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주(解脫呪)

(영가를 해탈시켜 천도시키는 주문)

 

영가위설 지심제청 지심제수(靈駕爲設 至心諦廳 至心諦受)

나무(南無) 동방(東方) 해탈주세계(解脫呪世界)

허공공덕(虛空功德) 청정미진(淸淨微塵) 등목단정(等目端正) 공덕상(功德相)

광명화(光明華) 파두마(波頭摩) 유리광(琉璃光) 보체상(寶體相) 최상향(最上香) 공양홀(供養訖)

종종장엄정계(種種莊嚴頂髻)

무량무변(無量無邊) 일월광명(日月光明)

원력장엄(原力莊嚴) 변화장엄(變化莊嚴)

법계출생(法界出生) 무장애왕(無障礙王)

여래아라하(如來阿羅訶) 삼막삼불타(三藐三佛陀) (3번)

 

 

<풀이>

동방으로 나아가서 해탈주의 세계시여

허공처럼 걸림없는 무애공덕 지니시고

아주작은 티끄람져 고결하고 맑으시며

단정하고 반듯한눈 공덕갖춘 모습이여

광명의꽃 아름답기 파두마와 같으시고

유리광명 보배의몸 상호두루 갖췄으며

가장좋은 향기로써 매우그윽 하시오매

두손모아 마음모아 지성귀의 하나이다

이공양을 마치옵고 거듭찬탄 하옵나니

정수리의 육계상을 갖가지로 꾸미시고

한량없고 가이없는 해와달의 광명이며

끊임없는 원력으로 고루장엄 하신이여

중생들의 근기까라 변화장엄 하옵시고

이법계에 출생하사 걸림없는 왕이시여

여럐시여 아라하여 삼먁삼불 세존이여

진여로서 오신이여 정등정각 이룬이여

이한생명 다바쳐서 지성귀의 하옵나니

저희들의 간절한뜻 이뤄지게 하옵소서

두손모아 마음모아 지성귀의 하옵나니

부처님의 크신뜻을 이땅에서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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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문 바 없이 마음이 나면 곧 부처님의 행


배휴가 물었다.[어떤 것이 세간의 이치[世諦]입니까?]["언어.문자에 얽매인 이치를 논하여 무엇하겠느냐? ][본래 청정한 것인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문답을 하겠는가?] 다만 일체의 마음이 없기만 하면 번뇌없는 지혜[無漏智]라 부른다.

 

네가 모든 언행에 있어 하염없는 법[有爲法]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말하고 눈 깜짝이는것모두가 번뇌없는 지혜와 같으니라. 지금 말법 시대에 접어들면서 참선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온갖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고 있다.이래서야 어찌 자기 마음을 여의었다고 하겠느냐?

 

마음이 허공같고 마른 나무와 돌덩이처럼 되어가며, 또한 타고남은 재와 꺼진 불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도에 상응할 분(分)이 조금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한다면 뒷날 모두 염라대왕에게서 엄한 문책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네가 다만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여의기만 하면, 마음이 마치 허공에 떠있는 햇살같아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자연히 두루 비추는 것이니, 이 어찌 힘 덜리는 일[省力事]이 아니겠느냐?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쉬어 머물 바가 없어서,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행을 하게 되고,'[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것이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청정한 법신이며 무상정등정각이니라.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지식을 배워 얻고 부지런히 고행수도하며풀옷을 입고 나무 먹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이니라.

 

이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 하며,정작 천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니,이런 식으로 수행을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지공(誌公 : 418-514)이 말하기를 '[부처란 본래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인데 어찌문자로 인해 구해지겠는가? ]설령 그렇게 해서 삼현(三賢).사과(四果).십지만심(十地滿心)의 지위를 얻는다 해도,그 역시 범부와 성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너는 보지 못하였느냐?'

 

모든 행위가 무상하나니, 이것이 나고 없어지는 법이니라'고 하였으며,힘이 다한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뜻대로 되지 않을 내생을 초래하리로다.어찌 하염없는 실상의 문[無爲實相門]에 한번 뛰어넘어 여래의 지위에바로 드는것만 같으리오' 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는 이 정도의 근기가 아니므로 옛사람이 세우신 방편문에서알음알이를 널리 배워야 하느니라.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뛰어 넘은 명철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法藥)을잘못 먹는 것이다.'고 하였다.네 지금 일거일동에 항상 무심(無心)을 닦아 오래오래 되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너는 역량이 부족하니 단박에 뛰어넘지는 못한다.다만 3년이나 5년 혹 10년만 지나면 반드시 들어갈 곳을 얻어 자연히 알게될 것이니라.그러나 너는 이렇게 해내지 못하고, 굳이 마음을 가지고 선(禪)을 배우고 도를 배워야 하니,그것이 불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시기를,'여래의 설법은 모두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이것은 마치 누런 나뭇잎을 돈이라하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따라서 법이란 결코 실다운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만약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종문(宗門)의 사람이 아니다.뿐만 아니라, 너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그래서 경에 말씀하시기를,'실로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는 것을 무상정각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만약 이 뜻을 알아 낸다면,부처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니라.본래 깨끗하여 환히 밝아 모남도 둥근것도 없고, 크고 작음도 길고 짧은 모양도 없으며,번뇌(漏)도 작위(作爲)도 없고 미혹됨도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항하사 대천세계(大千世界)는 바다의 물거품이요,모든 성현들은 스치는 번개불 같도다 '한 것이다.모든 것이 진실한 마음만 같질 못하니라.법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조사와 더불어 마찬가지여서어디 떨끝 만큼 이라도 모자람이 겠느냐.이런 내 말의 뜻을 알아 들었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니,이 생을 마칠 즈음에는 내 뱉는숨이 들이쉬는 숨을 보장치 못하느니라."

 ********원오당 한소리********


[배휴가 물었다."어떤 것이 세간의 이치[世諦]입니까?""언어.문자에 얽매인 이치를 논하여 무엇하겠느냐?본래 청정한 것인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문답을 하겠는가?다만 일체의 마음이 없기만 하면 번뇌없는 지혜[無漏智]라 부른다.]여기서 배휴가 물은 것은 세간의 이치즉 세제(世諦)을 뭍고 있다.세제란 출세간법과 반대대는 말이다.마명보살이 대승기신론에서 일심을 세간법과 출세간법으로 나누어 설명하듯이세간법은 일체의 제법을 말하며 유위법(有爲法)이고.출세간법은 무위법(無爲法)을 말하는 것으로 세간법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나 이 법은 다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므로 언어 문자에 얽매인 이치를 논해 무었하겠느냐법이란 원래 청정한 것인데 언설로 문답을 하겠느냐고 하신다.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는 법은 오직 무위법인 출세간법을 논할뿐이라고 하시면서모든 제법인 일체의 마음이 없기만 하면 여기서 말하는 제법은 법신을 제외한마음에 작용과 작용으로 드러난 덕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 작용을 떠난 본바탕인 법신에는 어떤 번뇌와 말상이 없음으로 이를 무루지(無漏智)라고 하여변함이 없는 지혜이니 이것이 바로 무위법(無爲法)인 것이며 무위에는 허공. 택멸. 비택멸. 멸진정. 부동.진여를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전부 법신을 칭하는 이름인 것이다.

 

이 무위가 바로 진여 법신이며 우리 마음에 체인 것이며, 무루지라고 하여 반야 지혜를 말씀하고있다.그러면 허망한 마음은 무엇이고 진실한 마음은 무엇인가?법신은 항주불멸하여 영원하고 보신과 화신은변하여 없으지는 것임으로 허망하다고 하였을뿐 일체제법은 하나같이 일심(一心)이요,작용면에서 나눈 것이지 다 부처인 것이다. [네가 모든 언행에 있어 하염없는 법[有爲法]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말하고 눈 깜짝이는 것 모두가 번뇌없는 지혜와 같으니라.]

 

만약 모든 제법을 쓰면서도 여기에 집착하거나 차별하고 시비하고 조작하지만 않는다면일체의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定)에 일체시 일체처(一切時一切處)가 다 있는 그대로 진실여상한 것이라는 것이다.[지금 말법 시대에 접어들면서 참선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온갖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고 있다.이래서야 어찌 자기 마음을 여의었다고 하겠느냐?]

선을 배운다는 것은 오직 마음을 버리는 공부이지배워서 얻어가는 공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온갖 소리와 빛깔등의 명색(名色)에 젖어 집착을 하고 이것을 배운다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참다운 공부일 것이며,마음이라는 이 모든 식심(識心)을 여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뭍고 계신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야 하는가.[마음이 허공같고 마른 나무와 돌덩이처럼 되어 가며,또한 타고 남은 재와 꺼진 불처럼 되어야 한다.그래야만 바야흐로 도에 상응할 분(分)이 조금 있는 것이다.만약 이와 같지 못한다면 뒷날 모두 염라대왕에게서 엄한 문책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마음이 한점 걸림없는 허공같고 부동의 경지인 마른 나무와 돌덩이처럼 되어가고타다 남은 재와 꺼진 불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조금은 상응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마음에 작용으로 제법을 일으켜 분별하고 조작하여 집착한다면 이것은 전부 허망한 것이며,인과의 도리에 따라 인과응보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네가 다만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여의기만 하면, 마음이 마치 허공에 떠있는 햇살같아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자연히 두루 비추는 것이니, 이 어찌 힘 덜리는 일[省力事]이 아니겠느냐?] 모든 유위법인 있다 없다하는 차별심을 내지 않는다면 바로 모든 것이 그대로 완전하여 무슨 일이 있겠는가?허공은 햇살이 비추어도 허공이고, 비추이지 않아도 그대로 허공인 것처럼 힘안들이고 모든 것을 그대로 구족해 있으니,무엇이 있어 걸리고 얽히어 시비에 빠져 고통받지 않을 것이며, 안심입명하여 편안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쉬어 머물 바가 없어서,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행을 하게 되고,'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것이 되느니라.이것이 바로 자신의 청정한 법신이며 무상정등정각이니라.] 이렇게 마음을 다 비워 허공처럼 된다면. 쉬어갈 것도, 머물 바도, 머물지 않을 바도 없이행하데 행함이 없이 행하는 부처님의 행을 하게되고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금강경의 구절처럼 무엇이 있어 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따르고 대경에 따라 일어나는곳도 없이 마음이 일어나는 것임으로, 이것이 바로 자신으로 보면 자성이요,법으로 보면 법성이요, 법계로 보면 진여요,부처로 보면 법신인 자성청정심인 본마음이요 본불(本佛)이 되는 것이라고 하시어, 이것이 바로 최고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신다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지식을 배워 얻고 부지런히 고행수도하며풀옷을 입고 나무 먹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이니라.이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 하며, 정작 천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머뭄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라는 근본 뜻을 모른다면 지식을 배워서 아는 견문각지나 부지런히고행수도하며 풀옷을 입고하여 투타행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전부 유위적 조작에 불과 한 것이니.이것은 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인과의 법칙에 따라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니.어찌 본래의 마음은 청정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상주불변하는 본래불을 알겠는가!하시면서 그 어떤 수도나 수행도 인과의 도리에 따라 지음으로 인한 결과 임으로그 결과에 따라 육취중생으로 각각 그 과보를 받을 것이니, 이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조작하여 만들어진 식심의 허망함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지공(誌公 : 418-514)이 말하기를 '부처란 본래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인데 어찌문자로 인해 구해지겠는가?설령 그렇게 해서 삼현(三賢). 사과(四果).십지만심(十地滿心)의 지위를 얻는다 해도,그 역시 범부와 성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지공화상의 말씀을 빌어 확실하게 증거를 든다.

일체의 모든 것이 다 내마음의 지음인 것인데 어찌 문자로 인해 구해지겠는가.설령 그렇게 해서 구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차별적 세계의 구분이지 원래 성인과범부가 없음을 어찌 알겠는가 하는 것이다.즉 성인이라고 하는 것도 내 마음이 이름붙인 것이요.범인이라는 것도 내 마음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너는 보지 못하였느냐?'모든 행위가 무상하나니, 이것이 나고 없어지는 법이니라'고 하였으며,힘이 다한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뜻대로 되지 않을 내생을 초래하리로다.어찌 하염없는 실상의 문[無爲實相門]에 한번 뛰어넘어 여래의 지위에바로 드는것만 같으리오' 라고 하였느니라.] 모든 행위가 무상하니니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안다면 어찌 얻을게 있으며 잃을것이 있겠는가.유위적 조작은 화살이 조금은 나가는 것 같지만 그 힘이 떨어지면 바닥으로다시 떨어지는 것과 같이 그 인연이 다하면 멸하여 본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그래서 인과를 지어 다시 내생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곳으로 간다고 하신다.

 

즉 내생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어서. 여기가 이승이라하니,다음생인 내생을 생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짓는 것임을 알아 허망한 식심을 벗어나 본래불에 계합한다면그 즉시에 무위실상문(無爲實相門)에 뛰어올라 바로 일촉지에 불지(佛地)에 이른 다고 하신다.[그러나 너는 이 정도의 근기가 아니므로 옛사람이 세우신 방편문에서 알음알이를 널리 배워야 하느니라.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뛰어 넘은 명철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法藥)을잘못 먹는 것이다.'고 하였다.]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는 배휴를 꾸짖어 그 정도로 근기가 모자라니 우선은 옛사람이세운 방편문에서 알음알이를 널리 배워서 가지고 다니지만 그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그러니 세간을 뛰어넘은 명철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대승의 법약인들 무슨 소용이있겠는가.

 

오직 스스로 벗어나는 일승법으로 해야지 사법을 실지하는 것으로 하여,그것을 배운다면 다 생사의 바다에 떠 있는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꾸짖고 계신것이다.그래서 여기서는 오직 스승을 잘못만나 알음알이에 속는다면 부처님의 뜻은 고사하고삿된길로 접어들 것이니. 스승을 잘 만나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네 지금 일거일동에 항상 무심(無心)을 닦아 오래오래 되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역량이 부족하니 단박에 뛰어넘지는 못한다.다만 3년이나 5년 혹 10년만 지나면 반드시 들어갈 곳을 얻어 자연히 알게될 것이니라.]그러니 이제 모든 식심과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고오직 이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나는 허망한 물결임을 알아,한 마음도 짓지않고 견문각지를 굴리지 않아 무심한 경지에서 있다보면몇년이 결리더라도 마음이 스스로 훈숙되어 식심은 사라지고 본 바탕이 들어날 것이라고 일러 주신다.

 

[그러나 너는 이렇게 해내지 못하고, 굳이 마음을 가지고 선(禪)을 배우고 도를 배워야 하니,그것이 불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그러나 배휴 자네는 굳이 마음을 가지고 알음알이로 선을 배우고 도를 배워서 이루어 지는것으로 알고 있으니,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뜻을 등지는 것이며, 그렇게 하였어는 겁이 지나고세월이 흘러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시기를,'여래의 설법은 모두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이것은 마치 누런 나뭇잎을 돈이라하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따라서 법이란 결코 실다운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만약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종문(宗門)의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팔만사천법은 전부 사람의 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세운 방편법이지,법이 실지로 있음이 아니며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하는 것임을 밝히고 조사들의 선기방편은그 어떤 법도 세울게 없으며 원래 마음의 지음을 일러 법이라고 하였을뿐 모든 것은 마음바탕을 떠나서 세울 것도, 얻을 것도,구할것도, 지을 것도, 없음을 알아.모든 마음에 억매이지 않고 벗어나고. 벗어났다는 것 마져도 벗어나야 만이 진정 이런 사람이라야우리 종문의 사람이지 배워서 채워가는 사람은 우리 종문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뿐만 아니라, 너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그래서 경에 말씀하시기를, '실로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는 것을 무상정각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만약 이 뜻을 알아낸다면, 부처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니라. 본래 깨끗하여 환히 밝아 모남도 둥근것도 없고, 크고 작음도 길고 짧은 모양도 없으며,번뇌(漏)도 작위(作爲)도 없고 미혹됨도 깨달음도 없다.] 이렇게 모든 유위의 법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는 그 생각까지 벗어나야 하며,그 어떤 것에도 걸리거나 세우거나 막히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실로 얻을 만한그 어떤 것도 없음을 알아야 만이 무상정득각이라고 하시면서 이런 뜻을 알아야부처님의 도나 마구니의 도까지도 다 벗어나야만이 번뇌망상이다,

 

반야지혜다, 깨달음이다, 미혹함이다,하는 것 마져 벗어나야 하며 이것은 다 방편으로 세운 명색(名色)이며 실지 하는그 무엇도 없음을 알아야 만이 바로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자유인이 된다고 설하시고 계신 것이다.[그러므로 말하기를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항하사 대천세계(大千世界)는 바다의 물거품이요,모든 성현들은 스치는 번개불 같도다 ' 한 것이다.]그러니 무심(無心)이라는 명색이 아니라 실지로 그 어떠한 마음도 없는 경지에서 이르러 본다면중생이라는 것도 부처라는 것도 삼천대천세계마져다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인 것이다.그러니 선지식을 말은 번개불같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받아들여야 옳은 안목을 길러 견처가 생기고 행리처가 달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모든 것이 진실한 마음만 같질 못하니라. 법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조사와 더불어마찬가지여서 어디 떨끝만큼이라도 모자람이 겠느냐.이런 내 말의 뜻을 알았들었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니,이 생을 마칠 즈음에는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을 보장치 못하느니라."]

 

그러니 유위조작으로 이루어진 허망한 식심(識心)을 마음이라 잘못알지 못하고 진실하여허망함이 없는 법신을 증득해야 하며, 옛이나 지금이니 부처나 조사가 모두 본 마음인 법신을 말하였지.다른 마음이 아님을 알아야 하며, 고요하여 담담히 비추이는 이 경지만이 진실한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무심한 경지에서 담담히 발을 옮길 지언정 허망한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난물거품 같은 경계에 휘들려 알음알이인 견문각지를 떠나 상주불변한 법신을 경지를 투득하지 못한다면이 생을 마칠 즈음에는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을 보장치 못하느니라 하시면서함이 없는 무위적 불도를 간절히 지어가시라고 하시면서 법문을 마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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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當何名此經(당하명차경)이며 我等(아등)이 云何奉持(운하봉지)리잇고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是經(시경)은 名爲金剛般若波羅密(명위금강반야파라밀)이니 以是名字(이시명자)로 汝當奉持(여당봉지)하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蜜(불설반야바라밀)은 卽非般若波羅蜜(즉비반야바라밀)이니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所說法不(유소설법부)아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如來(여래)-無所說(무소설)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三千大天世界所有微塵(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이 是爲多不(시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제언)하사대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諸微塵(제미진)은 如來說非微塵(여래설비미진)이라 是名微塵(시명미진)이며 如來說世界(여래설세계)도 非世界(비세계)라 是名世界(시명세계)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32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不可以三十二相(불가이32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三十二相(여래설32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名三十二相(시명32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으로 布施(보시)어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甚多(심다)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전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전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가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니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어떤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신 바가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먼지의 수를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심히 많사옵니다, 부처님께서시여.』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먼지를 먼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께서 말하는 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이름이 세계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오면 여래께서 삼십 이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라 이름을 32상이라 하시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몸과 생명을 가지고 보시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 내지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그 복이 심히 많으니라.』

 

 

第十三 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지니다

 

[科 解]

 

이제 오늘 저녁엔 제 십삼분(第十三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인데 부처님 뜻에 어기지 않도록 이 경전을 받아 가진다, 수지(受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의 문자(文字)를 받아 가지는 형편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이 문자이전(文字以前)의 실상(實相) 자리의 내용을 체득(體得)해서 수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완전히 성불(成佛)해 가지고 부처님을 수지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범부가 우선 부처님 흉내라도 내어야 할 것이니 먼저 근본적으로는 견성을 해라. 그래서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중간 보살이라도 되어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라.」 그것이며 나중에 필경에는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법을 지니는 것을 법답게 진리와 같이 이 경전(經典)의 정법(正法)인 부처님 법을 받아 가진다는 뜻으로 여법수지(如法受持)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 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解 義] 이제 수보리 존자께서 40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밤낮 없이 많이 듣기는 했지만 질서 정연하고 조리(條理)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지 배우기만 하면 제나름대로 깨닫고 했는데, 이번에 금강경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니 참 그야말로 대각세존(大覺世尊)이시라고 느껴졌고 마음이 기뻐서 「이 경전 이름을 뭐라고 저희들이 이름하여 받들어 모시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경 제목을 약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셨습니다. 이 금강경의 금강철퇴를 가지면 무엇이나 두들겨 부수어서 안 깨지는 것이 없고 다른 것을 가지고는 이것을 깨뜨릴 수가 없는 보물(寶物)입니다. 이것은 여물기만 해도 안 되고 날카롭기만 해도 안되며 굳세고 날카롭고 아주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면서 만사만능(萬事萬能)하며 환하게 통달해서 세간중생들 법이나 출세간의 성불하는 보살들 법이나 부처님세계 할 것 없이 하나 빠짐 없이 환히 다 통달한 지혜에 견주어 붙인 이름이 금강입니다. 말하는 이 자리 말 듣고 앉은 자리, 그 자리가 불멸의 존재고 영원불멸의 생명체인 동시에 만사만태(萬事萬態)를 다 통달해 가진 금강반야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금강에다 이 마음 자성자리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지혜이므로 반야라 한 것이니 반야는 곧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지식은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것으로 이런 지혜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본분(本分)을 망치도록 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을 결과적으로 지옥으로 보내고 꽁꽁 뭉쳐져서 생사에 윤회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뿐입니다. 금강과 같은 그런 존재가 있는데 말하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는 것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참된 반야고 지혜입니다. 이렇게 자성(自性)만이 오직 있는 참 구공(俱空)까지 된 그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인데 그러나 그 실상반야를 깨달아 가지고 거기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소승나한(小乘羅漢)이 되어 버릴 뿐이므로 그 때문에 성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행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복혜쌍수(福慧雙修)입니다. 그 방법은 곧,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여섯 가지인데 이 육바라밀(六波羅蜜) 중 마지막 바라밀인 지혜바라밀 하나만 빼 놓고는 앞의 선정하는데 까지는 전부 복을 닦는 수행입니다. 한량 없는 복 닦는 방법이니 우주를 점령해서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그만한 신통조화(神通調和)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 앞에 다섯 가지 복짓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지혜바라밀이 곧 복혜쌍수(福慧雙修)인 것입니다.

또한 이런 법을 다 듣고 그렇게 해야 하겠다고 깨닫는 그것이 반야이고, 필경 견성(見性)까지 해서 견성한 뒤에 하는 수도(修道)가 진짜 수도인데 그렇게 해 가지고 수지(受持)해 올라가야겠구나 하는 것도 내내 그 자리가 하는 것이고 수지 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야입니다.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이름하라 하셨고 이런 뜻으로 받들어 지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 羅蜜 是名般若波羅蜜

 

[解 義]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지어 가지고 가지라했느냐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반야바라밀 . 관조반야바라밀 . 실상반야바라밀의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이제까지 그게 실지로 말하면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서 이 문자반야는 어떻고 또 관조반야는 어떻게 살피는 것이라 했지만 실은 살필 것도 없다. 마지막 자성자리인 실상반야는 어떻고 어떤것이라 설명 했지만, 또 그래서 그것을 실천해서 바라밀을 해서 부처가 되고 하는데 지혜가 제일이니까 그랬지마는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닌 것이므로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긍정하시는 것 같으면서 부정하시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으로 언제나 같은 말씀 같은 그런 내용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 말씀하시는 구절(句節)에 의지해서 그 구절은 해결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여지껏 고구정령(苦口丁寧)으로 이십년 동안 설명하셨는데 이제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문자나 반야에 의지해서 걸려 있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보시하는 것이나 계행 가지는 것이나 인욕이나 다 잘하면 세상에 알려지고 저절로 밖으로 드러납니다. 또 정진하는 것도 모두 보고 알 수가 있고 또 선정한다고 앉아 가지고 며칠씩 먹지도 않고 하게 되므로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요새 미술가 들도 선정과 같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한 일 주일씩 안 먹고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구상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굉장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일 주일씩 어떤 땐 한 달씩 자기도 모르고 앉아서 구상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일종의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가면 자연히 지혜가 나옵니다. 이 여섯가지 바리밀 가운데 구경(究竟)에 들어가면 다 하나가 됩니다. 이금강경은 반야바라밀을 밝히는 경전이고 반야를 역설(力說)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복짓는 수행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수즉파파즉수(水卽波 波卽水)로 물과 물결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 처럼 복 짓는 것이나 지혜를 닦는 것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반야바라밀을 그렇게 애써 설명했지만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 해라.」 하신 말씀에 이해가 잘 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역시 같은 뜻입니다. 견성하기 위해 참선한다고 벽을 향해 돌아 앉아 있지만 그것은 초학자(初學者)가 금강반야(金剛般若)를 체득해야 하겠으니 이 마음자리를 깨닫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지, 실상금강이란 마음자리에서는 그것은 다 버려야 할 지식 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반야의 실체는 아니고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하느라고 이름한 것 뿐입니다.

바라밀이다, 도피안이다, 하는 말은 생사니 번뇌니 망상이니 하는 것이 떨어져서 불생불멸하고 영원불멸하는 생명체가 온전히 티 하나 없이 드러나면 도피안이고 이것을 성불했다, 생사를 해탈했다, 그럽니다. 그때 가면 일체가 무소부지(無所不知)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본체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걸 설명하느라고 금강이니 반야바라밀이니하고 또 부인(否認)하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마음 자체가 곧 반야바라밀이 다 되어 있습니다. 이미 말씀은 다 끝나신 것이지만 이것을 문자로 설명하면서 틀림없이 이론으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일을 위해 「불설 반야바라밀은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니라.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 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解 義] 『수보리야!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한 게 있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한 바 아무 법도 없으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시고 다녔지만 한 번도 입을 떼신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반야경을 네 곳에서 십 육회의 법회를 가지면서 설법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한 법이 있느냐?」 물으니까 「아니 올시다. 부처님께서 입 떼신 일도 없고 언제 누구 보고 법문한 말씀 못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지금 계속 얘기하시고 계시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실상반야는 말로나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고 문자로 기록 할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당신께서 소개하고 싶은 것을 소개하는 말씀이 아니라 필경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는 자리고 말로서는 소개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깨친다고 하는 것은 번뇌 망상을 제거해서 장난치던 그 사람이 장난 안 하고 앉아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당 지옥의 생각을 해서 꿈을 꾸고 돌아 다니다가 꿈 꾸는 생각을 걷어 버리니까 눈뻔히 뜨고 꿈꾸는 것이고 꿈을 깨 놓고 보면 잠 자본 일도 없고 꿈꾼 일도 없고 그렇습니다. 꿈속에도 그 사람이고 꿈 밖에도 그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실 부처님께서 당신 말씀하고 싶은 그 얘기를 한번도 얘기해 보지 못합니다. 꿈 속에서 꿈꾸는 사람한테 나도 꿈꾸는 몸뚱이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 꿈속에 들어가서 얘기를 실컷 하는 격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그저 헛말 하고 앉아 있는 것이고 잠꼬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잠꼬대를 가지고 얘기한다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보면 꿈속에서 하던 일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보리 존자 말씀이 「부처님께서 언제 무슨 말씀하셨습니까?」하고 반문을 했고, 부처님께서도 「네 말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몽중지사(夢中之事)니 꿈꾸는 중생들과 상대하는 얘기인데 또 다시 술에 취해 가지고 여기가 동쪽인지 남쪽인지도 모르고 헤메는 판이므로 이렇게 달래 주는 것이지만 턱도 안 닿는 얘기입니다. 비록 술이 취해서 정신의 착란을 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잠꼬대 같은 말을 가지고「내가 말한 일이 있느냐」고 하니까 「말이 안됩니다. 금강경이고 반야고 이걸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그게 무엇인지 그 주인공 주체를 찾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어떤 법도 금강경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 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解 義] 부처님께서 또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십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한 그 전자의 수가 많으냐 많지 않으냐?』 하셨는데, 수보리존자 경계로 봐서는 우리가 콩 한 개 보는 만큼 쉽게 압니다. 그래서『참 많습니다, 세존이시여.』하고 사뢰었습니다. 그러나 수보리 존자의 경계로 봐서는 엄청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일반 중생을 대신해서 하는 말씀이므로 「참 많으옵니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수보리야! 이 먼지 이 미진 그것을 부처님은 미진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미진이라고 내가 설명했던 미진이 그게 곧 미진이 아닌데 그것을 미진이라고 말하며, 여래께서 말하는 세계도 세계가 아니니 이 이름이 세계니라.」하셨습니다. 천백억 지구덩이 별세계가 모인 것을 사바세계라하고 극락세계도 무수한 불세계(佛世界)중 하나인데, 화엄경(華嚴經) 같은 데에서는 화장찰해(華藏刹海)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맨 밑에 무한대의 허공 가운데서 무엇 하나를 근거로 해 가지고 이십중광대찰(二十重廣大刹)이 이루어져서 스무 층의 세계가 벌어집니다. 이 한 층계 세계의 거리가 얼마냐 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열 배, 곧 백억의 지구의 열배에 해당하는 세계를 부순 먼지를 십중찰미진수(十重刹微塵數)라 하는데 이 미진수가 다하도록 별나라 하나에 먼지 하나씩 놓아서 이 미진수가 다 하도록 무한히 올라간 거리 그것이 화장세계의 한 계층의 거리입니다.

여기서 찰(刹)자는 절찰자로만 알지만 세계란 뜻입니다. 십중찰세계 곧 지구덩이 백억배에 해당하는 삼천대천세계의 열 배나 되는 지구덩이들을 전자나 원자로 환원시킨다면 그 수가 불가사의한 무한대의 수일 것입니다. 불보살이나 헤아릴 수 있는 이렇게 많은 수의 전자 원자를 가지고 지구덩이 하나 지나갈 때마다 한 개씩 놓고 올라가서 그 전자가 다하도록 수 없이 많은 지구를 일직선으로 통과해 올라갑니다. 이렇게 해서 십중찰세계의 미진수가 다 하도록 올라가서 이렇게 하기를 동서남북과 네 간방(間方) 상하방(上下方)의 사방으로 다 올라간 세계, 거기엔 부처님 계신 세계도 있고 안 계시는 세계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안 계신 세계는 범부 세계인데, 지금 우리 세계는 불세계 아닌 것으로 됐습니다. 그렇지만 대장경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아주 불세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십주찰세계의 전자 . 원자가 다하도록 한 것을 한 계층으로 해서 이렇게 이십층이나 올라간다고 그랬는데 이것이 하나의 화장찰해입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도 이렇게 광대무변한 세계는 측정(測定)하지 못했는데 부처님 께서는 그렇게 굉장한 세계를 설명해 놓으셨지만「그건 세계가 아니니 그래서 세계라고 하느니라」 그러셨습니다. 「미진은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하고 세계가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세계라 한다.」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32상으로, 부처님의 설흔 두가지 거룩한 특별한 상과 여든가지 뛰어나게 생긴 모양(八十種好)으로 여래를 친견(親見)할 수 있느냐? 부처님을 뵐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 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어째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32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이것이 상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삽이상>이라 하신 것이옵니다.』

부처님의 32상도 비록 육도 만행(六度萬行)을 하고 억만겁 동안 몸뚱이와 온갖 것을 남을 위해 보시한 공덕으로 얻어진 거룩한 상호(相好)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역시 세계나 먼지 처럼 상대적으로 있는 허망한 거짓 존재이며 따라서 상(相)이 아닙니다. 육체의 오장육부(五臟六腑)나 혈액(血液)과 신경(神經)등이 다 물질에 불과하고 그 물질은 곧 있는 것이 아니므로 32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2상 이라고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역시 다생겁(多生劫)으로 보살의 인행(因行)을 닦으면 그 정도에 따라서 상호도 거룩해지고 하나하나 갖추어지게 되며 그래서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밝힌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 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 他人說 其福甚多

 

[解 義] 『수보리야!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몸뚱이와 생명을 가지고 보시를 했다면 옷 없는 사람 . 돈 없는 사람 . 밥 없는 사람을 위해 돈도 주고 옷도 주고 재산 다 털어 주고 나서 더 줄 것이 없으면 코도 떼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기를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몸을 버려서 보시한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 가운데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잘 수지해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심히 많나니라. 삼천대천세계에 먼지 수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나면 그 복이 한량 없을 겁니다. 그러나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 했다 해도 그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니고,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몸만 남한테 보시 했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남에게 설명해 주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리불 존자가 공부하고 앉아 계시는데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부처님 제자이시죠. 부처님 제자는 다 대자대비 하시다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다 보시 할 수 있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스님 왼 눈이 하나 필요한데 빼 주실 수 있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눈을 빼 줍니다. 그 사람은 그걸 받아서 더럽다고 탁 침을 뱉아가지고 집어던지더니 발로 비벼서 짓이겨 버립니다. 남은 애써서 아픈 눈울 빼서 줬는데 필요 없어서 내 버리더라도 자기 안 보는 데 가서 했으면 좋을 텐데 그 빼 준 사람 앞에서 그러니 아무리 사리불이라 해도 마음이 동해서 고약한 놈이라고 속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아 스님이 발심을 덜 했습니다. 철저히 발심을 했으면 내가 그걸 갖다가 똥 속에 집어 넣거나 발로 밟아 버리거나 주는 것 뿐이요. 무심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안색을 보니까 속으로 마음이 동한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응무소주한 보시가 아닙니다.」 하면서 자기는 제석천(帝釋天)인데 스님을 시험해 보느라고 그랬다고 하면서 부처님 비슷한 제석천의 본신(本身)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나는 그것도 못합니다.」 사리불 존자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 깨닫기 전이라도 이런 경전을 읽고 배워서 마음을 조복을 받고 항복하는 법을 익혀 나가면 자기 목을 못 빼 준다 하더라도 이 목을 못 빼 줄 때 마다 마음이 아프고 참회가 되고 진실히 중 노릇을 잘 하고 인욕도 하고 보시도 하고 모두 잘 할 줄 알면 깨친 뒤에 훨씬 수월해 집니다. 경을 읽을 때 마다 하루에 열번 읽어도 읽을 때 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나고 꼭 이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지나가다가 개가 날 보고 짖으면 마음에 부끄럽고 부처님 뵙기에 황송하고 신도를 대하기에 얼굴이 화끈하고 이런 식으로 정진되어 올라가야 오늘은 안 돼도 내일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법문 들을 때만 그렇겠다 생각해 놓고는 개가 짖거나 말거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런 식으로 되어서는 천만 겁을 가도 큰 수행이 안됩니다. 내 것을 주고 내가 다 참아야 할 것을 남더러 주라 하고 참아 달라고 해도 안 되는 일이고 내가 참지 않으면 안 되고 내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설사 억만겁을 두고 몸뚱이를 보시하고 재물을 보시하고 큰 공덕을 지었다 해도 그것은 물질로 지은 복이고 몸뚱이라는 형상으로 지은 공덕인데 물질이나 몸뚱이 자체가 허망한 존재이고 상대적인 한계가 있는 존재이므로 그 공덕 또한 무한대한 절대적 공덕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또 상대적인 공덕으로는 생사를 해탈 할 수가 없고 자기 자성을 체득하지 못한 중생의 경계일 수밖에 없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는 자성을 깨달아 우주를 소유하고 주재하며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탈하여 영원불멸의 대성자인 부처님을 성취하는 비결(秘訣)이므로 그 복이 비교도 안되게 더욱 많다(其福甚多)고 하신 것입니다.

 

 

[說義]

 

문자반야는 곧 실상반야

반야라는 말은 우리말로 눈이 보배란 말이고 소견(所見)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소견이란 말은 역시 지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도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머리를 아무리 쓰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탐진치(貪嗔痴) 욕심만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사람이 제가 미친 줄 모르듯이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욕심을 더욱 더 부릴 따름입니다. 그러나 옳든 그르든 세상의 지혜도 반야는 반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경의 제목을 풀이할 때 반야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지만 관조반야(觀照般若) . 실상반야(實相般若) .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가 실상은 하나입니다. 문자반야인 이 경전이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실상반야 . 관조반야의 조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므로 이 뜻을 나중에 참말로 성취하고 보면 문자반야가 곧 실상반야고 그래서 문자가 곧 실상이고 문자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곧 마음자리입니다. 그 실상반야가 있다는 것도 문자가 소개해서 알고 관조반야를 옳게 가지는 방법도 역시문자가 지도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문자가 역시 참으로 소중해서 이 경전이 계시는 데는 곧 부처님께서 계시는 데고, 이 경전을 설명하는 분은 곧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라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래서 이 경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 조리가 어떤 것인지 똑 떨어져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산 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 아는 목전지사(目前之事)를 설명한 것이니까 수보리를 불러서 「개미나 굼벵이를 하나 놓고 이 자체가 금강반야바라밀이니라.」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굼벵이나 지옥 중생이나 천당 중생이나 누구든지 지도를 하면 전부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이니 이게 모두 그런 것을 설명 해놓은 말씀이고 사람이 모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금강경 본문울 말하기 전에 이것이 지금 완전히 꿈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자니 전자니 하는 것 그게 그대로가 환의 존재인데,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인 사실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자가 인식하듯이 그런 전자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진공이고 없는 존재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유정 무정 이것도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일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하면 금강경 설명 다 된 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러기 때문에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했다.」하셨으니, 이러면 설명이 다 된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강경 한 번 죽 들어서는 어느대문에 어떤 내용의 골자(骨字)가 있는지 기억에 잘 안 남지만 이것을 천독 만독(千讀萬讀)을 하면 확실히 내 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듭 거듭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이것이 문자반야바라밀이고 이 문자반야바라밀이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반야를 차차 자꾸 익혀서 실제로 알아지고 깨닫게 해 주는 공덕이 되기도 합니다.

혹 무한동력(無限動力)을 말하지만 아무리 물질절대론자(物質絶對論者)가 있다 해도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절대적 존재란 하나도 없는 것이 현상계인데 무한동력도 마음 내 놓고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이것만이 아무렇게나 해도 죽지도 않고 가만 있지도 않고 사실상 무한동력입니다. 제가 내었던 욕심을 만족하려고 할 때 가령 안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욕심은 무한인 만큼 남이 나를 죽이려고 해서 하나가 달려들면 하나 죽이고 둘이 달려들면 둘울 죽이고 백명이 달려들면 백명을 다 죽입니다. 또 27억이 다 달려 들어도 할 수만 있으면 27억을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악할 때는 무한히 무섭고 악하기도 하면서 또 가장 착하기도 한 존재이어서 착한 생각을 내면 이보다 더 착할 수 없는 짓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역설하셨고, 내가 그것을 또 어떻게든지 바로 인식하도록 하려고 애를 써서 이야기했습니다. 말 하고 있는 이 자리, 말 듣고 있는 이 자리가 실상입니다. 실존철학자(實存哲學者)들이 말하고 있는 바 그 실존 자리는 산 보면 높다 하고 물 보면 깊다고 알 줄 아는 자리, 공산당은 죽일 놈들이라고 서로 적대시하는 그 자리가 실상자리입니다. 허공도 그 생각 못 내고 물질도 그 생각 못 내는 것이니 이 실상자리 빼 놓고는 그런 생각 내 놓을 곳이 없습니다. 육체도 못 내고 아무 것도 못 내는데 오직 마음자리 이것 하나만이 그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밤에 켜 놓은 촛불처럼 항상 드러나 있고 이것은 숨을 곳도 없고 사라질 곳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리입니다. 깨달아야 하겠다는 생각, 견성해야 하겠다 또 무엇을 체득해서 증득을 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막히게 되고 그게 역시 장애입니다. 이 자리는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이 얘기하다가, 법문을 듣다가 깨치고 육조대사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법문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리는 게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어디 이론으로 설명할 정도로는 그렇게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을 어디까지나 깨쳐야 하겠다는 이것이 가장 큰 근본지장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견성하기가 아주 쉽다는 겁니다.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산 보면 높은 줄 알고 미운 것 보면 밉다고 싸우기도 하는 이것이 금강반야입니다. 또 보리심을 발해 가지고 닦는다고 하는 것이 금강의 용(用)인데, 실상이 용이고 용이 실상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깨달아 체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개념이나마 확실히 그렇겠다고 생각해야 이것이 불교를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신심(信心)이 튼튼해집니다. 범부로서 일으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곧 자성(自性)에 대해 그 존재가 어떤 거라고 개념으로나마 깨치기 전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처님께서 설명을 자주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사실 부처님께서 애써서 소개하시고 싶은 것은 말 듣는 그 자리, 일체 시비언설(是非言說)이 다 끊어져서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곧 이것이 없는 거로 있는 거고 있는 것으로 없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 논리를 초월한 자리이지만 부득이 억지로 말을 붙여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이므로 실상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소개하고 싶어하는 그 내용은 문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역시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마치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전체가 그대들 마음이라.」고 하신 육조대사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만들었지, 그 자체가 어디 이름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 아무리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그런 무슨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인식을 하고 그러지만 그 실상과는 멀리 어그러집니다. 그 실상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가진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붙이라고 하는 것이니 실지는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놈은 이름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얘기 듣고 추상(推想)할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고 생각조차도 아니란 뜻입니다.

 

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口頭禪)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회에 나간 말입니다. 선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 하는 것, 책임 없는 말, 실천 없는 말을 뜻하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서 장난에 정신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羊車) 사슴수레(鹿車) 소수레(牛車)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 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동안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 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자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박고봉(朴古峰)스님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스님인데 만공스님(宋滿空)제자입니다. 한번은 고봉 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굴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만공아, 네가 견성을 했어, 이 도둑놈아, 견성을 좀 내놔 봐라.」 이렇게 욕을 한 나절이나 퍼부어 놓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구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찧을 수도 없는 것인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이 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 밖에 없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 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 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는데, 만공스님 혼자 앉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서 갭니다. 우리가 평생에 만공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울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 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 오고 그랬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스님의 힘이 훨씬 셉니다. 그것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 까지 들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비구가 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 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 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스님은 「허 허」하며 돌아 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때리는데 바윗돌이 갈라져서 몇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도 없는 거고 칭찬도 할 수 없는 거고 껍데기가 욕을 할 거고 욕은 실제로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인데 화를 낸다는 것은 더 우스운 알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에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엔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래의 면목을 보면 그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간 잘못 하거나 시장을 돌아 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 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趙州)스님이라는 굉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리 밖 산 밑에 한 노인이 호떡 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조주 스님을 한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 행인은 바로 가는 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불러놓고는 아 그리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도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부터 바로 길을 가르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쪽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켜 주고 스님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조주스님이 당장 주장자를 들고 「오늘 이자를 타살(打殺)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리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地獄業報)를 적게 받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려 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럼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비뚜로 가르쳐 줍니다. 조주 스님은 가리켜 주는 대로 얼마를 가니까 또 불러서 잘못 됐다고 다시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난다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 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 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시오. 천번 만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窮極體)인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욱 분석이 돼서 전자니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 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성자로 보이고 어떤 때는 그게 또 그것도 저것도 아닌 에너지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강강도 댕댕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한 가지 입니다.

그러니 아인쉬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지 아닌 이 이치까지는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事物)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을 때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 똑 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을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로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마는 딱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를 해 가지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 놓은 그 시간 부터 숨쉬는 시간 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찰라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完成品)의 반만 만들었다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을 하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맡는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불자(佛字)도 안 들어보고 하는 소리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비세계(非世界)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학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닌 과학 . 종교가 아닌 종교 . 초과학 . 초 종교인 동시에 초(超)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 억만배 했다면 말이 안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뵈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막이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 지언정 이런 원리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미진 전자 같은 요소(要素)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라고 말하고 중생이라 말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지 자꾸 베껴 보면 껍데기뿐이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 처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 에너지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가서 소모되고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을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 산소 . 수소로 보면 보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천여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 칠십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 데 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색즉시공 공중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진공(眞空)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고 있은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이고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것도 거리낄게 없는데 괜히 쓸데 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 손이 통과 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 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건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도 그렇고 동시에 바다 . 물 . 보배다 하는 현상계의 존재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저거는 중공이다.」 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하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도 있는거고 만일 천지가 날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라고 하는 생명의 실재(實在)로 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고 얽히게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5천년 문화와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존재하는 것인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한 데서 잘못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재를 깨닫는 것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현인(賢人)이나 성인(聖人)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에도 못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이고 꿈이고 환(幻)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니 미진이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여주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 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인쉬타인은 수박겉 핥기로 조금 얘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 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 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 게 아니고 아무 쓸데 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물 삼자(施受物三者)가 청정한 것입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 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주고 하면 그 복이 한량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닌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 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겠지만 그러나 아까 조주스님(趙州)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打殺)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 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滿空)이 절구공으로 고봉(古峰)스님을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법 다웁게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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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 명상`으로 자유로워지기/법상스님

 

 

 

 ​한 거사님의 고민은 진급에 대한 불안에 있고, 한 보살님의 고민은 사업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있다.

 거사님은 토끼 같은 자식들 공부라도 다 시키려면 어떻게든 끝가지 버티면서 진급에 목메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보살님은 벌여 놓은 사업이 왜 신통치 않은지 날이 갈수록 고민만 쌓인다.

 

 그런데 어느 날 설법을 듣고, 방하착에 대한, 무집착에 대한,그리고 공의 명상에 대한 가르침 대목에서 큰 깨달

 음이 있었다.

 조금 내려놓으니 답이 없었던 것이,완전히 내려놓아 보니 시원한 답이 나왔던 것이다.

 자식들 공부 시키고, 마누라 월급도 갖다 줘야 하고,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진급도 해야 하고,

 특히, 자식 공부 끝날 때 까지는 포기할 수 없다고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진급, 직장에 대해

 완전히 내려놓아 보았더니, 그래도 죽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진급 안 하면 우리 가족 다 죽는 줄만 알았고,해결책이 없을 줄만 알았고, 진급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만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사실, 정녕, 결정코, 그런 것인가?

 

 결코 진급 없인 안 되는가? 하고 냉정하게 물어 보았더니,그렇지는 않더라고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진급 까짓 거 안 되면 어떻게든 죽으라는 법이야 있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는 마음으로 내려놓아 보았더니,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기가 한결 수월해  지더라는 것이다. 보살님도 마찬가지다.

 사업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내가 어떻게 일구어 온 것인데,어떻게든 한 번 빛을 보고야 말 것이라고,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사업인데,^이걸 놓으라고'절대 그럴 수 없어‘스님이 뭘 안다고 놓으라는 거야?

 남 사정도 모르면서’‘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단 말이야’ 하고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사업,

 그것을 까짓거 마음으로인데 어때 하고 받아들이고 났더니,까짓 거 놓아볼 용기가 생기더란다.

 그래 사업, 내가 젊었을 때부터 일구어 왔고,어렵게 어렵게 이렇게까지 끌고 왔는데,

 한번 크게 성공도 못 하고, 본전도 못 찾고, 남들에게 성공했단 소리도 못 듣고,

 여기서 끝내라고? 절대 할 수 없을 것만 같더니,한번 놓아 보자 한 생각에 내려놓고도 살 수는 있을 것 

 같더란다.

 억울하지만,그리고 아깝지만,까짓 거 내려놓을 수도 있겠더란다.

 그렇게 내려놓고 났더니,그제서야 속이 후련해 지더란다.

 이제까지 그 사업으로 인해 속 끓이고,골치 썩이고, 괴로워하고, 자식들과 놀아주지도 못하고,

 신경도 못 써주고, 몸도 못 돌보고, 못 먹는 술도 먹어야 하고,그 모든 것들이 까짓 거 한 번 놓겠다는 

 마음 내 보았더니, 못 놓을 것도 없고,오히려 속이 후련해 지더라고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그렇게 마음에서 짐을 내려놓고 실제 포기한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은 훨씬 편안해 

 지고,자유로워지고, 얽매임이 훨씬 줄어들게 됨을 경험한다.

 이것 아니면 안 되겠다던 생각들이 놓여지면서,훨씬 여유가 생기고, 잘 안 되더라도 일희일비 하지 않게 되고,

 조금 잘 되더라도 쉬 들뜨지 않게 되면서,조금 더 크게 자신의 사업에 대해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집착하게 되면, 그 집착이라는 좁은 소견에 갇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넓은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지혜로운 눈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는 모를지라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다면 미련 없이 ‘그래 내려놓고 말지’라는

 큰 한 생각을 내고 나면 오히려 그 일에 대한 지혜와 통찰과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이게 바로 내려놓아야 더 크게 잡힌다는 도리다.

 물론 미묘하게도, 내려놓으면 더 큰 것을 잡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과 계산은 또 다른 어리석음이며,

 더 큰 것을 붙잡겠다는 무명일 뿐이다.

 완전히 내려놓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큰 공덕이 있다.

 자유로움이 있고,지혜가 있고,여유가 생겨나고,통찰과 직관이 깨어나며, 나만이 아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자비로움도 생겨나고, 매 순간의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 또한 생기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크게 한 번 내려놓는,그래서 본래 아무 것도 없었던 ‘무(無)’,공(空)’ ‘제로(0)’로 돌아가 보는 명상이다.

 진짜로 사업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진급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집착을 내려놓음으로 인해,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참된 무소유를 통해,

 공의 실천을 통해 더 큰 지혜와 사랑과 통찰이 열리는 귀하디귀한 명상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놓으려면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과연 나는 무엇을 잡고 있고, 또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내려놓아야 할까?

 그리고 집착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 공(空)의 명상’이 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씩 둘씩 붙잡고 집착하며 집착과 소유의 굴레에 사로잡힌 줄도 모른 채 

 무거운 집착의 속박에 갇히곤 한다. 처음엔 작게 시작되었던 집착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그것이 어느 새 늘어난 줄도 모르고 집착의 무게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시절에는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다가,

 대학생 때쯤에는 몇 만 원쯤은 있어야 행복해지고, 직장생활 초년생 때는 월급 100만원에도 행복해지지만,

 점차 월급도 연봉도 많아지면서 연봉 5,000만원, 7,000만원, 1억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신을 발견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욕심과 만족할 줄 모르는 집착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때때로 ‘공성의 명상’을 통해 내가 지금 어느 정도의 집착의 굴레에 갇혀 있는지,

 내가 집착하고 있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물론 소유하지도 말라는 말이 아니다.

 소유하되, 거기에 소유 당하고 있는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알아차리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성의 명상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0’으로, 즉 ‘무(無)’, 아무 것도 없음의 공(空)으로 돌아가 보는 명상이다.

 우리가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생을 마치고 떠나가야 할 때, 우리가 본래 나왔던 바로 그 자리가 바로 공의 

 자리다.

 이 나온 자리를 아주 생소하게, 낯설게,‘나’라는 모든 수식과 정의와 규정들을 완전히 내려놓고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무아(無我)의 나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온 자리는 어디인가?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어떤 존재로 왔는가?

 아무 것도 없는 존재로 왔다. 소유한 바도 없었고, 집착한 것도 없었으며, 이루어야 할 꿈도 없었고, 커서 무엇이 

 되리라는 목표도 없었다. 동전 한 닢도 없었고, 돈도, 차도, 집도, 집착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알몸 하나 달랑 가지고 태어나매 순간순간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두려움도 없었고, 오직 그 순간을 누리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이 자리가 바로 공의 자리다. 바로 이 자리로 다시 돌아가 보는 것이다.

 내가 문득 낯선 여행지에 섰을 때, 히말라야 고지에 홀로 우뚝 서 있을 때, 

 문득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이 너무나도 낯설고 낯설 어, 나의 이름도, 정체성도, 외모도, 학력도, 

 그 무엇도 잊은 채 그저 광대한 우주 속의 공이 된 한 존재를 느끼곤 했다.


 그 순간이야말로 얼마나 자유스러웠던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바랄 것도 없고,그저 그 어떤 수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한 존재가 자유로이 서 있었다.

 공의 명상을 위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수식과 정의와 규정들을 미련 없이 내려놓아 보자.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이나, 나를 규정지을 수 있는 꼬리표들을 하나씩 내려놓아 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까짓, 그것 쯤 하나도 없다고 가정해 보라.

 내 집, 내 차, 내 직장, 내 위치, 내 학력, 내 외모,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삶, 나의 가족, 내 자식,

 내 꿈, 내 미래 비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본래의 공의 자리로 잠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완전히 텅 빈 ‘제로’가 되어 보라. 아무 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 보라.

 그 무엇도 아닌 내가 되어 보라. 말 그대로 ‘0’, 제로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의식으로 내려놓아 보고, 다 내려놓은 뒤의 ‘아무 것도 아닌 나’를

 가만히 느껴보고 주시 해 보라. 낯선 여행지에, 아니 낯선 별 위를 홀로 걷는 나그네가 되어 

 텅 빈 행성 위를 거닐어 보라.


 아무 것도 아닐 때,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나는 누구인가’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 가 보자. 당신의 직업? 바로 그 직업을 잃었고, 가야 할 일터가 없다!

 돈? 통장 잔고는 ‘0원’,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 밖에 없다. 집과 차? 물론 없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죽을 텐가? 더 이상 살아 볼 도리가 없다고 생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물론 어제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발버둥치고, 진급하려고 안달하며, 

 자식 성적 때문에 근심걱정하고 집을 사려면 아직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던 그 ‘나’는 이제 꿈처럼 흩어지고 없다.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발버둥 칠 것도 없이 직업도 없고, 일터도 없고, 내 사업도 없다!

 진급하려고 안달할 것도 없이 진급할 직장도 없고, 지위도 없다!

 자식 성적 때문에 근심 걱정할 것도 없이 자식 학교 보낼 돈도 없어 학교를 다닐 수도 없다.

 집을 사려고 돈을 더 벌 것도 없이 아예 집도 모아 놓은 돈도 하나도 없다.

 그저 당장에 한 끼 입에 풀칠 할 일만도 버겁다. 당장에 오늘 밤에 어디에서 잘지가 문제다.

 그렇게 무소유의 공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이제 하나하나 제로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이제 당신은 어쩔건가?

 그냥 다 포기하고 말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럴 수가 없다. 그래도 어쨌든 삶은 계속될 테니까.

 그런데 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텅 빈 무(無), 제로인 공 속에서 생각지도 못 했던, 놀라운 빛과 텅 빈 무소유의 자유함,

 무아의 걸림 없는 툭 트인 삶의 길이 열린다. 잘 안 풀리는 사업 때문에, 안 되는 진급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걱정하기에 앞서‘내 삶의 공성’을 사유해 보라. 제로’인 공성 앞에서 그 모든 문제는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때 비로소 완전한 무집착의 자유함을 만끽하게 된다. 아무 것도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아니, 기적과도 같이 폐허 속에서 피는 꽃처럼 전혀 새로운 무한한 삶의 가능성들이 일렁인다.

 그 제로의 텅 빈 바탕 위에 무엇이든 쌓을 수 있는 자유함이 서린다. 

 텅 빈 도화지 위에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이제 기쁘고 행복한 일만 남았다. 

 완전한 제로, 무소유의 상태에서라면 무엇을 하든 그 다음 부터는 어쨌든 제로에서 하나로, 

 둘로, 셋으로 이어지며 행복에 겨워질 수 있는 가능성들의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누구나 때때로 이런 공성의 명상을 실천해 볼 일이다. 누구나 때때로 자신의 삶에 완전한 무소유, 

 무아라는 텅 빈 옷을 입혀 볼 일이다. 

 자식과 아내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우린 지금 돈도, 집도, 차도, 음식도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에 가족 모두 배는 고프고 춥다. 


 그럼 무엇을 하게 될까? 먼저 당장에 먹어야 하고 먹여야 할 음식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때 아버지는 무엇을 해서든 일단 가족을 위한 한 끼의 음식을 마련할 것이다.

 그 한 끼의 음식이 해결되는 순간, 가족 모두는 고픈 배를 달랠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는 막노동이라도, 어머니는 식당일이라도 보려고 바둥거릴 것이고,

 아주 작은 몸만 누일 수 있는 작디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아이들을 눕힐 수만 있어도,

 가족 모두가 함께 있을 수만 있어도 모두는 행복해 질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진급이 안 될까를 걱정하기 전에,

 이 직장에서 완전히 공으로 돌아가는 사유를 먼저 해 보라. 이 직장이 없다면,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좋은 집을 살 여건이 안 되는 사람은 그 돈을 걱정하기 전에 집도 돈도 아무 것도 없는 제로를 사유해 보라.

 아무 것도 없어도 삶은 계속되고, 당신의 행복을 향한 열정은 계속될 것이다.

 

 과연 집착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무엇에 집착하고 있나?

 제로, 공성, 무의 명상을 통해 비로소 과연 내가 어디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본래 온 곳인 ‘텅 빈 공’의 상태에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아 왔는지,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풍요로운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더 벌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하며, 끊임없이 쌓고 쌓아야 하는 이가 아니다!

 사실 당신은, 이 지구별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붙잡고 집착해 온 것이다!


 처음 올 때 아무 것도 가져 오지 않았던 한 투명한 존재, 자유로운 존재가,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고, 그 붙잡은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고,

 더 많이 소유한 타인을 보며 자괴감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진짜 궁핍하고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이 생에서 쌓아 올린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던 바로 그 무지가 나를 가난하다는 의식으로 내몬 것은 아닌가.

 오늘, 처음 이 생으로 여행을 오던 그 날로 되돌아가, 그 본래의 텅 빈 자리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다시 되돌아 온 뒤, 그동안 이 생에서 내가 붙잡은 것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들이며,

 그것들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주 전체의 도움이 있었는지를 뜨겁게 뜨겁게 감사해 보자.

 그리고 요즘 내가 더 많이 가지려고, 얻으려고, 올라가려고 애쓰던 그 모든 욕망과 집착들이 얼마나 나를 속박하고 있었

 는지를  사유해 보자. 

 누구나 때때로 내 삶의 무소유, 공성의 명상을 실천해 보라. 그럼으로써 자유한 나를 되찾게 될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그렇게 앞만 바라보며, 그렇게 소유와 돈을 갈구해 가며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풍요로운 존재이며,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찬탄과 경외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텅 빈 그 자리에서 온 우리가 때때로 고향을 그리워하듯

 우리의 본향인 그 텅 빈 공의 자리를 때때로 명상해 보고, 사유해 보며,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아니던 그 자유했던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 그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속 시원하고 툭 트인 길인가. 텅 빈 공으로 돌아가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들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풍요와 감사와 자비로운 도움 

 속에서 그동  안 이렇게 살아왔다는 사실에 감동, 찬탄, 자족,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라는 마음을 없앤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아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텅 빈 공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일이다. 진여(참 나)는 본래 텅 비어있다.

 감사하는 것의 극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지금 죽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의 경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존재 그 자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만 알고, 고 살아가기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니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것은 실체가 없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니 만일 이와 같은 줄을 알면 부처님 세계를 보리라.”

 

여기에서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 구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구절을 금강경 사구게 서너 군데 가운데 한 곳이 아니냐. 

대충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금강경을 다 못 외우더라도

군데군데의 중요한 말씀은 외워야 하는데, 그

중에 한 말씀이 바로 ‘범소유상 개시허망’ 이 부분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그 부분 해설들이 좀 너무 굳어진 해설을 내려서 제가 좀 풀어놨습니다. 

 

범소유상 - (무릇 있는 바 상이)

개시허망 - (다 허망하니)

약견제상비상 - (만약에 모든 상을 보아서 상이 아니면)

즉견여래 - (곧 여래를 보리라.)

 

무릇 있는 바 상이 다 허망함이니, 

만약에 모든 상을 보아서 상이 아니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를 금강경 4구게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4구게가 서너 군데 나온다.

4구게란 네 구절로 된 게송(시, 노래)를 말한다. 

게송의 게는 가타의 소리 번역이고, 

송은 게의 뜻 번역으로 운문형식을 말한다.

 

아래 제 5분의 제목은 여리실견분이다. 

이치답게 이치와 같이 실답게 본다는 뜻이다. 

즉 바로 보라는 말이다.

‘바로 본다’라고 하는 말은 8정도에서 정견을 말한다. 정견. 바로 보라. 

이 바로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려고 이렇게 모인 것도 정견을 획득하려고, 

정견을 성취하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바른 견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공부는 아주 중요합니다.

 

정견이 있어야지 그 뒤에 나오는 팔정도를 예로 든다면

뒤에 7정도를 다 바로 그대로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정견, 바른 견해가 없는 데 뒤에 7가지 정도를 알 수가 없어요. 

그만큼 팔정도에 있어서의 정견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팔정도를 한번 얘기해 봐요. 

팔정도도 이미 공부를 다 하셨습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그 다음 뭐지요? 정정, 이 8가지.

 

그러니까 공부를 좀 했다하는 사람들은 전 시간에 말씀드렸던

육바라밀, 그 다음에 팔정도, 이 정도는 줄줄 외울 수 있어야 되요. 

그럼 8정도라고 하는 이 가르침이 나오기 그 전에 개략적인 법문이 뭐냐? 

고집멸도라고 하는 사성제라 이 말이죠. 

고집멸도 사성제의 도성제, 도성제의 내용이 팔정도 아닙니까.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감포도량 세계 명상센터의 문수전이 세워졌는데, 왜 이 문수전이라고 했느냐?

팔정도를 나타내는 4, 8개의 기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셨을 때 잘 보기 바랍니다. 

이 8개의 기둥인가. 문수전. 

그러니까 4개의 속기둥, 사성제, 

바깥에 8가지 8개 기둥 팔정도, 

사성제 팔정도가 모든 지혜의 근본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가 많은 얘기를 했지만, 사성제 팔정도는 코끼리 발자국과 같다. 

코끼리 발자국은 하도 커서, 

그 발자국 안에 들어가지 않는 뭇 짐승의 발자국은 없다.

 

즉 코끼리 발자국은 너무너무 커서

모든 짐승의 발자국이 그 속에 다 들어온다. 

그와 같이 나의 많은 교리 가운데서도 많은 얘기 가운데서도

사성제 팔정도야 말로, 모든 교리를 아우르는 그런 내용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성제 팔정도는 틈틈이 읽어보고 익히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불교공부 책을 틈틈이 잘 좀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이 팔정도에서 처음 나오는 정견, 바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보는 것이 부처님 문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입니다. 

이 사구게에서 가르치는 바로 봄은 제상비상이다. 

즉 상이 상 아닌 것으로 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아주 어려운 말이에요. 상이 상 아닌 것을 보는 일이다. 

상은 무엇인가? 

물질적인 형체, 즉, 겉모습, 형색을 말한다. 

여기에는 돈, 명예, 권력등도 포함되며 자기의 고정관념도 포함된다.

 

우리가 상, 상, 똘똘 뭉쳐진 그 상은

돈, 명예, 권력, 고정관념, 다 상이다, 이 말입니다. 

상은 중생의 착각, 망상으로 인해 영원하고

고정된 것인 양 대상화한다. 

그런데 실지 그런 상황은 없다.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과학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아래에 상이 왜 비상인가? 

비상이 왜 상인가? 거기에 대한 해설을 아주 길게 해 놨습니다.

 

이 내용은 읽어보면 다 이해가 되지만,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 이론에서 E=MC² 

즉, 에너지=질량X 광속² 밝힌 바 있다. 

결국은 질량은 에너지 덩어리이며, 에너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즉 상은 비상인 것이다. 

이건 과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상이 왜 비상인가? 

질량이 바로 빛을 나타낸다. 에너지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상은 정신적인 관념도 포함된다. 

정신적 관념이 실체가 없다함은 다소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우리의 정신작용이 분별지에 의한 것임으로. 

항상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분별지는 망념, 망상일 뿐 실체가 전혀 없다. 비상이다. 

생주이멸을 쉼 없이 계속한다. 

예. 그래서 여기서 상이 비상인 줄 아는 것이

어떻게 부처님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일까를 살펴보자.

 

거기 봐봐요. 상이라 하는 것은 허망한 것. 비상-상이 아니다. 

이 말은 허망하지 않는 것. 상은 모양 지어진 것은 다 허망합니다. 

뭐 간단하게 우리 육신을 보면, 다 허물어지고 있는 중이잖아요. 

그렇다면 허망한 거죠. 그런데 허망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법신인데, 여래부처님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상이 곧 비상이다. 이 말은 뭐냐? 

중생이 바로 부처다. 그걸 나타내는 것입니다. 

상이 곧 비상이다. 

그래서 중생이 영원한 것이 중생이 아닌 줄 봐야지

부처인 줄 알게 된다. 그런 말도 되고,

아상 인상등이 사상이라 그랬습니다.

아상 인상등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중생이요, 

그런데 상이 비상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사상이 없어요. 

그 비상인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 마음은 사상 없음. 

즉, 상은 곧 비상이다. 

아상 인상등의 사상 없으면 바로 부처님이잖아요. 

그런데 중생 그대로 부처님이죠. 그래서 상이 곧 비상이다.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상 그대로 참여 실상이다.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상 그대로 참이요, 실상이다. 

여기에 상이라는 말에 나를 대비해 봐요. 

내가 나 아닌 줄 알면 내가 현재의 나, 

현재 지금 국한되어져 있는 나, 

내가 나 아닌 줄 알면, 내 그대로 참이오, 실상이다. 

그러니까 중생인 내가 영원한 내가 아닌 줄 아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거죠. 

그러면 그 자리가 바로 실상이다. 참여 실상이다.

 

이 말은 내 생각을 떠나버리면, 

아닌 줄 안다는 것은 내 생각을 떠난 거잖아요. 

내 생각을 떠나 버리면 온 우주가 바로 부처님 세계에요. 

부처님 나타나신다. 

즉,

이름과 상에 속지 않으면

상이 상 아닌 것을 알 것이오,

상이 상 아님을 알면,

상 그대로 참인 것을 안다.

 

보시를 할 때 보시 했다는 상이 없으면

보시함의 자체가 바로 참이다.

 

요약하면 상이면서 상이 아니고, 

상이면서 상인 이치를 안

즉,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잘 생활함이 된다. 

여기에는 항상 상락아정의 부처님세계가 현현할 뿐이다.

이거 뭐, 무슨 말을 하는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어, 세 번 째 줄에 상이 상 아님을 알면 안개가 안내가 아님을 알면, 

안개가 실체가 없다는 것은 요건 다 알아요. 

그 비유해서 생각해 봐요. 

안개가 안개 아님을 알면 안개 그대로 참이다. 

이 말입니다. 

아, 안개구나. 

그러나

안개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보는 안개와

안개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보는 사람하고는

그 안개가 다르다.

 

딱 대비해 봐요. 

안개가 안개 아님을 알면 안개 그대로 참인 것을 안다. 

분명히 답이 나왔잖아요. 

그래서 다시 중도의 원리에서 얘기하면

우리는 육신을 너무 가꾸어서도 안 되고, 

또 육신에 대해서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고, 

육신을 너무 학대해서도 안 됩니다. 

육신은 있기도 하고, 육신은 없기도 하고. 비유비무라. 

그래서 때로는 긍정하고, 때로는 부정하면서, 

긍정과 부정을 잘 조화롭게 생각하는 가운데에, 

절대 긍정의 생각이 나타나죠. 

그걸 우리는 상차상조라. 상으로 막고 상으로 긍정한다. 

그랬거든. 바로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비유비무, 상이면서 상이 아니고, 

상 아니면서 상인 이치를 안즉, 

또 요약하면 돈을 한번 대비해 봐요. 

돈이면서 돈이 아니고, 돈 아니면서 돈인 이치를 알아라. 

그러면 그 돈을 잘 다스리고 돈을 가지고 잘 생활한다. 이 말이죠.        -우학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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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 붓다의 핵심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가 무엇일까요? ‘연기법(緣起法)’이라고 말합니다. 좀 쉬운 말로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 말해요. 그걸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과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살면서 괴롭잖아요. 이 괴로움은 자신의 ‘무지(無知) - 알지 못함,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무엇에 대해서 어리석고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인연법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인연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인연법이라는 게 뭐냐? 이 세상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원리입니다.

 

외부적 조건과 내부적 조건

 

내일 여러분과 같이 아침에 남산을 산책하면서 진달래를 보게 될 텐데, 햇빛이 많이 비치는 남사면 양지바른 곳에는 진달래꽃이 벌써 활짝 폈습니다. 그런데 서쪽이나 북쪽 면에 있는 진달래는 아직 꽃이 활짝 피지 못하고 봉오리 상태예요. 이렇게 일조량이 어떠냐에 따라서 피기도 하고 피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남사면에 있는 다수가 꽃이 폈는데 개중 몇몇은 아직 피지 않고 봉오리 상태로 있어요. 또 북사면에 있는 것도 대다수가 아직 피지 않았는데 몇 개는 활짝 피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이걸 설명해 보자면, 똑같은 조건에서도 나무의 종자에 따라서 빨리 피는 게 있고 늦게 피는 게 있습니다. 또, 똑같은 종자라도 남쪽 면에서 자라느냐 북쪽 면에서 자라느냐에 따라서 꽃이 빨리 피기도 하고 늦게 피기도 해요. 이건 진달래만 그런 게 아니라 벚꽃도 그렇고 목련도 그렇고 밤나무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개인의 특성, 인(因) 그리고 외부 환경 연(緣)

 

똑같은 조건에서 서로 다른 것은 그 개체의 성질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조건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괴롭고 어떤 사람은 안 괴로운 것은 각 개인의 마음, 즉 개인의 성질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같은 사람인데도 이런 환경에 가면 행복하고 저런 환경에 가면 괴롭다면 그 환경 탓, 즉 조건 탓입니다. 북사면에 있는 것은 아직 꽃이 안 피고 남사면에 있는 것은 꽃이 피는 것과 같아요.

 

이러한 개개의 특성을 ‘인(因)’이라 하고,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을 ‘연(緣)’이라고 합니다. 인연이 만나서 과보(果報)가 생겨난다, 즉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천장에 매달려 있거나, 불에 떨어지거나, 건조한 데 있거나, 너무 추운 데 있으면 싹이 나지 않습니다. 유인무연(有因無緣) - 비록 인이 있다 하더라도 연이 없으면 과보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무인유연(無因有緣) - 즉, 아무리 좋은 밭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싹이 트지 않아요. 인이 없으면 연이 있다 하더라도 과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인유연(有因有緣) - 씨앗도 있고 밭도 있어야 마침내 싹이 틉니다. 인연이 만나야, 즉 인연이 지어져야 과보가 생긴다는 이야기예요.

 

그럴 때 ‘씨앗이 좋으면 반드시 수확이 좋다’ 혹은 ‘밭이 좋으면 반드시 수확이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인연이 만나야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같은 밭이라면 씨앗이 좋을수록 수확이 많다’, ‘같은 씨앗이라면 밭을 잘 가꿀수록 수확이 많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씨앗이 좋을수록 무조건 수확이 많다는 게 아니라 ‘수확이 많을 확률이 높아진다’라고 할 수 있고, ‘밭을 잘 가꿀수록 수확이 많을 확률이 높아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인만 강조해서도, 연만 강조해서도 안 되는 법칙

 

다시 말해, 인연법은 기계론적인 법칙이 아니에요. 무조건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길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해도 나쁜 과보가 생길 수도 있고, 착한 일을 해서 좋은 과보가 생길 수도 있어요.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생길 수도 있고, 나쁜 일을 했는데도 좋은 과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인연의 원리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과보가 생길 확률이 높다’,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인연과보를 무시하거나 인과율을 기계론적으로 받아들이면 오류가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현상을 관찰하면서 편견을 갖고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콩 100알을 자갈밭에다 뿌렸는데 98알은 죽고 2알이 살았다면 그걸 가지고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봐라, 살 놈은 자갈밭에 뿌려도 산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이번에는 콩 100알을 기름진 밭에 뿌렸어요. 그래도 2알이 죽었어요. ‘봐라,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죽을 놈은 죽는다.’ 사물을 이렇게 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살고 죽는 것을 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은 ‘인’을 너무 강조하는 자세입니다.

 

‘이 과보의 원인이 인에 있다’ 이렇게 인만을 강조해서 보는 거예요. 종교가 이렇게 치우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 쉬워요. ‘다 네가 잘못해서 그렇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시각도 있어요. ‘콩 100알을 기름진 밭에 뿌리면 98알이 싹이 트고, 자갈밭에 뿌리면 2알밖에 싹이 트지 않으니 기름진 밭이 96알의 생존 확률을 높여준다. 그러니 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하냐? 따라서 밭의 상태가 수확을 결정한다.’ 라고 한다면, 이건 밭을 너무나 강조하는 태도예요. 이게 사회과학이고 사회운동이에요. 모든 게 다 우리 사회의 모순,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연’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종교는 ‘인’을 지나치게 강조해요.

 

그러나 실제는 어떨까요? 인연과보, 다시 말해 인과 연이 같이 작용해서 생겨난 거예요. 그럴 떄 우리는 개개인이 수행 정진하는 것과 우리 사회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 다시 말해 좋은 씨앗을 고르는 것과 밭을 잘 가꾸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같은 사회조건에 살면서도, 이렇게 같은 문경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괴롭고 힘들게 사는 것은 문경 수련원 탓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는 거예요.(청중 웃음) 그런데 이 수련원 환경을 개선하면 수련원에 사는 다수가 조금 더 행복해진다고 말할 수 있죠. 즉 모든 게 다 개인 탓만도 아닙니다. 개인이 느끼는 것은 개인 탓이지만 전체적으로 평가했을 때 보이는 변화에는 환경 탓도 있어요.

 

한국 사회의 인과 연

 

대한민국의 국민 행복도가 세계 117위라고 합니다. GDP는 세계 13위고 1인당 GDP는 세계 28위인데 행복도는 117위예요. 여기에는 대한민국 국민성, 사람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성격이 조급하거나, 욕심이 많거나, 고집이 센 것 같은 요소가 행복도를 떨어뜨려요.

 

그러면 다 국민성 때문에 불행할까요? 아니에요.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조건 때문이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만 봤을 때는 괜찮은 사회지만 그 사회 안의 질적 조건, 사회적인 조건을 보면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데 장애가 되는 조건,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우선 불평등합니다. 절대 빈곤은 해소됐는데 상대적 빈곤은 지나치게 크죠. 불평등이 심하면 불만이 커질 수 있습니다.

 

또 한국 사회는 불공정해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니까 경쟁을 하는데 그 경쟁이 공정할 때 패자가 승복하게 되지요. 그런데 경쟁이 불공정하기 때문에 불만이 많아요.

 

또 한국 사회는 불안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이 항상 ‘조심해라’입니다. 차 조심, 사람 조심, 늘 ‘조심해라, 조심해라’ 이래요.(청중 웃음) 그만큼 불안전하다는 겁니다. 특히 안보 불안, 다시 말해 전쟁의 위험이 상존합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 국민이 행복하지 못한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든다면 전체 국민의 행복도가 높아집니다. 그런데 사회를 그렇게 만든다고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은 아니에요. 역시 개인이 자기 욕심을 버리고 자기 고집을 버리면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인연과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원리에 무지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 원리에 밝으면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뭘 하다가 안 되면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거 도와주세요, 저거 도와주세요’ 하는 게 종교가 아니에요. 우리가 말하는 것은 기복 종교,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무지를 깨우치고 지혜로워져서 자신을 자유롭게, 또 행복하게 만드는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그런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스스로 수행 해보겠다고 들어와 놓고도 문경 수련원 탓했다가(청중 웃음) 또, 자기를 탓했다가, 또 남을 탓했다가 하며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에요. 우왕좌왕하는 중입니다. 아직 연습이 덜 되어서 그래요.

 

나의 인과 연, 체험을 통해서 가꾸어야

 

그런 원리를 알아서 꾸준히 수행을 통한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오늘 스님의 설명을 듣고 ‘모든 게 인연과보야!’ 이런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원리를 자기의 삶 속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농사를 지어도 그렇고, 산에 가서 꽃을 봐도 그렇고, 사람을 봐도 그래요. 모든 것이 다 인연과보의 법칙에 의해서 운행됩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나가야 합니다. 각자 자기 개인을 가다듬어 각성을 해서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도록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사는 이 가정환경과 사회환경을 개선해서 사람이 사는 데 좀 더 편리하고 행복하도록 가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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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三法印): 세가지 진실한 가르침

(1)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고 변화한다.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

(2)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변화하는 것에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3) 열반적정(涅槃寂靜): 모든 괴로움의 불을 끈 적멸의 상태 .열반사덕(涅槃四德)이 있다.

* 열반4덕(涅槃四德): 부처님의 법신과 불성과 열반에 갖추어 있는 네 가지 큰 덕.

상(常)·락(樂)·아(我)·정(淨)을 말한다.

상(常): 열반에 도달하면 무상(無常)하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한 덕이다.

낙(樂):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지극한 즐거움으로 충만한 덕이다.

아(我): 헛된 나를 떠난 참나 대자재하고 다른 무엇에도 결박되지 않는 덕이다.

정(淨): 더러움이 없고 언제나 청정한 덕을 말한다.

 

(4) 일체개고(一切皆苦) : 모든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 이를 포함해 '사법인'이라고 한다.

 

* 사성제(四聖諦):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

(1) 고(苦) :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 (예, 현재 환자의 증세)

- 사고(四苦) : 생.노.병.사(生老病死)

- 팔고(八苦) : 생노병사 사고(四苦)에 아래의 4가지를 더한 것.

-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것을 만나는 괴로움.

-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 오음성고(五陰盛苦) -육체의 본능에 의한 괴로움.

(2) 집(集) :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 (예, 병이 나게된 원인)

(3) 멸(滅) : 번뇌와 고통이 모두 없어진 해탈, 열반의 세계 (예, 병이 없는 상태)

(4) 도(道) :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 (예,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

 

팔정도(八正道): 멸에 이르기 위한 8가지의 바른 길.

1. 정견(正見) : 편견없이 바로 보는 것

2. 정사유(正思惟) : 바른 생각

3. 정어(正語) : 바른 말

4. 정업(正業) : 바른 행동

5. 정명(正命) : 바른 생활

6.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7. 정념(正念) : 바른 마음의 수행

8. 정정(正定) : 바른 집중

 

* 연기법(緣起法)

- 불교의 핵심이 되는 근본사상.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핵심 내용.

-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 모든 것은 인연따라 일어난다는 말. 상의상관성.

- 아함경에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했다.

- 연기를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 유행(流行)'이라고도 한다.

- 중아함경에 '연기'에 관한 유명한 귀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 12연기(十二因緣)

 

 

- 무명(無命): 연기의 근본원인, 진리에의 무지(無知), 무아나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것.

- 행(行):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모든 행동을 뜻하며 무명의 끊임없이 활동하는 상태.

- 식(識): 인식작용을 뜻하며,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 (선, 악의 분별의식)

- 명색(命色): 분별의식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나타남. 명은 정신세계, 색은 물질세계,

- 육입(六入): 눈, 귀, 코, 입, 몸, 의식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감각과 지각의 능력을 의미.

- 촉(觸): 육입이 빛깔, 소리, 냄새, 맛, 몸의 촉감, 의식 육경(六境)에 접촉하는 상태.

- 수(受) : 접촉한 결과로 즐겁고, 괴롭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 애(愛) :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욕망, 애착, 열망, 갈애.

- 취(取):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취하고 버리는 실제행동.

- 유(有): 애와 최로 인하여 업을 짓는 것.

- 생(生): 업의 인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되는 것.

- 노사(老死): 생의 현실로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음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

 

* 순관(順觀):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

* 역관(逆觀): 노사에서 무명의 방향으로 관찰하신 것

* 유전(流轉)연기: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계속 연기되는 과정.

* 환멸(還滅)연기: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괴로움을 멸하여 해탈로 향하는 과정.

 

* 오온(五蘊): 인연에 의해서 생긴 5가지 현상, 물질세계(색)과 정신세계(수.상.행.식)를 말한다.

(1) 색(色): 우리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인 '사대(四大)'를 포함한 모든 물질세계

(2) 수(受):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감각 등을 받아들이는 작용

(3) 상(想): 대상을 인식하는 표상작용

(4) 행(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작용

(5) 식(識): 판단이나 추리에 의한 식별작용, 일반적으로 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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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12연기법의 첫번째가 바로 무명(無明)이다.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명(明)은 밝음, 곧 지혜를 뜻하므로

무명(無明)은 어두움, 즉 지혜가 없어 어리석음을 뜻한다.

어리석음이란 곧 치(癡)이다.

탐진치(貪瞋癡)에서의 그 치(癡)다.

탐진치(貪瞋癡)는 모두 마음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탐심/진심/치심이다.

무명(無明)이 곧 치심(癡心)이다.

그래서 중아함경에 보면,

12연기를 설명할 때 무명(無明)대신에

무명(無明)이란 즉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밝음, 즉 지혜는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지혜이다.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아는게 지혜이며, 잘못 알고 있는게 바로 무명/무지이다.

어리석음이란 단순하게 멍청하다는 뜻이 아니고, 잘못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중생들은 보여지고 들려지는 그 모든 것들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

또한 자신의 몸과 마음에도 영원불변의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다.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하기에 애착, 즉 탐심이 생겨나고, 그 탐심이 좌절되거나 방해가 되면 진심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탐진치(貪瞋癡)이다.

탐심과 진심의 뿌리는 바로 치심(癡心)즉 무명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이란 무엇인가?

바로 연기법이다.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생긴다."

제법실상은 크게 두가지, 즉 <공>과 <인과>이다.

그러므로 무명이란 모든 것들의 본질이 공한 것임을 모르는 것,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과로 흘러간다는 걸 모르는 것을 뜻한다.

 

1. 空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생긴다라는 의미는

저것은 저것 자체로써 즉 스스로 생겨난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딴걸로 말미암아서 생겨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고유한 성품, 즉 자성/실체가 없으므로 <무아>이다.

사람이 나라고 여기는 첫번째 요소는 바로 자신의 몸이다.

이 몸은 스스로 홀로 생겨났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서 생겨났다.

부정모혈과 이전의 識이 화합해서 잉태되고 그게 커서 현재의 몸이 된 것이다.

우리 인간세계에서 몸이 스스로 혼자서 생겨난다면 부모는 필요없게 된다.

우리의 몸은 독립적으로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기에

몸에는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것이 무아이다.

몸에는 고정불변의 실체/자성이 없기에, 몸은 언제나 변화해간다.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변화할 수가 없다.

변화해간다는 그게 바로 실체가 없다는 증거이다.

그럼 몸 그 자체의 존재방식이란 뭔가?

몸은 아주 없는게 아니다.

無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몸에 어떤 영원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몸은 空한 것이다.

몸의 존재방식이 곧 空이다.

이 空이 곧 중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空을 無로 여긴다.

空과 無는 전혀 다른 것이다.

몸엔 영원한 실체가 없기에 상주론을 박살내고,

또한 몸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기에 단멸론을 박살낸다.

몸은 있되 거기에 실체가 없기에 空한 것이다.

수상행식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이와 같다.

 

2. 인과(因果)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은 원인이요, 저것은 결과이다.

모든 것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서 저런 결과가 발생되어진다.

무명이라는 원인으로 말미암아 행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지구가 태양에서 멀리 떨어짐으로 인해 겨울이 온다.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발생되어짐으로 인해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 세상은 인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걸 전혀 모른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이 저절로 그냥 생겨난 줄 알기에,

사주팔자/운명 또는 신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불행에는 원인이 있다.

악행이라는 원인으로 말미암아 불행을 겪는다. 이것이 고성제/집성제이다.

행복에도 또한 원인이 있다.

고통의 원인을 끊어버리는게 바로 원인이다.

고통의 원인을 모두 없애버리면 그 결과로써 영원한 행복인 열반을 얻게 된다.

고통의 원인을 모두 제거하는 그 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불교에서의 행복은 세속적인 일시적인 그런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뜻한다.

이러한 인과를 알게 되면,

내 행동, 즉 내 업이 내 행복을 좌우하게 되므로 선량하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러한 인과의 흐름을 모르기에

악하게 살면서도 복을 받고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이것이 무명이다.

이러한 인과를 못 믿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 때문인데,

결과가 바로 그 즉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왜 도둑질할까?

왜냐면 도둑질해도 바로 그 즉시 안잡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고도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남에게 피해를 준다.

그러나 대부분이 잡힌다.

설사 잡히지 않게 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

또한 잡혀서 감옥에 갇히면 몸만 괴롭지 마음은 괴롭지 않지만,

안잡히면 언제 잡힐까 하는 두려움에 언제나 불안하게 된다. 그 역시도 과보이다.

그러므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보는 몸과 마음으로 받는다.

무명(無明)이란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을 잘못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제법실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공>과 <인과>이다.

본질은 실체가 없어서 공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현실에서는 인과로 흘러간다. 콩심으면 콩나고 팥심으면 팥난다.

무명(無明)이란

진제의 <공>과 속제의 <인과>, 이 둘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이 연기법이고,

연기법의 핵심이 바로 <공>과 <인과>이다.

 

 

<공>가 <인과>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사성제이다.

고집멸도 사성제

고성제(과-결과)

집성제(인-원인)

집성제로 말미암아 고성제가 있다.

고통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인과관계이다.

멸성제와 도성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멸성제(과-결과)

도성제(인-원인)

도성제(팔정도)를 닦아서 멸성제를 성취한다.

도성제는 길이요, 멸성제는 도착, 즉 결과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알겠지만,

사성제는 결과부터 먼저 배치시키셨다.

<인과> 순서가 아니고 <과인>의 순서이다.

이렇게 결과부터 배치시킨 이유는

먼저 고통을 알아야만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병명을 알아야만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과 같다.

 

멸성제는 곧 해탈과 열반을 의미하는데,

해탈과 열반은 <공>으로써 성취된다.

그래서 대승이나 소승이나 해탈의 문은 <공>이다.

통상적으로 삼해탈문을 말씀하셨는데, 다 같은 의미이다.

해탈은 오로지 <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딴 방법은 있을 수 없다.

타 종교인들, 그리고 외도들과 몇몇 어리석은 불자들이

이 空을 비방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아함경이나 니까야/청정도론에도 역시나 이 空이 명확히 나오고 있고,

또한 해탈/열반의 가장 뿌리이자 핵심이 바로 空이라고 정확히 나오니 찾아보라.

괜히 어설프게 이 해탈의 유일한 문인 空을 비방하여,

해탈의 문을 닫는 가장 지독한 죄를 짓는 그런 어리석은 불자들이 없길 바랍니다.

본질적으로 해탈의 문은 그 누구도 닫을 수 없으나,

공을 비방하는 그런 글을 보고 초보자가 공을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믿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게 해탈문을 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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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요약>

사람의 내면에서 성품(性 성)·감정(情 정)·의사(意 의)·의지(志 의)를 포함하는 주체.

 

 

[내용]

마음은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은 좁은 의미로서 육신에 상대되는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서 우주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유심론적(唯心論的 :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며 물질적 현상도 정신적인 것의 발현이라는 이론)세계관의 마음 개념이 있다.

 

곧 원효(元曉)는 “삼계(三界 : 중생이 생사 왕래하는 세 가지 세계)가 곧 마음이다.”라 하여 우주를 하나의 마음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상어 가운데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라는 단어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의 바탕(體 체)과 그것의 움직임(動 동)과 그것의 발현(用 용)과 그것의 모양(狀 상)이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자리’는 마음의 바탕을

‘마음결’은 마음의 움직임을,

‘마음씀’은 마음의 발현을,

‘마음씨’는 마음의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의 4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각각의 설명과 아울러 이에 해당한 단어군(單語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마음자리는 ‘마음의 근원’, ‘마음의 바탕’, ‘심지(心地)’, ‘심원(心源)’이라 풀이되는 일체 마음의 근본을 나타내는 단어다. 그것은 마음의 근본을 이룰 뿐이요, 아직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니 관념적 인식의 대상이다.

 

그것은 선과 악(善惡 선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美醜 미추)이나 깨끗함과 더러움(染淨 염정)도 떠나 있는 것이다. 붙잡을 수도 보고 들을 수도 없이 다만 고요하고 담담(湛然 담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고요하고 담담한 마음자리는 외물에 감응이 되면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감응의 물이 가라앉으면 다시 본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마치 바람이 불면 물결을 일으키다가도 바람이 자면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는 바다와도 같다.

원효는 이러한 마음을 ‘일심(一心)의 바다’라 표현했다. 이러한 마음은 바탕을 이루기 때문에 만물을 낳은 하늘이 하나인 것처럼 ‘마음자리’도 하나로 인식한다.

 

둘째, 마음자리는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만, 마음결은 외물에 감응되면 쉽게 물결을 일으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물결을 일으키는 상태가 ‘마음결’이다. 바다나 강물은 천년이라도 고요함을 지킬 수 있지만 태풍을 만나면 격랑을 일으키고, 벼랑 아래에서는 용솟음치고, 탁류를 만나면 물색이 변한다.

이러하듯이 마음자리도 외물에 감응하면 그 외물의 속성대로 물결을 일으킨다. 마음자리도 외물에 감응되면 외물의 속성대로 결을 일으킨다. 여기에 해당한 단어들은 ‘마음결’ 외에 ‘마음가짐’과 ‘마음보’ 등이 있다.

 

셋째, ‘마음씀’이다. ‘마음결’이 마음의 움직임을 뜻한다면 ‘마음씀’은 ‘마음결’이

실제 밖으로 드러나는 발현이다.

물론 ‘마음결’과 ‘마음씀’을 다 같이 마음의 발현으로 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미세하게 쪼개어 보면 마음이 동요하는 단계와 그것이 실제로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마음은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의 발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넷째, ‘마음씨’다. 이것은 마음결이 일어날 때와 마음씀이 드러날 때 어떤 모양으로 일어나고 드러나느냐 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마음에 관련된 형용사는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은 그 구조상으로는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마음의 바탕이 움직임·발현·모양으로 전개되면서 많은 단어를 파생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 나타난 마음을 고찰할 때에는 마음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에서 화살표를 거꾸로 놓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를 주목한다. 이 구조는 마음을 근원적인 마음자리로 되돌리는 구조다.

마음자리는 선과 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넘어선 담담하고 고요한 그 어떤 경지이다. 마음은 외물에 감응되어 선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게도 되지만 악하고 추악하고 더러움에 물든 것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망심(妄心)이라 표현한다. 그러기에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나는 망심을 끊어버리고 마음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벗어 던져버리고, 이른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에서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수심론(修心論)은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난 망심을 끊어버리고 본질적인 마음자리를 찾아 나서는 방법이다. 불교의 심론(心論)은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과 그 본체를 가리우는 심식(心識)과 연기가 일어나는 까닭을 밝히고 그것을 씻고 본체에 이르는 방법으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타이르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심론의 과정을 불교경전 속에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의 본체에는 상(相)이 없다. “지난날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般若經 반야경),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維摩經 유마경),

“마음의 자성(自性)은 공적(空寂 : 空은 그 어느 것도 형상이 없음을 이르고, 寂은 일어나거나 스러짐이 없음을 이른다.)하여 대립도 없고 소멸한 일도 없다. 그것은 처음인 것도 아니요, 가운데나 뒤인 것도 아니며, 삼세(三世)를 초월하여 그 모습이 허공과 같다.”(華嚴經 화엄경), “마음이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번뇌에 더럽혀질 여지가 없으니, 어찌 마음이 탐(貪)·진(瞋)·치(痴)에 의해서 더럽혀지며, 삼세에 속하는 온갖 것에 무엇을 마음이라 하랴.”(心地觀經 심지관경) 등이 있다.

 

둘째, 다음으로 마음의 본체는 평등하다. “모든 중생은 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차별이 없다.”(涅槃經 열반경),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마치 하늘에 연기와 먼지나 구름 그리고 안개 따위가 뒤덮여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하늘의 본성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勝思惟梵天所問經 승사유범천소문경), “심성의 청정함은 물 속의 달과 같다”(大寶積經 대보적경) 등이다.

마음의 본성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상(相)이 없으니 더럽혀 질 까닭도 없다. 마음은 오염과는 관계 없이 청정하기만 한 하늘이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본성이요 불성(佛性)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무엇 때문에 더럽혀지는가? 그것은 마음에는 심식(心識)과 연기(緣起)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의 구절들은 마음의 심식과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달 속에 여러 가지 물체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세상이 무실(無實)하지만 분별함을 따라서 그것이 일어난다. 분별하는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大乘破有論 대승파유론), “중생이 경계를 망령되이 인정하므로 마음의 차별이 생긴다.”(起信論 기신론),

“마음은 본래부터 생긴 일도 일어난 일도 없어서 그 본성이 언제나 청정할 뿐이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어온 티끌과 번뇌(客塵煩惱 객진번뇌)에 의해서 더럽혀진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持世經 지세경), “대해의 물결이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일어나면 큰 파도가 바다에 물결쳐서 끊일 새가 없게 된다. 알라야식(阿賴耶識 아뢰야식)도 그래서 경계의 바람이 불어와 흔들면 여러 가지 식(識)의 물결이 치솟아 날뛰고 자꾸 생겨나기 마련이다.”(入楞伽經 입능가경)

 

심식과 연기는 마음결이나 마음씨(씀)를 의미한다. 원래 마음의 본성, 곧 마음자리는 바다처럼 고요하고 청렴한 것이지만 외계의 사물에 부딪게 되면 마음자리의 경계를 깨뜨리고 곧장 동요하게 된다. 마치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이치와 같다. 그것을 ‘식(識)’이라 하였다.

‘식’은 여덟 가지로 팔식(八識)이다. 사람에게는 감각과 의식의 기능이 있다. 그것이 안식(眼識)·설식(舌識)·후식(臭識)·이식(耳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이다. 이 중에서 앞의 오식(五識)까지는 감각기능이고 제 육식(第六識)인 의식은 사고(思考)에서 나타난 정신적인 인식이다. 이외에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제 칠식(第七識)은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한다. 또한 불교 특유의 제 팔식(第八識)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장식(藏識)’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알라야식’은 의식을 초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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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세계

 

*** 진리란? (1) *** (총론)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진리란? 어떠한 것에도 똑 같이 적용되고(보편성, 공통점), 이치적으로도 딱 들어맞는 것(타당성)을 말하며,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무엇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고, 내내 변함이 없어서 항상恒常한 것(영원불변)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깨달음의 세계(불교)에서는 `진여眞如’ 또는 `법法’이라 합니다. 진여眞如(범어 tathata)? 우주 만유에 보편普遍한 상주불변하는 본체 또는 모든 현상의 차별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빼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진여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무엇이 진리다.”라고 많은 말을 해 왔습니다. 특이하게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법法(진리, 진여眞如)을 법이라 말하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개구즉착開口卽錯(입을 여는 순간 곧 틀리다. 말을 하면 그 참모습과는 어긋난다.)이며, 언어도단言語道斷(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진리)이며, 심행처멸心行處滅(분별, 망상이 끊어진 상태. 마음 작용이 소멸한 상태.) 이며, 교외별전敎外別傳(언어를 떠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문자로는 깨달음을 세울 수 없다)다.”하였습니다.


 진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진리는 여러 개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만이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진리가 어떠한 것과도 걸림이 없이 모든 것과 하나로 소통(회통, 통섭)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진리는 바로 [ “만상은 변한다, 즉 모든 것은 고정 불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도 다 가능하다.” ] 이것만이 우주(법계法界)의 진리이고, 진여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는 만상을 만들어 내는 에너지라 할 수 있으며, 진여의 작용은 어떠한 것으로부터 간섭받지 아니하고 인연(조건, 주어진 여건)따라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제행무상諸行無常(우주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원리는 이 하나의 진리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무상無常; 항상하지 않다)는 것이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비롯한 모든 물질(존재)과 마음(생각)은 생주이멸生住異滅(생겨나고, 머물다가, 변하여, 소멸하는 모습.)하고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생성되고, 머무르다, 파괴되고, 없어진다.)을 반복하면서 영원히 흘러가는 것(윤회, 무시무종無始無終)입니다. 이와 같이 성주괴공은 우주의 양상을 제행무상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며, 생주이멸은 만물의 양상을 제행무상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고, 생로병사는 인간의 삶을 제행무상의 원리로 설명한 것입니다. 제행무상이 진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이것이 진리다.”라고 단정 지어 말하면 이렇게 한 말은 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변한다는 진리에 어긋나고 맙니다. 그래서 `개구즉착’이고 `언어도단’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바뀌는 과정에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저것에게 저것은 이것에게 서로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바뀌기 때문에 이것은 저것으로 말미암아 있고 저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있게 됨으로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지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도 없어지는데 이러한 현상의 법칙을 `연기법緣起法’이라 합니다.  서로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상대방(대상, 경계)이 있어야 하며 이것을 `인연因緣’이라 합니다. 이때 서로 주고받는 행위의 결과를 `업’이라 하며, 연기의 현상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윤회’라 합니다. 따라서 업은 윤회의 주체가 되며, 업이 윤회할 때는 반드시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좋은 인연을 지으면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인연을 지으면 나쁜 결과가 온다.)’로 되돌려 받기 때문에 `자업자득’이라 합니다.윤회라는 말도 근본도리(본질, 진여의 입장)로 보면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시간을 과거(전생), 현재(금생), 미래(내생)라는 개념으로 나누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본래 무시무종無始無終이기 때문에 물 흐르는 것과 같아서 나누려 해도 나눌 수 없는 것이므로 윤회라는 말은 본래 없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무상無常).”, “모든 것은 서로 주고받는 연기적인 존재다(연기緣起).”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독립되어 고정된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무자성無自性).” 따라서 “`나(아我)’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무아無我).” “`나’라고 하는 것은 있기는 하나 `나’아닌 요소로 되어 있는(비아非我) 가립假立된 존재存在다.” 이 모든 현상을 “공空 하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무상공無常空’, `연기공緣起空’,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 합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하나의 진리에서 이와 같은 모든 존재의 원리가 나오고, 이 모든 원리는 `중도中道’라는 하나의 말로 모아지고(회통, 융합, 소통, 화합), “만상은 중도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하나다(불이不二; 둘이 아니다, 불이不異; 다르지 않다, 즉화卽化; 같다)”라는 말이므로 이 또한 진리입니다.


무자성의 원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양자물리학에서 찾아 낸 빛(광양자, 소립자)의 이중성(상보성)입니다. 빛은 관찰자가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의 성질로 나타나고 관찰하면 입자의 성질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자연은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즉, 서로 상반된 성질을 둘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모든 것을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하나의 논리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반된 두 가지의 논리가 동시에 필요하다(상보성)는 뜻입니다.


 상반되는 것이 있다는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상반되는 것이 있는 것은 인간의 문제일 뿐, 인간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는 없을 뿐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본래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개념에 의해 만들어 졌을 뿐입니다. 행복이 있다는 것은 불행이 상대적으로 있기 때문이고, 행복은 불행이 변함(극복)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별해서 보면 모든 것은 다 다르나 분별하지 않고 근원적(진여의 입장)으로 보면(내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면) 그 것은 그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만상은 둘이 아니다(불이不二), 다르지 않다(불이不異), 같다(즉화卽化)는 말도 `제행무상’의 진리에서 나온 진리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 진리란? (2) *** (총론)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무자성의 원리를 증명해 주는 자연(광양자, 빛, 전자)의 이중성이 왜 일어나는지는 현대물리학(양자역학)으로도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자연의 수수께끼(비밀)” 또는 “신이 부리는 요술”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성을 처음 발견했을 때 물리학자들은 하나의 전자가 넓은 공간에 퍼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관찰하면 언제나 전자는 하나의 점과 같이 공간적 크기를 갖지 않는 점입자(Point Particle)였으며, 입자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관찰하지 않으면 하나의 점이 동시에 여러 곳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열린 공간이라면 전 공간에 퍼져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이중성은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으나 어쨌든 관측결과(현상)는 그렇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이론은 아니며, 현재로서는 그냥 관찰결과가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여(진리)의 세계 즉, 연기의 세계는 이래서 깊고도 깊고 복잡하고도 복잡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이중성에서 말하는 파동은 실체(매질媒質)가 없는 파동으로 해석하면서 `확률파確率波라 이름 하고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확률파의 이론적 해석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삼라만상은 본질적(양자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본(관觀) 깨달은 사람들은 진여(진리)의 세계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이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직은 과학(학문)으로 풀지 못하는 문제를, “모든 것은 변한다(제행무상諸行無常).”라

는 하나의 진리에서 비롯되는 원리를 깨달음을 통해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한꺼번에 확실하게 체득體得(증득證得)함으로써 얻어지는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나의 삶과 자연의 원리가 하나 되게 하여(순리) 최고의 행복(만족) 즉, 해탈 열반(구원)에 이르고, 더불어 가장 많은 것을 이익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이 강의의 목적입니다.


진여(진리, 법) 체득(확실한 깨달음)한 완성된 지혜(지혜바라밀)로 만상을 분별하지 않고(불이不二, 불이不異, 즉화卽化) 있는 그대로 하나로 보는 해탈 열반의 세계를 `출세간出世間’이라 하고 내 생각(무명無明, 개념, 알음알이, 고정관념. 아상我相)에 집착해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진여)를 보지 못하고 각자의 나름대로 만들어 분별하고 차별하는 어리석은 중생의 세계를 `세간世間’이라 합니다.  출세간의 특징은 너(객관)와 나(주관)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차별도 없고 절대 긍정의 세계이므로 어떠한 고통도 없으나, 세간에서는 내 생각과 같으면 옳다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그르다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항상 분쟁과 다툼으로 인한 고통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학문(과학)은 양자물리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뉴턴역학, 고전 물리학)는 하나의 논리(개념, 학설)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양자물리학이 발달되면서(빛의 이중성, 자연의 이중성) 하나의 개념으로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인도(지금의 네팔)의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ātha’는 수행(자기계발)을 함으로써 우주(법계)의 진리를 직관적으로 깨닫고 일찍이 자연의 신비스러움(비밀)을 통달하였습니다. 양자물리학이 이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리(중도)를 체득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미 약 2500년 전에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다 다르나 각각의 것을 이루고 있는 근본(본질, 진여, 체體)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불이不異). 따라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평등하기 때문에 어떠한 차별도 본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나’아닌 것이 없고 진리(하나님, 부처, 법, 진여)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을 이제야 양자 물리학이 수많은 소립자를 통해 조금씩 접근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강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개념을 벗어나(버리고,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진여)를 탐구함으로써 우리도 큰 깨달음(자기계발)을 얻고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삶(구원)을 살아가고자 함입니다.


 과학(학문)이 발달되기 이전에는 신이 있다고 믿으면서 신에 대한 경배심敬拜心(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신의 가르침(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원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류의 궁금증이 하나씩 풀어지고 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즐거움이 점차 늘어나면서 신에 대한 신앙심(경배심)은 흐려지고 인간에게 행복(유토피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대상이 정신적인 것(신불神佛을 경배하는 것, 신의 나라, 천국)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물질도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행복이란? 물질도 아니요, 신불神佛을 경배하고 그들에게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그 어떠한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마음 가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 남과 비교하지 마라, 사랑하라, 내 탓이요, 나누는 삶을 살아가라, 무소유”와 같은 말을 실천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그 원리를 모르고 의식적(결심)으로 하기 때문에 금방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진리로부터 나온 원리를 깨닫게 되면 지혜(통찰력)가 생기고 그 지혜로 세상을 살게 되면 생활화 되어 이러한 가르침을 힘들이지 않고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자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다.” 이 말은 “우주적 종교 감각이야말로 과학적 탐구의 가장 강열하고 숭고한 동기라고 생각한다. 종교적 신앙은 대체로 무조건적 믿음을 중시하거나 방편설에 치중함으로 자연의 이법理法을 경시한다. 따라서 자연의 진리를 다루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목적 이다.”라는 의미로서 종교(형이상학)와 과학(형이하학)을 분리시켜 보던 지금까지의 개념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빛(전자, 소립자)의 이중성에서 보았듯이 입자(유有)와 파동(무無)을 분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아야 모든 것을 보다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양자물리학이 등장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는 모든 것을 분리해서 보던 개념을 하나로 통합해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인연화합 因緣和合, 연기緣起)으로 보는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 진리란? (3) *** (총론)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오늘날 과학은 새로운 많은 학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진여, 진리)은 무엇으로 분석하고 파헤치고 정리 정돈하는 알음알이가 아닙니다. 자연(진여)이 스스로 그냥 그렇게 순환(변화)하면서 존재하고 있듯이 깨달음도 내 생각(알음알이, 고정관념, 지식, 무명無明)으로 만들어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그냥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몰라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훤히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별하지 않고(무분별無分別) 무심無心(무집착)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데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마땅히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하라”는 말과 그 뜻이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떠한 것과도 다툴 일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이는 절대긍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여의 입장(전체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진리(진여, 존재의 원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설은 자꾸 바뀌고 진리를 깨닫기는 어렵기 때문에 학설(과학)로서 진여(진리, 원리)를 “무엇이다.”라고 단정 지어 말하면 자칫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물론 오류가 생긴다 할지라도 이러한 시도 자체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동안 모르고 있다가 양자물리학에서 밝혀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연의 `이중성(상보성)’ 즉, 어떤 하나의 고정된 개념(학설)만으로는 자연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강의에서는 자연의 핵심인 `이중성’과 깨달음의 세계에서 핵심적으로 말하는 `중도中道와 소통(회통)시키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서 알아낸 자연의 본질(이중성, 상보성)과 깨달음의 본질(중도)이 둘이 아님(불이不二)을 말하고자 합니다.


 만상은 진여(진리)의 작용 즉,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져 겉으로 드러난 모습(중도실상 中道實相)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존재의 모습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진여(하나님, 진리, 부처, 법法)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따라서 본래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완벽하게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얻을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내 생각을 죽이고 보는 것입니다. 이중성은 인연(조건, 여건, 원인)따라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법칙(원리)이기 때문에 그냥 본래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내버려 두는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유는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과학도 분석하고, 해명하고, 증명하고, 도전하다가 마지막에는 본래 그러한 것(진여, 진리)은 어떠한 것(인간의 생각, 개념)으로도 그 당체를 똑 같이 나타낼 수 없다(증명할 수 없음)는 사실(인간의 한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에서 하는 어떠한 말도 진여의 당체는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진여를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의 문자 방편의 역할(인연을 맺어주는 역할, 찾아가는 길)을 할 뿐입니다. 진여는 머리로 아는 지식(학문)이 아닙니다. 수행(자기계발)을 통해 체득體得(증득證得,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것이며, 체득하고 나면 자기만의 독창적인 언어로 개개인의 근기에 적합한 수많은 방편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과학(학문)으로 진여를 직접적으로 “진여란 이러한 것이다.”라고 증명해 보일 수는 없을 것이나 진여의 작용을 연구 발전시킴으로써 우리의 생활을 보다 더 편리하게 할 것입니다.  깨달음은 진여를 관觀(마음으로 깊게 보고 확실하게 아는 앎)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만족감(자족自足)을 얻게 하여 영원한 행복(구원, 해탈, 열반)을 얻게 할 수는 있으나 반도체를 만들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물질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정신적인 것(형이상학, 종교)과 물질적인 것(형이하학, 과학)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중성 즉, 있는 그대로를 다 포용하는 중도의 원리(진리)를 따라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정신세계)를 다루는 언어(문자방편,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와 경험세계의 물질현상을 인간의 이성으로서 파악하려는 자연과학의 언어(학설)를 그 외형적인 유사성으로 인해 지나치게 하나로 합치려 하는 것은 아직은 조심스럽게 하여야 합니다. 자연과학의 어떤 구체적인 발견이 깨달음의 어느 특정한 부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은 삼가야 하며, 또 깨달음을 체득하는 것이 어떠한 과학보다도 더 과학적이라는 사실에 우월감을 가지거나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깨달음 스스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를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기 때문에 중도의 원리를 거슬러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깨달음(진리)을 얻을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는 문자방편도 그 시대에 따라 알맞게 바꾸어야 합니다. 다만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이던 깨달음의 세계와 학문(과학)이 서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기에 더욱 서로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점과,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흐름이 양자역학의 흐름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상보성, 중도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과학은 깨달음의 세계에서 체득되는 `중도中道’의 깊은 의미를 늘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고, 깨달음의 세계는 지난 날 과학이 발전되지 못했던 시대의 수행방편에서 벗어나 오늘 날 획기적으로 발달한 과학을 반영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수행인(자기계발)으로서는 깨달음의 세계관이 서구과학문명의 모순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인류의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까에 대한 적극적이고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 이제 자연(법계)의 진실을 깨달음의 세계에서 약2500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께서 깨달음으로 관하신 내용과 현대물리학(양자역학)이 밝혀낸 자연의 성품(비밀, 수수께끼)을 하나로 회통시켜 논리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 진리란? (4) *** (총론)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우주의 근본을 `진여’라 말하고 이것을 `참 마음’이라 했습니다. 진여를 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에너지이며 이 에너지의 작용으로 모든 존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본래 언어 문자(일체의 개념)로는 “이것이 진여다.”라고 나타낼 수 없으므로 개구즉착開口卽錯입니다.

 빅뱅이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의 시작이며 빅뱅은 진여의 작용으로 일어난 현상입니다. 만일에 빅뱅이 우주의 근원(시작)이 아니고 다른 것이 우주의 근원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나온다면 그것도 역시 진여의 작용(연기법 緣起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빅뱅이 일어나고 3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지금의 우주가 형성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거의 다 갖추었습니다. 우주 전체로 볼 때 수소 75%와 헬륨25%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나머지 많은 원소들은 수소와 헬륨의 양에 비하면 극소수 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최초의 3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소립자(미립자)는 빅뱅 즉, 진여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소립자는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알갱이들이며 이 알갱이들이 인연 따라 모이고(생生) 흩어지는 것(멸滅, 사死)이 모든 존재의 모습입니다.


 진여의 성품을 저자는 `원리’라 이름하고, 만상은 이 원리를 근본바탕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원리는 어디에나 똑 같이 들어있는 만상의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만상을 진여(원리, 체體, 본질, 진리, 법法)의 입장에서 보면 있는 그대로 둘이 아니다(불이不二), 다르지 않다(불이不異), 같다(즉화卽化)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진여는 모든 것을 다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진여의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소립자(미립자) 또한 진여와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여와 소립자는 그 작용에 있어서는 매우 다릅니다. 진여는 우주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우주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서 다스리기 때문에 인연(조건, 상항, 여건)따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대의 에너지입니다. 소립자 하나하나에도 무한한 가능성은 갖추어져 있으나 그 가능성을 스스로 작동시키지는 못합니다. 다만 다른 소립자와 소통함으로써 영향을 받아 반응할 뿐 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장 잘못 전해지고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소립자 하나하나에 인식할 수 있는 기능(지능)이 있어 소립자가 인간의 마음을 척척 읽어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립자는 수많은 알갱이들이 모여 어떤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개체로 거듭났을 때 다른 개체와 주고받는 관계성(연기緣起)으로 연결되면 비로소 자기의 기능을 스스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을 구성(오장육부)하고 있는 최소한의 단위는 모두 소립자입니다. 이 소립자가 오장육부라는 각 기관을 만들고 각각의 기관은 서로 연결(연기, 관계성)되어 작용함으로써 한 사람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소립자는 인간이 간절하게 소망하면서 꾸준한 노력을 하면 거기에 반응을 일으키기도 하며, 특히 한번이라도 인연을 맺은 소립자끼리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과학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문제는 소립자를 말할 때 상세하게 서술하겠습니다.


 진여의 성품인 원리에는 무상無常의 원리, 연기緣起(인연因緣)의 원리, 무자성無自性의 원리, 무아無我의 원리, 공空의 원리, 업業의 순환(윤회) 원리가 있으며 각각의 원리는 서로 연기되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중도中道의 원리로 회통됩니다.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께서 큰 깨달음을 얻고 맨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나는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일체의 참된 모습을 깨달은 더할 나위 없는 지혜) 했노라”입니다. 진여의 작용에 의해서 소립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진여의 성품과 소립자의 성품은 같습니다.


 소립자는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구성 물질이기 때문에 소립자의 성품은 곧 자연의 성품(본질,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양자물리학에서 밝혀낸 소립자의 성품은 무엇일까요? 소립자의 `이중성(상보성), 불확정성, 확률파(이중성에서의 파동), 중첩, 모든 가능성’이 그것입니다. 앞으로 자세하게 설명될 것이지만 이 모든 성품이 `중도의 원리’와 거의 흡사합니다. 이로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원리를 오늘 날 양자물리학(학문)이 하나씩 증명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진여는 인간의 모든 개념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언어 문자로 나타낼 수 없지만 진여의 성품인 원리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원리를 방편으로 삼아 깨달음으로써 진여를 체득(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진여는 참마음이요, 진여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소립자요, 그러므로 진여의 성품과 소립자의 성품은 같으며, 그 성품을 원리라 하며, 소립자는 우주 만상의 최소구성 물질이기 때문에 진여(소립자, 원리, 진리, 본질, 체體)의 입장에서 보면, 만상은 각기 다른 모습(상相, 용用)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 모습 있는 그대로 둘이 아니고(불이不二), 다르지 않기 때문에(불이不異), 같다(즉화卽化)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여와 소립자와 원리(성품)의 관계는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은 그 자리는 다르나 하나다.”라고 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 사상’과 같고,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비록 몸은 다르나 하나다.”라고 하는 `삼신일체三身一體 사상’과도 같습니다. 이 관계를 삼위일체 사상으로 본다면, 진여는 성부요, 소립자는 성자요, 원리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현존하는 성부(하나님)와 성자(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나에게 임할 때 비로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원리를 체득(깨달음)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비로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삼신일체 사상으로 본다면, 진여는 법신을 뜻하고, 원리는 보신을 뜻하고 소립자는 화신을 뜻합니다. 따라서 원리(보신)를 통해서(인연) 진여(법신)를 체득하면 해탈(열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법신을 진여라는 하나의 말로 통합시키면 모든 종교적인 논리는 가장 조화롭게 됩니다.




*** 진리란? (5) *** (총론)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우리는 종교가 다 다르다고 말하면서 내가 믿는 종교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별하고 차별해서 서로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에는 중도를 체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불성佛性)이 있다(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만물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소립자가 본질(체體)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진여를 참 마음이라 하면서, 우주 전체를 마음의 본바탕인 제8 아뢰야식(무의식, 모든 업業을 저장하는 창고)에 비유하였습니다. 아뢰야식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해있는데 이것을 계발하는 것이 수행(자기계발)입니다. 이것을 양자물리학자들은, 소립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도대체 소립자를 누가 창조해 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독일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플랑크Max Planck“고도의 지능을 가진 배후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우주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Richard Phillips Feynman, 1918.5.11~1988.2.15)은 “양자론은 논리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신비한 과학체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자연은 인간의 개념을 뛰어넘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세계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린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즉,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인식 가능한 것들을 현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 너머의 `무한한 의식(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양자물리학 이론입니다. 여기서 `고도의 지능을 가진 배후의 마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마음’ `현실 너머의 무한한 의식’이란?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진여(하나님, 법신, 부처)’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항상하지 않다. 변한다.)하기 때문에 시작(기원)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고정되어 있다면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다만 시작과 끝이 일회성이 아니고 계속해서 반복(윤회)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기원基源(시작)이 있다는 것은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 이 강의에서는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원리를 깨달음으로 체득하고 얻어지는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게 함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열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 진리의 다른 이름 *

 인간은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 놓고 “그것은 무엇이다.”라고 함으로써 의사소통을 합니다. 이것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명자상名字相 ’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진리’라고 하는 것도 인간이 “그것은 진리라고 이름 하자”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것도 스스로 “내 이름은 무엇이다.”라고 말한 것은 없습니다.


 진리를 의미적으로 나타내는 말에는, 신을 모시고 있는 종교에서는 신을 진리라 하고, 신을 모시지 않는 종교(불교)에서는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고 진여라는 말도 다른 이름이 여러 개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세상을 만든 `창조주’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 갈등은 이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진리(창조주)가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느냐를 놓고 종교마다 이론이 다 다르며, 종교마다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교리)에 있어서는 서로 자기 종교의 교리(가르침의 말씀)가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을 해도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오감(눈, 귀, 코, 혀, 몸)으로 느낀 것을 언어 문자로 제 아무리 명확하게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직접 체험해 보는 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깨달음(견성見性)도 체험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체득體得 또는 증득證得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명자상名字相으로부터 벗어나야 해탈解脫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주 만상은 진리(법法)에 의해 만들어진 진리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보면 진리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불이不二(不異)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확실하게 체득하면 그것이 깨달음(견성)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언어 문자로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으므로 깨닫고 나면 언어 문자(문자방편)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무학無學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종교로 인한 분쟁은 수 없이 많으며 지금도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진리(원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기원基源(시작)이 있다는 것의 의미 (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형이상학(종교적 개념; 불교)으로 볼 때 우주는 순환원리에 의해 순환하고 있기때문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무시무종無始無終). 그러나 형이하학(과학)으로 보면 시작이 있기 때문에 언제인지는 몰라도 끝이 있을 것입니다.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빅뱅(Big Bang; 대폭발)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지금 태양계가 속해있는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므로 빅뱅이 우주의 기원起源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순환원리란? 인연(연기緣起, 여건 상황)따라 일어남(생生, 모이고)과 사라짐(멸滅, 사死,흩어짐)의 끝없는 연속(윤회)을 말하기 때문에 이 순환원리 가운데 빅뱅(생生, 시작)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부분적(개별적)으로 보면 시작도 있고 끝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주를 순환케 하는 근원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진여眞如’라하고, 진여의 성품(원리)은 무상無常, 연기緣起(인연생기因緣生起), 공空, 무자성無自性, 무아無我,업業의 순환(윤회)이며 이 말들을 하나로 회통시킨 말이 `중도中道’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으며, 시작과 끝은 진여의 작용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무시무종의 순환원리로 볼 때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고, 빅뱅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며, 공간은 점점 더 확장(팽창)되고 있습니다. 확장된다는 말은 축소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시작과 끝이라고 본다면, 빅뱅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반복 될 수도 있으며, 우리가 속해있는우주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우주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초끈이론’과 `M이론’, `평행우주’에서 말하는 `다중 우주론’이 형이하학(과학)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무엇이 애초에 빅뱅을 만들었을까? 많은 과학자들은 빅뱅을 만들어 낸 에너지가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중 우주라고 불리는 시공간 속에 말입니다. 우리는 빅뱅이엄청난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다중 우주 속에서 빅뱅은 항상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의 탄생은 단지 작고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했을수도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다른 우주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다중 우주가 거품 같은 우주들을 수없이 만들어 낸다면 우리 몸과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들을 형성하는 패턴도, 수없이 반복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다중 우주 어딘가에서 똑 같이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우주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 하였으며, 이것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있는 미진수세계微塵數世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고 말합니다. 생주이멸과 성주괴공은 인연(조건, 여건, 상황)따라 모이고(생生) 흩어지는 것(멸滅)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무시무종)을 말합니다. 무無에서 유有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빅뱅도 유有이기 때문에 유有 이전의 또 다른 유有는 끊임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는 끊임없는 유有의 순환(연속)입니다. 시작(기원)이 있다는 것은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나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시작은 원인(본질, 근본,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원인을 찾고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학문이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학문이 발전되면서 차츰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 분야별로 근본적인 원리가 밝혀지면서 원리끼리 서로 통하는 공동패턴pattern(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공동패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기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갈수록 시스템system은 간단해 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의 예로서, 진화발생생물학(이보 디보 EVO DEVO; Evolutionary Development Biology)입니다. 진화생물학과 발생학이 합쳐진 신생 생물학의 한 분야로 유전학, 세포생물학, 생리학, 내분비학, 면역학, 신경생물학, 생화학, 생물물리학 등의 기능생물학 분야와 행동생물학, 생태학, 진화학, 계통분류학, 고

생물학, 집단유전학 등을 포함하는 진화생물학 분야 그리고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생물정보학 까지도 하나의 카테고리Kategorie(범주) 안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보디보’가 생명과 관련된 이 모든 학문 분야를 하나로 묶어 나가고 있습니다. 빅뱅이 우주의 기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3분에 이미 75%의 수소와 25%의 헬륨이라는 원소(소립자)가 형성되었으며, 지금과 같은 우주가 형성된 것은, 우주 전체의 온도를 측정해 본 결과 빅뱅이후 38만년 후의 우주전체의 온도는 균일한 것이 아니라 10만 분의 1도의 편차(섭씨 -270.4252도~섭씨 -270.4248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10만분의 1도의 온도의 편차에 의해서 은하계가 만들어지고 태양계가 만들어지고 행성 지구에 유기체라는 형태의 방향성을 갖는 물질시스템이 나오게 되면서 인간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은 그동안 신神의 영역으로만 알려졌던 창조에 관한 것 즉, 생명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우주의 기원인 빅뱅을 빅뱅머신이라고 하는 `거대강입자가속기(LHC, Large Hardron Collider)’를 만들어 유럽 원자핵 공동연구소(CERN)에서 2008년 10월 10일 가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인위적으로 빅뱅을 만들고 모든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힉스 입자(힉스메커니즘)’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LHC는 두 개의 양성자 빔을 원형으로 가속하여 고에너지로 충돌시키는 장치로서 이때 충돌에너지는 양성자 자신의 질량보다 14000배나 높습니다. 고에너지로 충돌한 양성자는 부서지면서 그 내부의 소립자들이 높은 에너지로 충돌하게 되는데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 소립자들 사이의 고에너지 상호작용입니다. 이 실험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빅뱅이 일어난 직후 약 천억 분의 일초에 해당하는 시기의 에너지와 비슷하기 때문에 LHC는 초기 우주 상태를 재현함으로써 우주의 탄생과 자연법칙의 비밀을 파헤칠 단서를 찾고자 함입니다.



 

*** 기원基源(시작)이 있다는 것의 의미 (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학문(과학)이 발전되면서 거시의 세계(고전 물리학; 뉴턴역학)에서 미시의 세계(현대 물리학; 양자역학)로 영역이 옮겨짐으로 이제는 중력에 관한 것을 제외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성자, 전자, 광자 이 세 가지의 소립자로 다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주 만물은 태초에 빅뱅이라고 하는 한 지점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우주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만물은 양자적(소립자)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연기緣起)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전기역학에서는 전기電氣와 자기磁氣현상을 하나로 합쳐 이들을 지배하는 힘을 전자기력電磁氣力이라하였으며, 고전 물리학(뉴턴역학)에서는 `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에서는 `상호작용相互作用’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자연계에는 질량이 있는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과 관련한 `중력重力(뉴턴의 만유인력)’과 전기나 자기에 의한 `전자기력(맥스웰의 전자기 법칙)’과 원자핵이 붕괴되지 않도록 강한 힘으로 묶어두는 `강력强力(강한 상호작용)’과 물질의 붕괴와 관련된 `약력弱力(약한 상호작용; 한 종류의 기본 입자를 다른 종류의 기본입자로 바꾸는 힘)’, 이렇게 네 가지의 기본적인 상호작용(절대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상호작용을 ‘하나’로 보고 모든 자연현상을 하나의 법칙(대통일장이론)으로 통합 기술하는 것이 물리학의 꿈입니다.


물리학자들이 과학의 ‘마지막 이론(final theory)’이라거나 또는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라고 부르면서 찾고 있는 `대통일장 이론(grand unification theory)’은 알고 보면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조화롭게 결합한 이론입니다. 대통일장이론이란? 1974년 `죠지아이’와 `셀든 글래쇼(Sheldon Lee Glashow)’에 의해 제창된 이론으로서 입자물리학에서 기본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형태와 상호관계를 하나의 통일된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장(field)의 이론입니다. 이런 궁극적 이론이 있다면 이 이론은 반드시 연기법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우주 만물은 양자적(소립자)으로 서로 얽혀 있는 생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연기법과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물리학의 궁극적 이론이 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물리학자들이 대통일장이론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연기법의 의미가 복잡하고 깊고 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통일장이론에 의해 전자기력, 약력, 강력은 통일되었으나 아인슈타인이 시도하였던 중력과의 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력을 양자화 하는 일에 성공하면 대통일장이론을 거의 이루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거시세계에서 일어나는 물리현상인 중력과 미시세계에 적합한 양자론, 이 두 힘을 합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거시세계의 연기법을 과학이론으로 정립했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나 미시세계의 현상을 기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중력을 기술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은 모두 자연의 일부만을 기술할 수 있을 뿐, 연기법을 전부 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끈(string)’이론과 ‘막(membrane)’이론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기본입자들을 끈의 진동이나 막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는 고차원에서 중력과 양자론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만물의 이론(TOE; Theory of Everything)이라고도 불리나 실험을 통한 실제적인 끈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면 수학적 이론에 머물거나 과학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차원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진여의 입장에서 보면, 소립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하나며(불이不二, 불이不異) 어떠한 분별도 차별도 본래 없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하나로 통일된 물리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궁극적 목표는 언제쯤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778~897)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문)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갑니까?(만법귀일 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답) “내가 청주(칭저우)에 있을 때 삼베 장삼 하나를 만들어 입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나 나갔다네.”


 이와 같이 질문의 내용과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는 이유는, 법을 법이라 말 하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도단’이요 `개구즉착’이라는 말입니다. 법(진리)은 오직 깨달음으로 체득해서 느낌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물어보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즉시 깨달아야 하나 대개의 경우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엉뚱한 말(격외格外의 말)을 의심해 들어감으로써 훗날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화두참구話頭參究(간화선 看話禪)’라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지?” 참구參究해 보십시오.


 현대 물리학과 고전 물리학의 차이는, 기본적인 공식은 같으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한 에너지와 시간을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측정할 수 있다고 하면 고전 물리학(뉴턴역학)이고, 측정할 수 없다고 하면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뜻인데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빅뱅과 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의 작용이 0.00000000000000...1초와 같이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나면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에너지(소립자)로 꽉차있는 진공에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무수히 많은 일들(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시의 세계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시의 세계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 원리(이중성)와 확률파와 중첩현상 즉,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빅뱅은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겉으로 드러난 세상이 우주 만물(현상계, 거시세계)입니다.

 학문은 하나하나의 개체(상相, 용用; 정보)를 연구하다가 발전하면 할수록 각각의 공통점(이치)을 발견하게 되고, 그 공통점을 추적하다 보면 하나의 이론(기원, 체體; 본질, 근원, 원리)으로 통합되기 때문에 기원(시작)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여서 번뇌, 망상(망념; 상相, 용用; 정보)으로서 번뇌, 망상(망념)을 끊고 진여(체體; 본질, 근원, 원리)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의 등장과 소립자의 성품(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 양자물리학의 등장 *

 

 

 

 

 

빛의 파동설과 입자설은, 1621년 `스넬(Willebrord van Roijen Snell, 네덜란드, 1591 ~ 1626, 물리학자, 수학자)’에 의해 빛의 굴절屈折에 대한 법칙이 발견되면서 빛을 파동으로 보는 이론 이후 1887년 `헤르츠(Hertz, Heinrich Rodolph 독일의 물리학자, 1857~1894)’의 실험으로 발견된 광전효과光電效果등 빛의 입자설을 입증하는 여러 현상들이 발견됨으로써 빛의 입자설과 파동설에 대한 과학자들 간의 논쟁은 19세기 말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로 20세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양자이론은 1900년 12월 14일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 -1947)’라는 독일의 물리학자가 독일 물리학회에 발표한 내용으로 “물체에 의한 빛의 방출放出과 흡수吸收에 관한 종전의 주장(고전물리학, 뉴턴역학)에 반대하는 이론으로서, 물질로부터 에너지가 덩어리로 떨어진 형식으로 방출된다는 가정을 하면 설명된다.”는 가설을 내 놓았습니다. 이 가정이 바로 새로운 양자이론(Quantum hypothesis)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플랑크’는 빛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 대하여 종래의 상식을 깨고 양자量子라고 하는 것을 처음으로 제창하였습니다.


흑체복사黑體輻射(Black Body Radiation)를 할 때 뜨거운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spectrum(무지개와 같이 빛의 파장에 따라서 나타나는 색깔)은 고전물리학(뉴턴역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였습니다.

플랑크가 주장한“덩어리로 떨어진다.”는 의미는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조금씩 떨어져 나온다는 불연속적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데, 불연속적으로 떨어진다면 그 거리가 얼마나 떨어지는 거리인지 그가 발표한 공식에 의하면 십의 마이너스 이십 승 정도의 미미微微한 거리입니다. 이것은 측정도 불가한 거리이기 때문에 어느 과학자가 보더라도 연속적으로 변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지만, 마이크로(소립자) 세계(미시세계)의 물리량에서는 물리현상을 생각할 때 이런 미미한 물리량의 불연속도 무시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양자가설이 발표된 뒤 190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은 “빛은 연속적인 파동의 흐름이 아니라 광자Photon 또는 광양자Light Quantum라고 부르는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며, 광양자가 가지는 에너지는 플랑크상수常數(h)와 진동수振動數의 곱으로 나타난다.”라고 주장하고, `막스 플랑크’가 발표한 양자가설을 물리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입증하고, 광전효과光電效果를 해명하려고 하였습니다.

 

1923년 `콤프턴(Arthur Holly Compton, 1892.9.10 ~ 1962.3.15)’의 실험에 의해 발표되었던 `콤프턴 효과Compton Effect’는 물질과 빛이 상호작용할 때 에너지와 함께 운동량도 전달되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광자光子가 전자電子를 밀어내는 효과를 관측함으로써 광자의 실체를 확실하게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아인슈타인의 광양자가설光量子假說이 콤프턴 효과를 확실하게 설명함으로써 광자는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가 아니라 에너지와 운동량을 지니고 시·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물리적 실체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관측된 이후 과학자들 간에는 빛의 입자설과 파동설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되었으며 개념상 입자성과 파동성은 양립될 수가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 물리적 사물이 파동波動이면서 파동과 상반되는 입자粒子의 성질을 가지는 것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광양자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 빛의 간섭干涉과 회절回折현상을 설명할 수 없고 빛을 파동으로만 생각하면 광전효과와 콤프턴 효과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물리학자들은 점점 빛의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二重性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시작되면서, 하나의 물리학적 항목이 파동성도 지니고 입자성도 지닐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개념이 어떻게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5년 6월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 1976 독일의 이론물리학자)’는 물리학적 모형을 도입하지 않고 거의 수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양자에 대한 행렬역학行列力學이라는 새로운 역학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 - 1961, 오스트리아)’의 파동역학波動力學과 함께 마이크로 세계의 운동법칙을 기술하는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이론이 확립됨으로써 양자역학量子力學이 시작되었습니다.

1927년 `드브로이(De Broglie, 1892년 - 1987년, 프랑스)’에 의해 밝혀진, 빛이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가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동안 양립 불가능한 개념으로 인식되었던 것을 바꾸어야 했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빛과 물질은 모두 에너지의 한 형태이고 서로 다른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모든 물질도 입자성과 파동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파동은 어떤 한 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넓게 퍼져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원자 중의 전자의 파동도 원자핵의 주위에 넓게 퍼져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드브로이는 전자의 정체는 파로 되어 있으나 보기에는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으며, 원자의 파와 물질의 파가 어떤 모양인지에 대하여는 명확히 서술하지 못했습니다.


 `드브로이’의 이와 같은 주장을 같은 해에 `데이비슨(Clinton Joseph Davisson, 1881 ~ 1958, 미국의 실험 물리학자)’과 `저머(Lester Germer, 1896~1971, 미국)’가 전자는 파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드브로이’의 식을 만족해 준다고 증명을 해 주었으며, 또한 `톰슨(George Thomson, 1892~1975, 영국)’의 실험을 통하여 전자를 알루미늄박에 입사入射시켜 회절回折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전자의 파동성이 실험으로 재 증명됨으로써 물질의 이중성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 소립자(미립자, 아원자)의 성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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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미립자, 아원자)란? 유형무형有形無形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를 소립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개면 아주 작은 알갱이가 되는데 이것을 소립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소립자의 입장에서 보면 만상은 소립자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만상(모든 것)의 본질이 소립자라는 말인데, 이 말은 소립자는 무한한 가능성(창조)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소립자가 어떤 성품(성질, 원리)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소립자는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한의 물질이면서, 소립자끼리는 항상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현실도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현실도 부정적으로 나타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거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거나,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물의 결정체가 바뀌고, 식물의 성장에 영향력을 미치게 하거나, 텔레파시(생각과 생각)가 서로 통하는 등 오는 날 과학은 많은 것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발달한 양자물리학에서 이러한 자연(우주)의 진실을 찾아낸 것은 깨달음의 세계의 핵심사상인 `불이不 二 ; 둘이 아니다(불이不異 ;다르지 않다)사상’, `중도中道사상’, `공사상’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증명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며, 이 강의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찾아낸 소립자의 성품과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핵심 원리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에 그동안 분리되어 왔던 형이상학(정신계, 종교)과 형이하학(물질계, 과학)을 비롯한 만상이 하나로 통하게 됨으로써 모든 분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소립자가 모든 것의 근본 물질이기 때문에 소립자의 이중성(상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제는 자연을 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반되는 두 개의 개념을 함께 적용시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종교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종교의 이름과 교리는 다른 것 같으나 본질에 있어서는 같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만 알아서는 안되고, 다른 것도 알고, 이것과 저것을 서로 연결해서 알아야 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고, 그래야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양자역학의 확립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와 `닐스 보어’의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 Coplementarity principle가 발표됨으로써 이루어 졌습니다.




*** 양자물리학의 등장과 소립자의 성품 (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불확정성 원리란? 1927년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입자성과 파동성은 논리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양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모든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자차원에서는 사물을 위치의 관점과 운동량의 관점에서 각각 기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두 관점 모두를 동시에 확정적으로 대상을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두 관점을 동시에 기술하려고 하면 하나를 측정하는 동안 다른 하나가 움직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는 것으로 이를 `불확정성원리’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물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지고, 그 물체의 속도를 알고 있다면 그것의위치를 알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출수록 다른 하나의 불확정성은 더욱 증가합니다.

 

미시세계에서는 극히 미미한 사물의 위치나 운동량의 변화도 무시해서는 안 된 다는 말입니다. 공간적으로 0.001mm라는 거리와 시간적으로 0.001초라는 시간은 거시세계에서는 아주 짧은 거리나 시간이므로 무시해도 별 상관이 없으나 미시세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가 되며, 긴 시간이 되기 때문에 결코 무시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땅에 떨어져 있는 물체는 거시적인 개념으로는 땅과 물체가 붙어 있는 것이나 미시적인 개념으로는 결코 붙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텅 비어있는 공空이기 때문입니다.

 

입자-파동의 이중성은 1927년 데이비슨-저머 실험(Davisson–Germer experiment)에 의해 전자 같은 아원자 입자(소립자)는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다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입니다. 입자는 공간에서 특정위치를 점하는 분리된 고형의 물질이라 할 수 있고, 파동은 위치가 정해져 있지않고 고체의 성질을 갖지 않으며 음파나 물결처럼 매질을 통해서 퍼져 나갑니다.

 

이 들은 이중 슬릿(두개의 구멍)실험에서 전자와 같은 소립자의 파동성을 관찰하던 중, 소립자는 관찰자가 관찰하면, 특정한 장소를 점하지 않고 `확률의 장’으로 존재하던 파동성이 붕괴되면서 입자로 변해 특정 위치와 시간 속에서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관찰하지 않으면 다시 파동의 성질로 나타나는이중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한꺼번에 많은 입자를 동시에 내 보냈으나 입자를 하나씩 시간 간격을 두고 내 보내도 파동의 특징인 간섭무늬가 나타나는지를 실험하였습니다. 입자를 하나씩 내 보내고 몇 시간이 지난 뒤 가보니 역시 간섭무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입자가 어느 구멍으로 통과했는지를 알아보면 반드시 두 개의 구멍 중에 어느 하나의 구멍으로만 통과했다는 한 개로 나타나고, 관찰하지 않으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했다는 간섭무늬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입자가 둘로 쪼개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멍을 여러 개로 뚫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인간이 관찰하면, 즉 정보를 얻으면 자연의 상태는 바뀐다는 말입니다. 관찰대상과 관찰자의 의미는 무엇이며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을 놓고 물리학자들이 설전을 벌였으나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상보성 원리란? 빛이나 전자와 같은 소립자(미립자)는 전 공간에 넓게 파동으로 퍼져 있다가 관찰자가 관찰하면 입자의 성질로 나타나고, 관찰하지 않으면 다시 파동의 성질로 나타나기 때문에 입자나 파동 중 어느 하나의 성질로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두 가지 성질을 함께 지닌다고 말해야 된다는 이론이 상보성원리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물질이 논리적으로 양립兩立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이중성二重性(Duality)’이라고도 합니다. 이때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 성질은 서로 상보적이라고 합니다. 이중성과 상보성은 같은 말이기는 하나 이중성은 상반되는 이것과 저것의 성질을 경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상보성은 음양陰陽이 서로 조화(화합)를 이루는 것과 같이 서로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는 관계 즉, 공생共生하는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보다 더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즉, 연기緣起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빛이 동시에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관찰자가 관찰하면 입자로 나타나고,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중론中論’에서 사물의 참모습을 8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팔불중도八不中道라하며, 여기에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물의 참모습은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이며 `같은 것도 아니다(불일不一)’라는 말은 본질(체體)은 같으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상相, 용用)으로 보면 서로 다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불일不一’은 음양陰陽이 서로 다르면서 화합하고 있는 모습과 같으므로 ‘상보성相補性’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불이不異)’라는 말은 입자-파동과 같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다르나 입자의 성질을 가질 때나 파동의 성질을 가질 때나 소립자라는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다(같다)이므로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불이不異’는 ‘이중성二重性’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불일역불이’는 서로 대립되는(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상, 용; 현상)이 사실은 하나의 근원(체; 본질)에서 출발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국 소립자의 이중성(입자-파동)은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만상의 존재 원리인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합니다. 무자성의 원리는 여러 가지로 활용되나 우리들의 삶에 응용한다면, “만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내 생각(고정관념)으로 분별해서 판단하고 확정지어 말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서 일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의 지혜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 양자물리학의 등장과 소립자의 성품 (3)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이중성과 양면성은 사전적으로는 비슷한 말이나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양면성이란? 대립(상반)되는 두 가지 성질을 다 가지고 있다(한 가지 사물에 속하여 있는 서로 맞서는 두 가지의 성질.)는 뜻으로, 이것과 저것을 다 가지고는 있지만 이것과 저것이 같지는 않다는 뜻으로 쓰이고, 이중성(하나의 사물에 겹쳐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은 이것과 저것은 있는 그대로 같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따라서 이중성은 서로 상대적인 것이 `하나다’, `같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은 다르지 않다(不異), 둘이 아니다(不二), 같다(즉화卽化)는 뜻이므로 우리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불이不二(불이不異, 즉卽의 논리)다.”라고 하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에 “물질(유有)이 허공(무無)과 같으며(색즉시공 色卽是空), 어리석음(무명無 明, 번뇌)이 최상의 깨달음(보리菩提)과 같으며(번뇌즉보리 煩惱卽菩提), 삶과 죽음(생사生死)이 있는 것과 생사를 벗어난 것(열반涅槃)이 같으며(생사즉열반 生死卽涅槃),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범부凡夫)과 깨달음을 얻어 최상의 지혜를 갖춘 부처(불佛)가 같다(범부즉부처 凡夫卽佛).”고 하였습니다. `범부즉부처’라는 말의 뜻은, 한 사람에게 깨달음의 측면과 어리석음의 측면이 따로 있어서 어리석음의 측면이 나타나면 범부가 되고 깨달음의 측면이 나타나면 부처라는 뜻이 아닙니다. 깨닫고 보니 내가 본래 부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본래심을 말합니다. 깨닫기 전에는 누가 아무리 “네가 본래 부처다.”라고 말해주어도 그 말을 결코 믿으려 하지 않고 부처를 찾으려고만 합니다.


 빛의 이중성에서 보았듯이 상황에 따라 입자의 성질도 되었다가 파동의 성질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빛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나’가 됩니다. 예를 들어 불행과 행복이라는 것도 내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불행이라는 것이 없다면 행복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듯이 본래 행복도 불행도 그 자성(스스로의 고정된 성품)이 없습니다. 또한 `나(주관)’가 있기 때문에 `너(객관)’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불행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고, 나(주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너(객관, 상대, 경계, 대상)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상보성(이중성)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같고 너와 내가 같다는 말이므로 우리들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앞으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며 이 강의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양자역학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Henrick David Bohr, 1885~1962)인데, 상보성원리는 `닐스 보어’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 자연의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개념(고전물리학)으로는 모자라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양자역학은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운동을 설명하는 물리학의 한 분야로서 전자가 어떤 상태로 어떤 운동을 하는지 안다면 자연을 정확히 이해하고 새로운 기술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주로 거시세계를 관찰 대상으로 하였으나 현대물리학(양자물리학, 양자역학)에서는 미시세계(미립자, 소립자)를 관찰 대상으로 하였는데 빛이나 전자는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파동성波動性(비 물질의 특성)과 입자성粒子性(물질의 특성)의 이중성 이라는 사실을 알고 쓰기 시작한 말이 상보성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의 이중성은 회절回折이나 간섭干涉과 같은 파동 현상만으로 설명하기도 불가능하고, 광전효과와 같은 입자 현상만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파동 측면과 입자 측면을 동시에 관찰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이 두 가지 측면을 합치면 어느 한 가지 입장만을 취하는 경우보다 더욱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측정이 불가능하지만,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그 둘이 다 필요합니다. 자연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서로 보완(상보相補 )해주는 반대 개념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 보완해 주는 그 두 개가 한 쌍(세트set)의 물리량입니다. 즉 자연현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만으로는 결코 기술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이 개념과 짝이 되는 대립되는 개념을 함께 사용해야만 사물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입자란? 콩이나 야구공과 같이 하나씩 똑똑 떨어져 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있으며, 일정한 공간에 갇혀있으며, 사물로서 실재하는 것이며. 개별 입자가 여러 개가 있으면 물리량을 합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동은 소리나 물결파와 같이 연속적이기 때문에 하나씩 헤아릴 수 없으며, 전파(전달)되며,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에 보강과 소멸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입자는 `있다(유有)’를 의미하고, 파동은 `없다(무無)’는 뜻이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으로 본다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물질이 허공과 같고 허공이 물질과 같다.)’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엄격하게 보면 물리학적 원리가 아니라, 일종의 사고방식으로 과학과 철학, 윤리학, 종교 등을 포함하여 모든 이론에 적용시킬 수 있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보성원리를 깨달음으로 다시 해석한다면, “고정불변의 하나의 개념으로는 물질적인 현상이나 정신적인 현상 어느것 하나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없다.”가 됩니다. 고정된 하나의 개념은 만상의 자성自性을 말하는 것이니 상보성원리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무자성無自性을 뜻하는 것이며, 이것은 단멸斷滅(단견斷見; 무無)과 상주常住(상견常見; 유有)를 떠난(초월한) 중도中道를 의미합니다. 또한 상보성원리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 空卽是色’이기 때문에 왜 ‘공’이 미묘한 개념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을 단순하게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개념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그것들의 본질(최소 단위)인 미립자의 상보성 즉, 미립자의 무한한 가능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공眞空은 묘유妙有(참으로 공하다는 것은 만물이 묘하게 존재하고 있다.)’입니다. 그러므로 공이란? 있는 그대로 모든 존재의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다.”고 하는 것을 `공空(허공)’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들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하는 말입니다. 양자적으로 볼 때 허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소립자로 빈틈없이 꽉 차 있는 상태입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물이라는 물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물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물고기는 물을 어떻게 인식할까요? 우리들처럼 물을 물체로 인식할까요? 아닙니다. 인간이 허공을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인식하듯이 물고기도 물을 물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인식할 것입니다. 우리와 반대로 공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 그것을 물체로 인식할 것입니다.




*** 양자물리학의 등장과 소립자의 성품 (4)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양자물리학에서 발견된 `이중성’은 모든 것에 다 해당되기 때문에 `자연의 이중성’이라고도 합니다. 소립자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소립자는 관찰하면 입자(유有)의 성질로 나타나고 관찰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파동(무無)의 성질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관찰하면 파동의 성질이 붕괴되고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에 관찰행위(인간)가 관찰대상(소립자)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은 뇌파를 만들고 뇌파도 소립자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소립자와 서로 소통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미시적인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소립자와 소립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관찰행위에서 발생되는 소립자(뇌파)는 다른 소립자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세계에서는 관찰행위나 실험도구로 대상을 관찰한다고 해서 그 대상에 영향을 조금도 미치지 않으나 소립자와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아주 미세한 관찰이라 하더라도 대상 그 자체가 무작위로 변화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다(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관찰에 의해 바뀔 때는 하나의 사물이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비국소적으로 관찰하는 그 순간에 나타나며, 관찰된 것은 그 관찰자에게만 객관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다른 관찰자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또 항상 동일한 결과를 얻는 법은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결코 없습니다. 이유는 양자의 세계(미시의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무상無常)입니다.


 이와 같이 양자의 세계(미시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분리 될 수가 없는데 이것은 거시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원리를 체득(깨달음)하게 되면 확실하게 알게 됨으로써 불퇴전의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상보성원리를 처음부터 매우 어려운 깨달음(형이상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이유는, 이 공부는 강력하게 일어나는 의심을 통해서 깨달음을 체득體得(증득證得)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확률파란? 1926년 슈뢰딩거에 의해 제창된 물질입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양자역학의 이론을 말하며, 물질입자의 입자성粒子性과 파동성波動性이라는 이중적 성격이 이 이론에 의해 비로소 완전한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소립자)의 이중성에서 관찰자(관찰기기도 포함)가 관찰하면 입자의 성질로 나타나고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의 성질로 나타나는데, 이때 파동을 현대물리학에서는 확률파確率波라고 해석합니다. 소립자는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이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것을 본질적으로는 입자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고 파동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이분법(존재-비존재, 선-악 등)으로는 자연을 설명하고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로서 무자성 즉, 공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확률파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입자가 파동처럼 전 공간에 퍼져있는 것이 아니라 입자가 존재할 확률이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전 공간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항상 파동의 성질로 있고, 관찰할 때만 입자의 성질로 나타나므로 `측정하기 전에도 입자가 공간상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입자가 공간상의 어디에 있긴 있지만 측정하기 전에는 정확히 그 위치를 알 수 없고 존재할 확률만을 알 수 있는데 존재할 확률을 말해주는 것이 확률파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입자는 측정과 더불어 나타난 것일 뿐이기 때문에 측정을 하지 않고서 입자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측정 전에는 오직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만 전 공간을 뒤덮고 있을 뿐입니다. 측정하는 순간 파동은 사라지고 입자가 나타나므로 측정 후에야 비로소 입자의 존재가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태양계에 속해있는 행성은 일정한 궤도로 공전 운동을 하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나 속도를 정확하게 알면 그 행성이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일식이나 월식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며, 이러한 자연관을 `결정론적 자연관’이라 하며, 고전물리학 이론입니다. 그러나 행성과는 달리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와 같이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미시세계를 연구하는 양자론의 세계(현대물리학)는 결정론적인 세계(현실태 現實態)가 아니라 확률적인 세계(가능태 可能態)임을 전제하고, 미시세계의 모든 물리적인 현상을 확률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을 `코펜하겐 해석’이라 부르며 현재 물리학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 의해 전자의 현재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자의 미래 위치도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에 있는 어떤 원자핵 주위에 있는 전자는 실험도구로 관찰하기 전까지는 핵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고 금성이나 목성과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확률도 있으며, 심지어 수십억 광년 떨어진 아주 먼 은하계에 존재할 확률도 있습니다. 확률이란 전자의 위치나 이동경로가 관찰하기 전까지 어느 한 곳에 결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므로 하나의 전자는 우주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우주 어느 곳으로나 이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전자의 위치나 이동경로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확률’이라는 개념은 `본래부터(본질적으로) 그러하다.’는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과학용어입니다.

 확률파는 매질媒質이 없고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로서 누구도 확률파를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실체를 가진 구체적인 존재가 진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률파가 등장함으로써 물리적인 존재(존재, 물질)와 추상적인 존재(비존재, 비물질)와 같이 상대적(대대待對)인 이분법으로 구별하던 모든 개념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양자세계의 논리와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불이不二사상이 같다는 말입니다.

 확률파는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고 간섭무늬를 통해 파동의 성질을 조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관찰할 때만 입자로 나타나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측정하기 전에는 추상적抽象的인 세계, 또는 가상假想의 세계(가능태 可能態)가 측정이라는 인간의 행위나 측정 기구에 의해 현실적 세계(현실태 現實態)로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실재(객관적 실재客觀的 實在)란 없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측정행위에 의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현상계가 본질적으로는 가유假有(가립假立된 존재)임을 뜻합니다. 소립자의 세계인 진공眞空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품(가능태 可能態)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성품이 관찰자의 관찰 행위에 의해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현실태 現實態)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진공은 묘유이며, 모든 현상의 본성(제법실상 諸法實相)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비유비무 非有非無).



*** 양자물리학의 등장과 소립자의 성품 (5)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전자는 파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드 브로이’의 이론에 근거하여 전자의 파동역학을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슈뢰딩거’는 자신이 확립한 파동함수의 수학적인 설명이 전자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확률을 말하고 있다는 코펜하겐 해석의 주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자기는 결정론이나 실재론을 부정하는 양자역학을 연구한 것에 대하여 몹시 후회한다는 입장을 밝히고는 더 이상 양자역학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35년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출하여 코펜하겐 해석의 불합리성을 물리학계에 알리려 하였습니다.

중첩重疊이란? 사전적인 뜻은 거듭 겹치거나 포개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원자나 전자 등 미시세계에서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둘 이상의 상태로 있거나, 둘 이상의 위치에 존재하는 독특한 물리적 현상을 `양자중첩(Quantum Superpositon)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원자 입자亞元子 粒子(subatomic particle; 보다 작은 입자 혹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가 파동의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관찰 후 무엇으로 바뀌며, 어디에 위치할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마치 캄캄한 방에서 동전을 던졌을 때 동전의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알 수 없으나, 불을 켜는 순간 앞면과 뒷면이 섞여있는 중첩의 상태가 붕괴되면서 동전의 앞뒤가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 물리학자들은 파동波動 wave과 입자粒子particle를 하나의 말로 합쳐 `파립자波粒子wavicle라고도 합니다. 파동의 크기를 확률로 해석하는 가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논리이며 이해가 가지 않는 바가 아닌데, 양자역학에서 정말 이상한 가설은 중첩과 측정에 관한 가설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파동의 기본 성질인 중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물질파를 비롯해서 파도같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관찰하는 파동이 되었든 파동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여러 개의 파가 겹쳐질 수 있다는 것으로 빛의 굴절, 간섭, 회절, 반사 등 빛의 모든 성질들이 이것으로 설명됩니다. 물질파도 파동의 일종이므로 중첩이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이 중첩된 상태는 측정할 때만 붕괴되어 하나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찾아낸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회의를 하였습니다. 제5차 솔베이 회의는 1927년 10월 24일부터 29일까지 브뤼셀에 있는 솔베이 연구소에서 열렸으며, 이 회의에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당시 물리학계의 거물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이 회의에 코펜하겐에서 온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는 양자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으며, 이 해석이 양자 물리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으로 양자 물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해석입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중첩된 상태를 측정하면 고유 상태 중의 하나가 측정되며, 그 상태가 측정될 확률은 각 고유 상태가 섞인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각각의 고유 상태는 도대체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입자들이 파동성을 지닌다는 사실과 파동은 중첩의 성질이 있다는 사실과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아는 에너지 값들의 사이 값은 측정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며, 이 세 가지 사실을 논리적으로 가장 잘 설명하는 가설을 설정했을 뿐입니다.

 

이 중첩과 측정의 가설에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중첩 상태는 측정 후 고유 상태 중에서 어느 하나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첩이 없어진다는 뜻인데,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축소’ 또는 `붕괴한다.’고 표현합니다. 중첩된 상태는 측정 시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중첩된 비율에 따라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측정하고 나면 그 입자의 상태에 대해 100% 알고 있다는 뜻이므로 측정된 고유 상태와 나머지 상태들의 중첩된 비율이 1 대 0이어야 하므로 측정된 고유 상태 이외의 상태는 붕괴하여 없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쉽게 말한다면, 모든 것은 관찰하기 때문에 거기에 존재할 뿐 관찰하지 않으면 실재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므로 인간이 있기 때문에 우주가 있는 것이지 우주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닌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거시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아직까지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양자론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19세기까지 자연과학을 지배해 왔던 고전물리학의 결정론적 자연관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이란?

1. 양자계(입자)의 상태는 파동함수(Ψ Psi)로 기술되며, 양자계의 상태는근본적으로 확률적이다. 파동 함수의 제곱은 측정값에 대한 확률밀도이다.

2. 모든 물리량은 관측할 때만 의미를 갖기 때문에 관측하기 전의 물리량 은 존재하는 것으로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물리적 대상이 가지는 물  리량은 관측과 관계없는 객관적인 값이 아니라 관측 용 의 영향을 받는 값이다.

3. 서로 관계를 가지는 물리량들은 하이젠베르크가 제안한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관찰이 파동함수의 붕괴를 일으키며 불연속적인 양자도약을 일으키기 때 문에 한 상태에서 다른 상 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한 상태에서 사라지고 동시에 다른 상태에서 나타나야 한다.

5. 양자계는 근원적으로 비분리성 또는 비국소적 성질을 가진다.

6. 양자계는 파동으로서의 속성과 입자로서의 속성을 상보적으로 가지 며, 이 러한 상보성은 모든 물리 적 대상에서 발견된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양자계의 상태는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며, 모든 물리량은 관측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라는 말에서 `확률’이란? 자연은 인과율과 같은 필연성의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이며, 모든 물리량은 관측할 때만 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실상이 아니고 가립된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생겨났으며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였으며,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코펜하겐 해석의 확률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신’이란 자연과 물리법칙을 말하고 `주사위 놀이’는 확률(파동함수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닐스 보어는 아인슈타인을 향해 반박합니다.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든 말든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신이 왜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 보라.”고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양자 물리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후, 1935년에 코펜하겐 해석을 반박하는 중요한 사고 실험 두 가지를 제안했는데, 그 하나는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으로, 이들의 이름 머리글자를 따서 `EPR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슈뢰딩거의 이름으로 제안된 `슈뢰딩거의 고양이’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것은 슈뢰딩거가 제시한 고양이의 역설이며, 지금까지 양자물리학자들이 수많은 논쟁을 벌였으나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적인 논쟁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이제는 철학과 종교적으로 그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양자물리학의 등장과 소립자의 성품 (6)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을 살펴본다면,

고양이 한 마리가 밀폐된 상자 안에 갇혀 있고, 상자 안에는 방사선의 강도를 측정해서 방사선을 검출할 수 있는 가이거 계수관과 미량의 방사성 원소가 들어 있습니다. 방사성 원소의 양은 아주 적어서 한 시간 동안에 한 개의 원자가 붕괴할 확률과 한 개도 붕괴하지 않을 확률이 각각 50%입니다. 만약 방사성 원소가 붕괴하면 가이거 계수관이 방사선을 감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스위치가 작동되고 연결된 망치가 작동되어 독가스가 들어있는 병을 깨트려서 고양이에게 치명적인 독가스가 흘러나와 고양이를 죽게 하는 장치입니다. 이 상자를 한 시간 동안 방치해 둔 후에 고양이의 상태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 실험은 한 시간 동안에 50%의 확률로 붕괴될 수 있는 원자는 미시세계의 상태(가능태可能態)이고 그것의 확률(파동함수ψ)로 인해 같은 공간에 설정으로 존재하고 있는 고양이의 생사여부는 관찰자의 측정으로 인해 가능태에서 현실태現實態 (거시세계의 상태)로 어떻게 변환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은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세계(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루기 위해 고안한 물리학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할 수 없으므로 이해하기가 매우 혼란스러운 학문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자연을 기술 할 때 수학을 이용하는데 이것은 고전물리학에서나 양자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에 기술하는 수학에 별도의 해석이 필요치 않았으나 양자물리학에서는 모든 현상이 불확실(불확정성, 이중성, 확률파, 중첩)하기 때문에 수학 그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는 해석이 필요해졌습니다.

양자물리학에 대한 해석으로는 가장 많은 물리학자들이 받아들였던 보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자들이 제안한 `코펜하겐 해석입니다. 코펜하겐 해석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아인슈타인을 위시한 과학자들이 제안했던 ‘앙상블 해석’과 ‘숨은 변수 이론’,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였던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 등이 제안한 ‘프린스턴 해석’, 1972년에 휴 에버렛(Hugh Everett III, 1930~1982) 등이 제안한 ‘여러 세계 해석’, 머민(N. D. Mermin) 등이 제안한 ‘이타카 해석’을 비롯해서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한편이 되고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한편이 되어 논쟁한 것을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ingers Katze)는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고안한 사고 실험으로 하나의 역설로서 거론됩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미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사건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적으로 밖에 계산할 수가 없으며 관측이 시행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되며, 관측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상태가 공존(중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상자가 닫혀 있을 때 고양이의 상태는 반은 죽은 고양이의 상태와 반은 살아 있는 고양이 상태의 중첩으로 나타나지만,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두 가지 상태 중의 하나로 확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람의 측정결과를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관측자에게는 아직 고양이는 중첩 상태에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관측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양이의 상태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결정지어진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관측자와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거시세계에서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우리의 지식(개념)으로는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현상계에서 고양이는 우리가 관측하던 관측하지 않던, 죽어 있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로 결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리학의 언어는 수학이므로 우리가 양자역학적인 대상을 다룰 때에는 양자론의 수학을 사용해야 합니다. 양자론의 수학에 의하면 죽어 있는 고양이도 있을 수 있고, 살아 있는 고양이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죽어있으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고양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고양이의 삶과 죽음이 동시에 관찰되는 경우는 없지만 추상적인 수학으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코펜하겐 해석을 반대하는 물리학자(고전역학, 결정론적 해석자)들은 “그렇다면 태양과 달이 관측할 때만 존재하고 관측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고 반문했습니다. 관측은 단지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할 뿐이라는 것이 우리가 가진 상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시간 후에 일어날 일은 과정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그것은 관찰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은 여러 물리학자들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리학자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보어는 물리학자들을 설득할 때 철학적 논쟁은 하지 않고 항상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는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고 새로운 실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면 그것이 옳은 학문적 이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보어는 과학이론은 실험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설명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험 사실을 설명하는 이상의 것은 과학이 아닌 형이상학(철학)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 바람과 이슬 *

 

                              바람이 불어도 물이 없으면

                               파도가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나무가 없으면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는다.

                                   아침 이슬이 있어도

                                 영롱함을 모르는 것은

                             밝은 태양이 없기 때문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아침 이슬이 영롱하게 빛나도

                         보는 이가 없으면 있는 것이 아니다.

                                         - 옮긴 글 -


결국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고전물리학(뉴턴역학) 시대에서 현대물리학 시대(양자역학)로 넘어가는 시기에 미시의 세계(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거시의 세계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해석하려는 사고실험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논쟁으로 끝나고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종교)으로 아직도 결론을 맺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음으로 헤아려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과학과 깨달음 (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세상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끝없이 바뀌는 것이 진리이며 이것이 진여眞如(본래부터 있었던 것, 에너지)의 성품(작용)입니다. 고전물리학은 거시세계(3차원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원인에 의한 결과가 분명하므로(인과율 因果律에 의한 결정론) 새로운 학설이 발표되고 증명되면 논쟁할 일이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시비가 분명해 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미시세계(고차원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누구도 직접 경험할 수 없으며 인과율을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은 가능성만 있을 뿐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모든 물리학자들의 소망인 `대통일장 이론(초끈이론, 평행우주, M이론)’도 거시세계의 과학적인 논리와 미시세계의 과학적인 논리를 하나로 통일시켜 자연계(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논리(학설)로 완벽하게 설명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은 아마도 대통일장 이론이 완성되면 끝이 나리라 봅니다.

 

거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그것은 모두가 진여의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진여의 작용은 주어지는 조건(인연생 因緣生 인연멸因緣滅 )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정해진 모양(상相)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마다(인연 따라)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진여의 작용은 인연 따라 스스로 일어나며, 일어날 때는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성품 즉, 원리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공空(중도中道)’이라는 말입니다. 과학은 지금 양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공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알음알이(학문)로 무엇이든 더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진여眞如는 인간의 모든 개념을 벋어나 있기 때문에 내 생각(지식, 고정관념, 알음알이, 아상我相, 무명無明, 망념)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진여의 성품인 공 즉, 원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잘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은, 내 생각(망념, 학설)으로 분별하지 않고 그냥 본다는 말인데 이것을 `여실如實(실답게)하게 본다(여실지견 如實知見).’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쉽기로 말하면 이것보다 더 쉬운 일도 없지만 어렵기로 말하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과학(학문)의 특성은 지난날의 학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하고 동시에 실증實證을 하는데 있기 때문에 지식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생각, 망념)이기 때문에 이것을 버려야 공空(진실,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가설이든 정설이든 헤아리고 내 새워야 하나 공사상(중도사상)은 공(중도)에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공空도 공空해짐) 어떠한 것도 “이것은 그것이다.”하면서 법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정해진 법이 따로 없으므로 법을 법이라 하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절대적인 법은 될 수 없습니다. 정해진 법이 없는 것(무자성無自性, 법공法空)이 진여(법)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슈뢰딩거의 고양이(양자물리학)에서 파동함수(ψ)는 관찰하든 관찰하지 않던 이미 미시세계의 법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적인 대상이 관찰자의 관찰행위로 말미암아 중첩의 상태(가능태, 파동함수)가 붕괴되고 현실적(현실태)으로는 어떻게 바뀌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중도적인 관점)에서는 관찰하기 전의 중첩된 상태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첩된 상태와 동일한 개념인 파동함수(ψ)도 부정합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관찰하기 전의 고양이의 상태는 파동함수 속에서 죽음과 삶이 중첩상태에 있다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라는 부정적인 해석도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관찰하기 전의 파동함수는 추상적인 수학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양자역학, 미시세계)을 현실(뉴턴역학, 거시세계)과 결부시켜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파동함수(ψ)라는 개념은 인간의 개념일 뿐 다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도 우주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대표하는 중도라는 말은 `완성된 지혜’를 의미하므로 쓰이는 곳에 따라 그 생각을 달리하기 때문에 과학(학문, 논리,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말입니다. 중도는 가장 논리적이면서도 논리를 떠나있는 묘법妙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다면 아무것도 몰라야 공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바보나 멍청이가 되라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본래 아무것도 몰라서 텅 비어있는 것과 앎으로 가득채운 다음 비워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의 원리’입니다. 중도를 체득體得(증득證; 깨달음)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공부)을 하지만 중도를 얻고 나면 중도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무거운 뗏목을 짊어지고 다닌다면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학문)을 연구하고 익히고 있되 내가 익히고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것(무주無住, 무집착無執着)입니다. 중도가 중도에도 머무르지 않는 까닭은 모든 것과 하나 되어 서로 융합함으로써 상생相生을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과학이나 철학(종교)이 이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오랜 세월 논쟁만 있고 그 답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득 채운 것을 비우면 그 비운 자리에서 끝없는 지혜가 솟아나는 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이 강의에서 이루고자하는 바도 `완성된 중도의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 삶을 운영하여 영원한 행복인 해탈, 열반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계발’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해답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미 2500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밝혀져 있습니다. 그 답은 “있는 그대로 보라.”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일체의 망념(학설, 내 생각, 개념)을 내려놓고 침묵(무심) 속에서 그냥 보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거시의 세계에서는 뉴턴역학에 따르고 미시의 세계에서는 양자역학에 따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이 `있다(유有)’고 하는 `상견常見’과 `없다(무無)’고 하는 `단견斷見’의 양극단兩極端을 떠나 중도적인 관점(단상중도 斷常中道)에서 바라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중도에서 `융합한다.’는 말의 의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면서(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때에 따라 가장 알맞게(지혜롭게)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중도에는 고정된 법이 없습니다. 해탈, 열반이라는 것도 삶과 죽음을 없애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그대로 있는 가운데 해탈, 열반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화두로 참구하면 좋습니다.

모든 과학자들의 희망인 ‘대통일장이론’도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습니다. 미시세계의 상호작용과 거시세계의 상호작용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기본 힘(상호작용) 중에서 강한 핵력(강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약력)은 미시세계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양자화 할 수 있으나 중력은 거시세계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양자화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로 통일된 이론(대통일장이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과학과 깨달음 (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과 과학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중도는 깨달음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과학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둘 다 초월하기 때문에 둘을 하나로 융합(화합, 불이不二)하여 둘을 함께 성장시켜 나갈 것입니다. 과학은 새로운 학설로 논쟁을 하고 발전시켜 반도체, 양자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것을 발명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을 보다 더 편리하게 하고, 깨달음은 분별하고 차별하던 내 생각을 버림으로써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영원한 행복(구원, 해탈, 열반)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이 있는 그대로 보고 있으면 과학의 발전이 없을 것이고, 깨달음이 과학적으로 되면 깨치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양자적으로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다.”라고 말하는 양자물리학은 깨달음의 핵심사상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과학으로 잘 말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과 의식(정신세계, 마음)이 만나야 된다는 것에 대해, 아밋 고스와미(Amit Goswami, 오레곤 대학 이론 물리학교수), 피터 러셀(Peter Russell), 데이비드 찰머스(David Chalmers, 애리조나 의식 연구소 소장)와 같은 과학 사상가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만일 의식의 존재를 물질 법칙에서 끌어낼 수 없다면 물리학 이론은 모든 것에 응용할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닉 허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마음이 자연에 널리 퍼져있는 빛이나 전기처럼 그 자체로 어떤 근본적인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피터 러셀은 “대부분 과학자는 의식이 물질세계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많은 영적인 전통에서 제시하는 또 다른 세계관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즉 의식은 현실-시간, 공간,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요소이며 어쩌면 그것들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의식(consciousness, 당신이라는 존재)을 뇌 활동의 부수적인 현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의식이 존재의 기반이며, 뇌가 그것의 부수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본래의 마음(의식)을 `진여眞如’라고 하는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의 의미를 `일심一心(한마음)’이라 하고,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일미一味’라 하고, 원각경圓覺經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습니다.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중생의 본래 마음이 진여며, 일체 만법이 진여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진여연기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며, 해심밀경에서는 “(진여는)인간의 모든 사유와 개념을 떠나있고, 물건이나 관념이 아니므로 수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에 두루 평등하게 관련되어 한결같은 맛(일미一味)을 지닌다.”고 하였으며, 원각경에서는 “모든 것은 원각(진여, 몸과 마음을 떠난 청정한 본래의 성품)으로부터 나오고 원각으로 되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가르침을 대변하는 근본적인 경전은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입니다. 화엄사상은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일체 모든 것이 다 나지도 않고)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일체 모든 것이 다 멸하지도 않으니) 약능여시해若能如是解(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 있느니라)” 이라는 뜻입니다. 한두 가지만 불생불멸이 아니라 존재하는 전체가 다 있는 그대로 불생불멸이라는 뜻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라는 뜻으로서 생멸이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대대待對(상대적인 것)가 완전히 끊어진 절대(완전한)세계를 말합니다. 생멸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것으로 유한有限의 세계(세간世間)고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 진실은 대대가 완전히 끊어진 영원한 세계(출세간出世間), 즉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무한無限의 절대세계입니다. 이러한 절대세계를 `일진법계一眞法界’라 하는데 이것은 모든 것이 다 한 덩어리라는 말이고,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법是法이 주법위住法位하야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니라” 즉, “불생불멸하는 이 법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간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세간 이대로가 불생불멸하는 절대법입니다.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합니다. 이러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원리를 깨치지 못해 눈이 어두워 착각을 함으로써 진리가 본래 생멸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름에 가려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광명세계가 암흑세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불생불멸을 바로 알면 언제든지 진실(진리, 진여, 부처)이 눈앞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일체만법一切萬法)이 불생불멸이고, 부처며 이것이 극락(천국)세계고, 절대세계(완전한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양자물리학이 등장하면서 소립자는 모든 것의 최소 구성 물질(체體, 본질)이며, 우주는 양자적(소립자)으로 서로 얽혀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이며, 소립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생불멸(진여의 작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화엄사상과 법화사상을 과학이 너무나 확실하게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과학과 깨달음은 진여眞如(진실, 진리, 현상)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자하는 것은 같으나 가는 길은 상반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깊게 사유(생각)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으나 사유하는 방식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기 위해 망념(학문, 지식)을 끝없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깨달음은 깨닫기 위해 망념을 끊는 것(무학無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얻어지는 중도는 끊고 이어감을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립자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가지듯이 말입니다.

 

과학과 깨달음의 특징을 포도나무와 얼룩말의 예로 본다면, 하루 종일 음악을 들려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는 그 맛도 좋을 뿐 아니라 포도주의 맛도 좋아 진다는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음으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체體)은 소립자이므로 포도나무(상相, 용用)의 소립자와 음파(상相, 용用)의 소립자가 서로 소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음악의 장르에 따라 그 효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의 직관력(통찰력)으로 확신하는 것이 깨달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 반드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확실하게 증명해 내고 이것을 많은 것에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내는 것이 과학의 특징입니다.

얼룩말의 줄무늬가 흰색 바탕에 검은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검은색 바탕에 흰색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인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 아무런 시비를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나 과학은 분명하게 밝혀내야 합니다. 줄무늬는 말파리를 쫓아내기 위해 그렇게 진화한 것이며, 보호색이라는 사실과 흰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렇게 분석하고 해명하고 증명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깨달음을 중도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과학의 특징과 깨달음의 특징을 융합함으로써 과학을 대변하는 물질과 깨달음을 대변하는 정신을 골고루 발달시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면서도 편리함을 누리게 하고, 정신적으로는 고통이 소멸된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세상입니다. 중도에는 어떠한 분별도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한 곳으로 치우치는 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 소립자(미립자, 아원자)와 신비주의

 

(1<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소립자(미립자, 아원자)란? 유형무형有形無形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를 소립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개면 아주 작은 알갱이가 되는데 이것을 소립자라고 합니다. 심지어 뇌파도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뇌파란? 뇌에서 나오는 일종의 파장으로 뇌 활동에 따라 뇌에서 나오는 전기 신호를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상의 최소 구성요소(물질) 또는 본질이 소립자라는 말이며, 가장 먼저 발견된 소립자는 전자電子며, 영국의 실험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에 의하여 발견되었습니다. 그 뒤 원자핵이 발견되고, 이어 수소의 원자핵인 양성자陽性子가 알려졌으며, 중성자中性子와 양전자陽電子, 중간자中間子가 발견되고, 1950년경부터 급속히 많은 소립자가 발견되기 시작해서 현재는 약 300종류의 소립자가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태초의 대폭발 때 기본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 뒤 잠깐 존재하고 사라져버린 것으로 추정하는 힉스 입자(질량을 갖고 있지 않은 입자로서 현대 물리학의 기본 모델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하는 궁극적인 입자)의 존재를 2012년 7월 4일,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Conseil Europe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에서 거대강입자가속기(LHC; Large Hadron Collider)를 이용하여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은 LHC를 광속에 가깝도록 가속시킨 양성자들을 충돌시킴으로써 극히 작은 규모지만 대폭발(빅뱅)이 일어나는 순간 양성자들이 부서지고 그 부서진 조각들 속에서 힉스 입자의 존재를 확인한 것입니다. 힉스 입자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태초의 대폭발 순간에 해당하는 초고온, 초고압의 조건(현재의 태양보다 10만 배 정도 더 뜨거운 극히 높은 밀도의 상태)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가속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CERN의 LHC와 같은 어마어마한 가속기가 없었다면 힉스 입자의 발견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1973년에 개발된 이론인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에서는 기본 입자로 쿼크(quark) 6개, 경입자(lepton) 6개 등 12개와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4개의 매개입자(gauge particle, force), 그리고 이들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 입자 등 총 17개의 입자로 자연계의 현상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17개의 입자가 우주의 모든 물질과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만든다는 것이 표준모형의 핵심 이론입니다.

 우주 만물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져버린 `신의 입자’라고 하는 마지막 소립자(힉스 입자)까지 발견한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은 발전할 것입니다. 소립자는 이와 같이 빅뱅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소립자는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인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원리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좋은 화두는 없으니 참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구성요소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시간과 공간은 비례해서 커지게 됩니다. 편의상 소립자의 세계를 `미시의 세계’라 하고, 인간의 오감(안이비설신 眼耳鼻舌身)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를 `거시의 세계’라 한다면, 1mm는 거시의 세계에서는 매우 가까운 거리이나 미시의 세계에서는 엄청나게 먼 거리이며, 1초는 거시의 세계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나 미시의 세계에서는 매우 긴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대 폭발이 어떠한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시작되고 얼마나 짧은 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이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빅뱅(대 폭발)이 일어나고 10의 마이너스 43초 사이의 우주는 10의 마이너스 20승 밖에 안 되는 양성자 보다 더 작았기 때문에 이때는 너무 미세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적용시키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10의 마이너스 35초가 되었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우주는 10의 50승배로 급팽창하면서 이때 나오는 소립자인 쿼크와 렙톤(물질)이 반쿼크와 반렙톤(반물질) 보다 10억분의 1이 더 생겼습니다. 즉 물질과 반물질이 섞이게 되면 서로 상쇄되어 사라져 버리는데 10억분의 1만큼의 물질이 살아남게 되면서 이것이 오늘날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미시의 세계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과 작은 공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으며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우리 인간의 육감은 거시의 세계에 적응하면서 진화되었기 때문에 미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큰 사건(빅뱅)이라 할지라도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거시의 세계는 미시의 세계가 현상적으로 드러난 세계이므로 미시의 세계가 바뀌는데 따라 함께 바뀌기 때문에 미시의 세계를 모르고서는 거시의 세계를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서 우리의 삶의 문제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결과)만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또 다른 문제가 확대 재생산(악순환)됨으로써 문제가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미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사건)은 `원리(근본, 본질, 체體, 원인)’라 하고 거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보(가립假立된 것, 허상, 상相, 용用, 결과)’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정보는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원리를 모르는 정보는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근원적인 해결을 할 수 없습니다.




 *** 소립자(미립자, 아원자)와 신비주의 (2)***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원리를 알기위해 소립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면,

1) 수소원자의 핵을 거시적으로 환산해서 농구공 정도의 크기로 확대하면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와 핵의 거리는 약32km 정도가 되는데, 이것은 핵과 전자의 거리인 32km라는 공간이 텅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어있는 공간은 그냥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미묘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한 에너지로 꽉차있습니다. 물질은 작으면 작을수록 에너지의 양은 증가하는데, 핵에너지는 화학 에너지 보다 1백만 배나 더 강력합니다. 가령 핵을 1cm의 구슬 크기로 확대한다면, 거기에 존재하는 빈 공간의 에너지는 우주 전체에 있는 물질의 에너지 보다 더 큽니다. 이 에너지를 직접 측정할 수는 없지만 무한한 에너지의 효력을 과학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소립자의 이러한 현상을 깨달음으로 헤아려 본다면, 모든 물질을 크게 확대하면 할수록 그 속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물질이 곧 허공이요(색즉시공 色卽是空; 색불이공色不異空) 허공이 곧 물질이다(공즉시색 空卽是色; 공불이색空不異色).”라는 말의 물리적인 측면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된 셈이며, 그 텅 비어있는 공간은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도 과학적으로 설명이 된 것입니다.

 

 진공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소립자가 메우고 있다면 진공에서 입자가 없어져 뚫어진 상태도 있을 것입니다. 진공에 뚫어진 이 구멍을 반입자反粒子 Antiparticle라고 부르며, 진공에 구멍이 뚫어지면 진공은 더 이상 진공으로 관측되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진공과 반입자에 대한 이러한 추론은 이미 1930년에 `디락(영국, Paul Adrien Maurice Dirac)’이 `구멍이론(Hole Theory)’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하였으며, 그 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립자에는 대응하는 반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밝혀졌습니다.

 

 현대물리학의 양자장론量子場論에서는 진공을 `디락의 바다와는 약간 다르게 설명합니다. 양자장론에서는 진공을 입자-반입자가 쌍으로 결합되어 있으나 관측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봅니다. 진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입자와 반입자는 정지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진공과 현상계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을 반복하고 있는 이 입자들은 현상계의 입자들과도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진공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한 것이 압축된 진공의 대 폭발(빅뱅)이라고 믿는 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물리적 진공으로 과학이 가장 확실하게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 소립자(아원자 입자, 전자나 광자)는 관측하지 않으면 넓게 퍼져 파동의 성질을 띠고, 관측하면 파동의 성질이 붕괴되고 입자로 변해 정해진 위치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소립자 스스로 파동에서 입자로 바뀌고 입자에서 파동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측행위가 파동과 입자라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중성’을 갖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소립자가 파동의 상태에 있을 때 관찰 후 그것이 무엇으로 변하고 어디에 위치할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때의 파동을 `확률파’라하고 여러 가지 상태가 겹쳐있다고 해서 이 상태를 `중첩’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소립자의 현상을 깨달음에 비유한다면, 소립자의 `이중성’은 “만상은 고정불변의 독립된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고 하는 무자성無自性, 무아無我(비아非我), 공空을 과학으로 잘 나타내고 있으며, 확률파와 중첩은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므로 전체적으로는 중도中道의 뜻을 과학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찰자의 관찰행위에 의해 소립자의 성질이 바뀌는 것은 “만상은 고정불변이 아니기 때문에 인연 따라 항상 바뀐다.”라는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그 뜻이 같다고 보아야합니다. 이유는 객관(대상, 모든 것)은 주관(내 생각)에 의해 그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음식(객관)을 먹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과 맛이 없다고 하는 사람으로 나뉘기 때문에 그 음식의 맛은 음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사람(주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음식은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닌 `중도’라는 말입니다. 그 음식은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맛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에서는 맛이 있다고 하는 것이 진리이고, 맛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에서는 맛이 없다고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중도는 분별하지 않으나 맛이 있다고 하는 곳에서는 맛이 있다하고, 맛이 없다고 하는 곳에 가면 맛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 부딪힘이 없습니다. 이것이 불이不二입니다.

 이 내용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의심을 가지고 계속진행하다 보면 의심이 풀릴 것입니다.

 

3) 고전 물리학(뉴턴역학)에서는 모든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으나 양자차원(현대 물리학, 양자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을 하나씩 따로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가능하나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즉 어떤 사물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지고, 반대로 그 물체의 속도를 알고 있다면 그것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합니다.이것은 거시세계의 물리법칙과 미시세계의 물리법칙이 서로 다르게 적용된다는 가장 좋은 예로서 미시세계에서는 아무리 미세한 거리나 운동량과 같은 물리현상도 절대로 무시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4) 같은 시간에 만들어진 두 개의 소립자는 서로 얽혀있는 상태에 있거나 중첩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 두 입자를 아주 먼 거리까지 떨어지게 한 다음 하나의 입자에 자극을 주고 상태를 변화시키면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도 동시에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설혹 우주의 반대쪽까지 떨어져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차이가 없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립자들은 이처럼 시공時空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양자 물리학에서는 `비국지성이라 하고, 서로 얽혀있는 현상은 `양자 얽힘 현상’이라고 합니다.

 비국지성에 대한 실험은 1998년 미국 국방부가 실시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피부의 일부를 조금 떼고 그것을 수 백 키로 떨어진 곳에 두고 그 사람의 몸과 떼어낸 피부에 각각 피부반응 감지기를 부착한 다음, 그 사람에게 평온과 공포와 같은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람과 떼어낸 피부는 동시에 똑 같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세포 속에 들어있는 미립자들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고 있으며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보았듯이 소립자는 한번 인연을 맺은 소립자끼리는 영원히 직접적인 교감(정보)을 나누고, 그렇지 않은 소립자끼리도 늘 간접적으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감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이나 감정을 주고받는 텔레파시(telepathy; 떨어진 곳에서 느끼기)도 소립자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연어와 같은 회귀성 물고기의 고향 찾아가는 능력이나, 철새들의 이동 등 모든 생명체가 진화된 유전자(DNA)로 그때그때의 주어진 환경(조건, 여건)에 적응하면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근원적으로 보면 다 소립자의 무한한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소립자의 이러한 개념(비국지성)은 너무 기묘해서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현상을 `도깨비 같은 원격작용’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것도 빛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고 하는 상대성 이론도 이 실험에서 확인 된 바와 같이 소립자(전자)의 속도는 무한하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묻히게 되었습니다.




*** 소립자(미립자, 아원자)와 신비주의 (3)***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자연의 이중성, 확률파, 중첩, 양자도약과 같은 소립자의 작용에 의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과학이 해내고 있지만 어떠한 작용에 의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 원인(인연, 연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아직은 거의 없습니다. `확률파’라고 이름 한 것도 원인은 모르면서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양자현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중첩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어떠한 양자현상에 대해서도 고전역학처럼 확실하게 “이것이다.”라고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서도 “이것이다.”라고 대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은 자성이 없고 중도로 되어있으며, 소립자의 성품이 진여의 성품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이 진여에 접근하고 있을 뿐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었다는 말입니다.

 

 양자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많은 가설을 발표하게 됩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4가지의 절대적인 힘(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을 통합하려고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이론인 `통일장 이론’도 아직까지는 완성되지 않은 이론입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이면 수학으로는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수학적인 차원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의 크기만을 말하는 물리학적인 차원과는 달라서 추상적인 공간의 크기를 나타내므로 0차원에서 무한차원까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4차원 시공간’이라는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시간과 공간을 합쳐서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4차원 시공간은 초끈이론과 M이론의 등장과 함께 11차원까지 가설되었으며, 이것은 `통일장 이론’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통일장 이론’은 물리학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이론 물리학의 중심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가설적인 현상(수학적인 차원)은 있으나 그 현상의 원인(연기관계, 상관관계, 인연)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양자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달음으로 헤아려 본다면, “모든 것(현상)은 직접적인 원인(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연緣, 조건, 여건)에 의해서 그 결과(과果)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연법因緣法 또는 인과법因果法, 인과율因果律 이라 하며 연기법緣起法과 그 의미가 같습니다. 그래서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말입니다. 거시세계가 되었든 미시세계가 되었든 어떤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과果)은 반드시 그 현상과 연결된 그 무엇(연緣, 조건, 여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씨앗(인因)을 가만히 놓아두면 결코 싹(과果)이 돋아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싹이 돋아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흙, 습기, 온도와 같은 조건(연緣)이 갖추어져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통일장 이론이 완성된다면 연기법을 벗어 날 수는 없습니다.

 

만상의 연기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이 관계성을 남김없이 밝혀낸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자연은 양자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그물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으며, 이것을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주를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라고도 합니다. 한번 인연 맺은 소립자는 우주를 가로질러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이원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뉴턴의 분리된 우주관은 끝이 났으며, 마음과 물질이 둘이 아니며, 영혼(형이상학)과 과학(형이하학)이 다르지 않으며, 모든 상대적인 개념들도 결국 같다는 것입니다.

소립자의 모든 성품을 `인드라의 망과 같이 `끈 이론’으로 가정한 것이 `초끈이론이며, 초끈이론의 기본개념은 제일 작은 입자에서부터 머나먼 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물질인 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끈은 진동하고 있는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초끈이론은 통일장이론의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과 거시세계를 다루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화롭게 통합한 것입니다. 그러나 1차원인 초끈보다 2차원인 면이 통일장이론을 설명하는데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태어난 이론이 M이론(Membrance theory)입니다. M이론 역시 평행우주론과 비슷한 무한에 가까운 우주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론은 아직 미완성(가설)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소립자의 기기묘묘한 성품은 영적인 세계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현상과 비슷한 것들이 많아서 양자물리학의 선구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깊은 명상(선정, 삼매)중에 나타나는 신비스러운 여러 가지 현상들은 거의 모두가 환상(마구니 장애)으로서 자아의식(제7 말나식)이 완전하게 타파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선 삼명三明이 열리는데, 삼명이란? 과거의 인연을 아는 숙명명宿命明, 미래의 인연을 아는 천안명天眼明, 모든 번뇌를 밝게 보고 끊는 누진명漏盡明입니다. 삼명이 열리고 나면 6가지 초자연적인 신묘하고도 거칠 것이 없는 신통력을 발휘하는 지혜를 갖추게 되는데, 이것을 육신통六神通이라고 합니다.

 

육신통이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여의통如意通), 무엇이든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모든 소리를 분별하고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남의 마음을 훤히 읽을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관심법觀心法), 전생(과거)에 생존했던 상태를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모든 번뇌를 소멸함으로써 더 이상 의무적인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누진통漏盡通을 갖추게 됩니다. 마지막의 누진통은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이 생기면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마구니 장애를 잘 극복해야 되듯이 신통력에 집착하게 되면 수행을 게을리 하게 되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육신통은 실제일 수도 있으나 저자는 여기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완성된 중도의 지혜를 갖춤으로써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자재無碍自在한 해탈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는 것에 그 의미를 둡니다. 우리는 흔히 신비스러운 초월된 능력이나 기적과 같은 일에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가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생명활동 그 자체가 진정한 초월된 능력이고 기적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생명활동은 진여의 작용입니다. 이것을 뛰어넘는 기적이나 초월된 능력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소립자(미립자, 아원자)와 신비주의 (4)***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소립자의 성품 중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이중성’입니다. 그러나 이중성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신비주의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립자의 이중성(입자-파동)의 의미는, `만상은 자성이 없다(무자성無自性).’입니다. 관찰자의 관찰행위에 의해 파동에서 입자로 바뀌는 현상을 가지고 소립자 하나하나에 마치 인식기능이 있는 것처럼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립자는 그 자체가 인식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과 모든 정보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간절한 마음(소원)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면 소립자 상호간의 소통에 의해서 그것(간절한 마음)에 반응할 확률이 커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하나로 나타난다는 말이기 때문에 반응하는 것일 뿐 소립자가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렇게 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잘못 알고 소립자가 마치 인식기능을 가지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척척 읽어낸다.”라고 한다면 전혀 다른 뜻이 되고 맙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과학자나 정신세계에서 잘 못 전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역학이 지나칠 정도로 신비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와 더불어 소립자의 성품과 깨달음의 세계(종교, 철학)를 하나로 합쳐 자연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뜻과 소립자의 성품을 하나로 서술하려면, 둘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소립자의 성품인 이중성, 확률파, 중첩, 불확정성, 모든 가능성의 공통점과 `일체유심조’의 뜻은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것에 고정불변의 자성이 있다면 소립자의 성품도 있을 수 없으며, `일체유심조’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고정불변)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유심조’의 뜻을 직역하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즉,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의 넓고 깊은 의미를 모르거나 소립자의 성품을 확실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로 서술하면 오류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일체유심조’의 일반적인 뜻은, 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 “똑 같은 것을 대하고 느끼는 것 즉, 육감(안이비설신의)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르듯이 같은 것을 보고서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배우고 익힌 것(경험, 지식, 알음알이)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생각(개념)이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경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것이 `일체유심조’의 뜻이라면, 뇌파는 생각하는데 따라서 달라지는데 뇌파도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소립자끼리의 소통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확률)이 높아져 좋지 않은 일도 좋아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 `일체유심조’와 소립자의 관계(연기)입니다. 이것을 잘못 알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소립자가 내 마음을 척척 읽고(알아차리고) 내 생각대로 바뀐다.”라고 한다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인식대상(경계, 객관, 상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내 마음에 있다는 말입니다. `원효대사의 해골 물’과 같은 경우는 좋은 예가 됩니다. 이 경우의 마음은 좁은 의미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넓은 의미의 마음이란? 우주전체(법계法界)를 마음(일심一心;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진여眞如(진리, 법法)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경우의 마음은 진여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따라서 진여의 작용에 의해서 소립자가 생기고, 소립자가 모든 것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유심조’에서 말하는 마음의 의미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소립자의 세계(미시세계)에서 관찰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파동의 성질을 붕괴시키고 입자의 성질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거시세계에서는 관찰자의 관찰 행위가 직접적으로 관찰대상(물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시세계에서는 관찰행위에 의해 관찰대상(소립자)의 성품이 바뀝니다. 다시 말해서 미시세계에서의 `일체유심조’는 생각하는 대로 즉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능동적) 거시세계에서는 간절한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부단한 노력이 뒤 따라야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수동적). 우리가 기도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혼동해서 거시세계에서도 미시세계에서와 같이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칫 신비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소립자의 성품에 의해 작동되는 미시의 세계와 소립자가 모여 현실에 드러나 있는 거시의 세계와의 상관관계를 확실하게 알아야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역설적인 사고실험으로 논쟁을 하는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우리들의 몸을 살펴본다면, 인간의 몸은 오장육부五臟六腑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기臟器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한의 단위는 똑 같은 소립자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장기가 하는 역할은 다르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이어가게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체를 이어가기 위한 구성요소만 다를 뿐 다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소립자 하나만을 따로 분리시켰을 때는 모든 가능성만 지니고 있을 뿐 스스로 특정한 작용(기능)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연(조건, 여건)을 만나 여러 개가 모여 일정한 모양을 지니고 현실로 드러나게 되면 각각의 역할을 하게 되고 그 각각은 또 다른 것들과 인연(연기)되어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연결 관계이며, 거시와 미시를 함께 보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 소립자(미립자, 아원자)와 신비주의 (5)***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소립자(미립자)는 진여의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다 지니고 있는 최소한의 알갱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다 지니고 있다(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는 말도 양자물리학으로 증명이 된 셈입니다.

소립자는 인연 따라 모이고(생生) 흩어지는 것(멸滅)을 반복(윤회)할 뿐 본래 불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본질적인 것(원리, 체體)은 추구하지 아니하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상相, 용用)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세간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시시각각으로 생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고, 모든 존재(우주 전체)의 참다운 모습(제법실상諸法實相)은 불멸이며, 불멸이기 때문에 불생입니다. 그렇다면 생멸이 없는데 어떻게 만물이 존재할 수 있느냐? 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생멸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변화(바뀌는 것, 순환, 윤회, 무시무종)’를 뜻하기 때문이고, 변화는 진여의 작용일 뿐 진여에는 본래 생멸이 없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의상대사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은 항상 함께한다.)”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과 사死(멸滅)가 필연적(반드시)으로 있는 가운데 죽지 않는 도리가 있기 때문에 이 도리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생사를 초월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또한 삶과 죽음을 함께 보는 것이며,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는 뜻이므로 생사와 열반은 불이不二라는 말이고, 이것은 소립자는 본래 죽지 않는다는 것과 뜻을 같이 합니다. 다만 인연 따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할 따름입니다. 마치 하늘의 한 조각 구름이 인연(여건) 따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모이고 흩어지기는 하나 그것을 이루고 있는 작은 수증기는 없어지지 않고 모이고 흩어짐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입니다.

 

소립자의 이중성은 무자성 즉, 중도를 의미합니다.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반복할 때 이것은 저것으로 저것은 이것으로 서로 주고받기 때문에 비록 겉으로 드러난 모습(상相)과 쓰임새(용用)는 다르나 각각을 이루고 있는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불이不異)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의 원리는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전부가 융화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던 모든 존재가 융화되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불생불멸不生不滅, 무애법계無碍法界가 모두 중도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유비무非有非無, 역유역무亦有亦無, 즉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고타마 싯다르타’께서는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유무합고명위중도 有無合故名爲中道).”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에 양자물리학(과학)이 다가와 하나씩 밝히고 있습니다.인간은 새로운 것, 인기 있는 것,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 이런 것들이 있으면 다른 것들을 버리고 그곳으로 몰리는 속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분별하고 차별해서 취하거나 버리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은 연기의 원리(관계성)에 의한 것이어서 필연적이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의 법칙(진여의 작용)입니다.

 

중도는 어떠한 것도 취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모두를 융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물리학은 고전물리학을 버리고 신비스러운 양자물리학에만 쏠려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둘을 하나로 융합하여 무애자재(자유자재)하게 쓸 줄 알아야 그것이 완성된 중도의 지혜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이러합니다.

                           (이 글을 깊게 사유하기 바랍니다.)

                                          * * * * *



                                

 * 양자물리학과 기氣 *

양자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양자의학에서는 영혼(유령)을 촬영할 수 있는 장치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생물물리학자인 해리 올드필드(Hary Oldfield)는 PIP(polycontrast interference photograpy)라고 하는 특수한 사진 기법으로 인체를 싸고 있는 정보-에너지 장을 촬영하였습니다. PIP로 인체를 스캔(scan)하면 인체의 주위 및 내부를 매우 정밀하게 진동하면서 흐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육체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상태도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PIP로 관찰하면 기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질병도 찾아 낼 수 있으며, 대체로 병이 있는 부분은 붉고 어둡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PIP를 이용한 많은 실험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 모든 사람은 육체 주위에 에너지 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에너지 장은 사람의 의식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PIP를 가지고 공동묘지를 촬영하였는데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PIP에 유령과도 같은 존재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제임스 드메오(JAMES DEMEO)박사는 오르곤 생물리학 연구소(Orgone Biophysical Research Center)를 운영하면서 오르곤 에너지라고 하는 생명 에너지를 십여 년 간 연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양에서 말하고 있는 기와 같은 것입니다. 기는 몸 안의 경락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포를 크게 확대해 보면 그 주위에 푸른색을 띄고 있는데 이것이 생명 에너지가 띄는 색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에너지는 우주의 생명력이며 대기 중에 자연스러운 형태로 존재합니다.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각자의 고유한 에너지 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와 남, 나와 자연, 그리고 나와 우주, 이모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오르곤 에너지인데 이것이 기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에너지는 소립자이기 때문에 우주는 소립자(양자적)로 얽혀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으로, 기 능력이 있는 기 치료사에게 기 치료를 받고나면 오르곤 에너지가 훨씬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사진으로 확인 하였으며, 기 능력자의 기가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과정도 동영상으로 촬영하였습니다.

 

지금 양자물리학의 원리를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있으나 양자물리학이 워낙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로 지극히 전문적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앞으로는 양자물리학을 모르면 19세기 이전으로 후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상은 진여의 작용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양자물리학은 너무나 쉬워집니다. 




*** 거시의 세계와 미시의 세계 (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양자물리학은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세계(미시세계, 아원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루기 위해 고안한 물리학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경험세계가 아니므로 이해하기가 매우 혼란스러운 학문입니다. 그래서 닐스 보어는 말하기를 “양자이론에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양자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리차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결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과장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물리학자들이 설명하는 양자역학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물리학자들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간世間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편적이기는 하나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世間에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양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양자역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우리는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에 함께하고 있으나 미시세계는 인식할 수 없고 거시세계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하고 기억되는 것이 무의식에 저장될 때 거시세계의 것만 저장됨으로 거시세계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자현상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굳어져있는 고정된 관념(개념)으로 가득 찬 무의식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깨달음이라는 마음의 눈(지혜)으로 보고, 느낌으로 훤히 꿰뚫어 알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에 대해서는 이미 대략의 설명이 있었으나 좀 더 자세하게 하나로 모아서 말하려고 합니다. 애리조나대학의 의식 연구소장인 스튜어트 해머오프(Stuart Hameroff)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우주는 아주 이상하다. 두 개의 법칙이 우주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백 년 동안 운동의 법칙을 설명한 뉴턴의 법칙이 적용되는 일상의 삶, 고전적인 세상이 존재한다(거시세계). 하지만 원자처럼 아주 작은 단위로 내려가게 되면 또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 이것이 바로 양자의 법칙이다(미시세계).”

거시의 세계는 원인에 대한 결과가 확실하기 때문에 뉴턴역학(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고, 미시의 세계는 소립자(미립자)의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양자역학(현대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양자역학은 원인에 대한 결과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가능성)는 이론으로서 공을 던지면 공중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좌우로 휘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확정적으로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확률적으로는 계산되어집니다. 공을 던졌을 때는 앞으로 나갈 확률을 계산하는 것인데 이것을 거시세계에 적용한다면 공이 앞으로 날아갈 확률이 높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거시세계는 미시세계의 확률을 모아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시세계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가능성만 존재할 뿐 확실하게 측정할 수 없다하여 불확정성원리, 상보성(이중성)원리, 중첩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거시의 세계는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서로 연결되고(연기緣起,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인연화합因緣和合) 쌓여(모여) 한시적으로(가립假立된 존재) 형상(모양)이 겉으로 드러난 세상이고, 미시의 세계는 거시세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사건), 또는 허공과 같이 형상이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느낄 수 없는 세상입니다. 미시의 세계는 미시의 세계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고, 거시의 세계는 거시의 세계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시의 세계와 미시의 세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입니다.

 

거시의 세계는 미시의 세계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소립자의 성품인 무상, 연기, 공, 무아, 무자성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며, 가립된 존재들로 구성된 유有의 세계이므로 시간, 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 즉 세간世間을 말합니다. 미시의 세계는 소립자의 세계이므로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 고차원의 세계로서 수학적으로는 설명되어지나 현상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미시의 세계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묘유妙有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이며 공의 세계(진여의 작용) 즉, 세간과 함께하고는 있으나 현상을 떠나있는 출세간出世間입니다. 따라서 거시세계의 본질(근원, 근본, 뿌리)은 미시세계입니다. 거시세계에서는 생멸이 있고 분별과 차별이 있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생멸이 없고 어떠한 분별도 차별도 본래 없습니다.




*** 거시의 세계와 미시의 세계 (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께서는 소립자의 성품(법法, 진여, 진리, 원리, 세상, 

화엄법계華嚴法界)을 법성게法性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 일체(모두)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 있어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우주)를 머금었고(담겨있고)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하나하나의 티끌) 속도 또한 그러하다.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끝없는 긴 시간도 찰나(한 생각)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일념(찰나)이 곧 끝없는 무량겁(끝없는 긴 시간)이라”.

법성게에서 의상스님께서는 법의 성품은, 하나하나의 것을 분별(부분적)해서 보면 모양(상相, 생김새)과 쓰임새(용用)가 다 다르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소립자, 체體)의 입장(전체적)에서 분별하지 않고 보면 우주 만상은 있는 그대로 둘도 아니고(불이不二),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불이不異) 같다(즉화卽化)는 것입니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는 서로 분리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미시세계의 법

(양자역학)을 그대로 거시세계에 적용시키고 거시세계의 법(뉴턴역학)을 그대로

미시세계에 적용시키려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라”는 자연의 원리(비밀, 수수

께끼, 마술, 중도)를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미시세계(양자세계)에서는 관

찰대상에 관찰행위가 분명히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러나 거시세계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아직도 상자 안에 갇혀 확

실한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가 봅니다.

 

거시세계의 법은 미시세계에서 볼 때 맞지 않는 하나의 고정관념(개념)일 뿐이고, 반대로 미시세계의 법은 거시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역시 잘 못된 하나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에 두 법法(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소립자의 성품(이중성, 확률파, 중첩, 가능성)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거시세계의 모든 현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나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성품)과 거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공통점이 매우 많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은 열려 있으나 그것이 이루어질 확률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무한한 가능성은 많은 것(다양한 직업)들로 중첩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 있으나 이 아이가 자라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가장 노력한 방향으로 성장할 확률이 가장 높을 뿐입니다. 소립자의 성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만상은 주관적(나의 입장)으로 보느냐 객관적(너의 입장)으로 보느냐 즉, 보는 방향(각도, 입장)에 따라 그 성질(분별)이 달라질 뿐 고정된 스스로의 성품(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중성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먹는 아버지는,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바람직하지 못한 아버지일 것이나 술을 만드는 회사나 술을 파는 가게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환영받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중성과 더불어 미시세계에서 원자핵을 돌고 있는 전자와 원자핵의 거리는 거시적인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면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거리이기 때문에 무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시세계에서는 결코 무시하면 안 되는 먼 거리입니다. 이것을 거시세계에 가지고 들어와서 가령 수소 원자핵(미시세계)을 농구공 정도로 확대시키면(거시세계) 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와 원자핵의 거리는 약 32km 정도의 먼 거리가 됩니다. 따라서 원자핵과 그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사이는 텅 비어있게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본질적으로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이 논리를 그대로 거시세계에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서 모든 것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높이 올라갈수록 모든 것이 작아져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것이다.”라는 말도 본질적으로는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것(무無)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도로 본다.’고 합니다. 중도는 거시세계에서는 거시세계의 법을 따르고 미시세계에서는 미시세계의 법을 따를 뿐, 스스로의 고정된 법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완성된 중도의 지혜입니다. 중도는 미시와 거시를 떠나(초월) 미시와 거시를 하나로 융합(화합, 조화)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본래 미시와 거시가 함께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여입니다. 미시와 거시를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알음알이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 거시의 세계와 미시의 세계 (3)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확실하게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하는데 견성을 하고나면 중도로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거시세계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은 미시세계를 함께 보는 것이며, 생과 사(멸)가 반드시 있는 거시세계에서 생사가 없는 미시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이不二(不異)’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하나의 세포에는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습니다. 시간과 공간도 인간이 만든 개념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았을 뿐 마치 흐르는 물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듯이 본래 나누려 해도 나눌 수 없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는 것도 지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수 억, 수 십 억 년 전에 빛의 속도로 출발했던 그 빛을 통해 그때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혹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는 그 별이 사라졌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수 억, 수 십 억 년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시작(빅뱅)인 137억년 이라는 진화의 시간과 지금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 영원한 것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안 보이는 상태가 원인이고

                             보이는 것은 하나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영원한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은 일시적으로 늘 변화하는 것이다.

                                      ㅡ 법정法頂 ㅡ

 이와 같이 깨닫기 전에는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개념(고정관념, 알음알이, 지식, 아상我相, 무명無明)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차별해서 만들어 보기 때문에(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천국과 지옥도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나 깨닫고 나면 있는 그대로 법 아닌 것이 없고 우주 전체는 떼려도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거시세계(세간, 가립된 존재)에 있으면서 미시세계(출세간, 소립자)를 깨닫게 되면 거시세계(지옥, 고통) 그대로 미시세계(천국, 해탈, 열반)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의미하는 바가 가장 큽니다.

 

 법계(진여)의 성품(소립자의 성품, 미시의 세계)을 깨닫고 나면, 그 동안 알지 못해 내 생각(이기심)으로 어리석게 살아가든 것이 깨닫고 나면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들과 인연 맺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됨으로써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져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무슨 일을 하던 가장 많은 것을 이익 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하게 됩니다.


*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깨달음의 세계와 양자물리학을 하나로 회통 시킨 것이어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을 화두話頭로 삼고 앞으로 펼쳐질 원리를 깨닫게 하는 강의에 충실하면 의심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다 어느 날 한꺼번에 타파될 것입니다.


                          


                       

 - 제 1 강 -

               

*** 공부(수행)를 위한 기본 개념 (1-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지금까지 우리는 늘 나(주관)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너, 객관, 경계)을 바꾸려 했기 때문에 분쟁과 고통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공부는 원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개념이 잘 못되었음을 확실하게 체험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개념과는 반대로, 나(주관)를 바꾸면 세상(객관)은 내가 바라는 대로 저절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어떤 문제가 되었든 문제의 해결점을 항상 나를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떠한 분쟁도 일어나지 않으며, 최고의 소통(화합, 융합)을 이루어 모든 것이 하나로 되는 즉, 최고의 조화를 이루게 됨으로써 모두를 이익 되게 합니다.


 우주가 생긴 이래로부터 지금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렇게나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이 법칙을 우리는 진리(원리, 근본도리, 스스로 그러한 힘)라고 합니다. 만상은 진리(진여)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깊게 살펴보면 이 법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만상은 진리를 공통분모로 해서 진화를 거듭했기 때문에 진리를 역행하면 반드시 부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생명체의 설계도인 유전자(DNA)는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기적인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잘 발달되었으며, 이기적인 성향은 뇌가 발달된 생명체일수록 강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인간은 자아의식의 발달로 말미암아 자기와 관련된 것에는 집착이 더욱더 강해져서 끝없이 욕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자아의식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이기적)으로 분별해서 차별하므로 있는 그대로의 진리(진실)를 보지 못하고 내 생각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에 결국 진리를 거스르게 되어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자아의식은 부작용도 있지만 모든 면에서 발전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의 양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의식, 이기심, 욕심, 집착과 같은 것들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것(무자성無自性)이므로 그것은 그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넘치거나 부족하면 나쁘게 작용하고, 필요(인연, 조건)에 따라 알맞게 쓰면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욕심을 알맞게 쓰면 의욕이 되고, 집착은 집중(몰입)이 되고, 자아의식은 자존감이 되고, 이기심은 이루고자 하는 마음(발심發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자유란?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간섭(구속)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으로부터 간섭받는 일입니다. 이것 역시 유전자가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는 일은 앞으로 할 공부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인간의 본래 마음은 누구나 똑 같아서, 티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것(청정심淸淨心)입니다. 

마음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생각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익힌 모든 것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각이 똑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배우고 익힌 모든 것에 의해 개념(관념)이 만들어 지고 이 개념은 생각을 만들게 됩니다.

 개념은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형상(상相)이나 쓰임새(용用)를 인간의 육감(보고: 눈, 듣고: 귀, 냄새 맡고: 코, 맛보고: 혀, 감촉을 느끼고: 몸, 생각하고: 뇌)을 통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에 형상이나 쓰임새 속에 공통적으로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본질(체體, 진리, 원리, 진실, 근본도리)을 찾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형상이나 쓰임새에 익숙해져 이것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 자기 생각과 같으면 옳다하고 다르면 그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모든 분쟁과 고통은 이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 제 1 강 -

          

*** 공부(수행)를 위한 기본 개념 (1-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양자물리학(미시세계)이 어렵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시세계에 습관 되어있기 때문에 미시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상에 젖어있기 때문에 본질을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를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리를 깨달으면 나머지 것들은 알기가 매우 쉬워집니다.


 따라서 각자의 생각 즉, 내 생각을 내려놓으면 본래의 마음자리(청정심淸淨心)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이 때 갖추어지는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조금씩 버리는 것이 이 공부의 시작이고 완전히 다 버리는 것이 이 공부의 끝이 됩니다.


진리(체體)는 어디에나 다 들어있어서 보편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나 정확하게 들어맞아서 타당하고 변하지 않으므로 항상 일정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현실에 드러나 있는 형상(상相)이나 쓰임새(용用)를 통해서 만들어진 내 생각(개념)은 보편성도 없고 타당성도 없을 뿐 아니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일정하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 생각은 어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번뇌, 망상, 또는 망념이라 하며,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해는 온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으나(지혜) 구름이 끼면 밝지 못함(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는 무수하게 많습니다. 이러한 정보들은 어떤 이치에서 나왔으며, 이치 또한 어떤 원리에서 나왔는지를 알아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기계발에 관한 정보들은 답만 일러주었기 때문에 그 답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약해서 조금 해보다가 그만두게 되는 단점이 있었으며, 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다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보편적 타당성이 없음). 이러한 이유는 진리(원리, 근본도리, 자연적인 것, 섭리, 순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인간의 개념(인위적인 것, 지식, 학식, 내 생각)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공부할 내용은 현상(거시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리(원리, 법칙, 미시세계)가 무엇이며, 진리를 어떻게 활용하면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가장 지혜롭게 해결하여 가장 많은 것에 이익을 줄 수 있겠는가? 입니다. 진리는 본래부터 우주에 존재했었고 이것은 에너지입니다. 진리(원리, 근본도리)를 체험적으로 증득證得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완성된 중도의 지혜’라는 단 하나의 도구로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는 이치에서 나오고, 이치는 원리를 통해서 나온 것들입니다. 원리를 알 때 실천할 수 있는 힘이 가장 강하고 그 다음 이치를 알 때며, 정보만 알 때가 가장 힘이 약합니다. 정보(답)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하나의 이치를 아는 것만 못하며, 아무리 많은 이치를 알아도 하나의 원리를 아는 것만 못합니다. 원리를 모르고 이치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많은 노력이 있어야 조금씩 개선되며, 이치도 모르고 정보만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면 노력에 비해 거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칫 문제가 더욱더 복잡해지기 쉽습니다. 원리는 머리로 아는 것(지식, 학식)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체득體得(경험, 증득證得)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으면 얻는 만큼 힘들이지 않고 무슨 일이든 가볍게 이룰 수 있습니다.




  - 제 1 강 -

     

*** 공부(수행)를 위한 기본 개념 (1-3)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펼쳐 보일 글은 학문, 종교 즉, 형이하학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들의 공통점인 원리(진리)만을 말하고 있을 뿐 결코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원리에 덧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개개인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고정된 개념(관념, 내 생각, 지식, 알음알이)으로 만들어 의미를 새기면 안 됩니다. 특히 철학적인 관점이나 신앙적(종교적)인 관점으로 원리에 접근하면 안 됩니다. 오늘 날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형이하학적인 것은 물론 형이상학적인 것도 과학으로 검증되어 형이상학과 하학의 구별이 없어져 하나로 통합 되리라 믿고 지금 양자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만상은 진여(하나님, 법신法身, 진리, 원리, 근본, 본질, 뿌리, 스스로 그러한 힘)의 작용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진여는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으며(불변성), 모든 것에 다 적용되며(보편성), 어디에나 딱 들어맞습니다(타당성).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는 그들이 섬기는 신을 진리라 부르고 창조주라 합니다. 따라서 창조의 원리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순리)이 가장 지혜롭게 잘 살아가는 것이므로 모든 것에 이익을 줄 수 있게 되며 이것이 자기계발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생각)은 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학설, 이념, 사상, 문화, 풍습, 윤리, 도덕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항상 변하기 때문에 보편성도 없고 타당성도 없습니다. 결국 고정 되어진 내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각자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분쟁의 씨앗이 되어 서로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은 진리(진여)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진리는 모든 것을 다 품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내 생각으로 부분만 보면 결코 볼 수가 없으며 내 생각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전체를 볼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계발의 완성은 진리와 내가 하나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면 너(객관)와 나(주관)라는 모든 분별심 차별심이 사라져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둘이 아니며(불이不二), 다르지도 않게 됩니다(불이不異). 이것이 우리들의 참 모습(참나)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나이기 때문에 나는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없기도 함으로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인 생사로부터도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아自我는 못 찾은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실상입니다.

 이 공부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익혀 내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기질, 성격, 습관, 지식, 윤리관, 도덕관, 경험 등 내 생각을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리를 깨침으로써 갖추어지는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세상을 살아갑니다. 성공해서 행복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해결책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결책들이 어떠한 원리에서 나온 것인지를 말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해결책은 원리 즉, 진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해결책만 알아가지고는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약해서 몇 번 해보다가 그만두게 되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은 갖추지 못하고 답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행복해 진다”라는 말은 행복해 지기 위한 하나의 방편 즉, 답이 될 뿐 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며, 왜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하며,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남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는 지에 대한 원리가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심을 하고 애를 써야 조금되는 듯하다가 힘이 들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리를 깨닫게 되면 확실한 믿음이 생겨 마음을 가볍게 내고 가볍게 행동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게 되므로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굳게 결심하고 하는 일은 반드시 그 일에 집착하게 되고 욕심으로 하게 되어 이루고 난 다음 자기 것으로 삼기 때문에 나누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믿음으로 가볍게 그냥 한 일은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욕심이 없어서 성취한 다음에도 가볍게 그냥 나눌 수 있습니다. 이루고 난 다음 이룬 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생각은 내 것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실에 알맞게 대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 생각과 같으면 옳다 하고 다르면 그르다고 생각해서 분별하고 차별하기 때문에 항상 분쟁을 일으키고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인간은 배우고 익힌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의 개념이 다릅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아 체득되는 지혜는 “무엇이다”라고 정해진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러한 때는 저렇게 할 수 있으므로 무엇을 어떻게 하든 서로 최고의 소통(최고의 조화, 융합)이 이루어져 모든 것이 하나로 뭉치게 되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 제 1 강 -

                    

*** 공부(수행)를 위한 기본 개념 (1-4)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이 공부는 내 생각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내 생각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공부의 끝입니다. “내 생각을 조금 버리면 조금 얻을 것이요 다 버리면 다 얻을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은 쉽기로 말하면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보다 더 쉬울 수도 있지만 어렵기로 말하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입장이고 여러분들은 저에게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저는 가르치려 하고 여러분들은 배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별것 아닌 것에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가르치는 입장에서 가르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마다 따라오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빨리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답답해하거나 화가 나게 되고 잘하는 사람과 잘 못하는 사람을 차별하게 되며, 집착하게 되고, 욕심이 일어나게 되어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끊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정성껏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둘째, 배우는 입장에서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결심)을 가지고 배우면 자기도 모르게 빨리 배우려는 마음이 일어나 집착하게 되고 욕심이 생겨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없어지고 힘이 들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거나 계속한다 하더라도 별 성과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친다는 생각 없이 가르치고 배운다는 생각 없이 배워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무의식에 이 습관이 저장되어있기 때문에 내 생각을 버리고(무심無心)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려면 공부가 조금은 진행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나 미리 말한다면, “그냥 최선을 다할 뿐, 그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그냥 한다는 말은, 어떤 일을 할 때 목적(목표)을 설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목적을 세우면 집착과 욕심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이룬 것을 나누지 못하고 자기 것으로 삼게 될 뿐만 아니라 세워놓은 목적에만 집착하게 되어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보기 때문에 얻는 것이 있는 반면에 반드시 잃어버리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내 생각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내 생각(번뇌, 망상, 고정관념, 무명)을 버리고 마음을 쓰면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이므로 하나를 얻으면 하나에 만족하고 열을 얻으면 열에 만족하므로 늘 만족하게 되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내 생각을 버리지 않고 목적의식에 떨어지는 마음을 쓰면 채워도 늘 부족하기 때문에 나누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 제 2 강 -

         

 *** 공부(수행)를 위한 기본 개념 (2-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마음을 경영한다는 말의 의미는?

마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특히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만상을 마음이라고 하기 때문에 창조의 본질인 진여(진리, 원리)도 마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느 것 하나를 꼬집어서 마음이라 말할 수 없어서 마음이라는 것은 말이나 글로서 나타낼 수 없으며(언어도단言語道斷),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을 벌리면 바로 그 순간 잘못되는 것입니다(개구즉착開口卽錯).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을 만들어 내는 곳’을 마음이라 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보면 뇌를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며, 많은 것들에 이익을 주는 것과 나만을 이익 되게 하거나 나와 관련되는 것에만 이익 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표현해서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을 말합니다. 생각에는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 있지만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에는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나 일어나는 작용이 다를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찰나(약 천 이 백 분의 일초)지간에 약 구백 번 일어났다 가라앉기 때문에 마음의 속성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 있으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경영한다는 것은 나쁜 생각을 다스려 좋은 생각으로 바꾸고 바꾼 그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마음 쓰는 법(용심법用心法)을 깨달아서(원리를 깨닫는 것) 일어나는 마음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부릴 줄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일어난 마음을 내 의지대로 부린다는 말은, 무엇을 함에 있어서 가장 많은 것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지혜를 쓴다는 말이기 때문에 자기를 계발한다는 말과 의미가 같습니다.

 

 * 자기계발(마음 경영)을 하지 못하는 이유.

 자기계발(마음 경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와 같고,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무슨 일을 하던 바라는 마음 없이 무심無心으로 그냥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심으로 그냥 한다는 말을 확실하게 이해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므로 실천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무심이라는 말은, 무엇을 바라는 일체의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래 한다!”라는 그 마음 하나만 가지고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다른 말로는 원을 세우고 그 원력願力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여러 강의에서 다시 언급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때 결심을 하고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맞게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이 잘 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되 무엇을 바라는 내 생각을 빼고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행복해 지기 위해서, 만족하기 위해서와 같이 목적의식에 떨어지지 마라는 뜻입니다.

목적의식에 떨어지면 집착하게 되고, 욕심으로 하게 되며, 하는 것이 즐겁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설혹 이룬다 할지라도 이기적으로 이루기 때문에 자칫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되며, 나누기가 어렵고, 이룬 것으로부터 구속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원력으로 하는 일은 바라는 것이 없이 그냥 최선을 다한 일이기 때문에 욕심이 없으므로 집착하지 않고, 늘 하는 일이 즐거우며, 모두를 이익 되게 하며, 이루어지면 더욱 좋고, 이루어 지지 않아도 괴롭지 않으며, 이룬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무엇을 못한다는 것은 한다는 마음(발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다는 마음을 일으켰으면 “해야지”라는 마음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 즉,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다는 맨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냥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냥 해버리고 나면 “해야지”라는 생각이 필요 없습니다. “해야지”라는 생각에는 “하기는 해야 되는데 하기는 싫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에 이것은 번뇌 망상입니다. 




- 제 2 강 -

       

 *** 공부(수행)를 위한 기본 개념 (2-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인생은 선택입니다. 선택은 각자의 고유권한 즉, 자유며,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공부(자기계발)를 해서 평생을 만족하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내 생각대로 살면서 고통스러운 가운데 잠시 행복을 조금씩 누리느냐? 입니다.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도 나에게 있으므로 선택한 것의 과보를 달게 받아들이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선택은 내가 하고 그 책임은 남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선택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내가 진다는 각오를 미리하고 일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오더라도 긍정적으로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고통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가벼워져 가볍게 일을 할 수 있으므로 설혹 실패를 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강해집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면 일상사의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결혼할 때 신랑은 신부를 선택하고, 신부는 신랑을 선택했기 때문에 결혼을 합니다. 결혼할 때는 분명히 조금이라도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혼인 서약서에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헤어지지 않고 잘 살겠습니다.”라고 굳게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별의별 일들로 다투다가 심하면 헤어지게 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헤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안다면 서로 헤어지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십니까? 각자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욕심으로 인해 많은 것을 얻으려 하는 생각(욕심)이 무의식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늘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장점을 동시에 얻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하면 담배를 끊어야 하나 담배를 피우면서 몸이 건강해 지는 무엇을 찾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시골에 가면 도회지가 그립고 도회지에 오면 시골이 그리운 것도 시골 생활의 장점과 도시 생활의 장점을 동시에 다 가지려 하기 때문에 어디에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시골에서 살 것인지, 도시에서 살 것인지 우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시골에서 사는 것을 선택했다면 도시 생활의 장점은 포기하고 시골 생활을 즐기면 되고, 도시를 선택 했다면 시골 생활의 장점을 포기하면 어디에서 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도시는 도시라서 좋고 시골은 시골이라서 좋게 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여서, 혼자 살면 외롭기는 하나 자유로워서 좋고, 둘이 살면 외롭지는 않으나 서로 간섭하기 때문에 맞추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외롭지도 않으면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평생을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계발(마음공부, 수행)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자기를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둘째, “그런 것(도道 닦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야,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 나는 지금이 제일 좋아, 이대로 살래.”

셋째, “공부라면 지겹다. 이 나이에 공부는 무슨 공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해보기도 전에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것이어서 모든 가능성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부정적인 생각으로서 부정적인 생각은 그 결과도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양자물리학에서 말했듯이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뇌파(소립자)를 내보냄으로써 다른 소립자와 부정적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 박사가 실험한 의식에 반응하는 물 결정 사진은 이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주는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의 실험에 의하면, 컵에 물을 담아놓고 “사랑해”라는 좋은 말과 “미워”라는 나쁜 말을 하거나 그 말을 글로 써서 붙여놓으면 좋은 말의 물은 결정체가 매우 아름답고, 나쁜 말의 물은 결정체가 흐트러진 흉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물을 화초에 주면 좋은 말의 물은 화초를 잘 자라게 하나 나쁜 말의 물은 화초를 잘 자라지 않게 하였습니다. 흔히 가수들이 노래하는 가사 말대로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며, 배우들이 맡는 역할에 따라 그 배역이 끝난 다음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건강)이 다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특히 거짓말로 웃어도 건강이 좋아지는 것도 이러한 소립자끼리 소통의 문제 때문입니다. 의식(생각)이 물에 이런 영향을 준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몸의 70~80%가 물입니다.

 

 꼭 기억해 두십시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자업자득, 자작자수).” 이 말보다 더 과학적인 것은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종두득두種豆得豆)." “심은 대로 거둔다.”

우리들은 공부는 하지 않고 좋은 대학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일을 자신도 모르게 수 없이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유는 자업자득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심지 않고 거두려 하지마라  행하지 않고 이루려 하지마  

     스스로 노력하라. 그대의 운명은 그대 스스로 짓고 받는다."]




- 제 2 강 -

                 

 *** 공부를 위한 기본 개념 (2-3) ***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자기계발의 지름 길.

 자기계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위에서 보았듯이

1) 무심으로 그냥 하지 않고 목적의식에 떨어지는 것.

2) 현실에 안주해 버리거나, 어렵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포기하거나 잘못 된 부정적인 개념.

3) 노력하는 것 보다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는 욕심.

4) 선택에 대한 책임회피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부정적인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되어 될 일도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내면 가볍게 시작하기 때문에 결과에 큰 부담이 없게 되어 늘 편안하며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자기를 계발하는 공부를 종교적인 도, 선, 수행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일상적으로 해오던 나쁜 습관을 바로 잡아나간다는 개념으로 바꾸십시오. 이러한 노력은 누구나 평상시에 나름대로 다 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구태여 굳은 결심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린아이는 화장실에서도 만화책을 열심히 보는데 이것은 특별히 어떤 결심을 하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집중도는 매우 높습니다.

 

 그동안 자기를 계발하는 방법으로 많은 정보가 제시되었으나 그 성과가 미흡하였고, 종교적인 수행방법은 확실하기는 하나 지금에 맞지 않고, 너무나 어렵고 일반적이지 못해 극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강의에서는 종교적인 수행방법의 원리를 가장 이해하기 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이 공부를 한다는 의미는 이 강의에서 하라는 그대로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따라하다 보면 화장실에서 만화책을 보는 것이 어린아이의 즐거움이듯이 자기계발을 하는 이 공부보다 더 재미있는 공부는 없습니다. 이유는 내가 행복해지고 내 주변이 모두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계발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과 연관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도, 선, 수행, 깨달음은 일상을 잘해서 행복해지기 위한 하나의 수단(방편)이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일을 공부의 방편으로 삼으면 별도의 시간과 특별한 장소가 필요치 않으며 그 과정에 하나씩 깨닫게 되고 그 결과로 지혜(좋은 경험)를 얻게 됩니다. 이 수행법의 장점은 깨달음의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수행을 하기 위해서 일상을 떠난 다음 조용한 곳에서 방대하고 어려운 경전을 오랜 시간에 걸쳐 공부하고 익히면서(참선수행) 깨달음을 이루고(원리를 깨달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얻은 지혜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수행법은 조용한 곳에 있을 때는 잘 되는듯하다가 다시 시끄러운 곳(일상)에 오면 잘 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멀리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강의에서는 방대한 원리를 하나로 회통시켰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원리를 깨닫는 첫 걸음은 원리를 이해하는 데 있으며, 이해하는 가운데 의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원리를 깨닫고 지혜를 체득하는 공부와 함께 아주 작은 일상의 습관을 바꾸는 일을 동시에 실행함으로써 멀리 돌아서 가던 길을 지름길로 곧바로 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시키기 위해 중간역할을 하던 중간상인을 없애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연결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 제 3 강 -

 

                 

*** 공부를 위한 기본 개념 (3-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생활습관 바꾸기.

 (1) TV를 볼 때 시비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기.

 대개 TV를 볼 때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즉, 있는 그대로 그냥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두 가지 마음으로 보게 되어 말을 많이 하게 되고, 가끔은 가족 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기 까지 합니다. 이것은 각자의 생각이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내 생각을 내려놓는 공부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내 생각을 내려놓고 방송을 보거나 들으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제작자의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버리거나 취하는 것이 없어져 모든 방송이 재미있어 집니다. 이렇게 되면 보고 듣는 것에서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어 TV는 바보상자가 아니라 지혜의 상자가 됩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든 잘 쓰면 좋은 것이 되고 잘 못쓰면 나쁜 것이 될 뿐 본래 좋고 나쁨은 없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TV를 통해 평상시에 연습을 해두면 마음이 늘 편안해 지며, 앞으로 공부할 원리를 터득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무슨 일을 판단할 때 주관적(이기적, 자기중심)으로 판단하여 부분만 보지 말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전체(이타적, 객관적)를 보고 판단할 것.

 첫 번째 방법과 연결되는 공부로서, 인간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내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에 집착하면 모든 것이 내 생각에 구속되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됨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마치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와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 생각은 주관적(자기중심적)이어서 내 생각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분별하기 때문에 객관(대상, 경계)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객관은 본래 없는 것이나 주관이 있으므로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관을 없애면 객관은 저절로 없어져 모든 것은 하나로 되며 이 하나를 보는 것은 전체를 다 보는 것이 됩니다. 내 생각은 개념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봄으로써 모든 일의 답을 자신도 모르게 미리 예측하고 정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담을 할 때도 자기가 미리 정해놓고 기대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여러 곳을 찾아다니게 되며, 때로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바라는 바를 정해놓고 하는 기도는 자신이 정해놓은 그 부분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결국 그 부분만 바라보게 되어 사실은 이기적인 기도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의 답을 미리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기 때문에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되고 종교적인 방황을 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기도는 다만 할 뿐 그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 인해 일어 날 수 있는 재앙은 무수히 많습니다. 지금 돈을 많이 벌게 해주면 그 돈으로 인해서 재앙이 올 것을 그 분(신불神佛)께서는 미리 아시고 돈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결과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다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고 믿음입니다.

 

 원리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내 생각(알음알이, 지식)을 내려놓지 않고 따로 살림을 차리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개념과 원리를 섞어서 또 다른 개념(번뇌, 망상)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것을 새로운 자기 것(고정관념, 아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왜 그럴까?’ ‘어째서?’ ‘까닭이 무엇일까?’라는 철저하게 원리를 믿는 순수한 의심(이 뭣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공부에 진전이 없으며 더 이상 공부를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 공부는 각인시키고, 그 결과로 인해 생기는 믿음에 대한 알 수없는 말(화두話頭, 의미를 모르는 말)로 의심을 불러일으켜 그 의심을 깊게 파고드는 의심공부(내 생각을 내려놓은 순수한 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부에 의심(간절함)을 일으키는 습관을 만드는 일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상대방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헤아려 보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공부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으로 들어가기도 어렵겠지만, 설혹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결과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 제 3 강 -

 

                

*** 공부를 위한 기본 개념 (3-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3) 자동차를 운전할 때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양보운전을 할 것.

 살아남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헐떡거리는 마음(시간에 쫒기는 일)을 가라앉히고, 정해진 것은 반드시 지키게 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습관을 만들고, 좁아진 마음을 넓게 하는 공부입니다.  흔히 하는 말에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운전하다 보면 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고 합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공부에 그 효과가 탁월합니다. 아무도 없는 밤길에 신호등을 지키는 것은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에 매우 좋습니다. 양보한다는 것은, 내가 유리한 입장에 있을 때 상대방을 배려한다거나, 가지고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4)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용서해 줄 수 있고, 미운 사람을 떠올렸을 때도 미워하지 않고, 내가 지금 당장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 수시로 상상하여 평상시에 마음의 정리를 해둘 것.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생각으로 연습해 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실지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자주 연습하다 보면 마음에도 근육이 생기고 뼈가 생겨 실제로 부딪혔을 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 용서해줄 줄 알고, 미워하지 않게 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육체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운동을 하듯이 마음도 이렇게 상상 법으로 운동을 하면 건강해집니다.

 인간의 뇌는 상상하는 것과 실지로 부딪히는 일을 분간하지 못하고 같은 것으로 반응합니다. 어느 운동선수가 심한 부상을 당해 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마음으로 평상시에 연습하던 것을 상상하였으며 시합에서 늘 우승해서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였습니다. 퇴원 후 얼마 있다 시합에 참가한 그는 우승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지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을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자기최면)’ 이라 하며 오늘 날 많은 분야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방편은 명상할 때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며, 이때 떠올리는 생각은 공부의 방편으로 하는 것이므로 망념(번뇌, 망상)이 아닙니다.

 

 (5) 하기 싫은 일(역경계逆境界)을 수행의 문門(방편, 스승)으로 생각하고 할 것.

 하기 싫다는 것은 하기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예 상관없는 일이라면 싫을 것도 좋을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즐기면서 하자는 말입니다. 수행을 하는 종교인들을 보십시오, 자기를 계발하기 위해서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학습합니다. 이것에 비교하면 일상사를 대상으로 공부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효과 면에서는 별 차이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상사를 공부의 대상으로 했을 때가 더 나을 수도 많습니다. 까닭은 어차피 어떤 수행을 하던 궁극에는 일상사를 잘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상대방도 하기 싫어하므로 이것을 내가 했을 때, 나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바뀌게 됩니다. 이 공부는 참을성을 길러주고 고정관념을 바뀌게 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내와 시장이나 백화점 가는 일을 불편해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로 남자와 여자의 본능적인 성향이 달라서 그렇거나, 아니면 과거의 개념에 젖어 남녀가 하는 일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가 평등해 지면서 이러한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특히 남녀의 본능적인 성향이 점차로 없어져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하기 싫어하던 일들을 하나씩 수행의 문으로 삼고 실천하면 어떠한 수행방편보다 공부에 효과가 클 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가 좋아지고 가정이 화목해 집니다.




- 제 3 강 -

 

                

 *** 공부를 위한 기본 개념 (3-3)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6) 명상이나 기도를 하라.

 명상이나 기도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함으로써 한 가지에 집중하는 능력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 쌓인 긴장과 피로를 풀어 줍니다. 명상을 할 때는 평상시에 하던 모든 생각(번뇌)을 내려놓음으로써 일상에서 인식하지 않고 하던 호흡이나 천천히 걷기 등을 하면서 몸에 있는 긴장을 풀어내고 몸의 존재에 주의를 집중시켜 떨어져 있는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고 존재 그 자체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합니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기적적인 일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사 모든 것이 수행의 대상이 되듯이 명상의 대상도 삶 전체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명상이라고 하면 마음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일에 집중(몰입)하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명상입니다. 기도는 마음에 오직 한 가지의 간절함만을 일어나게 하여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7) 생각의 95%인 번뇌 망상을 자기계발의 시간으로 활용하라.

 우리가 하는 생각의 95% 이상이 번뇌, 망상(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지나간 과거의 추억에 끌려 다니고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이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95%라는 대부분의 생각을 여기에 소모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공부하는 시간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없으며, 해봐야 아무 쓸데없는 95%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나를 계발할 수 있을 까?’로 생각을 모으고 실천하는 것으로 이용하자는 말입니다.

 우리는 늘 과거의 경험(기억)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은 내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보편타당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망설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여기에 많은 시간을 뺏기게 됩니다. 이렇게 소모하는 생각이 95%라는 말이고, 불확실한 생각이기 때문에 번뇌 망상인 것입니다. 이 시간을 이용해서 자기를 계발하면 원리를 깨닫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됩니다. 지혜는 보편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를 판단하는데 망설임이 없이(망념을 일으키지 않고) 즉각적으로 가장 정확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합니다.

 

 번뇌 망상은 없애려고 하면 더욱더 세차게 일어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다만 번뇌와 싸우지 말고 일어났음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그냥 내 버려두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속성에 의해 잠시 후 저절로 사라집니다. 원리를 깨닫고 나면 깨달음의 단계에 따라 정비례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번뇌를 일으키는 업종자業種子가 무의식에서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아예 번뇌가 없습니다. 알아차려야 될 일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 일곱 가지 방법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에게 알맞은 한두 가지 방법을 선택해서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 이 강의에 참여하시는 독자 여러분! 내 생각을 내려놓고 이 공부를 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계발이 되지 않은 사람은 세계 역사상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이 글은 많이 읽고(문聞), 깊이 새기고(사思), 실천에 옮겨야(수修) 내 것이 됩니다.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철학이나 하나의 사상(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진리(원리)는 모든 것에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내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원리를 깊이 사유해서 확실하게 깨우치면 다른 원리도 함께 통하게 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며, 믿음은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종교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의 문제와 찬양의 문제, 순종하는 문제는 있다-없다, 옳다-그르다 등 우리들의 알음알이로 분별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글도 읽고 믿지 않으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약해서 별 효과가 없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간절할수록 믿는 마음을 최고로 상승시키고 이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이것이 소립자의 소통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계발하는 공부는 간절하게 펼쳐 보이는 저의 마음과 간절하게 받아들이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서로 화합(소통)할 때 깨달음을 얻게 되며,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이 때 실천 할 수 있는 힘이 가장 강하게 되며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기적이 됩니다. 이것이 정신적(영적)인 성장입니다.

오늘 날 과학은 많은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의 문제만은 숙제로 남겨놓고 있습니다.





- 제 4 강 -

 

          

* 자기계발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나를 계발한다는 것은 나를 배우는 것이요, 나를 배운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요,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요,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

 위 글에서 배우고, 알고, 버리고, 죽이는 것은 고정관념이 만들어 내는 ‘내 생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말 대신에 ‘내 생각’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나를 계발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요, 내 생각을 배운다는 것은 내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요, 내 생각을 안다는 것은 내 생각이 잘못된 개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음이요, 내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내 생각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임으로써 자기계발이 완성된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내 생각과 나를 같은 것으로 보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짓게 됩니다.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생각은 개념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모든 개념은 그 사람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모든 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어떤 개념(관념)으로 세상을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개념에 의해서 믿음이 만들어지고 믿음은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게 되며, 고정관념은 습관화되어 무의식에 저장되고 이것은 그 사람의 기질, 개성, 특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사람 자체로 인식되어 내 생각이 곧 내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은 사람마다 배우고 익힌 것이 달라서 같은 것을 보고서도 서로 다르게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서로 다르고 무엇을 보고 판단하는 것도 다 다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오직 생각이 만든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너와 내가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옳다-그르다, 라는 시비가 일어나지 않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고 인정함으로써 거의 모든 분쟁이 사라지게 됩니다.

 

지나간 시간(과거)에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이 무의식에 저장된 것을 우리는 기억과 경험이라 하고, 이것은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미래를 결정짓게 됩니다. 특히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의 결과를 업이라 하고, 이것은 무의식에 종자로 저장되어 지금의 일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다시 새로운 업을 만들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합니다. 업에 대한 것은 원리 강의 때 상세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인식(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지고 결과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컵에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컵에 물이 반씩이나 남아 있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똑같은 상황을 보고 인식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좌절하고 절망하는 삶을 살게 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의욕적이고 희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 글을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금의 내 생각(개념)과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으나 어렵다고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되어 의욕이 사라져 공부를 진행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럴 때는 아직은 잘 모르기는 하나 계속 읽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오겠지?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공부가 끊어지지 않으면 차츰 알게 되고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작은 생각의 차이가 결과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를 만들게 됩니다.

 

 결국, 개념이 생각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생각에 의해서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생의 합계는 재물이나 명예의 합계가 아니라 생각의 합계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개념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느냐의 문제가 삶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러면 잘 못된 개념으로 만들어진 내 생각을 버리고 그 자리를 무엇으로 대신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상에 드러나 있는 존재의 구성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며, 그 하나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즉, 인위적인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그러한 힘에 의해서 저절로 생긴 것 즉, 본래부터 있었던 자연적인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다른 말로 진리, 진실, 원리 등으로 표현하고, 깨달음의 세계(종교)에서는 창조주, 신, 법, 근본도리, 진여眞如, 원각圓覺, 여여如如, 참나(진아眞我), 한 마음(일심一心)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어떤 특정한 것을 위해서 특정한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긴 것(스스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서로 화합하여 상생의 관계를 최대한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변하면 저것도 이것의 변화에 따라 가장 알맞게 변하기 때문에 조금의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은 인간의 뇌의 발달로 말미암아 다른 생명체에는 거의 없는 자아의식의 발달로 인해서 인간중심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차별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에게 이익 되지 않는다고 강한 느낌을 받아야만 비로소 다른 것들과 화합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위적인 것은 상생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연결고리(연기의 원리)를 끊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 제 5 강 -

 

         

 * 자기계발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인위적인 것은 개념적인 것이어서 계속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보편적이거나 타당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은 어떤 것에나 똑같이 적용되어 보편적이며, 모든 것에 딱 들어맞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며, 우주가 생긴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인위적인 것은 너와 나를 분별하기 때문에 이기적이나, 자연적인 것은 모든 것을 분별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서로 주고받을 뿐입니다.

 장마 뒤에 주변의 다른 것들과의 상관관계를 무시하고 인간 편의를 위주로 복구하여 매년 똑같은 피해를 당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강이 구부러져 내려가는 것은 공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예는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간 상호간에도 치열하게 나타납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풍요로워지기는 하였으나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게 되었고 인간성 상실로 인하여 각 가정마저 해체될 위기에 처해있으며 고통은 날로 늘어나고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삶은 풍요로워 졌으나 행복지수는 자꾸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은, 인간에 의해서 현실에서 그때그때 가장 알맞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한 알음알이(지식, 학문, 풍습, 문화, 윤리, 도덕, 예절)로서 개개인의 개념은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게 되므로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계발을 하려면 학습의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일상적 사고(내 생각)로 만들어낸 것은 분별하고 차별하기 때문에 잘못된 개념(인위적인 것)이므로 이것을 학습의 대상으로 하던 것을 버리고, 분별하지 않으며 차별하지도 않아서 서로 주고받는 상생의 개념(자연적인 것, 진리, 원리)으로 학습의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학습의 대상이 바뀌면 개념이 바뀌고, 개념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게 되어 말과 행동이 이기적인 것에서 이타적(상생)인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자기계발입니다.

 

 진리를 학습의 대상으로 바꾸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는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 우리몸 전체에 젖어있어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개념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굳어진 개념(고정관념, 내 생각)은 생각을 좁게 만들게 됨으로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자기방식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원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고정관념으로 만들어지는 내 생각을 없애는 일이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 내 생각을 없애는 일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근본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 졌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결코 까닭 없이 그냥 바뀌지는 않습니다. 원리를 통해서 그 원리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강력한 믿음이 생겨야 비로소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점이 생깁니다. 원리를 깨달아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모르고 믿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확실하게 알고 믿는 믿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는 일도 이와 같아서 내 생각을 버려야 깨달을 수 있고, 깨달아야 내 생각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내 생각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내 생각을 완전히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따라서 내 생각을 버려야 믿는 마음이 생긴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는 마음이 없으면 알고자하는 순수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므로 자기계발은 불가능 합니다. 이 강의에서 하는 말은 저자의 개념(내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원리(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생각(내 생각)을 내려놓고 우선 믿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진리란? 보편타당한 것이어서 바뀌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개념을 벗어나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서 완벽하게 나타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수행(자기계발)이라는 체험을 통한 ‘체득體得’또는 ‘증득證得’하지 않고는 달리알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름다운 꽃을 보았다던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얼마나 아름답고 맛이 있는지를 글이나 말로서 제 아무리 잘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학설이나 개념 같은 것들은 불확실한 것이므로 진실(진리)이 밝혀질 때까지 계속 연구해서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에 연구의 대상은 되지만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에 비록 아직까지 깨닫지 못해 모르고 있었더라도 우선 믿고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내 생각(알음알이)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성령聖靈이 나에게 임하시는 것은, 내 생각을 비운 만큼(믿는 만큼) 그 자리에 임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을 때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믿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번 더 강조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기를 계발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와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제 6 강 -

             

  *** 개념 바꾸기 (2-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연기공과 무상공의 원리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자기계발이 거의 끝났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자성의 원리는 자기를 계발하는 원리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원리를 명확하게 알고 생활에 잘 활용하면 거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는 원리를 우리들의 생활에 활용하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다시 살펴본다면,

 (1) 매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거나 때로는 외박도 하고, 그 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못하고 이 일로 자주 다투기도 한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런 남편을 좋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도리(원리)의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이 남편은 자성自性이 없습니다(무자성無自性). 같이 살고 있는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쁜 사람인 것이 분명하나 이 사람에게 매일 술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가는 술집 여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좋은 사람입니다.술에 대한 개념도 이와 같아서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술은 나쁜 것이나 술을 좋아하는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술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사랑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술집 여주인과 이 남편이 사랑을 나눈다면 이 사랑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여러 가지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나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부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전체를 보고 명확하게 아는 것이 늘 깨어있는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지혜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부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이 경우 사느냐? 헤어지느냐? 의 문제는 각자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택의 결과를 미리 각오하고 받아들이면 행복해 질 것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또 다시 불행해 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헤어지든 함께 살든 어떻게 해야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헤어지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므로 여기서 더 이상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헤어지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 이러 저런 이유로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내가 직접 남편을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왕에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사는 것 일까?의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러한 경우에 내 남편이 술을 조금만 먹거나 먹지 않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묘책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용하다는 곳을 찾아 물어보러 다니거나 기도를 하거나, 아무튼 남편을 고치려고 합니다. 남편 술 못 먹게 하려고 잔소리해서 고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고쳐지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욱더 심하게 다투게 되고 이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원리를 모르는 어리석음(내 생각, 무명, 지식, 알음알이, 아상) 때문입니다. 남편을 직접적으로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유는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내 남편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하는 내 생각을 바꾸는 일 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술 먹는 남편은 나의(아내)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평생 원수입니다. 이것은 원리를 모르는 나의 어리석은 내 생각일 뿐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원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 생각을 내려놓으면 남편이 아무리 술을 먹어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의 남편이 술 먹는다고 이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내 남편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내 남편이기 때문에 술을 먹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므로 집착하게 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미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계발을 함에 있어서 내 생각을 죽이는 것 즉, 나를 죽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남편, 남의 남편으로 구별하고 차별하는 그 마음이 이 모든 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 서약서에 맹세했던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려면 내 생각을 죽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 남편에게 있어서 “술은 보약이다.”라는 마음이 일어 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남편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이 지혜로 말미암아 서로 소통하게 되고 조화를 이루게 되어 남편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 때 지혜는 이렇게 하라고 시킵니다.   남편이 보약을 조금 먹고 들어오거나 먹지 않고 들어오면 술상을 차려 대접하라고 시킵니다. 이렇게 내가 바뀌면 남편은 이일에 감동되어 스스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일은 남편이 바뀔 때까지 계속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할 뿐 남편이 바뀌고 바뀌지 않고의 결과에는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경영하는 것(자기계발)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경영할 줄 알면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디에서든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환상이 아니냐? 영화나 연속극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앞으로 공부하면서 절실하게 느낄 것입니다. 아직 업의 윤회와 자업자득의 원리를 강의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리 이 부분만 조금 말씀드린다면, 지금 남편이 나에게 하고 있는 모습은 과거(전생)의 내 모습입니다. 따라서 지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도 과거의 나의 모습이요, 지금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과거의 나의 모습입니다. 다만 내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공부를 하면 통찰력으로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다 내 탓인 것입니다. 통찰력(숙명통宿命通)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술 먹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과거에 내가 그를 괴롭혔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편에 대한 미운 마음 대신에 측은한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수행자는 어떠한 경우(무슨 일이 벌어져도)에도 마음이 조용해야 합니다. 

이유는 내 마음이 조용해서(알아차림, 늘 깨어있음) 어떠한 일(경계, 대상, 객관, 여건, 상황)에도 끌려가지 않아야(물들지 않음, 생각이 머무르지 않음) 비로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법력法力, 통찰력)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 개념 바꾸기 (1-3)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연기공의 원리로 보면,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우주가 탄생(Big Bang)되면서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며, 이것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윤회輪廻)하는 과정에 이것은 저것에 들어있고 저것은 이것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1) (새롭게)생겨나지도 않으며, (완전히)소멸하지도 않습니다.

2)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깨끗이)단멸하는 것도 아닙니다.

3)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4) (어디선가)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가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도 이와 같아서,

1)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2) 죽는 가운데 죽지 않기도 하며,

3) 모든 것이 나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4) (어디선가)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가는 것도 아닙니다.

소립자는 온 우주에 에너지라는 형태로 조금의 빈틈도 없이 꽉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를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늘 주관(나)과 객관(나 외의 모든 것)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내 것과 남의 것이 만들어져 서로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일어나 화를 자초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는 존재와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분별하고 차별하고 배척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며 조건 없이 서로 나누지 않으면 상생의 관계가 끊어져 결국 자멸의 길로 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만상은 영원하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공空한 것(무상공)이고, 서로 상관관계로서 의지하면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공한 것(연기공)이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것(제법諸法)은 공空하다. 따라서 만상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무자성無自性)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무아無我).”는 말이 됩니다. 무자성의 원리는 빛(광양자)의 이중성(입자-파동)이 양자물리학에서 밝혀짐으로써 더욱 확실해 졌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즉卽(같다)의 논리와 불이不二(不異)사상이 그것입니다.

 

 무자성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는 뜻이어서 이 말은 `무아無我’라는 뜻이 되고, 무아는 “나라는 존재가 있기는 하나 나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비아非我’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찾아다니는 참나(진아眞我)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며, 자아는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원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없어져 모든 것을 하나로 보게 되어 분별심, 차별심이 저절로 없어지게 됨으로 항상 전체를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내가 없으니 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깨닫고 나면 생명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필요하게 되어 늘 한가하게 지내며, 오직 나누는 일에만 충실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소유의 삶이며, 무소유의 삶 보다 더 좋은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고의 자유, 최고의 행복, 최고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 제 7 강 -

               

*** 개념 바꾸기 (2-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연기공과 무상공의 원리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자기계발이 거의 끝났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자성의 원리는 자기를 계발하는 원리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원리를 명확하게 알고 생활에 잘 활용하면 거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는 원리를 우리들의 생활에 활용하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다시 살펴본다면,

 (1) 매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거나 때로는 외박도 하고, 그 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못하고 이 일로 자주 다투기도 한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런 남편을 좋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도리(원리)의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이 남편은 자성自性이 없습니다(무자성無自性). 같이 살고 있는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쁜 사람인 것이 분명하나 이 사람에게 매일 술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가는 술집 여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좋은 사람입니다.술에 대한 개념도 이와 같아서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술은 나쁜 것이나 술을 좋아하는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술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사랑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술집 여주인과 이 남편이 사랑을 나눈다면 이 사랑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여러 가지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나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부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전체를 보고 명확하게 아는 것이 늘 깨어있는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지혜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부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이 경우 사느냐? 헤어지느냐? 의 문제는 각자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택의 결과를 미리 각오하고 받아들이면 행복해 질 것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또 다시 불행해 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헤어지든 함께 살든 어떻게 해야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헤어지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므로 여기서 더 이상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헤어지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 이러 저런 이유로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내가 직접 남편을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왕에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사는 것 일까?의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러한 경우에 내 남편이 술을 조금만 먹거나 먹지 않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묘책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용하다는 곳을 찾아 물어보러 다니거나 기도를 하거나, 아무튼 남편을 고치려고 합니다. 남편 술 못 먹게 하려고 잔소리해서 고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고쳐지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욱더 심하게 다투게 되고 이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원리를 모르는 어리석음(내 생각, 무명, 지식, 알음알이, 아상) 때문입니다. 남편을 직접적으로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유는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내 남편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하는 내 생각을 바꾸는 일 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술 먹는 남편은 나의(아내)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평생 원수입니다. 이것은 원리를 모르는 나의 어리석은 내 생각일 뿐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원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 생각을 내려놓으면 남편이 아무리 술을 먹어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의 남편이 술 먹는다고 이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내 남편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내 남편이기 때문에 술을 먹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므로 집착하게 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미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계발을 함에 있어서 내 생각을 죽이는 것 즉, 나를 죽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남편, 남의 남편으로 구별하고 차별하는 그 마음이 이 모든 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 서약서에 맹세했던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려면 내 생각을 죽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 남편에게 있어서 “술은 보약이다.”라는 마음이 일어 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남편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이 지혜로 말미암아 서로 소통하게 되고 조화를 이루게 되어 남편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 때 지혜는 이렇게 하라고 시킵니다.   남편이 보약을 조금 먹고 들어오거나 먹지 않고 들어오면 술상을 차려 대접하라고 시킵니다. 이렇게 내가 바뀌면 남편은 이일에 감동되어 스스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일은 남편이 바뀔 때까지 계속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할 뿐 남편이 바뀌고 바뀌지 않고의 결과에는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경영하는 것(자기계발)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경영할 줄 알면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디에서든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환상이 아니냐? 영화나 연속극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앞으로 공부하면서 절실하게 느낄 것입니다. 아직 업의 윤회와 자업자득의 원리를 강의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리 이 부분만 조금 말씀드린다면, 지금 남편이 나에게 하고 있는 모습은 과거(전생)의 내 모습입니다. 따라서 지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도 과거의 나의 모습이요, 지금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과거의 나의 모습입니다. 다만 내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공부를 하면 통찰력으로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다 내 탓인 것입니다. 통찰력(숙명통宿命通)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술 먹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과거에 내가 그를 괴롭혔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편에 대한 미운 마음 대신에 측은한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수행자는 어떠한 경우(무슨 일이 벌어져도)에도 마음이 조용해야 합니다. 이유는 내 마음이 조용해서(알아차림, 늘 깨어있음) 어떠한 일(경계, 대상, 객관, 여건, 상황)에도 끌려가지 않아야(물들지 않음, 생각이 머무르지 않음) 비로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법력法力, 통찰력)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6]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것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위에서 보았듯이 자성은 없습니다. 다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1] 만물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므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3] 시간과 공간을 무한대의 개념으로 보면 존재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진다. 찰나 생하고 찰나 멸할 뿐이다. [4] 만물은 서로 다르게 생겼으며 그 작용 또한 다르다. 그러나 본질로 보면 같다. 다만,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관계에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이유로 모든 것은 독립된 스스로의 성품(자성自性)은 없고, 다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작용만 있을 뿐입니다(무자성無自性). 예를 들어서 독이라고 하면, 독이라고 하는 고정된 성품이 있다면 조금 먹든 많이 먹든 해를 끼쳐야 합니다. 그러나 독도 잘 쓰면 약이 되고 잘 못 쓰면 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말의 뜻은, 어떠한 경우든 그것이 독으로 작용하든 약으로 작용하든 작용은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좋게 쓰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쓰면 나쁜 것일 뿐, 본래 좋고 나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는 하나의 같은 마음이나 쓰이는 작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길을 가다가 어린 아이가 넘어진 것을 보고 일으켜 세워주는 마음과 그냥 지나치는 마음은 두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같은 마음이나 다만 그 작용만 다를 뿐입니다.

 * 존재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까닭은 존재의 원리는 만상(상相;생김새, 용用;쓰임새)을 구성하고 있는 공통분모(체體, 근본, 뿌리, 보편타당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상은 조건 없이 서로 주고받는 상관관계(연기緣起)이며, 매순간 변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무상無常) 즉,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존재의 원리에서 공의 원리(연기공緣起空, 무상공無常空)가 나오고,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만상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져(무자성無自性)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비아非我) 나는 있기도 하면서 또한 없기도 하므로(무아無我) 죽는 가운데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업의 윤회輪廻이며, 업이 윤회할 때는 자기가 한 행동의 결과는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자업자득自業自得)는 말입니다.

 

 이 원리들을 하나로 회통시킨 가장 멋있는 말이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따라서 존재의 원리와 마음의 구조, 명상하는 방법, 유식론唯識論, 업의 윤회, 화두참구 법을 알면 거의 모든 공부는 끝납니다. 이 강의에서 이 공부를 다 할 것이며, 공부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시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최고의 행복으로 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가장 완전한 행복을 `열반涅槃’이라 하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가장 완전한 자유를 `해탈解脫’이라 합니다. 이것이 자기계발(마음경영)의 완성입니다.

 * “진리는 세상을 거스른다(역행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리가 세상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겠지요.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진리대로 살아 갈 때 이루어집니다.  개념을 바꾸는 일은 자기를 바꾸는 일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쯤 이 강의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과정에 저도 이런 생각이 열두 번도 더 들었습니다. 이 과정을 잘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아직 공부가 짧아서 나타나는 현상이니 염려하지 말고 꾸준히 하십시오. 두드리면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 마음의 구조와 작용 (1-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개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나 이 말은 매우 잘못된 의미의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개념은 현상에만 치우쳐 있기 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하므로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하게 되어 자칫하면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치관이 오로지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있어서 쾌락에 빠지거나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원인입니다.

 

 사람의 마음처럼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없습니다. 우주 만물을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각자 자기의 마음(생각)으로 헤아려 보기 때문에 마음이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고 하며, 이것은 같은 것을 보고도 인식하는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지식(알음알이), 습관 등 과거로부터 배워 온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며, 이것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업식業識(업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대해서는 현대 심리학과 철학에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나 자기를 계발하는 방법(마음경영법)으로는 깨달음의 세계의 ‘유식론唯識論’에 근본적으로 보다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유식이란?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작용(심식心識)에 의해서 창조되며 심식(마음작용)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삼계유심설三界唯心說’에서 기인한 말로써 유식은 `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식작용이 가장 잘 발달한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유식론은, 선업善業에 의해서 증진될 수도 있고 악업惡業에 의해서 퇴보될 수도 있는 인간의 미묘한 마음자리, 곧 ‘심소心所’의 구조와 작용의 묘처를 규명하고 수행에 의해서 중생의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식사상을 불교 심리학 정도로 이해하면 큰 잘못입니다. 유식학의 목적은 ‘마음을 바꾸어 지혜를 얻는다(전식득지轉識得智)’ 즉, 번뇌 망상(내 생각, 고정관념)에 가려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만들어 보는 중생심(어리석음)을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청정심(진리)에서 발현되는 지혜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리를 모르는 내 생각(무명)을 바꾸어 지혜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8심소心所(식識; 마음자리)가 있습니다.

① 안식眼識(눈으로 보고, 색色)

② 이식耳識(귀로 듣고, 성聲)

③ 비식鼻識(코로 냄새 맡고, 향香)

④ 설식舌識(혀로 맛을 보고, 미味)

⑤ 신식身識(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촉觸)

⑥ 의식意識(뜻으로 생각하고, 법法)

⑦ 말나식末那識

⑧ 아뢰야식阿賴耶識

 보통 마음에는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의 세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인식을 주관하는 아뢰야식은 ‘심’이라 하고, 의지작용과 결의를 뜻하는 말나식은 ‘의’라 하고, 가려내고 판단을 하는 안이비설신의는 ‘식’이라고 합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심은 ‘내부의식’ 의는 ‘자아의식’ 식은 ‘외부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중간의식(제7말나식)에 들어있는 자아의식이란?

 (1) 아치我癡:이것은 자아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하며 무명無明이라고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를 해체해서 보면 이것과 저것이 모여 이루어 졌을 뿐 어느 것 하나 자기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는(무자성無自性, 무아無我)사실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2) 아견我見:자아自我는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로 아집我執이라고도 합니다. 즉, 자기의 견식을 고집하며, 자기 위주의 주장만을 절대적인 것이라 하며, 겸손하게 남의 주장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3) 아만我慢:아견我見에 의해 설정된 자아自我는 존재한다고 거만하게 우쭐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이미지화된 ‘자신’을 과시하고 의지하면서 그것이 상처를 받았다든지 충족되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4) 아애我愛:아애我愛는 아탐我貪이라고도 하며 설정된 허상의 자아상을 한 결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6의식은 나의 의지로서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이고, 7말나식은 의지로서 조절할 수도 있고 조절할 수 없기도 한 반 의식 반 무의식이기도 한 중간의식이며, 8아뢰야식은 완전한 무의식 즉 초월의식이므로 의지로는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현대 학자들은 8식을 초월의식, 7식을 잠재의식 또는 중간의식, 6식을 의식이라고 하는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1식에서 5식까지는 6의식에 포함되어 의식의 앞에 있으므로 전5식前五識이라 하며, 전5식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으로 느끼는 작용만 할 뿐 혼자의 능력으로서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눈은 카메라의 렌즈와 같아서 단순히 보는 작용만 할 뿐 생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전5식은 6의식에서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 마음의 구조와 작용 (1-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개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나 이 말은 매우 잘못된 의미의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개념은 현상에만 치우쳐 있기 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하므로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하게 되어 자칫하면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치관이 오로지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있어서 쾌락에 빠지거나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원인입니다.

 사람의 마음처럼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없습니다. 우주 만물을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각자 자기의 마음(생각)으로 헤아려 보기 때문에 마음이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고 하며, 이것은 같은 것을 보고도 인식하는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지식(알음알이), 습관 등 과거로부터 배워 온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며, 이것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업식業識(업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대해서는 현대 심리학과 철학에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나 자기를 계발하는 방법(마음경영법)으로는 깨달음의 세계의 ‘유식론唯識論’에 근본적으로 보다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유식이란?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작용(심식心識)에 의해서 창조되며 심식(마음작용)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삼계유심설三界唯心說’에서 기인한 말로써 유식은 `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식작용이 가장 잘 발달한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유식론은, 선업善業에 의해서 증진될 수도 있고 악업惡業에 의해서 퇴보될 수도 있는 인간의 미묘한 마음자리, 곧 ‘심소心所’의 구조와 작용의 묘처를 규명하고 수행에 의해서 중생의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식사상을 불교 심리학 정도로 이해하면 큰 잘못입니다. 유식학의 목적은 ‘마음을 바꾸어 지혜를 얻는다(전식득지轉識得智)’ 즉, 번뇌 망상(내 생각, 고정관념)에 가려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만들어 보는 중생심(어리석음)을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청정심(진리)에서 발현되는 지혜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리를 모르는 내 생각(무명)을 바꾸어 지혜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8심소心所(식識; 마음자리)가 있습니다.

① 안식眼識(눈으로 보고, 색色)

② 이식耳識(귀로 듣고, 성聲)

③ 비식鼻識(코로 냄새 맡고, 향香)

④ 설식舌識(혀로 맛을 보고, 미味)

⑤ 신식身識(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촉觸)

⑥ 의식意識(뜻으로 생각하고, 법法)

⑦ 말나식末那識

⑧ 아뢰야식阿賴耶識

 보통 마음에는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의 세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인식을 주관하는 아뢰야식은 ‘심’이라 하고, 의지작용과 결의를 뜻하는 말나식은 ‘의’라 하고, 가려내고 판단을 하는 안이비설신의는 ‘식’이라고 합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심은 ‘내부의식’ 의는 ‘자아의식’ 식은 ‘외부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중간의식(제7말나식)에 들어있는 자아의식이란?

 (1) 아치我癡:이것은 자아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하며 무명無明이라고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를 해체해서 보면 이것과 저것이 모여 이루어 졌을 뿐 어느 것 하나 자기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는(무자성無自性, 무아無我)사실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2) 아견我見:자아自我는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로 아집我執이라고도 합니다. 즉, 자기의 견식을 고집하며, 자기 위주의 주장만을 절대적인 것이라 하며, 겸손하게 남의 주장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3) 아만我慢:아견我見에 의해 설정된 자아自我는 존재한다고 거만하게 우쭐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이미지화된 ‘자신’을 과시하고 의지하면서 그것이 상처를 받았다든지 충족되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4) 아애我愛:아애我愛는 아탐我貪이라고도 하며 설정된 허상의 자아상을 한 결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6의식은 나의 의지로서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이고, 7말나식은 의지로서 조절할 수도 있고 조절할 수 없기도 한 반 의식 반 무의식이기도 한 중간의식이며, 8아뢰야식은 완전한 무의식 즉 초월의식이므로 의지로는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현대 학자들은 8식을 초월의식, 7식을 잠재의식 또는 중간의식, 6식을 의식이라고 하는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1식에서 5식까지는 6의식에 포함되어 의식의 앞에 있으므로 전5식前五識이라 하며, 전5식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으로 느끼는 작용만 할 뿐 혼자의 능력으로서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눈은 카메라의 렌즈와 같아서 단순히 보는 작용만 할 뿐 생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전5식은 6의식에서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 제 13 강 -

       

*** 본질(체體)과 현상(상相, 용用)의 원리 (1-1) ***

 이제부터 본격적인 원리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원리 강의는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를 더욱 자세하게 회통시킴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그 기초를 다지고자 함입니다.

 본질本質이란? 진리, 근본, 원인, 근원, 뿌리를 뜻하며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것(우주)을 만들어 낸 진여의 작용(에너지)을 본질 또는 본성이라 합니다.현상現狀이란? 본질에 의해서 만들어져 세상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며 인간의 인식 대상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들의 오감(눈, 귀, 코, 혀, 몸)으로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질은 모든 것의 근원을 뜻하기 때문에 ‘체’라 하고, 현상은 체를 바탕으로 세상에 드러난 모습과 그 쓰임새 또는 작용을 의미함으로 ‘상’또는 ‘용’이라 합니다.

 

 깨달음(종교적)으로 보면 체는 진여眞如, 여여如如, 여래如來, 원각圓覺, 일심一心(한 마음), 불성佛性, 청정심淸淨心, 본래심本來心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며, 상, 용은 경계, 대상, 객관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상, 용은 체의 다른 모습일 뿐, 체, 상, 용은 둘이 아니다(불이不二), 다르지 않다(불이不異), 같다(즉화卽化)는 의미에서 이 모두를 법이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법계法界라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체는 상, 용 모두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구성하고 있는) 성분 또는 성질을 말합니다. 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상과 용은 겉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집착하고 여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상, 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내용을 양자물리학적으로 살펴본다면, 우주 만상은 진여의 작용에 의해 비롯된 것이며, 진여의 작용에 의해 최초로 생긴 것이 소립자(아원자, 미립자)입니다. 진여를 만상의 체로 보았을 때는 소립자도 상, 용에 해당될 것이나 진여는 모든 개념을 떠나있기 때문에 논리를 확립시키기 위해 이 강의에서는 소립자를 만상의 체로 정리하겠습니다. 진여의 상, 용은 소립자요, 소립자의 상, 용은 만상이라는 뜻입니다.

 진여와 소립자의 관계는 기독교적으로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관계이며 불교적으로는 법신法身과 화신化身의 관계이기 때문에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으며, 같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았으므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진여는 형상이 아예 없어서 찾을 수도 없지만 소립자는 극도로 미세하기는 하나 형상이 아예 없지는 않으므로 찾을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진여와 소립자는 둘 다 일종의 에너지로서 만물은 진여와 소립자의 작용에 의해 생멸이 있고, 작용은 인연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작용할 때는 아무렇게나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일정한 원리를 가지고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진여는 언어 문자를 떠나 있지만 원리는 언어 문자를 의지할 수 있으므로 이 강의에서는 그 원리를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고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해탈, 열반(구원, 영원한 행복)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소립자가 에너지이기 때문에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현상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금(체)으로 반지, 목걸이, 행운의 열쇠(상, 용) 등 어떠한 것을 만들어도 모양은 다르나, 금이라는 본래의 성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향나무(체)로 어떠한 것(상, 용)을 조각하여도 냄새는 향나무 냄새가 날 것이며, 본질은 향나무라는 성질을 떠날 수 없습니다.

 (2) 물과 얼음과 구름은 현상적으로는 다르게 보이나 물이 찬 것을 만나면(인연, 조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더운 것을 만나면 물이 되며, 물이 증발하여 적당한 인연(조건)을 만나면 구름이 되기 때문에 얼음과 구름은 물의 ‘상’과 ‘용’이고, 물은 얼음과 구름의 ‘체’입니다. 또한, 이 셋은 물의 본래의 성품인 ‘젖어 들게 하는 성질’은 똑같이 지니고 있습니다.

 (3) 바닷물은 본래 고요하나 바람을 만나면 파도를 만듭니다. 바닷물 (체體)과 파도(상相, 용用)는 모양은 다르나, 파도는 바닷물을 떠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상, 용은 체의 다른 모습일 뿐, 체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 이것은 참 나와 가아(에고, 자아自我)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것과 같고, 서로 상대적인 모든 것은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이 사실(원리)을 깨닫게 되면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찻잔 속에 있는 구름을 보게 되며 차를 마시면서 동시에 구름을 마시는 경이로운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온전하게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한다는 말은 행동과 생각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밖으로 나가 있는 생각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명상에서 다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 제 13 강 -

 

  *** 본질(체體)과 현상(상相, 용用)의 원리 (1-2) ***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상, 용의 원리를 알고 나면 현실에 드러나 있는 ‘나’와 그 안에 숨어있는 또 다른 ‘내’가 있지 않을까? 라는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나를 바꾸는 공부는,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 거짓 ‘나(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이 거짓으로 화합한 나)’라는 사실을 알고 ‘참 나’를 찾아가는 공부입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나’는 상, 용을 의미하는 ‘거짓 나(가아假我)’이고, 공부해서 깨달음으로 찾은 ‘나’는 체를 의미하는 ‘참 나(진아眞我)’입니다. 그러나 본질과 현상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현상은 본질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마치 파도는 바닷물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모든 것은 하나로서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다(생명공동체)’라는 이 진리를 확실하게 깨달으면 그것이 견성입니다. 하나 된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를 모르는 것을 무명無明(중생, 내 생각)이라 하고 모든 고통은 무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거짓 나는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진리를 모르는 나(중생)이기 때문에 분별 망상에 집착하는 매우 이기적인 ‘나’이므로 성공하는 비결이나 행복해지는 비결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계발되어 있지 않은 ‘나’입니다. 그러나 공부하여 깨달음으로 ‘참 나’를 찾으면 본질을 확실하게 보고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진리를 터득하여 지혜를 얻음으로써 어떠한 것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므로 모든 것과 최고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최고의 행복, 최고의 성공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계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상, 용의 입장(내 생각, 부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체(진리, 진여, 전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즉, 상, 용의 입장에서 체의 입장으로 나를 바꾸는 일입니다.

 연기의 원리와 체, 상, 용의 원리를 알게 되면 최소한 가정이나 회사와 같은 조직에서 지금까지는 나의 이익에 치우쳐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전체를 죽이는 일이 되어 결국에는 나를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다르며, 좋아하는 것은 즐기려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평일에는 돈을 벌기위해 일만 하고 휴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나 혼자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늘 가족 밖에서 혼자만 지내는 것이 되어 가족과 화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좋아하는 것도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어서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적당히 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것 때문에 많은 고통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게임 중독, 술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구성요소를 해체해서 살펴보면,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본인 흙(지地), 성장시키는 습기와 액체인 물(수水), 성숙시키는 에너지인 불(화火), 변화시키는 움직임인 바람(풍風)의 사대四大가 조건(인연)에 따라서 모였다(생生) 흩어지는(멸滅) 것을 반복(윤회)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도 죽으면 살과 뼈는 흙의 기운으로, 피와 다른 액체는 물의 기운으로,따뜻했던체온은불의기운으로,숨쉬던것(호흡)은 바람의 기운으로, 즉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죽었다’는 말을 ‘돌아가셨다’라고도 합니다.

만물은 지, 수, 화, 풍 사대의 인연화합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하는 일을 반복(윤회)하고 있을 뿐, 어느 것 하나도 독립되어 스스로의 고정된 성품을 지닌 것은 없습니다(무자성無自性).  예컨대 집을 지으려면 많은 건축자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하나의 건축 자재를 집이라고는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이 집을 만들어야 비로소 집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이와 같아서 이것과 저것이 인연 화합되어 있을 뿐 변하지 않는 고정된 성품은 없습니다.

진여의 작용으로 대폭발(Big Bang)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수많은 소립자가 만들어지고, 그 소립자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본질이 되었다는 사실이 과학적(양자물리학)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소립자라는 말입니다. 이 현상을 머리로 상상하면서 이 글을 읽으면 이해가 빠르리라 생각됩니다.

연기의 원리로 보면,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우주가 탄생(Big Bang)되면서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며, 이것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윤회輪廻)하는 과정에 이것은 저것에 들어있고 저것은 이것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1) (새롭게)생겨나지도 않으며, (완전히)소멸하지도 않습니다. 2)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깨끗이)단멸하는 것도 아닙니다. 3)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4) (어디선가)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팔불중도八不中道’라 합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도 이와 같아서 1)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2) 나는 죽는 가운데 죽지 않기도 하며, 3) 모든 것이 나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4) 나는 (어디선가)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원리는 체, 상, 용의 원리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 본질(체體)과 현상(상相, 용用)의 원리 (1-3)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연기의 원리는 체, 상, 용의 원리에도 적용되어 체는 조건(여건) 따라 상, 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체는 인연 따라 모든 것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결국 연기의 원리로 본 존재의 실상이나 체, 상, 용의 원리로 본 존재의 실상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대(지수화풍地水火風)가 서로 인연화합因緣和合(연기緣起)되어 생멸이 만들어지고, 사대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근본이므로 체의 역할을 하며, 사대로 인해서 만물이 드러나기 때문에 상, 용이 있게 됩니다. 이 원리가 연기와 체, 상, 용이 하나 되어 있는 모든 존재의 모습입니다.

연기공, 무상공의 공사상空思想(원리)과 체, 상, 용의 원리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의 물리적인 뜻은, `정말로 공하다(비어있다)는 것은 만물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묘하게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비어있다는 것은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주는 소립자로 꽉차있는 소립자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진공묘유도 양자물리학(과학)으로 확실하게 증명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어떻게 지금으로부터 약2500년 전에 이러한 사실(원리)을 깨달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알아 낼 수 있었느냐? 입니다.

은 무상無常과 연기緣起와 무자성無自性을 뜻합니다. 만약 만상에 고정 불변의 자성이 있다면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생멸이 있을 수 없으므로 어떠한 것도 본래(원천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멸은 인연 따라 순환(무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공묘유는 생멸이 순환하는 과정에 서로 화합(융합)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중도사상입니다. 중도의 원리는 앞으로 공부할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으로 본인의 알음알이가 아닌(내 생각을 버린) 순수한 마음으로 깊게 한번 사유해 보기 바랍니다.

 우주에 시작이 있는가 아니면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가? 이것은 인류의 오래된 의문이었습니다. 우주의 시초가 있다고 주장하는 `빅뱅우주론’이 등장하자, 이에 맞서 영원한 우주를 주장하는 `정상상태 우주론’이 등장하여 상반된 두 우주론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으나 아직까지는 학설이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연기론과 윤회론으로 보면, 연기는 인연因緣하여 일어나는 것(인연소기因緣所起)입니다. 즉 어떤 인(因;직접적인 원인)이 있고, 그것에 상응하는 다른 조건(연緣;간접적인 원인)이 결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윤회輪廻는 원인과 결과에 의한 순환, 유전流轉, 생사, 흐름, 상속,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과 결과로 연기되는 현상들의 연속적 흐름을 윤회라고 합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의 만물은 돌고 돌아, 변하고 변하여 항상 그대로 인 것이 없다(제행무상諸行無常).’는 것을 말합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의 삶을 제행무상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며, 생주이멸生住異滅은 만물의 양상을 제행무상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며, 성주괴공成住壊空은 세상(우주)의 양상을 제행무상의 원리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리적인 측면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우주 만물)은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습니다(무시무종無始無終).

 연기와 무상은 동시에 진행되면서 상, 용을 만들어 내고 상, 용의 본질(체)은 사대(지, 수 화, 풍)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사대는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생노병사, 생주이멸, 성주괴공의 순서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대라는 말은 과학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고, 지금은 사대라는 말 대신 소립자라는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 * * * * *

 * 자기를 계발한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더 나아져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고정관념)을 보다 더 진취적인 생각으로 바꿀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마찰(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이 공부를 끝까지 하려면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과 싸우기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지고 결국은 “이 공부를 하기 전에도 잘 살아 왔는데”라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굳어져 포기하게 됩니다. 자기를 비롯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자기주장(생각)이 강해서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제 14 강 *** 본질(체體)과 현상(상相, 용用)의 원리 (2-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상, 용의 원리는 우주 만물의 존재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의상

조사義湘祖師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하나에 모두가 다 있으며 모두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이니, 한 티끌 작은 속에 우주를 다 머금었으며, 낱낱의 티끌이 다 그러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미물이라 할지라도 우주의 모든 역사를 다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모든 존재는 스스로 독립된 고정불변(영원한)의 존재가 아니라 인연 따라 모였다(생生) 흩어지는(사死, 멸滅) 과정에 이것은 저것에 저것은 이것에 서로 복잡하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과학은 ‘물체(색色)는 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event(공空) 이다’, 또는 ‘물체는 물체가 아니라 에너지(공空)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물리적(과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말입니다.(여기서 말하는 공은 반야심경의 공은 아닙니다.) 미국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앤더슨Carl David Anderson’은 무형의 에너지를 유형의 질량으로 전환(에너지 물질화)시켰습니다. 결국 에너지(공空)가 질량(물질, 색色)이고 질량이 에너지였던 것입니다(등가원리). 그 후 이탈리아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세그레Emilio Gino Segre’가 다방면으로 실험하여 에너지가 물질화할 때 거기에는 증감이 없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부증불감不增不感, 질량보존의 법칙)

 거의 모든 생명체에 다 들어있으면서 세포호흡에 관여하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를 생명체의 체로 본다면, 모든 생명체는 미토콘드리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체(미토콘드리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상相, 용用)이 고등동물이라는 말은 우스운 일입니다. 체(미토콘드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는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나고 죽는 일도 없어집니다. 이유는 모든 것은 다 ‘나’이기 때문입니다. 상, 용이 일부 없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연기공, 무상공의 원리와 체, 상, 용의 원리를 알면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고(색불이공色不異空)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공불이색空不異色) 물질이 곧 허공이고(색즉시공色卽是空) 허공이 곧 물질이다(공즉시색空卽是色)"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공한 이 실상은(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불생불멸不生不滅)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불구부정不垢不淨)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부증불감不增不感)” 라고 말한 의미(공空의 성품性品)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더욱 쉽게 풀어 본다면, 물은 H2O로서 산소 1분자와 수소 2분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물이라고 하는 독립적인 자성(고정적인 성품)은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인연화합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물(색色)의 성품은 공空(무자성)입니다(색즉시공色卽是空). 이렇게 화합해서 이루어진 물이 본래대로 산소분자와 수소분자로 되돌아가도 그 양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부증불감不增不感). 물이 차가운 인연을 만나면 얼음이 되고 더운 인연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모이면 다시 물이 되어(공즉시색空卽是色)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이렇게 순환하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불생불멸不生不滅). 물은 모든 생명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체의 역할을 하므로 모든 생명체는 물로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입니다.

 10개의 방이 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각각의 방에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건물 전체에는 100명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방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오고 가면 각각의 방에 있는 사람의 수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 전체로 보면 항상 100명이라는 사람의 수는 변함이 없습니다(부증불감不增不感). 돈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10명의 사람이 각각 100만원씩 가지고 있다면 전체로 보면 1000만원이 됩니다. 거래관계로 서로 주고받았다면 각각의 돈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늘어나지도 않았으며 줄어들지도 않았습니다. 서로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각각의 입장(중생, 나, 주관, 상相)에서 전체의 입장(깨달은 사람, 진여眞如, 체體)으로 완전하게 바꾸는 것이 자기계발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주관을 내 세우면 객관이 생기기 때문에 분별하게 되어 내 것과 네 것이라는 소유의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원리로 본다면, 본래 만물은 주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빈 것으로 왔다가 빈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진여(체體)의 입장이 되면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되므로 소유의 개념(욕심)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무소유는 깨닫는 사람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일 뿐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은 만족, 행복, 기쁨, 즐거움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지려면 너와 내가 하나 될 때입니다. 그 까닭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 본래 하나인가?’의 원리를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 되어 분별심 차별심이 끊어지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가져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무소유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항상 체(진여)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전체를 하나로 보게 되어 너(객관)와 나(주관)의 구별이 없어지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기적)인 상, 용의 입장에서 부분만을 보게 되어 분별하고 비교하여 차별 짓고 배척하기 때문에 항상 경쟁하고 다투는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이든 전체(체體)의 입장에서 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感이며, 불구부정不垢不淨입니다. 그러나 각각(상相, 용用)의 입장에서 보면 생멸도 있고,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며, 더러울 수도 있고 깨끗할 수도 있습니다. 소똥구리는 소똥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똥은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자성이 없습니다. 소똥은 소똥일 뿐입니다.

 종교의 문제도 체, 상, 용의 원리로 살펴본다면, 모든 종교는 인간의 고통을 없애고 행복해지기 위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 사실이 모든 종교의 체(본질)가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는 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상, 용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서로 다르나 종교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같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커서 문화, 풍습, 예술, 학문, 심지어 전쟁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관계(인연)를 맺고 있습니다. 종교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분쟁은 본질의 의미가 인간의 욕심에 의해 퇴색되고 ‘내가 믿는 종교와 신이 제일이다.’라고 해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이단시하여 저마다 자기가 믿는 종교로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사랑, 자비, 나눔, 믿음, 순종입니다. 이것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종교의 본질에 벗어나는 외적인 형식에 불과합니다. 종교는 종교의 본질 이외의 다른 어떠한 목적으로도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종교가 본질에서 벗어나 외적인 일(형식)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슨 종교를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의 본질이 형식에 치우쳐 훼손되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종교와 신의 문제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가장 조화롭게 해결하는 방법은 체, 상, 용의 원리를 분명하게 아는데 있습니다.



*** 자기계발과 선의 만남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이 글에서 말한 내용을 총 정리한다면,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내 생각은 현실에 익숙해 있어서 진리를 모르는 번뇌 망상이기 때문에 버려야 하며, 번뇌 망상은 의식적으로 버리려 한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확실하게 깨우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 공, 무상, 무아, 체와 상용의 원리, 업과 윤회의 원리를 공부하였으며, 이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이므로 마음의 구조와 작용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또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명상수행에 대해서도 공부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원리적으로 서로 상통하고 있으며 ‘중도’라는 하나의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도 함께 알았으며, 이렇게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번뇌 망상은 사라지고 누구나 다 갖추고 있는 본래의 깨끗한 마음(참 나)이 드러나며, 이 마음의 작용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라 하고 이러한 삶이 바로 진정한 주인공의 삶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자기를 계발하는 공부는 수행修行을 하는 것이므로 머리에 담아두는 공부가 아니라 가슴으로 깊게 느끼고 사무쳐서 깨달음으로 승화되어 완성된 중도의 지혜가 일상의 모든 것에 활발하게 작용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마음(중생심衆生心, 망념忘念)을 깨달음의 마음(불심佛心, 지혜智慧)으로 바꾼다(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합니다.

 지혜의 작용에는 반드시 ‘사랑’과 ‘나눔(자비심慈悲心)이 있어야 합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유전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실상의 원리를 확실하게 밝혀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사랑하고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평등하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기계발’의 완성입니다. 이 일은 오직 우리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이 글은 한두 번 읽고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일상에서 실천하면서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다시 반복해서 읽으십시오. 자기계발을 하는 지름길은 많이 듣거나 읽고(문聞), 깊이 생각하고(사思), 수행하고, 실천(수修) 하는 데 있습니다.


 [2] 생과 멸滅(사死)에 대한 개념

 우리는 생사의 개념을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이유는 있다는 것은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고 없다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긴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물질이 조건(인연)에 따라서 때가 되면 모이는 것이고 멸한다는 것은 조건에 따라서 모였던 여러 가지의 물질이 때가 되면 본래의 모습으로 흩어진다(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조각 구름이 생기고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더워지면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고 이것이 모이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모이면 다시 비가 되어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이 생긴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나,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경우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변하지 않고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생전生前(과거)에 지은 모든 행위의 결과(업業)입니다.

 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윤회輪廻를 알아야 하며, 윤회의 주체는 업입니다. 인간은 어떤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온五蘊 즉, 정신적인 요소(수受, 상想, 행行, 식識)와 물질적인 요소(색色;몸)가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다섯 가지의 요소를 하나하나 떼어서 보더라도 자성이 없기 때문에 거짓(일시적)으로 화합된 것입니다. 이 정신과 물질을 결합시키는 힘이 곧 업이라는 하나의 세력(에너지, 소립자)입니다. 이 업으로 말미암아 생멸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는 없어지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지은 모든 행위의 결과(업)는 없어지지 않고 더욱 새로운 생을 일으키고 꺼지면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우리들의 생사윤회의 원리입니다.

 양자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학설로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우주가 여러 개 있을 것이라는 `다중우주론’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주가 하나만 있든 여러 개가 있든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에너지이며, 이 에너지는 소립자들의 모임입니다. 이 에너지(소립자)의 작용에 의해서 모든 것은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생멸이란 에너지가 인연 따라 모이고(생生) 흩어지는(멸滅) 현상(사건)입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보면 생멸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본래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다만 모였다 흩어지는 작용(현상)만 있을 뿐이므로 윤회라는 말도 부분의 문제일 뿐 전체로 보면 본래 윤회라는 것도 없습니다. 윤회라는 말은 개별적으로 볼 때,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것으로서 이 말도 인간이 한 생각 일으켜 만든 개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몸은 업이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어서, 죽을 때는 입고 있던 헌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이고 태어날 때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체득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죽는 가운데서 죽지 않는 원리(묘법)를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생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생사가 있는 가운데 그대로 생사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고 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할 모든 원리와 연결됨으로 특히 중요합니다.


 [3] “백년이라는 시간은 길고, 하루라는 시간은 짧다. 처음과 시작이 있다.” 이렇게 한정지어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과, “눈에 보이면 있다, 보이지 않으면 없다, 공간을 서로 비교해서 넓다, 좁다”라고 한정지어 주관적으로 보던 개념을 무한대의 개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은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다 ‘내 생각(망념)입니다.

 1분은 60초, 1시간은 60분, 1달은 30일, 1년은 365일과 같이 시간에 대한 개념이나, 지나간 시간은 과거, 지금은 현재, 다가올 시간은 미래라고 이름 한 것도 인간이 편의상 시간을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시간은 물 흐르는 것과 같아서 한 선상에 연결되어 있을 뿐 시작과 끝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라 할지라도 무한대의 시간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보면 찰나(순간)에 불과합니다. 가령 유리로 만든 컵의 수명이 천 년을 간다고 할지라도 무한대의 시간 개념으로 비교해 보면 컵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이 되어 실질적인 존재의 의미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을 통해서 공을 보게 되면(깨닫게 되면) 어떠한 것에도 집작하거나 생각이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가지려하는 욕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상無常(변화, 영원하지 않다. 바뀌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반드시 무한대의 개념으로 바꾸어야 가능하며, 이것은 우리들의 육안肉眼(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안心眼(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심안으로는 무엇이든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소립자도 심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장작에서 재를 보고 재에서 장작을 봅니다. 얼음, 구름, 수증기는 모두 물이 변한 모습입니다. 얼음에서 물을 보고 물에서 얼음을 볼 수 있다면,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구름을 마시는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간에 대한 개념 또한 내 눈에 보이면 ‘있다’하고, 보이지 않으면 ‘없다’ 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을 진실로 있다는 것으로 개념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심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주관적인 판단 때문인데 죽는 다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하여 없다고 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물건도 앞에 있으면 있다고 하나 뒤에 있어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합니다. 물을 끓일 때 김이 올라가는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있다고 하나 공기 중에 흩어지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방울은 잠시 모여 있다가 흩어졌을 뿐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주관적으로 판단해서 생기는 말입니다. 공간에 대한 개념도 무한대로 늘려서 우주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 정도의 크기는 미세한 점에 불과합니다.


12강1

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로 각인 시키고 각인된 것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순수한 의심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1살에서 3살까지의 어린아이는 자기 생각이 거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시기에는 경험도 없을 뿐 만 아니라 지능이 발달되지 않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받아들인 것에 대한 의심(참구)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성장하는 과정에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내 생각으로 판단하는 힘은 강해지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각인 시키는 것)은 어릴 때보다 오히려 약해져 이 경우에도 역시 깨닫지 못합니다. 


따라서 깨달음의 필수 조건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각인) 받아들인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순수한 의심이 간절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지능이 발달되지 않아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를 각인시키는 어린아이의 능력과, 지능은 발달 되었으나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판단할 수 있는 성인의 능력을 함께 갖추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지기가 쉽고 양면을 고루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느린 성격을 지닌 사람은 무엇을 하든 느리게 하고, 빠른(급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무엇을 하든 빨리 합니다. 이 둘은 어느 것이 좋다 어느 것이 나쁘다고 결론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무자성) 경우에 따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인간의 뇌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한 것은 무의식에 입력(저장)되어 다른 일을 할 때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삼매 가운데 있으면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생활 삼매’라 합니다. 견성은 ‘생활 삼매’속에서만 체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95%의 무의미한 번뇌 망상을 할 시간을 원리를 깨닫고자 하는 시간으로 바꾸면 그것이 그대로 생활 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의 역할은, 번뇌 망상의 내 생각을 일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하나에 몰입하는데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몰입해서 삼매의 경지까지 가게 하였으나 꼭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 강의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화두입니다. 원리를 깨닫는 공부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개념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나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다만 일어나는 의심을 내 생각으로 만들어 또 다른 나의 고정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심이 일어나는 현상을 혼란스럽다고 여겨 처음부터 공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으나 조금 지나면 오히려 혼란스러움은 사라지고 의심이 하나씩 풀어지면서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이 공부는 의심하는 ‘의심공부’이기 때문에 스스로 파고드는 능동적인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의심을 하다 보면 웬만한 의심은 다 풀리게 되나 지금까지 배운 어떠한 것으로도 풀리지 않는 의심에 걸리게 됩니다. 이것이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의심은 자기 자신이 풀어야 하며 결코 남의 도움을 받아서 직답을 얻는 것은 지식은 될지언정 깨달음은 되지 못합니다. 의심이 집중이고 집중이 명상이며, 명상은 지금 여기로 돌아와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몸으로 하고 있는 일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온전하게 한다고 합니다. 의심하지 않고 그냥 하는 공부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부터 ‘생활 삼매’는 시작되는 것이며 이렇게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시절인연時節因緣(가장 알맞은 때)이 닿아 누구나 문득 견성을 하게 됩니다.

 자기를 계발한다는 것(수행을 한다는 것)은, 95%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제8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윤회의 주체가 되는 업의 종자(씨앗, 내 생각)를 하나씩 소멸시켜 궁극에는 완전하게 청소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심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내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 마음이 그대로 본래 누구에게나 똑 같이 갖추어진 청정한 마음(본래심)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심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간단한 것 같지만 그 뜻이 매우 깊기 때문에 앞으로 조금씩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심(청정심)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이 일어났으나 업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생기지 않으므로 행하기는 행하였으나 행한 바가 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바라밀 수행’이라 합니다. 바라밀波羅蜜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의 음역이며 바라밀다波羅蜜多 또는 바라밀波羅蜜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고, 성취, 최상, 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라밀에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지혜)의 6바라밀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인욕바라밀을 예로 든다면, 우리는 보통 참는다고 하면 화는 나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경우에는 화를 내게 하는 화의 종자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나 인욕바라밀(완성된 인욕)의 경우는 무의식에 저장되어 화를 일으키는 화의 씨앗을 모두 소멸시켰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낼 일이 아예 없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과거의 모든 수행자들은 바라밀 수행을 하였으며, 이 강의 에서도 바라밀 수행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결국 새로운 수행의 방편이란? 뇌 과학이 발달되기 이전의 수행방편인 삼매에 드는 수행은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현실과 부합하지 못하므로, 내 생각을 내려놓고 이 글을 읽고 간절하게 의심해 들어가면서 3강에서 공부한 생활습관 바꾸기를 실천하면 수행의 부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 수행방편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원리를 하나로 회통시킴으로써 이해하기 쉽게 한 글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수행방편에 관련되는 부분은 다만 알고 참고만 하십시오. 전통적인 수행방편은 최상의 삼매에 드는 것에는 적합하나 원리를 깨닫는 것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하고 있는 강의의 모든 것이 지금에 가장 알맞은 수행의 방편이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제일 잘하는 일입니다.




- 제 12 강 -

            *** 깨달음으로 가는 새로운 방편 (2-3) ***

 

지금 우리나라의 수행방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전통성이 있으며, 출가하지 않은 수행자의 숫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참선수행參禪修行(삼매수행)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선수행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마치 커다란 바위를 잘게 부수기 위해 발달된 여러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석기시대의 방법으로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반적이다’ 또는 ‘관행이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옳다-그르다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로서 옳다는 말 대신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많이 쓰입니다. 문제는 일반적인 것과 관행에 습관 되면 모든 것이 희석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세력화 되면 진실하게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을 밖으로 내 몰아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일반적인 것과 관행적인 것에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말을 깊게 사유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선수행법인 간화선의 핵심은, “만상은 있는 그대로 어떠한 결점도 없는 완성품이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도 이대로 완성품입니다. 자기를 계발해서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완성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진여(진리, 부처)다.”, “모든 것은 본래 진여다.”라고 말합니다.  웃을 줄 알고, 화낼 줄 알고, 모든 능력을 다 나타 낼 수 있는 것이 사람 말고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한 마디에 아는 사람도 있고, 열 마디 백 마디 말에 아는 사람도 있으며, 무슨 말을 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견성, 돈오)입니다.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진실, 진리, 원리)을 모르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하고, 무명의 원인은 내 생각 때문입니다. 앞으로 공부할 원리를 통해서 더욱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없애는 일이 자기계발의 시작이고 동시에 끝이라는 말입니다. 이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공부를 함으로써 비록 큰 깨달음은 얻지 못했더라도 이론적으로 라도 좀 안다면 살아가는 태도가 자연스러워지고, 분수와 인연(조건)을 따를 줄 알기 때문에 순리에 역행하거나 무리수를 두지 않으며 자기의 위치에 대해 불만이 없으므로 그것이 자기의 인연(주어진 조건)임을 앎으로써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팔자타령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수행의 관성에 의해 시절인연(적당한 때)이 되면 문득 깨치게 됩니다.

 이 공부(화두참구)는 몸(행동, 일)과 마음(생각)을 지금, 여기에 일치시켜 한 가지에 몰입하는 것(온전하게 함, 삼매)입니다. 모든 달인이나 장인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자기가 하는 일에만 집중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머리에 한 생각만 있다는 말입니다. 베토벤의 머리에는 온통 음악 한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 삼매입니다. 생활 삼매 속에서 우연히 어떤 경계(대상)에 부딪힐 때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새로운 발명, 새로운 기술, 새로운 발견 그리고 견성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 * * * *

 *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개개인이 느끼는 점이 다 다를 줄 압니다. “어렵다, 실천해 보니 잘 안되기도 하지만 역시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다만 마음을 가볍게 가지십시오. 모든 것은 이 강의에 맡기십시오. 원리 강의가 끝나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생활의 문제를 원리를 적용해서 하나씩 풀어 나가는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 공부가 더욱 중요합니다. 원리를 모르면 해답을 주어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부가 시작입니다. 앞으로 순서대로 공부하다 보면 하나씩 원리를 알게 되고 실천 할 수 있는 힘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그러니 그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따라하는 것이 어렵다구요?, 억지로 따라하지는 마십시오. 안되면 “아! 아직은 잘 안 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하고 “안 된다”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나는 왜 안 될까?”와 같은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번뇌 망상입니다. 잘 안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번에 안 되면 그냥 가볍게 지나가고 다음에 다시하면 됩니다. 이렇게 자꾸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됩니다. 마치 안개 속을 거닐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옷이 젖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훈습薰習’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마음을 가볍게 내고 가볍게 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잘해야지”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이런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그냥 해 버리십시오. “잘해야지”라는 생각은 번뇌 망상입니다. 이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잘 안될 때 스트레스가 일어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잘하는 것 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것은, 이 공부를 하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과,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 공부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비현실적이다.”, 또는 “당신이 그런 일에 직접 부딪혀 보지 않아서 그런 얘기하는 거다.” 결국 둘 다 현실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폐암에 걸려 병원에 가면, 모든 의사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앞으로 담배는 절대로 피우시면 안 됩니다. 만약에 담배를 피우시면 죽습니다.” 여러분! 이 말보다 더 현실적인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 는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문제고, 선택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짊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업자득(자작자수自作自受)입니다.  



            *** 공, 인연, 연기, 무상, 무아의 원리 (1-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우리는 아무것도 없으면 인식해야 할 대상이 없으므로 인식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집착하지 않으나 눈에 무엇이 보이게 되면 그것을 보게 되고 인식기능이 작동해서 내 마음에 들면 갖고 싶은 욕심(탐貪)이 생기고 가질 수 없으면 화(진嗔)가 나며 화가 나면 여러 가지 형태의 어리석은(치痴) 행동을 하게 됩니다.  모든 물질이 공하다는 사실(순간 생겨나고 순간 없어지는 사실)을 보면 무집착이 되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무주無住) 걸림이 없어 물들지 않기 때문에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삼독심三毒心이 일어나지 않게 되며 자기중심적인(이기적) 생각대로만 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혹자는 사람은 적당한 욕심이 있어야 잘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욕심에는 적당하다는 기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욕심은 반드시 또 다른 욕심을 일으키는 속성이 있어 돈이 많으면 더 많은 돈을 가지려 하거나 아니면 권력을 탐내게 되고, 권력을 얻으면 최고의 권력을 얻으려 하거나 아니면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탐내게 됩니다. 그래서 `채우는 것으로서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우는 것(나눔)으로서 채워라’고 합니다. 공의 원리를 깨치게 되면 욕심(이기심)이 사라지는 대신 서원(이타심)이 생기게 됩니다. 욕심은 나와 관련되는 것만을 이익 되게 하여 내가 이룬 것의 종(노예)이 되기 쉬우나, 서원은 모두를 이익 되게 함으로 이룬 것의 주인이 되어 나누는 삶을 살게 하여 어디에서나 주인공이 되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양식을 진리라 하는데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진여는 말과 생각 이전의 것(인간의 개념적 사유를 초월한 것)이므로 우주를 창조한 그 무엇을 이르는 말입니다. 진여는 일심一心(한마음) 이라고도 하며 진여의 모습(상相)에는 공空(진공眞空)과 불공不空(묘유妙有)이 있으며 공은 번뇌가 사라졌기 때문에 번뇌공煩惱空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번뇌공은 번뇌가 다 지워져 텅 비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극(경계, 대상)이 오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때 나타나는 반응이 바로 불공입니다. 이것이 진여의 모습입니다. 마치 거울은 아무것도 없을 때는 어떠한 상相(모양)도 만들지 않으나 무엇이든 나타나면 비추이게 됩니다. 공을 체득한 사람(깨달은 사람)은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마음을 움직여 그 사람을 도와줍니다. 이때 가만히 있으면 깨친 사람이 아닙니다. 이때 도와주는 마음을 일으킨 것은 번뇌가 살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텅 빈 가운데 행하기만 한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진공에다가 물리적인 힘을 가하면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즉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닙니다.

 은 깨달음의 세계(출세간出世間)이기 때문에 불변不變을 의미함으로 진여의 바탕(체體)을 말하고 불공不空은 깨닫지 못한 중생계(세간世間)를 뜻함으로 인연 따라 변하는 것 즉, 이 세상(상相, 용用)을 말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없다는 것(진공眞空)은 모든 것이 묘하게 존재하는 것(묘유妙有)이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까닭으로 공과 불공不空은 바탕(체)은 같으나 그 작용만 다를 뿐입니다. 이 말은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중생)는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광양자(빛)가 입자-파동의 성질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입자가 파동이고 파동이 입자이듯이 말입니다.

(공을 다소 어려운 말로 나타냈으니 사유하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의 핵심사상인 공사상에 대해서는 여러 강의에서 말했습니다. 공사상은 어디까지나 공을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공에 대한 견해(공견空見)입니다. 그래서 공견을 내 것으로 삼아서 공이라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아야 됩니다. 공견에 빠지게 되면, 무엇이라 해도 “다 공한 것을” 이라고 하면 끝나는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고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공은 공성空性도 공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이 아닙니다.  색色을 떠난 공空이 따로 있고 공을 떠난 색이 따로 없습니다. 공과 색은 불이不二입니다. 이것은 생노병사를 떠나서 해탈, 열반이 따로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생노병사에 집착하면 색견色見이 됩니다.

 인연因緣이란? 흔히 인연과보因緣果報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는 말로서 만남, 조건, 환경, 관계라는 의미와 함께, 인은 어떤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을 말하고, 연은 인을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을 말합니다.  인연과보를 식물에 비유해 본다면, 씨앗(종자)은 직접적인 원인이므로 인에 해당하며, 그 씨앗이 자라는 과정을 통해서 만나는 모든 것들, 즉 흙, 물, 햇빛, 공기, 농부 등과 같은 수많은 간접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들을 총칭하여 연이라 하고, 인과 연의 결합에 의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과라 하고, 그 열매로 인해서 다른 것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하여 이익 되게 하거나 아니면 해를 끼치게 하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결국, 보는 과의 영향력에 의한 또 다른 과이기 때문에 한두 번으로 끝날 수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는 이것은 저것에, 저것은 이것에 연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모든 과보를 업이라고 합니다. 인연과보는 연기緣起, 윤회輪廻, 업, 자업자득의 원리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렇게 원리(진리)와 원리가 서로 통하는 것을 `원리의 연기(관계성)’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원리(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을 공부할 때도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 부분적으로라도 있으면 결국에는 그 하나로 다 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연과보는 뇌의 발달 정도에 따라 복잡성은 정비례하기 때문에 식물보다는 동물이 더 복잡하고 특히 가장 고등동물인 인간의 인연과보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우리는 인연이라 하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보통 인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확대해서 깊게 살펴보면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하는 순간부터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고 죽어서 흩어지는 순간까지 내가 모르고 만나는 것과 알고 만나는 모든 것이 나와의 인연입니다. 알고 만나는 인연은 주로 인간관계나 의·식·주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우리는 주로 이것에 집착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들은 크게 인식하지 못해서 잘 모르고 인연되는 햇빛, 공기, 물, 자연환경 등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인연일수록 그것이 없어졌을 때 그 소중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 공, 인연, 연기, 무상, 무아의 원리 (2-1) ***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

 

연기緣起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로서 모든 것은 서로 주고받는 상관관계로서 하나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법칙을 말하는 것이며, 연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로는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잡아함경 권15>

 

이 말은 ‘우주 만상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관계로써 존재할 뿐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진리)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의지하여, 또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즉 일체의 것은 모두가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며, 또한 그 조건만 없어지면 그 존재도 있을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간접의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로, 이를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는 술어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말은 단순한 두 가지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상의성相依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만유萬有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하나도 독립됨이 없이 서로 서로가 인이 되고 연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인연생기因緣生起(연기緣起)하고 있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 속에는 우연히, 홀연하게 또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의 원리로 구성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펼쳐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주와 나는 어떤 관계일까요? 내가 잘 살아야 120년 정도의 수명을 지니고 있으며, 내가 살아가기에는 지구도 너무 크다고 생각되어지는데 무한히 커다란 우주가 왜 필요하며, 137억년이라는 긴 시간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태양 에너지가 있어야하며, 그 외에 탄소, 산소, 질소, 철과 같은 92가지의 원소와 철보다 무거운 방사성 원소도 지열地熱의 원천으로서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주의 탄생 초기에는 수소(H)와 헬륨(He)과 약간의 리튬(Li) 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 가지 보다 무거운 원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태양 질량의 수백 배에서 수천 배에 이르는 우주 탄생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별들(초신성超新星, Supernova)의 폭발이 필요했으며, 초신성들은 태양이 생기기 훨씬 오래 전에 폭발하여 무거운 원소들을 우주에 뿌려놓고 사라졌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원소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에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모든 것들과 우리는 연기되어 그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시간적으로는 137억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며 공간적으로도 지금처럼 커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생겨날 때는 반드시 다른 것들과 연기되어 생겨나기 때문에 그때그때 가장 알맞은 것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최고의 고등 생명체가 가장 늦게 생겨난 이

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번 생겨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어지지 않고 또 다른 것들과 연기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공룡이 없어졌다고 알면 대단히 잘못 아는 것입니다.

비록 공룡이라고 하는 형태는 사라졌으나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공룡을 형성하고 있던 성분(소립자)이 다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것은 연기의 관계로 하나 되어 있다.’라는 것이 존재의 원리(진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만상은 둘이 아니다(불이不二), 다르지 않다(불이不異), 같다(즉화卽化).’

라고 하며,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라는 의미에서 `연기공緣起空이라 합니다.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변화를 말하기 때문에 진화는 연기관계를 가장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존 강에 살고 있는 식물들 중에 그들을 먹고사는 동물들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표면을 매우 거칠게 변화시키는 것은 연기에 의해 진화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에 서로 독립되어 존재한다면 진화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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