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如法受持分 (여법수지분)

 

爾時, 須菩堤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운하봉지.

佛告須菩堤 是經 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

불고수보리시경 명위 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

當奉持. 所以者何. 須菩堤, 佛說般若波羅蜜 卽

당봉지.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

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堤, 於意云 何 如來 有所說法不.

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수보리, 어의운 하 여래 유소설법부.

須菩堤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堤 於意 云何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수보리 어의 운하

三千大千世界 所有 微塵 是爲多不. 須菩堤言 甚多世尊 須菩

삼천대천세계 소유 미진 시위다부. 수보리언 심다세존 수보

堤,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리, 제미진 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

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卽是非相是名三十二相 須菩

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설 삼십이상즉시비상시명삼십이상 수보

堤,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항하사등신명보시,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

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수지 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심다.

 

이 경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받들고 공부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며 이 이름으로 항상 공부할 것이니라, 반야바라밀은 지혜 닦는 방법을 설명한 것인데, 그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어야 곧 반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 부처님께 대답하되,

"세존님, 여래께서는 오직 '네 마음 밝혀라'했지 어떤 의견을 말씀하신 게 없습니다"

"수보리야,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 대답하되,

"매우 많습니다. "

"수보리야, 이 모든 티끌은 여래가 설한 티끌이 아니고, 그 이름이 티끌이니라.

여래께서 말씀한 세계는 세계라는데 뜻이 있어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마음 닦는 방법을 일러주는데 필요해서 그 이름을 세계라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서른두 가지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부처라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보통사람보다 서른두 가지 모양이 다르다 해서 여래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서른두 가지 상은 곧 상이 아니며 그 이름이 서른두 가지 상일뿐입니다"

"수보리야,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육체와 목숨으로 남에게 이익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내용 중 '사구게'를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명한다면 그 복이 앞에서 말한 복 보다 훨씬 많으니라"

 

 

다만 이름하길 금강경이라고 해야해요.

수보리도 눈송이님처럼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설한 바가 없습니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수보리의 이런 말에 부처님은 침묵하고 넘어갔어요.

묵계죠.

속으로 (음~수보리가 제대로 아는구나. 그래도 잘했다고 하면 무엇이 있다는 말이니 잘했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지....)

하는 뜻으로 그냥 암말 안하고 다음 말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처님의 사상이 바로 불교의 매력이 된 것입니다.

그 무엇을 해도.... 대단히 좋은 말로 수 많은 사람을 깨닫게 해도

했다는 생각이 없는 부처님의 고요한 마음을 사람들은 높히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처럼 여러분도 무엇을 해도 한다라든지, 했다라든지 하는 생각을 내면 안됩니다.

좋은 일을 해도......... 자식을 고생해서 가르쳐도....... 남편 내조를 잘했어도........

절에서 봉사를 10년간 했어도......... 부처님께 수 많은 공양을 올렸어도...........

양나라 무제처럼 수 백 개의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했어도..........

전혀 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제대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되 하고 있다든지, 했다는 생각없이 하는 종교입니다.

모다 깊이 깨달으소서.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자, 여기서 수보리는 많다고 했어요?

정말 많아서 많다고 한 것일까요?

삼천대천세계는 우주를 말합니다.

우주에 가득한 티끌이라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여기서 많다고 하였어요.

이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요. 여러분?

틀린 말입니다.

많다고 하면 안되요.

부처님의 논법으로 말한다면 '많지 않습니다'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존재하는 것은 곧 공이다 라고 말하셨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 그 말입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존재는 그 자체가 그대로 공입니다.

마치 얼음과 물처럼 존재와 공은 같은 것으로 생각해요.

그러니까 존재를 공으로 보기땜에 '많지 않습니다' 해야 해요.

그러나 수보리는 "매우 많습니다"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대화 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 말씀대로 한다면 아무 할 말이 없어져요.

그러니까 대화를 소통하기 위해서 많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많아서 많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많다'는 말은 다만 명자일뿐이라고 뒤에 설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름일 뿐이다' '명자일뿐이다' 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모두 아셨죠?

“수보리야, 모든 미진을 여래가 설하되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라 하며

여래가 말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이니라.”

▶ 미진=티끌

부처님께서 부연 설명을 하셨네요.

그래, 그래. 수보리야 내가 말한 바 티끌도 다만 언어를 소통시키기 위한 이름일 뿐이고

세계도 무슨 정말 세계가 있어서 세계가 아니고, 다만 대화를 소통시키기 위한 이름일 뿐이니라 하고 부연설명을 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만 그런 명칭일 뿐 그것의 실체는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사람도 사람이라는 명칭일뿐 사람의 실체는 없어요. 사람이라는 명칭만 있을뿐입니다.

사람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네가지 원소가 모여서 사람이지 사람이라는 어떤 불변의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원소가 제각기 제 고향으로 가면 사람은 어디에고 없어요.

화장터에 가면 한 줌의 재로 화하듯이...........

사람은 없고 사람이라고 부르는 명칭만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4성제에 집(集)이 나와요.

4성제 = 4가지 성스럼 진리, 부처님의 최초설법 집(集)은 모을 집자입니다.

모아지다, 모집하다, 집합하다 라는 뜻입니다.

불교는 절대 불변의 원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의 종교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아트만' 이라고 했어요.

이 세계는 아트만이라는 불변의 원소가 있어서 거기에 여러 가지 인연이 보태어져서 만물이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만물이 파괴되면 아트만만 남는다. 이 아트만이 바로 브라만이다.

브라만은 곧 신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우주를 창조하고 멸하게 하는 절대 불변의 존재이다.

사람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으나 그 존재는 반드시 있다.

그 분이 바로 신이다.

이 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므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다.

우리의 주님이며 나의 주인이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바로 창조주를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만물을 잉태하게 했으면 어머니여야 하는데 아버지로 표현했어요.

이것이 기독교 표현의 모순중에 하나입니다.

옛날식 남성우월주의의 사고방식이죠.

어머니는 약해요. 그래가지고는 사람들을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옛날 가부장적인 사고가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강하고 어른이고..험한 일과 가정을 책임지니까..적어도 주인이라면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창조주라면 어머니여야 해요.

그래야 만물을 자식처럼 돌보고 다 사랑하죠.

죄진 자도 용서하고.........부드럽죠. 어머니는

그래서 제가 법성게 강의에서 신은 어머니여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 종교가 부르럽고 온화해진다고.......

남자고 아버지로 표현하니까 윽박지르고.......안나오면 혼내는 줄 알고

무섭고..........살벌해요. 이기적이고.......신을 위해 불도 내고, 사람을 죽이고....

말한마디가 준 어감이 가져오는 파급 효과가 매우 큽니다.

다시 돌아가서.... 불교는 이런 아트만의 세계를 반대합니다.

모든 것은 모여진 것이니라.......집(集). 이것이 불교 사상입니다.

여러 원소가 모여져서 이루어졌으니 흩어지면 거기 그 실체는 없다

그러니까 다만 이름만 존재할 뿐이다 라는 논리입니다.

부처님께서 혹시 세계라고 말하고 티끌이라고 말한다고 그것이 실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름일 뿐이니라 라는 말이어요.

이런 말이 금강경에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머리에 배기도록 하기 위하여 철저히 사상교육시키듯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32(三十二)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32상은 부처님께서 가지고 있는 32가지 좋은 상호입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부처님의 보통 사람하고 좀 다른 그런 상은 사실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받아나는 상입니다.

그만큼 부처님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한가지 상호를 얻으려면 100가지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귀가 길고.머리에 도툼한 살이 돋아나 있고.

아마에 흰 털이 나고.등등 32가지 좋은 상호가 그것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32(三十二)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볼 수 없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三十二)상은 곧 상(相)이 아니고 그 이름이 32(三十二)상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상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생에 복을 지어서 좋은 상호를 받았으나

그것도 허망한 이름만 있을뿐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상호를 보고 부처를 보았다고 말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부처님의 제자 수보리입니다.

여러분도 수보리처럼 법당에 모셔놓은 불상을 부처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불상을 부처로 보면 큰일납니다.

진짜 부처님께서 그것을 아시면 불상들 다 때려부숩니다.

아니,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의 실상을 보고 있는 면전에서도

'너희들이 나를 보고 부처를 보았다고 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라고 하였는데

3천년이 자나간 오늘날 법당의 불상을 부처로 본다면 그것은 대단히 화가 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불상이 부처가 아니고 누가 부처입니까?

네, 바로 자기 자신이 부처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법당의 부처님은 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조성해놓은 것이지 그것이 부처는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부처임을 잊지마세요.

이것을 안잊으면 행복하나 잊으면 그순간부터 사이비요, 불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목숨으로 보시했을지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다만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훨씬 많으리라

금강경의 위대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무엇보다도 진리를 숭배해야지 단른 것을 숭배하면 안됩니다.

이 진리를 읽는 것 자체가 복이고 남에게 전해주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남에게 목숨을 바쳐서 베풀어준 복보다도 더 큰 복입니다.

돈이 없어서 좋은 일 못한다고 근심하지 말고

금강경 한 구절이라도 읽고 남에게 전해서 큰 복을 짓자.

12. 尊重正敎分 (존중정교분)

 

復次須菩堤, 隋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一切世間天人阿修羅

부차수보리, 수설시경 내지사구게등 당지차처일체세간천인아수라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堤 當知是人成就

개응공양 여불탑묘 하황유인 진능수지독송. 수보리 당지시인성취

最上第一稀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卽爲有佛 若尊重弟子.

최상제일희유지법 약시경전소재지처즉위유불 약존중제자.

 

바로 깨친분을 존경하라.

"수보리야, 이 경의 내용 중 '사구게'를 설한다면 모든 세상 사람이나 하늘사람이나 아수라가 이곳에서 공양하기를 마치 부처님 사리탑에 공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더욱이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스스로 읽고 외운다면 이 사람은 가장 높고 고귀한 경지를 이룰 것이니라.

이 경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의 가장 존경스러운 제자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니라. "

 

 

12.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또 수보리야, 이 경을 설해 주거나 다만 사구게만이라도 설명해 들려 주면,

온 세상의 천.인.아수라들이 공양하기를 마치 부처님 탑에 공양하듯 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함에 있어서이겠느냐.

 

지난 번에 이어서 계속 이 경의 공덕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는 이 경중에 4마디라도 받아지니거나 남에게 전해주면 그 공덕이 항하의 모래알 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경을 설해주는 그 공덕이 천상 사람과 그리고 지상의 사람들이 그리고 아수라들이 남에게 이 경 전부를 설해주거나,

단 4마디라도 설해주는 자에게 공양하기를 마치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처럼 할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공양 = 음식물등을 제공하다.

아수라는 전투의 신입니다

귀신보다는 좀 나은 신들인데, 신(神)들의 장수 중에서 유난히 싸움을 좋아하는 신입니다.

마음으로 물건을 맘대로 부리고, 음악으로 적을 퇴치하기도 하는 신입니다.

이들 아수라도 유복(有福)아수라, 무복(無福)아수라가 있는데 유복 아수라는 복이 좀 있어서 천상에도 가고

지상에도 넘나들면서 싸움을 즐기지만, 유독 부처님과 보살과 이 경을 전하거나 읽는 사람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각종 공양을 올리고, 주위를 보호합니다. 일종의 깡패 보디가드야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금강경을 읽고 있으면 이들 아수라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합장하고 앉아서

경을 듣는데, 만약 틀리지 않고 읽고 그 뜻을 알고 읽으면 더욱 신심이 나서 각종 보배를 올려요.

희한한 향수를 뿌려서 좋은 향기가 온 방에 진동하게 합니다.

복이 있어서 악심이 동하다가도 어디서 금강경 읽는 소리가 나면 달려가서 주위를 보호하고

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금강경을 자꾸 읽으면 부자가 되어요

실제로 영험록을 보면 중국에 어떤 사람이 다리를 못쓰게 되어 일을 못하므로 매우 가난하였는데

어떤 스님이 금강경을 읽으라 하여 매일 읽었는데, 차츰 재물이 들어와서 나중에 큰 부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부자가 된 뒤에는 남에게 좋은 일도 하고 경도 열심히 읽어서 남에게 전달하여 주기도 하여 복을 지어야 하는데 부자가 되자 경 읽는것을 그만 두었어요. 그랬더니 재물이 슬슬 빠져나가서 나중에 다시 가난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경을 안읽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다시 경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늙고 병이 들어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못읽게 되드랍니다.

그래서 최후에는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수라의 공양 때문이었어요.

자기는 전생에 복을 지은 것이 없어서 가난하고 병신이 되었는데 금강경을 읽자 갑자기 아수라의 공양으로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경을 안읽으니까 곧 아수라도 떠나가고.자기 복이 나타나서 도로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아수라는 마음이 악독하여 판단이 분명해요. 이익이 없으면 싹 돌아서죠.

실제로 한 세대 전 불자들은 금강경 엄청 읽었습니다.

한 세대전이라 하면 대략 8,90~100세 정도 되시는 분들인데 이 분들이 제가 처음에 스님될 때 4,5~60대의 불자들이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불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하여 염불하러 그 불자 댁에 갔는데

제가 책을 보고 금강경을 읽으니까, 그 분이 옆에 앉아서 책도 안보고 다 외우는 것이었어요

저는 초자니까, 책을 보고도 오히려 틀리는 것이 있는데 그분은 안보고도 훤하게 읽어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하도 많이 읽으니까 저절로 외우게 되드래요.

그런 세대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가 세계에서 12번째 잘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거의 다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지금 세대들, 그러니까 대략 현재 4,5~60대들이 새롭게 불자들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분들 보고 금강경 외우라 하면 못 외워요. 겨우 천수경정도만 어쩌다 한명씩 외우죠.

그러면 이들은 옛날 선배들이 경읽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면 바보 상자(TV) 쳐다보느라 자기 혼을 뺏기고 있습니다.

요즘 뭐야요? 토진가....? 그것, 길상이 나오는 것.... 그 시간 재느라 시간 없고

뭐 또 있드라,,,,,너 나 맘먹는거야? ....그런 거야? 하는 것 ....

코미디....알죠? 다 큰 어른 들이 되어가지고 남 흉내나 내고 있어요.

얼마전 친구들 모임에 갔더니 50살 먹은 친구가 뭐라더니... 그런거~야? 하길레

그것이 뭔가 했는데 나중에 어쩌다 TV를 돌렸더니 거기서

까까머리 젊은 친구가 그런거~야? 하니까, 밑에 방청객들 애들이 좋다고 죽고 못살데요...^^*

그기서 느끼한 남자도 나오는데 정말 느끼하게 생겼는데 뭐라고 한마디하면

방청객이 막 좋다고 죽어요, 죽어.....^^*

그래서 저걸 보고 그랬군 했는데.모다 자기 혼을 빼놓는 것을 보느라 경 읽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 경제가 이 모양으로 돌아가요

제가 처음 입문할 때만 해도 불자가 거의 80% 정도여서 누구나 다 금강경 읽는 수행을 했어요

오늘날 티벳처럼.... 그런데 그 세대가 가고 신세대는 경을 안 읽고 교회로 간 사람들도 많고

TV로 간 사람도 많으니까.....복이 없는 나라가 아수라들마저 떠나서

원래 가난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금이라도 모두 이 경을 읽고 자기를 깨달으려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모으지 않고 어떻게 경제가 일어서겠어요?

정신이 산만 하니까 정치도 혼란하고.....사람들도 혼란하고.....사회도 어수선해요.

무복 아수라들은 남이 싸우면 옆에서 충동질해요.

그래서 실제로 때린 사람은 살살쳤는데 무복(無福) 아수라가 한대 더 때려서 사망하게 하고.....

작은 일을 크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 화나는 사람을 더 부추겨요.

그래서 더 화내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화가 안나야지

한번 화내면 무복 아수라가 즉시 달려와서 더 화내게 해요.

그래서 화낸 것이 화를 또 불러서 더 크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가 자기의 분노가 아닌 경우도 있어요. 제정신이 아닌 경우죠.

평상시와 다르고 그래서 착한 일 하면 선신이 돕고 악한 일 하면 악신이 더 부추긴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라도 국민 모두가 경을 읽고 외우고 전하는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경을 가까이 하면 절대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좋은 말씀을 매일 읽는데 어찌 나쁜 일을 하겠어요.

매일 읽으면 재물도 들어오고,,,,깨침도 얻고 하니 일거양득, 매일 읽고 전하도록 하세요.

질문방에서 가끔 어떻게 기도합니까? 물으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아니면 금강경 읽으라 하는데

신묘장구대다라니도 관세음보살이 오랫동안 읽고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고

금강경도 깨달음을 목표로 설해졌어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신효하고 빨라요.

그리고 주로 악한 일을 없애주고.흉몸을 길몽으로 바꾸는데 아주 영험이 있습니다.

100%입니다. 99%도 아니고 .....100%.

옐들어 간밤에 애를 보거나, 여자를 보거나,

죽은 자를 보았을 때 아침에 일어나 얼른 신묘장구대다라니 1편을 외우고 하루를 시작해보세요.

그러면 절대 그 날 중에 흉한 일이 안 일어납니다.

그러면 시험삼아 그런 꿈을 꾸었을 때 하루는 읽지 말아보세요.

그러면 어디가서 실컷 싸우느라 머리카락 다 빠지고.얼굴에 손톱으로 할퀴어 상처가 깊게 패였는데도

보상도 못받고 찜찜하게 돌아오는 불상사가 생길 거예요.

얼굴에는 평생의 흉터는 남고. 아! 이것 안읽으면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을 읽던지 좋습니다.

진리를 읽는 것이라 건전하고 좋은 것입니다. 진리를 숭배하면 복이 와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읽으면 마장이 물러가고, 흉한 일이 제거되며, 일이 빠르게 성사됩니다.

금강경은 복입니다. 재물을 얻으려면 금강경을 읽어야 해요.

그러니까 출근 전에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읽고 저녁에는 금강경을 소리내어 1편 읽고 자면 좋습니다.

처음에는 한글로 된 것을 읽고 뜻이 다 들어오면 나중에는 한문을 읽어 금강경 정도는 다 외워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가 다시 피고 집안에 웃음이 가득해져요.

이 것을 읽고 전하기만 하여도 악한 아수라도 복을 가져오는데,

하물며 사람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함에 있어서는 오죽하겠습니까?

뜻을 모르고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알고 읽으면 더욱 좋고요.

못 외우면 항상 몸에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단 네마디라도 써서 식구들에게 지니라고 주세요.

그리고 가능한 외우도록 하세요. 그러면 그 복이 한량 없어집니다.

이 말은 부처님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진리를 신봉하면 그만큼 큰 복이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의 신봉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래요.

저급한 신이나 어떤 물질을 숭배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인간성 상실이 되어요.

최근에 우리나라 유신론 종교 인구가 급상승했어요. 이젠 불교인구보다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보다 신을 더 섬기니 인간성 상실이 된 사람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말입니다.

신을 섬겨서 더 행복하고 부자가 되고 나라가 행복해져야 하는데

더 가난해지고.각박해져가요. 그러니 마이너스 아닙니까.

빨리 다시 되돌아와야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고.진리의 숭배자가 되어야 신이 아닌 사람이 대우받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됩니다.

 

수보리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 가는 세상에서도 드문 법을 얻게 될 것이니

 

세상에서 제일 높고 드믄 법은 불법입니다. 법을 얻었다 함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경을 가까이 하면 결국 크게 깨닫게 되죠. 부처님의 뜻은 복을 받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깨달아 신들이나 사람 중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부처임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진리를 설하니 어찌 위대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위대한 자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고개숙이지 말고 어떤 신도 섬기면 안되요.

인간이 신 위에 있어야지 신 아래 있으면 계속 허황된 것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이 아닌 인간이 세워놓은 허황된 가치에 끌려가는 이상 이상국가는 없습니다.

항상 혼란하고 불화스러움으로 가득해요.

사람이 대우받고 사람이 귀하고, 사람이 위대해야 진실를 보게 됩니다.

자기가 부처임을 알면 남도 부처인줄 알고 존중해요.

자기가 노예이면 남도 노예인 줄 알아요. 그래서 상대를 무시합니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제자가 머무는 곳이니라.

 

여기서 부처님은 경전을 높이 쳤어요.

부처가 있는 곳이 아니고..신이 있는 곳이 아니고..바로 경전이 있는 곳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붓다의 사상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유신론 종교는 나는 신이요, 너희의 주인이요, 길이다 라고 말해요.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인정하면 내가 천국에서 너희를 주께 인증할 것이요.

너희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천국에서 주 앞에 너를 인증하지 않으리라.

이것이 유신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나를,,,,,신을 인정해라 너의 주인으로 인정해라 합니다.

그러나 붓다는 달라요. 너희는 나를 인정하지 말라. 붓다는 없다.

너희가 만약 나 붓다를 인정하면 너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말은 믿을 만 하다.

그 무엇도 세우지 말고 인정하지 말라 라는 말은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이 진리를 높이 하는 자는 복 받을 것이요,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가난하리라.

이 진리가 있는 곳이 바로 붓다가 있는 곳이요, 거기가 바로 붓다들의 도량이니라.

붓다 : 부처

부처 : 깨달은 자

라고 하였으니 부처님이야 말로 위대한 진리의 숭배자입니다.

여러분도 부처님을 숭배하지는 말이요. 부처는 이름뿐입니다.

부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처입니다.

희안찬란하게 꾸며놓은 법당도 숭배하지 마세요. 이 경이 있는 여러분 안방이 참다운 법당입니다.

그러나 진리(法)는 항상 숭배하세요.

머리에 이고 가슴에 안고 자고, 값진 보배로 단장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든 진정한 행복은 바로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붓다도 이 경에서 나오고 모든 진실도 이 경에서 나옵니다.

매일 한번씩 읽고 또 읽어서 대대로 전하세요.

이런 진리가 전해져야지, 쓸데 없는 허황된 것이 전해지면 인류의 퇴보입니다.

인류가 더 퇴보하는냐? 진보하느냐는 하는 것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모두 참 진리를 전하는 포교사가 됩시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니라.”

 

금강이란 단단하다는 말입니다. 반야는 지혜입니다. 금강반야란 단단한 지혜입니다.

부서지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부서지지 않는가? 금강경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부서질 것이 없어요.

오히려 누가 무엇을 내세우면 그것을 파괴할 뿐입니다.

너의 그런 생각이 오히려 너를 괴롭힐 뿐이니라 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행복합니다. 이대로 다 갖추었어요. 그대로 붓다요, 위대한 자요, 평온한 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생각 툭 일어나 옷을 이렇게 입어야 행복이야. 집은 이런 데서 살아야 행복이고,

차는 이 정도 타야 남에게 대우 받어...말은 이렇게 우아하게 하고..

일런 말을 들어야 대접받는 것이고,,,,, 이런 말을 들으면 맘 상하는 거야.....

이렇게 공연히 쓸데 없는 가치와 허왕된 의미를 스스로 정해서

그것에 목을 매요. 스스로 꿈을 꾸듯이 스스로 환상을 만들고

이래야 고귀한 인생이지, 이래야 스승이고, 이래야 수행자야, 이래야 아버지고,,,,,

이렇게 환상을 세우고 그것에 맞추느라 본래 가지고 있는 행복을 막아버렸어요.

그야말로 허황된 욕구가 진실을 막아 진짜 행복이 가려진 것입니다.

허황을 쫓아가느라 진실이 뭍혀진 것입니다.

그런 가치는 다 사람이 만든 가치요, 여러분의 마음이 만든 허망한 가치입니다.

그렇게 입으나 이렇게 사나, 저렇게 말하나 원래 여러분의 마음은 다 같아요.

그렇게 안살아도 마음은 항상 고요합니다.

여러분의 그런 욕구대로 살아도, 그 욕구대로 안살아도 마음은 항상 같습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욕구를 쉬어야 하는데, 거기서 더 색다른 것으로.......

더 높은 것으로.........더 아름다운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갖추기 위하여 달려가서 바꿔보지만

얼마 안 있다가 또 실증나고 마음이 예전과 같아져요. 좋은 것을 도통 모르겠고.....

그래서 또 더 좋은 것으로........더 비싼으로 ........더 강하고 찐한 것으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달성해놓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또 허망해져요. 도통 기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또 찾고........그렇게 결혼도 4번씩이나 하고.... 이영희처럼 종이인형 예술가 ....

땅도 많이 사들이고........집도 크게 지어보지만 여전히 불행해요.

우울하고..........외롭고...... 왜 입니까?

마음은 원래 비워져 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요.

마음은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빈 채로 두면 그것이 행복입니다.본래 마음은 이래도 고요........

저래도 한 생각 안 일어나면 고요해요. 행복합니다.

그 본래 행복을 지키라고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잡으려 하지 마라, 오히려 갖은 것을 놔버려라.

버릴 수록 내려 놓을 수록 편안해진다. 본래 행복을 너의 생각 하나로 가로막지 마라.

이렇게 살아도 행복 저렇게 살아도 행복인데 너의 한 생각이 문제이다. 그것만 중지해라.

그러면 완전하다. 그대로 행복한 붓다이다 이것을 외치는 것입니다.

네가 찾는 붓다는 없고, 보살도 대단하지 않고, 진리도 없다.

너는 그대로 이상적인 사람이다

네 자신이 네가 그렇게 수십년 찾던 바로 그것이다.

깨달아라. 붓다여. 붓다여! 그대는 원래 붓다이다.

붓다여! 그대는 지금 그대로 그대가 찾는 붓다이다

라는 말이 담긴 금강경, 이것이야 말로 무너지지 않는 경입니다.

그러니 이 경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이런 경은 만세에 전해야 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반야바라밀=지혜를 얻으려는 수행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없애야 반야바라밀입니다.

무엇을 얻으려하면 잃어요.

아무것도 세우지 않으면 그것이 반야이고 세워질 때마다 돌이키면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이름뿐 실제로 특별난 수행은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중에 아무 것도 세우지 않는 것,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부처님의 매력은 이렇게 항상 무엇을 말하시다가 여러분이 그 명자에 또 집착하실까봐

무엇이 있다고 찾을 까봐....그때그때 교정해주십니다.

이것도 다만 명(이름)자일 뿐이니라 하고.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이 대목이 금강경의 꽃입니다.

그동안 제 강의를 잘 들은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것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중에 가장 매력 있고, 겸손하시고, 사실적이고,

부처님의 핵심 사상이 들어있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최근에 불교에 입문한 대학 교수들도 이 말에 매력을 느껴서 입문하였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 불교에 이런 깊은 뜻이 있었다니,,,, 금강경은 과연 경중의 경이구나....

금강경에 이 경을 단 네 마디라도 간직하거나 남을 위하여 읽어주면 큰 공덕이 된다고 하더니

과연 그럴만 하구나 하고 생각하였던 곳도 여기입니다.

금강경에 이 경을 단 네 마디라도 간직하거나 남을 위하여 읽어주면 큰 공덕이 된다고 하더니

과연 그럴만 하구나 하고 생각하였던 곳도 여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처님께서 그동안 수많은 말씀을 해놓았는데 왜 여기서는 수보리가 설한 바가 없다고 했을까요?

부처님은 설해도 설한다는 생각이 없어요.

이것을 잘 알아야 불교의 논리 전개를 압니다.

불교는 실제로 많은 일을 하지만 '한 바가 없다'고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중생을 제도해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해야 하고....

많은 법을 설해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물론 법(法)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하고....

그러니까 하지 않았다 하여 정말 안한 것이 아니고

내심으로는 전혀 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는 수 많은 법을 설하시지만

마음은 정말 설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입니다.

이런 불교의 논리를 잘 알아야 불경을 볼 수 있습니다.

설 한 바가 없다고 말하니까 고지 곧대로 정말 말하지 않았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면 안되요.

수많은 말씀을 하셨어요.

부처님은 45년간 8만 대장경을 설했습니다.

35세부터 80세까지 거의 매일 하다시피 했어요.

그러니까 세계 어떤 종교보다도 많은 성전을 가지고 있는 곳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설하셨으나 나중에 돌아가실 때는

"나는 45년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느니라" 하셨어요.

부처님의 독특한 논법이죠.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마음에서 정말 하였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죠.

거짓말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을 보고 또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고 말할지 몰라도

부처님은 정말 했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그리고 무슨 가치 있는 것을 설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항상 빈 상태에서 설하셨고

설하고 있으면서도 설한다는 생각이 없고

누가 못알아들어도 가슴 답답한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설한 것이 아니니라 하고 말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다가 막 소리지르고 헛소리를 했어요.

옆에 같이 자던 사람이 "자네 자다가 웬 헛소리를 그렇게 하나?" 하고 물으면

헛소리 한 사람이 '아! 그것 말이지....?' 하고 기억할까요? 못합니다.

실제로는 했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다가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자다가 소리친 것을 평생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것이 아니죠. 그처럼 부처님은 수 많은 좋은 말씀을 하시지만

전혀 했다는 생각이 없어요. 만약 했다면 헛소리를 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 헛소리여요. 옛 조사들은 고름 닦는 휴지라고 했어요.

또한 부처님이 쓸데 없는 말을 했다고 지옥에 갔다고도 말합니다.

제대로 말한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매주 화요일 강의하지만 강의한 바가 없습니다.

무엇을 세운 것이 있어야 한 것이죠. 그러니까 저는 언제나 강의 안한다 하고 생각해요.

만약 한다 하고 생각하면 시간 아깝고...... 연료비가 아깝고.... 노력이 아깝고....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맨날 해도 제대로 탁 깨달은 사람이 없으면 나중에 아마 그런 생각이 들거예요.

그래서 한 생각 내면 그 생각이 스스로를 괴롭힌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적이 없고..... 여러분도 들은 적이 없고......

금강경 '금'자도 모른다 해야 제대로 공부한 것입니다.

11. 無爲福勝分 (무위복승분)

 

須菩堤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 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수보리 여항하중 소유사수 여시사등 항하 어의운하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須菩堤言 甚多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堤

수보리언 심다세존 단제항하 상다무수 하황기사. 수보리

我今實言告汝 若有 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

아금실언고여 약유 선남자선녀인 이칠보만이소항하사수 삼천대천

世界 利用布施 得福多不. 須菩堤言 甚多世尊 佛告須菩堤 若 善男

세계 이용보시 득복다부. 수보리언 심다세존 불고수보리 약 선남

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爲他人說此福德勝前 福德.

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 수지 사구게등위타인설차복덕승전 복덕.

 

분별내지 않는 복이 크니라.

"수보리야, 항하의 모래알과 같은 수의 항하, 그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 대답하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도 그 수가 많은데 하물며 그 항하에 있는 모래수,

그건 참으로 매우 많은 수입니다. "

"수보리야 내가 이제 참다운 말로써 너에게 이르노니,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이 항하 모래수와 같은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찬 칠보를 남에게 베풀어 준다면 그 복이 많으냐?"

수보리 대답하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이 경 내용 중 '사구게'만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하여 준다면

이는 마음을 밝히는 공부로써 앞의 칠보로 남에게 베푸는 복보다 훨씬 많으니라. "

 

 

11.무위복승분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처럼 많은 항하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 수효가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항하들만 하여도 엄청나게 많겠거든

하물며 그 여러 항하의 모래 수이겠습니까.”

 

항하는 갠지스강을 한자로 항하라고 합니다.

인도의 젓줄 갠지스강, 여기에 가면 모래밭이 있습니다.

그 모래밭의 모래알 숫자는 무척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래알 숫자만큼이나 되는 강이 있고, 그 각각 강에 모래알이 또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얼마나 되는 숫자겠어요? 말도 못하겠죠? 너무 많으면 말못해요.

없어도 말못하고....희한해요. 두 경우가 같은 것 보면 ^^*

그러니까 말못하는 이유를 한가지만 생각하면 안되요.

너무 많아도 말못하고 아예 없어도 말 못하고....^^*

 

“수보리야, 내가 지금 참말로써 말하노니,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그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를 가득히 채워서

남에게 베풀어준다면 그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얼마나 많을까요? 말을 통할 때는 통해야 합니다.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미리 부처님의 화법을 설명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많습니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많은 것은 기정사실이어요.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이것은 가정이나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그 복은 이루 헤아릴 수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녀인이 이 경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명해 주면

그 복덕은 앞에서 칠보(七寶)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크니라.”

 

이구절에서 육조스님은 칠보를 보시하는 것은 삼계(三界)의 부귀한 과보를 얻음이요,

대승경전을 강설하는 것은 모든 듣는 자로 하여금 대지혜를 내어서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게 함이니

마땅히 알라. 경을 수지하는 복덕이 앞의 칠보를 보시하는 복덕보다 수승하리라.

육조스님도 이처럼 경을 간직하고 남을 위하여 일러준 복덕이 가장 뛰어난 복을 짓는 것임을 설명하였어요. 모든 부처님은

이 금강경에서 나옵니다. 이 땅이 부처님으로 가득하면 그대로 살기 좋은 낙원이요, 파라다이스고, 극락세계입니다.

제가 늦은 밤에 이렇게 여러분에게 경을 설명하여 복을 짓듯이 여러분들도 남에게 단 네마디라도 전하여 복을 지어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복, 이것은 아무리 많아도 나쁘지 않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모두 부처님께 복달라고 빌지만 말고 스스로 복을 지어서 복을 받도록 합시다.

10. 莊嚴淨土分 (장엄정토분)

 

佛告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昔在然燈佛所 於法有所 得不不也 世尊

불고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 득부불야 세존

如來 在然燈佛所 於法實無所得 須菩堤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여래 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須菩堤 諸菩

불야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시고수보리 제보

薩 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살 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 而生 其心 須菩堤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

응무소주 이생 기심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

身爲大不 須菩堤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신위대부 수보리언 심대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부처님 세계를 꾸밀 수 있느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시기를,

"여래께서 옛날에 연등불을 모시고 계셨을 때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연등불로부터 진실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부처님세계를 장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부처님세계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제 마음에 분별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분별이 없으면 부처님 세계를 장엄한 것입니다. 장엄한다는 분별이 없으므로 장엄이 아니며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라.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소리에 집착하지 않고 냄새에 집착하지 않고 맛, 촉감, 법, 어디에서나 집착하지 않고 그 마음을 낼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데 어떤 사람의 육체가 마치 수미산과 같다면 이 몸이 크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 대답하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육체는 이름이 육체지 실제로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닙니다. "

 

10.장엄정토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께 법을 얻은 것이 있느냐?”

과거 연등불 시대는 오랜 옛날을 말하는데 부처님께서 과거 3아승지겁을 수행하셨는데

그 중에 2아승지겁이 지나서 수행할 때를 말합니다.

아승지겁이라는 말 하시지요?

지구가 한번 무너져 가루가 되면 1 아승지겁이라고 합니다.

줄여서 1겁이라해요.

그러니까 높이 세워진 것들....산이나 바위나, 나무들이 다 가루가 되는 시기입니다.

언젠가는 진화가 후퇴해서 다 가루가 될 때가 있겠지요.

부처님께서는 지구가 3번 닳도록 윤회하면서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 2번째 지구 위에 초목들이 다시 세워졌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원래 아승지겁은 지구가 가루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해석하기를 그렇게 했는데.

원래는 사방 4십리, 높이 10리가 되는 바위가 다 닳으면 1겁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10리면 높이가 4km라는 말입니다.

해발 4천m인데.에베레스트산이 8,000m정도 된다고 하니까 그 절반 정도 되는 바위가 다 닳으면 1겁.

그래서 제가 해석하기를 그것은 지구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야 가능한 세월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여튼 오랜 옛날에 부처님께서는 선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수행자였습니다.

그때 세상은 연등불이 계실 때였습니다.

하루는 선혜 행자가 연등불이 그 지역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꽃을 공양하려고 꽃 파는 곳에 갔어요.

마침 '구리'라는 처녀가 꽃을 팔고 있었는데 꽃을 다 팔고 7송이를 자기가 연등불에게 시주하려고

남겨두었어요. 그런데 꽃을 팔라고 온 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꽃을 팔수 없다고 하였는데도 부득불 팔라고 간청을 해요.

그래서 나중에는 할수 없이 조건에 승락하면 판다고 하였습니다.

그 조건은 자기와 결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여인....이죠? 그 옛날에....첫눈에 반했으니....

아마도 선혜가 잘 생겼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된다 하였어요. 왜냐면 자기는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이기 땜에

결혼하면 가족을 책임져야 하므로 수행할 수없으니 그것만은 안된다 하였어요.

그러나 그럼 다음 생에는 혼인해 줄 수 있다고 하였고,

거기에 구리선녀가 응락하여 꽃을 5송이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때.선혜선인도 다음생에 결혼을 하겠으나

만약 제가 출가의 길을 간다면 막지 말아달라고 하였고 ......

구리선녀도 그러마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약속하면 지켜집니다.

그러니까 다음생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약속하지 마세요.

구리선녀는 자기 몫으로 2개를 더 주면서 자기 것까지 올려달라고 했어요

드디어 선혜선인이 꽃을 들고 부처님 오시는 거리에서 기다렸습니다.

부처님은 다가오고.....사람들은 꽃과 공양을 올려요......

그런데 당시에 선혜선인은 머리를 기를 때였습니다.

오래전이라 당시 수행자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선혜선인이 꽃을 바치고 엎드려서 절을 하려는데

마침 부처님 앞에 조그마한 진흙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전혀 돌아서 가거나 뛰어 넘으려는 기색이 없이

발을 들어 그 진흙 웅덩이 한 가운데을 밟으려고 하였어요.

그러자 얼른 선혜님이 머리를 풀어 헤쳐서 그 진흙구덩이를 덮어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발에 진흙이 뭍지 아니하시고 사쁜이 즈려밟고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선혜가 머리를 매만지면서 묶는 것을 지켜보시고는

선혜동자의 이마를 만지시면서 "너는 참 장한 신심을 가졌구나.

이러한 정신이라면 너는 장차 1아승지겁후에 틀림없이 부처가 될 것이다."

"그때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 하고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수기라고 합니다. 수기란 장차 일어날 일을 말해주면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고 옛부터 선사들은 부처님께서 법을 얻었을 때라고 합니다.

바로 이때에 석가모니불은 연등불로부터 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장차 부처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리라 라고 인정하심이 바로 법을 얻은 것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꽃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뒤에 다시 1아승지겁이 지나서

인도 카빌라 왕국에 한 왕자로 태어났는데 이름이 고오타마 싯다르타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17세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태자비 이름이 '야쇼다라'입니다.

예쁜 이름이죠? 야쇼다라.....

그리고 29세에 라훌라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이 때에 출가를 결심하고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분이 바로 석가모니불입니다.

석가는 성씨이고 모니는 성장했을 때 이름입니다.

원어로는 '샤카모니' 라고도 발음합니다.

그런데 당시 야쇼다라는 과거의 구리선녀였고.... 꽃을 팔던......

결혼하여서도 전생의 약속대로 출가를 막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함부러 약속하지 마세요. 나중에 그대로 됩니다.

이 인연으로 절에서 누가 결혼할 때는 반드시 꽃을 7송이 준비해서 식장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풍속이 생겼습니다 .

이것을 꽃으로 맺어졌다 하여 화혼식(華婚式)이라고 해요.

화(華)자도 꽃화자입니다. 花는 꽃이 하나가 있을 때 이 자를 쓰고요.

꽃이 여러 개일 때는 華자를 씁니다. 화려할 화.......

남자는 5송이, 여자는 2송이를 준비하였다가 주례스님에게 드리면 주례는 부처님께 올립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시작합니다. 절에서.혹은 불자가 결혼하는 풍속입니다.

수보리야, 바로 이 연등불 때에 내가 연등불부처님께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수기를 얻은 것이 있느냐 라는 질문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여야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이겠어요?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 회상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

네, 수보리는 제대로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골수사상입니다.

분명히 연등불에게 법을 얻은 바가 있건만 부처님이나 제자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허망한 몸뚱이가 꿈을 꾸는 것과 같고 꿈 속의 일이 사실일 수가 없으므로.

또 불자라면 무엇을 얻어도 절대 얻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므로.

깨달아도 깨달은 것이 없고. 알아도 안 것이 없으므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게 나쁜 소리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누가 욕을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잡아먹으려는 듯이 길길이 날 뛰지만,

내가 없는데 도대체 누가 속상하고 기분이 나쁘겠어요?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무심해야 하고, 전혀 반응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욕을 들어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라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괴로워집니다.

깨달음도 그래요. 깨달았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깨달은 것이 아니지만,

혹 누가 깨닫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쬐끔이라도 일어나면 그때부터 불행 시작이라고 알면 되요.

깨달아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누가 먹으라고 쌀 한 되박 가져다 주는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 뭘 말 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여 한심하고, 답답하고, 게다가 년륜도 있고 좀 아는 자라면

오히려 무시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므로 내가 깨달았노라 했다가는 본전도 못찾아요.

그러니까 평상시와 똑같이 일하고 돈 벌다가 때가 되면 누구에겐가 가리켜주고,,,,,

가리켜 줄 사람이 없으면 평생 고요하게 행복하게 살다가 가면 되지....

스님들 처럼 꼭 크게 되어서 사방에 이름이 나야 제대로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뭘 알아도 절대 안다고 말하지 말아요.

부처님의 사상에 위배됩니다.

항상 조심스럽게 하고. 겸손하게 말해야 합니다.

아는 것을 자랑 할 것도 없고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수보리는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그때에 전혀 "무엇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조 법연스님이 산에서 수행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수행했는지

날아다니는 새가 먹을 것을 가져오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공양을 바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어떤 스님이 지나면서 가만히 보니까 열심히 닦기는 닦는데

도를 알지는 못하고 있으므로 안타까워서 가서 알려주었습니다.

말 몇마디를 듣고 크게 깨달았는데, 그 후로는 이상하게 아무도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아요.

이것 유명한 화두입니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 때는 먹을 것이 풍부했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수행했는데.

도를 깨닫고는 궁핍해졌을까요? 화두니까 풀어봐요.

그 뒤로 산을 내려와서 어느 절에서 있는데 원오스님을 만나 그 그릇이 좋음을 간파했어요.

원오스님이 찾아가서 그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공부한 것을 내놓아 보거라 하였어요.

다 마땅치 않았는데 원오스님은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말했어요.

'발밑을 보십시오' 라는 말인데 발밑은 어디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러자 법연스님이 내 법이 네게서 멸망하겠구나. 하고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내 법이 네게서 멸망하겠구나' 하는 내용이 바로 이 금강경과 통하는 내용입니다.

선사들은 인정을 이렇게 합니다. 내법이 네게서 흥하겠구나 하면.

그것은 선사도 아니고 남에게 욕만 먹는 돌팔이 입니다.

그 뒤로 원오스님은 법연스님 뒤를 이었습니다.

스승의 말도 깨우치기 위하여 부득이 있는 것이지 거기에 진짜 무슨 도리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러니까 스승의 말을 자꾸 들먹거리고 하는 사람은 스승의 뜻에 안맞아요.

스승의 말도 없에고 불교를 전혀 세우지 않아야 제대로 스승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내 법을 망하게 하겠구나' 라고 말한 것은 '네가 내 법을 제대로 펴겠구나' 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한 것인데, 이 말뜻을 아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선공부를 안하면 몰라요.

지금 수보리도 부처님의 얻은 바 법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속으로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음~ 수보리 정도는 되어야 해'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더이상 이의를 달지 않고 아무 말도 안하셨어요.

묵언은 긍정이죠. 그래서 다음 말로 넘어갑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장엄은 아름답게 가꾼다는 뜻입니다.

국토에 꽃을 심고 길을 내고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를 들려주고

길을 묻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해주고 등등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살은 실제로 봉사하면서 수행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국토의 이름다움을 갈망해요. 그래서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금 보살이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데.......

저 사람이 정말로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네, 과연 수보리죠? 스승의 뜻을 이렇게 잘 아는 제자가 있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입니다.

이 법도 장인과 같아요. 알죠? 장인.....도자기 장인, 칠보장장인,,,,,

마음을 다스리는데 제일인 장인라는 말이어요.

이것을 부처님은 조어장부라고 했어요.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마음을 잘 다스리려면 이러 이러한 방법이 있는데 이 길로 가면 틀림없이 인생이 행복해지고

좋아진다고 가르쳐주는 장인이죠. 선사는......

그런데 선사가 나중에 제자가 없으면 참 외로워집니다.

이 문중에서는 그래도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자가 제자여요.

눈만 끔쩍여도 알아채고,,,,,팔다리를 움직이면 벌써 어디로 가는지 아는 제자가 있다면 평생 제자이면서 의지처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똑똑한 제자를 갖기 원합니다.

세속에서는 부인이 있고 자식이 있으나 이 문 중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가 참 진하죠.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부처님의 속을 아는 제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10명의 걸출한 제자가 있었고, 1,200 여명이나 되는 아라한들이 있었으니

감히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다복한 분입니다.

선사 열전을 보면 단 한 명의 제자도 만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많은데 말입니다.

수보리는 보살이 버젖이 지금 국토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데도

한사코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 다만 '장엄' 이라는 이름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수보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보살이 장엄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항상 말했죠? 불자들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이런 차원으로이해 해야 해요.

지금 세상은 돌아가고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바쁘게 일하거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곳이 있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시각으로는 세상은 너무 고요하고 평온하다고 말해요.

왜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바삐 움직이는 것을 바쁘다고 표현하는 것은 허망한 개념이어요.

왜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합니까? 조용하다고 표현하면 안될까요?

부처님은 시끄럽고 바쁜 것을 보고도 조용하고 한가하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특징이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한바탕 꿈인데 무엇이 바쁘겠어요?

이렇게 보기 때문에 시끄러운 속에서도 마음이 항상 고요하십니다.

그러나 말도 안하면 안되니까, 말은 통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람이 갖다 붙힌 이름일 뿐이라고 봅니다.

장엄, 아름다움, 얻음, 행복, 볼행, 더러움, 깨끗함, 부자, 가난....등등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다만 명칭일뿐, 하나도 진실은 없는 것으로 생각입니다.

남자들은 아마 꿈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 것입니다.

나이 40세 전에는 가끔 몽정을 해요.

여러 이유로 하겠으나 어떤 때는 정말 여인과 성적인 접촉을 하고 있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 꿈이 너무 생시와 같아요.

어떤 때는 느낌까지 생시와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막 클라이막스에 오르려는 그 순간. 그때는 꿈을 깹니다.

그러니까 막상 중요한 순간은 꿈이 아님을 알면서 깨면서 몽정을 합니다.

참 허망해요. 사실도 아닌데 꿈이 사실처럼 느껴지다니. 인생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중에는 제가 아무리 인생은 꿈이야.....해도 잘 믿겨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꾸 부처님 공부하고 진실을 알아가면서 인생은 하나의 '언어의 뜻' 이라는

허망한 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될 것입니다.

원래 더러움은 없는 것인데 더러움을 세우고 그것에 위배되면 칼을 들고 설쳐대잖아요.

명예도 본래 없는 것인데 허망하게 세우고

그 명예를 쫓기 위하여 괴로워하고 원수 맺고...

무엇인가 성취되면 스스로 높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고요한 중에 문득 한 생각 일어나 이렇게 허망한 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인생이 꿈이 아니겠습니까?

이 공부 오래하면 어느날 저절로 세상이 정말 꿈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진즉에 깨달은 부처님의 눈에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세상은 하나의 명자(명칭)만 있을 뿐,,,,,,,,,,!!

실제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수보리가 이렇게 잘 대답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흡족해하시면서 다음말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네, 부처님은 수보리가 알고 있는 것에는 긍정하므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렇다, 수보리야, 그러니까 모든 보살마하살도 마땅히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내어라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정한 마음'이 중요한 말입니다.

무엇이 청정한가? 설사 국토를 아름답게 꾸미는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하고 있다라든지, 했다라는 생각이 없는 마음이 바로 청정함이라는 것입니다.

청청함은 깨끗함이어요. 흔히 보면,저 낙도나 깊은 산속 같은 데에 살면서

세상 일을 모르고 사는 사람을 깨끗하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틀린 표현입니다.

그것은 모르는 것이지 청정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하고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다른 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부터 700년전에 벌써 독신으로 산다고 깨끗하고,

결혼하고 세속에 사는 사람은 더럽다 라는 생각이 얼마나 유치하고 낮은 생각인가

하는 것을 부처님 말씀을 통하여 알았어요.

누가 어떻게 살든,결혼하여 살든,똥지게를 지는 직업을 가졌다 하여도

그 마음이 분별이 없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깨끗함이지만

신선처럼 사람을 피하여 산 속에 살고 독신으로 산다고 절대 청정한 것이 아님을 알았어요.

그렇게 살아도 마음이 망상이 많고, 번뇌가 많고 욕심이 많으면.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분노라도 일어나면 그것이 더러움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청정에 대한 개념 정의는 대품반야경에서도 잘 나와있어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고 생각해야 그것이 바로 청정이다' 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700년 전에 스님도 결혼하는 법을 만들어 지금 일본 불교의 80%는 스님도 장가를 갑니다.

그 법이 일제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도 장가가는 스님들이 있는데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직도 일반 사람들이나 스님들이나 불자들이나

스님이 장가가면 갑자기 콱 더러워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아는 것이 마치 불교인양 하고,자기가 아는 것이 바른 것이라 생각해요.

스스로 한 생각 세워서 똥을 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누가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독신으로 살든, 장가를 가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한 생각도 안 일어나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 청정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 껍데기로 사람을 농락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하셨어요. 그런 보살과 같은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라 라고,,

그런 보살이란 보통 사람이어요. 보살은 스님이 아닙니다. 결혼한 속인이어요.

그래도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 다음 가는 보살이 되었고....

이들이 오늘날 불자들이 대부분 의지하는 보살입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같은 분들이지요.

모두 머리를 길렀어요. 속인이기 땜에....그래서 관(모자)을 섰고.....

당당히 부처님 옆 자리에 앉아 일반 불자들에게 귀의예배를 받는 성인으로 대접받습니다.

이런 보살들처럼 외형이 아닌 내부가 청정해야 참 불자이고 참 사람입니다.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히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이 마음을 써야 할 바를 계속 설하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에 보살은 이 국토를 장엄한다 하여도

장엄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하였고

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청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좋은 일을 하고도 했다는 생각이 없는 마음 현재 하고 있어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는 마음

이것이 청정이라고 했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나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더러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해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것이 원래 깨끗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나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일어난 그것이 바로 더러움인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지요.

그런데 평상시 말은 다 무심에서 나온 말이라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간다, 온다, 밥 먹어라, 학교에 가라, 잘 다녀오세요,,,,,등등

일상사 필요한 말은 그 자체가 무심입니다.

그러나 높다, 낮다, 옳다, 그르다, 더럽다 깨끗하다, 부자다, 가난하다 등등

은 다 더러운 말입니다. 고요한 마음에서 파문을 일으킨 말입니다.

저기 높은 사람이 오고 있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야! 저기 깨끗한 도인이 지나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여도 그 사람 역시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야! 이 더러운 놈아.하고 소리를 친다고 하여도 역시 말하는 자 역시 더러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더럽고 깨끗함은 없는데.스스로 한생각 더럽다는 생각을 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낸 사람이 오히려 청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물질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면 안됩니다.

좋은 집에 살고 있다, 좋은 차를 끌고 다닌다, 좋은 옷을 입었다.

이렇게 물질에 집착하면 아직 존재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허망한 것입니다. 아침 이슬과 같아요.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언젠가 허망한 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색은 곧 공이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시간이 지나서 공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현재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곧 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중에 '관법'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관(觀)이란 마음으로 본다는 말인데

어떤 것을 외적인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내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보되 대부분 사람들은 그 외적인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아, 참 이쁘다! 하고 스스로 냄새를 풍깁니다.

그러나 진실은 정말 이쁠까요?

수행자는 그 사람 속을 들여다 봅니다.

우선은 피부 속을 봐요. 마음으로 봅니다.

그러면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는 살덩이만 보일 것입니다.

그 살을 뚫고 들여다 보면 창자 속이 나오는데 음식물이 쉬어서 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음식물은 녹아서 마치 오물통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더럽고 축축한 것으로 꽉 차 있어요.

뿐만 아니라, 비장(취장)을 들여다 보면 독한 액체가 흐르고 있고.....

대장을 들여다 보면 찌꺼기 들이 미쳐 나가지 못하여 냄새나는 오물이 되어 막혀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머리속이나 발, 손 들을 들여다 보고.....

나중에는 그 뼈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이 없어지고 뼈만 남아서 앙상한 것이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법이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내부를 보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자꾸 보다보면 나중에 사람을 보아도 외부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보게 되어요.

그러니 허망한 것이 인간이고 더러운 오물로 꽉 차있는 인간이요,

뼈만 앙상한 인간으로 보이게 되요.

이렇게 보이면 다음으로 뼈속을 들여다 봅니다.

뼈조차도 부서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공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다가 나중에는 공으로 돌리는 수행을 백일간 하면 참 좋습니다.

이것이 관법입니다.

나중에는 사람의 몸뚱이에 현혹되지 않아요.

지나치게 예쁜 것 좋아하는 사람은 이 관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아직 미혼들은 특히 해두어야 해요. 그래서 얼굴 보지 않고 마음을 보고 결혼하도록 해야 합니다.

허망한 몸뚱이, 냄새나는 몸뚱이인데 거기다가 겉만 요란하게 치장하면 무얼합니까?

그것은 마치 얼은 똥으로 깍은 인형에다 좋은 옷을 입혀놓은 것과 같아요.

똥깍인형에다 옷을 입혀놓으면 의미가 있어요?

똥깍인형에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놓는다고 냄새가 안나겠어요?

마찬가지로 사람이 분별심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 놓아 보아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입에서 냄새만 날뿐입니다.

옛날 큰 스님들은 사람을 제분기(製糞機)로 보았어요.

즉 똥만드는 기계라는 말입니다.

입으로 음식을 넣으면 하루종일 몸이 하는 일은 똥만드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누구나 다 똥깍인형이요, 제분기인데 어찌 이 몸뚱이가 위대하고 좋은 것이라고 집착하겠어요.

이 몸은 적당히 춥지 않게 입으면 되고 남에게 실례되지 않으면 되지

몸에다 크게 치장할 가치는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물질적인 것에 집착을 떠나야 보살입니다.

양나라 무제가 불교의 귀의하여 수많은 절과 법당과 불상을 조성했습니다.

기록에 수백건에 달한다고 하였는데 중국 역사상 절과 불상 짓는데

그렇게 열성적으로 헌신한 왕이 없었어요.

나중에는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왕궁에 돌아가지 않아요.

신하들이 자꾸 절에 찾아와서....결재를 맞고....왕궁으로 돌아가자고 하여도 안갑니다.

나중에 하도 간청하면 나를 돈을 주고 사가라고 하여 신하들이 품삵을 주지스님이게 주고 왕을 모셔갔어요.

그런 왕이 하루는 달마라는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제가 이와같이 수많은 불사를 하였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무無!" 라고 외쳤어요.

그러자 왕이 얼굴 색을 바꾸며, 아니 경에는 수없는 복이 된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무냐고 반문하자. 더이상 아무말도 않고 산 속으로 떠나가버렸습니다.

아직 중국은 불법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구나 생각하고

9년을 굴 속에서 참선하면서 지냈는데 하루는 혜가라는 청년이 와서 불법을 묻기에

"이 법은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만 전해줄 수있다. 네가 증표를 바쳐라" 하자

두 말 않고 팔을 끊어 바쳤습니다. 이것을 보고 제자로 받아주어 나중에 법을 전했으니

중국은 이 선불교를 얻기 위하여 자기 팔을 끊어바쳐서 산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것이기 때문에 고귀하고 아름답고....깊어서 남에게 함부로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했다는 한 생각, 이것이 바로 물질에 집착한 생각입니다.

아무리 했어도 한 것이 없는 줄 알아야 깨끗하고 큰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각종 지식에도 마음이 머무르면 병이 됩니다.

이런 것에 머무르면 중생이라 하고 세상이 시끄러워집니다.

너 했니,,,안했니,,,하고 싸우고,,,,잘했다 못했다 싸우고,,,,,,

모두 허망한 것에 사로잡혀 헤매는 것일 뿐입니다.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의 백미라고 하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여기가 가장 아름답다고 모두 한결같이 찬탄을 아끼지 않고 노래를 불렀어요.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써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

거친 옷을 (색:물질)을 입어도 입었다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부른다 하여도 자랑하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향기가 나더라도 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든다 하여도 자랑하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마음을 낼 것이며

아름다운 천을 짜는 직물 박사라고 하여도 박사라는 생각을 내지 말고 마음을 쓸 것이며

수많은 지식(法)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안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것이 바로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유명한 금강경 구절입니다.

금강경은 기본적으로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하였어요. 집착하지 마라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6진이 이 세상에 없을 수는 없어요.

그러므로 내가 없엘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멀리 산으로 피하거나 접촉을 꺼려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속에 살되 '머물지 말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묘미입니다.

도교는 도피하여 산으로 들어가는 종교이지만 불교는 더 깊이 마을 속으로 들어가되 물들지 말라는

멧세지가 담겨있어요. 어떻게 물들지 않는가? 초월하라.

어떻게 초월하는가? 6진 속에 있되 마음이 머물지 말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에 육조혜능스님도 깨달았고, 많은 선사들도 여기서 다 깨달았어요.

6진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고 6진 속에 있되 마음이 머물지 마라.

이것이 불교의 도의 극치점인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입니다.

여기서 깊이 깨달으세요. 그 어디에고 머물지 않으면 공부 끝입니다. 그대가 바로 붓다입니다.

몸이 이 세상에 있되 마음은 머물지 않는다면 그대가 바로 청정한 붓다요, 깨달은 자입니다.

그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나, 개념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면 당신은 평안한 성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큰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불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일하고, 쉬고,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고,

자기의 능력대로 과학자는 미래를 연구하고, 정치인은 정치를 하고, 선생님은 가르치되.

자연스럽게 살아가되..항상 무심속에서 할 것..

마치 꿀벌처럼,,,,,,,여왕벌처럼,,,,,,,,군사벌처럼,,,,,,,,

자기의 직분에 충실할 뿐,,,,,,,,,생각은 항상 비울 것,,,,,,,,

비우다: 별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몸이 큰 수미산 같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非身)을 큰 몸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

여기서 부처님의 화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크다 하셨다면 그것은 큰 것은 원래 없지만 다만 말하기를 크다라고 하실 뿐입니다.

만약 크다는 말도 안한다면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하시면서 어째서 여기서는 크다고 하셨나 오해하면 안됩니다.

부처님의 내부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없어요. 그러나 대화를 위하여 크다고 하셨습니다.

저 큰 수미산은 크다고 해야 말이 통할 것이 아닙니까.

큰 것이 없다고 크다는 말도 안해야 한다면 그 어떤 말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불교의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크다고 하면 말이 통하자면 큰 것이지 실제로는 큰 것이 없는 줄로 알아야 합니다.

9. 一相無相分 (일상무상분)

 

須菩堤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

수보리 어의운하 수타원 능작시념 아득수타원과부.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타원 명위

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須菩堤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

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타원. 수보리 어의운하 사타함 능작시념 아득사타함

果不. 須菩堤 言 不也世尊. 何以故 斯陀含名 一往來 是名斯陀含. 須菩堤, 於意云 何 阿那含

과부. 수보리 언 불야세존. 하이고 사타함명 일왕래 시명사타함. 수보리, 어의운 하 아나함

能作是念 我得阿那含 果不. 須菩堤言 不也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

능작시념 아득아나함 과부. 수보리언 불야세존. 하이고, 아나함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명

阿那含. 須菩堤, 於意云何. 阿羅漢能作 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

아나함.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능작 시념 아득아라한도부.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실무유

法 名阿羅漢. 世尊 阿羅漢 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著 我人衆 生壽者. 世尊, 佛說我得 無諍

법 명아라한. 세존 아라한 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즉위저 아인중 생수자. 세존, 불설아득 무쟁

三昧 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 作是念

삼매 인중 최위제일 시제일이욕아라한. 세존 아부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세존, 아약 작시념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佛說 須菩堤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堤 實無所行而名須菩 堤是樂阿蘭那行.

아득아라한도 세존 즉불설 수보리 시요아란나행자 이수보리 실무소행이명수보 리시요아란나행.

 

어떠한 집착도 용납할 수 없다.

 "수보리야,

수다원이 '내가 수다원 경지를 얻었다'고 하면 수다원이 돼서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이란 것은 '인제 공부 시작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러 들어간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공부 시작한다는 생각은 형상이든지 소리든지 냄새든지 맛이든지 부드러운 것이든지, 이런것들에 집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수다원입니다. "

"수보리야,

사다함이 '내가 사다함 경지를 얻었다'고 하면 사다함이 돼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이란 것은 '몸뚱이를 한번 받는다'는 말이나, 실제로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사다함입니다. "

"수보리야, 아나함이 '내가 아나함 경지를 얻었다'고 하면 아나함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나함이란 '다시 오지 않는다'함인데 실제로 다시 오지 않는다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름이 아나함입니다"

 "수보리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면,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이란 것은 실로 무슨 생각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아라한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다' 그러면 얻은 내가 있고 얻지 못한 남이 있고, 알지 못한 중생이 있고 경험이 있다는 수자가 있을 것이니까, 이것은 그냥 육체에 대한 집착심이 그대로 있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깊은 삼매를 얻어서 사람 가운데 으뜸이다'라고 하신다면, 이것이 욕심이 없는 아라한 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내가 '내가 아라한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아마 부처님께서 날보고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보리는 실제로 그런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9.하나의 상도 없어야 함

수보리야 어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축에 든다는 뜻으로 일컬을 뿐이지 실은 들어간 바 없기 때문입니다.

색 성 향 미 촉 법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을 일컬어 수다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문 4과가 나옵니다. 성문 4과란 4단계의 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바로 4단계의 성인입니다.

그 중에서 수다원이 성인 초입에 들어간 사람이고,

아라한이 최고의 성인인데 바로 부처님의 경지와 같습니다.

지혜는 부처님과 같은데, 복이 달라서.... 복이 충분하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아라한 이라고 합니다.

보통 공자님이나, 예수님을 아라한의 단계에 들어갔다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역대 선사들도.....

지금 수다원을 설명하고 있는데 수다원은 색(물질)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소리에도 유혹되지 않으므로 각종 소리 때문에 괴롭지 않고........

향에도 유혹되지 않으므로 각종 향기 때문에 좋았다 싫었다 하지 않아요.

미각에도 유혹되지 않으므로 맛 때문에 짜증내거나 싫어하거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고요해요.......

촉감에 유혹되지 않으므로 촉감으로 인한 괴로움이 없습니다. 무엇을 입어도 고요해요......

법(지식)에 유혹되지 않으므로 누가 아무리 잘난 채 해도 무시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아요.

다 허망하다고 보지요......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요...

그러니까 수다원은 색성향미촉법에 유혹되지 않는 단계라고 합니다.

대단하지요. 그러니까 성인이라고 해요.

여러분도 색성향미촉법에 유혹되지 않으면 수다원과에 이른 것입니다.

눈이 오는데 갑자기 센치해지고.....여우털 입은 사람이 지나가면....

갑자기 나도 입고 싶어지면 꽝!!... 노! 수다원....

그런데 한 가지 흠이 있어요. 수다원에 들어가면 처음에 말이 많아져요.

그래서 청산유수처럼 줄줄 나와요. 변재를 얻어서 낮이고 밤이고 말하려고 해요.

가르키려고 하고.....돈도 안되는데.....못말려....

그래서 수다장이라고 합니다. 수다장이 라는 말 여기서 나왔어요. 명심....외우기 쉽죠?

그런데 수다원을 얻은 사람이 만약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면 절대 수다원을 못얻은 것입니다.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어야 진정한 수다원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냐?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다시 온다는 뜻을 일컬음이나

실로 가고 오는 바가 없으며 다만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일컬을 뿐입니다.

사다함은 한번 갔다 오는 자라는 뜻인데

수다원의 경지를 말이 줄어 들고 매사 신중해져도 한 번은 실수를 합니다.

그러니까 성인이라 해도 한 번은 실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는 수가 있고,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해도 한번 살짝 망상의 세계에 빠졌다가 다시 되돌아옵니다.

만약 어려분이 2시간을 참선해서 단 한번만 살짝 1초간 망상이 있었으면 사다함의 경지입니다.

비록 한번 실수를 하지만 대단한 경지예요. 이렇게 실수하면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아요.

그래도 성인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이렇게 자기를 맘대로 되어야 성인이라해요.

말만 잘하면 절대 성인이 아님.........선생일 수는 있어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다함도 만약 내가 사다함을 얻었다는 생각이 쬐끔이라도 있으면 사다함이 아닙니다.

이런 경지는 돈을 주고라도 사야한다고 외우세요. 돈주고 사다함 이렇게...........

수보리야 !

또 어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그런 생각을 능히 하겠느냐?

성문 4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문이란 성인라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성인도 4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순서인데 이중에서 수다원이 성인의 초입에 들어간 사람이고

아라한은 성인의 마지막 단계로서 비로서 마음 공부가 끝난 사람입니다.

중간에 사다함, 아나함도 다 성인이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약간씩 내부의 문제가 있는 성인들입니다.

즉, 사다함은 한번 정도 실수를 하는 경지라는 말인데, 이 말은 색성향미촉법에 유혹되지는 않으나

아직 무의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여자기도 모르게 미미한 실수를 범하고 마는 경지입니다.

그러나 이 경지도 대단하기 때문에 가히 성인이 아니면 그 실수를 집어낼 수 없습니다.

지금 하려고 하는 아나함의 경지는 다시는 중생계에 떨어지지 않는 경지인데 절대 실수가 없고

글자 그대로 무심 그 자체가 되어서 누가 뭐라고 하여도....

곁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도 놀라지 않는 성인의 경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나도, 돈이 없어도, 비행기에 탓는데 비행기가 고장나서 막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 찰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입니다.

가히 본심 그 자체가 된 경지이고, 초목과 같고, 흘러가는 물과 같고,

들판에 피어있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경지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부처의 경지에서 보면 아직 도에 근접하지 못한 경지입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본심 그 자체가 되었으면 이번에는 무한한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즉,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단계에 들어가 중생이 아프다 하면 받아주기도 하고,

잘못한 제자가 있으면 야단도 칠 줄 알아야 하고

임제스님이나 덕산 스님처럼 생전 처음 보는 수행자들에게도

소리를 지르고 봉을 날려서 깨우치게 하려는 것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나무와 같고 돌과 같이 매사 무덤덤하게 살아가면 아직 정(定)에 떨어진 단계입니다.

누가 절을 지으려 하면....절 지어서 뭣해 하고 부정적이고,

누가 설법하면 다 쓸데없는 짓이야 본래 공인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하거나,

인생을 사는데 매사 부정적이라.... 창조적이고 생동적인 삶 그 자체가 되지 못한 단계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창조적으로 살기 위한 방편입니다.

우리의 몸은 피가 돌고 있어요. 이 몸은 한 날 한시도 멈추지 않고 역동적으로 흘러가 일하고 있어요.

만약 피가 멈추면 죽음입니다.

살아있는 순간까지 피가 돌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순간까지 일을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하는 것은 잘 움직이기 위한 것이지....나무처럼 죽음처럼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숙명적으로 이 몸을 가지고 있으면 움직여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도 활동적이어야 해요. 부처님도 45년간 쉬지 않고 설법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고요하게....몸은 무한히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이것이 부처님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입니다.

그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이 금강경을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금강경에서 진리를 깨닫고 삶을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라 라는 외침입니다.

수보리가 다시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오나

실로 오지 아니 함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지 않는다는 말은 사바세계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제 사다함의 간혹 실수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다시는 실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중생계에 대하여 전혀 흥미도 없고....관심가질 일도 없는 단계라

사바세계=중생계=현실의 세계

다시는 빠지지 않는다는 뜻의 아나함이라고 합니다.

외울 때 '니 그런 단계를 아나?....“아나함” 이렇게 외우세요

그런데 아나함도 만약에 마음에서 내가 아나함을 얻었다 하면 얻은 것이 아닙니다.

원래 올 것도 없으므로 오지 않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얻었다 하겠어요.

금강경은 철저하게 상을 부수는 경이기 때문에 마음에 무엇이라도 세우면 안됨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인 4단계... 누구라도 내가 이것을 얻었다 라는 상이 있으면

절대 얻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어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능히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법이 없음을 깨달은 이를 아라한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은 고요를 얻은 자들 중에 으뜸인 자요, 성인의 단계 중에서도 마지막 단계입니다.

성인으로서 조그마한 흠도 없어요.

이 경지가 바로 흔히 깨달음을 얻은 단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중에 깨달은 사람이 있으면 바로 이 단계입니다. 아라한이어요.

역대 선사도 아라한이라고 말하고....부처님의 제자중에는 1,200명의 아라한이 있었다 하였으니,

깨달은 제자가 그렇게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은 수행하다가 결국 '법은 없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단계입니다.

정해진 법은 없다, 특별히 법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법이라 단지 중생이 병이 들었을 때 갖다가 쓰면 될뿐이다.

즉 사용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살아가야 하고...부인하고 말하고....자식하고 말하고....

강도도 만나고,,,,사깃꾼도 만납니다.

그럴때 어떻게 마음을 쓸 것이가를 잘아는 단계가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맹꽁이 단계가 아닙니다. 자유자재하게 마음을 쓰지요.

선사들을 일명 본분작가라고 합니다.

본분에 합당한 말을 해주는데 아주 독특하고 창조적이어요. 그래서 본분작가라고 하는데 ....

취모검(털로 만든 검) 하나로도 사람을 죽였다가 살렸다가를 맘대로 하고

사람의 혼을 빼놓기도 하고....앉은 자리에서 중생을 부처로 만들기도 하는 가히 신출귀몰한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분 작가는 모방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무한하듯이 답도 무한하고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듯이 답도 다 달라야 합니다.

선지식을 찾아갖을 때 이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답이 이미 책에 있는 것은 답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게다가 스승이 말한 것을 따라하는 것은 더욱 안되요.

선은 모방을 싫어해요. 독창적인 것을 선호해요.

선지식은 래방자의 답을 들어보고 이미 나와 있는 것을 말하면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두번 세번 반복해서 다른 것을 물어 보는 것입니다.

정말로 알고 있나 확인하기 위하여 다른 것을 대는 것이지요.

칠불암 아자방 설화에 보면 하루는 군수가 스님들 참선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선방을 들여다 보았는데

어떤 스님은 천장을 보고 입을 벌리고 졸고 있고, 어떤 스님은 고개를 푹 수구리고 졸고 있고

어떤 스님은 좌우로 몸을 흔들고 졸고 있어요. 또 어떤 스님은 졸면서 방귀를 붕붕 끼고 있어요.

이것을 보고 실망하여 과연 칠불암에 도인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돌아가서 문제를 냈어요.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서너바퀴 돌 수있는 사람을 보내시오...."

참 대단한 질문입니다. 살아있는 말을 타라고 해도 못 탈턴데....

목마를 타라고 했으니 이것을 누가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12세 사미가 가서 문제를 풀고 목마를 타고 돌아와서 화를 면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12세 사미가 그때 군수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기록에 빠졌어요.

군수와 사람들이 모여있는데서 뭐라고 한 마디 힘차게 하고 목마의 엉덩이를 때리니까

목마가 달려서 마당을 돌고 칠불암쪽으로 날아갔다는 것인데......

여기 그때 뭐라고 하였는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

오래 전에 제가 그 문제를 풀은 적이 있었는데

"동헌 마당은 1리로다 " 입니다. 이것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답이어요.

그야말로 창조적이지요

그런데 아는 사람이 보면 틀림없이 목마를 타고 서너바퀴 도는 문제에 대한 답이 됩니다

이런 것을 본본에 맞는 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비로소 입에서 술술 나오기 시작할 때가

바로 남에게 선을 말해줄 수 있을 때라고 해요.

여러분도 목마 타는 문제 풀어보세요. 그리고 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것도 알아보세요

동자가 틀림없이 그렇게 외쳤기 때문에 목마가 살아서 달린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이라고 하여도 만약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아라한의 단계를 얻었다는 생각이 있으면

절대 아라한이 아닙니다. 이 공부는 평범해지는 공부입니다.

어떤 단계에 들어가도 평범져야 부처님의 뜻에 합당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누가 불법을 조금 알면 뭘 알았다고 자랑하고 난채를 하는데 이것이 병중에서 큰 병입니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선사들의 경지를 다 입으로 간파합니다.

누구는 어떻고....누구는 어떻해서....큰 스님인데, 누구는 어떠해서 문제가 있고.....

그런데 그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전부 상에 잡혀있어요.

어떤 스님은 8년간을 잠 안자고 수행했고....죽을 때 사리가 몇 개 나오고....

어떤 스님은 3년을 맨발로 걸어서 전국을 만행하였고....

어쩌구 저쩌구....

이런 것은 다 껍데기 상을 본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사람을 보면 안되요.

그 도의 깊이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 같아요. 인간은 평등합니다.

때문에 이 문중에서는 사람이 못하는 것을 했다고 존경하면 안되요.

그런 사람은 대한민국에 꽉 찼어요. k2에 8번 올라간 사람,

70세에 산소호흡기도 끼지 않고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간 단전호흡자 등등...

허다 못해 공부도 안하고 성공한 정주영씨, 대학도 못나오고 변호사 합격하여 대통령된 노무현씨....

꽉찼어요. 그런데 특별한 일을 했다고 그것이 무슨 그리 도인 대접받을 일입니까?

설사 도를 깨달았다 하여도 평범하지 않으면 그것을 절대 도인이 아닙니다.

마음에 전혀 그런 생각이 없어야 아라한이고....

곧 아상 인상 중생 수자상이 없는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깨달은 자도 하물며 깨달았다는 상이 없는데

깨닫지 못한 우리가 어찌 무엇을 내세울 것이 있겠어요.

항상 누구를 만나도 그를 부처로 존중하고, 예를 다할 것이며, 사랑을 잃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도로 당신을 부처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행을 할 지언정 어찌 반딧불같은 무슨 앎을 내세워 거만하고 자존심을 세웁니까?

아라한은 자기가 깨달은 법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서 깨달았다고 세우지 않아요.

원래 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 말도 지금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부처님 공부를 할수록 이 말이 실감나는 말이 될 것입니다.

법은 없다......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라한은 고요중에 고요를 얻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도 취할 것이 없고 오히려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 이 공부인데....

버릴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 버려져있음을 깨달으면

바로 더이상 버리는 공부도 필요 없고 바로 고요한 아라한이 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순전히 깨달음 이것 하나로 성취는 것이지 닦아서 되는 단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욕망을 떠난 아라한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라고 는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라한은 욕망을 떠난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마음에서 고요를 얻었으니 당연히 욕망을 떠난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선가에서는 참선만 하면 욕망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참선도 중요하나 깨달음이 더 중요합니다.

불교는 사람의 각성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닦아서 사람을 바꾸려고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은 즉시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깨달음을 목적으로 설법합니다.

여기 금경경도 깨달음을 목적으로 설해졌어요.

한마디 한 마디가 전부 깨달음을 연결될 수 있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옛 스님들도 다 금강경에서 깨닫고 부처님 제자들도 다 금강경에서 깨달았는데

왜 오늘날 금강경을 보는 사람들은 많은데 깨달은 자는 드믄가?

그것은 마음이 진실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간절히 들어서 그 뜻을 파악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문자를 외우는 것을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 뜻이 가슴에 넘쳐나야 합니다.

가슴에 넘쳐난다는 말은 감동해야 한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식견이 있는 사람은

제가 말해도 자꾸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요.

단순하고 간절하게 그리고 믿음으로 들어야 하는데 자꾸 반발이 나요.

그러면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경은 초심자를 우대해요.

처음 듣는 사람은 바로 알아듣기 때문에 들은 대로 그런 줄 알아요.

그래서 금강경 강의나 선서강의는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 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다 버리고 백지가 되어서 들은 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아란나행은 고요함을 즐기고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아라한의 행을 아란나 행이라고 말해요.

고요야말로 기쁨 중에 기쁨이고, 행복 중에 핼복입니다.

마음이 고요할 것을 최상의 행복이라고 보았어요. 저 하늘처럼......

바람 한 점없는 고요한 호수를 보세요. 얼마나 아름 답습니까?

만약 마음이 어떤 기쁨으로 움직이고 있으면 호수를 아름답게 하려고 빨간 물감을 타는 것과 같아요.

비록 처음에는 빨간 색이 아름답게 보일지 몰라도 이 인위적인 것은 절대 아름다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색이 젤 좋아요.

그래서 기쁨도 결코 행복이 되지 못하고 오직 고요만이 행복이 됩니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을 지내면서 명상해보세요. 스스로 터득해보세요.

고요가 왜 최상의 행복이 되는지......

아라한은 욕망이 끊어져 오직 고요함만 있고, 매사를 부지런히 하나 고요함을 지키고 일하므로

아라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고요를 즐기면서 일하면 아란나행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실은 수보리가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수보리야 말로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 라고 일컬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시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공부를 하고 무엇을 얻어도 조그만한

소득이라도 얻었다면 절대 얻었다는 상은 세우면 안됩니다.

기본적으로 금강경은 누가 좋은 일을 해도, 부처가 되어도, 종정이 되어도,

아라한을 얻었어도 절대 얻었다....행했다....라는 생각등을 내지 마라는 가르침입니다.

혹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해야할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있는 그대로 말해야지요. 불교를 공부해서 좋았던 점, 느꼈던 점, 그리고 깨달았던 점 등등

그렇게 말은 해도 마음은 고요해야 합니다. 말해도 고요한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상을 세우지 않는 것이어요.

또 바보처럼 가만히 있고..불교는 말해도 안되고....알아도 아는 척을 하면 안되고..

깨달아도 표내지 마라고 하여 돌처럼 살려고 하면 이것은 병이 들은 것이어요.

'돌처럼 살련다' 는 상을 세운 것이고........

항상 말하지만 불교는 상을 세우지 않아도 할 것 다 해야 합니다.

가르치고, 문자를 세우고, 일하고 돈벌고, 부장이 되어 말하고.....대통령이 되어 위엄을 보이고.....

그러나........그렇게 모든 것을 해도 마음에 전혀 내세우는 것이 없이 해야한다는 말이어요.

바로 여기에 불교의 매력이 있고 초점이 있어요.

무엇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 하되 했다는 것이 없고...

제가 이렇게 매주 화요일, 수요일 2시간씩 돈이 되지 않는 이런 일을 해도

했다라든가, 하고 있다라든가, 대단하다라든가, 봉사한다라든가..이런 생각이 없어야 해요.

만약 그런 생각을 세우면 곧 그 생각 때문에 스스로 불행져요.

여기 봉사하는 운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영자들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해야 해요.

이 공부를 잊어버리면.......무슨 일이 생겼을 때........

서운하고...섭섭하고....스님이 수고했다는 말도 한번 안하고........

메일도 한번 보내지 않고........죽어라 일만 하다가.....

조금 잘못하면.... 잘못한다고 하니까......

삐기고......섭섭해하고........안한다고 튕겨보고......하다보면 자기만 손해여요.

자기가 했다는 생각이 있어서 괴로운 것이지 아무도 자기를 괴롭힌 사람 없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입니다.

불자라면 어떤 경우에도 누구 때문이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다 자기가 부처님 말씀, 행복해지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 대로 ....고집대로 살다가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불자는 항상 자기에게 문제를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도 풀리고 남에게도 피해를 안주는 것입니다.

제8. 依法出生分 (의법출생분)

 

須菩堤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 世界 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 福德 寧爲多不. 須菩堤言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 만삼천대천 세계 칠보 이용보시 시인 소득 복덕 영위다부. 수보리언

甚多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 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

심다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설 복덕다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

四句偈等 爲他人 說 其福勝彼 何以故. 須菩堤, 一切 諸佛 及諸 不 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사구게등 위타인 설 기복승피 하이고. 수보리, 일체 제불 급제 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皆從此經出. 須菩堤, 所謂佛法者卽非佛法

개종차경출. 수보리, 소위불법자즉비불법

 

법에 의지해서 닦아라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남을 위하여 베푼다면 이 사람의 얻은 복덕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님. 부처님이 말씀하신 복덕은 자성이 밝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시복덕은 복덕성이 아니며 자성이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 내용 중에 '사구게'를 읽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명한다면 마음을 밝게 하는 복덕의 보배를 남에게 베푸는 복덕보다 많다 할 것이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이나 또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불법이라는 뜻은 마음을 밝히는 방법이라는 말이며, 만약 이 경을 읽고서 마음이 어둡다면 그것은 불법의 본 뜻이 아닐 것이니라. 그래서 불법이라고 한다면 곧 불법이 아니니라. "

 

 

8. 법에 의해서 나다.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모두 보시한다면

그 사람이 지은 공덕이 과연 많겠느냐?

삼천대천세계--해와 달이 하나씩 있는 하나의 수미산 세계가 천 개 모이면, 소천세계

소천세계가 천개 모이면 중천세계

중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대천세계 그리하여 삼천대천세계라 합니다.

그러니까 삼천대천세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입니다.

우주에 가득한 칠보로 남에게 베풀어주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공덕이 크겠어요.

수보리가 대답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래 = 부처님

자, 여기서 많다는 의미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복덕이 많다 이 말은 남에게 베풀어 주고 난 뒤에 주었다 라든지....복을 지었다 라든지....

복덕성이라는 것은 있다 라는 생각들이 있으면 그것은 복이 되지 않으므로 많다고 할 수 없어요.

그러나 복도 없고, 준 적도 없고, 줄 것도 없고, 좋은 일도 한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복덕이 많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복은 복이 아니기 때문에 많다고 말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복을 지었다 ...라고 한다면 전혀 복을 지은 것이 아니예요.

칠보는 무엇 무엇이지요?

금,은, 호박, 다이아몬드, 자거, 적주, 유리입니다. 에메랄드를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7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시에 중요한 보석 들을 누가 우주만큼을 남에게 베풀어주었어도

주었다는 생각이 있으면 복이 되지 않으나 그런 생각이 없으면 복이 많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수보리가 제대로 부처님말슴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다는 말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다만 사구게(四句偈)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준다면 그 복덕은 저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휠씬 더 크니라.

금강경의 우수성, 그리고 금강경을 전파하면 복이 되는 것을 강조한 대목입니다.

4구게는 단 4마디로 된 구절이라도 라는 뜻임다

복의 차이는 누구도 부정못하는 법칙입니다.

부처님도 전생에 수많은 복을 지었어요.

그래서 붓다가 되었고 임종시까지 박해없이 평안히 살다가 열반에 드셨어요.

설사 치열한 구도심으로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라 해도 복을 닦아야 합니다.

도인도 복이 다 달라요. 국왕은 전생복으로 일국의 주인이 되었으나

스님은 그런 복을 못지었기 때문에 평범하잖아요.

그러니가 도를 얻으면 바로 불법을 전파하는 복을 쌓아야 합니다.

얼마만한 복이 되길레 경을 전하라고 하는가?

우주에 가득한 칠보로 남에게 베풀어주고 주었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

그래서 큰 복을 지은 사람보다도 이 경을 전하는 공덕이 더 크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많이 알지 못해도 단 4마디라도 아는 것을 남에게 전해주면 큰 공덕이 되고 복이 됩니다.

흔히 깨달으면 복을 닦을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은 도인도 복을 쌓아야 복을 받아요.

부자는 전생에 복을 쌓아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깨달은 도인도 복을 짓지 못하면 단명한 수가 있어요.

물론 전생에 지은 것이지만.... 깨달은 영가스님은 39세에 죽었어요. 전생 복이 그것뿐인 것입니다.

부처님도 길가다가 까시에 찔려 발등을 뚫고 나와서 몇 개월간 고생하셨던 적이 있었고,

3개월을 말먹는 보리를 먹고 사셨던 적도 있었고....간혹 사람의 마장을 겪었어요.

최고의 복인인 부처님도 마장이 있었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남아있는 삶동안 잘 살아가려면 공부도 하고 복도 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복을 채우고 마장은 물러가고....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 부처님 법 마이 전파해서 큰 복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은 거짓말 안합니다.

전하면 ....이 법이 워낙 큰 법이고 훌륭한 법이라 반드시 복을 받게 될 것임을 다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보리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다 이 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최상의 깨달음입니다. 이 큰 깨달음과 그리고 부처님들이 다 이 금강경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을 잘 들으면 여기서 큰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인데 한 두 부처님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이 다 이것을 보고 듣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만큼 금강경이....여러분이 듣고 있는 이 경이 부처님의 사상에 정통하고

참 진리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많은 스님들이 이 금강경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고

선불교의 중간조 육조 혜능스님도 이 금강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진실한 마음으로 잘 들으시면 틀림없이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간혹 깨달음을 목표로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도 바로 밑에 나옵니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유명한 말입니다.

불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법이 특별하다고 하는 사람들,

불법이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 상에 앍매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불법은 일상사가 불법입니다. 따로 불법이 없어요.

밥 먹고, 잠자고, 걸어가고, 일하고, 말하는 것이 곧 불법이어요.

거기에 다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큰 스님 밑에서 3년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배운 것이 없어요. 부처님이 누구인지, 불법이 무엇인지, 참선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지 못하고 3년이 지나갔어요.

하루는 스님에게 따졌습니다. 스님 저 갈래요....

왜 가느냐? 3년이 지났는데 제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진리를 깨닫고 부처가 되려고 왔는데 3년간 일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 무엇이 굼금하였느냐? 이제라도 물어보아라.

무엇이 부처입니까?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니라.

즉심시불이이라는 말은 '곧 마음이 부처니라'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글자를 몰라서 언듯 들으니까 '짚신이 불'이니라로 알아들었습니다.

며칠을 지내면서 생각해보아도 참 이상했어요. 어째서 짚신이 부처라고 했을까.....?

하루는 큰스님과 풀을 메다가 확인차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스님 지난번에 하신 말씀 '짚신이 불'이라는 말이 맞습니까?

그래 맞다.

짚신=즉심을 잘못 알아들은 것

정말 이상했어요. 잘못들었나 하고 확인까지 했는데 확실히 잘못들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후로 매일 짚신을 쳐다보고 그 뜻을 알려고 애를 썼어요.

그러다 하루는 성질이 나서 불법이 뭐 이래....이따위 짚신이 부처라니.....

하고는 짚신을 휙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짚신이 바위에 맞고 퉁 튀면서 어디론가 없어지는 것을 쳐다 보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아~~

어찌 이 법문이 상승 법문이 아니더냐......하고요....

모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말속에 금강경의 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무엇이 부처인가 물었는데 짚신이 부처라고 알아들었어요.

그러면 깨닫지 말아야 하는데 짚신이 부처라는 말에 깨달았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다 배운 것인데 .....어찌 모두 말이 없습니까?

부처님은 형상에 있지 않아요.

말에도 있지 않고.....아울러 불법도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꿈 속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과 같은데 무엇이 옳고 무엇이 불법입니까?

꿈 속에서 대단하다고 해봐야 허망한 것일 뿐이잖어요.

만약 그 스님이 즉심시불,

즉 마음이 부처니라 이렇게 알아들었으면 그렇게 빨리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또 마음이라는 상을 세우고 존재에 집착했을 것이기 깨문입니다.

그러나 짚신이 부처라고 알아들었기 때문에 이상했고....

그 의심이 연속되다가 어느날 이까짓 짚신이 무슨 부처냐고 그 화두조차도 던져버렸어요.

그러니까, 스승이 말한 말씀 조차도 던져버리고.....그 짚신이 풀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데서..... 마음이 고요해진 것을 느끼고.....

참으로 아무 것도 세우지 않았을 때가 바로 무심이고....그리고 그 경지가 바로 부처의 경지구나 하고

래서 스승님이 날보고 짚신이 부처라고 했구나 하고 .....문득 깨달은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한낱 짚신과 같은 존재야.....!!

꿈과 같고.....아침 이슬과 같은 것....

이것도 던져 버릴 때 스스로 항상 밝아있는 진불(眞佛)을 찾는다.....

아아~~스승님, 감사합니다.... 하고

스승님께 달려가서 스승님, 제가 이제 부처를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짚신이 부처인 줄 알았습니다. 짚신이 저를 깨닫게 하였어요.

하니까 스승이 기가 막혀서....

엉....?? 뭐라고? 너는 어디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다니느냐? 하고 혼을 내주었어요.

큰 소리로 야단을 친 것이지요.

그때 이 스님은 또 한번 크게 깨달았어요.

뭘 깨달았어요? 채송화님?

에구.....머리야.....다 나온 것인데....복습인데....어째 모른데유~~~

이래서 시험보러 가겠어요? 뜻은 같고 글자만 달라져도 모르니....

금강경 1/4 속에 다 있는데 매주 무얼 들었남요.....?

그러니까 선문답을 갖다 대면 멍멍~~하지요...

스승님은 이 놈아, 네가 무얼 알아도 알았다는 것이 있으면 틀리는 거야 하고 야단친 것입니다.

넌 무슨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이 말이 그말입니다.

네가 조금도 뭘 알았다는 것이 있으면 틀려!! 이 멍청한 놈아.....

그때 영리한 제자라 바로 알아 듣고 다시 한번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즉 깨달음 후에 보림까지 마쳐버렸던 것입니다.

그후 이 스님은 다시는 어디 가서 아는 소리를 하지 않고

평범하게 유유낙낙하면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헤헤~~힌트를 주니까 답이 막 쏟아지고 난리나네요.....

힌트 주기 전에 알아야징....그렇게 답을 다 주었는데도 모르면 바보지용....

이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라도 마음에 세우면 그것은 불법이 아냐요....명심하세요.

어디가서 불법을 아는 소리했다간 큰 일납니다.

항상 난 모른다 해야 해요. 그래야 금강경 잘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물어보면 청산유수처럼 나와야 해요.

좍~ 설명을 해야 해요. 그리고서는 또 모른 척 해야 해요.

절대 자기를 세우면 안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지금 그러고 계시잖아요.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라는 말이 바로 그 말이어요.

일상사가 다 불법이니까 불법은 따로 없어요. 명심하세요.....

불교는 불교도 버려야 불법입니다.

임제 스님이 열반에 들 때 평상시에 마음에 드는 제자가 있었어요. 삼성스님입니다.

그 제자에게 법을 전해주려고 물었어요.

임종직전입니다.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찰라입니다. ...지금....

네가 나중에 불법을 펴려고 할 때 우리 스님이 어떤 법을 폈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느냐?

내가 가고 난다음 정법을 없어지지 않게 해라...했어요.

그러자 제자 삼성스님이

어찌 감히 큰 스님의 법을 없엘 수 있겠습니까?

이 다음에 누가 너에게 불법을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삼성스님이

" 악! " 하고 고함을 쳤어요.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나의 정법안장이 저 눈먼 나귀한테 없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오.

하고는 열반에 들고 말았어요.

자, 여러분 이 말이 삼성스님을 칭찬한 것입니까? 자기 대가 끊어짐을 안타까워한 것입니까?

분명히 금강경에 세우지 말라했는데 또 칭찬이래.얼뜨기 도인들 같느니....^^*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님, 누굴 놀리는 것입니까? "

아니 칭찬도 없고 야단도 없는데 저보고 뭘 말하는 것입니까?

절 놀리려는 것이야요? 라는 뜻...................

그러니까 곳곳에 무의식을 극복했는지 시험이 있으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에 유혹당하지 말아야 진정한 종장이고, 깨달은 자이며, 자유로운 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 말이 칭찬입니다.

삼성스님이 한 마디로

악! 하고 소리쳤을 뿐 묵묵히 있었으니

그래서 임제스님이 저 눈먼 나귀한테 내 법이 망하는 구나.

이것이 바로 맞다는 칭찬이었고. 고요하게 열반에 들은 것입니다.

바로 불법은 아무 것도 세우지 말아야 해요. 그 무엇도 세우면 꽝이요, 사도입니다.

그러니까 삼성스님은 악! 하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냄새도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악” 소리만 낸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하고 -

이것을 본 임제스님도 기뻐하면서 음! 되었다 그 정도면 .스승도 넘어간 정도라면,

그렇게 모든 것을 끊어낼 정도라면.내가 걱정하지 않고 죽어도 되겠구나 하는 것을

'너는 눈먼 나귀이다 네가 내 법을 망하게 하는구나 ' 로 표현하고 .편안하게 열반에 들은 것입니다.

죽는 그 순간도 정법을 잊지 않은 스승의 자비심입니다.

그러니까 도인들이죠. 생각이 틀리고 말이 틀려요......

아는 사람들에게는 선문답이 다 소설처럼 보입니다.

원래 이렇게 풀어버리면 안되는 것인데 이 금강경이 모든 선문답과 연관이 되어있음을

증명해주기 위하여 일부러 말한 것입니다. 선기를 한번 맛보라고....

금강경이 선문답의 골수이고, 불법의 골수이고....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넓게 보세요. 그래야 훤히 통(圓通)합니다.

7 無得無說分 (무득무설분)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 耶. 須菩堤言, 如我解佛所說義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 야.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無有定法 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 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무유정법 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 무유정법 여래가설.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비법 비비법,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얻은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수보리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설명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뜻을 제가 이해하기에는 일정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또한 일정한 법이 없는 것도 아님을 여래께서 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때에 마음 닦아 본 중생에게 그것을 일러주고,

그것을 일러주다 보니 이렇게 여러 말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시지,

실제로 어떠한 일정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법 아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상황에서 맞을 때엔 법도 되니까요.

그러기 때문에 모든 어진 사람이나 성인이 한량없는 방법으로써 차별을 내심입니다.

 

 

7.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음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무상정등정각(無相正等正覺),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얻은 깨달음이 있느냐?

그리고 내가 설한 바 법이라는 것이 정말 있느냐? 하고요.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한 뜻을 헤아리건데 일정한 법(無定法)이 없는 것을 이름지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오며, 또한 여래께서는 정한 바 없는 것을 가히 설하셨나이다.

 

금강경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의 큰 깨달음이라는 말인데 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어서....

깨달을 무엇이 있어서 그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할 수 없는 법' 을 깨달았을 뿐이며

무유정법이란 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렇다 저렇다....크다, 작다....길다....더럽다....깨끗하다....등등

단 하나라도 그것의 진실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이것이 불법이다......이것이 진리이다.....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병이 있을 때는 사용하되 이것이 영원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무유정법입니다.

 

정함이 없으라.....이것이 금강경의 또 하나의 큰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자꾸 정해요. 나는 부자다....행복하다....건강하다....나는 똑독하다....

옆집은 참 행복해.....우리는 불행해.....왜 우리는 맨난 이렇게 살아야 해....

저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 것 아냐?....

어떤 부부가 찾아왔어요. 그런데 부인이 저한테 남편을 옆에다 두고 불만을 말해요....

남편은 현재 농협은행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책보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직장 끝나면 바로 독서실로 갑니다. 그래서 12시까지 공부하다 와요.

승진시험하다가 승진하면....자격증....각종 자격증을 다 따놔요....

이것 해야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못쓰게 되면 저것 해야돼....

그런데 그것도 못쓰게 되면...이것을 해야돼 ....

그러다 보니 한번도 집에 편히 있는 날이 없어요.

애들도 크고...맨난 부인 혼자 집에서 독수공방....

아니, 결혼하면 어디 놀러도 나가고....여행도 같이 가고...

영화도 보고 아니면 집에서 같이 놀기라고 해야 하는데....

저녁에 술은 안먹는데 매일 12시에 들어와서 씻고 자기 바빠요....

그러니까 부인은 우울증....따분....운전 면허따고....검정고시 했다가.....

교리했다가 요리학원다녔다가....

혼자 춤배우러 다녔다가...나중에는 그것들도 시들해져서 불만이어요.

그런데 제가 그랫어요.

아니, 그 공부 하라고 해도 안하는 사람이 있는데 미래를 대비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이 저 사람의 길이니까....막고 싸워도 안되니까 그냥 내버려두세요....

왜 자꾸 남의 인생에 비교합니까? 세상에 그 누구도 님의 가정과 똑같은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누굴 비교합니까? 사람이 다 다르듯이 사는 것도 다르니까

다른 집의 분위기를 님의 집에다가 꼭 맞추려고 하지 말아요.

그것 시켜서 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님의 인생이요, 가정임다.....인생은 다 달라요.

남과 비교하고 그래서 우리집은 불행하다 이렇게 정하지 마세요.

언젠가 안그럴 날이 오기도 하고....

또 그것이 미래에는 오히려 칭찬할 것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냥 사세요.....

꽃이 다르지만 다 이쁘듯이 집안 사는 것도 다 다르나 불행은 아닙니다. 달리 사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참 말해주었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어요.

일단 편안하게 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집은 부인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해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남편에게도... 혼자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정하지 말고 사세요. 그냥 사세요.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부처님도 정하지 않고 항상 법을 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이해할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으며 또한 법이 아니며

그 까닭은 모든 성현은 다 무위법(無爲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무위란 '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해도 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 무위법임다

부처님이나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지만 해도 전혀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없는데 누가 했습니까?

한 자도 없고, 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현은 다 무위법을 써요.

밥먹고 있는데 누가 배고파 밥 달라하면 줘요.

그래서 겨우 얻어서 밥 먹는데 누가 또 달라해서 주었어요.

그래서 또 겨우 얻어서 먹으려고 했는데 또 누가 달래요. ...가만 보니까 이러다가 오늘 밥굶겠어요.

그러면 또 주어야겠어요? 안주어야겠어요.

주어야 합니다. 하루는 굶을 수 있어요.

그러나 3일은 곤란해요. 그런데 3일째 날, 누가 4일굶은 사람이 왔어요.

주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더 참을 수 있으면 참고 못참을 것 같으면 주지 말아야 해요.

그래야 주어도 준 것이 아니고 안주어도 안준 것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없이 해요. 오직 현실만 봐요.

도인이 가는데 불이 났어요. 막 지붕이 무너질라고 하는데 집안에서 애가 천천히 울면서 걸어나와요.

이때 달려가서 구해야 해요? 가만히 있어야 해요?

위험하면 가지 말고 구하는 것이 가능하면 달려가세요. ^^*

도인이 설사 앞에서 애가 죽어도 못가는 것을 고민이나 자책하면 안되요.

위험한데 달려가면 두 사람이 죽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도인이라고 무조건 희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 무위법을 모르면 고민해요.

도인은 무엇을 해도 했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안해도 안했다는 것이 없어요. ...

모든 것은 순리대로....살아요.....

그러니까 절이 아직 남아있고.....스님의 몸이 남아있지만 다 주어야만 한다면

절도 주어야 하고.....몸도 주어야 해요.....그러고 어떻게 불법을 펴겠어요?

여러분은 혹 도인이 애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저것이 무슨 도인이냐고 절대 뭐라 하면 안되요.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따로 더 이상의 행은 없어요. 할수 있으면 하나 못하는 것은 못합니다. 이것이 도인이어요.

역사를 보아도 도인은 할 수 있는 있는 일만했어요. 부처님도 마찬가지고요.

불가능한 것은 안했어요. 못하는 것이지요.

도인의 행은 따로 이렇게 해야한다고 정하지 마세요. 판단은 각자 부처님이 알아서 합니다.

누구의 행도 나쁘다 좋다 평가하지 마세요.

설사 내게 나쁘게 했어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이것이 무위입니다.

마음 속에서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이것이 무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은 가히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불가설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6 正信希有分 (정신희유분)

 

須菩堤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 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 菩堤 莫作是說 如來滅後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 언설장구 생실신부. 불고수 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 章句 能 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 一佛二佛三四五佛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 장구 능 생신심 이차위실 당지시인 불어 일불이불삼사오불

而種善根 已於 無量 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堤, 如來 悉知悉見

이종선근 이어 무량 천만불소 종제선근 문시장구 내지일염 생정신자.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是諸 衆生 無復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 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시제 중생 무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 무비법상.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卽爲著我人 衆生壽者, 何以故 若取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

즉위저아인 중생수자, 하이고 약취법상 즉저아인중생수자, 약취비법상 즉저아인중생수자. 시고

不應取法 不應 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設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불응취법 불응 취비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을 바로 믿고 행하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이 여래의 몸뚱이가 없어진 오백년 후에 계행을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부처님 말씀에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생각한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서 착한 마음을 닦은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천이나 만분의 부처님 계신 곳에서 모든 착한 마음을 닦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 '참 이말이 옳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그러한 중생이 이와같이 한량없는 복을 짓고, 덕을 쌓는 것을 다 아시고 다 보시느니라. 왜냐하면 그 모든 중생이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나 법이라는 생각이나 법 아니라는 생각이 모두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중생이 마음의 모양(고정된 관념)에 집착하면 곧,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 있게 된다. 만약에 법상(만유의 형상)을 취해도 역시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 있게 된다. 이러하기 때문에 법도 취하지 말 것이며, 또 법 아닌 것도 갖지 말아라(말들었으면 그대로 실행을 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이유로 여래가 항상 너희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설명한 법은 마치 강건너가는데 쓰는 뗏목이나 널조각과 같다. 그런데 마음이 밝으면 즉, 강건너 갔거든 배를 내려야 되는데, 강을 건너가고도 여전히 배를 타고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

 

6. 올바른 믿음을 희유하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먼 뒷날 많은 중생들이 이와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을 진실이라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걱정하지마라.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나 5백세가 지나가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만 있으면

능히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믿음에 대한 것이군요.

믿음! 이것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 금강경과 화엄경에서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은 어느 종교나 어느 신선한 단체나 다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신을 믿는 유일신 종교에서는 특히 강조하였던 부분입니다.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눈에 보여지거나 어떤 작용력이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믿게 하려면

이 믿음을 강조해야 할 수밖에 믿음은 어떤 것을 사실처럼 여겨지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나 적당하면 좋은 효력이 나타납니다.

반면 너무 안 믿어도 가능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불교의 깨달음은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깨달은 선사들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증거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으나 일상사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아 붓다가 된다는 사실을 약간만 믿어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수보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저 뒤에.....5백세가 지나서도 부처님의 이런 설법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던 것입니다.

5백세는 5百世인데 1世는 한 생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사람의 한 생을 60년으로 잡는다면 60*500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몇년인가요?

30000 년이네요, 먼 미래군요. 말법세계라고하지요.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도 믿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건이 있습니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계란= 부처님의 규율입니다.

남자스님=250 계

여자스님=348계

불자=5계 등 각자에 맞는 계율이 있습니다.

중요한 계율이 4계인데 모두 공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살,도,음, 망입니다.

살생, 도둑질, 사음, 망어인데

살생=생명을 죽이는것

도둑질=물건을 훔치고 거나 강도질하는 것

사음=외도

망어=거짓말, 사기, 쓸데없는 말, 악한 말

모두 '살도음망'만 외우세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지켜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을 닦는다는 것은

경을 읽거나, 보시나 봉사에 임하여 복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하니까 틀림없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마음을 다루는 종교이기 때문에

조금만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

마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 이 불법을 믿게 되어있습니다.

왜냐면 불교는 사람이 중심이고 마음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도에 들어가는 근본이고 깨달음을 일으키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만약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소리도 옳은 소리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붓다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처님말씀은 꼭 믿도록 하십시오.

스님도 아니고, 선사도 아니고, 선배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이 금강경은 다른 경보다

부처님의 사상이 그대로 압축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옛부처 많은 스님들이 이 금강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바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한 대목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선의 이치는 사실 금강경에서 나왔습니다.

때문에 금강경을 잘 읽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있고 대평안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고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진심을 가지고 들으면

보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한 말이니 거듭 말하지만

진심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보세요. 믿음을 가득히 안은 채로

불교는 깨달음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유는 깨달음은 무의식을

순식간에 넘어서 바로 참 자기를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간혹 깨달으려면 얼마의 세월을 닦아야 하느냐고 질문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깨달음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은 즉석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고

수십년을 닦아도 안오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저는 누구나 다 깨달을 수있는데 왜 사람들은 늦게 깨닫나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일단 두 가지 결론을 얻었어요.

하나는 전생의 업연이 나타나서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견성방에 가면 견성이라는 글들이 있는데

이것을 보고 즉시 아는 사람이 있고, 잠시 제 강의를 듣다가 아는 사람이 있고,

아직도 여러번 읽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시 그 강의를 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주로 강의 주제였어요.

그런데 그런 것을 매번 할 수도 없고 해서 요즘은 잘 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요즘은 그 글을 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현장 설법이 참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자세입니다. 법문을 들을 때 신심과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선 진리를 알려는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화두도 의심이 안생기면 자기가 가장 궁금한 것 아무거나 들고 탐구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인생은 무엇인가? 내가 죽어서 다음에 어디로 가나?

나는 전생에 어디서 왔는가?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젤 궁금하다면 답이 나타날 때까지 연구하면 되요.

항상 앉으나 서나 궁리해요. 그러다가 여기 금강경강의에 들어와서 설법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 탁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전혀 상관없는 스님의 말에 깨닫기도 하고

연관된 말에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궁금한 것이 없는가 찾아보세요.

있으면 또 그것을 들고 연구하세요.

그러다가 보면 어느날 중요한 본질을 알게 되요.

그리고 금강경 강의를 여기 현장에서 듣는 것과 나중에 갈무리한 것 읽는 것이 달라요.

평상시에는 다름을 못느끼나 어떤 진실을 깨닫는 부분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싱싱한 것입니다.

공지에 올려진 것은 식었어요. 그래서 다른 글들처럼 읽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같아도 깨달음의 부분에서는 아주 달라집니다.

깐돌님께서 처음에 강의를 듣고 견성을 이해하려고 했으나 도대체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그래서 총무님께 전화해서 스님을 찾아뵐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고는

찾아와서 절 3배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기 난초를 보라고 했어요. 순간 고개가 돌아가요.

그순간 '그것을 보는 자가 누구냐' 고 하니까 순간 알았어요.

아~ 감사합니다. 그것을 말하는군요. 하고 깨닫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열심히 화두 들고 공부합니다.

현장 설법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자기를 보지(견성) 못한 사람은

즉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물으라고 했습니다.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고생해서 찾아가면 우선 간절하게 되죠.

절에 가는데 무슨 행세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견손하게 3배하고 물어요.

그러니 얼마나 간절합니까? 그러니까 한마디 듣는 것에 깨닫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도 견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은 즉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깨닫도록 하세요.

아니면 여기 강의에 오셔서 현장에서 설법을 들으세요.

글자가 한줄 한줄 올라오는데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래도 마음을 쉬고 다음에 무슨 말이 오는가 하고 기울이다가

어떤 말한마디에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듣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절하고 정말 알려는 마음이 있으면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꽂힙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이 없으면 아무리 들어도 느낌이 없습니다.

깨달으면 순간 50%~80%의 무의식이 순식간에 날아갑니다.

예전에 안되었던 것이 잘 되지요. 분노도 안 일어나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원래 카페회원 깐돌님은 화를 잘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인이 말해요.

직장에서 유명한 사람이고 다열질로...집사람도 다아는 것인데....

책을 200권을 보고 각종 수련과 수행을 다했으나 소용없었는데

말 한마디에 깨닫고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화가 나지 않더래요.

그래서 본인도 참 이상하다 하였고 직장에서도 사람이 많이 변했다 하고

부인도 절에 하번 가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그 외에는 자유게시판에 가끔 올라오니까 아실 것입니다.

외국에 가서 상담할때도 화두 들고.....일거수 일투족이 부처가 하는 구나....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꿔지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좀처럼 오지 않으면 이 두 가지중에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업연과 알려는 자세....

업연이 문제인데 이것은 깨달음을 막는 업장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할 수 없이 1080배라든가 예배수행을 하여 참회정진을 많이 하시고

꾸준히 경을 읽거나 참선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깨달음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사람이 한 부처님이나 몇 분 부처님에게만 귀의하고 선근을 심는 것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큼 많은 부처님 밑에서 갖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 경전을 듣고 보고나 잠깐 생각만 해도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을 보고....바로 전시간에 말했듯이 부처는 형상에 없다는

이 말을 그대로 믿고 깨닫는 것은 한 생의 복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만 일어나도 한 생의 복이 아니지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여기에 모인 것은 다생의 복을 심어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곧 동물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유난히 여러분들은 자기가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이고 우주는 어떻게 되었고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니 이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에서 우주가 태어나서 이 몸이 만들어졌는데 껍데기 몸의 쾌락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본질을 알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희귀한 일입니까?

이것은 많은 생의 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잠깐만이라도 이 경을 들으면 곧 믿음을 냅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이런 것을 다 잘 알고 보나니,

이 중생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누리게 되느니라,

또한 전생의 복으로 여기에 모였고 여기에 모여서 법문을 들어 또 복을 짓으니

법문을 듣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저 뒤에 나와요.

왜냐하면, 이들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도 없고 또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니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절대 이 법을 듣지 못합니다.

스스로 최고인데 법을 들어서 무엇합니까?

그러니 여기에 오셔서 들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겸손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불교는 꽤 어렵다고 말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무엇이 어렵던가요?

왜 스님을 친견할 때 절을 해야합니까? 그냥 다른 상담사를 찾듯이

고개만 숙이고 인사하고 말하면 되지 큰절을 올리려니 쑥스럽습니다 해요.

저도 한동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역시 옛스님들이 현명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님들이 절을 받아보아야 뭐합니까? 좋은 것이 뭐 있겠어요?

그래도 하라고 하는 것은 스님앞에서 말하려면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라도 들어서 자기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려면 간절하게 들어야 되고

그럴려면 겸손하게 자기를 버리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와서 절도 안하고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뭘 가르켜주어도 전혀 가슴에 남지가 안하요.

알기는 알겠는데 깨침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넓게 알지 못하고 좁게 아니까

가르쳐 주었는데도 박혀있지 않아서 나중에 잊어버리고 또 인생이 무엇인가 질문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깨침은 달라요 아까 깐돌님이 와서 절이 작다고 무시하고

거기다 꾀죄죄한 스님이 젊어가지고 턱 앉아있는 것이 못마땅하고

저런데 무슨 도가 있겠는가 생각하고....

그래도 왔으니 한번 물어나 보자하고 물었다면 난초를 가르쳐주어도 몰랐을 것입니다.

혹시 무얼 말하는지 않았다 하여도 깨침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 것이 안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원래 우리 속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요. 원래 그러하느니라 하고 가르켜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바로 알고 즉시 내(我)가 없음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그런다더라 하고 깨닫지를 못하니까 나중에 닦아서 없애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닦아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관념은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거나 잘못 안 것을 시정하면 되었지

물리적으로 무엇을 바꾸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미련한 사람들 말을 듣고 닦아서 없애려고 하고

경을 읽고 3천배를 해서 닦으려고 하니까....

원래 없는 것을 닦고 있으니까...닦아지겠습니까?

닦아도 닦아도 맨날 같은 것입니다. 오직 한 순간에 탁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은 텅 비어서 원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한 마디에 믿고 즉시 깨달아서 다시는 아상에 떨어지지 말도록 하세요.

비법상(非法相) : 법이 아니라는 생각, 법 아닌 것을 세우는 것.

그런데 부처님은 법상(法相)도 없고 비법상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법상은 법이라는 상이어요.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진리이다는 라는 것인데 이런 것은 없다는 말이어요.

바로 기독교와 판연히 다른 것이 이점입니다.

기독교는 나는 진리요 길이요. 희망이니 나를 따르라 해요.

바로 나를 세웁니다. (나=신) 그러나 부처님은 부처라는 이름도 세우지 말라 했습니다.

진리도 세우지 말고 만약 이것이 법이라고 생각하면 상이 걸리고

그러면 그것 때문에 불행해진다고 하였어요.

부처님의 법은 단지 병을 치료하는 일회용 처방입니다.

병을 나으면 필요 없어요. 불교는 불법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쓰고 버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리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불변의 신을 세웁니다.

그래서 그 신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조상도 버려요.

오직 신만을 최고로 여겨요.

이렇게 자기를 잊고 신에게 다가가게 하는데 나중에는 다시 사람에게 돌아와야 하는데

신에게 머물러있기 때문에 신을 위한 종교이지 사람을 위한 종교는 아닙니다.

그래서 절도 태우고 단군상도 무너뜨립니다.

그것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들은 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불교는 진리를 쫓아 가다가 가다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와요.

사람이 곧 붓다이고 자기가 부처이기 때문에 스스로 부처의 행을 하라고 하죠.

그리고 많은 진리를 깨달았으면 이것이 진리이다 라는 것도 버리라 해요.

그것이 있으면 결국 그것에 매이므로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골수사상이어요.

그런데 비법상, 즉 그렇다고 해서 법이 아닌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상은 원래 없는 것이니라.' 이 말은 만고불변의 법이어요.

그렇다고 이런 법을 무시하고 아무 법이나 찾는다거나,

법이 없다고 없다는 것에도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상은 원래 없는 것이니라.

이법은 원래 법이 아니라.

불법은 원래 없느니라.

하면 대부분 없다는 병에 결려요,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이 법은 .... 부처님의 뜻은 있다 없다는 것을 다 주장하지 않는데 있어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없다는 말에만 빠져서 허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양자를 다 없에야 합니다. 양자를 다 없엔 경지는 고요한 마음입니다.

지금 당장 집에 난초나 화초가 있으면...

아니면 다른 것이라도 지금 즉시 한번 들여다 보세요.

잠깐 동안무심으로 보세요. 거기에 난초가 있다 없다 하지 말고 그냥 보세요.

보긴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으면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께서 말하고 싶은 자리입니다.

있어도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생각없이 보라.그것이 진실이다.

있다 없다는 것은 그대의 상념이고 언어의 개념일뿐

진실이 아니죠. 말을 통하기 위한 언어예요.

진실은 그런 것이 없는 태초의 그 시각, 바로 있다 없다를 세우지 않는 그 시각이 진실입니다.

그 시각이 진실을 보는 시각입니다.

그렇게 무심으로 화초를 보듯이 모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조차도 그 어떤 것도.

5 如理實見分 (여이실견분)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불야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卽非身相. 佛告須菩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비신상. 불고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우주의 밝은 빛을 보라.

"수보리야, 사람이 마음을 닦으면 달라지게 되고, 그 마음을 밝히기까지는 닦는다는 분별이 있지만, 닦는다는 분별조차 없어진 여래를 몸뚱이로써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밝히겠다는 생각까지도 없는 여래를 어떻게 몸뚱이를 가졌다고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당신이 그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를 제도하지만 실제로 우리 마음에 비춰줄 것은 그 몸뚱이가 아니라 당신의 밝은 마음일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우주에 분별로써 건설된 모든 것들은 근거가 없는 허망한 것이니라. 만약 이와같은 모든 형상을 고정된 관념인 모양으로 보지 않을 것 같으면 완전한 우주의 밝은 빛인 여래를 볼 수 있느니라"

 

 

 

 

5. 참된 이치를 바로 봄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나?

나의 외모를 가지고 여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외모를 가지고는 여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무엇이 부처인가에 대한 것이 먼저 나옵니다.

부처님은 32상의 좋은 상호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귀가 크고, 이마에 흰 털이 나있고, 정수리가 상투처럼 살이 돋아나있고....

손과 발바닥은 비단처럼 고우며....무늬가 희한하게 바퀴처럼 생겼고....

몸집이 사자의 상처럼 어깨가 우람하고....

옆구리가 날엽하고,,,, 팔이 무룹아래까지 내려오고

손가락이 유달리 길고...그래서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같은 살이 있고

발꿈치가 넓고 두겁고 발등이 도톰하게 올라와있고 팔뼈가 사슴의 왕처럼 굵고 단단하고

음부가 말의 성기처럼 속에 감추어져있고 신체가 크고 넓으며 균형을 이루었고

털은 푸른 색이고 위로 나서 오른 쪽으로 돌아나고 두 구멍에서 한 털이 나오고

몸이 금색을 띠고 금색빛이 한 길이나 비치고 양손, 양발, 양어께, 목털미 살이 도톰하고

겨드랑이 밑에 살이 도톰하고 신체가 항상 곧바르고

어깨가 원만상이고...달처럼 둥근... 치아가 40개이고

치아가 고르게 나있고 어금니는 한쪽이 4개인데 하얗고

최상의 미각을 가지고 있고 혀가 유난히 길어서 얼굴을 덮을 정도이고

천상의 목소리같고 눈동자가 감청색이고 속눈썹이 큰 소와 같이 곧고 길고

양미간 사이에 흰 털이 나있는데 5자나 되고 이것이 감겨서 뭉쳐있으므로 은보석처럼 빛난다.

이상이 32상이어요.

이 상 중에 한 상을 얻으려면 100가지 좋은 일을 해야합니다.

저도 몇 백가지는 좋은 일을 했는지 이 중에 한 두개는 같습니당~~^^*

그러니까 불상을 금색으로 도금하는 이유가 있어요.

몸이 금색이고 빛이 나는데 가장 적합한 물질이 금인 것이고

금으로 해야 부처님의 몸을 실제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수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외모를 가지고 부처라고 하지 말라했어요.

몸뚱이가 아무리 잘나도 꼳 썩어서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런 형상으로는 부처라고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부처님의 위대한 점을 깊이 부각시키기 위하여 각종 희한한 불상을 조각하고

큰 부처님을 조각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불상만 짓고

마음 속에 있는 불상은 찾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늘날 중동전쟁에 불교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호멧이라는 사람이 나오기전 대략 서기 5백년경까지는

많은 중동 지역이 불교를 믿는 나라였어요.

스님들도 많았고 불자도 많아 불교가 국교인 곳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불상과 불경과 스님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소승불교를 하는 나라라

자기가 바로 부처인 줄은 몰랐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을 존중하고 예배하기를 원하였던 것이 아니고 각자 자기 속에 있는 부처님을 발견하여

부처의 행을 하기를 바라셨으나 초기 불교는 부처가 되기어렵다고 생각하여

감히 누가 선듯 나서서....

내가 깨달은 자이고 부처님과 같은 부처이니라 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불교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처럼 기복신앙은 강하고 수행 위주여서

깨달은 자가 많이 없었던 것입니다. 깨달아야 진정 자기를 발견할 것인데

깨닫지를 못하니 점점 마호멧을 전파하는 이슬람주의에 뭍혀지고

스님들은 처형 당하고, 불경을 없어지고, 불상은 파괴되었어요.

알마전에도 파괴했죠?

어디드라? 이라크죠?

하옇튼 거기서 큰 불상 폭파시켜 신문에 크게 났어요.

후세인정부였을때 거의 산 하나가 다 불상인데

그것을 폭파시켰으니 얼마나 아까운 세계문화유산이 없어진 겁니까?

후세인이 그런 정치를 했으니까, 불상을 파괴했으니까 오늘날 수난을 당하는 거야요

그러니까 이렇게 큰 불상을 세우면 뭘합니까? 이것은 없어져요.

그리고 이런 것이 아무리 많아도 인재가 없으면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불상을 세울 정도의 열성이 있으면 도인을 만들 열정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깨달은 도인들이 나와서 이리가도 부처, 저리가도 부처,

돌아가도 부처 등으로 넘쳐나야 불교가 오래갈 것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부처를 발견하게 하는 데는 무관심하고

외적인 불상만 크게 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인재가 없으니 타종교는 크게 번창하는데 불교는 항상 뒤에 쳐져있습니다.

이것 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래요.

다른 사람보고 부처님의 말씀 어겼다고 난리지길 것이 아니라

불교 자체가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면 다 부처님의 말씀을 어기는 사람이고

이렇게 되면 불교가 빨리 망합니다.

부처님의 제자 수보리는 정확하게 부처님의 뜻을 안 사람입니다.

▶ 여래=부처

여래의 외모는 부처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상(身相)이란 곧 외모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말은 뭐냐하면

상은 곧 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32상의 근사한 모습이 있어도 그것은 물거품같은 것이고

지금 이대로 모습이 눈에 보여도 그것은 그림자같은 것이라 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지수화풍 4가지 원소로 된 것인데 각자 그 원소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자기라고 할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상은 상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무릇 형상을 지닌 것은 (凡所有相)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皆是虛妄)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非相)으로 본다면 (若見諸相非相)

곧 여래를 보리라 (卽見如來)"

유명한 금강경의 4구게입니다.

4구게란 4가지 글귀로 된 게송이라는 말인데

이 게송이 참 유명하고 좋은 게송입니다.

모두 적어서 수첩에 넣어가지고 다니세요.

가지고 다니면 일체 마장이 물러가고 큰 복을 받고 소원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를 보려면 상에서 보면 절대로 못본다는 말입니다.

모든 상이 비상(非相)으로 보여지면 곧 부처를 본다는 말이어요.

007 영화에 보면 투시안경이 나옵니다.

그것을 쓰면 옷 속의 것이 보여요.

누가 권총을 찻는지 속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옷으로 치장해도 그 속의 것은 못보는데

이 안경을 쓰면 그 속의 것이 다 보여요.

그처럼 여러분이 진리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상이 비상으로 보여지게 된다면

곧 부처를 보게 되리라는 말씀이어요. 깊은 뜻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에 얽매여있습니까?

학력, 이쁜 것, 못난 것, 부자, 가난,,,,,

스님, 국회의원, 대통령, 종정, 구청장.....

45평, 30평, 15평, .....이런 상에 억매여있기 때문에 진실를 못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무심이어야 하고....

아무리 나를 욕해도 무심이고, 칭찬해도 무심,,,,

무엇이 되어도 담담,,,,,대통령에 당선되어도.....담담

리무진을 끌고 와도 담담....

그렇게 되어야 바로 부처를 본다는 말입니다.

만약 마음이 상에 얽매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가로 막아 절대 진실을 보지 못해요.

중국에 조주스님은 120세를 살았어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부처라고 말했습니다.

오래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마음이 항상 똑같아요.

상에 얼매이지 않은 것이죠.

한번은 나라의 대왕이 왔어요.

그런데 시자가 대왕이 옵니다 하고 알렸는 데도 문밖까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설법이 끝난 뒤에도 다리가 아파 나아가지 못한다 하고

문밖까지 전송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장군이 벌컥 화를 내고 다음날 조주스님이 있는 관음암에 갔습니다.

그런데 문밖까지 와서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왕을 앉아서 맞더니 오늘은 장군을 어찌 문 밖까지 와서 맞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왕의 심량과 장군의 심량이 다르다고 한마디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말에서 내려 인사하고 돌아갔습니다.

왕은 일국을 다스리는 주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있는 그릇이 있으나

장군은 일개 군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그릇이 작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선사라면 이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뭐 국회의원이 한 사람이 와도 부산을 떨면 안되요.

누가 오던지 그 상을 보지 말고 그 속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와도 똑 같아야되요.

부처님으로 생각하려면 전부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중생으로 보려면 전부 중생으로 보아야지

그 상에 걸려있으면 세상도 제대로 못살고 부처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다 훌륭하지 않아요.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훌륭한 사람 많습니다.

현대는 사람 그 자체가 중요하지 그 직위나 학력이나 능력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사상이 그대로 불교 사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은 항상 현대적이고 미래적이어요.

오늘날 불교가 자꾸 현대인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불교가 시대가 많이 지나도

항상 미래적이고 현실에 적합한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교는 상에 얽매이지 말라해요. 만약 상에 얼매이면 진실를 못보고

그 상에 끌려가면 부처를 못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있는 모든 불자님들은 앞으로 절대 상에 매이지 말고

상을 보고 부처를 보지 말고 자기 마음을 보고 부처를 보아야 합니다.

상이 없는 것, 무엇입니까?

상이 없으면서도 무엇이든지 다하고 다 일어나는 신비한 존재가 바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심이어요.

이 마음이 부처입니다. 법당에 불상은 그것을 가르쳐준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

그 앞에서 수행하고 법문듣는 장소이지 그 상이 부처는 아닙니다.

설사 2천6백년전 부처님이 그대로 여기에 나타났다 하여도

깨박 죽어서 부처라고 난리치고 예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 살아있는 분도 껍데기는 부처가 아니어요.

그 상 속의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그 부처는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런 자심불을 보는 눈이 열려야 부처를 보지 상에 얽매이는 작은 눈으로는 부처를 보지 못합니다.

2천 6백년전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든 자기를 보세요. 자기 마음을....

그리고 누가 부처를 보았냐고 묻거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확실히 보았다고 말하세요.

그럼 무엇이 부처냐고 묻거든 얼른 합장하고

"뿌리없는 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잘 가세요." 라고 하세요.

뿌리 없는 뿌리가 뭡니까?

길에 가다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돌아보면 다 뿌리가 깊게 박혀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걸려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뿌리가 없어요.

형체가 없는데 무슨 뿌리가 있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뿌리 없는 뿌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 근사하게 하면되요. 부처님처럼....

무엇이 부처입니까 할때

마음이요...하고 대답하면 안되요. 왜냐?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라는 명자(상)를 세운 것이라 틀려져요.

그냥 부처가 되어서 한마디 좋은 말을 일러주면 됩니다.

다른 좋은 말을 해도 되요.

이렇게 자기가 부처임을 증명하고 설하고 깨닫는 불교가 된다면

불교의 혁명이 일어나요.

마르틴루터는 기독교 구교가 지나치게 형식에 많이 매여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혁명을 일으켰어요. 그 주장은 성서주의였습니다.

어찌 천당에 가는데 주교의 안수를 받아야 되고, 표를 받고 축복을 받아야 됩니까?

이것은 지나치게 의식주의이고 형식주의여요.

누구든지 성서를 읽을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릅으로 모여서 대표가 연설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면 천당에 간다고 말했어요.

이것이 오늘날 신교, 개신교입니다.

목사는 장가를 가고 주님의 말씀을 전도하면 되었지 굳이 하나님께 수절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때 누구나 공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장가가는 것은 권리였고 천리였어요.

그런데 이 새로운 혁신적 연설에 뜻밖에 수많은 군중이 지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나와서 오늘날 세계사를 바꿔놓았어요.

불교도 이젠 지나치게 의식주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누구나 참 자기를 발견할 수 있고

당당히 진정한 부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바로 부처이니까 하나 하나 실천하여 이 땅에 참 자기를 회복한 사람이 넘쳐나길 기대합니다.

4. 妙行無住分 (묘행무주분)

 

復次 須菩堤,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 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 聲香味觸法 布施. 須菩堤,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 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 성향미촉법 보시. 수보리,

菩薩應如是布施 不住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堤, 於意云何.

보살응여시보시 부주상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양 수보리, 어의운하.

東方虛空 可思量 不. 佛也世尊. 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上下虛空 可思量不. 佛也世尊. 須菩堤,

동방허공 가사량 부. 불야세존.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 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수보리,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堤, 菩薩 但應如所敎住.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양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집착하지 않는 행동

"수보리야, 보살은 내가 설명한 방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남을 대할 때는 주는 마음으로 대하여라. 어떻게 남을 상대해서 좋은 마음을 쓰는가 하면, 형상이 예쁘다고 주는 마음을 내지 말아라. 소리가 좋아서 마음을 준다든지 냄새 맡기가 좋아서 마음을 준다든지 장래에 잡아먹기 위해서 먹이를 준다든지 이와같이 오관을 통해서 남에게 주는 것은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보살이 어떤 행동을 할 때, 형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나 보수를 바라지 아니하고 자기 일을 하면 마음이 닦아지고 무한대로 발전할 것이니라. 수보리야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 그리고 그 사이와 위아래 허공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행동하면 그 공덕은 앞에서 말한 동서남북 위 아래의 허공과 같이 한량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렇게 내가 가르친대로 마음을 다스릴 것이니라. "

 

4.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그리고 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법에 얽매이지 말고 보시를 행할지니

법(法) : 인과법이나, 각종 이치, 논리 등을 말한다.

보시(布施) : 재물이나 먹을 것이나 설법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

이른바 색(色)에 얽매이거나

물질에 얽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주었다든가 물건을 받았다라고 생각하면 색에 얽매인 것입니다.

3물이 청정하지 못한 것을 물질에 얽매인 것이라고 해요.

3물=주는 자, 받는 자, 주는 물건

남에게 물건을 주었을 때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주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올바로 준 것입니다.

남에게 물건을 받았을 때는 아무리 귀한 것을 받아도 받았다는 생각이 없어야 바르게 받은 것이어요

주는 물건이 깨끗한 것이라 함은 첫째 도둑질하지 않은 것, 둘째 남을 속이지 않은 것,

셋째 노력 없이 얻은 것.

노력 없이 얻은 것에는 길에서 주은 것이 있어요.

길에서 줏은 것은 되돌려주어야지 그것으로 남에게 베풀면 청정하지 못한 행위가 됩니다.

남에게 받아도 받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원래 물건도 없고, 주는 사람도 없고, 받는 나도 없기 때문에

받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 받았다는 생각이 있으면 이 한 생각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내가 받았으니 갚아야 하는데 나는 갚을 것이 없어봐요. 받은 것이 얼마나 부담되겠어요.

미안하고 속상하고....왜 자꾸 주어가지고 나를 괴롭히는지....존심 상하게.....없으니 안받을 수도 없고.....

이것이 다 괴로움이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받은 자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고요한 마음일뿐.....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해도 마음은 고요해야 합니다.

성 향 미 촉 법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

기타 소리, 향기, 맛, 촉감, 각종 법칙에 얽매인 채 보시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소리 = 목소리(노래등)를 보시하고서 듣기 좋은 소리 하기를 바라는 것.

향기 = 향기 나는 것을 보시하고서 자기 주변에 향가 있기를 바라는 것.

맛 = 맛난 음식을 보시하고서 나중에 더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기를 바라는 것.

촉감 = 좋은 옷감 등을 베풀고 나중에 그 댓가로 자기 피부가 고와지기를 바라는 것.

법 = 베풀면 반드시 복이 돌아온다는 기대를 하고 베푸는 것.

여기서 맨 나중의 법에 대한 말을 잘 살펴야 합니다. 법은 인과응보의 법칙 등을 말해요.

물론 세상의 이치는 인과법이 기본이므로 복을 쌓으면 반드시 그만큼의 복이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베푸는 사람은 절대 그런 댓가가 있기를 바라고 베풀어도 안 되고,

베푼 후에도 어떤 복이 돌아오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절대 손톱만큼도 바라는 것이 있으면 안 되요.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한 것입니다.

괜히 자기가 주어가지고는 댓가가 없다고 욕하는 사람....

나는 준다는 생각이 없다고 해놓고선 좀 서운한 일이 있으면

주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을 혼란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어도 안준 것처럼 고요해야 해요.

받아도 안 받은 사람처럼 고요해야 하고......

준 사람도 영원히 잊어버려야 하고 받은 사람도 영원히 잊어버려야 해요....

내가 안 갚아도 되요.

왜냐? 언젠가 자기가 지은 것은 복이 되어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풀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참된 보시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과거 수행시절 보살이었을 때 만약 누가 무엇이든지 달라고 하면 다 주리라고 맹세했어요.

하루는 제석천황이 이 사람이 얼마나 자기 약속을 지키나 보려고

눈먼 장님으로 변장하여서 보살이 지나는 곳에 나타났어요.

보살이 보니까 눈먼 사람이 고생하면서 겨우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은 얼른 부축하면서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장님은 "나는 배고품을 이젠 웬만하면 참을 수 있고 옷도 대충 입으면 되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답답한 일입니다.

만약 저에게 눈을 주셔서 세상을 휜하게 보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자 보살은 더 생각하지 않고 즉석에서 바로 자기 눈을 손가락으로 파내어

주었어요. 피가 뚝 뚝 떨어지고....파진 눈은 아픈데.....

장님이 손을 내밀어서 주었는데 눈알이 손에 닿으려하자 마자...

얼론 손을 옆으로 옮겨서 달라는 흉내를 내었어요. 그러니까 눈알을 공중에다 놓은 결과가 되어.....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장님이 눈 뜬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그 눈을 발로 밟아서 비벼버리면서.....

" 에잇 ! 못쓰게 되었네...."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눈알을 파준다고 눈이 장님 눈에 들어갈 수술 기술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같으면 눈이 있다해도 어떻게 집어넣을 것입니까? 하고 물어라도 보련만....

대뜸 눈을 파내준 것도 대단한 일인데.....

그만 눈이 땅에 떨어져 못쓰게 되었으니 얼마나 아깝겠어요.

그래도 보살은 아무 표정도 바꾸지 않고 피나는 눈을 손으로 막으면서 자기 가던 길을 갔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자가 이 말을 듣고 물었어요. 부처님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이왕 주었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것이므로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라."

이렇게 보시행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부처님은 천안통을 얻었습니다.

천안통(天眼通) : 마치 하늘의 눈처럼 모든 것을 다 봄

못보는 것이 없는 신통을 얻었던 것입니다.

남에게 무엇을 주었을 때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해도

쓰다 남은 헌 걸레를 주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받은 사람도 준 사람도 잊어버려야 해요.

만약 기억하고 있으면 그것은 선행이 되지 않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보시하되 상을 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니라.

주었다는 생각이 상입니다.

그런데 보살이 주고도 주었다는 상이 없으면 그 복덕은 한량없이 큽니다.

그런데 만약 누가 주었다고 자랑하거나 스스로 속으로라도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은 아주 작은 복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되로 주고 말로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럴려면 주었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해요. 그래야 큰 복이 되어 나에게 옵니다.

눈덩이처럼 가까이 올수록 불어나요.

말로 받아야 겠다는 것 도 상이죠

아니, 이것이 복의 실체라는 말입니다.

한 생각이라도 생기면 복이 작으나 없으면 크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크냐 하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냐?

동쪽 하늘의 허공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수보리야 동서남북 그리고 4유와 상 하 허공은 헤아릴 수 있겠느냐?

▶ 4유는 8방을 말해요

▶ 4방 = 동서남북

▶ 8방 = 4방의 간방까지...

▶ 10방 = 8방과 우주를 팽이처럼 본다면 상방과 하방까지

▶ '십방' 이라고 부르지 않고 '시방' 이라고 발음합니다.

▶ 시방 = 온 우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을 내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이 마치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나의 가르침대로 행해야 하느니라.

보살이 만약 부처님께서 가르친 바 대로 행하지 않으면 보살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수행자가 아니어요.

왜냐면 이 수행자의 행은 그 자체가 어떤 진실과 부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주는 무상(無相)이다' 라는 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깨달았다면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겠으나....

만약 깨닫고 뭘 알았다든가, 보았다든가 라고 허튼 소리하면 그것은 병이 들린 자이지 정신병자....

절대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왜냐? 우주가 비었은데 도대체 그 실체를 어찌 봤단 말입니까?

무엇을 본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지은 환영을 보았을 뿐....

하도 고대하니까 이상 증세가 나타났을 뿐....가상 임신처럼....

진실을 본 것이 아닙니다.

저 뒤에 나오지만 설사 상으로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면

어떤 상을 보고 부처라고 한다면 절대 부처를 본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무엇을 보았다니....그것은 병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허상이 빠지지 말고 딱 부처님께서 가르친 대로만 해야겠습니다.

바로 일체 모든 선한 행위를 했어도 무엇을 얻었어도, 깨달음을 얻었어도....

대통령이 되고, 종정이 되었도 되었다 ....했다 하는 상이 있으면 틀린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허공처럼 그 복이 크게 됩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나의 가르침대로 행해야 하느니라.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부처님게서 가르친 바 대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자(佛子)라는 말은 부처님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부처님이니까 부처님께서 시킨대로 해야해요.

그래야 나중에 자기도 커서 부처님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시키는 일은 부처가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의 길을 모르면 커서도 부처의 길을 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불자들은 꼭 부처님께서 시킨대로 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행복해지고 지혜로운 인생이 됩니다.

사람과 사람을 다 부처로 보게 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요.

물질에 현혹되거나, 이름에 현혹되거나, 욕설에 현혹되어 끌려가지 않으므로

매일 행복하고 고요해집니다.

그러니까 불자들은 반드시 부처님 가르침대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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