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莊嚴淨土分 (장엄정토분)
佛告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昔在然燈佛所 於法有所 得不不也 世尊
불고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 득부불야 세존
如來 在然燈佛所 於法實無所得 須菩堤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여래 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須菩堤 諸菩
불야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시고수보리 제보
薩 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살 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 而生 其心 須菩堤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
응무소주 이생 기심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
身爲大不 須菩堤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신위대부 수보리언 심대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부처님 세계를 꾸밀 수 있느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시기를,
"여래께서 옛날에 연등불을 모시고 계셨을 때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연등불로부터 진실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부처님세계를 장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부처님세계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제 마음에 분별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분별이 없으면 부처님 세계를 장엄한 것입니다. 장엄한다는 분별이 없으므로 장엄이 아니며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라.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소리에 집착하지 않고 냄새에 집착하지 않고 맛, 촉감, 법, 어디에서나 집착하지 않고 그 마음을 낼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데 어떤 사람의 육체가 마치 수미산과 같다면 이 몸이 크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 대답하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육체는 이름이 육체지 실제로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닙니다. "
10.장엄정토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께 법을 얻은 것이 있느냐?”
과거 연등불 시대는 오랜 옛날을 말하는데 부처님께서 과거 3아승지겁을 수행하셨는데
그 중에 2아승지겁이 지나서 수행할 때를 말합니다.
아승지겁이라는 말 하시지요?
지구가 한번 무너져 가루가 되면 1 아승지겁이라고 합니다.
줄여서 1겁이라해요.
그러니까 높이 세워진 것들....산이나 바위나, 나무들이 다 가루가 되는 시기입니다.
언젠가는 진화가 후퇴해서 다 가루가 될 때가 있겠지요.
부처님께서는 지구가 3번 닳도록 윤회하면서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 2번째 지구 위에 초목들이 다시 세워졌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원래 아승지겁은 지구가 가루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해석하기를 그렇게 했는데.
원래는 사방 4십리, 높이 10리가 되는 바위가 다 닳으면 1겁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10리면 높이가 4km라는 말입니다.
해발 4천m인데.에베레스트산이 8,000m정도 된다고 하니까 그 절반 정도 되는 바위가 다 닳으면 1겁.
그래서 제가 해석하기를 그것은 지구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야 가능한 세월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여튼 오랜 옛날에 부처님께서는 선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수행자였습니다.
그때 세상은 연등불이 계실 때였습니다.
하루는 선혜 행자가 연등불이 그 지역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꽃을 공양하려고 꽃 파는 곳에 갔어요.
마침 '구리'라는 처녀가 꽃을 팔고 있었는데 꽃을 다 팔고 7송이를 자기가 연등불에게 시주하려고
남겨두었어요. 그런데 꽃을 팔라고 온 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꽃을 팔수 없다고 하였는데도 부득불 팔라고 간청을 해요.
그래서 나중에는 할수 없이 조건에 승락하면 판다고 하였습니다.
그 조건은 자기와 결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여인....이죠? 그 옛날에....첫눈에 반했으니....
아마도 선혜가 잘 생겼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된다 하였어요. 왜냐면 자기는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이기 땜에
결혼하면 가족을 책임져야 하므로 수행할 수없으니 그것만은 안된다 하였어요.
그러나 그럼 다음 생에는 혼인해 줄 수 있다고 하였고,
거기에 구리선녀가 응락하여 꽃을 5송이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때.선혜선인도 다음생에 결혼을 하겠으나
만약 제가 출가의 길을 간다면 막지 말아달라고 하였고 ......
구리선녀도 그러마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약속하면 지켜집니다.
그러니까 다음생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약속하지 마세요.
구리선녀는 자기 몫으로 2개를 더 주면서 자기 것까지 올려달라고 했어요
드디어 선혜선인이 꽃을 들고 부처님 오시는 거리에서 기다렸습니다.
부처님은 다가오고.....사람들은 꽃과 공양을 올려요......
그런데 당시에 선혜선인은 머리를 기를 때였습니다.
오래전이라 당시 수행자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선혜선인이 꽃을 바치고 엎드려서 절을 하려는데
마침 부처님 앞에 조그마한 진흙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전혀 돌아서 가거나 뛰어 넘으려는 기색이 없이
발을 들어 그 진흙 웅덩이 한 가운데을 밟으려고 하였어요.
그러자 얼른 선혜님이 머리를 풀어 헤쳐서 그 진흙구덩이를 덮어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발에 진흙이 뭍지 아니하시고 사쁜이 즈려밟고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선혜가 머리를 매만지면서 묶는 것을 지켜보시고는
선혜동자의 이마를 만지시면서 "너는 참 장한 신심을 가졌구나.
이러한 정신이라면 너는 장차 1아승지겁후에 틀림없이 부처가 될 것이다."
"그때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 하고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수기라고 합니다. 수기란 장차 일어날 일을 말해주면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고 옛부터 선사들은 부처님께서 법을 얻었을 때라고 합니다.
바로 이때에 석가모니불은 연등불로부터 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장차 부처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리라 라고 인정하심이 바로 법을 얻은 것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꽃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뒤에 다시 1아승지겁이 지나서
인도 카빌라 왕국에 한 왕자로 태어났는데 이름이 고오타마 싯다르타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17세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태자비 이름이 '야쇼다라'입니다.
예쁜 이름이죠? 야쇼다라.....
그리고 29세에 라훌라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이 때에 출가를 결심하고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분이 바로 석가모니불입니다.
석가는 성씨이고 모니는 성장했을 때 이름입니다.
원어로는 '샤카모니' 라고도 발음합니다.
그런데 당시 야쇼다라는 과거의 구리선녀였고.... 꽃을 팔던......
결혼하여서도 전생의 약속대로 출가를 막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함부러 약속하지 마세요. 나중에 그대로 됩니다.
이 인연으로 절에서 누가 결혼할 때는 반드시 꽃을 7송이 준비해서 식장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풍속이 생겼습니다 .
이것을 꽃으로 맺어졌다 하여 화혼식(華婚式)이라고 해요.
화(華)자도 꽃화자입니다. 花는 꽃이 하나가 있을 때 이 자를 쓰고요.
꽃이 여러 개일 때는 華자를 씁니다. 화려할 화.......
남자는 5송이, 여자는 2송이를 준비하였다가 주례스님에게 드리면 주례는 부처님께 올립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시작합니다. 절에서.혹은 불자가 결혼하는 풍속입니다.
수보리야, 바로 이 연등불 때에 내가 연등불부처님께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수기를 얻은 것이 있느냐 라는 질문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여야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이겠어요?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 회상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
네, 수보리는 제대로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골수사상입니다.
분명히 연등불에게 법을 얻은 바가 있건만 부처님이나 제자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허망한 몸뚱이가 꿈을 꾸는 것과 같고 꿈 속의 일이 사실일 수가 없으므로.
또 불자라면 무엇을 얻어도 절대 얻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므로.
깨달아도 깨달은 것이 없고. 알아도 안 것이 없으므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게 나쁜 소리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누가 욕을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잡아먹으려는 듯이 길길이 날 뛰지만,
내가 없는데 도대체 누가 속상하고 기분이 나쁘겠어요?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무심해야 하고, 전혀 반응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욕을 들어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라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괴로워집니다.
깨달음도 그래요. 깨달았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깨달은 것이 아니지만,
혹 누가 깨닫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쬐끔이라도 일어나면 그때부터 불행 시작이라고 알면 되요.
깨달아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누가 먹으라고 쌀 한 되박 가져다 주는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 뭘 말 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여 한심하고, 답답하고, 게다가 년륜도 있고 좀 아는 자라면
오히려 무시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므로 내가 깨달았노라 했다가는 본전도 못찾아요.
그러니까 평상시와 똑같이 일하고 돈 벌다가 때가 되면 누구에겐가 가리켜주고,,,,,
가리켜 줄 사람이 없으면 평생 고요하게 행복하게 살다가 가면 되지....
스님들 처럼 꼭 크게 되어서 사방에 이름이 나야 제대로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뭘 알아도 절대 안다고 말하지 말아요.
부처님의 사상에 위배됩니다.
항상 조심스럽게 하고. 겸손하게 말해야 합니다.
아는 것을 자랑 할 것도 없고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수보리는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그때에 전혀 "무엇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조 법연스님이 산에서 수행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수행했는지
날아다니는 새가 먹을 것을 가져오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공양을 바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어떤 스님이 지나면서 가만히 보니까 열심히 닦기는 닦는데
도를 알지는 못하고 있으므로 안타까워서 가서 알려주었습니다.
말 몇마디를 듣고 크게 깨달았는데, 그 후로는 이상하게 아무도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아요.
이것 유명한 화두입니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 때는 먹을 것이 풍부했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수행했는데.
도를 깨닫고는 궁핍해졌을까요? 화두니까 풀어봐요.
그 뒤로 산을 내려와서 어느 절에서 있는데 원오스님을 만나 그 그릇이 좋음을 간파했어요.
원오스님이 찾아가서 그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공부한 것을 내놓아 보거라 하였어요.
다 마땅치 않았는데 원오스님은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말했어요.
'발밑을 보십시오' 라는 말인데 발밑은 어디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러자 법연스님이 내 법이 네게서 멸망하겠구나. 하고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내 법이 네게서 멸망하겠구나' 하는 내용이 바로 이 금강경과 통하는 내용입니다.
선사들은 인정을 이렇게 합니다. 내법이 네게서 흥하겠구나 하면.
그것은 선사도 아니고 남에게 욕만 먹는 돌팔이 입니다.
그 뒤로 원오스님은 법연스님 뒤를 이었습니다.
스승의 말도 깨우치기 위하여 부득이 있는 것이지 거기에 진짜 무슨 도리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러니까 스승의 말을 자꾸 들먹거리고 하는 사람은 스승의 뜻에 안맞아요.
스승의 말도 없에고 불교를 전혀 세우지 않아야 제대로 스승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내 법을 망하게 하겠구나' 라고 말한 것은 '네가 내 법을 제대로 펴겠구나' 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한 것인데, 이 말뜻을 아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선공부를 안하면 몰라요.
지금 수보리도 부처님의 얻은 바 법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속으로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음~ 수보리 정도는 되어야 해'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더이상 이의를 달지 않고 아무 말도 안하셨어요.
묵언은 긍정이죠. 그래서 다음 말로 넘어갑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장엄은 아름답게 가꾼다는 뜻입니다.
국토에 꽃을 심고 길을 내고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를 들려주고
길을 묻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해주고 등등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살은 실제로 봉사하면서 수행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국토의 이름다움을 갈망해요. 그래서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금 보살이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데.......
저 사람이 정말로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네, 과연 수보리죠? 스승의 뜻을 이렇게 잘 아는 제자가 있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입니다.
이 법도 장인과 같아요. 알죠? 장인.....도자기 장인, 칠보장장인,,,,,
마음을 다스리는데 제일인 장인라는 말이어요.
이것을 부처님은 조어장부라고 했어요.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마음을 잘 다스리려면 이러 이러한 방법이 있는데 이 길로 가면 틀림없이 인생이 행복해지고
좋아진다고 가르쳐주는 장인이죠. 선사는......
그런데 선사가 나중에 제자가 없으면 참 외로워집니다.
이 문중에서는 그래도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자가 제자여요.
눈만 끔쩍여도 알아채고,,,,,팔다리를 움직이면 벌써 어디로 가는지 아는 제자가 있다면 평생 제자이면서 의지처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똑똑한 제자를 갖기 원합니다.
세속에서는 부인이 있고 자식이 있으나 이 문 중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가 참 진하죠.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부처님의 속을 아는 제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10명의 걸출한 제자가 있었고, 1,200 여명이나 되는 아라한들이 있었으니
감히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다복한 분입니다.
선사 열전을 보면 단 한 명의 제자도 만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많은데 말입니다.
수보리는 보살이 버젖이 지금 국토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데도
한사코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 다만 '장엄' 이라는 이름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수보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보살이 장엄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항상 말했죠? 불자들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이런 차원으로이해 해야 해요.
지금 세상은 돌아가고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바쁘게 일하거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곳이 있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시각으로는 세상은 너무 고요하고 평온하다고 말해요.
왜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바삐 움직이는 것을 바쁘다고 표현하는 것은 허망한 개념이어요.
왜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합니까? 조용하다고 표현하면 안될까요?
부처님은 시끄럽고 바쁜 것을 보고도 조용하고 한가하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특징이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한바탕 꿈인데 무엇이 바쁘겠어요?
이렇게 보기 때문에 시끄러운 속에서도 마음이 항상 고요하십니다.
그러나 말도 안하면 안되니까, 말은 통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람이 갖다 붙힌 이름일 뿐이라고 봅니다.
장엄, 아름다움, 얻음, 행복, 볼행, 더러움, 깨끗함, 부자, 가난....등등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다만 명칭일뿐, 하나도 진실은 없는 것으로 생각입니다.
남자들은 아마 꿈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 것입니다.
나이 40세 전에는 가끔 몽정을 해요.
여러 이유로 하겠으나 어떤 때는 정말 여인과 성적인 접촉을 하고 있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 꿈이 너무 생시와 같아요.
어떤 때는 느낌까지 생시와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막 클라이막스에 오르려는 그 순간. 그때는 꿈을 깹니다.
그러니까 막상 중요한 순간은 꿈이 아님을 알면서 깨면서 몽정을 합니다.
참 허망해요. 사실도 아닌데 꿈이 사실처럼 느껴지다니. 인생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중에는 제가 아무리 인생은 꿈이야.....해도 잘 믿겨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꾸 부처님 공부하고 진실을 알아가면서 인생은 하나의 '언어의 뜻' 이라는
허망한 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될 것입니다.
원래 더러움은 없는 것인데 더러움을 세우고 그것에 위배되면 칼을 들고 설쳐대잖아요.
명예도 본래 없는 것인데 허망하게 세우고
그 명예를 쫓기 위하여 괴로워하고 원수 맺고...
무엇인가 성취되면 스스로 높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고요한 중에 문득 한 생각 일어나 이렇게 허망한 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인생이 꿈이 아니겠습니까?
이 공부 오래하면 어느날 저절로 세상이 정말 꿈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진즉에 깨달은 부처님의 눈에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세상은 하나의 명자(명칭)만 있을 뿐,,,,,,,,,,!!
실제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수보리가 이렇게 잘 대답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흡족해하시면서 다음말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네, 부처님은 수보리가 알고 있는 것에는 긍정하므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렇다, 수보리야, 그러니까 모든 보살마하살도 마땅히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내어라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정한 마음'이 중요한 말입니다.
무엇이 청정한가? 설사 국토를 아름답게 꾸미는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하고 있다라든지, 했다라는 생각이 없는 마음이 바로 청정함이라는 것입니다.
청청함은 깨끗함이어요. 흔히 보면,저 낙도나 깊은 산속 같은 데에 살면서
세상 일을 모르고 사는 사람을 깨끗하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틀린 표현입니다.
그것은 모르는 것이지 청정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하고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다른 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부터 700년전에 벌써 독신으로 산다고 깨끗하고,
결혼하고 세속에 사는 사람은 더럽다 라는 생각이 얼마나 유치하고 낮은 생각인가
하는 것을 부처님 말씀을 통하여 알았어요.
누가 어떻게 살든,결혼하여 살든,똥지게를 지는 직업을 가졌다 하여도
그 마음이 분별이 없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깨끗함이지만
신선처럼 사람을 피하여 산 속에 살고 독신으로 산다고 절대 청정한 것이 아님을 알았어요.
그렇게 살아도 마음이 망상이 많고, 번뇌가 많고 욕심이 많으면.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분노라도 일어나면 그것이 더러움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청정에 대한 개념 정의는 대품반야경에서도 잘 나와있어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고 생각해야 그것이 바로 청정이다' 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700년 전에 스님도 결혼하는 법을 만들어 지금 일본 불교의 80%는 스님도 장가를 갑니다.
그 법이 일제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도 장가가는 스님들이 있는데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직도 일반 사람들이나 스님들이나 불자들이나
스님이 장가가면 갑자기 콱 더러워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아는 것이 마치 불교인양 하고,자기가 아는 것이 바른 것이라 생각해요.
스스로 한 생각 세워서 똥을 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누가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독신으로 살든, 장가를 가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한 생각도 안 일어나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 청정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 껍데기로 사람을 농락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하셨어요. 그런 보살과 같은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라 라고,,
그런 보살이란 보통 사람이어요. 보살은 스님이 아닙니다. 결혼한 속인이어요.
그래도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 다음 가는 보살이 되었고....
이들이 오늘날 불자들이 대부분 의지하는 보살입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같은 분들이지요.
모두 머리를 길렀어요. 속인이기 땜에....그래서 관(모자)을 섰고.....
당당히 부처님 옆 자리에 앉아 일반 불자들에게 귀의예배를 받는 성인으로 대접받습니다.
이런 보살들처럼 외형이 아닌 내부가 청정해야 참 불자이고 참 사람입니다.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히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이 마음을 써야 할 바를 계속 설하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에 보살은 이 국토를 장엄한다 하여도
장엄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하였고
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청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좋은 일을 하고도 했다는 생각이 없는 마음 현재 하고 있어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는 마음
이것이 청정이라고 했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나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더러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해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것이 원래 깨끗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나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일어난 그것이 바로 더러움인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지요.
그런데 평상시 말은 다 무심에서 나온 말이라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간다, 온다, 밥 먹어라, 학교에 가라, 잘 다녀오세요,,,,,등등
일상사 필요한 말은 그 자체가 무심입니다.
그러나 높다, 낮다, 옳다, 그르다, 더럽다 깨끗하다, 부자다, 가난하다 등등
은 다 더러운 말입니다. 고요한 마음에서 파문을 일으킨 말입니다.
저기 높은 사람이 오고 있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야! 저기 깨끗한 도인이 지나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여도 그 사람 역시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야! 이 더러운 놈아.하고 소리를 친다고 하여도 역시 말하는 자 역시 더러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더럽고 깨끗함은 없는데.스스로 한생각 더럽다는 생각을 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낸 사람이 오히려 청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물질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면 안됩니다.
좋은 집에 살고 있다, 좋은 차를 끌고 다닌다, 좋은 옷을 입었다.
이렇게 물질에 집착하면 아직 존재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허망한 것입니다. 아침 이슬과 같아요.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언젠가 허망한 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색은 곧 공이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시간이 지나서 공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현재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곧 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중에 '관법'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관(觀)이란 마음으로 본다는 말인데
어떤 것을 외적인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내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보되 대부분 사람들은 그 외적인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아, 참 이쁘다! 하고 스스로 냄새를 풍깁니다.
그러나 진실은 정말 이쁠까요?
수행자는 그 사람 속을 들여다 봅니다.
우선은 피부 속을 봐요. 마음으로 봅니다.
그러면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는 살덩이만 보일 것입니다.
그 살을 뚫고 들여다 보면 창자 속이 나오는데 음식물이 쉬어서 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음식물은 녹아서 마치 오물통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더럽고 축축한 것으로 꽉 차 있어요.
뿐만 아니라, 비장(취장)을 들여다 보면 독한 액체가 흐르고 있고.....
대장을 들여다 보면 찌꺼기 들이 미쳐 나가지 못하여 냄새나는 오물이 되어 막혀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머리속이나 발, 손 들을 들여다 보고.....
나중에는 그 뼈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이 없어지고 뼈만 남아서 앙상한 것이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법이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내부를 보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자꾸 보다보면 나중에 사람을 보아도 외부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보게 되어요.
그러니 허망한 것이 인간이고 더러운 오물로 꽉 차있는 인간이요,
뼈만 앙상한 인간으로 보이게 되요.
이렇게 보이면 다음으로 뼈속을 들여다 봅니다.
뼈조차도 부서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공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다가 나중에는 공으로 돌리는 수행을 백일간 하면 참 좋습니다.
이것이 관법입니다.
나중에는 사람의 몸뚱이에 현혹되지 않아요.
지나치게 예쁜 것 좋아하는 사람은 이 관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아직 미혼들은 특히 해두어야 해요. 그래서 얼굴 보지 않고 마음을 보고 결혼하도록 해야 합니다.
허망한 몸뚱이, 냄새나는 몸뚱이인데 거기다가 겉만 요란하게 치장하면 무얼합니까?
그것은 마치 얼은 똥으로 깍은 인형에다 좋은 옷을 입혀놓은 것과 같아요.
똥깍인형에다 옷을 입혀놓으면 의미가 있어요?
똥깍인형에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놓는다고 냄새가 안나겠어요?
마찬가지로 사람이 분별심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 놓아 보아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입에서 냄새만 날뿐입니다.
옛날 큰 스님들은 사람을 제분기(製糞機)로 보았어요.
즉 똥만드는 기계라는 말입니다.
입으로 음식을 넣으면 하루종일 몸이 하는 일은 똥만드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누구나 다 똥깍인형이요, 제분기인데 어찌 이 몸뚱이가 위대하고 좋은 것이라고 집착하겠어요.
이 몸은 적당히 춥지 않게 입으면 되고 남에게 실례되지 않으면 되지
몸에다 크게 치장할 가치는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물질적인 것에 집착을 떠나야 보살입니다.
양나라 무제가 불교의 귀의하여 수많은 절과 법당과 불상을 조성했습니다.
기록에 수백건에 달한다고 하였는데 중국 역사상 절과 불상 짓는데
그렇게 열성적으로 헌신한 왕이 없었어요.
나중에는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왕궁에 돌아가지 않아요.
신하들이 자꾸 절에 찾아와서....결재를 맞고....왕궁으로 돌아가자고 하여도 안갑니다.
나중에 하도 간청하면 나를 돈을 주고 사가라고 하여 신하들이 품삵을 주지스님이게 주고 왕을 모셔갔어요.
그런 왕이 하루는 달마라는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제가 이와같이 수많은 불사를 하였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무無!" 라고 외쳤어요.
그러자 왕이 얼굴 색을 바꾸며, 아니 경에는 수없는 복이 된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무냐고 반문하자. 더이상 아무말도 않고 산 속으로 떠나가버렸습니다.
아직 중국은 불법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구나 생각하고
9년을 굴 속에서 참선하면서 지냈는데 하루는 혜가라는 청년이 와서 불법을 묻기에
"이 법은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만 전해줄 수있다. 네가 증표를 바쳐라" 하자
두 말 않고 팔을 끊어 바쳤습니다. 이것을 보고 제자로 받아주어 나중에 법을 전했으니
중국은 이 선불교를 얻기 위하여 자기 팔을 끊어바쳐서 산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것이기 때문에 고귀하고 아름답고....깊어서 남에게 함부로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했다는 한 생각, 이것이 바로 물질에 집착한 생각입니다.
아무리 했어도 한 것이 없는 줄 알아야 깨끗하고 큰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각종 지식에도 마음이 머무르면 병이 됩니다.
이런 것에 머무르면 중생이라 하고 세상이 시끄러워집니다.
너 했니,,,안했니,,,하고 싸우고,,,,잘했다 못했다 싸우고,,,,,,
모두 허망한 것에 사로잡혀 헤매는 것일 뿐입니다.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의 백미라고 하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여기가 가장 아름답다고 모두 한결같이 찬탄을 아끼지 않고 노래를 불렀어요.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써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
거친 옷을 (색:물질)을 입어도 입었다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부른다 하여도 자랑하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향기가 나더라도 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든다 하여도 자랑하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천을 짜는 직물 박사라고 하여도 박사라는 생각을 내지 말고 마음을 쓸 것이며
수많은 지식(法)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안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것이 바로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유명한 금강경 구절입니다.
금강경은 기본적으로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하였어요. 집착하지 마라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6진이 이 세상에 없을 수는 없어요.
그러므로 내가 없엘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멀리 산으로 피하거나 접촉을 꺼려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속에 살되 '머물지 말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묘미입니다.
도교는 도피하여 산으로 들어가는 종교이지만 불교는 더 깊이 마을 속으로 들어가되 물들지 말라는
멧세지가 담겨있어요. 어떻게 물들지 않는가? 초월하라.
어떻게 초월하는가? 6진 속에 있되 마음이 머물지 말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에 육조혜능스님도 깨달았고, 많은 선사들도 여기서 다 깨달았어요.
6진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고 6진 속에 있되 마음이 머물지 마라.
이것이 불교의 도의 극치점인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입니다.
여기서 깊이 깨달으세요. 그 어디에고 머물지 않으면 공부 끝입니다. 그대가 바로 붓다입니다.
몸이 이 세상에 있되 마음은 머물지 않는다면 그대가 바로 청정한 붓다요, 깨달은 자입니다.
그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나, 개념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면 당신은 평안한 성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큰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불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일하고, 쉬고,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고,
자기의 능력대로 과학자는 미래를 연구하고, 정치인은 정치를 하고, 선생님은 가르치되.
자연스럽게 살아가되..항상 무심속에서 할 것..
마치 꿀벌처럼,,,,,,,여왕벌처럼,,,,,,,,군사벌처럼,,,,,,,,
자기의 직분에 충실할 뿐,,,,,,,,,생각은 항상 비울 것,,,,,,,,
비우다: 별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몸이 큰 수미산 같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非身)을 큰 몸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
여기서 부처님의 화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크다 하셨다면 그것은 큰 것은 원래 없지만 다만 말하기를 크다라고 하실 뿐입니다.
만약 크다는 말도 안한다면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하시면서 어째서 여기서는 크다고 하셨나 오해하면 안됩니다.
부처님의 내부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없어요. 그러나 대화를 위하여 크다고 하셨습니다.
저 큰 수미산은 크다고 해야 말이 통할 것이 아닙니까.
큰 것이 없다고 크다는 말도 안해야 한다면 그 어떤 말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불교의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크다고 하면 말이 통하자면 큰 것이지 실제로는 큰 것이 없는 줄로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