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이렇게 물으면 “양반이 왜 쌍놈이 되려고 노력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선은 우리가 논의해서 말로 하거나 들을 때 우리 눈동자에 모래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머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깨달은 분이 선의 본질을 드러내 대중에게 설법함에,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옥 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낸 것과 같습니다. 즉, 법을 일러준 선사도 괜히 백옥 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만든 것과 같고 물어서 깨닫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게 선입니다. 이 일구(一句)의 세계는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어 진리라 하고 삶이자 사실이고 본래 모습인데, 여기에는 닦는다느니 증득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군더더기이며 사족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선은 대부분 화두 들고 참구하는 것으로만 아는데,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인가, 꼭 해야 하는가? 여러분 선은 왜 닦습니까? 과연 선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 신도님들이 제 말씀을 듣고 있는 것, 바로 그게 선입니다. 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제 말 듣고 보는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간화선이 위기다, 침체한다.’ 이런 소리는 누워서 침 뱉는 격입니다. 이는 특정인이 아닌 우리 전부의 책임이자 허물입니다.

 

내 자신이 선이기 때문에, 부처요 불성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부처님께선 깨치고 보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하고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했습니다. 존재가 연기이자 법이며 여래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선이고 부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되기 위 참선한다는 생각을 내면 틀린 소리일 뿐더러 시간만 낭비됩니다. 이 존재 자체가 선이요 부처란 사실을 오늘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열반경>과 <아함경> 등 많은 경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이를 믿지 않으면 허송세월하기 십상입니다.

 

불성이 내 몸의 일부에, 잡초 속의 금덩어리처럼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듣고 보는 마음과 몸뚱이도 부처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여서 똑같은 작용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과 같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우리는 다 부처님입니다. 뒤에 계시는 불단 위의 부처님도, 이 마이크도 컵도, 이 법당도 다 부처님입니다. 물론 이해 없이 믿는 것은 맹신의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왜 부처인지 알면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법은 곧 연기이자 공이기에 무아인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입니다. 이를 철저히 깨는 것이 선종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연기를 가장 정확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선은 다만 체험을 강조할 뿐, ‘본래 성불’임을 철저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다른 종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지만, 선종은 진리와 사실 그자체인 달만 인정하기에 최상승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간화선 선수행자들이 많이 참석하셨지만, 그 화두를 정신통일이나 의심하기 위해 드는 것이라고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화두는 의심하기 위한 것도, 정신집중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간화선은 서기 1000년 전후 대혜 스님이 주창했습니다. 그 이전 250 여 년 전 마조 스님 시대에만 하더라도 ‘의심하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조 스님 당시엔 어떻게 의심했을까요?

 

어느 날 늑담법회(?潭法會) 스님이 마조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스님께서는 나지막히 속삭였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찾아오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법회 스님은 다음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은 돌아가고 내가 상당(上堂)할 때를 기다렸다가 나오게.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 스님은 여기서 바로 깨닫고 말했습니다.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가버렸습니다.

 

마조 스님은 법회 스님에게 여럿이 있을 때도, 단 둘이 있을 때도 ‘무엇이 선인가(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연 반대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분별심을 떠난 존재의 원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 법회 스님은 밤새도록 큰 의심을 낸 후 다음 날 질문했을 겁니다. 요즘 선사라면 “모르면 의심해라. 그리고 해답을 가져오너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조 스님은 자연스럽게 의심을 돈발시킨 것입니다. 결국 의심하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고, 답을 몰라서 저절로 의심이 드는 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 서장>의 저자인 대혜 스님도 무턱대고 의심하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의심하라 했지, 의심하기 위해 화두 들라 한 게 아닙니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 분별을 초월한 것이 화두입니다. 분별하는 한 화두를 타파할 수 없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꽝 부서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회 스님이 마조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초음파, 즉 ‘뭐’ 하는 순간에 깨달아야 합니다. 주객으로 나뉜 내 의식을 한방에 깨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이게 공부이고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식의 그 말을 통해서 바로 깨달으면 됩니다. 그런데 깨치라고 제시하는데 못 깨치니까, 하는 수 없이 의심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도 둔근기들에게는 깨치게 하는 방법이니까 그냥 놔두는 거죠. 의심하라고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될까봐 <선요(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고 했어요. 콩하고 보리도 못가르는 놈, 신랑하고 종을 못 가리는 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은 쑥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 그러니 선종은 철저히 상대 개념을 벗어나서 절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겁니다. 쑥맥도 모르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최상승 공부를 하고 있고 최고 근기다 하면 그 분상 의식구조에서는 목과 어깨에 기브스하게 되죠. 그런 스님과 신도가 많이 있잖아요. 폼으로 공부하기 위한 공부, 의심하기 위한 의심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어떤 고정관념도 무장해제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나니 내안에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내 안에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안거지요. 그래서 선어록에도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게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깨칠 것이 있고 얻을 게 있다는 공부는 그래서 잘못된 선 공부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라는 ‘본래 성불’임을 알고 공부 하는 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공부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고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어서도 안 됩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불교를 허무적인 종교로 표현했지만, 절대 그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그 자리로 돌아가면 하늘에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서 햇빛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지혜광명입니다. 그래서 이 공(空)을 깨달으면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서 평등하고 편안하게 끄달림도 없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좋은 것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아도 싫어하지 않는, 양변을 초월한 자유자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 성불’을 전제로 공부하는 것과 있다 없다를 구별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성불을 믿고 이해하면 금생에 확철대오는 못해도 정(正)과 사(邪)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재수, 삼수를 하더라도 알고 공부하면 내생에는 그 힘으로 재수하지 않고 합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불의 수행전통을 잘 이어오고 있는 것이 선종이고, 이런 조사선의 전통은 한국 불교만이 바르게 잇고 있습니다. 중국은 선종의 유적지만 남아있으며 참선하는 분들이 매우 적습니다. 일본의 선은 화두를 하나하나 타파해 가는 소위 ‘사다리 참선’으로 변형이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가 ‘손가락 불교’가 아닌 ‘달 불교’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세계적으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선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합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던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중국의 운문문언(?~949) 스님은 어떻게 하면 날마다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운문문언 스님이 어느날 대중에게 말하기를 “15일 이전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지만, 15일 이후에 대해서는 한 구절 말해보라” 하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매일매일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고 했습니다. 범부의 세계에서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가 양변으로 나눠집니다. 나다 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않고 초월한 사람, 즉 공을 깨달은 사람은 날마다 좋은 날인 것입니다. 무아, 연기, 중도를 체득하고 사는 삶은 매일 좋은 날인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부처인 줄 알면 생로병사마저 진리로 바라보는 눈이 생깁니다.

 

‘본래부처’ 자리를 알면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이혼율도 낮아지고, 전쟁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 전쟁비용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돕는 다면 예산이 남아 돌 겁니다. 구치소와 교도소에서는 범죄인들이 사라지고 남북통일도 하루아침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끝없는 갈등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을 나는 ‘부시형(型)’이라 합니다. 부시형, 그게 일반 세계의 대응논리고 삶이죠. 그게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이런 것이 모두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에서 나오는 거죠. 인류가 모두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가 부처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라와 사회 간의 갈등과 대립은 이 중도(中道)가 아니고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해 ‘틱낫한’ 스님의 서울 방문과 달라이 라마의 저서들은 한국의 수행 붐 조성에 일조하였습니다. 그걸 보고 느낀 것이 우리나라에도 한국불교의 특색을 가진 국제적인 선 센터를 만들어 한 5년 동안 프로그램을 짜서 국내인부터 교육시키면 외국인도 저절로 배우러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은 화를 삭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애초부터 화라는 게 없고 오직 연민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동네에서는 환대와 선물을 받고, 다른 동네에서는 모욕을 선물로 받았지만 좋은 선물, 나쁜 선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분별심을 여의었으니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욕했던 동네 사람과 욕을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하는 아난에게 모두 연민을 느낀 겁니다. 공을 깨달으면 분노와 미움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으로 반응합니다. 자(慈)는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비(悲)는 상대방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자비심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반대로 증오와 미움은 엄청난 자기 학대입니다.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인 적이 있지만, <육조단경>에는 “남의 허물 보지 말고 자기 허물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사랑’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하는 게 가능합니다. 결국 남을 돕는 것은 나를 위하는 일인 겁니다. 본래 부처의 효능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즐겁고 슬프고, 나다 너다, 천하고 귀하다 하는 양변의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버릴 때 스스로가 짓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똥 푸는 사람에게도 가치와 의미를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직업에는 천하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3D업종에 사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일하고 남을 돕고 사는 살면 귀하고, 국왕이라도 국민을 괴롭히면 천한 사람입니다. 비교 안하는 마음, 실체가 없다는 그 자리, 공空이라는 그 자리를 이해하게 되면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권력과 부를 부정적으로만 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달다’ 장자가 있었습니다. 장자는 재산이 굉장히 많은 부자였는데 부처님께서 무상(無相)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를 강조하시니까 고민이 되어 부처님께 “재산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쭈니까 부처님께선 “너는 더 가져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수달다’는 한역하면 급고독(給孤獨)입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에게 보시를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큰 것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절대 행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속되는 행복입니다. 생로병사까지 진리로 보고 해탈할 수 있는 행복 말입니다.

 

이런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한 참선은 판결을 잘못해 친구를 사형시킨 충격으로 출가해서 일심으로 공부한 ‘효봉’ 스님과 같은 큰 발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사연으론 ‘효봉’ 스님과 같은 발심의 지속은 불가능합니다. ‘고봉’ 스님은 제자의 멱살을 잡고 몽둥이질을 하며 “송장 끌고 다니는 그놈을 알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고봉’ 스님의 방만 쳐다봐도 머리가 아팠겠지만, 그 분심으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그렇게 발심을 내도록 때려가며 인도하는 스승이 적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스스로 발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행복하게 사는 길을 일러줍니다. 존재의 원리를 깨달아 바른 사고와 행위로 살도록 합니다.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멋진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한번 제대로 발심하여 참선공부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 고우 스님은>

1937년 성주 생으로 20살 때 청암사 수도암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운 후 제방 선원에서 정진. 1968~9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지는 등 봉암사 축서사 금영사 용주사 각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 법랍 47년.

 

< 즉문즉답(卽問卽答)>

고우 스님의 법문이 끝난 후 바로 즉문즉답(卽問卽答) 시간이 이어졌다.

한 50대 거사가 일어나 질문했다.

“아뢰야식(제8식)은 자성(自性)과 같습니까. 다른 것입니까?”

고우 스님은 좋은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아뢰야식과 자성은 같다고도 할 수 있지만 효능면에서는 다릅니다. 아뢰야식, 이 정도만 알아도 담담해서 악한 생각과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경지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를 극복해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뢰야식을 보고 착각해서 공부를 멈추고 맙니다.”

 

충주에서 올라왔다는 30대 거사의 두 번째 질문은 더욱 난해했다.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여 ‘무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입니까?”

고우 스님은 두 번째 질문에도 주저 없이 답변했다.

“세계의 학자들이 한평생 연구하는 분야가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 라는 ‘윤회와 무아’에 대한 주제입니다. 우리나라의 ‘호진’ 스님도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딴 걸로 압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에 평생 몰두하지만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풀립니다. 윤회의 주체는 아시다시피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그러나 아뢰야식 역시 연기된 현상이기에 이 윤회하는 식 역시, 무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연기된 것이기에 무아(제법무아)’라고 하셨듯이 전혀 이론적으로 상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공이자 연기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컵을 들며) 여러분은 이것이 꽉 찬 걸로 보이겠지만, 이 컵이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세 번째 역시 50대 거사의 질문.

“스님께서는 의심을 내기 위한 의심은 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참 의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래성불인 그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의심이 필요하겠지요. <선요>에서도 대분심, 대의심, 대신심을 공부의 필수요건으로 말했지만, 이를 다 갖추더라도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떨어져 있는 꼴입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도록 용맹정진해도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큰 의심이 든 것이고, 이걸 깨치면 성불입니다. 왜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가를 알면 얻은 게 없이 이미 다 갖춰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의심을 크게 하려면 분심과 신심이 바탕이 돼야 함은 물론입니다.”

 

<수행법>

고우 스님의 수행법은 ‘닦을 것이 없음을 닦는’ 무수지수(無修之修)의 단박깨침(頓悟)을 강조하는 정통 조사선, 즉 최상승선의 입장이기에 따로이 수행법이 없다고 해야 정답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굳이 설명하자면,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 한 생각 일어 난 그 자리를 돌이켜 비춰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공부로 요약된다.

 

“<선요>에서는 물을 져다가 우물에 붓듯이, 물에 비친 달 건지듯이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우물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더 차지 않고, 물에 비친 달을 아무리 건지려 해도 얻어지지 않듯이 깨달을 것이란 없습니다. 보고 듣는 그놈이 하는 일이니, 집착만 세탁해 버리면 됩니다.”

 

고우 스님은 여러 수행법을 닦더라도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꼭 믿고 해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참선뿐만 아니라 봉사, 주력, 염불도 좋다고 한다. ‘본래 성불’임을 믿고 근기에 맞게 공부하되 주의할 점은 자기를 비우고 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고우 스님은 선(禪)은 부처님의 오리지널 수행법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육조 스님의 제자인 ‘영가’ 스님은 사마타를 ‘적적성성(寂寂惺惺)’, 위빠사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으로 표현했습니다. 6바라밀 수행과 염불, 주력, 참선 등의 모든 수행법이 ‘적적’과 ‘성성’을 강조합니다. ‘성성’은 혼침(昏沈, 조는 것)하지 않는 것이며, 적적은 ‘도거(掉擧, 망상)’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외도는 적적(寂寂)만을 강조해서 삼매에 들면 모든 행위가 정지되지만, 불교 삼매(三昧)는 모든 행위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고우 스님은 늘 ‘성성적적’한 공부를 통해 삼매에 들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양쪽 다 삼매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특색이라고 말한다. 고우 스님이 <육조단경> ‘정혜불이품’ 에 “정혜(定慧)가 하나가 되더라도 도가 아니다. 하나가 되어 통류해야 한다”라는 대목을 보다가 안목이 열린 것도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행에 앞서 중도연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바로 보는 정견(正見)이 가장 중요하다”는 고우 스님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좋은날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분별심을 버리고 비우고 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고우 스님은 이날 법회에서 강정진 법사가 펴낸 <영원한 대자유인>과 관련, “그 책에서는 수행법도, 깨달음도 방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조사선에서는 그런 설명은 발도 붙일 수 없기에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이란 ?  (0) 2016.02.11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세계  (0) 2016.02.08
연기緣起란?  (0) 2015.12.29
12연기설  (0) 2015.12.11
서암스님 참선수행법  (0) 2015.12.11

 

 

연기緣起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로서 모든 것은 서로 주고받는 상관관계로서 하나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법칙을 말하는 것이며, 연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로는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잡아함경 권15>

 

이 말은 ‘우주 만상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관계로써 존재할 뿐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진리)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의지하여, 또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즉 일체의 것은 모두가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며, 또한 그 조건만 없어지면 그 존재도 있을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간접의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로, 이를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는 술어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말은 단순한 두 가지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상의성相依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만유萬有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하나도 독립됨이 없이 서로 서로가 인이 되고 연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인연생기因緣生起(연기緣起)하고 있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 속에는 우연히, 홀연하게 또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의 원리로 구성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주와 나는 어떤 관계일까요? 내가 잘 살아야 120년 정도의 수명을 지니고 있으며, 내가 살아가기에는 지구도 너무 크다고 생각되어지는데 무한히 커다란 우주가 왜 필요하며, 137억년이라는 긴 시간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태양 에너지가 있어야하며, 그 외에 탄소, 산소, 질소, 철과 같은 92가지의 원소와 철보다 무거운 방사성 원소도 지열地熱의 원천으로서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주의 탄생 초기에는 수소(H)와 헬륨(He)과 약간의 리튬(Li) 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 가지 보다 무거운 원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태양 질량의 수백 배에서 수천 배에 이르는 우주 탄생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별들(초신성超新星, Supernova)의 폭발이 필요했으며, 초신성들은 태양이 생기기 훨씬 오래 전에 폭발하여 무거운 원소들을 우주에 뿌려놓고 사라졌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원소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에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모든 것들과 우리는 연기되어 그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시간적으로는 137억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며 공간적으로도 지금처럼 커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생겨날 때는 반드시 다른 것들과 연기되어 생겨나기 때문에 그때그때 가장 알맞은 것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최고의 고등 생명체가 가장 늦게 생겨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번 생겨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어지지 않고 또 다른 것들과 연기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공룡이 없어졌다고 알면 대단히 잘못 아는 것입니다. 비록 공룡이라고 하는 형태는 사라졌으나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공룡을 형성하고 있던 성분(소립자)이 다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것은 연기의 관계로 하나 되어 있다.’라는 것이 존재의 원리(진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만상은 둘이 아니다(불이不二), 다르지 않다(불이不異), 같다(즉화卽化).’라고 하며,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라는 의미에서 `연기공緣起空이라 합니다.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변화를 말하기 때문에 진화는 연기관계를 가장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존 강에 살고 있는 식물들 중에 그들을 먹고사는 동물들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표면을 매우 거칠게 변화시키는 것은 연기에 의해 진화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에 서로 독립되어 존재한다면 진화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세계  (0) 2016.02.08
선禪의 본질本質과 의미意味 (고우스님)  (0) 2015.12.29
12연기설  (0) 2015.12.11
서암스님 참선수행법  (0) 2015.12.11
話頭(공안)  (0) 2015.12.05

 

 

12연기설

불교의 본질은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미혹으로 인한 그릇된 행위가 일어나서 결국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악순환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표현할 때 혹(惑)→업(業)→고(苦)의 순환이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었을 때 중생의 고통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며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가를 관찰하고 그 이법을 이론적으로 전개해 놓은 것이 12인연설입니다. 생멸변화하는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교리로 12연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2가지의 지(支)가 연결된다 하여 12지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이 설은 모든 존재의 기본적 구조를 12가지 항목의 계열을 세워 설명함으로서 생존의 조건이 연결되는 과정과 이 조건이 소멸되었을 때의 경지를 밝혀 놓은 것입니다.

① 무명(無明 avidya)

우리들 존재의 맨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무명이라 합니다. 글자 그대로 밝음이 없는 어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무지(無知) 혹은 무지(無智)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모른다’,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생·노·병·사의 고통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무명에서부터 중생의 업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여실히 진여(眞如)의 법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무명이라 한다고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우주 만유에 가득한 상주불변하는 본체를 진여라 하는데 이는 우리들의 사상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진실한 진리 그 자체를 두고 부르는 말입니다. 이 진여를 모르는 상태 곧 깨닫지 못한 상태를 무명이라 합니다. 중생의 경우에 이 무명이 과거세로부터 무한히 이어져 온 것으로 그 시작이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그래서 흔히 시작을 모른다는 뜻을 붙여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합니다. 또한 이 무명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마치 땅이 있기 때문에 잡초가 자라듯이 번뇌의 땅이 되는 것이 이 무명입니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캄캄한 어두운 밤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명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줄여서 한자로 혹(惑)이라고도 합니다. 

  

② 행(行 samskara)

행이란 곧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형성되는 힘 혹은 만들어지는 힘을 뜻하는 말인데 어떤 원인에서 결과가 나타나기까지의 진행될 힘이 잠재해 있는 것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업(業 karma)이 지어지는 상태, 일어나는 상태가 행으로 몸으로 하는 신행(身行)과 말로 하는 구행(口行)과 생각으로 하는 의행(意行)이 있습니다. 이 삼행(三行)을 삼업(三業)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구·의에 따른 행위가 축적되어 사람의 인격의 내용이 결정되고 삼행의 행위에 의해서 형성된 습관력(習慣力) 또한 행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업을 짓는 자체가 행인데 업을 지으면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어떤 행을 유발할 잠재적인 힘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업력(業力)이며 업력이 있으면 행은 따라 일어나며 이 업력이 바로 앞에서 설명한 무명이 조건이 되어 생기는 것이며 업력이 형성되는 상태 또한 행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식(識 vijnana)

인식작용 또는 분별작용을 식이라 합니다. 여기에 안식(眼識)·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 주관을 이루는 인식작용의 갈래를 나누어 말하는 것인데 눈·귀·코·혀·몸의 오관에 의해 일어나는 인식과 마음(意根)에서 일어나는 인식까지를 육식(六識)이라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서는 7식·8식을 추가하여 말나(末那 manas)식과 아뢰야(阿賴耶 alaya)을 말하지만 근본불교의 교리인 12인연설에서는 아직 7·8식이 설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식은 반드시 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표면적인 의식 다시 말하면 우리들 머리에 떠오른 의식뿐만 아니라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상태에서도 식은 내재해 있습니다. 가령 꽃을 보고 꽃을 인식할 때에 꽃을 보는 행이 먼저 일어나 경험하는 과정이 있고 난 후 잠재의식이나 직접적인 의식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식은 시간적으로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을 생각하는 중추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럴 때 의식의 영역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히 확대되는 것입니다. 

  ④ 명색(名色 namarupa)

명색이란 정신과 물질을 함께 지칭하는 합성어입니다. 명(名)은 오온(五蘊) 가운데 색(色)을 제외한 수(受)·상(想)·행(行)·식(識)을 형성하는 인자(因子)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색(色)은 곧 물질을 이루는 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로 구성된 객관 경계에 나타나는 물질적 현상입니다. 때로는 육체 와 정신의 양면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식에 의해서 명색이 있게 된다는 것은 거울이 있으니 거울에 물체가 비쳐진다는 논리와 같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음으로 인식의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설정에 있어 주관이 먼저 서는 차례를 보이는 것입니다. 식이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명색이 있어야 하며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해서 연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⑤ 육입(六入 sadayatana)

육입이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통하여 객관 경계를 인식하면서 주객(主客)이 대응하는 영역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육입이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볼 때 식이 탁태되어 태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직 눈, 귀, 코 등의 근(根)이 갖추어지지 아니한 상태를 명색이라 하고 육근이 갖추어진 상태를 육입이라 한 재래적인 해석방식이 있기는 하지만  외계의 사물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보면 명색은 인식의 대상인 경계라 할 수 있으므로 이 경우에 있어서는 식과 명색과 육입은  동시에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이 됩니다.

⑥ 촉(觸 sparsa)

촉(觸)이란 신체의 기관을 통해서 외부의 객관 경계를 느끼는 지적(知的)인 힘을 말합니다. 감각을 느끼는 자체가 촉인 것입니다. 이 역시 육입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데 엄격히 말하면 식(識)과. 명색(名色)과 육입(六入)이 동시에 함께 함으로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볼 때 육입이 갖춰지고 난 뒤에 촉(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각(視覺)이나 청각(聽覺)등이 일어나는 상태가 촉으로 육입이 있으므로 육촉이 되는 것입니다.

⑦ 수(受 vedana)

수(受)란 외부의 경계로부터 느낌을 받는 감수(感受)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감정(樂受)과  괴로운 감정(苦受)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정(不苦不樂受)의 세 가지가 모두 객관 경계로부터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는 느낌입니다. 마치 거울에 물체의 모양이 투영되어 거울 면에 허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사물을 대할 때 먼저 감수를 통한 인상(印象)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각인(刻印)되는 것입니다. 육근(六根)의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육진(六塵)과 인식작용이 함께 만나면 촉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감정의 느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의 지(支)인 촉(觸)에 의해서 객관의 경계가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인 것입니다.

⑧ 애(愛 trsna)

애(愛)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고 싶어하듯 무엇을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애욕(愛慾)을 갈애(渴愛)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면 애착심(愛着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싫은 것을 만나면 증오심(憎惡心)이 생기는데 이 모두가 애(愛)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애(愛)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능적 욕구이기도 합니다. 오욕락(五慾樂)인 이성간의 성적인 욕구와 음식에 대한 욕구, 수면에 대한 욕구, 재물에 대한 욕구 명예에 대한 욕구가 모두 애(愛)인 것입니다. 고(苦)·낙(樂)등의 감수작용이 심해질수록 거기서 일어나는 애착심 증오심도 강해지면서 다음 지(支)인 취(取)의 집착이 애를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⑨ 취(取 upadana)

취(取)란 가지려고 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집착을 뜻하는 말입니다. 맹목적인 충동으로 인한 애착이 생겨 갖고 싶어하는 소유욕 등이 바로 취인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경계가 이 취에 의하여 주관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 업을 발휘하는 힘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취는 결국 업을 짓는 전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⑩ 유(有 bhava)

유란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곧 생존으로서 생존 자체의 근본을 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의 취가 업을 일으키면 유가 다음 지(支)인 생을 있게 하는데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유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존재 자체를 건물에 비유한다면 그 건물이 앉는 다리 즉 터를 유라 하겠습니다. 또 생물의 생명이 있다 하든가 중생의 업이 있다 할 때 있다는 의미 그 자체를 유(有)라는 한 범주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는 윤회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쓰여 욕유(欲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로 구분해 말하기도 합니다. 또 생사가 되풀이되는 과정을 유로 나타내어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의 사유(四有)설이 있기도 합니다.

⑪ 생(生 jati)

생명체가 태어나는 현상을 말하며 동시에 생명체의 구성 요소가 완성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중생의 종류에 따라 태어나는 형태가 다르다 하여 이를 구분 태생(胎生)·난생(卵生)· 습생(濕生)·화생(化生)이라 하여 사생(四生)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출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태에서 태어나거나 알에서 태어나고 습진 데서 생겨나고 생명체 자체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⑫ 노사(老死 jaramarana)

노사란 모든 생존하는 존재가 현상적으로 쇠멸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생의 반대 현상으로 소멸되어 생존의 기간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현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에 속해 있는 생멸하는 존재이므로 있던 것은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납니다.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면 노사를 조건으로 하여 생이 있다고 반대로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이인연의 각 지(支)는 생사가 어떤 과정으로 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인데 생사가 모두 고(苦)이므로 이 고의 유발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또 이 노사는 근심(憂)· 비애(悲)· 고통(苦)·번민(惱)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상의 12인연의 설은 석가모니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때 중생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을 관찰하고 이 12인연의 이치를 알아냈다는 것으로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각 지(支)의 일어나는 순서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일어나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일어나 마지막 노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하며 이는 중생세계가 현전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노사로부터 무명으로 거슬러 가면 중생세계의 고(苦)가 소멸되고 부처의 세계가 현전하는데 이를 역관(逆觀)이라 합니다. 또한 12인연 전체의 관계를 인과관계로 보고 이 인과관계를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설명 인과관계를 두 번으로 보는 것을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 하여 고래로 이설을 많이 인용해 왔습니다. 곧 무명과 행은 과거의 원인이고 식·명색·육입·촉·수는 현재의 결과이며 애·취·유의 세 지분은 현재의 원인이고 생·노사는 미래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황을 두 가지 면으로 관찰하여 그 실상이 어떠한가를 파악하는 이론입니다.

인간의 존재를 결과로서의 산물로 보며 동시에 원인으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자로서의 인간은 의식과 명색이라는 신심의 요소와 육체의 감각인 육입에 의해서 객관 대상을 접하고 그것을 감수(感受)하세 됩니다. 또한 활동하는 자로서의 인간은 애욕에 뿌리를 두고 어떤 대상에 집착하여 욕구실현의 행동을 합니다. 이리하여 인간은 다시 존재하는 자로서의 자기 원인을 규명하여 무명과 행을 찾아내고 현실의 모습인 애·취·유를 통해서 새로운 생·노사의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세에 걸쳐서 두 번의 인과를 이야기 하지만 언제나 현재가 중심이 됨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다만 이 현재를 관념적으로 반성할 때 과거의 두 가지 원인과 현재의 다섯 가지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경험적으로 인식할 때는 현재의 세 가지 원인과 미래의 두 가지 결과인 인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안스님강의.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禪의 본질本質과 의미意味 (고우스님)  (0) 2015.12.29
연기緣起란?  (0) 2015.12.29
서암스님 참선수행법  (0) 2015.12.11
話頭(공안)  (0) 2015.12.05
참 나를 찿아라 (2)-진제스님  (0) 2015.11.29

 

 

서암스님 참선수행법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천 가지 만 가지로 생각을 굴리고 그 끊임없는 상념을 쫓아 살아가기 바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념을 모두 털어 버린 곳에 본래 빛나는 주인공이 항상 있음을 알아야 참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주인공을 찾는 것이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입 벌리기 전 설명하기 전에 본래 이루어진 것입니다.

49년동안 설법을 하셨으면서도 한 마디도 말한 바 없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도 근본 자리는 언어와 상념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항시 생각이 흘러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항상 찰나찰나 흐르고 있는 마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념 동안에 9백 생멸한다는 걸로 그 미세한 흐름을 설명합니다만 사실 이런 말로는 제대로 설명 될 수 없을 정도로 더 복잡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지요. 이렇게 강가에 물 흐르듯이 정처없이 자꾸 흘러가는 그 마음이 모든 희로애락 길.흉.화.복을 낳는 것이요,

이 일체 상념 속에서 헤매는 것을 몇 갈래로 구분하여 삼계육도 중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런 생각을 완전히 쉬어 버리면 그 자리에 공공적적하고 불생불멸한 본래 마음자리가 빛나고 있거든요.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셨듯이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는데,

우리 사바세계는 그 근거없는 생각을 통해서 무한히 죄를 짓고 과보를 받고 상념을 일으키고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어요.

그것은 마치 우리가 꿈을 꾸는데 좋은 꿈, 괴로운 꿈 등 온갖 꿈을 밤새도록 꾸면서 하룻밤에 몇 해의 이야기를 꾸기도 하고, 단 몇 시간의 단잠에 몇 생을 거듭 사는 삶의 꿈을 꾸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모두 깨고 보면 한바탕 분명한 꿈인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사실 우리가 꿈에서 깨고 보니까 나쁘고 좋은 온갖 경계가 다 한바탕 꿈인 줄 알았지, 꿈을 깨기 전까지는 그 경계에 사로 잡혀서 꿈의 구속을 받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좋은 경계에는 웃고 언짢은 경계에는 괴로워 하고 헤매고 당황해 합니다.

이렇게 꿈이라는 게 하무한 것이지만 그 꿈을 꾸었던 주인공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분명 있어요.

그러니까 짧은 꿈, 긴 꿈, 좋은 꿈, 언짢은 그 꿈들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은 영원히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것이 정말 문제지요.

우리가 백년을 살면 그 백 년 인생이 다 꿈입니다.

또 백 년이란 꿈을 꾸며 살아도 그 역시 흘러가는 경계 인지라 돌아보면 다 지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겪은 좋은 일이나 언짢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기쁜 일들이 모두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바탕 꿈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꿈이면서 그 꿈을 감지하는 그 놈은 변함없이 불생불멸이요,

항상 현존목전(現存目前)에 있는 그 한자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불교는 바로 꿈을 깨는 가르침입니다.

본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항존하는 자기 인생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절대자를 찾고 창조주니 조물주니 해서 인간 밖의 위대한 힘을 찾고 거기에 구원을 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에 맞지 않는 신앙의 종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장야(長夜)의 꿈을 깼습니다.

그렇게 꿈을 깨는 도리를 기록한 것이 8만 4천 법문이요,

꿈을 깨는 방법이 계, 정, 혜(戒定慧) 삼학인 것이지요.

우리가 상념이 일어나는 대로 오욕락을 따라가다 보면 술 취한 사람처럼 그 경계에 취해 자기의 본색이나

이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경계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런 우리 생활을 절제하여 안정시키는 것이 계행입니다.

또 그렇게 절제하여 살다 보면 안정이 생기고 빛나는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것을 비유해 보면, 파도가 일 때 그곳에 비친 일체 그림자가 찢어지고, 그 파도가 가라앉으면

모든 만물의 형상이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게 하는 방법이 계행이요,

그런 계행을 지킴으로 해서 안정을 얻고, 그래서 영원한 자기의 본래 빛을 보게 된다는 말이지요.

모든 이론과 상념을 초월한 곳에 있는 참선법은 바로 그 자기 본래의 빛을 밝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평소에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든 또는 앞으로 올 미래를 꿈꾸든지 결국 눈 앞에 보이는

경계에 팔려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흘러가는 생각이 생각을 하지 않을 때 자기 생각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참선입니다.

잠을 자면 꿈 속에 돌아다니는 자기가 보이고 자기의 위치가 거기 있습니다.

또 현재도 눈 앞에 보고 듣고 있으니 자기 위치가 거기 있어요.

그런데 꿈도 안 꾸며 깊이 잠이 들었을 때는 과연 자기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 여러분들은 꽉 막힐 것입니다.

그 막힌다는 것은 우리가 모태에 들었을 때나 모태 안에 들기 이전의 자기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꽉 막히면서도 빛나는 자기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참선은 배우고 듣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서 어떠한 문제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깨달아지고 열려지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바닷가에 가서 모래알을 세듯이 복잡스런 경구라든지 학설들을 종합해서

일생 동안 헤매고 따지는 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따지고 헤맨다면 그것은 중생놀음입니다.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모든 것은 무엇을 종합분석하며

풀이 하는 학설로써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상념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앉으나 서나 항상 스스로 앉고 스스로 일어나는

자기의 부처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물건을 바로 응시해서 관찰한다면 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선하기보다 쉬운 게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게 어디 가겠습니까?

잠시도 여의지 않습니다.

부르면 대답하고 꼬집으면 아픈 줄 아는 그 소소영영한 자리 찾기가 뭐 어렵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생에 익힌 습관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니까 화두법을 받아들여 수행하는데,

그렇게 방편 지어진 것이 간화선입니다.

중요한 것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그 실다움 없는 속에 진실한 물건, 여기에 우리가 착안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맹신하는 종교가 아니며, 또 누구를 따라 가고 연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누가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아는 이 주인공을,

눈을 똑바로 정시해서 찾아내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옛날 스님들께서 참선은 '입만 벌리면 어긋난다'고 하여,

몽둥이로 그저 후려친다든지 할을 한다든지 한 것

모두가 그 주인공을 바로 깨치도록 이끄시는 방법이었지요.

참선은 어렵다면 한 없이 어렵고, 쉽다면 그 보다 쉬운 게 없습니다.

'삼 서근이다', '뜰 앞의 잣나무다', 혹은 '똥막대기다' 하는 1700공안의 뜻이

단도직입적으로 부처의 세계를 일러 준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계제도 없고 차별도 없고 계급도 없습니다.

다만 한마디 일러주면 누구나 통하는 것이니 이보다 간단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간단한 것을 모르고 항상 바깥으로 헤매는 것이 우리 중생이지요.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자기의 눈은 안 보입니다.

그렇다고 눈은 안 보이니까 눈이 없다고 하다면 그 사람은 분명 어리석은 사람이죠.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지고 있는 그 자리가 부처인데 그것을 두고 바깥으로 헤매면서 신앙하고 찾으려 하니 찾을수록 점점 멀어집니다.

그 본래 마음자리 찾는 화두법이란, '이것이 도대체 무엇 이길래 앉고 서고, 가고 오고, 밥도 먹고 옷도 입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온갖 분멸을 다 하는 그 핵심된 주인공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존비귀천에 차별이 없어 누구나 평등한 자리, 그 의심 자리를 한 번 응시해서 찾아낸다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인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모르고 바깥으로 찾아 헤매면서 허송세월 하는 것은 아타까운 일입니다.

참선을 하면 모든 경계에 흔들림이 없는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사람 사는 것이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이 착잡하고 어지 럽지만, 그 한 주인공은 절대 어지럽지 않고 항상 한가합니다.

그렇게 일체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발견해서 사는 게 해탈의 세계입니다.

그 자기를 잃어버리면 모든 경계에 얽매여 항상 공포나 초조와 불안 속에 헤매게 되니 그것이 그대로 지옥이지요.

참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보면 어떠한 것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존재인데, 미혹한 중생은 스스로 고통을 일으 키고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모양도 없이 일 체가 끊어진 자리이니까,

누가 해칠 수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습니다.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이 허공과 같지요.

허공은 끝도 모양도 한계도 없고, 아무리 칼로 베어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아무리 불로 태우려 해도 불에 끄슬려지지 않고, 한계가 없어서 그릇에 담을 수도 없거든요.

그런 본래 마음을 크게 쓰면 무한히 크게 써집니다.

예를 들어서 나와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철천지원수 라고 할지라도 한 생각 넓게 쓰면 용서하고 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한 생각 옹졸하게 쓰면 아무리 친한 사이에도 조금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서로 칼부림이 일어나고 원수를 맺고, 내외간에도 이혼을 하는 등 모든 체계가 다 무너져 버립니다.

본 마음자리는 옹졸한 게 없는 것인데 스스로가 옹졸하게 써서 그런 것이니, 넓은 마음을 구애없이 쓰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항상 좁은 소견을 쓰기 때문에 백년인생을 여러 가지 불안에 떨며 살아가지만, 한 순간 이러한 한계 없는 본래 자기 마음을 찾아 쓰게 되면, 이 세상을 전부 포용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서 누구의 지배도 없이 자기가 창조주이고 조물주이며,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자기 인생을 발견해서 살라는 게 불교요, 참선의 목적입니다.

우리 마음이 항상 갈팡질팡 기멸(起滅)하는 파도가 이는 것은 마치 물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이란 바로 희로애락의 파도가 치지 않고 고요하고 평정하게 안정된 마음, 그러니까 마음의 기멸없는 터를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명에 가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에 중생세계인 지옥, 아귀, 수라 등 육도만행이 벌어진 것이지, 본시 기멸없는 마음자리는 때 묻지 않는 청정한 자리입니다.

그 마음자리란 분명히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열심히 참구한다면 만법을 포용하는 자기의 생명을 회복할 수 있으니, 불자는 늘 이 참선 수행을 힘써 생활화 해야겠습니다.

-서암큰스님글-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기緣起란?  (0) 2015.12.29
12연기설  (0) 2015.12.11
話頭(공안)  (0) 2015.12.05
참 나를 찿아라 (2)-진제스님  (0) 2015.11.29
참 나를 찿아라 (1)-진제스님  (0) 2015.11.29

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

공안이라고 할 때의 ‘공(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案)’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우리 나라 참선수행자들이 널리 채택하여 참구한 화두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麽)’,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尿橛)’ 등이다.

‘구자무불성’은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하는데, 우리 나라의 고승들이 이 화두를 참구하고 가장 많이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스님을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무(無)”라고 답하여 이 화두가 생겨났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틀림없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였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이 무엇고?’ 화두는 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참된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것으로, 무자화두 다음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또한, ‘뜰 앞의 잣나무’는 어떤 승려가 조주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답한 말이다. ‘삼 서근’은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답한 말이며, ‘마른 똥막대기’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문언선사(文偃禪師)가 답한 말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는 문답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켜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할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풀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은 그의 ≪선가귀감 禪家龜鑑≫에서 “닭이 알을 안을 때에는 더운 기운이 늘 지속되고 있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주린 때 밥 생각하는 것이나 목 마를 때 물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 있어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 현대의 고승 일타선사(日陀禪師)는 “화두를 드는 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일념으로 간절히 참구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 절(切)’이야말로 화두를 드는 데 있어 가장 요긴한 것이다. 간절한 일념으로 크게 의심해 나가는 것이 화두법의 가장 요긴한 점이요,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대오(大悟)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조사의 1,700여 가지 화두 가운데 한 가지를 취하여 참선해 보면 쉽게 화두에 집중하지 못한다.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망상이 자꾸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화두에 대하여 집중이 되지 않고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입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법(誦話頭法)을 권하기도 한다.

입으로 계속해서 송화두를 하다 보면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화두가 목구멍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염화두(念話頭)로 바뀌게 되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일을 하거나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看話頭)가 이루어진다.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불러일으키면 참의심[眞疑]이 생겨나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大無心)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때의 화두를 참화두(參話頭)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를 깨치게 된다고 한다. 즉, 화두가 또렷하게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꿈을 꾸나 항상 참화두가 되는 경지에 이르면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廓徹大悟:확연히 꿰뚫어 크게 깨우침)하게 된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연기설  (0) 2015.12.11
서암스님 참선수행법  (0) 2015.12.11
참 나를 찿아라 (2)-진제스님  (0) 2015.11.29
참 나를 찿아라 (1)-진제스님  (0) 2015.11.29
명심견성(明心見性)  (0) 2015.11.27

■ 해인총림 방장 원각스님

 

깨어있으라 언제라도 속아서는 안 된다!

 

覺華有種無人種

 

心火無烟日日燒

 

誰知佛祖圓覺性

 

各人日用何不知

 

깨달음의 꽃씨 있어도 심는 사람 없고 마음의 불 연기 없지만 나날이 타오르네, 불조가 전한 원각의 성품을 누가 알겠는가. 사람들이 날마다 쓰면서 어찌 알지 못하는가?

 

 

오늘은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삼하(三夏)결제를 맞아 신심납자(信心衲子)들이 저마다 심지(心地)를 다잡고 운집하여 청정가풍 속에 확철대오의 결기(決起)를 다지고 있습니다. 결제 기간에 총림의 대중은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야 하겠습니까.

 

조주선사에게 어느 수좌가 물었습니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 “그대는 스물 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나는 스물 네 시간을 부릴 수 있다. 그대는 어느 시간을 묻느냐?”

 

과연 그러합니다. 시간을 부리느냐, 시간의 부림을 받느냐가 귀중한 일입니다. 금일 결제대중은 어떠합니까? 부리는 주인입니까. 부림 받는 객입니까. 본분납자는 대신심(大信心)과 대용맹심(大勇猛心)과 대의심(大疑心)으로 삼계(三界)의 당당한 주인이 되어 생사공안(生死公案)을 밝혀야 합니다. 도솔천 내원궁에 거꾸로 매달려도 주인이 되고, 아수라의 정수리를 바로 밟아도 진실 되게 참구해야 합니다.

 

서암사언(瑞岩師彦)화상이 매일 자신을 향해 말했습니다. “주인공아!” 그리고 스스로 대답하기를, “예!” “항상 깨어있어라!” “예!” “언제 어디서라도 남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앉아도 선이요(坐亦禪), 움직여도 선입니다(行亦禪). 언제 어디서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깨어있는 자가 참공부인입니다. 본분납자(本分衲子)가 되어 순역경계順逆境界에 항상 깨어있다면 하루 종일 부리고 살 것이여, 호구승(糊口僧)이 되어 경계마다 끄달려 허송세월 한다면 부림을 당하는 종노릇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금일 총림의 대중은 깨어있습니까?”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건너와(達磨西來) 소실봉(少室峰) 아래에서 9년 동안 만벽하셨고(九年面壁), 혜가는 눈 속에 서서 팔을 끊어 바쳤으니(二祖立雪斷臂)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감수했습니다.(甘受盡難辛). 그러나 달마는 일찍이 한 마디 말도 던지지 않았고(達磨不曾措了一辭), 혜가도 일찍이 한 글귀도 묻지 않았으니(二祖不曾問着一句), 그러면 달마가 사람들을 위하지 않았다고 해야만 옳겠습니까(還喚達磨作不爲人,得麽)? 혜가가 스승을 구하지 않았다고 해야만 옳겠습니까(二祖做不求師, 得麽)?

 

산승이 옛 조사들의 일들을 상기할 때마다, 문득 몸 숨길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뒷사람의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제불조사들이 후래중생을 위해 목숨 바쳐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드러내 보여 주셨건만 오늘 날 우리 납자들은 공부인(工夫人)의 기상(氣像)이 옹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릇 생사해탈을 구하는 본분납자는 삼천대천세계를 한 입에 삼키고도 남음이 있어야 하고, 백만의 아수라대군을 맞이하고도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당당한 기백(氣魄)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별호를 조어장부(調御丈夫)라 하는 것은 백만의 번뇌마군과 싸워 당당히 이겼기 때문이요, 조사를 일러 도중지수(盜中之首)라 하는 것은 스승이 가르친 법을 낚아채는데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본분사를 결택한 수행인(修行人)은 불법(佛法)의 조어장부가 되고 법문(法門)의 영수(嶺首)가 되어 화두(話頭)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조사관(組師關)을 투과(透過)하기 위해서는 팔만 사천의 땀구멍마다 의정(疑情)으로 뭉쳐야 반분(半分)의 묘(妙)가 있을 것입니다.

 

임제스님은 황벽선사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수행태도는 아주 순수했습니다. 이것을 본 그 당시의 수좌(首座) 목주화상은 “이 때까지 노사에게 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느냐” “한 번도 없습니다. 무엇이라고 물어야 될지 몰라서 못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가서 불법의 근본 뜻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아라.”

 

임제가 황벽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바른 뜻입니까…” 채 말이 끝나기 전에 황벽은 주장자를 내리쳤습니다. 임제가 돌아오니 수좌가 물었습니다. “문답은 어찌 되었느냐?” “저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사(老師)에게 맞았습니다. 왜 맞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더 가서 물어보아라.” 임제가 또 가서 물었습니다. 또 황벽은 주장자를 내리쳤습니다. 이렇게 세 번 되풀이해서 묻고 맞았습니다. 마침내 임제는 수좌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친절하게 인도를 받아 노사에게 묻는 기회를 얻었습니다만 세 번을 물어 세 번을 다 맞았습니다. 인연이 아직 익지 않아서인지 저는 그 종지(宗旨)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 하지만 가더라도 노사에게 허락을 받고 가거라.”

 

수좌는 한 발 먼저 황벽에게 와서 “아까 스님에게 찾아온 운수(雲水)는 대단히 성실합니다. 만약 작별인사 하러 오거든 잘 지도해서 보내주십시오. 그는 잘만 기르면 장래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천하의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가 황벽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가니, “너는 아무데고 너 마음대로 가서는 안된다. 고안의 대우화상을 찾아가거라. 대우화상은 너를 위해 꼭 유익한 법문을 해 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임제는 대우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황벽의 회상에서 왔습니다.” “황벽은 어떻게 너를 지도하더냐.” “저는 세 번이나 불법에 대한 근본 뜻을 물었건만 대답은 듣지 못하고 세 번이나 매만 죽도록 맞았습니다. 저에게 어떤 허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황벽은 마치 할머니가 외손자를 사랑하듯 너를 위해 애써 친절히 일러주었는데도 그런 줄도 모르고 나한테까지 와서 허물이 있니, 없니 말하느냐? 이 미련한 놈아!” 하고 꾸짖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임제는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이번 철 90일 동안에 현성공안(現成公案)이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반드시 조사의 관문을 통과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석 달 후에는 틀림없이 공짜로 먹고 잔 밥값계산을 할 것입니다.

 

祖師西來意如何

 

少林院大集衆多

 

三夏結制山林盛

 

誰有決擇本分事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소림선원은 크고 대중은 많이 운집하여 삼하안거 결제 살림은 번성한데 누가 있어 본분 일대사를 결택하겠는가.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암스님 참선수행법  (0) 2015.12.11
話頭(공안)  (0) 2015.12.05
참 나를 찿아라 (1)-진제스님  (0) 2015.11.29
명심견성(明心見性)  (0) 2015.11.27
식심견성(識心見性)  (0) 2015.11.26

■ 진제 종정예하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 어떤 것이 참나인가?

 

太平治業無像

 

野老家風至淳

 

只管村歌社飮

 

那知舜德堯仁

 

태평세월에 업을 다스리는 데는 상이 없음이요, 들 늙은이들의 가풍은 지극히 순함이라. 다못 촌에서 노래하고 모여서 마시는지라. 이에 순임금의 덕과 요임금의 어짊을 어찌 아리요.

 

금일은 을미년 하안거 결제일이라. 모든 결제대중은 부처님께서 사바에 출세하신 뜻을 좇아 일구월심 ‘참나(眞我)’를 밝히는 일에 몰두해야 함이로다. 우리가 세속의 온갖 부귀영화도 마다하고 일가친족 등 정으로 맺은 인연을 다 끊고 출가하여 먹물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고죽는 고통을 영구히 여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지 다른 데 있지 아니함이로다. 그런데 이 일은 남이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어디 다른 나라에 가서 가져올 수 있는 것도 아님이라. 오직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증득(證得)해야 함이로다.

 

불가(佛家)에는 여러 수행법이 있지만은 다른 여타의 수행법으로는 대오견성(大悟見性)이 불가능하고 오직 간화선 수행만이 이 일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이니, 다겁생에 만나기 힘든 이 견성법(見性法)을 만난 김에 이번 생은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수양에 몰두해야 함이로다. 그러면 어떻게 닦아야 참나를 밝혀 생사(生死)를 요달(了達)할 수 있음인고?

 

화두가 있는 이는 각자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하는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간절히 의심하고 의심해야 함이로다. 화두를 챙기고 의심을 쭈욱 밀어주기를 하루에도 천번 만번 반복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주 간절한 화두의심 한 생각이 끊어짐이 없도록 혼신을 다해 참구해야 함이로다.

 

앉아서 화두를 참구할 때는 몸가짐 자세가 반듯해야 하는 것이니, 어깨를 활짝 펴고,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눈은 보통으로 뜨되 1미터 앞 아래에다 시야를 고정해 두고 화두를 챙겨야 함이로다. 화두의심에 용을 써서 몸에 힘이 들어가면 상기(上氣)가 돼서 머리가 무거워져 참선을 할 수 없게 되니, 오직 생각으로만 화두를 챙기고 간절한 의심을 밀어주어야 함이로다.

 

이렇게 바른 자세로 뼈골에 사무치는 의심을 짓고 화두를 챙겨갈 거 같으면,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눈앞에 화두가 떠나지 않아 졸리는 바도 없고 망상이 일어날려야 일어날 수 가 없는 것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가 무르익어지는 것이로다. 그렇게 혼신의 정력을 쏟아 무한히 노력하다보면 문득 참의심이 발동하여 화두의심 한 생각만이 또렷이 드러나게 되는데,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밥을 지으나 청소를 하나 직장일을 하나 잠을 자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 한 생각만 흐르는 냇물처럼 끊어짐 없이 흘러가게 됨이로다. 사물을 봐도 본 줄을 모르고 소리를 들어도 들은 줄을 모르게 됨이니, 다겁다생에 지어온 모든 습기가 다 녹아 없어져 버리게 됨이로다. 이러한 상태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남과 동시에 자기의 참 모습이 환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로다. 그러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여래(如來)의 땅에 이르게 되고 천 칠백 공안을 한 꼬챙이에 다 꿰어버리게 되는 것이니, 누가 어떠한 법문을 물어 와도 척척 바른 답을 내놓게 되는 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호왈견성(號曰見性)이요, 확철대오라, 반드시 선지식을 친견하여 바르게 점검받아서 인가(印可)를 받아야 함이로다. 왜 그러느냐?

 

광대무변한 진리의 세계는 도저히 혼자서는 다 알았다 할 수 없기에 반드시 먼저 깨달은 눈 밝은 선지식을 의지해서 점검받고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천마외도(天魔外道)다” 즉, 정법을 이은 선지식으로부터 점검받은 바 없이 깨달았다 하는 자는 천마외도(天魔外道)일 뿐이라고 못을 박아놓으신 것이로다.

 

이렇듯 대오견성하기 위해서는 선지식의 지도 아래 철두철미한 신심으로 간절하게 의심하며 화두를 챙겨가야 함이로다. 그러니 모든 대중은 이같은 자세로써 어떻게든 이번 안거 동안에 득력하여 불은(佛恩)과 시은(施恩)을 다 갚고 생사를 요달할 수 있도록 혼신의 정력을 쏟을지어다.

 

석일에 덕산(德山)선사께서 회상을 열어 대중을 지도하고 계실 때, 참으로 훌륭한 두 분의 눈 밝은 제자를 두었는데, 한 분은 암두(岩頭)선사로 참선하여 깨달은 바도 없이 그대로 생이지지(生而知之)요, 또 한 분은 훗날 천오백 대중을 거느리신 설봉(雪峰)선사였다. 하루는 덕산선사께서 공양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식당으로 걸어가셨다. 공양주인 설봉스님이 이 모습을 보고 여쭙기를, “조실 스님,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가지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 덕산선사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이고 조실방으로 돌아가 버리셨다. 그 광경을 설봉스님이 사형(師兄)되는 암두스님에게 말하니, 암두스님이 듣고는 대뜸 말하기를, “덕산노인이 말후구(末後句) 진리를 알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자신의 스승이건만 단 번에 이렇게 평가를 하니 법을 논함에 있어서는 스승과 제자를 따지지 않는 법이로다.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가지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 덕산선사께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간 뜻이 무엇이며, 암두스님은 어째서 덕산선사가 말후구 진리를 알지 못했다 했는지 알아야 함이로다.

 

암두스님의 그 말이 총림에 분분하여 덕산선사의 귀에 들어가니 암두스님을 불러서 물으시기를, “네가 왜 내가 말후구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고?” 하시니, 암두스님이 덕산선사의 귀에다 대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은밀히 속삭였다.

 

그런 후로 뒷날 덕산선사께서 상당하시어 법문을 하시는데 종전과 판이하게 다르고 당당하게 법문하셨다. 법문을 다 마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니, 암두스님이 덕산선사의 손을 잡고,

 

“정말 반갑고 즐겁습니다. 스님의 법은 천하 도인이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3년밖에 세상에 머물지 못합니다.” 하니, 덕산선사는 과연 3년 후에 열반(涅槃)에 드셨다.

 

암두스님이 덕산선사의 귀에 대고 은밀히 속삭인 대문을 아시겠습니까? 대체 무어라고 속삭였기에 덕산선사께서 종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당당한 법문을 하신 것입니까?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이 공안은 백천 공안 가운데 가장 알기가 어려운 법문이라, 천하 선지식도 바로 보기가 어려워 이 법문에 대해서 평을 한 이가 거의 없음이로다. 그래서 이 공안을 바로 보는 눈이 열려야 대오견성을 했다고 인정함이로다.

 

그러면 금일 모든 결제대중은 아시겠습니까?

 

산승이 양팔을 걷어붙이고 이 법문을 점검해서 천하에 공개하리니, 어째서 이와 같이 점검하였는지 대중은 잘 살필지어다.

 

馬駒踏殺天下人

 

臨濟未是白拈賊

 

한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니, 그 위대한 임제 선사도 백염적(白拈賊)이 되지 못함이로다.

 

~~~~~~~~~~~~~~~~~~~~~~~~~~~~~~~~~~~~~~~~~~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話頭(공안)  (0) 2015.12.05
참 나를 찿아라 (2)-진제스님  (0) 2015.11.29
명심견성(明心見性)  (0) 2015.11.27
식심견성(識心見性)  (0) 2015.11.26
우리말금강경듣기  (0) 2015.05.06

선종은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식심견성(識心見性)을 주장하는데, 명심(明心)은 마음작용을 명철하게 밝히면서 본성을 드러내는 것(見性)을 가리키며, 한편 명심견성과 식심견성 등은 돈오설과 맞닿아 있는 어구들로서 선종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명심견성의 관건은 본을 버리고 말을 좇는(捨本逐末) 중생들의 미함를 타파해(破迷)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범을 전해 성에 들게(轉凡入聖)하는 방편으로 수행 근본의 취를 삼았다.

 

심(心)은 성(性)의 작용이며 성은 심의 체(體)가 되며, 성을 여읜 심도 없으며 심(心)을 여읜 성도 없기 때문에 심성불이(心性不二)가 되며, 확철히 각오하는 것을 가리켜 명심견성이라 이른다. 불성을 보면 중생이라 칭하지 않으며, 견성은 성(性)의 작용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상생활 속에서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자유자재한 경계를 가리킨다.

 

때문에 성을 본즉 불(佛)을 보는 것으로(見性即見佛), “불(佛)은 내 마음으로 짓는 것이고, 심을 여의고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고, 부처를 여의고 다른 심(心)이 없으며, 심과 불(佛)이 평등해서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다”라는 것이다. 중생이 성(性, 본질)을 보지 못하고, 시종 성을 여의고 밖에서 성을 찾으면 무수겁이 지나도 부처를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선종은 먼저 명확하게 당하심 작용(當下心作用, 현재 마음작용) 파악하기를 강조하면서 먼저 당하 마음을 요지하지 못하면, 확실한 명심견성을 요지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즉심즉불(即心即佛),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돈견성불(頓見成佛), 일문천오(一聞千悟), 견성성불(見性成佛) 등 어구가 함축하고 있는 깊은 의미를 숙지할 수가 없다고 여겼다.

 

선종은 마음 작용에 매우 많은 중점을 두며 마음(心, 動, 용)으로 성(性, 체) 본질로 삼으면서, 한번 동념(動念)은 만 가지 망상을 일으키며, 한 번의 무념(無念)은 만 가지 망상을 소멸시킨다고 하는 일념의 작용을 매우 강조하기도 한다.

 

<단경(壇經)>에서도 “하나의 등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며, 하나의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소멸할 수 있으며”, 또 일념의 악보는 도리어 천년의 선심을 잃게 하며, 일념의 선보는 도리어 천년의 악을 멸(滅)하게 한다”고 하는데, 바로 일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일념은 곧 일심을 가리키며 각자 현재 마음작용 표명으로 일념의 순간작용이 지옥과 극락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으로, <단경>에서 “일체만법이 모두 자신 중에 있다(一切萬法盡在自身中)”는 것과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은 모두 마음작용처의 극대화 표현이라고 하겠다.

 

마음을 극대화한 내용은 경전 도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은 유독 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심의 작용을 극대화해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부처 마음을 쓰면 바로 부처가 되고, 도둑의 마음을 쓰면 바로 도둑이 된다(作佛用 作賊用)”라고 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으며, 마음작용을 최대로 활용한 선사로 마조를 꼽을 수가 있는데, 일찍이 “평상심이 바로 이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하는 구호를 들어서 일상에 직면한 현실 속에서 어떤 상태로 마음을 챙겨야 하는가를 제시했다.

 

대개 선종은 일념의 내외경계 작용을 표달할때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는 측면이 있었으며, 간접적인 표현(遮詮)과 직접적인 표현(表詮)을 오가며 선경(禪境)을 설명하곤 했다. 특히 복잡한 교리체계를 단순명료한 성묵연성설법(聖默然 聖說法, 성현의 묵언, 성현의 설법)으로, 설할 때와 설하지 말아야 할 때를 가려서 “설하데 설하지 않는 것이고(說而不說, 동중정) 설하지 않되 설하는 것(不說而說, 정중동)”이지만, 결국 “불설이지만 항상 설한다(不說而常說)”는 진공묘유한 상태로 명심견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열반경>에서 “불성을 보면 중생이 아니고, 불성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했듯이,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명심견성(明心見性) 하는 그날이 바로 삼계윤회사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될 것이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나를 찿아라 (2)-진제스님  (0) 2015.11.29
참 나를 찿아라 (1)-진제스님  (0) 2015.11.29
식심견성(識心見性)  (0) 2015.11.26
우리말금강경듣기  (0) 2015.05.06
금강경 듣기(승우)  (0) 2015.04.13

 

 

 

1. 식심견성(識心見性)

일체 만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서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즉시에 넓게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만법이 모두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 가운데로부터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서 말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 고 하였으니,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다 부처님 道를 성취하는 것이니
곧 넓게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어서 본래 스스로 구비하여 있거늘,
자기의 성품을 깨치지 못하였거든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성품을 볼지니라.


각각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래 성품을 단박 깨닫게 하되,
만약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졌거늘
다만 마음이 미혹하므로 말미암아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는 까닭으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망념이 소멸하면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라.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불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곧 큰 뜻을 깨치느니라.

앞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을 깨치면 곧 부처니라.
자성을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자기의 성품을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곧 부처니라.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나를 찿아라 (1)-진제스님  (0) 2015.11.29
명심견성(明心見性)  (0) 2015.11.27
우리말금강경듣기  (0) 2015.05.06
금강경 듣기(승우)  (0) 2015.04.13
우리말 금강경  (0) 2015.04.13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심견성(明心見性)  (0) 2015.11.27
식심견성(識心見性)  (0) 2015.11.26
금강경 듣기(승우)  (0) 2015.04.13
우리말 금강경  (0) 2015.04.13
무엇으로 보았느냐?  (0) 2015.03.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