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세와 관점을 갖고 정진을 할 것인가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참선을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절을 한다든지, 독경을 한다든지, 주력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정진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건을 담는 박스와 같이 포장에 해당하는 겁니다.

 

 

이에 반해 정진의 내용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마치 흙탕물과 같아요. 가만히 놔두면 흙이 밑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물이 맑아 투명하게 비칩니다. 그런데 약간 흔들거나 자극을 주면, 밑에 있는 흙이 올라와서 전체 물이 흐려져 버립니다. 그래서 흐린 물에는 아무것도 비치는 게 없어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상태를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앎이 없거나 잘못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해서 치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무지 상태가 되면, 두 가지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욕심이 일어납니다. 내가 어떤 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욕구이지 욕심은 아닙니다. 욕구가 지나치게 커지면 욕심이 됩니다. 마음이 흐려져서 욕구가 지나치게 커진 것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둘째, 자기 생각이 옳다는 무의식적인 고집이 생깁니다. 고집이 생기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성내는 마음이라고 해서 진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탐심, 진심, 치심에 의해서 고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중에 치심, 어리석음이 근본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일어나더라도, 즉 마음이 흐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도, 행동의 결과로 인해 손해가 나는 줄 알면 그 행동을 멈춰야 합니다. 이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계율을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마음이 흐려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에 자꾸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맑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지도록 하려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물을 휘젓지 말고 가만히 놔두는 겁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면 졸려요. 그래서 멍청해지기가 쉽습니다. 마음이 흔들려서 앎이 없는 게 아니고, 고요한 데도 멍청해져서 앎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정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물이 맑은 상태가 유지되면, 갖가지 사물이 물에 비치듯이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아예 행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원리에 따라서 우리가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는 겁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흙탕물과 같은 상태가 바로 현재 우리의 마음이에요. 자극을 안 받고 조용할 때는 괜찮은데, 자극을 받으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무언가를 눈으로 보면 시각적 자극을 받아서 흔들립니다. 어떤 소리를 들으면 청각적 자극을 받아서 흔들립니다. 냄새를 맡아도 흔들리고, 맛을 봐도 흔들립니다. 손으로 만져도 부드럽거나 따뜻한 감촉에 갈애가 일어나거나 혐오가 일어납니다.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 갑자기 마음이 들뜨거나 경직되거나 슬프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는 마음이 흔들리는 줄을 알아차려야 해요. 그 흔들리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면 그 마음이 가라앉게 됩니다. 욕망이 일어날 때 욕망이 일어나는 줄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 욕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화가 일어날 때 그 화나는 상태를 알아차리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 세력이 점차 약해져서 고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심자는 가능한 자극이 없는 산속에서 정진을 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자극이 없어서 고요한 것은 완전한 수행은 아니에요. 자극을 받아서 흥분하는 것보다는 좋은데, 이 상태를 유지하려면 계속 산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방식으로는 병든 마음을 응급으로 치유할 수는 있지만, 건강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는 공간을 멸균상태로 해놓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건강입니다.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건강해지려면 면역력을 키워서 온갖 세균이 있는 환경에서도 내 몸이 그것을 이겨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진짜 건강입니다. 그래야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어디에서든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마음도 눈에 보이는 게 있어도 거기로부터 자유롭고, 귀에 들리는 게 있어도 거기로부터 자유롭고, 냄새에도 자유롭고, 맛에도 자유롭고, 감촉에도 자유로운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자기 마음의 상태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처음 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깊은 산속에서 정진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고 법의 이치를 알았다면, 다시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세상 속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점검합니다. 이것을 선에서는 보림이라고 합니다.

 

법의 이치를 깨치는 것을 초견성이라고 하는데, 초견성을 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많이 안 걸려요. 그러나 보림을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육조 혜능대사도 6개월 간 방아를 찧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보림을 하는 데는 16년이나 걸렸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초견성을 언제 했을까요? 깨달음의 장을 다녀왔다면 그때 초견성을 한 거나 같아요. 왜냐하면 깨달음의 장에서 대부분 법의 이치를 체득하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 보림을 하는 중이에요. 그런데 보림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빠져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모두 웃음)

 

 

보림을 하려면,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머슴살이도 하고, 생선가게도 하고, 하인 노릇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대를 받고, 핍박을 받고, 고통을 겪어야, 그런 가운데에서도 내가 자유로워지는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좋은 환경에서는 특별히 수행을 안 해도 누구나 다 잘 지낼 수 있으니까요.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아도 화상도 모례 장자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것처럼 여러분들도 보림을 하기 위해 지금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남의 집 남편이 되어서 아내한테 실컷 구박을 받아보고 있는 중이고, 아이들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한테서도 압박을 받아보고 있는 중이고, 회사에 들어가서 상사한테 온갖 꾸지람을 듣고, 이렇게 종살이를 한 번 해보는 중인 겁니다. 그 속에서도 내 마음이 여여해지는지 연습하러 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들이 이런 관점을 다 놓치고 사는 것 같아요. (모두 웃음)

 

이 속에서도 마음이 여여해졌다면, 이제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돌아오기 싫어서 그렇게 헤매고 사는 거예요? (모두 웃음)

 

 

남편이 하는 말, 아내가 하는 말, 가게에 온 손님이 하는 말, 직장 상사가 하는 말,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 수행자는 이런 말속에서도 내가 여여해지는가?’ 이렇게 살펴야 해요. 화가 나면 , 내가 또 놓치네하고 자기를 체크해봐야 합니다. 이게 바로 수행적 관점입니다.

 

저 소리에, 저 행동에, 이 상황에 내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이것을 딱 체크하는 겁니다. 고요함이 유지되고 안 되고는 부차적인 문제예요. 이 관점을 갖고 있으면 수행자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욕을 많이 해주면 해줄수록 연습할 기회가 많아지는 거예요. 하루에 한 번도 욕을 안 해주면 그 날은 연습을 못하게 되는 겁니다. 남편이 하루에 열 번씩 욕을 해주면, 아침에 놓쳐도 점심때 또 기회가 생기고, 점심때 놓쳐도 저녁에 또 기회가 생기고, 자기 전에 또 기회가 생기는 거예요. (모두 웃음)

 

 

이런 식으로 내가 마음공부가 되는지, 안 되는지 계속 점검해 나갈 때 수행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을 놓치면 수행적 관점을 놓쳤다이렇게 말합니다. 정진의 내용적 측면은 바로 이겁니다.

 

이 관점을 24시간 유지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모든 게 수행입니다. 대화하는 것도 수행이고, 일하는 것도 수행이고, 화를 벌컥 내는 것도 수행입니다. ‘, 내가 놓쳤구나하고 체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건 아무렇지 않은데, 이해관계가 걸린 것은 잘 안 된다.’

 

이해관계가 걸린 건 아무렇지 않은데, 자존심이 상하는 건 못 견딘다. 아직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하구나.’

 

남편에게는 되는데, 아이한테는 안 된다.’

 

이렇게 나는 어떤 것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일상이 다 수행입니다. 참선하고 염불하고 절하는 것만 수행이 아니라 일상이 수행입니다. 꾸준히 정진한다는 것은 이 관점을 늘 유지하고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바깥에서 자극이 얼마나 강하게 들어오느냐, 내 업식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서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해요. 그러나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 않으면 실패를 반복하다가 결국 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자전거를 배울 때 넘어지는 횟수가 많아지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이때 수행적 관점을 놓쳐버리면 안 돼요. 관점을 놓쳐버리면 경계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러나 경계에 휘둘리더라도 내가 경계에 휘둘리는 줄을 알고 자기중심을 잡고 있으면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지금 일상 속에서 보림을 하기 위해 파견 근무를 나온 겁니다. 이렇게 보림을 하고 있다는 관점을 딱 가지고 있으면, 경계가 강할수록 자신에 대한 체크가 더 깊이 됩니다. 상대가 세게 나올수록, 환경이 나쁠수록, 내 안에 더 깊은 무의식이 반응합니다. 오늘 3000배를 하면 육체가 힘들어요. 육체가 힘들면 내 속에 있던 업식이 여기에 반응합니다.

 

부처님이 이런 고행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완전히 고행이네. 사람을 죽이려고 이러나?’

 

이렇게 온갖 것에 의심이 듭니다. 힘이 들면 들수록 자기 속에 있던 분별이 끝없이 올라오게 돼요. 그럴 때 자기를 봐야 해요.

 

, 내가 몸이 힘드니까 이런 상황까지도 다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이는구나

 

이렇게 연습을 자꾸 해나가야 해요. 절을 장시간 하는 이유는 육체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3000배를 하다 보면 3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절하는 모습은 반듯한데, 속은 부글부글 끓습니다. 절을 하면, 땀이 나고, 다리가 아프고, 옷이 젖고 하니까 짜증이 올라오거든요. 절을 하느라고 마음이 불편해져 있는데, 옆에서 방귀를 뀐다든지, 문을 쾅 닫고 나간다든지, 이렇게 자극을 주면 그쪽으로 마음이 확 쏠려서 시비를 일으키게 되죠. (모두 웃음)

 

 

절을 하는 것은, 첫째, 건강에 좋아요. 둘째,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는 의지력도 키울 수 있어요. 셋째, 자기 속에 내재해 있던 업식을 지켜보고,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할 수 있어요.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입니다. 몸의 피곤함이라고 하는 외부의 자극이 주어졌을 때 나에게는 어떤 분별이 올라오는지 살펴보고, 거기로부터 내가 편안해져야 해요. 이를 악물고 참으면 안 되고, 그 상태에서도 마음이 편안해져야 합니다. 편안해지지 않으면 편안해지지 않는 자기를 봐야 합니다. 그래야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게 돼요.

 

젊은 사람들은 주로 의지력이 약하니까 의지력을 키우는 것을 중심에 놓고 해도 돼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3000배는 다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 그걸 극복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그러나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젊은 사람들처럼 의지력 테스트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젊은 사람들을 쫓아가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오히려 자기를 관찰하고 알아차려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젊은 사람은 이러다가 몸에 고장이 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분별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넘어서야 해요. 나이 든 사람은 끝까지 해내겠다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해요. 이렇게 사람마다 건강상태에 따라 각자 수행의 목표를 다르게 세워야 합니다. ‘나는 의지력이 약해서 항상 중간에 그만둔다라고 할 때는 그걸 극복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고, ‘나는 늘 욕심을 내서 나중에 후회를 한다라고 할 때는 욕심내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으면 돼요.

 

 

절을 하다 보면 과거에 잘못했던 일, 상처 받았던 일, 이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이때 그 생각에 빠지면 안 돼요. ‘, 내가 이런 상처가 있었구나하고 흘려보내야지 골똘히 그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골똘히 생각하면 힘이 덜 들긴 해요. 그러나 힘이 덜 드는 것에 목표를 두면 안 됩니다.

 

오늘 3000배를 하는 목적은 지난 3년 동안 정진한 힘을 모아서 3000배를 해냄으로 인해 의지력을 키우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목적은 정진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처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상처가 떠올라도 마음이 흥분되거나 경직되거나 미워지지 않고, 그것을 그냥 바깥 하늘을 보듯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을 중심에 놓고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정진할 때는 환경 탓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정진은 환경을 외부 자극으로 보고, 그 자극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지느냐를 연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열악한 환경에서 정진을 할수록 정진이 잘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내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적 관점을 딱 가져버리면 환경은 더 이상 논하지 않게 돼요.

 

그래서 3000배를 한 경험이 참 중요해요. 일상으로 돌아가서 가끔 누가 잔소리를 해서 듣기가 싫을 때 잔소리 듣는 게 나을까, 3000배 하는 게 나을까?’ 이렇게 기준점이 생기게 됩니다. ‘, 그래도 잔소리 듣는 게 낫다이렇게 생각이 되기 때문에 웬만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이렇게 힘든 3000배도 했기 때문에 잔소리 들어주는 건 별로 안 힘들어요. 사로잡히면 정말 힘든 일이 되는데, 거기로부터 벗어나면 전혀 힘든 일이 아니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하나 극복하면 삶의 기준점이 생겨요. 비행기를 장시간 타서 힘들 때 시골에서 트럭 타고 몇 시간을 갔던 때를 생각할 수 있게 되고, 트럭 타고 가는 게 힘들 때는 몇 시간을 걸어서 갔던 때를 생각할 수 있게 돼요. 이런 경험을 통해 낮은 기준점을 갖고 살아야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유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렇다고 항상 어려운 곳에서만 살아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경험을 하면 삶의 자유가 훨씬 더 커진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 3000배 정진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모두 박수)  <수련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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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비법상 法相非法相이여

개권부성장 開拳復成掌이로다.

부운산벽공 浮雲散碧空하니

만리천일양 萬里天一樣이로다.

법상과 비법상이여!

주먹을 펴니 다시 손바닥이로다.

뜬 구름이 푸른 하늘에 흩어지니

만리의 하늘이 온통 푸른 하늘뿐이로다.

 

운문 스님이 언젠가는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광명을 가지고 있는데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깜깜하고 어두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어느 것이 그 빛이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대신 말하였습니다.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니라.”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

 

요즈음 납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은 연구하지 않고 다만 조사의 말씀만 궁구하니 조사의 말씀이 곧 부처님의 말씀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간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불법을 비난하게 되는 결과를 만듭니다.

운문 스님이 ‘광명이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니라.’고 하였는데 평소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만일 본다면 ‘볼 때는 어두컴컴하여 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광명이 되겠습니까? 이미 광명이 되었다면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조사의 말은 궁구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은 궁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이는 ‘나는 부처님의 말씀도 쓰지 않고, 조사의 말씀도 쓰지 않고, 단지 스스로의 말만을 쓴다.’고 하는데 조사의 말씀이나 부처님의 말씀도 쓰지 않거늘 다시 스스로의 말은 쓸 일이 뭐 있겠습니까?또 어떤 이는 말합니다.

“나의 종宗은 말이 없다. 언어를 쓰지 않는다.”라고 하니 말이 있어도 옳지 않거늘 하물며 말 없음이겠습니까? 잠꼬대일 뿐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처님 말씀으로 한 축을 삼고 조사의 말씀으로 한 축을 삼고, 말 없음을 한 축으로 삼고 말 있음으로 한 축을 삼고, 망상으로 한 축을 삼고 망상 없음으로 한 축을 삼아야 하니, 이렇게 한다면 “진실로 볼 때에 컴컴하여 보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운문 스님은 ‘좋은 일도 아예 없느니만 못하느니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또 운문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천지가 기우뚱하니 일월성신이 온통 깜깜하다. 어떻게 말하겠느냐?”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대신 말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아예 없느니만 못하느니라.”

 

또 어느날 운문스님께서 납자에게 물었습니다.

“등불을 보느냐?”

“다시 볼 것이 없습니다.”

“원숭이를 노주露柱에 묶어 두었군.”

대꾸가 없어 대신 말했습니다.

“그대의 불법에 대한 깊은 마음은 잘 알겠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

 

조주 스님도 이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법당을 지나가다가 한 납자가 예불 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한 대 때렸습니다.

이에 그 납자가 발끈하여 말했습니다.

“예불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다.”

 

종문의 소의경전인 『금강경』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시고是故로 불응취법不應取法하며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이니라.

이시의고以是義故로 여래상설如來常說키를 여등비구汝等比丘여지아설법知我說法은 여벌유자如筏喩者이니 법상응사法尙應捨 커늘 하황비법何況非法이랴.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했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과 같음을 아는 자는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따라서 공부인이라면 법의 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미산만큼의 유견有見을 일으켜서도 안 되겠지만 겨자씨만큼의 무견無見을 일으켜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 스님과 조주 스님은 항상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산승이 오늘 법문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운문 스님은 광명을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이라고 해 놓고 또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선사께서는 평소에 법문을 할 때는 한 구절로 주로 대답을 했는데 왜 여기서는 두 구절로 말했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니라.”는 구절은 우리들을 위하여 간단하게 한 가닥 가느다란 방편의 길을 터 놓고서 알도록 한 것입니다.

영리한 자라면 이를 듣자마자 눈썹을 치켜 세우고 바로 떠나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운문 스님은 납자들이 여기에 집착할까 봐 두려워하여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여전히 납자들을 위하여 자취마저도 쓸어 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밝은 빛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눈을 똑바로 뜨고 ‘어디가 부엌이며 창고이며 어디가 삼문이냐?’고 말들을 하지만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는 눈으로 보는 것에도 있지 않고 또한 경계에도 있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지견이 끊기고 이해득실을 망각하여

말끔히 훌훌 벗고 텅텅 비어 말끔한 각자 자기자신 속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심월고원 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 光呑萬象이로구나.

마음의 달이 호젓하게 밝으니

광명이 온갖 것을 삼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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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진짜로 믿으면 천당에 가야 돼요? 지옥에 가야 돼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중생의 죄를 대신하는 거였잖아요.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지옥에 가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행동을 할 때 그 가르침과 일관성이 있잖아요.

 

그러니 우선 이 가르침이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이치를 깨닫고 나면 우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행동으로 다 옮겨지는 건 아니에요. 아직 체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과보가 따릅니다. 이것이 인연 과보(因緣果報)입니다. 이 이치를 알면 껄떡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모두 내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고, 돈을 갚기가 싫으면 앞으로는 돈을 빌리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벌을 받아야 하고, 벌을 받기 싫으면 다음부터는 물건을 훔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매사에 자기가 선택을 하고 자기가 결과를 책임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살지 않고 그저 ‘한 가지 소원은 무조건 들어준다’는 말에 혹해서 쌀자루를 짊어지고 불상 앞에 올려놓고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고 비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행동이에요. 비는 것이 나쁜 행동은 아니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공부를 했으니 이치가 어떠한지 대충은 알겠죠?”

 

 

“그런 관점을 분명히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이 이치를 아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래도 여러분들은 정토불교대학을 다녀서 이치를 짧은 시간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렇게 설명을 한 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깨달음의 장, 인도 성지순례, 명상수련이 어떤 배경에서 마련되었는지 각각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불교대학 학생들이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다양한 질문 중 한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할 때 자신의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지난주 불교대학 수업에서 자신이 법을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의 주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경(經)과 율(律)에 견주어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제 자신을 보면 저는 습관의 덩어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의지하라 하실 때 나 자신의 무엇에 의지하라는 말씀이신지 궁금합니다. 여기에서 업식인 나와 의지의 대상인 나는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기보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요점 정리를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뜻을 헤아려보면,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남편에게 의지하고, 나이가 더 들면 자식에게 의지합니다. 스승에게 의지할 때도 있고, 친구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부처님이나 하느님께 의지하기도 합니다. 모두 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자를 중생이라 합니다. 의지하지 않는 자가 곧 부처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독립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등명(自燈明),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자립하라는 의미입니다. 스님을 찾아와서 ‘돈을 빌려야 됩니까, 빌리지 말아야 합니까?’ 또는 ‘돈을 갚아야 합니까, 갚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물을 게 아니에요. 이치를 깨달으면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하고, 갚기 싫으면 안 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돈을 빌릴 때 대개 빌리는 것만 생각하는데 갚을 일도 미리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내 수입은 100만 원인데 다른 사람에게 매달 100만 원을 빌리면 마치 내 수입이 200만 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빌린 100만 원들은 쌓여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빌리는 돈은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지금 좋은 것만 보고 결정을 하면 안 돼요. 나중에 큰 과보를 받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모르고 돈을 빌리게 되면 나중에 갚을 때 힘이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힘들다고 해서 그게 또 나쁜 건 아닙니다. 이번에 힘든 것을 알았으니까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조금 궁하게 살더라도 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훈련을 몇 번 하면, 이제 이런 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자등명에서 ‘나(自)’라는 용어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곧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립하라는 의미입니다.

 

 

등명(法燈明), 법에 의지하라 


물론 이런 연습을 통해 점차 자립된 삶을 살고, 필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더라도, 그 결정이 어리석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뭔가 필요한 결정들을 스스로 하긴 하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스스로 결정을 하긴 하는데 나의 주관이나 무지에 빠져서 결정을 할 때는 엉터리로 결론을 내버립니다. 이런 부분을 경계하기 위해 ‘자등명’과 함께 ‘법등명’을 덧붙여 놓은 겁니다. 법에 의지해야지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 기준을 두라는 뜻입니다. 막연히 부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판단이 부처님의 가르침, 즉 이치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지금 질문한 내용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이치에 맞도록 하라는 말이 ‘법등명’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들을 게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자등명’입니다.”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있을 때 지금처럼 즉문즉설 시간을 통해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미웠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미워할 필요가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정도 물어본 다음에 이치가 파악이 되면 차츰 물어볼 일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스님한테 결혼에 대해 물으러 온 사람이 스님의 의견을 듣고 내린 결정이 더 유리했다는 것을 알고, 그다음에는 집 사는 문제도 물어보고, 집 파는 문제도 물어보고, 아이 키우는 것에 대해서도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 웃음)

 

이렇게 되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앞으로 물어봐야 할 것이 더 많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벌써 자기도 모르게 스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의 법문은 자립을 돕는 가르침인데 도리어 법문을 통해 자립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1500여 개의 영상이 있는데, 5개를 보든 100개를 보든 보면 볼수록 차츰 자립의 길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스님에게 질문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거나, 비슷한 주제의 유튜브를 찾아보지 않고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처음에는 스님에게 도움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님에게 의지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것은 가르침과 정반대로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금강경에서는 뗏목에 비유합니다. 강을 건널 때 뗏목의 도움을 얻었는데, 강을 건넌 뒤에도 그 뗏목을 계속 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지팡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이 지팡이에 의지하면 걷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리가 다 낫고 나면 지팡이를 버려야 되는데, 계속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다리가 멀쩡한 사람인데 지팡이를 계속 가지고 다니니 결국 멀쩡한 사람이 다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됩니다.




○적반하장 [賊反荷杖]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였다

직진 차로가 길게 늘어서 정체가 심하다

신호를받고 진행을하는데 약삭빠른 놈이 우회전 차로에서 갑자기 내앞으로 끼어들어 진로를 방해하고 먼저 사거리를 건너간다

위험을느껴 무례하다는 뜻으로 라이트를

상하로 깜박 거리는 신호를 보냈다.

미안하다고 깜박이로 깜박 깜박 해주면 될텐데 일부러 부레이크를 밟고 차를 천천히 가면서

엿 먹일려고 보복운전을한다.

 

하는짓이 얄미워 계속 전조등을 깜박거리며

비춰 주었더니 차를 도로 가운데 멈춰 세우고 젊은놈이 차에서 내려 문도 열어 놓은체 험상궂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왜 깜박거려'' 소리를 지르면서 째려보며 닥아온다.

무슨 일이 생길것 같은 긴박한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간다.

이걸 사건을 만들까 하는 생각이 떠 올랐지만 상대를보니 겸손과 양심이 워낙 빈곤해 보였다. 자잘못을 따져봤자 소귀에 경읽기가 될것같아

포기하기로했다. 그리고 뒤에선 밀려있던 차들의 경적 소리가 요란하여 빨리 마무리를 짓는게 상책 일것 같았다.

 

손자병법에 ''상대를 보고 나를알면 백전백승 한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나를 내려 놓기로 했다. 서있는 그놈을 쳐다보고 창문을 내리면서 웃는 얼굴로 미만합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그놈이 보기에 의외 였던지 아니면 내가 생각보다 늙어 보였던지 아무튼 말없이 돌아서서 차를타고 휭 하고 가버린다. 일단은 위기를 모면 했지만 마음속에 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개자식 싸가지가 바가지 같은새끼 지가 뭘 잘 했다고 큰 소리치며 적반하장 지랄병이냐 등 욕설을 하며 가버린 그놈을 향해 원망을 했다.

 

''저런놈은 어쩔수없다,누구도 고칠수없다''라고 생각하면서 내 자신에게 내가 시비를 만든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냥 상대를 있는그대로 인정하고 시비를 만들지 않는것이 ''불취어상 여여부동''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원인과 원리 그리고 이치를 알고 적절하게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것이 현명한 삶이

이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잘했다 니가 잘못했다 서로가 잘했다고 따지고 시비를 가린다는것은 서로가 자기를

내 세우는 고집을 부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아집이며 아상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모든것은 연기이니까 있는그대로 실체가

없는 실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시비를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내 개념을 세우지 말고 ''있는그대로 보라''

한마음 한생각이 곧 중생도 되고 부처도 된다

상을 지으면 중생이요 상을 여의면 부처다

그놈이 나뿐 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바빴던지 아니면 습관이 그랬던지 그럴수도 있는것이다. 내 입장에서 내 생각데로 그를 나쁘다고 상을 지었던 것이다.

그놈 때문에 오늘 마음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와 나는 말미암아 인연 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니까 아까 미웠던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처처불상 사사불공''

살펴보면 모든게 다 부처이며 공부거리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생각 돌이켜 자신을 볼수있는 회광반조가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갈수잇는 길손의 안내판이 되여 줄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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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에 짜증이 많이 납니다.”



2019.11.24 정토불교대학 졸업 수련 3차_부산 울산, 경남

 

안녕하세요. 오늘은 새벽 일찍부터 정토불교대학 졸업 수련 특강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은 문경 수련원에서 특강을 해주기 위해 새벽 3시에 아침을 먹고 4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차가 없는 새벽길을 2시간 달려 오전 6시가 다 되어 문경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죽비 삼성에 함께 특강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 울산, 경남 지역에서 480여 명의 불교대학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문경 수련원의 시설이 열악한 편인데, 스님은 불편한 상황조차도 수행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큰 방에 처음 자봤죠?”

 

“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한 방에 처음 자봤죠?”

 

“네!”

 

“여러분은 하루아침에 인생에서 신기록을 많이 세우셨어요. 정토회는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겨울에도 화장실 밑에서 성능 좋은 에어컨 바람이 나오게 해 놓았어요. 엉덩이가 시원했죠? (모두 웃음)

 

 

이렇게 같은 조건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하나의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고통이나 어려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큰 방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큰 방에서 잘 수 있도록 한 겁니다. (모두 웃음)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코 고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자는 경험도 해봤습니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 재미있잖아요. 혼자서 지내거나 둘이서만 지낼 때는 다양하게 코 고는 소리를 듣기 어렵지만, 여러 명이 같이 자면 밤새도록 다양한 음악을 연주해 주잖아요. 그런데 본인만 몰라요. (모두 웃음)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는 것을 자꾸 깨닫게 되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 않고, 혼자 자도 좋고, 여럿이 자도 좋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생이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혼자서는 외로워서 못 지내겠다고 하고, 둘이 있으면 귀찮아서 못 지내겠다고 하고, 방이 크면 청소하기 힘들다고 불평하고, 방이 작으면 너무 좁다고 불평합니다. 자꾸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삶이 힘들어집니다.

 

세상이 마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가만히 보면 세상은 우리를 귀찮게 할 의도도 없고, 우리를 행복하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봄에 꽃피는 게 우리를 즐겁게 하려고 피는 게 아니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게 우리를 슬프게 하려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여름에 더운 게 우리가 수영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겨울에 추운 게 우리를 괴롭히려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것대로 그냥 환경이 만들어질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봄에는 꽃구경할 수 있어서 좋고, 여름에는 수영할 수 있어서 좋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고, 겨울에는 스키를 탈 수 있어서 좋다!’

 

이렇게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삶이 덜 괴롭고 행복감이 커집니다. 반대로 주어진 조건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괴로움이 커집니다.

 

 

행복하게 살 것인지, 불행하게 살 것인지는 개개인의 선택입니다. 어차피 살아가는 인생인데 조금 덜 괴롭게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누가 행복하게 살라고 해서가 아니에요. 스스로가 행복하게 살 길 바라잖아요. 본인 스스로가 덜 괴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잖아요. 덜 괴롭고 행복하게 살려면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됩니다. 괴롭게 살고 싶으면 사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돼요.”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으니, 금세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이어서 스님은 지난 1년 동안 불교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총정리를 해주었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 부처님의 일생, 근본불교, 불교의 변천사에 가르치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한 후 “지식에 그치면 안 되고 반드시 몸과 마음에서 체험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면서 깨달음의 장, 인도 성지순례, 명상수련, 경전반에서 더 체험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말하니까 지금 졸리죠? 이제 질문을 받을게요.”

 

 

오늘은 11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중 첫 번째 질문자는 ‘무아’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다 보니 50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무아의 핵심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참 나를 찾는 것과 ‘무아(無我)’는 상충되는 것 아닌가요

 

“선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 용어는 ‘참 나’, ‘진여(眞如)’, ‘본래면목(本來面目)’, ‘주인공’ 등의 다른 말로도 쓰입니다. 불교대학에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불성(佛性)’과 같은 말도 배웠습니다. 이런 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無我)’와는 상충되는 것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고 아무리 많이 배워도, 실제로 밖에 나가서 관찰을 해보면 여전히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마찬가지로 무아에 대해 아무리 많이 배워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자아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무아(無我), 즉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는 말은 ‘작용은 있지만 그 작용의 실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더 발달하면 사람과의 대화도 가능해질 거예요. 사람이 시키는 일도 다 하게 될 겁니다. 심지어 사람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일도 가능해질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인공지능의 실체가 있을까요? 인공지능마다 그 속에 다이아몬드 같은 게 있어서 그것을 인공지능의 실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을 분해해보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봇은 부속품들의 결합일 뿐이고, 거기에 깔린 정신작용은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프로그램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신작용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작용 속에 고정 불변한 실체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식이라고 하는 작용은 존재하지만, 그 속에 ‘나’라고 할 만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이것이 무아입니다.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늘 변화하고 작용하지만, 그 속에 ‘자기’라고 할 만한 고정 불변한 실체가 있는 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늘 부모님을 따라서 구걸을 했던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걸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을 겁니다. 반면 어릴 때부터 늘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 일을 했다면 그 사람은 은연중에 다른 사람의 물건이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또 어릴 때부터 늘 사냥을 다닌 사람은 산에 있는 짐승은 언제든지 잡아먹어도 된다고 인식을 할 겁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듣고 배운 대로 프로그램이 깔리는 겁니다. 전생에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면서 살도록 정해져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다만 어릴 때부터 그런 프로그램이 깔렸을 뿐입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어릴 때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바꾸기가 쉬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천성적으로 도벽이 있다’, ‘천성적으로 살심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진단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올 인공지능도 어떤 프로그램을 까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하게 될 겁니다.

 

 

붓다는 정신작용도 이런 원리에 의해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이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업식’, ‘까르마’입니다. 업식은 형성된 것이지 천성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더 발달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원리적으로 모순점이 없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집에서 딸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어릴 때 고아원에 맡겨져서 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릴 때 친척에게서 성추행을 당한 사람도 있고, 자식이 먼저 죽는 부모도 있고, 사업이 망하는 사람도 있고, 몸을 크게 다치는 사람도 있고,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지금 살아있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네.”

 

 

“그런데 당사자에게 가서 한 번 물어보세요.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람에게 가서 ‘당신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제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한 사람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 집착되어 있으면 불행하게 살게 되는 거예요. 그 일을 놓아버리면 그때부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괴로워해야 하는 실체가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 빠지면 괴로움이 작동을 하지만, 괴로워해야 할 실체는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해야 하는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어떤 일에 사로잡히고 집착해서 괴로움에 계속 빠져있을 뿐이에요.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은 누구나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다’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괴로움이 없는 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해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을 ‘붓다’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괴로움이 없는 사람인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사람은 불성이 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실제로 붓다가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사위성에 사는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이 질문을 하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은 사위성에 살기 전에 어디에서 살았습니까?’

‘저는 왕사성에 살았습니다.’

‘그럼 사위성에서 왕사성으로 가는 길을 잘 아십니까?’

‘그럼요, 요즘에도 자주 오고 가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이 왕사성에 가는 길을 물어보면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네,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왕사성에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 그 사람들 모두가 왕사성에 반드시 도착합니까?’

‘그렇지는 않죠.’

‘왜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알려준 대로 가는 사람은 잘 도착하겠지만, 그 길을 가지 않거나 알려준 대로 가지 않는 사람은 도착하지 못합니다.’

‘저의 가르침도 그와 같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조리 있게 잘하십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다 보면 표현이 차츰 다양해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다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

‘열반을 증득하는 사람은 붓다이니, 모든 사람은 다 붓다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다 붓다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불성(佛性)’이라는 용어를 쓰다 보니 또 자연스레 우리 몸속에 구슬과 같은 불변하는 실체인 불성이 있어서 마치 그것을 발견하면 부처가 된다는 식의 오해를 하게 된 거예요. 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무아(無我)가 아닌 유아(有我)의 관점입니다. 이런 과정을 잘 살펴보면 어떻게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꾸 ‘나만의 나라고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분석을 많이 하다 보면 결국 유아(有我) 사상, 즉 무언가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이 우리의 관찰과 부합하니까 확 다가오는 것과 같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자기의 경험과 다르기 때문에 잘 다가오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해도 일반 대중은 늘 자기의 경험을 통한 인식에 기초하기 때문에 인식의 오류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불교는 역사 속에서 때로는 종교의 길을, 때로는 철학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가 생겨나게 된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강연을 시작한 지 3시간이 경과하고 끝무렵에 일어선 질문자는 평소에 짜증이 많은데 짜증을 줄이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짧고 재미있는 대화에 웃음이 많이 터졌습니다.

 

짜증이 일어났을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정토불교대학에 다니면서 화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큰 일 앞에서는 나를 돌이키면서 ‘이것이 내 인식의 오류이구나’ 하고 알아차리지만, 사소한 일 앞에서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미움이 생기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면 또 제 자신에게 불만이 생깁니다. 그럴 때 중도를 떠올리면서 제 욕구를 따라가지도 않고 억제하지도 않는 제3의 길을 가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 어떻게 중도를 일상생활에 적용해 나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날려고 하네요. 저도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짜증이 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저보다 더 앞서가려고 하네요.” (모두 웃음)

 

 

큰 웃음과 함께 스님의 답변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원리는 이렇습니다. 욕구가 일어날 때 ‘이걸 해야지’ 하고 따라가지도 말고, ‘안 해야지’라고 억압하지도 말고, 그저 ‘욕구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무언가 먹고 싶을 때, ‘먹어야지’라는 결심도 하지 말고, ‘안 먹어야지’라는 결심도 하지 말고, 다만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욕구를 알아차리고 가만 놔두는 거예요.

 

욕구가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그냥 ‘내가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주문 외우듯이 하라는 게 아니에요. 짜증이 날 때 ‘아, 지금 짜증이 올라오네’ 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겁니다.”

 

“저는 남편에 대해 짜증이 많이 올라오는 데요. 그럴 때 ‘짜증을 안 내야지, 저 사람을 이해해보자’라고도 하지 말고, ‘내 마음이 이런데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면 안 될까’하고 내 마음을 확장시키지도 말고, 그저 ‘짜증이 올라오네’라고만 하면 될까요?”

 

“짜증이 날 때 ‘짜증이 나는구나’ 하고 짜증이 나는 줄을 알 뿐입니다. 짜증이 나는 것을 안 나게 하려고 억압하지도 말고, 짜증이 난다고 해서 드러내지도 말고, 그냥 짜증이 날 때 ‘지금 짜증이 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명상을 할 때 알아차리는 방식이고, 깨달음의 방식은 조금 달라요. 깨달음의 방식은 짜증이 날 때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겁니다. 짜증이 나는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내가 옳고, 상대는 그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때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고 사실대로 알아차리면 내 짜증이 사라집니다. 짜증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때는 원인 규명을 하지 말고, 그저 짜증이 올라오는 나 자신에게만 깨어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짜증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나아가 짜증이 왜 날까를 탐구해보면, 결국 ‘내가 옳고, 상대는 그르다’ 하는 생각에서 마음이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인 거예요.

 

‘남편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짜증은 사라집니다. 만약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왔다면, ‘왜 술을 먹고 오니?’ 이 생각 때문에 짜증을 내게 되는데, 그때 그냥 ‘내가 지금 짜증이 나는구나’하고 상황을 알아차리면 시간이 흐르면서 짜증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짜증이 영원히 가지는 않기 때문이에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짜증이 왜 나는지 원인을 규명해보면, 남편이 술을 먹고 온 것이 원인이 아니라 ‘남편이 술을 안 먹고 왔으면 좋겠다’ 하는 내 욕구가 짜증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요. 남편이 술을 먹고 오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아, 남편이 술을 먹을 만한 무슨 일이 있었겠지.’

 

그러면 짜증이 안 일어나요. 깨달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질문자가 밝게 웃자 청중이 박수를 보냅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지옥에 가겠다고 하셨는데요.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서암 스님께서 마음이 청정한 자가 스님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아’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가요?

정토행자의 서원을 읽어보니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주생의 요구에 수순 하는 보살이 되고자 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어떻게 중생의 요구에 수순 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내가 지은 죄를 소멸할 수 있나요?

어제 졸업 수련에서 처음으로 300배를 해보았습니다. 108배와 300배의 차이를 잘 모르겠어요. 300배를 하면 뭐가 좋은가요?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스님은 명상을 할 때 머리를 비우시나요? 아니면 사업적인 구상이나 복잡한 문제들을 정리하시나요?

소승불교는 계율과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대승불교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배웠습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저는 결정장애가 있습니다. 저에게 왜 결정장애가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깨달음에 대해서 많이 듣는데, 아직도 깨달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중도를 깨달으셨다고 하는데, 깨달음이 곧 중도인가요?

저는 평소에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인데요. 중도를 깨우치면 이런 성격을 고칠 수 있나요?

지소미아 문제, 미국의 방위비 증가 요청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요?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어두운 새벽에 강의를 시작했는데, 답변을 모두 마치고 나니 밖이 훤하게 밝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인 한일 관계와 지소미아, 미국의 방위비 증가 요청에 대한 대응법을 묻는 질문에 대해 답변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다만 사분오열된 정치 상황 속에서 국민들만큼이라도 일치단결된 행동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당부했습니다.

 

 

“현재의 갈등 상황은 미국이나 일본이나 우리 정부나 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거예요. 소나기가 강하게 내릴 때는 조금 피해 가면 되고, 필요하면 우산을 쓰고 갈 수도 있는 겁니다. 다만, 국민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정부가 중심을 잡고 여야 합의를 이끌어내고,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해야죠. 그런데 야당 입장에서는 자기들도 국내 정치의 입지를 넓히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니 국가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국내 정치에서는 좀 양보를 해야 돼요. 그런데 국내 정치는 야당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또 야당의 도움을 좀 얻고 싶은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은 협조를 안 해주고, 미국 편이나 일본 편을 드니까, 지금 나라가 사분오열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이라도 일치단결을 해줘야 합니다. 물론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일본 여행 안 가고, 일본 제품 안 산다고 해서, 얼마나 영향이 갈까 싶을 겁니다. 그러나 칼을 한 번 빼들었으면 최소한 일 년이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참여해주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런 운동에 동의를 안 했다 하더라도 일본이 한국을 우습게 보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3개월을 못 간다’

 

이런 소리를 듣게 돼요. 그러니 내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나 일본 여행 안 가기 운동에 동의를 안 했다 하더라도 국가의 이익을 생각해서는 좀 동참을 해줘야 합니다. 아주 필수적인 물건이 아니면 일본 제품을 사지 않는 게 좋아요. 지금 일본 제품이 아니면 도저히 못 사는 수준이에요?”

 

“아니요.”

 

“코끼리 밥통 대신에 쿠쿠 밥통 쓰면 되잖아요.” (모두 웃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조금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동참을 해줘야 합니다. 저는 이런 운동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에요. 그러나 국가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나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동참해주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큰 박수와 함께 3시간 30분 동안의 강연을 모두 마쳤습니다.

 

 

문경 수련원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선유동 정토 연수원으로 향했습니다. 선유동에서는 어제에 이어서 전국 대의원 회의가 2일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오후부터 대의원들은 스님과 함께 정토회의 10차 천일결사 사업 방향과 대의원회의 운영에 대해 연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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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택시를 시작해서 무사고 16년만에 서울시 고건 시장으로부터 개인면허를 받아 2004,6, EF소나타로 처음 개인택시를 시작해서 2012,4월 Yf소나타로 바꾸어 90개월을타고

2019,11,LF뉴라이즈 소나타로 바쿠면서 조도

나조에서 라조로 바꿨다.이제 남은생 부부가

같이 여행도다니면서 지낼수 있는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동안 세월이 변한만큼 자동차도 많이 발전했다

운전하기 편하게 모든게 전자식으로 현대화 되여있어 성능도 탁월하게 좋아졌다

벌써 택시경력 31년째다

40대 젊은나이에 노후를 위해 개인면허를 받겠다는 포부로 영업용택시 회사에 뛰어들어 운좋게 무사고 16년만에 마지막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하게 되여 지금까지 경력 15년째 하고있다

어렸을적 시골에서 자랄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신작로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자동차를 보면서 나도 운전기사가 되여야겠다는 꿈을 갖게되였다

지금은 운전 못하는 사람이 별로없을 정도가

되였지만 50~60년전에는 자동차가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때 그시절 우리 고장 부안에서

전주 칠보 산외로 다니던 여객버스 차량번호 34번과 61번 그차를 타고 신태인까지 통학을 하면서 운전수 아저씨의 멋스러움이 부럽기도하고 신비스럽게 보였다

그후 세월이 지나서 1979년 인천에 살면서

경기 1종면허를 취득해었다. 1987년 이웃에서 폐차시키려는 차를 8만원에사서 서울시 지도를 가지고 몇날몇달 길을 익혀 가며 연수를 해가지고 장안동에 현대택시에 지인의

소개로 입사를해서 16년동안 무사고 근무를 하면서 개인면허를 타가지고 지금껏 택시로 생활을 하면서 자식들 키우며 가르치고 먹고 살아왔다

나는 이 직업이 괜찮고 좋다

어릴적 어디가서 사주를보면 꼭 철(쇠)을 다루는일을 하게 될거라고 했다. 내 팔자인지

하고싶어서 하는일이라서 그런지 싫지가 않다.

이사람 저사람 인연따라 만나서 가고오고 하루하루 나의 일정은 정해져 있지를않다

내나이 71세 앞으로 몇년이나 택시를 하게 될지 모르나 능력이 (건강) 되는한 할수 있을때까지 천직으로 알고 하고싶다.

돈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다

벌리면 벌리는데로 안되면 안되는데로 그냥 하루를 운전하며 다니는게 좋다.

늘 다른사람과 다른 풍경 그리고 다른길을 누비며

다니는것은 즐거운 일이다.

때로는 도로가 막혀서 답답 할 때도있지만 이것도 다 연기일진데 어찌 할건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이 한 생각을

적절하게 바꾸고 쓰면서 그냥 하면 될 뿐이다

흐르는 물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스쳐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수행자로서 ^운전하는 이것이 뭐고?^ 십우도처럼 내 마음속 깊은 숲속에 소를찿아 다니며 부처행을 연습 하면서 살아가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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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공부

“불교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면 10년을 공부해도 모자랄 만큼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토불교대학은 불교를 전공하는 박사가 되고자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에요. 정토불교대학은 내가 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이치를 알고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필수적인 내용만 배우고 나머지는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물론 이론적인 내용을 더 배우고자 하면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반을 공부한 후에 동국대에 가서 더 배우면 됩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통해 계속해서 탐구해 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2년 동안의 공부가 끝나면 경험하고 탐구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자기 스스로 탐구를 해야지, 남이 쓴 글이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하기만 하면 결국 맹신자가 되거나 추종자가 됩니다. 누구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붓다가 되어야 합니다. 죽을 때 입가에 미소를 띠며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야지, 죽는 그 순간에도 ‘극락에 갈 수 있을까?’, ‘천당에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면 죽는 순간에도 안심입명 하지 못하고 헐떡거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치를 깨닫고 나면 누가 천당에 보내준다고 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천당이 있다면 나같이 살아온 사람이 가겠지’ 하고 편하게 받아들이고, 만약 지옥에 간다고 해도 겁을 내지 않는 경지가 되어야 합니다. 지옥에 가면 할 일이 많습니다. 지옥에서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니까 도울 일이 많아요. 그러니 지옥에 가면 할 일이 많아서 좋지요. ‘평소에도 일을 많이 하는데 거기 가서 일이나 많이 하자’ 이렇게 받아들이면, 어디를 가든 좋은 일이 되기 때문에 인생이 편안해집니다.

 

인생이 스스로 자립되지 않으면 자기가 같이 살 부인이나 남편도 자기가 선택하지 못하고 부처님한테 구해달라고 하고, 자기가 하는 사업도 부처님한테 잘 되게 해달라고 하고, 시험을 치는 것도 자기가 공부를 해서 합격하면 될 일인데 그걸 부처님한테 합격시켜 달라고 하면서 평생을 남에게 빌며 헐떡거리고 삽니다. 그리고 숨이 넘어 가는 순간까지도 ‘지옥에는 보내지 말라’, ‘천국에 보내달라’ 이렇게 구걸하는 인생을 삽니다. 이건 중생의 길입니다. 나쁜 길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길입니다.

 

 

이런 헐떡거림을 놓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여유가 조금 생기면 허우적대는 사람을 건져주기도 하고, 도와달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해놓고 천당에 가길 바라는 더러운 심보를 갖지 말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천당에 갈 자격은 있지만 지옥의 중생들이 괴로워하니 그 사람들을 돕고자 내 발로 지옥에 가는 배짱과 패기가 있어야 합니다. 천당에 못 가는 게 아니라 갈 자격은 있지만 자기 스스로 지옥 중생을 돕고자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모두 다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는 삶을 장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장부다운 가르침’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부처님을 영웅 중의 영웅인 ‘대웅(大雄)’이라고 부릅니다.

 

언젠가 즉문즉설을 하는데 어떤 분이 스님은 좋은 일도 많이 하시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안타깝다고 해요. 이유를 들어보니 하느님을 믿어야 천당에 가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으니 천당에 가지 못한다며 너무 안타깝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님 믿고 천당 가세요’ 하시길래 저도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 믿고 지옥에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모두 웃음)

 

 

예수님을 진짜로 믿으면 천당에 가야 돼요? 지옥에 가야 돼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중생의 죄를 대신하는 거였잖아요.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지옥에 가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행동을 할 때 그 가르침과 일관성이 있잖아요.

 

그러니 우선 이 가르침이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이치를 깨닫고 나면 우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행동으로 다 옮겨지는 건 아니에요. 아직 체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과보가 따릅니다. 이것이 인연 과보(因緣果報)입니다. 이 이치를 알면 껄떡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모두 내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고, 돈을 갚기가 싫으면 앞으로는 돈을 빌리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벌을 받아야 하고, 벌을 받기 싫으면 다음부터는 물건을 훔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매사에 자기가 선택을 하고 자기가 결과를 책임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살지 않고 그저 ‘한 가지 소원은 무조건 들어준다’는 말에 혹해서 쌀자루를 짊어지고 불상 앞에 올려놓고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고 비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행동이에요. 비는 것이 나쁜 행동은 아니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공부를 했으니 이치가 어떠한지 대충은 알겠죠?”

 

“네!”

 

 

“그런 관점을 분명히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이 이치를 아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래도 여러분들은 정토불교대학을 다녀서 이치를 짧은 시간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렇게 설명을 한 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깨달음의 장, 인도 성지순례, 명상수련이 어떤 배경에서 마련되었는지 각각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불교대학 학생들이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다양한 질문 중 한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할 때 자신의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지난주 불교대학 수업에서 자신이 법을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의 주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경(經)과 율(律)에 견주어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제 자신을 보면 저는 습관의 덩어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의지하라 하실 때 나 자신의 무엇에 의지하라는 말씀이신지 궁금합니다. 여기에서 업식인 나와 의지의 대상인 나는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기보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요점 정리를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뜻을 헤아려보면,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남편에게 의지하고, 나이가 더 들면 자식에게 의지합니다. 스승에게 의지할 때도 있고, 친구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부처님이나 하느님께 의지하기도 합니다. 모두 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자를 중생이라 합니다. 의지하지 않는 자가 곧 부처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독립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등명(自燈明),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자립하라는 의미입니다. 스님을 찾아와서 ‘돈을 빌려야 됩니까, 빌리지 말아야 합니까?’ 또는 ‘돈을 갚아야 합니까, 갚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물을 게 아니에요. 이치를 깨달으면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하고, 갚기 싫으면 안 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돈을 빌릴 때 대개 빌리는 것만 생각하는데 갚을 일도 미리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내 수입은 100만 원인데 다른 사람에게 매달 100만 원을 빌리면 마치 내 수입이 200만 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빌린 100만 원들은 쌓여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빌리는 돈은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지금 좋은 것만 보고 결정을 하면 안 돼요. 나중에 큰 과보를 받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모르고 돈을 빌리게 되면 나중에 갚을 때 힘이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힘들다고 해서 그게 또 나쁜 건 아닙니다. 이번에 힘든 것을 알았으니까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조금 궁하게 살더라도 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훈련을 몇 번 하면, 이제 이런 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자등명에서 ‘나(自)’라는 용어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곧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립하라는 의미입니다.

 

 

○법등명(法燈明), 법에 의지하라

물론 이런 연습을 통해 점차 자립된 삶을 살고, 필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더라도, 그 결정이 어리석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뭔가 필요한 결정들을 스스로 하긴 하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스스로 결정을 하긴 하는데 나의 주관이나 무지에 빠져서 결정을 할 때는 엉터리로 결론을 내버립니다. 이런 부분을 경계하기 위해 ‘자등명’과 함께 ‘법등명’을 덧붙여 놓은 겁니다. 법에 의지해야지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 기준을 두라는 뜻입니다. 막연히 부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판단이 부처님의 가르침, 즉 이치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지금 질문한 내용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이치에 맞도록 하라는 말이 ‘법등명’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들을 게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자등명’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립하겠습니다. 이치에 맞게 결정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있을 때 지금처럼 즉문즉설 시간을 통해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미웠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미워할 필요가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정도 물어본 다음에 이치가 파악이 되면 차츰 물어볼 일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스님한테 결혼에 대해 물으러 온 사람이 스님의 의견을 듣고 내린 결정이 더 유리했다는 것을 알고, 그다음에는 집 사는 문제도 물어보고, 집 파는 문제도 물어보고, 아이 키우는 것에 대해서도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 웃음)

 

 

이렇게 되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앞으로 물어봐야 할 것이 더 많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벌써 자기도 모르게 스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의 법문은 자립을 돕는 가르침인데 도리어 법문을 통해 자립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1500여 개의 영상이 있는데, 5개를 보든 100개를 보든 보면 볼수록 차츰 자립의 길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스님에게 질문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거나, 비슷한 주제의 유튜브를 찾아보지 않고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처음에는 스님에게 도움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님에게 의지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것은 가르침과 정반대로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금강경에서는 뗏목에 비유합니다. 강을 건널 때 뗏목의 도움을 얻었는데, 강을 건넌 뒤에도 그 뗏목을 계속 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지팡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이 지팡이에 의지하면 걷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리가 다 낫고 나면 지팡이를 버려야 되는데, 계속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다리가 멀쩡한 사람인데 지팡이를 계속 가지고 다니니 결국 멀쩡한 사람이 다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됩니다.

 

법륜 스님이 필요하고 필요 없고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거기에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공부를 해나갈수록 점차 의지심이 줄어들고 자립도가 높아지는 것이 진정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부처님의 삶처럼 우리의 삶도 바뀌어 가야 합니다. 부처님께 무얼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설령 해주겠다고 해도 ‘제 인생은 이제 제가 살 수 있으니 저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세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아가 ‘저 사람들 돕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더 급한 일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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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전 갑자기 스마트폰을 여기저기 보다

그림 그리기 어풀이 있고 삼성노트에 그림판이

있는걸보고 나도 한번 그려볼까하고 생각하다

코타기나발루에 가족 여행을 갔다가 해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렸다 지우다를 거듭해보다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시간이 있을때마다 연습을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산과구름을 대상으로 그려보려고한다. 이것들이 기본적으로 쉽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려져 자연이되고 부분을 그려놓으면 그림이 되기때문이다.

아래 올린 그림들은 그동안의 변천사를 알수있게 올려봤다.처음보다 많이 발전해 가는것을 느끼게 한다.

그림이란 수없이 많이 그리고 고치고 지우고 를 반복하며 작품이 된다는것을 알았습니다

한번에 맘에들게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세상사도 그렸듯이 내 습관을 고치려면 그림을 그리듯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그림은 삼성 노트8로 AutodesksketchBook앱을 이용해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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