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살법회

포살은 자신의 잘못을 대중앞에 드러내놓고 참회하는것이다

수행자가 모인 공동체를 상가라고하며

마음이 깨끗하다는것은 탐진치 삼독과 욕망과 욕구가 없이 수행을 하는것으로 욕망 욕구를 내려놓은 상태를 청정이라고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것을 해탈열반이라하고

수행자가 지켜야할 다섯가지 계는 다음과 같다

 

1.생명을 죽이지말자

2.남의 물건을 훔치지말자

3.불륜의 삿된 행위를 하지말자

4.남을 속이거나 욕설 양설을 하지말라

5.술 마시고 남을 괴롭히지말자

이계를 지키지 않으면 인과에 의해 나도

남도 괴롭게된다

공동체에서는이 5계를 지켜야 청정하다 할수있다

나를 주장하게되먼 갈등이 일어나게된다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나를 낮추고 고집하지 않고 공동체로 살아가는데 꼭 지켜야 할 것을 지켜 가므로 청정하게된다

수행자라면 남을 죽이거나 때리거나 속이거나

업신 여기지 말고 남에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지말고 남의 여자나 남자를 추행하거나 삿된 짓을하지 말고 술이나 마약등을 섭취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말자 이계를 어겼을 때는

참회를 해야한다

참회라는것은 내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것이다

대중들에게 또는 지신에게 의혹을 받지않도록

들어내어 참회하는것을 포살참회라 한다

수행공동체는 계를받은 수행자끼리 같이 포살을 하게된다

받은 계률 만큼만 지키도록한다

자자는 대중들에게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부탁하고 참회를 하는것이다

자자는 아주 친밀감이 있는 수행자들끼리

할수있다

수행공동체가 청정하기위해서 포살을 하는것이다. 곧 화합과 청정으로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나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것을 포살이라 한다

이것이 자신을 정화하는것이다.

법문을듣고 18가지 사항을 돌이켜보니

모두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 없었다

이렇게 많은 죄를짓고 살아오면서도

그 행위가 잘 못된 것인줄도 몰랐던 것이다

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속이고 못되게 한 죄를 깊이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앞으로 남은 생을 내가 없음을

알고 다른 생명을 내 몸같이 여기며 남을 속이거나 없신 여기지않고 분별하지않고

바른 마음(양심)으로 청정하게 살것을 맹세합니다.

 

 

<죄무자성종심귀>

 

"죄는 있는게 아니라

죄는 마음따라 일어나니

 

이른바 한 생각 딱 마음먹고

내가 고쳐야겠다"라고 생각하면

서서히 고쳐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불안한 마음이 있으면

반대로 뒤집으면 좋은 안이 나오는 법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겠다.

저렇게 하지 않겠다"보다는

"내가 이렇게 하겠다 .

저렇게 하겠다"라고 기도해 보세요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있을것입니다

 

- 지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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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산스님 성지순례법문

 

▲ 미얀마 파욱 수행센터를 탐방한 후 아침 공양 마치고 양곤 최고급 호텔인 롯데호텔 뒤뜰에 모인 각산스님 법문현장입니다. 성지순례하면서 시의적절하게 곳곳에서 해주신 법문으로 더 갚진 순례 여행이었습니다.

 

 

 

'중생의 몸으로 온 부처(불변수연)'

 

 

 

뛰어난 부처님 말씀도 각자의 인식대로 해석하기때문에 종파불교 부파불교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테라와다불교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도 대승불교도 각자 이것이 부처님의 진의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는 부파불교 안에도 들어있고 대승불교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알지 못하면 무명으로 인한 미혹함 때문에 남에게 종속되게 됩니다.

 

저역시 미얀마 불교가 부처님의 원형이 담겨있는 초기불교라고 믿고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제 나름대로의 안목이 열리고 보니 초기불교의 원형이라고 주장한 미얀마 불교는부파 불교였습니다.

 

 

 

초기경전을 말하지만 철저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를 기반한 논장을 중심으로하는 부파불교입니다. 아비담마란 스님들이 공부를 하며 쌓아 온 부처님 말씀에대한 해석, 즉 법에대한 연구를 말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실참법은 전달할 수 없는 부분이라 각자의 관점에서 철학과 사상을 전달됩니다.

 

 

 

물론 테라와다는 부처님 당시의 장로적 성향, 생활상 계율적인 것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실제 수행 체험에서 보면 초기경전의 가르침과는 상이합니다.

 

 

 

특히 테라와다 불교인 남방불교 중에 미얀마 불교는 논점이나 위빠사나, 그리고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은 팔정도를 말하지만 팔정도의 하이라이트인 정정(正定, 바른삼매)를 증명시키기에는 뭔가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논서에 입각한 수행은 수행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는 복잡하지 않지만 대중과는 괴리가 생겨 종교적 생동감을 잃고 번쇄철학으로 흐르는 요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용수(나가르주나)로 대표되는 새로운 승가운동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종교철학에 대한 내용과 부처님 일생,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는 책들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1.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의 '초기대승불교의 종교생활'

 

2.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 '바웃드하 불교'

 

3. 나라다 마하테라 '(The)Buddha and his teaching'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필독서로 삼아서 시간을 내서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난존자의 일기>를 병행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처님의 일대기 입니다. 감동있고 몰입되는 부처님의 일생입니다. 그리고 꼭 먼저 <법구경>(거해스님 번역)부터 독파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당시의 생활상을 알수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게송을 통해서는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를 연 대표적 인물인 '용수(나가르주나)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용수는 '삼사칠정의 계'를 받지 않고 불탑에 나아가 스승없이 스스로 삭발하였습니다. '십선계'를 말하므로 비구가 아니라 그냥 사마나(沙門)인 출가자입니다. 비구가 아니기에 승가의 공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용수가 비구가 아니라고는 제가 최초로 발견한 것 같습니다. 검증을 자료를 찾다보니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히라가와 아키라'가 저와 같이 주장하고 있음을 뒤에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대승불교의 승단은 복합적 형태의 보살계본을 포살로 하기도 하지만 '사분률'을 승가의 계율로도 삼고 있기에 비구승단으로 정통성을 유지합니다. 대승불교의 철학은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사상입니다. 대승경전 또한 직설은 아닐지라도 불설이 담겨져 있으니 나름대로 초기경전의 뜻에 부합합니다.

 

 

 

문상의 글보다는 이면의 '뜻'인 문저(文低)를 살펴봐야 합니다.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의 대승사상을 전법하지만 진리는 한 사람의 것이기도 하지만 만 사람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실존적 부처님이 어떻게 존재할까요?' 부처님이 계셔도 못 깨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법이 부처입니다. 불법을 만난 자는 법의 인연이 되었기에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면, 마음이 바탕이 되어 생각이 '조건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 '생각은 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런 이치만 알면 모두 이자리에서 법을 만나고, 부처를 만나고, 견성이 되는 것입니다.이때 견성성불은 아라한을 뜻하고, 삼마삼붓다는 다른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 중도(팔정도)를 설하셨고, 사성제,그리고 연기법을 차례로 설하셨습니다.

 

 

 

이것을 정형화 시킨 것이 '무상' '무아' '고'이며 반야심경에도 그대로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미얀마불교에서는 폄훼시키고 있지만, 반야심경의 260자는 초기불교의 법수들인 오온, 십이처, 사성제, 12연기가 모두다 집약 되었습니다.

 

 

 

핵심은 '나는 누구인가?' 를 계속해서 물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라고 여기는 건 오온일 뿐이다' 오온은 텅비어 실존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 오온은 실존하나 실체는 없습니다.

 

 

 

'내가 없다'가 아니라 오온은 존재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자아가 아니며 소유할수도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내것도 아니고 통제 안되는 것을 통제하려는 것이 '고통'이므로 이것을 정확히 알면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애착, 집착의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온이 텅 빈 것을 아는 것'이 '돈교법'입니다. 보통 마음과 생각이 같다고 알고 있지만마음은 생각과 다릅니다. 마음은 있는그대로 원융한 본체를 말함이고 생각은 각자의 업식에 따라 일어나는 찰나의 작용입니다.

 

 

 

'의지'는 원력이요, '의도'는 자기 생각에 매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는 가지되 '의도'는 없어야 합니다. 모든 괴로움과 번뇌는 '의도'때문에 생깁니다. 그안에 탐,진,치가 자리하기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음 바탕은 누구나 똑 같지만 생각은 각양각색, 오만가지로 일어남을 우리는 쉽게 보게됩니다. 훈련을 통해 마치 드론을 띄워 보는 것처럼 보게되면 '생각이 일어나는구나'라고 구경꾼처럼 생각이 보이고, 생각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그것이 실체없는 허상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훈련이 없으면 생각과 마음이 붙어있게 되어 마치 내것인양 부여안고 고통을 받습니다. 느낌(受), 인식(想), 의도(行)가 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일 뿐, 내 것이 아니고 그냥 조건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먼저, 느낌은 내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바탕위에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느낌이 좋으면 애착. 집착이 일어나고 나와 안 맞으면 성냄이 일어납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지만 수행이 안된 사람은 미혹으로 인하여 느낌에 사로잡혀 그 느낌에끌려갑니다.

 

 

 

사랑, 명예, 재물은 문제가 없지만, 그 속성이 가지려하고 추구하게 되는 것이므로 '독'

 

이 되는 것입니다. 애착, 집착은 바라는 마음이고, 의도하는 마음이라 그로 인해 고통이 일어납니다.

 

 

 

둘째 인식은 어떻게 저장 될까요? 아는 마음을 잘 살펴보면 항상 내 방식대로 알아집니다. 그 경험으로 '내가 최고다'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것이 고착화 되면 '고집'이 됩니다.그것이 행동화되어 '의도'가 되고 각자의 식(윈냐냐)이 되어 저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틀어 '찟따'라는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

 

그러므로 훈련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분리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드론을 띄운 듯 보면 '첫생각'을 보게되고, '생각이 일어나기 전'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 그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생.멸)인연을 따라 일어나게 됩니다. '인연'이란 것은 어떤 누구든, 만물,물질. 모든 것에 적용되는 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법이란 모든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은 과거의 인식을 가지고 '내 것'으로 삼고 있는 생각일뿐 , 마음은 물들 바가 없습니다.

 

 

 

허공같은 마음바탕엔 아무것도 없는데 각자의 생각으로 모든 것(만법)을 창조해 낸 것이라 만법은 곧 마음에서 일어난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은 현상입니다. 원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절대 평화입니다.

 

 

 

본래는 마음 그 자체이지만 생각이 마음이라는 바탕을 두고, 생.멸의 인연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불성이라고하고 진여라고도 합니다. 명칭으로 드러내 보입니다.

 

 

 

"마음자체는 변함없는 본체이므로 '불변(不變)'이라하고

 

생.멸의 인연따라 드러나는 것을 '수연(隨緣)'이라 합니다."

 

 

 

만법은 생멸의 인연에 따라 변하지만 마음본체는 불변하는 것이고 이 마음은 만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 다만 인연에 따라 흐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생겨났다 사라집니다(생.멸) 그러나 마음바탕은 물들 자리가 없으니 그 본체를 성(性)이라 합니다.('隨緣不變而性). 그리고 마음은 생.멸의 인연따라 드러난 것이니 '不變隨緣而心'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생멸의 인연따라 드러난 것을 '요동함' '들뜸'이라 하고,

 

인연따라 일어나지만 본체가 그대로인 것을 '고요함'이라 합니다. '성(性)'은 변하지 않는 바다자체요, 만법은 물결이라 생.멸함의 인연을 따르지만 본성의 마음(心)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라 고통 받을 자가 없습니다. 헹위만 있고 행위자가 없는 이치입니다.

 

 

 

이것이 심성이 가지고 있는 것, 무시이래로 本覺, 본래 부처지만 중생의 몸을 받아 온 것일 뿐! 생멸의 인연을 따랐지만 부처의 불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말은"여러분이 이대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그냥 '된다'라고 자신을 믿는 것, 자신감을 가지면 됩니다. 안된다는 마음 때문에 못 깨치는 것이지 안된다는 생각없이 하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변함없는 본체를 '불성'이라하고 드러난 현상을 '자성'이라 합니다. 업이라는 것도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 본체라는 것은 그대로 변한 바가 없으니 그 일어나는 힌 생각만 멈추면 됩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일어난 생각을' 내 것'으로 삼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조견 오온개공" 입니다.

 

 

 

'불성'자리는 허물어 지지 않는 것이라 심성(불성)은 닦을 것이 없이 그냥 원융무애한'돈교'의 가르침입니다. 심성은 불성이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고 점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에서 요동함(들뜸)을 멈추면 그대로 고요함이요, 상즉(相卽, 모든 현상의 본질은 서로 융합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의 도리입니다. 번뇌가 보리요, 어두움이 바로 빛이고, 문제가 답인 것입니다. 이것이 닦을 것이 아닌 '돈교법'입니다

 

 

 

"바라는 마음 없이 다만 할 뿐!"

 

각자의 보리수를 가지십시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나무를 내가 어떻게 조각하느냐에 따라 나무는 달라지는 것이니, 잘 배우고 익혀 능숙한 목수가 되어 각자의 보리수를 조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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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선이란?

 

파수오경간월출(芭岫午更看月出)허고

두견성리목장려(杜鵑聲裡牧將驢)로구나

원앙수출종교간(鴛鴦繡出從敎看)허되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渡與人)이니라

 

<뾰족한 산봉우리에 달 뜨는 것을 보고,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

 

'파수오경'의 오경은 '낮 오(午)'자 오경입니다. 달은 밤에 뜨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낮 오경에 달 뜨는 것을 보느냐?

 

이 '파수오경간월출'은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 없고 만져볼래야 만져볼 수도 없는 한 물건을 깨닫는 도리를 표현한 것이고,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하는 것은 내가 나를 깨닫는 그 도리에 입각해서 깨달은 뒤에 수행해 나가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원앙새 수 놓은 것은 보여 주거니와 수 놓는 금침은 사람에게 건네 줄 수가 없느니라>

 

참선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며, 그 길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열심히 행해 가야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해탈을 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음으로써, 나도 영원히 행복하고 모든 중생도 영원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소원이 있다 하더라도, 바른 수행 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바른 길을 알았다 하더라도, 쉬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가지 아니한다면 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불교를 펴시기 이전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참나'는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어려서부터, 대관절 이 인생이란 게 무엇이냐? '나'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디에서 부터 와 가지고 한 평생을 희로애락의 많은 고비 고비를 겪으면서 마침내는 일생을 하직하고 어느 곳으로 또 가느냐? 생각하면 생각해 볼수록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성현들도 이 문제를 위해서 많은 힘을 거기에 쏟았던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말로써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고, 귀를 통해서 들어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이론으로 따져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생의 힘을 다 소비한다 하더라도 이론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선법'을 통해서 '깨달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참선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 그것은 '깨달음'인 것입니 다. 깨달음과 아는 것과는 전연 질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론을 통해서 불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마침내 중생의 사량 분별심(思量分別心)을 조장하는 결과 밖에는 안되는 것이라, 그걸 가지고는 생사해탈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2. 활구선과 사구선

 

요새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라 서양에까지도 널리 보급이 되고, 붐이 일어나서 너도나도 참선을 하려고 하고 또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마는, 참선은 두 가지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살 활(活)자 글귀 구(句)자 → 활구참선(活句參禪)이고, 또 하나는 죽을 사(死)자 글귀 구(句)자 → 사구참선(死句參禪)입니다.

 

사구참선은 무엇이냐?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 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 그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활구참선은 선지식으로부터 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은 당장 처음 시작할 때부터 꽉 막혔고, 뒤를 돌아봐도 꽉 맥혔고, 왼쪽·오른쪽을 둘러봐도 콱 맥혀서 한 걸음도 나아 갈라야 나아갈 수 없는 상태로 지어가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참나'를 깨닫는 길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공부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해서 차츰차츰 해감에 따라서 무엇인가 얻어진 바가 있어야만 되지만, 이 참선 공부는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에 다 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공부에 빨리 힘을 얻게 되는 것이고, 미련 때문에 버리지를 못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그만큼 늦어지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을 하려면 그 동안에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불교에 관한 것이건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의 말씀까지도, 전부를 다 놓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못 바보가 되어서 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3. 선수행의 기본

 

가) 자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가부좌, 오른 다리를 구부려서 왼쪽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고, 또 왼쪽 다리를 구부려서 오른쪽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습니다. 지금 해 보셔도 좋습니다. 다리가 굳어서 잘 안되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만 자꾸 해 버릇하면 차츰차츰 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일생 동안 의자 생활만 해서 이 책상다리를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지마는 그 사람들도 얼마 동안만 연습하면 가부좌를 우리보다도 더 오랫동안 잘 하는 것을 봤습니다.

 

가부좌하는 것이 참선의 기본 자세입니다. 자꾸 익혀서 되도록 하면은 그 굳어져 있던 힘줄이 서서히 늘어짐으로 해서 건강에도 좋은 것이니까 틈틈이 가부좌를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꼭 가부좌를 해야만 참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가부좌를 해도 좋습니다.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하다가 다리가 저리거나 아프면 발을 바꾸어 놓고 반가부좌를 해도 무방합니다.

 

다리를 그렇게 한 다음에는, 오른 손바닥을 위로 해서 왼쪽 발 복숭아뼈 위에다가 올려놓고, 그 다음에 왼손을 펴서 오른손 위에다가 포개 놓은 다음, 양 엄지손가락 끝을 가볍게 맞댑니다. 너무 힘 주어 맞대려고 하지 말고, 또 떨어지지도 않도록 하되 엄지손의 모습이 아주 곱게 되어야 합니다. 위로 삐쭉 올라가거나 삐뚜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손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생각이 안정이 되었나, 어떤 망상 속에서 곤두박질을 치고 있나, 또는 졸음에 빠져 있느냐, 그런 것을 이 손 모습만 보고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참 딴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에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두서 없이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손을 가지고 장난하기도 하고, 손이 삐끄러져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 손만 보면은 그 사람이 옳게 화두를 들고 있나, 안 들고 있나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손 모습을 잘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앉은 자세가 뒤로 넘어 가거나, 앞으로 기울어지거나,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두 귀는 어깨 위에, 수직으로 놓이도록 하고 고개도 전후좌우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코끝은 단전 위에 수직선상에 놓이도록 합니다 . 몸도 바르게 해야 하고, 고개도 바르게 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금니부터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가 대는 것입니다.

 

눈은 평상으로 뜹니다. 너무 뚝 부릅뜨면은 생각이 산만해지기가 쉽고, 너무 가늘게 뜨면은 졸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성하고 적적(惺惺寂寂)하며, 적적하면서 성성(寂寂惺惺) 해야 하므로 처음 시작할 때부터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합니다. 눈은 평상으로 뜨되, 자기 앉은자리로부터 3미터 전방에다 시선을 떨구면 되는 것입니다. '시선을 떨군다' 하는 것은 보려고 하면은 거기가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지 3미터 지점의 어떤 한 점을 의식적으로 응시하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 호흡

 

1) 단전호흡

 

우리의 의식은 오직 배꼽 밑에 일촌 삼푼에다가 집중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집중을 하느냐? 보통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만, 참선하는 사람은 단전(丹田)으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마시되 너무 가뜩 들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이마시되, 숨을 들이마심에 따라 단전 부위가 볼록해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단전이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온 의식이 거기에 집중이 돼야 합니다. 너무 무리하게 잔뜩 들이마신다든지, 들이마신 상태에서 너무 오래 억지로 참는다든지 하면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부작용이 일어나는 수가 있으니까 무리가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

 

이렇게 단전호흡을 잘하면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회복이 되며 정신이 안정이 되고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앉아서 하는 것이 기본 자세이지마는 매우 피로했을 때나, 정신이 착잡할 때, 그리고 잠이 안올 때는 누워서 하는 것도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2) 수식관(數息觀)

 

팔·다리를 뻗고 편안하게 누워서 단전 부위에다가 두툼한 책 한 권을 올려놓습니다. 그래 가지고 숨을 들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니까 책이 약 3센티 가량 위로 올라가고, 올라간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무른 뒤 조용히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지니까 따라서 책도 한 3센티 내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마다 '하나... 둘...'하고 세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세어 올라가고, 열에서 하나까지 세어 내려옵니다. 이것이 수식관(數息觀)입니다.

 

중간에 딴 생각이 나서 몇까지 했나 막연하면, 다시 하나에서 시작하고 해서 잘 되면 20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또 그게 잘 되면 30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합니다. 해서, 100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도록 아무 실수 없이 되면 참선해 나가는데 기초가 아주 훌륭하게 닦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건물을 지으려고 할수록 암반이 나오도록 깊이 파서 기초공사를 잘 해야만 하는 것처럼, 대도를 성취하려면 그 기초인 자세와 단전호흡을 완벽하게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기초를 허술하게 하고 건물을 아무리 잘 지어봤자 얼마 안가서 와우아파트와 같은 무서운 사고가 나게 되는 것처럼, 참선도 기본 자세와 호흡법을 잘 모르고 덮어놓고 화두만 맹렬히 들고 나가다가는 백이면 백, 위장병이나 상기병(上氣病)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기본 자세와 호흡법을 바르게 알고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화두

 

1) 생각의 기멸

 

그 다음 셋째번에 가서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느냐?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무엇인가 생각 아니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사그러지면 또 딴 생각이 생겨나고, 쓸데 있는 생각· 쓸데 없는 생각· 지나간 생각· 현재 닥치고 있는 생각· 앞으로 다가올 생각. 그러한 생각 속에서 일분 일분을 지내고, 하루 하루를 지내고 , 그러면서 일생이 지나가게 됩니다. 심지어 잠이 들어 있을 때도, 꿈속에서도 그 생각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서 행동화되면 좋은 행동을 하게 되고, 삿(邪)된 생각이나 착하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이 행동화되면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의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육도윤회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안하게 하려면, 죽으면 안하게 될 것 같지만 죽는다고 한들 이 현재 가지고 있는 그 몸을 가지고서는 끝나지마는 이 몸 버린다고 해서 그 생각의 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또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나 게 되고, 설사 다음 몸을 받아날 때 까지 몸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중음신의 상태에서도 우리의 생각의 기멸(起滅)은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송(頌)에, "참선은 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이요, 묘오는 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종요로이 마음길이 끊어져야 한다> 하셨습니다.

 

 

2) 활구참선의 법맥

 

삼 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하시고,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아난존자는 상나화수존자에게, 이렇게 해서 28대 달마대사까지 전해 왔습니다.

 

달마대사는 일백 오십 세가 되도록 인도 천지를 두루 다니시면서 이 정법을 펴시다가, 그 이전에 중국에 불법이 건너갔다고는 하지마는, 경전이나 불상이나 그런 상법(像法)만이 건너갔지, 내가 나를 깨닫는 부처님의 최상승법은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백 오십 세의 고령으로 3년간의 항해 끝에 중국 남해안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맨 처음에 양무제를 만나니, "짐이 절을 많이 짓고, 경전을 보시하고, 스님네 봉양을 많이 한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달마대사께서는, "공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대사께서, "확연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그러면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不識)!"하고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거기에서 대화가 끊어져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서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들어가 9년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다가 혜가(慧可)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 법을 전하셨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 33대가 되고, 육조스님 이후로 오종가풍이 벌어져 중국 천지에 선풍이 크게 진작을 했습니다. 그 오종가풍 가운데 임제종의 활구참선법이 한국에 전해졌습니다.

 

조선에 와서 수 백년 간 교풍(敎風)이 성하고 선풍(禪風)이 다소 침체한 감이 있었으나, 백여 년 전에 경허선사가 대강사로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시어 종풍(宗風)을 중흥하셨습니다. 그 밑에 만공선사를 비롯한 육대 선지식이 배출되고, 오늘날 활구참선법이 이 땅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3) 화두란 무엇인가?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나는 누구인가?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 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성품이다· 주인공(主人公)이다·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놨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 천만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 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 천만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 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 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덥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 갔다 하고, 또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 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 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들도 일생, 이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 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 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우리 밖의 모든 사물)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 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앉었을 때도·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 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5) 이뭣고 화두법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 라고 합니다. 표준말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확히 쓰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석자입니다. 그래서 참선 해나가는 데에는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왔습니다.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뿐이어야 합니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 때는 슬픔에 빠져 가지고, 점점 슬픈 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묵은 생각을 일으켜 내 가지고 점점 더 슬픔에 빠집니다.

어떤 괴로운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앨려고 하지를 않고, 점점 근심이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더욱 더 연상을 해내서 더 근심에 빠집니다.

 

성이 날 때에는 빨리 그 생각을 돌이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앉도록 해야 자기에게 유익할 텐데, 점점 성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고약한 그 지나간 생각을 되살려 내 가지고 더 깊이 그 성나는 생각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 들어갑니다.

 

이래 가지고 중생은 불붙은 데다가 스스로 석유와 휘발유를 끼얹어 가지고 점점 더 불을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 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에 빠져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 한 생각이 원인이 돼 가지고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좋지 않은 생각을 터뜨려 가지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괴롭히고 일까지 그르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니 생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습니까?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번 일어난다 허드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성나는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현재 생각이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뭣고......?" 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합니다.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서 성이 푹 솟구치더라도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뭣고 ?'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쪼꼼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며 참선을 하는 지성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 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스르르 숨을 들이마시되, 들이마시면서도 아까 그 '이뭣고' 한 그 의심의 그 여운이 그때까지 오도록 그렇게 조용하게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3초 동안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다가 조용하게 내쉴 때에 다시 또,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다가 차츰차츰 딴 생각은 줄어들고 '이뭣고 ?' 가 잘 되어지면, 두 번 들이마셨다 내쉴 때 한 번씩만 '이뭣고?'를 들다가, 나중에 더 익숙해지면 다섯 번 호흡하는 동안 '이뭣고?' 한번의 의심으로 쭉 이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부가 더욱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떴을 때, "이...뭣고......?" 한 번 해놓으면 하루 종일 그 ' 이뭣고?' 한번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될 때가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깨달을래야 안 깨달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이 바로 알 수 없는 화두 하나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를 들고서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팔만 사천 마구니(魔軍)가 엿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팔만 사천 마구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인데, 화두가 독로(獨露)한 사람한테는 와서 들어 붙지를 못합니다.

 

잠깐 잠깐 필요 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필요한 일을 적절히 처리하되, 나의 이 화두 일념은 근본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요, 우주법계의 주인공이 되어서 우주법계를 내가 요리해 나가고,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바로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많은 법문이 있지마는 그 말씀을 하나로 뭉치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4. 참선의 효과

 

지극히 간단한 이 한 마디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깊이 명심을 하고 생활 속에 이것을 응용해 나가고 실천해 나간다 면, 여러분은 한 달 못 가서 차츰차츰 이 공부가 얼마만큼 소중하고 훌륭하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두 달 , 석 달, 반 년, 일 년 가노라면 여러분은 완전히 딴 사람이 돼 있는 것을 느끼게 되고, 여러분 가족이나 친구간에도 "하! 저 사람이 딴 사람이 됐다. 그렇게 신경질을 잘 내고, 경솔하고, 괴벽한 성격을 가졌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저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을까?" 놀랄 정도로 딴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말할 것도 없지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수십 가지 좋은 이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간상 그것을 낱낱이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마는 우선, 피가 맑아지고, 피로가 풀리고, 정신이 안정이 되고, 정신이 통일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학생이니까 학생으로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고, 회사나 관공서에 나가시는 분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기 마련인데 아까 말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과 아울러 화두를 잘 관조해 나가면 피로회복이 빨리 되고, 온갖 짜증이 쉽게 풀어지고, 정신이 맑고 안정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환희의 마음으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공부를 알고서 열심히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5. 결어

 

"말세다. 중생의 근기(根機)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런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은 말세(末世)라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 이렇게 말씀을 해 왔지마는,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삼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正法)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정법시대를 만난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고 도업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까 시작할 때에 읊은 <원앙수출은 종교간(鴛鴦繡出從敎看)이어니와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渡與人)이라>하는 것은, "원앙새 수놓은 것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지마는 원앙새 수놓은 그 바늘은 여러분에게 줄 수는 없다" 이러 한 내용의 게송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얘기해 드릴 수 있지마는 깨달음 그 자체는 여러분에게 줄 수가 없다. 깨달음은 여러분 자신이 깨달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으로서도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실천을 통해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금생에 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허리라

 

<금생에 약불종사어허면>, 금생에 오늘 이 자리에서 들으신 말씀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내세에 당연한만단허리라>, 내생에 지옥에 떨어져가지고 "아! 그때에 열심히 참선을 안해서 이렇게 지옥에 떨어졌다!" 하고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러한 내용의 게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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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

 

그런데 흔히 화두 허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허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헌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허는 가운데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다. 불교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教)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 밖에는 못되겄다’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그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허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헌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허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허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허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헐 것이 있느냐?’허니,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헐 것이 없지를 않지만은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연구허는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思量)•분별(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의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렇고, 마삼근(麻三斤)도 그렇고, 무자(無字) 화두도 그렇고, 시삼마(是甚麼)도 그렇고, 무슨 화두(話頭)를 어느 큰스님한테 탔든지 간에 한번 탔으면,
공부가 잘되거나 못되거나 못될수록에 그 화두 하나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잘된다 하드라도 기쁘다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지어갈 따름인 것입니다.
 
꽉 맥혀서 답답허고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없고, 또 그렇게 해 가다 보면 화두가 순일하게 들려서 의심(疑心)이 순일(純一)하게 들린다 하드라도, 화두가 독로(獨露)한다 하드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쁜 마음을 내면 이미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기쁜 마음의 마군(魔軍)이가 벌써 침입해 들어온 것이고,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면 이미 번뇌의 마군이가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도 내서는 아니 되고,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낼 일도 아닌 것입니다.
 
다못 단전호흡을 허면서 숨을 쑥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허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숨이 다 나가면 배가 홀쪽해지죠.
그러면 또 스르르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딱 정지헌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숨을 내쉬면서 ‘이 무엇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됩니다.
들었던 화두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냥 화두는 더 들지 않고, 그 있는 의심을 묵묵히 반조(返照)를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한번 들고서, 숨은 3번•4번•5번 내지 10번을 쉬어도 그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않다가, 화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다허면 그때 가서 또 화두를 떠억 한 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처음에는 그렇게 들랴고 해도 깜빡한 사이에 달아나 버리고, 들면 또 달아나 버리고 하는데, 나중에는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상 들어져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다가 공부가 많이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힘을 쓰지 아니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어가니까 힘을 덜게 된다.
‘힘 덜게 되는 것을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라’ 이렇게 고인(古人)네들은 표현을 했습니다.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갈 때,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잘되어가게 되면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떠한 그 신기한 경계(境界)가-혹 환한 광명을 본다던지, 꿈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또는 여러 가지 뭣이 알아진다든지, 그런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환상(幻相)이다’ 생각하고,
‘이거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러헌 그 외람(猥濫)되고 잘못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이오, 환상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승을 바로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게 해나가는 것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허다가 이런 허상(虛想)과 환상(幻相)과 마경(魔境)이 나타나면 이것이 도통(道通)헌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기쁜 마음을 내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신경을 써 가지고 영영 사도(邪道)에 빠지고, 까딱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하는 예도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작할 때부터서 바르게 시작을 해야 하고, 중간에도 바르게 해 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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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의 핵심

 

금강경의 핵심 사상이 금강경의 사구게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등도 마찬가지로 사구게를 살펴봄으로 해서 

그 경전에 나타난 사상의 핵심을공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 경전에 나타난 사구게를 공부해 보도록 하지요.
수행상담에 질문해 주신 분께 답변차 쓰는 글입니다.
먼저 금강경 사구게 먼저입니다.

먼저 사구게(四句偈)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금강경의 한 구절을 살펴보지요.

[금강경]에 보면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해석해 보면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면

(受持爲他人說) 그 복덕은 앞에서 말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殊勝)하니라."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사구게를 수지하고 타인에서 설명해 주는 공덕에 대하여,
이 공덕은 항하의 모래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구게란 글자 그대로 경전에 등장하는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합니다.
네 글귀로 되어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경전의 말씀을 의미하지요.

다시 말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로 된 짧은 한 문구 만이라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설명해 주라는 말인데
꼭 사구게로 정형화된 틀 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경전에 등장하는 그 어떤 짧은 법문이라도 
소중하게 받아지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금강경의 사구게를 살펴보지요.
금강경에는 사구게가 곳곳에 많이 등장하지만
우선 핵심이 되는 네 가지 사구게를 옮겨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른 상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첫 사구게부터 살펴보면
범소유상,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라고 하면
두두만물 일체 현상계에 벌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꼭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 육근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미하지요.

바로 일체 모든 현상계가 개시허망이란 말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 일체 현상계가
상이 아님을 즉 개시허망임을 바로 보면
즉견여래한다, 즉 여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탕이 텅 비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꽉 차서 인연따라 모든 것을 나툽니다.

나무와 나무를 비빔으로써 불을 얻었다면
불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공기 중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비비는 내 손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분명이 이렇게 불이란 상을 가지고 나투었단 말입니다.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 범소유상은 다 이처럼 인연따라 잠시 나투고,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될 뿐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촉할 수 있는 모든 상(相)은
다만 인연따라 잠시 나툰 것일 뿐 고정된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볼 수 있으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범소유상이, 
한낮 인연따라 허망하게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바로 보아 정견(正見)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상에도, 그 어떤 경계에도, 그 어떤 현상계에도
휘둘리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가며 그 어떤 경계나 현상계가 다가오더라도
다만 인연따라 허망한 경계가 일고 사라질 뿐임을 알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여여하며 성성적적하게 깨어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여부동하여 오고 감이 없는 여래를 볼 것이란 말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바로 깨치면 그대로 부처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음 사구게는 말하고 있습니다.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보통 우리가 마음을 일으킬 때는
육근, 안이비설신의, 즉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대상으로 마음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쉽게 말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여여하게 아무런 분별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머무른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좋아하는 연인을 볼 때와
미워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 마음은 좋다고 집착하고 밉다고 집착하여
대상에 좋고 싫음의 분별을 덮씌우고는
그 좋고 싫은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이지
고정되게 좋고 싫은 대상 하고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색성향미촉법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이야 말로
모든 수행자들의 실천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집착, 방하착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깨닫겠다고,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많지만
부처라는 것 또한 대상으로 정해 놓고
찾아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으로 부처를 만나고자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형상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귀로서 부처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못합니다.
눈귀코혀몸뜻 육근으로 촉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다음 사구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어때요?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이란
다 허망하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생하고 멸할 뿐인 겁니다.
모두가 다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이며 번개와 같은 것이라고 
잘 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이처럼 금강경의 사구게는
연기, 공, 무집착, 무아라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십니까?

그렇게 허무한 것이니까 세상 살 필요도 없고,
다 필요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고, 서러워하고, 욕심부리며 살던
바로 그 괴로움의 대상인 이 현상 세계가
모두 공하여 허망하고 꿈같고, 환영같고, 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착하지 말고, 괴로워 하지도 말고, 걸리지 말고
여여하게 시원스럽게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현상세계는 다 허망하여 물거품 같은 것이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이 놈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놈은 누구냐? 하고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 공하고 허망하다는데 그럼 허망으로 끝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바탕에 나를 이끌고 가는, 이 허망한 현상계를 이끌고 가는
본래자리, 진면목, 자성불, 불성, 주인공, 한마음 이라 불리는
바로 이 본래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볼 것이란 말은,
이 현상세계 모든 상들을 허망하고 꿈과 같으며

환영과 같고 헛개비와 같다고 바로 관하라는 말이고,
그렇게 현상계의 생멸법을 바로 관했을 때 여래를 본다,
즉 부처가 되고 깨닫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의 실천법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인 것이지요.
세상 다 허무한 것이니까 다 필요없고, 마음을 일으킬 것도 없다가 아니라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고 살라는 말입니다.
마음 일으키지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집착하지 말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요?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허무한 것이고 공한 것이니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허무하고 공하다는 현상계를 잘 관할 수 있어야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실천은 힘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때요?
잘 관(觀)하며 살 수 있어야
세상이 다 공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바로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실천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를 보며(見性) 부처(成佛)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목탁소리 법상스님 -

- 모든 물질 흩어지고 모일 뿐 변함없어 -

- 심경의 ‘불생불멸’물리학의 기본법칙-

 

 

반야심경은 공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하기를 ‘…불생불멸 불구부정…’이라고 한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겉으로는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는 뜻의 불생불멸이야 말로 물질세계에 관한한 핵심을 찌른 말이다. 고전물리학이건 현대물리학이건 가릴 것없이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 보존의 법칙이다. 이 보존의 법칙이 말하는 바가 바로 에너지, 전기량(電氣量)등 기본적인 물리량은 결코 없어지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설명하겠다.

 

물체가 움직이면 거기에는 반드시 운동에너지가 따른다. 또한 지구상의 물체가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으면 거기에는 위치에너지가 따른다. 높은 곳에 있는 물을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면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에너지의 모양이 바뀔 뿐 에너지의 양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높은 곳에서 떨어진 물이 발전기를 돌리면 전기에너지로 변하고 이 전기에너지로부터 사람들은 필요에따라 빛 에너지나 열 에너지 또는 운동에너지를 끌어 쓰는데 어떤 형태의 에너지로 쓰던 에너지의 양에는 변함이 없다. 에너지는 또한 질량으로 변하기도 하고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기도 한다.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변환은 반야심경이 말하는 불생불멸을 물질세계에서 이해하는데 더 없이 좋은 예이다. 자연계에는 어딘가에서 갑자기 질량이 생겨나기도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는데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어 없어진 것도 없고 생겨난 것도 없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불쑥 질량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질량이 없는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잠재해 있던 에너지가 질량의 모습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질량이 감소한 경우에도 질량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자연현상이 여러가지 형태로 바뀌는 것은 결국 에너지가 이 모습에서 저 모습으로 바뀐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나무를 태워 재가 되었다 하더라도 무엇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수소가 산소와 결합하면 다만 물이 되는데 이 경우에도 수소와 산소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소도 없어지고 산소도 없어졌으며 물이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없어진 것이 없다. 타기전에는 산소분자와 수소분자가 서로 따로 따로 놀았던 것이며 타고난 후에는 수소분자와 산소분자가 서로 결합한 것 뿐이다. 산소-수소가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결합한 것을 사람이 물이라고 부를 뿐이다. 비유를 들자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과 같다. 결혼전 한남자와 한여자가 있었는데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남자와 여자가 없어지고 한 가정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다. 모든 변화가 다 이런 식이다.

 

살아 움직이던 생물체가 죽어서 그 몸이 썩어 없어진 경우에도 원자(原子)의 세계에서 보면 변한 것이 없다. 단지 원자들 상호간의 결합상태가 바뀐것이다. 물질이 생겨났다 썩어 없어지는 것은 사람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과 꼭 같다. 어떤 모임이 있어 사람이 100명쯤 모였다면 100이라는 숫자의 사람 하나하나가 어딘가에서 없어지고 100명이 모인 어떤 모임이 생겨난 것이다. 이 모임을 사람들이 물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임이 해체되면 물질이 없어진 것이지만 모임을 구성했던 100이라는 숫자의 사람이 어디 다른 곳에 갔을 뿐 사람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물질이 생겼나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질세계의 윤회를 뜻할뿐이다. 이렇게 모였다 흩어지고 저렇게 모였다 다시 흩어지고 새롭게 모일 뿐 무엇이 없어진 것도 없고 생겨난 것도 없다는 것이 바로 물리학에서 말하는 보존의 법칙이다. 결국 보존의법칙은 불생불멸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불생불멸! 그것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불생불멸(不生不滅)>

 

제행무상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라는 삼법인의 하나로서,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고,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행에서, 제(諸)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인데, 빠알리어 sabbe가 ‘일체’ ‘모든’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행(行)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빠알리어 san(skt. sam)이라는 말과 kh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진 말로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 형성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 ‘행(行, saṅkhāra)’은 ‘만들어진 모든 존재’ 혹은 ‘형성된 모든 것들’이란 의미로서의 ‘존재-법(法)’란 뜻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제행무상(pali. Sabbe saṅkhāra anicca)이란 모든 것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므로 실체가 없으며, 모든 법에는 자아(自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제행(諸行)이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어떤 존재를 만들고, 어떤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제행무상이란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며, 무상하고, 고정불변의 독립된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데, 조건으로 발생된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 조건이 해체되면 실체라고 했던 것도 사라져버리니까. 그래서 독립된 실체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금강경>에서는 “인연에 의해서 생긴 모든 사물은 한바탕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위의 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풀잎의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는 흐른다는 뜻이고, 변화하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진화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변화를 낳으며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무상(無常)이라는 말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지, 허망하다, 허무하다, 인생은 덧없다는 식의 말은 아니다. 즉, 제행무상은 일체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 마음의 형상이 12연기에 의해 시시각각 생멸 변화해 흘러갈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무상은 고유한 존재가 없다는 말이다. 어떠한 존재도 어느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사물, 심지어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 그리고 관념 감정 등 제행 모두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경망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같이 왔다갔다 움직이고 변한다.

 

예컨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은 분자가 합성돼 형성됐고, 따라서 다시 분해된다. 이런 과정이 흐름으로 이어진다. 예쁜 얼굴을 아무리 오래도록 지속하려고 성형도 하고, 화장도 하고, 약을 먹고, 하더라도 나이 들면 피부가 늘어지고 쭈글쭈글 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나이 들면 다 늙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무상하다는 말은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는 얘기다. 어떤 무엇이 결정 지워져서 영원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영원한 흐름 속에서 변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한편 그러하니까, 즉 영원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므로 이 세상은 가만있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것이다.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넘어가고, 따라서 무상(無常, anicca)은 발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곧 무아(無我, anatta)를 의미하기도 한다. 항상 변하니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무상(無常)은 시간적 개념이고 무아(無我)는 공간적 개념으로서, 무상과 무아는 분리할 수가 없다. 무상하기 때문에, 즉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이다.

 

제행무상은 불교적 존재론인 동시에 연기법에 대한 시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관점에서 인과 연에 의해 잠시 잠정적으로 현재의 모습을 띠지만 그것이 고정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영원할 수는 없고, 무상해서 변한다는 말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됐을 때 얼음과 물은 별개가 아니다. 얼음과 물은 다만 변화했을 뿐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원리, 이것이 ‘불이(不二)’이다. 그 모양과 형태가 다르므로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불일불이(不一不二)로 변화하는 측면을 ‘무상’이라고 한다.

 

무상은 고정됨이 없음을 말하는데, 만약 고정돼 있다면 어떻게 물이 얼음이 될 수 있으며, 어린이가 어른이 될 수가 있고, 나무가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고정돼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은 세상일 것이니, 그런 ‘고정돼 있다’는 이치란 있을 수가 없다. 이 사회가 점점 발전하는 것도 무상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변해가기에 또한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부자가 영원히 부자이고 가난한 자가 영원히 가난하다면 이 세상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할 것 없다.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라. 무소의 뿔처럼 열심히 나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의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일순간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화가 불끈 솟을 때가 있다. 그런데 화가 났을 땐 분명 화가 나 있었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해서 기분을 되돌리고 나면 어느 새 화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화의 실체란 무엇인가. 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슬픔, 불행뿐만 아니라 기쁨, 행복 같은 감정도 어느 순간 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했지만 어느새 사랑이 식어버려 헤어지게 되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상하기에 고(苦)의 측면도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항상 하는 유일신(唯一神)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무상에 있다. 무상의 이치는 불교의 기준이요, 근거요, 법인(法印)인데, 절대 독존의 변치 않는 유일신은 바로 이 무상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석가모니께서도 무상하기 때문에 반열반에 드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므로 영원한 유일신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즉,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해 결국 소멸되고 만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마찬가지다. 현재 이 우주도 성주괴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제행무상에서 무상은 생ㆍ주ㆍ이ㆍ멸(生住異滅) 하고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하는 현상을 말하며, 생멸의 이치[시생멸법(是生滅法)]를 말한다.

 

헌데 수행을 통해 열반에 들어 이러한 생멸의 도리 자체를 없애면[생멸멸이(生滅滅已)],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경지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 적멸위락(寂滅爲樂)의 경지가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것이 <열반경>에 나오는 무상과 적멸에 대한 게송이다.

 

그런데 제행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고 했으면서 「생멸의 도리 자체를 없애면」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지 않은가. 어떻게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인가?

 

현상의 세계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고, 나고 죽음이 뻔히 눈에 보이므로 제행무상이라 하는데 어째서 또 불생불멸인가? 깨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불법(佛法)이라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 생자필멸의 원리를 따르는 듯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제행무상이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죽거나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이라 했을까? 불생불멸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부처님의 근본교설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의 분별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오히려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 변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이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천삼라(天森羅)는 지구를 제외한 대기권 전체를 말한다. 물론 태양을 포함한 달과 무수한 별들을 비롯한 무한한 우주공간이 모두 포함된다. 지만상(地萬象)은 지구 표면에 존재하는 생물ㆍ무생물, 그러니까 산하대지를 다 포함한 무생물, 거기에 사는 생물, 그리고 지하의 세계와 거기에 있는 생물ㆍ무생물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즉, 우주를 동양식으로 말한 것으로 공중에 떠 있는 천삼라와 땅위에 붙거나 땅 아래까지를 포함한 지만상의 조화로운 운행을 우주라 한다. 이 동양식 우주가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萬象)이다.

 

그러한 우주의 모습을 불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본래모습 그대로”라고 파악한다. 이러함을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 -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 - 세간(世間)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이 법’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한다. 곧,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萬象)이 모두가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만법의 참모습으로 불법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한다.

 

또 <화엄경>에서는 불생불멸 제법실상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한다. 한 없이 한 없이 연기할 뿐 근본모습은 모두 다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萬象) 전체가 다 융화해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변만화한다 해도 상주불멸(常住不滅) 그대로라는 말이다.

 

이법계(理法界) 중에 사법계(事法界)가 있는 것이고, 사법계 중에 이법계가 있는 것이지, 이법계 사법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법계 사법계를 따로 세웠지만 각각 이법계 중에 사법계, 사법계 중에 이법계, 이렇게 해서 이사(理事)가 무애(無碍)하다. 이사가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천삼라 지만상(天森羅地滿象)이 하나도 무애법계 아님이 없다. 그리하여 온 시방세계의 모든 존재가 중도(中道)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절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내려진다. 이것이 <화엄경>과 <법화경>의 근본이론이다.

 

따라서 우주의 진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우주의 진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창조도 없고 멸망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함을 바로 알려면 도를 확연히 깨쳐야 한다.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아는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우주의 진리를 깨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천삼라 지만상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법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진리)의 세계라는 말이다.

 

’천삼라 지만상‘ 개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소멸하지만 그 전체는 불생불멸의 위치에 있어서 세상의 모습이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진볍계(無盡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무진법계란 세상의 무한한 다양성과 연관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무진연기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철학이라기보다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철학이다. 현상세계와 진리세계의 조화를 밝힌 것이다.

 

즉, 삼라만상 개개는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고 하는 말은 현상세계를 의미하며, 진리의 세계는 그렇게 계속 변화하지만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조금도 변화하는 것 없이 - 늘고 주는 것 없이 그대로 불생불멸인 상주법계(常住法界), 곧 제법실상이란 말이다.

 

한 납자(衲子-승려)가 큰 스님께 물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는데 어찌 불생불멸이 있습니까?"

 

"존재의 근본을 모르고 개별 존재에 집착하는 중생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생멸로 보이지만 우주 전체의 이치를 알고 보면 변화가 있을 뿐, 불생불멸이라네..."하셨다.

 

마치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마는, 그리고 법정 스님의 육신(肉身)이 다비 장에서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육신을 이루었던 성분(원소)은 본래의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간 것이니… 우리는 살아도 지구라는 동네에 있고 죽어도 지구라는 동네에 있다는 뜻이다.

 

외도(外道)들은 불생불멸이라고 하지 않는다. 생겨나기는 했지만 불멸하다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나'라는 영혼이 만들어졌으니 생한 것인데, 이것이 다시 신에게 돌아가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 불멸이고 영생이라는 사상이다. 즉, ‘나’라는 것이 생겨났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영생한다는 말이다. 시작은 있으되 끝이 없다는 뜻이니 우주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

 

역시 한 납자가 큰 스님께 물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외도(外道)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외도에서 말하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허위 창조신(創造神)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세뇌된 맹목적 신앙일 뿐이고, 만법의 근본인 성품은 공하여 불생불멸이며, 다만 이 성품이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우주법계이다. 오직 불생불멸하는 것은 공한 것뿐이다. 공한 것은 우주의 진리이다.

 

무명 중생은 스스로의 업을 따라 원융무애하게 나투고,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은 스스로의 뜻을 따라 원융무애하다. 업을 따라 원융무애한 것은 무명해서 그렇게 본 것이므로 아집의 고(苦)이고, 깨달음으로 원융무애함은 아집을 떠났으므로 법락(法樂)의 세계로세!”라고 말했다.

 

우주에는 브라만(Brahman, 梵)이라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실체가 있고, 이것이 분화돼 각 개체에 아트만(Atman)이라는 실체가 생겼으며, 이 실체는 불생불멸이라고 했다. 여기서 보듯이 외도들은 증득한 것이 아니다. 실체가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공성(空性)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오직 수행을 통해 증득할 수 있을 뿐이다.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이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 역시 논리적 추리를 통하거나, 상상으로 한 것이며, 이런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가정하고,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에 대한 도리를 강조하는 것은 범부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도깨비가 산에 살고 있으니, 혼자 산에 가지 말고, 늦은 시간에 산에 가지 말며, 도깨비를 만나면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외도의 불생불멸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은 믿음 곧 신앙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불생불멸 곧 열반은 개개인의 실천적 수행으로 가능하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본성을 봐야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본래자리를 허공에 비유한다. 허공을 보면, 구름도 떠가고 해와 달, 별들이 있고, 새들이 날아가고, 바람이 분다. 그러나 허공 그 자체는 늘 그대로 텅 빈 모습이다. 모습이라고 하나 모습도 없다. 본래자리 그 자체는 늘 그대로다. 그러니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착각은 사물을 잘못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릇에 담긴 얼음을 두고 밖에 나갔다가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그릇에 물만 담겨있다면 어린아이는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얼음과 물이 서로 별개의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 하나하나를 별개의 것으로 보는 탓이다. 전체를 알고 보면 얼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인간 개개, 삼라만상 하나하나를 보면 생멸이 있는 것 같지만, 우주 전체를 두고 보면 작은 존재 하나하나에 생멸이 있는 것 같은 모습도 하나의 작은 변화일 뿐 우주 전체엔 변화가 없다. 일체만법이 이와 같으므로 우주는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불생불멸한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중생은 생멸의 세계에 빠져 있다. 생겨난다, 사라진다는 현상(겉보기)만을 놓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제법의 공(空)한 도리를 모른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볼 줄 알면 생은 생이 아니요, 멸은 멸이 아님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언설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 우리 범부들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제로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고(苦)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생(生)과 멸(滅)을 부정하는 것이다. 낳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것이다. 작은 개개를 보지 말고, 크게 보란 말이다. 넓게 보란 말이다.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보란 말이다. 즉, 공(空)으로 보란 말이다.

 

 

여러 경전들에서 불생불멸에 관해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경전 말씀을 골라 살펴보자.

 

 

*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一切法不生(일체법불생) -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一切法不滅(일체법불멸) -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若能如是解(약능여시해) -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諸佛常現前(제불상현전) -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

 

 

“모든 존재는 생기지도 않으며 또한 소멸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러한 이치를 알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음을 보리라.”고 했다. 일체만법은 생겨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은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와 같은 내용을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신다,

― 깨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하는 말이다.

 

여기서 불생불멸하는 우주의 섭리가 항상 존재하는 현상을 ‘부처가 나타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섭리가 곧 부처이며, 이 현상을 이해하면 곧 부처가 보인다, ― 깨침을 얻는다는 말이다. 우주의 섭리와 부처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원칙을 말한다. 삼라만상의 원칙을 노자는 도(道), 공자는 성(誠), 불교에서는 부처(佛)로 표현했다.

 

따라서 성철((性澈, 1912년~1993) 큰스님은 불생불멸이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이라 하셨으며, 팔만대장경 안에 부처님 말씀이 그렇듯 많고 많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쳤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원리인 것이고,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된다고 하셨다.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다행히 요즘은 과학만능시대이니까 과학이 불생불멸의 열쇠를 풀어주고 있다. 현대물리학인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이 등장하면서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 했다. 이들 소립자들은 다시 수많은 소립자들로 형성돼 상호의존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밝혀냈다. 즉, 우주는 양자적(소립자)으로 서로 얽혀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로서, 소립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생불멸(진여의 작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학적실험이 화엄사상과 법화사상을 너무나 확실하게 잘 말해주고 있다.

 

 

* 과학으로 증명되는 불생불멸 - 등가원리(等價原理)

 

 

인류역사에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돼 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해서 요즘은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됐다. 그만큼 불교원리는 과학적이란 말이기도 하다.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돼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質量), 이 두 가지로 구성돼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봤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로서, 서로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설명했으나, 요즘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한다. 질량이라는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이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서로 전환한다는 것은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리하여 50여 년 전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라 했다.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원자탄, 수소탄이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키면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이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 이것이 수소탄이 된다.

 

이로써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왔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앤더슨(Anderson, Carl David, 1905~1991)이다.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했다.

 

그 뒤에 세그레라(Emilio Segre)는, 독재자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에게 쫓겨 미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학자였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다.

 

이와 같이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 그대로이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돼 조금도 증감이 없다. 곧 부증불감이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法界)라고 한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이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이며 상주법계이다.

 

 

*맺는 말

 

 

현대과학계에서도 질량은 완전히 없앨 수 없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완전히 새로운 물질도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은 <반야심경>의 제법공상 불생불멸(諸法空相 不生不滅)과 잘 들어맞는다.

 

주인과 나그네가 있다고 하자. 항상 머무는 게 주인이고, 항상 왔다 갔다 하는 게 나그네이다. 중생은 항상 왔다 갔다 하는 그 나그네를 ‘나’로 여긴다. 변화 없이 항상 머무는 불생불멸의 진여불성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이 생멸하는 생각을 ‘나’로 여기는 한, 절대로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다. 자존심을 버려야 고통이 사라지는데, 불생불멸의 진여를 깨닫지 못하는 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과 얄팍한 자존심은 버리지 못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깨달음에는 먼 사람이다. 아상(我相)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여-불성-공」을 깨닫는 것만이 대안이다. 이 길밖에 없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불생불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 난해해 부처님의 혜안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과학이 고도로 발달돼 현대과학의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돼 있음을 증명해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2천 600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했고, 과학은 2천 600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해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한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다. 다만 부처님 혜안의 탁월함에 감탄할 뿐이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住法界)에는 증감과 거래(去來)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의 실상(實相)이다.

 

이상과 같이 이 세상 천삼라 지만상은 제행무상이다. 그런데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불생불멸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으므로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때문에 고(苦)이고, 무아(無我)이다.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라는 실체가 있을 수 없으니 무아인 것이다. 그런데 범부중생은 무상한 ’나‘를 두고 무상하지 않다 영원하다고 집착하니 고(苦)가 따른다. 따라서 제행무상이 범부중생에겐 고(苦)로 비치는 것이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거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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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한국불교 조계종 종지(宗旨)로서, 선종에서 깨달음을 설명한 말이다. 즉, 교학에 의지하지 않고, 좌선에 의해서 바로 사람의 마음을 직관해, 불(佛)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4구가 하나로 연결된 언구이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해야 견성성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의 세 구절은 모두 견성성불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며, 꼭 실천해야 하는 선(先) 수행의 단계이다. 이를 무시하고서는 선(禪)의 근본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며, 선 수행의 적격이라고도 할 수 없고, 물론 견성성불도 불가능하다. 마치 공중에다 ‘견성성불’이라는 누각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말이 선종과 교학종파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선종의 독특한 ‘구원론’을 담고 있다. 즉,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와 ‘어떻게 부처님의 마음 그 자체와 다시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은 곧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문자나 언어를 빌리거나 외적 대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마음을 잘 응시해서 직접 단번에 마음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마음 깊숙이 내재하는 순수한 본심, 순수한 본성에 투철(透徹)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구명(究明)하는 것이며, 자기에 투철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본마음을 직접 파악하는 것을 직지인심이라 한다.

 

   직지(直指)의 대상은 자기 밖이 아니라 자기 속에 존재한다. 때문에 밖에서 구하지 말고 안에서 구해야 한다. 마음 밖에서 찾는다면 외적 대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결과 망상과 미혹된 마음이 일어나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혜능(慧能) 대사나 임제(臨濟) 선사 등 여러 조사들은 밖을 향해 구하지 말라[막멱외구(莫覓外求)], 즉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경계의 말을 했다.

 

   본래 중생과 부처는 하나이다. 마치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다. 물을 떠난 얼음이 없듯이 중생 밖에 따로 부처는 없다. 바로 중생에게서 부처를 구해야지 멀리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말은 마음 밖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곧바로 본심, 본성에 투철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직관(直觀)은 즉각적으로 안다는 뜻이지만 불교의 직지(直指)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본래부터 갖고 있는 부처의 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 것을 일컫는다. 도(道)를 안다고 하지 않고 통(通)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지는 우주와 하나가 돼 소통하는 것인데, 그것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니라 분별심이다. 따라서 분별하지 말고 직지 하라는 말이다.

 

   불경의 가르침을 방편설(方便說)이라고 한다. 본래의 실법(實法)은 말로써 나타낼 수 없는데, 말을 수단 방편으로 삼아 실법을 암시한다고 해서 방편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설법(說法)을 듣고서 그 말의 뜻만 이해해서는 실법을 알았다고 할 수가 없고, 말 너머에 숨겨진 실법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방편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배우는 자는 손가락에 머물러 있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조사선(祖師禪)은 방편과 실법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그것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마음법을 바로 가리켜 보일 뿐, 달리 방편을 두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석가세존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린 것은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지, 꽃을 들어 올리는 행위 뒤에 숨어 있는 비밀한 뜻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趙州)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이다.(庭前柏樹子)”라고 답한 것이나, 운문 문언(雲門文偃) 선사의 ‘호떡(餬餠)!’이나 간시궐(乾屍厥-마른 똥 막대기), 이러한 말들은 모두 과거 부처님과 선대 조사(祖師)들이 똑같이 부른 멋진 교외별전의 곡(曲)이다. 이런 말들은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지, 잣나무나 호떡, 혹은 간시궐을 통해 다른 비밀한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찾아야 할 비밀한 뜻이 따로 있다면, 법(法)은 이법(二法)이 돼 분별심으로 떨어지게 되고, 불이법(不二法)과는 어긋나버린다. 직지인심은 그만큼 명쾌한 언어이다.

 

  

 

   그리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기본성을 보면, 즉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참나]을 깨쳐서 알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이 ‘견성성불’은 자기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쳐야 한다는 선종(禪宗)의 이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견(見)’이란 눈으로 본다, 돌이켜 본다, 터득 한다, 생각, 변별, 견해라고 하는 뜻이 담겨있다. 보는 것과 깨쳐 아는 것이라는 뜻이 함께 함축된 글자이다. 그리고 견성(見性)의 ‘성(性)’은 본심(本心), 본성(本性)을 말한다. 마음의 본질, 마음의 주체, 마음의 실체로서 선문에서는 불성(佛性), 자성(自性) 또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는데, 달마(達磨) 대사가 말한 마음도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본심,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견과 성이 합쳐진 말이 견성인데, ‘견성(見性)’이란 ‘견불성(見佛性)’의 준말로 “불성을 본다 - 깨친다”는 뜻이다. 불성은 곧 ‘중도(中道)’를 의미하며, 견성은 ‘중도의 자각’이다. 따라서 견성성불은 중도를 자각해 자기본성(본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본래의 자기면목(自己面目), 본시 그대로의 자기본성을 깨치면 성불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리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자기 본래면목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성불이 된다는 말이다.

 

   보통 깨달음의 경우 견성(見性)이라 하고, 일반적인 식견은 견해(見解)라 한다. 즉, 진리의 영역을 견성이라 하고, 지식의 영역을 견해라 한다.

 

   ‘견성(見性)’이란 말은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연 달마(達磨, ?~528) 대사가 중국에 와서 "이심전심 견성성불(以心傳心 見性成佛)"이란 말을 했는지 역사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혜능 이전엔 ‘관조(觀照)’ 또는 ‘적조(寂照)’란 말로서 깨달음을 보편화하고 있었다. 이를 혜능이 "조(照)" 대신에 ‘견(見)’을 넣어 "견성"이라고 한 것이다.

 

   <육조단경> ‘반야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 본래 스스로의 성품이 청정하니 만약 자신의 이 마음을 알면 그대로 견성이라, 모두 도를 이루리라(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부처이며, 이 본래 성품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本性是佛 離性無別佛)”

 

   이러한 생각은 부처는 하나가 아니라 ‘모든 중생이 스스로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승의 불성설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을 선불교에서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며, ‘자성이 부처(自性是佛)’라는 심성(心性) 이해로 받아들여 성립시킨 사상이 곧 견성성불설이다.

 

   세상을 지식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형상에는 변함이 없지만 다른 점도 있다. 우리의 인식, 다시 말해서 안식(眼識)의 허망함을 알고, 안식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무상(無想)의 상태가 견성이다. 본연의 자기는 항상 존재하는데 어째서 보지 못할까, 생각에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 구름이 계속 덮여 있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그 흐림을 걷어내고 본성을 보는 것이 견성이요, 진리의 발견이고, 깨달음이다. 결국 견성(見性), 성불(成佛), 해탈(解脫), 득도(得道), 돈오(頓悟), 혜오(慧悟), 확철대오(廓徹大悟), 깨침 등이 모두 같은 말이다.

 

   달마(達磨) 조사, 그리고 육조 혜능(慧能) 선사도 성품을 보면 ― 각자의 본래면목(본성)을 보면, 부처를 이룬 것과 같다[견성성불(見性成佛)]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불성 그대로인데, 경계에 따라 본성이 흐려지는 것이므로, 그 흐림을 걷어내고 본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라 했다. 즉 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불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 견성이다.

 

   부처의 성품이 있는 것과, 부처의 성품을 발견하는 것과, 부처의 성품을 완전히 드러낸 것에는 차이가 있다. 부처의 성품을 한번 힐끗 봤다고 부처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중생에겐 불성이 있지만 가려져 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불성이 가려져 있느냐, 완전히 드러나 있느냐 하는 차이다. 뭐가 가리느냐, 바로 망념에 물든 내 마음이 가리고 있다. 그래서 자꾸 마음을 비워라,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이 마음, 움직이는 이 마음은 허상이고, ‘나’가 아니다. 그냥 생겼다가 사라지는 생각의 파편들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구름에 가린 하늘과 같다. 그래서 하늘의 태양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거기에서 빛나고 있다. 그 구름을 단 한방에 모조리 치워버리는 것이 돈오(頓悟)이고, 꾸준히 수행을 하면서 조금씩 치워나가는 것이 점오(漸悟)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보통 일반적으로 말하는 마음과는 어느 정도 다른 것이다. 보통 말하는 마음은 마음의 본질이나 본체의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견성은 마음의 본질로서의 자기 본심, 자기 본성, 자기 불성을 투철히 보는 것이다. 따라서 견성은 불성이라고 한다. 이때의 견성(見性)은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견성 그대로 마음이자 본성이자 불성인 것이다. 육조 혜능(慧能) 대사가 말한 견성은 바로 달마 대사가 말한 마음이다. 봄(見)이 곧 마음이요, 봄(見)이 곧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불은 중생이 수행을 통해 미혹이나 망상을 없애고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선문(禪門)에서는 단박에 깨달아 부처를 이룬다(頓悟成佛)고 해서 단계적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깨달아 정각(正覺)을 성취한다고 설하고 있다. 성불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문에서 말하는 성불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불(佛)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는 붓다(Buddha)이며, 한역으로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각(覺)은 자기를 주시하는 것이며, 자각하는 것이며, 깨닫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발심해 깨달은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성불은 쉽게 말하면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견성성불은 그 불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인간의 원점에 자리 잡는 것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희들 본성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니,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정견(正見)이라 하고,…… 오직 본원(本源)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과 깨달음의 본체가 원만하고 밝다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것을 일컬어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었다[견성성불]고 한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본성을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선종(禪宗)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본성[불성]을 밝고 바르게 보아 앎으로써 정각(正覺)을 이루면 성불한다는,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 교종(敎宗)이라면, 선종은 부처님의 마음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학수행이나 계율을 통해 마음을 맑게 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교종과는 달리, 선종에서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단번에 깨쳐서 - 돈오(頓悟)하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문득 깨쳐서 자기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면, 그렇게 해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찾으면, 즉 견성하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달마의 견성성불설을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달마 스님은 사람들이 헷갈리기 좋도록 교묘하게 암시와 최면을 걸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구절 속에 들어있는 ‘성불(成佛)’이 그것이다. 이 한 마디 때문에 사람들은 달마의 선이 마치 성불의 첩경인 줄로 깜빡 속고 말았다.…

 

   달마는 직지인심(直旨人心)해서 견성(見性)하면 그 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헛소리를 했다. 공부도 필요 없고, 경전도 소용없으며, 근기도 막론이고, 아저씨나, 아줌마나 할배나 할매나, 심지어 개나 소나 전부 자기 마음 하나 척 바로 보고 자기 본성을 척 보면 곧바로 부처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달마 이후 천년이상 지나도록 마음 하나 바로 보고 곧바로 앉은 자리에서 성불한 사람이 과연 있는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가 하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견성성불은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阿羅漢)이 되는 것을 말한다는 주장도 있다.

 

   인간은 구조상 아라한(阿羅漢) 이상은 오를 수 없다. 중생은 아라한이 한계이다. 따라서 견성즉성불(見性卽成佛)이란 위험한 표현이다. 화두 참구를 통해 얻은 견성은 이제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다. 자성(自性)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으나 시작도 없는 옛날부터 무시겁(無始劫)으로 내려오면서 쌓아온 기(氣)와 습(習)은 그렇게 단박에 사라지지 않는다. 업장도 자기 힘만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백겁동안 지은 죄업이라도 한 생각 깨쳐 광명을 보면 찰나에 없어진다 ―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라 하는 말도 이치상으로는 말이 되는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오직 붓다의 화신에게만 가능하다.

 

   흔히 선가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새벽 별을 보고 깨쳐 붓다가 되셨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확철대오 했다고 해서 붓다라고 할 수 없다. 오랜 생(生) 동안 여러 단계와 관문을 통과해서 불신(佛身)을 얻어야 붓다가 되는 것이다. 대오견성은 아라한 자리에 이른 것에 불과하다.

 

   부처님 입멸 후 수백 년이 지나자 부처님 당시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달해 윤회를 끊는 것보다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보살행을 하며 모든 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윤회를 끊지 않고 어딘가에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를 반복하는 사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시지 않은 수많은 보살이 출현하고 수만 억 불국토와 수만 억 부처님이 출현하고, 드디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이론까지 나왔다. 헌데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아론(無我論)에 완전히 반대 되는, 재생이 아닌 환생이론으로 바뀌면서, 힌두교의 자아(아트만)사상이 삽입된 변질된 불교가 됐다.

 

   윤회를 끊어 완전히 소멸되는 것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이라는 근사한 삶을 사는 환생을 중생들이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이러한 현란한 이론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게 돼,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선불교(禪佛敎)가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불교는 대승불교에서 보살행을 강조한 것에 반발해 마음만 깨치면 부처라는 견성성불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성불은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阿羅漢)’을 지칭하는 것이다. 결코 18불공법을 지닌 부처님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불교의 견성성불은 오온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성과 탐 ․ 진 ․ 치라는 모든 번뇌나 집착을 소멸한 아라한의 경지를 성불이다.

 

   부처님 입멸로 불교가 힘을 잃게 되면서 해탈 열반보다는 보살행을 주장하는 대승불교가 일어났고, 다시 이런 대승불교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선불교가 일어나면서 보살행을 강조하지 않고 우선 자신의 견성성불을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있으나 이런 주장들에는 지나친 비약의 논리들이 잠재해 있다. 더구나 견성성불이 곧 아라한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궤변이다. 선가에서 그런 말을 한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창작적 주장일 뿐이다. 일면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선가에서 보살을 폄하하지도 않으며, 소승의 아라한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치 선불교가 대승불교에 반발해서 출현한 것처럼 말하는데, 허긴 불교(대승)가 힌두화 하는데 반발해서 달마가 중국으로 왔겠지마는 어디까지나 선불교도 대승불교의 하나이고, 크게 대승불교 틀 안에 있는 종파일 따름이다.

 

   이런 오해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견성성불(見性成佛)’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견성성불에서 ‘성불(成佛)’이라 하지만 감히 석가모니부처님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성불’이라고 하니, 어떤 사람은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문에서 말하는 성불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그리고 본래 중생과 부처는 하나이다. 마치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다. 물을 떠난 얼음이 없듯이 중생 밖에 따로 부처는 없다. 바로 중생에게서 부처를 구해야지 멀리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중생 중에서 부처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 수준의 부처란 말이다. 부처라 하니까 석가모니부처님만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에 나왔던 말들을 정리를 해보자.

 

    • 자기 본래면목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성불이 된다는 말이다.

 

    • 견성은 ‘중도의 자각’이다.

 

    • 따라서 견성성불은 중도를 자각해 자기본성(본마음)을 깨치는 것을 말한다.

 

    • 진리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자기 본래면목을 찾게 되면 그것이 곧 성불이다.

 

    • 본시 그대로의 자기본성을 깨치는 것이 성불이다.

 

    • 자기 본래의 성품인 불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 견성이다.

 

    •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다.

 

    • 성불은 본래의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참나]을 깨쳐서 알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위에 적혀 있는 말들의 공통점은 결코 석가모니부처님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성불(成佛)에서 ‘불(佛)’을 석가모니부처님 정도로 너무 크게 생각하니 여러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가 보니 수천 년 동안 부처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 소리를 하게 된다.

 

   위에서 말하는 ‘성불’은 다만 본래면목을 찾는 것, 중도의 자각, 자기 본성을 깨치는 것, 불성을 깨치는 것, 본래의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이룬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아미타불 그런 부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성불은 쉽게 말하면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때문에 성불(成佛)에서 ‘불(佛)은 글자 원래의 뜻에도 있듯이 ‘깨친 사람’, ‘견성한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니다. 다만 깨친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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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의 본질本質과 의미意味 (고우 큰스님 법문)]

                 - 고우스님 (경북 봉화군 금봉암)-
                                           

 

참선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이렇게 물으면 양반이 왜 쌍놈이 되려고 노력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선은 우리가 논의해서 말로 하거나 들을 때 우리 눈동자에 모래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머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깨달은 분이 선의 본질을 드러내 대중에게 설법함에,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옥 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낸 것과 같습니다. , 법을 일러준 선사도 괜히 백옥 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만든 것과 같고 물어서 깨닫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게 선입니다. 이 일구(一句)의 세계는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어 진리라 하고 삶이자 사실이고 본래 모습인데, 여기에는 닦는다느니 증득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군더더기이며 사족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선은 대부분 화두 들고 참구하는 것으로만 아는데,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인가, 꼭 해야 하는가?

여러분 선은 왜 닦습니까? 과연 선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 신도님들이 제 말씀을 듣고 있는 것, 바로 그게 선입니다. 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제 말 듣고 보는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간화선이 위기다, 침체한다.’ 이런 소리는 누워서 침 뱉는 격입니다. 이는 특정인이 아닌 우리 전부의 책임이자 허물입니다.

 

내 자신이 선이기 때문에, 부처요 불성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부처님께선 깨치고 보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하고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했습니다. 존재가 연기이자 법이며 여래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선이고 부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되기 위해 참선한다는 생각을 내면 틀린 소리일 뿐더러 시간만 낭비됩니다. 이 존재 자체가 선이요 부처란 사실을 오늘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열반경><아함경> 등 많은 경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이를 믿지 않으면 허송세월하기 십상입니다.

 

불성이 내 몸의 일부에, 잡초 속의 금덩어리처럼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듣고 보는 마음과 몸뚱이도 부처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여서 똑같은 작용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과 같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우리는 다 부처님입니다. 뒤에 계시는 불단 위의 부처님도, 이 마이크도 컵도, 이 법당도 다 부처님입니다. 물론 이해 없이 믿는 것은 맹신의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왜 부처인지 알면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법은 곧 연기이자 공이기에 무아인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입니다. 이를 철저히 깨는 것이 선종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연기를 가장 정확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선은 다만 체험을 강조할 뿐, ‘본래 성불임을 철저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다른 종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지만, 선종은 진리와 사실 그자체인 달만 인정하기에 최상승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간화선 선수행자들이 많이 참석하셨지만, 그 화두를 정신통일이나 의심하기 위해 드는 것이라고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화두는 의심하기 위한 것도, 정신집중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간화선은 서기 1000년 전후 대혜 스님이 주창했습니다. 그 이전 250 여 년 전 마조 스님 시대에만 하더라도 의심하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조 스님 당시엔 어떻게 의심했을까요?

 

어느 날 늑담법회(?潭法會) 스님이 마조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스님께서는 나지막히 속삭였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찾아오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법회 스님은 다음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은 돌아가고 내가 상당(上堂)할 때를 기다렸다가 나오게.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 스님은 여기서 바로 깨닫고 말했습니다.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가버렸습니다.

 

마조 스님은 법회 스님에게 여럿이 있을 때도, 단 둘이 있을 때도 무엇이 선인가(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연 반대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분별심을 떠난 존재의 원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 법회 스님은 밤새도록 큰 의심을 낸 후 다음 날 질문했을 겁니다. 요즘 선사라면 모르면 의심해라. 그리고 해답을 가져오너라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조 스님은 자연스럽게 의심을 돈발시킨 것입니다. 결국 의심하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고, 답을 몰라서 저절로 의심이 드는 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 서장>의 저자인 대혜 스님도 무턱대고 의심하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의심하라 했지, 의심하기 위해 화두 들라 한 게 아닙니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 분별을 초월한 것이 화두입니다. 분별하는 한 화두를 타파할 수 없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꽝 부서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회 스님이 마조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초음파, 하는 순간에 깨달아야 합니다. 주객으로 나뉜 내 의식을 한방에 깨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이게 공부이고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식의 그 말을 통해서 바로 깨달으면 됩니다. 그런데 깨치라고 제시하는데 못 깨치니까, 하는 수 없이 의심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도 둔근기들에게는 깨치게 하는 방법이니까 그냥 놔두는 거죠. 의심하라고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될까봐 <선요(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고 했어요. 콩하고 보리도 못가르는 놈, 신랑하고 종을 못 가리는 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은 쑥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 그러니 선종은 철저히 상대 개념을 벗어나서 절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겁니다. 쑥맥도 모르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최상승 공부를 하고 있고 최고 근기다 하면 그 분상 의식구조에서는 목과 어깨에 기브스하게 되죠. 그런 스님과 신도가 많이 있잖아요. 폼으로 공부하기 위한 공부, 의심하기 위한 의심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어떤 고정관념도 무장해제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나니 내안에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내 안에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안거지요. 그래서 선어록에도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게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깨칠 것이 있고 얻을 게 있다는 공부는 그래서 잘못된 선 공부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라는 본래 성불임을 알고 공부 하는 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공부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고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어서도 안 됩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불교를 허무적인 종교로 표현했지만, 절대 그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그 자리로 돌아가면 하늘에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서 햇빛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지혜광명입니다. 그래서 이 공()을 깨달으면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서 평등하고 편안하게 끄달림도 없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좋은 것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아도 싫어하지 않는, 양변을 초월한 자유자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 성불을 전제로 공부하는 것과 있다 없다를 구별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성불을 믿고 이해하면 금생에 확철대오는 못해도 정()과 사()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재수, 삼수를 하더라도 알고 공부하면 내생에는 그 힘으로 재수하지 않고 합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불의 수행전통을 잘 이어오고 있는 것이 선종이고, 이런 조사선의 전통은 한국 불교만이 바르게 잇고 있습니다. 중국은 선종의 유적지만 남아있으며 참선하는 분들이 매우 적습니다. 일본의 선은 화두를 하나하나 타파해 가는 소위 사다리 참선으로 변형이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가 손가락 불교가 아닌 달 불교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세계적으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선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합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던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중국의 운문문언(?~949) 스님은 어떻게 하면 날마다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운문문언 스님이 어느날 대중에게 말하기를 “15일 이전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지만, 15일 이후에 대해서는 한 구절 말해보라하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매일매일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고 했습니다. 범부의 세계에서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가 양변으로 나눠집니다. 나다 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않고 초월한 사람, 즉 공을 깨달은 사람은 날마다 좋은 날인 것입니다. 무아, 연기, 중도를 체득하고 사는 삶은 매일 좋은 날인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부처인 줄 알면 생로병사마저 진리로 바라보는 눈이 생깁니다.

 

본래부처자리를 알면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이혼율도 낮아지고, 전쟁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 전쟁비용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돕는 다면 예산이 남아 돌 겁니다. 구치소와 교도소에서는 범죄인들이 사라지고 남북통일도 하루아침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끝없는 갈등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을 나는 부시형()’이라 합니다. 부시형, 그게 일반 세계의 대응논리고 삶이죠. 그게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이런 것이 모두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에서 나오는 거죠. 인류가 모두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가 부처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라와 사회 간의 갈등과 대립은 이 중도(中道)가 아니고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해 틱낫한스님의 서울 방문과 달라이 라마의 저서들은 한국의 수행 붐 조성에 일조하였습니다. 그걸 보고 느낀 것이 우리나라에도 한국불교의 특색을 가진 국제적인 선 센터를 만들어 한 5년 동안 프로그램을 짜서 국내인부터 교육시키면 외국인도 저절로 배우러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틱낫한스님의 <>라는 책은 화를 삭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애초부터 화라는 게 없고 오직 연민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동네에서는 환대와 선물을 받고, 다른 동네에서는 모욕을 선물로 받았지만 좋은 선물, 나쁜 선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분별심을 여의었으니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욕했던 동네 사람과 욕을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하는 아난에게 모두 연민을 느낀 겁니다. 공을 깨달으면 분노와 미움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으로 반응합니다. ()는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는 상대방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자비심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반대로 증오와 미움은 엄청난 자기 학대입니다.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운동을 벌인 적이 있지만, <육조단경>에는 남의 허물 보지 말고 자기 허물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사랑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하는 게 가능합니다. 결국 남을 돕는 것은 나를 위하는 일인 겁니다. 본래 부처의 효능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즐겁고 슬프고, 나다 너다, 천하고 귀하다 하는 양변의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버릴 때 스스로가 짓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똥 푸는 사람에게도 가치와 의미를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직업에는 천하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3D업종에 사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일하고 남을 돕고 사는 살면 귀하고, 국왕이라도 국민을 괴롭히면 천한 사람입니다. 비교 안하는 마음, 실체가 없다는 그 자리, 이라는 그 자리를 이해하게 되면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권력과 부를 부정적으로만 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달다장자가 있었습니다. 장자는 재산이 굉장히 많은 부자였는데 부처님께서 무상(無相)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를 강조하시니까 고민이 되어 부처님께 재산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쭈니까 부처님께선 너는 더 가져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수달다는 한역하면 급고독(給孤獨)입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에게 보시를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큰 것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절대 행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속되는 행복입니다. 생로병사까지 진리로 보고 해탈할 수 있는 행복 말입니다.

 

이런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한 참선은 판결을 잘못해 친구를 사형시킨 충격으로 출가해서 일심으로 공부한 효봉스님과 같은 큰 발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사연으론 효봉스님과 같은 발심의 지속은 불가능합니다. ‘고봉스님은 제자의 멱살을 잡고 몽둥이질을 하며 송장 끌고 다니는 그놈을 알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고봉스님의 방만 쳐다봐도 머리가 아팠겠지만, 그 분심으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그렇게 발심을 내도록 때려가며 인도하는 스승이 적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스스로 발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행복하게 사는 길을 일러줍니다. 존재의 원리를 깨달아 바른 사고와 행위로 살도록 합니다.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멋진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한번 제대로 발심하여 참선공부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 고우 스님은>

1937년 성주 생으로 20살 때 청암사 수도암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운 후 제방 선원에서 정진. 1968~9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지는 등 봉암사 축서사 금영사 용주사 각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 법랍 47.

 

< 즉문즉답(卽問卽答)>

고우 스님의 법문이 끝난 후 바로 즉문즉답(卽問卽答) 시간이 이어졌다.

50대 거사가 일어나 질문했다.

아뢰야식(8)은 자성(自性)과 같습니까. 다른 것입니까?”

고우 스님은 좋은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아뢰야식과 자성은 같다고도 할 수 있지만 효능면에서는 다릅니다. 아뢰야식, 이 정도만 알아도 담담해서 악한 생각과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경지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를 극복해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뢰야식을 보고 착각해서 공부를 멈추고 맙니다.”

 

충주에서 올라왔다는 30대 거사의 두 번째 질문은 더욱 난해했다.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여 무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입니까?”

고우 스님은 두 번째 질문에도 주저 없이 답변했다.

세계의 학자들이 한평생 연구하는 분야가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 라는 윤회와 무아에 대한 주제입니다. 우리나라의 호진스님도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딴 걸로 압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에 평생 몰두하지만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풀립니다. 윤회의 주체는 아시다시피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그러나 아뢰야식 역시 연기된 현상이기에 이 윤회하는 식 역시, 무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연기된 것이기에 무아(제법무아)’라고 하셨듯이 전혀 이론적으로 상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공이자 연기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컵을 들며) 여러분은 이것이 꽉 찬 걸로 보이겠지만, 이 컵이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세 번째 역시 50대 거사의 질문.

스님께서는 의심을 내기 위한 의심은 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참 의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래성불인 그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의심이 필요하겠지요. <선요>에서도 대분심, 대의심, 대신심을 공부의 필수요건으로 말했지만, 이를 다 갖추더라도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떨어져 있는 꼴입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도록 용맹정진해도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큰 의심이 든 것이고, 이걸 깨치면 성불입니다. 왜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가를 알면 얻은 게 없이 이미 다 갖춰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의심을 크게 하려면 분심과 신심이 바탕이 돼야 함은 물론입니다.”

 

<수행법>

고우 스님의 수행법은 닦을 것이 없음을 닦는무수지수(無修之修)의 단박깨침(頓悟)을 강조하는 정통 조사선, 즉 최상승선의 입장이기에 따로이 수행법이 없다고 해야 정답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굳이 설명하자면,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 한 생각 일어 난 그 자리를 돌이켜 비춰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공부로 요약된다.

 

“<선요>에서는 물을 져다가 우물에 붓듯이, 물에 비친 달 건지듯이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우물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더 차지 않고, 물에 비친 달을 아무리 건지려 해도 얻어지지 않듯이 깨달을 것이란 없습니다. 보고 듣는 그놈이 하는 일이니, 집착만 세탁해 버리면 됩니다.”

 

고우 스님은 여러 수행법을 닦더라도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꼭 믿고 해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참선뿐만 아니라 봉사, 주력, 염불도 좋다고 한다. ‘본래 성불임을 믿고 근기에 맞게 공부하되 주의할 점은 자기를 비우고 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고우 스님은 선()은 부처님의 오리지널 수행법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육조 스님의 제자인 영가스님은 사마타를 적적성성(寂寂惺惺)’, 위빠사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으로 표현했습니다. 6바라밀 수행과 염불, 주력, 참선 등의 모든 수행법이 적적성성을 강조합니다. ‘성성은 혼침(昏沈, 조는 것)하지 않는 것이며, 적적은 도거(掉擧, 망상)’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외도는 적적(寂寂)만을 강조해서 삼매에 들면 모든 행위가 정지되지만, 불교 삼매(三昧)는 모든 행위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고우 스님은 늘 성성적적한 공부를 통해 삼매에 들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양쪽 다 삼매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특색이라고 말한다. 고우 스님이 <육조단경> ‘정혜불이품정혜(定慧)가 하나가 되더라도 도가 아니다. 하나가 되어 통류해야 한다라는 대목을 보다가 안목이 열린 것도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행에 앞서 중도연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바로 보는 정견(正見)이 가장 중요하다는 고우 스님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좋은날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분별심을 버리고 비우고 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고우 스님은 이날 법회에서 강정진 법사가 펴낸 <영원한 대자유인>과 관련, “그 책에서는 수행법도, 깨달음도 방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조사선에서는 그런 설명은 발도 붙일 수 없기에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 간화선 중흥을 위한 선원장 초청 대법회 -

출처 :수미산 원문보기글쓴이 : 시공

 

우리가 본래 부처(본래 성불, 본래 참 나, 자성불自性佛)라는 진실을 믿지 못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 학습한 것(무명無明, 아상我相, 내 생각, 고정관념, 알음알이, 지식)으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해서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하기 때문입니다.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에 이르기를.....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 지극한 도(최상의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다시 말해서 지극한 도는 사실상 어렵지 않다. 오직 좋다-나쁘다, 밉다-곱다, 옳다-그르다 등의 간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 , , ,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분별도 없는데 이때 인식하게 하는 그놈이 바로 참 나(진여)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 받아들이는데 이것도 참 나의 다른 모습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진여의 다른 모습일 뿐 그 본질(, 본성本性)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주관하는 그 주인공을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깊게 돌이켜 비추어보는 반조返照를 행하여야 합니다.

 

참 나를 찾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참 나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참 나는 내가 나쁜 생각(, 이기적)을 하면 나쁘게 작용하고 좋은 생각(, 이타적)을 하면 좋게 작용합니다. ‘참 나는 작용만 있을 뿐 어떠한 것도 붙어있지 않아서 텅 비어있습니다. 텅비어있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무의 개념이 아니라 대상(인연, 조건, 여건)을 만나면 그 대상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전지전능, 진공묘유眞空妙有)을 현상적으로 펼쳐 보인다는 뜻입니다.

 

참 나자리에는 어떠한 것도 붙을 수 없다는 말은, 그 자리는 본래 열반涅槃이고, 본래 깨달아 있기 때문에 닦을 것도 없고, 어떠한 것을 해도 한 일이 없습니다. ‘참 나는 마치 태양 빛과 같아서 늘 빛을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현상계 모든 것은 에고Ego(자아自我, 개개인의 존재)의 입장에서 있는 일입니다. ‘돈오돈수라는 말도, 에고의 입장에서 깨닫고 보니 참 나는 본래 깨달아있고 본래 더 닦을 것이 없다는 진실을 알았다는 말일 뿐, 에고의 입장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깨닫는 즉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에고는 끝없이 관리해야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참 나무오무수無悟無修(본래 깨달을 것도 없고 본래 닦을 것도 없다. 본래 깨달음 그 자체고 본래 청정하다.)’입니다.

 

모든 것을 참 나에게 맡기고 살아가라는 말은 참 나의 성품인 원리대로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선문답禪問答이나 화두話頭, 군대에서 사용하는 암구호와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나리라고 했을 때 진달래라고 응답을 하면 아군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군임을 즉시에 알아차리는데 암구호의 의미가 있듯이, 툭 던지는 한 마디 말과 동시에 참 나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나야합니다(언하대오言下大悟, 조사선祖師禪).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의심을 품고 이뭐꼬를 하는 것이 화두선話頭禪으로 바뀐 것입니다.

 

깨달음의 대상은 참 나(진여)’의 성품인 원리(진리)를 하나로 통합한 중도中道를 체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지혜입니다. 이때의 지혜완성된 중도의 지혜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것을 이익 되게 합니다.

이것을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깨닫지 못한 상태로 그냥 나누기 때문에(상생相生) 보살행이라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결과로 나누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 공空의 의미 *
우주만상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거나 바뀌고 있으며, 변하고 바뀌는 과정에 이것과 저것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관계로 그 존재가 가능합니다.전자는 ‘무상공無常空’이라하고 후자는 ‘연기공緣起空’이라 합니다.무상하기 때문에 공하고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공하다고하며 이말은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할 만한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이 없다(무자성無自性)는 의미로서 무아無我를 뜻합니다.

무아란?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있기는 있으나 나라고 할 만한 고정불변의 스스로의 성품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혼재되어 한시적限時的으로 가립假立된 존재이므로 ‘나’아닌 것이 인연(상황, 여건, 조건)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비아非我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아공我空이라하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만상이 다 그러하기 때문에 법공法空이라 합니다.

무상을 알면 욕심(바라는 마음)이 없어지고, 연기를 알면 모든 것을 하나(전체)로 연결해서 보고 이것과 저것의 주고받는 관계성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필요치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진실을 꿰뚫어 알게 됩니다. 인간 중심으로 보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으나 전체로 보면 상생相生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무상을 보고 연기를 보면 공을 보고 공을 보면 여래如來를 본다고 하였기 때문에 공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으면 무궁무진한 지혜가 발현되고, 이 지혜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 예로서,남편이 술을 좋아해 가정을 돌보지 않고 매일 친구들과 어울리고 술에 취해 들어온다면 이 사실을 좋아할 아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의 입장에서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같이 어울려 노는 사람들과 술을 파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연 따라 좋고 나쁨은 있으나 고정불변의 좋고 나쁨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자성이고 공하다는 말입니다.나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보면 모든 것에 분별이 있고 차별이 있으나 전체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분별과 차별이 없다는 것이 진리(원리)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전체를 보고 전체를 볼 때 지혜는 발현됩니다.

지혜는 늘 너와 나를 이익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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