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
시방 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 성문 스님네께 지성 귀의 하옵나니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저희들이
참된 성품 등지옵고 무명 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온갖 번뇌 쌓았으며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녀
여러 생에 지은 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삼보전에 원력빌어 일심참회 하옵나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네 살피옵서

고통바다 헤어나서 열반 언덕 가사이다
이 세상에 명과 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 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적마다 좋은 국토 밝은 스승 만나오며
바른 신심 굳게 세워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 들고 청정 범행 닦고 닦아
서리같이 엄한 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 생명 사랑하여
이내 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하리
삼재팔난 만나잖고 불법 인연 구족하며
반야 지혜 드러나고 보살 마음 견고하여
제불 정법 잘 배워서 대승 진리 깨달은 뒤
육바라밀 행을 닦아 아승기겁 뛰어 넘고
곳곳마다 설법으로 천겹 만겹 의심끊고
마군중을 항복받고 삼보를 뵙사올 제
시방 제불 섬기는 일 잠깐인들 쉬오리까
온갖 법문 다 배워서 모두 통달 하옵거든
복과 지혜 함께 늘어 무량 중생 제도하며
여섯 가지 신통얻고 무생 법인 이룬 뒤에
관음보살 대자비로 시방 법계 다니면서
보현보살 행원으로 많은 중생 건지올 제
여러 갈래 몸을 나퉈 미묘 법문 연설하고
지옥 아귀 나쁜 곳엔 광명 놓고 신통보여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보리 마음 모두 내어 윤회고를 벗어나되
화탕 지옥 끓는 물은 감로수로 변해지고
검수도산 날센 칼날 연꽃으로 화하여서
고통받던 저 중생들 극락세계 왕생하며
나는 새와 기는 짐승 원수 맺고 빚진 이들
갖은 고통 벗어나서 좋은 복락 누려지다
모진 질병 돌 적에는 약풀되어 치료하고
흉년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구제하되
여러 중생 이익한 일 한가진들 빼오리까
천겁 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이나
이 세상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얽히었던 애정 끊고 삼계 고해 벗어나서
시방 세계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사이다
허공 끝이 있아온들 이내 소원 다하리까
유정들도 무정들도 일체 종지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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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 참선곡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의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 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삼계대사 부처님이 정녕히 이르시되
마음깨쳐 성불하여 생사윤회 영단하고
불생불멸 저 국토에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를 사람마다 다할 줄로 팔만장교 유전이라.

사람 되어 못 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강 추려 적어보세.

앉고서고 보고듣고 착의끽반 대인접화
일체처 일체시에 소소영영(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 나의 부처
보고듣고 앉고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짝 할 제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한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 마를 때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 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가되 일념만년 되게 하여

폐침망찬(廢寢忘饌)할 지경에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 절묘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늙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본래 생긴 자기영광(自己靈光) 지내가되
개천개지(盖天蓋地) 이러하고 열반진락 (涅槃眞樂) 가이없다.
지옥 천당 본공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히 인가맡어
다시 의심 없앤 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수연방광(隨緣放光) 지내가되 빈배같이 떠놀면서
유연중생(有緣衆生) 제도하면 보불은덕(報佛恩德) 이 아닌가

일체계행(一切戒行) 지켜가면 천상인간 복수(福壽)하고
대원력을 발하여서 항수불학(恒隨佛學) 생각하고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먹어 빈병걸인 (貧病乞人) 괄시 말고
오온 색신(五溫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 하고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해태심(懈怠心)을 내지 말고 허령(虛靈)한 이내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팔풍오욕(八風五辱) 일체경계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세.

허튼소리 우스개로 이날 저날 다보내고
늙는 줄을 망각하니 무슨 공부 하여볼까.
죽을 제 고통 중에 후회한들 무엇하리.
사지백절(四肢百節)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낸 듯
오장육부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참혹 내 노릇이 이럴 줄을 누가 알꼬,
저 지옥과 저 축생(畜生)의 나의 신세 참혹하다.
백천만겁 차타(蹉跎)하여 다시 인신(人身) 망연(茫然)하다

참선 잘한 저 도인은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앓도 않고 선세(蟬蜕)하며
오래 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하며 항하사수 신통묘용 임의쾌락 소요하니
아무쪼록 이 세상을 눈코를 쥐어뜯고 부지런히 하여보세.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하니
포줏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로세.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깐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잠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럿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고

무명업식(無明業識) 독한 술에 혼혼불각 지내더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 않고 심상히 지나가니
혼미한 이 마음을 어이하여 인도할꼬

쓸데 없는 탐심진심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 분별(許多分別) 날마다 분요(紛擾)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지각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 죽을 줄 모르도다.
내 마음을 못 닦으면

여간계행(如干戒行) 소분복덕(小分福德) 도무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히 보아
하루도 열두 때며 밤으로도 조금 자고부지런히 공부하소.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위에 펴놓고 시시때때 경책하소
할 말을 다 하려면 해묵서이(海墨書而) 부진이라

이만 적고 그치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할 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기 나면 그때에 말할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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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모양도 소리도 없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있다 즉 부처가 되여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부처니기 때문에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본원의 원리인 것이다,

 

?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연기 즉 중도입니다.

이세상 모든것은 중도 연기로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도 역시나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곧 부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부처로서 살면 되는것이다

내 마음이 분별심이 없이 청정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내가 있는 곳이 절이요 법당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부처요, 미혹하면 중생다.  

 

정토는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내 마음 내집 내방 내있는 곳이 청정도량 이니 한마음 집착과 분별을 버리고 청정심으로 겸손하고 교만하지않게 살아 간다

면 정토의 수행자로서 가는길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마음이 부처다 생각도 보는것도 듣는것도 느끼는것도 감정도 모든것이 이 마음이며

마음을보면 연기를보고 법을보고 부처를본다고 했다.

 

이세상 있는 모든것은 영원한 것이 없고 곧 허망하고. 항상하지 못하다.

늘 수시로 변하고 달라지고 있다. 그래서 고정된 실체의 상이 없으므로

상이 없다. 비상이다. 즉 무상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독적으로 존재 할 수있는 것은 없다.

물론 나라는것도 나라고 할수 있는것도 내것이라 할수 있는 것도 없는 것이다.

? 연기적 작용으로 즉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결합되여 있기 때문에 딱히 절대적인것은 없다는 것이다.

즉 꿈과 같은 환()으로서 가합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머무를수 있는것도 머무를수 있는 곳도 없기 때문에 무주상 이라 하는 것이다.

고정되여 불변하는 실체의 상은 없다는 것이다.

물질이나 마음 생각 느낌 감정 시비 그 어떤것도 이름뿐이지 실체가 있는것은 없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이것을 즉비로 상을 부정 하고 이름뿐이다 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한 단어로 공이다 라고 표현 할 뿐이다.

금강경의 핵심이 바로 공이다 정해진 법이 없다는것을 무유정법으로 나타내는 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할수있는 것이다.

이것인가 싶으면 이것도 아니고 있는 가 싶으면 또한 있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없는 것도 아니더라.

양자 물리학에서 빛은 곧 파동인가 싶어 측정을 해보면 입자이고 입자인가싶어 측정해 보면 파동이더라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 입자라고 할수도 없고 파동이라고 할수도 없어 입자이면서 파동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금강경에 무유정법으로 인연따라 이뤄지는 수연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는 지금 즉 이순간을 중심으로 분별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며 그냥 부처로 인연따라 살아가는 것이 수행자

의 자세 즉 면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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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심시불’이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이다. 여기서 ‘부처’라는 말은 석가모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곧 진리 또는 우주, 불법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우주요 진리요 부처라는 말이다. 즉, 도(道)를 깨달으면 마음은 곧 불심(佛心)이기에 마음을 떠나서 부처는 따로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서 ‘그대의 마음이 곧 부처-진리’라는 뜻, 깨달아서 얻은 나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그 밖에 부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이 곧 깨달아야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실체, 마음의 움직임을 낚아채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는 뜻, 따라서 ‘부처’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을 가리키거나 인격화된 명칭이 아니라, 불교적 진리의 대명사로서 ‘부처’이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은 원래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사람들 마음이 부처임을 생각하면, 그 생각하는 마음 전체가 부처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이 부처임을 생각할 때, 그 마음에 부처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고 하는 데에서 나온 말인데, 즉심시불(卽心是佛), 즉심즉불(卽心卽佛),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즉불(是心卽佛), 심즉시불(心卽是佛)들이 다 같은 의미의 말들로서 혼용해서 쓰인다.

그리고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에서 활약한 재가불자로 선을 깨친 부흡(傅翕, 傅大士, 497~569)은 그의 저서 <심왕명(心王銘)>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해서 다른 데서 부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즉심시불이나 즉심즉불이 같은 말이므로 혼용해서 쓴다.

그 외에 선종 초기 2조 혜가(慧可)와 4조 도신(道信)의 설법에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설법이 등장하고 있으며,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사상은 혜능(慧能) 남종선의 핵심법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황벽 희운(黃檗希運, ?~850) 선사의 어록<전심법요(傳心法要>과 <완릉록(宛陵錄)> 등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그리고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주요 사상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을 들고 있다. 그리하여 마조 계통의 홍주선(洪州禪)은 조사선(祖師禪)의 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즉심시불 사상을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그런데 훗날 어떤 스님이 마조 선사에게 묻기를,

“왜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고 말하십니까?”라고 하자,

“애기의 울음을 달래기 위함이다.”라고 대답했다.

“애기가 울음을 그친 후에는 어찌 합니까?”라고 하자,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대답했다.

“이 두 종류를 제외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르칩니까?”라고 묻자,

“마음도 아니요(不是心), 부처도 아니요(不是佛), 물건도 아니다(不是物)라고 한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밖을 향해 부처를 구하고 있다. 마조 선사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깨우치기 위해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마조 선사가 즉심시불을 강조한 이후 사람들은 또한 즉심시불이라는 말에 집착해 수행하지 않게 되자, 지해(知解-알음알이)의 방편을 부수기 위해 이번에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설하게 된다.

처음에 즉심시불이라 답한 것은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해서라 했다. 이것은 일종의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몹시 아파하는 이는 삶이나 죽음이나 같다. 아픔을 견디기 힘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말도 한다. 여기서 우는 아이는 질문을 한 그 어떤 스님이다. 의정(疑情)과 의단(疑團)에 가슴 막힌 수행승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그 고통을 느끼는 절실한 마음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다. 그리하여 마음이나 부처에 구애 받는 자의식을 떠나서 본래면목 참 마음에 이르게 되면, 나 자신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게 된다는 말이다. 부처는 다른데 있는 게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다. 그렇게 달랬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울음을 그친 뒤엔 비심비불이라 했을까. 아이는 절실한 의단을 가진 무명(無明)을 뜻하고, 우는 것은 고행(苦行)이다. 그러니 울음을 그친 것은 고행을 그침을 말하고, 무명에서 벗어나 고행을 그치면 텅 비어[공(空)] 아무 것도 없다. 마음의 움직임을 낚아채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공을 깨쳤다면 거기엔 마음이라든지 부처(佛)든지 하는 명색(名色)이 없다. 그래서 우는 아이가 울음을 그치면 깨쳐서 비심비불이 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 견성성불(見性成佛), 즉신성불(卽身成佛)과 같은 맥락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



중국 당나라시대 대매 법상(大梅法常, 741-808) 스님은 명주(明州) 출신으로 휘호는 법상(法常)이며 형주 옥천사에서 출가했다. 계를 받은 후 수많은 경전을 공부했으며, 이윽고 크고 작은 경론을 강의했다. 그러다가 보니 지식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그의 강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그러나 스스로 위화감에 깊이 번민하다가 드디어 도를 찾아 널리 유행에 나섰다. 마침 마조 선사가 수행승을 지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매는 곧 그에게 갔다.

대매가 하루는 마조 선사께 묻기를, "어떤 것이 불(佛)입니까." 하니, 마조 선사가 답하기를,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했다.

“그것을 어떻게 체득합니까?”

“빈틈없이 지켜나가야 한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또한 그것이다.”

“달마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달마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마음을 간파하라!”

마조 선사의 이 말에 대매는 비로소 심오한 뜻을 깨달았다. 그는 곧 석장을 짚어가며 구름이 걸려 있는 대매산(大梅山)에 올랐다.

대매 법상은 아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스님이었는데, 마조 선사에게서 ‘즉심시불’이라는 법문을 들은 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알아 봤더니, 대매 스님은 대매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마조 선가가 시자를 보내서, 그 사람(대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가보고 오라고 했다.

그래 시자가 가보니까 거기서 혼자 살고 있는데, 그 심부름 간, 시자가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하니까,

“아 나는 전에 마조 선사에게 ‘즉심시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뭐 그걸로 내 공부는 다 됐다 생각하고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시자가 있다가 아! 그건 이제 유행이 지나갔고, 요즘 마조 선사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을 말하고 계신다고 했다. 즉, 즉심시불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법문을 하신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매 스님 말이,

“저 노장이 사람을 호리기를 그칠 날이 없구나. 노장이야 뭐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하든, 즉심시불이라고 하든, 나는 오직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겠네.” 이렇게 말하니, 시자가 돌아와서 마조 선사께 그 얘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아! 참 매실이 잘 익었구나!”라고 해서 인가를 하며, 제자들에게 일렀다.

“매실이 잘 익었으니 여러분은 이제 그리로 가서 마음대로 따먹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이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대매산에 큰 회중이 생겨나더니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는 그런 이야기가 <마조어록(馬祖語錄)>에 전한다.

「“마음이 부처[卽心是佛 또는 卽心卽佛]”에 나오는 마음은 최소한의 알아차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깨어있는 마음, 있는 그대로 현존하는 마음이다.

대매 스님은 마조 선사께서 ‘마음이 부처’라고 했을 때, 갇혀있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걸어 나와 ‘순수한 깨어있음’을 경험했다. 전에는 생각과의 동일시 그리고 감정의 혼란 속에 살아왔었는데, 마조 선사가 말하는 순간 순수한 내면 공간의 등장을 경험했다. 그것을 선에서는 견성(見性)이라 한다.

대매 스님은 이것을 완전하게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마조 선사는 “빈틈없이 지켜나가라.”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순수한 깨어있음의 상태, 있는 그대로의 현존을 빈틈없이 유지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깨어 있으려 해도, 있는 그대로 현존하려고 해도, 에고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머리를 내밀 것이다. 또한 과거생으로부터 익혀 온 업력이 대상을 만나면 머리를 들고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그때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강력하게 현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과 감정에 동일시하게 되면 에고와 업력이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에너지를 키워 그대를 삼켜버린다.

그러므로 생각과의 동일시, 감정과의 동일시가 일어나려고 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대신 직접 그것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생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존할 수 있다. 생각과 감정에 의식의 빛을 비춤으로써 에고와 업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순수한 깨어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깨어있음을 유지하면 에고와 업력은 점점 힘을 잃어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녹아 사라진다. 왜 그런가? 에고와 업력은 생각과 감정의 동일시를 먹고 사는 유기체이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어떤 감정이 일어나든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거리를 두고 연료를 보충해 주지 않고, 먹이를 주지 않으면 에고와 업력은 결국 에너지가 고갈돼 완전히 소멸한다.

대매는 30년 동안 깨어있음을 유지해 자신의 깨달음을 완성했다. 그것은 머리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완벽하게 체득한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매실이 완전히 익은 것이다.」 - 무념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 ----------------------



옛날에 석두(石頭)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승이 있었다. 하도 머리가 나빠 그의 이름이 '돌대가리'라는 뜻이다. 그의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경전의 말들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참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참선 역시 그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오직 옛날 혜능(慧能) 선사가 행자시설 그랬던 것처럼 “일하는 선(禪)”만 하기로 했다. 그는 늘 부엌에서, 들판에서 일만 했다.

그런데 그 선원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선사의 법문이 있었다. 이 법문들 역시 석두의 머리를 혼란에 빠지게 할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법문이 끝난 뒤 석두는 선사에게로 가서 말했다.

“스님, 저는 저의 어리석음에 진력이 났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에 선사가 말했다.

“질문을 하려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라.” 그런 막연한 질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석두는 한참 동안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늘 부처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부처가 무엇입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그런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이 말을 무식한 석두는 “짚신시불”로 알아들었다. 그는 부처는 곧 짚신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 얼마나 어려운 공안인가?” 하고 석두는 생각하면서 스님께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어떻게 부처가 짚신일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어떻게 하면 이 오묘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석두는 그 후 3년 동안 선원에서 일을 하면서 늘 이 큰 의문에 사로잡혔다. 화두 일념으로 일을 하면서도 그 말에 집중했다. 그냥 마음속에 그 의문을 늘 간직한 채 그 말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석두는 등에 잔뜩 땔감을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땔감이 나뒹굴고 그가 신고 있던 짚신 끈이 끊어지면서 허공으로 날아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 석두는 깨달음을 얻었다.

석두는 대단히 행복하고 흥분이 됐다. 그래서 그는 선사에게로 달려갔다.

“스님, 스님, 이제 저는 부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 선사는 석두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부처가 무엇인가?”

석두는 짚신 한 짝을 벗어 들어 선사의 뒤통수를 갈겼다.

선사가 말했다.

“이것이 진리인가?”

석두는 말했다.

“내 짚신 끈이 끊어졌습니다!” 석두는 해탈한 것이다.

선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석두는 기쁨의 춤을 추었다.

화두가 굳이 오묘한 뜻을 품은 글이 아니라도 된다. ‘짚신’이면 어떻고 ‘지게’면 어떤가. 일찍 숭산 행원(崇山行願, 1927~2004) 선사께서 미국에서 선교 사업을 벌일 때, 영어밖에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어려운 한문 투의 화두보다는 그들이 알아듣기 쉬운 “코카콜라”를 화두로 정해도 된다고 했다. 염불을 할 때도 목탁만 고집하지 않고, 장구, 북, 꽹과리 등 각종 타악기를 동원했다는 일화가 있다. 선(禪)은 격식을 무시하는 수행이기에 굳이 딱딱한 화두나 틀에 매인 격식에 묶일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이야기 ---------------------------------



옛날 어느 마을에 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외지로 다 나가버리고 그렇게 혼자 살고 있었다. 외로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할머니는 열심히 부처님에 의지했다.

처음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기도 하고 때로는 객지로 떠난 자식들의 행복을 빌기도 하다가 세월이 흘러 수행이 어느 정도 깊어진 어느 날 할머니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아! 이 모든 것이 덧없어 진다. 어떻게 하면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부끄러웠다. 자신은 글을 몰랐고, 때문에 지금까지 공부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 동안 고민하다가 드디어 용기를 내어 자신이 다니는 절의 한 스님에게 어렵게 말을 건넸다.

"스님, 제가 한번 마음을 깨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할머니의 질문을 받은 스님은 다름 아닌 그 절의 행자승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계를 받지 못한, 말하자면 수련승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진지함에 그 행자승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해주었다.

"노 보살님! 즉심시불(卽心是佛)입니다. 이것만 잘 생각해 보세요!"

할머니는 두 손을 공손히 합장하고 재빨리 암송했으나 할머니에게 이 어려운 말이 제대로 이해될 리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기억을 더듬어 행자승이 일러준 말을 되새기다가 나름으로 정리를 했다.

“음, ‘짚신시불’이라, 짚신이 곧 부처란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짚신이 부처님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할머니는 그날부터 짚신을 만들며 생각에 잠겼다. 지치지도 않고 한결같이 꾸준히 짚신을 만들며 이 말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어느덧 짚신 만드는 할머니로 유명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와서 말을 걸어도 할머니는 그저 묵묵히 짚신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짚신시불’에 몰두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겐 ‘짚신시불’이 곧 화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근처를 지나가던 스님이 마침 짚신이 해져 할머니에게 찾아갔다. 여느 때와 같이 할머니는 짚신을 만들고 있었고, 사람들이 달라고 하면 옆으로 하나 건네주곤 했다.

스님도 그렇게 짚신을 하나 얻으려는 참에 할머니의 두 뺨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봤다. 스님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궁금증을 못 이겨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노 보살님, 무슨 연유로 눈물을 보이시는지요?”

그러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할머니는 스님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내가 불법의 진리에 목이 말라 스님에게 법문을 하나 받았지요. 그것은 ‘짚신시불’이었는데,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무식한 내가 어찌 알음알이를 내나 싶어 그저 짚신을 만들면서 그 의미를 새겨보려 했답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을 잘못 들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짚신을 만드는 내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짚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짚신을 만들면서 계속 저의 변화하는 마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짚신을 통해서 저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저는 참다운 짚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즉심시불(卽心是佛)' 이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짚신시불’ 화두를 통해 깨쳐 해달을 한 것이다. 할머니가 자나 깨나 ‘즉심시불’을 '짚신시불'로 잘못 알아듣고 그것만 들고 있다가 견성했다는 것은 ‘즉심’이나 ‘짚신’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화두로 들고 있는 할머니 마음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158~1210) 선사는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 “심외무법(心外無法)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했다.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 국사도 어록 <태고집>에서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으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세 가지가 본래 차별이 없다”고 했다.

달마(達磨) 대사의 어록 <혈맥론(血脈論)>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 마음 떠나서 다른 부처를 찾을 수 없나니 이 마음 떠나서 보리와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기 성품은 진실해서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법(法) 그대로가 마음이라. 스스로 마음이 보리요, 스스로 마음이 열반이니, 만일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가 있어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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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연일 관광인파가 인산인해다 오늘 휴일이라서 더욱더 붐벼 내부는 줄지어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포기하고 경내만구경을하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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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공사상은 〈반야경〉에 기초를 둔 사상으로 중관학파(中觀學派, Madhyamika) 창시자 용수(龍樹, Nagarjuna, 150 ~250Common era·공통연호 경)에 의해 체계화됐다. 용수는 연기법이야말로 불타의 중심 교설이며 최상의 진리임을 밝히고있다. “모든 희론(戱論)을 적멸케 하는 연기법(緣起法; pratityasamutpada)은 모든 설법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연기법을 설한 정각자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연기’라는 말은 사물은 반드시 원인에 의해 생겨남을 의미한다. 용수가 해석하는 연기론은 ‘어떤 원인에 인연하여 어떤 법이 있다’는 존재의 상호상의성(相互相依性)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어떤 법도 인연을 따르지 않는 바가 없으니 일체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월칭(月稱, Candrakirti)은 〈명구론(明句論, prasannapada)〉에서 ‘연기’의 어의를 “사물이 원인과 조건을 기다려, 즉 의존하여(apeksya)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이 곧 공의(空義)로서의 연기의 의미이다. 〈회쟁론(回諍論)〉에서 용수는 “제법을 연해서 존재하는 것이 공성(空性)이며 또한 무자성성(無自性性) 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연기와 공성과 무자성의 논리 관계를 밝혔다. 이러한 연기·무자성·공의 논리가 용수가 해석한 연기와 공성의 관계의 주요 요지였다.〈반야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설한다. 사물이 생한다고 보는 것이나 멸한다고 보는 견해는 일상적인 언어에 의한 관념일 뿐 실제로 그 생멸에는 실체와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 사상은 모든 존재 스스로의 창조나 다른 존재로부터의 창조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연기와 공의 원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요소를 유기적 인과의 조직 속에서 생성되게 하는 법칙인 것이다. 제법은 연기의 관계로써 존재하므로 공하다는 일체법공(一切法空)사상의 귀착점은 연기설의 근본 정신인 중도(madhyama-pratipada)와 이를 깨우치는 중관(madhyamika)사상에 있다.

 

이러한 연기와 공과 중도의 관계는 ‘중송’의 첫장에 이른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게송으로 설해져 있다.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영원한 것도 없고 단절됨도 없다.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이 여덟 가지 부정의 게송은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유물론이나 유심론 등 무엇이 먼저 존재한다는 모든 사상을 부정한다. 생함과 멸함이 본래 없다는 것은 종자와 싹의 생멸 관계를 예로 설명할 수 있다. 싹은 종자에서 오지만 싹이 되어도 종자는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종자 속에도 역시 싹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를 소급해 보면 그 이전의 식물은 끝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본래 생이 없는 것이며 싹이 다시 종자가 되었을 때도 역시 그 식물은 소멸된 것이 아니므로 불멸인 것이다. 그러나 종자가 싹으로 변환되었을 때 그 종자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불상(不常)이며 그렇다고 그 상속 작용이 끊어지지 않음으로 불멸인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또한 어디에서 온 것도,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이를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추상적인 시간을 초월하여 오지도 가지도 않는 것이다.

 

마치 바닷물이 바람의 인연으로 물결이 일었다가 다시 잔잔해지나 본래 바닷물은 생함도 멸함도 없는 것과 같다. 연기설은 상호 의존적 관계 외에 독립적인 존재의 생을 부정하며 무(無)로부터의 창조설이나 상응론(相應論)도 부정한다. 이 논리의 중심은 동일성과 상대성과의 딜레마를 연기설로 해명하는 것이다. 태어남은 오히려 태어나지 않음이며 멸함도 또한 멸함이 아니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긴다고 해도 원인이 그대로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지도 않으며 끊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의 연기관은 초기 불교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비판한 불이적(不二的) 중도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중송’ 에 설하고 있는 바와같이 “연기하는 것은 곧 공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을 위한 가상의 명칭(假名)일 뿐이며, 그 공성은 바로 중도(中道)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연기를 공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언어적 시설에 지나지 않는다. 중도는 분별 작용을 넘어서 개념이나 언어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서 열리는 세계이다. 여기에서 초기 불교의 중도 사상이 대승불교에 와서는 공사상의 철학적 배경이 되었고 또 이 공사상은 대승의 종교적 실천 수행의 길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대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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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오스님

 

월인 스님 은사 상연대 출가 후

50이뭣고화두 정진일로

 

거울, 암명·대상 관계없이 비추듯

청정 자성·불성도 여여하게 작용

 

분별시비 떨친 부설거사 열반송

무심·무상·무주 관통했기에 가능

번뇌망상 당장 끊을 수 없다면

집착하지 않는 마음부터 내 보라

 

산길은 있어도 찻길은 없는 월명암. 2Km의 산행을 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월명암을 일러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라 한다.‘ 다툼이 없는 곳이니 적정처(寂靜處). 호남정맥의 첩첩산중과 운해(雲海)가 빚어내는 풍광은 말 그대로 절경이라 한다. 하지만 월명암을 오르는 동안 산은 자신의 자태를 내보이지 않았다. 비 개인 직후 일어나는 산 속의 안개와 바다에서 밀려 온 해무가 합쳐져 지척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월명암 절경도 3대의 복을 쌓아야만 접할 수 있는 것일까? 후드득! 나뭇잎에 남아있던 빗방울이 떨어지며 목덜미를 적신다. 산의 사자후가 들리는 듯하다.

 

입산을 허락하기에 방금 내리던 비를 멈추게 하지 않았는가!’

 

통일신라의 부설거사는 도반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법왕봉(현 쌍선봉) 아래 한 칸의 초가를 지어놓고 묘적(妙寂)이라 이름 했다. 선정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간다는 의미의 묘입선적(妙入禪寂)을 뜻함이다. 부설전(浮雪傳,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 140)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을 벗삼아 산을 오른다.

 

어느 날 부설거사는부부 인연을 맺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는 묘화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이를 지켜 본 영조 스님은부질없는 지혜가 헛된 견해를 이루고 편벽된 자비는 애연에 이루고야 말았네라며 안타까워 했고 영희 스님은 수행은 대나무 쪼개듯 해야 하고, 득도는 채찍을 휘갈기듯 해야 하네라며 날을 세웠다. 이별을 고한 두 도반을 위해 부설 거사는 솔잎차를 건네며도란 검은 비단을 입느냐 흰옷을 입느냐에 있지 않다. 모든 부처님들은 생명체들을 이롭게 하려는데 뜻을 두었다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후 부설거사는 부인 묘화와 아들 등운, 딸 월명과 함께 정진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영조, 영희 스님이 찾아왔다. 부설 거사는 병 3개에 물을 담아 대들보에 매달고는 각자 하나씩 깨뜨리기로 했다. 공부가 얼마큼 되었는지 점검해 보자는 의도였다. 영조와 영희 스님이 병을 때리자 병이 깨지면서 물이 쏟아져버렸다. 부설 거사가 때린 병도 깨졌지만 물은 보에 매달려 있었다.

부설거사가 일갈했다.

몸에 본성의 진상이 나타나니 생멸에 얽매이지 않는다. 무상(無常)한 환신(幻身)이 삶과 죽음을 따라서 옮겨 흐르는 것은 병이 깨어져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진성(眞性)은 본래 신령하여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물이 공중에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대들이 두루 높은 지식있는 이를 찾아보았고 오랫동안 총림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생과 멸을 섭수(攝受)하며 진상(眞常)을 삼고 환화(幻化)를 공()으로 하여 법성(法性)을 지키지 못하는가.”

 

부설거사는벌써 열반에 들려 했으나 자네들을 만나려고 여태 미루었다며 이내 게를 지었다.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이 없고/ 귀로 듣는 소리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다./ 분별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니/ 다만 심불이 스스로 귀의함을 보도다.’

 

부설거사는 일념으로 단정히 앉아 허물을 벗고는 열반에 들었다. 훗날 월명은 온 몸이 보랏빛 구름에 휩싸여 홀연히 서쪽 하늘로 향했다. 이를 지켜 본 등운은반야삼매에 깊이 들어 극락 가는 길이 기쁘다는 시를 짓고는 미소를 머금으며 입적했다. 지금의 월명암은 부설거사의 딸 월명을 기려 이름 한 것이고 사성선원(四聖禪院)은 부설, 묘화, 등운, 월명 네 명의 사성에서 유래 됐다.

 

월명암의 부속 암자인 묘적암은 부설거사가 수행했던 초가 한 칸의묘적터라 추정돼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사성선원장 일오 스님은 이 묘적암에 주석하고 있다.

 

일오 스님은 1965년 고향인 함양 상연대에서 월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월인 스님이라면 6.25한국전쟁 직전 잿더미로 변한 월명암에 법당을 세우며 부설거사의 법을 이은 스님으로서 숨은 도인이라 불렸다. 스승으로부터이 뭣고화두를 받은 일오 스님은 행자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인사 조사전, 화엄사 탑전, 백장암, 도솔암 등 전국 제방선원에 머물며 정진해 왔다. 대승경전은 물론 초기경전에도 밝아 선교를 겸수한 선승으로 정평 나있다.

일오 스님에게 여쭈어 볼 건 부설 거사가 열반송에서 이른심불(心佛)’이다. 무엇을 심불이라 하는지, 또 그 심불이 스스로 귀의함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지 궁금했다.

 

심불 질문에 일오 스님은거울을 들어보였다. “거울은 만상을 비추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했지요?”그렇다. 산을 비춘다 해서 거울이 산이 되는 건 아니다. 바위를 비춘다 해도 거울은 틀어지지 않는다. 거울은 대상에 따라 비출뿐 왜곡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일오 스님은 하택 신회의거울’(明鏡)을 꺼내들었다.

남양화상문답집징의에 나오는 신회 선사와 장연공 사이에 오고 간 선문답 일부분입니다. 신회 선사가 말하지요. ‘형상을 비춘다고 말하는 것은 대상물이 있기 때문에 그 모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장연공이 다시 묻습니다. ‘만약 대상이 없으면 비춥니까? 비추지 않습니까?’어떻습니까. 대상이 없으면 거울은 아무 것도 비추지 않나요?”

대상이 없다면 비출 게 없으니 거울은 비추지 않는다고 말해야 옳다. 신회 선사는 어떻게 답했을까?

신회 선사가 말합니다. ‘명경은 대상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언제나 비추고 있습니다.”뇌리를 강타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거울은 밝은 곳에서만 비추는 게 아닙니다. 어두운 곳에서도 비춥니다. 항상 여여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렇다. 어두운 곳에서 거울을 보았을 때, 거울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어둠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내 눈의 망막에 확연하게 잡히지 않아서 안 보이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거울을 통해 내가 안 보인다 해서 거울이 나를 비추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어두운 가운데서도 거울은 나를 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말이다.

일오 스님은 월암 스님이 쓴친절한 간화선에 신회의 명경에 대한 해설이 잘 돼 있으니 꼭 한 번 보라며 책에 설명된 자성견(自性見)과 수연견(隨緣見)을 전했다.

 

대상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거울의 본성이 항상 비추는 것은 중생의 자성이 청정하여 지혜의 광명이 세계를 비추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 일러 자성견이라 합니다. 수연견은 대상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작용적인 면을 말합니다. 방안이 어두울 때 대상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것은 자성견이 작용하지만 수연견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자성견은 밝고 어둠에 관계없이 보는 견이고, 수연견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작용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성, 불성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식들이 전한 청정자성, 불성, 참나를 신회는명경으로 바꿔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시비와 분별을 떨쳐내면 나와 세상을 차별 없이,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음을 일오 스님은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설거사의심불은 신회의명경과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 해도 의구심이 남는다. 어떻게 해야 심불이 될 수 있는가. 어찌해야 거울처럼 항상 여여하게 비추면서도 대상에 따라 왜곡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체 모든 존재가 인연화합으로 생긴 것이므로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습니다. 그러기에 무상이라 합니다. ‘라는 존재도 찰나 생멸의 과정 속 연기적 작용에 따라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라고 내세울 게 없지요. 그러기에 무아라 합니다. 나와 세상이 다 무상이요 무아인데 집착할게 있겠습니까?”

하지만 시비분별을 떨쳐내기란 녹록치 않다. 연기를 알아도 이를 체득하지 못한 중생으로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일체유심조라 했듯이 한 생각을 어떻게 일게 했는가에 따라 언행도, 세계도 달라집니다.”무서운 이야기다. 내 생각 하나에 이 세계는 예토가 될 수도 있고, 정토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이른 것처럼 한 생각조차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었다는 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내었다는 것의 의미합니다. 역설적으로 보면한 생각도 낸 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일러 무심이라 합니다.”

 

단 번에 이러한 무심을 내기란 불가능 하다고 전제하면서도 스님은연기적 세계관을 알았다면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어려움이 놓였다 해서 산이 꺼져라 한 숨 쉴 일은 아니라고 한다. 비록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들었더라도 뒤돌아서면 훌훌 털어버리려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성선원에서 내려다 본 월명암과 내변산 전경.

 

 

부설 거사도 그랬던 것이다. 연기법 속의 무상을 확연하게 알았기에 무심하려 노력하며 정진 하다가 궁극에는 시비분별을 떨쳐 버렸다. 시비분별을 떠나야만 무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달리 보면 무심하려 노력하는 중에 시비분별의 굴레도 벗을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숨통이 트인다. 번뇌와 상이 일어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도 정진이기 때문이다. 갈 길이 멀지만 시작은 할 수 있다.

 

밖을 내다보니 어느 새 해무가 걷혔다. 월명암 사성선원에서 내려다 본 내변산은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일오 스님이 한마디 이른다.

왜 산상무쟁처라 했는지 알겠지요?”

, 참 멋진 풍광입니다.”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을 수 있는 그 자리를 무쟁처라고 하지요. 풍광은 그저 그림일 뿐입니다.”

 

한 방 맞았다. 내면의 대립과 갈등, 시비와 분별을 떨친 그 자리가 무쟁처 아닌가. 그 자리, 어디 있는가. 서산 대사의 사자후가 들린다. ‘가히 우습다 소를 찾는 사람이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소요 스님은 그 자리서 깨달았다 하는데, 내 눈에는 절경만 가득하다.

그래도 참 좋다! 이런 호사 누려도 되는가!

 

일오 스님은

1965년 월인 스님을 만나 출가. 50년 동안 해인사 조사전, 화엄사 탑전, 백장암, 도솔암, 남해 염불암 등의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곡성 태안사 선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월명암 사성선원장을 맡아 후학을 제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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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온, 십이처, 십팔계
1) 오온(五蘊)-오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하며 색온(色蘊), 수온(水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을 말한다.
① 색온은 물체의 형상이며,(모든 물체를 뜻함)
② 수온은 감각작용,
③ 상온은 사고작용,
④ 행온은 의지작용,
⑤ 식온은 인식능력을 말한다.
※ 온(蘊)이란 쌓아 모았다는 뜻이고 인간(人間)은 몸과 마음, 즉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로 구성(構成)됨


① 색온(色蘊) : 색에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인 사대(四大)가 있고 이 사대는 안으로는 우리의 몸에 있어서 사지, 백골, 오장, 육부, 눈, 귀, 입 등의 모든 기관이 되는 것이고, 밖으로는 단단한 것(地)과 물(水), 더운 기운(火)과 움직이는 기운(風)이 된다.


- 눈이 바깥 물색의 경계를 대하지 않거나 또는 바깥 경계를 대할지라도 주의하여 마음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의식작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 금촉 또는 지감(판단중지-가치관 등 관념에 의한 분별중지)
- 눈이 밖으로 경계를 대하면서 주의하여 마음의 분별을 일으킬 때에 비로소 의식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의 색을 색온이 라 한다.
- 스스로 변화하며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로 제각기 다른 형태와 색체를 가진 색, 성, 향, 미, 촉, 법을 총괄한 객관적 세계.


② 수온(受蘊) : 육근(六根)의 감각을 통하여 육경을 접해서 일어나는 감수작용으로 고, 락, 불고, 불락(苦, 樂, 不苦, 不樂)을 느끼는 마음을 수온이라 한다.


③ 상온(想蘊) : 감수작용으로 일어나는 느낌이 뇌리에 전달되어 일어나는 상상 [사고]작용을 상온이라 한다.


④ 행온(行蘊) : 사고작용의 결과, 의지작용으로 취하고 버리는 행동, 인식의 능동적 작용을 행온이라 하고, 업의 근원이 된다.


⑤ 식온(識蘊) : 그것을 인식하여 좋고, 나쁘고 하는 판단작용을 식온이라 한다-(선악미추호오)판단/분별작용


바깥 세계와 이 몸 내부의 모든 기관은 오온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인연으로 쫓아 나는 이치를 보는 자는 법을 볼 것이고, 법을 보는 자는 자연 인연생(因緣生起)의 이치를 볼 것이며, 오온은 인연생기의 법이므로 오온에 대해 탐욕과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이 고(苦)를 없애는 것이다. < 아함경 >


* 비유 : 꽃(色)을 보니 아름다워서(受) 애인에게 주려는 생각이 들어(想) 꽃을 꺾었는데(行) 한편으로 꽃을 꺾은 것이 마음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識).
5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인 것으로 영원불멸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설한 것이다. 즉 이들에게 정신 또한 실체가 없으며 연기된 것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2) 12처(十二處)
이 우주에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 관계와 객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주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6내입처이고 객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6외입처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모든 현상은 12처에 포섭된다.
십이처(十二處)ㅡ육근과 육경을 합친 것; 처(處)ㅡ들어오는 곳
육근(六根)ㅡ안, 이, 비, 설, 신, 의ㅡ6내처(六內處)
육경(六境)ㅡ색, 성, 향, 미, 촉, 법ㅡ6외처(六外處)


<6근>               <6경>
➊ 안계(眼界) ㅡ ➐ 색계(色界)
➋ 이계(耳界) ㅡ ➑ 성계(聲界)
➌ 비계(鼻界) ㅡ ➒ 향계(香界)
➍ 설계(舌界) ㅡ ➓ 미계(味界)
➎ 신계(身界) ㅡ ⓫ 촉계(觸界)
➏ 의계(意界) ㅡ ⓬ 법계(法界)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을 이루는 기본 요소는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체를 구성하는 12처도 모두 연기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3) 18계(十八界)
18계설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인식기관[6근(六根)]과 인식대상[6경(六境)], 그리고 인식작용[6식(六識)]으로 분류한다.
계(界)ㅡ구성요소, 영역, 종류
식(識)ㅡ인식작용


<6근>               <6경>              <6식>
➊ 안계(眼界) + ➐ 색계(色界) = ⓭ 안식계(眼識界)
➋ 이계(耳界) + ➑ 성계(聲界) = ⓮ 이식계(耳識界)
➌ 비계(鼻界) + ➒ 향계(香界) = ⓯ 비식계(鼻識界)
➍ 설계(舌界) + ➓ 미계(味界) = ⓰ 설식계(舌識界)
➎ 신계(身界) + ⓫ 촉계(觸界) = ⓱ 신식계(身識界)
➏ 의계(意界) + ⓬ 법계(法界) = ⓲ 의식계(意識界)-[오감 감정 생각]
18계설은 물질과 정신에 실체가 있어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설한 것이다. 이들에게 물질과 정신의 참모습인 연기성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8계설에서도 결국 정신이든 물질이든 모든 현상은 영구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연기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일체(세계)는 12처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일체(세계)는 18계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며, 일체(세계)는 5온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ㅡ일체유심조: 일체 만물은 오온(참나)의 작용-법공
* 12처 = 6경 + 6근
* 18계 = 6경 + 6근 + 6식
* 108번뇌 = 18계 x 2(좋고, 나쁨 분별) x 3세(과거, 현재, 미래)
108번뇌, 108염주, 108배 등 108이라는 숫자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인식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대함으로써 일어나는데, 육근이 육경에 대할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이 육식이다. 이렇게 육근, 육경, 육식이 모여 인식이 성립하는 것을 '근경식 삼사화합'이라 함.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다가 이런 질문을 했다. “비구들이여, 내가 물을테니 아는 대로 대답해 보라.
육체[色]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시시각각 변해서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라면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육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것[我所]이며, 나[我]이며, 나의 본체[我體]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無我].”
“그러면 정신의 세계인 감수작용[受]과 개념작용[想], 그리고 의지[行]와 인식[識]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며, 즐거운 것이 아니며, 나의 것도 나의 본체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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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공

독립된 실제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존재의 원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화하므로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인데 이것을 무상공 이라하고
둘째 이것은 저것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어야 존재 할 수 있으므로서 서로 상관관계로 의지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연기공이라고 합니다
이때에 의미는 스스로 성품이 없다 (즉 자성이 없다 무자성) 확실하게 이것이다 하는 확실하게 저것이다라고 할 만한 그 무엇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모든 존재는 생기고 잠시 머무르고 변화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다라고 하며 무상이라고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설 풍습 윤리 도덕 모든 물질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컵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모양으로 보이겠지만 물리적으로 매 순간 미세하게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뿐 고정 불변은 아닙니다.

따라서 지금 보고 있는 컵은 과거의 보고 뇌에 인식된 기억속에 컵을 보고 있을뿐 겁을 형성하고 있는 소립자의 작용에 의해서 매 순간 미세하게 변하고 있는 지금은 컵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는 그 실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리를 통해서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실상의 허상 즉 가립된 존제를 보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는 것을 공을 보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변하기 때문에 항상 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공하다라는 의미의 공으로이므로 무상공이라고 합니다.

만상은 고정불변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는 것이 존재의 원리이기 때문에 무상을 보면 진리를 본다 진리를 취득한다는 뜻이 됩니다. 물체를 고정된 실제로 볼 때는 그 것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욕심을 일으켜 가지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무상으로 원리를 깨닫게 되면 잠시 존재하다가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므로 가지려 하는 욕심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거의 모든 고통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것은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기 공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관계로써 존재가 가능하므로 혼자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 할 수있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꽃을 해체해서 보면 이것과 저것이 모여 하나의 꽃이라고 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을뿐 꽃을 구성하고 있는 어느 것 하나도 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으며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는 씨앗 흑 비 태양과 같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조건만으로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접적인 원인으로 (인 씨앗) 간접적인 원인 (연 흑비 인간 태양등) 화합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인연생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물질이 인연따라 모이면 살아 있는 것이고 흩터지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70%는 물입니다 물을 먹으면 먹은 물은 내 몸의 구성 요소가 되어 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은 밖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나라고 할수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인연연기법으로 보면 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로서 존재하는 생명공동체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아서 어떤 물질적인 힘을 가해도 부서지지 않아야 하고 없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날 물리학에서 물체는 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소립자의 작용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그 작용에 의해서 물체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는 이것과 저 서로 상관관계로 영향력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생겨나고 흩어지고 없어진다라는 뜻으로써 모든 것은 전체로서 하나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의미의 공이므로 연기 공이라고 합니다 무상공과 연기공의 원리로 보면 만상은 있는 그대로 공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있는 것을 없애고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서 없음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보는 것이므로 공하다는 의미의 존재의 실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연기공의 원리로 보면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우주가 탄생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며 이것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적 윤회하는 과정에 이것은 저것에 들어 있고 저것은 이것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으며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상주 하는 것도 아니면 단멸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도 이와 같아서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죽는 가운데 죽지 않기도 하며 모든 것이 나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소립자는 온 우주에 에너지라는 형태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를 다른것들과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주간과 객관으로 나눠지기 때문에 내 것과 남의 것이 만들어져 서로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일어나 화를 자초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것들과 관계를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따라서 선별하고 차별하고 배척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되며 조건 없이 서로 나누지 않으면 상생의 관계가 끊어져 결국 자멸의 길로 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만상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공한 것이고 서로 상관관계를 의지하면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것은 제법은 있는 그대로 공하다 따라서 만상은 스스로 성품이 없으므로 무자성 즉 나라고 할 만한 영구불변의 실체는 없다 그래서 무아라는 말이 됩니다 무자성 원리는 빛의 이중성 즉 입자와 파동 양자물리학에서 밝혀짐으로써 더 확실해졌습니다

깨달음을 세계에서 말하는 것 같다 다르지 않다 사상이 그것입니다 무자생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나라고 할 만한 고정불변의 것은 없다라는 뜻이 어서 이 말은 무아라는 뜻인 되고 무아는 나라는 존재가 연기적 존재로서 있기는 하나 나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나 아닌 다른 요소 (오온 색수상행식) 로 나라는 존재로 있다. 즉 가립된 존재 허상 이라는 의미의이기 때문에 비아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함께 있는 생물 공동체 구성이기 때문에 나는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므로 모든 것을 하나로 보게되며 분별심 차별 저절로 없어지게 됨으로써 항상 전체를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독립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으니 나만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 그래서 깨닫고 나면 생명 공동 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필요하게 되어서 늘 한가하게 지내며 오직 나누는 일에만 충실 하게 됩니다. 연기공과 무아공 원리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자기 계발을 거의 끝났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자성 원리는 자기를 개발하는 원리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이 원리를 명확하게 알고 생활을 잘 활용하면 거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 원리를 우리 생활에 활용하기 위해서 항상 깨어있어 자신을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무아 무유정법 응무소주 재상비상 등 중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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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를 찿아라

이송장 끌고다니는 이것이 뭐고?

죽은 뒤에 이 몸뚱이 내버리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게 참말로 큰일이다.
발심해라.
인간은 늙을수록 천해진다.
가죽 속에 힘 있을 때 한번 좀 닦아보지
왜 늙기를 기다리는가?
병들기 전에 늙기 전에 한바탕해라.
나한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광음...
그 옥 같은 광음을 허송하지마라
금생에 생사해탈 못하면 언제 깨달을 것인가?
인생답게 살아봐야겠다. 그 무슨 도리냐?
나를 깨닫는 참선법을 해야 되겠다고 결심해라

"이 뭣고 (화두) 한번 찾아보란말여”

이 몸뚱이 내버릴 그 시간을 누가 아느냔 말여 일향간에 있다.
숨 한번 들이 쉬고 내쉬는 가운데 있다.
이 소소영영한 주인공은 똥을 아무리 묻힐래야 묻지도 않는다.
이렇게 껌껌해 가지고 오늘 살면 뭣하고 내일 살면 뭣혀. 내가 나를 깨달아야지.
우리는 도둑질한 죄수보다 더한 감옥에 갇힌 거여 죽으러 가는 소가 자욱 자욱 사지인 것과 같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자 이러지 말어.
광음을 진실로 아껴라.
오늘 이 목숨을 내버릴런지 내일 죽을런지 알지 못한다.
어린 손자가 물가에 놀다가 물에 빠질까
걱정이 돼서 쫓아 들어가 건져내듯이 간절할 절(切)자 뿐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진리가 있을 것인데
본래 생사가 없는 본래면목 근본면목
내가 나를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인디
죄만 퍼짓는 내가 나 깨달을 줄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어 육도윤회에 들어 어리석어
나를 깨달을 줄 모르는 것을 중생이라고해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부처를 안고 일어난다.
부처님 가신 곳을 알고자 할진데 이 말과 소리가 이것이니라.“
내 마음 밖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삼라만상이 내 마음에서 난 것이다.
두두물물이 다 내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다.
내가 하늘이고 내가 우주만물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여!
발심을 해가지고 들어오면 어디 가서 남의 시비가 보일 것이냐
죽을 일을 생각해 보지 어찌 안할 것인가?
공부에 要한 것이 그 마음을 잘 써라.
이 뭣고를 잘 챙기는 것이다.

참으로 참다운 신심을 발해라.
신심을 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해태 마구니가 잽히고
번뇌 마구니가 잽히고 일체 마구니에
그놈한테 가서 그만 입에 물려가지고서
밤낮 그만 도로 煩惱妄想 도로 해태심 도로 그런 마음 이렇다.

한번 신심을 내라
어찌 안 믿을 수가 있나
내가 나 찾는 법을 어째 안 믿어?
밤새도록 자고 있어?
몇 시간씩 자고 있어?
잠 안 잔다고 병 안나.
화두만 없어지면 즐겁다 좋다 망념이 들어올 것이니까.
숨 내쉴 때에도 알 수 없는 화두요
숨을 들이쉴 때에도 알 수 없는 화두가 되게 하라.
넘 안한다고 나도 안할 것인가?

공부하는데
의심은 왜 이렇게 안날까 하시겠지만
그렇게 안되는 법이여
그래도 그렇게 안 될수록에 안되는 곳을 보면 망상이 화두 뿌럭지에 가서 솜 얼키듯이 얽혔어 전생의 숙습이기 때문에 화두는 겉으로 들어지고 속에는 망상이 끼었어 그 여러 가지 망상 번뇌가 뿌럭데기가 없기 때문에 곧 죽어버려
"이뭣고(화두)"만 하면 곧 없어져...
알 수 없는 의심하나 그놈이 본 주인이기 때문에 천 가지 만 가지 망상이 다 무찔러지는 것이여
망상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말라.
싸울수록 더 일어나니 의심하나만 둬라.

-전강스님의 발심 법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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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태어나기전 어떤것이 참나더고?]

나는언제 부터인가 내 전생이 궁금했었다
인터넷 법문을 찿아 해매다가 참나를 찿아 참되게 살라는 글귀를 우연히보고
그럼 "어떤것이 참나일까 ?" 하는의문이 마음에 꽂쳤다
반야심경에 이몸이 사대(지수화풍)오온(색수상행식)
으로 되여있고 그것이 본래 공하다
그러면 진짜 참나는(본래면목) 뭘까?
자성.진성.본성.불성,성품 이라고
불러지는 이것이 어떤것일까?

마음을 알면 성품을알고 성품을 알면 부처를 보는 것이다 (식심견성)
그런데 아직 마음이 뭔지 알지 못하고
성품을 알지 못하니 부처를 알리가 없다

"이 뮛고?"

이것을 아는 것만이 부처를 아는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이 날때마다
난 이것(화두)을 나에게 되묻는다
어느땐 순일하게 잘 될때도 있지만 거의
잊어버리고 놓치고 지낼때가 더많다

이래가지고 언제 공부를 할까 .
오매일여 숙면일여 몽중일여 까지 갈수있을까?
화두를 놓을래야 놀을수없을 정도로
딱 의문이 고리와 연결이돼 물이 흐르듯 흘러야 된다는데 난 늘 놓치고 산다

百尺竿頭 進一步(백척간두 진일보)
말과생각이 끊어져 은산철벽을 넘어야
화두 타파가 된다고 했는데
마음 찿는공부가 이렇게 어렵다면
늘 깨여있어서 항시 화두를 들고
그러다 순간 놓치면 알아차리고
참회하고 다시 화두를 들고를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해야만 될것이다

"이 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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