씀이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벌써 짐작을 하게 되므로 결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게 되는 원인이 되느니라.』는 뜻이 됩니다.

법화경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아이나 어른이나 그저 남녀 노소간에 만나기만 하면 합장을 하고 절을 공손히 하고 「내가 당신 업신여기고 천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중생 그대로 부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대해서 어떻게 공손하지 않고 업신여기거나 천대를 하겠습니까?」 그럽니다. 사실 일체 중생이 즉비중생이니 시명중생(一切衆生 卽非衆生 是名衆生)입니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면서 부처란 말로 되어 있고 육체가 이대로 모두 다 환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사실 있는 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뜻도 있고 시명중생(是名衆生)이라 하면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중생이고 그런 굉장한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불경보살이 그렇게 하는데, 그 따위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도 또 하고 하니 이번엔 이 놈 매나 맞아라, 나중에 그런 소리 또 하면 때려죽인다고 하고 차고 밟고 그럽니다. 안 맞으려고 쫓겨 도망가고 또 따라오면 멀찍이 달아나서 서 가지고 안 따라오면 다시 합니다. 「내가 당신네들 공경합니다.」 이렇게 자꾸 합니다. 그럴수록 듣기 싫다고 매를 무수히 맞았습니다. 이 보살도 일종의 경천보(輕淺報)를 받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이 금강경을 읽어서 그 죄가 가벼워져서 경천보를 받는 것은 금강경을 읽어 복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원체 많은 사람은 금강경을 읽고 천대를 받는 것으로 면하는데 그 경천보를 받는 종류가 가지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일수록 내가 전생의 업이 무거운 것을 이제 경전보로 대신하는가보다 하며 조금이라도 해태해지면 신심이 부족하거나 정신이 모자라서 그런 줄로 알고 더욱 더 자꾸 읽어야 할 텐데,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금강경 덕을 못 봤다고 해서 그 경전 다 거짓말이라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섭섭해 하고 신심을 안 냅니다. 이런 사람은 금강경을 잘못 배운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我念過去 無量阿僧祗劫 於然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 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解 義] 『수보리야! 내가 또 생각해 보니 저 과거 무량 아승지겁 전에 그때 연등불이 계셨는데 내가 그 연등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셨느니라.』하십니다. 요새 우리 수자는 만까지는 열배하는 십진법이고 만부터는 만을 만하면 억이고 억을 만하면 조(兆)이고 조를 만배하면 경(京)하여 만배법(萬倍法)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하여 24단위 밖에 없지만 불교가 온 뒤에는 불교 숫자를 뒤에다 붙여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불교의 수는 구지(俱只)에서 부터 배수입니다. 인도의 낙차(洛叉)라는 숫자가 우리 수로 십만인데 십만을 백배로 하면 그게 구지(俱只), 곧 1천만입니다. 그 구지를 구지배로 하면 천만을 천만배로 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1아유타(阿由他)라 합니다.

또 아유타를 아유타배하면 나유타(那由他)인데 이렇게 해서 나간 수의 단위가 124자입니다. 그런데 아승지 이 숫자는 105번째 나오는 수의 단위이니 아승지라는게 우리의 일반수학 상식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그런 굉장한 수자입니다. 아승지수의 무량아승지라 했는데 무량도 숫자입니다. 아승지 바로 위에 있는 104번째 숫자입니다.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수의 부처님들을 연등부처님 불자로서 부처님 모시고 있는 동안에 다 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공부가 높고 신통이 많은 대 도인들은 시방에 한량없는 부처 여기 앉아 계신 것을 다 친견합니다. 최면술을 걸어 놓으면 여기 앉아서 동경가서 보고 얘기하고 그렇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만억 이런 지구를 직선으로 지나가서 우리 사바세계하고 똑같이 극락세계가 있다고 그랬는데 여기 이대로 앉은 채 찰라 사이에 십만억 세계를 지나가서 우리하고 얘기하듯이 아미타불을 친견(親見)하고 법문도 듣고 묻기도 하고 그럽니다. 본체 자리에서 보면 항상 시간도 공간도 아닌 조그만 초점 안에서 극락세계니 십만억 국토를 지나가느니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거 없이 가고 다 알고 보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연등불을 만나 가지고 연등불을 모시고 있는 그 동안에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내가 다 그 부처님에게 모두 음식도 올리고 옷도 올리고 향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온갖 시봉도 다 해서 공경 공양했고 도량청소도 하고 변소도 모두 소제해 드리고 부처님 제자를 시봉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한량없는 백천만억나유타 모든 부처님께 한분도 빠짐없이 공양 안 드리고 간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공양한 공덕을 그때 참 많이 지었지만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저 후오백세 말세에 지금(이 때입니다.) 혼란한 말세에 능히 이 경전을 받아 가지며 읽고 외우고 하면 내가 지은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억분의 일도 안되는 거고 내지 124자를 다 써서 비유를 한다 해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만억국토의 미진수분의 일도 안 됩니다. 부처님 세상에는 모두 선지식 천지이니까 아무나 할 수 있고 아무나 들을 수 있지만 이 말세에 이 금강경을 옳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금강경 학자가 나와서 일한다면 참 하늘에 별따기 같은 일이고 맹구우목(盲龜遇木)같은 참 희유한 일입니다. 그렇듯이 대단히 희유한 일이 되느니라. 그러셨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解 義]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저 말세에 사람들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고 또 이 경전을 수지독송한 공덕을 얻는 그걸 내가 만일 갖추어서 다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이 듣고 나면 마음이 미쳐서 혼란해 지고 미칠 것이다.』했습니다. 향적세계(香積世界)라는 불세계가 있는데 거기서는 말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시려면 향을 한 대 향로에 꽂아 놓으면 백년이고 천년이고 그 향내가 뻗혀 나갑니다. 그러면 그 불세계에 사는 중생들은 누구나 그 향내를 맡으면 그만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를 깨쳐 버립니다.

「아 ! 이 세상이 다 고로구나. 이 세상이 다 허망한 것이 모여가지고 거짓 있는 것이고 흩어져 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구나.」하고 곧 압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께서 주먹을 번쩍들어 보이면 그만 대중이 전부 다 깨달아 버립니다. 이건 말이 없는 불세계입니다.

이와 같이 향으로 하는데, 꽃으로 하는데, 또는 음식으로 하든지 그 교화 방법이 불세계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이 사바세계는 교체(敎體)가 무엇이냐 하면 음성교체(音聲敎體) 곧 음성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 문자만 가지고도 또 안되고 글로 된 경전이 있지마는 그것보다도 꼭 혀를 놀려서 가르쳐야 빠릅니다. 글도 역시 혀의 표현이긴 합니다. 그래도 여기는 어디까지나 음성이 교체가 되어 있고 향적세계 같은 데는 향이 교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석천천당에 올라가면 굉장한 복력으로 저절로 생긴 궁전이 있습니다. 우리도 꿈에 가면 큰 도시가 있고 우리 집도 있고 그런 것이 생각으로 저절로 생겨 가지고 있는 것이며 누가 목수를 데려다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듯이 제석천궁도 제석천의 복력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 궁전의 크기를 아주 줄이고 줄여서 우리 한국 땅덩이만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법당에도 바깥 천정에 비들기나 새들이 못들어가게 그물을 쳤는데 제석천궁은 새 똥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장엄으로 장식을 하느라고 진주·다이야몬드 같은 아주 좋은 보석으로만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이쪽 구슬이 저쪽 구슬에 비춰지고 하여 이 구슬끼리 전부 서로 통하여 비춰가지고 있으니 우리 한국만한 궁전이라고 한다면 그 구슬의 수가 몇 개나 되겠습니까? 그 많은 구슬이 한 구슬 속으로 그림자가 다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구슬 이것이 그 여러 억천만개나 되는 구슬의 그림자가 밑으로 보이고 동서남북으로 들어와 가지고 그 전체를 받아 가지고 그 옆에 구슬에 비추니까 이거는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전체로 보입니다. 이것을 받아 저쪽에 넘기고, 제 구슬의 것을 또 이쪽으로 넘기고, 저는 저대로 받아 있습니다. 제 그림자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 쪽을 비춰주고 또 저놈이 제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받고 이러면 복수(複數)로 자꾸 곱수로 됩니다. 이런 것이 한 시간만 되면 그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고 두 개 구슬로만 해도 무한의 수가 될 것인데 이것은 정말 아승지의 수자 보다 더 많습니다. 일백 스물 넉자라도 못 따라 갑니다. 이런데 그 구슬과 구슬 전체가 또 다 그러니 전체가 전체를 전부 포함한 그것이 여러 수 억만 불찰미진수 아승지 항하사 숫자 이런 게 모두 다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하고 제망중중(帝網重重)이라 합니다. 지금도 자꾸 그렇게 점점 비쳐 나갈 것이며 서로 반사가 될 것이니 그런 수를 누가 세겠습니까? 그렇지만 부처님은 그 제망 중중 구슬들을 서로 비쳐서 만년 아니라 몇 아승지 겁을 지나도 이 수를 다 아십니다.

부처님의 반야법문이 600권이라고 하지만 그 실제로는 미진수의 법문이 있다고 합니다. 21년간 말씀하신 것이 우리 인간만 듣는 게 아니라 천당 사바세계 할 것 없이 다 듣도록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셔도 여러 세계의 중생들이 각각 다 자기 말로 알아듣도록 하십니다. 이 금강경도 이제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다 되는데 상하 두 권이나 되는 것은 화엄경 같으면 하나만 물어도 몇 가지로 대답하시듯이 백 마디 물으면 천 가지가 나오고 만 가지가 나오고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게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제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 수가 모두 몇 권이나 되며 사실 그걸 다 펼쳐 놓으면 모두 얼마가 되겠습니까?」 물으니까 백억 세계를 두드려 무슨 미진수 전자수와 같이 많은 장수(張數)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중무진의 시방세계에서 불보살님까지 「저 사바세계의 석가여래께서 출세를 하셔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시느라고 마지막 법화경을 설하신단다, 금강경을 설하신단다.」 이래 가지고 막 모여옵니다. 그러니 허공이 가득차고 이러는데 또 제 몸을 포개고 또 그 보살이 보살을 포개가지고 중중으로 포개지만 하나도 머리가 안 아프고 밑에 깔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고 두루하고 그래서 서로 방해도 안 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그 희유한 경계를 상상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이런 희유한 도리를 다 설명하신다면 근기가 여간 높지 않아 가지고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의(狐疑)라는 말을 여호 같은 의심이라고 하는데 이런 의심이 있는 사람은 성불 못합니다. 사람들이 여호를 찾겠다고 쇠고기나 돼지고기나 그 속에다가 무슨 폭발물 같은 것을 넣든지, 무슨 독약을 넣든지 하고는 겉으로 냄새를 피우지 않게끔 잘 밀봉해서 여우 다니는 데다 놔둡니다. 이놈이 무엇 주워 먹으러 다니다가 돼지고기가 한 뭉치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게 이런데 떨어질 수가 없는 건데 필연 무슨 조화가 붙어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들고 요리저리 벼른 뒤에 여기 좀 맡아 보고 저리 맡아 보고 하다가 아무래도 못 먹겠다 하여 그대로 놓아두고는 한 댓 발 간다는 겁니다. 가다가는 그 놈이 또 아까와서 냄새라도 맡아 보고 가야지 하고는 다시 되돌아와 보고 하기를 열번 백번 하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어 먹어 버립니다. 까불다가 탁 터져 죽는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먹고 나서 몇 시간 뒤에 그만 죽기도 하는데 어떤 놈은 기어코 먹지 않는 놈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를 중생들 중에 제일 의심이 많고 제일 영리하다고 하고 사람도 호의(狐疑)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말로 들어 봐서는 꼭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참 그럴까」하고 괜히 그런 생각 저런 생각 갖다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의심 많이 하는 성질이 있어 군자를 만나도 도인을 만나도 의심을 많이 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렇게 호의증에 걸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장가가면 의처증(疑妻症)이 걸리고 또 의부증에 걸려서 영감을 의심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의심할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내버려 두고 그런 세상을 살면 편한데 의심을 하면 사람의 마음이 안 편해지고 의심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백사불성(百事不成)으로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만날 사사건건 의심만 붙어 있으니 무슨 일을 누구하고도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當知是經 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解 義]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전의 뜻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동시에 그 과보도 불가사의하느니라.』

이 경전을 읽고 나면 그때부터 금생에서부터 차차 이 경전 읽은 공덕을 받기 시작하여 두고두고 세세생생에 자꾸 견성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다 설명하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놀라서 기절할 정도로 그 뜻과 과보도 공덕도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번에 금강경 살림에 참여한 분들은 금강경의 이런 도리를 깊이 믿고 대게 그게 그럴거라고 십분 이해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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