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 無法可得分 (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음)

 

 

須菩堤 白佛言 世尊,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爲無所得耶. 佛言

수보리 백불언 세존, 불득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위무소득야. 불언

 

如是如是 須菩堤, 我於 阿耨多羅三藐三菩堤 乃至 無有少法可得

여시여시 수보리, 아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무유소법가득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堤.

시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은 법이 전연 없다.

수보리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도 얻은 것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옳은 말이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티끌만한 것도 얻은 것이 없으며

또한 조그마한 법도 얻은 바 없으므로 그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바 없음이 되옵니다. ”

수보리가 제대로 말했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최상의 깨달음은 아무 것도 얻음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붓다에게 무엇을 깨달았냐고 묻지 말아요.

아무것도 깨달은 것이 없어요. 여러분이나 같아요.

그런데 붓다는 철저히 아무것도 가지고 있음이 없지만

여러분은 끝없이 자기가 안 것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몰라도 틀려요.

부처님은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비었어요.

텅빔..........그래서 행복해요.

그러나 여러분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모르고

비웠다 하나 꽊차있어요.

중생은 꽉차서 모르고

부처는 텅비워서 모르나 부처님은 다 알고 봅니다. 걸릴 것이 없어요.

중생은 꽉차서 안보이고......... 똑같이 몰라도 이렇게 다릅니다.

한번에 쓸어내세요. 단번에 비워버려요.

단번에 버려서 다시는 세우지 마세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작은 법이라도

가히 얻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아무것도 얻음이 없어야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라는 말이죠.

작은 것이라도 다 버리세요.

그러면 문득 다 보입니다.

선어록도 다 보여요. 희한하게...........

화두가 싱거워요.

아~~그래서 이렇게 말했구나.......해요.

작은 앎이라도....작은 얻음이라도 있으면 절대 모릅니다.

왜냐? 앎은 어디까지나 허상을 아는 것이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앎 자체가 허망인데 그것으로 어찌 道를 보고 禪을 보고 진실을 보겠어요?

앎이 가리면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앎으로 알려하지 마세요.

도는 마음을 고요하게 비웠을 때 드러납니다. 틀림없이 드러나요.

지금은 이 카페에서 제가 유일하게 쉬어서 드러났다 하니까

사실인가 의심하는 사람이 혹 있을 거예요.

그러나 조만간 여기서 많은 사람이 제가 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확실히 제 말을 믿을 것입니다.

쉬어보세요. 그러면 다 드러납니다.

왜 잠깐도 쉬지 못하나요? 작심하고 쉬어보세요.

그리고 화두를 들고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면 문득 알게 됩니다.

아하~~이것이로구나.........하고

그래서 본래 당신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능해요.

이것은 얻는 것이 아니고 쉬는데 뜻이 있습니다.

얻는 것보다는 쉬는 것이 더 쉽습니다.

얻는 것은 안보이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나

쉬는 것은 분명히 자기가 일어나는 생각을 쉬는 것이니까

확실하잖아요.쉬면 나타나니까 분명하고 선명하지요.

그러니까 대통령되기 보다 쉽고, 국회의원되기 보다 쉽고,

주지스님 되기 보다 부처되기가 더 쉽고,엄마 아빠되기 보다 더 쉬워요.

왜냐? 당신이 원래 부처이고 누구나 가능하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절대 뭘 모르는 사람입니다.

화두공부 아직 덜되고 화두뜻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얻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탁수가 가라앉으면 다 드러나듯이.........

화두 뜻이 드러난 사람이라면 절대 어렵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드러내어서 빨리 제 말을 증명해보세요.

그러면 우후죽순 드러날 것입니다.

대혜스님이 깨닫자 송나라 사대부 수백명이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이 드러나자 모두 드러났어요.

만약 안드러나면 강제로라도 드러나게 할 작정입니다.

막 때리고 꼬집어서.....라도

일단 한 사람만 드러나면 유행처럼 일어나요.

기대해보세요.

곧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第22. 無法可得分 (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바 없음이 되옵니다. ”

수보리가 제대로 말했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최상의 깨달음은 아무 것도 얻음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붓다에게 무엇을 깨달았냐고 묻지 말아요.

아무것도 깨달은 것이 없어요. 여러분이나 같아요.

그런데 붓다는 철저히 아무것도 가지고 있음이 없지만

여러분은 끝없이 자기가 안 것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몰라도 틀려요.

부처님은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비었어요.

텅빔..........그래서 행복해요.

그러나 여러분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모르고

비웠다 하나 꽊차있어요.

중생은 꽉차서 모르고

부처는 텅비워서 모르나 부처님은 다 알고 봅니다. 걸릴 것이 없어요.

중생은 꽉차서 안보이고......... 똑같이 몰라도 이렇게 다릅니다.

한번에 쓸어내세요. 단번에 비워버려요.

단번에 버려서 다시는 세우지 마세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작은 법이라도

가히 얻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아무것도 얻음이 없어야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라는 말이죠.

작은 것이라도 다 버리세요.

그러면 문득 다 보입니다.

선어록도 다 보여요. 희한하게...........

화두가 싱거워요.

아~~그래서 이렇게 말했구나.......해요.

작은 앎이라도....작은 얻음이라도 있으면 절대 모릅니다.

왜냐? 앎은 어디까지나 허상을 아는 것이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앎 자체가 허망인데 그것으로 어찌 道를 보고 禪을 보고 진실을 보겠어요?

앎이 가리면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앎으로 알려하지 마세요.

도는 마음을 고요하게 비웠을 때 드러납니다. 틀림없이 드러나요.

지금은 이 카페에서 제가 유일하게 쉬어서 드러났다 하니까

사실인가 의심하는 사람이 혹 있을 거예요.

그러나 조만간 여기서 많은 사람이 제가 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확실히 제 말을 믿을 것입니다.

쉬어보세요. 그러면 다 드러납니다.

왜 잠깐도 쉬지 못하나요? 작심하고 쉬어보세요.

그리고 화두를 들고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면 문득 알게 됩니다.

아하~~이것이로구나.........하고

그래서 본래 당신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능해요.

이것은 얻는 것이 아니고 쉬는데 뜻이 있습니다.

얻는 것보다는 쉬는 것이 더 쉽습니다.

얻는 것은 안보이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나

쉬는 것은 분명히 자기가 일어나는 생각을 쉬는 것이니까

확실하잖아요.쉬면 나타나니까 분명하고 선명하지요.

그러니까 대통령되기 보다 쉽고, 국회의원되기 보다 쉽고,

주지스님 되기 보다 부처되기가 더 쉽고,엄마 아빠되기 보다 더 쉬워요.

왜냐? 당신이 원래 부처이고 누구나 가능하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절대 뭘 모르는 사람입니다.

화두공부 아직 덜되고 화두뜻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얻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탁수가 가라앉으면 다 드러나듯이.........

화두 뜻이 드러난 사람이라면 절대 어렵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드러내어서 빨리 제 말을 증명해보세요.

그러면 우후죽순 드러날 것입니다.

대혜스님이 깨닫자 송나라 사대부 수백명이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이 드러나자 모두 드러났어요.

만약 안드러나면 강제로라도 드러나게 할 작정입니다.

막 때리고 꼬집어서.....라도

일단 한 사람만 드러나면 유행처럼 일어나요.

기대해보세요.

곧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제21. 非說所說分 (비설소설분)

 

 

須菩堤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

수보리 여물위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하이고 약인언

 

如來有 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堤 說法者無法可說

여래유 소설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수보리 설법자무법가설

 

是名說法. 爾時, 慧明 須菩堤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

시명설법. 이시, 혜명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어미내세 문설

 

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堤, 彼非衆生 何以故 須菩堤, 衆生衆生者

시법 생신심부. 불언 수보리, 피비중생 하이고 수보리, 중생중생자

 

如來說 非衆生 是名衆生.

여래설 비중생 시명중생.

 

마음을 밝게 하여 주시다.

"수보리야, 너는 여래께서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한 법이 있다하면 그것은 부처님을 욕하는 것이며,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너희들에게 마음 밝게 하기위하여 마음 닦는 이야기를 했지, 언제 내가 설법을 하였느냐. 그러나 그 말이 그때 그 사람에게 효과를 나타내면 설법이라고 이름하느니라. "

 이 때 지혜로운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이시여, 중생이 오는 세상에 이 법 설하는 것을 듣고 '참으로 옳다'하고 믿는 마음이 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그 사람은 중생이 아니며, 또한 중생 아님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법문을 듣고 좋은 마음 냈으니 마음 밝았고, 마음이 밝았으니 중생이 아니고, 몰랐을 때에 들었으니까 중생이니라. "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 라고 생각한다고 이르지 마라.

그런 생각도 하지 말지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하면 이는 부처님을 비방함이니라. 능히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

어떻게 보면 이 말이 금강경의 핵심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45년을 설했어도 설법했다고 하지 않았고 그럴 법도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은 부처님은 실제로 아무것도 안하시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조심해야 해요.

항상 말하지만 부처님은 할 것 다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다합니다.

그러나 했다는 생각없이 해요.

부처님은 45년간 설법해도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한 마디도 않했다......... 이것이 부처님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여기 금강경에서도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 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마라고 했어요.

법은 없다.......나는 아무 법도 설하지 않았다.

나의 법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누가 만약 '불법' 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는 나를 비방한 것이니라 라고 했어요.

대단해요. 부처님의 이 생각은 그냥 생각이 아니어요.

인사나 겸손이 아니어요. 명심해요.

부처님은 겸손이 아니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세상에 진리는 없다 따라서 나의 법도 없다..........

꿈 속에서도 나는 법을 조금도 주장하지 않는다 라는 사상이죠.

그러니 이런 종교를 누가 알아봐요.

불교가 참 대단한 종교로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종교와 확 틀려요.

그 누구도 구 무엇도 추중하지 마라. 오직 네 마음을 보아라.....라는 식입니다.

혹 겸손한 종교라고도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겸손이 아닙니다.

진실은 없어요. 다 명칭만 존재 할 뿐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라고 했어요.

부처님은 설할 법이란 없느니라 라는 것을 말했을 뿐.......

아무 것도 말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특이한 사상인데 법을 이렇게 알고 깨달으면 매우 행복해져요.

그래서 옛날부터 이 금강경을 듣고 깨달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잘 못 살았구나~~ 무엇을 옳다고 주장한단 말인가...

옳다 그르다 이것은 다 헛된 말이로다.....

없다.......없다는 것도 없다.....이것도 또한 없다.....

이런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 말놀음인가......

한 생각이라도 일어난다는 것은 모두 생각 속의 허망한 것을 꺼내는 것인데

무슨 말을 하고 또 무엇이 옳다하고 ... 그르다 할까....

모두 헛된 것일뿐.........

이렇게 깨닫고 입을 닫고 생각을 닫고 무심으로 일상사를 하면서 편안하게 살다가 갔어요.

조심해요. 불교는 할 것은 다합니다. 다만 무심으로 할 뿐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자는 불교를 모르는 자입니다.

안한다는 병에 걸려있는 병자입니다. 불자가 아니고......

부처님은 평생 일하셨어요.

남 가르치는 일이죠........그래서 얻은 것은 겨우 하루에 한 때 식사였어요.

그것으로 항상 만족하고 사셨습니다.

부지런히 살았고 수많은 말을 했어요.

모두 집착의 병을 고쳐주는 말이지요.

없다는데 집착하는병 있다는데 집착하는 병을 다 고쳐주었어요.

있다 없다 이것 다 마음이 만든 병입니다. 이것만 중지하면 되요. 그러면 편해집니다.

그렇게 병고쳐주고 남은 것이 바로 이 처방집입니다.

마음병을 고치는 처방집이 바로 금강경입니다.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

오늘 부처님께서 설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설법(說法)=법을 설하다) 라는 뜻인데 부처님의 법은 이것이 법이다 할 것이 없으므로

설법한다 했을 때도 무엇을 설하는 것이 없어야 설법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다 하지만 말하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설법이란 아무 것도 말하지 말아야 설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따로 주장하는 것이 없으니까

당연히 설법할 것도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금강경을 들으면서 자꾸 부처님의 핵심이 무엇인가 찾는데

그렇게 찾으면 없어요.

왜냐? 부처님은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핵심을 찾으면 못찾습니다.

부처님은 단지 중생의 병을 고쳐주었을 뿐입니다.

아상이 있거나, 했다는 상이 있거나, 부처님의 상을 보고 부처라고 하거나,

법을 보고 불법이라고 하거나, 큰 것이 있다고 하거나 등등...

마음에서 뭐라고 정한 것이 있고 상에 현혹됨이 있는 것을 고쳐주는 말이지

따로 세운 것은 없습니다.

원래 우리는 행복하고 완벽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어나 그 행복을 막아요.

원래 부자도, 가난도, 권세도, 힘도 없는 것입니다.

한 마음 일어나 의미를 붙여서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생각하여 집착하고....급기야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자기가 이끌린 의미 때문에 괴로운 것이지

부자가 안되고 소원을 이루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이 되고 안되고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고

대부분 자기가 세운 허망한 가치에 부합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삶의 가치만 버리면 행복해집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장님이 눈을 뜨고 허공을 향해 우는 것이니라.

장님이 눈을 떳으면 기뻐해야하는데 왜 허공을 보고 웁니까?

눈을 떠도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까닭에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곧 울 날이 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란 헛된 것을 찾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쓸데 없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묻거들랑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말라고 하세요.

그러면 너는 밥으로만 사느냐고 묻거들랑

이 세상에 밥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반문하시고

넌 어째 인생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사느냐고 또 묻거들랑

넌 그렇게 생각하고 산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그모양 그꼴이냐고 반문해주세요.

스스로 허공에 꽃을 그려놓고 그 꽃이 있는 세계를 찾으니 평생 찾아도 있겠습니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허망한 짓입니다. 설할 바 법은 없느니라..........

이것을 설하기에도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한데

없는 진실을 찾으려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불교는 간단하게 들어갑니다.

아무 것도 주장하지 마라........

이것이다 저것이다 다 버려라....... 입니다.

그때에 혜명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부처님께서 계실 때는 당연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사실이라고

믿겠으나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은 미래에도 믿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물음인데

이것 참 고민되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믿었겠지요.

내 법은 없다.......그러면 그런 가보다 믿어요.

그런데 말세에....요즘도 말세라고 해요...

이러한 때에 사람들이 확실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 때에....

불법은 없는 것이 불법이다 하고 말하면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실로 고민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불법을 믿지 않고 해탈을 얻지 못하면 어쩔까 고민되겠지요.

그런데 사실은 무엇을 새로 배우기 보다도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 더 만만치 않아요.

너는 없다, 그러니 상을 내지 말거라........네........

이렇게 알고 끝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모두 5분도 못가서 잊어버립니다.

강의끝나고 돌아서서 5분만 지나면 다시 자기라는 상이 세워져요.

아무리 나는 없다고 알아도 누가 심한 욕을 하고 옆에서 가지도 않고 슬슬 긁으면

금발 폭발하고 맙니다. 쌍놈의 새끼 지랄하고 있네.........

그러니까 다음에는 괜히 참지 말고 바로 나가자 해요. 이 머리가....

그래서 배운 것 따로 행하는 것 따로 돼서 진전이 없어요.

그래서 버리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의 듣다가 어느날 탁 마음에 꽂히는 말이 있을 것이고

그 말을 듣고 깨달으면 다시는 세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가 깨닫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절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설법듣고 해야합니다.

다 아는 말이래도 어느날 가슴이 터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중생이라는 말은 중생이라는 말일뿐이다.실은 중생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부처도 아니다 그러나 곧 부처가 될 것이다.

곧 깨달을 것이다. 중생은 명칭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이니 그냥 사람이면 된다.

오래 된 버릇이라 부끄럽지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미래가 되어도 진실을 없어지지 않는다...

믿음을 가질 사람이 더 많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요즘 세계적으로 불교인구가 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많이 늘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불자 수만 늘일 것만 아니라

이제는 깨달은 사람도 늘여야 합니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누가 물으면 너도 나도 깨달아서 내가 부처요....

하고 나서야 합니다.

여러분부터 즉시 자기가 바로 부처인줄 깨닫고 당당히 나서도록 하세요.

사자의 새끼는 어떻게 되어도 사자의 울음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처의 심성입니다.

자신을 가지고 그것(맘)을 맘대로 쓰도록 하세요.

제20. 離色離相分 (이색이상분)

 

須菩堤,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

수보리, 어의운하 불가이구족색신견부. 불야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

 

色身見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

색신견 하이고 여래설구족색신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 수보

 

堤, 於意云何 如來可以具足諸相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

리, 어의운하 여래가이구족제상견부. 불야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제

 

相見 何以故 如來說 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상견 하이고 여래설 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삼십이상 팔십종호가 여래냐

"수보리야, 구족한 색신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구족한 색신으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구족색신은 구족색신이 아니고 이름이 구족색신입니다. "

"수보리야, 여래를 구족한 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구족한 상이란 것은 곧 구족이 아니고 이름이 구족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가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마땅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구족한 색신은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고

그 이름이 구족한 색신입니다.”

자, 여기서는 또 좋은 상을 갖춘 몸을 보고 부처를 보았다고 하겠느냐 하고 물었고

수보리는 이번에는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어요.

이말은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두 분은 상황에 맞게 할 뿐 특별이 형식을 세우고 고집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온갖 좋은 상호를 갖춘 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여래가 아닙니다.

그런 상호와 껍데기는 여래가 아닙니다.

다만 몸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그것을 보고 부처님을 보았다고 하면 안됩니다 하고

수보리가 말하고 있어요.

부처님은 마음이 부처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껍데기에 홀리지 마세요.

큰 불상이나 근사한 법상에 앉아서 설법하는 큰 스님....

이것은 다 똥덩이인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꿈에 부처님의 상이 나와도 마군이가 왔다고 쳐버리고

위풍 당당한 영웅이 나와서 부처의 흉내를 낸다고 하여도 부셔버려야 합니다.

실제 2600년전의 석가모니 진불이 면전에 있다해도

당신은 부처가 아니요! 하고 소리질러야 부처님은 좋아합니다.

그래, 네가 내 불법을 망해먹겠구나.........해요.

그럼 이 말이 칭찬입니까? 꾸지람입니까? 칭찬입니다 ^^*

착하다......네가 오직 나의 제자다 하는 말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명칭, 이름, 의미, 행동 이런데 끄달려가지 말아요....

옛날에 수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알려진 선사들은 일부분입니다. 실제는 더 많아요.

모두 명예나 부와 상관없이 살았어요. 나라에서는 왕사 국사를 뽑는데 1명만 뽑습니다.

총림에서도 방장을 1명만 뽑아요. 그러니까 대부분 도인들은 이름없이 살다가 갔지요.

그래도 아무도 불만없었어요. 부르면 가나 안부르면 초야에 뭍혀 평생 늙어죽습니다.

내가 이미 부처요, 우주의 주인인데 누구에게 알아달라하고 답답하다 하겠어요.

당신이 바로 부처이니까 아무것도 원하지 말고 부처의 길을 가세요.

부처의 길이란 삶의 길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로써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모든 상의 구족함이 곧 구족이 아니고 그 이름이 모든 상의 구족함입니다.”

아까는 색신에 대한 것이고 (색신=몸)

여기서는 구족한 모양입니다. 즉 32상 80종호를 말해요.

부처님은 남들과 다른 32가지 상이 있었어요.

미간에 흰 털이 있다든지....

손바닥에 무늬가 있다든지....

어깨가 사자와 같다든지,,,,,뭐 이런거요.

그리고 더 세부적으로 보면 80가지의 좋은 상호가 있데요....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부처를 보았다 하면 안된다는 말이지요.

다 명칭(이름)이요, 허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 남보다 좀 잘 생겼으면 대부분 혹할 것입니다.

유혹되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이렇다더라....이런 신통이 있다더라....

하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말씀 때문에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자랑을 하지 않아요.

6가지 신통으로 천궁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시는 분이지만

전혀 누구도 내세우지 않아요.

기독교는 예수님이 조금만 신비한 것을 보여도 크게 부풀려 자랑합니다.

빵 한개로 여럿이 나누어 먹었는데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빵 한 개로 모두 나누어먹었으니 미안해서라도 배가 안고팠겠지요....

그런데 수십명이 나누어 먹고도 남았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죽을 때도 '죽지 않았느니라 다시 부활하여 지금 천국에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이런 분이니라...

그러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교주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것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부풀리기는 커녕 사실대로라도 말하지 않아요.

부처님은 난타를 데리고 천국에 올라가서 구경시켜주고

지옥에도 들어가서 구경시켜주었어요.......

누가 천국과 지옥을 가보았겠어요? 부처님과 난타입니다. 그래도 불자들은 가만있잖아요.

왜냐? 불교는 해도 했다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몸도 허망한 몸이라 그것을 보고 부처를 보았다 하면 야단치고 난리나요.

성깔있는 선사라면 '쌍놈아~~~너 언제 철이 들래?'

그딴 것으로 부처라고 한다면

너는 연원히 그런 똥덩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놈 신세 못면한다...

라고 호되게 야단쳐요....

하옇튼 32상 80종호는 다 명칭이고 특이하다고 존경하고 따라갈 것은 못되고....

집착할 것도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다 실없는 명칭일 뿐입니다.

第19. 法界通化分 (법계를 다 교화하다)

 

須菩堤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 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

수보리 어의운하. 약유인 만삼천대천 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 이

 

是因緣 得福多不. 如是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甚多. 須菩堤, 若福

시인연 득복다부. 여시세존 차인 이시인연 득복심다. 수보리, 약복

 

德有實 如來佛說 得福德多 以福德無故 如來說 得福德多.

덕유실 여래불설 득복덕다 이복덕무고 여래설 득복덕다.

 

온세상을 교화하시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남에게 베풀면 이 인연으로 얻은 복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이 매우 많습니다. "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하지 않았느니라.

복덕이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여래가 많다고 했느니라. "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서 보시에 쓴다면

이사람이 이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매우 많겠습니다"

비슷한 말이 몇번 나왔으니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삼천 대천 세계는 우주를 말합니다.

칠보는 일곱가지 보물이에요

금.은.유리.자거.적주.만호. 다이아몬드....등등

이러한 보물이 우주에가득있는데 그것이 모두 내것이라면.

그리고 그 것을 다 남에게 베풀어 주었다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았다면. 눈 어두운 사람이 눈을 뜨고 .

배고푼 사람이 배부르고. 집없는 사람이 집을 사고. 옷없는 사람이 옷을 얻고...

등등해서 모두 도움을 받았다면. 눈 어두운 사람이 눈을 뜨고.

배고푼 사람이 배부르고. 집없는 사람 집을 사고, 옷이 없는 사람 옷을 얻고....

등등해서 모두 도움을 받았다면 얻을 복덕이 많겠느냐? 하고 물었어요.

그러면 어때요? 많아요? 지은 바 복덕이 많겟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할까요?

네, 그러니까 복덕이 없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만약 누가 복을 짓고는 조금이라도 했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복이 되지 않아요.

전혀 지은 바 복이 없습니다. 그래야 진짜 복이 됩니다

그런데 '복이 없습니다' 이래야 하는데. 수보리는 '얻을 복이 많습니다' 하고 대답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미리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복지은 사람은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다고 한 것입니다.

한 단계를 뛰어넘었어요. 원래는 얻을 복이 없습니다 이래야 하는데

한 단계를 넘어서 그 사람은 복을 지음이 많고 그러니까 얻음이 많습니다 라고 말했어요.

한 단계를 넘어서 ....이 말 이해하세요? 중간을 생략하였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받을 복이 없습니다 하고 먼저 나와야 하는데....

받을 복이 없어야 그 복이 진짜 복입니다 하고 말해야 하는데

매우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고 먼저 말했다 그 말입니다.

일종의 도치법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수보리와 부처님과의 대화중에 두 분은 어떻게 말해도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한해요. 우주에 가득한 칠보를 다 베풀어주었을 때 그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많으냐?

하고 물은 것에

아니오? 전혀 복을 얻지 못합니다 라고 말해도 부처님은 통하고

네, 매우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해도 부처님은 통해요

부처님은 많다와 없다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많다 했을 때는 없기 때문에 많다로 알아들으시고

없다 하면 원래 없기 때문에 없다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알아들어요.

희한하죠 부처님은 누가 아프다 해도 통하고

안 아프다 해도 통해요 슬프다 해도 그렇구나 하시고 안 슬프다 해도 그렇구나 하셔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무엇이든지 이해하는 분입니다.

선사들도 같은 내용을 가지고 전혀 다르게 말하는 수가 있어요.

제자에게 나중에 법을 부탁할 때 '네가 앞으로 불법을 잘 펴거라....'

이렇게 말하는 선사가 있고

'네 대에서 내 법이 끊어지는구나....'하고 말하는 선사가 있어요.

그런데 이것도 두 말이 같은 뜻입니다.

다 불법을 부탁 한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같은 말이라도 때에 따라 다르게 써요.

선생님이 이 때에는 이렇게 말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말해야지 하고 말해보았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선사를 본분작가(本分作家)라고 합니다.

작가(作家)란 무엇입니까?

사람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을 자유자재로 쓴다고 해서 작가여요.

지금 시대와 옛 시대가 다르니까

지금 시대에는 지금에 맞는 방법으로 깨닫게 하고

옛 시대는 그럴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해도 되니까 이렇게 해야돼....하고 생각해서

자기식의 가르침과 할과 방을 쓰죠....

그래서 임제스님은 할(喝:소리지름)을 잘 썼고

덕산 스님은 방을 잘 썼고. 방(榜주장자방)

조주스님은 짧은 말로 깨닫게 하였고

구지선사는 누구든지 오면 손가락을 들어서 가르쳤어요.

이렇게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쓴다 하여 작가여요.

그리고 가능하면 옛 선사들의 방식을 안씁니다.

왜냐면 그렇게 하면 다 책을 외운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점검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자기만의 방식을 쓰죠.

그러니까 같은 질문에도 어떤 선사는 그렇다 하는데 어떤 선사는 아니다 해요.

다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고 결국 다 맞는 말이고 상통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수보리와 부처님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많다와 없다는 같은 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 어패가 있는 말처럼 들리겠으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많다와 없다는 같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을진대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으련만

복덕은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느니라.

중간에 무엇이 빠진 느낌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경전이고 하권은 상권의 연속이라

다소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사실 많다는 말은 수보리가 했지 부처님께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기가 한 말처럼 말하고 있어요.

내가 혹시 많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복덕이란 실다움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아라.

복덕은 없느니라.

네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너는 전혀 좋은 복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네가 좋은 일을 하였더라도 전혀 기대하지 말고

했다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런 꿈도 꾸지 말아라.

넌 전혀 한 것이 없느니라,

그래서 정말 그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전혀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잊어 버렸다면

그 일을 잊어 버렸다면........ 바로 그때가 네가 복을 받을 때이다.

정말 네가 캄캄하게 잊고 있다면.... 전혀 바라지도 않고

했다고 남에게 말도 안하고 생각도 안하고 있다면 .....바로 그때 네가 복을 받는다

그런데 네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스님이나 부처님께서 '보살님, 이렇게 봉사를 많이 하고 계시니 틀림없이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 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복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말은 보살님께서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도 한 것을 잊어버리고 계시니

큰 복이 되실 것입니다 라는 말과 같아요.

큰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복 지으신 것 잊어버리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많다 했을 때는 복이 없기 때문에 많다고 말하신 것입니다.

왜냐? 마음에 조금도 지었다는 상이 없어야 진짜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第18. 一體同觀分 (한 몸으로 동일하게 봄)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堤, 於意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수보리, 어의

 

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世尊, 如來有天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蕙

운하 여래유천안부. 여시세존, 여래유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

 

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蕙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世

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 여시세

 

尊 如來有法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

존 여래유법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불

 

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 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世尊, 如來

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 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여시세존, 여래

 

說是沙. 須菩堤, 於意云何 如一恒河 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

설시사.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 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

 

恒河 所有沙數 佛說世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 須菩堤 爾所

항하 소유사수 불설세여시 영위다부. 심다 세존 불고 수보리 이소

 

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堤,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시명위심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수보리야, 여래는 육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천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혜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법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불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하여 부처님이 설명하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그 모래를 설명하셨습니다. "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수 같은 항하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수와 같은 수의

삼천대천세계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이러한 많은 수의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가지가지 마음을 여래께서는 다 아시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설하신 마음이라는 것은 전부 분별하여 생기는 것이며, 그것을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느니라. 때문에 수보리야 마음은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肉眼)이란 고기눈이라는 말로서 보통 사람의 눈입니다.

당연히 부처님은 육안이 있겠지요.

여기서 부처님의 5안이 나옵니다.

보통 사람은 눈이 한 개인데 부처님은 5개나 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천안(天眼)은 하늘의 눈인데 세상을 다 보는 눈입니다.

하늘 자체가 부처님의 눈입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약간 위도 하늘이니까

허공이 즉 부처님의 눈이라는 말이고 허공은 어디고 없는 곳이 없으니까

부처님은 세상을 다 본다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6가지 신통중에 하나가 천안입니다.

그러니까 다 숨겨도 부처님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다 알고 다 보십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혜안(慧眼)은 지혜의 눈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혜안인데 천안이나 불안 등은 부처님만 가지고 있는 신통이므로

감히 따라갈 수 없으나 혜안은 누구든지 얻을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믿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통달한다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혜안입니다.

참선을 많이 하고 경을 많이 읽고 염불을 많이 하면 저절로 얻어지기도 합니다.

매사를 지혜로 보는 눈입니다. 반야심경에 (不垢不淨)이라했어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니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사실을 알려준 말씀입니다.

우선 이것이 확실히 그렇다 이해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명예는 한낱 꿈과 같고 허망한 것입니다.

불교계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좋은 어느 스님은 가끔 엣세이를 쓰는데

거기에 보면 간혹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혜안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고요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한 생각 일으켜서 고독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바뻐서 생각을 일으킬 시간이 없다고 가정해보세요.

정신이 지금 매우 바쁜데 고독한 감정을 낼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고독을 모르고 살 것입니다.

만약 고독한 존재라면 바쁘거나 안바쁘거나 항상 고독해야 해요.

인간의 마음이 원래 고독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고요하고 생각이 일어났을 때는 고독하다면

생각이 고독을 부르는 것이지 고독해서 고독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스님은 산 속에서 워낙 혼자 오래 살았어요.

해질무렵도 혼자....

한 밤중에도 혼자....

아침에도 혼자....

낮에도 혼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늘 고독을 느끼고 살지요.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 고독한 것이지

인간이 원래 고독하다고 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고요합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원래 고독이면 늘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고독은 시간이 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끊고 대무심에 들어가지 않고 일상사 느낌에

안주하면 절대 고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명예는 한낱 물거품같고 허망한 것입니다.

그럴바에는 편안하게 좋은 친구 만나서 함께 살아도 되련만

그러면 한순간에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염두도 내지 않고

낼 모래 죽을 나이에 이제 친구 만나서 적응하면서 산다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그래서 혼자 사는데 ..그럴바에는 이제라도 철저히 무심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놔두고 죽으면 다음 생에 다시 생각을 일으키는 윤회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안 되고 일반인이 되면 차라리 편해요.

명예는 없지만 언제라도 장가갈 수 있고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고.....

일이 있고....친구가 있고 그렇다보면 외로울 시간이 없지요.

명예는 허망한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을 때 유명해져요.

장가가지 않고 스님이 부인도 없이 혼자 산골짜기에 살면서

지내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명예 뿐더러 스님 말씀대로 다 허망 하지요!

그래서 알아주고 훌륭하다고 해요.

그런데 이것에 따라가는 사람도 헛된 것을 찾아가는 사람이고

이것을 훌륭하다고 존경하는 사람도 헛된 꿈에 빠져있는 사람이어요.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그러셨는데

그것이 무슨 그리 존경받고 훌륭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그러한 일일뿐.... 존경받은 일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산속에서 혼자 사시지 않았어요.

대중과 함께 사셨지요.

부처님은 그렇게 사람을 피해 숨어사는 것도 인위적이고 헛된 것임을 아셨어요.

바로 혜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매사를 지혜의 눈으로 봐요.

그래서 어떤 것도 똑같을 뿐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장가를 10번간 노인이 있고

단 한 번도 안간 스님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스님이 존경스럽겠으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요.

똑같이 봅니다. 누가 청정하고 더러운 것은 없어요.

사람은 다 같아요. 평등하게 보고 대우해요.

그러니까 헛된 명예를 버린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명예란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므로

왕이 되고 세계대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냥 자기의 길을 가기를 원했죠.

그래서 당신의 길을 간 것입니다.

혜안이란 바로 보는 눈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아주 조그마한 모래처럼 보여요.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이 혜안을 얻는 것이 꿈입니다.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는 눈! 진실에 입각하여 보는 눈!

자기의 감정에 빠지거나 독단적이지 않고 보는 눈!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눈!

이것이 청정한 눈이요, 부처님의 눈이고, 혜안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법안이 있습니다.

법안(法眼)은 진리의 눈이지요.

진리로 보는 눈입니다.

언듯보면 혜안과 진리의 눈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약간 다릅니다.

혜안은 응용의 눈이고요. 진리의 눈은 진실대로 보는 눈입니다.

그러니까 좀 쌀쌀맞겠죠.

철칙대로 보니까....냉정해요.

글자 그대로 법칙대로 보는 눈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냉철함이 있어야 해요.

사견이 붙으면 안되고 어디서 보아도 진실어야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어디서 보아도 올바른 시각입니다.

여기 금강경도 누가 읽어도 손색이 없는 경입니다.

아직까지 금강경을 읽고 비판하는 사람없습니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설득력있는 말씀이죠.

이런 냉철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눈이 법안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佛眼)은 부처님의 눈입니다.

▶ 부처=붓다=깨달은 사람=覺者

깨달은 자의 눈입니다.

일체 모든 진리를 깨달으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중생을 보되 안타깝게 보고 자비한 눈으로 보고

편안한 눈으로 보지요.

욕심이 없는 눈이고 분노가 없는 눈이고

시기가 없고, 미움이 없는 편안한 눈입니다.

사람들이 부처님의 눈을 보기만 해도 편안해져요.

선량한 눈!

때묻지 않은 눈!

자비를 간직한 눈!

동요심이 없는 눈!

가장 편안한 사람의 눈이 바로 부처님의 눈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의 눈이 부처님의 눈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미 이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단지 마음을 쉬면 그 눈이 드러나나

마음이 움직이면 탁한 눈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은 깨닫는 순간 일어나는 생각을 싹 밀어버리고

다시는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무엇을 아는 데에 있지 않아요.

자꾸 깨달음을 무얼 많이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기회에 고치세요.

아는 것이 아니고 순간 버리는 것입니다.

순간 어리석은 생각을 확 밀어버려서 다시는 동요되지 않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옐들어 의사가 당신 "폐암 4기요!" 했을 때

당사자는 순간 싹 바뀌어져요.

자신에 대하여 엄청난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 뒤부터 2갑씩 피우던 담배를 요구하는 마음을 확 밀어버려요.

단번에 끊습니다. 연습이 필요없어요.

자기 몸의 상태를 깨닫는 순간 확 바꿔요.

단번에.............

이처럼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순간 확 인생이 바뀌면

깨달음이나 듣고도 시간이 지나자 도로 잊은 듯 하고

여전히 분별하고......... 더럽다 하고 깨끗하다 하고......

부자가 있고, 가난이 있고....... 미운 자가 있고 예쁜 자가 있으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천되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스님들은 산중에서 참선을 합니다.

참선할 때 화두 하나로 죽 밀어부치면

자유로운 자고 화두 생각했다가.....망상했다가.......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 하면

그러면 그것은 아직 자기를 맘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어요.

아무리 깨달아도 무슨 일이 닦치면 동요해요.

예를 들어 친구가 돈떼먹고 도망가면 ....... 속에서 열불이 나요.

그것도 한 2억 떼먹고....내 집문서 다 팔아먹어서 ....

나는 자식과 부인과 거리에 나앉고 그놈은 어디가서 행복하게 잘 산다하면

전국을 그 놈 찾아다니면서 혈안이 되어요.

그때는 아무리 인생이 꿈이라고 주문을 걸어보아야 소용없고

그동안 다니면서 도반들에게 뭘 안다고 떠들던 것도 다 허사고....

마음은 연일 분하고....죽고 싶고....술마시고 싶고.... 이래요.

그래서 결국 폐인이 됩니다.

화두 들때 나타나는 망상이 대표적인 무의식이요,

전생의 업보입니다.

이것을 확 밀어내지 않으면 절대 자기를 맘대로 끌고 가는 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일이 생겼을 때 아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서 확 깨닫지 못했으면 하루종일 화두로써 망상을 제거하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경계를 못 만나니까 화두할 때 망상을 경계삼아 물리치죠.

화두들 때 망상에 끌려가는 마음으로는

절대 무엇을 알아도 알았다 할 수 없습니다.

알면 무얼합니까. 행동이 안되는 것을.........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순간 깨달아서 생각과 망상을 확 밀어버리라고 하는 것이고

아니면 화두 공부해서 망상을 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해야 하고

한 곳에 모아야 되므로 공부할 때는 다른 것은 다 중요하지 않고

이것만 중요하다 해야 해요.

일할 때만 빼고, 걸으나, 가나, 앉으나....누우나.....

해서 화두 지속이 길어지면 자기를 좀 맘대로 하는 경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끊어지지 않는 일행삼매를 얻는 것이 오래 수행해야 얻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경험자들이 다 한결같이 7일에서 1달이나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했어요.

그렇지 못한 것은 마음이 진실하지 못해서 그래요.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가운데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설하신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한 항하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이 이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이 많은 항하에 있는 바 모래수 만큼의 불세계가 있다면 이는 얼마나 많음이 되겠느냐?"

"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가지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아무리 가지 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하여도

부처님은 이 5안으로 다 알고 다 봅니다.

그래서 손오공을 부처님의 손바닥 안이라고 했어요.

5안이면 그 누구도 숨길 수 없고 감출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많이 알았다해도

그가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처님은 압니다.

한번 턱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내려지는데

그걸 못내려놓고 명예에....재산에.....사랑에....생각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진리가 안보여요. 그러니 깨달을 수도 없지요.

명예....재산.....사랑....정의로움....이런 것들은

모두 허망한 의미들입니다.

이것을 잡으려고 하다가는 더 큰 행복은 놓치고 말아요.

작은 것을 가져 행복하려다가 큰 불행을 만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매일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으시고

기도가 안되고 화두가 안되면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참회하시고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발원하면서 해보세요.

그러면 부처님과 보살을 감동시켜서 감응하여 반드시 들어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 무심 삼매에 들어가면 그 뒤에는 쉬워집니다.

일사천리로 하나를 들으면 그것만 있어요.

시간이 지나감을 못느끼고...

고요한 심성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화두와 하나가 되어요.

그때 모든 것이 드러나지요.

탁수가 가라앉았을 때 물 밑의 것이 나타나듯이 모든 것이 드러나요.

그래서 이것은 쉬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했어요.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이 모든 마음을 낱낱히 다 아시는 것은 마음을 형체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체로 본다면 각양각색의 모양을 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다 못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형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근원을 보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다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름일 뿐이고 마음을 마음이라고 하면 안되요.

마음은 이름이고 그 실체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확실히 보고 깨달았으면 일체 중생의 마음이 보여요.

왜냐면 중생의 마음은 모두 빈 마음에서 선설된 것이라

근원을 알면 거기서 생긴 것은 다 알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한 마디 척 들어보면 저 사람이 병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어느 때는 눈만 보아도 알아요. 눈도 말하기 때문이어요.

화두를 깨달으면 제일 먼저 보여지는 것이 중생의 심리상태여요.

척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다 알아요.

아무리 이론을 세우고 자기를 감추어도 근원에 들어간 사람 앞에서는 자기가 다 들어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마치 산 꼭데기에서 내려다 보는 것과 같아요.

밑에 있는 사람은 위에 있는 사람을 모르나 위에 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을 알아요.

누가 말해도 객관적이고 고요해요.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부처님은 아무도 속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남들이 보지 못했던 곳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신 것이 바로 경의 진리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해서 부처님처럼 다 알고 다 봐서 고요하고 행복을 얻은 사람이 됩시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마음에 대한 설명이네요.

금강경에서 유명한 말입니다.

한자로 말하면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임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모두 외우세요

과거 현재 미래로 외우면 됩니다.

과거의 마음은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볼 수 없죠

미래의 마음은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알 수 없고....

현재라고 하지만 금방 과거로 가니..무엇을 현재심이라고 해야할까요?

설사 어떤 사람이 현재의 내 마음을 보았다고 하여도...

천신만고 끝에 마음을 잡아서...마음을 중지시켰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마음을 볼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마음에 때가 뭍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본 것은 마음을 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은 아무도 볼 수 없어요.

오직 깨달은 사람만 마음에 대하여 확실히 알아요.

그러니까 마음은 볼 수는 없어도 깨달아 알 수는 있습니다.

아, 이것이 마음이구나 하고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설사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틀려요. 형체가 없는데 무엇을 압니까?

그러나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하고 깨달아서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들여다 보고 자기의 성품인 마음을 깨달은 것이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마음입니다.

자기를 보고 있다가 어느날 깨달으세요.

아무개야 하고 부를 때 대답하는 그 자가 바로 마음이어요.

우리는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 마음을 깨달을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체가 없다는 것은 비었다는 것이고

비었다는 것은 자기 성품이 자기 본질이 비었다는 것이니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자기는 원래 무심이요, 무아라는 것을 깨달으세요.

그렇다면..그렇게 비었다면 어떻게 마음을 얻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은 마음이라는 이름뿐이지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 하였어요.

그 이유로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은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뭘 아는 것은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알잖아요.

알았으면 바로 마음이 비었음을 아시고 한 생각도 내지 마시고 편안하게 사세요.

그러면 바로 여러분이 부처입니다.

만일 어떤 생각이든지 일으켜 세웠다 하면 자기 마음을 낸 것이 아냐요.

어떤 사람이 부인을 정말 사랑했어요.

그런데 그 부인이 연애때 나이타를 선물했습니다.

은으로 된 나이타인데 비싼거예요.

그것을 한번도 안잊어버리다가

한 20년쯤 지나서 어느날 잊어버렸어요.

항상 그것을 자랑하고 사랑의 징표라고 하고

담배필 때 꼭 가지고 다녔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런뒤 이 사람은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어요.

부인이 혹시 바람피지 않을까?

헤어지지 않을까?

그것을 잊을게 뭐야?

무슨 징조가 아닐까?

불안해서 대낮부터 술을 마셨어요.

그리고 저녁에 또 술마시고 나이타 생각만 해요.

친구들한테고....회사에서고....

자식에게도....네 엄마 나이타 잊어버렸당....

다음날 또 술먹고..... 다음날 또 술먹고.....

그러는 자기가 한심해서 술먹고.......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병입니다.

물건은 언제든지 떠나가요.

부인도 죽습니다.

자기도 죽고....

그런데 나이타가 뭐 대수여요.

그냥 잊으면 되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집착입니다.

건전하고 좋은 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병적인 집착이어요.

그래서 의처증이 있고.... 의부증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집착이잖아요.

그런 집착은 병입니다.

모두 한생각 일어난 것이고

그 생각을 방치하여 결국 병이 들었으니

나이타 잊어버리고 병을 만든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빈 마음이 자기인 줄 알고

필요한 것은 사용하되 필요치 않는 것은 일으키지 마세요.

자꾸 안된다고 하는데 잘 됩니다.

한번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하게 되어있어요.

자성 부처님의 위대한 능력이지요.

알면 됩니다. 그러니까 알면 끝이어요.

저것은 하수도 물이다......네....

너는 폐암 4기다!..........네.....

너는 이 나라의 왕자야!...........네....

너는 이 집안의 장손이다........네....

너는 바로 부처이다.........네....

모두 이렇게 알고 자기 처신에 맞는 행동을 하였지 따로 배운 것은 없어요.

알면 행(실천)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행하려고 하지 노력하지는 말아요.

한번 알면 어느 순간이든지 즉시 하는 것이지

하지는 않고 앉아서 해야지..해야지..해야죠..이러지 말아요.

언젠가 당신이 해야 깨달을 것입니다.

비가 새요. 부인이 "여보! 빨리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 좀 살펴봐요."

"응, 그래....해야지...." 그리고는 비 새는 것을 쳐다보면서

해야지.....해야지.....이래봐요. 그러면 비가 안샙니까?

언젠가는 일어나서 바로 사다리를 올려놓고 올라가야해요.

이렇게 행동만 필요하지 해야지.....해야지....이것은 필요없습니다.

바로 비워진 마음대로 살아야 습관되고 그쳐지고....바르게 잡아져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도 되고....

그러니까 마음이 빈 것을 바로 아시고 무심의 인생을 즉시 살아가세요.

중국에서 설봉 스님과 암두 스님을 깨닫게 했던 덕산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깨달을 때입니다.

이 스님은 원래 절에서 스님들에게 경을 가르치는 강사스님이었는데

10년간 금강경을 연구하여 주석서를 짓기도 하였으므로 성이 주(周)씨라, 사람들이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금강경 대가였습니다.

덕산 스님은 평소에 수많은 세월을 계를 지키고 닦아야 부처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남쪽에서 '마음이 곧 부처' 라고 하면서 이것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말도 안 되는 마구니들을 다 쳐부수리라 마음을 먹고 주석서를 짊어지고 남방으로 갔습니다.

처음 풍주(豊州) 땅에 도착하여 길거리에서 떡 파는 노파가 있기에

금강경 주석서를 내려놓고 떡을 사서 점심(點心)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노파가 물었습니다.

"등에 지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

"금강경 주석서요."

"내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만일 스님이 대답한다면 떡을 그냥 드리겠으나 대답 못한다면 다른 곳을 찾아가 먹도록 하십시오."

"묻기만 하시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마음에 점을 찍다)을 하시려고 하오? " 했어요.

점심은 점찍을 점자, 마음심자입니다. 원래 점심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어요.

아, 떡을 먹어야 겠구나 했을때

어디에다 '먹어야지....'하고 콕 찍었냐 그말입니다.

아, 배가 고프구나 했을 때

어디에서 한 생각 일어났는가 그말이어요.

과거, 현재, 미래중에 어디에서 순간 일어났습니까?

덕산 스님이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금강경을 십년씩이나 연구하고 배운 스님도 말을 못했어요.

그러자 노파가

"난 또 금강경 대가인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려, 그것을 알려면 용담(龍潭)스님에게 가보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대단한 노파죠?

중국의 선사열전을 보면 노파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럴 정도로 노파들이 불교를 열심히 신행했어요.

참선도 많이 했고....

모두 한소식 얻어서 당당하게 살다가 스님을 만나면 한번 시험해봐요.

제대로 아나, 모르나 하고요....이 노파처럼말야요.

우리나라도 빨리 그런 시대가 도래해야합니다

여러분이 다 깨달아서 언젠가 대한민국을 휘저을 것입니다.

여기 열심히 나오세요.

다른 데 가면 못깨달으나 여기 있으면 언젠가 깨달아요.

왜냐면 이것은 오래 되면 저절로 알게 되어있어요.

마치 안개에 젖듯이 차차 젖어서...나중에 마침내 다젖어버리듯이 부처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얼마전에 무불선원이라는 간판을 보고 누가 찾아왔어요.

교장하시던 노보살인데 나이가 83살인가 하데요

이동네 사는데 송광사 구산 스님 밑에서 한 10년 참선 공부했데요.

아주 열심히 했다고 하데요.

그래서 우리나라 전국 큰 스님한데 다 다니면서 법거래하고 ..그만하면 됐다 하고...인가를 받았데요

경봉스님, 전강스님, 향곡스님, 성철스님, 등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해요.

그분이 와서는 이동네에 공부하는 스님이 있다고 해서 왔데요.

그래서 한참 반갑고 해서 뭐라고 말해봤는데

다 좋았는데, 법을 논하고 아는 것은 다 좋았는데

자기가 다니던 절 스님이 뭘 잘못해서 신도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그때 자기는 신도 회장이었는데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아니었데요.

그말에 제가 그것 잘못하셨네요 그랬어요.

구산스님밑에서 공부하신 분이 어째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까? 했어요.

그 스님 나도 잘 아는 스님인데 장차 훌륭하게 될 스님인데

그런 것이 흠이 되면 안되잖아요.

잘못해도 그때 덮었으면 반성하고 크게 될 것인데

신문에 내고....프랑카드 내고 하는데 어찌 회장님이 보고만 있었습니까?

순간 소신이 흔들리셨네요 하고 지적해주었지요. 그랬더니 그렇다고 하데요.

공부는 일상사에 있어요. 어찌 머리 속에 아는 것이 공부이겠어요.

그런데 이 보살님이 제 법성게 강의 책을 달라해서

하나 드렸더니 한 7일후에 오더니 스님 공부가 많이 되셨데요

그런데 아직 더해야 합니다. 조금 더하세요. 해요. 그래서 제가 '네 감사합니다'

하고 더이상 말안했어요. 결국 서로 인정 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단한 노인이지요.

자기는 자기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아직도 한가지 해결되지 않은 것을 해결하겠다고

아직도 참선한데요. 그러면서 참선하는 스님 만나서 반갑다고 하면서 갔어요.

한참되었는데 요즘 연락이 없네요.

어찌 되었건 여러분이 여기 한참 나오면 젖습니다

반드시 깨달을 것이니까 열심히 나오세요.

노파에게 대답을 못하여 떡을 얻어먹지도 못한 덕산 스님은

바로 용담 스님 회상으로 갔습니다.

대개 남의 집안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도량에 들어서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 보여요.

덕산 스님은 여전히 오만을 버리지 못하고 용담 스님 도량에 들어가 한번 휙 돌아보더니

"용도 없고 연못도 없구먼. "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이 나타나서

"자네가 용담에 도착하였네.(子親到龍潭)" 하고 말했습니다.

용(龍)은 불교에서 상징입니다. 백수의 왕이죠.

마음에 한 점의 생각도 없어야 그것이 용이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용이 사는 연못이라는 말입니다.

덕산 스님은 용담 스님의 첫 법문을 들었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절하고 물러났습니다.

저녁에 다시 용담 스님을 찾아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선불교의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자 덕산 스님은 마음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경을 보고 불교를 이해한 사람은 끝까지 앎으로서 도(道)를 이해하려고 해요.

도는 앎을 떠나있는 것인데, 앎 이전에 있는 것은 도통 보지 못합니다.

선사는 바로 가는 사람이지만 제자는 둘러 가는 사람이라 그런 사람과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말로써는 더 이상 깨닫게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담 스님은 밤도 늦었으니 이제 처소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덕산 스님이 문밖을 나서니 캄캄하여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 와서 밖이 어둡다고 하니까,

용담 스님은 이때가 바로 덕산을 깨닫게 해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용담 스님이 굵은 초에 불을 밝혀서 내주었는데,

덕산 스님 받으려고 하자 용담 스님이 바로 훅 불어서 불을 꺼버렸습니다.

순간 덕산 스님은 무언가 보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덕산 스님이 절을 하자,

"네가 무엇을 보았기에 갑자기 절을 하느냐? "

"지금 이후로 다시는 천하 선지식 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이것이 바로 줄탁동기입니다.

제자가 불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마음도 동요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스승은 간단한 말이나 행동으로 제자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제자가 충분한데도 스승이 인도하지 않으면

제자는 깨달을 시기를 놓쳐 못 깨닫고 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승도 제자를 잘 만나야 하고 제자도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순간 덕산 스님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불이 꺼진 순간 무언가 보았습니다.

이 사실적인 가르침에 덕산 스님은 크게 깨닫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덕산 스님도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고

순간 선사를 잘 만나 깨달은 것이지요.

이것이 선불교입니다.

그때 무엇을 보았을까? 여러분도 한번 두고 두고 생각해보세요.

이튿날 용담 스님이 상당하여 법문을 하였습니다.

"만일 이빨은 칼로 된 숲과 같고 입은 시뻘겋게 크게 벌리며

한 방망이 얻어맞고도 뒤도 안 돌아보는 놈이 있다면 후일

그는 고봉정상에서 나의 도를 세울 것이다."

대단하잖아요.

이빨이 칼로 된 숲과 같다고 했으니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죠

살덩이들을 벨테니말입니다.

그러니까 입은 크게 벌리고 다물줄 몰라야 되요.

그런 상태에서 크게 한 방망이를 얻어맞아도 눈도 꿈쩍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나의 도를 알고 말리라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가 발만 밟아도....반응을 보이고...

힘들어죽겠는데 부탁하면 신경질석인 목소리로

보면 몰라! 하고 대뜸 소리칠턴데 입에 칼을 물고 누가 때려도 꿈쩍않는 자라야

그럴 정도의 굳건한 기백이 있는 자라야

그런 고집이 있고 세계가 무너져도 움직이지 않아야 이 도를 보리라...라는 말입니다.

용담 스님의 법문을 들은 덕산 스님은 드디어 금강경 주석서를 법당 앞에 놓고 횃불을 들고 말하였습니다.

"현묘한 변론을 다하여도 마치 넓은 허공에 하나의 털을 둔 것과 같고,

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을 모두 갖추었다 하여도

이는 큰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던지는 것과 같다. "

아무리 많이 알고 미묘한 법문을 쏟아내도 도의 세계,

진실의 세계에서는 한낱 티끌과 같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고 주석서를 다 태워버렸습니다.

아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그리 크게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훨씬 나으나 아는 것보다

아는 대로 실천됨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알지 말고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앎이나 깨달아 아는 것은 그 강도가 다릅니다.

물론 아는 것 하나로... 소신 하나로 성공한 사례도 많으나

그것은 모두 마음 외적인 것에서 그렇습니다.

즉, 재산을 일구고 명예를 얻는 일에는 아는 것이 성공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에는 아는 것과 소신은 오히려 병(病)이 됩니다.

그런 앎과 소신은 상대를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불행을 불러옵니다.

도는 아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다운 인생은 아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해집니다.

그런 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선 사람이 어찌 앎을 가만 두겠습니까?

모두 태워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마음을 비운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알고 즉시 버린 것입니다.

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자기를 향해 옵니다.

그토록 찾으러 다녔고 구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돈과 명예와 기타 것들이 일시에 내달려옵니다.

그래도 행복한 사람은 그런 것에 눈도 돌리지 않고 황금을 돌처럼 보듯이 보고 자기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리하여 중국 선불교에서 임제스님과 함께 덕산의 방(榜), 임제의 할(喝)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크게 사람을 교화한 인재가 나왔으니 그가 바로 덕산선감(德山宣鑑) 스님입니다.

그후 덕산 스님은 공부가 많이 되어 큰 스님들을 찾아뵈러 다녔는데 한번은 위산 스님 도량에 들어갔습니다.

바랑을 멘 채로 법당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뒤돌아보며 "없다, 없어!" 하고 말하고는 곧바로 나가버렸어요.

덕산 스님이 문 앞에 이르러서는 '경솔해서는 안되지' 하고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들어가 위산 스님을 뵈었습니다.

접객실에서 기다리다가 위산 스님이 들어와서 앉으려고 하자 마자,

덕산 스님이 방석을 집어들면서 "스님!" 하고 불렀습니다.

위산 스님이 불자를 집으려고 하자

덕산 스님이 큰 소리를 지르고는 소맷자락을 떨치고 나가버렸어요.

그리고는 법당을 뒤로하고 짚신을 신고 곧바로 떠나버렸습니다.

참 대단한 그릇입니다.

덕산 스님은 방석을 들고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였고 위산 스님은 또 무엇을 보았기에 불자를 들어 응대하려고 하였을까요?

(불자는 선사가 가르칠 때 사용하는 먼지털개처럼 생긴 것입니다.)

먼지털이개....알죠? 그것처럼 생겼어요. 휠씬 크죠

큰스님 영정에 보면 들고 있는 털이개가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어디 가서 함 보세요.

그런데 불자를 잡기도 전에 덕산 스님이 '꽥' 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나갔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무언가 선사들이 암중에서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원오 스님이 한 마디 붙이길

"불여우 같은 견해로다. 이 한 소리에 방편도 있고 진실로 있으며 관조(觀照)함도 있고 활용도 있다. 자유자재하기가 마치 구름을 몰고 안개를 움켜쥐려는 자들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것과 같다. " 라고 하였습니다. 원오 스님은 또 무엇을 보았을까요?

여기서 제가 한 마디 하자면,

위산 스님은 덕산 스님에게 속지 않았고 원오 스님은 덕산 스님에게 속았고

이 세 스님은 화살 하나에 모두 관통 당하였으므로 훗날 남에게 말 한번 변변하게 하지 못하였다 하겠습니다.

위산 스님이 저녁나절에 수좌에게 물었어요.

"아까 새로 찾아온 스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당시에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바로 떠났습니다."

"이 사람은 훗날 고봉정상에 암자를 짓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할 것이다."

라고 말했어요.

여기에 원오 스님이 또 한 마디 붙이길

"도적이 가버린 뒤에 활을 당기는군. 천하의 납승들이 덕산 스님을 뛰어넘지 못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덕산스님은 방석을 들고 스님! 하고 불렀고

위산 스님은 불자를 들려고 하자

덕산 스님이 즉시 꽥 하고 소리지르고 간 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덕산의 선기에 천하의 납승도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여기서 위산 스님은 어째서 덕산 스님이 훗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한다고 했겠습니까?

칭찬입니까? 꾸중입니까?

저보고 말하라 하면

"어허, 오늘이 3월 22일이네." 라고 말하겠습니다.

붓다들이여, 여러분에게 이미 이것을 아는 자가 내부에 있으니 꺼내놓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꺼내놓기만 한다면 물 위에서 아무리 달려도 신발이 젖지 않는 도리를 꽐꽐 쏟아낼 것입니다.

 

 

 

 

18. 一體同觀分 (일체동관분)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堤, 於意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수보리, 어의

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世尊, 如來有天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蕙

운하 여래유천안부. 여시세존, 여래유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

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蕙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世

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 여시세

尊 如來有法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

존 여래유법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불

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 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世尊, 如來

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 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여시세존, 여래

說是沙. 須菩堤, 於意云何 如一恒河 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

설시사.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 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

恒河 所有沙數 佛說世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 須菩堤 爾所

항하 소유사수 불설세여시 영위다부. 심다 세존 불고 수보리 이소

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堤,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시명위심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수보리야, 여래는 육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천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혜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법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불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하여 부처님이 설명하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그 모래를 설명하셨습니다. "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수 같은 항하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수와 같은 수의

삼천대천세계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이러한 많은 수의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가지가지 마음을 여래께서는 다 아시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설하신 마음이라는 것은 전부 분별하여 생기는 것이며, 그것을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느니라. 때문에 수보리야 마음은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18. 一體同觀分 (한 몸으로 동일하게 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肉眼)이란 고기눈이라는 말로서 보통 사람의 눈입니다.

당연히 부처님은 육안이 있겠지요.

여기서 부처님의 5안이 나옵니다.

보통 사람은 눈이 한 개인데 부처님은 5개나 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천안(天眼)은 하늘의 눈인데 세상을 다 보는 눈입니다.

하늘 자체가 부처님의 눈입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약간 위도 하늘이니까

허공이 즉 부처님의 눈이라는 말이고 허공은 어디고 없는 곳이 없으니까

부처님은 세상을 다 본다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6가지 신통중에 하나가 천안입니다.

그러니까 다 숨겨도 부처님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다 알고 다 보십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혜안(慧眼)은 지혜의 눈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혜안인데 천안이나 불안 등은

부처님만 가지고 있는 신통이므로 감히 따라갈 수 없으나 혜안은 누구든지 얻을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믿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통달한다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혜안입니다.

참선을 많이 하고 경을 많이 읽고 염불을 많이 하면 저절로 얻어지기도 합니다.

매사를 지혜로 보는 눈입니다. 반야심경에 (不垢不淨)이라했어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니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사실을 알려준 말씀입니다.

우선 이것이 확실히 그렇다 이해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명예는 한낱 꿈과 같고 허망한 것입니다.

불교계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좋은 어느 스님은 가끔 엣세이를 쓰는데

거기에 보면 간혹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혜안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고요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한 생각 일으켜서 고독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바뻐서 생각을 일으킬 시간이 없다고 가정해보세요.

정신이 지금 매우 바쁜데 고독한 감정을 낼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고독을 모르고 살 것입니다.

만약 고독한 존재라면 바쁘거나 안바쁘거나 항상 고독해야 해요.

인간의 마음이 원래 고독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고요하고 생각이 일어났을 때는 고독하다면

생각이 고독을 부르는 것이지 고독해서 고독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스님은 산 속에서 워낙 혼자 오래 살았어요.

해질무렵도 혼자...한 밤중에도 혼자...아침에도 혼자...낮에도 혼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늘 고독을 느끼고 살지요.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 고독한 것이지 인간이 원래 고독하다고 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고요합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원래 고독이면 늘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고독은 시간이 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끊고 대무심에 들어가지 않고

일상사 느낌에 안주하면 절대 고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명예는 한낱 물거품같고 허망한 것입니다.

그럴바에는 편안하게 좋은 친구 만나서 함께 살아도 되련만

그러면 한순간에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염두도 내지 않고 낼 모래 죽을 나이에 이제 친구 만나서 적응하면서 산다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그래서 혼자 사는데 ....그럴바에는 이제라도 철저히 무심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놔두고 죽으면 다음 생에 다시 생각을 일으키는 윤회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안 되고 일반인이 되면 차라리 편해요.

명예는 없지만 언제라도 장가갈 수 있고 ㅋㅋㅋㅋ 스님도 참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고.....

명예는 허망한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을 때 유명해져요.

장가가지 않고 스님이 부인도 없이 혼자 산골짜기에 살면서 지내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래서 알아주고 훌륭하다고 해요. 그런데 이것에 따라가는 사람도 헛된 것을 찾아가는 사람이고

이것을 훌륭하다고 존경하는 사람도 헛된 꿈에 빠져있는 사람이어요.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그러셨는데 그것이 무슨 그리 존경받고 훌륭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그러한 일일뿐.... 존경받은 일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산속에서 혼자 사시지 않았어요. 대중과 함께 사셨지요.

부처님은 그렇게 사람을 피해 숨어사는 것도 인위적이고 헛된 것임을 아셨어요.

바로 혜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매사를 지혜의 눈으로 봐요.

그래서 어떤 것도 똑같을 뿐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장가를 10번간 노인이 있고 단 한번도 안간 스님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스님이 존경스럽겠으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요. 똑같이 봅니다. 누가 청정하고 더러운 것은 없어요.

사람은 다 같아요. 평등하게 보고 대우해요. 그러니까 헛된 명예를 버린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명예란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므로 왕이 되고 세계대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냥 자기의 길을 가기를 원했죠. 그래서 당신의 길을 간 것입니다. 혜안이란 바로 보는 눈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아주 조그마한 모래처럼 보여요.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이 혜안을 얻는 것이 꿈입니다.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는 눈! 진실에 입각하여 보는 눈!

자기의 감정에 빠지거나 독단적이지 않고 보는 눈!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눈!

이것이 청정한 눈이요, 부처님의 눈이고, 혜안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법안이 있습니다.

법안(法眼)은 진리의 눈이지요. 진리로 보는 눈입니다.

언듯보면 혜안과 진리의 눈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약간 다릅니다.

혜안은 응용의 눈이고요. 진리의 눈은 진실대로 보는 눈입니다.

그러니까 좀 쌀쌀맞겠죠. 철칙대로 보니까....냉정해요. 글자 그대로 법칙대로 보는 눈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냉철함이 있어야 해요. 사견이 붙으면 안되고 어디서 보아도 진실어야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어디서 보아도 올바른 시각입니다.

여기 금강경도 누가 읽어도 손색이 없는 경입니다. 아직까지 금강경을 읽고 비판하는 사람없습니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설득력있는 말씀이죠. 이런 냉철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눈이 법안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佛眼)은 부처님의 눈입니다.

▶부처 = 붓다 = 깨달은 사람 = 覺者

깨달은 자의 눈입니다. 일체 모든 진리를 깨달으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중생을 보되 안타깝게 보고 자비한 눈으로 보고 편안한 눈으로 보지요.

욕심이 없는 눈이고 분노가 없는 눈이고 시기가 없고, 미움이 없는 편안한 눈입니다.

사람들이 부처님의 눈을 보기만 해도 편안해져요.

선량한 눈! 때묻지 않은 눈! 자비를 간직한 눈! 동요심이 없는 눈!

가장 편안한 사람의 눈이 바로 부처님의 눈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의 눈이 부처님의 눈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미 이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단지 마음을 쉬면 그 눈이 드러나나 마음이 움직이면 탁한 눈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은 깨닫는 순간 일어나는 생각을 싹 밀어버리고 다시는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무엇을 아는 데에 있지 않아요. 자꾸 깨달음을 무얼 많이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기회에 고치세요.

아는 것이 아니고 순간 버리는 것입니다.

순간 어리석은 생각을 확 밀어버려서 다시는 동요되지 않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옐들어 의사가 당신 "폐암 4기요!" 했을 때 당사자는 순간 싹 바뀌어져요.

자신에 대하여 엄청난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 뒤부터 2갑씩 피우던 담배를 요구하는 마음을 확 밀어버려요.

단번에 끊습니다. 연습이 필요없어요. 자기 몸의 상태를 깨닫는 순간 확 바꿔요.

단번에.............이처럼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순간 확 인생이 바뀌면

깨달음이나 듣고도 시간이 지나자 도로 잊은 듯 하고 여전히 분별하고.........

더럽다 하고 깨끗하다 하고...... 부자가 있고, 가난이 있고.......

미운 자가 있고 예쁜 자가 있으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천되는 것이 중요 하잖아요.

그래서 스님들은 산중에서 참선을 합니다.

참선할 때 화두 하나로 죽 밀어부치면 자유로운 자고.

화두 생각했다가.....망상했다가.......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 하면 ~

그러면 그것은 아직 자기를 맘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어요.

아무리 깨달아도 무슨 일이 닦치면 동요해요.

예를 들어 친구가 돈떼먹고 도망가면 ....... 속에서 열불이 나요.

그것도 한 2억 떼먹고....내 집문서 다 팔아먹어서 ....

나는 자식과 부인과 거리에 나앉고 그놈은 어디가서 행복하게 잘 산다하면

전국을 그 놈 찾아다니면서 혈안이 되어요.

그때는 아무리 인생이 꿈이라고 주문을 걸어보아야 소용없고

그동안 다니면서 도반들에게 뭘 안다고 떠들던 것도 다 허사고....

마음은 연일 분하고....죽고 싶고....술마시고 싶고.... 이래요.

그래서 결국 폐인이 됩니다.

화두 들때 나타나는 망상이 대표적인 무의식이요, 전생의 업보입니다.

이것을 확 밀어내지 않으면 절대 자기를 맘대로 끌고 가는 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일이 생겼을 때 아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서 확 깨닫지 못했으면 하루종일 화두로써 망상을 제거하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경계를 못 만나니까 화두할 때 망상을 경계삼아 물리치죠.

화두들 때 망상에 끌려가는 마음으로는 절대 무엇을 알아도 알았다 할 수 없습니다.

알면 무얼합니까. 행동이 안되는 것을.........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순간 깨달아서 생각과 망상을 확 밀어버리라고 하는 것이고

아니면 화두 공부해서 망상을 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해야 하고

한 곳에 모아야 되므로 공부할 때는 다른 것은 다 중요하지 않고 이것만 중요하다 해야 해요.

일할 때만 빼고, 걸으나, 가나, 앉으나....누우나.....

해서 화두 지속이 길어지면 자기를 좀 맘대로 하는 경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끊어지지 않는 일행삼매를 얻는 것이 오래 수행해야 얻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경험자들이 다 한결같이 7일에서 1달이나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했어요.

그렇지 못한 것은 마음이 진실하지 못해서 그래요.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가운데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설하신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한 항하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이 이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이 많은 항하에 있는 바 모래수 만큼의 불세계가 있다면 이는 얼마나 많음이 되겠느냐?"

"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가지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아무리 가지 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하여도 부처님은 이 5안으로 다 알고 다 봅니다.

그래서 손오공을 부처님의 손바닥 안이라고 했어요. 5안이면 그 누구도 숨길 수 없고 감출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많이 알았다해도 그가 깨달았는지 못깨달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처님은 압니다.

한번 턱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내려지는데 그걸 못내려놓고

명예에....재산에.....사랑에....생각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진리가 안보여요.

그러니 깨달을 수도 없지요. 명예....재산.....사랑....정의로움....이런 것들은

모두 허망한 의미들입니다. 이것을 잡으려고 하다가는 더 큰 행복은 놓치고 말아요.

작은 것을 가져 행복하려다가 큰 불행을 만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매일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으시고

기도가 안되고 화두가 안되면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참회하시고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발원하면서 해보세요.

그러면 부처님과 보살을 감동시켜서 감응하여 반드시 들어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 무심 삼매에 들어가면 그 뒤에는 쉬워집니다.

일사천리로 하나를 들으면 그것만 있어요. 시간이 지나감을 못느끼고...

고요한 심성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화두와 하나가 되어요.

그때 모든 것이 드러나지요. 탁수가 가라앉았을 때 물 밑의 것이 나타나듯이

모든 것이 드러나요. 그래서 이것은 쉬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했어요.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이 모든 마음을 낱낱히 다 아시는 것은 마음을 형체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체로 본다면 각양각색의 모양을 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다 못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형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근원을 보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다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름일 뿐이고 마음을 마음이라고 하면 안되요.

마음은 이름이고 그 실체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확실히 보고 깨달았으면 일체 중생의 마음이 보여요.

왜냐면 중생의 마음은 모두 빈 마음에서 선설된 것이라

근원을 알면 거기서 생긴 것은 다 알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한 마디 척 들어보면 저 사람이 병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어느 때는 눈만 보아도 알아요. 눈도 말하기 때문이어요.

화두를 깨달으면 제일 먼저 보여지는 것이 중생의 심리상태여요.

척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다 알아요.

아무리 이론을 세우고 자기를 감추어도 근원에 들어간 사람 앞에서는 자기가 다 들어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마치 산 꼭데기에서 내려다 보는 것과 같아요.

밑에 있는 사람은 위에 있는 사람을 모르나 위에 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을 알아요.

누가 말해도 객관적이고 고요해요.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부처님은 아무도 속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남들이 보지 못했던 곳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신 것이 바로 경의 진리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해서 부처님처럼 다 알고 다 봐서 고요하고 행복을 얻은 사람이 됩시다.

 

17. 究竟無我分 (구경무아분)

 

爾時 須菩堤百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 云何應住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선남자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堤 若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운하항복기심. 불고수보리 약선남자 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當生如是心 我應滅度 一切衆生滅度 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당생여시심 아응멸도 일체중생멸도 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 실멸도자,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 有我相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소이자하.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於然燈佛所 有法得 阿耨多羅三藐三菩堤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어연등불소 유법득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부.

不也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然

불야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어연

燈佛所 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若有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등불소 무유법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약유법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然燈佛 卽佛如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연등불 즉불여아수기 여어래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이실무유법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是故然燈佛 如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시고연등불 여아수기 작시언 여어래세 당득작불 호 석가모니.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若有人言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如來 所得 阿耨多羅三藐三菩堤

약유인언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여래 소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須菩堤, 所言一切法者卽非一切法

어시중 무실무허. 시고여래설일체법 개시불법. 수보리, 소언일체법자즉비일체법

是故名一切法. 須菩堤, 譬如人身長大. 須菩堤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 非大身

시고명일체법.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수보리언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 비대신

是名大身. 須菩堤, 菩薩亦如是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시명대신. 수보리, 보살역여시약작시언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하이고.

須菩堤, 實無有 法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須菩堤,

수보리, 실무유 법명위보살. 시고 불설일체법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보리,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약보살 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하이고.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장엄

是名莊嚴. 須菩堤, 若菩薩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시명장엄. 수보리, 약보살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결국은 나도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님,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아뇩다라삼보리심을 내면 그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며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다면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네 마음 속에 있는 분별을 모두 부처님께 바쳐라. 바치고 나면 네 마음이 그대로 비어 부처님의 광명이 있을뿐 그곳엔 제도 받을 한 중생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 보살이 나라는 생각이나 남이라는 생각이나 중생이라는 생각이나 수자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실제로 어떠한 법도 없으므로 어떤 것은 둬 두고, 어떤 것은 내버린다는 것이 아니고 몰밀어 바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연등불 계신 곳에서 법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내가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뜻을 이해한 바로는 연등불 계신 곳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했으리라 생각합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옳은 말이다. 수보리야, 실로 얻은 법이 없어서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하시되, 너는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될텐데 이름이 석가모니라고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라. 실제로 법이 없으므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 때문에, 연등부처님이 나에게 수기하시되, 너는 이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텐데 그 사람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셨느니라. 여래란 것은 모든 세상의 우주 뜻 그대로다 그 말이니라.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얻은 법이 없어서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여래께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설명하신 일체법이란 것은 모두 마음닦는 방법이니라. 우주를 집착하면 그대로 컴컴하고 우주를 활용하면 그대로 밝으니라. 그러니 일체법이란 것은 일체법이 아니고 이름이 일체법이니라. 비유컨대 사람의 육체가 크다는 것과 같으니라. "

 

수보리 여주되,

"세존님,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육체가 크다는 것은 곧, 큰 몸이 아니고 이것의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같아서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한다'하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 보살일 뿐이니라. 이런고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법은 모두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이런말을 하되 내가 부처님 세계를 장엄한다고 하면 이는 보살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부처님세계를 장엄한다 함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일뿐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나'라는 것이 없는 법을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진실한 보살이니라. "

 

 

17.究竟無我分(구경무아분/끝까지 我가 없음)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니, 어떻게 마땅히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리까.

하권이 시작되면서 전편처럼 수보리의 거듭된 질문부터 시작합니다.

금강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실 금강경은 이본(異本) 있었는데 여러 세월을 거치면서 각자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고

어느 땐가 부터는 서로 다른 경의 내용이 다 좋은 말씀이라 굳이 하나를 진본이라 판별하기 어려워서

하권이라고 명명하고 상권에 붙여 금강경이 상하권으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의 줄기가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것이 있어서 2가지를 다 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학자들은 원래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을 여러번 다른 곳에서 설법하셨기 때문에

그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설하여 이본이 있게 되었고 후대에 불교학자들은 그것을 같이 묶어서 상하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뜻은 같으면서도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이 하권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강의는 진도가 조금씩 빠르게 나가고자 합니다.

전편에서 설명된 부분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설명하겠으나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는 것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수보리는 재차 부처님께 질문합니다.

바로 금강경의 주제가 나온 것입니다.

금강경의 주제는 첫째 어디에 마음을 머무를 것인가, 둘째 어떻게 마음을 조복할 것인가 입니다.

조복하다는 것은 항복시키다는 뜻입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대한 이야기로 무상, 무위, 무정을 설법하셨습니다.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는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끝에 심자가 붙으면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구도심을 말해요.

구도심은 탐구하는 마음입니다. 화두는 우주의 진리를 알수 있는 단서입니다.

마치 수사관이 살인현장에서 찾은 머리카락을 하나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단서라고는 머리카락 하나뿐인데 도대체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는가.....

의심을 가지고 추적하는 것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로 살인자를 찾기란 참 난감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사관은 항상 질문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이 머리카락은 누구 것이고, 왜 여기에 있는가. 이 의심을 품고 머리카락을 가지고 과학 수사실에 들러서 DNA를 알아보고 혈액형을 알아보고 죽은 사람의 주변 사람을 일일히 찾아다니면서 머리카락을 채취합니다. 그러면서 왜 죽였나, 무슨 관계인가, 등을 계속 의심하면서 수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내고 살인 이유를 밝혀내고 살인자를 찾아 채포합니다.

바로 머리카락 하나가 모든 것을 알 수있는 단서가 된 것입니다.

그처럼 화두도 화두 하나가 비록 작은 사건에서 생겼지만 그렇게 말한 선사의 뜻이 담겨있어요.

그 선사의 뜻을 알면 선사가 깨달은 도의 세계도 알 수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경의 여러가지 말씀은 도를 아는 결정적인 주변 정황이 됩니다. 구도자는 경을 세밀히 살피면서 도가 나온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탐구하면서 화두가 풀리게 되고 동시에 우주의 근원을 알고 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라만상의 근원을 깨달아 알게 되면 사람이 저절로 바꿔지게 되어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달라요. 그래서 마음을 쓰는 것도 다르죠.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목적으로 설하셨습니다.

금강경을 듣다보면 저절로 깨달음에 근접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도의 세계에 젖어들어가요.

그러니까 깊이 몰두하고 재미있게 들어야 합니다.

강의를 듣는 사람과 내용이 일치되어야 해요.

우리가 007 영화를 보다 보면 저절로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만든 사람은 사람들이 거기에 홀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2시간을 다른 데 신경쓰지 않고 오직 영화에만 계속 주시하게 만들어요.

재미있게 본 것일 수록 나중에 끝나고 말하라 하면 다 내용을 외우고 말해요.

그처럼 금강경도 여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금강경 사상이 흡수되고 강의가 다 끝나면 자기도 모르게 부처님의 행이 나와요.

그때 당신 깨달았소? 하고 물으면 아니요.하고 저절로 말합니다. 전혀 깨달은 기억이 없어요.

그냥 안개처럼 젖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절로 무아의 행이 되고 무위의 행이 되고 무정(無定)의 행이 됩니다.

금강경은 3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무상(無相), 무위(無爲), 무정(無定)입니다.

▶ 무상-상(모양)을 세우지 마라.

▶ 무위-한 바가 없으라 (무심)

▶ 무정-정하지 마라. (무주)

이 3가지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저절로 행이 나옵니다. 3가지 행이 되면 바로 부처입니다.

원래 행이 되면 깨달음은 따로 필요 없어요.

깨달음은 깊이 깨닫고 행이 되라고 있는 것인데 이미 행이 실천되면

굳이 깨달아보아야 무슨 소용입니까

그러니까 깨달음도 필요없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지요.

안되는 사람이 깊이 깨닫고, 즉 반성하고 행하는 것이지 원래 되는 사람은

그냥 행하면 되지 깨달음이 왜 필요하겠어요.

금강경은 깨달음도 세우지 말고 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냥 진리를 설할 뿐 깨달으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행하라고만 해요. 그러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고 예로 부터 많은 선사들이 깨닫고 말았어요.

아~아~, 내가 많은 것을 세우고 있었구나..

그 모든 것이 다 허망한 것인데.내가 세우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했어.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 모든 선문답을 보면 다 보여요. 그래서 이 경을 크게 친 것입니다.

금강경이야 말로 자주 읽거나 그 깊은 뜻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주의 근원을 봐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상, 무위, 무정 3가지에 마음이 머물게 되고 이것으로 황소같은 고집을 꺽고

자기 마음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웠다는 상, 나이가 들었다는 상, 인텔리라는 상, 권력가라는 상, 부자라는 상,

가난하다는 상등을 다 버리고 정법이라는 상도 버리고 안다는 것도 버리고 모른다는 것도 버리고

마음이 그저 고요하게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경을 듣기 전에 자주 분노하던 것이 없어지고 자기가 얻은 것도 다 놔버려지고

기독교도 버려지고 불교도 버려지고 나도 버려지고 그저 고요할 뿐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다시 행이 되어요.

이 경을 보고 깨달은 사람은 굳이 화가 안나는 수련을 하지 않아도 화 낼 것이 없어집니다.

화낼 것이 없어지니까 화가 안나죠.

서운 할 것이 없어지니까 서운 한 것이 없어지고 그렇게 황소같이 한 곳에 집착하던 마음이 풀어지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마음이 자유자재로 나옵니다.

부드럽게, 강하게, 느슨하게, 편안하게, 엄하게 등이 필요한만큼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버리지 않고 에전의 그 마음을 다 써요. 필요한 때에 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화내는 에너지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연장을 사용하듯이 망치가 필요한 때에 못을 쓰면 안되잖아요.

도라이버가 필요한데 뺀찌가 왜 나오겠어요.

모든 연장이 일정하지 않듯이 사람의 마음 씀도 일정하지 않아요.

똑같이 써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달라야 합니다.

어떤 신도가 저에게 스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해요.

왜 자기하고는 밥도 먹으러 안가고 같이 차도 안타려고 하고 농담도 안하냐고 해요.

그런데 여러분이나 저나 마찬가지여요. 아무하고 농담합니까? 그렇게 되던가요?

그래서 제가 아무하고나 농담하나? 했더니 왜 자기는 안사랑하고 누구만 사랑하냐고 해요.

그래서 니는 꼴통이래서 사랑할 수가 없다 하니까 왜 꼴통이냐고 해요.

이 사람은 나에게 전혀 개인적인 감정이 없는데 너는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안된다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가 좋아하면 안되냐고 해요. 안되지 했더니 왜냐고 물어요.

그걸 모르니까 넌 골통이야 그래서 그래. 네가 세상에서 젤 이쁘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널 좋아해야 하냐?

내가 싫을 수도 있지, 난 너같은 여자 싫어해! 그랬더니 뒤로 돌아가서 확 끌어안으면서 스님~ 해요.

그래서 봐라, 이 미친갱이야 넌 그러니까 내가 싫어하지 딴 사람이 어디 그런 사람 있디? 놔라, 이 손

그런데 얼마나 쎄게 잡고 안놔주는지 내가 소리 소리 지르다가 안되서 이 쌍년아, 저리 꺼져라.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

그러더니 얼마후에 누구 이름을 대면서 그 사람 좋아하냐고 묻길래...

내가 막 뭐라고 하니까, 잘못했다고 빌어요....

가라,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했는데 또 계속 따라다니면서 잘못했데요.....

아이고, 내가 원 전생에 무슨 죄가 있는지.... 아주 거머리야요.

그래도 그 사람을 용서해주면 안되겠더라구요.

계속 가라고 했는데도 귀찮게 그래요. 그런데 마침 할머니가 저녁 먹으래요.

그래서 부엌으로 도망갔는데 남 밥 먹는데 옆에서 용서해주래요.

그래서 확 밥상을 엎어버리고 미친년 지랄하고 있네 하고 2층으로 올라갔어요.

그렇게 해서 그날은 갔는데.....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요.

그렇게 마음을 쓰지 않으면 걔한테 내내 글려다녔을 거야요.

사실 저는 내 평생 첨으로 그렇게 화내봤어요.

그 사람은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가부다 하겠으나 그것이 여잘 떼는 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다른 방법도 있겠으나 그날은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고

이 물귀신 같은 애는 단단히 해놔야 된다라는 생각만 들어요.

그런데 자기의 행동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동네에 다니면서 나를 욕하고 다닌데요. 돌 중이라고하고, 날 보고 진실하지 않다고 하고, 편가르기 한다 하고.그래도 지금 생각해도 잘한거예요. 왜냐면 부드럽게 자꾸 말하고 하면 그런 사람은 끝이 없어요.

또 만나주어야 하고, 하나가 끝나면 또 무슨 이유로 찾아오고.그것을 해결해주면 며칠 있다가 또 찾아오고..... 하옇튼 저녁마다 대문에 불이나요. 물론 좋은 방법도 있겠으나 저는 다른 방법은 잘 몰라요. 그런 방법이 효과적이고 빠르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사람은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강경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줍니다.

상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사용하게 되요.

내가 스님이 되어가지고....이런 것을 쓰면 되겠어....라는 생각이 없어지죠.

참으로 비워진 자는 무엇이든지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잘 써야 합니다.

아무 때나 화내고 짜증내면 금강경을 안다고 할 수없어요.

먼저 마음에서 분노가 없어야 해요. 그리고 사용을 해야하죠.

만약 그날 마음에 분노가 있었으면 그것은 실패하게 됩니다.

왜냐면 화는 화를 부르게 되어있으므로 한번 화가 나면 께속 화가 치솟아 결국 사람을 다치게 해요.

약간이라도 피를 보죠. 그러면 그것은 사용이 아니고 분노야요. 나쁘게 결과가 나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화를 내도 내부에 화가 안나면 사람을 다치게는 안해요.

분노를 잘 사용하죠. 분노는 결국 좋으라고 내는 것이니까요.

욕을 해도 심한 욕은 안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공부입니다.

삶이 그대로 공부이고 인생이고 시험장이죠.

분노 가운데서도 강약이 있고 부드럽게 하는데서도 강약이 있어요.

그러니까 닦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분노가 일지 않게 해요.

그러나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가에서는 마음을 사용하라고 하죠. 사용하는 순간에도 깨어있으라 해요.

그렇게 해서 분노의 에너지를 적합한 것에 사용하게 해요.

그러나 깨달은 사람도 시간이 오래되면 닦은 사람처럼 저절로 분노가 없어집니다.

완전히 분노의 습관이 사라지죠. 그래서 마음이 항상 고요해져요.

경이 번역이 좀 어렵게 되었지만 결국 누구를 제도하거나 인도해도 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금강경의 행심입니다. 금강경은 설사 제도뿐만아니라 모든 것을 그렇게 하라고 해요.

깨달아도 깨달았다 하지말고 무엇을 알아도 알았다 하지 말고 부자래도 부자라 하지 말고

가난해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내지 마라해요. 왜냐면 세상은 사람의 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꿈은 원래 허망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인간의 꿈이 말보다 빠르고 편한 것으로 이동했으면 하는 꿈이 자동차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자동차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불편을 겪고 삽니까.

예전에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겁내었지만 지금은 자동차 사고를 겁내고 다니잖아요.

게다가 매연이며 교통마비를 생각해보세요.

자동차라는 꿈 때문에 우리는 너무 많은 희생을 하고 삽니다.

꿈 자체가 허망한 것이라 꿈에서 나온 것은 다 불안전한 이상이지 완전한 이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꿈에 어린 아이가 예뻐서 안아주고 업어주면 다음날 근심이 생겨요.

아이들은 천진하고 좋잖아요. 그러나 꿈은 그것을 근심으로 나타내요.

그러니까 꿈속에서는 그럴 듯해보여도 현실에서는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 꿈이 현실에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이 일이 많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니가 세상은 인간의 꿈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런 꿈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어찌 그리 대단하겟어요.

가난해도 부귀해도 승리해도 져도 한갖 풀잎에 스치는 바람 정도 밖에 안되는 것들입니다.

그러하니 어찌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고 말하겠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네가 무엇을 해도 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도 말고 말도 하지말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불자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마음에 전혀 상이 없어야 불자이지 마음에 각종 똥덩이로 가득하다면 무슨 불자이겠습니까?

그래서 절에 가면 스님에게 3배하라고 했어요.

먼저 너를 버려라. 너와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려라.

너의 목을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께 맡겨라. 너의 목을 스님께 바쳐라.

스님~ 제 목을 가져가세요.... 이것이 절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입문해야 불자입니다.

그렇게 버리면 큰 것을 얻어요. 세상을 큰 눈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리죠.

만약 자기라는 상과 자존심, 그리고 명문대에 다녔다는 오만, 큰 스님에게서 법병을 받았다는 오만

이런 것을 가지고 다니면 그는 불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했어도.....항상 안 한듯해야 하고

항상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고 평등하게 볼 것이지 매이커를 보고 차별하고 가리고 하면 불자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살하고는 천리나 다르죠.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 아니니라.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입니다.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에 심자가 붙으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심이 되는데 최상의 개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입니다. 아까 구도심이라고 했죠? 그런데 부처님은 세상에서 무엇을 얻겠다고.....

어떤 완벽한 법이 있어서 그것을 깨닫겠다고 보리심을 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해요. 사람은 곧 붓다입니다.

이 선언은 틀림없이 미래가 될수록 반짝 반짝 빛나는 선언이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불교는 1천년전의 생각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있어요.

오히려 퇴보했어요. 돈오법이 거의 사장될뻔 했습니다. 경허스님이 다시 부활시켰죠.

앞으로는 크게 알려질 것입니다. 거기다가 한발 더나아가서 더욱 진보할거라고 확신합니다.

왜냐면 선가의 '사람이 곧 부처' 라는 이 선언은 미래인에게 아주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은 스님들이 대우받고 살지만 앞으로는 어떻겠어요?

누가 스님을 대우하겠습니까? 다 같은 사람으로 보는데 마치 서양처럼 말입니다.

옷만 다르지 누가 특별하다고 대우하겠어요. 갈수록 평등해지고 보통 사람 그 자체가 높아집니다.

이젠 큰 스님도 사회에 나와서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거나

아니면 깊은 산속에서 따로 별도의 세계에서 살아야할 때가 올 것입니다.

부처님은 특별한 법을 세우지 않았어요.

아니, 법이라는 것 자체를 하나도 세운 것이 없습니다. 특별한 법이 없음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일정한 법은 곧 무너져요. 세상이 꿈인데 거기서 무슨 말인들 진실이겠어요.

꿈 자체가 허망한 것인데 무엇이 법이요, 무엇이 진실이겠습니까?

부처님은 세상에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이라는 의미도 사라가는 의미도 진실이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법이라고 내세우겠습니까?

만약 누가 깨달을 것이 따로 있다 하면 부처님과 정면으로 위배되요.

기차를 타고 있으면서는 절대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가는 마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공도 진실이 아니라니까...진실 자체를 찾지말라. 그냥 고요해라. 편안해라.

찾음이 불행하게 만든다. 아직 기차를 타고 있음이다.

기차 정지해라. 그러면 보인다, 모든 것이 제대로이고 원래 행복한 것인데

그대의 일어난 생각이 그대를 괴롭혔을 뿐이다.

불교는 원래 완벽한 부처에서 출발한다. 원래 부처이다.

단지 우리는 그 붓다의 심성을 회복하면 된다. 움직이고 찾던 마음을 중지하면 회복이다.

단 10분만 움직이는 마음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라. 고요한 채로 그대의 일어나는 생각을 멈춘 채 둘러보라. 그러면 붓다가 본 것을 보리라. 그대가 바로 붓다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실은 진실이고 허는 거짓입니다.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무엇인가 얻은 것이 있지 않을까

깨달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부처님께서는 아무 것도 얻은 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부처님께서 겸손하셔서 얻어도 얻은 바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무엇인가 얻은 바가 있었다면 부처님의 평상시 말씀이나 사상과도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특히 금강경 사상과도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한 법도 없고 얻음도 없다 그리고 진실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거짓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생각은 여러분과 다릅니다.

세상이 하나의 꿈과 같이 빈 곳에서 만들어진 세계인데 그 세계가 어찌 진실이겠습니까.

사람이나 동물이나 나무나 당분간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곧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지금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숨쉬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의 일부는 계속 없어지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람은 7년이면 모든 기관이 다 완전히 바뀌어진다고 합니다.

즉 사람은 7년마다 전혀 새로운 모습이죠.

그러니까 간난 아기는 태어날 때는 부모에게 받은 몸이지만 7살 끝이 되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부모의 몸이 아닌 자연의 것으로 바뀌어요. 14살이 되면 한번 또 바뀌면서 성인의 모습으로 조금씩 변합니다. 그래서 성인의 징조가 나타나지요. 21살이 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해서 계속 7년 주기로 바뀐데요.

그런데 이 몸이 어느 순간 싹 바뀌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하나씩 빠뀌어서 늙은 세포는 죽고 새로운 아들 세포가 그 자리를 대신하다가 죽고 손자 세포가 주인이 되었다가...

이렇게 계속 바뀌고 있어요. 지금 이순간도 우리의 세포는 바뀌어지고 있죠.

그러니까 엄격한 의미로 어제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릅니다. 그만큼 늙고 새로워진 나입니다.

세포가 기억을 자식에게 전해주어 같은 모습과 습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몸입니다. 물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또 달라요. 우리가 그것을 못느끼고 있을 뿐 이 소우주의 주인은 마치 달이 바뀌어 1월 2월 3월 이렇게 명칭이 바뀌듯이 이 소우주의 주인도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이 소우주도 하나의 나라를 이끌 듯이 주인이 바뀝니다.

그러니까 이 몸은 정체하지 않고 변신중인 몸이죠.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진실이겠어요.

우리가 "나!" 라고 했을 때 벌써 시간은 지나갔고 새로운 나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참 나이겠어요. 참나는 없습니다.

세상이 이미 한바탕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아서 잠깐 솟아있다가 곧 없어지는 것인데 원래 없는 나였고 그래서 나는 장차 미래에 없는 곳으로 되돌아가는데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는 것인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입니까? 삶이 허망한 꿈 속과 같은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이겠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님의 최상의 깨달음에는 실도 없고 허도 없습니다. 이것을 잘 명심하세요.

진실이니, 거짓이니 언어를 통하기 위한, 그리고 잠깐 어떤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뜻으로는 있으나

이런 것이 본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진실을 알려하고 거짓을 알려는 것 자체가 헛된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것을 찾다가 그만 두었어요.

부처님은 출가동기가 인간은 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가 였습니다.

심각하게 그 이유를 찾았지요. 처음에는 힌두교의 신이 만들었다는 이론을 섭렵하고

곧 신의 존재가 허구임을 깨닫고 인연법에서 찾다가 그것도 허망한 것임을 알았어요.

6년간 진실을 찾다가 나무아래서 참선하면서 어느날 느낀 것이 있었어요.

바로 새벽 별이 반짝일 때 바로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별은 언제나 저렇게 빛나고 있건만 보는 사람은 여러가지로 보는구나

슬픈 사람은 슬프게 보고.... 기쁜 사람은 기쁘게 보고

고독한 사람은 고독하게보고.... 허망병에 빠진 사람은 허망하게 보고....

조심해야 합니다. 불교는 허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어요.

실도 주장하지 않고 허도 주장하지 않아요. 실과 허는 다 사람이 만든 의미요, 감정입니다.

진실이 아니죠. 그래서 다 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별을 보는 사람은 빅뱅이 일어난 분자로 보고....

가스로 보고.... 어두운 길을 가는 사람은 밝은 빛으로만 보고...

저마다 사람마다 마음이 보는 것이구나 ...... 별은 다만 저러할 뿐인데

혹시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빛이 지구에 당도하는 시간이 있어요.

몇억 광년이 걸리죠. 멀수록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리고 빛도 휩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동쪽 별을 보고 있으면서

동쪽에 별이 떴구나 하나 실제로는 남쪽에 있는 별일 수 있습니다.

빛이 휘니까 내가 그렇게 보는 것이지, 실제 별은 동쪽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어떤 별은 이미 폭발하여 수억년 전에 없어졌는데

다만 그 빛이 아직도 지구를 향하여 날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빛을 볼 뿐,

실제의 별은 실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별을 보고 뭐라고 한 생각이라도 내면 그것은 자의에 의한 단정이요.

각자 생각이지 진실이 아닌 것입니다.

아! 아! 그렇구나.....나는 여지껏 내 생각 속의 것을 찾아다녔구나.

존재하지 않는 진실을 찾아다녔어......하고 깨달았습니다.

이 내용은 비밀히 전해오는 경에 적혀있는 내용입니당. 일반 경에는 없어요.

드디어 석가모니는 붓다가 되었어요. 세상의 진실을 깨달은 붓다(깨달은 자)가 된 것입니다.

생도 사도 병듦도 늙음도 한낱 나의 생각 속의 것 실은 생도 없고 병듦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 이다.

어찌 내가 죽으랴. 어찌 내가 윤회를 받으랴. 나도 없는데.....

그후 붓다는 어떤 의미나 관념에도 끌려가지 않고 담담히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붓다는 생사를 벗어난 자라고 합니다. 생사란 다만 관념적으로만 존재해요.

우리는 거의 그런 관념에 끄다려살아가죠. 오직 이 진실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유유히 관념에 끄달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종언문에 보면 부처님을 어른으로 표현했어요.

왜 그렇게 표현했나 몰라도 아마도 님이라는 말이 어른이라는 뜻이 있었나봐요.

그런데 사실 부처님은 어른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세상을 첨 보니까 참 신비로운 것이 많아요.

그래서 매일 묻습니다. 엄마, 저것은 뭐야? 달이란다. 저것은 뭐야? 산이란다.

저것은 뭐야? 꽃이란다. 이것이 기억에 깊이 간직되어 그것이 진실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간혹 달님은 왜 밤에만 와? 하고 물어요.

그러면 달님은 밤을 좋아해요. 그리고 우리 아가 창밖을 밝히려고 밤에만 오지...해요.

그런데 아기는 살아가면서 이런 말은 다 자기를 위안시키려는 어머니의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어른인 것입니다. 그처럼 부처님도 세상의 언어나 의미에 끌려가지 않고 벗어나 있어요.

진실을 본 것이죠. 그래서 어른님이라고 표현했어요.

한편 중생은 어린 중생이라고 표현했는데 아직 덜 큰 사람이라는 표현이지요.

옛날말이 다 맞는 말입니다. 진정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 부처님처럼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린 중생일 뿐이죠.

아직도 말과 뜻과 생각이 진실인줄 아는 ...... 오늘 이 강의를 듣는 사람은 단숨에 벗어나세요.

단숨에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바로 어른의 길을 가세요.

당신은 이미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소곱장난에서 헤매지 마세요.

정해놓은 생각을 벗어나 단숨에 출격장부의 길을 가세요.

그 어느 사상이나 의미에도 끌려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세요.

여기서 벗어나 바로 선사들의 격식 바깥의 뜻을 보세요. 부처님과 선사는 깨달았어요.

그래서 진실을 말할 때 격식 바깥의 말을 했던 것입니다. 벗어나면 바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하되‘일체법이 다 불법이라’하시니 벗어난 사람은 따로 불법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어요.

만약 이것이 불법이니라 하고 말하는 자는 지옥에 갑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것이 불법이라고 망말을 합니까?

그렇게 한 법도 세우지 않을 때....... 정말로 한 법도 옳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그때는 모든 것이 다 불법이 되어요. 쓰는 것 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가져다 씁니다.

모든 언어나 사상과 뜻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생각 속에 빠져있는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질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붓다들은 말합니다.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 하고.......

수보리야, 말한 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님일새 그러므로 일체법이라 이름하느니라.

금강경은 끝없이 지루해도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이유가 있어요.

골수에 박히게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와서 한동안 강의듣고는 스님 강의는 딱 한마디로 말하라면 무심과 마음이 부처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그 말만 반복하는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가버려요.

이 사람이 제 강의를 잘 들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꿈에도 제 강의의 뜻을 못보았어요.

보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도 45년을 설하시고 한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 하셨어요.

실로 설할 것이 없었어요. 단지 중생이 덕지 덕지 집착하고 있는 아교같은 것들을 떼어내느라

수많은 말을 했지, 무엇을 따로 세운 것은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무심으로 돌아가라고 했지 무심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갈 때 '부처님, 건강하십시오' 하고 나가야 제 말을 알아들은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글자만 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같은 소리를 매일하시는 스님이라고 하지요.

저는 한번도 무엇을 한 것이 없는데 했다고 해요. 무심을 한 번도 보인 적도 없는데 무심을 말했데요.

그런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많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 말에 쫓아다니지 말라고 지겹도록 한말씀 끝나면 같은 말을 되풀이 했어요.

수보리야, 말한 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님일새 그러므로 일체법이라 이름하느니라

라는 말들입니다.

내가 일체법이라 하니까 너희들은 정말 법이 있어어서 그렇게 말했나보다 하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말하는 그 실체는 없으나 다만 말을 통하기 위한 말이었느니라 라는 말이죠.(이름.명색)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것과 같느니라.

사람의 몸이 크다고 말한 것은 정말 커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크다고 산보다 크겠습니까? 사람이 작다고 벌레보다 작겠어요?

원래 크고 작음은 상대적이라 그런 것은 없지만 말하기를 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사람 몸의 장대함도 곧 큰 몸이 아니고 그 이름이 큰 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무엇을 만나도 누구와 이야기를 해도 무엇을 말해도 다만 이름만 그러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 말에 끌려가면 안되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다 진실이 아닌 그런 말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청정하다, 더럽다, 위엄이 있다, 점잖다, 산듯한 사람, 담담한 사람..... 모두 명칭일 뿐입니다.

이 명칭에 끌려가면 괴로운 인생이고 이 명칭에서 벗어나면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중생은 누구나 집착증이 있어요. 지겹도록 또 주장하고.....끌려가고.....집착해요.

아무리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법문을 들어도 낼 차를 운전하다가 누가 앞에서 얼쩡대다가 내 차를 들이받으면 .....게다가 다가와서 큰 소리로 자기가 오히려 잘했다고 삿대질하면.... 그리고 '쌍놈아! 운전 잘해라......' 하고 욕하면 당장 안전띠를 벗는 것도 잊은 채 분노에 휩싸여 나가려다가 다리에 띠가 걸려 과당 넘어져서 코피가 나면 대로변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창피하고 신경질나서 더 화를 내고는 상대와 멱살잡고 치고 받고 해요.

오늘 낮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앞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저는 서서 한참 구경해요.

저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해결하고 헤어지나..... 어던 기분이 들까?

무엇이 저렇게 만들었나하고 한참을 생각하죠.

물론 저도 그런 경우를 당해요.

새파란 젊은 사람이 위로 아래로 눈을 치켜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참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자기가 잘한 것을 우깁니다. 누가 본 사람은 없고.... 답답하겠죠.......

그럴 때 가능한 합리적으로 상대에게 예의에 벗어나지 않게 설명하고 나중에 처리하자고 해요.

서로 일부러그런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풀자고 하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공부입니다.

언어의 뜻에 끌려가냐 ~ 안끌려가냐가 우리의 공부입니다.

알면서 안되면 그것은 모르니만 못합니다. 알면 되어야 합니다. (깨여있어 실천을 해야합니다.)

용기를 내어서 하나 하나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얻어지는 것이 있고 결국 나중에는 화가 전혀 안나는 사람이 됩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이런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 하리라”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니,

이렇게 공부하다가 보면 나중에는 붓다와 같아집니다. 점점 평범한 사람이 되요.

도대체 무엇을 구했다고.....누구를 제도했다고 야단이겠어요.

제도할 사람도 없고 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했다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깨달아도 깨달은 것이 없고,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사라지고

낮은 사람이라는 것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아갑니다.

제가 베드민턴 운동장에서 운동복을 입고 사람들과 똑같이 공을 칩니다.

저는 좀 운동신경이 좋아서 거의 못받는 공이 없어요.

그러나 공격력은 좀 약한 편이어요. 그러면 게임을 해볼만해서 사람들이 처음에는 저와 게임해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것도 금메달 딴 사람이라니까 모두 고개를 끄덕이죠. 그런데 여기서도 사람은 항상 평범한 사람을 좋아해요.

사람이 공은 잘치는데 좀 오만하고 못하는 파트너를 야단치고 하면 싫어해요.

그래서 항상 겸손하도록 하고 평범하게 행동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운동이 끝나면 함께 맥주도 먹고 노래도 하고 웃기도 하지요.

언제나 자기를 낮추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하고 자기 속의 비밀을 털어놓으면 참 좋아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친해지고 무리없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항상 사과하고...... 의견을 개진할 때는 날카롭게 하고........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민을 잘 들어주면 여러분이 바로 붓다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 누가 더 낫고 못함은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제도했다고 하겠어요.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그 사람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괴로움이라는 무덤말입니다. 자기가 세운 생각이 언젠가 자기를 괴롭힌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16. 能淨業障分 (능정업장분)

 

復次須菩堤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應

부차수보리 선남자선녀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선세죄업응

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타악도 이금세인 경천고 선세죄업 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堤, 我念過去 無量阿僧祈劫 於然燈佛前 得値 八百四千萬億

수보리, 아념과거 무량아승기겁 어연등불전 득치 팔백사천만억

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 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나유타제불 실개공양승사 무 공과자.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

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萬億分 乃至 算數比喩 所不能及.

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백분불급일, 천만억분 내지 산수비유 소불능급.

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於後 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 具說者 或有人聞

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후 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 구설자 혹유인문

心卽狂亂 狐疑不信. 須菩堤, 當知是經 義不可思議 果報亦 不可思議.

심즉광란 호의불신. 수보리, 당지시경 의불가사의 과보역 불가사의.

 

업장을 밝게 한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스스로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또한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마땅히 지옥에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업신여기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소멸하고 아뇩다라샴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수보리야 내가 생각하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연등불 앞에서 팔백사천만억 아승기겁에 연등불 앞에서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정성껏 공양을 드리며 방심한 일이 없었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훗날 말세에 스스로 이 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이 사람이 갖는 공덕은 내가 일찍이 연등불 계신 곳에서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이 앞의 공덕보다 백분의 일도 천 만 억분의 일도 더 나아가 수치로 비교도 안될 만큼 미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훗날 말세에 이 경을 스스로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갖는 공덕을, 내가 말하면 어떤 사람은 내말을 듣고 그만 정신을 잃고 '정말 그럴까?'하고 여우처럼 의심하여 믿지 않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분명히 알아라. 이 경은 감히 생각으로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감히 생각으로 또는 말로 할 수 없느니라. "

 

 

16. 能淨業障分 (능히 업장을 깨끗이 함)

 

또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나 선녀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더라도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으면, 이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악도에 떨어질 것이로되, 금생의 사람들이 업신여김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중요한 내용이군요.

업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경을 읽다가 마장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이런 현상은 왜 오는가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금강경을 배우는 사람은 여기를 잘 봐야 합니다.

마장에 대한 설명이 함축된 것입니다.

마장이라하면 여러가지가 있는데 경을 읽다가 오는 마장은 이 경에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경에 다 포함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몸이 아프거나, 누가 방해하거나, 하기 싫거나, 집안에 일이 생겨 못하게 하거나 사고가 나서 무섭거나 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이런 것은 우연히 오는 경우가 있는데

간혹 이 경을 읽어서 그런 것이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으나, 대부분 이 경을 읽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전생의 업보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그만큼 가벼운 일을 말하지요.

즉 금강경을 읽어서 생기는 업보는 가벼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에게 업신 여김을 당한다 함은 경을 너무 읽고 있으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저 사람은 금강경에 미쳤다, 해도 너무 한다, 아예 싸들고 절에 들어가라, 부처님이 밥먹여주냐,

절에 스님 말이라면 꺼벅 죽고 내말이라면 왜 무시하냐....등등

가벼운 업신여김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겨도 이런 것에 신경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생의 업보가 나타나서 나를 가로 막는 것이니

전생 업보가 그렇게 줄어들어서 나타나므로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보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고

그런 일이 나타나는 것으로 인하여 전생의 빚을 많이 갚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간혹 이런 가벼운 것보다 더 큰 것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옐들어 금강경을 읽으면 복이 오는데 복을 받으면 전생업보가 안나타나므로

복을 받기 전에 급하게 나타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을 읽는 사람은 그런 일이 나타나도 극복하고 읽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경을 읽다가 보면 다 없어지고 차차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으면 전생의 업을 하나 갚은 것이니까 곧 좋은 일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전생의 업보는 크고 강력한 경우가 있어요.

이런 업보는 사실 제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니은 금강경의 4구절만이라도 남에게 전해주면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복을 쌓는 것입니다.

복은 복대로 오나 흔히 전생의 빚은 빚대로 따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만독을 읽는다고 하는데 만독을 읽는 것은 실제로 피눈물나는 고행입니다.

그런 고행 자체가 업보를 녹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일부러 선택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견딜만 한 것입니다.

만약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당한다면 아마 대단한 놀람이 될 것입니다.

만독을 목표한다면 사경은 따로 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

그냥 읽기만 해도 세월이 엄청 지나가요.

그러니까 읽기만 해보세요.

금강경을 만독을 목표한다면 읽는 것 자체가 고행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티벳에서 어떤 남자가 2년간 어떤 절을 순례가는데

겨울에 손발이 얼어가면서 부인과 모친과 함께 가면서 오체투지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렇게 2년을 걸으면서 절하면서 길에서 자고 먹으면서 절에 가더군요.

3사람이 다 얼굴이 얼고 발이 동상 걸리고.....그래도 하는 것을 보니 대단했어요.

이런 순례 자체가 고행이고 전생의 업보를 녹이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순례를 마치면 스님 대우를 하더군요.

티벳 사람들은 그렇게 고행해서 업보를 녹이고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면 바보같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다른 것은 몰라도 오체투지 순례는 본받을만해요.

티벳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그렇게 한번 장시간 고행하는 순례를 마치면

일이 잘 풀리고 집안이 아무 일없이 행복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례 수행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천태종 구인사에서 그런 방식으로 기도를 시킵니다.

즉 절에 들어가서 3일간 기도를 신청하면 잠을 안재우고 관세음보살을 하게 해요.

예전에 7일간 잠안자고 하는 용맹정진을 몇번 해보았지만

3일간 잠안자고 하는 기도도 대단한 기도입니다. 나름대로 고통과 심리적인 압박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밤낮 주야로 기도하니까 모두 소원을 이루게 되고

소원을 이룬 사람은 그 감사함을 정재로 표시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천태종은 큰 종단이 되었어요.

천태대학도 세우고 대도시마다 큰 사찰을 세워서 그 위용을 자랑해요. 짧은 시간에 대단한 발전입니다.

조계종은 과거 선배들의 역사를 팔아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데 반하여 천태종은 신생종단으로서 주목할만합니다.

그런데 그런 발전의 원동력이 바로 잠안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일간 혹은 7일간 .....혹은 15일을 정하고 얼마의 기도비를 내면

밥은 먹여주니까 큰방에 앉아서 '관세음보살'만 불러요.

그러다 보면 전생의 업보가 녹아지고 거기에 복이 보태어져서 영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20년 전에 3일간 병원에서 잠안자고 기도해본 적있는데

정말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어요.

그후 아, 이것 거짓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죠.

물론 3일후에도 계속 해서 기도했고 거의 한달을 기도로 씨름해서 중환자가 나았어요.

그 뒤로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느꼈는데

천태종은 벌써부터 알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불교가 굶어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큰 발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평등하니까 부인있는 스님이라고 영험을 안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같아요. 혹 독신승이 위대하고 깨끗하다고 터무니없는 오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기회에 바로 잡아야 합니다.

만약 대처승이 더러우면 신도들은 다 더러워요.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사람 나아가 전세계인이 다 더러워요.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오만을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사람은 있는 그 자체로 위대하고 깨끗하고 존경받을 대상입니다.

특히 불구부정(不垢不淨)을 설하셨던

관세음보살은 대처승이라고 영험을 안주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부산 삼광사는 동양에서 제일 큰 법당을 지었다 하데요.

3백평이라나 그렇대요. 매일 신도들이 가서 기도한데요.

아마 부산에서는 제일 큰 법당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쓸데없는 상이 많아요.

외국사람은 안그럽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고 해요.

우리나라는 아직 정신 수준의 열세를 못면하고 있어요.

때가 때인 만큼 조만간 그런 것이 다 깨질 것입니다.

제가 선불교는 일반인에게 전한다니까 웃는 사람이 있었어요.

도대체 일반인에게 뭘 가르친다는 것입니까?

스님들도 수십년해도 안되는 것을 일반인이 어떻게 이해하고 깨닫겠어요?

그런데 제가 그랬습니다.

스님들은 안되도 일반인은 된다 했어요.

어째서 그러냐고 하길레 비구승은 대처승을 보면 무시하고 절을 안하지만

신도한테는 합니다. 돈을 주는 신도에게는 친절하고 깎듯하게 허리를 굽힙니다.

이렇게 마음에 상이 있는 이상에는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어떤 스님을 보아도 그가 비구승이던 대처승이던

보면 합장하고 절합니다. 스님들보다 더 겸손해요. 그러니까 일반인은 빨라요.

누구나 부처로 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돈오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 단적인 예가 송나라 초기에 유행했던 중국선불교였습니다.

바로 원오스님과 대혜스님 시절인데 이 두 스님은 수많은 사대부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했어요.

서적에 남아있으니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사실 상은 스님들이 더 많아요. 병이 더 깊은 것이죠.

뭘 안다는 것이 병이고 독신우월주의가 병입니다.

사실은 저도 그 병이 들어 엄청 고생했어요.

내가 독신승이고 스님이다라는 상이죠. 남보다 강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껍데기였지만 예전에는 대단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세월을 수십년이 되어가는데 왜 깨달음이 안오는지 참 답답했어요.

많은 시간을 고민했죠.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아직 상을 못버리고 있는 것이 병이라는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어느날 내가 스님이라는 상을 먼저 버려야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버릴려고 일반인도 사귀고 평범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래서 마이 평범해졌는데도 아주 평범하지는 못했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아예 장가를 가자, 내가 도를 얻으려면 장가를 가야한다

그렇게 되어서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고 평범해져야지

이렇게 생각으로만 상을 버리겠다하면 안된다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정말 장가 갈라고 했는데 바로 그때 마음이 탁 쉬더라구요.

고요해요. 나는 일반인이라고 하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이것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래서 아~~~이것이구나

이렇게 마음이 푹 쉬어야지 되는 거였습니다.

그 뒤로 경이 새롭게 보여지고 생각이 확 달라졌어요.

절에서 얻은 그놈의 스님이라는 상을 떼느냐고 엄청 고생한 샘이죠.

그후 공부하고 화두를 들어도 일사천리이고 화두의 뜻도 저절로 드러났어요.

그래서 제가 가끔 스님들을 만나면 스님이 되면 못깨닫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나를 오해했는가 봐요.

그 사람도 병이 단단히 들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이면 되요.

무엇이 되면 그것이 바로 병이고 금강경 사상과도 위배됩니다.

금강경은 철저히 나는 버리고, 지식을 버리고, 함을 버리고, 위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이와 직위를 다 버려야 되요. 그래야 깨닫습니다.

금강경은 깨달음을 위해서 설해졌어요.

그런데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상을 버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정말 놓아보세요. 한 눈에 부처님의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금강경을 보고 금강경에 없는 뜻이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상을 버리면 가능해요.

조만간 여기서 많은 분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모두 똑같은 소리를 할 것입니다.

금강경은 전혀 다른 데 있는 그 속 뜻을 알아야 한다고....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겁을 생각하니,

연등불을 뵙기 전에도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서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으며 헛되이 지냄이 없었노라.

먼저 수행자는 스승을 잘 섬겨야 합니다.

항상 스승에게 공양하고 받들고 섬겨야 합니다.

스승을 믿음은 믿음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스승을 높이 추앙하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으면 도둑 놈이 한 말에도 깨달아요.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의심하고 듣기 때문에 못깨닫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길가다가 길동무를 만났습니다.

여관에서 같이 자고 하면서 사귀어보니까 대단한 식견이 있었어요.

말하는 것마다 도인같은 말을 해요. 네 마음이 고요해져야 진리를 본다 등등...

그렇게 며칠을 함께 가다가 아주 그 길동무를 신뢰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마침 타향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고양에 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여관에서 돈보따리는 풀어놓고 화장실을 다녀와도 전대가 그대로 있자 더 신뢰하게 되었어요.

돈도 벌고 좋은 말도 듣고 하니까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어요.

그래서 물 떠오라 하면 떠오고 담배 사오라 하면 사와요

그렇게 고향 어귀에 닿게 되었어요.

마침 저 강을 건너면 고향인데 배가 하나 있는데 돗대가 있어요.

스승은 말해요. 네가 이제 깨달을 때가 되었다

이제 줄탁동시의 시점이다.

자 저 배의 돗대에 올라가라 그러면 깨달으리라.

스승님, 그러면 됩니니까?

그래, 저기서 그대가 생사를 잊으면 이제 깨닫는다.

깨달으면 그대는 이제 매사 행복하리라.

언제나 행복하리라.

그래서 나그네는 얼른 배로 다가가서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전대가 걸리적 거려요.

그래서 스승에게 잠시 좀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재빠르게 올라갔는데

돗대에 사람이 매달리자 배가 이리 저리 쓸어지면서

생사를 오락가락해요.

그런데 한쪽으로 떨어질 것 같던 배가 다시 원 위치로 올라가는 것 같아서 안심했는데

다시 반대 쪽으로 떨어져요.

그래서 또 죽었구나 하고 놀라고.......이렇게 몇 번을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탁 알았어요.

아~ 원래 죽음의 순간은 없는데, 내가 지금 이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구나

그래서 마음을 턱 내려놓으니까

오히혀 돗대 타는 것이 재미 있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크게 깨닫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스승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스승도 없고 돈도 없어졌어요. ㅎㅎ

그 길동무는 도둑 놈이었죠.

그러나 이 사람은 너무 큰 것을 얻어서,

인생을 크게 보게 되어 다시는 고민하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선사의 가르침을 빗댄 누군가의 말인데 선사는 사실 제자에게 수강료만 받는 도둑놈입니다.

그 누구도 주는 것은 없어요. 부처님도 제자에게 주지 못했어요.

다만 제자가 믿음으로 스스로 깨달았을 뿐입니다.

석가모니불도 전생에 연등불과 그 이전의 많은 부처님들을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고 했어요.

이런 믿음이 결국 자기를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대단한 복을 짓는 것이죠.

만약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면

그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전생에 성인 섬기기를 하루도 쉬지 않고 했고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던 공덕보다

이 경을 지니거나 외운 공덕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가히 이 경을 부처님께서 크게 강조하는 이유가 있고 선불교에서 육조스님이 이 경을 보고 깨달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경을 부처님은 매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 진리를 매우 사랑하고 크게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 이 이 다음 말법 세상에서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모두 말하면, 이 말을 듣는 이는 마음이 미치고 어지러워서 믿지 아니하리라.

수보리야, 이 경은 이치도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고 과보도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느니라.

이 경의 공덕이 하도 크고 그 이치도 높아서 그것을 일일히 다 말하면

모두 미치지 않으면 어지러을 것이라고까지 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겠어요.

만약 거인이 입이 커서 해를 먹었다고 하면 믿겠어요?

아마 어지럽다하고 고개를 설래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인이 있어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은 바다보다도 크고 우주보다도 커서

해가 아니라, 우주를 삼키고도 남아요.

그처럼 이 경을 지니거나 외우는 공덕도 대단해요. 제가 조금만 말한다 하여도 길게 말하게 되므로

저는 할 말이 많으나 아마 여러분은 지겨워서 어지럽다할 거예요.

그러니 이 경을 외우고 또 외우세요. 그래서 복도 쌓고 그 뜻도 알아마치기를 빕니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뜻도 가히 생각할 수도 없으며 과보도 또한 생각할 수 없느니라.”

만약 한 사람의 깨달은 자가 나오면 그 뒤로 줄줄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중국에 송나라 때 많은 거사들이 참선해서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 바로 그 증거예요.

만약 부처가 되는 것이 닦아서 되는 것이라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나

부처는 이미 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과거에 가능했다면 지금도 가능한 것이죠.

옛 선사들이 닦지 않고 바로 깨달음 하나로 부처가 된 사례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만약 누가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정통 선불교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아마 소승 불교를 하는 교학자일 것입니다.

선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깨달아 부처를 회복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금강경을 읽어 복을 닦는다는 것은 하나의 신행수단이고

진짜 목적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마이 마이 읽어서 반드시 깨달아 붓다의 지위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선사들의 모든 글을 보세요. 일견에 그 뜻이 드러나고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자꾸 자기 눈으로 선사들을 해석하려고 해요.

도대체 선문답을 해석해주어도 모르는 눈으로 어떻게 불교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평합니까?

움직이는 마음을 중지하면 즉시 알 것인데 그것 하나 즉시 중지 못하고

움직이는 마음으로 도를 보려고 하고 진실을 보려고 하니

알 턱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여기 와서 내내 공부하다가 자꾸 머리로 알려고 해요.

나이들고 대학 나오고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까 그리 하면 안되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있겠는가 하고

자구 이해로써 알려고 해요.

이것은 움직이는 마음을 즉시 멈추어야 합니다.

앞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는 절대 사물의 진실을 몰라요.

가는 것을 중지해야 진실이 보여요.

그렇게 마음은 중지하지 않고 알음알이로 자꾸 알려고 하다가

모르겠으니까, 그러면 화두 들고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걸 못참고

누구에겐가 물었나봐요. 그러자 그 사람이 다 알음알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날보고 내내 알음알이로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인사하고 가데요.

내가 잘 가라고 했지요. 당신은 그런 마음 쉬지 못하면 절대 금생에는 죽어도 못깨달으리라고 했어요.

선불교는 볼 수 있는 사람이 보면 모두 진귀한 금은 보화여요.

그 맛이 감칠 납니다.

그런데 모르는 눈으로 보면 허공에 뜬 구름 잡는 격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자기가 아둔하고 상이 많고 겸손하지 못하고 쉬지 못해서 안보이는 즐 모르고 제가 하는 말을 다 알음알이라고 하고 나가요.

이 모두가 선불교를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다고는 안해요.

그러니 언제 깨닫겠습니까?

선불교가 빠르긴 빠른데 단지 쉬어야 합니다.

그것이 요점입니다.

그러면 단번에 천리를 갑니다.

즉시 천리를 뛰어서 모든 선사들을 보면 그때서야 알게 될 거에요.

왜 이렇게 선문답이 생겼는지 알게 되요.

동시에 강의하는 이 사람도 알게 될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어디에다 초점을 두고 강의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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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 持經功德分 (지경공덕분)

 

須菩堤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 等身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 等身布施

수보리 약유선남자선녀인 초일분 이항하사 등신보시 중일분 부이항하사 등신보시

如是無量 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

여시무량 백천만억겁 이신보시 약부유인 문차경전 신심불역 기복승피 하황서사

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堤,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수지독송 위인해설 수보리, 이요언지 시경 유불가사의 불가칭량 무변공덕,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 人說 如來 悉知是人

여래위발대승자설 위발최상승자설. 약유인 능수지독송 광위 인설 여래 실지시인

悉見是人 皆得 成就 不可量 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 功德. 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

실견시인 개득 성취 불가량 불가칭 무유변 불가사의 공덕. 여시인등 즉위하담여래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何以故 須菩堤, 若樂小法者 著 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아뇩다라삼먁삼보리, 하이고 수보리, 약요소법자 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須菩堤,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즉어차경 불능청수독송 위인해설. 수보리, 재재처처 약유차경 일체세간 천인아수라

所應供養 當知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繞 以諸華香 而散其處.

소응공양 당지차처 즉위시탑 개응공경 작례위요 이제화향 이산기처.

 

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면 복을 받는다

 

" 수보리야,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처음에 항하 모래수와 같은 몸과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베풀고 , 중간에 항하 모래수와 같은 몸과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베풀고, 또 나중에 항하 모래수와 같은 몸과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풀어서, 이와같이 한량없이 많은 몸과 마음으로 베풀었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서 환희심을 낸다면 그 복이 앞의 복보다 크다 할 것이니, 그런데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명한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느냐! 수보리야, 이 경은 생각으로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한량없는 공덕을 가졌느니라. 여래는 대승에 뜻을 두고 공부하는 사람이나 최상승에 뜻을 두고 공부하는 사람이나 최상승에 뜻을 두고 공부하는 사람이나 최상승에 뜻을 두고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설명하였느니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이 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널리 남을 위해서 신심나게 설명한다면 여래께서는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또한 끝이 없으며, 감히 생각으로도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공덕을 성취할 것이라는 것을 아시며, 또한 보고 계시느니라.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쳐서 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작은 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생각 가지고는 이 금강경의 마음 닦는 법이 꼭 옳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 경이 있는 곳은 어느 곳에서나 모든 세상 사람이나 하늘사람이나 아수라가 공양할 것이니, 이곳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니라. 이곳에 모두 정성껏 예를 드리고 주변을 돌면서 꽃과 향으로 공양할 지니라. "

 

 

15. 持經功德分 (지경공덕분)

 

경을 지니는 공덕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한 백천만억 겁동안을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않으면

그 복이 저 몸을 보시한 복보다 수승하리니,

어찌 하물며 이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해설해줌이겠는가.

불교는 자기 몸을 남에게 보시해주는 것을 여사로 생각해요.

부처님 전생을 보면 자기 몸을 남에게 준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수 없이 자기 몸을 남에게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복이 크고 결국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기를

강가의 모래 수 만큼이나 했다면 얼마나 그 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있어요.

바로 이 경을 읽고 외우고 지니다가 남에게 일러주는 공덕입니다.

진리를 남에게 전해주면 그것이 최상의 복이 되는데

특히 이 금강경을 전해주면 더 큰 복이 된다는 말이지요.

부처님께서 다 보시고 한 말이니 모두 큰 복을 지어야 합니다.

수보리야, 요약해서 말한진대

이 경은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끝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진리, 그것도 금강경이라면 자신 있게 타 종교인에게도 권할 수 있는 경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항상 읽어도 좋은 경입니다.

여래는 대승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며 최상승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느니라.

대승심을 발한 자는 큰 마음을 내는 자를 말해요.

적은 마음으로는 이 경의 가치를 몰라요.

그러나 마음이 큰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것의 가치를 압니다.

그 영리한 수보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게 생각했던 심정을 알게되요.

여러분이 이것을 소개해주고 무불에 가서 금강경 강의 들어라 하고

권해주면 아마 당신을 평생 못잊을 겁니다.

여러분은 큰 복을 짓는 것이 되고 말입니다.

최상승은 대승심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모두 알며 이 사람을 모두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끝이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게 되리라.

이 사람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짐이 되느니라.

그렇지요.

부처님의 목표는 바로 큰 깨달음을 성취하게 하려는데에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부처님은 종국에 큰 깨달음으로 스스로 부처를 회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다른 불자들이나 이것이 마지막 발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자기 발원문에 “꼭 깨달음을 얻겠습니다” 하고 적어넣으세요.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작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게 되므로

곧 이 경을 능히 받아듣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해설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이 작은 자는 남에게 전해주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있고,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기만 알려고 남에게는 안가르쳐주어요.

이런 것은 아상이 있고 인상이 있고 중생상이 있고 수자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도 못짓고 결국 깨달음도 얻지 못해요.

자기에게 큰 마음이 있고 아상이 없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에게나 이 법을 전하세요.

그래야 깨달음을 얻습니다.

낼부터 지하철에서 소리지르면서 전하세요 ^^*

아무것도 정하지 마라.

아무것도 세우지 마라.

아무것도 원하지 마라.

아무것도 구하지 마라. 라고 말입니당 ^^*

수보리야, 어느 곳이든 만약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천상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응당 공양하게 되리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탑이 됨이라.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으로써 그곳에 흩으리라.

제대로 알아야 해요. 부처님의 진정한 사리는 이 경입니다.

이 경이 있는 곳이 부처님의 법이 있는 법당이고 예배처이고, 모든 신들이 보호하는 곳입니다.

가끔 물어요. 불상을 모시면 어떠하냐고요. 기도를 위해서 말입니다.

무론 기회가 된다면 불상도 좋으나 건전하게 금강경을 모셔두고 기도해도 되요.

약간 높은 곳에 금강경을 놓고 그 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보듯이 사리 보듯이 예배하고 발원하고 기도하면 되요.

이곳이 진짜 불사리가 있는 탑이지 쓸데없이 허망한 뼈다귀가 무슨 불신입니까?

부처님은 자기 몸을 보고 부처라고 한다면 사도라고 했어요.

여러분은 그런 사도가 되지 않고 진정한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모시다가 혹시 읽고 싶으면 내려놓고 읽고.읽는 것이 끝났으면 다시 높은 곳에 놓고

옆에 향이나 초를 켜놔도 되고.꽃으로 장식해도 됩니다.

그렇게 사리를 모시고 진리를 숭배해야 진짜 법당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금강경 상권 끝났습니다.

 

 

제14. 離相寂滅分 (이상적멸분)

 

爾時 須菩堤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稀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희유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我從昔來 所得蕙眼 未曾得 聞 如是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아종석래 소득혜안 미증득 문 여시경.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當知是人 成就第一稀有 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世尊,

당지시인 성취제일희유 공덕.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여래설명실상. 세존,

我今得聞如是 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아금득문여시 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약당내세 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

卽 爲第一稀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無人相 無衆生相

즉 위제일희유. 하이고. 차인 무아상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卽是 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무수자상. 소이자하. 아상즉시 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시비상.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佛告 須菩堤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불고 수보리 여시여시. 약부유인 득문

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稀有. 何以故. 須菩堤, 如來說第一

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

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堤, 忍辱波羅蜜 如來

바라밀 즉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

說 非忍辱 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堤 如我昔爲歌利王

설 비인욕 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割截身體 於我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

할절신체 어아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하이고. 아어

往昔 節節支解時 若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瞋恨. 須菩堤,

왕석 절절지해시 약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응생진한. 수보리,

又念過去 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우념과거 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 是故 須菩堤, 菩薩 應離 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

무수자상.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 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 有住 卽爲非住. 是故,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약심 유주 즉위비주. 시고,

佛說菩薩 心不應 住色布施. 須菩堤,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

불설보살 심불응 주색보시. 수보리, 보살 위리익일체중생 응여시보

施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堤, 如來

시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수보리, 여래

是 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語者 不異語者. 須菩堤, 如來所得法

시 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수보리, 여래소득법

此法 無實虛 須菩堤,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如人入闇 卽無所見,

차법 무실허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여인입암 즉무소견,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須菩提當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수보리당

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悉

래지세 약유선남자선녀인능어차경 수지독송 즉위여래 이불지혜실

知 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지 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 무량무변공덕.

 

닦는다는 생각없이 닦아라

 

이 때에 수보리가 이 경의 매우 깊은 뜻을 알고서 훌쩍훌쩍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되,

 

"존경하옵는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이와 같이 뜻이 깊은 경전은 제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얻은 지혜로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참 그 말이 옳다'하고 신심이 청정하여 '이렇게 닦으면 누구든지 자성이 밝아지겠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제일 값있는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성취한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상이 아니며, 여래께서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을 뿐입니다. 세존님 내가 이런 경전을 듣고서 믿고 알고 받아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후 오백년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고 알고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나라고 하는 상이나 남이라고 하는 상이나 중생이라는 상이나 수자라는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생각이나 남이라는 생각이나 중생수자라는 생각을 여의면 그 사람에게 상이 없으니, 그건 그냥 부처님입니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옳은 말이다.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면 이 사람은 매우 귀한 사람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신 제일바라밀(보시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오,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인욕바라밀은 이름이 인욕바라밀뿐이니라. 수보리야, 이름이 인욕바라밀뿐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한테 육체를 베이고 끊기고 했을 때, 내가 나라는 생각도 없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이란 생각도 없고 수자라는 생각도 없었느니라. 만약 내가 옛날에 마디마디 베이고 끊기고 할 때에, 나라는 생각이나 남이라는 생각이나 중생이라는 생각이나 수자라는 생각만 있었으며 내가 성을 냈을 것이다. 또한 수보리야, 내가 과거 오백생전에 인욕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 때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 없었더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분별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것이니라. 얼굴이 예쁘다고 거기에 의지해서 마음을 내거나, 그 사람 음성이 좋다고 거기에 의지해서 마음을 내거나 냄새라든가 맛 혹은 살이 보드랍다고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어디든지 마음을 두지 말고 그 마음을 낼 것이니라.

 

이런 고로 부처님께서 설하시되 보살은 마음을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하여 보시해야 하느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일체의 중생이라는 것도 마음이 미한 것이 중생이며 깨치고 나면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이요, 실체로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요,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요, 속이는 말을 아니 하는 사람이며, 변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법은 그 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의 경우에 따라 필요해서 이야기한 것이니, 실다움도 아니지만 거짓말도 아닐 것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법에 집착하여 보시를 행한다면, 사람이 컴컴한데 들어가 있는 것 같아서 컴컴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자기 마음도 컴컴해지느니라. 만약 보살이 마음을 어느 곳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의 눈으로 밝은 햇빛 속에서 가지가지 물질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앞으로 오는 세상에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이 경을 스스로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님의 지혜로써, 이 사람들은 결국 자성이 밝아질 것이라는 것을 다 아시며 다 보시느니라. "

 

 

▶14.離相寂滅分 (상을 떠나서 적멸함)

 

그 때에 수보리 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잘 알고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으로도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듣지 못하였습니다."

 

희유하다는 것은 드믄 일이라는 뜻입니다.

금강경도 유명하지만 이것을 듣고 눈물을 흘린 수보리도 참 대단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린 옛 선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얼마나 가슴에 닿고, 얼마나 감사했으면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얼마나 신중하게 듣고 얼마나 집중해서 들었으면 눈물이 다 나오겠어요?

옛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좋은 말씀을 들려주면 깊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했어요.

그러니까 가슴에 꽂혀서 바로 깨닫고 행하였던 것입니다.

금강경은 무상(無相), 무정(無定), 무위(無爲)를 가르칩니다.

그동안 각종 상(相)에 잡혀있고

자기 정함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그 스스로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행하되 행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니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원함이 있으면 불행해집니다. 사람은 원래 행복해요.

스스로 원함이 그 행복을 막아서 불행했었는데 금강경 말씀을 듣고 행하되 행하지 않으니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래서 수보리는 엉엉 울은 것입니다.

남자가 칠칠맞게 왜 울어? 할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접해보고 그대로 행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그런 기분 모릅니다.

사람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만약 수보리가 금강경을 듣지 않았다면 전혀 새로운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대단히 영리한 사람입니다.

처음에 보살은 일체 중생을 제도해도 제도했다는 상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서

벌써 금강경을 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물으시면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정확히 대답하면서 설법을 들으면서 확신을

거듭 얻었습니다.

수보리는 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진리를 배웠으므로 지혜가 매우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안 진리와 부처님의 진리를 비교하면 자기의 지혜는 매우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수보리는 여기서 크게 깨닫고 북받히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대중이 많은 가운데서도 울음이 터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이 금강경의 핵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수보리는 여기서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이 깨달으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경을 만나지 못했다면.... 하고 생각해보니까 정말 끔찍했어요.

아직도 조그마한 알음알이를 위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잘난 것을 최고로 자랑했을 것이고

부자인 것을 뻐겼을 것이고 일류대학 나온 것을 으시댔을 것이고

깨달음 얻은 것을 자랑했을 것이고 30m 짜리 대형 불상을 보면 기기 죽었을 것이고

불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진리는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깨달음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32상을 갖춘 부처상이 부처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니까 자기의 참 모습도 몰랐을 것이고 돈많은 사람 만나면 기죽었을 것이고

동창회에 나가서 잘나가는 친구가 레간자차에 기사두고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눈골이 사나워 갑자기 술먹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술먹고 들어갔더니 마누라가 허구한날 술만 먹고 다닌다고 바가지가 심해서 홧김에 또 나가 포장마차에 가서 또 한잔....

전봇대에 쉬하고...박치기 하고.... 그랬을 것인데.... 이 말씀을 듣고

그런 것이 싹 없어졌으니 이 경을 만난 것이 이렇게 다행하고 감사하고........

그래서 펑펑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가히 진리를 공부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이런 기분을........

진정한 진리를 듣고 깨달음이 깊으면 이렇게 눈물이 납니다.

경봉스님도 이뭣고를 들고 화두 공부하다가

하루는 툭 터져서 '이 놈이 바로 이 놈이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리고는 으하하하하....하고 웃고는 막 논바닥으로 뛰어가서 뒹굴면서 좋아하다가 곧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공아......네가 바로 나의 주인공이거늘 내가 이제야 너를 보게 되었으니......흑흑....내가 너를 찾아 그렇게 몇 년을 고생했는데

7일간 잠도 안자고 용맹정진 밥을 먹어도 이뭣고 길을 가도 이뭣고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이뭣고

길에서 예쁜 아가씨를 만나 사랑하고 싶을 때도, 마음이 흔들릴 때도 이뭣고

눈먹고 귀먹은 자처럼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그렇게 너를 찾아다닌지 수년만에야 이제 너를 보게 되다니 .....흑흑,,,고맙다.

이제라도 너를 보게 되었으니 고맙다.....흑흑....

하는 내용이 경봉스님 설법집에 나옵니다.

진실을 아는 순간은 이렇게 감동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허구한날 무엇에 감동하고 있습니까? 한번 되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옛 사람과 오늘날 사람이 다르기 땜에 오늘날 영리한 자는 많으나

진실로 깨달은 자는 적은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목마른 자만이 물 한 잔에 감동해요.

목마르지 않은 자는 물을 주어도 감사한지 모릅니다.

진리는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데 왜 외면해야 합니까?

붓다 여러분!

언제 어디서러도 진리를 설하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서 들으시고

또 남에게 전하는 일을 생활화하여 이 땅에 엉뚱한 것이 휘날리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이 진솔한 법이 휘날리게 합시당 ^^*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이 나오리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일 것이옵니다.

 

믿음을 강조한 부분이죠.

아무리 좋은 말씀도 믿지 않으면 소용 없잖아요

그래서 수보리는 오직 믿음만 있다면 실상이 나온다 하였으니

실상이 니온다 함은 진실이 나온단 말이니 진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진실은 마음이 쉬었을 때 나옵니다.

사실 진실은 이미 여러분의 내부에 있습니다.

부처님, 참다운 인생, 행복, 진리 등등은 이미 여러분의 가슴에 꽉 차있어요.

다만 마음을 쉬면 그것들이 나타납니다. 물이 혼탁할 때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의 모습이 상상이 안가요. 그래서 자기를 모르고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마음이 쉬어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진모습을 모르고 있어요.

간혹 커피마실 때.... 그것도 맥스웰 커피라면....

마음이 한순간 쉬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뿐 곧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혼탁질거예요.

그래서 마음은 한순간도 고요히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요.

그래서 자기의 진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 보면....차창 속에서 밖을 보면....

모든 것이 뒤로 지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무가 뒤로 휙 휙 지나가요.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데 토지가....세상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도 지나가고.....강도 지나가고.....대전도 지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보는 현실이 진실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 기차에 타면 누구나 모든 사물이 지나가는 것으로 보여요.

무엇 때문에 이런 착시 현상이 나오는 것일까요?

내가 움직이고 있어서 그래요.

내가 앞으로 가면 사물은 뒤로 지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가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절대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중지해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물건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면 세상의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있고, 더러움이 있고, 깨끗함이 있으며....

늘어남과 줄어듦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 이런 것은 없어요.

만약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중지하면 세상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혼탁한 물을 가라앉히듯 마음을 고요히 중지시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이 가라앉게 되고 이전에 자기가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의 진실이 명백하게 나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처음에..마음을 중지하라 하면 잘 안하려고 해요. 잘 안된다고.하면서

그러나 자꾸 하다보면 마음은 중지됩니다.

그것이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 망상으로 빠지는 것을 거두어들여 화두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고

염불하여 집중하게 하는 것이고..... 독경하여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을 자유롭게 조정하게 되고 나중에 마음이 저절로 정지하게 됩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되지요. 그때는 사람마다 다 이렇게 말해요.

거참 이상하다.......... 이런 세상이 있었나.......?

아니, 사람들이 다 저렇게 팔을 흔들고 다니네....?

거리가 예전에는 멀었는데 가깝네..저 사람이 내 부인이었어? 새로운 모습이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보여요.

예전에 화를 내던 말에도 화가 안나고....... 짜증날 것도 아니라서 싱겁고.........

그렇게 약간 다르게 보이고 느껴져요.

그런데 이렇게 도인의 심성으로 돌아가려면

마음을 즉시 중지하던지, 수련해서 중지하던지 하여간에

먼저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으면 즉시 회복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옛 선사들은 스승이 한마디 해주면 즉시 믿었어요.

그래서 빠르게 이 문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처님 말씀은 즉시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일단 믿으세요.

자꾸 자기식으로 부처임 말씀을 해석하고 거부하고 하지 마시고 들은 즉시 믿으세요.

여러분은 지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혼탁한 상태라 고요한 상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그 고요에 들어간 사람이라 고요한 심성으로 만물을 보면 모든 것의

진실이 보인다는 것을 안 분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여러분과 같은 인간이니까, 신이 아니고....

부처님 말씀은 절대 여러분을 어긋나게 인도하지 않아요.

엉뚱한 신들의 세계를 소개하는 공상과학의 세계를 설한 것도 아니고

다만 마음이 중지했을 때 보여지는 세계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신이 아닌 사람, 그중에서도 뛰어난 스승이니까

부처님 말씀은 확 믿어버리세요. 그러면 절반은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를 알려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였는데

▶ 그 첫째가 믿음입니다.

▶ 둘째는 용맹심

▶ 셋째는 탐구심입니다.

알려는 마음이지요.

알려는 마음이 없으면 답도 없어요.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면

그 사람은 정말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희안한 세계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순수하여 잡되지 않아서 깨끗하면 아주 휘귀한 곳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존이시여, 실상이란 곧 이 상이 아님이니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 실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혹은 수보리가, 혹은 여러분 중에 누가 실상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다만 언어를 통용하기 위한 명칭일 뿐이라는 것을 또 설명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듣고 믿어 알고 받아 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겠으나

만약 오는 세상 후 오백세에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듣고 믿고서 믿어 알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함이 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당연히 부처님이 계시고 또 부처님은 언어의 변재를 얻은 분이라

들으면 누구나 다 믿었으나 만약 저 말세에, 5백세(60x500=30,000년)가 지난 뒤에도

누군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정말 이 사람은 희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죠.

사실 여러분이 여기 제 금강경강의를 죽 들어본 사람이라면

경이 참 쉽고 그렇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그 깊은 맛이 있다는 것에 대단한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가 강의하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강의하면 모든 경들이 다 쉬워져요.

나는 어려운 문자를 써가면서 강의하는 사람들 참 이해가 안되요.

뭣 때문에 그렇게 어렵게 하고, 문자를 나열한다거나, 지나치게 이론적일 필요가 있겠어요?

금강경은 아주 쉬워요.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하는 것은 강의하는 사람도 금강경의 뜻을 제대로 몰라서 그래요.

자기도 모르니까 어려운 단어로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확실히 알면 쉽게 한마디면 되요.

아마 여기 금강경강의 듣는 사람들은 경이 참 쉽구나 하는 것을 알거예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 듣지 못한 독특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가끔 제 강의를 봐도 그래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참 쉽고 정확하게 하는구나^^*

그 이유는 불경을 관통해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을 봅니다.

이런 이유로 이렇게 말하셨구나....하고 봐요.

그러니까 쉽게 나오죠. 그런데 이렇게 경을 보는 사람 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강의를 듣는 사람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제가 있을 때는 쉬워요.

그러다가 제가 죽고 누군가가 제 말을 또 해석하게 되면 어렵게 바뀔지도 몰라요.

그래서 나중 사람들은 전혀 제 뜻을 파악못하고 문자들의 해석을 하느라 정신만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경을 보는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저 뒤에도 제 그 글을 보고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매우 희귀할거에요.

그래서 고전을 볼 때 저는 주석을 잘 안봅니다.

주석이란 주관적인 해석이라 그것을 보면 진짜를 보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요.

바로 원문을 봅니다.

여기 금강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로 부처님 원문을 보지 주적은 안봐요.

주석 달린 고전도 많아요. 요즘 더욱 그렇죠

그러나 오늘날은 원문을 그대로 보고 강의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것이 더 정확하게 부처님의 뜻에 다가가요.

하옇튼 그래서.... 부처님 말씀도 자꾸 주석을 붙여서 한 학기 강의 듣고 난 뒤에도 무엇을 들었는지 남는 것이 없어요.

오늘날도 그러는데 저 3만년 뒤에 어떤 초인이.... 석우스님 같은 초인이.....^^*

이 경을 보고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드믄 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 뒷 사람이 이해하려면 먼저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보면서 아상이 있으면 절대 이 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병들었고 마음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꼭 자기 식으로 이해하려고 해요.

어떻게 기차를 탄 사람이 사물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 경은 자기를 버리고 봐야 해요. 그래야 제대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있다는 생각, 중생이 있다는 생각 영원이 있다는 생각이 있으면

이 경의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경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런 사상이 없으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왜 말세중생이 4상이 없는가? 하면 사상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없애기 어려우나,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한순간 없앨수 있어요.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이 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즉 모든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정확하게 알았어요.

사상은 본래 없고 다만 이름만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본심은 일체 모든 언설이나 모양이나 뜻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고요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되요.

고요할 때 거기에 무엇이 있겠어요?

그 고요함의 연속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고 진실이기 때문에

본래 사상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 4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본래 없으니 미래 사람도 이 경을 한번 믿고 즉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매우 희유함이 되느니라.

주변에 자기 생각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 투성이인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이 경........

무상(無相), 무정(無定), 무위(無爲)를 설하는 이 경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은 매우 휘귀한 사람이 되겠지요.

뒤로 갈수록 그런 사람이 드물지만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 경을 듣고 깨달아 또 사람들을 일깨우게 될 것입니다.

혹시 이 경대로 살면 사이비가 되는 것이 아니야? 하는 두려움이 있다는 말이죠.

여러분도 제가 이렇게 현재 같이 있으니까 잘 받아들이지

혼자 이 공부를 하게 되면 부처님을 사이비라 할지 몰라요.

모르니까 ........혼탁한 마음에 있으니까

마음이 움직여서 진실을 못보니까, 그런 것이지요.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 바라밀이 제일 바라밀이 아님일세, 그 이름이 제일 바라밀이니라.

부처님께서 지금 사상뿐만 아니라 6바라밀도 그 실체는 없고 다만 이름뿐이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 6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6바라밀뜻은 여섯가지 수행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할 6섯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도는 누구나 외워두어야 합니다.

▶ 보시= 베풀다

▶ 지계=계를 지키다

▶ 인욕=참다

▶ 정진=부지런히 살다

▶ 선정=집중, 몰두, 삼매

▶ 지혜=텅 빈 지혜

평상시에 이것을 실천해야 수행자입니다.

다 외우세요.

그런데 이 중에 보시바라밀이라는 것도 한낱 이름뿐 그 실체는 없다는 말이지요.

보시라고 하지만 보시한 것이 어디 흔적이 있습니까?

이미 지나간 것을 생각해보아야 무얼하겠어요?

이미 준 것이라 내 것이 아닌 이상에야 .나도 없는 것인데 거기 무슨 의미있는 행동이 있겠어요.

인생이 꿈인데 꿈 속에서 무얼 했다고 무엇이 한 것이겠어요?

다만 주었다는 명칭만 있을 뿐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주고도 준 것에 집착하면 바보죠.

주어도 주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그렇다고 그럼 안주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반두시 주어라.......이것이 부처님이 강조한 수행이죠.

그러나 주어도 주었다는 생각이 없으라. 왜냐면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어도 준 것은 없다 이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준 것에 집착하면 그 순간부터 준 것 때문에 괴로워지니까

주는 순간 잊어버려라 이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미 내 것이 아니니까, 줄 때 주었다는 집착도 주어라 라는 말입니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설하되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네가 온갖 수모를 참을 때 참고 있다는 것까지 참아라.

그래서 참고 있다든지, 참았다든지 하는 흔적을 없애라 라는 말입니다.

인욕이란 다만 이름뿐이니까 말입니다.

어찌한 까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임을 당할 때에

나는 그때에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을 내었으리라.

옛날에 가리왕이 있었어요. 부처님 전생에

하루는 가리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왕이 피곤하여 잠시 낮잠을 자는 사이에 궁녀들이 주변에 유명한 선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설법을 들었습니다.

왕이 깨어나서 궁녀들을 찾다가 선인이 있는 곳까지 왔는데

선인 앞에서 열심히 설법을 듣는 궁녀들을 보자 질투가 불같이 났어요.

"그대는 누구요?"

"나는 인욕을 수행하는 선인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인욕을 수행한다니 어디 한번 봅시다."

하고는 칼을 빼들고 단번에 한 쪽 팔을 잘라버렸습니다.

피는 분수같이 나오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선인은 전혀 성내거나 원망하는 눈빛이 없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팔을 잘랐어요.

그래도 묵묵부답...........

그래서 또 다리를 자르고....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미친듯이 전신을 갈갈이 도려냈어요.

그래도 반응이 없다가 죽을 무렵이 되자 하늘의 천왕에게 말합니다

"제석천이시어!

내가 만약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면 내 목숨을 가져가시고

그렇지 않고 더 수행하여 도를 이룰 운명이라면 저의 몸을 회복시켜주소서........"

하고 힘없이 소리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제석천왕이 놀라서 하늘에서 내려와 "선인이시어!

어찌 그렇게 잘 참습니까?

어찌 제가 이런 선인을 죽게 내버려두겠습니까?" 하고 합장하고 예배하자

즉시 전신이 다시 붙어서 멀쩡한 몸이 되었어요.

이것을 본 가리왕이 감동하여 예배하고 물러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또 부처님 전생에 5백세동안 인욕을 닦은 적이 있었는데

부처님은 한때에 왕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때 왕은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좋아했는데 하늘에 제석천왕이 내려와서

얼마나 잘 베푸나 보려고 백정의 몸으로 변신하여 왕의 몸을 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왕은 자기 살을 칼로 베어서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팔면 남는 것이 없다하고 더 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또 베어주고.......그렇게 전신을 베어주었어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베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베품은 조건이 없는 베품이어요.

달라하면 이유를 묻지 않고 줍니다.

차라리 못줄 망정 그 이유는 뭇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베품이어요.

저도 금강경을 배우고는 남에게 줄때 그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어요.

거지가 참 자주 와요. 그러면 있으면 줍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왜 할 일이 없어서 얻으러 다녀요? 하고 묻지 않고.......

멀쩡한 사람이 달라해도 묻지 않고 주어요. 다만 없으면 못주어요.

제석천왕은 하늘의 왕입니다.

왕은 시험하기 위해서 살을 달라한 것이지요.

부처님은 달라하니까 이유를 묻지 않고 주었어요.

자기 살이 다 없어지는 데도 주었어요.

부처님은 그렇게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복인이 된 것이고

그런 복이 쌓여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 자식인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복이 없으면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방스님들은 일부러 3개월 해제기간에 복을 짓기 위하여

낙도에 가서 봉사하기도 하고.논을 갈아 농부를 돕고,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야 마장이 안끼고 복을 만난다고 모두들 생각하죠.

여러분도 빨리 깨달으려면 복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도량, 좋은 스승을 만나서 한마디에 즉시 깨닫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전생에 지은 업장이 많은데 .......

그 업장대로 살기도 바쁜데, 진리가 들어갈 틈이 어디 있겠어요?

이 법은 아무래도 좀 시간이 나야하고

자기를 돌아볼 기회가 있어야 결국 얻습니다.

그런 기회조차도 없이 평생 절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은 깨달음은 커녕

부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 많아요.

스스로 붓다이면서도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평생 살아가다니.......

이렇게 안타까울 데가 어디 있겠어요?

이때 고통스러울 때, 부처님은 성내거나 원망하는 아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고통을 받아들일뿐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방의 산이 몰려오면 어떻게 합니까?

사방의 산이 몰려오는데 어떻게 한단 말이냐?

조주선사의 선문답니다.

사방의 산은 생노병사입니다.

이것은 피일 수없는 운명이지요. 고요해야합니다^^~~

이때는 할 일이 없어요. 받아들이는 일만 있을 뿐........

부처님도 고통을 받아들여요. 단지 아풀뿐....에쿠~ㅇ허리양~~하고......

아무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아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고 무지 아프다~~~..그래도..어쩌랴..내가 참지...^^;

절대 남원망하거나 괴롭히지 말고 병으로 병원에 있을 때도 그냥 아프세요.

이것이 도인의 행동입니다.

안 아픈 척할 필요도 없고 아픈 것을 받아들이뿐 남 괴롭히지는 말아요.

인상 쓸 것도 없고.죽을 때라 하면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세요. 본래 죽음은 없습니다.

죽는 꿈을 꿀뿐.... 유언을 남길 것이 있으면 담담히 남기고.........

죽을 때 비참하게.........구차하게.............흉하게 남을 괴롭히면

부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욕을 실천한다 하여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욕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인욕을 한다 하여도 그것도 한갖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 실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욕을 실천한다 하여도 자랑할 것도 없고 대단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지니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마음을 낼지니라.

지난 번에 6바라밀하다가 보시 인욕까지 했는데 원문에는 생략되었지만 나머지가 더 있습니다.

잠깐 보충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 인욕하듯이 나머지 4가지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인욕 다음에는 지계입니다.

지계(持戒)는 계를 지키다는 뜻인데

부처님은 공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설하시지만

그렇다고 공에 매여있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공에 빠지면 그것도 병입니다.

가금 인터넷에 보면 사람들이 공(空)에 빠진 듯한 발언을 하시는데

이것은 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공에 집착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곧 병(病)들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색에도 머물지 않지만 공에도 머물지 않아요.

색이니 공이니 주장하는 것은 다 병입니다. 둘다 떠나야 합니다.

색에 집착하여 존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하여 공을 설하시고

공에 집착하여 모든 것은 공이라고 거기에 집착하여 아무 일도 안하는 사람을 위하여

계율을 설하셨고 각종 수행 종류를 설하셨어요.

색과 공을 잘 이해 하려면 살아있는 이대로 곧 공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대로 색이면서 동시에 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꿈 속에서 모든 일은 사실처럼 여겨지나 사실은 꿈입니다.

공이지요. 공에서 만든 세계여요.

그러나 꿈 속의 사람은 실제로 고통이 있고 어떤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이면서 동시에 색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여요.

공이 변하여 만물이 되었으나 만물은 생주이멸하고 있는 어떤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고 일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공에 떨어진 병자입니다.

그러면서 밥은 왜 먹나 몰라요?

몸을 가지고 있으니 몸은 부지런히 일하고

마음은 항상 무심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6섯가지 수행을 하되 했다거나 한다는 생각 없이 하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수행자라면 계를 지켜야 되는데 계는 근본 4계가 중요합니다.

바로 살.도.음.망입니다. 살생, 도적질, 사음, 망어지요.

도의 입장에서는 필요없는 것이지만 사회는 이러한 질서가 없으면 매우 혼란하니까

깨달은 자라도 이 계를 지키라고 질서유지 차원에서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를 보아도 부처님은 철저히 사람들과의 윤리지 어떤 신을 섬기라는 계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철저히 객관적인 진리를 설하셨고, 사람들에게 맞는 말씀을 설하셨으며

사람을 가장 존경하였고 사람이 가장 귀하면서 사람은 스스로 행복한 존재라고 설하셨습니다.

계도 순전히 사람을 위하여 설하셨지, 어떤 다른 자를 위하여 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계를 지킨다고 굳히 손해되거나 잡신에 매이는 것이 아니니까

꼭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 사람이라면 이정도는 지켜야 해요.

살생, 이것은 남의 생명을 죽이는 것 아닙니까? 비록 힘없는 생명이라도 함부러 죽이지 마세요.

도적질, 이것 왜 합니까?

남은 힘들게 벌어놓은 것 왜 몰래 훔칩니까? 다음 생에 그 몇 배를 갚으니까 절대 훔치지 마세요.

오히려 베풀어 주어야지 왜 훔칩니까? 훔치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여기 제 금강경 수강하는 수강생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수강료 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수강료 안내고 다니는 사람 있어요.

다 알지만 누구라고는 말 안합니당^^*

옛날에 선생님은 기성회비 안내면 매로 맞았어요.

그것은 받았으면 응당의 댓가를 내라, 공짜를 바라지 마라 라는 교육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성인이 되어서 공짜 좋아하면 안되잖아요.

강의하는 스님은 이 강의를 하기 위해서 30년간을 고생해서 공부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2시간을 봉사합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공짜라고 해도 분명히 수강료있다고 했는데도 안내면 훔치는 것 밖에 안되잖아요.

내가 죄지으면서 남보고 큰 소리 치고 다닐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께 이제부터라도 꼭 수강료 내세요.

공연히 왜 빚을 집니까?

이것 하기 위해서 각 운영자님들은 얼마나 수고가 많으시겠어요.

앞으로 살아가시면서 두고 두고 아시겠지만 어디 가서 이런 강의 못듣습니다.

이렇게 강의하는 사람 없어요.

다음은 정진(精進)입니다.

정은 정미롭다는 뜻이고 진은 나간다는 뜻입니다. 정미롭게 나간다 라는 뜻인데

작은 계단을 올라가는 것 처럼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부지런히 살아라.

그것이 기도가 되었든 일이 되었든 개미처럼 한발 한발 딛어서 나아가라 라는 말입니다.

한꺼번에 단숨에 뛰어서 가지말고 하나 하나 딛으면서 나아가라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욕심을 내지 마라고 하였어요.

실제로 사는데 욕심은 필요없습니다.

욕심은 몰라서 내는 것입니다.

어디 세상사가 욕심대로 되든가요?

욕심이 있던 없던 결론은 항상 똑같아요.

전생에 지은 복만큼만 들어옵니다.

그런데 분에 넘치는 욕심, 즉 자기가 전생에 지은 복보다 더한 것을 얻으려고 하니

그것이 얻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단지 부지런히 일해라.

그러다 보면 전생이 업이 나타나는데 큰 복이면 자연히 거부가 될 것이고

작은 복이면 굶지않고 사니 부지런히 할 뿐이어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의 복에 대하여 더 할 말이 많으나 여기는 금강경강의 시간이라

충분히 못하지만 하옇튼 자기가 전생에 지은 것 + 부지런함이 자기 삶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살아라 라는 말이 정진입니다.

선정(禪定)은 집중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만약 이 훈련을 해두지 않으면 다음 생에도 머리가 나빠져요. 산만해지고

염불, 기도, 참선을 통해서 잡념없이 하나에 몰두하는 수련을 자꾸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부처님의 마음을 완전히 회복합니다.

지혜(智慧)는 반야지혜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사용하는 것은 다 반야지혜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인 지혜는 반야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지혜를 쓰면 반야지혜지요.

겸손하고, 나를 버리고 남을 존중하고.......죄진 자를 용서하고.....

그러면 반야지혜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가지를 항상 닦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6수행을 하더라도 했다던지 하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어야 합니다.

그냥 살아가듯이 하는 것입니다.

중요하기는 종요하나 이것도 결국 화장실에서 똥누는 것과 같습니다.

화장실 가는 것 중요합니다. 안갈 수없어요.

그러나 갔다 와서 자랑하는 사람 봤습니까?

큰 소리로 나 화장실 갔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있던가요?

그처럼 6바라밀을 분명히 하되 했다는 생각은 내지 마라는 말이지요.

결국 6바라밀도 사람으로 있기 때문에 필요한 수행이지요.

사람노릇을 하려면 필요하다는 말인데 누가 설사 제대로 못해도 미워하면 안되요.

이것도 꿈 속의 일과 같아서 해도 한 것이 없고 남 미워할만큼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뭘 정해놓으면 꼭 거기에 집착을 해요.

그것 하지마라 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어요.

옐들어 발우를 너무 크게 하지말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 발우=스님들 걸식 밥그릇

이유는 부처님 당시에 어떤 비구니가 걸식갔다가 웬 장수와 눈이 마주쳐서

어찌 하다가 애를 뱄어요.

실수로 애를 낳았지만 애를 어디다 둘 데가 없어서 자기 밥그릇에다 놓고 키웠어요.

낭중에 애 머리가 자꾸 삐져나오니까

스님들이 다 알게 되었는데 부처님께서

그것을 듣고 좋게 애를 키우러 세속에 가서 살면서 수행하라 했어요.

그리고는 발우의 일정한 크기를 정했습니다.

애가 들어가지 못하는 싸이즈죠.

그 법이 지금까지 있는데 누가 혹시 발우를 너무 크게 하면

벌받고 큰 일나는 줄 알고 막 죽일 듯이 대드는 사람있어요.

이것이 바로 병입니다.

지키되 못지켰다고 그 사람 미워할 만큼의 큰 일은 아닙니다.

만약 지키지 못한 사람 미워하면 자기가 오히려 더큰 죄를 짓는 줄 알아야 해요.

무엇보다도 부처님을 미워하는 죄가 젤 커요.

남 미워하고 시기하고 싫어하는 것이 곧 부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꿈인데 도적질했다고,,,,,,,사음했다고,,,,,,,살생했다고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어요.

죄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꼭 지켜야하는 법일뿐이지 그것이 생명을 내걸고 남 미워할 정도의 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해도 했다는 생각이 없으라는 말입니다.

6바라밀도 결국 허망한 것이니까........수행하되 했다는 상을 내면 안됩니다.

불자라면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 색은 만물, 개념, 생각, 의미, 뜻 등을 말해요.

▶ 물건, 그리고 마음에서 나온 어떤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상이요,

그것을 색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상을 떠나서 마음을 내야합니다.

무심으로 말하라라는 말이지요.

무슨 뜻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

옐들어 부인이 쓸어졌으면 아무 생각없이 병원으로 옮겨라.

그리고 의사가 뭐라고 생각하기 전까지 아무 생각도 단정도 하지마라

설사 의사가 뇌졸증에다 회복하기 어여운 중증이라고 하여도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라

불쌍하다, 에잇 돈들게 생겼네, 차라리 죽었으면.....

아니면, "흑흑 불쌍한 사람, 이 못난 남자를 위하여

평생 좋은 옷도 못 입어보고,,,,,,,

지난 번에 보너스라고 당신 좋은 것 하나 사입으라고 주었는데도 안사입고.......

오히려 나를 위하여 보약 한제 지어오더니.......

그렇게 자기는 안 돌보다가 쓸어지나니......."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 아내 죽으면 안됩니다........엉엉........"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지도 말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하고

단지 법당에 가서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되

부처님의 뜻에 맡길 뿐..... 일찍 죽어도 매달 월급 다 써가면서 7년을 병원에 누워있어도

항상 무심으로 받아들이고 그 어디에고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큰 깨달음의 마음을 내고

응당 소리, 향기, 맛, 촉감, 지식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어디에고 집착하여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지 마라.......

동요없이 마음을 쓰라 항상 고요하고 담담하라 라는 말입니다.

왜냐? 알고 보면 인생은 꿈과 같이 내가 만든 세상이고

그 본질은 고요한 세상이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면 본질과 멀어진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고요하고 본래 죽음도 삶도 병도 없으니 그런 것에 동요하지 마라

항상 고요하라 고요하되 그 고요 속에서 마음을 사용하라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마음을 쓰라

마음을 항상 사용하라, 그러나 내부는 고요하라 라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마음에 머뭄이 있으면 곧 머뭄이 아님이 되느니라.

사실은 네가 아무리 머물려해도 머물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비어있는 것인데 어디에 머물 것인가?

기억이라는 두뇌 한 쪽에 저장했던 것들을 순간 사용하는 것이지

마음이 순간 사용하는 것이지 마음의 저편에 여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지요.

아니, 그것은 아예 머물 수 없다는 말이어요.

본래 너의 성품은 항상 비어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스스로 성품에 맞는 행동을 하라는 말이지요.

성품에 그 무엇도 아무리 머물게 하려고 해도 머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빈 성품이 주인이 되어서 빔 속에서 일체를 사용하라

끌려가지 마라. 그것은 실제로 너의 망념일 뿐이다

불쌍함은 없다

여우털 코트 못입어도........외국 여행 한 번 안가도.......비싼 음식 한번 먹어보지 못해도

죽을 때까지 나 장애인 남편을 만나서 매일 5시에 일어나

애들 학교에 보내고 자기 파출부하러 가다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뇌졸증으로 쓸어져도

그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대의 부인은 자기가 불행하다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것은 그대의 생각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죽어도 죽음은 없다 무엇이 죽나? 죽을 자가 있어야 죽을 것이 아닌가?

항상 고요한 가운데 네가 해야할 일을 살피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깨어나길 기다려라.

새 장가갈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한심한 인생이라고 자학하지도 말고,

애들하고 살아갈 것 걱정하지도 말고 무심히 현실을 받아들여라.

그 속에서 마음을 일체에 끄갈려 가지도 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용하라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보살은 마땅히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라고 설하느니라.

물질과 생각에 머물지 말고 베풀고 행하고 말하라는 말입니다.

'나는 얼마를 주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도 없는 데서 자기가 세운 병이고

'나는 주었다는 생각이 없다' 는 말을 해도 역시 병이고

'나는 주었다는 생각도 없이 주어!' 라고 말해도 병입니다.

일체 선이던지 악이던지 한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다운 베품입니다.

구산스님은 아무리 귀중한 것을 남에게 주어도 헌 걸레를 주었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걸레주고 남에게 주었다고 자랑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걸레같은 것을 주었다고도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주세요. 항상 주는 삶을 살되 주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해요. 그럼 안주면 되겠네 하고 안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은 "주어라! 베풀어라!" 꼭 주어라, 주는 생활을 습관들여라,

그러나 주어도 준 행위는 잊어버려라 라고 말합니다.

물건을 줄 때 주었다는 생각도 함께 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행은 아무 것도 안하는 삶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되 했다는 생각은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라.

이렇게 마음에 두지 않고 보시하고 일체를 행해야 나도 이익되고 모든 사람도 이익됩니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고 도인이요, 보살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행입니다.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상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의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부처님의 결벽증이 또 나왔어요.

내가 상이라고 말하고, 중생이라고 말한다고 정말 모양이 있고 중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말을 통하기 위한 명칭일 뿐이니라라는 말이죠.

저 위에서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말하십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만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그렇습니다. 여래(부처님)는 거짓말을 안해요.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사실은 부처님의 말씀이 다 맞는 말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거짓입니다.

지난 번에 말했듯이 우리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이상 진실은 보이지 않아요.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중지한 분입니다.

선사도 그렇고 저 또한 중지한 세계를 보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움직이고 있으면서 보기 땜에

부처님의 말씀이 허공에 구름잡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부처님을 뜬 구름 잡는 말씀을 하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가 병들은 것을 모르고 병자가 병나은 사람을 진단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말씀이 맞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행복한 삶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불타는 집에서 벗어나 이리 건너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옛 선배들 즉 부처님 이후로 계속 나왔던 부처님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었잖아요.

여러분만큼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분들도 믿어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부처님 말씀이 진실임을 믿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지나간 제 강의 잘 읽어보세요. 전부 맞는 말만 합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던 이유들이 다 설명되어 있어요.

그리고 생각해봐요. 부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한번 보세요.

그러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말씀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은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오늘 첫구절, 물론 지난 번하고 연결된 말이지만 아주 중요한 말부터 합니다.

이 말씀에 부처님의 금강경 사상, 그리고 모든 경에서 설하신 뜻,

그리고 선사들의 오의까지 다 들어있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쉬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실다움이란 없어요.

다른 성인들은 다 한결같이 내 법은 최고의 법이요, 진리요,

실다움이다 라고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 반대를 말합니다.

"내 법은 실다움이라고는 없느니라. "

실다움이란 실체요, 진실이요, 열매요, 알맹이인데

부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나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셨어요.

간혹 초심자들이 여기서 번역을 잘못했는가보다 하고 원문을 살펴보기도 하고

이리 저리 궁리도 내보기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절대 이것이 '나의 진리니라' 하고 설하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으면 그것은 상을 세우는 것이므로 허망해지고 언젠가는 없어질 때가 있게 됩니다.

옐들어 유신론의 종교중 회교도 코란에 보면 알라(신)가 말씀하시길

"내가 사막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드리라"

라는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 옛날에 사막에서 젖과 꿀이 나온다 하니까 희안한 말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절대신이 말했다하니까 모두 믿고 기다렸어요.

이 말을 거의 1500년간을 기다렸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 그래서 내 자손이라도 번창하리라......

그러던 중 사막에서 기름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신이 더 위대해졌어요.

오늘날 이슬람은 순전히 그 기름 때문에 영광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어 서로 끊임없이 없이 싸워요.

만약 이라크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는다면 부시는 전쟁하려고 하지도 않고

오늘날 그렇게 거기서 수많은 사람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은 꿀이 아니라 피를 불러왔어요. 서로 차지하려고....

그런데 이것도 언젠가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알라의 말은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해야 신의 능력일텐데 한정이 있다면 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연의 능력입니다.

얼마후에 틀림없이 환경문제를 고려하여 대체에너지가 보급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무공해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살 날이 올거에요.

그러면 또 알라의 말이 틀린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 젖과 꿀이 내려오게 하리라.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오늘날 연탄이 안팔리듯이 기름이 안팔리면 도대체 그때는 뭐라하겟어요?

이렇게 물체를 가지고 진리를 설한다든지 또한 어떤 윤리를 하나 세워 그것으로 진리라 하면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로다 같은 그것도 무너질 때가 있고

오늘날은 여자가 하늘이고 남자가 땅이 되었잖아요.

남자는 작업장에서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사는데

여자는 아파트 높은 곳에서 보일로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사니까 말입니다.

또한 내가 7일동안 세상을 창조했으니라 라는 말도 요즘은 조의 기원같은 진화론에 밀리고 있잖아요.

종 .무엇이든지 세우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진리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아무것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실다움이란 없다는 말이 그말입니다

모두 잠깐 굼처럼 존재하는 실체요, 윤리요, 진리인데 무엇이 영원하다고 주장하겟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허망을 주장한 것도 아니니다.

꼭 사람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을 판단하려고 해요.

이것이 아니니라 하니까 그러면 당연히 저것인줄 알아요.

이것이 병들기 쉬운 함정입니다.

선사(禪師) 자격시험에서도 꼭 여기서 다들 떨어져요.

"그러니까 인생이 허망하고 꿈이고 아침 이슬같습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해요.

이렇게 답안지에 써내면 다 떨어집니다.

그렇게 불교를 알아서는 밥도 얻어먹지 못해요.

부처님은 허(虛)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버려야 합니다.

허(虛)를 주장하면 유(有)를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존재와 비존재를 다 버려야 되요.

이것을 양변을 다 버린다 하지요.

이것을 불교의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그러면 유도 버리고 무도 버리면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또 뭘 찾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도 병이니다. 이런 병이 있어서 불교를 제대로 못보고 꼭 뭘 세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찾지 말고, 정하지 말아야 해요. 그래야 도(道)가 나타납니다.

마음에서 찾지 말고 정하지 말고 살아봐요.

그러면 부처님의 행이 되고 곧 도인의 행이됩니다.

남이 장군이 아침에 출근하려고 집에서 나오는데 웬 여자가 휙 지나가더래요.

순간 남이 장군은 기분이 상했어요. 아침부터 여자가 남자의 길을 가로 지르다니.......

요즘도 그런 넘들 있으니까 여자님들 조심해요^^*

건방진년 같으니라구.하더니 칼을 뽑아 뒤에서 목을 쳐서 죽여버렸어요.

서슬퍼런 장군이니까 아무도 말 못해요.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 뒤로 하는 것마다 안되어요.

결국 남이가 20대 초에 장군이 된 것을 시기라는 무리들에 의하여

연일 남이를 비방하고, 트집 잡고, 시기하는 상소가 오라가더니 나중에 주살을 당하고 말았어요.

여러분에게 묻노니 말해보세요. 정말 아침에 남자를 가로지른 것이 나쁜 징조였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나요? 마음! 그렇습니다.

한 마음 일어나서 사람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된 것이지

여자가 지나간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였어요.

어떤 사람, 1년간 씻지 않은 양아치가 있어요. 여기 동네에....

수염 지저분하게 기르고 얼굴은 시커멍스인데 가끔 오는데 꼭 여자 신발을 메고 와요.

그래서 내가 왜 그것 메고 다니요? 하고 물었더니 여자 신발 줍는 날은 돈생기는 날이래요

그래서 꼭 어깨에 메고 다니면 그말은 재수가 좋데요.

내가 웃겨서 허허 웃으면서 엿다 가져가시오 하고 천원을 주었어요.

그랬더니 고맙다고 넙죽 절하면서 거봐요. 진짜잖아요.

하고 눈을 흘기면서 가는데 그 모양이 얼마나 우습던지 한참 웃었는데 돈이 안아깝 더라고요.

다 사람이 자기 마음이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이것은 실화인데 어떤 권투선수가 자기 처녀 팬티 입고 싸우면 꼭 이긴대요.

그래서 시합만 되면 그 처녀팬티 구하는라 아우성이라데요.

모두 자기 맘이 짓는 것이지. 그렇게 정하면 정하는대로 되는 것이 마음의 힘이어요.

그런데 불교는 그런 것을 정하지 마라했어요.

그 정함이 결국 너를 불행하게 한다는 말이지요.

이것도 실례인데 어떤 사람이 자기 부인이 맘에 안들어 이혼하려고 했어요.

이유는 한번도 자기에게 편하게 해준 적이 없데요.

그런데 사업에 망해서 가난하게 되었는데

부인이 그동안 저축해놓은 돈으로 어디 땅을 투자했데요.

마침 거기에 큰 건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큰 부자가 되었어요.

그러니 자기에게 문제 부인이 아니고 노년을 행복하게 해주는 부인아닙니까?

무엇이든지 정하지 말아요.

그러면 그순간 불행의 여신이 따라다닙니다.

정함이 없으면 당신이 곧 부처요. 도인이어요.

배고프면 일하고 좋다 나쁘다, 정함이 없이.....

주어진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세요.

작다고 불만족이라고 정하지 말고 그렇다고 평수가 작은 것이 행복이라고 정하지도 마세요.

어떤 정함도 그대를 불행하게 해요.

그저 산위에서 살게 되면 면 그런대로 살고

팔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뿐 불행하다고 정하지 마세요.

양팔이 있다고 행복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팔이 있으나 없으나 같아요. 이것이 진리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진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을 찾는 양변을 여의는 것이 핵심입니다.

열심히 살되 무심으로 사는 것 이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말입니다.

“수보리야, 어떤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마치 어두운 곳에 들어가매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어떤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법에 머물다는 말은 인과에 연연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일 했으면 과보가 있으니라

인과응보 이것을 기대하는 것이 법에 매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절대 댓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어도 절대 준 적이 없다고 해요.

그러므로 댓가를 바라지도 않지요.

이렇게 살아가면 이것은 밝은 곳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모든 윤리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네가 좋은 일해라. 그러면 복이 오리라.

이렇게 가르쳤어요. 어려서부터말입니다.

그래서 불행해진 것입니다.

내가 해주었으니까 너는 나를 위하여 해주어야 해 하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가 내가 답을 안해주자 시기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상대도 안하고 합니다.

이것은 불행의 징조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안되요.

앞으로 자식들에게 부처님처럼 가르쳐야해요. 그래야 행복해져요.

너는 항상 주어라. 그러나 댓다를 바라지도 말고, 주었다고 생각도 하지 마라. 영원히 잊어버려라.

그래야 죄를 짓지 않느니라.

좋은 일하고 보답이 없다고 욕하면 더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답을 바라는 것은 곧 죄를 짓는 것이요,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왕 살라면 밝은 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럴려면 일체 세상의 법을 버리고 주고 또 주도록 하십시오.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 선남자나 선녀인 들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들을 다 아시고 다 보시 나니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이루느니라.”

부처님은 다 알고 다 보십니다.

다 속여도 부처님은 속일 수 없어요.

부처님은 천안이 있고 누진통을 얻었어요.

천안(天眼)은 하늘 눈입니다.

하늘이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땅 위가 하늘이어요. 1mm 위도 하늘이고

그러니까 거기에, 하늘이 곧 부처님의 눈이니까 부처님은 숨길수 없어요.

그리고 누진통은 모르는 것이 없이 다아는 지혜입니다.

하늘이 곧 부처님의 눈이니까 다봅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 다 알죠.

이런 눈으로 보고 알아서 말인데 이 경을 지니거나 읽거나 외우면 한량없는 공덕을 받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익이 있습니다. 믿고 실천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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