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化非眞分 第三十二

 

 

須菩提(수보리)야 若有人(약유인)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이만아승지세계칠보)로 持用布施(지용보시)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發菩提心者(발보리심자)하야 持於此經(지어차경)하되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을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며 爲人演說(위인연설)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하리니 云何爲人演說(운하위인연설)고 不取於相(불취어상)하야 如如不動(여여부동)일지니 何以故(하이고)오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이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하며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하니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하라 佛說是經已(불설시경이)하시니 長老須菩提(장로수보리)와 及諸比丘比丘尼(급제비구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聞佛所說(문불소설)하고 皆大歡喜(개대환희)하야 信受奉行(신수봉행)하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했더라도, 다른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이 경전을 지니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어 남을 위해 연설해 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인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그 까닭은 이러하니라.』

『일체의 함 있는 법은 꿈같고

꼭두각시·거품·그림자이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비구·비구니와 우바새·우바이와 여러 세계의 하늘사람·세상사람·아수라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다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第三十二 應化非眞分--응신·화신 참된 것 아니다

 

[科 解]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은 부처님의 응신(應身)이나 화신(化身)은 참다운 법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한 대문입니다. 물질적인 보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설법하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참다운 설법은 이 세상의 온갖 현상에 대해 마음을 이끌리지 말고 여여부동하라.」 곧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도리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확실히 꿈인 줄 알면 무엇에 집착할 것이 없으며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사람이 뒤에 있는 줄만 알면 꼭두각시에 홀리지 않게 되는 것처럼 현상계에 대해서도 그렇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응화비진분의 내용은 「須菩提 若有人以滿에서 應作如是觀」까지이고 그 다음 「佛說是經已」에서 끝까지의 내용이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합니다. 제일 처음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을 설명할 때 말한 것처럼 어떤 경이든지 경 전문을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말씀뿐이며 본론에 해당하는 정종분과 서분과 유통분은 경을 결집할 당시 아란존자의 말씀으로 엮어진 것이며, 부처님 말씀 앞뒤에 붙여서 법회(法會)를 하기 전과 마친 뒤의 경위를 간략히 설명한 부분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

 

[解 義] 『수보리야! 만일 마음이 넓고 훌륭한 어떤 사람이 있어서 무량아승지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남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면, 즉 옷 없는 사람에게 옷을 주고 밥 없는 사람에게 밥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고 고학생에게 장학금도 주고 실업자에게는 직장을 주는 등의 온갖 좋은 일을 하였다면, 이 사람의 복덕이 한량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서,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낸 보살이 이 금강경을 정성으로 받아 지니고 잘 배우는데, 어려우면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서 지니고 읽고 외며 또한 남을 위하여 잘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아까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보시한 사람의 복 보다 더 뛰어나리라.』

물질을 보시하거나 몸뚱이를 보시해서 얻은 공덕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해서 남에게 연설해 주는 공덕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여러 번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데 그러나 남을 위해 금강경의 뜻을 설명해 주려면 마음을 어떻게 가지고 어떻게 일러 주어야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끝으로 말씀하십니다.

 

原 文 :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解 義] 『어떻게 하는 것이 참으로 남을 위해서 하는 연설이냐, 부처님의 깊고 깊은 법을 남에게 잘 가르쳐 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은 모든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하여 부동하는 것이다. 내가 남을 위해서 법문을 해 줬거니 하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도 불법을 설했다는 상에 떨어진 것이니 여여하게 까딱도 하지 말라.』

내가 남에게 백만 원쯤 주어서 살게 해 주었더라도 내가 누구를 위해 보시를 했거니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곧 상에 떨어진 것입니다. 「금을 보시했다, 옷을 보시했다, 고아원을 만들었다, 양로원을 만들었다, 절을 지었다.」하는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불취어상(不取於相)입니다.

여여부동(如如不動)은 마음자리는 생노병사·남녀노소·빈부귀천이 없고 천지음양·시간공간·주관객관을 다 초월한 자리이므로 항상 그대로고 변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여여부동이라 한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이 정도라도 법문을 들어 놨으니 「불취어상 여여부동하라.」하면 그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취어상 여여부동하라.」 그러면 곧 깜깜하게 꽉 막힙니다. 시간, 공간이 나누어지기 이전, 생사 유무 이전의 자리이므로 여여부동하게 되고 좋고 싫은 것이 없고 주관 객관이 떨어진 자리에서 하는 것이므로 상을 취할 것도 없습니다.

 

原 文 :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일체의 유위법, 곧 할 수 있는 법, 조작이 있는 생사법은 다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그런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볼지어다. 이렇게 허망한 꿈인 줄 확실히 알았다면 그것을 소유하겠다고 집착할 것도 없고, 그것 때문에 기쁘다든지 슬프다든지 놀라고 할 것이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오직 상에 떨어지지 말고 여여하여 부동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시어 금강경 본문의 대단원의 마지막 끝마무리를 하셨습니다.

일체 유위법이라 함은 상대세계의 생사법 일체를 말합니다. 춘하추동이 유위법이고 음양조화가 유위법이며, 있는 것 없는 것이 유위법이고, 할 수 있는 것 하여지고 있는 것 변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은 다 유위법입니다. 부처니 중생이니가 다 유위법이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사구게를 설명하는 것도 유위법이고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팔만대장경도 유위법입니다.

이와 같은 유위법은 다 아침에 잠깐 있다 해가 반짝 나면 없어지는 이슬 같은 것이므로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 하듯이 언제 날아갔는지 없어진 줄도 모르게 사라집니다. 또 번쩍하는 번갯불이고 물거품 같고 꼭두각시 허깨비 같으니, 물거품은 일어나면서 한쪽으로 꺼지는 것이고 꼭두각시는 요술하는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사람처럼 만든 것을 말하며 허깨비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헛보는 것이니, 눈병이 나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꽃이 피어 보이는 등의 예를 말합니다. 현상계가 그대로 꿈이고 인생의 현실이 그대로 꿈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꿈과 같다고 말하지만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농사짓고 아무 생각 없이 시집가고 아무 생각 없이 장가가서 좋은 일만 하고 상에 취하지 말아야 하며 여여부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여부동한 마음으로 이생기심(而生其心)하여 중생제도도 하고 성불도 합니다.

 

原 文 : 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 比丘尼 優婆塞 優婆夷 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解 義]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을 다 말씀하시고 다시 장로 수보리와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 곧 청신남 청신녀를 비롯해서 일체 세간의 하늘사람 인간 세상사람 아수라 등의 백만 억 중생들이 설법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에 아주 기쁘고 좋아서 받들어 행하였다.』

장로 수보리의 장로는 나이가 많고 덕이 높고 지식이 높다고 하여 지어진 존칭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라는 존칭을 쓴 것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아란존자께서 엮은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말씀하시고 나니 장로 수보리(佛說是經已 長老 須菩提)」에서부터 끝까지는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는 출가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독신수행을 하는 승려를 가리킵니다. 처음 출가하면 사미계(沙彌戒)를 받아서 승려 후보로서 수행생활을 하다가 스무살이 되면 남자는 250계를 받아서 비구가 되고 여자는 348계를 받아서 비구니가 됩니다.

작년 가을에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의 비구니 승방에서 대중공양할 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전 처녀가 승려가 되겠다고 찾아 온 일이 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데 어서 시집가라는 어른들의 성화가 있었지만 학교 다닐 적에 절에 다니며 무상법문을 여러 번 들었고 사회의 혼란한 것도 직접 보고 해서 발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는 이 비구총림(比丘叢林)이나 비구니총림(比丘尼叢林)이 하나씩만 있어도 중노릇 잘할 수 있는 처녀 총각이 많이 있습니다. 중노릇 하려 절에 갔다가도 참다운 수행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없고 청정한 수행도량의 모습도 보기 어려우며 머리 깎아 봐야 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되돌아서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바새(優婆塞)는 청신남(淸信男)·선남자 곧 남자신도를 뜻합니다. 우바이(優婆夷)는 청신녀(淸信女) 선여인, 곧 여자 신도를 뜻합니다.

한 20년 전쯤 되는 일인데 내가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대개 그랬지만 부모가 정하여 처녀 총각이 얼굴도 모르고 결혼식을 올린 신부 신랑이 있었습니다. 손님들이 다 물러가고 신랑이 신방에 들어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신부는 윗목에 딱 앉아 가지고 밤새도록 까딱도 하지 않고 참선만 하고 있습니다. 신랑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새벽이 되어서는 별별 무서운 생각이 다 들어 그 이튿날 그대로 혼자 도망을 갔습니다. 집에 일이 있으면 조석이든 무엇이든 일을 다 해놓고 틈만 있으면 그렇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시 부모들이 여러 가지로 알아보니 참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참선에 어느 정도 맛을 안 것입니다. 정신이 밝아서 참 좋고 모두 다 내 세상이니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면 큰 공부를 할 사람이고 재가해서 우바이가 되어도 많은 정진을 할 사람입니다.

요새 세상은 총각으로 믿고 시집갈 데 없고 어떤 처녀 믿고 장가갈 수도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서양풍속이 자꾸 들어와서 좋지 않은 것만 본뜨다 보니 서로 의지하고 믿고 살 수 있는 처녀 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되는 문명인지 거꾸로 후퇴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개도 새끼 날 때 되면 흰 개 검은 개 정해서 몇 번 교미하고 그러는 것인데 소위 인간이라면서 정조나 지키려 들고 그러면 그것은 18세기다 미개했다고 그러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대인의 사상이라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다 유물론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믿을 수가 없이 된 이런 세상에 불법이 하루 바삐 널리 전해지지 않고서는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부처님 경전에는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한 말씀도 한량없이 많습니다. 중생들은 오히려 그렇게 자신이 살고 있지만 잘 모릅니다. 술 취한 사람이 자기 상태를 모르는 것 같고 아주 만취(滿醉)가 되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춘원 이광수가 연애소설을 아주 잘 쓴다고 하지만 내가 얘기를 하면 몇 백배 더 죽고 못 살 재미있는 연애방법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스님은 소설도 안 보고 신문도 안 보면서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그러지만 그것은 다 경전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 법의 원리를 듣고 공부를 좀 해서 마음이 맑아지면 문일지십(聞一知十)으로 한 가지 들으면 열 가지 백 가지를 알아집니다. 그래서 중생살이의 내용을 다 알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서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말 못할 숨은 살림살이를 끄집어내서 그 실지를 말해서 이 금강경의 정법을 신수봉행해 주니까 고독해지고 서러워지고 불법에 마음을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참으로 해결하기 위해 발심한 구법불자(求法佛子)들이 많이 나와서 계행도 잘 지키고 경도 바르게 배운 뒤 목숨을 걸고 철저한 참선을 해서 견성(見性)을 하면 더 좋고, 견성은 못 했더라도 이런 금강경의 정법을 신수봉행할 줄 아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정법이 무엇인지 하는 것만이라도 바로 육도만행(六度萬行)하여 여시항복기심(如是降伏其心)하는 선지식(善知識)이 나오면 말할 것도 없지만 정법이 무엇인지 하는 것만이라도 바로 아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많이 나와야 우리 한국불교가 바로 되고 그래야 우리나라가 잘되며 세계평화의 길이 열립니다. 금강경의 아공·법공·구공의 도리를 잘 알고 아상·인상·사상(四相)을 여의고 응무소주하여 이생기심할 줄 아는 불자들이 많이 나와서 이 금강경의 정법을 널리 펴야만 이 혼란한 사회가 바로잡히고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說 義]

 

꿈의 실상(實相)

경전을 천독 만독 억만독하라는 것은 한 번 읽어서는 경의 깊은 뜻이 이해되지 않지만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여러 번 읽는 동안에 그 뜻이 조금씩 깨달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내가 한번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게 되는데 이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꿈이 과학이라는 것은 사람이 확실히 경험할 수 있는 심리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인데, 그리고 꿈에 대해 그 동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얘기해 왔는데, 먼저 꿈에 대한 시간을 말하겠습니다.

사람이 자는 시간은 대체로 하룻밤에 7시간 내지 8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 시간 동안 꿈을 꾸었다고 해도 8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어가서는 8시간만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몇 해 사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 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가서는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나 반나절 꿈도 꾸지마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산 시간보다 꿈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됩니다. 그러면 「꿈을 꾼 실제의 시간은 얼마 동안이냐?」 꿈을 꾼 시간을 조사해 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제일 쉬운 방법은 잠이 들어 있을 때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아 알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 위에다 가만히 가볍게 손을 대고 있으면 꿈을 꾸는 사람은 눈동자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눈동자는 우리가 눈 감고도 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눈동자가 놀지 않고 가만히 있는 때는 꿈을 꾸지 않는 때로 판단합니다. 이제 꿈꾸는 시간이 5분 동안이라면 눈동자가 움직이는 시간도 5분 동안이 되는데 단 5분 동안에 꾼 꿈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꿈속에서는 하루도 살고 이틀도 지내고 때로는 한 달 산 것도 이야기합니다.

꿈을 꾸는 실제의 시간은 연구 조사한 사람에 따라서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조사 결과는 45분 걸렸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36분 걸렸다, 35분 걸렸다, 이렇게 차츰차츰 줄어서 심지어는 결국 모든 꿈은 단 1초 동안에 이루워진다는 결론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는 1초 동안의 짧은 시간이지만 꿈속에 들어가서는 50년, 60년의 긴 생활을 경험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45분 가지고 10년, 50년을 봤다는 얘기는 일초를 가지고 10년, 50년을 만들어 살았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45분이 10년이 될 수 있고 10년이 또한 단 5분이 될 수 있는 거나 1초 가지고 10년 살았다는 얘기나 마음대로이기는 마찬가지고 45분이나 1초나 시간을 초월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원리라 하겠습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1초보다도 훨씬 작은 몇 만분의 1초쯤 되는 시간을 가지고 몇 해의 긴 꿈을 꾸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차츰차츰 올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시간도 아닌 것, 시간이 채 움직일까 말까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과거·현재·미래의 무궁한 세계를 꿈에 가서 창조한 것이 됩니다. 시간이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가 꿈에 가서 항상 시간을 만들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시공을 창조

우리는 마음으로 꿈속에서 시간을 창조하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 딸 낳고 그 아이 기르고 교육을 시킵니다. 유치원에서 국민학교로 중·고등학교에 보내느라고 가정교사를 대어 입학시험준비도 시키고 해서 교육을 마치고 나면 또 결혼을 시켜 가지고 슬하에 손자를 많이 두게 됩니다. 우리가 생시의 현실사회에서 한평생 산 그대로 꼭 생시와 똑같은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꿈속에서 이렇게 한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시간이 움직이기도 전의 순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하튼 시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 곳에도 공원이 있고 공장이 많았을 것이며 사회가 있고 우주가 있으니 이것은 무한대 공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한대 공간 이것은 참말 공간이냐 하면 그것도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이런 무한대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억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점을 가지고 무한대 공간을 본데 불과하고 자꾸 자꾸 이렇게 추구해서 따져 나가다 보면 점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한대의 공간으로 창조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꿈이란 확실히 마음이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궁한 시간이나 무한대의 공간이 찰나도 점도 아니어서 말하자면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간도 아닌 것 시간도 아닌 것을 물질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시간이라는 정의에 의해서 평소에 시간이란 물질계의 한 현상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랬고 무엇인가 움직인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 공간이 현실적으로 존립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꿈에 시간이란 하나의 물질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꿈에는 공간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궁한 세월이 흘러갔다고 생각하고 무한대의 공간이 벌어져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관념이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원리가 현실적으로도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한번 비유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가령 여기서 조그만 거울을 가지고 남산에 올라가서 시내를 비추어 보기로 합시다. 그러면 서대문에서 동대문·남대문·청량리까지 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거울 속에 거울의 몇 억 만 배도 넘는 큰 서울의 질량이 그대로 변함없이 나타납니다. 사람만한 것은 사람만 하게 보이고 자동차만한 물건도 빌딩도 각각 자기의 크기 그대로 비춰져서 나타납니다. 또 거리도 1미터 떨어진 것, 100미터 떨어진 것, 1키로 2키로의 거리가 각각 조그만 차이도 없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거울에 나타난 서울은 한 개의 그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림이라고 하면 또 실제의 청량리가 거울 안에 들어와 똑같은 크기로 나타날 수는 없는 겁니다. 작은 손바닥만 한 렌즈 속에 큰 서울을 그대로 옮겨다 떼어 놓는다면 북악산이 깨알 만큼한 크기로 될 것이고 남산이 콩알만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남산에 가서 거울을 비춰 보면 확실히 서울만한 질량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광학상(光學上)의 원리가 그렇다고 하지만 광학 자체도 결국 우리의 감각작용상 작은 것을 큰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보이느냐? 이유 없이 그렇게 보인다고 해야 합니다. 꼭 무슨 이유가 있다면 우리의 이 마음이 신기해서 신통으로 그렇게 작은 것을 크게 본다는 것입니다. 이 거울 반만한 작은 거울을 가지고 비추어 보더라도 역시 서울은 큰 거울과 똑같이 보이게 됩니다.

만약 이것을 더욱 작은 것으로 차츰차츰 더 줄여서 나중에는 사람들이 육안으로는 못 볼 정도의 작은 거울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비춰진 서울은 그 크기가 변함없이 그대로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과학이 발달해서 산소나 수소나 원자처럼 작은 거울이 나타났다면 원자 크기의 거울 거기에도 역시 서울만한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작은 것까지 없어진 것 나중에는 작은 것이 없어진 것까지도 없어진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 마음의 참 거울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 것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

우리의 이 시간 공간이 본래 마음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이것은 시간도 공간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무 것도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말 듣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경을 읽고 있는 그 마음자리가 참 거울입니다. 돌을 갈아서 무엇을 비추게 했다든지 유리의 뒤에 약을 붙여서 비추게 하든지 해서 만든 거울은 죽은 거울이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배거울이 있습니다. 이것은 허공도 아니고 공기가 없는 진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기에도 무엇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보배 거울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가 물질로 만든 거울은 다 죽은 거울들이고 여기 우리의 마음은 즉 산 거울입니다. 아는 능력을 지닌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 거울은 생명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고 나의 참 모습이라 할 수도 있으며,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불성(佛性:부처될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마음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에 맞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은 작다고 한다면 작다가 작은 것도 없어져버린 경지, 말하자면 무한소(無限小)가 됩니다. 이 무한소는 결국 무한대(無限大)와 동일한 통일경(統一境)이 되어 마침내 모두가 다 <마음>뿐이고 <나>일 뿐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법문을 듣고 앉아 있는 여러분의 이 <아무것도 아닌 것>, <마음> 오직 그것뿐입니다.

무한소가 무한대로 통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우주가 다 이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고 무한소·무한대로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하늘·땅·태양계·은하계 할 것 없이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한계가 있다면 어디는 있고 어디는 없어야 할 것이지만 이 마음은 무한소 그대로 무한대이고 전 우주 그대로이기 때문에 꿈을 꾸는 찰나에 우주를 이루고 시간세계·공간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고 작은, 작은 것조차 없어진 이 무한소(無限小), 바로 그곳에 무한대의 세계인 대 우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그 꿈속의 우주나 생시에 보는 이 우주나 똑같은 우주인데 그 우주가 이 아무것도 아닌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도 있고 태양도 있고 별들도 있고 무한대 허공도 있고 모든 온갖 것이 다 이루어져 있는 겁니다.

 

 

꿈으로 불법을 이해하면 쉽다

이와 같이 마음을 꿈으로 풀어 보면 확실해지고 재미있습니다. 저녁마다 꿈속에서 우리가 대우주를 창조합니다. 그렇지만 꿈 세상이 생시에 살던 세상과 너무 똑같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모릅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서 유치원,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했는데, 그리고 내 아들 딸들도 내가 나온 대학에 다 들어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아 키운 이 몸 말고 내가 어디 또 따로 있기에 이것을 꿈이라고 하느냐? 생시가 따로 있을 수 있느냐, 이렇게 됩니다. 감히 꿈이려니 의심도 안합니다. 그 꿈 세상이 참이고 생시라고만 믿고 살 뿐, 정말 생시는 아예 부인합니다. 그러다가 꿈을 깨고 나면 웃어 버립니다. 그래서 꿈이 되고 생시가 됩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아들 딸 다 낳고 교육시키고 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손목시계는 1분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시의 1분 이것은 참말로 알고, 꿈속의 수십 년은 거짓말인줄 알지만, 꿈나라의 시간도 역시 60초가 1분이고, 60분이 1시간이고, 24시간이 하루고, 365일이 1년인 그런 시간으로 아들 딸 여러 남매를 낳아서 키웠으면서 이것은 소홀히 압니다. 그러나 꿈은 천년 만년이지만 생시는 모아봐야 10년도 안됩니다. 이런 꿈과 생시가 번갈아 반복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참말이고 어떤 것이 꿈이냐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1분전에 살던 생시를 꿈에 가서는 부인하지만 우리가 저녁마다 꾸는 꿈은 생시에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머리에 어느 것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까? 꿈에 들어가서 깜박 잊어버리는 얼마 안 되는 생시, 이것이 꿈인가. 생시에도 잊지 못하는 천 년 만 년 되는 꿈이 생시인가. 생시를 깨면 꿈에 들어간 꿈이 되고 꿈을 깨면 생시에 들어온 꿈인데, 생시를 깬 꿈에는 생시는 완전히 부정됩니다. 또 간밤 꿈만 꿈이 아니라 생시에는 사는 것도 살아 놓고 보면 다 꿈입니다. 지나가고 나서만 꿈이 아니라 생시가 지나가기 전에도 깨어 있는 이대로 꿈입니다. 왜냐 하면 꿈을 깨기 전까지는 꿈인 줄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인데 깨지 않고 꿈인 줄 모르는 그대로가 꿈이듯이 생시도 똑 같습니다. 생시가 꿈인 줄 모르는 생시 그대로 생시 그것도 꿈입니다.

한국 갑부가 되어 돈을 마음대로 쓰면서 몇 십 년 호강을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전체가 다 꿈입니다. 돈이 모였다는 것, 갑부가 되었다는 것도 꿈이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다는 것도 꿈이고 모두 헛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낮 꿈으로 나와 있으니까 이 낮 꿈을 깨기 전에는 이게 꿈인 줄 알 도리가 없지만 그것은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꿈속에는 꿈 아닌 소식, 꿈밖에 있는 자기 참 얼굴은 모르고 꿈속에 행동하는 겉마음밖에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먹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다 생시가 꿈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짓들입니다. 꿈에도 사실은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하루 세 그릇씩 꼭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꿈에도 싸움을 하고 전쟁을 하고 생존경쟁을 합니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싸움을 하고 생존경쟁을 하면서 수십 년 사는 꿈으로 됩니다.

연애 꿈을 꾸었을 때는 그게 꿈이 아니었더라면, 깨지나 말았더라면 할 것입니다. 연애도 오래 해 보고, 부자가 되어 자가용차도 타고 수천 명 부하를 거느리고 멋지게 살아봤으면 하고 꿈에서라도 이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꿈 좀 꾸어 봤으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한 달 동안 꿈만 꾼 여인

옛날 평안도 어느 산골에 감자 농사나 지어서 겨우 살아 나가는 외딴 농가가 한 집 있었습니다. 하루는 사람을 사서 감자 밭의 풀을 매게 됐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감자를 가지고 적도 부치고 수재비도 만들어서 일꾼들의 점심을 해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두세 시간이나 지나도 아내가 오지 않자 남자가 집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심을 가뜩 해 오다가 길옆에 내려놓고는 누워서 뒹굴고 웃고 헛소리를 하고 미쳐 있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즉시 약을 먹이고 침을 놓고 온갖 수단을 다 썼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들과 산으로 돌아다니고 춤도 추고 노래 부르고 웃고 또 내외간에도 말 못할 이야기도 막하고 그럽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아내의 손발을 묶어 방안에 가두고 재워 놓았더니 거의 한 달 후에 깨었습니다. 이리하여 제 정신이 돌아오기는 했는데, 웬일인지 자꾸 울기만 합니다. 하도 이상해서 친정어머니가 한 달 이상을 두고 달래면서 물어 보니 아버지한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을 당부한 뒤에 다음과 같은 사연을 말했습니다.

「사람을 사서 일하던 그날 밥을 해 가지고 밭으로 나가려는 참인데, 웬 초립동 소년이 예쁜 당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초립동을 보니 옷도 잘 입고 얼마나 잘났는지 세상 사람들과는 대조할 수도 없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이 초립동이 자기 옆에 탁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서서 하는 말이 ‘대단히 실례입니다. 우리 집은 아무 데에 있고 우리 부모는 누군데 정승 판서 집이고 농사는 수만 석을 하는 부자입니다. 내가 1년 전에 부잣집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정이 깊이 들었는데 자식도 하나 낳아 보지 못한 채 금년 봄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홀로 된 나는 궁리하기를 죽은 마누라는 다시 만날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마누라와 똑같은 여자를 만나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이렇게 팔도강산을 헤매고 있던 중 오늘 이곳을 지나다 보니 당신은 우리 마누라와 조금도 안 다르고 똑같이 생겼습니다. 당신이 이런 두메산골에서 감자농사나 지어먹고 살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이 당나귀를 타고 이 길로 곧장 갑시다. 이 당나귀는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이니 잠깐 가면 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만 마음이 끌려 살림살이고 뭐고 정신이 다 나가버린 채 그 당나귀를 타고 같이 가는데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삽시간에 강과 들판을 지나서 산골짜기를 들어가니 남녀 하인들이 마중을 나와 인사를 합니다. 그들 하인이 입은 옷 모양과 미모가 어찌 뛰어났던지 자기 같은 것은 곁에 서지도 못하게 잘 생겼습니다. 동구(洞口)안으로 들어가니 큰 동네가 있는데 전부가 기와집이고 낙원 같은 좋은 집에서 조부모 시부모도 마중 나와 환영해 주었습니다. 나는 데운 물로 목욕을 하고 그곳에서 주는 옷을 갈아입고서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니 내가 언제 이렇게 예뻤던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면서 해마다 아들딸을 자꾸 낳고 그 집의 살림살이도 다 차지했습니다. 예쁘고 잘난 얼굴만 해도 천당에 사는 느낌인데 아들들도 재주가 다 좋아서 공부 잘하고 참 재미나게 한 십년 호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전신이 아프고 몸이 부자유해서 고함을 질러 보니 꽁꽁 묶여 있는 것이었습니다.」하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미친 짓하는 동안 15년을 살았고 그래서 꿈속에서 정든 아들과 남편이 보고 싶어서 우는 것이니, 이 소리를 누구 보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한 번 더 미쳐 가지고 가 봤으면 좋겠다.」하면서 그 꿈이 그리워 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꿈을 못 잊고 사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꿈속에 평생을 산 조신대사

여하튼 중생인 우리는 마음을 깨치지 못하는 한 모두 꿈속에서 사는 것인데 전부 자기 마음으로 꿈을 꾸어 가지고 그 속에서 시집간다, 장가간다, 살림살이 차린다, 아들딸 낳는다 하는 것이니 마치 아까 산골 밭에서 정신 이상 된 여자가 정상(正常)을 잃은 채 웃으며 행복한 생활을 의식하는 꿈속의 생활과 같습니다. 요새 꿈에 대한 학자가 과학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꿈이란 큰 꿈이나 작은 꿈이나 최고의 시간이 45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 45분이면 며칠도 되고 몇 년도 되고 일평생 되는 꿈으로도 된다는 것입니다.

조신대사의 실제 꿈을 이광수 선생이 「꿈」이란 역사소설로 엮어서 세상에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옛날 신라 때 조신대사라는 스님이 강원도 낙산사(洛山寺)에 있을 적인데 법당에 사시마지(巳時供養)를 올려놓고 경쇠(법당에 있는 작은 종)를 땡하고 치는 사이 깜박하고 졸음을 조는 동안에 80년 긴 꿈을 경험했습니다. 이 경쇠라는 종은 천천히 때리면 소리가 죽고 힘껏 빨리 때리고 가만히 있어야 소리가 죽지 않습니다. 그 경쇠를 때리는 순간은 몇 10분의 1초에 불과합니다. 깜박하고 조는 순간 중노릇하는 현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꿈속에 들어가서 그 고을 사또님 심부름으로 마을에 내려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내려가다 보니까 단골 신도인 무남독녀 딸 하나가 있는 신도 집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됐습니다. 그 집은 다른 일가친척도 없고 살림은 한 300석 하는 시골의 부자였습니다. 그 처녀에게 장가를 들면 누구든지 300석을 얻어 팔자가 핍니다.

그 집은 1년에 몇 번씩 조신대사가 있는 절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때마다 그 처녀가 어머니를 따라오는 것을 보아 왔는데 이제는 시집갈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신대사는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가기로 마음먹고 잠깐 방문했습니다. 사또님 심부름으로 어디까지 가는 연유를 말하니 돌아오려면 저물겠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 저녁 자시고 가라고 친절히 해 줍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볼일 보고 늦게야 올라오다 보니 어두워지고 나서야 그 신도 집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그 신도 집에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반찬감만 장만해 놓고 밥도 안 짓고 반찬도 안 만들고 있다가 조신스님이 들어오니까 하인에게 「밥해라, 반찬해라.」하며 부랴부랴 시켜 놓고는 스님과 법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식구 모두인 모녀도 이제까지 밥을 먹지 않고 조신대사가 오면 같이 먹는다고 기다렸다가 밥상이 들어오니 같이 먹도록 했습니다.

그때는 불교가 크게 융창했고 스님들에 대한 대우가 대신보다 더 존경하던 신라 때였습니다. 딸 방에서 진수성찬을 차린 저녁 밥상을 놓고 셋이서 같이 먹고는 법문해 달라고 해서 아는 대로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그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모른다는 식으로 시간이 오래 지나가서 한밤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다 잠을 자는데 십여리나 가기도 어렵고 그 집에서는 자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그대로 자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 신도는 어떻게 된 건지 그만 자기 딸과 조신대사를 한 방에 가두어 놓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조신대사는 그래서는 안 될 것인 줄은 알지만 어려서부터 잘 알고 서로 얘기도 하고 친숙하게 지내다가 그렇게 되어 놓으니까 그만 그날 저녁에 장가를 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절에는 다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심부름 갔다 온 사정을 보고할 수도 없고 그만 그 집에 숨어 가지고 머리를 길러서 상투를 얹고 결혼식할 새도 없이 신혼생활을 했습니다.

그 해에 단번에 아들을 하나 낳았고 소문도 없이 감쪽같이 그러고 있는 판입니다. 그러데 해 마다 아들을 낳아 꼭 달팽이 같은 아들을 수두룩하게 낳았습니다. 그 놈들이 자꾸 크고 2살 3살 되면 천자 다 외고 글도 가르치고 했는데 공부를 다 잘합니다. 이렇게 해서 8년만에 아들 8형제를 낳았습니다. 그때는 한문 짓는 어려운 문장인데도 글 잘 짓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말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겼고 이래서 서울에 올라가면 단번에 급제를 합니다.

아들들이 경상 감사·전라 감사도 있고 평안도 충청도 나중에는 팔도강산에 다 자기 아들들이 있게 돼서 나라 임금보다 오히려 권력이 센 편이 됐습니다. 집안 살림도 300석짜리가 이제는 10만석이 넘었고 아까 나귀 타고 간 처녀보다 훨씬 더 재미나게 잘 삽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이 죽었고 그리고 나서 한 10년이나 지났는데 아들 딸 형제가 다 죽고 며느리 다 죽고 손주들까지도 다 죽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끝내는 자기 마누라도 죽고 자기 혼자 늙은 몸으로 나쁜 부하들한테 재산도 다 빼앗기고 이제는 하인들까지 전부 다 달아나 버려서 자기 혼자만 남게 됐습니다. 아차하다가는 그 놈들한테 맞아 생명도 위험하게 되었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보니 있는 돈이나 꾸려 꽁무니에 차고는 팔도강산 유람차 나섰습니다. 구경 다니는 판입니다.

세상이 허망해도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 꿈을 깨어 가지고 자꾸 울어대는 그 여자보다 더 허망할 것입니다. 그래 이리저리 한없이 돌아다니다가 가을이 됐는데 해는 저물고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길가 잔디밭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신세 한탄을 하며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산 위로부터 절에서 종치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내려옴을 느끼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는가 보다 하고 가만히 살펴보노라니 자기가 10여 년 전에 살다가 떠났던 집 근처 낙산사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였고, 자기가 앉은 그 자리가 바로 자기가 살던 그 집터였습니다. 지금은 잔디밭이 되었고 쑥대들이 나오고 거기 있던 동네는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는 꼼짝없이 큰일 났습니다. 내 나이 벌써 아흔이 다 되어서 이제는 오늘밤에 죽을는지 내일 아침에 죽을지 모르는 판이 됐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던 250가지 계를 낱낱이 다 파계하고 팔만 가지 세행(細行 : 주의할 작은 계)다 부숴 버리고 이제 눈만 감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판이니 생각하면 전신이 떨려옵니다. 이제 곧 죽게 생겼는데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다 범해 놨으니 진작 이렇게 허망한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장가 안 가고 그날 저녁 내가 절로 올라갔으면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 하루 저녁을 못 참고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이제 죽기만 하면 지옥행은 끊어놨고 아들딸이 또 그렇게 다 죽을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 몸은 늙고 곰곰이 신세를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힙니다.

그동안 하던 공부나 열심히 했더라면 성불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아닌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니 내가 그렇게 어리석었던가 하고 탄식하며 두 다리를 뻗고 방성통곡하고 울다가 깨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자기가 깜빡하고 졸기 전에 경쇠를 치던 망치를 잡은 채 그대로여서 경쇠의 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습니다. 몇 10분의 1초가 지났을까 말까 한 짧은 찰나에 90살이 지났으니 당시 스님의 나이 스물 대여섯 살이 되었다고 치면 한 60여년 근 70년쯤 지난 것입니다. 조신대사의 실제의 생활 경험이었고 인생의 일대 교훈이었습니다. 인간 세상이라는 게 일체의 꿈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생시는 곧 낮 꿈

지금까지 여러분한테 밤 꿈을 얘기했지만 우리가 깨어서 활동하는 생시라는 것도 낮 꿈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밤에 가서 꿈속의 생시라는 것도 만드는데 내 마음 가운데서 무한대 우주를 낮과 똑같이 건립한 때문입니다. 현 생시에 에너지로부터 모든 여러 가지가 창조되어 우주의 현실이 벌어졌듯이 이 꿈에도 가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꿈속에서도 사업을 하게 되고 생활을 하게 되는데 불은 뜨겁고 물은 차갑고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고 하여 생시의 이 자연계와 똑같은 자연계가 있는데 그것은 모두 마음이 건립한 것입니다. 마음이 만들은 것이라기보다 마음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야 할 일입니다. 마음이 산도 되고 물도 되고 남자 여자 호랑이도 되고 구렁이도 되고 온갖 유정물이 되어 가는 것이 꿈의 세계, 즉 꿈의 우주인데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다 전체가 마음뿐인 때문입니다.

가령 밤에 잠이 들어 자다가 이불 속에 자기 몸뚱이와 처자를 다 그대로 놓아둔 채 마음만 나와 가지고 꿈속의 세계를 새로 만듭니다. 그러나 나온 것도 들어간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갔다 안 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마음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포 하나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도 이 마음은 수 억만 가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사는 중생이면서 제일 작은 것이 제일 큰 것이 되고 큰 게 작은 것이 되는 원리와 하나가 되다 보니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그 한계를 지을 도리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마음자리가 꿈에 가서 대 우주를 창조하게 될 능력이 있다 보니 꿈속에서 자기 몸뚱이를 끌고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하다가 그 살림살이 그대로 다 내 버리고 어딘가 다른 세계로 나오는데 그것을 소위 생시라고 말합니다. 꿈에 가서도 우주를 창조할 능력이 있으니까 생시에 나와 가지고도 다시 현실의 우주를 창조합니다. 생시에 마치 활동사진의 필름을 바꿔서 새로운 화면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과 같이 금강산이 나왔다, 지리산이 나왔다, 석굴암이 나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깬다 하는 것은 내가 꿈을 꾼 그 자리에서 필름이 바뀌어 딴 필름이 돌아가게 되어 소위 생시라는 그런 영화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의 꿈속에 있는 영화나 생시에 있는 영화나 다 마음의 조화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건 밤 꿈이고 이건 낮 꿈이고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꿈도 없는 것이어서 생시도 꿈도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이대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밤 꿈은 확실히 낮 꿈과는 또 다른 겁니다. 다른 꿈이니까 밤 꿈은 낮 꿈이 아니고 낮 꿈은 밤 꿈이 아닌 것입니다. 밤에도 마누라도 있고 낮에도 그 남편 그대로이고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확실히 밤 꿈에 만난 자기 마누라는 지금 생시에 있던 그 마누라는 절대로 아닙니다.

꿈에 같이 산 그 마누라가 틀림없는 자기 마누라이고 꿈인 줄도 모르고까지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똑같으니까 서로 부둥켜안아 봐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낮에 있던 마누라는 꿈 세계로 들어갈 때 자기가 재워 놓고 간 자기 몸뚱이 옆에 자고 있으니까 밤에 있는 마누라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밤 꿈에 있던 자기 몸과 생시의 자기 몸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정말 다르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이것이 곧 <마음>입니다. 밤 꿈에서도 이 마음 그대로이고 낮 꿈에서도 밤 꿈에 있던 그 마음이 그대로 낮 꿈을 꾸는 격입니다. 여기에 대우주의 꿈을 똑같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밤 꿈이 순전히 마음의 조화라고 말한다면 낮 꿈도 역시 마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밤에 굉장한 창조의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면 낮 꿈인 지금 이 순간에도 역시 그런 힘이 그대로 발휘되고 있을 것입니다. 꿈이나 생시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조화하고자 하는 그대로 밤 꿈이나 낮 꿈이나 필름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꿈속의 객관은 곧 나

마음의 본성을 깨치지 못한 범부중생들은 꿈속에 들어가서 꿈을 꿈인 줄 모르듯이 생시 이것도 낮 꿈인 줄 모르고 생시라고만 보는 겁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그것을 생시라고 느낄 뿐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꿈이기 때문에 꿈을 깨 봐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 꿈에 들어가서는 그것이 밤 꿈이고 생시의 낮 꿈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낮 꿈에 와서는 밤에 꾼 꿈을 기억할 뿐 밤 꿈에 있었던 일을 말 못할 내용도 있습니다. 가령 사람을 죽였다든지 윤리도덕을 어기면서까지 범행을 저질렀다든지 그야말로 생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을 밤 꿈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못하지만 기억은 하고 있습니다.

밤 꿈속에서 몇 시간 며칠을 살았지만, 끔을 깨어 보면 실제는 1분도 채 경과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1분전에 살던 낮 꿈 소식을 전혀 모르게 되는 것이 밤 꿈입니다. 다시 말하면 밤 꿈에 가서는 낮 소위 생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밤 꿈에 생시를 모르고 밤 꿈을 꿈인 줄 모르게 되는 원인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꿈이 현실과 너무나 똑같기 때문에 그걸 꿈인 줄 모르는 동시에 꿈 아닌 현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망각하게 됩니다. 또 생시가 있었다는 것을 꿈에 들어가 아무리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한다고 하더라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아버지와 연애해서 결혼하여 나를 낳아서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보내고 내가 유치원 대학까지 나온 학교가 다 이렇게 엄연히 있는데 이 몸뚱이 말고 또 내가 어디 있겠느냐고 항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왜 꿈이겠느냐? 소위 현실을 완전히 부인한다는 말인데 절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 꿈속에는 꿈 그것이 생시입니다. 소위 생시라는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밤 꿈에 가서는 낮 꿈을 완전히 부인해 버립니다. 그러나 생시에는 밤 꿈을 우리가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런 걸 보면 소위 생시라는 이것도 밤 꿈을 깨듯 낮 꿈을 깰 수 있는 꿈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을 좀 에누리해서 밤 꿈 낮 꿈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밤 꿈에 들어가서는 낮 꿈을 다 부정했는데 이것은 낮 꿈 꿀 때 생각해 보면 참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밤 꿈에서는 언제나 낮 꿈을 부정해 버리고 밤 꿈에 있는 그 몸뚱이만 참이라고 하고 낮에 있는 건 다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오늘 저녁에 꿈을 꾸어 대우주가 나타나고 또 이 마이크가 내 기억에 잠재해 있다가 꿈에 나타나서 대중이 가득한 이 법당 안에 내가 이 마이크 앞에서 법문을 하게 된다면 이 마이크도 내 마음을 나타난 것이고 이 육체도 똑같이 내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육체를 만약 <나>라고 한다면 이 마이크도 <나>라는 말이 됩니다. 내 마음에서 모두 다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뚱이를 <나>라고 한 것처럼 여기에 있는 이 탁자도 나고 저 촛불도 <나>고 저 석등도 <나>고 종도 <나>고 이 앞에 정자나무도 <나>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은 다 <나>를 안 닮았느냐? 그것은 이 육체에는 자유가 있고 감각이 있어서 연장에 발을 다치든지 고장이 조금만 나도 아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왜 다른 물건들은 다쳐도 아픈 줄 모르느냐? 그것은 다같이 <나>로 나타난 것이지만 객관으로 인정하고 <나>로부터 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찔리거나 부러지거나 불에 타거나 아무걱정도 안됩니다. 이 몸뚱이는 <나>라고 하고 애착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손등에 가시만 들어도 큰 문제이고 우주의 제일 큰 사고입니다. 이 육체의 경우도 몸뚱이가 <나>라는 애착을 완전히 떼어 버리면 객관처럼 도끼로 발을 찍어도 정말 아픈 줄 모릅니다. 객관의 물질들이 아무 것도 모르듯이 지금 이 몸뚱이도 꿈이거나 생시거나 마음에서 애착을 떼어 버리면 톱으로 몸뚱이를 썰어 내려가더라도 아픈 줄 모릅니다. 마음이 오로지 살아 있을 뿐입니다. 이 몸뚱이는 한 객관의 물질이고 <참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 몸뚱이를 완전히 버려 버린다면 창자가 썩어서 흘러 내려간다 해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낮 꿈의 현실도 나

꿈 자체가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며 동시에 꿈속에 있는 객관들도 다 내 마음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이크 기둥도 저 나무도 탑도 석등도 종도 전부 다 <나>라는 것을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원리는 밤 꿈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낮 꿈의 현실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낮 꿈, 밤 꿈을 다 깨어서 밤 꿈도 없어지고 낮 꿈도 없어져서 마음이 오직 드러난 밝은 세계, 그래서 거짓으로 존재하는 객관과 이 몸뚱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기분을 완전히 떠나는 것입니다. 좋다 싫다 하는 기분, 밉다 예쁘다 하는 기분을 떠나야 됩니다.

모든 만물을 대할 때 모든 선입관·분별심 모든 기분을 떼어 버리고 무심하게 되면 곧 만물하고 나하고는 둘이 아니고 거리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경계가 끊어져 버려서 객관·주관의 분간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중생은 중생이고 보살은 보살이고 또 천당은 천당이고 지옥은 지옥이고 완전히 각각 다르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들이 스스로 그렇게 다르게 만들어 놓으니까 그럴 뿐 실상은 다르지 않은 것이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늘 하는 얘기이지만 육체만을 나라고 애착하기 때문에 모두 객관이 되어 주객이 벌어졌고 전 우주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꿈에 보는 태양도 억만리 허공 위에 떠가지고 열과 광을 발산하여 제일 무더운 삼복중엔 머리가 뜨거워 모자 안 쓰고 우산 안 들고는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저 태양은 여러 수억만 년 동안 저 허공 위에서 열을 쬐고 있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태양은 저 높은 위에 뜨겁게 있는 거다」는 기억이 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태양은 또 저렇게 먼 데 무한대로 먼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꿈에 가서 무한대의 허공을 나타나게 합니다. 생각 그것이 그대로 나타난 겁니다. 따라서 그 생각하고 태양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생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주관하고 객관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주관 객관은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나>라고 하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거리를 인정하게 된 것뿐입니다.

<나>의 발하고 머리하고 사이에는 거리가 있겠지마는 「나」하고는 거리가 없듯이 몸뚱이의 어느 곳이든 <나>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나>하고는 뒤도 등도 아닙니다. 이게 그대로 나입니다. 내 등이 내 뒤가 아니고 가슴이 내 앞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뒤도 없고 좌우도 없습니다. 발이 곧 <나>자신이므로 <내>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 또한 <나>이므로 머리가 내 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내 마음에서 나타난 객관 일체가 다 <나>이니 거기에도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경계와 경계가 없고 주관 객관 사이에 거리가 없습니다. 전 우주 무한대의 극대(極大)와 원자·전자 같은 제일 작은 극소(極小)가 서로 거리가 없습니다. 곧 하나라는 말이니 현실의 객관이 <나>고 마음이며 <내>가 곧 현실이고 마음이어서 둘이 아닙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그만 거울에 서울이 나타났듯이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소위 현실이라고 하는 대우주가 곧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우주라고 하는 것이 작은 점 속에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현미경으로도 절대 볼 수 없을 겁니다. 작다가 작은 것까지 없어져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대우주라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렇다보니 있다고 하는 대우주라는 것이 점도 아니고 점 속에 다 들었다 하더라도 점 그것마저 없어져서 없는 것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가령 없는 거라고 정한다면 있는 것이 없는 거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됩니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색불이공은 있는 현재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고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 「공불이색」은 아무 것도 없는 것 빈 것이라 해도 그 가운데 온갖 것이 다 숨어 있다 그 말입니다.

마치 텅 빈 방에 사람이 대여섯 명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대구 꿈을 꾸고 한 사람은 부산 꿈꾸고 한 사람은 오대산 꿈, 또 한 사람은 설악산 꿈, 또 한사람은 서울 꿈을 꾸고 있다면 방 하나에 대구를 건설하고 설악산·오대산·서울을 만들고 별별 세계가 다 건설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업에 따라 천당도 지옥으로 볼 수 있고 복 지은 사람은 지옥을 가도 거기가 천당입니다. 착한 일 했으니까 착한 마음에서 나타난 행복스러운 영화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죄 많은 사람은 천당에 올라가도 지옥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제 마음이 나타난 것이므로 지옥과 천당을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를 임의로 도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과에 따라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지옥으로 나타나고 마음이 천당 사람 몸뚱이로 태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살았다 죽었다 하는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가령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도 꿈속에서 중생이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한다, 철학·종교를 한다, 전쟁을 한다 해서 어느 나라는 지고 어느 나라가 이겼다고 하는 이 모두가 꿈입니다. 전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석가여래께서 성불했다 그래서 49년 동안 중생을 제도했다는 그것도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다 꿈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내 꿈에 석가여래께서 지나가신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몸처럼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없는 것같이 보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게 없는 거고 없는 게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 없다」말하는 것이 다 틀린 겁니다. 있다 해도 안 맞고 없다 해도 안 맞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해도 다 틀리고 하나도 없고 말도 없고 글도 없는 것입니다.

글자는 본래 내용이 없습니다. 가령 있을 유(有)자를 본래 없을 유자라 했다면 없을 유자라고 현재도 사용할 것입니다. 글자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는 글자가 따로 있다는 말은 확실히 있다는 말이고 없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 틀림없으며 있다는 말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없다는 말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어떤 게 있느냐는 것을 깊이 따져 보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없다고 그러지만 무엇을 가지고 없다고 하느냐? 허공을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허공도 없어지면 그때 가서 없어지는 거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두 내 생각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내 생각이 이러니까 모두 생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또 생각이 그렇게 되면 그것이 나타나 보이게 됩니다.

 

 

부처도 중생도 생각도 몸도 다 꿈이다.

이 모두가 꿈이라는 겁니다. 부처도 꿈이고 중생도 꿈이고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전부다 꿈입니다. 하나도 실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있다고 해도 말이 되고 없다고 해도 말이 되고 있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없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이렇게 안 되기도 하고 안 되고 된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자유라고 하겠습니까? 다 없어져 버린 것뿐입니다. 철학자·과학자·종교가가 와도 모든 문제에 대해 그 사람하고 똑같이 이해하고 얘기하고 듣고 긍정할 수도 있지만 또 그것을 근본적으로 절대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까지도 꿈이고 다 쫒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쫒아가는 것도 다 꿈이고 이론으로 거부하는 것도 꿈이고 모두 꿈인 것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현실 그대로가 낮 꿈 밤 꿈인 줄을 대오(大悟)해서 모든 것을 쳐부술 수도 있고 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경지에 들어간다면 정말 마음 턱 놓고 이제 할 일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낮잠을 잘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할 수 있고 어떤 마음도 가질 수가 있지만 이와 같은 마음의 바탕에 못 들어갔다면 어떤 이상을 가지고 마음 놓고 실현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 근심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있을 것이 없어 걱정이 되고 없었던 사건이 또 생길까 걱정이 됩니다. 꿈에 가서도 걱정이고 잠을 자도 잠 속에서 잠재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게 되어 언제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잠재의식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안 나타날 때도 항상 마음속에서 잠재력으로 영향되고 움직입니다.

가령 우리가 한편으로만 누워 있게 된다면 아파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눕게 됩니다. 이 몸뚱이가 정말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꿈에 가서도 자꾸 돌아눕게 되고 오래도록 앉아 있게 되면 궁둥이가 아파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게 됩니다. 꿈속에 있는 궁둥이가 정말 이렇게 아프겠습니까? 그건 아플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는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야 할 꿈의 몸뚱이입니다. 그러나 꿈에서도 감기 들어 놓으면 약을 먹지 않고는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또 기도해야 병이 낫습니다. 만약 현실이 확실히 꿈인 줄로 증득되지 않는다면 「오늘까지 한 공부가 다 되었나 보다」하는 생각을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꿈과 같다. 그러니까 「이 생시가 허망한 것이구나」하고 단정하게 되는데 꿈과 같은가 보다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가지고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가지고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경을 봐서는 팔만대장경 거꾸로 외워내더라도 부처님 말씀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 꿈인 줄 알면 금강경 전체 내용이 하나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가운데 일체법이 즉비일체법 시고명일체법(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은 저것은 동물이고 이것은 사람이고 저것은 나무고 이것은 돌이다 하는 현상계의 삼라일체를 통털어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은 불법이니까 정법이고 저것은 모두 다른 교당에 나가는 외도니까 사도라고 합니다. 불법이 마음의 법인데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한다고 해서 이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혜안(慧眼)으로 보면 일체법이 따로 있고 불법 아닌 다른 외도가 있고 외도가 아닌 불법이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꿈에 가서 부처가 있고 석가가 있다 해도 꿈에 도깨비가 나와서 설법한 것에 불과합니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다른 외도도 다 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의 전부는 마음의 한 개 장난의 조화입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전부 꿈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 하나만을 내라고 해 가지고 하루 밥 세그릇 먹어야 하는 이 사고 때문에 전쟁을 해야하고 새파란 젊은 사람들이 총을 메고 싸움터에 나가야 합니다. 죽게 되니까 전쟁에 나가서 죽는 그 시간만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불쌍한 것이 인간입니다. 어서 깨어나야 할 꿈입니다.

 

 

미친 것도 꿈

일본 식민치하에 있을 때 만주에 가 있던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있었습니다. 그때 만주에서 일본사람들이 만주를 점령하려고 만주 동쪽 땅을 토벌하려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인 한 사람이 어디를 갔다 오는데 자기 부락이 온통 수라장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와 가지고 무조건 한국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있기만 하면 총살시켜 버리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참멸시킨 것입니다.

동포와 가족들은 죽은 시체로 나둥그러져 있고 집과 재산은 탄 채 재만 남았고 온통 쑥밭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런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그만 미친 사람 모양으로 고성을 지르고 대성통곡을 하며 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디 두고 보자, 내가 꼭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부산 가는 기차에 막 뛰어 오는 겁니다. 기차를 못 타게 하면 막 죽이려고 합니다. 「너희 놈들만 타라고 만든 기차냐? 왜 조선 사람은 못타느냐? 네 놈들만 잘 살 줄 아느냐?」고 두서도 없이 욕을 마구 하며 달리는 차에 뛰어올랐습니다. 감시원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목적지인 부산까지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경찰서로 들어가서는 서장을 보고 내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으니 당신이 돈을 내라는 겁니다. 하도 기세가 대단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당신이 누구요, 무슨 용건으로 왔소?」하며 호통을 쳐도 어서 잔말 말고 내가 필요한 돈이나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고 막 쓰러져 버리는 겁니다. 서장도 그 기에 눌려서 그만 얼떨결에 돈을 주어 보냈는데 이 사람은 도리어 고약한 놈이라고 마구 욕을 하며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냥 나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 모두 나누어 주고 올 떼 갈 떼 없는 거지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정말로 미쳐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너무 분개한 일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인간적인 힘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몇 달씩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얼굴도 별로 축난 것도 없고 힘도 더 셉니다.

이 사람의 소문이 굉장하게 나 있었을 무렵 그해 칠월 백중날 내가 어느 절에 가서 있을 적인데 마침 어느 날 그 절에 이 사람이 온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곁에 가서 「선생님 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을 두고 울다 죽어도 분함이 풀리지 않겠지마는 마음을 진정하시고 방에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나 좀 합시다.」하며 좋게 대해 주고 자기 심정을 알아준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않고 방에 따라 들어 왔습니다. 「그동안 음식을 제대로 잡숫지도 않으셨을 텐데, 여기는 음식도 많은 데니까 오늘 여기까지 오신 김에 한번 실컷 잡수시기 바랍니다.」하고 상을 차려서 갖다 주고 옆에서 많이 드시라고 권하면서 먹는 걸 봤는데, 몇 달 동안 먹지 않고 있다가 먹으니 굉장합니다. 밥이 적은 듯싶어서 남은 밥 다 갖고 오라고 하여 주었더니 나물하고 김치하고 국하고 밥하고 주머니 속에서 자기가 차고 다니는 고춧가루를 꺼내서 큰 그릇에다 한데 붓고는 숟가락을 댓 개 가지고 척척 비비면서 침을 꿀꺽꿀꺽 넘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밥을 잡수시는 데까지 한번 잡숴 보십시오.」하니까 먹기 시작하는데 그 많던 밥을 다 먹는 겁니다. 소금보다 짠 김치를 막 먹고 고춧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서 보통사람은 도저히 먹지 못할 짜고 매운 것을 막 먹는 겁니다. 원체 마음이 한데 몰려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의식과 애착이 없다는 겁니다. 이 많은 밥을 다 먹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위장이 늘어나지도 않고 아무 탈이 없습니다. 소화도 잘 될 거라고 마음을 과감하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옆의 일행에게 물어보니 석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얼굴 하나 축나지 않았고 기운도 펄펄하다는 겁니다. 마음속에 일본 사람 죽이려는 생각 하나뿐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르는 정신일도(精神一到) 상태이기 때문에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굶었다는 생각만 안 하면 배도 고프지 않고 축이 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거리에 다른 미친 사람들을 보아도 남자, 여자 미쳐가지고 열흘씩 한 달씩 아무 것도 안 먹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얼굴이 그렇게 흉하게 축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 사람들 나체로 다닌다고 미쳤다고 하지만 이 사람 사실 미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연애하다 실패했다고 한다면 보고 싶은 그 한 생각뿐이어서 보고 싶으면 봐야 하는데 어떤 장애가 생겨 가지고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분한 생각, 보고 싶은 생각 일념뿐이지 먹었든지 굶었든지 그런 것은 다 귀찮다는 겁니다. 이렇게 한 생각으로 미쳐서 딴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남자도 이렇게 일본 사람에 대한 적개심 일념으로 미쳐서 일본 경찰만 보면 욕을 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경찰서에 붙들려 유치장에 갇히었습니다. 독방을 정해 주고 음식도 자기 집에서 먹는 이상으로 갖다 주고 건강진단까지 해서 가두었는데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동안은 먹지 않는다 해도 닷새 이상은 굶을 수 없겠지 생각했는데 그러나 닷새가 되어도 계속 안 먹습니다. 그럭저럭 일주일이 되었을 때까지 물 한모금 안 마셨는데도 얼굴이 축나지 않고 눈 딱 감고 꼭 참선하는 사람모양 앉아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3주일이 되던 날 담당 의사를 불러 체중을 달고 건강진단을 했는데 3주일 전에 달아 보던 체중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진맥을 해 봐도 그대로 있고 그래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러냐고 물으니까 담당 의사 말이 내가 알고 있는 의학지식으로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인 보고 얼마나 더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나는 그것을 대답할 기력도 없지만 내 추측으로는 이 체질 가지고 3주일 동안 조금도 축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또 3주일까지는 이렇게 더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이런 추측이 어떤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하면서 굳은 표정으로 나가더라는 겁니다.

그 후 또 3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동상같이 앉았는데 마지막 3주일째 되던 날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6주일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동포를 학살한 일본 경찰들, 그리고 자기를 유치장에 가둔 사람을 원망하고 간 겁니다. 「고약한 놈들, 나쁜 놈들, 내가 뭐 잘못했다고.」 이렇게 원망하는 일념으로 차라리 내가 사형을 당하느니 네 스스로 깨끗이 이곳에서 죽자는 일념으로 지낸 겁니다. 처음 3주일 동안은 날짜가 지나간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담당자가 3주일이 지났다는 얘기를 해 주어서 비로소 3주일이 지나갔다는 인식을 했습니다. 만일 이 때 주위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6주일이란 날짜를 인식시켜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보다 더 살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꿈이 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꿈인 줄 몰라서

육체를 <나>라고 하기 때문에 공포증이 나고 분하고 억울하고 편하지를 못한 마음이 항상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시집을 가면 별수 있을까 하여 트집을 잡고 시집을 가보지만 별수 없습니다. 첫날 저녁부터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시집을 가나 안 가나 1초도 마음 편할 시간은 없습니다. 잠이 들어도 편하지 못합니다. 홧김에 술이나 한 잔 먹자고 병으로 되로 들이마셔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술이 취하면 마음이 더 불안해 집니다. 취중에 진정하라고 술이 만취돼 버리면 할 소리 안 할 소리 평소에 비밀로 간직해 놓았던 불평불만을 다 얘기해 버리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 불평을 털어 놓은 줄도 모르고 코 깨지고 소리치고 다 해 봤자 하나도 편하지를 않습니다. 본마음을 잘 모르고 인생을 잘못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속이 항상 편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무의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미쳐서 옷을 훌렁 벗어버리고 나체가 된 채 길을 활보하는 미치광이를 더러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요즘 히피족 모양으로 옷에 온갖 잉크를 다 바르고 살에도 바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의젓하게 다니는 광인도 있습니다. 이들은 쓰레기통에서 썩은 고기·창자·닭 창자 이런 것을 주워 먹습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고 병도 안 나고 또 석 달, 넉 달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돌아다닙니다. 평소에 십 배, 백 배나 떠들면서 굶고 돌아다니지만 성한 사람보다 기운이 몇 배 나 더 셉니다. 소위 미쳤다고 하는 그때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마음을 탁 놓았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십년동안 열렬히 연애를 하다가 남자로부터 버림을 당해서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를 풀고 나서면 그때에는 세상에 아무 것도 쓸데없이 됩니다. 믿고 믿었었는데 그 자식 그런 줄 누가 알았느냐? 이젠 남자는 다 싫어졌고 다시는 연애 안 하고 시집 같은 거 안 간다는 겁니다. 탁 놔 버리면서 하하 웃고 나서는 그때부터 자유입니다. 아무것도 근심 걱정이 없게 되는 겁니다. 또 미친 사람이 하는 말들은 대개 다 옳은 말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미쳤다 고하는 그때가 제일 건전한 상태입니다. 하고 싶은 말 그 자리에서 바로 다 하고 죽는 거, 사는 거 걱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못 믿겠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청년이 나를 괄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총각만 보면 보기도 싫어집니다. 다 그놈이 그놈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탁 놔 버리게 됩니다.

남자도 여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참 불쌍한 인간 현황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도 마음에 맞을 수 없고 믿을 사람도 없습니다. 이 우주는 한 곳도 믿을 데도 없고 의지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모든 것을 단념하고 마음 탁 놓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치지 못해 가지고 어디에 구속되어 있는 셈입니다. 혹 행여나 싶어서 구속되어 견디어 보면 좀 나아지려니 하고 날마다 해마다 속아서 나중에는 70, 80된 후에 늙어서 죽게 됩니다.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시집 잘못 간 한탄이 굉장합니다. 이 문둥이 같은 인간한테 시집을 잘못 와서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는 나중에 자식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자식한테 천대를 받고는 다 젊어 시집 잘못 간 것 후회합니다. 청춘과부도 자식들 불쌍해서 돌보기 위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어려운 고비도 다 참아 가며 남한테 천대 받아 가면서 시집 안 간 것인데 자식들은 이제 와서 어머니 고생한 것 만분의 일도 안 알아줍니다. 그런 얘기를 하려 하면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럴 줄을 알았으면 벌써 시집이나 갈건 데 괜히 청춘과부로 늙었다고 후회가 되어 죽겠다는 겁니다.

 

 

꿈인 줄 몰라 철저한 원수로

이것은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하나 들면 청년 순경 한 사람이 후처를 잘못 얻어 자식에게 못할 일을 한 비통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 순경은 본래 자기 아버지가 새로 맞아들인 어머니한테 무서운 천대를 받았습니다. 밥도 안 먹이려 하고 옷도 안 입히려 하고 학교도 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겨우 아버지 덕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자기 아버지한테 갑니다. 자기 아버지도 순경이었으므로 학교에서 지서로 갔다가 저녁에 아버지하고 같이 집으로 갑니다. 그것은 계모가 자꾸 때려주고 구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순경은 자기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면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새 마누라를 도로 가라고 하지는 못하겠고 자식한테 대하는걸 보면 당장 총살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부자가 함께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결심하기를,「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마누라 죽으면 절대 장가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불행하게 마누라가 일찍 죽었습니다. 젊은 몸으로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장가를 가고 보니 그 사람 아들이 자기 어렸을 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또 순경이 되었는데 학교 안 가는 일요일에도 아버지 없이는 하도 구박을 하기 때문에 밥도 먹을 수 없고 집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꼭 데리고 가서 옆에 앉혀 놓고 밥을 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아들이 자기하고 밥 먹고 나서 역시 낮에도 집으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바람도 쐴일 겸 들로 나갔다가 그 아들이 어느 다리에 올라서서 기둥에 걸터앉아 있게 되었는데,「네가 이렇게 살면 무엇을 하느냐」는 생각이 든 아버지는 등 뒤에서 총을 쐈습니다. 자기도 총을 쏴서 부자가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꿈속의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데 철저한 원수가 되어 가지고 내생에 또 만나서 그 여자하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는 서로 원수가 되어 너 때문에 내가 죽고 나 때문에 네가 죽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중생생활을 하다 보면 그 누구도 이러한 경우를 만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도 낮 꿈 밤 꿈 깨자는 것

마음을 깨쳐 자아완성을 하면 남자가 여자를 봐도 아무런 생각이 안 나고 남자를 봐도 아무 생각도 안 납니다. 이렇게 일 없는 한가한 사람이 되고 부처가 되어야 마음이 편하고 태산같이 든든해지고 우주가 나 자신이고 우주의 일이 전부 내 일입니다.

따라서 중생은 한이 없기 때문에 중생 하나하나를 다 따라다니며 타이르고 깨워 줘야하고 밥 먹여 줘야 하고 옷 입혀 줘야 하고 이렇게 거들어 주면서 발심시켜 꿈을 깨도록 해 줘야겠습니다. 결국 부처님 49년 동안 설법하신 것도 꿈을 깨라는 말씀뿐입니다. 이제 꿈을 완전히 깨어서 꿈속의 의식을 깨고 잠재의식까지 깨워야 됩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통일되고 잠재의식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잠재의식에도 계단이 있고 깊이가 있습니다. 잠재의식이 7할쯤 움직이는 것도 있고 또 좀더 들어가면 5할 움직이는 것, 또 깊이 더 들어가면 10분의 5할 움직이는 것, 10분의 1할 움직이는 것, 그것도 만분의 1할 움직이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든 잠재의식이 다 정리되어지도록 공부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 공부는 먼저 공부한 선각자(先覺者)한테 의지해야 합니다. 공부를 해 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돈 모으는 것 보다 훨씬 더 재미납니다. 점점 마음과 정신이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아무 근심걱정이 없고 해탈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게 되어 모든 것을 차차 다 알아지게 됩니다. 아까 강원도 여자가 밭에 점심을 가지고 가다가 도깨비한테 홀려 15년 동안 잘 산 것처럼 확실히 그 여자는 꿈속에 애착을 가지고 생시와 다름없이 15년을 잘 산 것인데 생시의 보름이 꿈속의 15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도깨비에게 홀린 격이지만 그래도 꿈 복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잘 사는 도깨비에게 시집을 가서 애기도 낳아 주고 호강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낮에는 낮 꿈이 되어 있고 밤에는 밤 꿈이 되어 있듯이 그 도깨비한테 홀려간 것도 사실은 도깨비한테 홀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산골에서 호미로 밭을 매고 있는 것도 꿈이라는 점에서는 결국은 도깨비한테 홀린 것과 공통됩니다. 거기서도 도깨비한테 홀려가지고 있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생전이라는 것도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기왕에 홀린 바에는 다시 한 번 좋은데 홀려 가지고 그 당나귀 타고 다시 한 번 더 가보면 좋겠다는 그 말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 모두가 다 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꿈이고 저것도 꿈이고 또 현실이라면 이것도 현실이고 꿈도 역시 현실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똑같으니까 무시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이 마음이 전부 이렇게 만들어서 천당 꿈을 꾸어 보고 지옥 꿈을 꾸어 보고 중생 꿈을 꾸어 보고 남자 꿈·여자 꿈·아이 꿈·어른 꿈도 꾸어 보고 그런 중생놀음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제 마음 뜻하는 대로 선(善)이 아니면 악(惡), 악이 아니면 선, 선도 악도 아닌 멍청한 짓 중에 어느 짓을 하게 됩니다. 소위 수도(修道)한다고 하는데도 멍청하게 선도 악도 아닌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하고 정신 통일했다 하고 자기 마음을 깨우친다고 하지만 의식에서 망상을 내고 있거나 망상을 갈아 치라고 거부합니다. 또 망상을 그대로 두어도 안 되고 망상을 떼어도 안 되는 것이며 성불한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통일하고 선정(禪定)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번뇌망상을 쉰다고 합니다. 번뇌망상을 쉬어 가지고 더욱 정밀하고 깊은 선정에 들어가 오래 있으면 신통이 난다고 합니다.

실달태자가 마음을 깨쳐 석가여래께서 될 수 있었던 것도 6년 동안을 꼬빡 앉아 가지고 이렇게 선정을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섣달 여드렛날 새벽에 별 뜨는 걸 보고 묘하게 깨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친 뒤에 보니 내가 실달태자로 있을 적에 세상이 허무해서 싫다고 짜증을 내고 그랬는데 그 놈이 바로 그놈입니다. 실달태자가 한참 인간염증이 나서 「왜 늙어야 하고 병들고 죽어야하는가?」하고 생각하던 바로 그 마음을 깨친 것이며 깨치고 보니 바로 그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깨친 것은 아니며 생각을 내는 마음을 깨친 것인데, 마음을 깨치면 깨친 그 마음으로 생각을 알고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게 묘법이란 것입니다. 묘한 깨침이란 말입니다.

불법은 마음 깨치는 공부이므로 지식이나 학문하는 태도로 임해서는 석존의 깨달음을 몸소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서 성불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석가여래 한 분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소식입니다.

이제 마음을 깨치는 선법(禪法)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달마선(達磨禪)과 천천히 닦아 익히는 의리선(義理禪)이 있습니다. 달마선이란 <마음>을 곧 깨치는 선법으로 고속으로 가는 방법이고 의리선은 과학적·철학적·이론적으로 따져 볼 것 다 따져 가며 닦는 방법입니다.

비유하면 여러 수억만㎞의 거리를 올라가는데 제트기나 우주선 로켓 같은 것을 타고 가는 것이 달마선인데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위험한 것입니다. 인력거나 자동차나 우마차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의리선인데 그러나 의리선도 지도자 없이는 정말 위험합니다. 중간에 가다 보면 자꾸 주저앉게 되고 또 마음 세계의 과정을 모르고 잘못되면 허황된 또 다른 꿈속 세계에 빠져서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꿈과 같은 것이 아니라 꼭 꿈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모든 것이 너의 업으로 있다. 하나의 환상이고 몽환(夢幻: 꿈)이지 이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여몽환(如夢幻)하니까 이 세상이 꿈과 같다, 이렇게만 해석을 하고 넘어가는 데 있습니다. <여몽환>이란 여(如)자가 비슷하다 같다는 뜻이 아니라 꼭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꼭 꿈이다, 참 꿈이다.」 그래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여여(如如)다 진여(眞如)다 그러는데 이때 여(如)자의 뜻은 「비슷하다 닮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꼭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이렇게 새깁니다. 그러면 <여몽환>(如夢幻)의 여(如)도 비슷하다는 뜻이 아니라 <여여>하다 꼭 같다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 이대로가 정말 과학이고 물질세계의 그대로가 꿈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계 이대로가 꿈이라는 겁니다. 꿈이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고 요새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유물사상 그것이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이것이 꿈인 줄 모르고 참선하는 이는 신도이거나 스님이거나 간에 참선이 잘 안됩니다.

무언가 자기가 이 세상에 원한이 있다고 오인하게 되고 그 한이 가슴 속에 남아있는 한 사람을 원망한다든가 하게 되어 아무리 참선을 해도 안 됩니다. 어떤 여인이 첩 때문에 억울하게 남편을 뺏기고 아들딸과 집까지 뺏기고 입은 옷 그대로 쫓겨난 여자가, 분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워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면 그 귀여운 자식들 생각이 눈에 선하고 남편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곧 업장(業障)인데 이 장애의 경계선이 가로막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려면 우선 남을 사랑하는 생각이나 미워하는 생각을 일체 다 버리기 전에는 절대 견성을 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일단 떠났을 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대로 발심을 한번 해 놓으면 됩니다. 어느 땐가는 선지식(善知識)만 만나 가지고 이런 법문 듣고 번뇌망상 탁 집어 내던질 기회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연이 되는 것인데, 만일 또 그렇더라도 이런 보통 사람은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집착을 잘 모릅니다. 말로는 「나는 집착 다 떼어 버려서 없다」고들 하지만 없기는 뭐가 없습니까? 잠재의식 속에 꽉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업장이 잠재의식으로 남아 있어서 참선이 잘 안되거나 염불이 잘 안되고 다라니를 해도 일념(一念)이 안 될 때에는 참회를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절을 천배 만 배하고 참회를 하여 업장이 녹아 내려가고 나도 모르는 잠재의식이 뿌리째 뽑아져 버리기 전에는 참선도 견성도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도 공부하다 안 되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업장과 잠재의식을 완전히 참회하지 않고 참선하다가는 크게 잘못될 수가 많습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며칠 안 있으면 견성할 정도가 되었을 때 미쳐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공부하다 미친 사람은 완력도 광장하고 무서워서 갈 수도 없습니다. 벽이나 돌담 같은 것도 탁 치면 무너지는 정력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마음을 쉬어가지고 약을 먹고 미친병이 다 낳아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 때 견성 직전쯤 가면 다시 미쳐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다 그 사람의 중죄업장(重罪業障)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참선할 때 참선한 큰 힘을 타고 나타난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공부가 되고 다른 망상은 뿌리가 뽑아졌는데 마지막 그놈만은 잠재의식 속에 있다가 참선을 하게 되면 참선과 싸웁니다.

우리가 참선할 때 졸음이 오면 화두(話頭 : 참선하는 마음을 이끌어 가는 과제)하고 잠싸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 마음하고 잠하고 싸우다가 지치면 화두가 졸음에 지듯이 나중에는 업장 그놈만 남아서 마음이 감당을 못하게 되면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장이 지중한 사람은 업장하고 옥신각신 싸우다간 미치기 쉬우니, 이런 사람은 참선이나 다라니보다는 먼저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한테 기도해 가지고 업장이 다 없어지는 상서라도 있어서 꿈이거나 생시거나 이런 징조를 먼저 얻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금강경 산림을 마치신 분들은 모두 다 금강경의 정법을 신수봉행(信受奉行)하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되시고 또한 더욱 많은 불자들이 나오도록 정법을 널리 펴시면 이 혼란한 사회가 바로잡히고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모두 금강경 설법 듣는다고 너무 많이 애를 쓰셨습니다. 한번 죽죽 새겨서 읽는 정도로 하면 한 3시간 좀 더 걸리면 되고 약간 설명을 해도 한 3일이면 될 것인데, 이것을 3주일이 넘어 4주일이나 되도록 지루하게 해서 여러분이 큰 고역을 했습니다. 눈도 깜짝거리지 못하게 하고 땀이 바짝바짝 나게 했으니 아마 내가 죄가 많을 겁니다.

 

원이차공덕(願以此功德) 원컨대 이 공덕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 온 누리에 두루하여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온 중생 우리와 함께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 모두 다 성불해지이다.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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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見不生分 第三十一

 

 

須菩提(수보리)야 若人(약인)이 言(언)하되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하면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人(시인)이 解我所說義不(해아소설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是人(시인)이 不解如來所說義(불해여래소설의)니 何以故(하이고)오 世尊(세존)이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설악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於一切法(어일체법)에 應如是知(응여시지)며 如是見(여시견)이며 如是信解(여시신해)하야 不生法相(불생법상)이니 須菩提(수보리)야 所言法相者(소언법상자)는 如來說卽非法相(여래설즉비법상)일새 是名法相(시명법상)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을 말했다」고 하면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뜻을 안다고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한 것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은 곧 그것이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이 아니오니, 이런 것을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이라고 하시었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는 일체의 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고 깨달아서 법이란 생각을 내지 말 것이니라. 수보리야! 법상이라 하는 것은 곧 법상이 아니니 이런 것을 여래께서 법상이라 말하느니라.』

 

 

 

第三十一 知見不生分

 

[科 解]

부처님께서 처음부터 「이렇게 마음을 항복하고 이렇게 머무르라.」하신 것을 비롯해서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을 끊어야 보살이라」하셨습니다. 또 「아무데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마음을 내라(而生其心)」하셨고, 많은 사구게(四句偈)를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이 불법이다. 이런 법을 얻으면 부처가 되겠다.」하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이 법에 대한 집착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금강경에 대한 뜻을 총체적으로 결론하여 일체의 지견을 끊으라는 말씀이므로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이라 했습니다. 금강반야의 법문을 듣고 「이런 것이 반야바라밀이구나.」하는 법에 대한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되며 여시(如是)하게 알고 여시하게 받아 지니고 여시하게 깨달아서 「여시여시」하라는 말씀을 하신 대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人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 解我所說義不 不也 世尊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말씀하셨다. 석가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법문을 들어 보니 <나라는 소견>·<남이라는 소견>·<중생살이라는 소견>·<오래 산다는 소견>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뜻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세존께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설명하신 것은 곧 그것이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아닙니다. 아견도 아니고 인견도 아니고 중생견도 아니고 수자견도 아닌 것을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고 하셨기 때문이옵니다.』

 

原 文 : 須菩提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解 義]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일체법에 대해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이 봐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이 믿고 가져서(信) 이와 같이 깨달아야(解) 할 것이며 그래서 「이런 것이 법이다. 저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것은 결정된 진리다.」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법이라는 생각은 곧 법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하나니 이런 것을 법상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깨달으라.」하셨는데, 여기서 「이와 같이」란 어떻게 알며 어떻게 보라는 뜻입니까? 이런 문제는 생사를 해결하는 문제이고 생명의 일체를 해결하는 근본 문제입니다. 선방(禪房)에 오래 다니면서 많이 얻어 듣고 입으로 흉내만 내는 사람을 구두선객(口頭禪客)이라 그럽니다. 말이나 행동으로 문답하는 것은 많이 배워서 열 마디 물으면 열 마디 다 대답할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생사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열반은 조금도 증득되지 않은 채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아는 것은 결국은 생사문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인데 내가 처음부터 이것은 「반쪽 공부다, 한쪽 공부다.」한 것도 까닭이 있어서 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끊는데 대한 말씀 참 잘 하셨다고 누가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이 부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이냐?』하고 물으시니 수보리존자 말씀이 『안 될 말씀이올시다. 그 사람은 부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말하는 사람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고 하지만 그게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고 하면 말에 떨어진 것이오니 이것은 아상도 아니고 아상 아닌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고 하신 것이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옳게 알았다. 그렇게 보고 그렇게 알아라.』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런 <여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로만 배우다 보니 경계에 부딪치면 막히어 엎어지고 뒤집히고 허둥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꾸 이렇게 물으시고 저렇게 물으시는 것인데 수보리 존자는 번갯불처럼 밝고 빠른 지혜로 부처님 말씀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깨달은 이들끼리는 주먹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방망이질하고 하지만 다 그 경계에 맞는 짓을 하는지 미친 짓을 하는지 다 압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때는 「32상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느냐?」하고 물으시면 「예, 부처님을 32상으로 뵐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가 다시 또 「참 부처님을 32상으로 뵐 수 없습니다.」하고 정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말이 다 맞는 말이지만 32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32상으로 볼 수 없다는 말 보다 더 깊이 들어간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러면 32상이 여래냐?」 하시니까 수보리존자가 말을 바꾸어 가지고 「아닙니다. 뵈올 수 없습니다.」하고 이랬다 저랬다 말을 숨겼다 드러냈다 하며 번갯불처럼 왔다 갔다 하시지만 그게 다 꼭 꼭 들어맞는 조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소위 불법이라는 것이 곧 불법이 아니다(所謂佛法者 卽非佛法)」하셨다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 난로니 석탄이니 촛대니 경전이니 종이니 하는 이것이 다 불법이다.」 이렇게도 하셨다가 저렇게도 하시는데 그렇게 들으면 그 말이 옳고 저렇게 들으면 저 말이 옳고 그 조리만 따를 줄 알면 다 옳은 말씀이고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행하라.」 「이와 같이 신행하라.」의 <신>은 견성하기 전에 불법을 똑똑히 바로 아는 신심을 말하고 <해>는 견성하는 것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불생법상>(不生法相)하라는 것은 「이것이 결정된 불법이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떨어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일체중생이 즉비중생인데 그런 것을 중생이라 한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아닌 것을 네 가지 상이라 이름한다. 일합상(一合相)이라 하면 범부가 또 거기에 집착하고 그 말에 떨어지므로 일합상이 아닌데 범부들이 그것을 탐착한다. 그러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서 법상을 내지 말아라.」하신 것입니다.

결정된 법이 있다고 해도 <법상>이고, 결정된 법이 없다고 알아도 <법상>입니다. 결정한 법이 없는 줄 알면 없다고 결정된 것이므로 역시 법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번에 금강경 산림을 마치고 나서 「불법은 이런 것이다」하고 알고 있어도 안 되고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이 불법이구나.」해도 안 되고 아무것도 모르겠다해도 안됩니다.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법상을 내지 않는다고 하여 불법은 배울 것도 없고 경전도 다 필요 없고 무조건 참선만 하면 된다고 해도 그것이 법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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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合理相分 第三十0

 

 

須菩提(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以三千大天世界(이삼천대천세계)를 碎爲微塵(쇄위미진)하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微塵衆(시미진중)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若是微塵衆(약시미진중)이 實有者(실유자)인댄 佛(불)이 卽佛說是微塵衆(즉불설시미진중)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佛說微塵衆(불설미진중)이 卽非微塵衆(즉비미진중)일새 是名微塵衆(시명미진중)이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所說三千大天世界(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도 卽非世界(즉비세계)일새 是名世界(시명세계)니 何以故(하이고)오 若世界(약세계)-實有者(실유자)인댄 卽是一合相(즉시일합상)이니 如來說一合相(여래설일합상)은 卽非一合相(즉비일합상)일새 是名一合相(시명일합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一合相者(일합상자)는 卽是不可說(즉시불가설)이어늘 但凡夫之人(단범부지인)이 貪着其事(탐착기사)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먼지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먼지를 많다고 하겠느냐?』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이 먼지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이것을 먼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오니,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먼지는 곧 먼지가 아니오라 이런 것을 먼지라 하신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므로 이것을 세계라 하신 것이오니,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온데,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로 된 것>은 곧 <하나로 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하나로 된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하나로 된 것>은 곧 말로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하느니라.』

 

 

第三十 一合理相分--이치와 상이 하나다

 

[科 解]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이란 이치와 상, 곧 진리와 현상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설명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혹 「일합이상분」이라고도 하나 이 대문은 본래 법신(法身)이나 화신(化身)이 하나여서 다르지 않다는 옛 보살님들의 논(論)에 따라 이(理)자 대신 이(離)자는 잘 쓰지 않습니다.

티끌이나 세계가 그대로 하나의 법신자리이고 현상계가 그대로 진여(眞如)의 마음자리이며 일체법이 개시불법(皆是佛法)이니 이치와 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하나의 진여에 통해서 하나로 된 일합상(一合相)임을 말씀한 대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합상에 집착해도 안 되는 것이니 그 일합상은 말이나 글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그것을 탐착한다고 크게 경계하기까지 합니다. 앞장에서 법신은 상이 아니고 32상 80종호의 화신으로 여래의 진신인 법신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상을 여읜 여래의 참 모습은 가고 오고 앉고 눕고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현상과 마음이 하나여서 여래는 하나에도 머물지 않으시고 이것 저것이 다른 데에도 머물지 않으심을 밝히시게 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天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卽不說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신통력이 높은 보살이 이 삼천대천세계의 전 우주를 쳐부숴서 원자시대 전자시대 내지 에너지 상태로 돌려보냈다고 하면 그 전자의 수는 그 먼지가루는 얼마나 되는 것이냐? 대단히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참 굉장히 많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그 미진중인 먼지가루가 참말로 있는 실물이라면 그것을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먼지가루라고 말씀하신 그 먼지는 모두 다 환으로 된 것이옵고 먼지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런 것을 미진이라 하고 먼지라고 이름을 붙여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 미진이 참말로 있는 것이라면 절대적 존재이고 불생불멸하는 그것을 미진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불생불멸하는 그런 먼지를 더구나 많다 적다 이렇다 저렇다 할 수도 없고 먼지라고 이름 지을 수는 더욱 없습니다.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는 그런 틈에서 모두 환으로 벌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그러다 보니까 그게 또 불가사의한 미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다 사구의 도리이고 사구백비(四句百非)의 도리인데, 예컨대 여기있는 이 초, 이 촛대를 두고 말하더라도 「분명히 초는 초지만 초가 아니니 그러므로 이름이 초다.」 그러면 이것은 역시 불가사의한 촛대가 됩니다. 또 이 촛불이 자꾸 타서 닳아지고 있지만 닳는 형태는 안 보입니다. 그렇게 닳는 것이 곧 안 닳는 것이기 때문인데 닳기 전이나 닳고 난 뒤나 그 근원을 따지면 하나이니, 그것이 닳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 사구는 어디에다 붙여도 다 되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

 

原 文 :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天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解 義]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옵니다.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왜냐 하오면 저 세계가 참으로 실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합상, 곧 하나의 세계일 것이옵니다. 최초의 우주에 있어서 있는 것 없는 것이 하나가 되고 시간 공간이 하나로 된 때가 일합상이온데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합상이라 한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그러니 일합상이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 범부들이 공연히 그 일이 되는 것인 줄 알고 곧 생각으로 알 수 있고 학문하듯 되는 줄 알고 탐착하느니라.』

제망중중의 무진장한 현상들이 그대로 하나인 그런 세계라면 그 세계는 세계도 아닙니다. 유무·시방·중생·범부·부처·보살·아뇩다라삼먁삼보리·탐진치 삼독이 모두가 하나로 뭉쳐진 세계를 일합상이라 그럽니다. 그러다 보니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깨친 것도 미한 것도 아니고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중생들이 발심을 해 가지고 성불해 보려고 하는 것도 안 되는 생각입니다. 얻으려는 생각이 있으면 안 되고 공부를 해서도 안 되며 깨쳐서도 안 되고 방심을 해도 안 되고 까딱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나도 일합상이 되어 보겠다. 둘이 아닌 하나인 일합상의 마음이 되어야 하겠다. 가장 원만하고 구족하고 완전한 <참나>가 되어야 하겠다.」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일합상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일합상도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증득하려고 하느냐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발심해서 깨달으려 하고 증득하려 하므로 그것을 탐착기사(貪着其事)라 한 것입니다.

범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본 취지를 모르고 말에만 따라다니고 글에만 따라다니기 때문에 깨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경문에 맨 처음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을 설명할 적에 <여시>의 뜻을 숙제로 돌린 일이 있는데 그것은 <여시>의 참 뜻은 말과 글을 떠난 자리이므로 설명만 가지고는 다 풀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체법이 개시불법(皆是佛法)이고 일체불법이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는 것도 숙제였고 또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인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 이 말을 대답하지 못해서 덕산(德山)화상은 점심을 굶고 용담(龍潭)스님을 찾아 갈 수밖에 없던 일이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일합상>을 깨치려 해도 안 된고 얻으려 해도 안 되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일합상이 아닌 일합상 이런 일합상이라 하니 그만 숨통까지 막아 놨습니다. 이런 숙제는 설명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없고 직접 마음으로 깨달아 계합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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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儀寂靜分 第二十九

 

 

 

須菩提(수보리)야 若有人(약유인)이 言(언)하되 如來(여래)-若來若去若坐若臥(약래약거약좌약와)라하면 是人(시인)은 不解我所說義(불해아소설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無所從來(무소종래)며 亦無所去(역무소거)일세 故名如來(고명여래)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만약 왔다거나 간다거나 앉았다거나 눕는다거나」한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바가 없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하는 때문이니라.』

 

 

第二十九 威儀寂靜分--위의 또한 공적하다

 

 

[科 解]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팔상성도(八相成道)을 나투시고 열반해 보이시고 하는 것은 다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만행만덕(萬行萬德)을 지으신 복덕의 보응으로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시어 베푸신 자비연극입니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이란 말은 거래좌와(去來坐臥)의 네 위의가 다 공하여서 공적한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허깨비 놀음을 보인 것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여래의 법신인 마음자리에는 오고 가고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룸비니 꽃동산에 강탄하신 것을 오셨다(若來)하고 사라수 수풀에서 열반해 보이신 것을 가셨다(若去)하는데, 부처님은 오셔도 온 게 아니고 가셔도 간 게 아니며 그렇게 오셔서 오신 것도 가신 것도 아니란 뜻으로 위위적정분이라 한 것이니, 위의(威儀)라 함은 육신의 거동,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動靜)의 일체를 가리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解 義]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하거나 여래께서 열반을 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 하거나 부처님께서 가부좌하고 앉아계시다고 하거나 대중과 같이 누워 계시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가 설명하는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라.』

현재의 지구설(地球說)로 보더라도 우리는 지금 거꾸로 매어달린 것으로 됩니다. 따라서 누워 있는 때가 지구에 붙어서 서 있는 때입니다. 중생들이 각각 제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앉았다 섰다 누웠다 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고, 여기서 보니까 동쪽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고 저쪽에서 보니까 서쪽으로 보이지만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성립 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니까 이것은 머리고 발이고 그렇지, 부처님은 발가락으로 말씀도 하시고 음식도 잡수시고 대소변도, 듣기도 보기도 하시고 다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석가여래께서 앉고 서고 하시지만 이치로나 현상으로나 위 아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구나, 누우셨구나.」하고 말하는 사람은 불법같은 얘기도 못들은 사람입니다. 설사 들었더라도 두 귀의 고막이 다 없어진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어가지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들은 거나 한가지고 벼락소리 들은 거나 한가지입니다. 이렇게 들은 사람은 부처님 40년 동안 모시고 다녀도 부처님 법문 한마디 못들은 것이 됩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 그것을 마음의 성품 자리로 봐도 그렇고 현상적으로 보아도 그런 것이니 그래서 이름을 여래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바리때 들고 장삼 입으시고 탁발(托鉢)나가신다」고 하면 그것은 불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 부처님은 탁발을 하셨지만 사실은 탁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탁발이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밭 맸다고 치고 누가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 오늘 밭 매느라고 수고했소.」하는 사람은 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오늘 내가 누구하고 싸움을 했다 해도「싸움한 그게 싸움한 게 아닌데, 그런 싸움을 싸움했다 한다. 싸움 아닌 싸움이다.」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번에 금강경 법문을 들으신 분들은 누가 고약한 놈이라고 욕을 하더라도「그 욕이 욕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모든 일이 다 이 세 마디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하면 선정도 잘되고 성불도 빨리 됩니다. 그러니 사구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좋고 없다 해도 좋고 무슨 짓을 해 놓고도 이 세 마디만 하면 됩니다.

이 마음자리는 작기로 말하면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는 자리고 크기로 말하면 무한대의 우주가 되고 부처님의 화장세계인데 이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런 속에 필름만 돌리면 온갖 것이 다 나오는 영화의 화면처럼 가는 것 같은 것이고 오는 것 같은 것으로 벌어진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것이 오는 게 아니고 그렇게 오는 것이며, 가도 가는 게 아니고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說 義]

현상계의 모든 것이 환인 줄을 확실히 알면 현실에 구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통조화를 부리게 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제 마음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구속이 되고 속는데 사실은 속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물 긷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하는 것이 모두 신통묘유(神通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하면 용(用)이고 없다 하면 체(體)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 체와 용을 초월한 것이며, 「이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을 체와 용이라 이름 할 뿐이다.」하면 체와 용을 겸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구(四句)가 됩니다. 이것을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이 공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제일구(句)의 유문(有門)이라 하고, 모든 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보는 것을 제 이구의 공문(空門)이라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제 삼구인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이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 제사구의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라 그럽니다.

나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좋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합(正反合)의 서양 논리로는 이렇게 긍정 부정해서 그 양자를 종합해서 진보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론이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 더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야 마지막 이론이 끝납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보다 불교의 사구논법이 훨씬 완전한 논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모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 사구의 이론으로 하면 더욱 완전하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구에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까지가 아니다, 곧 온갖 것 온갖 이치를 다 부정하여 어떠한 존재나 이론, 원리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백비라 한 것이고 사구 자체에 이미 백 가지로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사구백비라 한 것입니다. 사구로 네 번 부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서 백비란 말을 붙였지만 사실은 사구 가운데 이미 백비의 원리가 다 들어있는데 그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풀이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에 있다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으로 봐서 제일비(非)가 되고 다음에 없다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란 <제이비>입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제삼비>가 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은 <제사비>가 됩니다. 그런데 또 중생들이 이 사구의 논법에 집착해서 사구의 본래 뜻을 바로 깨달을 줄은 모르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것만을 주장하니까 그런 주장을 부정하는 제 오비가 나오게 됩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물질의 본질은 에너지도 아니라고 했듯이 물질의 본질을 원소라고 하지만 원소의 근본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 연구돼야 하고 원자, 전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원자, 전자를 이루는 본질이 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끈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반합을 부정하고 사구를 부정하고 거기다 다시 아니 비(非)자를 하나 더 붙이면 긍정이 되는데 다시 또 비(非)자를 붙이면 부정이 됩니다. 이렇게 비차를 천자, 만 자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있는 비자를 붙여서 사고·관념을 초월하자는 궁극적인 듯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백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 자리, 산보고 높은 줄 아는 이 자리는 사구로도 설명될 수 없고 백구(百句)로도 안 됩니다. 말을 붙이면 붙이는 대로 모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하면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이 작고 몇 천만 억 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도 살펴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또 크다고 할 때는 몇 천만 억 배의 우주를 제망중중 무한대 수로도 비교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큰 이 마음자리는 작으면 작은 대로 큰 거고, 크면 큰 대로 작은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무엇이 가고 올 것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서 천 백억 세계에 부처님의 몸을 한 분씩 나누어 중생들을 모두 제도했지만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소승경전만 잘못 본 사람은 실달태자가 이 세상에 실제로 오셔서 팔상성도(八相成道)하셨고 79세에 진지를 잘못 잡수시고 혹은 돼지고기 잡수시고 잘못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승경의 도리를 아는 이 부처님의 참 모습, 마음자리를 아는 이는 부처님께서 몸뚱이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가셨어도 간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지혜, 대승의 지혜로 볼 때는 신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이 다 도깨비이고 설사 시방제불이 나타났다 해도 다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밖에 안됩니다. 상(相)으로 나타난 그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보면 속는 것이고 견성성불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 오시고 가시고 앉고 눕고 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의 육신상을 보고 하는 말이므로 참 부처를 본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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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受不貪分 第二十八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로 持用布施(지용보시)하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知一切法無我(지일체법무아)하야 得成於忍(득성어인)하면 此菩薩(차보살)이 勝前菩薩(승전보살)의 所得功德(소득공덕)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以諸菩薩(이제보살)은 不受福德故(불수복덕고)니라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云何菩薩(운하보살)이 不受福德(불수복덕)이니잇고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의 所作福德(소작복덕)은 不應貪着(불응탐착)이니 是故(시고)로 說不受福德(설불수복덕)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일체 법에 내가 없음을 알아서 참다운 진리를 이루어 얻었다면, 이 보살이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덕을 짓는 것은 탐착해서가 아니니 그러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第二十八 不受不貪分--보살은 복덕을 탐하지 않는다.

 

[科 解]

불수불탐(不受不貪)이란 주관·객관을 초월하여 선악을 여윈 자리에는 화복을 받는 주체도 객관도 없으며 미추호오(美醜好惡)가 붙을 수 없으므로 탐착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나와 남이 있고 부처와 중생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물질적인 복덕을 많이 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인과이므로 한계가 있고 생명이 있는 생사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없는 <참 나>의 자리, 상에 머무르지 않는 <응무소주>의 마음자리를 깨달아서 체득해야만 참다운 큰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말씀처럼 상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고 만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에 머무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서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하고 보시·지계·인욕을 하는 보살의 무심한 자리에 탐착이 있을 수 없고 복덕도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없으니 밥이 필요 없고 옷이 필요 없으며 돈, 생명까지 다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 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에게 보시한 보살이 있고, 또 다른 어떤 보살은 「일체법이 내가 없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지식이 참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아의 경계이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응무소주의 경계구나.」하는 진리를 깨쳐서 완전히 증득했다면 이 보살의 공덕이 앞에서 칠보를 보시한 공덕보다 더 많으리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에게 만법이 무아인 도리를 깨쳤습니다. 나만 무아가 아니라 만법이 다 무아이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도리를 깨쳤습니다.

인욕하는 것도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것도 자꾸 노력을 하고 무아의 도리를 닦아 나가면 도가 높아지는데 따라서 힘 안들이고 잘됩니다. 그 전에 어떤 노장님이 인욕을 아주 참 잘해서 평생에 노한 얼굴 한 번 안한 분도 있습니다. 성나는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도 참아야 하는데 몸을 톱으로 켜고 칼로 찌르더라도 아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력이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발심한 불자입니다.

내가 한 30년 전에 맨발로 짚신만 신고 다니며 방에 불도 안 때고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한동안 인욕공부를 하며 지낸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추위는 30년 전 추위에 비하면 훨씬 덜 춥습니다. 그때 장안에는 선학원에 장사 중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때 몸뚱이를 내 버리고 인욕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는 것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적에 가리왕에게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찢길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전당포라는 하늘나라의 고약을 가지고 와서 찢어진 육신을 완전하게 치료해 줄 그때에도 조금도 기쁜 마음을 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참는 것 없이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마음의 참 바탕자리를 튼튼하게 지키고 일체의 객관경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참 나>의 진리를 체득했다는 뜻을 가진 인(忍)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득성어인(得成於忍)의 <인>(忍)은 어긋나고 모순되고 거슬리는 경계를 잘 참고 성내지 않으며 좋다 싫다는 생각이 없어서 갚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생멸(生滅)이 없는 진리에 머물러서 그 마음이 도할양무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須菩提 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 說不受福德

 

[解 義] 『수보리야! 저 모든 보살은 한량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채워서 보시한 공덕보다도 더 큰 복을 지은 그런 보살들은 다 생멸이 없는 진리, 곧 무생법인을 체득했으니 그러므로 그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복을 받느니라.』 보살은 복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보리존자는 깜짝 놀라서 부처님께 여쭙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복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을 짓는 것은 무엇을 탐착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중생들 소견으로는 「복을 받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복은 지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살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 없이 된 분이고 수행을 하거나 불법을 할 필요가 없이 된 분입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니 밥이 필요합니까? 옷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생각이 아니니 지식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무량대복을 짓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복을 지을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이치(理)에만 착하지 말고 사(事)에도 자유롭자는 것입니다. 곧 원리로만 통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현상계에 대해서도 자유로워야 마지막 자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혜만 닦아 놓았을 뿐 복을 닦지 않은 것은 마치 열, 백가지 박사학위를 받은 대천재가 있다 치고 이 사람이 비록 아는 것은 세계 제일이지만 그러나 어느 백화점이던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바늘 한 개만 집어오면 당장 도둑으로 몰려 잡혀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서 구경을 하는 데는 백화점 주인이거나 거지나 한가지지만 그 물건을 직접 내가 소유해서 쓰려고 할 때는 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 <참나>의 본성자리에서는 복이니 복이 아니니 선이니 악이니가 또 생사니 열반이니가 붙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욕심으로만 살다 보니까 우주를 다 차지해도 만족이 안 됩니다. 본성을 깨쳐서 정혜(定慧)만 닦으면 욕심이 다 떨어져서 중생도 부처도 없으니 아침나절에 성불해 가지고 저녁때 열반합니다. 복을 안 지어서는 나한테 제도 받을 중생이 하나도 없으니 그러므로 그래서 복도 중생이라 그러는데 시방제불이 복을 갖추어서야 비로소 중생을 제도하시지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복에만 치우쳐도 안 되고 그래서 부처님은 복혜(福慧)를 쌍으로 구족하신다고 그럽니다. 곧 복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지혜로도 완전히 자유로우면 이것이 복혜구족(福慧具足)이고 성불입니다.

그래서 보살이 육바라밀을 닦고 복을 짓는데, 보살은 자기를 위해서 복을 짓지 않습니다. 자기 살림살이 늘리기 위해 복짓는게 아니고 보시를 해도 저절로 되고 아무 생각없이 오직 중생만을 위해서 살생 안 하고 도둑질 안 하고 일체의 악은 다 안 하고 꼭 선행만 하고 복을 짓지만 복에 탐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수복덕(不受福德)입니다.

 

 

[說 義]

부처님께서 어느 두 보살의 과거세의 역사를 말씀하셨는데, 그야말로 <일체법무아>의 법인을 체득해서 불수복덕(不受福德)의 무량복을 짓는 내용입니다.

이 보살이 어느 부처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을 심어 주기 위해 사법(邪法)과 싸우게 됐습니다. 그때도 지금 우리 한국과 같이 정법이 사법에 몰리는 말세였습니다. 석가세존 불법에는 정법(正法) 천 년, 상법(像法) 천 년, 말법(末法) 만 년인데 현재 불멸기원(佛滅紀元) 2500년이 세계통일년대이므로 말법의 운수는 아직도 구천 오백년이 남아 있고 지금은 말법의 초기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 우리 한국보다도 더한 말법시대가 되어서 비구승들이 전부 장가가고 술 고기 먹고 다 가짜 중 썩은 중들만 있고 정말 수행을 하는 참 비구는 이 보살 한 분만 남았습니다. 불교 신도도 말이 불자지 전부 마구니 신도고 그럴 때입니다. 그래서 술, 담배 먹고 곰탕, 불고기 먹어가며 참선도 하고 기도를 해야 속히 견성성불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저녁에 열 여자하고 자더라도 생각이 있으면 안 되지만 아무 생각 안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엉망으로 되어 마구니떼로 변해가고 있으니 이 보살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력을 세우고 정진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세밀한 계획을 잘 세워서 서울 같으면 먼저 파고다공원에서 법문을 한번 하고 다음에는 장충공원에서 한 번하고 역전에서, 시청 앞에서 이렇게 돌아가며 설법을 합니다. 청중들 가운데 신심이 있는 신도도 있고 불교를 연구하는 지식층 인사도 끼여서 들어보고는 「이제야 정말 참 불법 바로 하는 스님 한 분 우리가 만났다. 이 대사님을 옹호해 가지고 정법을 펴자.」 이렇게 하여 모여든 대중이 몇 만명이 됐습니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있는 삿된 무리들이 우리 한국 같으면 만신·무당·불법을 삿되게 하는 불교인들, 막행막식주의(莫行莫食主義)로 하는 불교인 천주교·기독교·천도교·유교 등 이런 것도 모두 삿되게 하는 무리들이 원체 많은데 전부 단결해 가지고 일거에 대항해 옵니다. 그 스님이 공부도 대단하고 원력도 커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데다 그 교세가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팽창돼 가고 있으며 자기네 신도들을 다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컨데 저쪽에는 몇 백만명이 되고 이쪽은 몇 십만 되는 많은 신도들이 도처에서 생명을 걸고 싸움질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정법의 신도들이 다 죽어 갑니다. 이때에 마침 그 나라 국왕은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으며 과거세부터 불법을 많이 공부했던 인연이 있는 이어서 경을 바로 보는 안목(眼目)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을 소집해 가지고 「이제 정법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혼란한 것도 다 불교가 이렇게 혼란한 때문이다. 이제 다행히 옳은 스님이 한 분 나오셨는데 무자비한 사도들에게 목숨을 잃을 직전에 있으니 다 같이 가서 구하자.」고 호소했으나 군중들은 그릇된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국왕의 호소에도 잘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의 당시 국법으로도 도와 줄 수 없고 국회 같은 회의나 조정대신들도 다 반대했으므로 국왕은 할 수 없이 자기의 직속 호위병들 정도만 이끌고 그 스님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쪽이 원체 수가 많아서 이쪽은 다 몰살당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스님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싸서 모셔 놓고 「우리는 다 죽더라도 이 스님만은 살려야 한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국왕도 왕위를 걸고 헌신적으로 나섰지만 이쪽은 자꾸만 밀리고 무너져서 이대로는 그 스님을 보호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국왕은 속임수로 진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우리는 다 죽어도 좋지만 스님 한 분만은 꼭 사셔야 합니다. 어서 피해서 누더기 옷이라도 입고 살아 계셔야만 저 마구니들이 이 나라를 다 점령하더라도 스님께서 이 나라에 생존해 계신 한 그만한 덕이 될 것입니다.」하며 피하도록 했습니다. 스님도 할 수 없이 그 길로 산으로 피해 가서 변형(變形)을 하고 공부만 하면서 기회를 보았으나 인연이 맞지 않아서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나라 국왕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두 보살의 과거의 보살행을 이렇게 설명하셨는데, 열반경(涅槃經) 같은 데도 보살이 과거에 어떤 나라의 국왕으로 있었다는 등의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보살님들의 다생겁래의 모든 행은 다 자기의 복덕이나 자기의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 생각 없이 무심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도할양무심의 행이기 때문에 탐착이 아니며 복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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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斷無滅分 第二十七

 

 

須菩提(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하되 如來(여래)-不以具足相故(불이구족상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아뇩다라삼먁삼보리)면 須菩提(수보리)야 莫作是念(막작시념)하라 如來不以具足相故(여래불이구족상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하되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 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說諸法斷滅(설제법단멸)가 莫作是念(막작시념)이니 何以故(하이고)오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於法(어법)이 不說斷滅相(불설단멸상)이니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여래는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도다.」하겠느냐,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께서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 말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이 단멸하는 것으로 말하는구나.」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에 대해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第二十七 無斷無滅分--단멸이 아니다

 

[科 解]

앞에서 제26 법신은 상이 아니란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을 말씀하실 적에 여래는 32상·80종호(種好)로 볼 수 없다고 하셨고, 또한 모양이나 소리로 부처님을 찾는다면 이것은 곧 사도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32상·80종호 같은 복된 상에는 아무 생각도 없고 일체의 법에 대해서 모든 진리는 아주 다 없어지는 것이란 단멸상(斷滅相)을 가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으시는 것인가 보다.」하고 잘못 생각할까봐 염려해서 이 잘못된 생각을 미리 막으시려는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須菩提 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解 義] 『수보리야! 네가 혹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부처님께서 구족한 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 여래께서 구족상에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너는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께서 구족한 상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해서, 곧 상에 아무 상이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래께서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가지고 오랜 세월 무량겁을 두고 육바라밀을 닦으셨습니다. 보시(布施)도 하고 지계도 하고 인욕도 하고 정진, 선정도 하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지혜바라밀을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세생생에 인격이 점점 향상해 왔고 일체 현상계에 이(理)로나 사(事)로나 두루 다 원만하게 통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량중생을 제도해서 많은 복을 지으므로 32상·80종호(種好)를 비롯한 구족상(具足相)을 갖추셨지만 이런 구족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구나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금강경을 배워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해라, 여하한 경우 여하한 조건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글귀의 뜻도 수없이 들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여기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상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구나.」하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등상불(等像佛)이나 실제 부처님 생존당시의 32상을 갖춘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더라도 「그게 다 상인데 볼 게 무엇이 있느냐?」하는 그런 소견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原 文 :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說 諸法斷滅 莫作是念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須菩堤 心者 於法 不說斷滅相

 

[解 義] 『수보리야! 네가 만일 이런 생각을 하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자는 모든 법이 단멸했다.」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 가령 여기 이 등상 위에 켜 놓은 이 초를 두고 말하는 경우에도 처음에는 새것이었던 것이 자꾸 달아서 더 있으면 다 달아 없어질 것인데 그러면 초는 다 달아서 단멸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늙어서 죽든지 병으로 죽든지 교통사고 같은 참변을 당해서 죽든지 한번 죽으면 그만이다. 육체적으로는 물론 생명의 본질, 영혼 같은 것이 있어서 내생(來生)이 영속(永續)된다든지 하는 것을 부인하고 한번 죽으면 그만이다. 아주 죽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사람 생명에 대한 단멸상(斷滅相)입니다. 또 반대로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가든지 천당에 가든지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상견(常見)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항상하다고 하여 보리·열반의 참다운 진리를 체득할 줄 모르면 이것도 구경법(究竟法)이 되지 못하는 때문에 불교에서는 제법을 단멸상으로 보는 단견이나 항상하다고 보고 마는 상견을 다 정견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여래께서 구족상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어서 모든 것을 끊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은 모든 법에 대해 말도 없고 생각도 없는 다 끊어 없어진 단멸이라고 생각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일체 만법에 아주 없어져서 아무 것도 없다는 단멸상을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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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身非相分 第二十六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不(관여래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이다 以三十二相(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佛(불)이 言(언)하사대 須菩提(수보리)야 若三十二相(약삼십이상)으로 觀如來者(관여래자)면 轉輪聖王(전륜성왕)도 卽是如來(즉시여래)로다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컨댄 不應以三十二相(불응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爾時(이시)에 世尊(세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사대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거나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하면 是人(시인)은 行邪道(행사도)라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32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러하옵니다. 32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뵐 수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32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제가 아옵기로는 32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사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第二十六 法身非相分- -법신은 상이 아니다

 

 

[科 解]

제26분에서는 법신(法身)은 거룩한 상, 즉 복상(福相)이 아니라는 도리를 말씀하시는 대문입니다. 우리의 참 마음이 곧 여래의 법신인데 이 참 마음자리는 선이니 악이니 복이니 죄니 하는 차별상이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지으면 복된 상을 받고 죄를 지으면 추한 세상에 나쁜 모습으로 태어나서 화를 받는데, 그러나 설사 아무리 복을 많이 짓고 아무리 거룩한 선행을 많이 해서 32상·80종호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 상만을 보고 여래를 식별한다는 것은 곧 현상계에 떨어진 것이고 생각·지식·망상에 집착된 중생경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여래를 찾으면 곧 사도를 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상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무상무위(無相無爲)에 열반적정에 가만히 앉아서 복도 짓지 말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解 義] 『수보리야! 네뜻이 어떠하냐? 32상으로 부처님을 본다고 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이렇게 물으셨는데 청중(聽衆) 가운데 누가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32상으로 부처님을 보겠습니까?

수보리존자님은 32상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이렇게 사뢰었습니다. 『그러하옵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뵈옵니다.』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설명된 것처럼 일체법이 다 불법인데(一切法 皆是佛法) 왜 32상으로 부처님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32상을 껍질로만 보니까 부처님을 못 보지 32상이 즉시 불법인 도리로 보면 곧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천만억겁을 두고 겉으로만 보고 겉만 알기 때문에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原 文 : 佛言 須菩提 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解 義]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만일 32상으로 여래를 보는 것이라면 전륜성왕은 32상을 갖추었으니 그러면 그도 곧 여래겠구나.』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또 이렇게 안 된다고 하셨는지 그 내용을 알고 넘어가야지 말만 따라다녀서는 안 됩니다. 일체제법 개시불법(一切諸法 皆是佛法)인데 전류성왕만이 유독 불(佛)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륜성왕은 인수(人壽) 2만세 때에 나타나서 온 세계를 통치하는 성왕(聖王)인데 보배수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므로 비행황제(飛行皇帝)라고도 하며 32상을 갖춘 아주 복이 많은 성왕입니다. 나이가 늘어나는 증겁(增劫) 때에는 이만세에서 나이가 줄어드는 감겁(減劫)때는 8만세까지 사이에 나타나는 복덕의 왕이고 성왕입니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고 부처인데 어찌 전륜성왕이 부처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수보리존자님이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사룁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뜻을 아는 것 같아서는 32상으로 부처님을 뵐 수는 없사옵니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말씀을 뒤집어서 수정을 합니다. 이때에 수보리존자님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이란 곧 32상의 껍질만 보고서 부처를 볼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대로 얼른 받아서 먼저의 말을 수정했던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解 義]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읊어서 말씀하시기를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어떤모양으로, 32상 80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 같은 겉모양으로 부처를 보거나,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다라니를 하거나 염불을 해서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하거나 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이 사람은 곧 사도(邪道)를 행하는 사람이고 정도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이런 사람은 천만 겁을 두고 공부를 해도 부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떡이며 돈이며 갖다 놓고 불공을 하거나 참선하는 수좌(首座)들도 화두를 말로만 외는 사람도 있고 경을 봐도 글자에 매어 달려서 불법을 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사람은 다 견성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說 義]

전에 한 수좌가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하는데 「무! 무!」하고 소리 내어 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화두의 뜻은 이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온갖 것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有情無情 皆有佛性)고 하셨는데, 조주(趙州)스님이라고 옛날 중국에서 유명한 선지식에게 어떤 학인(學人)이 찾아와서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적에 <무>(無)하고 없다고 하셨으니 「도대체 무슨 뜻으로 <무>라고 하셨을까?」하는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 수좌는 「무! 무!」하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큰 소리까지 내어서 「무! 무!」합니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옆 사람 참선에 방해가 되므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할 수 없이 수좌는 걸망을 지고 이 절 저 절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혼자 참선을 하는데 밑은 깊고 험한 낭떠러지어서 떨어지면 즉사(卽死)하게 될 그런 데 올라앉아서 마음 놓고 「무! 무!」하며 참선을 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결국은 견성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애를 쓰면 이런 정도로 애를 써야 합니다.

이 사람이 본래는 조그만 보따리장사였는데 만공스님 회상에 와서 법문을 듣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면 생명을 걸고 한번 해 봐야겠다고 발심을 해서 깨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 무」하고 소리를 내어 음성으로 부처를 구한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사람은 모양이나 말을 따라 부처를 구한 것은 아닙니다. 아둔해서 처음에 그랬지만 마음의 부처를 찾으려 한 수좌였습니다.

이렇게 견성을 해서 마음을 깨쳐 놓으면 32상을 갖추신 부처님께서 온갖 신통을 하시며 종로에 나타나셨다 하더라도 그래서 서울의 온 시민이 다 나와서 마중을 하시더라도 이 정도 된 사람은 왼눈 한 깜짝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 깨친 자리에서 보면 그런 부처님도 다 도깨비인데 거기 무엇 하러 갑니까? 이와 같이 근본 문제를 해결해 놓아야 부처님께서 고맙게 여기시지, 떡을 갖다 놓고 절을 하고 돈을 바치고 복을 많이 달라고 그래 봐야 불보살님은 고맙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이 보인다고 기도하다가 도통했다고 하고, 참선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하고 하면 이런 사람은 다 헛공부한 것이고 삿된 공부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제일 수제자(首弟子)인 가섭존자께서 본래 명문대가(名門大家)의 부잣집 아들이고 대학자 큰 인격자로 늦게 출가하신 분인데, 한번은 부처님께서 먼 데 어디 가셔서 설법해 주시고 한 달쯤이고 얼마쯤 계시다가 돌아오시게 되었는데, 그러면 대중들이 환희에 넘쳐서 모두 마중을 나갑니다. 그런데 가섭존자는 부처님 마중도 안 나가고 그대로 앉아 계십니다. 그러니 대중들이 한결같이 지탄을 합니다. 「가섭존자라는 이는 법도 모르고 어떻게 된 사람이냐?」하면서 대중들의 여론이 분분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들이 그런 불평을 하는 것은 다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여래를 환영한다는 것은 도깨비가 도깨비를 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섭은 여래를 정말 존경할 줄도 알고 참으로 환영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존자를 이렇게 칭찬해 주셨고, 시방제불이 석가여래의 상수(上首)인 가섭존자 참 거룩하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또 가섭존자께서는 이런 도리를 아시고 마중도 하시고 존경도 하시고 하니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도리를 알고 참선도 하고 경도 보고 염불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염불도 안 하고 기도도 필요 없고 경도 참선도 할 것 없다고 하면 이것이 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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化無所化分 第二十五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汝等(여등)은 勿謂如來-作是念(물위여래-작시념)하되 我當度衆生(아당도중생)이라하라 須菩提(수보리)야 莫作是念(막작시념)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實無有衆生(실무유중생)하야 如來度者(여래도자)니 若有衆生(약유중생)하야 如來度者(여래도자)면 如來卽我人衆生壽者(여래즉아인중생수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說有我者(여래설유아자)는 卽非有我(즉비유아)어늘 而凡夫之人(이범부지인)이 以爲有我(이위유아)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凡夫者(범부자)도 如來說卽非凡夫(여래설즉비범부)요 是名凡夫(시명범부)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께서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중생이 있어서 여래께서 제도하였다면 여래는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나라는 생각>이 있다 함은 곧<나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나라는 생각>이 있다고 함이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는 곧 범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름을 범부라 하느니라.』

 

 

第二十五 化無所化分

 

[科 解]

일체 중생이 본래 성불이어서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으시며 오직 평등한 성품, 자타가 없는 진여의 법계 속에 계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곧 마음속에 교화 받을 중생이 있고 교화한 내가 있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주객·자타·우열의 차별세계에 떨어지는 것이므로 이런 것은 다 부처님의 경계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무량중생을 제도하시지만 제도한 것이 아니며 교화의 주체도 제도된 중생도 없다」는 뜻으로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이라 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 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卽我人衆生壽者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앞에서 금강경의 공덕이 너무나 커서 무엇으로 비유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불법의 광대무변함에 집착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너희들은 행여 이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께서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했도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그런 말은 하지도 말고 생각도 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실로 중생을 여래께서 제도한 일이 한 번도 없고 제도 받을 중생도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부처님께서 제도할 중생이 있다면 이는 부처님께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는 것이 되느니라.』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을 말씀하실 적에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은 결정된 법이 없어서 설명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고, 바른 법도 그른 법도 아니니라. 여래께서 그런 법을 말하느니라.」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堤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고 하셨습니다.

 

 

 

또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 『수보리야! 만일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네가 이다음 세상에 성불하여 석가모니라 하리라.」하고 수기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須菩提 若有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然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하셨으며,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에서도 같은 뜻의 말씀을 하시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말씀한 법이 있다고 하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수보리야! 법을 말한다는 것은 곧 법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설법이라 이름하느니라.』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래께서는 얻은 법이 없고 법을 말씀한 적도 없고 중생을 제도하신 일도 없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제도할 중생은 없습니다. 중생 중생하지만 제21 비설소설분에서 말씀한 것처럼 그것은 중생이 아니라 이름을 중생이라 할 뿐 잠깐 꿈꾸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도한 부처님도 제도 받은 중생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한 적이 있으면 제도한 내가 있고 제도 받은 중생이 있게 되므로 곧 아상(我相)·인상(人相)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 따라서 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아상·인상이 있고 주관 객관이 벌어지게 되면 그것은 곧 중생일 수밖에 없고 부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如來說 有我者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解 義] 일체 중생이 모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으로 산다고 그러지만 그런 것이 참말로 있는 것도 아니라 범부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중생들이 아상을 제가 만들어 놓고 제가 아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중생인데 어찌할 수 있느냐?」하고 좌절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상>이 있다, <인상>이 있다 하셨다지만 실제로는 <상>이 아니다. 범부들은 그것을 모르고 참말로 <아상>이 자기한테 있는 줄 알고 「내가 <아상>이 있는 중생이다」이렇게 인정을 한다. 그러나 수보리야! 범부란 여래께서 범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또 범부가 아니 것도 아니니, 그래서 이름을 범부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범부는 범부인데 정말 범부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만일 한쪽 말씀만 하시면 중생들이 다 그렇게 되고 말 것이요, 시방제불께서 부처님께서 설법 잘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제21 비설소설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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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智無比分 第二十四

 

 

須菩提(수보리)야 若三千大天世界中(약삼천대천세계중)에 所有諸須彌山王(소유제수미산왕)의 如是等七寶聚(여시등칠보취)를 有人(유인)이 持用布施(지용보시)라도 若人(약인)이 以此般若波羅蜜經(이차반야바라밀경)으로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을 受持讀誦(수지독송)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於前福德(어전복덕)으론 百分(백분)에 不及一(불급일)하며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백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로도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만한 칠보의 덩어리로 보시해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의 네 글귀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앞의 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온갖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第二十四 福智無比分--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科 解]

물질을 가지고 보시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그 육신을 구제하는 것에 불과하고 금강반야의 구경법(究竟法)으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대해탈(大解脫)을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게 하는 것이므로 그 공덕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보리를 증득(證得)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七寶)덩어리가 아니라 온 우주의 몇 억만곱을 더한 것과 비교하더라도 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三千大天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 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만한 그런 덩어리의 칠보를 가지고 어떤 사람이 보시를 했다면, 그 복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이 금강반야바라밀경 가운데 사구게, 곧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제5 여리실견분 참조)」라 한 이러한 한 게송만 받아 지니어 읽고 외워서 그 뜻을 잘 이해해 가지고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이 사람의 복이 수미산처럼 큰 칠보 덩어리를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수미산만큼 하여 보시를 한 그 복보다 훨씬 많으니라. 그 복이 많은 정도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라 백분의 일로도 비교가 안 되고 백천만억분 내지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산수로 비유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견주어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삼천대천세계 가운데는 수미산이 백억개나 있는데, 큰 지구덩어리 백억개에 해당하는 칠보덩어리를 가지고 한량없는 중생 중생에게 보시했다면 그 복이 한량없이 많을 겁니다. 밥 없는 사람에게 평생 먹을 주고 옷 없는 사람에게 옷을 주고 집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줍니다. 고아원도 세워서 불우아동을 보살펴 주고 양로원을 세우고 무료 병원을 세워서 병든 이 외로운 이를 돌봐줍니다, 학교를 세워서 교육도 시키고 절을 세워서 중생을 지도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한량없이 베풀어서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만한 다이아몬드·금·은 비취 등의 칠보덩어리가 다 없어지도록 보시를 한다면 그 복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지만 금강경 사구게 한 게송을 잘 받아서 지니고 외워서 남에게 이해시켜주는 공덕만은 못하다는 것입니다. 못한 정도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수학상의 수자를 아무리 동원해서 비유를 한다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질이나 내지 몸뚱이를 가지고 온갖 중생을 위해서 아무리 많은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금강경의 사구게송의 도리를 잘 배워서 익히고 남을 위해 설명해 주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은 벌써 여러 번 나왔습니다.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에서도 나왔고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에서도 말씀하셨고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에서도 말씀하셨고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에서도 이번 제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에서도 말씀하셨는데 처음에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사구게를 수지하여 남에게 연설해 주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셨고 나중에는 항하강의 모래 수 같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항하사 수의 몸을 보시한 공덕으로 비유해도 안 된다고 하셨고, 그 다음에는 아침나절에 항하사 수의 몸으로 보시하고 한낮에 항하사 수의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나절에 항하사 수의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금강경의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천만억분 내지 산수비유로도 비교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내용은 다 같은 원리로 설명될 수 있으므로 거듭 되풀이해서 말할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이렇게 금강경의 골자를 한번 쭉 말씀하시고는 금강경 사구게의 공덕은 상을 여읜 무상공덕(無相功德)이므로 물질이나 육신 보시와 같은 상(相)에 주착(住着)한 보시의 공덕으로는 억만분의 일도 못 미치고 산수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금강경의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의 도리만을 알고 있으면 되고 온갖 보시 공덕을 짓지 말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보시공덕을 지으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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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是法(시법)이 平等(평등)하야 無有高下(무유고하)하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堤.(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로 修一切善法(수일체선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리니 須菩提(수보리)야 所言善法者(소언선법자)는 如來(여래)-說卽非善法(설즉비선법)을 是名善法(시명선법)이니라

 

『또 수보리야! 이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하느니라.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살이>도 없고 <오래산다>는 생각도 없이 온갖 착한 법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착한 법이라 함은 여래께서 곧 착한 법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착한 법이니라.』

 

 

第二十三 淨心行善分

 

 

[科 解]

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은 깨끗한 마음으로 일체의 선을 행한다는 뜻이지만 제 22분의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에서 말씀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계속해서 설명해 주시는 뜻이 됩니다. 앞장에서 내지 아주 작은 법도 얻은 것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셨는데, 이 법이 평등해서 고하가 없다고 하십니다. 또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깨끗한 마음으로 선법을 닦아라, 거룩한 보살행을 해라.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따라서 조건이 남아있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붙어 있는 마음으로,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아무리 선행을 해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지 못한다는 뜻으로 <정심행선분>이라 했습니다.

 

原 文 :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堤

 

[解 義] 이 법문은 앞의 제 22분과 따로 장절을 나누기는 했지만 실상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또 다시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은 위 아래가 없고 높고 낮은 것도 없이 평등하다. 지금 말하고 듣는 무엇을 알 줄 아는 이 자리가 불법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인데, 이 자리는 부처님께서 깨달아 얻은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도 아니며, 부처님께서나 중생이나 똑같이 본래부터 있던 너니 나니가 떨어진 평등한 마음자리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는 시방제불과 일체중생이 다 평등한 성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은 물건을 통과하는 광선의 그림자가 비친 것이니 거울 속으로 물건이 들어간 것은 아니니 거울 바탕은 물건이 비칠 적이나 안 비칠 적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또 물결이 없이 고요하고 평평하던 바다에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서 큰 파도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역시 바다물이란 점에서는 평평할 때나 물결이 일 때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탐진치의 번뇌망상이나 보리열반이나 다 같은 마음자리라는 것입니다. 자기욕심을 채우느라고 남을 해치고 살생을 하며 성을 내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지금 무엇을 알 줄 아는 이 마음이 하는 짓이고 발심해서 여러 가지 선행(善行)을 하고 육바라밀을 닦고 참선을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도 다 그 마음이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서 새벽 별을 보시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치신 그때나, 태자의 몸으로 출가하려고 발심했던 그때나, 또는 어머니 마야부인의 태중에서 태어나 왕자의 몸으로 세속의 학문을 배우던 그때나 깨치고 나서 보니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한 마음이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고와 언어를 초월한 심행처멸언어도단(心行處滅言語道斷)하여 구공지경(俱空地境)에 들어간 다음이나 10원, 20원 가지고 싸우고 밥 한 그릇 서로 뺏어 먹으려고 칼로 찔러 죽이고 하는 그 마음이 다 평등한 한 마음이어서 고하(高下)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또 「이 법이 평등해서, 고하가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하는 이 말을 듣고 「아, 그러면 항하사수의 시방제불(十方諸佛)도 다 없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또 없다는 말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등해서 고하가 없는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도 금강경 잘못 들은 사람입니다. 금강경의 말씀이 전부 틀린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을 들어도 말 듣고 알 줄 아는 이 자리에서 들어야 바로 들리지 그렇지 않으면 천번만번 들어도 하나도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原 文 :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阿耨多羅三藐三菩堤

 

[解 義]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이 일체의 선법(善法)을 닦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인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다는 말씀은 곧 아무 생각도 없는 마음, 아무데도 걸림 없는 마음을 가리키므로 <응무소주>에 해당하고 일체의 선법을 닦는다는 것은 곧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생기심>에 해당합니다.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말은 곧 성불(成佛)한다는 뜻이니 <응무소주>해서 <이생기심>하면 성불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온갖 착한 일을 다 하라. 눈도 빼 주고 코도 베어주고 영감도 남 주고 마누라도 남 주고 재산도 주고 하여 아무 조건 없이 남만 위해서 희생해서 착한 일을 베풀어 주라, 이렇게 무심(無心)으로 육바라밀을 닦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 선이 되고 저렇게 되면 죄가 된다 하는 아무 생각 없이 보시도 하고 지계(持戒)하고 인욕·정진·선정·지혜를 닦아서 <이생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고, 이렇게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성불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解 義] 『수보리야! 이른바 선법(善法)이라고 하는 것을 여래께서 선법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름을 선법이라 할 뿐이니라. 내가 착하다고 하는 말은 착하다는 말이 아니니 그런 것을 착한 법이라 한 것이다.』 금강경을 배워서 외워 가지고 천독만독(千讀萬讀)하면 부처님의 이런 말씀이 알아집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이 생사와 열반에 구애되지 않고 무심으로 중생을 위해서 선행을 하라. 배고픈 사람 밥도 주고 옷 없는 사람 옷도 주고 금강경의 사구게도 가르쳐 주고 하여 이렇게 착한 법을 닦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성불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착한 법이 곧 착한 일이 아니다 그런 말입니다. 착하다는 말은 악하다는 말의 상대어(相對語)인데 <응무소주>의 열반 해탈의 경지에서는 선악·시비·죄복이 있을 수 없는 자리 입니다.

중생들의 세계에서는 선악의 절대적인 기준도 세울 수 없습니다. 이해와 관념·사상·주의를 따라 여기서 선이던 것도 저쪽에서는 악으로 규정됩니다. 이와 같이 자기 본위로 하는 행동은 자기 생각으로 아무리 좋은 일을 하든 좋지 않은 일을 하든 사사건건이 악한 일이며 남을 위해서 봉사적으로 희생적으로 하는 보살행은 일거수 일투족(一擧手 一投足)이 다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구공(俱空)의 자리에 들어가 보면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말도 그 절대적인 표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우주 천지의 모든 것이 큰 바람 한 번 만나면 꺼져 없어지는 물거품 같고 아침 이슬처럼 잠깐 동안 존재하는 초로인생(草露人生)인데 이런 것 저런 것이 얘기가 되지 않습니다. 구멍 뚫어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일체선법을 닦아라.」하신 말씀은 물거품 같고 이슬 같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중생을 위해서 무조건 남을 위해서 살아라. 그것이 보살행이다. 「저러면 어떻게 되고 이러면 불리하겠다」하는 모든 것이 보살의 입장이나 불교를 참으로 아는 이가 보면 이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던 도둑스런 생각, 원수스런 잘못된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說 義]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이 일체의 선법을 닦으라(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는 말은 곧 아무 생각 없이 응무소주해서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라는 뜻인데, 이런 대승사상은 소승경전(小乘經典)에는 안 나옵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까딱하면 이것이 다 망상이고 중생놀음이니 시방제불한테도 속지 않고 귀신도 이 사람 볼 수 없고 제불도 이 사람 마음 찾아 볼 수 없는 구공(俱空)의 자리에 들어간 것을 <응무소주>라 합니다. 중생들의 탐진치(貪瞋痴)도 없고 대보리를 증득하고 성불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서 해탈도를 닦을 것도 없고 생사를 윤회하는 것도 아니어서 생사열반을 다 초월한 자리입니다. 생사는 유심(有心)이고 망상이며 열반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없는 것도 없는 것, 그것이 구공입니다. 앞뒤가 끊어지고 시간공간이 없어진 절대자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사람이 여기에 낙착(落着)해서 떨어지면 그것이 바로 소승입니다. 생사열반이 없는 이 자리에서 열반이 생사고 생사가 열반이며 생사도 열반도 아닌 이 자리에서 일체에 걸림이 없이 중생을 제도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면 24시간 하루종일 일해도 피로도 모르고 잘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피로하고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설사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더라도 그 기쁜 생각도 오래 못갑니다. 기쁜 생각 뒤에는 반드시 싫어하는 마음이 꼭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마음으로 하는 일은 물론 나쁘지만 선심으로 하는 일도 오래 못갑니다. 선악심을 초월해서 오직 농사짓고 장사할 뿐입니다. 이것을 꼭 내가 먹을 것이란 생각도, 남만 먹을 것이란 생각도 없이 그저 부지런히 일해서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양식만 준비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부지런히 합니다. 이것이 보살행이고 대자대비이니 이것이 소승네의 열반과 다르고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는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고 강을 건너가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힐 수 없이 타는 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용이 있다면 제망중중(帝網重重)의 내용이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고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고 하여 이걸 무어라고 할 수 없어서 결국은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고 저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탐진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사생육도(四生六道)를 갖춘 것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어서 일체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그런 것을 중생이라 했고, 그러므로 여래께서 선법(善法)이라 하신 것도 선법이 아닌데 그런 것을 이름하여 선법이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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