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차도를 지나는데 차가 몹시 정체 되였다

앞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 2차선 차로가 1차선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2차선을 가던 차들은 1차선으로 차로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서서히 한대 한대 손 깍지 끼듯이

끼어들어 가기때문에 1차선을 가던 차들이 양보를 해주어야만 하는 상황 이였다.

앞 차들이 한대한대 끼어어들어 차선을 바꾸어 나가고 내 차례가 되여 왼쪽 깜박이를 켜고

끼어드는데 1차선에 있는 차가 양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 온다.

양쪽 비상 깜박이를 캄박거리며 조심스래 들어가면서 빽미러를 바라보는데 여전히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밀어 붙힌다,

이러다가는 사고가 발생 할것 같아 멈추어 그차를 보내고 다음 차의 양보를 받아 빠져 나갔다,

도대체 매너가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그차 옆으로 가면서 왼쪽 창문을 내리고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그랬나 싶어 쏘아 보았더니

"뭐가 어떼서" 라듯이  창문을 내리고 상대도 나를 뻔뻔스런 얼굴로 쏘아본다,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나이지만 나만 생각하는 요즘 신세대들의 이기적인 그런 인상이였다.

그럼 그렇지 그래서 양보를 안해주고 밀어 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런 말도 없이 창문을 올렸다,

어쨌던 상대는 해주기 싫어서 그렀겠지만 그렇다고 왜 상대를 얄밉다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내가 스스로

짜증을 내며 화를 낸단 말인가?  그것은 당연히 양보를 해주기를 바랜는데 안해줘서 그랬던 것이다,

바라는 것은 내 생각이였고 안해준것은 상대의 생각인것이다,

이렇게 바램이 있어 안 되면 화가 난는 것이다,

화를 내고 있는 내 자신이 어리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보는 상대의 선택일 뿐이고. 난 상황에 따라 해결하면 되는데 내 욕구데로 안됐다고 상대를 원망하면서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를 내면 상대가 괴로운것이 아니고 내가 괴로운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을 취하지 말고 괴로움이 없이 여여부동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다.

열반은(행복한 마음) 즉 상이 없는 마음이다. 

분별심이나 차별심 간택심을 버리고 이타심[利他心]을 갖는 것이 보살의 정신이다,

이럴때 그래 바쁜 모양이다, 내가 양보를 받아야 하지만 이럴 땐 내가 양보를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괴로운게 아니고 행복할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 유심조다.

한생각 바꾸면은 괴로움이 편안함으로 전도 되는 것이다.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오는 인과의 법칙은 좋지 않은 나뿐 생각은 해가 되지만 좋은 생각은 득이된다,

남을 탓하기전 먼저 자신을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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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고통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의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것이 다 인연으로 인하여 발생 된다고 보면 될것이다.

곧 인연이라고 하면 "인"이라는 종자가 "연"이라는 간접적 원인이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나타나는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반듯이 주고 받는 관계속에서 인연이 맺어지게 되며 이 인연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두터워지고 가까워져서 서로가 호감을 갖게되고 뭔가 좋아지고 이익이 될것 같아서 결혼을 하게

될수도 있고 결과로 가정이 만들어지게 된다.

 

인연은 우연은 없다고 볼수있으며 어쩌면 필연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서로가 주고 받을것이 많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주고 받을 것이 많다는 것은 관심과 생각이 많아 오가는 인연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연이 맺어지게 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과거의 어떤 인연이 무의식에 저장되여있는

업식으로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포장이 되여 좋아하게 되면서

이루어지게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인연도 어떤 인연이 됐던 만날수 밖에 없는 과거의 결과라고 볼수 있다.

 

살아가면서 서로 맘에 들지않고 기대치에 어긋나면 미워지게 되고 

아니면 그냥 보고 살자니 답답하고 어떻게 고쳤으면하고 바라지만 안고쳐지니 

어떻게 하면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살수 있을까? 

 

괴로운 것은 내가 나를 괴롭힐 뿐이지 누가 나를 괴롭게해서 괴로운 경우는 드문일이다,

비가오면 온다고 불만이고 눈이오면 온다고 바람이불면 분다고 투정을 부리면서 자신을

괴롭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밖으로부터 괴로움이 오는줄 알고 대상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힘들어 하는데

이것도 자업자득 이라고 할수 있다, 

 

내가 있고 내것이 있고 내생각이 올다라고 고집하게 되면 반듯이 상이라는 찌거기가 남게되여

내생각대로 남을 고치려하고 내 생각데로 되여(바꿔)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여

바로 괴로움의 씨앗이 발연이 되고 내가 힘들어지게 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 물질 즉 지수화풍으로 형성되여

있으므로 "이것이 나다" 라고 할수가 없는 것이기에 무아 즉 비아라고 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자세히 분석해보면 오온으로 되여있다,

오온은 반야심경에 색수상행식이며 색은 형상 즉 지수화풍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작용을 말한다,

이와 같이 나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속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연생하면서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나를 지켜보고 상대를 이해하고 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꿀수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부관계도 서로 생각이 안맞아 다툴때가 있다

곧 내 생각이 올고 상대 생각이 맞지 안다고 나를 고집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감정적 경계가 일어날때  알아차리면서 "그래 나는 무아다" 라고 생각을 바꾸면서

"실체가 없는 공이며 연기 중도다"라고 한생각 바꾸면 싸울일이 없어지고 나도 좋고 상대도

좋고 서로 좋아 이것이 중도의 생각인 것이다, 

 

원리와 이치 알고보면 괴로워 할것이 아닌데 인식상의 착각으로 자기생각에 사로잡혀

원망하게 되고 짜증을 내면서 자신만을 학대하는 것이다,

내가 괴로우면 옆에 가족들도 괴롭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있는 방이 밝으면 같이 있는 사람도

같이 밝아지는 것이다,이왕에 살바에야 행복하게 살아야지 왜 굳이 괴롭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두운 곳에서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내 자신의 주인이 되여 밝고 행복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생각할수 있다

뜨거운 감자를 들고 괴로워 할것이 아니라 바로 놓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한 생각만 놓아 버리면 된다. 아 그럴수도 있겠다, 다행이다,

그런데 먹고싶은 용망에 놓지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괴로워 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것인데 이미 사라져버린 생각에 묶여서

목을 맨 강아지처럼 캥캥거리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생각이 내 생각과 어긋나거나 행위가 거슬리면은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를 하던지

아니면 "내가 화가나고 있구나"하고 자신을 알아차리고 놓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왜 저럴수가 있어 나하고는 정말 안 맞어" 하면서 오해와 분노를 만들고 자꾸 가지를

치고 세끼를 치면서 고리를 만들어 나가면 엉켜진 실타래처럼 더욱더 복잡하게 되면서 곧 내 자신이

괴롭게 되는 것이다, 내가 행복 할려면 나를 방어하라.

괴로움이 침투하는 생각의 길을 막아버려라.

그리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럴때는 한번에 싹 잘라 버리던지 아예 "에이 모르겠다" 하면서 멀리 던져 버리면 되는 것이다,

모든것은 연기중도다, 실체가 없는 공이다」라고 한 생각을 싹 돌려 버리면 되는 것이다,

유위법은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모든것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개불처럼 허망하고 무상하게 여기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한 마음 한생각으로 웃기도하고 울기도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놈을 본적은 한번도 없지만

이것이 만상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 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일뿐이다, 나와 상대를 비교하면서 올다 그르다 판단을 하는것은 곧 시비를 만드는 것이다,

대상을 보면 있는 그대로 볼뿐 내 생각대로 보면서 스스로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강건너 불을 보듯이 남의 일은 참견하지 말고 그냥 지켜만 봐야한다. 

내 생각데로 그를 고치려 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괴로울 뿐이므로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생각을 버리면 시비할 일이 없으므로 불취어상 여여 부동 할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이라고 했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도

소리도 없어 감히 얻을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 내가 올다는 생각 즉 집착하는 마음(생각)이 나를 괴롭게 하는 원인인 것이다

세상에는 올은 것도 그른것도 없다해서 무유정법이라고 한다,

내 생각을 버리면 세상과 나는 둘이아니다. 나라는 생각을 하면 상대와 내가 둘이 되며 양극이

되기 때문에 마찰이 일어날수 있다, 한생각이 일어날때 이뭣고로 돌리면서 알아차려라.

수행은 곧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내 잘 못된 습관을 고칠수 있는것이다,

 

모든것은  본래 무상하고 무아이며 연기 중도로 되여 있다는 원리를 알면 내가 괴로워 할께 없는 것이다,

괴로움은 바로 집착으로 부터 발생하는 것이므로 원리(연기중도)를 알면  집착 할것이 없는 것이다

본래 없는 것을 꿈속에서 처럼 있다고 착각하는데서 괴로워 하고 있으므로 무상 무아 무주로서 살아가는

지혜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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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모든것이 다 부처다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

 

일미진중 함시방

일체진중 역여시

 

일체만법 개시불법

일체중생 개유불성

 

일념즉시 무량겁

무량원겁 즉일념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유즉시무 무즉시유

생즉시멸 멸즉시생

응무소주 이생기심

 

 정견 이란 :바르게본다

양변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본다

 

정견은 곧 중도라고 할수있고 정도라고 할수있고 

팔정도 사성제 삼법인 연기 무아 무상 공과 반야 지혜와 다르지않다,

 

우리는 아니 일체는 텅비워있는 우주공간에 묘하게 존재하고있다,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아니다

옳은것도 아니고 그른것도 아니다

좋은것도 아니고 싫은것도 아니다

 

본래 정해져 있는것이 아니고 인연에 따라 정해질수도 있기때문에 진공묘유라고한다,

 

우리가 생활을 중도로 살면은 마음이편하다,

즉 내생각을 정해놓고 고집하지않고 내려놓고 살아간다면 굳이 다툴일이없다,

이렇게 살아갈려면 내가 없음을 알아야한다,

즉 무아 공 연기 중도라고 이해하고 현실에 생가을 적용하면서 실천행을 하면 되는것이다.

이것을 체험을 하면 모든것이 툭 터져서 자동으로 자비사상이 나온다지만 우리수행 중생들은

아직 미혹하기 때문에 목표를 여기에 두고 공부를 해야 할것이다,

 

 

원리를알고 이치를알고 정보를 알고 실천하면 괴로울 일이

없게되여 행복하게 살수있다. (법성 원융 무이상)

 

유즉시무 무즉시유 (有卽是無 無即是有)

있는 것은 곧 없는것이며 없는것은 곧 있는것이다,

 

있는것도아니고 없는것도아니다 즉 있을수도있고 없을수도있다

이것이 바로 중도적으로 표현을 한것이다,

 

 

손벽을치면 소리가 나면서 사라진다     

그러니 있기도하고 없기도 한다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다

이것이 곧 연기 중도라고 한다.

 

인연따라(조건) 이뤄졌다가 인연따라 사라진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것은 항상함이 없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즉 시간적 차원에서 무상이라하고 공간적 차원에서 무아라고 한다

진아다 참나다라는 것은 이름일 뿐이지 실체가 없어 있다고 할수도 없고

없다고 할수도 없는 것이다,(진공묘유)

 

 

제상이 비상이다.

제상은 곧 있는것이며 즉 색이며 비상은 있지않는것이다, 즉 공이라고한다,

 

즉견여래 고정된 실체(상)가 없는것을 부처라 하는데 부처를 본다 즉 부처라 한다.

상이 없는것을 부처라 한다 일체 상을 떠나면 그 이름을 부처라한다,

 

일체의 모든 것들은 다 중도로 되여있는데 편견과 변견 그리고 분별과 간택으로 

한편에 치우치기 때문에 정견 곧 중도를 외면하고 있는것이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 중도를 잘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즉비 논리로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중생이라면 중생의 모양(실체)이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라고 설명하는것이다. 모든상은 허망하기 때문이다, 즉 실체가 없기때문이다,

궁정을 부정해 버리고 다시 궁정과 부정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사실 중생이라는 것은 중생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이다 부처다 양변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있다 없다. 생이다 사다. 옳다 그르다. 극단적 양극으로 성립되여 있지만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공 처럼 양극이 둘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양변을 떠난것이 쌍차라면 있는것이 없는것이요 없는것이 있는것이다. 

이것이 상호상관 관계로 서로 통하게 되므로 쌍조라 한다

 

 

부분은 곧 전체요 하나는 곧 전부요,전체는 즉 부분이며 전부는 곧 하나이다.

이세계는 원자로 되여있다, 즉 미진으로 되여있다 소립자로 되여있다,

소립자가 덩어리로 모이고 뭉처서 이세계가 되여있기에 의상스님의 법성게에서 볼수있다,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

일미진중 함시방

일체진중 역여시

 

 

어둠이 있으므로 밝음이있다. 이것은 둘이 아니고 다르지않다 이것이 중도다. 

반야심경에 즉(곧)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나 

금깅경에 여래설 바라밀이 즉비 바라밀 시명 바라밀 이 중도를 설명한것이다

 

이 세계는 부분적으로 보면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전체로보면 다르지않고 둘이 아니다,

왜? 연기 중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곧 너고 너가 즉 나다 라고 할수있다

 

각각 다른모습 다른 생활을 하고있지만 우리는 실체가 없이 지수화풍의 연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지수화풍 4대가 곧 나라고 할수있다. 그렇다고 지수화풍이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수화풍도 연기로서 되여있기 때문에 공이라고 한다 (오온개공)

 

우리의 본질은 색이면서 공으로 공이면서 색으로 동시에 존재하고있다. 

이둘은 땔래야 땔수가 없다 ,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기 때문이다,

색은 공이 있으므로 나타낼수있고 공은 색이 있으므로 드러낼수 있기 때문이다,

생과 사도 그렇고 있다 없다도 그렇다, 모든것은 양극이면서 하나의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하고 다르지 않다라고 한다, 이것이 연기 중도로 되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상은 곧 둘이 아니면서 하나다, 

그러면서 무자성으로 무상 무아로서 영원한 것이 아이므로 그냥 공이라 할 뿐이다,

 

곧 부처가 아닌게 없다. 세게 17억 인류를 넘어서 우주에 있는 일체의 모든것은 그물코처럼

서로 연관되여 있으면서 소립자로 되여있고 연기로 되여있고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연기설로 보면 하나님도 부처요. 흰두교도 부처요. 이슬람교도 부처다,  

모든것이 하나 이며 부처라 할수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다,

 

나는 곧 부처이면서 무명에 의해서 (생각.습관.관념.지식.)중생적으로 삶을 살고있을 뿐이다,

 

완성된 부처로 살기위해서 내가 없고 내것이 업고 아집이 없다는것을 자각하고 실천하면서

중생의 업식 습관과 버릇을 고쳐 나아가기위한 수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팔정도

 

1,정견 / 바른견해

2,정사유 / 바른 생각과의지

3,정어 / 바른 말

4,정업 / 바른 해위

5,정명 / 바른생활

6,정정진 / 바른정진노력

7, 정념 / 바른 생각

8,정정 / 바른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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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이란 무엇인가? 선은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이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명상하여 불생불멸하는 진리를 깨쳤다. 이 깨달음으로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인간이 생로병사의 상대 세계에서 깨어나 영원한 행복의 절대 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불교의 성립이고 출발이다.

 

부처님이 깨치기 이전에도 요가와 명상이라는 다양한 수행이 있었다. 부처님이 깨친 마음을 표현한 선(禪)은 범어로 디야나(dhya-na), 팔리어로는 쟈나(jha-na)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가 다른 지역으로 전해질 때 그 지방의 말로 표현되어야 했다.

 

“안으로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으니”

“그림자가 마당을 쓸어도 움직이지 않아”

 

디야나는 한자문화권에서는 선나(禪那)라 음사하였고 줄여서 선(禪)이라 한 것이다. 禪(선)이라는 문자는 한국에서는 선, 중국에선 찬(chán), 일본에선 젠(ぜん)이라 발음한다.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은 다양한 말로 표현되지만, 그 깨달음은 하나이다.

 

6조 혜능스님은 <단경> 좌선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안으로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다.” 예컨대 선이란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고 안정됨을 말한다. 6조의 제자 영가스님은 <증도가>에서 “다녀도 선(禪)이요 앉아도 선이니 말하고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하거나 본체가 편안함”이라 했다.

 

즉, 우리가 부처님이나 조사들처럼 깨치면 분주히 일상생활을 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이다.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은 이렇게 표현한다.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禪)이다(<돈오입도요문론>).”

 

조사 스님들의 말을 종합하면, 선이란 결국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고 번뇌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깨달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조스님은 이것을 평상심(平常心)이라 했다. 그런데, 평상심이라 하니 화내고 욕심 부리고 술 마시고 남 욕하는 그대로가 평상시의 일이니 그대로 선이고 수행이라 하는 분도 흔히 본다. 그것은 아니다. 큰 착각이다.

 

성철스님 강설(증도가, 돈오입도요문론)에 보면, 우리가 이로움과 손실, 비방과 받듦, 칭찬과 비웃음,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팔풍(八風) 경계에 직면하더라도 마음이 여여해야 선이라고 한다. 즉, 선이란 나에게 팔풍이 거세게 불어 닥쳐도 가나 서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고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하거나(행주좌와 어묵동정), 자나 깨나 꿈에서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누구나 의문이 생기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남이 나를 욕하고 비웃고 내 것을 빼앗아 가고 헐뜯고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도 내 마음이 과연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부처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부처님은 명상을 통해 선을 체득해서 그런 삶을 살고 가신 것이다.

 

부처님뿐 아니다. 달마, 혜능, 마조, 조주, 임제, 도의, 보조, 태고, 나옹, 서산, 사명, 경허, 용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역대 조사 선지식들이 그런 분들이다. 그러한 깨달음 세계, 경지를 선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재가자들도 가정과 직장의 일상생활에서도 수많은 팔풍을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선을 해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롭겠는가. 가정과 직장, 사회에는 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극락과 천당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 선(禪)의 세계에 극락이 있다.

 

그래서 송나라 때 야보스님은 선의 세계를 이렇게 노래한다.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쓸어도 티끌이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물 바닥까지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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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생각

 

수시로 변하는 생각이 왜 일어난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이것은 물이 조건에 따라서 구름이되고 비가되고 눈이되고

물이되고 얼음이 되듯이 인연에 따라서 말미암아 일어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지우거나 안할려고 해도 끈임없이 일어 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생각은 어째서 왜 일어 나는 것일까?

기억속에 저장된 것이 일어날때도 있고 아니면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데서

생각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일어 나는것이다.

그 일어나느 것을 따라가면 방황하게되고 또 다른 생각이 곁들어 일어나게 된다.

생각이란 것은 들여다보면 실체가 없이 하늘에 구름이 생겼다 사라지듯이 흔적이 없이 허망 할 뿐이다.

곧 허망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허망한 존제에 속아서 착각에 속아서 "있다"고 여기면서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생각이 나도 모르는 마음이라는 바탕에서 일어난데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이

비어있어 곧 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렇다라고 확실하게 알것 같으면 괴로움은 본래 없는데

괴로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알게되면서 괴로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일어나는 괴로움은 곧 생각이 근본이고 그 생각이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을 알아차려야 근본적인

괴로움의 뿌리를 알게되고 그 뿌리가 본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알아차릴수가 있으므로 어느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되고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한생각이 일어날때 즉해서 바로 알아차리던지 아니면 이뭣고로 도리켜 본래 마음자리를 지켜야한다.

"불취어상 여여 부동"하라 하는 금강경의 글구가 생각난다.

하나의 상도(생각.모양) 짓지말고 (취하지말고) 여여하게 움직임니 없이 부동해야 된다는 뜻이다.

상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집착을 놓아버려야한다.

 

집착은 안타까움 그리움 노여움 섭섭함 원망등 여러가지 번뇌와 망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손과 주머니가 비워 있어야 가볍고 편하고 자유롭드시 마음도 비워져 있어야 편안하다.

일어난 분별심등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지켜보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마음은 자유로울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것은 허망하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머무를수 있는 곳이 없다.

 

구름은 일어서 사라지고 생각도 일어나서 사라지고 생명도 태어나서 멸(죽음)하고 그 어떤 물건도

만들어지면 결국 없어지고 마는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인연에 따라서 공에서 색으로 색에서 공으로 변하는 것이다

법성게에 "불수자성(공) 수연성(색)" 이라는 것이 이뜻을 의미하는것이다.

이세계는 정해진것이 없다.<무유정법> 옳다 그르다 단정(답) 할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 차원에서 다를수도 있다는 것이 법의 참뜻이다.

 

큰것도 작은것도 상대적 비교에서 우리가 느끼는 인식일뿐이다.

모든것은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 놓은 명칭(단어) 곧 이름일 뿐이다.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곧 그것의 실상일 뿐이다. 곧 공이다.  무유정법이다.

이것은 인연 연기이 때문에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연기란 나 아닌 것들이 상호 말미암아 화합되여 존재 할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씨앗이 꽃이 피기까지 물과 흙과 햇볕 공기 거름 바람 그리고 사람의 손길 벌과 나비등 온갖 것들이

필요에 의해서 도움으로서 피어날수 있듯이 연기란 이런 과정을 의미한다.

연기이므로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무상 허망한것이며 공간적으로는 서로가

의지하고 연결되여 있기 때문에 공간적 차원으로 단독적 존제라고 할수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시간적 차원에서 고정되여 있는 것이 없으므로 무상이라한다. 늘 변화되여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어떤것도 영원한것이 없으며 그것이 절대적 독단적 존재다 라고 할수가 없다.

나는 곧 영원한 존재가 안니기 때문에 당연히 언젠가는 인연따라 죽을 것이며 그리고 절대적 나라고 할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라고 착각하고 고집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곧 지금 이대로 나일뿐 나라는 실체가 없다. 다만 이름으로 하여금 나(진병남)라고 인연과 조건따라

그것에 맞게 적절하게 작용만 할뿐이다.

때로는 운전기사 부모 남편 할아버지 손님 승객  친구 삼촌 주인 학생 신도 회원 동기 등등....

 

오온의 사대 지수화풍이요  과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원자로 뭉쳐져 있으며 원자는 전자 양성자

더 미세하게 분석하면 쾌크로 더 작게 분석했더니 힉스라는 반물질로 되여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의학적으로는 미세의 세포들이 모여서 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 세포들은 작으만치 약70조의 세포로 구성되였으며 이 세포도 생멸이 연기되여 우리생명의 한계내에서 전체가

몇번의 생멸을 한다고 한다. 또한 그 세포 속에는 수백개의 미토콘트리아로 형성 되여 있다고 한다

이렇게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데 이몸 이마음 이생각이 나라고 착각을 하면서 분별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데 왜 탐욕을 내고 화를 내며 어리석게 살아 갈까?

이 몸뚱가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착각속에 꿈을 꾸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꿈과 같다.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모든것은 허망한 것이므로 본래 진실하고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삼독(탐진치)을 내지말고 일체상을

여의고 그 이름 부처로 살아가야 할것이다.

내가 어찌 부처냐 하면 나라고 할것이 없는 무아이고 내것이라 할것이 없기 때문에 무유이며 내 생각이 옳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무착으로 일체 상이 없으므로 부처라 할수있다.

이미 본래 부처로 완성되여 있는데 분별심이라는 구름으로 해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부처는 일체 상을 여의어 탐착지않아  한상도 취하지 않기때문에 그 이름을 부처라 하기 때문이다.

 

 

 




[임대소득 2천만원이하면 종합·분리과세 어느쪽이 유리?]


임대사업자 등록여부·타 소득·공제 따라 달라..국세청, 세액비교 서비스 예정부부합산 2주택·9억원초과 1주택 보유자, 전세금만 받으면 소득세 신고 필요없어세무서·지자체 등록 임대사업자, 월세수입 연 1천만원이하면 세금 '0'

(세종=연합뉴스) 신호경 기자 = 6년만에 2천만원이하의 주택임대소득이 소득세 과세 대상에 포함되면서, 월·전세를 주는 임대인들의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주택임대소득세 신고 대상인지, 임대사업자 등록 등으로 어떤 혜택을 볼 수 있는지 등을 따져보기 위해 기본적으로 숙지해야할 관련 주요 내용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픽] 주택임대소득 과세 기준 (서울=연합뉴스) 김영은 기자 0eun@yna.co.kr


-- 주택임대소득 과세 대상은

▲ 기준시가 9억원이 넘는 국내 주택 보유자, 국외 소재 1주택 보유자, 2주택이상 보유자 중 월세 소득이 있는 사람과 보증금 합계가 3억원을 넘는 3주택이상 보유자는 임대소득 규모에 상관없이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기준시가 9억원이하 국내 소재 1주택 보유자의 월세와 2주택이하 보유자, 보증금 합계가 3억원이하인 3주택이상 보유자의 보증금은 과세 대상이 아니다.

소형주택(주거전용면적 40㎡이하이면서 기준시가도 2억원이하)의 경우도 2021년 귀속분까지 임대수입 과세대상에서 제외된다.





주택임대소득 과세요건과 과세방법 [국세청 제공=연합뉴스]


-- 주택임대소득 과세대상을 판단할 때, 명시된 기준 주택 수는 전체 보유주택인지, 임대주택인지

▲ 주택임대소득 과세대상 여부는 본인과 배우자의 '보유주택'을 합산해 판단한다.


-- 주택 보증금 등에 대한 간주임대료란 무엇인가

▲ 월세 임대료를 받는 임대사업자와의 과세형평성 차원에서 보증금 등에 대해 정기예금이자율(2019년 귀속분의 경우 2.1%)에 해당하는 금액만큼을 임대료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다만 주택의 경우 부부 합산 3주택(주거전용면적 40㎡ 이하이면서 기준시가가 2억 원 이하인 주택은 2021년까지 제외) 이상 보유자의 경우만, 보증금 등에서 3억 원을 차감한 금액에 60%에 대해 과세한다.









주택임대소득세 기준 '간주임대료' 계산 방법 [국세청 제공=연합뉴스]


-- 주택임대소득세는 어떻게 신고하나. 신고 방법은

▲ 주택임대소득은 소득세법에 사업소득으로 규정돼있다. 따라서 오는 5월 1일부터 6월 1일까지 2019년 귀속 소득세를 신고하고 납부해야한다.


올해의 경우 5월 31일이 일요일이므로 신고·납부기한은 6월 1일까지로 연장된다. 성실신고확인 대상 사업자가 성실신고확인서를 제출할 경우 신고·납부기한은 6월 30일까지다.

주택임대 총수입금액이 2천만원 이하인 경우에는 종합과세(세율 6∼42%)와 분리과세(세율 14%) 중 선택해 신고할 수 있다. 주택임대 총수입금액이 2천만 원을 초과한다면 다른 종합과세 대상 소득과 합산(세율 6∼42%)해 신고해야한다.


-- 주택임대 총수입금액이 2천만원 이하일 경우 종합과세와 분리과세 중 어느 것이 유리한지

▲ 임대주택 등록(세무서+지자체) 여부, 다른 소득금액, 소득공제 항목 등이 납세자마다 달라 어느 것이 유리한지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국세청은 올해 5월 소득세 신고 시 종합과세와 분리과세 예상 세액을 비교할 수 있는 서비스를 홈택스(www.hometax.go.kr)에서 제공할 예정이다.


-- 2주택 또는 기준시가가 9억원을 초과하는 1주택을 보유하고 월세 없이 전세금만 받고 임대하는 경우 소득세를 신고해야 하나

▲ 부부 합산 2주택 보유자와 기준시가 9억원 초과 1주택 보유자의 주택임대소득은 월세 임대료 수입만 과세대상이기 때문에, 월세 없이 전세금만 받는 경우에는 소득세 신고대상이 아니다.

전세금의 경우 부부 합산 3주택 이상인 경우 과세대상에 해당하며, 2021년까지는 소형주택(주거전용면적 40㎡ 이하이면서 기준시가 2억원 이하)은 전세금에 대한 간주임대료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 주택임대소득 과세대상자는 모두 소득세를 내야 하나

▲ 보유주택 수 등이 과세대상 기준에 해당하더라도, 수입금액에서 필요경비와 공제금액을 차감하면 납부할 세금(임대소득세)이 없을 수도 있다.

세무서와 지방자치단체에 주택임대업을 모두 등록한 사업자는 수입금액이 연 1천만원(월 임대료 약 83만3천원) 이하이면 납부할 세금이 없다. 세무서 또는 지방자치단체 중 하나만 등록했거나 두 곳에 모두 등록하지 않은 사업자도 수입금액이 4백만원(월 임대료 약 33만3천원)이하라면 납부할 세금이 없다.







주택임대소득이 있더라도 실제 과세액이 '0'이 되는 경우 예시 [국세청 제공=연합뉴스]


-- 미혼인 본인이 보유한 1채를 임대하고, 부모님이 보유한 주택에서 거주하는 경우 임대소득세 대상인지

▲ 주택임대소득 과세 여부를 판단할 때 주택 수는 부부 합산 결과일 뿐, 직계존비속이 보유한 주택 수는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혼인 본인이 1채만 보유하고 있다면 임대소득세 과세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기혼인 경우에도 본인과 배우자의 주택 수를 합산하여 1채인 경우 과세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이 보유한 주택의 기준시가가 9억 원을 넘고(초과) 월세 임대수입이 있는 경우에는 소득세를 내야 한다.


-- 부부 합산 4주택인데, 3채의 각 주거전용면적이 40㎡ 이하이면서 기준시가가 2억원 이하이고 나머지 1채의 기준시가가 3억원이며, 4주택 모두 (월세가 아닌) 보증금만 받는 경우에도 임대소득세가 과세되나

▲ 2021년 귀속분까지 소형주택(주거전용면적이 40㎡ 이하이면서 기준시가가 2억 원 이하)은 간주임대료 과세대상을 판단할 때 주택 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2019년 귀속(2020년 신고) 보증금 등에 대한 간주임대료가 과세되지 않는다. 다만, 소형주택도 월세 임대수입은 과세대상이다.


-- 이사 등 때문에 일시적으로 2주택을 보유한 경우에도 과세하나

▲ 과세 기간 중 2주택 보유 기간의 월세 임대수입은 소득세 과세 대상이다.


-- 부부가 각 1주택을 보유하다가 과세기간 중 이혼한 경우 과세대상을 어떻게 판단하나

▲ 이혼 전까지는 2주택에 해당하므로 월세에 대해 과세, 이혼 후에는 각 1주택이 기준시가 9억 원 이하일 경우 비과세 대상이다.


-- 오피스텔을 임대한 경우도 주택임대소득 신고대상인가

▲ 임차인(세입자)이 오피스텔을 상시 거주용으로 사용하는 경우, 주택임대소득이 과세된다. 주거용이 아니라면 '상가임대소득'으로서 소득세가 부과된다.


-- 기준시가 9억 원 초과 주택의 경우 1주택 보유자라도 월세에 과세한다는데, 판단 기준일은

▲ 과세기간 종료일(2019년 12월 31일) 또는 해당 주택의 '양도일 현재'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 농가주택 1채와 도시주택 1채를 보유하고 있다. 월세 과세 대상인지

▲ 주택임대소득 과세대상 판단 시 농가주택도 주택 수에 포함되므로 월세에 대해 과세된다.

-- 다가구주택도 '1채만' 보유하고 있으면 비과세 대상인지

▲ 구분등기가 되지 않은 다가구주택을 1채만 보유하고, 기준시가가 9억 원을 초과하지 않으면 비과세 대상이다.


-- 갑과 을이 공동으로 주택을 보유(지분 50:50)한 경우, 갑과 을의 주택 수는 어떻게 계산하나(갑·을 모두 다른 주택이 없다면)

▲ 공동 보유 주택의 경우 지분이 가장 큰 자가 2인 이상일 때 각각의 '보유'로 계산된다. 다만, 지분이 가장 큰 자가 2인 이상인 경우라도 서로 합의에 따라 1인을 당해 주택의 임대수입 귀속자로 정한 경우에는 그 귀속자의 보유 주택으로만 계산한다.

따라서 공동 보유한 주택 임대수입의 귀속자를 별도로 정하지 않았다면 갑과 을 1채씩 보유한 것으로 간주된다.


-- 주택임대소득자도 사업자등록을 해야 하나.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은

▲ 주택임대소득자도 사업소득자로서 사업장 관할 세무서에 사업자등록을 해야 한다. 2020년 귀속분부터 사업자 미등록자에게 가산세가 부과된다.

임대사업 시작일로부터 20일 이내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을 신청하지 않을 경우 사업개시일부터 등록을 신청한 날 직전일까지의 주택임대수입 금액의 0.2%를 가산세로 부담해야 한다.

2019년 이전에 임대사업을 시작하고 2020년에도 계속 사업을 하는 경우 2020년 1월 21일까지 사업자등록을 신청하면 가산세를 부담하지 않는다.


-- 주택임대사업자의 사업자등록 방법은

▲ 지방자치단체와 세무서에 함께 등록을 신청하려면 '렌트홈' 페이지(www.renthome.go.kr)를 이용하거나 지방자치단체를 방문하면 된다.

세무서에서만 등록을 신청할 경우, 홈택스 페이지(www.hometax.go.kr)나 손택스(홈택스 모바일 앱), 세무서에서 신청 가능하다. 방문 신청할 경우 신분증과 임대차계약서를 지참해야 한다.


-- 주택임대사업자도 사업장 현황 신고를 해야 하나

▲ 주택임대업은 부가가치세가 면세되는 업종이기 때문에 주택임대업을 하는 개인사업자는 2월 10일까지 사업장 현황 신고를 해야 한다.

사업장 현황을 신고해야만 5월 종합소득세 신고 시 국세청이 제공하는 간편 신고 서비스를 받아 편리하게 소득세를 신고할 수 있다.



이번 방안에는 정부가 임대주택등록자에게 임대 소득세, 재산세, 취득세, 양도소득세 등 각종 세제 감면 혜택과 건강보험료 인하해준다는 혜택이 담겼다.


특히 주택 임대소득이 연 2000만원을 넘지 않는 사업자가 2020년 말까지 주택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건강보험료 인상분을 최대 80% 감면받는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조세 관련 법령이 개정되고 변경된 내용이 시행되면 2019년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이번 방안은 3주택 보유자에만 혜택이 집중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3주택 이상 다주택자부터 임대 등록을 하지 않으면 세금 부담이 매우 커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토부가 임대사업자 등록의 세제혜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3주택 보유자가 2채를 임대 등록해 8년간 임대했을 때 등록한 경우에는 미등록했을 때보다 연간 935만원의 세금과 건보료를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서울 3주택 보유자가 2채를 임대로 등록해 8년간 임대했을 때 현재 기준대로면 연간 세부담액이 516만원 수준이지만, 개선안을 적용하면 270만원으로 절반가량 줄게 된다. 반대로 미등록 임대주택의 경우 현재 기준으로는 세금으로 1097만원을 부담하지만 개선안이 적용되면 1205만원으로 오른다.


3주택 보유자는 본인 거주 주택 외에 나머지 2채를 전세로 임대하면 보증금에 대해 소득세가 부과되기 때문에 임대 등록을 하지 않으면 세금 부담이 커진다.


반면, 2주택 보유자는 1채만 전세로 임대하면 소득세나 건보료가 부과되지 않는다.


출처 : 화이트페이퍼(http://www.white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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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의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나는 수행자다’ 하는 자각을 늘 갖고 있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수행이란 나의 괴로움이 남으로부터 오지 않고 나의 어리석음으로 부터 온다는 것을 늘 자각하는 것입니다.

밖을 향해 내 괴로움을 해결해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무지를 깨우쳐서 내가 행복해지는 원리를 체득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나는 곧 중도 연기로 무아 공으로 연기적 존재로 바로 부처라는 것을 믿고 수행을 하여 나의 무지로 내가 있다라는 착각을

깨고 내가 무아라는 사실을 깨치는 것이다. 무아인 내가 괴롭고 즐거움이 없이 양변을 떠나 중도로서 존재함을 확실히

알게되면 이것이 자유롭고 행복한 해탈 열반으로 살아 갈 수 있는 부처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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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요일 법회에 참석후 일을 볼까하고 계획을 했었는데 아침에 늦장을 부리다가 시간을 놓쳤다는 핑계로 법회를포기하고 용마산을 돌고 지부사무실에 들려서 무사고증명 발급받아서 중랑경찰서에가서 무사고 증명 신청을 하고 병원에들려 치료받고 하는등 일을 보기로 생각을 바꾸어 법회를 땡치고 말았다.

 

10:18분 집을 출발해서 테크를타고 용마산 순환 도로를 따라 동화천 옛길을따라 굽이치는 한강을 바라보며 순환도로를 걸었다 

 

옛날에 자주 다니던 곳이였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와보게되니 감회가 새롭다.

망우산에는 독립운동가 지사 선생들이 잠들어 있는곳이다. 한용운 조봉암 방정환 오세창 유관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분들외 다수가 영면하고 있다는걸 알았다.

 

유명하게 업적이 크신분들이 묘비앞에 세워진 비문의 이름뿐 그분들의 실체는간곳이 없다.

세월이란 시간속에 이렇게 무상할 뿐이다.

늘 변화도는 가운데 고정된 불변의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몇일전 설날에 따분해서 얘들을 데리고 망우산에 왔었다.

7살된 손녀를 데리고 가면서 30년전 딸이 손녀딸 만큼일때 이길을 지금처럼 데리고 다녔는데 그 딸에 딸을 똑같이 데리고 다니는 나를보니 그때 나는 40대 젊은 청춘이였는데 지금은 70대 노년이 되였다는게 실감낙게 느껴진다.

 

그러나 몸은 물질이니 늙어 있지만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모양이나 소리가 없는데 무엇이 변하겠는가?

변 할래야 변 할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무엇인가?

 

동화천은 매말라서 겨우 매말라 겨우 낙수물처럼 한방울씩 떨어져 받쳐놓는 바가지를 언제나 체워질지 모르겠다.

관리사무소 지부사무실에 도착하니 거의 두시간이 걸렸다.

아침을 시원찮게 먹어서 그런지 배개 출출하다.날씨가 좋아 시야가 좋다.

 

경력증명을 발급 받아 신내 양원지구를 질려가다 공사장 함바집이 있어 점심을 먹었다

함바집 집밥이 맛이 있다 생선조림에 봄동 무침에 김을 겯들어 배고품을 양껏 채울수가 있었다. 

마침 점심때라 근처 송곡 학생들 선생님들 그리고 아파트현장 노동자들이 많았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속도로 빠르게 전염이 되여간다는 뉴스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깨름직하다

 

나도 낼부터 마스크를 착용하고 일을해야 할것같다. 여러사람을 태우고 다니기도 하지만

요즘 중국 여행객들이 간혹 타기 때문에 불안하다.

  

예약된 병원시간이 촉박한 것같아 데시앙 건너편에서 버스를타고 경찰서에 갔다.

민원실에 30년 마지막 무사증명 신청했다 무사고 증명은 30년이 마지막 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 무사고 증명을 신청하게 된것이다. 30년8개월이라고 안내해준다

버스를타고 하나 예약된 병원 (통증의원)에 도착 했다.

대기자들 모두가 노인들 뿐이다 오래 사니까 아푼데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요즘 통증 크리닉 병원이 많이 생겼다

그만큼 환자가 많기때문에 수효따라 병원이 늘어나는가 싶다

나이가 70이 넘으면 내 의지로 건강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약이나 치료로 그냥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똑같은 통증의원인데 이곳이 저럼하다보니 많은 환자들이 모이는것같다

노인들의 아품이나 병은 싹 낳을병이 아니다.

병원에 다니면서 임시 방편으로 신경 마취로 아품을 크리닉 할 뿐이다,

 

오늘은 걸을 만큼 걸어 다녔다. 이곳에 이사와서 두달이 되여갼다. 내 휴식공간으로 방하나를 만들었다

책상하나에 컴프터 하나 뿐이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곳이다.

3식구가 살고 있으니 모두 각각 자기방에 들어가면 깊은 산속에 암자처럼 고요하다

설명절때 20여명이 모였는데도 헐렁했다 공간이 넓으니까 마음도 넉넉하고 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지않고 부자가 된 느낌이다 

 

아무래도 장남인 큰집은 보다 넓고 잘 살아야 떳떳 한것같다.

이곳 으로 이사하기 전 까지는 협소해서 동생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마음이 편치를 안았었다,

이제 조금은 나도 떳떳하고 편안 해진것 같다,

세배돈이 매년 수십만원씩 나간다, 금년에도 40만원이 나갔다,

일년에 한번인데 하면서 위안을 하지만 적은 돈이 아니다. 사실 내것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조카 손주들 까지 사임당 5만원짜라로 주다보니 그렀다.

큰 아들은 그래서 짐이 많는 것이다,

 

그렀지만 자식들이 용돈으로 주는돈이 있으니 사실 내 돈은 10만원만 나간 것이 되니 아쉽거나 아까울 것이 아니다.

이세상에 그 어떤것도 누구의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 한다면 내 것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쓰고 있을 뿐이다. 나다 내 것이다 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성냄이 일어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할수 있는 것이다,

 

 

 

 

 

명상을 하는방법

 

 

명상은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서 마음의 상태가 고요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명상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합니다.

 

둘째,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셋째, 그 집중된 것에 대하여 뚜렷한 알아차림이 유지돼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긴장하지도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안 되니까 그만둬야겠다며 물러서지도 말고, 그냥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갖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합니다. 지금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해보십시오. 내가 숨을 쉬고 있나, 숨을 안 쉬고 있나 한번 확인해 보세요. 확인해 보면 숨을 쉬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숨이 들어오기도 하고 숨이 나가기도 합니다.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줄 알아차리고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아차립니다. 바깥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면 숨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모르고 호흡을 놓치게 됩니다. 경전에 보면 바깥에서 천 개의 벼락이 쳐도 꿈쩍하지 않고 다만 호흡을 알아차린다고 나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감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리가 아프다든지, 어디가 가렵다든지, 이런 데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졸음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과거 생각이나 미래 구상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든, 몸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 졸음이 오든, 머릿속에서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생각이 떠오르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만약에 나도 모르게 놓쳤다 하면 놓쳤구나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쳤다고 실수했다, 잘못했다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놓쳤으면 놓쳤구나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먼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놓쳤구나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꾸준히 해나갑니다. 처음에는 자꾸 놓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알아차림이 길어집니다.

 

 

자세는 왼발을 오른발 위에 올리든 오른발을 왼발 위에 올리든 먼저 반가부좌를 합니다. 그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읍니다. 오른발을 왼발 위에 올려 앉을 때는 오른손을 왼손 위에 올립니다. 반대로 왼발을 오른발 위로 올려 앉을 때는 왼손을 오른손 위로 올립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을 편안하게 감습니다. 몸에 긴장이 들어간다면 긴장을 풉니다.

 

 

그리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다시 합니다. 조금 된다고 들뜨지 않고, 조금 안 된다고 좌절하지도 않고, 그냥 꾸준히 해나갑니다. 죽비를 세 번 치면 명상을 시작하고 죽비를 세 번 치면 명상을 마칩니다.

 

죽비를 세 번 치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법당 안을 천천히 걷습니다. 걸을 때는 자기 동작에 깨어있습니다. 왼발이 나갈 때는 왼발이 나가는 줄 알고, 오른발이 나갈 때는 오른발이 나가는 줄 압니다. 일어설 때는 일어서는 줄 알고, 걸을 때는 걷는 줄 알고, 움직일 때는 움직이는 줄 알고, 설 때는 서는 줄 알고, 앉을 때는 앉는 줄 압니다. 이렇게 자기 동작에 깨어있습니다. 앉아 있을 때 죽비를 세 번 치면 호흡을 알아차리고, 죽비를 세 번 치면 가부좌를 풀고 조용히 걸으면서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을 지긋이 감습니다. 마음을 콧구멍 끝에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다시 알아차립니다.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몸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졸음이 오더라도,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콧구멍 끝에 집중해서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놓쳤구나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꾸준히 해나갑니다. 긴장하지도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고 말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다만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사념처에 의지하라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념처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몸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둘째, 느낌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려라. 우리는 기분이 좋다는 즐거움으로 행복을 삼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즐거움은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본질이 괴로움임을 보면 결국 모두 다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낌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은 항상(恒常)하지 않아서, 영원하지 않으며 늘 순간순간 변화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늘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차려라. 그러니 마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넷째, ()이라는 것은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법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 네 가지를 올바로 알아차리고 있다면 늘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아난다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계율을 잘 지킨다면 항상 나와 있는 것과 같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설령 나와 함께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명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념처(四念處), 즉 네 가지 알아차림에 의지하라고 알려주신 것 중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첫 번째가 바로 몸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이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 사람이 죽고 난 뒤 시신이 썩어서 흩어져 없어지는 과정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나빠나 사띠, 호흡 알아차리기

 

열반(Nirvana)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위빠사나(Vipassana, )’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중에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고, 그중에서도 범위를 좁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부를 때는 아나빠나 사띠(Anapan-Sati)’라고 합니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잘 유지되면 다른 것에 대한 알아차림도 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호흡을 여실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이런저런 기억들이 계속 떠오릅니다. 그리고 내일 뭐 해야지하고 미래에 대한 구상이 계속 떠오릅니다. 이렇게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구상을 하다 보면 호흡을 놓치고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망상을 피운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에 따라가면 안 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마음을 코끝에 딱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마음을 코끝에 모아서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줄 압니다. 숨이 길면 긴 줄 알고, 짧으면 짧은 줄 압니다. 숨이 가쁘면 가쁜 줄 알고,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줄 압니다.

 

내가 의지를 갖고 이러저러하게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호흡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 호흡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긴장도 하지 말고, 애쓰지도 말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호흡을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놓치면 놓쳤구나하고 다시 합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첫 번째는 먹고 싶다, 자고 싶다, 눕고 싶다는 등의 욕망입니다. 두 번째는 무언가 하기 싫다는 혐오입니다. 세 번째는 무언가를 하다가 잘 된다고 이야, 이거 잘 되네하고 들뜨는 마음입니다. 네 번째는 게으름입니다. 잘 안 되니까 그만두고 싶다는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다섯 번째는 회의적 의심입니다. ‘이걸 한다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정진하는 데 늘 장애가 됩니다. 그러니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부처님께서 이런 마음이 정진에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다하는 것을 알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코끝에 모아봅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몸에서 통증이나 가려움 등 여러 가지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머릿속에서 지나간 과거의 이런저런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구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다만 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가면 나가는 줄 압니다.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나갑니다. 그것처럼 호흡은 저절로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합니다. 호흡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압니다. 그것을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것에는 힘이 들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긴장하지도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고 말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다만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자 하는 자발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명상을 할 때는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잘하려고 애를 쓰거나 욕심을 내면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편안하고 한가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하다가 안 된다고 쉽게 그만두거나 좌절해도 안 됩니다. 이렇게 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세 번째, 긴장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네 번째,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마음을 코끝에 딱 모으면,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곧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실재하는 것은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여러분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환상이고 가상입니다. 내가 편안히 앉아서 이 순간 실재하는 것,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에만 깨어있도록 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다 환상입니다. 조금 전 지나간 일을 생각하는 것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도 다 환상입니다. 생각이 아니라 지금 경험되는 것에 집중합니다. 숨이 들락날락하면서 피부를 자극해서 내가 호흡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에 집중합니다. 콧구멍, 콧구멍 속, 윗입술 등 콧구멍 주위에서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면 다 환상입니다. 콧구멍 주위에 딱 정신을 집중해서 느껴지는 감각에 완전히 깨어있습니다.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명상하고 아무 관계없는 공상이나 망상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직 콧구멍 주위에 마음을 모아서 피부의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공상을 하다가 호흡을 놓치게 되면 ! 놓쳤구나하고 다시 콧구멍 주위에 집중해서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출처: <https://www.jungto.org/pomnyun/view/82423>

 

호흡에 집중이 잘 안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은 여러분이 자꾸 딴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연습이 많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호흡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은 자꾸 딴생각을 해요. 딴생각에 빠져서 호흡을 놓쳐버립니다.

 

 

 

호흡은 항상 여기 있습니다. 앉아도 여기 있고, 서도 여기 있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여기 있고, 목욕을 하는 동안에도 여기 있고, 자는 동안에도 여기 있고, 언제나 여기 가까이에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면 호흡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관심을 안 갖고 늘 딴생각을 하니까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찾는 것이 아니에요. 호흡은 여기에 항상 있어요. 관심만 가지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딴 데 신경을 자꾸 빼앗기기 때문에 놓치는 거예요.

 

한마디로 산만하거나 집중력이 없는 거예요. 어떤 일을 할 때 한 군데에 딱 집중하는 힘이 없고 늘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정신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꾸 연습해서 호흡이 잘 알아차려지면 활쏘기를 해도 딱 집중이 되고, 총을 쏴도 딱 집중이 되고, 어떤 일을 할 때도 딱 집중이 됩니다. 이게 잘 안 된다는 것은 지금 여러분이 정신없이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어도 생각은 늘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도 눈은 상대의 눈을 보고, 귀는 상대의 말을 들으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눈과 정신을 딴 데 두고, 지나가는 소리로 들어요. 그러니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나중에 물어보면 모르고, 기억도 잘 안 나는 거예요. ‘뭐라고 했지?’ 이러잖아요. (모두 웃음)

 

 

그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하기 때문입니다. 호흡 관찰은 집중력을 키우는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러니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호흡에 집중하고 싶은데, 왜 자꾸 생각이 떠오를까요?”

 

사람의 정신작용은 늘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오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면 좋겠다고 해도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잠잘 때도 생각은 계속 작용합니다. 의식을 잃어버려도 본인이 모를 뿐이지, 그럴 때조차 무의식은 계속 작용합니다.

 

그래서 집중이 가장 중요합니다. 짜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엄마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문제가 없고, 여자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음 생각으로 연

 

결되면 문제예요.

 

딱 집중이 되어 있으면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관심을 안 둡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떠올랐다가 조금 있다가 사라져요. 마치 우리가 시장통을 지나갈 때와 같습니다. 시장통을 지나가면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사람이 나와서 구경하고 가라며 날 붙잡잖아요. 그럴 때 끌려가서 이 가게에서 구경하다가 나오고, 저 가게에서 또 구경하고 나오는 것 같은 상태가 지금 여러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가게 상인이 아무리 팔을 잡아당겨도 내가 아무 신경 안 쓰고 똑바로 걸으면, 그 사람들이

 

우리 가게 와요하고 몇 번 따라오다가도 가버립니다. 따라오다가 가버리고, 또 다음 사람이 와서 따라오다가 가버리고, 또 따라오다가 가버려요. 그런 가운데 나는 천천히 그 시장 골목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시장에 무슨 가게가 있었는지 안 들여다보고도 다 알죠. 사람들이 옷가게

 

들어오세요’, ‘시계 가게 들어오세요이렇게 부르는 말을 다 들으면서도 나는 그냥 지나가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처럼 한 가게에 들어가서 상인과 대화하고 얼마냐고 물어보면서 놀다 보면, 시장 골목을 아예 지나가지도 못하고, 그 시장에서 뭘 파는지도 다 몰라요. 가게 한두 개밖에 못 가봤으니까요.

 

호흡에 집중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온갖 생각이 일어나서 호객 행위를 하듯 나를 잡아당겨도 신경을 안 쓰고 호흡에 딱 집중하면, 어떤 무의식들이 떠올라서 나를 잡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어요. 30분만 딱 앉아 있어도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나가기 때문에 , 내 속에 이런 번뇌 망상이 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면, ‘없애겠다하는 생각이 하나 더 생겨나서 더 복잡해집니다. 그러니 생각이 떠올라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내버려 둔 채 오직 호흡에만 집중합니다.

 

지바카 병원 의사인 까미스왈 지의 예를 들어볼게요. 스님이 기침을 하면 이런 생각이 들죠?

 

, 저렇게 기침하실 땐 이 약을 먹거나 이 주사를 놓아드려야 하는데. 잠시 후 수련 마친 뒤에 주사를 놓아드려야겠다.’ (모두 웃음)

 

이런 게 모두 망상입니다. 부처님이 생각나도 망상입니다. 명상 중에 일어나는 생각은 좋은 생각, 나쁜 생각 할 것 없이 전부 망상이에요. 오직 여기서 일어나는 감각, 다시 말해 호흡이 들어가고 나갈 때 코 언저리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제외하면 다 망상이에요. 어떤 생각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계속 호흡에 집중을 못하는 거예요.”

 

 

 

 

 




○ 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

 

인과법이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은 지나간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현상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의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의 현상(나에게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이것은 진여眞如의 알아차리고(전지全知) 작용하는(전능全能) 우주의 경영(운영)원리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연이란 없다. 반드시 필연일 뿐이다.

 

 

인과의 원리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주고받는 상호관계성(원인과 결과의 연기緣起, 상호의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인연을 만나고 좋은 행위를 하면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인과법을 인간의 문제로 탐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적용된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 학습한 것에 의해 생각을 하고 모든 행위를 하기 때문에 생각이 똑 같은 사람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하는 행위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하는 생각과 행위를 총칭해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이라 한다.

 

업 자체는 우리들이 마음먹은 대로(의식적으로) 쓸 수 없다. 업은 만들어지는 즉시 마음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8아뢰야식)에 저장되며, 같은 업을 자주 되풀이하면 할수록 내 것(고정관념, 아상我相, 무명無明, 알음알이, 내 생각, 습관, 중독) 으로 굳어져 바꾸기가 어렵게 된다. 무의식은 우리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5%를 차지하고 있는 의식(6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은 업력業力(업이 작용하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전생에 지은 업은 지금(금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업은 윤회(순환)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과 같다.

 

 

인과의 원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과거로 인해 지금(현재)의 현상(나아가야 할 길)이 결정됨으로 이것을 우리는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데 주어진 길을 지금 내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새롭게 결정되기 때문에 가야할 길은 주어지나 그 길을 지금 내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는 결정됨으로써 바꿀 수 없는 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은 누구나 삶에 있어 많은 고통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해서 상담을 하거나 선각자를 만나 즉문즉설을 통해 해답을 구하거나 아니면 점집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렇게 방황하는 이유는, 인과법이 순환하는 원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인과법이 순환하는 원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을 과거(전생) 현재(금생) 미래(내생)로 나누지 말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인식하는 개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간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이(무시무종無始無終)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나눌 수 없는 것이나 인간이 편의상 나누어 놓은 것일 뿐이다. 한 찰나(약 구백 분의 일초)가 지나가면 과거(전생前生)라 하고 다가올 것이면 미래(내생來生)라 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는 시간은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오늘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면 갚을 날이 되면 갚아야 할 것이다. 만약 갚지 못했다면 언젠가는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죽으면 갚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다시 말해서 인과()의 순환 원리를 몰라서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는 시간에 대한 개념(고정관념, 내 생각, 아상我相, 무명無明)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오히려 더욱더 복잡해지는 원인이 된다. 까닭은 모든 삶이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업의 순환원리를 알면 결코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두려워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금생에 돈을 빌리고 갚지 않으면 반드시 내생에 그 돈을 갚기 위해 가까운 인연으로 다시 만나 어떠한 형태로든 갚아야한다는 말이다.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내가 그의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전생에 내가 다른 누구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내생에는 반드시 가까운 인연으로 다시 만나 이번에는 반대로 그에게 내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은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세생생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기 때문에 업은 윤회한다고 한다.

 

가까운 인연 중에서도 특히 가족 간의 인연은 전생에 서로 주고받을 것이 가장 많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그렇다면 업이 윤회하는 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하면 끊어질까요? (인과)의 순환 원리로 볼 때 지금 내 앞에 현상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내 탓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여건(상황, 조건 가야 할 길)은 내가 그 원인(주인공)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거나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 불평불만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서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윤회(악연)의 고리는 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참회고 용서하는 일이다.

 

 

인과법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너의 과거전생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 너에게 주어진 여건(조건, 상황)을 보면 알 수 있고, 너의 미래(내생)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 네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원리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 과거전생을 훤히 꿰뚫어 아는 통찰력인 숙명통宿命通이 열린다.

 

 

업이 순환할 때 과거전생에 서로 주고받을 것이 많을수록 금생에 가장 가까운 사이로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에 부부, 부모 자식, 친구, 직장동료 등으로 인연지어진다.

 

인연이 멀면 멀수록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주관적으로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가까울수록 라는 생각(내 부모, 내 친구, 내 형제)이 끼어들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고 바라는 마음은 욕심을 만들고, 우리들은 이 모든 마음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포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모든 일을 지혜롭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나의 모든 행위)은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서 내가지은 업은 오직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것은 마치 내배가 불러지려면 내가 먹어야 한다. 다른 어떠한 사람이 대신 먹어주어도 내 배는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은 항상 나를 바꾸는 일이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주어진 조건, 여건, 상황)은 과거전생에 내가 행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과보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다 나에게 있다는 인과()의 순환원리(윤회)를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전생에 내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지금(금생)은 내가 반대로 그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고통을 주는 그(상대방)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참회(반성)함으로써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오히려 고통스럽게 하는 그에게 잘 대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일이며, 업장이 소멸됨으로써 비로소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는 것이다.

 

 

업장을 소멸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업이 작용하는 힘(업력業力, 업식業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원리)을 깨달아 체득되는 법력法力(완성된 중도의 지혜)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信仰의 힘으로는 가벼운 업력은 이겨나갈 수 있으나 무거운 업력은 이기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해서 법력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업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비교하자면, 나에게 적은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잊어버리기도 할 수 있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용서하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무의식(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장을 소멸함으로써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원리를 체득하고 이루어지는 깨달음으로 (자아自我)’를 소멸시켜야 된다.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리 좋은 열쇠(해답, 조언)를 준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 날 유행하고 있는 즉문즉설卽問卽說의 한계점이다.

 

 

인과법의 핵심은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온다.)”]

 

그래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이것은 마치 좋은 대학에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말과 같아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좋은 인연(선연善緣)과 나쁜 인연(악연惡緣)을 판단하는 기준은 과정에 있지 않고 결과에 있다.

 

예를 들어서 주방장이 주인 망하게 하려고 고기를 많이 넣어 주었는데 그 집에 가면 고기를 많이 넣어준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오히려 손님이 많아져 돈을 많이 벌었다면 좋은 인연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 잘되게 하려고 고기를 조금 넣어주어 식당이 망했다면 나쁜 인연이라는 말이다. 전자는 동기는 나쁘나 결과가 좋기 때문에 선연이고 후자는 동기는 좋았으나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악연이다.

 

 

모든 수행의 핵심(궁극)(자아自我, 주관)를 죽이는(소멸) 일이다.” 나를 죽이면 모든 것은 저절로 객관화됨으로써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를 버리지 않는 이상 바라는 마음 없이 늘 그냥 최선을 다하는 무심無心의 삶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심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대자유인이 되는 해탈解脫이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없는 열반涅槃이기 때문이다. 무심은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 함으로써 얻어지는 최고의 지혜다. 따라서 무심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궁극이다. 무심 하나면 어떠한 고통도 일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은 무심 하나로 다 해결되어진다는 말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무심으로 살아 갈 것을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무심으로 살았는지를 점검해 보는 일은 어떠한 수행(기도, 명상) 보다 나에게 더 이익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원인에 의한 결과의 나타남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재하는 별도의 주재자(절대자)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일 뿐 근본원리에는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오직 자기 자신이 진여의 성품(무상, 연기, 중도, )인 원리를 깨우쳐 완성되는 궁극의 지혜(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이 부처님의 유언인 "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스스로의 등불이 밝으니 스스로에게 돌아가 의지하고) 법등명 법귀의法燈明 法歸依:(법의 등불이 밝으니 법에게 돌아가 의지하라)".

 

 

이와 같이 우주의 순환 원리인 인과법을 확실하게 알아서 숙명통宿命通이 열리고 진여의 성품인 원리를 깨달아 지혜가 완성되면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고통을 헤쳐 나아가는 주인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고 물과 같은 대 자유인(해탈자解脫者)이 되는 것이다.

 

해탈자는 (자아)’를 소멸 시켰기 때문에 존재자체만 있을 뿐 나를 위해 필요한 어떠한 그 무엇도 필요치 않게 된다. 다만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필요할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무소유無所有. 무엇을 하든 다만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이기 때문에 늘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생각은 있으나 번뇌 망상이 없는 무념無念, 어떠한 것도 내 것(아상我相, 무명無明, 알음알이, 고정관념)으로 삼지 않는 무상無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 즉 무심無心의 삶이다. 따라서 무심이 깨달음의 궁극이요, 해탈이요,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는 일이다.

 

 

를 죽이지 않으면 무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를 죽여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목적의식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어떠한 경우(상황, 여건, 조건)에도 절대긍정의 마음이 만들어 지고, 다 사랑 할 수 있게 된다. 성경말씀의 핵심인 할렐루야’ ‘아멘를 죽임으로써 가능해 진다. ‘를 죽여야 성령聖靈이 나에게 온전히 임하게 된다.

 

무심으로 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그냥 최선을 다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이 진여의 성품이다.

 

 

무심으로 행한 것은, 행하기는 행하였으나 행한 바가 없기 때문에 삶의 찌꺼기인 업을 남기지 않으므로 윤회의 고리가 다 끊어진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어느 곳에도 마음을 머물지 않게 하여 마음을 일으키라고 하는 것.)”의 의미다.



[출처] * 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작성자 여해 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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