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TV에서 두물머리 양평시장이 나왔다 언젠가부터 시골 5일장을 가보고싶었는데 잘됐다싶어 배낭하나 걸머지고 9:15분 집을나섰다 버스를타고 망우역에서 용문행 열차를 공짜로 타고 44분 출발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타보는 열차여행이라 설랬다
옛날에는 기차가 달리면 철로이음 부분에 바뀌가 지날때마다 덜거덕 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는데 요즘은 이음부분이 없는 철로로 조용하게 달리다보니 옛날 석탄으로 증기를 만들어 하얀 머리가락을 흩날리며 달리던 기차가 생각이난다.
코로나 때문인지 승객들이 별로없어 자리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나마 있는 승객도 나처럼 공짜 승객들이 대부분들이다
이런걸보면 대한민국이 복지는 잘되여 있다는 생각이든다, 이 노선스로 계속달리면 동해 강릉까지 갈수있다
갑자기 동해의 푸른바다가 생각이 난다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찬다는  생각을한다. 진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홀로 다닌다고한다
오늘은 시골 5일장 구경을하고 신선한 봄나물 돌미나리 냉이 달래를 좀사와서 정자에게 선물을 할까한다
열차는 한가한 시골길을 여유있게 달리고 나는 차장 넘어로 스치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바라보고있다.
시골역에서는 타고내리는 사람도 별로없다 아직 농사는 이른지 논밭이 그대로 묵혀있다. 차창밖 동네 울타리에는 개나리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버드나무 가지에는 푸릇푸릇 새삯이 돋아 나서 예쁘다.
한가한 농촌풍경이 참으로 정겹게 아름답다 그런데 왜 이 아름다움을 즐길줄 모르고 허덕이며 골치아프게들
살고 있을까? 정말 있는그대로 천국이며 극락인데 지옥적으로 살게 뭐 있을까? 모든게 다 나라는 생각에 이분법적 생각으로 집착을 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모든것은 존재는 있지만 그 실체는 없는것이다
그런데 우린 있다고 여기고있기 때문이다. 모든것은 인연에 의한 연기적 존재일 뿐이다. 고정된 단독적 불변의 실체는 없는것이다. 그래서 무상 무아라고 하는것이다.
연기는 모두가 각 각 다른 것들이 인연으로 모여서 형성 됐을뿐이다.
그래서 이것이다 라고 할수있는것은 없는것이다. 다만 서로 의존하면서 존재할 뿐이다. 영원 무궁한것은 없다
실체가 없으므로 본래 청정하고

생멸이 본래 업는 것이며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며
깨끗 한것도 더러운것도 아니며
같은것도 아니고 다른것도 아니며
가는것도아니고 오는것도 아닌것이
존재의 실상인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친 최초로 발견한 중도 연기라는 것이다.

열차는 40분을 달려왔다
국수역을 지나고있다 양평역은 거의다 온것갔다. 내려서 역사 밖으로나가는데 승객이 썰렁하다 했더니 오늘따라 코로나로 인하여 장이 안열린다고한다
정말 썰렁하다 할수없이 노점에서 수수빈대떡 전병을 하나 사서먹고 한바뀌 돌아보고서 나왔다.

마침열차에서 시장구경차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시 열차를 (Ktx)를타고 동해로 갈까하다 또 분별심에 서울행 전철을 탈수밖에 없었다 .

생각대로 되는일은 별로없다
생각은 생각일뿐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맞아 떨어지지 않을때가 많다
일이 뜻데로 이루진다면 조건과 일치하는 인연의 순간들리다.
세상사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으나 조건에 따라서 정해질수도 있는것이다
내 생각을 믿어도 안되고 믿지 않아도 안된다 다만 인연(조건)에 따라 이뤄질 때도있고 이뤄지지 않을때도
있기 때문이다.
바람도 쐬고 운동삼아 잘 나왔다 간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아까 탓던 망우역에 내렸다.

이 몸뚱이를 끌고 갔다온 이것이 뭘까?  이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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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色卽是空) ‘이 뭣고’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무형(無形)을 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서로 통하고 있는가?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虛空)이고 허공이 바위이다.

예를 들어 바위를 자꾸 나누어 가다보면 분자(分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고, 분자는 또 원자(原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원자도 소립자(素粒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결국 소립자 뭉치인 것이다. 그러면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하면,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충돌해서 입자(粒子)가 문득 나타났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있고, 바위도 무정물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인 소립자(素粒子)를 세분화하면 머리카락 굵기의 1조분의 1인 쿼크(Quark)인데 원자보다 십만배 이상 작은 원자핵 안에서 자동으로 스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주(宇宙)를 형성(形性)하는 근본(根本)은 에너지, 질량(質量), 그리고 광자(光子)이다. 상대성원리인 E=mc2의 공식은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뿐 아니라,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량과 에너지는 하나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질량이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이다. 연기법(緣起法)과 공성(空性)의 세계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상주법계(常住法界)는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다.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 여서 유정무정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총칭(總稱)이다.

그러므로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생명 전체가 절대여서 생명거래가 없는 것이다.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說) 산색개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계곡서 흘러가는 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산색 그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로구나. 밤새 쏟아내는 팔만사천 부처님의 감로 법문을, 뒷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이 시(詩)는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진리와 선의 세계가 아님이 없는 무처불시선(無處佛是禪)의 경계를 읊은 소동파의 오도시(悟道詩)이다.

소동파가 옥천사라는 절에 승호 큰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대인(大人)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의 성씨는 칭(秤)가요” 천하 스님들 무게를 달아보는 저울이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이 ‘악’하고 할을 하시며 “이 것이 몇근이나 됩니까?” 하고 반문하니 그 한마디에 소동파는 앞뒤가 꽉 막혀버렸다. 그래서 그 길로 상총 스님을 찾아가 ‘할’하는 도리를 묻자,

“어찌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만 들으려 하는고”하며 꾸짖으니, 말을 타고 계곡을 내려오다가 오로지 무정설법이라는 의정에 모든 생각, 분별이 사라지며 폭포수 소리에 개오한 것이다. 우주(宇宙)에 가득찬 그대로가 반야(般若)이고,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며, ‘이 뭣고’ 이며 증감(增感)이 없는 전 우주인(宇宙人)이고, 본래완성이며 본래구족(本自具足)이다.

또한 ‘이 뭣고’는 한없이 온갖 법을 창출하고 섭수(攝受)하되, 일찍이 일체법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정화되어 있지 않은 빛이 4차원을 넘어선 공간에서는 영(靈) 혹은 영적(靈的) 에너지로 존재한다. 이 영적 에너지는 무형으로서 생명의 근본이며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불성이고 진여본심이며 ‘이뭣고’인 것이다.

청운 스님

[출처] 색즉시공(色卽是空) ‘이 뭣고’|작성자 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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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한자로는 실아(實我)라고 표현됩니다.

진실된 나, 참된 나라는 의미입니다.

우선 ""라는 것을 먼저 자세히 아는게 중요합니다.

""라는 것은 오온에 의지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름/명칭!!!

오온은 색수상행식입니다.

내가 너의 몸을 보고 네 이름을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몸을 보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색수상행식에 과연 실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조견오온개공이죠.   

(/물질)은 무상한 것이며, 그러므로 苦이고, 또한 無我이며, 空입니다.

수상행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온도 역시나 실체가 없어서 공한데,

그 실체가 없는 오온에 의지해서 붙여진 ""라는 명칭에 무슨 실체가 있겠습니까?

또한 거길 뛰어넘어 <참나>라는 것도 역시나 있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에도 실체가 없는데, <참나>라는게 있을 수 없죠.

""라는 호칭/명칭은 우리 인간세계에서 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자니,

나 또는 너...라고 서로 호칭을 붙여서 부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임시의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야경에서의 부처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치 5[]이 화합한 까닭에 이름이 나이어서, 실제의 나[實我]는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중생(衆生) 내지 아는 자[知者]ㆍ보는 자[見者]도 모두가 5중의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임시의 이름[假名法]이니, 이 모든 법은 진실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건만 세간에서는 단지 이름으로만 말하게 되느니라. 보살이나 보살의 이름과 반야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가 이 인연으로 화합한 임시의 이름이니라

위의 말씀에 나오다시피,

오온이 화합한 것을 나라고 부르는데, 실제의 나(참나)도 역시나 당연히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래는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외도들처럼 실아(實我)를 구하고 찾아도 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다만 거짓 이름일 뿐이다.

갖가지 인연이 화합해서 있으므로 이런 이름이 있을 뿐이다.”

외도들은 ""에 집착하기 때문에 "진실된 나"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아트만 또는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몸과 마음을 떠나서 ""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몸과 마음과 상관없는 제3의 나(영혼/참나)가 있다면, 그것이 과연 나랑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영원불멸의 나, 즉 참나가 있다면 언제나 변화가 없어야 하므로,

죽지도 못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못해야 합니다. 영원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변화해가며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므로 참나(實我)라는 것은 본래가 없습니다.

왜냐면 <제법무아>라서 실체가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도 실체가 없이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인데,

"참나"라는 것도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나 또 많이 오해하는 것중에 하나가 불성(佛性)이 있다라는 표현입니다.

불성(佛性)이란 불생불멸을 뜻하며, 이게 곧 입니다.

그러므로 실체로 여길 만한 그 무엇이 있는게 아닙니다.

도 역시나 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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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무엇인가. / 혜국스님

 

 

 

 

 

어떠한 것이 참나인가. 누가 참나인가.

 

여러분들은 라고 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몸에서 영혼이 나가면 눈이 떠집니까?

 

죽은 사람들은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눈이 있지요.

 

있는데 그 사람은 봅니까? 못 봅니까?

 

그럼 눈으로 보는 게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영혼이 다시 몸속으로 들어오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나입니까? 이 몸뚱이가 나입니까?

 

영혼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두 참구법입니다.

 

위궤양이나 간경화를 고쳐주면 의사선생한테 정말 고맙다고 하는데,

 

몸뚱이가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참나를 위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세요.

 

몸뚱이가 나인 줄 알고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했지만 몸뚱이가

 

나를 지켜 줍니까?

 

늙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늙지, 아프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아프지, 죽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죽지, 아무리 내 몸뚱이를 위해봐야

 

결국은 나를 배신합니다.

 

배신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몸뚱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

 

운명의 노예가 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라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내 몸뚱이 위한다고

 

보낸 시간은 많지만, 내 몸뚱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내 마음을 위해서

 

마음 농사짓는데 바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선 공부는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법문을 듣고 여러분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워야 합니다.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우려면 여러분들 안에 있는 욕망, 시기·질투,

 

번뇌 망상을 화두로 돌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두는 부처요, 망상은 중생이니 중생부처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이 부처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 몸뚱이는 60조 개나 되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에 무량겁(無量劫) 동안 살아온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기록돼 있습니다.

 

그 기록을 우리는 업장(業障)이라 합니다.

 

60조 개나 되는 세포에 기록된 모든 업장이 부처로 바뀌어 가는

 

기간을 교리적으로는 아승기겁이라 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요원하겠습니까.

 

내가 마음의 눈을 뜨면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쉽다고 하면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중생이 부처 되는 것을 쉽다고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 목숨 바쳐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도 벽이 있으니 이 방, 저 방, 아랫방이 있는 것입니다.

 

이 벽 다 허물어 버리면 법당도 없고 허공이 되어 버리지요.

 

그럼 그 허공은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허공은 변하지 않습니다.

 

허공은 조용필이 부르는 허공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는 시야까지를 허공이라 하는데 진짜 허공은 깨달은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내 성품이 허공이지요.

 

아인슈타인은 허공을 본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밖에 없다

 

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들어오는 허공을 허공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공 자체는 변함없습니다.

 

여러분 마음 부처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임제 스님도 그것을 깨치고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했습니다.

 

이것은 우주가 깨어지는 소리요, 중생이 부처되는 소리요,

 

참으로 우리를 모두 다 제도하는 소리입니다.

 

내가 깨달으면 천하가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첩첩산중이 다 부처님 도량이요,

 

만상의 소리가 부처님 음성입니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불국토가 사바세계인 것입니다.

 

너무 육신으로 가고, 너무 멀리 갔으니 마음의 고향으로 핸들을

 

돌려보자, 그게 화두참선법 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따라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누구냐? 나는 모른다.

 

모르면 어떻게 하는가.

 

내 마음 안에 있는 번뇌망상이 부처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 농사라 합니다.

 

매일 이뭣고하며 내 마음 농사는 얼마나 지었는가,

 

내 마음의 소가 남의 밭에 놀게 놔둔 일은 없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뭣고를 스승 삼아 이뭣고를 할 줄 아는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뭣고를 대지와 같은 벗,

 

어머니와 같은 벗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승사자를 만나도, 천둥벼락이 쳐도 이뭣고하는

 

이 것만큼은 어느 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침을 뱉어도 묻지 않고, 똥물을 끼얹어도 묻지 않는 허공과 같이 마음을 쓰면

 

누가들 나를 어찌 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 손가락을 태우면서

 

나 혼자 극락세계에 가지는 않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만약 제 법문을 들은 사람이 지옥에 가 있다면 그 사람을

 

업고서라도 부처님 회상으로 나와서 도의 길을 가게 할 것입니다.

 

내 얼굴 한 번 본 사람은 내가 반드시 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 벽만 허물어 버리면 여러분도 바로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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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경문에 나오는 ‘문(門, skt. dvara)’은 출입문이란 의미보다는 따위, 부류, 그런 종류, 상태, 가르침 등의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문(門)’이란 그런 마음상태, 혹은 마음이 드나드는 문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문(門)이 곧 마음(心)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마명(馬鳴, 아슈바고샤/Asvaghoa, AD 2세기) 보살은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 즉 생멸심과 진여심이 있다고 했다.


• 생멸심(生滅心)이란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측면을 말한 것인데, 이 생멸심이 바로 중생심이다. 중생은 대상에 따라서 온갖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마치 죽 끓듯 일어나,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즉, 세간법의 세계를 말한다.


• 진여심(眞如心)이란 우리의 본래 마음으로서, 이 마음은 맑고 청정하다고 해 청정심(淸淨心), 부처님의 성품과 같다고 하여 불성(佛性), 여래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여래장(如來藏), 이 자리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고 해서 ‘이 뭣고’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마음의 참된 모습을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를 ‘언어를 떠난, - 언어를 초월한 말(離言眞如)’이라고 했다. 즉, 출세간법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원효(元曉, 617~686) 대사는 사람에겐 부처와 같은 마음과 속된 마음, 이렇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다. 부처와 같은 마음이 진여심이요, 속된 마음이 생멸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여심을 추구하는 가르침인 진여문(眞如門)은 모든 상대적 모습을 떠난 불변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생멸심의 가르침인 생멸문(生滅門)은 진여문의 반대말로서, 중생이 태어나고 죽게 되는 문, 중생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말한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은 일심이문(一心二門)을 말했다. 한 마음에 두 개의 문(심)이 있다는 말이다. 마음은 진리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그 마음의 문에는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로 가는 진여문(眞如門)과 중생세계로 가는 생멸문(生滅門)이 있다. 즉, 일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하는 것이 일심인데, 이 일심은 진여와 생멸의 두 측면을 가진다. 생멸문은 세간법이요, 진여문은 출세간법을 일컫는다.


진여문을 심진여문(心眞如門), 생멸문을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도 한다. 즉, 이문(二門)이란 진여문과 생멸문인데, 그 자체가 번뇌와 무명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진여문이고, 번뇌와 무명 작용에 유전해 가는 것이 생멸문이다. 생멸에서 진여로 나아가는 문이 진여문이고, 진여에서 생멸로 나아가는 문이 생멸문이기에 이문(二門)이 된다.

<기신론>의 법문을 보자.
“현시정의자 의일심자 유이종문(顯示正義者 依一心者 有二種門) - 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일심이라는 것에 의지해 두 가지 문이 있음이니,
일자 심진여문 이자 심생멸문(一者 心眞如門 二者 心生滅門) - 하나는 마음의 진여문이요, 둘은 마음의 생멸문이다.”


여기서 마음을 진여와 생멸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여문이라는 것은 진여(眞如), 즉 ‘참나’를 느껴가는 수행과정을 말하며, 생멸문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나타나고(生) 사라지는(滅) 생각들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함부로 움직여 타락돼가는 과정을 생멸문이라고 표현했다. 즉, 생멸문은 본래 고요함을 잃고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 - 번뇌가 들끓는 상태를 가리킨 것이다.

이른바 오온(五蘊)을 추구하면 색(色)과 심(心)이 있지만, 육진(六塵) 경계, - 육진을 초월한 경계는 필경 무념(無念)이다. 마음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시방으로 구해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오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하는데, 색을 제외한 나머지 수ㆍ상ㆍ행ㆍ식이 마음(心)이다.


육진(六塵)이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하는데, 이들이 6근(六根)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서 우리들 정심(淨心)을 더럽히고 진성(眞性)을 덮어 흐리게 함으로 진(塵)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육진 경계를 넘어서야 무념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일반 범부가 일상적으로 자아(自我)라고 여기는 것은 바로 심신(心身)의 ‘나’,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5온(蘊)의 ‘나’를 말한다. 물리적 존재인 신(身)이 곧 색이고, 심리적 존재인 심(心)이 곧 수ㆍ상ㆍ행ㆍ식이다. 이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무더기를 진제(眞諦, Paramartha, 499~569)는 ‘5음(陰)’으로 번역했고 현장(玄奘, 602~664)은 ‘5온(蘊)’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공(空)이라는 것이다. 색(色)이 곧 공(空)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중관(中觀)사상이고, 공으로 드러나는 진여가 곧 심(心)이기에, 색이 곧 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유식(唯識)사상이다.


유식에 따르면, 일체제법이 모두 다 심(心)의 변현(變現) 결과로서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나 마음 바깥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6진 경계는 찾을 수는 없다. 일체는 마음의 경계인 것이다.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도 포착되지 않기에 시방세계 어디에서도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미혹하기 때문에 동(東)을 서(西)라고 해도 방향이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무명으로 미혹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각[念]이라고 여겨도 마음 바탕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은 불가득(不可得)이지만 중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혹해서 동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해도 방향 자체가 실제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이 근저에 있기에 우리가 방향에 미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의 본래 마음인 진여성(眞如性)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떠올린 망념과 동일시하면서 그 망념에 끌려 다닌다 해도, 마음 바탕의 청정한 진여성이 사라지거나 망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여성과 그 본각(本覺)이 근저에 놓여 있기에 그 진여 본각을 알지 못하는 미혹이 미혹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관찰해 마음에 염(念)이 없다는 것을 알면,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 안의 마음 바탕을 관해 마음은 본래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곧 자신의 마음을 진여로 자각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멸하는 망념을 따라가지 않고 그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생멸문에서 몸만 돌리면 바로 그 자리가 곧 진여문이다.
생멸심과 진여심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마음이 아니라 마치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파도요, 파도는 바닷물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파도와 바닷물은 둘이 아니다. 또 푸른 하늘에 비유할 수도 있다. 하늘의 본바탕은 맑고 푸르다. 그러나 때때로 흰 구름ㆍ뭉게구름ㆍ먹구름이 낄 때도 있지만, 맑고 푸른 하늘의 본바탕은 변함이 없다. 여기서 맑고 푸른 하늘은 우리의 본래 마음이고, 구름 낀 하늘은 생멸심이다.


그리고 거울에 비유해 보자. 여기 거울이 하나 있다. 이 거울은 본래 맑고 깨끗했다. 그런데 이 거울에 때가 묻고 먼지가 끼면 물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코가 둘로 보이기도 하고, 한 쪽 눈은 작고 다른 한 쪽 눈은 크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때가 묻었다고 해서 거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맑고 깨끗한 거울이 우리의 진여심이라면, 때 묻고 먼지 낀 거울이 생멸심이다. 때 묻고 먼지 낀 거울도 깨끗이 닦아내면 맑고 깨끗한 거울이 될 수 있듯이, - 진여문에 들어설 수 있듯이 우리 중생도 열심이 수행정진하면 불심(佛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진여문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불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이 문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ㆍ무형의 사물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고 애착이나 집착을 놓아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세속적인 마음(생멸심)이 일심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되는 진여심 위에 세속적인 마음인 생멸심이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면서 일심으로 돌아가야 함, - 일심으로의 회귀해야 함을 말한다[회귀일심(回歸一心)].


일심(一心)이란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의미한다. 일심과 같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마음으로 정돈된 마음을 진여심(眞如心), 심진여문(心眞如門) 혹은 불심(佛心)이라 한다. 불심은 부처와 같이 깨달은 마음이다. 이 불심을 일심이라고 한다. 일심은 불교에서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이다. 일심은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어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서 그냥 ‘참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진여문과 생멸문은 분리될 수 없지만은 동일한 중생심을 양쪽에서 관찰한 것이다. 영원한 불심에서 이를 보면 심진여문이요, 생멸의 현상에서 이를 보면 심생멸문이다.
일심의 ‘일’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고, 개체가 그 안에서 진실로 살아 있는 조화로운 전체가 일심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 있고,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음을 말한다. 일심은 우주의 진리, 진여심을 말하는데, 이 일심이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이다.


그리하여 일심의 덕성은 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의 모든 대상 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춰주듯이 환하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고, 어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대승기신론>의 이러한 일심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독특한 사상으로 발전시킨 고승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으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和諍思想)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一心二門論)이다.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원효 대사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를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비록 두 가지 문이 있어서 다른 문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문이라는 것이 원효 대사의 사상이다. 일심은 중생의 마음이며, 그 문의 이름은 진여문인 동시에 생멸문으로 불린다는 것이 원효 대사의 대답이었다.

이와 같이 진여문과 생멸문은 같은 문으로 중생의 마음의 문이다. 일심은 비어있는 공(空)이며 누구나가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중생이 들어가더라도 항상 비어있다. 마음의 문은 우주 전체가 들어가도 닫히지 않는다                                                                                           

                                                                                                                   (이미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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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비워야 자유로와 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 - 도법 스님


중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도 아니고 이분법적 견해의 그 중간도 아니다. '너와 나', '선과 악', '옳고 그름',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적 견해에 얽매이거나, 그 두 개의 견해를 알맞게 절충하거나, 아니면 두 개의 견해 사이의 그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 중도는 단순히 극단적인 길을 피하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도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다.

중도는 '바른 견해'이고, '바른 생각'이다. 중도는 우선 '바르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르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을 달리 보거나 해석하는 것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그럼 사실은 무엇일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인과 연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연기적 존재' 혹은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개체는 없다. 당신은 당신의 부모, 조상들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음식, 물, 공기, 지구 그리고 우주의 어느 것 하나라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한 송이 꽃도 한 조각 구름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른 생각'도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결해를 버릴 수 있다.

예를 들면,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너와 꽃'이 다르지 않고, '꽃과 돌'이 다르지 않고, '돌과 집'이 다르지 않고, '집과 별'이 다르지 않고, '별과 연꽃'이 다르지 않고, '연꽃과 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무상하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도 없다. 무상은 무아이기도 하다. 무상, 무아, 괴로운 것이 인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연기하고 있는 이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자라서 소녀가 될 수 있고,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될 수 있다. 무아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비우면 채워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라고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들을 다 비우면, 하나의 견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견해를 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바른 견해'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고, 극단적인 시각과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만물의 본성은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인과 연에 의해 생성된다는 '연기법'을 따르는 것이다. ... 우리가 이러한 가르침을 잊고, 생각에 집착하고, 그리고 사물에 집착하면서, 또 그것들이 독립적이고 영원하다고 믿을 때, 우리에게 어려움들이 생기게 된다. 모든 만물은 상호 의존관계라는 본질을 받아들이고, 모든 극단을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더 평화롭고, 기쁨이 가득 찬 삶의 길을 걷을 수 있다.





'중도'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무명(無明 : 무지 혹은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충동이 있고, 충동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의식이 있기 때문에 명색(名色 : 정신과 물질)이 있고, 명색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 있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있고, 접촉 있기 때문에 감정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갈망이 있고, 갈망이 있기 때문에 집착이 있고, 집착이 있기 때문에 생성이 있고, 생성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이렇게 일어난다. 그러나 무명이 사라지면 충동이 소멸하고, 충동이 사라지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소멸하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사라지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사라지면 감정이 소멸하고, 감정이 사라지면 갈망이 소멸하고, 갈망이 사라지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사라지면 생성이 소멸하고, 생성이 사라지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결국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사라질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이 이렇게 사라진다. - 잡아함경 301(Samyukta agama 301)

'중도'는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관념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도는 극단적인 견해와 이분법적 사고를 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고, 잘못된 인식은 두려움, 화, 분별심, 절망과 같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 이런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모든 종류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잘못된 인식, 생각, 관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곳이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이다.

'잘못된 견해'라는 말 자체는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다. 잘못된 견해들도 상대적으로 시각을 달리하면, 그것이 옳은 견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심히 더 들여다보면, 모든 견해들은 잘못된 견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어떤 견해도 진리인 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어느 한 측면에서의 견해이다. 그래서 그것을 소위 하나의 '관점'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보게 되고, 그럼 우리가 처음 가진 견해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여러 견해들이 한 무더기로 모여 있는 견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 반대로 붓다는 잘못된 견해들을 하나씩 버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즉 견해가 아니라 실천이다. 질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견해들이 언제든지 향상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궁극적 실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른 견해'란 모든 견해가 부재한 상태, 즉 하나의 견해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갖는 견해들은 우리의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인식을 중국어로는 생각 '想'이라고 하는데, 한자 윗부분의 '相'은 표시, 기호, 또는 모양을 뜻하고, 한자 아랫부분의 '心'은 마음 혹은 정신을 뜻한다. 하나의 인식은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그 상은 마음으로 그려낸 환영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에게 우리가 인지하는 것으로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붓다는 우리의 대부분의 인식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많은 사례를 들어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괴로움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가 명확히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들로 인해 우리가 '바른 견해'를 갖는 데 방해를 받게 된다.

<금강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르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가르침도 버려야 한다." 당신의 관념과 견해들을 버리는 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유는 버리는 것을 실천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집착과 애착과 같은 정신적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아를 고집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

'중도'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이것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이 나타난다." '나타난다'라는 말은 '태어나다'라는 말보다 훨씬 맞는 말이다. 이것이 연기를 잘 표현한 말이고, 초기 경전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 "그것이 발현을 멈추기 때문에 이것이 발현을 멈춘다." "그것이 그렇듯 이것이 이러하다." 즉 이런 말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연기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마치 우리가 미소를 지으면, 거울도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그들도 우리에게 친절할 것이다.

붓다는 "가르침은 강 건너편으로 건너게 해주는 뗏목과 같다"고 말한다. 일단 강을 건너게 되면, 우리는 강가에 뗏목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두고 떠난다. 가르침도 뗏목과 같아 놓아두어야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에 "45년 동안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나는 한 마디도 한 게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많은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그는 제자들이 그의 말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가 무상, 무아, 연기적 존재라는 가르침을 올바른 견해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를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가르침이지, 그것은 이론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상함이라는 관념은 영원함이라는 관념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떠받들어야 할 진리가 아니다. 가르침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래야 그 가르침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습관의 힘은 수천 번씩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다. 습관의 힘은 우리를 쉬지 않고 달리게 하고, 늘 무엇인가를 하게 하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게 하고, 우리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비난하게 한다. 또한 습관의 힘은 지금 이 순간 누려야 할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가로막는다. 마음챙김 수행은 그런 습관의 힘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챙김은 우리 안에 내재된 그런 습관의 힘을 인식할 때마다 그런 습관의 힘을 멈추게 하고, 현재 이 순간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마음챙김의 힘은 우리 안에 내재된 습관의 힘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변화시키도록 돕는 최고의 에너지이다. 마음챙김의 힘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알아차리게 한다. 그리고 이 힘은 호흡하고, 걷고, 마시고, 먹을 때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마음챙기며 호흡하고, 걷고, 마시고, 먹는 실천으로부터 생겨난다. 마음챙김의 힘은 그 자체 안에 필연적으로 집중력이 따른다. 당신이 무언가에 마음을 모은다면, 그것이 꽃이든, 친구든, 한 잔의 차든, 마음챙김의 대상에 집중을 하게 된다.

 

집중력은 마음챙김의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만약 집중을 충분히 하게 된다면, 그 집중의 힘에는 또한 통찰력이 따르게 된다. 마음챙김, 집중력, 통찰력은 붓다가 되는 에너지들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에너지가 습관의 힘을 변화시켜, 치유와 양분을 이끌어 낸다. 며칠간의 마음을 챙기며 하는 호흡과 걷기만으로도 커다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그 수행은 즐거워야 하고,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숨을 들이쉴 때, 들숨에 주의를 돌려보라. "들숨아! 나는 내가 숨을 들이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들숨아!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를 알아차린다면, 숨 쉬는 것은 행복이다.

'바른 견해'와 '연기'에 대한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성공이나 실패를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 우리 자신의 행복과 연관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도 행복하지 않게 된다.

수행의 목적은 현상계라는 들판으로부터 본질의 차원, 즉 진여의 세계로 내면 깊숙이 내려가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관습적인 명칭들 - 부모, 아이, 나, 너, 꽃, 구름, 오다, 가다 - 에 의해 사로잡힌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관습적인 명칭들을 초월하는 중도의 차원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분노와 미움은 관습적인 명칭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그러면서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부모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자신 안에서 우리의 부모를 보게 된다. 우리가 그처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깊은 차원, 진여의 세계에 닿을 수 있으며,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습관의 힘에 계속 갇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마음챙김 호흡은 우리에게 안락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마음챙김은 이런 마음을 계속해서 지속시켜주려는 성향이 있다. "내가 숨을 쉴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또 내가 화가 날 때도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럼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우리의 모든 족쇄들을 깨부수는 데 도움을 주는 통찰력을 갖게 하고, 또 우리를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이끄는 지혜의 가르침, 즉 무분별심의 속으로 깊이 들어간 상태에 머물게 한다. 이는 수행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가장 위대한 열매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에 얽매어 있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중도에 대한 이해로부터 생겨난 통찰력은 습관의 힘을 부수고, 위대한 통찰과 사랑과 연민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런 에너지들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처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통찰력과 사랑을 미래 세대에게도 전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자유로 가는 순간이다. 이렇게 걷는 걸음은 걸음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세대들의 조상들과 수많은 세대들의 후손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우리가 붓다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고苦의 뿌리는 에고(ego:자아)의 생존욕에 있다. 그 생존욕은 '나'와 '나 아닌 것'이라고 갈라지고...., 이를 바탕으로 온갖 이분二分의 분별과 감정이 잇따라 일어나게 된다. 중생의 마음은 그 '이분'의 양쪽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므로 불안정하다. 안정되지 않은 마음 상태가 곧 '고'이다. 따라서 에고의 생존욕이 있는 한 '고'일 수밖에 없다. 결국 중생의 삶이란 에고의 만족을 위한, 에고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한 갈등에 지나지 않고, 에고의 올가미에 걸려든 그 삶은 탐욕과 불안에 휘몰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깨달음)는 에고의 죽음, 즉 '자아라는 생각'과 '자아에 대한 집착'의 소멸이다. - <금강경>, 곽철환, 살림, 2010, 3~4쪽

심층생태론, 인간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본래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얽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생태계의 근본적인 위기의 원인은 이 같은 사실을 무시한 결과이다. 모든 가치를 인간적 측면에서 평가하고,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원이나 물질로 파악하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고 서로 공생할 수 있는 생태적 세계관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분별심'은 타인과 나,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려는 마음이고, 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분별하려는 습관의 힘이 있는 것은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진실하고 깊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별지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긴다.

내가 과거에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 내가 미래에 존재할 것인지 존재하지 않을 것인지. 내가 지금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사람들이 물어보면, 때에 따라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다. .... 과거에는 내 과거의 존재가 현실이었고, 미래와 현재의 존재는 비현실이었다. 미래에는 나의 미래의 존재가 현실이며, 과거와 현재의 존재는 비현실이 될 것이다. 현재에는 나의 현존재가 현실이며, 과거와 미래의 존재는 비현실이다.(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1997, 106쪽'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또 일어날 것이지만 모두 정확하게 각자의 '바로 지금'에서만 일어난다. 보르헤스는 "인간이 쳇바퀴처럼 흘러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 그리고 유일하게 실재하는 시간인 현재를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가. '오늘'은 '오!늘常'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의상대사가 "과거 현재 미래가 찰나 속에 깃든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역시 모든 시간이 현재에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시간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친 사람중의 하나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그의 영혼이 무엇이 시간인지 알고 싶어 불타오른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날은 나날이 아니라 '오늘' 뿐이라고 하면서 영원으로 통하는 시간인 현재를 강조했다(보르헤스 외,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 김홍근 편역, 여시아문, 1998, 36쪽, 38쪽 참고)

원래 붓다가 가르치려는 길은 형이상학적의 길이 아니다. 해탈의 길이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는 철학과 신학, 자유와 이성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그리고 종교적인 권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훗날 붓다의 가르침은 점차 종교적 색채를 띠지만,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그 동안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참사와 끔찍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불교는 이교도 탄압, 종교 재판, 마녀 재판, 종교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이다(카를 야스퍼스, <위대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80~95쪽 참고)

구원으로 가는 결정적인 것은 믿음이나 희망이 아니라 오로지 올바른 방법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을 믿지만 잘못된 실천 방법을 취하는 사람은 "우유를 좋아하면서 쇠뿔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과 같다." "신념을 갖고 그렇게 하든 신념 없이 그렇게 하든, 그는 우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유를 얻는 올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젖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어도 우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방법이 구원으로 이끌어주며, 이때 믿음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1997,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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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란 무엇인가?

 

 

좋고 나쁨은 그대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난다. 중도는 그대의 마음에 들어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는 더 많은 분별심과 망상들을 짓게 된다.

 

나를 버리면 참된 나를 만나게 된다.(모양이 있는 나가 아닌 무아의 나)

 

자기 생각을 내려놓은 고요한 사람은 집착을 내려놓고, 평온과 순수한 앎의 길로 나아간다.

이 길이 수행자가 가야하는 올바른 길이다. 그 길이 중도다.

 

붓다의 중도(中道)는 강기슭의 두 물줄기로써, 두 물줄기 사이의 중간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최초의 선언인 새로운 길(New way), 참된 길, 바른 길의 천명이다.

 

새로운 길을 보여준 중도는 불교만의 독창적 사상철학이다.

 

유심(唯心)론과 유물(唯物)론의 양변에 떨어진 인도사상을 붓다는 유심과 유물의 어느 한쪽의 견해에 치우치지 않는 양변을 포괄한 중도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재조명했다.

 

고따마 싣다르타는 쾌락과 고행주의의 어느 한쪽의 양 극단을 취하거나 굴복 당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욕망에 사로잡혀 안일하거나 고행이 아닌 합당한 정진으로 나아가는 중도를 취하였기에 견성오도 하였다.

 

욕망과 탐닉, 들뜸과 괴로움, 화와 두려움, 불만족과 혐오라는 것은 수행자가 가는 중도의 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길이다 .

 

집착과 애착이 있는 곳은 양 극단이기 때문에 수행자가 가는 중도의 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길이다 .

 

중도는 강기슭의 양 물줄기를 말하는 것으로 선과 악이 통하는 것, ()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어중간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은 적중의 중으로 중간이나 편견, 변견이 아니다.

시비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가 있으면 비()가 있게 되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기 때문이다. 시비가 융합하면 시가 비가 되고 비가 시가 된다. 시비가 없기 때문에 모순 대립 투쟁이 벗어난다. 이것이 중도다.

 

중용(中庸)과 중도는 다르다.

 

중용이란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는 과유불급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지만 중도는 양변을 포섭한다.

 

가령, 유교의 중용철학은 오욕칠정을 겸양의 미덕으로 자제하거나 선비로서 과하지 않게 억제해야 하는 중간 도리를 취하게 하지만 중도는 그렇지 않다.

 

오욕칠정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에 즐기되 욕망을 추구하거나 탐착하지 마라.

 

 

*오욕칠정(五慾七情)

색욕(애욕),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과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노애락, 사랑·미움·욕심을 말한다.

 

 

불교적으로는 희노애락·우비고뇌(憂悲苦惱)을 유교사상과는 다르게 초연성을 갖는다.

 

즉 슬프면 슬퍼하라. 슬픔을 억누르지 않는다.

 

무엇이든 억지로 통제하면 병이 된다. 목석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하되 비탄에만 빠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중도는 중용과는 달리 양변에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달라진다.

 

 

사랑하되 애착하지 말라.

애착은 고통이다.

 

애착하지 않고 승화된 영혼의 사랑은 자유가 있는 참사랑이다.

재물을 가지되 소유하지 말라.

 

재물은 역사상 그 누구도 줄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무소유의 마음으로 나누고 보시하면 도리어 재물은 더 늘어나고 번창한다.

 

권력을 가지되 남용하지 말라.

군림하지 않고 공평무사하면 만인에게 칭송 받고 명예가 높아진다.

 

 

즐기되 탐착하지 말라.

탐착은 멈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탐착하지 않는 문화적 심취는 예술과 낭만의 삶으로 이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는 중도를 정의한다.

 

쌍차쌍조는 <영락본업경>에 나오는 용어로서 천태지의(智顗, 538~597)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 진보와 보수, 옳고 그름, 시비분별과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양변(兩邊)을 말한다. ()은 악의 상대적 관념에서 나온다.

 

 

쌍차는 각각 한 쪽으로 치우친 변견적 양변의 사고를 차단하는 의미이고, 쌍조는 양변을 비춘다는 것으로서 태양이 만물 전체를 공평하게 비추듯이 양변의 서로가 햇빛의 자양분을 골고루 받으면서 회통 융합되는 것을 말한다.

 

 

 

천태의 공··중 삼관(空假中三觀)에 대하여

 

()이라함은 형성된 물질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재는 하나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색즉시공이다.(형성된 물질은 곧 텅 비어있다)

 

()라고 함은 형성된 물질은 조건에 화합하여 잠시 드러나 있는 거짓의 모습으로 관찰하는 것을 가관(假觀)이라고 한다. 공즉시색이다. (텅 빔은 곧 물질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질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의미는 텅 비어 있는 듯 하지만 조건을 맞으면 언제나 물질로 드러난다.)

 

()이라고 함은 ·를 별개로 구분하여 양변을 치우쳐 보지 않고 하나의 동시적 현상으로서 관찰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한다. 이를 천태학에서는 중도실상이라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중도는 팔풍(八風)에 대한 초연함이다.

팔풍은 이((), ((), ()(), (()의 여덟 가지에 초연하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듯이 영향을 받는 심리적 현상 작동을 말하는데,

 

이익은 좋아하되 손해는 싫어하며(·),

 

명예는 좋아하되 치욕은 싫어하며(·),

 

칭찬은 받는 것은 좋고 비난받는 것 싫어하며(·),

 

인내심이 약하고 이기적이어서 힘든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좋은 것만 하려고(·)을 말한다.

 

 

<무쟁의 분석 경(M.139)>에 부처님의 중도에 대한 말씀이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 수행자는 그 어느 한쪽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 .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

쾌락의 탐착은 천박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

자신의 학대는 피로와 고통만 남길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난 것이 중도이다. 그것은 안목을 밝히고 지혜를 증진시키며 번뇌를 쉬고 고요하게 한다 ."

 

 

중도를 완성하는 길이 팔정도의 길이다. (중도 = 팔정도)

중도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하되 머물지 않는 마음)의 무심이다.(중도 = 무심)

 

 

만물은 상호연기적 관계로 존재하나 실체는 없다.

그래서 중도는 연기, 연기는 곧 공이다(중도=연기=)

 

무심은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함이 없고 의도가 없는 마음을 말한다. 이를 용심(用心, 화엄경의 善用其心)이라고 한다.

 

마음이 무심하면 감정이 없고 자비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 기쁨, 사랑, 분노, 신경질 등의 감정들은 느낌과 감흥이기 때문에 나와는 관계없이 상황에 따라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들에 물듦고 애닮음이 없다. , 상황에 반응하되, 그 마음은 작동(동요)하지 않는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사랑은 있되 애착·집착·소유욕이 없고, 사별과 실연 속에서 통곡과 애절함, 쓸쓸함은 있을지라도 비탄에 빠지는 일는 없다.

 

응무소주는 (사마타, )이며 진공(眞空)이요, 이생기심은 (위빠사나, )이자 묘유(妙有)이다.

 

정통 출가자는 아니지만,

대승불교의 거목인 용수 <중론(中論)>의 팔불(八不)에서도 중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고, 불멸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대상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오고 감이 없다)

 

 

중론의 팔불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중도의 표명이다.

 

()은 일체를 부정하고 염세적인 허무주의가 아니고, 없는 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을 초월한 유무가 서로 상생화합하는 원융무애의 공이다.

 

 

<화엄경>의 법성게는 중도의 압권이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아니다.

 

 

*()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듯이 마음의 본질은 원래가 원융무애한데, 스스로가 죄와 벌을 주고 중생이다 부처다 분별한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에 일체가 있고 모든 것이 하나로써,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와 일체라는 것은 양 변으로써, 하나와 일체에 국집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중도이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과 사와 열반 또한 그 자체가 함께하는 조화로운 하나이네.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이다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본래부터 부동이라 이름 하여 부처라 하네.

 

*중생심만 내려놓으면 본래가 부처로세*

중생심이란 분별심이다,분별심은 양변에 치우치는 것이니 중도 연기인줄 알면 실체가 없는 무아이므로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적으로 중도를 잘 드러낸 양나라 황제 무제와 달마의 문답이다.

 

 

양무제 : 무엇이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 마 :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여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소.(확연무성 廓然無聖)

 

양무제 : ?????!!!!!

 

 

성철스님의 중도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서구 세계에서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이 일찌기 중용사상을 펼쳤는데, 그들도 중간 사상을 가지고 중용사상이라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들의 이른바 중용사상은 양변을 완전히 버리고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사상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융합한다는 것은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도사상과 중용은 결코 혼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계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언뜻 보기에 불교의 중도사상과 비슷해보이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헤겔의 변증법(辯證法) 사상입니다. (), (), (),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정에서 반이 나오면 그것을 융합시켜서 합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논리는 중도와 비슷한 듯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는 헤겔의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변증법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괴테와 헤겔이 만났는데, 괴테가 헤겔에게 그 변증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헤겔은 그것은 모순의 논리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곧 정과반의 모순, 시와 비의 모순, 선과 악의 모순을 말하니, 이것은 양 변이 서로 모순이므로 서로 통할 수가 없으니 이 이론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사상이니, 팔만대장경 전체가 여기에 입각해 있으며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중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 불교를 설명한 많은 것들의 그 진위를 가리려면 중도논리에 위배되는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에 위배되는 사상은 결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각산스님의 말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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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산의 모습

갈촌 마을 입구 소나무

할아버지 할머니산소

갈촌 할아버지 할머니산소

가평리 가평저수지위 부모님 산소
영암 시종 신학리 처가집 산소 
목포 해상 케이블카
유달산을 오르고 있음
목포시가지
목포항 상공
점심 낙지 탕탕으로하고 1004대교로 간다.
영광군과 지도해지면 연육교
저녁은 고창의명품 장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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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상대의 고통을 보고 내가 위안을 받을 때가 있는데, 괜찮나요?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정토회의 나누기와 비슷한 형식이었는데, 제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누구누구 씨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저의 고민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던 교수님이 ‘그런 발언은 집단의 심리적인 안정성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삼는 것은 상대와 본인 모두에게 위험한 방법입니다’라고 하시면서 제게 실망하시는 듯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상대적으로 다행이다’라고 위안을 삼는 것이 수행자로서 위험한 일인지 궁금합니다.”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돼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이고, 오늘도 살았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라고 제가 그동안 법문을 많이 했잖아요. 이것은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절대적인 비교입니다. 즉 생존에 대한 자각이지 남보다 못하거나 낫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나는 만족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고민할 게 하나도 없어져요. 욕을 얻어먹어도 살아 있으니까 얻어먹는 것이고, 한 대 맞아도 살아 있으니까 맞는 것이고, 병에 걸려도 살아 있으니까 병에 걸리는 것이잖아요. 죽었다면 병들 일도 없고, 욕 얻어먹을 일도 없고, 굶을 일도 없어요. 이렇게 딱 관점을 바로 잡아버리면 모든 고뇌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법문을 할 때도 있잖아요.
‘즐겁고 괴로운 것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복 사고가 났다고 합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팔이 부러졌어요. 그런데 부러진 팔을 쥐고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사람은 다 죽고 나만 살았어요. 그러면 우리는 ‘아이고, 부처님의 가피구나.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나고 팔이 부러졌어도,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안 다치고 내 팔만 부러졌다면 어떨까요? ‘재수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재수 좋다, 재수 없다, 사실은 어떨까요?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재수 좋음과 재수 없음은 객관적인 게 아니에요. 늘 주변과 비교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재수 좋고 재수 없는 것은 믿을만한 게 못 됩니다.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팔이 부러진 상황은 똑같은데 어떤 경우에는 ‘다행이다. 부처님의 가피다’라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재수 없다. 나만 벌 받았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양쪽 모두 팔 하나가 부러진 것뿐인데요. 이게 중생의 복과 재앙입니다.
아마 그 교수님은 이런 식으로 위안을 받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는 뜻에서 문제 제기를 하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에게 달리 특별한 기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이치에 따라서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으면 그냥 상황이 벌어진 것일 뿐 그걸 갖고 재수 좋으니 재수 없느니, 좋으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마라’
팔이 부러졌으면 부처님의 가피라고도 하지 말고, 부처님을 안 믿어서 벌 받았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건 상대적으로 일어난 생각일 뿐이니까요.
팔이 부러졌으면 그냥 부러진 것이니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됩니다. 이걸 두고 재수가 좋으니 재수가 나쁘니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마음이 널뛰기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한 생각 일으켰다면
그런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할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선책도 있습니다. 어차피 마음을 일으킬 바에는 ‘재수 없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재수 있다’라고 일으키는 게 낫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지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이왕이면 ‘재수가 좋다’, ‘가피를 입었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낫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다고 합시다. 그럴 때 다친 다리를 부여잡고 ‘아이고, 부처님께 기도해도 소용이 없네!’ 이러면 자기에게 재앙이 생긴 것이 되고, 부처님도 원망하게 되잖아요. 그럴 때 이왕이면 마음을 다르게 가져보라는 거예요. 사실 부처님께 절하는 것과 계단에서 넘어진 것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다쳤으면 그냥 치료를 하면 돼요. 그러나 이왕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면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게 낫습니다.
‘아이고, 기도라도 했더니 그래도 한 다리만 부러지고 다른 다리는 안 부러졌네. 다행이다.’
마음을 이렇게 일으키는 것을 ‘긍정적’이라고 해요. ‘재수 없다!’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부정적’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일으키는 것은 나쁜 게 아니에요. 진리의 길은 애초에 이것을 좋고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한 생각을 일으켰으면 긍정적으로 일으키라는 거예요. 이왕에 마음을 일으킨다면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편이 본인에게도 좋다는 거죠.
수행의 목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되 평정심을 잃었다면 재빨리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리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으키는 마음의 90퍼센트는 부정적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우리의 까르마(습관)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문화적인 환경도 부정적인 심리가 작동되기가 쉽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 세대나 사회 전체가 어떤 일이 생기면 늘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도 어릴 때부터 보고 들으면서 그런 습관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긍정적으로 돌리려면 의식적으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천당과 지옥을 벗어난 해탈의 길
꿈으로 비유해 볼게요. 꿈은 안 꾸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런데 꿈을 꾸는 상황이라면 이왕 꿀 바에야 악몽을 꾸는 것보다는 좋은 꿈을 꾸는 게 낫겠죠. 그러나 수행적 관점은 ‘그것이 설령 좋은 꿈이라 하더라도 안 꾸는 것보다는 못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설령 그게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마음을 애초에 안 내는 것보다는 못한 거죠.
세상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만을 말하지만, 부처님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당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는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갔다고 좋아할 게 아닙니다. 천당 역시 불안정한 세계로 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해가 됐어요?”
(후기)
우리는 늘 분별심으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 있다 없다> 양변으로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번뇌 망상이라는 것이다, 양변과 변견을 떠나 중도로서 보는 지혜를 터득해야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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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연기

중도란 양변에 치우치지안고 중간에도 머무르지안고 전체를 하나로 화합하는 것이다.

중도는 곧 연기이며 진여라고한다, 사성제 팔정도도 중도를 설명한 것이다,

12연기도 중도를 설명한 것이다, 상의성 서로 의지해있는 성품이다,

연기를 알면 정견을 갖추었다고 볼수 있다,

 

생멸연기 태어나면 반듯이 생노병사의 법칙에 따라 죽는 것이다.

생도 연기요 사도 연기이므로 생과 사는 다르지안다,하나다

생이 있으려면 암수가 인연이 되어 정자와 난자가 합쳐저서 하나의 생명이

만들어져서 태어나듯이 연기적 인연으로 작용이 되는 것이다,

 

 

진여연기를 이해하면 연기중도를 이해하게 된다,

연기란 인연으로 인하여 결과가 있다.

연기란 서로 상의 관계를 말한다.

연기는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면 바로 부처의 참모습을 본다.

있다는 것도 연기요 없다는 것도 연기이므로 연기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부처를 본다.

부처란 모양도 소리도 없는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인연법 또는 인과법이라고도 한다.

중생도 연기 불성도 연기이므로 차별이 있을수 없으므로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로 진여 불성을 지닌 부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런 연기의 법칙,

즉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서로 의존하며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홀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섶에 붙은 불 때문이며 불은 타는 물질과 공기와 산소가 있으므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생겨나고

원인과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아래의 시로 간명히 표현하신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잡아함경30335제일의공경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진리이다.

존재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이것과 저 것의 의존관계와 상관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이것이 사라 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관계성(關係性)’을 뜻한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항상 서로 의지하여 관계를 맺고 있다 하여

연기법을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라 말하기도 한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12연기설(十二緣起說)

무명 · · · 명색 · 6· · · · · · · 노사 (12)

12요소로 된 연기설(緣起說)이다.

 

쌍차 즉 양변을 막는 것은 양변을 떠난는 것이요 쌍조는 양변을 비추며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양변이란 변견인데 변견을 버리는 것을 중도라한다,

비유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걷이면 해가 그대로 들어나고 해가 완전히 들어나 있으면

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이다,

쌍차란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이니 구름이 걷혔다는 것이고

쌍조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것이니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것이다,

구름이(번뇌) 사라졌다는 것은 해(지혜)가 비친다는 것이며

해가 비친다는 것은 구름이 사라졌다는 것이므로 쌍차 쌍조는 둘이 아니다

번뇌와 지혜도 둘이 아니다, 쌍차하면 쌍조의 뜻이 내포되여 있고 쌍조하면 쌍차가

내포되여 있듯리 번뇌라하면 지혜가 지혜하면 번뇌가 내포되여 있다.

색하면 공이있고 공하면 색이 있듯이 일체의 모든 것은 양극()이면서 하나다 라는 뜻이

내포되여 있는 것이다, 왜 연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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