尊重正敎分 第十二

 

 

復次(부차) 須菩提(수보리)야 隨說是經(수설시경)하되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하면 當知此處(당지차처)는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皆應供養(개응공양)을 如佛塔廟(여불탑묘)어든 何況有人(하황유인)이 盡能受持讀誦(진능수지독송)이리오 須菩提(수보리)야 當知是人(당지시인)은 成就最上第一稀有之法(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이니 若是經典所在之處(약시경전소재지처)는 卽爲有佛(즉위유불)과 若尊重弟子(약존중제자)니라

 

『그리고 또 수보리야! 이 경에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따라서 일러준다면, 마땅히 알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하늘·사람·아수라가 다 마땅히 부처님의 탑과 절같이 공경할 것인데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받아 지니어 읽고 외는 것이겠느냐?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니, 만일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께서 계신 곳이 되고 존경 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 되느니라.』

 

 

第十二 尊重正敎分 --바른 교법을 존중하다.

 

[科 解]

 

다음은 존중정교분 제12(尊重正敎分 第十二)입니다. 정교(正敎)라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정교이고 사교(邪敎)가 아니며 삿된 경전이 아니니 생존경쟁(生存競爭)의 원리나 적은 자본을 들여 많은 수익을 올리려는 경제원리도 아니고 남의 노동력을 착취해 가지고 부자가 되자는 개인주의도 아닙니다. 남을 나쁜 곳으로 인도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 사교(邪敎)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내 곳간에 잘 저장해 놓아도 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내가 점령하지 않으면 천지가 다 내 것이고 천지가 다 내 집이니 이렇게 마음을 쓰면 그 사람이 무슨 궁색한 일이 있고 그 사람이 주관을 해 가지고 안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부처님께서 중생을 도탄에서 건져 내는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 팔만 대장경 중에도 이 금강경은 더욱 귀중한 바른 법이므로 그래서 부처님의 정법을 존중하는 까닭을 말씀하신 귀절이란 뜻으로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바른 법이 들어 있는 경책(經冊)이야말로 이세상의 금은보화나 명예 권력으로 바꿀 수 없고 이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소중(所重)한 법이 담겨져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이며, 이 법을 말하는 법사는 더욱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처럼 존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경문(經文)가운데 이 경전을 받아서 지니고 읽고 외는 사람은 하늘 위 하늘 아래서 가장 으뜸이고 제일 희유한 법을 성취한 사람이므로 이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께서 계신 곳이고 10대 제자처럼 거룩한 어른들이 계신 곳으로 존중된다고 하셨습니다.

 

原 文 :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 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解 義] 수보리야! 「수설시경 내지 사구게등(隨說是經 乃至 四句偈等) 이경전을 설명해 주되 내지 사구게 네 글귀 열 여섯자만이라도 설명해 준다고 하면, 「당지차처 일체세간 천인아수라(當知此處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일체세간의 천당이나 인간이나 아수라 등의 온갖 중생들이 「개응공양 여불탑묘(皆應供養 如佛塔廟)」 즉 부처님을 모신 절이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에 공양하는 것처럼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며 공양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공양한다는 말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말하며 이 경을 다는 못하더라도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말하는 곳이면 가령 절이든지 강당이든지 냇가든지 그 장소에 천인 아수라들이 전부 어울려 가지고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법사는 우리를 지도해 줄 사람이니만큼 그것을 전공(專攻)해야지 다른 농사나 장사할 사이도 없고 전적으로 정법(正法)만 설명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처사(處士)거나 승려거나 불자가 그렇게 하려면 이 세상의 개인 사정, 곧 <나>를 잃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법 책임자가 되어 부처님 대신 행동하려면 비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남의 물건 소유권 행사나 하는 사람은 남을 제도 할 기회가 없으니 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몸뚱이조차도 내 버리고 나야만 아무 것도 없게 되는데, 없는 것까지 가지면 안 됩니다. 철두철미하게 가난한 그것이 <도>입니다. 천지를 집삼아 돌아다니고 지식층(知識層)이나 무식층(無識層)이나 같이 잘 놀고 거지떼 하고도 어울리면서 잘 놉니다. 위로는 천자를 호령하기도 하고 아래로는 거지들 하고도 잘 놉니다. 이것이 제일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다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교에서 높은 걸로 끝까지 높으려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부처님께서 지도하시는 것이 거지가 되어서 하시듯이 걸식생활(乞食生活)하면서 가장 높은 인천의 도사(人天導師)요, 제일 낮은 데서부터 제일 높은 데까지 무상도(無上道)의 도리로 하는 것이 그게 참된 인격자지 높은 것으로만 높아지는건 위험한 존재입니다. 자기가 높은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멸시하는 것은 얼마나 죄짓는 사람입니까? 자나 깨나 그 사람은 죄 짓는 사람입니다. 일체 중생을 소중히 여기기를 부처님께 하듯 하라는 것이고 심지어는 일체 존재 돌까지라도 필요없이 함부로 깨뜨리고 발로 차지말라는 것이 불교의 바른 가르침(正敎)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정교(正敎)가 실려 있고 인천(人天)의 도사(導師)가 나오는 진리가 이 열 여섯자 네 글귀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설법하는 곳이면 그 이상 더 거룩한 곳은 다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부처가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부처님 학교인 것입니다.

 

原 文 :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解 義] 『이 네 글귀만 수지독송(受持讀誦)해도 그 공덕이 이렇게 큰데, 하물며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 전체를 다 받아서 지니고 읽고 외우고 그 뜻대로 잘 받드는 사람이겠느냐』하셨는데, 여기서<다 받아서 읽고 외운다>(盡能受持讀誦)는 말은 돈이나 몇 푼 받기 위해서 뜻에도 없는 경문(經文)을 억지로 형식적으로 읽는 것과 같은 수지독송이 아니라, 청정한 신심으로 수지독송하는 것을 뜻합니다. 곧 第六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에서 말한 정신(淨信)으로 청정한 자성(自性) 자리에서 이 경의 뜻을 받아 지니고 외우고 읽고 그 뜻대로 받들어 행하는 것을 뜻하며, 남에게 설명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경을 독송하는 경우에도 그 뜻을 깨우치는 마음으로 읽어야 참으로 경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질문을 해도 막힘이 없고 갖가지의 온갖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맞추어서 각각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해 주어서 자기가 아는 것을 남김 없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경의 뜻대로 실천하도록 되어야 그것이 참 경 읽는 태도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稀有之法 若是 經典 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외우기까지 하는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으뜸으로 높고 또 가장 제일 되고 고금에 둘도 없이 신비하여서 뭐라고 말할 수 없고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그런 희유법(稀有法)을 성취한 사람이니라.』하십니다. 자기만 알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남에게 전부 설명해 주는 것이 경을 잘 안 것입니다. 이제는 무슨 질문을 해도 막히는게 없이 내용을 잘 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 과연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또 이제 인천이 받들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만일 이 경전이 있는 곳 금강경을 어디다 모셔 놓았다고 하면 곧 그 곳은 부처님께서 직접 계시는 것과 똑 같고 존귀한 부처님의 큰 제자들이 계신 곳과 같습니다. 그게 겨우 문자반야(文字般若)지만 그래서 흰 종이에 먹칠해 놓은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것이 곧 부처가 되는 방법이고 성불할 길을 찾아 낼 수 있는 문서이니 그곳이 바로 부처님 석가여래께서 계시는 장소란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탑을 모시거나 할 때는 그 속에 반드시 경전을 모십니다. 아무 보물(寶物)도 없이 경전을 인쇄해 가지고 탑 안에 모셔 놓은 그런 탑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기 때문입니다.

 

 

[說義]

 

지공(至公)이 정법(正法)

내가 전에 어떤 절에 있을 때인데 윤보산(尹寶山)화상이 나와 만나서 얘기하다가 중이 됐습니다. 그 분은 순전히 윤씨들 기독교 집안의 종가(宗家)로서 호랑이 집이고 풍신(風身)도 잘나고 학문과 덕망이 높고 전에 일본사람들의 수양전집(修養全集) 25권을 거의 다 외운 천재입니다. 우선 집에 상의를 해서 허락되도록 해야 할테니 글을 하나 써 달라고 종이를 내 놓는데 보니까 윤가용선(尹家用箋)이라 쓴 자기네 전용 용지였습니다. 내가 거기다 뭐라고 써 놓았는고 하니 「公公至公物 何必尹家用 尹家人非公 天公地亦公 因何人不公 欲識至公人 此知尹家用」

공공지공물(公公至公物)을 하필윤가용(何必尹家用)이나, 공공하고 공공하여 지극히 공변된 물건을 어찌하여 윤가집 쓰는 것이라 이름을 했는가 윤가용비공(尹家用非公)이니 윤가 사람들은 공변되지 못하구나, 천공지역공(天公地亦公)한데 하늘도 공변되고 땅도 공변되어 천지만물이 다 공변된데 인하인불공(因何人不公) 어찌해서 사람만이 공변되지 못한가, 욕식지공인(欲識至公人)인댄 지극히 공변된 생활을 하는 게 누구인가, 날더러 누가 물으면 차지윤가용(此知尹家用)이라 이 윤씨네가 이 종이를 쓰는 것이라 하겠다. 윤가를 욕하다가 끝에 와 가지고 지공한 사람이 누구나 윤가네가 쓰는 종이라고 대답하니 이게 아주 멋지다는 평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은 탁 트여서 벗어 납니다. 천지만물이 제 멋대로 있는 것을 왜 사람이 침략을 하느냐? 서로 잡아 먹으려고 하느냐? 그래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한계를 막고 삼팔선 같이 국경이 생기고 민족이 모두 달라지고 하니 이게 사람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것을 바로잡는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바른 법이고 정교(正敎)입니다. 누에가 제 입으로 실을 내 가지고 번대기가 되어서 고치 안에 가치듯이 사람도 전부 천당이나 지옥이나 제가 만들어 가지고 구속되고 얽혀 있으므로 이런 윤회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울 수 있도록 사람을 지도하는 게 정교(正敎)입니다. 우리가 다른 경을 다 못 배웠더라도 금강경만 배우면 십년 경 본 것처럼 경 보는 눈이 열린다고 하여 경안(經眼)이라고 그러는데, 이 금강경의 뜻을 바로 알아서 마음이 열리면 곧 부처님의 바른 법, 정교(正敎)에 바로 들어서게 됩니다.

 

정법을 닦는 인천도사(人天導師)

바른 법이 들어 있는 경책(經冊)을 마땅히 소중(所重)하게 여기고 이 법을 설명하는 법사(法師)도 역시 다시 없이 공경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탑이나 부처님 모셔 놓은 법당이나 같이 할 것이니 그렇게 해야 할 귀중한 존재라 그런 뜻입니다. 하물며 또한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 전체를 받아 가지고 또 읽기도 하고 끝까지 외우기도 하고 그랬다면 얼마나 그 사람을 우리가 받들어야 하겠는가. 천자도 꿇어 엎드려서 어깨나 허리를 밟고 법상에 올라가도록 받들고 하는 것은 복 지으려고 그렇게 합니다만 양무제(梁武帝) 같은 그런 굉장한 영웅호걸도 그런 짓을 했습니다. 이런 금강경 . 화엄경(華嚴經) 같은 법을 잘 알고 보니 우리 속인은 아무리 국왕이 아니라 천자가 된다 해도 죄악투성이니 수도하는 도인을 한번 존경하여 받들어야 하겠고 큰 인연을 맺자는 뜻입니다.

신라 . 고려때만 해도 중은 누구에게 인사르 하지 않는 정도로 존중되는 불교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이백오십계(戒)를 받아서 비구승이 되기 전에 십계를 받아서 시미승(沙彌僧)만 되어도 그 날부터 이런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승려가 될 재질(才質)을 검사(檢査)하는데 신체검사(身體檢査)도 하여 몸이 어디 병신(病身)이 아닌가도 조사하고 확실히 도를 통할만한 소질이나 중생구제(衆生救濟)를 할 수 있는 기개(氣槪)가 있는가를 보아서 엄격한 선발(選拔)을 해서 득도식(得度式)이라고 중 만드는 의식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부모가 다 와서 앉아야 하고 국왕이 앉고 대신도 앉고 그 때는 수천명 국민이 옵니다. 경을 잘 설법하는 이가 나오고 계사(戒師)가 나오고 이래 가지고 행렬을 갖추어서 장엄한 형식을 갖춘 뒤에 사미승 견습생(見習生)이 됩니다. 처음에는 부모도 사랑해서 키우던 자식을 남산 바윗돌만 쳐다보는 건건무미(乾乾無味)하고 적적한 산 중에 들여보내니까 아무리 성불이 좋아서 가기는 가고 보내긴 하지만 세상에 살면 가끔 떡도 먹고 불고기도 먹고 곰탕도 먹고 냉면도 먹고 할건대 그것저것 다 못먹고 파 . 마늘 들은 음식까지도 못 먹고 매일 시레기죽이나 먹고 시달리며 재미 없는 세상이나 보낼테니 참 서러운 일입니다. 이런 세상으로 보내니까 부모들도 울고 아들도 역시 부모 눈물에 같이 울면서 청하면 나중에야 정식으로 승낙합니다. 그러면 또 국왕한테 가서 정부에 대해 내가 중 노릇 하게 되어 국민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됐으니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청합니다. 내가 이제 중 노릇 잘 해 가지고 국가은혜를 갚을 것이고, 부모은혜 세상은혜를 갚을 것이고 스승의 은혜를 갚고 사대은혜(四大恩惠)를 갚을 터이니 호적을 제적(除籍)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호적을 정식으로 제적하고 비국민(非國民)이기 때문에 국민으로 취급을 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령 국법을 위반하더라도 내나라 백성이 아니니까 승단(僧團)에서 처벌하는데,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고 하여 이 네가지 죄를 범하면 승단(僧團)에서 축출(逐出)한 뒤에야 국법으로 구속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출가하면 맨 먼저 사미(沙彌)의 십계를 받습니다. 열 가지 계는 살생(殺生) . 도둑질(偸盜) . 사음(邪?) . 거짓말(妄語) . 때아닌 때 밥먹는것(非時食) 등의 열 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계만 받으면, 사미승(沙彌僧)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벌써 국왕한테 절 안하고 부모한테 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님들 자리에는 임금이나 천자가 와도 맨 나중에 된 사미승 끝에 앉게 합니다.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와도 역시 끝에 앉힙니다. 왕이나 옥황상제라 해도 오욕락(五欲樂)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인들이고 범부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태국에서는 스님이 되면 사미십계 받는 그날부터 그 나라 국왕이 절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그에게 절합니다. 이제는 자식이 아니고 국민도 아니고 십계를 받은 그 시간부터 천상(天上) . 인간(人間)에 제일 귀중한 존재고 가장 죄없는 존재이고 가장 깨끗한 인물이 되었음을 존중하려는 것입니다. 부모 . 국왕도 이제는 내가 제도하는 중생이란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성불하신 뒤에 인도 천지를 다 돌고 맨 마지막으로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이 아들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싣달다태자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부룰 수가 없어서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세존이시여」하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신라 고려시대만 해도 승려가 이렇게 존중되었는데 십계는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사음(邪?)이라는 것은 성욕에 대한 생각만 해도 파계(破戒)라고 그럽니다. 여자의 근처에 몸뚱이만 대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태국국사(泰國國師)가 작년에 태국부대 위문차 왔다가 갔는데 그 태국부대 지휘관들이 하는 소리가 「우리가 본국에 있으면 국사스님 얼굴 한 평생 한 번도 뵙기 힘드는데 우리가 한국에 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보고 종일 모시고 다니기도 하고 우리 먹는 것 가지고 공양도 올리고 그랬으니 참 우리는 복이 많습니다.」하며 기뻐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칠십이 넘은 노장들이 돌아갈 때는 비행기 회사에 요구하기를 「내가 지금 태국에 ? 텐데 젊으나 늙으니 여성과 한 자리에 앉히면 비행기를 안 탄다. 또 차장 같은 여자들이 우리한테 음식을 가져와도 안 된다. 그러니 이런 비행기가 어디에 있느냐?」고 고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이 벌써 십계 받을 때 받은 것입니다. 늙어 죽어도 그렇고 내생에도 그럴 것이고 성불 다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될 게 아닙니까?

부처님 말씀에 성욕 같은 것이 두가지만 더 있어도 성불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은 한 번 결심하고 내던지면 돈을 봐도 욕심니 안 생기고 또 좋은 부귀 공명, 높은 지위 그까짓 것 헌신짝처럼 볼 수 있지만 비구니가 미남자를 볼 때 생각이 아무래도 흔들리고 또 이제 비구가 미녀를 볼 때 아무래도 한 번 더 쳐다보고 안 보는체 해도 옆눈으로라도 한 번 슬쩍 봅니다. 그러니까 끊기가 참 어려운 것이어서 이놈 같은 것이 두 가지만 있다면 성불할 사람 하나도 없다고 석가여래께서 고백하신 겁니다. 비구니는 평생 인사도 못합니다. 같이 있지도 못하고 또 큰 수도원 같은 데서 비구니들이 설법듣는데도 따로따로하고 비구승들과 한데 앉히지 않습니다. 그래 이제 도승들이나 법에 따라 비구니들을 교화하지 그렇지 않고는 비구와 비구니는 서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설사 배를 타도 한배를 타지 않아야 원칙입니다. 이것이 다 붗님의 바른 법을 깨달아 온 중생을 바르게 지도하고 국가사회에 정신적 기둥이 될 인천(人天)의 대도사(大導師)를 높이 존중하여 많이 배출(輩出)하자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을 짓는 일반 대중이 많이 생기면 자연히 나라의 복이 되어서 나쁜 업은 사라지고 부강(富强)하게 되리라는 신념(信念)입니다.

 

한국 선지식(善知識) 세계에서 으뜸

이렇게 정법(正法)을 존중하여 많은 선지식(善知識)과 인천도사(人天導師)가 나왔지만 그 가운데 특히 석가여래 가신 뒤 삼천년 동안에 부처님을 완전히 대신해서 성도한 이는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인도에도 없고 오직 한국의 원효대사(元曉大師)밖에 없다고 일본사람들이 저희끼리 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도 선지식이나 도인이 나왔지만 어느 누구도 원효대사에 비하면 반쪽도 안된다는 겁니다. 한국에는 사명대사(四溟大邪)도 있고 아무 지도 없이 대각(大覺)을 해서 성불한 이가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불교 유학생(留學生)이 중국으로 갔었는데 중국사람들이 못 당합니다. 저번에 말한 왕화산(王火山) 스님의 경우처럼 중국 중운 그렇게까지 다부지게 하지 못합니다. 중국에 건너가기만 하면 우리가 항상 일 등을 했고 우승을 했으며 인도까지 건너갔다가 오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훌륭한 분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단합만 되면 세계 제일의 민족이 되고 우리 삼천만이 불법으로 무장해서 나서면 삼십억 되는 인류는 하루아침거리 밖에 안됩니다. 유엔총회니 연합총회니 하지만 지금 모양으로 도둑놈만 몰아 놓은 총회 만날 있어 봐야 소용 없습니다. 우리 한국이 불교의 진리로 뭉쳐서 세계를 교화해야 평화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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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福勝分 第十一

 

 

須菩提(수보리)야 如恒河中所有沙數(여항하중소유사수)하야 如是沙等恒河(여시사등항하)하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諸恒河沙-寧爲多不(시제항하사-영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但諸恒河(단제항하)도 尙多無水(상다무수)온 何況其沙(하황기사)리잇가 須菩提(수보리)야 我今實言(아금실언)으로 告汝(고여)하노니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以七寶(이칠보)로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하야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得福(득복)이 多不(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수지사구게등)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而此福德(이차복덕)이 勝前福德(승전복덕)이니라.

 

『수보리야!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 수와 같이 그렇게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모든 항하만 하더라도 수 없이 많사온데 하물며 그 모래이겠나이까?』

『수보리야! 내 이제 너에게 실다운 말로 이르노니,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저 모든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다 보시했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만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일러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 말한 복덕보다 뛰어나리라.』

 

 

第十一 無爲福德分-(무한대의 절대 복력

 

 

[科 解]

제11분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은 하는 생각 없이 무심(無心)으로 중생을 위해 짓는 복이 제일 거룩하고 비교할 수도 없이 크다는 것을 말씀하신 장(章)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보시하고 아무리 좋은 물질을 보시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우리 마음자리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물질에 머무는 한 그것은 생사법(生死法)이고 중생심의 세계이므로 이것은 참다운 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本性)은 이와 같은 물질적 현상을 다 초월했으며 이와 같은 물질은 곧 물질이 아니고 현상이 현상이 아닌 본체(本體)를 깨닫고 번뇌망상의 세계로부터 영원불멸의 진실세계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으로부터 보리열반(菩提涅槃)의 광명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마침내 생사를 해탈하고 우주의 주인공(主人公)으로서 대자유 대자재(大自在)를 성취하게 하는 이 금강경의 진리를 남에게 가르쳐 주는 공덕은 어떠한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것임을 말씀하신 대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水 何況其沙

 

[解 義]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항하의 모래가 많으냐? 적으냐?」하고 물으십니다. 항하(恒河)는 지금의 인도 갠지스강을 말하며 중국의 양자강(揚子江)·황하(黃河), 미국의 미시시피강, 이집트의 나일강 등과 함께 세계적인 큰 강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리 수로 따지면 한 만 리나 되는 큰 강입니다.

얼마 전(1955)에 지금 종정 스님(河東山宗正), 통영(統營)에 계신 효봉 스님(曉峰) 그리고 몇 분 스님과 같이 인도에 갔을 적에 항하를 기차로 지나 본 일이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옆에 모래밭이 깔려 있었고 모래밭의 폭만 십 리도 더 되는 것 같았는데 그 강 모래는 아무리 손아귀 힘이 센 사람이라도 모래를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전부 빠져 버리고 땀에 붙은 모래만 남는다고 합니다. 쥘 수가 없을 정도로 보드랍고 먼지가루처럼 잘기 때문입니다. 강을 따라서 이런 고운모래가 한 만리 평야에 뻗쳐 가지고 밀가루 헤친 것보다 더 보드라워서 맨발로 다녀도 참 편리하게 생겼습니다. 이런 모래의 수는 생각해 볼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항하강의 모래가 얼마나 많으냐, 많지 않으냐?」 그것을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릴 때는 셋을 손가락으로 몇 번 곱아 보고서야 알지만 좀 커지고 나서는 척 보면 대번에 알듯이 나한님들은 욕심이 없어져서 마음이 맑아졌고 도가 높아졌으므로 현상계를 한 번 보면 다 아시는데 수보리존자는 나한 중에서도 제일가는 나한이므로 항하강의 그 모래 수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지만 한 생각에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 항하강에 가득한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또 있다고 하면, 예컨대 이 같은 항하사를 다른 지구·금성(金星)·화성(火星)·목성(木星)에 까지 확대하여 「항하사 모래 수 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고 하면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얼마나 되겠느냐?」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수보리 존자께서 여쭈었습니다. 「참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한 항하의 모래수도 그 수가 한량없는데 그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 수는 이루 다 말할 수나 있겠사옵니까?」 만일 전 인류가 다 모여서 한 항하의 모래 수를 손으로 헤아린 다고 하면 백년을 세더라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래 수만 한 항하강의 모래는 무한수(無限數)일 것이므로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我今實言 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解 義]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내가 이제 참 진정한 말로 네게 이르노니 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금·은·호박·진주 등의 七보를 앞에서 말한 항하강 모래 수처럼 많은 항사 사장의 모래 수 만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한다 하면 그 복이 많겠느냐? 안 많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작은 일이지만 남이 목마를 때 찬물 한 그릇만 떠 주어도 그 공덕으로 세세생생에 큰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굉장한 칠보를 보시로 다 주었으니 그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보리 존자께서 『참 굉장합니다.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하고 사뢰었습니다.

 

原 文 :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解 義]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이 금강경 가운데 사구게(四句偈)만 받아 가졌다가 남을 위해 해설해 주면, 예컨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등의 법문(法門)을 제대로 일러주면 그 복덕은 앞에서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것보다도 그 공덕이 훨씬 더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령 이것의 여러 억천만배 이상 무한대로 벌어져 있는 우주라 하더라도 내 몸뚱이의 털구멍 속에 그것을 전부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방법이 사구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성을 깨달아서「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산을 대할 때나 물을 대할 때나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을 대할 때 크다 작다 분별이 없으며 산이나 물이나 분별이 없이 대합니다. 육도만행(六道萬行)을 행해도 무심으로 하고 모든 것을 다 하는 것 없이 하는데, 결국은 부처님께서 자꾸 금강경 수지독송하라고 하시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남에게 이 정법(正法)을 해설해 주는 것이 참말로 그 사람을 영원히 위하는 것이고 그게 참말로 자기의 마지막 복과 지혜를 성취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질도 보시하고 몸뚱이도 보시한다고 해도 이 경전에 대한 것을 일러 준 것만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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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嚴淨十分 第十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대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昔在然燈佛所(여래석재연등불소)하야 於法(어법)에 有所得不(유소득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在然燈佛所(여래재연등불소)하사 於法(어법)에 實無所得(실무소득)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菩薩(보살)이 莊嚴佛土不(장엄불토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莊嚴佛土者(장엄불토자)는 卽非莊嚴(즉비장엄)이니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이다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諸菩薩摩訶薩(제보살마하살)은 應如是生淸淨心(응여시생청정심)이니 不應住色(불응주색)하고 生心(생심)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生心(생심)이요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而生其心(이생기심)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譬如有人(비여유인)이 身如須彌山王(신여수미산왕)이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身(시신)이 爲大不(위대불)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甚大(심대)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佛說非身(불설비신)이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얻은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실로 얻은 법이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안 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오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오며 그 이름이 장엄이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또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쓸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말씀하시어 큰 몸이라 이름하시었기 때문이옵니다.』

 

 

第十 莊嚴淨 十分

 

[科 解]

제10분은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인데 장엄은 꾸민다는 말입니다. 요새 말로 도시미화(都市美化)한다, 곧 가로수(街路樹)를 심고 길을 넓혀가지고 여러 가지 치장을 잘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정토(淨土)는 부처님 세계 곧 불토(佛土)를 가리키는데, 우리 본심 자리가 점령하고 있는 전체 우주를 흙 토(土)자 하나로 말한 것입니다. 현상계는 흙이 대표적이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불토(佛土)라 그러면 한 부처님께서 깨달아서 점령하고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정토를 장엄한다 함은 불세계를 미화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중생들은 장엄이 안 되어 있어서 모두 오줌·똥·고름·썩은 거름·송장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썩은 더러운 것을 먹고 험악하게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승불교에 초과(初果)·이과(二果)·삼과(三果)·사과(四果)를 증득해 올라가면 차차 이 세계가 정화됩니다. 더럽고 험한 것이 없어지고 차차 먹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까 대·소변도 필요 없어지고 그러므로 해서 몸이 점점 환화공신(幻化空身)으로 되어 갑니다.

그래서 보살이 52위(五十二位)를 증득(證得)해 올라감으로써 십신보살(十信菩薩)로부터 십지보살(十地菩薩)로 자꾸 올라갈수록 그 복과 지혜가 더욱 더 많아져서 계를 어렵게 지키고 보살행(菩薩行)을 하는데 따라 세계가 점점 장엄 미화되어 올라갑니다. 전에 말하던 28천(二十八天)의 하늘도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수명(壽命)이 길고 인격이 고상하며, 천상의 환경도 올라갈수록 점점 화려해져서, 인간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화려한 세상으로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 위로 올라갈수록 복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차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전부 얼굴도 더 거룩해지고 거대한 국토가 미화되어 올라가고 장엄이 되어 올라갑니다.

우리가 사는 여기는 오탁악세(五濁惡世)이니 다섯가지 욕심을 탐내서 죄만 짓고 서로 살육(殺戮)을 안하면 안 될 이런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마음 한 번만 돌이켜서 정화를 해 놓으면 그때는 세계가 또 달라져 가고 산천초목(山川草木)까지 전부 달라져 갑니다. 거기는 일체 중생의 마음도 정화(淨化)가 되어 거룩하게 삽니다. 그러나 인간세계의 장엄은 뭐니 뭐니 해도 극락세계에 비하면 냄새가 나고 사람 자체부터 추하고 못생겨서 극락세계의 변소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세계를 장엄한다 함은 장엄하는 장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심(無心)에서 이루어진 장엄 아닌 장엄이며, 하는 것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이끌어 제도한다는 뜻으로 장엄정토(莊嚴淨土)라 했습니다.

 

原 文 :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然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또 같은 뜻을 물으십니다. 『여래께서 아득한 과거세(過去世)에 연등부처님 앞에서 교화를 받고 보리심을 일으켰는데 그때에 내가 어떤 법을 얻은 바가 있었느냐,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은 법이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 여쭙니다. 『아니옵니다. 부처님,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었다는 것은 말뿐이지 실제로 아무것도 얻으신 법이 없습니다. 얻을 수 있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법은 없사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범부가 보기에는 석가여래께서 모든 것을 새로 깨달았으니 그것은 얻은 법입니다. 인생이란 밥먹고 똥싸다 죽는 것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부처님을 만나서 「확실히 내가 죽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우주의 본 바탕이요, 절대자유(絶對自由)의 존재로구나, 완전하고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존재로구나」하는 것을 부처님 설법(說法) 듣고 믿게 되었고 과연 그렇겠구나하는 도리를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연등불(燃燈佛) 처소에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그 후부터 열심히 수도를 하고 난행고행(亂行苦行)을 하고 보살행(菩薩行)을 닦아서 오늘날 성불(成佛)했노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뒤 40년동안 항상 이렇게 설법하셨는데, 40년이 지난 지금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시면서는 시치미를 떼고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음이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근본자체는 견성(見性)하기 전이나 그 뒤나 항상 마찬가지이고 부처님 만나 볼 때나 안 만나 볼 때나 그 자체는 아무런 증감(增減)도 없어서 지옥(地獄)에 가 있을 때나 굼벵이 버러지로 있을 때나 그 자리는 여여(如如)한 자리로서 아무도 엿볼 수 없고 주고받을 수도 없고 깨칠 수도 없고 미할 수도 없는 자리이지만 중생은 그런 줄을 모르기 때문에 지도자(指導者)를 만나서 그 법을 의지하지 않으면 믿을 수도 없게 되고 깨달을 수도 없게 됩니다.

연등부처님께서 설사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셨다 하더라도 석가모니 자신이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이 닦아서 깨달았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어떤 법을 가지고 와서 닦은 것은 아니며 애당초부터 없던 것을 연등부처님한테 비로서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불(成佛)을 다 마치기 전 까지는 연등부처님의 가르침을 버려서도 안 되고 마음에 기억을 해서 잘 간직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하는데도 마음에 의지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을 세워 가지고 염불(念佛)이나 참선(參禪)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도 과거에 아무데도 의지하지 않고 성불을 하신 것은 아니므로 얻은 것이 전혀 없다고는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내가 연등불한테 아무것도 얻은 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겉으로 봐서는 거짓말한 것과 한가지입니다. 확실히 연등부처님을 의지해서 발심했고 그 지도에 의지해서 성불하신 것인데 「얻은 것이 없다(無所得)」고 하심은 마치 제자가 스승을 배신(背信)하여 전부 「나 혼자 배웠지, 아무한테도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께서 「안 될 말씀이십니다. 연등부처님 앞에서 깊은 것이나 얕은 것이나 참된 법이나 거짓된 법이나 얻은 바가 조금도 없습니다.」하셨고 부처님께서도 「너의 말이 옳다」고 긍정(肯定)하셨습니다. 체와 용이 둘이 아닌(體用不二) 본체 자리의 본래청정(本來淸淨)한 본바탕인 마음자리를 강조(强調)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 자체가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시공(時空)을 초월한 자리임을 알고 이제부터는 술이니 고기니 재산이니 가정·국가·민족이니 하는 일체의 집착·분별·망상을 초월하여 공부를 완전하게 마치기까지는 달리 한 번 해봐야 할 것입니다. 마치 장래를 위해서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조국과 가정을 버리고 먼 외국으로 유학(留學)가는 것과 같이 불교가 본래는 구세(救世)의 종교지만 내가 먼저 도(道)를 구하여 알 때까지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산중수도(山中修道)하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본체로 봐서는 영원상주(永遠常住)의 존재니까 닦는다고 해도 안 되고 닦으려는 마음을 내면 벌써 때 묻히는 것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았다 해도 안 되는데 더군다나 깨치지도 못한 사람이 이걸 닦는다면 그것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더 깨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범부로서 모순(矛盾)된 방법에 의해서 깨치는 길이 묘하게 있기 때문에 귀신도 모르게 지도하는 길이 있는 것을 나중에는 필경 알게 됩니다. 깨친다는 것도 기묘(奇妙)한 일이고 깨쳐 놓고 봐도 참 기묘한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실상자리(實相), 마음자리를 봐서는 이렇다 저렇다가 다 끊어져서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줄 것도 없지만, 범부로서 학문이니 과학이니 철학이니 유물(唯物)이니 유심(唯心)이니 하고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 사상을 만들고 개념을 지어서 미혹(迷惑)되어 있다가 불법에 들어와서 상대세계(相對世界)의 생사법(生死法)을 초월해서 차차 도가 높아지면 마음의 터울이 단계적으로 굳어 올라갑니다. 그래서 1학년 2학년 구별이 있듯이 초지보살(初地菩薩)·이지보살(二地菩薩)하여 처음 깨달아서 부처가 되기까지 크게 나누어도 무려 52위(位)의 계층(階層)이 있는데 그것이 다 무엇에 의지해서 하긴 합니다. 깨달은 본체 자리에서 보면 계급이 있을 수 없고 닦을 것이 없지만 다겁(多劫)으로 오면서 지어 온 업습(業習)을 닦아 없애는 데 따라서 그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따라 점점 아는 것도 더 많아지고 신통(神通)이 늘어납니다. 이렇게 차츰차츰 닦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모두 다 무엇에 의지해서 배우고 닦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얻은 법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이와 같은 보살인위(菩薩因位)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꿈속에서 거짓으로 있었던 일이고 실제로 실상으로는 없는 것이란 말씀이신 것입니다. 내가 본래 얻은 것이고 연등부처님 만나 뵙기 전부터 내게 본래 있던 것이므로 그것은 연등불한테 얻은 법이 아니니 그래서 소득(所得)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解 義] 『수보리야! 그러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거룩하게 교화하여 불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생각이 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교화하여 불토를 장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름이 장엄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는 장엄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하고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장엄불토(莊嚴佛土)란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함으로 해서 무심한 것이 가장 큰 복을 짓는 것을 뜻하니, 복의 근본이 무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은 우주를 자유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곧 무심입니다. 중생들은 이와 반대로 유심(有心)하기 때문에 범부중생이니, 유심이라는 말은 소유욕이고 점령이고 욕심입니다.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자꾸 없어져 가고 욕심을 부리면 망해 가고 욕심을 덜면 부자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욕심만 초월해 보십시오. 먹을 것도 넉넉해집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경제가 곤란하다 해도 서울 생활수준을 보면 지금 불란서 파리나 영국 런던과 같이 하는 이가 많습니다. 물질이 없는 게 아니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국가사회를 위해서 일을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뼈 빠지게 농사를 짓게 되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문 적게 먹고 저기 있는 것 여기 갖다 주고 여기 있는 거 저기 갖다 주고 하루 밥 세끼 있으면 그만입니다. 또 대통령은 온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살피어 제가끔 뜻에 맞도록 해주어서 모든 분야가 잘 발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욕심을 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국도 장엄불토를 해야 하고 남북통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욕심으로 되는 것이냐 하면 무심함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심이라 해도 작심(作心)으로 하기는 하지마는 무심입니다. 천당도 올라가면 28천(二十八天)이 있는 데 그것도 다 욕심이 적고 복을 많이 심은 정도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보살은 무심하다 보니 장엄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지 않고 무심으로 하는 장엄이기 때문에 극락세계(極樂世界)같은 굉장한 장엄을 합니다. 극락세계의 장엄은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장엄입니다. 극락세계를 가보면 다이아몬드 나무가 있고 다이아몬드 잎이 열고 모두 금·은·칠보로서 도로가 장엄되고 팔공덕수(八功德水) 못이 있는데, 바닥에는 금·은·칠보로 된 모래가 깔리고 잔디가 있고 그 물속에 들어서면 키가 작은 사람은 작은 대로, 큰 사람이 들어서면 큰 대로 다 알맞게 물이 되고 백 명이 한 번에 들어가도 키가 작고 큰 것을 따라 모두 다 목욕하기 적당한 높이로 또 물이 찹니다. 발목쯤 닿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발목쯤으로 물이 내려가고 허리쯤 왔으면 하고 생각하면 곧 허리쯤으로 올라오는 그러한 자유신통한 연못입니다. 도로에 있는 가로수(街路樹)도 서울이나 영국 런던이나 워싱턴 뉴욕 같은 시가를 극락세계에 비하면 변소도 안 될 정도의 장엄이 경전에 쓰여 있습니다.

삼국시대 신라 고려의 문화가 그렇게 발달하고 불교의 예술이 극치(極致)에 이르렀던 것도 타방세계(他方世界)부처님세계의 굉장한 장엄을 경에서 그대로 보고 구상(構想)하고 설계를 하여 절을 짓고 탑을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절을 짓고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는 경우에도 정신을 일념으로 모아서 무심한 경지에서 했기 때문에 석굴암(石窟庵)같은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경 주제(主題)로 되어 있는 운하주(云何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에 대해서 「마음을 어디다 두며 마음을 어떻게 먹으며」,「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항복받으며」하는 말씀인데, 마음을 어디다 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어떻게 먹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가진다 해도 틀린 말입니다. 마음은 마음이지 그걸 두려고 하며, 가지려고 하며, 먹으려고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하라 「아무데도 주하지 말라」 주한다는 생각조차 내지 마라. 아무데도 주하지 않는 그게 본래 주이고 또 본래의 그 자리에 주하라 그런 말입니다. 내 본심자리는 생각을 내면 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망상이 죽 끓듯이 끊으니까 일체 만상(萬像)에 색신(色身)이니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전부 주하고 의지해 가지고 집에 주하고 남편한테 주하고 아들딸한테 의지하여 모두 거기에 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망상을 다 항복 받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 전체의 대의(大意)입니다.

이 망상을 항복받는 게 불교공부인데 산중(山中)의 절에 있으면 요 근래까지도 그런 실례를 많이 들었습니다. 공부하다가 흔히 노루나 토끼가 와서 도망가지 않고 옆에 와 있습니다. 나중에는 정이 들어 안 가려고 하는 정도입니다. 얼마 있다 다른 절로 가려고 하면 자꾸 따라옵니다. 그러면 사람들한테 붙들릴 거고 그래 돌멩이질을 하고 막 야단을 치고 이러면 또 눈을 끔벅끔벅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올라갑니다. 올라갔다가 자꾸 내려다보다가 그만 또 뛰어 내려옵니다. 그래 그놈 잡아가지고 온갖 설교를 해서 타이르고 「네가 여기 내려가면 잡혀서 죽으니까 너희 동무하고 놀아라」 그래도 잘 가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몽둥이로 때려 주고 돌멩이로 엉덩이를 한번 되게 때려 주면 그때는 안 옵니다. 옛말에「불탐이면 야식 금은기」(不貪 夜識金銀氣)라고 하여 탐심이 없으면 그믐밤에 금과 은의 서기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해면 조간 미록유」(遠害 朝看?鹿遊)라고 하여 아무 해물지샘(害物之心)이 없으면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나가도 사슴과 노루가 뜰 앞에서 자고 사람이 나와도 안 달아납니다.

이런 마음 공부하는 것이 보살장엄(菩薩莊嚴)입니다. 국토를 이렇게 장엄하여 악한 짐승도 악한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집니다. 내 마음이 완전히 그렇게 청정해지면 다른 것은 다 모두 내 마음의 그림자니까 따라서 다 청정해집니다. 이렇게 공부를 자꾸 해서 응무소주하는, 주하지 않는 보리(菩提)의 마음을 깨쳐 가지고 견성(見性)해 가지고 항복기심(降伏其心)을 해서 해물지심(害物之心)이 없어지고 춘삼월(春三月)에 눈 녹아 가듯이 온갖 욕심이 사라지고 이 세상이 참말로 있는 것인 줄 알고 허덕대는 마음, 이런 마음이 자꾸 눈 녹듯 얼음 녹듯이 녹아 내려갑니다. 그래서 불성자리만 드러나서 서로 해롭게 할 그런 일이 없으니까 이 세계가 차차 극락세계가 되어 가는 겁니다. 극락세계에도 새가 있고 나무가 있지만 모두가 불보살의 화현(化現)이어서 축생 그대로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나 보살님들이 불토(佛土)를 장엄한다 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니 그 마음에 한 점의 티도 없이 청정하므로 그 거룩한 마음의 광명이 장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사바세계에서 법당(法堂)에 단청(丹靑)하고 남대문에 단청하듯이 울긋불긋 오색 칠하는 게 아니고 궁전을 짓고 도로를 닦고 하는 게 아니며 오직 무심만 하면 그게 곧 장엄이고 장엄 안 하는 걸로 장엄하는 것을 장엄이라 이름하여 부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原 文 :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 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解 義] 부처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들은 뻑뻑이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다.』 하셨는데 무심한 것, 곧 청정심이 드러나도록 수도를 하고 그래서 견성(見性)하자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전생의 과거업(過去業)이 있어서 처음 견성한 사람으로서는 아무래도 업이 들락거립니다. 그러니 아주 본성(本性)에 깊이 들어서면 모르지만 이제 처음으로 초견성(初見性)쯤 해서는 고운 여자는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행동만 안 하지 그런 것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또 당부하시느라고 「이렇게 청정심을 내라」고 하신 것이니 이런 것은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 선호념제보살(善護念諸菩薩), 곧 「모든 보살들을 잘 당부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설교할 때도 내가 잘하거니 남모르는 소리를 하거니」 그런 생각이 있으면 불교를 설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소견대로 틀렸거나 잘 알았거나 얘기한 것이고 또 듣는 사람도 들어서 부처되는 길을 확실하게 바로 알기만 하지 누구한테 들었다 할 필요도 없고 다만 바른길 그대로 바로 알아 가지고 바로 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정심」,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불응주색(不應住色)하고 생심(生心)」하라 하셨는데, 나는 여기다 토를 답니다. 보통은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뻑뻑이 색에 주하여 생심(生心)하지 말며」 이렇게 새기는데, 나는 색에 주하지 말고 생심하라. 「마음을 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생심」위에 「하고」토를 달아서 해석합니다. 「네 소유 재산 있거든 내 재산이라 생각하지 말고 있는 사람에게 주지 말고 없는 사람에게 주라」 그 말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도 같은 이유로 「뻑뻑이 마땅히 주한 바 없이 어디고 마음이 걸린 바 없이 조건 없이 마음을 내어서 보살행을 하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고 청정한 마음을 내어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정한 마음자리만 깨달아 가지고 견성했다 하여 가만히 있으면 나한(羅漢)·소승(小乘)이 되어서 거기에 굳어 가지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하기를 싫어하게 되고 그러면 불과(佛果)를 증득(證得)할 수 없고 아무리 해 봐야 소승나한(小乘羅漢)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만일 뻑뻑이 마땅히 색에 주하지 말고 생심하라(不應住色 生心). 또한 성향미촉법에 주하지 말고 생심하라(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색에 주해서 생심하지 말고」 이렇게 새기는 경우에는 나한들 모양으로 염세주의자(厭世主義자)가 되어 가만히 정적(靜寂)만 지키고 앉아서 침공체적(沈空滯寂)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허공처럼 빈 것, 진공에 가라앉고(沈空), 적적(寂寂)한데 체했다 고요한데 걸렸다(滯寂)는 뜻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행(菩薩行)은 천당 지옥으로 중생을 쫓아다니며 제도(濟度)해 주고 아무 보수(報酬)도 생각 없이 하면 그것은 안 한거나 한가지고 안 한 것도 아니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자꾸 정적(靜寂)만 지키려 하고 어디 가서 설법(說法)도 하고 이 일 저 일 돌아다니다 보면 이것 참 손해 아니냐, 망상 아니냐 하면서 나한테 며칠 쉬어도 될 텐데 지독한 업보중생(業報衆生)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습니다. 「아 수고한다.」 칭찬이나 하면 좋을 건데 같은 말이면 업보(業報)라 하고 망상이라 욕한다고 싫게 들으면 욕도 아니고 칭찬도 아닌 말을 가지고 그렇게들은 내가 또 잘못 들은 것입니다.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 하지 말고 중생을 위해서 보시하고 제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미했다 깨달았다 하는 게 다 거짓말인데 또 거짓말이지만 중생의 현실 세계에는 사실처럼 있는 꿈이니까 그런 줄 알고 설법도 하고 중생제도도 하라. 이렇게 해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사람이 없다고 보는 그것이 마음을 항복 받는 법(降伏其心)이라고 하신 것이고 금강경이 전부 보살행 하라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解 義] 『수보리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몸의 크기가 백두산만 하다든지 지구덩이만 하다면 이 사람의 몸이 큰 것이냐, 안 큰 것이냐?』 하고 엉뚱한 말씀을 물으십니다. 여기서 수미산은 지구를 말합니다. 왕은 제일 큰 것을 뜻하니 산왕(山王)이라 함은 왕산(王山)입니다. 가령 한국은 백두산(白頭山)이 왕산이고 세계에서는 히말라야산이 왕산이 될 것입니다. 「왕산만한 몸뚱이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몸이 큰 것이냐」하고 물으심에 대해 수보리는 『아주 크옵니다.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몸 아닌 것을 큰 몸뚱이라 하셨기 때문이옵니다.』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의문되는 것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씀 다음에 수미산만한 몸뚱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논리(論理)의 연결입니다. 앞의 말과 뒤의 말의 뜻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그 까닭은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 아무 조건 없이 중생구제해 주고 보살행 하라. 소승 모양으로 적멸만 지키지 말고 중생을 제도해 복을 닦으라. 아무 생각 없이 해야 공덕이 크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도 크다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또 기묘(奇妙)한 턱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수보리야! 비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저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 몸뚱이가 크냐 안 크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 또 수보리 존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참 굉장히 큰 몸입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몸뚱이가 아니라고 설명하셨기 때문에 크다고 합니다.」 소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 놓은 것 같은 말씀이지만 앞에 한 말씀과 앞으로 나오는 말씀과 자세히 보면 엉뚱한 말씀도 아니고 동문서답(東問西答)도 아니고 앞뒤 조리(條理)가 딱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말씀한 내용을 여기서 종결짓는 구절(句節)인데 보통 책 소설 보듯이 「여시아문 보살마하살」하고 읽어 넘어 가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정도로 하고도 법문 들었다고 참배하고 가기는 갑니다마는 그것은 남의 잔치 구경한 것밖에 안 됩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나오기 전에부터 지금까지 「큰 것이 큰 게 아니고 있는 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게 없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32상(三十二相)이 32상 아니라」고 전부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모든 상이 상이 아니다.

현상계가 현상계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확실한 존재가 아니라 그지없이 허망한 존재라고 할 수도 없이 덧없는 것들이다.

이 모든 현상이 현상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한 이 말씀을 대표적으로 들어서 「금강경 사구게」(金剛經 四句偈)라 그럽니다. 이미 32상(三十二相)이 32상도 아니고 몸뚱이가 몸뚱이 아니라고 그랬으니 사실 그대로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미산이 아니라 우주덩어리만 하다고 하셨더라도 그것은 없는 것이며 비신(非身)이고 비상(非相)이라는 말입니다. 수미산만 하다고 거기에 걸려서 그러는데 「부처님 32상이 아니고 또 중생이 중생 아니고 현상계가 현상계도 아니고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다」라는 것을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중생들은 이런 사람들을 봤다면 「오늘 큰 산만한 사람 봤다」고 모두 밥만 먹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하고 야단인데 그러면 벌써 거기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불자는 신도거나 선남선녀거나 비구 비구니거나 그렇게 큰 걸 봐도 크다고 생각 안 합니다. 그게 다 모두 꿈속이고 그게 실지 있는 게 아니고 환(幻)의 존재여서 물질적으로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현재 파멸(破滅)되는 과정에 있는 비상(非相)으로 봐 버립니다. 「아까 그 사람 굉장히 크네」하고 큰 것 작은 것 분별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떨어져 거기에 주한 사람이니 번뇌망상에 쌓여서 7전8도(七顚八倒)로 일어섰다 자빠졌다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한술 더 떠서 「참 큽니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것을 속아서 대단히 크다고 한 것 같으면서도 곧 「부처님께서 그 몸뚱이가 몸뚱이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엉터리로 크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대답입니다. 우리가 이론으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큰 사람 하나 만났을 때 그 생각 놓치기 쉽습니다. 크다는데 그만 다 잊어버리고 주해 버립니다. 산을 보면 큰 데 넘어가고 꿀을 먹으면 달콤한 맛에 빠져서 다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견성(見性)한 이도 혹 어쩌다 24시간 제대로 가다가도 속는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속지 않도록 도가 아주 높아져서 잠도 없어지고 번뇌망상도 없고 열반(涅槃)도 아니고 생사(生死)도 아닌 신비한 지경에 합치(合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논리상(論理上)으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말이 모순(矛盾)됩니다. 응무소주면 응무소주고 이생기심이면 이생기심이지 어떻게 「내는 게 안 내는 거고 안 내는 게 내는 거」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수보리 존자가 크다고 한 말씀은 바람소리나 물소리같이 아무 뜻이 없는 대답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이것은 크니 작으니 말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다음에도 많이 나옵니다. 앞에서도 이미 「32상(三十二相)이 32상이 아니므로 그래서

32상이라 했고, 일체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중생이라 한다.」 그랬으니 여기서는 직접 사실적(事實的)인 실례(實例)를 들어가지고 도가 7전8도(七顚八倒)로 움직이지 않는가 하고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에 보면 선지식(善知識)이나 도인들끼리는 별짓을 다 해서 흥청거리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야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점잖게 말씀하셔서 어디까지나 범부중생이 알아듣도록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하시느라고

이렇게 순수하게 말씀하신 것이고 수보리 존자와 부처님 사이에는 그런 정도라도 척척 넘어갑니다. 도인들끼리 법담(法談)할 때에도 그야말로 석화광음(石火光陰)으로 찰나에 알게 됩니다.

 

 

[說 義]

 

▶배움도 얻음도 없다.

세간에서는 국민학교로부터 대학을 나와서 결혼을 하고 사회에 진출(進出)하는 개체성장(個體成長)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래서 졸업한 학교가 있고 배운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평생토록 기억하여 이용을 해야 하는 소득(所得)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법(佛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의 맨 첫자부터,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부터 배울 것도 없고 수도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득(無所得)을 목표로 합니다. 제구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에서 말한 소승불교의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이 다 내가 「아라한」이란 생각이 없고 맨 처음부터 불교의 원리를 배워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미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최면(催眠)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강제최면(强制催眠)하는 정도까지만 돼도

내 정신이 통일되어 있거니 하는 관념(觀念)이 없습니다. 정신통일이 되어 있지만 통일된 줄도 모르고 있고 그런 생각 가질

필요도 없고 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것도 배울 것 없고 깨달을 것도 미할 것도 없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이나 보살이나 부처님도 다 그런 사상(思想)입니다. 완전한 대성자(大聖者)가 되기 전에는 감기 몸살이 들면 쌍화탕(雙和湯)이라도 먹어야 하고 병원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쌍화탕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건강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듯이

불법 배우는 것도 육체가 무슨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의 마음자리 그대로가 부처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머지는 다 허튼 소리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라 하는 것도 부득이 해서 다른 종교에서처럼 천당(天堂)에 가서 늘 편안하게 살려고 하나님에게 어기지 않고 늘 복종(服從)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의 부하(部下)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마음자리 그대로가 곧 진리이니 이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불교 믿는 냄새도 나고 불교 믿는 신도이며 참다운 신행(信行)이고 그렇습니다.

금강경의 원리를 들어서 배운 그때부터, 공(空)의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해 놓은 그때부터 이런 경계가 나타납니다. 앞으로 금강경을 얼마를 더 배우더라도 우리가 배운 것은 남길 것 없는 것을 배우니까 남겨 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길 것 없는 그 자리가 빨리 증득되지 않으니 이젠 듣는 게 주장(主張)이지만 쓸데없는 것 자꾸 듣는 것이고 간직할 것 하나도 없고 지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견성(見性)해서 성불(成佛)한 뒤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전에도

아무것도 소득(所得)이 없는 것을 배우고 법(法)을 줄 것도 없고 애초에 주고받고 얻어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실로 얻은바 법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너도 대장부고 나도 대장부니 피차 똑 같은 부처자리인데 어쩌다 같은 사람끼리 한 사람은 곡차(穀茶) 잔이나 먹어서 비틀거리는 것 붙들어 주는 턱입니다. 술이 취해서 부처와 중생이 똑같은 자리, 똑똑하게 아는 그 바탕이 흐뭇해진 것뿐입니다. 학문이다 지식이다 과학이다 종교다 하고 따지고 배우고 연구하며 내가 어떻게 하든지 남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생존경쟁심으로 머리를 짜내고 잠을 안자고 온갖 꾀를 내어 별별 짓을 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그릇된 착각(錯覺)이고 지식의 장애라는 뜻으로 번뇌장(煩惱障)·소지장(所知障)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 아는 것을 다 포기(抛棄)해서 지식을 초월했으므로 산이 높다는 생각 없이 산을 보고 쇠가 돌이나 나무보다 무겁다는 관념(觀念)이 없이 일체의 지식, 망상을 다 초월해 버리고 나면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을 다 초월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러면서 그것이 우주 전체(宇宙全體)인 자기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치고 보면 먼 데 것도 아니고 가까운 데 것도 아니고 전체가 환히 다 드러난 것입니다. 요새 물리학(物理學)·화학(化學)·천문학(天文學)등의 과학(科學)이 환상(幻想)이거나 과거(過去)에만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거나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없고 증명(證明)할 수 없는 학문이 아니듯이, 우리 마음자리를 깨친 경계도

그와 같이 사무쳐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은 과거사(過去事)를 다 아신다고 신통(神通)이라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사실은 본래 그런 것뿐이고 모든 착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어서 종소리가 깡깡이다 땡땡이다 하고 듣는 그런 업을 해탈(解脫)했기 때문에 전에는 과거를 과거인 줄 알고 봤던 것인데 이제 보니 항상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비유하면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에 둘을 더하면 몇 개냐고 물으면 한, 둘 꼽아 보고서야 셋인 줄 알고 어른들도 좀 복잡한 계산은 수학적인 지식을 빌어서 알게 되지만 부처님은 항상 나타나 있으니까 연구하고 셈을 해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를 분별하지 않고 즉각으로 아는 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일을 알되 더 잘 알고 종소리를 듣되 과거 중생인 때 듣던 땡땡, 강강으로 들을 줄도 아시고 또 일체 중생이

그런 식으로 듣고 있는 줄도 아십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강강으로 들으면 그렇게 들리기도 하고 그리고 강강 땡땡을 초월해서 종소리의 실상(實相)을 들으실 줄 아시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보다 우월(優越)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꿈 가운데 들어가서도 자유하고 꼭 꿈 같이 꿈 사람하고 중생의 살림살이를 차리시기도 합니다. 예컨데 석가여래께서 범부중생이 볼 때엔 밥 먹고

오줌 누고 대변 보고 저녁때면 잠자고 다 합니다. 그렇지만 도가 높은 보살님들이 볼 때는 부처님은 음식을 잡수신 일 없고 육신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오신다 가신다 주무신다 그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의 경지에서는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이 한낱 환상(幻想)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과거사(過去事)를 알고 부처님께서 신통(神通)하다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신통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에게는 현실 세계가 실재(實在)해 있는 것 같고 육도세계(六道世界)에 윤회(輪廻)하는 것이 사실인 듯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꿈속에서 천당(天堂)갔다, 지옥(地獄) 갔다, 돌아다니는 것이고 참말로 간 것이 아닙니다. 최면술(催眠術)에 걸린 사람이 몸뚱이는 가만히 앉아서 동경 갔다 왔다 하고 꿈을 꿀 때에도 몸뚱이는 가만히 놓아두고 비행기를 타거나 날개를 붙여서 돌아다니지만 전부 거짓말이고 꿈을 깨고 나면 다 허사(虛事)입니다. 조신대사(調信大師)가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 팔십년을 살았듯이 과거(過去)니 미래(未來)니 하는 것도 사실로 있는 과거·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현재입니다.

불이 꺼져도 눈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불이 켜져도 환하게 밝은 광명을 보는 것이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이 마음자리는 볼 때나 안 볼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미래 것은 모르고 과거의 기억(記憶)은 희미해져서 망각(忘却)해야 되는 것은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경계를 치고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기 때문에 망상 그것만이 나인 줄 알고 깨끗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본체(本體)가 있다고 여간 설명해 줘 봐도 좀처럼 인정(認定)할 생각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망상이 어떤 자체가 있어서 능동적(能動的)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가

그러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波濤)와 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움직임이 파도고 파도 자체가 물이듯이 실상 망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착각(錯覺)을 한 것이 망상일 뿐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아도

그전 마음 그대로입니다.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도 깊은 그대로이며 성불(成佛)을 해도 항상 그대로입니다.

가령 우리가 중생살이 꿈속·생사대몽(生死大夢)·천당(天堂)·지옥(地獄)으로 돌아 다녔지만 그것이 참말로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아이가 그 몸뚱이는 가만히 두고 꿈속에서 모양으로 비행기를 탔거나 날개를 붙여 가지고 동경을 갔다 왔다 하지만 그리고 본인도 그런 줄 알지만 꿈을 깨보면 그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전혀 허사이듯이 우리의 천당·지옥의 중생놀음 이것도 역시 최면술에 걸려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신대사(調信大師)가 눈 뻔히 뜨고 80년을 꿈 가운데 있었듯이 중생의 생멸심으로 과거니 미래니 하지만 과거사(過去事)라고 하는 것이 실제의 과거가 아니라 알고

보면 곧 현재고 미래도 그런 것입니다.

억만년 전의 과거가 지금이고 몇 만겁을 지낸 미래도 역시 현재입니다(?萬古而長今 歷千劫而不古). 그러니까 우리가 듣기에는 타심통(他心通)이니 숙명통(宿命通)이니 하지만 그게 타심통도 아니고 숙명통도 아니고 오직 항상 눈앞에 있는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그러면서 분별(分別)이 아니고 망상(妄想)이 아닙니다. 흔히들 체(體)니 용(用)이니 하는 개념(槪念) 때문에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체와 용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눈은 아까 불이 꺼져도 어두운 것을 보고 있고 불이 켜져도 밝아진 것을 보고 있으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항상 상주(常住)하듯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이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래가 혼란도 아닌 가운데 혼란을 일으켜 가지고 혼란이지만 그것도 본체(本體)인 내가 그러는 것이지 망상 자체가

따로 있어서 독자적(獨自的)으로 그러지는 못합니다. 마치 파도와 물이 본래부터 그 본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 파도고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닌데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착각을 떼어 버리고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면 그때도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은 깊은 그대로 있어서 성불을 해 놓은 뒤에도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의 본래 면목 알 줄 아는 성품은 그대로입니다.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體用不二)

그러므로 혜(慧)는 일체 생각을 내지도 않고 작용(作用)을 내지 못하는 자리지만 용(用)을 일으키면 온갖 것이 중생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이 체용(體用)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금강경 말씀하시기 전 법공(法空)을 말씀한 때는 그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소위 우리 자성을 항상 참되고 불변한다고 해서 진여(眞如)라고 하는데, 이 진여가 허공처럼 영원불변하는 진여도 있고 또 현상계(現象界)의 인연을 따라서 용을 일으키는 진여도 있어서 대승시교(大乘始敎)에 들어오면 두 가지로 말합니다만 그런데 지금 금강경 설명(說明)하실 때만 해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의 경지(境地)는 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가 둘인 듯해도 실상은 하나이어서 관조반야가 내내 실상반야고 실상반야가 그대로 관조반야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다. 체니 용이니 가리려고 하면 이미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게 금강경의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분별없이 아시고 과거사(過去事)도 미래사(未來事)도 분별없이 아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도 분별없이 제도하십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견성(見性)하는 그날부터 종일설이미진설(終日說而未盡說)로 하루 종일 말을 해도 말한 것이 아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무슨 색안경을 끼고 어떤 조건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다만 무심한 마음으로 무심중에서 말을 하고 듣고 하므로 마치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앞에 나타나니까 무심히 알지 우리 모양으로 어떤 선입주견(先入主見)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과 같은데 가만히 그림만 비치는게 아니라 일체 동작을 우리와 같이 하는 것은 움직임이 곧 움직임이 아닌 때문입니다. 꿈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꿈 밖에 가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전혀 거짓말이듯이 사실로 가도 간 것이 아니고 와도 온 것이 아니고 가도 오도 안했다고 해도 가도 오도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아까 그 최면술에 걸린 애가 동경을 왔다 갔다 했지만 안 갔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안 간 걸로 간 거고 간걸로 안 간 거와 같이 부처님의 지경(地境)은 이런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 이어서 체니 용이니를 가지고 비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야경, 금강경 전에는 체와 용을 나누어서 일체를 망상이라 하고 심지어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망상이라 봅니다. 그러나 대승종교(大乘宗敎)인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화엄경(華嚴經)에 들어가면 체용이 둘이 아닌 수즉파 파즉수(水卽波波卽水)로 물이 곧 물결이고 물결이 곧 물인 도리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심하기 때문에 무심 자체(無心自體)의 본 마음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미한 것도 아니고 깨친 것도 아닌 한 생각도 없는 그 자리에서 49년간 설법도 하고 또 인도에만 나타나셨다 하지만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시어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노사나불(盧舍那佛)도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화신(化身)이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석가여래께서는 한 생각 까딱해 보신 일이 없습니다.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무분별(無分別) 그 자체가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설법을 하고 제도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녹음기나 라디오와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종일 일해도 괴로운 줄 모르고 피로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모양 체용(體用)이 다르다면 하는 일이 힘들고 괴로움이 따를 겁니다. 사실은 중생들도 체용(體用)이 다르지 않고 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되는 셈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의 본 바탕자리는 무심(無心)이니까 무심 자체(自體)가 천당업(天堂業)을 지녀가지고 천당생각을 내면 천당이 나타나고 부처님 역시 천당 생각하면 천당이 나타납니다. 다만 중생은 그것에 속고 부처님은 속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무심경계(無心境界)에서는 체용(體用)이 둘이 아니므로 생각이 움직여도 무심히 움직인 것이어서 움직인 게 아닙니다. 마치 물이 일어나고 꺼지고 해도 물의 본성질에는 아무 변동이 없듯이 이 무심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체용이 둘이 아닌 구경(究竟)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들이 제가 몰라서 그렇지 중생들 자신도 본래는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모든 개념이 다 떨어진 근본 자체이고 그야말로 나 하나뿐이므로 대 자유한 것이며, 이 자리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인데 체용(體用)을 가르는 따위는 용납(容納)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代弟子)를 비롯한 큰 비구승들이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가서 모두 한 방망이씩 맞는 것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체용불이(體用不二)의 도리를 보이는 대문(大門)입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께서 참기름을 얻으러 갔다가 마침 유마거사의 집으로 가게 됐는데 유마거사는 「그것을 무엇하려고 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등에 종기가 나셔서 기름을 발라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해탈공신(解脫空身)이고 환신(幻身)이라서 부스럼같이 보이지만 사실 부수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본래 꿈이니까 시방제불(十方諸佛)이 꿈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음을 보이시기 위해 중생과 똑같이 그러하신 것입니다. 본래 환(幻)의 존재고 망(妄)의 존재인데 우리는 육신을 참말로 있는 물질적 과학적인 실재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나쁜 업(業)의 버릇을 정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다는 소리가 본래 면목을 증득했다는 말인 동시에 환(幻)을 증득했다, 삼계가 환임을 체득(體得)했다는 뜻으로 증득제환(證得諸幻)이라 그럽니다.

이렇게 완전한 환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낄 게 없으며 돼도 안 된 것이고 안 된 것이 된 거고 되고 안 된 것도 없고, 그러면서 그것이 말과 이론이 다 끊어진 자리가 무심체(無心體)이고 불보살의 마음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떻다 하지만 사실 우리도 그 무심체가 움직이는 대로 지옥으로도 되고 천당도 나타나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다 나타나고 그러면서 거기 딴 개념을 하나 더 가진 것 그게 중생의 허물입니다. 주관·객관이 따로 있고 육체가 나 인줄 알고 개나 소나 사람이나 중생 노릇 밖에 못하는 허물, 그것은 사실 그런게 아닌데 잘못 안 허물입니다. 돌이 돌도 되고 쇠도 되고 사람도 되고 세계도 되고 공간도 되고, 허공도 온갖 게 다 되는 데 이 돌은 부셔 봐도 돌가루일 뿐 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뿐입니다. 꿈속에 있는 바윗돌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못 드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이렇게 망념(妄念), 착각(錯覺) 때문에 모든 것에 걸려 있고 마음대로 안 되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안 되도록 해 놓은 것이고 사물에 얽혀 있는 것도 부자유한 것도 내가 부자유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결국은 마음대로 되고 있는 셈 입니다. 그러니 한쪽 신통은 얻은 셈이 됩니다. 이렇게 한 쪽 신통만 고집하다 도리어 구속당하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는 비밀방법은 오직 한 길 무심(無心)뿐이니 인간은 모든 생각 비울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전체를 쓰지 못하고 한쪽 신통만을 고집해서 도리어 구속을 당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과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나무를 팔고 돌아서다가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의 설명하는 것을 듣고 대번에 깨치셨는데, 그 구절이 바로 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육조스님은 팔십 노모(老母)를 혼자 모시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 시장에 팔아서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奉養)하고 지내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의 가난한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여관방에 나무를 팔아 가지고 돌아가려고 지나치다가 어떤 스님이 읽는 금강경 글귀를 듣게 됐습니다. 세상이야기가 아니고 인생일대사(人生一大事)에 대한 이야기, 생사(生死)를 초월하는 인생문제(人生問題)의 이야기 같아서 귀를 기울이니 결론을 짓는 대문(大門)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게 「응무소주하야 이생기심하라」는 대문이었습니다. 육조 스님은 이 글을 여기서 한 번 듣고 대번에 깨치셨기 때문에 이 글귀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마음을 어디다 두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보시(布施)도 하고 지계(持戒)도 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승 모양으로 가만히 정적(靜寂)만 지키고 앉았으면 역시 정적에 주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생사에 주해도 안 되고 보살은 열반에도 주하지 않고 생사에도 주하지 않는 것을 응무소주(應無所主)라 한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여기서 이 생각도 저 생각도 아닌 궁극(窮極)을 확실히 깨달아서, 알았다는 생각도 요달했다는 생각도 없이 오로지 말하는 이 마음자리만 환하게 남아 있는데, 그러면서 일체 번뇌 생사나 열반에나 아무데도 주하지 않고 중생을 위해 마음을 내는 보리심(菩提心)을 사무쳐 깨달으셨습니다. 육조스님은 무식한 나무꾼으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하라는 소리를 듣고 곧 견성(見性)하셨는데 그리고는 오조(五祖)스님을 찾아가려 했으나 늙은 어머님을 내 버리고 갈 수도 없고 하여 당황하니까 경 읽던 스님이 금을 여럿 냥(兩)을 주면서 어머니를 그동안 봉양(奉養)하도록 하고 노자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팔십 노모(老母)를 자기 친구한테 부탁하고, 「나는 천생 지금부터 오조 홍인(弘忍) 대사를 찾아뵙고 내가 바로 깨친 것인지 아닌지를 물어봐서 인가(印可)를 얻어와야 하겠고, 그리고 내가 모자라는 게 있으니 더 배워야 하겠네. 나의 인생이 나무해서 어머니나 모시다 돌아가신 뒤에 나도 죽고 하는 줄 알았더니 희한한 도를 한 번 듣고 내가 깨침을 얻어서 꼭 스승을 찾아가야 하겠네.」 하고 간청을 해서 승낙을 받고 떠났습니다. 나중에 홍인대사한테 참배하고서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만 오조 스님께서 마지막 날에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네가 많은 중생을 제도할 사람이니 금강경을 한 번 더 배우라」 하시면서 저녁에 데리고 앉아서 일러 주셨는데 여기서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라 하는 소리에 또 한 번 더욱 깨달았습니다. 두 번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조께 다음과 같은 오도의 게송(悟道頌)을 지어 바쳤습니다. 「어찌 자기 성품이 본래부터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기 마음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자리임을 알았으며, 어찌 자기 성품이 본래 동요하지 않을 줄 알았으며 어찌 자기 성품이 만가지 법을 내는 줄을 알았으리(何期自性 本自淸淨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本無動搖 何期自性 能生萬法)」이라 했습니다.

현상계니 형이상학(形而上學)이니 형이하학(形而下學)이니 하는 온갖 법이 다 마음 가운데 일이고 마음의 장난입니다. 대자연의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 조물주가 한 것도 아니며 오직 자기 마음에 만법이 구족해 있다는 것을 깨친 게송(偈頌)입니다. 이렇게 해서 육조스님은 부처님 때부터 전해 내려온 가사와 바리때와 금강경을 받아 가지고 오조스님 지시하신 대로 남쪽으로 피해 가셨습니다. 그때 오조스님 문하(門下)에는 칠백 대중이 있었는데 대중 가운데 신수(神秀)대사는 제일 학덕(學德)이 높아서 그이가 오조홍인대사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신수 문하의 대중들이 그걸로 해서 출세하려고 생각하는데 뜻밖에 저 남방 광동(廣東)에서 온 아주 시골뜨기 무식꾼처럼 생긴 자가 바리때와 부처님 가사를 가져갔다고 하니까 그럴 수 없다는 중생심으로 잡으러 가고 한 소설 같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렇게 15년 동안이나 피해 다니다가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우연히 지나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절에 큰 재가 들어서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고 공부하는 젊은 학인(學人)들이 한 열 댓명이 토론(討論)을 하게 됐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저 기가 흔드는 것이냐? 바람이 흔드는 것이냐?」하고 문제를 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기가 흔든다.」하고 또 하나는 「바람이 흔든다.」고 말하여 두 편으로 갈라져서 싸움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바람은 통과한 것 뿐이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또 반대편에서는 「기는 만년을 꼽아 봐도 바람 안 불면 가만히 서 있는데 바람이 기를 흔들지 어찌 기가 혼자 흔들 수 있느냐?」 이렇게 한참 시비가 벌어져 판단이 나지 않고 있는 판에 혜능(惠能) 스님이 마침 옆에 앉아 있다가「그것은 기가 흔든 것도 아니고 바람이 흔든 것도 아니며 오직 그대들 마음이 흔듭니다.」 그랬습니다. 기도 마음이요 바람도 마음이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학인들이 혜능행자(惠能行者)와 몇 마디 해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그곳 주지스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주지 인종 화상(印宗和尙)이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육신보살(肉身菩薩)이 남방에 한 번 출현하실 거라고 칠백년 전부터 예언(豫言)이 있었고, 홍인대사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은 부처님 법을 다 깨달은 이가 남방으로 나왔다고 하단데 아마도 이분인지 무르겠다.」했습니다. 그때까지 혜능 행자는 스님이 되지 못한 채 스님 견습생(見習生)인 행자였었는데 몇 마디 문답을 통해 높은 경지의 법을 통한 사람임을 안 인종 법사는 「오조스님의 의발(衣鉢)이 남방으로 왔다는 말이 있는데 필시 행자가 아니십니까?」하고 열반경법문(涅槃經法文)을 청하여 들었고, 또 혜능행자의 머리를 깎아 주고 범부가 처음 들어와 계를 받듯이 10계를 받고 250계를 낱낱이 받았습니다. 밥 먹는 것, 걸음 걷는 것, 앉는 방법, 문 출입하는 것, 팔만가지 세행(八萬細行)과 위의(威儀)를 다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육조대사는 38년간 정법(正法)을 크게 밝히셨는데 그 밑에 법을 이은 자가 43인이나 되고 도를 깨달아 견성한 이가 천 수백이나 되기에 이르렀고, 이들이 중국의 사백여주(四百餘州)에 흩어져 크게 교화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대사 이래 금강경은 더욱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되었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의 구절(句節)은 달마 선종(達摩禪宗)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하라.」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고 그것이 대승행(大乘行)입니다.

 

▶수월, 혜월 스님의 무심도행

부산 혜월노장(慧月老丈)님은 견성한 스님입니다. 한번은 절에서 산꼭대기 절 근방에 논을 몇 마지기 일구어 놓고 농사를 지었는데 산돼지가 벼를 전부 뜯어 먹어도 놓아두므로 한 수좌가 노장님 보고 『저 산돼지 좀 지키십시오.』『그러지.』이렇게 대답하고는 옆에 가만히 서서 돼지가 오면 돼지 잘 먹으라고 숨도 크게 안 쉬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노장님이 왔다 갔다 해도 돼지가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스님들이 와서 『노스님! 돈을 얼마나 들여 해놓은 농사인데 돼지가 다 먹으면 어쩌라고 그럽니까?』『우리는 이 벼가 아니라도 먹을 게 있지 않은가. 돼지란 놈은 농사를 짓나 장사를 하나 천생 좀 먹어야 할 게 아니냐?』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또 마당에 벼를 널어놓고 새가 오면 그것 좀 쫓아 달라고 하면 『그리하지.』하고 서 있는데 노장님 앞으로 새가 몰려와 주워 먹고 있습니다. 그거 먹으면 안 된다고 손을 내저어 쫓으면 저쪽으로 가서 주워 먹고 그리 가면 또 이쪽으로 오고 새가 그 노장님을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생할 마음으로 해물지심(害物之心)이 없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남을 해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것이 나에게 따르는 법입니다. 또 그 노장님이 있던 어느 절위에 한참 올라가면 암자가 있는데 가는 길에 바위 모퉁이를 지나야만 법당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혹 바위 모퉁이에 시퍼렇게 생긴 살모사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를 들고 아이들이 올라가면 머리를 딱 쳐들고 짝짝 소리를 내고 씩씩거리며 혀를 내두르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게 되면 아이들이 『노스님 저 나쁜 독사 놈 좀 쫒아 주십시오.』그럽니다. 『그리하지, 나쁘기는 너희가 나쁘지 독사가 나빠.』하고 이 노장님이 가서 독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너를 나쁘단다. 저희가 나쁜 줄 모르고 그러니 참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이래 가면서 독사 머리를 들고 있으면 이놈이 죽은 모양으로 흔들지도 않고 축 늘어져서 가만히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만히 놓으면 그 쪽에 가만히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평생을 앓지도 않고 솔방울 같은 거나 따 먹고 빗자루 만들어 가지고 가난한 집에 나누어 주고 그런 게 일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지냈는데 일화(逸話)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중국에 누구누구 일본에 어떤 선사라 하지만 우리나라에 참 희한한 얘기가 많습니다. 한 번은 그때 돈으로 25원을 들여서 산골짜기를 돌, 나무로 막아 놓고 그 위에 흙을 져다 부어 놓고는 팥을 갈았는데 가을에 팥을 타작해 보니까 반 말 닷 되가 나왔습니다. 옛날 돈으로 25원이면 팥을 여러 섬 살 때입니다. 수좌들이 모두들 한 마디씩 합니다. 「아 노스님! 돈 25원을 들여 가지고 고생만 하시고 겨우 이것뿐이니 이거 밑지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멍텅구리 아니냐? 돈 25원은 이 세상에 어디에 그대로 있어. 팥만 반말 공짜로 생겼지.」 일평생 사는 게 그런 식으로 삽니다.

저 북간도에 가서 돌아가신 수월(水月)스님이라는 도인(道人)이 있었는데, 내가 젊어서 평생 모시고 도를 배우다 같이 죽으려고 내가 그때 개운사강원(開運寺講院)에 있다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한 번 갔는데 그 분은 평생 40년 동안 그곳에서만 계십니다. 그 스님이 누구에게나 「나 한테 농사지은 양식이 있으니까 탁발(托鉢)하지 말고 이거 먹고 공부하라」고 늘 이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한테는 나가라고만 하셔서 아마 일부러 시험해 보는 게 아닌가 하고 별 짓을 다 했는데도 나에게는 기어코 나가라고만 하시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진짜로 나가라는 것 같아서 나오기로 작정한 뒤에 동량이나 한 댓새 해서 양식이나 좀 보태드리고 떠나야겠다고 동량을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흑룡강(黑龍江)이 나오고 한국 독립군들의 근거지인데 일본 토벌대들이 비행기를 가지고 가서 만주사람, 한국사람 무수히 죽인 바로 그 뒤에서 무서운 개를 많이 기르고 그럽니다. 여러 사람들에게「수월스님을 어떻게 아느냐?」 이러니까 나이 많은 노장님 한 사람이 동량이나 해 먹고 사는 분으로 알지, 별사람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모두들 수월 노장을 이렇게 모른다고 하기에 내가 우리 고국(故國)에서는 굉장한 도인으로 안다고 수월 스님에 대한 얘기를 해 주니까 그때에야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도인인가 보다고 하면서 이 얘기를 합니다.

만주 개는 셰퍼드보다 더 무섭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이고 키도 셰퍼드보다 더 큰데 그 개한테 내가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수백리 먼 길을 가게 되서 길을 묻고 싶어도 개가 나올까봐 일부러 다른 곳으로 피해서 산을 넘어 다니고 그럽니다. 그 곳에 한국 사람이 한 7백호 살고 중국 사람이 한 3백호 사는데 수월노장님의 모습이 참 기이하다는 겁니다. 옷도 다 떨어져서 빨간 것·푸른 것·흰 것 모두 누덕누덕 기어입고 짚신도 상주(喪主)들 신 모양으로 불룩해 가지고 머리에 쓴 것도 이상스럽게 걸레인지 모자인지 모를 정도로 이런 걸 쓰고 오는 걸 보면 그야말로 죽은 개도 기겁을 해 짖게 생겼는데도 그렇게 사나운 개들이 그 노장님 보고는 가만히 엎드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월 스님 보고는 무서운 개가 짖지 않는다 하는 소문이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탐진치(貪嗔痴)의 삼독(三毒)이 뿌리째 딱 떨어지면 호랑이와 함께 있을 수가 있고, 토끼나 노루가 그 사람 앉아 있는 곳에 뛰어 들어오고 그러는데 그렇게까지 없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때 나는 나를 보고 자꾸 짖어대는 개를 보고 속으로 참 부끄럽고 고개를 못 들었습니다. 명색이 장삼 입고 수도하는 중이라면서 개가 짖도록 되어 놨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 해물지심(害物之心)이 남아 있어서 그럽니다. 지금도 우리가 정화(淨化)한다고 이러지만 교단종풍(敎團宗風)을 바로 잡아서 앞으로 이제 무수한 도인이 나오도록 하느라고 전체를 위해 하는 짓이지마는 한쪽으로는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짓을 기어코 해 놨으니 남한테는 나쁜 과보(果報)도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심(猜忌心)이 있고 해물지심이 있으면 개가 짖습니다. 가령 사냥꾼이 아무리 목욕을 깨끗이 하고 몸에 향수(香水)를 바르고 새 옷을 입고 다녀도 개가 틀림없이 그 사람만 오면 문둥이 오는 것처럼 짖어 댑니다.

 

▶견성한 뒤에 보림 수행

도가 높아지면 죽을 때 몸뚱이를 옷 벗듯 벗고 갑니다. 실은 죽는 것도 아니지만 육체가 죽는다고 보고 지게를 지고 가다 지게를 세워 놓듯이 합니다. 그렇게 놓고도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갈 때는 미(迷)해서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있지만 탁한 마음, 곧 색정(色情)이 일어납니다. 금생의 자기 몸뚱이는 옷 벗듯이 했지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 깜박 미해서 피로 엉켜서 있습니다. 그런데 도가 더 높은 사람은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하지 않고 자기 공부 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달 동안 가만히 하는 이도 있고 아홉달 만에 자기 공부하던 걸 나와서 미한 사람도 있고 또 여덟달에 미한 사람, 한달에 미한 사람, 또 열달을 다 선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280일 동안 하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속에서 나오느라고 큰 고통을 겪게 되므로 출태(出胎)할 때 제일 미합니다. 그래서 깊고 완전하게 될 때 까지 계속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견성하고 닦는 것을 보임(保任)이라 합니다. 옛날에도 견성해 놓고 20년·30년·40년 수도를 하는데 얼굴에 흙칠하고 잿더미 바르고 미친 사람 짓을 하면서 남들이 미친놈, 미친놈 하는 그 가운데 자기는 멀쩡하게 천하태평이 되어 개 닭소리 안 들리고 사람 오지 못하는 산중에 깊이 들어가서 토굴(土窟)하나 만들고 솔잎이나 도토리나 먹고 들어 앉아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자성(自性)을 잘 보호해서 임의로 거기에 맡겨서 조금도 탈선(脫線) 행동이 없도록 하고 「응무소주 이생기심」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보임(保任)이라 한 것입니다. 범부가 탐진치(貪嗔痴)로 움직이는 마음과는 달라서 무심(無心)으로 움직이는 이것은 움직이는 것도 안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어서 마치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어서(水波不二) 사람이 그것을 파도라 할 뿐 물 자체는 파도가 아니고 움직였다 해도 달라진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물이 더 깨끗해진 것도 아니며, 물은 움직인 때나 항상 그런 것처럼 도를 깨쳐 놓고 자기 마음자리를 응무소주(應無所住)하며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것도 종일 설법해도 설법한 게 아니고 이와 같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부지런히 농사짓고 종일 일해도 고된 줄 모르고 생각 없이 일합니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 말고, 꼭 나만 먹을 거다 이런 생각 말고, 아무나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거고 헐벗은 사람이 먼저 입을 옷이라 생각하여 열 벌이고 한 벌이고 장만하는 것이 도인이 하는 행동이며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대보살이고 자기도 완전히 의식주를 초월하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수양이 돼서 맑아지면 소탈해지고 번뇌가 없어져서 남의 사정을 잘 알게 됩니다.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도 그렇고 제 감정으로 대하면 영감 말이 제대로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을 때 미운 생각으로 대하면 좋게 말해도 밉고 나쁘게 말해도 밉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되니까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감정이 앞선 중생이 되어 놓으니깐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팔월 추석이 되면 아이들 고무신 하나 사주고 옷가지나 사주자고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겠다고 얼른 주고 돈이 없으면 어디가 빛을 내 오든지 해 보자고 하고 빚도 못 낼 형편이면「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됐다고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당신 말을 못 들어주니 참 안 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 주면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 수도 있는 거고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인데, 꼭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그러니 시어머니 사정 모르고 며느리 사정 모릅니다. 응무소주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걸 환히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줄 지혜가 나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안하기 때문에 주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지옥으로, 삼악도로만 가서 인간세상이 혼란해집니다.

아무데도 머물지 않는 무소주(無所住)는 옳게 머무는 것이고 머무는 것은 그릇되게 머무는 비극(悲劇)이며 또 중생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육도만행을 행해야 하니까 그게 이생기심(而生其心)인데 「해도 한 것도 없이하라」 항복기심(降伏其心)이 됩니다. 일체 중생 무량무수 중생을 제도했지만 사실 제도한 나도 제도한 생각이 없고 또 제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법문을 듣고 그 방법 배우고 있는 범부 때 그 자체가 앉아서 배웠고 잠깐 지나간 생각이고 흘러간 강물과 같아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것도 없고 무슨 말을 해 줬단 말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종일 얘기해 본 일 없이 얘기하라」하는 게 항복기심(降伏其心)이니 레코드나 녹음기보다도 더 무심한 것입니다. 범부라도 억지로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직으로 하는 것이지만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근사해지고 좀 탈속(脫俗)해져서 마음이 편해지고 일은 일대로 잘 됩니다.

구경에는 마음과 육신이 하나

무아경(無我境)이라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관념(觀念)이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체(本體)자리는 아닙니다. 이 본체의 실재(實在)는 있기는 있지만 생각이 일어날 수 없는 사량부도지처(思量不到之處)고 시간공간을 초월한 무극 이전(無極以前), 태극 이전(太極以前)이며 원자 전자가 성립되기 이전 우주의 생성이전(生成以前)이며 유무(有無)를 초월하여 선악시비(善惡是非)가 일어나기 전입니다. 깨치는 방법이 있는 것은 부득이해서 의지할 지언정 그것이 어떤 존재라고 인식(認識)한 게 있으면 벌써 착각(錯覺)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지도를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하는 생각이 붙을 수 없으며 맨 처음부터, 중생 때부터 지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불(禮佛)할 때도 계향(戒香)·정향(定香)·혜향(慧香)·해탈향(解脫香)·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하고 오분향례(五分香禮)를 하는데, 부처님께 예경(禮敬)을 함에 있어 음식이나 떡을 올리는 헛된 예경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참된 예경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먼저 계를 지켜서 닦는 마음의 향으로 예경하고 또 참선을 하여 정(定)을 닦는 마음의 향으로 예경하고 지혜의 향, 해탈의 향으로 예경을 올린다는 뜻이니, 해탈했다고 해서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도 소승(小乘)이 되어 반쪽 해탈 밖에 안 되므로 그것까지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탈지견향의 예경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무 주객을 초월하여 생사에도 주하지 않고 열반에도 주하지 말라는 것이니, 도인이 밭 갈고 농사도 하고 장사도 하고 좀 더 내라, 덜 받아라, 그런 소리를 해도 조금도 업이 되도록 이익(利益)을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니 탐진치 삼독(貪嗔痴三毒)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육체를 나라고 하여 자기 본위로만 살다가 이제 견성(見性)을 하고 보니 정말로 자기라는 것은 누가 해롭게 할 수도 없고 보태서 이롭게 해 줄 수도 없는 존재이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그저 항상 불변하는 존재이니 정말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까지 이 몸뚱이 때문에 천사만려(千思萬慮)를 일으키고 온갖 망상(妄想)을 다 일으켜서 수단방법(手段方法)을 가리지 않고 죄업을 저지른 것은 육체가 나인 줄 알고 저질렀던 짓이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필요 없게 됐습니다. 오직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만이 일이라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하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깨우치는 것 일러 주는 것도 아무것도 내가 바랄 게 없습니다. 마음자리를 깨닫고 보니 돈도 소용없고 옷도 밥도 소용없고 차차 도가 높아 가면 육신이 실제로 그렇게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되어서 불에 앉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물에 들어앉아도 괜찮습니다. 신라 때에도 그렇고 중국에도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밤에 우물 속에 물이 한 댓 길 되는데 그 물 속에 가만히 들어가 밤을 새고 앉아 있다가 날이 새면 나와서 밥 얻어먹고 돌아다니며 절도 하고 중생제도도 하고 그랬습니다. 마음이 점점 무심해 지면 망상이 없어져서 이 육체가 본래 환(幻)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이 몸뚱이도 본래 망상 때문에 호흡이 필요해지는 것인데 망상이 죽 끓듯 하는 큰일이 생기면 호흡이 급하게 됩니다. 모든 망상이 뚝 떨어지면 호흡의 필요가 없어져서 줄어집니다. 처음에는 차츰차츰 호흡이 1분간에 1호흡하다가 나중에 2분간에 하다가 한 시간 하다가 극도에 다다르면 자연 호흡이 끊어져서 모공호흡(毛孔呼吸)만 가지고 만족하게 되는데 더욱 깊어지면 모공호흡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그것이 환신(幻身)인데 그래서 시방제불이 증득제환(十方諸佛證得諸幻)이라 한 것입니다. 범부 중생한테 처음에는 할 수 없어서 육신은 물질로 된 색신(色身)이니까 무상(無常)한 거고 부처님도 몸이 돌아가셔서 화장을 해서 사리(舍利)가 나오고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하여 소승(小乘)네에게는 아무리 성불해도 색신(色身)은 죽어 없어진다고 말해 주지만 이것은 아직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모르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승(大乘)에 올라오면 차차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인 것을 설명해 줍니다. 왜냐 하면 현상이 본래 환(幻)이기 때문입니다. 제불이 증득적멸심(諸佛證得寂滅心)이라고 하는 것이 곧 증득제환(證得諸幻), 모든 것이 환임을 증득한 것이므로 그때는 육신과 내 마음자리가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닌 하나의 도리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경계로 보면 말하는 마음자리와 육체는 둘입니다. 꿈속에서 온갖 활동을 하다가 꿈을 깰 때는 꿈에 있던 몸뚱이는 없어지고 또 현실의 딴 몸뚱이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종일 활동을 합니다. 만일 몸뚱이와 마음이 하나라면 마음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이 몸뚱이도 함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최면술에 걸린 아이가 이야기 몇 마디 하는 순간에 동경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그게 모두 다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고 참이라면 둘 다 참이고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육신 말고 마음이 따로 있어서 꼬집어보면 육신이 아픈데 사실은 육신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육신이 아픈 걸로 우리 마음이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 뿐, 실제로는 이것은 본래 육신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다 돼 가지고 환화공신(幻化空身)의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이 둘이 아닌 경계가 된 거나, 지금 우리가 미(迷)해 가지고 몸뚱이 이것만을 나라고 생각하므로 해서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육체가 아프지도 않고 안 아프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닐 텐데 불에 닿으면 뜨겁고 손 등을 꼬집으면 손등이 아프고 배를 꼬집으면 배가 아프고 다른 데는 아프지 않은 것이 다 마음과 몸이 한 덩어리가 된 때문입니다. 마치 육신과 법신이 다르지 않은 하나가 되어 버려서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부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몸뚱이가 환(幻)이고 현실이 꿈인 줄을 모르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부처님을 여래(如來)라 하는데, 여(如)라는 것은 진리인 법신의 본체자리를 말하며 이 여로 부터 여여(如如)하게 중생의 세계로 오셨다는 뜻으로 한 존칭(尊稱)으로서 그러니 내(來)는 오는 것 없는 걸로 오신 것이고, 여(如)는 변동을 안 하는 것인데 어디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까? 진공처럼 변동할 수 없는 자리이고 움직일 수 없는 자리인데 부처님께서 육체적으로나 법신(法身)으로나 근원적으로는 부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몸뚱이와 마음의 두 덩어리가 있는 것 같고 싣달다태자(悉達多太子)라는 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견성성불(見性成佛)했고 또 천당의 도솔천(兜率天)에 계시다가 이 세상에 내려오시니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 모시던 하늘의 대중들도 부처님을 옹호(擁護)하느라고 전부 따라 내려와서 49년 동안 부처님 불사(佛事)하는 것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돕게 되었는데, 그러니 부처님도 보살의 몸으로 계시던 도솔천 내원궁(內院宮)때의 몸뚱이는 없어지고 또 보살의 몸이 지하로 내려가신 것으로 중생은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 경지에서는 도솔천 내원궁이 곧 마야부인의 태중(胎中)이고 마야부인의 뱃속이 곧 내원궁이어서 오고가고 할 거리가 없는 것이니 가비라국이 그대로 내원궁에 앉아 있는 것이고 인도의 정반왕국(淨飯王國)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이 자리는 작다고 할 때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 속에 도솔천도 있고 정반왕궁도 있고 오고가고 할 게 없는 자리입니다. 현재도 우리가 마음 쓰는 이대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절대 자유로운 것인데 우리가 미한 중생이 되어 망상으로 보고 쓸데없이 부자유(不自由)한 짓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상이 자꾸 났다는 것뿐이지 열반(涅槃)이니 생사(生死)니 정법(正法)이니 사법(邪法)이니 이런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는 실상(實相)자리에 눈 깜짝해 보면 합치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 듣고 앉았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오늘이라도 육조 스님처럼 깨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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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相無相分 第九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須陀洹(수다원)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須陀洹果不(아득수다원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須陀洹(수다원)이 名爲入流(명위입류)로되 而無所入(이무소입)이요 不入色聲香味觸法(불입색성향미촉법)일새 是名須陀洹(시명수다원)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斯陀含(사다함)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斯陀含果不(아득사다함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斯陀含(사다함)이 名一往來(명일왕래)로되 而實無往來(이실무왕래)일새 是名斯陀含(시명사다함)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阿那含(아나함)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阿那含果不(아득아나함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阿那含(아나함)이 名爲不來(명위불래)로되 而實無不來(이실무불래)일새 是故(시고)로 名阿那含(명아나함)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阿羅漢(아라한)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不(아득아라한도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名阿羅漢(명아라한)이니 世尊(세존)하 若阿羅漢(약아라한)이 作是念(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라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즉위착아인중생수자)니이다 世尊(세존)하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에 最爲第一(최위제일)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시제일이욕아라한)이라하시오나 世尊(세존)하 我不作是念(아부작시념)하되 我是離欲阿羅漢(아시이욕아라한)이니이다 世尊(세존)하 我若作是念(아약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라하면 世尊(세존)하 卽不說須菩提(즉불설수보리)-是樂阿蘭那行者(시요아란나행자)라하시련만 以須菩提(이수보리)-實無所行(실무소행)일새 而名須菩提(이명수보리)- 是樂阿蘭那行(시요아란나행)이니이다.

 

『수보리야! 너 생각에 어떠하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어. 왜냐 하오면 수다원이라 함은 성인의 흐름에 들어갔다는 말이지만 실은 들어간 것이 아니오니, 물체·소리·향내·맛·촉감·법에 들어간 것이 아니 온데 이름을 수다원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어. 왜냐 하오면 사다함이라 함은 「한번 갔다 온다」는 말이지만 실은 가고 옴이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 이름한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실은 오지 않는 것도 없사오니 그래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하였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실로 어떠한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는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노라」 하오면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란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제가 <다툼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이라> 말씀하였사오니 이것이 첫째가는 욕심 없는 아라한이오나, 세존이시여! 저는 「내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오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에게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 온데 실은 수보리가 행함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이름하셨사옵니다.』

 

 

第九 一相無相分-절대의 하나인 상

 

[科 解]

일상(一相)이란 하나로 됐다는 뜻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하나로 되고 부처님과 중생이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로 된 때는 아무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고 하지만 실은 모양이 없어진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느 때를 말하느냐? 마음이 객관을 상대하지 않는 때를 말합니다(無相). 마음이란 성품자리(品 : 性根本實在)이고 불성자리(佛性 : 깨달음의 본바탕)인데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이 아무것도 상대하지 않고 부처도 사바도 상대하지 않으며, 있고 없는 것도 상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좋고 싫은 것도 상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내가 모든 기분을 내기 이전인 때를 가리킵니다.

이런 지경에 들어서면 나 자신마저 없는 무아(無我) 지경이 됩니다. 내가 없으니까 모든 상대를 초월해서 마음만 오로지 있는 때이므로 이것은 아무 모양이 아닙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이란 허공을 가리킵니다. 모든 현상은 있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건 크나 작으나 다 있는 모양이고 없는 모양은 허공입니다. 그런데 공기도 없는 진공은 없는 것으로 확실히 있는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무상(無相)이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란 말이 아니고, 마음이 객관 상대를 두지 않는 것, 일체 잠재의식까지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잠재의식까지 다 끊어지고 난 그것은 빈 허공이 아닙니다. 허공은 뭘 생각할 줄 모르고 알 줄 아는 능력이 없지만 허공까지 끊어서 초월했는데 순수한 본래 면목 그대로 살아 있는 이 마음은 있는 모양도 아니고 없는 모양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로 되었을 때, 상대가 없을 때, 오로지 이 마음만 살아 있을 때는 그때는 있다 없다가 아니며 허공 모양도 아니고 물질 모양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一相)이란 구공지경(俱空地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생각하다 저 생각하다 일분 동안에도 백천만 가지의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니 이것은 일상이 아니라 다상(多相)이고 복잡상(複雜相)입니다. 이런 번뇌, 망상이 아공(我空)이 되고 법공(法空)이 돼서 공했다는 생각까지 다 놓아 버리어 <구공>이 된 것을 <일상>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구공>이라 하는 그것도 <마음>의 별명이고 뭐라 그래도 제 이름이 아니므로 이것은 <구공>이라 하는 그것도 <마음>의 별명이고 뭐라 그래도 제 이름이 아니므로 이것은 <구공>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텅 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삼라만상이 그대로 다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일체상을 다 떠나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하니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해서 그 상을 다 초월하고 있는 것이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입니다. 분(分)은 경전 전체의 내용을 몇 개의 대목으로 나누어서 이해하기 좋게 하는 장절(章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解 義]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네 뜻에는 어떠하냐? 네 마음에 어떻게 생각이 드느냐?』 그런 뜻입니다.

『수다원(須陀洹)이 능작시념(能作是念)하되, <수다원>이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다음과 같이 마음을 먹겠느냐? 「내가 이제 <수다원과>를 얻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에 수보리존자 말씀이 『아니옵니다. 부처님, 어째서 그러냐 하오면 수다원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이온데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을 <수다원>이라 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수다원>이란 본래 인도 말이지만 그 뜻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곧 본문에 입류(入流)했다고 하는 유(流)란 말은 성류(聖流)라는 말이니 성인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범부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성인이 됐다는 뜻입니다. 소승불교의 계급에 四급이 있는데, 학교에 일학년, 이학년 올라가서 사학년이면 졸업하는 것과 같은데, <수다원>은 소승불교 일학년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학년인 <사다함>에 진급하려면 마음 가운데 일체의 색 ·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걸리지 말아서 진리니 비진리니 외도니 사도니 정도니 불법이니 하는 그런 망상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깊지 못하고 도(道)가 얕기 때문에 초과(初果)라 한 것입니다. 맨 처음으로 번뇌망상이 쉬고 조용해져서 해탈했기 때문에 성류(聖流)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지껏 산 보고 높다 물 보고 깊다 이렇게 생각하고 소학교에서 대학 졸업하기까지 배운 온갖 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살다가 부처님 덕분에 구공에 대한 법문을 듣고 보니까 참말로 그게 가질 바 참된 지식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차차 깨닫는 것은 소승사상만 그런 게 아니고 대승들도 처음에는 깊이 한꺼번에 깨닫는 수도 있지만 조금씩 깨달아 가지고 마지막에는 부처를 이루는 수도 있고 두번 세번 열번 깨닫는 수도 있습니다. 이 소승불교의 초과인 수다원과는 성인의 류에 들어갔다하는 것이니 마음이 해탈이 되고 조용하고 번뇌가 없어졌으니 성류에 들어선 것인데, 그렇지만 사실은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而無所入). 그러면 이게 또 무슨 뜻입니까? 들어갔으면 들어간 것이고 안 들어갔으면 안 들어간 것이지 들어갔는데 들어간 것 없다 그러니 말이 안 됩니다. 산 보고 높다, 물 보고 깊다, 이건 남자다 저건 여자다, 또 학교 가서 선생님 말 배우고 이론이나 지식 익혀서 참 그게 복잡했는데 인제 불교 정법을 듣고나서 그걸 다 해탈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산을 보든 물을 보든 마음자리만 남았으니 인제 그자리 그대로 산 본 자리고 물 보든 생명 그대로이며 그 생명 그 마음자리 그게 어디 나가고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 마음 그대로 조용해진 것뿐이니 어디 들어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주관 객관 이런 저런 관념으로 진리라는 게 저 하늘나라 높은데 저 고원 어디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걸로 알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 약하고 얼마 안 되는 무능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삽니다. 내가 그동안 애가 타도록 벌써 여러날 불법을 얘기해 줘도 항상 집에 갈 때는 무엇을 깨쳐 가지고 들어가는 그런 관념을 가집니다. 그러니 이런 관념을 떼는 게 불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본성이 아니고 항상 그대로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쉬어서 그것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기어코 먹을 것도 아닌 걸 안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수다원이 성인의 종류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들어간 데는 없사옵니다(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라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계, 곧 남자나 여자나 산하대지(山河大地) 어디에도 내 몸뚱이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입니다. 산보고 좋다 싫다는 생각 안 내는 것이 그것이 색(色)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산 보고 좋다 궂다 하든지 남녀간에 보고 좋다 궂다 하면 벌써 <색>의 현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색(色)이라 함은 여색(女色)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세계에서 유명한 성악가가 왔는데 노래를 아주 잘 부르니 이 기회에 한번 들어보자 하더라도 들어 볼 생각 없습니다. 또 들어 봐도 좋다고 생각하면 좋고 돼지 목 따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면 이것저것 다 내 버리어 번뇌가 아주 없는 수다원은 어떤 목소리를 들어도 아무 생각 없이 듣습니다. 법문하는 소리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러므로 수다원 같은 성인은 소리 따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不入聲).

또 좋은 향내가 난다 해도 향 한 대 더 피우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좋은 향내도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는 나의 망상이지 듣기 싫어집니다. 돼지 목따는 소리도 「참 불쌍하구나. 죽느라고 저렇게 애를 쓰는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야, 저 놈 죽느라고 노래 한 곡 잘 뽑고 죽는구나.」하고 돼지의 마지막 노래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다 하면 좋고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이니, 목소리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있는 향내와 향내를 맡을 줄 아는 주체인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향내는 냄새가 좋다는 관념이 있을 뿐입니다. 생각이 끊어져서 마음이 삼매에 들어 일념이 되면 똥을 코에 발라도 구린내가 안나고 방안에 향내를 꽉 채워도 향기가 안 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냄새 같은 객관에 끄달리지 않습니다(不入香).

「어느 식당에 가면 설렁탕 맛이 참 좋다는데 거기 가서 막걸리나 한잔 사 먹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안 합니다. 온갖 음식에 생각이 없습니다. 하루 밥 세끼 죽지 못해 먹는 것인데 하루 한끼 먹는 사람도 있는데 난 하루 두끼만 먹자. 이런 식으로 자꾸 육체생활을 줄여들어 갑니다. 그러면 「어디 술집이 새로 생겼는데 술맛이 좋다더라.」하는 류의 소리는 바람소리에 물소리처럼 지나갑니다. 몸뚱이도 세계도 꿈인데 꿈속에 들어가 무엇이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느 몸뚱이가 있어 마르고 축나겠느냐? 이렇게 닦아 들어가는 것이 불법입니다(不入味).

남녀간의 이성끼리 만나더라도 생각이 안정되지 않은 범부는 가슴이 설레고 번뇌가 일어나서 들끓습니다. 그러니 설사 이성을 만나더라도 저건 남자거니 여자거니 생각하지 말고 저건 하나의 껍데기다, 바지 껍데기고 육체의 껍데기, 그림자로 봐야 합니다. 똥주머니·오줌·피 ·코·가래의 주머니로 봐야 합니다. 번뇌를 여의고 마음만 오롯하게 드러난 성인의 경지에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육체에 대한 일체의 애착이 없어지고 온갖 사상 관념이 없어집니다(不入觸).

유교의 교리는 어떻고 예수교의 가르침·철학의 논리·과학의 원리 이 모든 것을 불교에서 법(法)이라고 그럽니다. 모든 이론·종교·학문이 다 법이고 불법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모든 법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망상이 없으면 불법까지도 따로 지킬 것이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모두 다 망상이니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자아를 완성하여 번뇌를 여의였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주인공이 되어 생사를 초월하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영원히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남을 제도한다는 것도 말이 됩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고서야 오직 남을 위해서만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농사도 지어 주고 장사하는 집에 가서는 장사하는 일 거들어 주고 설렁탕집에 가면 설렁탕 나누어 주고 하루 종일 남을 위해서 고된 줄도 모르고 봉사할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객관세계에 끄달림 없이 번뇌 망상 다 초월해서 몸뚱이도 없고 생명에까지도 조금도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데 거기에 무슨 법이 필요하고 어떤 진리, 어떤 원리가 필요합니까? 이것을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수다원은 그 마음이 무아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망상이 끊어진 경계에 들어섰지만 그 깊이가 아직은 얕습니다. 마치 학교 교육에 비교해 말하자면 국민학교는 졸업했다는 정도에 해당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의 三과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을 새기는데 있어서 잘못 새기면 「들어감이 없으므로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새기어 말을 두동강이를 만듭니다. 이것을 「자기 마음을 깨달은 것이고 어디 들어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무소입(而無所入)>이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객관의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어디에 들어갔느냐 하면 거기도 들어간 것이 없다는 뜻으로 <불입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어디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니, 안으로나 밖으로나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解 義] 부처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사다함>이 자기 스스로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 같으냐 안 그러냐?』하고 먼저와 같은 요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에 수보리존자의 대답은, 역시 『아니옵니다. 부처님 <사다함도 이름은 「한번 왔다 가는 이」라 하지만 사실은 오고 간 것이 없어서 그래서 <사다함>이라 한 것이옵니다.』하고 사룁니다. 이것은 다 第七章에서 말한 무위법(無爲法)이어서 모두 다 하는 것 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요새 최면술하는 사람들이 자기최면(自己催眠)을 통해 아무 생각 없는 지경에 들어 갑니다. 막연히 마음을 희미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있는 잡념망상을 없애어 무아지경에 도달합니다. 이들은 최면에 들어선 때가 가장 기분 좋은 때라고 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의 사건이란 다 불안 공포들 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모두 치워 버리고 마음만 가라앉히면 일시적으로 <수다원과>가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최면에 들었을 때에만 최면력에 의해 나타난 세계이고 마음을 깨달아서 성위에 들어 간 것과는 물론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번뇌망상이 없는 <수다원>의 경지에 들어가서 산하대지가 다 없어진 이런 사람이 죽으면 천당에 태어나게 되는데 하늘 세상에 태어나서 보면 아직도 미세한 망상, 적은 잡념의 버릇이 조금씩 남아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가 보입니다. 그런데 천당은 모든 게 뜻대로 되고 부족한 것이 없이 만족하고 너무 편하고 즐거워서 공부가 안 됩니다. 마치 부잣집 자녀들이 돈 쓰느라고 공부 못하듯이 자기의 선정(禪定)·삼매(三昧)의 힘으로는 하늘나라의 즐거움을 이겨가며 고도의 수행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인간 세상에 다시 내려가서 수도를 더 해야겠다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어느 집에 태어나야 불도를 만날 수 있으며 어려서부터 출가를 해서 수도를 마치고 또다시 하늘나라에 올라올 수 있을까를 살핍니다. 그리하여 늙도록 아들이 없는 집, 그리고 불교하는 집에 태어나서 7, 8살만 되면 절에 데리고 가서 일찍 중이 되도록 하는 그런 부모를 선택합니다. 늙은 부모 자기는 불도수행을 못 했지만 아들이라도 부처님께 바쳐서 큰 복을 짓자는 불심으로 그렇게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있는 나라, 불심이 있는 집안에 태어나서 한 평생 공부를 더 하면 나머지 번뇌망상이 더욱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한 번 더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천당에 다시 가더라도 그때는 미세한 번뇌마저도 끊어지기 때문에 천상락(天上樂)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선정을 닦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일왕래(一往來) 한번 또 <왔다 간다>고 하고 사다함(斯陀含)이라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 세상에 한 번 더 왔다 가기 때문에 <일왕래>(一往來)라고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 마음에 번뇌 망상이 있음으로써 오고가는 흔적이 나타나는 것이지, 몸뚱이도 세계도 없어진 경계에서 정신 하나만 오로지 깨어 있을 때는 무한대의 우주가 그대로 다 내 마음 뿐이어서, 이 세상에 왔다 간다 하지만 내 본 마음에서 보면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그대로 하나일 따름입니다. 다만 육체가 온 것이고 생각이 간 것입니다. 육체와 생각을 이미 초월하여 마음의 본바탕을 찾은 나에게는 오고 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세상 한번 왔다 가는 것도 이름만 왔다 가는 것이지 마음자리 자체는 왕래를 하지 않은 것이며, 육체가 그런 것이고 생각이 그런 것이지 우주 전체가 그대로 마음인 입장에서는 왕래할 수가 없는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사다함은 왕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왕래하지 않은 것이고 우리 마음 그게 곧 사다함인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世尊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解 義] <아나함>(阿那含)은 <오지 않는다>는 뜻이니 편안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정도가 된 셋째의 성위(聖位)입니다. 인간 세상에 다시 안 오고 천당에서 그대로 천당의 향락을 돌아보지도 않고 선방처럼 공부할 수 있는 삼학년생입니다. 자기의 참선하는 정진력(精進力)이 용맹스럽고 아무 생각 없는 정력(定力)이 깊고 견고해져서 주위의 향락에 조금도 끄달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수다원과>를 증득하면 비로소 성인의 류에 들은 것인데, 이 성과(聖果)의 일학년인 수다원과에 들어간 뒤 이학년인 <사다함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수행을 해야 하고 삼학년인 <아나함과>에 오르기까지는 얼마나 수행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칠래과>(七來果)·<一來果>(일래과)·<불래과>(不來果)라고 이름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닦은 복력(福力)으로 말하면 국왕·대신이 되고 부귀할 복력이 있지만 일부러 어려서 출가하기 좋도록 조실부모할 집에 태어나서 일찍 출가해서 평생 정진만 합니다. 이렇게 한평생 수도만 하다가 또 죽어서 천당에 가보면 이 세상 잠재의식이 움직이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에 내려왔다가 또 올라갔다 하기를 일곱 번이나 하는 동안이 제일과인 <수다원과>(須陀洹果)이므로 칠래과(七來果)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곱 번 왕래를 한 다음에는 사다함에 들어섭니다. 그래서 사다함과에서 한 번 더 왕래하는 것을 합하면 모두 팔왕래(八往來)가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왕래하면서도 왕래가 아닙니다. 천당에 갔을 때나 인간 세상에 올 때나 변하지 않는 자리가 있어서 우리의 마음자리, 성품자리가 그런 꿈을 꾸고 꿈이 깨면 생시인 것처럼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도 생각이 저 혼자 갔다 오고 업이 독자적인 생명이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내 우리 마음이 오고가고 하는 것인데 이 마음의 본체는 오고 가는 것이 없으며 변하지 않는 자립니다. 거리 내외가 없어서 마치 나와 몸뚱이가 둘이 아니어서 다리도 손도 배도 등도 다 나이고 몸뚱이 부분이나 전체의 구별이 없이 그것이 다 나인 것과 한가지로 온 우주가 <나>이며 전체가 나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함>이 천상에서 정진만 하고 세상에 내려가지 않지만 그러나 실로는 안 간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우주에 꽉 차서 가고 안 가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로는 가지 않는 것도 없다(實無不來)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位着我人衆生壽者

 

[解 義] 절에 가면 지금도 나한(羅漢)님, 오백 나한이 있는데 아라한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법을 얻었으면서도 일부러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무유법(實無有法)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내용이 있어서 이것이<아라한>이다」라고 할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큰일입니다. 실로는 나한이 됐다 해도 <아라한>이라 지목할 수 있는 그런 이치가 없으니 이 대목 참 어렵습니다. 이 대목이 사학년 졸업반의 마지막 문턱입니다. 나한님들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내가 사학년생입니다.」이런 생각을 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상(卽爲着我人衆生壽者相)이 꽉 남아 있는 사람이어서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느니 하고 중생살이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 장만하는 게 중생상(衆生相)이고 오래 살려니, 칠십, 팔십 살려 하는 그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공부도 안하고 나중에 애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늙어 빠진 뒤 할 일 없을 때에야 염불·참선하려 하지만 그 땐 이미 힘이 다 빠져서 참선해도 안 되고 염불해도 안 됩니다. 참선이나 염불은 젊어서 미성년 때 하는 게 훨씬 좋은 건데 내가 오래 살겠거니 믿고서 할 일 다 하고 늙은 뒤에나 천천히 해 보려는 것도 <수자상>의 그릇된 생각입니다. 아라한이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그 이치를 깨달아 얻은 것이 <아라한>이라면, <아라한>은 곧 내가 얻은 것이니 얻어진 법이 있고 얻은 내가 있게 되며, 법은 객관이고 나는 주관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주관인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면 그건 주관 객관이 벌어져서 상대가 안 떨어지고 절대 지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벌어져서 결국은 중생을 완전히 여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原 文 : 世尊 佛說 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쟁삼매를 얻으면 남이 무슨 말을 해도 대꾸를 안 합니다. 예쁘다 해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밉다 해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뭘 줘도 아무 생각 없고 빼앗겨도 아무 생각 안 합니다. 항상 남과 다투지 않아서 무슨 소리를 해도 다른 데 가서 그 소리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누가 법문을 해도 「아 법문 잘한다.」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만일 옳다 그르다 하면 그것도 시비가 있는 것이고 번뇌가 있는 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체 중생과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삼매를 얻은 것이 나한이고 나한이 되면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인데 도대체 마음을 탁 놓아 버리어 자기의 모든 번뇌를 쉬고 나면 현실 세계 이게 모두 공인 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제 사학년의 아라한과를 얻은 것을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수보리에게 「일체 사람과 시비를 안 하고 항상 마음이 편하고 그런 무쟁삼매에 들어서 일체의 다툼을 안 하는 그런 인간이 됐다. 수보리는 특히 모든 나한 가운데 오백나한 가운데 가장 제일이다. 수보리 이 사람은 제일 욕심을 멀리 했다. 그 에게는 아무 사건이 없다. 그래서 남과 시비를 안 하는 <아라한>가운데도 특등 <아라한>이 됐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나는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 이런 생각은 안합니다. 만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선 곧 「수보리가 그 마음이 고요한 나한도의 다툼 없는 나한 중 나한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제일 아라한이 될 수도 있고 진짜 나한이 될 수도 있지만 나에게 <아라한>을 증득했다는 생각이 조금만이라도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제가<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긴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하셨습니다. 아란나행(阿蘭那行)이란 다툼 없고 욕심을 여읜 무쟁삼매(無諍三昧)의 행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수보리는 <실무소행>(實無所行) 실제로 마음 닦은 게 실천한 게 아무 것도 없고 수행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란 무학(無學)이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지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이제 사학년이 되어 어려울 게 없는데 실제는 아무 수행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없는 그런 무위법(無爲法)의 행을<아란나행>을 좋아 한다고 한 것입니다.

 

 

[說 義]  

 

▶마음이 가고 마음이 온다.

우리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고 육도세계를 돌아다니고 윤회를 하고 그것이 다 번뇌의 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번뇌의 잠재의식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떠나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며 본 마음자리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천당에 가도 그 실상 자리, 자기 근본정신이 올라간 것이지 망상 그것이 자체가 있어서 본마음을 떠나서 올라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이 우주에 편만(遍滿)했다, 즉 크다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작은 거냐 하면 바늘가지고 찔러 볼 수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거면서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또 크기로 말하면 비행기 타고 광속(光速)으로 몇 억만년을 달아났다 하더라도 그게 나고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극소(極小)안에 무한대가 들어 있고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한한 시간을 달렸다고 해도 내내 돌아앉을 자리도 없는 거기입니다.

마치 손바닥만 한 거울에 동서 이십 리가 되는 서울이 다 비춰 들어오듯이 그런 건데 사실은 그 거울 속으로 뚫고 나간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거기 동서남북이 있고 왔다 갔다 하고 전차가 다니고 북악산도 있고 비행기도 떠다니고 하는 것은 눈이 속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길이 있지마는 과학으로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왔다 갔다는 말도 그거는 꿈속에 하는 소리입니다. 지상이나 천당이나 다 공간이 있고 천당 있는 데가 지옥 있는 데고 극락세계 있는 데가 사바세계 있는 데고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확실히 거래(去來)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육체도 <거래>를 안합니다. 내내 그 자리니까 거래할 곳이 없습니다. 사실은 거리가 있다 해도 안 되고 없다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왔다 갔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게 도대체가 이게 망상이고 마음으로 생각뿐이지 사실은 그런 건 없는 것이며 형상으로 나타난 것도 그런 불가사의였고 이건 크고 저건 작다고 하지만 망상일 뿐입니다. 간장독을 종지 안에 집어넣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미친놈이라 할 겁니다. 몇 짐의 물이 들어가는 독이 찻잔보다도 작은 종지 안에 어느 모퉁이 하나도 남지도 않고 딱 맞게 들어가 버리는 도리가 마음 법입니다. 그러면 간장 종지를 확대해서 넣어졌거나 큰 독이 축소해서 줄어들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는 돼야 할 겁니다. 그런데 둘 다 작고 큰 그대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조금 있는 것은 이 크다는 것도 거짓말로 큰 것이고 작다는 것도 거짓말로 작은 것이니,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작은 것이고 큰 것이 작은 것으로 큰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다 꿈이기 때문입니다. 꿈으로 크고 작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작은 것도 반드시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생각이지 참말로 큰 게 아니고 작다고 생각하는 간장 종지도 생각이지 실제로 작은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처님의 신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화엄의 도리가 아니면 참말로 성불할 사람도 없고 불법을 얻을 도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물질 자체도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있긴 있으되 진공으로 있는 것이고 사실로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걸로 있기 때문에 이게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니까 인제 여기 아무 것도 없는 데라 하여 아주 없는 거냐 하면 그건 없는 걸로 없는 게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게 있고 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있어도 거짓으로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거냐 하면 또 이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게 참말로 없는 것이지 없는 걸로 없는 그것은 없는 걸로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의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있다고 하려면 부득이 <묘유>라고 하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존재라 그럽니다. 우리가 업(業)이 달라서 안 보이는 것뿐이지 여기도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고 다 건립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대로 앉아 잠이 들면 제가끔의 꿈을 각각 꾸는 것과 같습니다. 독립만세 부를 땐 전부 묶여 들어가서 조금 기대서든지 숙직실이고 유치장이고 빽빽하게 서 있습니다. 밤낮으로 그래 가지고 잠깐 자는 동안에 꿈도 꾸고 그러는데 한 사람은 서울을 차려 놓고 하나는 부산을 건립해 놓고 하나는 대구를, 또 다른 사람은 평양을 건립하고 모두 이렇게 제가끔 백가지 천 가지 꿈을 꾸어도 조금도 혼란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공간을 분리해 가지고 그렇게 꿈을 꾸는데 그게 꿈이기 때문에 될 수 있지 현실 같으면 불가능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가 천당세계인 줄 알고 어떤 사람은 여기가 지옥으로 되었고 그런데 그게 모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존재 안에 천당·지옥·극락세계·사바세계가 다 있습니다. 그것이 큰 걸로 작은 것이므로 그렇게 되는데 이 실상을 우리가 깨닫기 전엔 모릅니다. 우리는 실상자리를 말로는 이렇게 하고 또 말들을 때는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지만 말 뚝 떨어지고 돌아서면 깜깜해서 「이건 촛대고 저건 나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하고 현상계에 끄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돌은 물이 아니라고 하고 불은 언제나 물이 아니라고 하고 이렇게 자꾸 해오다가 처음엔 속아서 그랬지만 나중에는 진리라는 고집이 되고 법집(法執)으로 됩니다.

 

▶삼매(三昧)는 마음의 정립

그래서 먼저 참선(參禪)을 하든지 염불(念佛)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합니다. 번뇌 망상을 쉬는 방법이 팔만사천가지로 많은데, 자꾸 마음공부를 해서 마음을 안정해야 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일념(念佛一念)에 들어도 하루 종일 여섯 자 그 소리뿐이지 다른 잡념 망상은 다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을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었다고 합니다. <삼매>란 인도 말이고 우리말로 하자면 「마음이 똑바로 정해졌다. 제자리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이리저리 끌리고 현상에 이끌리고 사랑에 이끌리고 돈에 목매어 번뇌 망상에 흔들리고 했는데, 이런 모든 것, 무엇을 보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 그때엔 마음이 제자리에 바로 선 것입니다. 「일체 생각 없이 마음 저 혼자 아무 상대 없이 꼭 제대로 마음이 섰다.」 대체로 이런 의미를 가진 말이 <삼매(三昧)>입니다.

요새 정립(定立)이란 말을 쓰는데 인생관이 정립됐다, 국가관을 정립한다, 확실하게 결정을 해서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서 있다, 그런 뜻입니다. 불교에는 또 선정(禪定)이란 말이 있습니다. 참선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도 없이 <화두(話頭)>만 뚜렷한 그것을 선정이라 하고 삼매에 들었다고 합니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진언이나 어떤 공부를 해서 내 몸뚱이도 없고 생사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며 허망한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깨끗한 정신입니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겨져서 잠도 못자고 마음도 편치 못한데 이 마음이 딱 정립이 돼서 가장 깨끗한 기분, 잡념이 하나도 없는 또렷한 마음만 남아 있을 때, 마음이 정립되어 선정 삼매에 들어섰을 그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안락할 때입니다.

잡념 때문에 잠을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그랬는데 이제 삼매에 들어서 망상이 끊어졌으니, 성인의 지위에 처음 들어섰다, 참여했다는 뜻으로 초과(初果)라 하고 <입류(入流)>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수다원>이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동서남북 하늘 땅 천당 지옥으로 쏘다닙니다. 어디엘 가면 좋은 음식 좀 얻어먹을까? 어디가면 좋은 사람을 만날까 이런 번뇌망상으로 잠을 못자고 부산 갔다 대구 갔다 하며 이런 짓거리 저런 짓거리로 업(業)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번뇌의 마음을 버리고 대구 부산 생각하던 그 마음이 없어진 것뿐이지 대구나 부산 생각하던 마음자리까지 어디로 간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마음자리>만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종류에 들어섰다고 해서 어디로 들어갔거나 올라간 게 아니고 아무데도 들어선 데가 없습니다.

미친 사람이 역시 때가 되었는지 밤인지 낮인지 시간도 분간 못하고 밤새도록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굶었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몸이 축이 안 나고 그것도 마음 하나이기 때문에 기운이 그렇게 세어집니다. 누구든지 때려 뉘일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깠을 때 고양이나 개가 달려들면 암탉이 성을 내서 달려들면 개도 도망을 가고 고양이도 도망을 갑니다. 마음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암탉이 모성애(母性愛)에서 무서운 마음으로 달려드는 때문입니다. 정신이 통일되면 마음에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어쩌나 하는 이런 것 때문에 해탈이 잘 안됩니다. 견성을 해 놓고도 깊이는 못 깨달아 앞으로 점차로 보림(保任)해 가지만 돈오(頓悟)를 해서 자꾸 올라갑니다. 처음에는 깨치고도 범부 때와 마찬가지어서 때가 되면 꼭 밥 먹어야 되고 밤 되면 자고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게 먹는다 굶는다 낮이다 밤이다 삼일 되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되고 모든 사물을 무심코 대하게 되어 그때는 상(相)이 상이 아닙니다. 산이라고 보면 다 산이고 물이라고 보면 태평양 바다가 되고 불이라고 볼 때는 그 놈이 큰 불바다가 되고 그러니 그때는 보는 대로 마음 쓰는 대로 다 되어 버립니다. 이 자리가 우주의 시간 공간의 본체이다 보니까 현상계는 다 본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도가 거기까지 안 가면 그렇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소위 팔지보살(八地菩薩)을 육학년 졸업이라 치면 오학년 삼학기쯤 되는 정도에 가면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 되어서 만물이 그 앞에서는 공해 버립니다.

이 자체는 본래 공한 것인데 참말로 있는 거라는 그 망상 때문에 정말 있는 것 같이 되어 있고 바윗돌은 중력이 있는 건데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리 들려 해도 안 들리고 조그만 것은 한 손으로 들리고 그래집니다. 그런데 그 중량이 다 마음으로 정한 것이지 중량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입니다. 현실도 하나의 꿈인데 여기는 밝은 광명이 나오니 보이고 저기는 광선이 막혀서 껌껌하고 한 이것이 하나의 우리 망상이지 사실로 이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보리존자께서 이런 공한 도리를 잘 알고 계시고 구공자리까지 잘 체득한 어른이니까 부처님께 「들어간 게 없고 오고 간 게 없고 얻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사뢰었던 것입니다.

마음 스스로는 그렇지만 또 그게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이며 또는 저 물질 세계에도 안 들어갑니다. 만일 거기 가서 좋다 궂다 생각 안 낸다면 그게 안 들어가는 겁니다. 산보고 좋다 궂다 하든지 남녀가 서로 보고 좋다 궂다 그러면 벌써 들어간 것이니 남자에게 들어가고 여자에게 들어가고 빠진 것입니다. 색(色)이란 형상·물질계·현상계니 그리고 과학적·철학적으로 따지는 생각은 무조건 다 내 버리고 나면 산보고 산이라고 해도 산이란 생각도 산 아니란 생각도 없이 무심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 소위 남이 날 보고 「미친놈아 도적놈아」해도 나는 탓을 안 하고 조금도 언짢아하지도 않으며 또 거룩하고 장하다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해서 존경해 줘도 나는 좋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거기 안 들어간 것입니다. 조금만 칭찬하면 좋아서 우쭐하고 욕하면 성내고 그러면 거기 들어간 것입니다. 남이 나를 비방하고 욕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다 거짓말이고 헛소리인 것인데 무슨 입장이 곤란합니까? 육신에나 입장이 통하지 말하는 마음자리한테는 입장이 없습니다. 칭찬하고 헐뜯는데 끄달리면 벌써 거기 빠진 것이고 그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벌써 누구한테 매여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는 것이고 요리조리 놀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새 보면 일본서 나온 좋은 향을 절에서 많이 갖다 씁니다. 냄새 맡기 좋다고 부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하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구린내 나는 것을 가지고 불공을 한다 해도 싫다 안 하고 향내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불공하는 사람 자기 정성일 뿐이지 물질이 좋고 궂고는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같은 값이면 남이 좋아하는 것 가져 오고 싶어서 그러지만 역시 수다원 초과만 증득해도 자기가 오고 가지도 않는 항상 그대로일 뿐 아니라 일체의 객관에도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좋지도 않고, 궂은 음식이라도 싫지도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떤 큰 부자가 부처님의 비구 스님네와 바라문교의 승려를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바라문교는 우리나라의 민속신앙이나 기독교처럼 창조주인 브라흐만 신이 있다고 믿는 외도(外道)였습니다. 이 장자가 바라문교의 거두들을 수백 명 초청하고 또 부처님 제자들을 오백 명 초청해서 점심 대접을 잘했는데 그 나라 국왕도 잘 못 먹어 보는 진미공양을 차려 놓고 가만히 지켜봅니다. 거지 밥 주듯이 먹든지 말든지 줘 놓고 보지도 않으면 그건 또 실례이므로 가만히 지켜보는데 이 바라문들은 생전 처음 먹는 음식을 얻어먹으니까 마음이 좋아서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서 입도 뻥긋뻥긋하고 눈도 끔뻑끔뻑 코도 쫑긋쫑긋하고 어떻게 좋아하는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런데 머리를 빡빡 깎고 누더기 옷을 입은 비구승들은 좋아서 먹는지 싫어서 억지로 먹는지 알 수 없이 담담하게 먹습니다.

장자는 그 다음에 먼저 왔던 그분들을 한번 또 청했습니다. 그때는 꽁보리밥에다 텁텁한 된장 좀 지지고 시래기 좀 무치고 생비지에 간장 좀하고 먹으라고 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라문들은 생전 그런 건 구경도 못한 맛없는 음식이므로 억지로 숟가락을 놨다가 댔다가 하면서 상을 찡그리고 안 먹을 수 없어서 몇 술씩 뜨고는 숟가락을 놓습니다. 거지 차림의 비구승들은 가만히 보니 역시 먼젓번과 같이 담담하니 한 그릇씩 반찬 하나도 안 남기고 싹싹 긁어 다 먹습니다. 그 얼굴을 보아도 좋은지 궂은지 모르겠고 아무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나중에 공양을 마친 뒤에 비구승에게 물어 봤습니다. 「아, 스님네들 죄송합니다만 저번의 초청은 제가 복을 지으려고 힘껏 차렸는데 바라문 승려들은 그때 참 기쁜 마음으로 자시는 걸 제가 보고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스님네들은 억지로 먹는지 좋은 마음으로 자시는지 얼굴에 나타나질 않아서 하도 궁금하여 이번에는 일부러 내가 시험 삼아 그래 본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스님네들은 담담히 다 잡수시고 반찬 한 젓갈도 안 남겨 놓았고 그것도 싹싹 씻어 그 물까지 다 마시고 그러니 그것 먹기 싫은 걸 조작으로 억지로 그렇게 잡수십니까? 좋은 음식을 자시든 나쁜 음식을 자시든 똑 같은 얼굴로 지시는 그 내력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노장 비구승 한 분이 일어서며 「비구승 입은 아궁이와 같습니다. 불 때는 아궁이는 썩은 놈을 때도 아무 말 안하고 장작 좋은 것 폭탄 터지듯 잘 타는 놈을 때도 좋다고 안하는 것이나 한 가지입니다. 무심함으로 해서 그걸로 생사를 초월하려고 하는데 음식 좀 맛있으면 좋다고 까불고 나쁜 거 준다고 찡그리고 하면 도가 어디에 있고 언제 생사를 면하겠습니까?」 그런 뜻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백용성(白龍城)스님이 통도사(通度寺) 건너 안산이 소금강이라 하여 경치도 좋은 데고 해서 거기 내원암(內院庵)에 계실 적입니다. 부산의 혜월(慧月)스님이 물 떠 오라 해서 물 떠 오니까 그게 불법이라고 하듯이 그와 같은 도인 입니다. 백용성 스님이 초심학인들 데리고 수고를 한다니까 혜월스님이 수박을 하나 사 가지고 왔었습니다. 마침 오니까 용성 스님이 점심상을 받아 놓고 다시마 튀김을 입에 넣고 씹는 판이라 혜월노장님이 막 들어가 밥상머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로 「아 그거 맛이 어떻습니까? 맛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러니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용성스님 대답이 좋아서 먹는 것도 아니고 나빠서 먹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거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 「그저 먹을 뿐입니다.」 달리 또 어렵게 하는 법도 있지만 쉽게 남도 알아듣게 하기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다 같은 도인들끼리의 경지이니 이렇게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나도 한번 흉내낸다고 지금부터 한 삼십년 전 해방 전입니다. 어떤 신도가 내가 항상 다 떨어진 장삼을 입고 다니니까 모시 장삼을 해 왔습니다. 내가 입을는지 안 입을는지 그것도 물어보지 않고 또 스님네 여러분을 청량리 청량사에 청해 가지고 음식을 차려 놓고 대접을 합니다. 나는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대접을 받았는데 나중에 장삼을 내 앞에 내 놓고 절을 하고 그럽니다. 그래도 나는 가만히 내 버려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을 새로 정하고 불명이나 하나 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그리 해준다는 말도 안하고 안 해준다는 말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남의 말처럼 그것도 남의 말이니까 덤덤히 있으니, 거기 같이 갔던 스님들이 화를 내고 야단났습니다. 대보살신도가 와서 절을 하고 이러는데 본체만체하고 앉아 있으니 네가 뭐 그리 대단하냐는 겁니다. 자기들이 면구해서 못 앉아 있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말도 안하고 있습니다. 칼을 가지고 나를 찔러도 그건 자기네 일이고 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뒤에 나를 대단히 좋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촉(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부딪친다, 대지른다, 닿는다는 말인데 남과 서로 부딪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촉이 있지마는 가령 남녀 간의 촉이 제일 무겁습니다. 의복도 좋은 거 부드러운 것 비단을 입으면 몸뚱이 촉감이 좋아지고 색정(色情)이 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친 걸입으라는 겁니다. 전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칠십 노인이 아들딸도 없이 홀로 사는데 어떤 처녀가 스스로 자원해서 시집을 갔는데 처음에 명주옷을 해 주어서 색정을 회복시켜 가지고 아들을 낳아서 큰 인물로 길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다원과만 얻어도 이런 촉법에 안 걸립니다. 그러나 이런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얻어도 쓸데없는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좋다 싫다 하는 그 마음 쓰는 작용은 그대로 있는데 그게 어디 나가고 들어가고 했습니까? 그건 어디 나가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들어와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그대로니까 또 그게 나가 버렸다 해서 어디 오고 간 것도 아니고 그 자체 그대로니까 본연한 자체뿐이란 뜻입니다.

 

▶중생이 곧 부처

부처님께서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어 인도의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뱃속으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도솔천의 법상(法床 : 설법하시는 자리)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계신 채였으며, 또한 마야부인의 태중에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신 채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마치신 것입니다. 마음을 깨친 청정한 마음자리에서 보면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부처고 부처 아닌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며, 자기가 깨치고 나면 본래부터 자기가 부처인 것인데, 중생이 그런 줄 모르고 육체가 <나>라고 해서 마음이 참 나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관과 객관은 현상으로 볼 때에만 대립되어 있고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지 마음의 바탕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발과 머리 사이에는 서로 거리가 있겠지만 나하고는 발이나 머리는 다 같이 거리가 없습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몸뚱이는 어느 부분과도 거리가 없습니다. 등도 나의 등이면서 나이고 배도 앞가슴도 나의 배 나의 앞가슴이면서 그대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앞도 뒤도 없고 머리가 위고 발이 아래라고 하지만 머리가 나의 위도 아니고 발 또한 나의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경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작을 때는 바늘 끝 위에도 올라앉을 수 있고, 또 클 때에는 온 우주를 둘러싸고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그 크고 작은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거리나 경계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장 자리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렇게 우주에 꽉 찬 것이라면 그곳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의아심이 생길 수도 있고 마치 몸뚱이가 큰 코끼리를 보는 몸뚱이가 날렵하고 작은 원숭이가 「저렇게 큰 몸을 어떻게 움직이며 사는가.」하고 걱정하고 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경우 마음이 들어 왔다 나갔다 하는 것처럼 이 마음이 작을 때에는 바늘 끝에 올라앉을 수도 있고 클 때는 우주에 꽉 찹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커졌다 작아진 것도 아닙니다. 마음으로 바늘구멍을 들여다 볼 수도 없지만 마음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며 바늘 끝에 날름 올라앉아도 오히려 넓습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이 거기 올라간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작고 크고가 자유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인간 세상을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지만 실로 올라간 것도 내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라한도(阿羅漢道)는 소승(小乘)의 이상

불교에서 소승·대승 나누는 데 소승의 아라한도는 소승불교의 성위(聖位)로서 곧 번뇌를 끊어가지고 망상을 쉬고 쉬고 하여 망상을 완전히 끊어서 남음이 없으면 이것이 나한인데 소승은 이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것을 소승열반(小乘涅槃)이라 하는 데 대승에 비해 마음의 경계가 적으므로 많은 사람을 실을 수 없다는 뜻으로 소승(小乘)이라 한 것입니다. 이들은 번뇌 망상만 끊으면 된다는 지론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마침내는 부서져서 수억만번 생겼다 없어졌다 그러는데, 이렇게 지구가 파멸되어 에너지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지구가 건립되고 그러는 것을 불교에서 생겨서(生) 있다가(住) 부서져(壞) 없어진다(空)는 뜻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나한이 되면 지구가 부서져 다 없어지는 이때에도 몸뚱이가 허공에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늙지도 젊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없고 정말 편한 사람입니다. 이 천지에 허공이거나 아니거나 아무 상관없고 지구가 없어지거나 원자탄으로 부수거나 나는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생사 밖에 뛰어나서 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 밖에 뛰어났으면서 보살들처럼 중생을 제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생제도만 하면 곧 부처님께서 될 텐데 소승의 나한들은 남의 말 안 듣는 중생들과 이래라 저래라 잘한다 못한다 그러다 보면 번뇌가 또 일어나서 생사 중생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번뇌가 안 쉬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중생제도를 못합니다. 중생 잘못하는 것을 보면 꾸짖고 때려 주고 싶고 그러니 그것은 탐진치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 제도하려다 나중에 도리어 중생이 되겠다는 것이니 소승불교는 결국 공부가 다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만 편한데 들어가 혼자 안주(安住)하고 있으니 이것은 염세주의입니다. 나한은 신통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천대천만 해도 십억이나 되는 지구이니 굉장한 우주공간이지만, 지구의 천백억배 되는 삼천대천세계에 하루 24시간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고 치면 그 소나기는 마치 우주 폭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뒤를 따라 연속 내려오니까 쭉 내려오는 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하나의 물방울의 연속인데 이런 소나기가 십억 백억의 지구에 하루 종일 내렸다고 하면 그 물방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나한님네는 그렇게 내린 비의 물방울 수를 다 알 수 있습니다. 전자계산기나 되면 모르지만 그 많은 빗방울의 수효를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으니 마음이 환하게 밝아서 다 보인다는 겁니다. 나한의 신통이 그만하면 그 마음이 그만큼 굉장하여 대자연계에 자유로운 힘도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나한의 특성 중 하나는 옳고 그른 것을 지킨다는 데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은 그르다는 한계를 두므로 자비심이 부족하고 대승심이 없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대승(大乘)의 자비 구세사상

대승 불법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가 다 되어 있으니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만 쉬라는 것입니다. 소승불법 모양 저 혼자 나한이 되어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초견성(初見性)만 해도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상좌가 잘못하면 때리고 그런 가운데 그걸 초월해서 종일 만나 시비를 하였지만 나는 만난 일 없고 시비한 일 없고 그런 심정에서 얘기해 주고 가르쳐 줍니다. 그 사람은 물론 얘기해도 안 한 거고 얘기 안 해도 안 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대승불법입니다. 대승불교의 이런 큰 불법을 성취하려면 이 몸뚱이를 초월하여 한국사람처럼 남 잘되면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도대체 남의 말 잘 안 듣는 그런 중생들 틈에 끼여 그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고 불법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중생을 교화했다, 그 공이 내게 있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하라.」 이것이 대승사상(大乘思想)입니다.

소승은 본래부터 번뇌망상이 있는 것이니 이것을 끊어야겠다는 것이고, 대승불법은 내가 망상을 안내면 된다. 그 망상 자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자리에서 생각을 일으키니 망상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는 탐진치가 있다고 하여 천만생을 돌아다니며 이걸 끊어 내려는 것이고, 대승불교는 「내가 망상을 자꾸 내기 때문에 번뇌가 계속되는 것이니 내가 생각 안내면 없다. 허공에서 망상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하여 근본적으로 생각을 안내려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빨리 끊어지고 훨씬 수월합니다. 예컨대, 가정에서 어머니가 애들이 잘못하면 나무라고 안 들으면 손찌검도 하고 때리기도 하지만 참말로 미워서 진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고 사람 만들려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철이 없는 어린애니까 그런 나쁜 일 못하게 하느라고 겉으로 그러는 것이고 자비심으로 하는 거지 참으로 저놈 때려 없애야겠다는 생각이라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 바로 잡기 위해서 빨리 부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아무 이해 상관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일러 주는 것뿐이며 대승불교는 처음부터 이렇게 나가기 때문에 종일 얘기를 해도 아무 피로를 모르는 실천이며 보살행이고 수행입니다.

그러나 나한들은 이런 것에 대해 귀찮은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안 들으면 다 내 버리고 그만 도망가 버립니다. 고약한 놈, 바른 말 바른 대로 해 줘도 안 듣고 귀에 담아 줘도 못 알아들으니 그게 미워서 못 봐 줍니다.

그러니 소승은 애초에 번뇌를 끊어야 하고 중생사회를 멀리 해야 한다는 염세적(厭世的) 불교인데 대해, 대승은 번뇌만 없으면 그 마음이 곧 보리 불성자리이며, 중생·마음·부처가 하나이니, 오로지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구세주의(救世主義)인 불교입니다. 대승불교는 마음을 깨치면 번뇌가 곧 보리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므로 걸림이 없습니다. 밥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대승불법은 그렇게 쉬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다 주다 줄 게 없으면 눈도 빼 주라」는 말은 몸뚱이가 내가 아니고 눈이 보는 게 아니며 이 오관이 아는 게 아니고 마음이 보고 아는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이 눈 때문에 못 볼 내가 아니니 중생을 위해 완전히 빼 주는 것이며 설사 못 본다 해도 그래도 좋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육신을 정리해 가면서 다리 하나 끊어 달라면 잘라 주고 피 좀 빼 달라면 뽑아 줍니다. 그리고 「이 몸뚱이 죽어도 좋다. 당장에 쓰러지지만 내가 더 용맹정진해서 누구보다 자아완성을 위해서 부처 될 수 있다. 그래서 우주에 자유로운 나를 확보 해야지 항상 육체가 나라는 생각에 이끌려서 좋은 일에도 시비하고 나쁜 일에도 시비하고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말 안 듣는 못된 중생들을 백번 천번 일러 주게 되더라도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안 들어도 그 사람 부처가 될 때까지 자꾸 따라다니며 일러 줘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성불하는 방법입니다.

 

▶이상사회(理想社會)는 청정한 마음으로부터

금강경도 이런 마음으로 가만히 읽으면 확실히 할 일, 못할 일, 구별이 납니다. 사람이 꼭 할 일이 뭐냐 하면 사람을 생사에서 꼭 건져내야 하는 일입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가는 고통을 면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1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없고 남과 안 싸울 수도 없고 싸워 봤자 다 버리고 가야 하는데, 밤에 갈는지 70년, 80년 살고 갈는지 모르고 돈이 많다고 밥을 두 그릇 먹느냐 하면 누구나 밥 한 그릇과 옷 한 벌은 마찬가지이니 밥 한 그릇 옷 한 벌 놓아두고는 다 남 주어라, 없는 사람들 내가 안 주면 속으로 날 얼마나 미워할까? 그리고 내생에 만나 형제가 되어 싸우고 자식이 되어 싸우고 곤란을 줍니다. 장학제도도, 병원도 만들어 직공들 처자 다 치료해 주고 직공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 온 나라 사람 불쌍한 사람 다 도와 주자. 벌어서 다 뭐 할 것인가.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다 버리고 갈 건데 보시나 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저만 살겠다는 욕심 버리고, 공산당은 한 사람이 독재를 해서 소처럼 개처럼 부려 먹으려 할 필요가 없어져서 세상은 공산당도 자본주의도 없어지고 평화스런 사회가 됩니다.

불교사상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도 편해지고 내 맘도 편해지고 이렇게 내 맘이 편하면 전 세계가 편해집니다. 내 말이 더러우면 온 중생이 다 더러운 사람이 되고, 내 맘이 청정해지면 온 국민이 다 청정해집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자유 평화롭게 하려거든 네 맘부터 바로 잡아라. 공연히 세상이 냉혹하다 국가가 어떻다, 정치하는 사람 나쁘고 부패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나쁘다고 해 봤자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선 너부터 고치면 모두 좋은 사람 돼 갑니다. 그러니 저만 착해지면 모두 착해 집니다. 따라서 불교는 사회 정화하는 기본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너부터 나쁜 데 가담하지 말고, 너 자신 하나가 정화되면 그러면 너를 대하는 사람도 다 너같이 된다. 「사람이 나쁘다.」 「세상이 나쁘다.」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쁜 길로 간다는 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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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若人(약인)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만삼천대천세계칠보)하야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是人(시인)의 所得福德(소득복덕)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是福德(시복덕)은 卽非福德性(즉비복덕성)일새 是故(시고)로 如來說福德多(여래설복덕다)니이다 若不有人(약부유인)하야 於此經中(어차경중)에 受持乃至四句偈等(수지사구게등)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一切諸佛(일체제불)과 及諸佛(급제불)의 阿多羅三邈三菩提法(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皆從此經出(개종차경출)일새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謂佛法者(소위불법자)는 卽非佛法(즉비불법)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오니 그래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신 것이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네 글귀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이 저것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니라.』

 

 

第八 依法出生分---모든 것 여기에서 나오다

 

 

[科 解]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의 의법이란 법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흔히 법, 법 하는데 세상에서도 법은 국회에 한 번 통과되면 다시는 변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만인이 누구나 다 같이 지켜야 합니다. 적어도 국회에서 다시 개정통과(改正通過)하기 전에는 변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법은 정당(政黨)이 한 번 바뀌면 변하게 되고 국체(國體)가 바뀌면 180도로 뒤집히기도 합니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모든 존재가 전자와 에네르기가 변하는 데 따라서 물리적(物理的)·화학적(化學的)으로 다 변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은 참된 의미의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알 줄 아는 알음알이의 힘은 어제도 오늘도 그대로고 24시간 안 변하는 영원불변의 존재입니다. 변하는 법칙은 찰나(刹那)로 변하는 것이니 잠시라도 1분 1초 동안이라도 안 변하는 것은 물질의 법칙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는 능력이 있는 이 마음만은 모든 욕심을 초월했고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없는 자성(自性)자리로서 법 중의 법이란 뜻으로 법왕(法王)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작용(作用)은 미워하고 좋아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모든 사고활동을 다 하지만 그 마음의 그 본체(本體)인 자성(自性)은 불변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의 작용은 착하려면 요순(堯舜)으로도 되고 악하려면 도척(盜?)으로도 되고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그러나 이렇게 변하는 작용은 물의 파도(波濤)와 같고 마음의 본체는 물의 수분(水分)처럼 변동이 없습니다. 수분은 얼음도 되고, 안개도 되고, 이슬도 되고, 파도도 되어 천만가지로 변하지만 물의 수분은 불변입니다.

이렇게 알 줄 아는 마음자리 그것이 법입니다. 말하기 전, 생각하기 이전의 자리, 오롯한 자기 정신, 이것이 우주의 진리고 가장 거룩한 자리이며 이것만이 법입니다. 그러니 법철학(法哲學)을 해도 부처님 법의 원리를 알면 다른 법은 그 지말(枝末)의 한 마디만 들어도 그 근본까지 다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성자리 그 근본만 깨달아 가지고 가만히 지키고만 있으면 그것은 죽다가 못 죽은 반 송장에 불과한 소승(小乘)일 뿐입니다. 그래서 무소부지(無所不知)로 아는 것은 모르는 것 없이 다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이 없어서 마음대로 잘 안되어 무소불능(無所不能)은 안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대성인(大聖人), 완전한 인격자(人格者)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본성(本性) 자리를 깨달아 가지고도 중생을 위해 봉사(奉仕)해야 되는 것이니 계(戒)를 가지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야 합니다. 만일 소승모양 자성자리만 지키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기만 하면 계행(戒行)을 가질 필요도 없고 보살만행(菩薩萬行)을 닦을 필요도 없으며 이 마음이 까딱하지도 않고 적멸(寂滅)만 지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와서 중생을 위해 온갖 괴로움 다 건져 주고 마음자리를 일깨워 주고 발심(發心)해서 보살행을 하고 성불(成佛)하도록 까지 이끌어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남 하는 것 나는 안하고 남 먹는 것 나는 다 안 먹으면서 오직 남만을 위해 일해 주고 돈도 벌어 주고 약도 사서 주고 병도 치료해 주고 법문도 잘 가르쳐 주고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할 뿐입니다. 남 하는 것 다 하고 먹을 것 다 먹으며 세상 생긴 대로 따라 하기만 해서는 세상에 나온 뜻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안됩니다.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란 「이렇게 법에 의지해서 마음을 내라, 출생(出生)해라, 사업을 해라, 중생을 제도해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내용을 모르고 이 네 글자만 가지고는 백 년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듭니다. 이런 진실한 자성에 의지해서 참선을 한다든지, 보리심(菩提心)을 발했다든지, 사상이 바뀌어졌다든지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리심을 발했다는 것을 요새 말로 풀어서 말하자면 범부가 육체 때문에 탐진치(貪瞋痴)에 얽매어 밥 세 그릇 먹으려고 싸우고 죄를 짓기만 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인생이란 그게 아니고 내 마음을 닦아야 하겠구나, 육체생활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물 불 헤아리지 않고 온갖 욕심으로만 살아 왔는데 그것은 다 헛된 것이고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생활이었구나, 물질본위의 생활, 객관 현상에 구속된 생활을 버리고 오직 마음의 성품을 찾고 온 중생을 위해서 보살행(菩薩行)을 해야겠구나.」하고 참다운 인생관·우주관에 입각한 사상의 전환(轉換)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금강경 가운데서 나온다(一切諸佛 及諸佛阿?多羅三?三菩提法 皆從此經出)」는 경문이 이절의 대문(大文) 가운데 있으므로 「이 법에 의지해서 모든 법이 나온다.」는 뜻으로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라 한 것입니다. 이 경은 곧 마음 깨치는 법을 말씀해 놓은 경중의 경인데 부처님도 다름 아닌 마음을 깨치신 분이므로 부처님도 이 경에서 나온다 한 것이고 또 깨달은 마음의 경계가 곧 이 금강경이며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도 결국은 이 경에 의지해서 나온 부처님 마음이므로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도 이 경에서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금강경도 마음이고 부처님도 마음이며 부처님의 깨달은 법도 다름 아닌 마음이니, 알고 보면 셋이 다 같은 한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도 말로 하자니까 그렇지 실제로는 나온 것도 아니고 의지한 것도 아닙니다. 나오고 들어가는 자리가 아니고 얻을 것도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으며 글로 옮길 수도 없는 것이 마음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 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解 義] 『수보리야! 네 마음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가득 찬 칠보(七寶)를 가지고 남을 도와주면 그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삼천대천세계란 말이 여기 나오는데 10년 20년 절에 다닌 신도 보살님들에게 그 뜻을 물어보니 모른다는 것입니다. 들으면 인연된다 하여 부지런히 다니며 듣기만 들었지 많이들은 말이기는 한데 그 뜻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알려는 생각도 안합니다.

삼천대천세계란 말은 불교 용어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기본용어인데 삼천대천은 하나의 숫자의 단위입니다. 그 당시 인도에는 소천(小天)·중천(中天)·대천(大天)이라 했는데 우리가 백· 천·억·조·경 하듯이 고대 인도 사람들의 숫자의 단위입니다. 소천이라 함은 하나에서 백 천까지 올라간 것, 천이 하나다. 천쪼가리 모아 놨다, 금을 천개 모아 놓았다, 그런 뜻이니 곧 천이란 말입니다. 중천이란 소천을 천배 한 것, 곧 백만을 말하며 대천이 중천을 천배한 것이니 백만을 천배하면 십억을 가리키는 바, 대천이란 천 가운데 마지막 큰 수란 뜻입니다. 중국은 단·십·백·천하여 만 이상이 되면 배로 나가지만 만 까지는 열배로 올라가는 십진법(十進法)입니다. 하나를 열하면 십이라 하고 열을 열하면 백, 백을 열하면 천, 천을 열하면 만이 되는 것이 십진입니다. 만에서부터 억까지는 만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부터는 배수로 올라가서 억을 억하면 조고, 조를 조하면 경이고 이렇게 중국에는 24자의 24개 단위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 발달한 때가 아니니 그 이상의 숫자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이런 수의 단위가 중국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예컨대 아승지(阿僧祗)란 무수(無數)란 뜻인데 수가 하도 많으니 무수하다는 소리가 아니고 이 무수에도 한개의 숫자입니다. 그러면 이 숫자의 단위가 몇자나 되느냐 하면 중국이 24자 뿐인데 대해 인도는 220자가 배수로 올라갑니다. 나중에는 불가설 불가설 불찰미진수(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라는 숫자가 있는데 이 지구를 조직하고 있는 전자 수 만큼이나 될 겁니다. 이 지구를 조직한 전자알을 실제로 헤아려 센다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그 숫자의 단위들이 하도 복잡하여 나한과 보살들이나 환히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인도의 수학 가운데는 영산법(影算法)이라고 부르는 수학이 있습니다. 그림자 영(影)자와 계산한다는 산(算)짜를 써서 영산법(影算法)이라 합니다. 큰 밭에 콩을 심어 놓고 이 밭에서 나올 콩이 몇 알이나 될까 물으면 영산법하는 사람들은 콩밭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몇섬 몇말 몇되 몇홉 몇직 하고 다섯개 남는 것까지 계산해 낸다고 하는데 실제로 나중에 보면 다섯알이 남는다고 하여 그렇게 신통하게 안다는 말이 전해 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손가락을 보고 하나·둘·셋 하다가는 그것도 잃어버리고 다섯조차도 못 셉니다. 그러나 어른은 세어보지 않아도 대번에 다섯개는 압니다. 따져보고 아는 게 아닙니다. 그렇듯이 마음에 망상이 없는 때는 고단위의 숫자가 탁 보입니다. 삼천대천세계라면 이런 지구덩이가 십억개라는 뜻입니다. 삼천이란 내내 삼자승했다 하는 소리인데 천을 삼자승한 것이 십억이므로 그런 지구덩이 십억이 모인 것을 대천세계라 합니다. 삼천하면 대천이고 대천하면 삼천인데 한문하는 사람들이 멋으로 삼천대천세계라고 엄청나게 쓴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란 십억이나 되는 해·달·지구·별들의 세계란 뜻이 됩니다.

만삼천대천세계칠보이용보시(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란 십억의 해·달·별들에다 금·은·유리·마노·자거·산호·진주(金 銀 琉璃 瑪瑙 자거 珊瑚 眞珠)의 칠보를 가득 채워 가지고 그 많은 칠보를 사람만 보면 한 섬씩 주어서 없는 사람 다 잘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칠보 한 섬만 잘 굴리면 몇 십억씩 될 것인데, 이렇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오직 남만 잘 살도록 사용했다면, 가령 고아원(孤兒院)도 수 없이 많이 세워서 다 잘 자라서 학교에 잘 다니도록 해 주고 양로원(養老院)도 많아 만들어 즐겁게 해 주고 무료병원(無料病院)·무료극장 등 온갖 좋은 일을 다 했다고 가정을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사람의 복덕이 금생, 내생에 받는 이 사람의 복(是人所得福德)이 얼마나 되겠느냐,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寧爲多不).』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原 文 : 須菩提言 甚多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福德多

 

[解 義]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해서 많은 중생들을 잘 살게 해준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부처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해, 수보리존자는 이렇게 사뢰었습니다. 『참 많습니다. 기가 막히게 복이 많을 것입니다(甚多). 세존이시여! 제가 많다고 말씀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금은 칠보를 대천세계에 가득 채워 가지고 나누어 주자면 아무래도 한해 두해가 걸려도 못 나눠 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몇 만년 안 죽고 살아가지고 끝없이 많이 보시하고 내가 죽어 다시 태어나서 또 보시하고 하여 천생 만생해도 다 못 나눠 줄 정도이니 그렇게 복만 지으면 대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물 한 그릇 떠주고 큰 부자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물 한 그릇이 사람 살리는 수도 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런 찬물이 있습니다. 밥 한 그릇 가지고도 그럴 수도 있는데 엄청나게 복을 많이 진 이런 사람의 복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렇게 큰 복을 엄청나게 많이 지었으니 가령 억만겁 드나들면서 전 세계 화폐를 혼자 다 차지할만한 그런 복을 지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큰 복을 지어 놓으면 제가 돈을 일일이 벌어 쓰는 게 아닙니다. 자기한테 신세 진 사람들이 형제·부모되어 가지고 다 돈 벌어 놓으면 그런 집에 태어나 돈 공짜로 막 씁니다. 가령 상속법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재산이 또 돌아오고 복을 지어 놓으면 설사 돈을 쫒아 내 버려도 쫒아 낼 수 없이 소낙비 오듯이 막 퍼부어 밀려옵니다. 무엇을 해도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됩니다. 반대로 복을 못 지어 놓으면 엎어져도 뒤통수가 깨지고 안 되는 사람은 온 시민이 도와 줘도 안 되고 대통령이 따라 다니며 밀어 줘도 그것 때문에 병이 나서 죽습니다. 그 돈이 없어질 때까지 병이 납니다. 배가 아프고 온갖 데가 다 아픕니다. 또 돈이 떨어지면 병이 낫습니다. 진주 논산이란 곳에 농사를 스물다섯 섬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해서 친구들이 돈을 막 대줍니다. 그런데 양식을 스물다섯 섬만 사 놓으면 마누라가 앓든지 자식이든지 부모든지 병이 납니다. 스물다섯 섬을 다 잘라 먹어야 병이 낫습니다. 그래서 스물다섯 번을 스물다섯씩 해 봤습니다. 동네에서는 하도 신용 있고 부지런하고 똑똑하니 자주 뒤를 대주고 나중에는 장사 밑천도 대 주어 그래서 또 장사를 하고 돈 모으느라 애를 쓰고 그러는데 그러면 꼭 병이 나고 그럽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다 죽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래께서 이 사람에게 복이 한 없이 많다고 하시는 데는 참 이유가 있습니다(是福德). 그것은 이런 물질적 복덕은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卽非福德性).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것 참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옵니다(是故如來說福德多).』이렇게 말씀하시는 수보리존자의 뜻은 무엇인가.

수보리존자는 40년 동안이나 부처님 따라 다니며 법문을 들어 다 아시지만 그러나 지금 세상의 우리는 좀처럼 그 뜻을 해득(解得)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복덕성(福德性), 곧 복덕의 성품이라고 한 것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음은 곧 복덕을 지을 수 있는 주체성(主體性)이고 성품이 되므로 <복덕성>이라 한 것입니다. 재물을 아무리 많이 보시(布施)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한계가 있고 끝이 있는 상대적 복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십억세계에다 칠보를 가득 채워서 그것을 여러 수천 만년을 두고 보시를 하면 복이 많긴 많지만 마음 깨쳐 우주 전체를 깨치는 것에 비하면 태평양 가운데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다고 했느냐 하면 그것은 불보살의 경계에서는 복이 많다는 말은 곧 복이 적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고, 정말 큰 것은 크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크다는 말은 작은 것을 상대로 해서 성립되는 말이고 이것보다 작은 저것하고 비교해서 이게 크다는 말이 됩니다. 사바세계 중생들은 복덕이 아주 작기 때문에 그런데 비교하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불보살세계의 복력(福力)에 비교 한다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 아니라 그것 몇 억만배의 복으로 비교한다 하더라도 견주어 볼 가치조차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이 마음자리인 성품의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덕 지을 수 있는 마음자리, 곧 복덕의 근본자리인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생각도 지식도 신앙도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닌데, 그게 깨끗이 살아 있으니 거기 들어서서 원대복귀하면 우주 전체가 <나>입니다. 허공도 현상계도 나고 내 마음에 그게 다 나타난 것입니다. 「복덕을 지을 수 있는 이 마음은, 곧 복덕성은 우주 전체를 차지하는 것인데 그까짓 십억세계 한두 개 차지해 봤자 그게 얼마나 되겠느냐?」 그런 뜻입니다.

이런 때는 뜻이 참 어렵습니다. 큰 대학자끼리 만나서 40년이나 불법을 들었으므로 이렇게만 얘기해도 알아들었지만 지금처럼 불교에 대한 기초도 없는데 이런 말을 내 놓아 봤자 깜깜합니다. 「이 사람 복덕이 많으냐 안 많으냐?」 「네, 많습니다.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로만 따라다니면 무슨 말인지 말이 안되고 날마다 금강경을 봐야 뭘 설명한 것인지 평생 해도 모릅니다. 「이 복덕은 주체성이 아니기 때문에, 많다 적다하는 것을 초월한 마음을 깨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 사람 복이 참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새겨야 그 뜻이 풀어집니다.

 

原 文 : 若不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起伏 勝彼

 

[解 義] 여기서부터는 수보리존자의 대답을 들으시고 나서 다시 부처님께서 물질로 지은 복은 마음의 복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든지(若不有人)이 이 금강경의 네 구절만 배워서 읽고 남이 알아듣도록 해석해 준다면, 금강경 전부가 아니라도 어느 한 구절 열 여섯자만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복이야말로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니 그 복은 십억 세계의 칠보를 보시한 복덕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 뜻을 알아들었으면 그 복이 한가지입니다.

사구게(四句偈)는 제五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는 16자와 같은 글귀를 말합니다. 이 글귀의 뜻만이라도 잘 가르쳐 주어서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라는 것 입니다.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법문 강의하는 것을 한번 듣고 일자무식(一字無識)한 나무 장사하는 소년으로 그 자리에서 마음을 깨쳤습니다. 육조대사와 같이 대번에 이렇게 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과학자·철학자·종교가등 많은 사람들이 이 사구게 해설하는 그 뜻을 알아듣고 육체가 나라고 하던 마음을 돌이켜서「나 자신을 알아 봐야겠다. 이 마음을 깨쳐야 되겠구나. 산을 보면 높은 줄 알고 물을 보면 깊은 줄 아는 이것만 깨치면 우주의 주인공(主人公)이고 생사를 해탈하는 굉장한 게 있는 걸 몰랐구나. 부처님을 믿고 절에 가서 불공하고 기도한다. 하느님 믿고 교회가서 기도한다 했지만 그게 다 무엇이 그런 짓을 했는가. 복을 받아 보았자 제가 지은 것만큼 받고는 또 가난뱅이 되고 지옥도 가고 그러는 것이니 그런 것은 다 완전한 것이 못되고 참된 복이 아니구나.」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잘 설명해 준다면 곧 부처가 되도록 하는 것이고 십억세계의 칠보를 가지고 자선사업(慈善事業)한 것보다 복덕이 더 클 것은 당연 합니다.

마음을 깨쳐서 아는 지혜는 연구하고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알아지는 지혜고 무소부지(無所不知)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는 그런 절대적인 법을 알려 주는 것이 이 사구게(四句偈)를 설명해 주는 것이니, 그 공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이 설법을 듣고 나서 저희들끼리 지껄이는 쓸모없는 소리라고 불평이나 하고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욕하고 비방(誹謗)한 인연으로 마침내는 불법에 귀의하여 성불(成佛)하는 날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 굶어 죽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남만을 위해서 사는 세상이 되면 사바세계가 그대로 극락이 되고 공산주의가 발붙일 수 없고 자본주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남에게 똑똑히 알아듣도록 설명해 준다면 참말로 큰 시주고 다시 없이 큰 복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금강경을 내가 설명할 줄 모르면 천리만리 밖에라도 가서 법사스님을 모시고 오고 처사나 신도 가운데서라도 잘 아는 이가 있으면 모셔다가 금강경 법회를 하고 다른 경이라도 대승경의 골수를 설법하게 한다면 법사 스님을 모시고 온 그이가 법사 스님하고 똑 같은 공덕을 받습니다. 법사의 입이 내 입이고 법사의 공덕이 내 공덕이 되고 그런 것이니 불공을 한다든지 기도를 드린다 하는 것 보다 온 우주의 재산을 다 차지하는 것 보다 법회를 열어서 마음을 열어서 마음을 열어 준 그것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공덕이 더 큽니다. 이것이 정말 인류정화(人類淨化)고 불교정화(佛敎淨化)입니다. 그러니 견성했다고 적멸(寂滅)의 열반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소승불교에 불과합니다. 탑골 공원이고 장충단이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중생제도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종일 설법해도 말한 흔적이 없고 한번 입을 떼 본 적이 없는 그런 식으로 자꾸 닦아 나가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 공덕 가운데 이런 법문을 설명해 주는 공덕이 제일 큰 것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多羅三?三菩提法 皆從此經出

 

[解 義]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 다 이 금강경으로부터 출생했다 나왔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경이란 말은 이 문자경(文字經), 곧 말과 글로 된 경을 뜻합니다. 문자로 된 이 금강경에 의지해서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의 三반야를 성취하게 되는 때문입니다. 문자반야에 의지해서 발심하여 무명(無明)에 속지 않고, 탐진치 三독에 속지 않게 되며 자성(自性)을 번조(返照)해서 자기 마음의 근본자리를 관조(觀照)하는 관조반야를 닦아 가지고 마침내는 실상반야를 체득(體得)하게 됩니다. 그러니 종이 위에 먹칠해 놓은 문자경에 의지해서 필경에 성불할 수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문자경(文字經)에 의지해서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하여 성불한다는 말씀입니다. 아공은 육신이 나인 줄 알았던 생각을 버리고 몸뚱이는 물리적 요소로 구성된 것인데 물질 자체는 근원적인 실체가 없는 공한 것임을 체득한 것을 말하며, 또한 생각이나 희로애락의 감정 역시 찰나 찰나로 변멸(變滅)하는 것으로서 그 근본은 다 같이 공무(空無)한 것임을 체득한 것을 아공(我空)이라 합니다. 법공(法空)은 현상계의 모든 것은 다 인연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으로 그 실재가 없으며 따라서 어떤 결정된 법이 없어서 온갖 법이 다 공했음을 증득(證得)한 경계를 말합니다. 그러니 <아공>은 육신이 내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고 <법공>은 객관세계가 다 공해서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를 구속할 게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생사를 벗어난 경지를 체득한 것이 법공입니다.

구공(俱空)은 「이것이 진리구나, 모두가 다 공했구나, 내가 이제 견성을 했구나」하고 자기가 해탈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 한 인식한 주체가 주관이 되고 인식한 내용이 객관이 되므로 다시 상대세계에 떨어져서 정말 대열반 . 대해탈을 성취할 수 없게 되므로 아공 법공까지도 다 여의어야 비로소 마음의 본 바탕자리에 계합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무(空無)한 적멸(寂滅)의 경계에 들어가서 마음의 실재 하나만 오롯이 남아 있더라도 「아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든지 「아아 내가 이제 깨달았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것이 구공이 아니라 법공에 도달한 것 밖에 안됩니다. 온갖 망상 미련이 다 끊어졌지만 「아 참 이렇구나」하는 그것만 남아 있으므로 이 생각까지 끊어져야 구공이고 참다운 견성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이 금강경을 설법하시기 40년 전부터 아공(我空)을 설명하시고 21년간 반야경 600부를 설명하셨는데 반야를 말씀하실 때도 처음에는 법공(法空)을 말씀하셨고 이 금강경을 설명하시게 되어서 부터는 구공(俱空)을 말씀하십니다. 금강경은 577권째이니까 반야 600부에 거진 끝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이런 구공 도리에 의지해서 모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시고 성불하십니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다(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多羅三?三菩提)」고 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 나서는 반야바라밀도 금강경도 필요 없지만 이 실상반야(實相般若)·구공소식(俱空消息)을 얻는데 이 문자반야(文字般若)가 근본이 돼 가지고 거기서부터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므로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다(諸佛及諸佛阿?多羅三?三菩提).」고 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解 義] 부처님께서 이제까지 금강경으로부터 부처님께서 나오고 이 경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나온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바로 뒤에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하고 딱 잡아떼십니다. 당신이 평생 동안 말씀하신 팔만대장경 그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니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또 꽉 막힙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내 살림살이가 아니기 때문에 꿈 가운데서 꿈 이야기 하는 것처럼 아득하게 됩니다. 참선을 좀 해서 견성(見性)은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만 해도 이런 말이 머리에 쑥 들어갑니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혼비백산(魂飛魄散)이 되고 어떤 정의(定義)나 개념(槪念)이 성립될 수 없어서 언어의 표현으로 뜻을 전달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려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한번 머리를 숙이고 참구(參究)해 봐야 합니다. 참으로 몇 번 죽었다 깨어나기 전에는 입김도 안 들어갑니다. 불법은 천당에 가는 얘기도 지옥 가는 얘기도 아니고 철학자나 과학자가 되는 얘기도 아니고 이것을 의지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경전에 의지해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도리를 알아서 참된 발심을 해가지고 또 수도하는 방법까지 배워가지고 선지식 지도에 의지해서 필경에는 성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때까지 꼭 내(부처님)가 시키는 대로 내 얘기만 듣고 그대로 해야지 다른 얘기 들으면 안된다. 다른 얘기 듣고 다른 데로 가다가는 성불하지 못한다. 이렇게 40년 동안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말씀하셨고, 또 이렇게 보살들을 잘 호념(護念)하시고 부촉(付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법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시니, 그러면 어떤 게 불법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거짓말하시는 것도 아니고 엉뚱한 말을 하시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이 말도 꼭 있어야 하겠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안 하면 불법이 잘못 전해질 논리적 결함이 생기겠으므로 그래서 그 논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정말 이런 엉뚱한 말이 나올 적에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탁 깨쳐서 대번에 생사를 초월해 버리고 불법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옛날부터 공부하는 이들이 다시 한번 재출가(再出家)를 해 가지고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어떤 게 불법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확연(廓然)해 지지 않으니까 또 다른 이한테 찾아갑니다. 「그 이가 잘못 깨쳐서, 설명이 철저하지 못해서 그런가. 내가 이것을 깨치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일 평생 찾아다니며 꼭 알고야 말겠다는 일념뿐 딴 생각은 아무것도 없는 도저한 경지가 되면 그때는 선지식·선사(禪師)의 말이 푹 들어와서 깨치게 됩니다.

혹 구공(俱空)의 도리를 몰라서 법공에 이끌릴까 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만 여기서는 이미 구공까지 넘어서서 하는 소리며 구공까지 체득했더라도 구공에 떨어져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내(부처님)가 한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도깨비 같은 소리니 거기에만 이끌려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을 다 불 질러 버리고 보지도 않을 경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40년 동안 하신 설법은 말로도 할 수 있고 이론으로도 할 수 있으며 생각도 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구공(俱空)에 들어서면 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구공이 불법인 줄 알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떤 것이 불법인가.」 분명하고 오롯한 실재를 끄집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선 숙제로 두기로 합니다.

 

 

[說 義]

▶업(業)이라는 것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종종 하는 이야기인데, 전남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서 혜공(惠空)스님을 내가 모시고 있을 때일 입니다. 그 절에 머슴살이하는 사람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집에 두어 봐야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절에 데려다 놓고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군불도 좀 때주고 하면서 밥 한 그릇 더 얻어다가 나누어 먹이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주 박복한 아이어서 절에 재나 불공이 들어 떡이나 뭐 먹을 게 생기면 꼭 배가 아프다고 그럽니다. 그래 참말인가 의심이 돼서 큰 불공이 들었을 때 그 놈 몫을 내가 떡이랑 과자를 아무도 모르게 꼭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놈이 그만 배가 아파서 못 일어납니다. 다음날 누가 와서 아이가 배가 아파서 물도 못 먹으니 누구든지 그 아이 몫으로 떡 받아 놓은 게 없느냐는 겁니다. 그래 숨겨 놨던 떡과 과자를 내 놓고 여럿이 하는 말이 그대로 두면 죽지도 않고 앓기만 하니 우리가 나누어 먹자고 해서 할 수 없이 그 떡과 과자를 다 먹고 나니 거짓말같이 싹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절에 불공 온 한 신도가 광주 시내에 부자인데 장가를 들어 첫 아들을 낳았다고 애 보는 사람 구한다 하여 그 애를 추천했습니다. 얼굴은 괜찮고 해서 부잣집 애 보는 심부름꾼으로 월급도 많이 받기로 하고 갔는데 보름 만에 자다 말고 밤중에 도망을 왔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거기 있으면 대학도 다니고 너 팔자 고칠 텐데 왜 왔느냐?」고 물어 보니 그 집에 이 애가 가고서부터 아들이 자꾸 아프다는 겁니다. 부모가 여러 가지 약을 해도 잘 안 났고 그래서 그 어머니가 걱정이 되니까 점을 치게 됐는데 이 집에 박복한 애가 하나 들어와서 그 아들이 자꾸 앓는 것이니 그 애를 내보내라고 했다는 겁니다. 어느 날 밤에 내외간에 소곤소곤 얘기하는 것을 듣고 부끄러워서 자다가 살그머니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전생에 남 잘되는 것 미워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그런 사람은 금생뿐 아니라 내생에도 부모덕도 없고 시집가도 남편 덕도 없고 장가가야 마누라 복도 없고 자식 낳아 봐야 모두 불효하고 명 짧고 박복한 아이만 내 앞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만 짓고 나면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되니 큰 돈 번 사람들은 꼭 운수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세속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불교에서는 인과(因果)라 한다고 일소(一笑)하지만 그러나 인과는 알고 보면 과학적인 내용이 다 있습니다. 운수니 사주팔자니 하는 것도 들어맞는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얼굴도 가령 정치가라든지 큰 사업가라든지 다 업보(業報)로 타고나는 운명이 있습니다. 누가 돈을 가져가도 그 사람 갚을 건가 안 갚을 건가 그 사람 얼굴에 다 나타납니다.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 시간 시간 미래에 관한 관상이 얼굴에 나와 있습니다. 관상 잘하는 사람은 내일은 뭐가 되고 모레는 뭐가 되고 미래를 다 설명합니다. 손금에도 거기 평생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정말 잘 보는 사람은 피 한 방울만 봐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 평생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잘 보면 전생도 알 수 있고 죽어 내생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수기예언(授記豫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중에게 수기(授記)를 주십니다. 이를테면 제자에게 미리 예언 하시는 것인데, 가령 갑이나 을은 금생에 죽으면 내생에는 어떤 집에 태어나게 되고 아버지가 뭘하고 형제간이 어떻고 장가가면 어떤 처녀한테 가고 시집가면 어떤 총각한테 간다. 그렇게 백천만겁 돌아다니며 도를 닦아 가지고 필경 성불하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실달태자처럼 아버지는 정반왕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고, 유성출가(遊城出家)하여 도망해 가지고 어느 산에 들어가 수도를 해서 몇 살에 네가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되겠다고 예언해 주시는 것이 수기입니다.

번뇌망상 아무것도 생각없는 무아지경에 들어서면 그것이 초차원의 세계인데, 너도 나도 없고 나도 남도 아니면서 확실히 나이기는 나입니다. 그 지경에 가면 조금조금 알아집니다. 그러니 요새 도통했다 통령했다 하는 건 모두 텅 빈 데 들어간 것을 가리키는데 거기도 백천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사차원의 영계(靈界)에 들어가서 점점 차원이 높을수록 자유가 많아지고 아는 게 많아지고 신통도 많아지고 참으로 근심 걱정 없고 의식주가 필요 없는 그리고 생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불보살의 차원에 들어갑니다. 이때가 되면 세상에 나와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해도 됩니다.

이렇게 복을 받든지 마음을 깨쳐 성현이 되는 것이 다 자기가 닦은 전생의 인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주에 가득 찬 보배를 보시한 그 사람이 복을 많이 받긴 받는데 그러나 그것도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복이 많다는 소리는 작다는 소리가 됩니다. 크다는 소리는 작은 것을 상대해서 크다는 것이고 작은 거 제해 놓고 크다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절대로 큰 게 아니고 작다는 소리입니다.

 

복덕(福德)의 주체(主體)

정말 큰 건 크다는 소리를 못합니다. 전체가 다 내가 되어 놓으면 무엇에다 비교해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많다는 소리는 작다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착한 일 해서 복을 짓는데 그런 인과로 큰 복을 많이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주의 어느 부분을 그 복이 다할 동안 잠시 차지한 것이며, 이 우주를 다 차지했다 해도 그건 많은 게 아니라 물질을 두고 한 소리니 많다고 할 것이 못 됩니다. 이 마음이 우주의 생명이며 마음은 곧 우주와 둘이 아니니 이 마음을 깨쳐 놓으면 우주와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너니 내니 하는 주객이 없어지고 이렇게 되면 그 성품에 들어서서 전 우주를 차지한 것이며 우주를 마음대로 창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능력을 갖게 되어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는 것이니 물질로 보시하여 얻는 공덕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은 마음에 비교하면 태평양 한 가운데 수증기 한 방울 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많다고 하는 게 적다는 소리고 크다는 게 작다는 소리이며 큰건 큰게 아니라 마음에 비하면 우주 전체가 적다느니 크다느니 하고 말도 붙일 수 없습니다. 한 생각을 내어 착한 일 해 가지고 복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 해도 허공의 한쪽 구석밖에 안 찹니다. 그런데 복을 짓고 싶어하는 거룩한 생각을 낼 줄 아는 주체성인 그 마음을 깨쳐 놓으면 우주 전체가 다 나이므로 작다 크다 소리는 없어집니다. 전체를 다 차지해야지 착한 일 좀 하여 한쪽 구석만 차지해 봐도 그건 네 마음을 깨치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같은 인생

인생의 근본이 되고 있는 <나>란 과연 무엇인가. 죄를 짓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한없는 고생을 하기도 하고 복을 지어서 천상(天上)에도 나고 사람 세상에 나와서 국왕 대신이나 큰 부자로 복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 근본 주체는 다 마음이란 <내>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그 핵심을 집어 내 보라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가 내가 아닐 게고 오장육부인가, 귀구멍인가, 머리인가, 다리인가, 팔인가, 그 핵심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먼저 확인되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심장이 뭘 생각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대뇌가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뇌의 어느 세포인가. 대뇌만 하더라도 세포가 여러 수백만개인데 그 가운데 어떤 세포가 나라 할 수 있을까? 그것 다 종합한 것이 나타나면 너무 막연한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물건을 모아 놓은 세포의 집단이지 어째 그게 나일 수 있는가. 나라는 소리는 그 핵심을 말합니다. 여기 40억 인구가 있지만 그건 다 내가 아니고 마누라도 부모 형제도 내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고 오늘은 이 사람 따라가고 내일은 저 사람 따라가고 엎어졌다 자빠졌다 사는 겁니다.

한평생 살아 봐도 누구를 위해 살았는지, 나를 위해 살았는지, 남을 위해 살았는지 까닭도 모르고 한평생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 바보가 되어 한강에 가자하면 한강에 가고 창경원에 가자하면 창경원에 가고 이리 가라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하면 저리 가고 모두가 이런 식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도 다 그런 식이고 정치하는 사람은 더합니다. 흘러가는 물과 한가지입니다. 물이 흐르는 것은 정처 없이 그저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치면 툭 치고 흙탕물이 되기도 했다가 또 거기서 뺑뺑 돌다 막 뒤집힙니다. 한강 물이 어떻게 흐르느냐 하면 여러 억만년 흐르긴 흘러도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 일정한 형태가 없습니다. 저쪽 모래에 부딪쳐 모래를 뒤집고 흐르고 그러니 한강물이 일정한 모양이 없습니다. 강원도에서 서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참 풍파가 많습니다. 강원도 오대산 산꼭대기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고기가 마셔 버리기도 하고 사람이 받아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에 들어갔다 또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는 놈 그 신세가 어찌될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도 한 평생 사는 신세가 어찌 될는지, 오늘은 오늘 생각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러니 서양 철인들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하는데 이 말은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그렇게 단정해 버린 말에 불과합니다. 곧 나는 없다는 소리와 한가지입니다. 허무한 인생이고 물거품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시집을 잘 갔느니 장가를 잘 갔느니 돈이 많으니 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어째서 제 돈입니까? 돈한테 이끌리는 겁니다. 돈 일원 모아 놓으면 일원에 구속되고 저걸 누가 집어 갈까 꾸어 달라면 어쩌나. 백만원 모아 놓으면 백만장자만큼 생각이 많고 백억원 모아 놓으면 백억장이 낱낱이 사람을 눌러 밤에 잠이 안 오고 꿈에서까지 걱정입니다.

그러니까 돈 많은 사람은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원수가 많아지고 친한 친구 다 떨어지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독해집니다. 권리가 높아도 높을수록 원수가 많고 고독해집니다. 그러니 돈도 모을게 못되고 권리도 높을 게 아닙니다. 개 돼지 소리 들으면서 모았다가 나중에 죽을 때는 「지금 죽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나 좋게 쓰고 죽을 걸.」 그렇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는 건지 그 까닭을 모릅니다. 꼭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 까닭 없이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삽니다.

 

깨달으면 지옥도 극락

부처님의 말씀하신 뜻대로 하면 「네가 너를 알고 너대로 살아라.」 그렇게 됩니다.

왜 빈껍데기만 가지고 사느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하느냐? 가령 이성끼리 상종하는 것을 보더라도 여자가 바람이 나면 오늘 저녁은 이런 남자한테 끌려가고 내일 저녁은 저런 남자한테 끌려가고 그런건 미칠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꾸 하면 또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혼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문명만이 발달되고 성을 개방해 놓으면 인생이 고독해지고 허탈해집니다. 나를 아껴 주는 사람도 없고 아껴 줄 사람도 없는 신세가 되니 이유 없는 반항과 욕구불만이 되어 자꾸 자살하는 겁니다.

결국 물질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객관세계에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나한테 본래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입니다. 죽을 수 없는 마음을 깨쳐 얻어야 영원한 행복입니다. 불에 뛰어들어도 안 죽고 칼로 쳐도 안 죽고 원자탄 다 퍼부어 놔도 까딱없는 것 그 자리에서 얻어진 것이 비로소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는 못됐다 하더라도 그런 원리를 알고 믿기라도 해야 합니다. 안심을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까짓 돈 천만원 얻어 놓고 안심할 수야 있습니까? 바람만 불어도 어느 놈이 담 안 넘어 오나 깜짝깜짝 놀라고 불쌍한 게 돈버는 재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치면 정말 돈도 필요 없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생사고도 아무 상관없는 대행복을 얻습니다. 지구가 다 깨져도 나는 까딱없습니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지옥을 가서 기름 가마에 집어넣어도 거기가 극락이 됩니다. 그 자리는 뜨겁고 찬 것도 없고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게 없으니 이 마음 앞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법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오늘 저녁 법문한 후에 저녁밥을 안 준다고 위협하면 이 법회 안할지도 모릅니다. 저녁 밥 한그릇 있으니 안심하고 하라 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의식주 밥 세그릇에 생명을 달아 가지고 사는 것이고 육신에 매달려 온갖 고생하느라고 밤에 잠을 안자고 허덕이는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에 비할 수 없습니다.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금강경 전체를 남을 위해 말해 주면 더욱 좋지만 사구게 16글자만이라도 남을 위해서 설명해 주는 것은 우주의 핵심인 마음, 만사의 주체인 진짜 나를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므로 그 공덕은 십억 세계에 가득찬 보배를 가지고 온 중생을 잘 살게 해 준 복덕보다도 몇 천만배 큰 것이라고 합니다. 물질로 보시해서 얻는 복은 그 과보도 역시 물질로 받고 몸으로 받는 중생의 과보일 뿐, 복덕 지을 수 있는 주체, 주인공을 찾는 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깨치는 일은 주인이 되는 일이고 영원불멸하는 절대자가 되는 것이지만 객관에 끌리고 몸뚱이로 사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고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제 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름꾼 만나면 노름장이가 되고 술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아편장이 만나면 아편장이 되고 도둑놈 만나면 도둑놈 되고 깡패 만나면 깡패 되어 온갖 곳으로 다 끌려 다니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종노릇 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니 자기를 아는 사람, 마음을 깨쳐 주객을 초월하여 부처를 안 사람은 누구를 따라 가더라도 거기 따라가서 나한테나 남한테나 이익이 되면 따라 가지만 이익이 안되면 안갑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따라다니면 덕 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란 몸뚱이를 나라고 속아 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나에게 정말 이익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스무자를 일러주는 것은 곧 영원히 행복한 행복의 모체, 주체를 밝혀 주는 것이지만, 물질로 복을 짓는 것은 아무리 크게 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분밖에 안됩니다. 사구게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도 있고, 이 금강경 맨끝에 가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란 게송도 있습니다.

또 제 26장에 가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란 게송도 있고 금강경 어느 구절에도 네 글귀의 내용이 다 있습니다. 물질로 많이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잘 해도 종을 호강시켜 주는 폭 밖에 안 되고 사구게를 잘 일러 주는 것은 수많은 종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마음을 깨우쳐 준 것이므로 그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 모든 부처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경에서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고 얻은 것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며 어떻다고 결정된 내용이 있거나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고 하셨던 것인데, 그러면 그 속뜻이 무엇인가. 강의를 안 들으면 칠판도 글씨도 아무것도 아닌 셈이고 아무런 뜻이 없으니, 팔만대장경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경을 일러 보고 거기서 조금 알았다고 해서 어떤 소견을 내면 그러다간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장님한테 장님이 끌려가는 것과 한 가지여서 나중에는 둘이 다 구렁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소위 불법이란 참말로 불법이 아니라, 그런 게 불법이다. 불법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게 불법이다(所謂佛法 卽非佛法)」의 뜻은 글자 음성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마음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설명하는 이 마음자리를 자꾸 생각하면 깨달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밥 먹다가 깨닫거나 변비로 애쓰다가 대변보는데 툭 터집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물으시고 수보리는 또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그러면 그 논리가 어디로 들어맞는가. 그것을 자꾸 생각해 보면 탁 깨칩니다. 이 문자와 인연이 없어서 여기서 깨치지 못하면 더 뒤에서 깨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강경 보고 못 깨치면 유마경(維摩經)보고 깨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깨치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오직 이 법문을 설명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답이 안 됩니다. 동서 오천년 문화를 다 듣고 나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어떤 학문으로라도 이것은 설명이 안됩니다.

부산에 혜월(慧月)스님이라고 하는 큰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일자무식(一字無識)인데 선지식(善知識) 가운데도 한국 최근세(最近世)에서는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동네 어린 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어린애 양을 합니다. 당시에 어떤 목사(牧師) 한 사람이 혜월스님이 불법을 잘 아는 선지식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혜월 노장스님은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예」하고 대답하니 「저 샘에 가서 물 한 그릇만 떠다 주시오.」 그래서 목사는 할 수 없이 노장님 시키는 대로 물을 한 그릇 떠다 드렸습니다. 그러니 노장님은 「그게 불법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목사가 과거세에 불연(佛緣)이 깊은 아주 수승(殊勝)한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주 깨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사로서는 수수께끼도 아니고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싱겁기만 했습니다.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나 떠 오라고 해 놓고는 불법 설명을 다 했다고 하니 그 스님이 무심해서 그런 것인가 어떤 것인가 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고래(古來)로 수백 가지 수천가지가 됩니다만 대개가 다 이 혜월스님이 보이신 것과 비슷했고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방법이 다른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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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得無說分 第七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 得阿多羅三三菩提耶(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아 如來有所說法耶(여래소설법야)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로는 無有定法(무유정법)하야 名阿多羅三三菩提(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오며 亦無有定法(역무유정법)을 如來可說(여래께서설)이니이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은 皆不可取(개불가취)며 不可說(불가설)이며 非法(비법)이며 非非法(비비법)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賢聖(일체현성)은 皆以無爲法(개이무위법)으로 而有差別(이유차별)일새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느냐? 또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명한 일이 있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결정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것이 없사오며, 또한 결정한 법 없는 것을 여래께서 설명해 주셨사옵니다. 왜냐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께서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第七 無得無說分

 

[科 解]

여기 제7장에서는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곧 석가여래는 아무 법도 얻은 법이 없고 깨달은 법도 없으며 부처님께서 입으로 49년 설법을 하셨지만 꼭 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모르고 딴 길로 험한 길을 가느라고 땀만 흘리고 고생을 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위해 「이리 가는 것이 옳소. 이리 가시오.」했지만 꼭 그 길이 참된 길도 아닙니다. 이 마음 깨치는데 여행하는 것 같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팔만사천가지 방편이 있지만 그것도 결정된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고 누구를 얻도록 해 줄 방법도 없고 또 말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없고 석가여래 49년 동안 단 한마디도 말한 적도 없다고 잡아떼십니다. 이것이 석가여래의 불법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 이것을 불법이라고 남겨 놓았느냐?」고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이 금강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나 말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개념으로 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하고 그것이 무상(無上) 최고의 정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정법은 우주 어디에고 없는 데 없이 꽉 차 있고 그것이 내 마음이라 합니다. 정법이란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그대로를 여여(如如)하게 보고 듣는 게 없습니다. 종소리 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는 제대로 못 듣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듣는 것 같고 똑바로 듣는 것 같지만 우리의 얼굴, 귀가 서로 다른 것만큼 이 오관(五官)의 조직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듣는 것도 다 각기 다르고 진실 그대로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일본사람은 <강강>, 우리나라 사람은 <땡땡> 그렇게 듣습니다. 일본사람은 우리나라사람 종소리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실지로 종을 쳐봐도 강강하는데 한국 사람은 왜 땡땡한다 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우리들은 종소리가 강강이 뭐냐고 일본사람들 참 우스운 사람들이라 그럽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에게 어려서 종소리는 땡땡이라고 한번 들어 놓으면 죽을 때까지 땡땡이고, 어머니한테 강강으로 들어 놓으면 평생 강강입니다. 또 가령 슬픈 마음으로 있을 때 어떤 노래를 처음 들으면 그 노래의 곡은 어찌됐든지 항상 아주 슬프게 들립니다. 그 자체의 음성이나 가사가 슬픈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고 설사 재미있는 노래라 하더라도 그렇게 됩니다. 어떤 물건을 처음 볼 때 인상은 평생 못 바꿉니다. 그것은 다 오관이 전부 불완전하게 인식하고 사실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깨끗한 마음을 깨닫고 나면 땡땡도 강강도 궁궁도 그게 한꺼번에 다 들리고 세계사람 소리가 한꺼번에 다 들립니다. 왜냐 하면 그 소리를 모두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실 그대로를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사물(事物)이나 사람을 보고 대할 때 이것이 정각(正覺)입니다.

우리는 물건의 빛깔도 노란 것을 검게도 검은 것을 희게도 봅니다. 전기 불 밑에서 보면 누렇지만 태양 빛으로 보면 하얗게 보입니다. 그러니 빛깔이 뭐냐 광선의 빛깔과 물체가 조화된 빛깔이지 실제의 빛깔은 아닙니다. 태양 밑에서 희게 보인다 해서 그것이 옳은 게 아니고 태양 빛깔과 섞여서 희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만일 여기다 붉은 전등을 비추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관이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들의 생각, 개념은 다 이렇게 불완전한 오관작용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중생의 이런 잘못된 착각을 떼어버린 마음자리만 드러난 부처님에게는 얻은 것도 설명할 법도 없습니다. 만일 얻은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오관에 의한 착각일 뿐 마음자리가 아닙니다. 마음만 드러난 자리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끊어지고 시간 공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자리이므로 얻은 법도 얻을 주관도 없습니다. 또 마음을 깨쳤다고 하여 새로운 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있던 마음 그대로이므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얻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도리를 말하는 절이란 뜻으로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 阿多羅三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일이 있느냐, 또한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제2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번역하면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인데 「이 깨달음을 여래께서 얻었느냐? 또 여래께서 무슨 법을 설한 게 있느냐?」 하는 말씀은 「네가 날 40년 따라 다녔는데 부처님께서 성불했더냐? 그래 내가 성불하는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었느냐? 그런 설법을 한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 물으심에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이런 진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하고 사뢰었습니다.

그런데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 名阿多羅三三菩提)를 해석하는 데 시비가 있습니다. 보통으로는 「결정한 법이 없는 것 그것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입니다」 그렇게 새깁니다. 이것을 달리 새기는 이는 「결정한 법이 있어서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맨 나중에 전체를 부정합니다. 뜻을 아는 사람은 이리 새기나 저리 새기나 그 뜻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사람에게 차이 있게 들리기도 합니다. 첫번째 새김은 어떻다고 결정할 수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했다는 것은 일정한 법이 없어서 동그라미라든지 그렇게 결정한 모양 내용이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 모양도 빛깔도 없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되므로, 그러면 뜻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하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두번째 새기는 법은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다.」 그렇게 하면 말로 할 수 없는 거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그것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첫번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새긴 것과는 표현상 대조가 됩니다. 한문이니 그렇게 새길 수도 있고 또 이렇게 새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 부처님 얻은 법이 그것뿐이다. 그렇게 이름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게 새기는 경우에는 어떤 생각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까딱해 볼 수도 없이 아주 앞뒤가 딱 끊어져 버리게 새긴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한 법이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새기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그건 것인가 보다 하고 꼬리가 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걸 깨달았나 보다 그렇게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된 법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이 불법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어떤 관념이 마음속에 남으면 나중에 참선이나 염불이나 하다 삼매가 나타날 때 제가 생각하던 것이 나타납니다. 자기 생각이 꿈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 처음부터 말씀하신 내용을 생각해 보면 설명할 수 있는 법을 깨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 것도 결정한 법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지은 법이 없느니라.」하고 새긴 두번째 새김이 더 분명합니다. 이것은 금강경뿐 아니라 일체 경전도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법이 애초에 없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새기지 않지만 이렇게 새겨야 좀 가깝게 새긴 것입니다.

앞에서 새긴 것처럼 「어떤 결정한 법이 없는 것이 이것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새기고 보면 삼보리의 이름지은 짐작이 남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개념이 생기게 합니다. 처음부터 어떤 개념이 생길 수 없는 곳으로 몰고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보다」하는 개념이 생겨 놓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다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아 ! 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보다. 이것은 참 뭐라고 할 수 없구나. 부처도 중생도 아니고 별 보고 깨친 것도 아니고 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뿐이구나.」하고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공부가 다 된 줄 알고 거기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실 그런 게 없다. 꼭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지적할 수 있는 법이 없다. 열반 생사도 불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공부를 해 보고 자꾸 들으면 짐작이 갑니다.

 

原 文 :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解 義] 『어떤 경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그 법을 얻으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결정된 법을 설명할 만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저희들에게 그냥 말씀해 주신 것이오니 그것은 법을 설명하신 것이 아니옵니다. 『이것만은 오직 석가여래인 내가 깨친 법이니 팔만사천 외도(外道)에게 다 물어 봐도 아무도 모르지만 여래만은 설명할 수 있는 법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고 수보리존자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팔만대장경은 뭐냐? 그건 달 보라고 가리킨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손가락만 봅니다. 어린아이니까 달 보라고 가리켜 줘도 손가락만 보는 소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49년 동안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신 것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그게 불법의 골수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하는데 아이가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듯이 팔만대장경에서 가리키는 마음을 깨치지 못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고 설명한 것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그 글자이고 음성이지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말이고 종이에 먹칠한 것이지 그 글자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찾다가는 안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가락만 들여다보는 것처럼 백만년 들여다봐도 달은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49년 말씀하신 팔만사천대장경이 그 음성이고 글자 먹칠한 것이어서 아무 뜻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무상(無上)의 정법을 깨쳐서 성불했다고 한다든지, 최고의 묘법을 49년 동안 설법해 주셨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곧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解 義]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께서 깨달아 얻은 법도 없고 중생에게 설법하신 말씀도 없다』고 하신 뒤에 계속해서 그 까닭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새삼스럽게 성불하신 적이 없으며 부처님께서 40년 설하신 말씀도 다 들어 두어야 할 건 한마디도 없습니다(不可取). 또 들었다 하여 누구에게 말해 줄 것 한 마디도 없고 확실히 얘기 안 하면 안 될 그런 법은 본래부터 없습니다(不可說). 또한 받아들일 만하고 받아들여야 할 진짜 법은 하나도 없으며(非法) 더군다나 쓸데없는 것, 법 아닌 것,

아무 소용없는 법, 그런 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법(非法)은 잘못된 법, 그릇된 법인데 또 그것조차도 아닙니다. 만일 비법이라도 된다면 그대로 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가치가 있지만 이런 비법도 아니라는 것 입니다(非非法). 왜냐하면 그것은 중생세계의 상대법(相對法)을 초월한 현성(賢聖)의 법이기 때문이라는 소이(까닭)를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原 文 :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어째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하면서 수보리존자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所以者何). 일체현성(一切賢聖)이란 곧 모든 불보살님들과 독성(獨聖)이나 나한님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달아 성인이 된 지위에 나아간 분들을 부처님과 보살님들이나 조사님, 나한님들이라 하며 이분들은 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무위법(無爲法), 텅 빈 경지, 아무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는 마음자리에 들어선 분들입니다(無爲法).

정말 마음의 본 자세에 들어가서 나와 남이 없고, 이해득실(利害得失)이 없고, 생노병사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데, 그러나 이와 같이 하는 게 없는 법 거기에도 보면 초지(初地)보살·이지(二地)보살·삼지(三地)·십지(十地)보살도 있고 52위(位)의 보살경계를 넘어야 부처님께서 됩니다. 이 보살님들은 다 하는 것 없는데 들어가서 이렇게 등급(等級)이 있고 차별(差別)이 있습니다. 마치 서울대학에 입학했다 하면 1학년도 서울대학생이고 3학년, 4학년도 서울대학생이지만, 그러나 공부하는 내용을 보면 1학년, 4학년의 차이가 있고 대학원, 박사과정 이상의 더욱 깊은 내용을 공부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선(參禪)을 해서 견성(見性)을 했다 해도 처음 깨친 초견성(初見性)을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부터 무위법(無爲法)에 들어선 것이므로 비로소 깊은 공부를 하게 되고 보임(保任)을 하여 참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초지(初地)에서부터 52위의 보살경계(菩薩境界)를 닦아 올라가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위법(無爲法)의 현성(賢聖)의 경계는 하는 것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닦는 것 없이 닦고 무심(無心)으로 하는 수행이어서 차별 없는 가운데 있는 차별이므로 중생세계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있는 차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별입니다(而有差別).

 

 

[說義]

 

상이상학(相而上學)과 상이하학(相而下學)

불교를 처음 믿고 아직 번뇌가 안 떨어져서 육체를 아직 여의지 못한 사람이면 이것을 상이하학(相而下學)이라 할 수 있고 생각이 떨어지고, 육체가 내가 아닌 줄 확인되었다면, 이것은 상이상학(相而上學)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배워서 생각이 뚝 떨어져 버려서 일체 모든 망상이 없어져 몸뚱이도 어디 갔는지 모르고 이 세계도 안 보여 다만 자기 정신만 하나 깨끗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이제 불법을 비로소 처음 만난 것입니다. 육체에 맨날 끄달려 사는 인간은 불법과 진짜 인연을 맺기 어렵습니다. 정말 진정한 불제자가 되려면 <상이상학> 여기 들어와서 52위나 되는 계급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아(無我)는 육체를 <나>라는 망상을 버리는 데서 시작입니다.

 

무위법(無爲法)에도 차별 있다

육체를 가지고 <나>라 하는 뿌리가 박혀서 범부는 이것 때문에 고해(苦海)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개나 돼지 그게 나라고 하여 남을 다 죽입니다.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 생명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려고 덤비는 겁니다.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여기서 온갖 생각을 다 내는 겁니다. 박사가 되어봤자 결국은 밥 한 그릇 잘 얻어먹자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상이상학(相而上學)에서부터 곧 생각을 초월하는 거기서부터 현성(賢聖)의 지위는 시작되는데 52위나 올라가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 할 일없다는 노자(老子)도 52위의 어느 정도까지 갔느냐, 우리가 볼 때 그의 도덕경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12위까지 겨우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孔子)는 그 가르침이 조리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사서삼경의 내용으로 보아 무위법(無爲法)을 깨달은 깊이가 보살의 52위설(位說)에 대조해 보면 노자의 경우보다 못한 것으로 판명됩니다. 또 유교에서는 「인간 성품이 본래는 착하다고 하고 본래 착한 것인데 공연히 너희가 악에 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선 같으면 근본 성품이 선인데 악한 생각이 어디서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설픈 얘기가 됩니다.

불교의 상이상학(相而上學)이란 보고 듣고 삼천대천세계 천당 지옥 돌아다니고 하는 거 모두를 말합니다. 이것을 초월한 경지에 들어가야 상이상학이 되니 불교는 세상학문이나 종교와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겨우 영혼의 세계가 있겠다, 4차원의 세계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아무 생각 없는 세계, 거기 들어서서도 크게 52차원의 세계를 나눕니다. 잠재의식이 차츰 진보해 가는 과정입니다. 52위의 처음에 들어선 것은 무(無), 곧 아무 생각 없는 데 곧 현상계가 없는 데 들어선 것, 아무 것도 할일 없는 데 이른 것입니다. 그 실력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범부(凡夫) 때나 부처 때나 변하지 않는 것

불·보살이나 조사·나한네들은 무위법(無爲法)의 열반(涅槃)세계에서 생사를 초월했다 하고 범부중생들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세계라고 우리는 분별하지만, 이렇게 생각이 남아 있고 얻은 게 있다고 하는 한, 생사다 열반(涅槃)이다 하는 것이 모두 번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고 죽고 하는 이거나 생사를 초월한 그거나 다 같은 것인데 그러면 그렇게 꼭 같다고만 결정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천당·지옥·축생으로 돌아다니는 그 가운데서도 뭐가 하나 안 죽는 게 있습니다. 몸뚱이는 천당·지옥·축생이 되고 남자·여자가 됐다, 부자도 가난살이도 온갖 것으로 바뀌지만 그래도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의 몸으로 탐·진·치(貪瞋痴)로 남과 멱살 잡고 피투성이 되어 세계전쟁을 일으킨 그 사람이나 성불한 사람이나 달라지지 않는 그게 대체 뭐냐?

석가여래께서 깨쳤다고 하지만 실달 태자 때와 달라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실달 태자가 왕자로 있을 때나 생사가 무서워 처자, 권속, 국가민족도 다 바리고 저 혼자만 살려고 성을 넘어 야반도주(夜半逃走)한 그때나, 또 마음을 깨쳐 생사를 완전히 초월한 때나 내내 그겁니다. 인생이 허망하다고 버리고 간 그 마음이나, 나중에 깨치고 나서 보니 내내 깨치려고 도망가던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 때는 육체를 나라고 믿었기에 육체 죽는 것을 겁내어 생사를 초월해야겠다고 했지만, 깨치고 보니 죽음이 싫다고 가던 그 마음이나 깨치고 안 그 마음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만이 나 혼자만 깨쳤다고 설명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태자로 있을 그때 내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이것이 급한 문제라고 하여 도망을 가서 야수다라도 자식도 국가민족 다 버리고 세상이 허망하니 도망가자고 결심하던 내내 그 마음이 꿈 깨고 보니 그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도 그 면목(面目)은 안 바뀌었으므로 성불해도 실달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다만 없어졌다면 육체를 <나>라고 하던 착각만 없어진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는 육체를 나라고 착각했을 뿐이지 이 마음자리가 조금도 달라진 건 아닙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다리 아프면 쉴 줄 아는 거 그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뱃속에서부터 이 마음이 나인 줄 알았으면 장가 들여도 마누라하고 안자면 그만이고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땐 몸뚱이만 나라고 생각하던 범부이다 보니 마음이 <나>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떤 마음이 <나>인지 늘 밥 먹고 생각하는 이걸 가지고 마음이라 했으니 하루에도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죽 끓듯이 끓는 그 가운데 어떤 마음이 진짜 마음인지 그것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깨치고 보니 온갖 망상을 내고 죄짓던 그 마음 그대로여서 부처가 됐다해도 다른 사람보다 다른 걸 깨친 게 아닙니다. 실달타 태자 때는 없던 것을 새로 깨친 것이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고 했기 때문에 세상이 참 복잡했던 것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법을 깨쳐서 범부 때 모르던 것을 새로 깨친 것도 아니고 동시에 새로 얻은 법이라 해서 나만이 설명할 수 있는 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론(理論)은 불법(佛法) 근처도 아니다.

깨쳤다고 해서 새로 얻은 것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법, 아무것도 할 일 없는 무위법(無爲法)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법도 아닌 것을 집착하고 <나>도 아닌 육신을 <나>로 삼아서 고해(苦海)에 헤매는 중생들을 위해 40년동안 말이 되지도 않는 것을 부득이 입이 닳도록 법을 일러 주셨지만, 그러므로 이것은 소위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가히 간직할 것이 못되고 한마디 기억해 둘 말이 없습니다. 남보고 불법을 들었다고 전해 줄 말도 못됩니다. 40년 설했다는 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이런 법이며 아닌 소리조차 아니어서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 모든 성인들은 상이상학에 올라가 있으며, 거기서도 차별이 있어서 국민학교·중·고등·대학도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 떨어진 데를 뭐라고 설명합니까? 부처님 경지나 초지보살(初地菩薩)이나 상이상학에 올라선 자리는 설명이 안 됩니다. 불교를 학문이나 이론으로만 하는 사람들은 불법 근처도 못간 사람들입니다. 저 동구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그 사람들 불교 설법한다고 하지만 참으로 경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지도해 주는 법사마다 불법이 다릅니다. 팔만 사천법이 다 무위법에 들어서려는 것이며, 모든 번뇌를 떼어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사건들은 허망하고 지킬 수 없는 것이고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달아나 버리는 게 목적이고 아주 영원히 못 보게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돈도 옷도 밥도 영감도 마누라도 딸도 이 지구도 태양도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사실은 다 설명이 안 됩니다. 지구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과학적으로도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것 모두가 다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불법만이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일체현상이 다 무위(無爲)속에 들어서 거기서부터 불법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 얘기 듣고 불법 아는 사람 참 딱한 일입니다. 마치 속아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속아 있는 것이고, 남의 음성에 속아 있는 것이며 미친 소리에 속아 있는 것입니다.

참선하면 견성한다고 자꾸 참선만 하고 앉아만 있지, 그러나 참선을 무엇 때문에 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참선하면 견성성불한다고 그러는데 견성성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니 큰일입니다. 옳은 선지식(善知識) 만나서 그런걸 다 알고 참선도 다 해본 사람, 그런 선지식 만나 공부하면 그 지식이 내 지식이 되기 때문에 무위법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선지식이 아닌 이를 만나 따라가면 극락세계 간다는 게 뒤로 되돌아가거나 까딱하면 지옥으로 가게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선을 한다든지 염불을 하든지 아무 생각 아무 하는 것 없는 무위법(無爲法)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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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白佛言(수보리-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頗有衆生(파유중생)이 得聞如是言說章句(득문여시언설장구)하고 生實信不(생실신부)이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대 莫作是說(막작시설)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여래멸후-후오백세)에 有持戒修福者(유지계수복자)하야 於此章句(어차장구)에 能生信心(능생신심)하야 以此爲實(이차위실)하리니 當知是人(당지시인)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에 而種善根(이종선근)이요 已於無量千萬佛所(이어무량천만불소)에 種諸善根(종제선근)이니 聞是章句(문시장구)하고 乃至一念(내지일념)이라도 生淨信者(생정신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悉知悉見是諸衆生(여래-실지실견시제중생)이 得如是無量福德(득여시무량복덕)이니 何以故(하이고)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이 無不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며 無法相(무법상)이며 亦無非法相(역무비법상)일새니 何以故(하이고)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이 若心取相(약심취상)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즉위착아인중생수자)니 何以故(하이고)오 若取法相(약취법상)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즉착아인중생수자)며 若取非法相(약취비법상)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즉착아인중생수자)니라 是故(시고)로 不應取法(불응취법)이며 不應取非法(불응취비법)이니 以是義故(이시의고)로 如來常說 汝等比丘(여래상설 여등비구)하되 知我說法(지아설법)을 如筏喩者(여벌유자)니 法尙應捨(법상응사)어든 何況非法(하황비법)가하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어,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실다운 신심을 낼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가신 뒤 후 오백세에 계를 받아 지니고 복을 닦는 수행자가 있어서 이 같은 말과 글귀에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기리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께서나 두 부처님께서나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 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한 사람이니,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거룩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 짓는 것을 다 아시고 보시느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은 다시는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생각>·<그릇된 법이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일 마음에 지키는 것이 있으면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며, 만일 <법이란 생각>을 지켜도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며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을 지켜도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정법을 지키지도 말고 그릇된 법을 지키지도 말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는 알라. 내가 말한바 법은 뗏목과 같으니 정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하였느니라.』

 

第六 正信希有分---말세에도 바른 신심 있다

 

[科 解]

우리가 만일 육신의 오관세계(五官世界), 물질세계만을 본위로 하여 삼차원세계에서만 산다면 사차원세계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고 불법과는 거리가 먼 생활에 떨어집니다. 예컨대 육신 가지고는 장래를 예언할 수 있는 관능(官能)은 없지만, 정신이 무아지경(無我地境)에 들어서면 온갖 것이 다 보이고 자유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문을 닫아걸었는데 육신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든지, 큰 종속에 집어넣었는데도 쇠종을 뚫고 육안으로는 지나간 줄도 모르는 새 어느 틈에 나가는 등입니다. 이런 것은 다 사차원세계에 들어서면 허다하게 많습니다.

현실세계란 이것이 근본적으로 꿈이고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상(假相)으로 있는 것이니 법당은 불에 타면 재만 남는다는 생각, 인식 그 관념 때문에 불이 붙는 것입니다. 삼차원의 세계는 환상이고 그것은 다 생각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 없는데 들어서면 거기서 사차원세계가 벌어지는데 여기서 더욱 더 들어가면 육신으로 살 때 오관에만 의지했던 인간 능력을 초월하여 무한대한 절대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사차원세계 정도는 초학자(初學者)의 체험입니다. 나는 불교의 내용을 사의상학(思議上學)·사의하학(思議下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생각하기 이전, 마음이 생각을 내기 전은 <사의상학>입니다. 곧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말합니다. <사의하학>은 세상에서 말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형이하학(形而下學)이 다 포함되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다 생각 밑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의상학(思議上學)에서부터는 불교 냄새가 조금 납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아직 마음의 본바탕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사차원의 세계가 있다고 하여 전혀 없었던 것, 새로 발명한 것처럼 야단입니다. 사차원세계에 들어서서 시골에 있는 집이 보인다, 친구들이 지금 앉아서 밥 먹고 얘기하는 것이 보이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지만 이것은 아직 불교의 초입(初入)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천차원(千次元), 만차원(萬次元)의 무아경에 들어가서 생각의 주체인 마음의 본연자세(本然姿勢)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을 깨달으면 주객(主客)을 초월하게 되어 <나라는 생각>(我相)·<남이라는 생각>(人相)·<중생살이라는 생각>(衆生相)·<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을 여의게 되는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 육체가 <나>가 아니라는 진리를 믿는 것이 바른 신심(正信)입니다. 불멸 후(佛滅 後) 이천 오백년의 말세에도 다생으로 부처님을 따라 배운 이들이 있어서 이와 같은 바른 신심(正信)으로 계를 지키고 큰 복을 닦으며 금강경의 진리를 읽고 거룩한 신심을 내어 무량한 복덕을 짓는 일은 심히 희유(希有)하다는 뜻에서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解 義] 이제까지 말씀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보리존자가 의문을 일으킵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이 다 허망할 뿐이니 모든 현상이 현상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까지의 법문을 듣고 육신 본위로만 사는 중생들이 육신이 내가 아니라는 그 법문을 얼른 알아듣고 믿음을 낼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파유중생(頗有衆生)에 파(頗)는 자못 파자인데 행여나, 진정 그런 중생이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득문여시언설장구(得聞如是言說章句)는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이와 같은 말과 글을 듣고 나서」란 뜻이니, <언설장구>는 곧 경문(經文)을 가리키며 말과 글을 가리키는데 말이 세련(洗練)되면 그것이 글이고 글이 서투른 것이 말이어서 마치 시와 소설이 다르듯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됐을 때 부처님께서 이런 연설이나 이런 글자를 보고 이 금강경을 읽어보고 천독만독(千讀萬讀) 자꾸 읽어서라도 「그것이 참말이구나」하고 「실다운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정말 있을까?」(生實信不)하는 의심을 냈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쓸데없는 소리였구나, 하나도 사실 없는 헛소리를 듣는 것이었구나, 마치 미친 사람이 술을 먹고 잠들어서 잠꼬대하는 꿈속의 헛소리였구나, 하고 느끼겠습니까?」 「이제까지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소리라,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나 아닌 다른 사람 얘기만 하는 도서관의 서적은 모두 다 미친 사람 술 먹고 자다가 헛소리하는 잠꼬대 녹음에 불과한 것이었구나. 그런 걸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 참말로 가치가 있는 진리의 실재 내용이 있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구나 하고 그런 신심을 낼 사람이 있겠습니까?」하고 부처님께 의문을 여쭈었습니다.

 

原 文 : 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解 義] 수보리존자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그렇지 않다고 끊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 너 함부로 하지 말라.(莫作是說) 부처님께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뒤에, 불멸(佛滅)한 뒤에 부처님께서 육신의 몸뚱이를 버리고 열반적멸(涅槃寂滅)의 부처님 세계에 멸도(滅度)하신 뒤에(如來滅後) 다섯번째 오백세 되는 그 때에도(後五百歲) 계를 잘 받아서 목숨처럼 지키어 큰 복을 짓는 갸륵한 수행자가 있어서(有持戒修福者) 이 금강경의 이런 거룩한 법문을 듣든지 읽어보고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라는 법문 듣고 깨치듯이 「참 그렇겠구나」하는 신심(信心)을 낼 것이다.(於此章句 能生信心) 그리고 「아 참말로 진실한 말이구나. 이런 내용 이런 말씀이었구나. 그것은 정말 한 말 한 글자도 거짓말이 없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후오백세(後五百歲)란 말은 오백년을 단위로 하여 제일 오백세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오백년까지를 가리키고, 제이 오백세는 부처님 가신 뒤 오백년에서부터 천년까지를 가리키고, 제삼 오백세는 천오백년까지, 제사 오백세는 부처님 멸도(滅度)하신 뒤 이천년까지, 제오 오백세는 불멸(佛滅) 이천 일년부터 이천 오백년까지에 해당합니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을 지으려는 수행인이라면 계를 바로 지키지 않고서는 큰 복을 성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직자라고 하면 남이 먹기 좋아하는 음식도 안 먹고 좋은 의복도 안 입고 좋은 데 거처(居處)도 안 하고 그리고 앉아서 밤에 잠도 안 자고 저녁도 굶고 하루 한 끼만 먹고 밤새도록 정진(精進)해야 남다른 수행도 되고 남들이 고마운 생각을 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 하고 공부도 잘 안하고 하면 하나도 고맙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 곧 「계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 다 먹어서 말하자면 고기를 먹는다, 파·마늘 먹는다 하면 영양 있고 자극성식물(刺戟性食物)이고 양기를 돕게 되기 때문에 비구나 비구니가 혼자 살 수 없게 됩니다. 몸뚱이는 뚱뚱하게 살이 찌고 정력이 강해지니 공부도 안 되고 번뇌가 막 일어납니다. 영양가치 있는 음식을 먹어서 피가 자꾸 들 끊고 술 같은 것 마셔 놓으면 온갖 생각이 나를 막 흔듭니다. 그래서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 강해지니 한번 흔들어 어지럽혀 놓고 나서 나중 술 깬 뒤에 생각해 봐야 후회막심하고 이런 일이 생겨 놓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다 먹으면 독신생활(獨身生活)도 안 되지만 억지로 참고 한다 하더라도 번뇌를 참느라고 공부도 안 됩니다.

수도하는 데 제일 어려운 것이 남녀 성 문제인데 음식 같은 것은 좀 안 먹으면 참을 수 있지만 먹을 것 다 먹어 놓으면 이성끼리 만나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성끼리 아무도 없는데서 만나면 할 수 없습니다. 성이란 본래 동물적인 본능일 뿐 눈도 코도 없고 머리꼬리도 없는 것이니 거기 이끌리면 동물입니다. 극단(極端)으로 말하면 애비와 딸을 이성이 하나도 없는 무인도에 갖다 놓으면 어린애라도 키워 가지고 손주를 낳습니다. 애비와 딸이 손주를 낳으면 그것은 딸이 낳았으니 손주고 애비가 낳았으니 자식이고 손주도 아니고 딸도 아닙니다.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충동 안 받으려면 애당초 영양가치 있는 것 먹지 말고 자극성 있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환경에 주의하고 계율에 맞추어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야 큰 복을 닦을 수 있지 계를 지키지 않고는 번뇌망상에 끄달리게 되고 탐진치 삼독으로 사는 중생놀음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므로 큰 복을 지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를 안 지키고도 복을 지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계를 가지고 짓는 복에 비교해 볼 수가 없는 작은 복입니다. 이런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가 금강경의 이런 구절을 읽어 보고서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이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같은 구절을 읽어 보고서(於此章句) 능히 신심을 내어 「참말로 진실한 진리였구나. 한 글자 한 마디도 진리 아닌 것이 없구나」하고 깨달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能生信心以此爲實)

 

原 文 :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 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解 義] 『당지시인(當知是人)하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 두라.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저 한 부처님께서나 두 부처님께서나 세 부처·네 부처·다섯 부처님께서 출현(出現)하실 때마다 태어나서 이종선근(而種善根)이라. 예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부처님께 법도 묻고 같이 공부도 많이 해서 착한 바탕을 많이 심었을 뿐이 아니라.』 착한 일 하는 것은 착한 뿌리가 되고 악한 일 하는 것도 뿌리가 된다는 말은 하나의 바탕이 되고 습관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한 부처님께만 뵈옵고 따라 배우면서 하나도 빼지 않고 듣고 그걸 다 기억하면 전능만능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부처님만 친견하고 신행(信行)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한 다섯 부처님을 이 세상에서 만났다면 그건 참 큰 복 지은 사람입니다. 다섯 부처님한테만 이런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한두 부처님 계신 데서가 아니라 이미 오랜 과거세(過去歲)부터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已於無量千萬佛所) 그 많은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고 부처님 가르쳐 주시는 대로 목숨 내 놓고 철저히 좋은 수행을 했습니다.(種諸善根) 부처님 직접 만나 놓으면 얼마나 신심이 나겠습니까? 휘발유가 불을 만난 것처럼 우리의 마음바탕이 그만 환 하게 드러납니다. 후 오백세(後五百歲)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많은 부처님 앞에서 많은 선근(善根)을 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천 오백년이나 지난 말세에도 어려운 불법을 듣고 「그게 참말이구나.」하고 바른 신심을 내어 바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여러분들이 금강경의 어려운 법문을 듣기 위해 벌써 두해가 넘었는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게 나오는 신심을 보고 정말 고맙고 거룩하게 느껴 본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지방에 가서 법문을 못하게 되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정신자(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니라. 금강경 가운데 어떤 구절을 듣든지 한 생각이라도 청정한 신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바로 믿는다는 정신(淨信)은 깨끗한 신심을 낸다는 말이니 이 마음에 조금도 부처님 뜻을 빼놓지 않고 다 받아들인 것을 정신(淨信)이라 합니다.

 

原 文 :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解 義]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신령한 마음을 눈으로 다 아시고 다 보시느니라(如來悉知悉見). 이런 중생들이 곧 다생(多生)으로 부처님 처소(處所)에 인연을 맺어서 이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청정한 신심을 내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이 모든 중생들이 곧 말세에 가도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 있는 것이 아니고 선근중생(善根衆生)들이 인연 있는 곳에 태어나 불법을 받아 지니고 거룩한 신행을 닦는 중생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중생들이(是諸衆生) 무량한 복덕을 얻는 것을(得如是無量福德) 여래께서 다 아십니다. 금생에 이 중생이 죽어서 어디로 가고 내생에 공부를 많이 하여 그 후세에 가서는 어떻게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걸 부처님은 낱낱이 다 아십니다. 내생에는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서 글을 어디서 배우고 어떤 스님을 만나 출가(出家)하고 어디서 발심하여 어떻게 수행한다는 것을 활동사진 필름 들여다보는 것처럼 환히 듣고 보고 하시는데, 그것은 부처님은 사차원·천차원(千次元)·만차원(萬次元)·무한차원(無限次元)의 세계에 들어가서 시간공간을 자유자재하게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일일이 지나온 일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본인보다 더 잘 아십니다.

 

原 文 : 何以故 是諸衆生 無不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解 義] 이 모든 중생들이 아(我)가 있어서 나라는 생각, 곧 아상(我相) 육체가 나거니 하는 그런 망상인데 이 생각이 앞서 가지고 제가 잘났다는 것이고 육신인 나 본위로 모든 것을 내세워서 남한테 안 지려고 싸우고 칼부림하고 합니다. 금강경을 아는 사람은 아상이 없어서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없고 동시에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생각이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 조건이 있게 됩니다. 난 공산주의다, 난 자본주의다, 난 기독교다, 난 불교다, 그런 게 붙습니다.

그런데 2500년 뒤에 금강경의 사구게에 발심한 이런 중생들은 아상도 없고 또 인상(人相)도 객관도 없습니다. 인상은 남이라는 소리도 되지만, 사회환경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 육체가 나인데 육체 밖에 객관을 인정하는 것이 인상 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시집가 봐야겠다. 자식 낳아야겠고 그러면 돈도 벌어야겠다.」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니 곧 살림살이 입니다. 또 중생들은 그냥 죽는건 생각 안 하고 죽게 되면 다 끝날 것인데 공연히 그 사람과 감정을 맺고 내가 공연히 마음 안 좋게 해주었구나, 이런 것이 모두 죽을 때 후회가 됩니다. 그러니 그거 천년 만년 살 줄 알고 생각하는 것, 오래 살려고 좋은 약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이런 법문(法門)을 처음 듣고 비로소 「아 진리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이런 법문 이제야 만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법상(法相)입니다. 그런 건 진리가 아니고 불법(佛法)만이 정법(正法)이니까 그것만 지켜야겠다는 마음도 없고 불법 믿는다는 생각도 없는 것 그것을 무법상(無法相)이라 합니다. 비법상(非法相)이란 건「잘못된 법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법이라고 지키려는 법이 아니다」 「법이 없는 게 참말 법이구나 하는 생각」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니 또한 법 아닌 것, 잘못 생각하는 것도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을 무비법상(無非法相)이라고 합니다.

후오백세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깨끗한 신심을 낸 사람은 이렇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이 네 상(四相)과 「법이란 생각」(法相) 「그릇된 법이란 생각」(非法相)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복덕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原 文 :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解 義] 근본적으로 마음에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중생들이 마음 가운데 무언가 하나 고집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마음에 간직하는 게 있다면(若心取相) 아상, 곧 나라는 생각에 끄달리게 되고 따라서 사상에 끄달리게 되는 까닭이니, 그렇게 되면 사상이 따라오게 되므로 중생을 면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금강경의 이런 글귀를 듣고 보더라도 청정한 신심을 낼 수 없습니다. 사상이 다 없어져서 조건 없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으로 중생을 위해 봉사해야만 한량없는 복만 짓고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집착이 있고 선택이 있으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걸려서 결국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굴레를 뒤집어쓴 중생에 떨어지며, 그러다 보면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의 삼악도(三惡道)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卽着我人衆生壽者).

 

原 文 : 何以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解 義] 또 마음속에 이것이 참다운 진리다, 이것이 바른 진리고 정법(正法)이란 생각을 가져도 안 됩니다. 불법도 법입니다. 「불법, 그게 옳구나.」하는 생각을 하면 불법에 이끌리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도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불법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불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고 그러다 보니 사상에 이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사람 미워하는 생각을 내가 내버렸다 하더라도(若取法相) 「나는 분함을 내버렸다」하는 생각 그것이 아(我)가 되어 거기에 대한 중생상이 생기고 수자상이 따라오게 됩니다.(卽着我人衆生壽者)

법 아니란 생각,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있어도 역시 비법이란 생각을 일으킨 내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남이 있고 하여 사상이 있게 되는 때문에 그릇된 법이란 생각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런 것은 그릇된 법이다」하는 생각이 있으면(若取非法相) 상대적으로 옳은 법이 있고 옳은 법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남이 있게 되어 사상에 떨어집니다.(卽着我人衆生 壽者)

그러므로 중생을 면하고 생사를 벗어나려면 그래서 부처가 되어 우주의 주인공(主人公)이 되려면 정법도 집착하지 말고 그른 법에도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이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불법에 취하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아야 하며 정법이 아니라는 생각 그릇된 법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까지도 초월하는데 그밖에 불법 아닌 것을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어떻게 하든지 좀 더 오래 살려고,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금방 죽을 것은 모르고 「백년은 살겠지」 안심하고는 허둥지둥(貪慾)으로 온갖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중생들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미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아 놓았으니 그 사형이 언제 집행(執行)될는지 모른다. 오늘 밤중에 갈는지 내일 새벽에 갈는지 내일 낮에 갈는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없는 사람 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선근(善根)입니다.

부처님께 이런 법문 듣고 이런 선근(善根)심어서 이제 아상만 없애면 그 밑에 세 가지 상(相)은 저절로 다 없어집니다. <나>라는 생각만 없으면 남보고 남이라 하는 생각도 없게 되고 아무 생각 없이 대하니 중생이란 생각도 없어집니다. 이 몸이 <나>라 하니까 마음에 의·식·주가 필요하지 마음은 밥도 옷도 필요 없고, 남편도 아들딸도 필요 없고 그런 이 <나>는 말하는 이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런 법문을 듣고 확실히 알아들으면 벌써 나란 생각, 곧 아상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여러 백천억 부처님을 섬기다 보니 「아 육체가 내가 아니구나. 이 말하고 말 듣는 마음자리가 바로 나구나 !」하고 깨달아지고 하는 그게 선근입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고 또 중생의 업을 안 만들려고 좋은 일은 다 하는데 계 지키는 것만 해도 큰 복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위에 착한 일 또 다 합니다. 부처님 법 만나 법문 듣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없어져야 그런 사람이 됩니다.

 

原 文 :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解 義] 이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以是義故) 여래께서 항상 말하기를(如來常說) 「너희들 비구·비구니나 선남선녀(汝等比丘)들은 내가 설명한 법(知我說法)이 뗏목에 비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줄을 알아야 한다(如筏喩者)」 고 하셨는데 이것은 불법도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불법 자체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강물 건너는데 떼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큰 나무를 연쇄적으로 연결을 시켜서 떼를 만들어 가지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쇠로 좋게 만든 요사이의 큰 배에 비유해도 좋고 군함이나 큰 기선으로 봐도 됩니다. 하여간 강은 그 폭이 넓어서 헤엄쳐 건너갈 수 없고 꼭 건너는 가야겠고 하니 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는 강을 다 건너고 나서까지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아무리 고마워도 강 건너 저 언덕에 왔으면 배는 놔두고 가야 합니다. 배 타는 게 목적이 아니고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고 집에 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서너 살 먹은 애기를 앉혀 놓고 밝은 달밤에 「저 달 좀 봐라」하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이면 어린아이들은 달을 보지 못하고 엄마 손가락만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49년 설법은 네 마음 깨치라고 목이 터져라 하고 일러 줬는데도 그 목소리만 따라 다니며 「아, 깨쳐라, 그 소리구나!」 그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에 끌려 다니는 것이 마치 소가 코에 끌려 산이나 들이나 끄는 대로 가듯이 말에 끌려 다니기만 하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자식 저 달을 볼 것이지 왜 내 손가락만 쳐다보느냐고 때려 줘봐야 울기만 하지 달을 볼 생각은 못 냅니다. 엿을 주며 달래 봐도 「저기, 저기」 하는 소리밖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말로 가리킨 그것, 곧 팔만대장경에 있는 불법도 역시 남겨 두어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깨쳤다 해도 후대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에서 실제로 깨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전의 말과 글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는 정도일 뿐, 실제의 달 자체는 아니며,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경이고 법일 뿐, 저 언덕의 목적지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습니다.

불법인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法尙應捨) 어찌 하물며 법 아닌 것, 무당 법, 삿된 법, 그릇된 법, 그걸 의지해서 점을 친다든지 관상보고 사주보고 손금보고 하는 사람이 무슨 불교 하는 사람이겠느냐? 또한 이 세상은 모두 허무한 존재이고 하나의 물거품이고 이것이 꿈인데 이것을 어찌 참말이라 하고 육신이 내라고 고집하겠느냐?(何況非法)

이와 같은 그릇된 법, 불법이 아닌 법들은 마땅히 다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체는 죽어있고 살아있다면 마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확실히 나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 일반적인 중생들은 입은 옷을 주지 않으면 네 목숨을 죽이겠다고 위협 당했을 때, 아무리 대낮이라도 종로 네거리에서 옷을 훌쩍 벗어 줍니다. 반대로 몸뚱이가 내가 아닌 걸 확실히 아는 사람은 몸뚱이 벗어라 하면 몸뚱이 내버리고 마음만 갑니다. 옷 벗어 버리듯 하게 됩니다.

이럴 때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법이고 몸뚱이는 옷이고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법(正法)인데 마음을 깨치고 나면 이 두 가지를 다 버려야 합니다. 대승불법은 계를 지킬 필요도 없고 고기도 막 먹고 술도 계집질도 보리반야에 방해되지 않으니 삼가할 것도 없다는 막행막식주의(莫行莫食主義)의 그릇된 생각은 비법(非法)이고 계를 지키고 음행도 술도 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육신이 내가 아니라 마음이 나라는 진리를 체득하고 깨달음을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은 정법인데, 우리가 마음을 일단 깨치고 나서는 계를 지니고 마음을 닦겠다는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아무렇게나 막행막식해도 관계없다는 그릇된 법은 더 말해 볼 것도 없이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說 義]

●막행막식은 전도된 비법

계율(戒律)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유감스럽지만 요사이도 더러 있는 우리 주위의 일로서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큰 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승불법은 마음만 깨치면 일체에 걸림 없고 아무런 행동을 다 해도 파계가 아니고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 해방 전만 해도 이런 식으로 견성한 도인이 많았습니다. 모두 고기 먹고 술 마시고는 물 마시나 술 마시나 뭐가 다르냐고 하면서 술기운에 화두(話頭)가 더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술기운에 취한 기분이지 공부가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 공부뿐 아니라 어떤 학문이나 과학이나 육체수련에 이르기까지 술기운으로 인해서 더욱 좋은 효과가 나온다는 말은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특히 참선 정진을 어떤 술이나 약품에 취한 마취된 기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그들은 야채를 먹으나 고기를 먹으나 한가지고 무엇을 먹든지 참선만 하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도둑질을 하든지 음란(淫亂)한 성생활을 하든지 대보리(大菩提)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면서 마구잡이로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합니다.

이런 풍습(風習)이 오늘까지 영향이 미쳐서 일대문제(一大問題)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불교를 거꾸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배운 금강경의 뜻으로 보더라도 보살은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해 보시하고 제도해야 할 것인데 남의 것 도둑질 하고 음행하라고 한 데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인데 이것을 편의상 남의 것을 훔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불교의 정신과는 정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소승불교의 이기주의(利己主義)는 차라리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므로 그 보다는 났습니다. 또 불교에서는 윤회(輪廻)하는 것을 절대 인정해야 하므로 금수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 형제동포와 같이 보고 자비심으로 이끌어 제도해야 하는 수행자로서 육식을 하고 음행을 하는 것은 자비의 종자를 끊고 번뇌를 가중하는 전도된 행동일 뿐입니다.

 

●아란존자의 위기련

그래서 우리 승려는 비구나 비구니나 독신수행에 알맞은 생활규법을 마련해 가지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구나 비구니는 혼자 다니지 못합니다. 둘도 안 되고 꼭 셋씩 다니라는 것입니다. 혼자 다니다 보면 불량한 사람 만나면 유혹도 되고 겁탈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다녀도 서로 뜻이 야합하기 쉽고 또 망신을 당해 놓고는 입을 다물고 시치미를 뗄 수 있지만, 셋이 되면 서로 의사가 맞기도 힘들 뿐 아니라 일을 당했더라도 참회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네는 아무리 조그만 암자 움막에 살더라도 세 사람 이상이 살아야지 둘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이 살면 뜻이 맞고 파계를 하고도 서로 감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란존자가 어디 가셨다가 일행(一行)스님 두 분은 딴 데 볼일로 가시고 아란존자 혼자 오게 됐는데, 오시다가 목이 말라서 샘가에 앉아 있는 처녀에게 물을 얻어먹게 됐습니다. 물을 떠주던 처녀가 아란존자를 뵈오니 풍모(風貌)가 너무 잘생긴데 아주 반했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 다음으로 아란존자가 잘 생기셨다고 합니다. 그 처녀는 상사병(相思病)이 나다시피 되어 그 어머니에게 아란존자에게 시집을 안 보내 주면 죽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되는 이는 주문(呪文)을 외워서 요즘 같으면 최면과 같은 신통력을 가진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문을 외워가지고 아란존자를 집으로 되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수양이 높은 사람은 수양이 낮은 사람에게 정신력으로 에너지의 압력을 가하여 강제체면을 걸어가지고 자유로 그 사람을 부립니다. 딸을 위해 주문에 능한 그 여인은 주문으로 아란존자로 하여금 그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딸 방으로 그를 인도했고 딸과 단 둘이만 있도록 했는데, 그때 아란존자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결사적으로 딴 데로 간다고 간 것이 그 처녀의 방으로 들어오게 됐고 아란존자는 이제 속옷 하나만을 입고 겁탈을 당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아란존자가 파계의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보시고 신통을 나타내시어 허공에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을 화신(化身)으로 나투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중이 다 볼 수 있도록 하시고 능엄주(楞嚴呪)라는 천수대다라니의 일곱배나 되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시켜서 그대가 빨리 이 주문을 받아 가지고 가서 외도(外道)들이 하는 주문을 풀어 주고 아란존자와 처녀를 함께 그 상태 그대로 데리고 오라 하셨습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가서 주문을 외우니 강제최면(强制催眠)은 없어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대중이 수천명 있는 데서 옷을 벗고 있는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아란존자는 부처님 앞이므로 부끄럽기 한이 없어 얼굴이 새빨개졌고 고개를 들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란존자는 울면서 부처님께 대법문(大法門)을 여쭈어 묻게 됩니다.

「한량없는 우리의 선각자(先覺者)이신 부처님들께서는 처음에 어떻게 발심을 하셔서 아무 사고 없이 성불하시고 끝까지 어떻게 가시었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중이 되기는 했지만 문수보살님이 아니시면 오늘 틀림없이 파계를 당할 뻔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정직한 마음으로 내가 묻는 대로 틀림없이 대답하라.」 「부처님께서 저의 마음을 환히 보고 계신데 무슨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능엄경의 법문이 시작된 것인데, 그 내용은 결국「네가 무엇이냐? 아란존자 네가 네 정신을 못차려서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니냐? 네 정신을 똑바로 차렸으면 부처님께서라 해도 안 될 터인데 네가 무엇인지 그것을 모르니 그런 변을 당한 것이 아니겠느냐? 네 마음이 어디 있는지 그것을 먼저 밝히도록 하라.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안도 밖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느냐, 가슴에 있느냐, 눈에 있느냐?」라고 따지다가 나중에 마음이 무엇이냐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네가 지금 속았다고 생각하는 그 주체가 무엇이냐, 무엇이 그렇게 속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아란존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방제불(時方諸佛)이 어떻게 발심해서 아무런 사고 없이 앉은 자리에서 부처가 되었습니까?」하고 파고 묻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답변하신 말씀도 결국「그렇게 파고 묻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먼저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그런 강제최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옛날 요술한다는 사람들이 인생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육체본의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그런 삿된 짓을 합니다. 이런 강제최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일본만 해도 천명을 헤아릴 정도고 영국 미국 같은 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걸 무기로 해서 별짓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수양이 물론 도저한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아란존자는 속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속는 내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힘이 약했을 뿐이며, 또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서 밝히신 바 그 처녀와 아란존자는 전생에 다생겁래로 부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처녀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했다고 합니다.

아란존자가 여인에게 겁탈당할 뻔했을 때도 부처님은 그것을 구해 주셨을 뿐 아니라 음행과 살생계를 계 가운데 제일 무거운 계로 삼았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를 가지고 수행을 해야 하는데, 계에도 소승계(小乘戒)·대승계(大乘戒)의 구별이 있습니다. 소승은 기초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고기라도 모르고 먹으면 허물없다고 말합니다. 정 죽게 됐거든 고기 먹어라, 많이도 먹지 말고 죽을 목숨만 건져 가지고 양치질하든지 참회를 해서 죄를 소멸해 가지고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 소승경전에 더러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 동남아시아 비구스님들은 여자를 곁에 못 오게 합니다. 사진 좀 찍자고 해도 남자 처사를 불러 놓고 처사 앞에 여성을 앉게 하고서야 찍지, 직접 비구승 앞에다 바로 여성을 앉혀 놓고 사진 찍으면 그건 비구승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스님들은 한국·중국·일본 승려들은 비구가 아니라고 그럽니다.

 

●계(戒)를 가지고 닦는 복

계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도 유언(遺言)으로 훈계하신 일까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정말 부처님께서는 만사를 잘 일러 주시는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누구한테 의지해서 도를 받겠습니까?」 여쭈니 「네가 계를 지키면 내가 열반하고 천년 만년 지나도 부처님 옆에 있는 것이고 계를 파하면 내 곁에 있어도 부처님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계가 생명이니 성불하는 데도 그게 생명이고 또 복을 짓는 데도 그게 생명이니 계율(戒律)을 법사로 삼고 계를 따라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를 가지고 복을 짓는다는 말이 보통 뜻이 아닙니다. 계 안 가지고 복을 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계를 갖는 복에 비교해 볼 수도 없는 복입니다. 우리 스님들이 참말로 진실하게 중노릇 잘하는 율사(律師)가 하루 짓는 복이란 전 세계 인구들이 평생을 짓는 그 복을 다 모아도 억만분의 일도 못 따라갑니다.

 

●나다 남이다 없어져야

계율 지키는 것이 어렵고 거룩한 일이지만 그러나 불법이 계를 지키는 그것만 가지고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최소한도 지켜야 할 기본과제이고 성불하는 최초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하고 배를 타기 위해서는 강가의 나루터에 나가야 하는데 계를 지키는 것은 나루터에 가기위한 신들매를 하고 떠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싶어도 나루터에는 가지 않고 육지 한 복판에서 잠이나 자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루터에 도착해서는 서슴지 말고 배를 타야 합니다. 만일 나루터에까지 갔어도 막상 배를 타려 하니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물길이 조심이 되어 주저하기만 하고 배를 타지 못 한다면 이런 사람은 강 건너 저 언덕에는 건너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배를 타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을 깨쳐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없애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니 남이니 하는 생각 없이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머무름 없는 경지에서 모든 중생을 위해 보시하고 일체 중생의 제도를 위해 지계(持戒)하고 중생들의 안락을 위해 인욕(忍辱)하고 더욱 많은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해 정진·선정·지혜(精進·禪定·智慧波羅蜜)의 보살행(菩薩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상(我相)이 없는 마음에서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야만 정말 남을 위해서는 큰 복을 지을 수 있고 참된 공덕을 짓습니다. 아상(我相)이 없어지면 참사람 진인(眞人), 좋은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적대시(敵對視)하지 않게 되므로 누구와도 잘 어울립니다. 미친 사람하고도 어울리고 잘 놉니다.

서울 여자 한 사람이 해방 이십년 전부터 공부한다고 하다가 미쳐서 순사고 서장이고 만나면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일본 욕을 막합니다. 난 그 사람의 그런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 만나서 웃지도 않고 깍듯이 시치미 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기의 지난 것을 다 얘기했는데 자기는 전차 기차도 공짜로 타고 다닐 때 운전수가 돈 내라면 「아 이놈의 자식아 네가 그렇게 충성해서 좋을 게 뭐 있냐? 결국 왜놈한테 가는 게 아니냐? 우리 조선사람 좀 공짜 차타는 게 그렇게 배 아프냐?」하고 도리어 호통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본경찰이 못 잡아 갑니다. 파출소나 경찰서로 데리고 가도 아무한테나 막 욕을 하고 덤벼드니 미친 여자라고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하나도 미친 말이나 행동도 안하고 그러는데 요사이는 이제 나이도 많고 그러니 나를 만나면 아무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돈 좀 달라는 표를 합니다. 뭐가 먹고 싶은 모양입니다. 나는 누가 보는데 줄 수도 없고 따라오라고 해서 살짝 뒤로 줍니다. 일년에 두번 세번 그렇게 그 사람이 미친 짓을 하고 그랬습니다.

자꾸 미쳤다고 하면 누구나 미칩니다. 아무리 성한 사람이나 인격자라도 사람 서넛이 짜가지고 그 사람이 미치게 만들려면 일주일 안에 그 사람 미쳐 돌아다닙니다. 인격 있는 사람은 처음엔 억울하다고 야단하지만 나중에는 여럿에게 집니다. 물론 같은 정도의 인격자가 해야 됩니다. 인격이 떨어지는 사람이 그러면 곧이듣지 않습니다. 아내가 하든가 좋은 친구들이 짜고 차차 자기를 의심하게 만들면 미쳐가지고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일주일내에 미쳐서 웃고 말도 함부로 합니다. 또 미친 사람을 성한 사람 대하듯 하면 미친 것이 나아집니다. 약을 먹이고 별별 치료를 해도 안 되지만 성한 사람끼리 앉아 그 사람 옳게 대해 주면 그는 성한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애초에 <나>란 생각(我相)이 없어 깨끗한 순수한 마음만 튼튼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슨 소리가 들어와도 거기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건 다 바람소리고 물소리다. 이해 타산할 소리 하나도 없다. 사람 지껄이는 소리 역시 다 그렇다.」 이걸 알고 나면 몸뚱이 그것도 내가 아닙니다. 이 몸뚱이는 지금도 자꾸 죽어가는 판이고 언젠가는 어디가나 차에 깔릴는지, 나쁜 사람만나 칼이라도 맞아 넘어질는지 그걸 모릅니다. 어디가나 물에 빠질는지 불에 타서 죽게 될는지, 집이 무너져 자다 죽을는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몸뚱이가 나라고 기어이 아끼고 살아봤자 별수 없습니다.

몸을 애착 않고 사건에 내가 관심을 갖는 일이 없이 하면 농사, 장사해도 피로가 안 생깁니다. 그러니 아상 없이 하라. 내가 없으니 내 소유물도 없다. 다 필요하면 누구든지 가져가라. 남의 것은 소유로 인정하지만 나에게는 소유권 행사 없습니다. 물질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몸뚱이를 저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니 불법(佛法)으로 교화해 주어야 내생에 나와서 악한 마음 안 먹고 법문 잘 듣고 부처님께 인도(引導)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육체가 내가 아니니 나라도 땅도 아들딸도 자기 마누라도 버리고 누구든지 달라면 다 주고 안 간다고 그러면 업어다 주고 그런 식으로 나란 육체를 버리고 모든 지식을 다 버려 버리고 참선이나 불교공부까지 다 버리고 나면 그곳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정말 텅 빈 그런 경지입니다. 「내 마음 자리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모든 생각이 없어지면 부처님까지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 <아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릇된 법은 뗏목도 못된다.

내가 처음 도선사에 들어가니 종래에 다니던 신도가 약 칠백 세대쯤 되었는데 모두 다 조상 때부터 이 절에 다녔기 때문에 다니는 것뿐 불교의 뜻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미신적으로 다니는 신도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도선사에 기도를 해서 아들을 낳았다든지, 산신각에 기도를 해서 복을 받았다든지 자손에 대한 소원을 빌어서 성취했다든지 하는 이들이고 부모의 유언에 따라서 다닌다든지 하는 무당불교에 가까운 신도들이었습니다.

신라 고려 때에는 스님들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일반 국민의 불교에 대한 신앙과 교양도 높았으며 국가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으니, 불교의 지위와 교통이 거룩했지만, 조선 때에 와서는 죽일 것을 사정 봐서 살려두는 정도의 극한적인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말미암아 중은 식은 밥이나 얻어먹는 불교로 되었습니다. 신도들이나 스님이나 수준이 극히 낮아져서 여신도들은 부처님께서 복 준다니 복 좀 타 오려고 절에 가고 스님을 무당 취급해서 그 풍습이 해방 후에까지도 그런 정도였습니다. 쌀 외에는 돈 백원 가지고 와서 아랫목 차지해 가지고 스님들 보고 밥해 오라고 상심부름이나 시키는 불교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신도정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나는 도선사에 가면서 먼저 「점도 치지 말라. 사주도 보지 말라. 절에 온다고 택일도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는 사시공양을 하셨으니 불공도 다른 때는 하지 말고 공동으로 함께 하라. 부처님께서 굶어 돌아가신 분 아니니 밥만 자꾸 때 없이 해서 올릴 것이 아니라 제가끔 일심으로 마음으로 참회하라.」고 하며 미신적인 짓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 칠백세대가 다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도 안 왔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내려가서 밥을 얻어먹는 정도로 되었는데 요즘은 전혀 새로운 신도들이 일만 칠천 세대로 늘어났고 매월 오백 세대씩 늡니다. 나는 그 뒤에 산신각까지 헐고 신도들의 그릇된 신앙, 곧 비법(非法)을 고쳐 주기 위해 올바른 신앙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고 마음을 깨쳐 생사고뇌를 벗어나야 한다는 불법을 말해 주었고, 마음을 깨치고 나면 부처님의 법문까지도 다 버려야 하는데, 미신·그릇된 법·법 아닌 법을 버려야 한다고 얘기한 보람이 있은 것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쫒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개구리이고 죽음은 구렁이입니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찰나도 쉬지 못하고 죽음이란 구렁이에게 쫒깁니다. 자는 시간까지는 죽음의 구렁이에게 쫒기는 개구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생입니다. 그것도 한번 죽고 그치는 죽음이 아니고 천당·지옥·축생으로 내생에도 무량겁을 쫒기고 죽고 합니다. 마음을 깨쳐서 육신은 내가 아닌 것을 확인해야 죽음의 쫓김을 면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치면 모든 근심을 여의고 어떤 법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정법(正法)은 물론 사법(邪法)의 구애를 벗어납니다. 강을 건너서 뗏목을 버리듯 모든 것 다 버리고 사상(四相)이 떨어져 나갑니다.

 

●말하고 듣는 그것이 주인공

이상에서 말씀하신 부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40년 동안 하루도 쉬지 말고 법문하는 것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듣고 애쓰는 제자가 많았지만 내 말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내가 너희한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듣고 「과연 그렇구나, 거기 들어가면 뭐가 있긴 있겠는데 알듯 알듯 하구나.」하고 생각하는 놈, 생각할 줄 아는 그게 바로 무엇인가? 그걸 알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뭔지 그걸 알고 앉아서 법문을 들으라는 것이니, 내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고 날 따라다니면서 배워봤자 그것은 한갓 바지 껍데기만 따라다닌 게 아니겠느냐? 따라서 내가 너희한테 법문을 한 것은 무엇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한 것이지 말이나 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인가.」 그것 하나, 이름 성도 없는 것,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는 그것, 앉아 듣는 그것이 너의 마음인데,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듣고 있으면서 알지 못하겠느냐?

무량겁으로 너희가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 왔으니 그래서 마음이 <나>라는 소리를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어째서 껍데기인 몸뚱이만을 알고 열매인 주인공을 모르느냐? 몸뚱이 위에 걸친 옷은 칼로 아무리 찢어봐야 아무 감각이 없지만, 몸뚱이는 바늘로 살가죽 어디에고 조금만 찌르더라도 곧 아픔을 느끼듯이, 몸뚱이는 너의 옷이고 껍데기며 참 너는 너의 마음이다. 몸뚱이는 하나의 기계이고 물질의 조직에 불과한데 그것을 자꾸 <나>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도 말똥말똥 무슨 소린가 그렇긴 한데 하면서도 정말 마음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이 어느 것인지 알아보려고 들면 가령 또 이것이 객관세계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한 십년 찾아서 땅속이든 어디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 이 놈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말하고 말 듣고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관념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생각만 놓아 버리면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그 주체가 드러날 것이다.

아주 천하에 제일 쉬운 일이다. 쉽기로 말하면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마음 깨치기가 더 쉽고 낯 씻고 코 만지려면 시간이나 걸리지만 이 마음은 시간 걸릴 것도 없다. 말하는 이놈이고 듣고 있는 마음 그것이기 때문에 너무 쉬운 때문에 알려고 하는 생각이 도리어 장애가 된다. 저 말 듣지 말아야겠다고 하니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이걸 가만히 생각하노라면 피를 토하다 죽을 일이다. 지금 이 몸뚱이는 오늘밤에 내 버릴지도 모르는데 이것만 소중히 생각해서 세계사람 다 잡아 먹고 저만 살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깨치지 못하느냐? 깨치고 싶어 하는 생각이 있어서 늘 객관시(客觀視)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가슴에 있는지 머릿속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망상을 다하는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버리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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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身相(가이신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라 世尊(세존)하 不可以身相(불가이신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說身相(여래소설신상)은 卽非身相(즉비신상)일새니이다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육신은 곧 육신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있는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第五 如理實見分--실제의 마음을 보라

 

[科 解]

여기서 금강경의 핵심이 또 나옵니다. 그 골수는 소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냐, 그것을 모르면 네가 아무리 불교를 믿고 49년 동안 부처님 모시고 법문을 들어 보았자, 아무 필요 없는 헛일이 된다는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분절(分節)입니다. 소위 불성(佛性)자리가 있다고 하지만 불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역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철학자를 따라다니고 부처님을 따라 다녀봐도 마치 껍데기가 따라다니는 것에 불과합니다. 흔히들 불교를 피상적(皮相的)으로만 보고 「현실을 무시하고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 몸뚱이보다 한 발 더 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입니다. 몸은 마음 뒤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입니다. 마음이 앉아야 몸이 앉고 마음이 먼저 드러누어야 몸이 따라 드러누우니 어떤 것이 현실입니까? 항상 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 아닙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마음이 현실이고 주체입니다.

이 마음이 만사(萬事)의 주체입니다. 남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마음이 먼저 시작하면 몸뚱이는 따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언제나 뒤에 쳐져 있고 마음은 어느 곳 어느 때에나 현실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 현실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 몸뚱이부터가 확고한 정체(定體)가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물건들 물질은 다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며 정체가 있어서 현실이라고 지적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보리 네가 지금 나한테 묻는 그것(마음)이 무엇이냐?』 수보리 존자는 그 뜻을 아시지만 미래 중생들을 위해서 일부러 물으시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시집을 가야 산다. 장가를 가야 산다.』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두 분께서 신파 연극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네가 무엇이냐? 여래께서 무엇인가.』 하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밝힌 것이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인데 이치대로 진리 그대로를 실답게 보는 절이란 뜻입니다. 이 절에서 금강경의 진리를 대표하는 사구게(四句偈)인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이 나옵니다. 이 뜻을 잘 해득하면 금강경을 다 알게 됩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解 義] 부처님은 안으로 마음을 깨쳐 지혜가 밝으실 뿐 아니라 밖으로 생긴 몸의 모습도 곧 신상(身相), 몸매도 보통 사람에게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십니다. 부처님의 모습은 32가지로 거룩한 32상(三十二相)이 있고, 80가지로 뛰어난 80종호(八十種好)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량겁을 지내 오면서 보살만행(菩薩萬行)을 닦으실 적에 오직 중생만을 위하여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주었고,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가진 돈이 없으면 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약도 사 주고 먹을 것도 마련해 주고 합니다. 누가 당신 팔이나 눈을 약으로 쓰겠다고 하면 조금도 주저 없이 팔도 잘라주고 눈을 빼 줍니다.

이와 같이 선행(善行)을 하면 아주 복된 삶을 살게 되는데 부처님은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곧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어서 그 털이 보통 때는 말려 있지만 그것이 펴지면서 광명이 나오고 신통이 나옵니다. 또 정상육계상(頂上肉?相)이 있는데 정수리에 살상투(肉?)가 있어서 보통사람에게는 정수리 맨 위가 보이지 않으며 또 열자나 되는 광명이 부처님의 몸 위에 항상 있는 등 세상 사람에게 없는 32가지상(三十二相)과 80가지 좋은 모습(八十種好)이 있습니다. 이런 상호(相好)는 물론 범부에게는 다 없는 상이고 부처님에게 특별히 있는 상이고 공덕으로 나타난 상이니『이런 상호로 여래 곧 부처님을 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原 文 :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解 義]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 「부처님 몸의 상호가 아무리 거룩하다 하더라도 그런 육신의 몸매를 가지고 부처님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사뢰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을 <여래>(如來)라고 했는데, 이 마음은 본래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지식도 사상도 선도 악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이 마음은 알 줄 아는 것뿐이고 순수한 생명, 청정한 본심이며 질량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은 같은 것과 같다는 뜻으로 여여(如如)하다고 합니다. 여래(如來)란 말은 이와 같이 같은 여여한데서 그와 같은 이가 왔다는 뜻입니다. 생로병사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 태어났다는 소리입니다. 언제나 같으니 거래(去來)도 직위도 동서남북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는 그런 사람이 탄생했습니다. 그이가 바로 석가여래입니다. 몸뚱이는 비록 뱃속에 들어가서 열달만에 아이가 되어 이 세상에 나왔고 실달태자가 되어 커서 출가해서 견성(見性) 오도(悟道)하여 설산(雪山)을 내려오셨지만 그 마음은 여여한 그대로 마침내 우리를 제도하려 오신 여래께서 바로 석가여래십니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뿐만 아니라 석가여래의 육신도 불생불멸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육신은 환상이고 꿈에 있는 몸뚱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으로 있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환상이란 불교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이 마음자리는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어져서 없는 것조차도 없어진 것이니 참으로 빈 것이며 허공도 아닙니다. 차라리 허공도 초월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 뜻이 아주 쉬운데 빈 공자(空)를 써서 온갖 강의를 다해 놓으니 도리어 알기 어려워집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고 지식도 사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니다 보니 진짜로 공한 것인데, 그렇다고 허공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온갖 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졌다는 생각도 없고 그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없기는 없는데 어떻게 없는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짜로 없는 이것이 금강경 강의해 달라고 와서 물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대답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묻고 대답하고 하니 뭐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처럼 있는 것으로 있지도 않고 허공처럼 텅 비어 없는 것으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이 소리를 잘못 알아들으면 공부하다가 아무것도 없는 경지가 나타나면 견성했다 도통했다 그럽니다. 그러니 있기는 있는데 있는 것도 있는 게 아니고 물질로 있는 게 아니고 없는 허공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이것을 묘하게 있다(妙有)고 하는 것입니다. 물으면 대답하고 먹고 배부르면 변소 가서 꿍꿍 앓고 이런 신기한 짓을 하니 참 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붙잡을 수 있고 쳐다볼 수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들어 볼 수도 없고 대질러 볼 수도 없고 그러니 이런 편으로 보면 꼭 진공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중생도 부처도 아닌 그런 것이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먹으라면 먹고 추운 줄 알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무엇이 분명히 있는 것이 물질처럼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처럼 없는 것도 아니므로 있기는 있는데 기이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자리인 이 생명은 진공묘유(眞空妙有)한 것이니 따라서 물질의 구성체인 이 육신이 아무리 미묘한 상(相)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런 상호(相好)를 가지고 여래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解 義] 『왜 그러냐하면(何以故)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뚱이의 모양(如來所說身相)은 곧 몸뚱이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몸뚱이의 모양이 여래일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卽非身相).』하고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여 여자 몸뚱이 타고 나면 시집가려고 애를 쓰고 남자 몸뚱이 타고나면 장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애를 씁니다. 이런 망상을 버리지 못하여 죽어서 또 태어나고 업을 짓고 하게 되는데 한번 나서 늙어 죽는 고생이 보통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죽을 수 없어 살아 있는 것이지 살아 갈 이유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세상은 결국 먹고 똥 싸고 그것 때문에 무의미 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꼼짝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그것을 위해 죽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모두 농사짓고 장사하는 이유는 죽기가 싫어서 안 죽으려고 하는 짓에 불과합니다. 단 십분이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질합니다. 그러나 농사짓고 장사하는 게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 죽으려고 결정만 했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합니다. 농사짓고 장사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아닌 본래 우리의 생명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니 밥을 먹어 산 것도 아니고 무엇을 위해 산 것도 아니고 돈을 위해 산 것도 아닙니다. 이 <마음>을 발견하고 발심한 보살은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하고 행동을 바꿔야합니다. 그게 바라밀이고 응무소주(應無所住)하는 행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 생사를 초월하여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하루 밥 세끼가 재미나서 먹는 것도 아닙니다. 밥 안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누가 씁쓸한 산삼을 먹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안 먹고 영원히 살아있는 우리 마음을 깨쳐야 합니다. 그래서 전 우주의 관광여행이나 다니고 아무 할 일 없는 관광여행, 중생제도를 위한 여행길에 올라서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모두 마음 깨쳐 생사해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육체와 정신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게 참 나인가, 이 육체는 언젠가는 늙어 죽을 것이며 그것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근육이나 뼈가 우리 몸뚱이의 주가 되는데 이것을 분석해 보면 결국 수분·당분·지방질 등의 물질적 요소에 불과합니다. 혈액이나 오줌 등을 보더라도 결국 이것은 물질이며 오장육부는 물론 뇌세포까지라도 그것은 물질적 구조에 불과하며 물질은 결국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마음이 없으면 송장입니다. 육체를 부려먹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은 운전수고 육체는 택시와 한 가지입니다. 마음이 몸뚱이더러 앉으라, 서라, 가자, 온갖 일을 다 시킵니다.

그런데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므로 마음이 곧 나입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산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히 믿어지면 그날 저녁부터 잠도 잘 오고 영원히 죽음을 면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니 큰 환희를 얻습니다. 곧 이 몸뚱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原 文 :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解 義] 이 금강경 계통을 전부 통틀어 반야부(般若部)라고 하고 그 부수(部數)만도 육백부나 되고 경책의 권수로는 이천권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반야심경(般若心經) 같은 작은 경도 있지만 큰 경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백부의 골수를 통틀어 얘기하는 대표적인 글이 다음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란 네 구절입니다. 이 네귀 16글자 안에 금강경의 핵심은 물론 반야 육백부 전체의 뜻을 유감없이 표했다는 뜻에서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라고도 합니다. 그 게송(偈頌)의 뜻은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현상이 상이 아닌 줄을 직관(直觀)할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고 마음을 깨친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무릇 있는바 모양(凡所有相)이란 현상계(現象界)를 말하고 이때에 현상은 모든 생각, 안 보이는 모든 것까지 다 포함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만분의 일초도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질량 변화를 쉴 새 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엇이 됐다가 돌아오고 하므로 이것은 결국 믿을 수 없는 허망상(虛妄相)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皆是虛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학문·예술·종교·불교도 다 허망하고 오직 자기 마음만이 진짜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마치 실연당했을 때보다도 더 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여자하고 연애를 하다가 그 여자 뒤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또는 그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려고 했던 그 마음이 홱 돌아섭니다. 그 총각 처녀 지나간 길로 걷기도 싫어질 겁니다. 애정문제 가지고도 이렇게 마음이 돌아서는데 하물며 우주 인생의 근본문제에 있어서는 말할 게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날 죽이려하고 부처님까지도 날 죽이려고 하는 것 같을 겁니다. 이 육신을 죽여서 구렁텅이에 꼼짝 못하게 해놓고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 인생과 나와는 완전히 정이 뚝 떨어집니다. 연애하다 실연당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인 가짜 나는 이 얘기 끝나고 죽을지, 앞으로 계속 얼마나 살아 있을지 그걸 생각하고 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남편이 작은 여자를 얻어 속을 썩이더라도「누가 먼저 죽을지 모른다. 내가 전생에 남편에게 속을 썩여서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니 달게 빚이나 갚자.」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배워야 할 지식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면 모든 것이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若見諸相非相). 「이 세상에 미련이라고 남을만한 사건이란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허망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고 마음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니 그게 곧 참 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닳아 없어지도록 육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몸뚱이 한테 정이 떨어지고 나니 마음만 드러납니다. 눈과 귀가 보는 게 아님을 확실히 알면 몸뚱이도 포기해 버리고 우주와 온 세상을 다 포기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나면 버릴 수 없는 것만 남는데 그것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자리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깨치기 전에도 여래(如來)하면 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연애하다 한번 배신당하면 뜨겁던 정이 냉정하게 끊어져서 얼음보다도 더 식어 버립니다. 우리도 이 육체와 무서운 연애를 한 셈입니다. 그 어느 누구한테 어느 무엇에게 보다도 다시 없이 이 몸뚱이를 소중히 아끼고 거두고 하루라도 더 살리려고 아들딸도 제쳐 놓고 불성(佛性)자리만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그것들이 다 상(相)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발견한다. 곧 자기를 자꾸 정리해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육체의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자리를 발견합니다(卽見如來).

금강경에 사구절만 읽어 가지고 성불한 사람도 있고 반야바라밀만 읽어 가지고 신통(神通)이 나오기도 하고「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만 외워서 견성(見性)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가지만 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다라니를 하든지 하나에 전념을 해야지 이것저것 다하면 그것은 허욕이 되고 정신이 한 가지로 통일되기 어렵습니다. 가령<옴마니반메훔>만 자꾸 염송(念頌)하다 보면 나중에는 소리도 아니고<옴메>만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깨닫는 시간이 빨라집니다.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그런 줄 확실히 알았으면 마음이 드러난다는 금강경 사구게 곧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마음을 다해 읽었다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안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을 천독만독(千讀萬讀)해서도 안 된다면 내생에 또 독송할 각오로 자꾸 읽어야 합니다.

 

[說義]

마음을 찾는 생활

모든 것이 다 허망한데 그 중에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이라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꼭 알아야겠다하면 그것은 이미 견성에 연결되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오직 이 마음을 알아야겠구나.」하는 마음으로 이 경문을 읽으면 이것이 곧 천 칠백이나 되는 참선의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다 생각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도 내가 아니고 우주도 실재가 아니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이라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 가운데 마음만은 어제도 오늘도 그렇고 작년도 금년도 백년 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당을 가도 지옥을 가도 이대로고, 소가 되도 개나 구렁이가 되도 마음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몸뚱이가 개가 되고 구렁이가 되었을 뿐 내가 개고 구렁이이구나 하고 생각할 줄 아는 근본 마음자리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여자가 되나 남자가 되나 짐승이 되나 송장을 끌고 왔다 갔다 하고 배고프다고 밥 먹고 똥 누는 생각을 내는 주체, 부정하고 긍정하는 주체,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지금 말하고 듣는 이대로 영원히 살아 있는 <참 나>를 발견하면 그때부터 논이고 밭이고 재산을 전부 팔아서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고 배고프고 옷 없는 사람에게 밥을 주고 옷을 주어 다 보시 합니다. 의식주의 재산을 보시하고 그 다음에 또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게 옳게 사는 것인가, 다른 것은 다 하나마나하고 이것만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학문은 하나마나하고 세계 제일가는 박사가 돼 봐도 생로병사는 면하지 못하고 하루 밥 세 그릇 꼭 먹어야 합니다. 육신은 내가 아니고 죽어 없어질 한낮 물질이며 죽지 않는 마음 영원히 살아있는 <내>가 어디인가를 일깨워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꼭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 이 두 가지만은 꼭 배워야 합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마음 깨달아 우주에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바른 정신 넣어 주는 것이 정법(正法)을 펴는 법시(法施)인 것입니다. 또 위태롭고 외롭고 근심 속에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고 마음을 깨치면 생사를 초월한다. 마음을 깨치면 부처이니 석가여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믿는 것이다. 석가여래도 나 같은 사람으로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깨칠 수 있는 법을 그대로 남기어 놓았으니 부처님 하시던 그대로 수도를 하면 된다.」 이런 이치를 알아서 몸뚱이가 나인 줄 알기 때문에 모든 근심걱정이 있는 것인데 마음이 나인 줄만 알면 아무 근심걱정 없어집니다. 남이 내 돈을 다 들어 먹고 알거지로 만들어 놔도 그 사람이 밉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바로 믿도록 정법을 일러 주면 확실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그래서 모든 근심걱정이 없어지므로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이 참 나임을 가르쳐 주는 것은 확실히 법시 이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의식주에 구애가 없으니 아무리 굶어도 걱정을 안 하고 우리생활을 완전히 남만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바꿉니다. 바라밀을 도피안이라 하지만 그 말이 어렵고 차라리 현명한 생활을 한다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생존경쟁에만 몰두하던 생활을 아침저녁으로 다만 10분이라도 참선을 해서 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찾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의식주 생활도 반대로 자기를 깨치는 시간이 됩니다. 10분이 차차 20분이 되고 나중에는 열 시간쯤 참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밥 먹을 때도 옷 입을 때도 똥 눌 때도 기차시간이나 학교 가서 선생 강의를 들으면서도 화두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해 나가면 24시간 꼬박 참선이 됩니다. 염불도 그렇게 됩니다. 경희대학에 한 학생이 참선을 배워서 화두(話頭)를 하는데 전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화두만 하다가 어떤 때는 버스 종점까지 아주 간다는 것입니다. 화두에 열중하다 보면 나중에 그런 식으로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학교성적은 자꾸만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강의 한 번 들으면 완전히 기억되고 시험 때가 되면 다 알게 되는 때문입니다. 공부를 바로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해서 마음을 턱 놓고 살 수 있는 지경에 들어가면 그렇게 됩니다. 신경이 사방에 쓰이고 온갖 번뇌가 들끓고 그래서 피가 나빠지고 신경이 약해지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하던 것이 정신을 크게 안정하고 사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됩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 밭은 밭대로 더 잘 가꾸고 지혜도 나오고 하여 생(生)의 투사, 진리의 투사가 됩니다. 육체본위로 살던 생활을 마음 본위로 사는 혁명투사의 생활로 바꿔 나가는 셈입니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얘기가 이 금강경입니다.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든 것

앞에서 진공묘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 육신과 일체의 물질은 다 환상이고 꿈에 있는 몸뚱이와 같으며 따라서 참 말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으로 있는 것이므로 아무것도 없는 진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진공도 한 개의 가상(假想)이고 진상은 아닐 뿐 깊이 생각하면 환각, 환상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이렇게 생시에 칠판 옆에 서서 강의하는 것을 본 여러분은 꿈에 가서도 이 청담이 칠판 옆에 서서 강의하는 걸 보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 나타난 이 청담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있는 이 청담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늘 보고 듣고 기억한 그 기억이 꿈에 가서 이 청담 목소리도 되고 몸뚱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하고 객관하고는 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자 곧 이 청담이고 여러분의 생각이자 곧 법당입니다. 그러니 물어 볼 것도 없이 이것은 확실히 여러분의 환각(幻覺)이고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생각 그것이 환상을 만들었고 그러므로 현재의 이것이 다 하나의 환상이고 참말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은 물질로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 의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객관으로 된 꿈에 가서 남편과 여러 달 살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지금 이불 속에 있는 남편이 자기 남편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 남편을 기억하고 있는 그 기억이 남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남편이 나를 그렇게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은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좋아한 것입니다. 꿈속의 남편은 내 생각이 만든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꼭 생각하고 있던 남편의 모양, 성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이 그대로 남편이 되어 가지고 밤에 나와 어디로 놀러 가자고 하여 남편 따라 호강을 하고 하는 것인데, 저 혼자 둘이 돼서 돌아다닌 것입니다. 제 마음의 생각이 자기도 되고 남편도 되고 해서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이게 환상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이 모든 것도 다 그렀습니다. 이것이 다 그대로 꿈이라고 하면 처음 듣는 이들은 이해되지 않겠지만 확실히 생시(生時)도 꿈입니다. 서론에서 자세히 얘기한 바 있지만 꿈에 들어갈 적마다 생시를 모두 잊어버립니다. 나를 나아서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 준 우리 어머니가 여기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것이 어찌 꿈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을 베어도 이것이 생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시에는 꿈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살 먹어서 꾼 꿈을 팔십노인이 기억을 하고 있으니 우리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꿈입니다. 반면에 생시는 꿈에 의해 부정됩니다. 우리 기억에서 떠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바꾸어 생시를 꿈이라 하고 꿈을 생시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년만년 사는 게 꿈이고 백년 밖에 못사는 게 생시입니다. 따라서 긴 세월을 경험하는 꿈이 생시입니다. 그런데 꿈에 있는 몸뚱이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환상입니다. 환으로 있는 상이므로 있다 해도 안 되고 없다고 해도 안 되니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내 생각입니다. 생각이 에너지가 되어 있고 에너지가 물질로 남산으로 되어 가지고 올라가면 확실히 숨차고 힘듭니다. <있다 없다>를 초월하여 사차원세계에 들어가면 남산도 몸뚱이도 어떤 생각도 없고 번뇌도 환상도 없습니다.

 

착각의 연속 속에 산다

현상세계도 꿈과 다름없이 하나의 환상입니다. 가령 여기 있는 나의 이 그림자도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여기서는 없어지고 저쪽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그림자는 없어진 게 아닙니다. 광학적(光學的)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림자는 광선을 막은 것인데 광선을 막은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안이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림자 자체는 없는 것이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달 밝은 밤에 한강 둑에 나가 보면 한강 물 속에 비친 달이 자꾸 따라옵니다. 그런데 그때 물속으로 따라오는 그 달은 저 허공에 매어 있는 그 달의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달의 그림자란 무수한 광선이 쏟아져 내려 온 것이므로 온 땅 위에 달그림자는 꽉 차 있는 것입니다. 한강 물에 수억만개의 달그림자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있는 위치가 달라져서 안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A자리에 서 있다가 B의 지점으로 옮겼을 때 보이는 물속의 달은 곧 달의 그림자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A지점에서 본 달의 그림자가 B지점에서 보이는 자리로 이동된 것이 아니고 나의 위치가 바뀌었으므로 A지점에서 보던 달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된 것이고 그 다음 B지점의 달의 그림자가 보인 것뿐입니다. 따라서 전혀 다른 달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므로 우리 육안에는 달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도 실은 먼저 달그림자는 안 보이고 다른 달그림자가 보이는 것이며 자리가 달라질 적마다 보이고 안 보이고 다른 그림자가 또 보이고 이것이 연속된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그림자는 광학상 전혀 우리들의 착각에 의한 잘못된 인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관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착각의 연속 속에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사실대로 듣지도 느끼지도 못합니다. 모든 물체가 다 환이고 꿈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걸어서 이쪽으로 몸을 이동하면 여러분은 이 청담이 갔다고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처녀 인물이 참 잘 생겼다고 하는데 그것도 생각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4차원·5차원 세계에 들어가면 이와 같은 오관으로 잘못 알아지고 있는 물질의 환상계(幻想界)가 사라지고 마음으로만 얘기하고 생활하게 됩니다. 그 마음은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현실은 곧 마음

우리가 이제 육체를 가지고 나라하고 오관에 의한 인간 이것이 참된 <내 생명>인 줄로 소중히 여깁니다.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무시하면 곧 「현실을 부정해서 되겠느냐?」결사적으로 항의합니다. 그러나 「현실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현실이지 육체가 현실은 아닙니다. 육체는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실재의 현실이 아니고 환각으로 있는 것뿐이란 뜻입니다. 이 조계사의 이 법당도 그렇고 서울시내도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이 다 환각으로 있는 것이지 진실상이 아니며 실재가 아니다. 그런 줄 알고 보면 곧 부처님을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하셨는데 부처님을 본다는 소리는 곧 자기 마음을 깨친다는 소립니다. 마음 깨치면 다 부처니 모두의 마음은 이미 다 부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견성(見性)했느냐 하는 말은 부처님을 보았느냐는 말이 됩니다. 우리불교는 따지고 보면 지나칠 정도로 무서운 틀림없는 이론 입니다. 전자계산기로 계산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몇 천배 더 철두철미한 이론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미리 질겁해서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과 수보리존자 두 분의 문답하시는 내용을 지세히 따라 들으면 견성합니다. 곧 자기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까지가 다섯번째 구절로서 어느 구절에서나 견성할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듣기 싫으니까 설명방법을 바꿔 가며 말씀하십니다.

 

영차원(零次元)

현상이 실다운 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발견한다(若見諸相非相)란 말은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말을 바꾸어 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환상이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니 지금 이 법당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지옥도 있고 천당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공간에 조그마한 법당 속에 한량없는 우주가 이 안에 다 있고 공간이 있고 시간이 다 있고 우주와 차원이 다른 하늘나라 등의 다른 현상계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를 본다 했으니 그 말 조리를 놓치지 말고 따라 붙어야 합니다. 자꾸 따라가도 이 이치를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금강경·반야경의 공(空)의 뜻이 이리 엉키고 저리 엉켜서 쉽게 알기 어려우므로 <넝쿨반야경>이라고 일컬어 옵니다. 진공과 막 엉키어서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아서 소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내용을 해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에<공>을 세웠는데 그 공의 뜻이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어 무엇인지 사실 알기 어렵습니다.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라는 뜻이며 허공도 물질도 아니면 있을 게 없으니 그것은 4차원, 5차원, 천차원, 무한차원(無限次元)의 세계를 말합니다.

본래 우주가 처음 형성될 때 텅 빈 허공만 있었는데 지구도 태양도 공기도 없을 때, 텅 빈 그때의 그것을 영차원이라 한다면, 이 영차원의 시대에 무언가가 하나 생겼고 그걸 점이라 치고 이 조그만 점에 대해 여러 가지 술어가 있지만 이름뿐이지 반점이라 해도 기실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점을 여기 찍어 놓아도 이것은 면적이 있습니다. 좁쌀을 쪼개어 놓는다 해도 면적이 있습니다. 바늘 끝으로 조금만 찍어 놓아도 면은 있게 됩니다. 면이 있으면 넓이가 있는 것이므로 점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점은 무엇인가. 이 점이란 말로만 있고 글자로만 있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조차도 아닌 것 다시 말하면 숫자의 영이나 마찬가지로써 없는 거나 한가지입니다.

 

4차원(四次元) 5차원(五次元)

영차원의 세계나 점이나 그 뜻은 다 같이 없다는 점에서 동일한데, 그 다음에 비로소 일차원의 세계가 벌어집니다. 일차원의 세계는 곧 물질의 단차원, 연속된 점의 세계를 말합니다. 점을 연속시킨 직선, 곧 선의 세계입니다. 그것도 외줄 단 하나의 줄만이 있어서 오른쪽 왼쪽이 없습니다. 앞과 뒤만 있는 기차선로나 전차선로는 일차원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담배씨보다도 더 작은, 가령 수소나 산소를 늘어놓아도 선이 될 것입니다.

이차원의 세계도 선의 세계이긴 하지만 선을 포개어 놓아서 평면이 생긴 것, 그래서 앞 뒤와 왼쪽 오른쪽 양면이 생긴 평면의 세계를 말합니다. 삼차원의 세계는 평면을 포개어 부피가 생긴 입체적인 세계를 가리킵니다. 두께가 생기어서 아래 위까지 생긴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원의 세계는 전후의 이면만의 세계고 이차원의 세계는 전후 좌우 사면의 세계를 말하며 삼차원의 세계는 전후좌우상하의 공간세계를 말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시방세계(十方世界)라고 합니다. 십방을 시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의 표음법(表音法)을 따른 종래의 습관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원의 세계에 사는 중생은 앞뒤만 알지 옆을 모릅니다. 앞과 뒤로만 왔다 갔다 하는 것, 예컨대 전차나 기차 같은 것은 앞과 뒤로만 가므로 이것은 일차원의 세계라 하겠습니다. 자동차 같은 것은 동서남북 어디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 이차원이고, 비행기는 면을 달릴 수 있고 아래위로 다닐 수도 있으니 입체적인 삼차원의 세계입니다. 지구나 태양은 삼차원의 세계에 불과합니다. 지구도 선이 포개어지고 평면이 쪼개어져서 지구덩이가 된 것이고 태양도 그런 것입니다. 중생들은 다 이 삼차원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으면 도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우리의 육체는 삼차원의 세계에서 생겨서 여기서 우물쭈물 하다가 도로 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사람은 영원히 죽고 마는 것이다. 우주 전부가 물질뿐이다. 사람·개·소 모두가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물질 놀음이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유물사상이 생긴 것입니다. 제일 고등동물인 우리 인간도 이 삼차원의 세계에서 오관작용의 경험으로 살다가 마는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해도 이 삼차원의 세계에서 헤매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삼차원의 세계 밖에 사차원의 세계를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차원의 세계는 흔히 막연히 시간세계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을 더욱 분석해서 삼차원의 원리를 초월한 정신세계를 뜻하는 말로 설명하려 합니다. 정신수양이 된 사람에게 가끔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정신상태가 조용해졌을 때 뜻밖에 시골에 있는 식구들이 다 보이고 얘기하는 소리가 다 들리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육체의 작용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오관 가운데 육안으로 몇 백리 몇 천리 밖에 있는 시골집이 보일 수도 없고 귀를 가지고 시골에서 얘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차원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 곧 오관이 아닌 다른 오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차원의 세계가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가령 일본의 어느 시골 두메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십 리 만큼 집이 하나씩 떨어져 있는 시골에 두집이 사는데 그 근방 산이 다 한사람의 소유이어서 이 사람들은 그 산에 벌목(伐木)을 해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두아람 세 아름되는 큰 나무들을 50개 이상을 베고서야 제각기 제집으로 갑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나무를 베어 그 나무가 곧 넘어가게 됐는데 또 한사람이 그 나무 넘어가는 곳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비켜나라고 소리를 쳤지만 그 사람은 비켜나지 않고 있다가 나무에 깔렸습니다. 세 아람이나 되는 큰 나무에 깔려 떡이 되었을 것이라 겁이 나서 나무를 번쩍 들어 저쪽으로 옮겨 놓고 보니 그 친구는 완전히 떡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십리 밖에 있는 경찰에 달려가서 신고를 했고 경찰은 현장 검증을 나왔습니다. 시체는 바싹 부서졌고 확실히 나무에 친 피투성이 흔적이 있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나무는 몇 백 명이 달려들어야 들어서 던질 수 있는 큰 나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네가 죽인 것이 아니냐? 누구하고 이 나무를 옮겼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 혼자 옮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거짓말이다. 저렇게 큰 나무를 네가 혼자 어떻게 옮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조사도하고 고문까지 해 보았습니다. 마을에 가서 확인을 해 봐도 그 마을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남녀노소 다 올라온다 해도 들 수도 없습니다.

결국 네가 친구를 구해야겠다는 정성에서 이 나무가 들렸던 것 같다고 판단한 나머지 이십원을 상금으로 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십세기 부사의 사건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역시 사차원 세계의 정신능력이 발동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급하다고 생각됐을 때 그 때는 나무가 크니 적으니 하는 생각도 없이 그저 「들면 들릴 것이다」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렇게 확신한 그 정신력이 그것을 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마음의 힘은 불가사의

옛날에 어떤 노장(老丈)님이 큰 산꼭대기에 암자에서 칠팔세 되는 애기를 하나 데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김치가 떨어져서 마을에 김칫거리를 좀 얻으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단지 몇 개를 잘 씻어서 뒤집어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노장님이 마을에 내려가서 먹을 것과 김칫거리를 한 짐 잔뜩 얻어 걸머지고 올라와 보니 지금까지 보지도 못하든 낯선 단지가 절에 있었습니다. 우그러지고 삐뚤어진 것들이 대여섯 개나 뜰에 널려 있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아마 옹기장수가 왔었구나.」 하면서 「항아리를 사려면 돈을 주고 사지 왜 이런 것을 샀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사지 않았습니다. 옹기장수는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그러면 이 단지들은 어디서 난 것이냐? 모두 다 없던 것들 아니냐?」「아닙니다. 그전에 있던 단지들입니다. 스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내가 뭐라 했더냐?」「씻어서 뒤집어엎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스님 가신 뒤에 좀 놀다가 씻어서 무릎에 대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버선짝 뒤집듯 후딱후딱 잘 뒤집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순진해서 뒤집으면 뒤집어지는 것으로만 알았던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도 없이 산에서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놈 거짓말 하지마라. 너 그러면 한번 뒤집어 봐라.」 그래서 아이가 무릎을 대고 뒤집으려고 하니 이제는 무릎이 깨어져도 안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의심이 생겨서 안됐던 것입니다. 요새 심리학자들도 그런 일을 혹 경험한다고 합니다.

중국에 이강(李廣)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광 사호(射虎)라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광은 본래 힘이 많은 무사로서 중국 역사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달 밝은 밤에 활 쏘는 연습을 하고 저물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동네 앞에 있는 남산(南山)근처에 왔을 때인데 큰 호랑이가 자기가 타고 오는 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광은 「저 놈이 배가 고픈 모양인데 나한테 달려들면 나도 죽고 말도 죽을 것에 틀림없다. 도망을 가자니 호랑이가 따라올 것만 같고 죽으나 사나 저놈하고 싸움이나 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 등에 올라 앉아 활을 호랑이에게 겨누어 정면으로 쏘았습니다. 호랑이는 자기 몸에 활을 맞으면 막 달려들어서 원수를 죽여 놓고 나서 죽는 영특한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자기가 소리를 지르면 자기가 탄 천리마가 단 걸음에 자기 집으로 달려 나갈 것이니 동네 앞에 닿으면 큰 소리를 질러서 동네 사람들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나오면 호랑이가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에 다 가도록 호랑이가 달려오는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랑이가 정통으로 내 활을 맞고 직사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큰 백호(白虎) 한 마리를 잡았다고 좋아서 밤새도록 잠도 한숨 못자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호랑이를 잡으면 껍데기는 임금한테 바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고기나 뼈는 귀한 약으로 쓰이므로 큰 횡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새벽녘에 날이 새자마자 지개를 지고 호랑이 죽은 근처에 가서 보니 호랑이가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면 그렇지 내 활을 네가 피하겠느냐?」하고 가까이 가 보니 화살이 꽂힌 곳은 큰 바위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내 활 앞에는 이 세상에 감당할 놈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활을 겨누어 다시 한 번 바위를 향해 쏘아 봤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역시 부사의인데 이것도 사차원 세계의 힘이 발동된 것입니다. 오관의 힘으로는 화살이 아무리 세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호랑이 뼈가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내 화살이 안 들어 갈 수 없다고 자신한 때문이었고,「단지는 뒤집어 놓는 것이다. 아름드리나무도 내가 집어 던질 수 있는 나무다.」라고 아무 생각 없이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사심(私心)없이 한가지로만 생각하면 이 지구도 뚫고 나갑니다. 내가 경험한 일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마산에 있을 때인데 밤중에 일어나 보니 우리 바로 앞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는 상주(喪主)일 땐데 상복을 벗어 놓고 불을 끄려고 나가니까 상주가 그런 짓하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먼저 보았으니 가야겠다고 달려가서 보니 큰집 한 쪽에 불이 붙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고 불은 곧 옆집으로 번지게 생겼습니다. 나는 옆집 지붕에 얼른 올라가서 「불이야!」하고 사방에다 대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올라선 그 집은 큰 부잣집이었는데, 「이 집에 멍석 있으면 올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멍석이 어찌나 컸는지 약한 사람은 지지도 못합니다. 나는 발이 썩은 집에 미끄러질까봐 한 손으로는 붙들고 내 몸뚱이도 거기 붙어 있을 수 없는 지경인데 한 짐이나 되는 멍석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집에 멍석을 쭉 펴놓고 물 가져오라 해서 물을 끼얹어 불이 안 붙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인데, 급한 사정에 부딪쳐서 이것을 집어던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안 된다는 생각 없이 던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천만 차원(次元)의 마음의 세계

꿈에도 바위는 무겁고 모래는 가볍고 그렇지만 이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꿈속의 세계에서는 중량이 없는 것인데 바위는 무겁다는 생각 그것이 무거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 그것만 끊어지면 현실 세계를 그대로 초월합니다. 화살이 돌을 뚫고, 단지를 뒤집는 것과 같이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고 오관으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안되지 이 오관 밖에 또 세계가 있고 오관 밖의 사람이 또 무수히 있습니다. 그것이 사차원의 세계에 의해 증명됩니다. 이 육체와 오관 밖에 참나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차원세계란 우리의 모든 잡념이 쉬고 나면 그때는 육체 이대로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서 미국으로 바로 뚫고 나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속도는 그렇게 빠릅니다. 마음만 그렇게 가는 게 아니라 육체도 같이 갑니다. 마음과 몸뚱이가 한 덩어리이고 물질하고도 하나고 중생하고도 하나입니다. 마음에 아무 생각 없는 그 때가 사차원의 시절이며 모두가 하나로 됩니다. 구별이 없고 주객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차원의 세계에도 한없는 층계가 있습니다. 오차원 육차원 천차원 만차원의 세계에 들어선 정신상태에서는 모든 사건에 전지전능하게 됩니다. 모를 것도 하나도 없고 안 되는 것도 하나도 없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깨달아 놓고 나서 중생제도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해야 정말 사람 사는 멋을 알게 됩니다.

 

생각을 여읜 마음자리

육체를 나라고 해서 살기 때문에 하루 밥 세끼 먹다 시간 다 가고 바빠서 쩔쩔맵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지나면 지금의 백배 천배 바빠집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전부 기계가 다하고 그때는 시간이 없어 밥도 먹을 틈이 없을 지경으로 됩니다. 지금은 태고적이 될 정도로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지나온 오천년 동안 발전한 것보다 몇 배 더한 발전을 해서 달나라 가는 것도 며칠이면 갔다 오고 화성 금성도 금방 갔다 올 겁니다. 그런 것들을 발명해 내는 마음자리, 지금 말하는 이것을 확실히 알면 그것이 곧 여래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것은 다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의심합니다.

즉견여래(卽見如來)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령 마루 가에 내가 앉아 있는데 마당에 호랑이 한마리가 왔다고 하면 그 호랑이를 피하려고 안방으로 자꾸 뒷걸음치면서 앉은 채 미끄러져 들어갈 것입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으니까 안방이 수백간이나 되는 큰 방이라 치고 맨 아랫목 구석까지 엉덩이를 비비면서 눈으로는 앞에 있는 호랑이를 주시하면서 문턱을 넘어 들어가서 문을 꼭 잠그고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호랑이를 피해서 방으로 자꾸 뒷걸음질 치듯이 마음에 모든 생각을 다 내버리고 나면 모든 생각의 주체인 이 마음자리, 기분 이전의 마음자리에 들어가 앉게 됩니다.

생각이란 생각을 다 떼어내고 객관을 세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마음자리만 남는데 그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어떤 귀신도 날 잡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이 와도 안 되고 부처님께서 와도 안 됩니다. 모든 생각이 떨어지고 나면 나를 볼 사람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날 못 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끼리는 서로 못 본다는 말(佛佛不相見)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못 보는 곳까지 가면 완전한 자기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객관을 보고 무엇을 분별하듯이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안다는 소리는 안다는 말도 아니니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럴 수 있겠다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서남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이 있어서 중생들은 그것들한테 이끌리어 지배를 받고 사는데, 크고 작은 그 모든 사건을 다 버리면 마음의 본연 자세에 들어앉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어앉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한다 생각한다 하다가 생각을 내 버리면, 좋다 나쁘다 하는 기분을 내버리면, 그러고 나서 남는 것은 마음의 본연자세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걸 여래(如來)라 그럽니다.

본심(本心)자리, 마음자리, 이것이 진짜 <나>입니다. 모든 생각의 주체인 자리입니다. 이것이 모든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온 우주에 이 <나>를 안 거칠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웅이 되든지 바보가 되든지 일체 사건의 주체입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정신만 다소곳이 챙겨라, 거기는 호랑이도 못가고 하느님도 못가고 부처님도 못가는 마지막 자리에 도사리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러면 그때에는「이제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엉뚱한 데 집착을 했구나」하는 것이 알아집니다.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 가지고 마음의 본연 자세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련만 근본적으로 끊어지면 잠재의식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육체를 여읜 마음이 부처

이와 같은 미련, 잠재의식이 업보(業報)라는 것입니다. 이 업만 없어지면 부처님하고 똑같습니다. 지금도 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가지고 이놈이 하루 밥 세 그릇 필요하니까 이것이 사건이 되어 갖고 마음이 복잡해져서 삼십오억 다 잡아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부모형제를 다 잡아먹어도 내가 살아야 하니 이것이 독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배타고 있다가 물에 빠져보면 압니다. 다 집어넣고 나 하나만 살려고 하는 지독한 독사가 한 마리씩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밝지 못하다, 모른다 소리입니다.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내가 아닌 걸 모른다, 내 꿈인 줄 모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근본적으로 육체를 나라고 하는 것이 근본무명(根本無明)입니다. 그 생각만 놓아 버리면 우리는 사차원 이상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얕은 사차원의 세계에 들어가서 자꾸자꾸 깊이 들어가면 부처님같이 대열반(大涅槃)·대보리(大菩提)의 여래께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고 가는데 구애(拘碍)가 없어서 와도 오는 게 아니고 가도 가는 게 아니며 하루 종일 말해도 한 마디도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은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말하자는 상대가 있으니 말해 주는 것뿐이지 나를 위해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한테 아무 필요도 없는 거니까 해보아도 손해도 이익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는 이것이 불성자리고 마음자리입니다. 이것이 성불(成佛)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탁 내 버리고 살아라. 전 세계 재산 전부 내 것 만들어 놓아도 내 것 아닙니다. 돈 백만원 모아 놓으면 돈 한장 한장에 내가 구속되는 겁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생명이 구속되는 것이고 좋은 마누라 얻어 놓으면 그 마누라가 완전히 나를 구속하는 겁니다. 현실이란 아무것도 아니어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은 하나도 없는데, 그것을 현실이라고 거기에 의지했다가는 눈에 핏물이 날 일이 생깁니다. 금방 없어질 테니까 거기 속지 말고 영원히 자기 생명을 찾자는 겁니다. 그것은 먼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이놈이고 말하는 이 자체 마음을 딱 곤두세워서 듣고 앉아 있는 생각의 주체 그것이 나라는 것입니다. 이 일부터 해놓고 남 도우려고 해야지, 뭐니 뭐니 해보아도 소용없습니다. 무슨 박사가 되어 보아도 박사가 되어서 밥 수월하게 벌어먹자는 밥벌이 수단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밥 먹어 보아야 아무것도 남는 것 없습니다. 아무것도 되는 것도 없는 그걸 현실이라고 하니 그것에 속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대로 살아야 될 걸 알았으니 그래야 분명하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허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은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 밖에 없다, 다른 건 다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서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바빴는가, 내가 이 소리를 하고 또 하는 것은 들을 때 마다 그만큼 긍정하면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생에 못하면 내생에라도 해야 합니다.

남이 다 성불하고 맨 나중에 성불해야 합니다. 성불해야 안심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어디로 가나 고통입니다. 천당을 가나 극락을 가나 높은 것 낮은 것 다 있습니다. 이 마음을 깨쳐 놓고 나면 나 보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고 그러니 평등의 세계입니다. 거기는 시기 질투도 없고 사람만나면 서로 부처니까 서로 반갑고 치하를 하고 지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실다운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객관을 다 떨어 버리면 그러면 여래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한 것입니다.

 

마음에서 여래를 찾아야

이 우주 허공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공간은 그것이 생명이 없고 무한대 무기체(無機體)입니다. 또 이 지구덩이가 생명이 없으니 그게 행동을 못하고 생각을 못합니다. 지구가 자전 공전하는 것이 제가 하는 것 아니고 자전 공전 안하면 않되게 되어 있는 피동(被動)이고 자동(自動)이 아닙니다. 그러니 물질계도 생명이 없고 허공계도 생명이 없는 거라면 그러면 우주객관에 생명이 없는 겁니다. 생명은 지금 말하고 듣는 이것밖엔 없습니다. 그러니 이건 내 생명이면서 전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우주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고 물질도 허공도 아닙니다.

무기물질(無機物質)이 유기물(有機物)로 화한다는 것은 과학이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무기물질이 유기물질로 화했다는 건 허공이 바윗돌로 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같은 이치로 무기물질이 세포로 되었다 해서 생명으로 화할 수 있다는 건 허공이 바윗돌이 됐다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에서 생명을 찾을 수 없고 그것은 다 마음의 그림자이며 마음이 곧 여래이니 여래는 오직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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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 菩薩(보살) 於法(어법)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行於布施(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소위부주색보시)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 須菩提(수보리) 菩薩(보살)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하되 不住於相(부주어상)이니 何以故(하이고) 若菩薩(약보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其福德(기복덕)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東方虛空(동방허공) 可思量不(가사량부) 不也(불야)니이라 世尊(세존) 須菩提(수보리)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可思量不(가사량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 須菩提(수보리) 菩薩(보살)의 無住相布施福德(무주상보시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 菩薩(보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남쪽·서쪽·북쪽과 네 간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第四 妙行無住分--머무름 없이 행하라.


[科 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불교의 오묘한 법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묘행(妙行)은 수행(修行)한다는 말이고, 무주(無住)는 마음을 닦을 때 어떤 조건 어떤 법에도 머물러서 집착하고 걸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대승의 진리인데 세번째로 묘행 무주의 도리를 말한다고 해서 제 사분(第四分)이라 한 것인데 그 내용의 요의(要義)를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성불(成佛)하고서야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고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당 지옥(天堂 地獄)의 윤회(輪廻)를 하고 돌아다니며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갖가지 몸뚱이를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기도 했지만 이 마음만은 문둥이도 아니고 재주 있는 것도 아니고 질량(質量)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계(現象界)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學問)·지식(知識)·돈·권력(權力)·육체 생활(肉體生活)등에 얽매어 아무리 애써서 죽도록 해봐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다 헛것입니다. 온 세계 권력을 가지고 세계 돈 다 모아 봐도, 또 도서관(圖書館)의 지식 다 알아봐도 제일 큰 인생 문제(人生問題)인 죽음만은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 밥 세 그릇 때문에 「밥 못 먹으면 죽는다. 육체가 죽으면 내가 죽는다.」고 착각(錯覺)을 하여 가지고 「하루 밥 세 그릇 가운데 한 그릇이라도 못 먹으면 영원히 못 먹는다, 죽은 뒤에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보살은 이런 마음을 다 쉬라는 것입니다. 세 그릇 먹든 거 두 그릇 먹고 나머지 한 그릇 배고픈 사람 주자, 배고픈 사람 배를 채워 주었으니 복이 되고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생명, 이것을 찾아 우주에서 자유로워 보자, 그래서 생사(生死)도 없어지고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면 이익 되고 저걸 버리면 손해가 클 테니 절대로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하는 등의 망상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지니기 때문에 소위 업(業)이란 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은 보고 듣는 거 꼭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심(無心)이 되어 생각이 없으면 하루 종일 다녀도 남과 싸우거나 장난을 하거나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어제 내가 저물도록 얘기해 놓고도 오늘 만나면 또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업(業)이 녹는 것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란 말은 비록 팔만사천 계율(八萬四千 戒律)을 다 지키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지만 그런 모든 걸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농사를 뼈 빠지게 짓더라도 그 농사지어 뭘 하겠다는 생각 버리고 그냥 농사만 지어라 장사를 해도 이 돈 벌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아무 잡념(雜念) 없이 뼈 빠지게 하라, 그래서 아껴 먹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에게 몽땅 다 베풀어 줘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씨와 그 공덕(功德)을 말씀한 것이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입니다.



原 文 :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또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법에든지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하심은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내 것을 주고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기분 내지 말고 사회봉사(社會奉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했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안 했다 해도 말이 안 되고 그저 중생을 위해서 노력한 것뿐입니다. 중생(衆生)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해서 잘 했다는 서투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니 자연히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성인(聖人)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법(於法)이라 함은 모든 법이란 뜻이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 어떤 환경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그런 말입니다. 남자건 여자건 노인이건 젊은이건 한국사람, 외국사람 가릴 것 없이 다 잘 살게 해 주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 주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 떠 주어도 은혜(恩惠)를 베풀어주었다 하여 공치사(功致辭)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굴레에다가 뒤집어 씌워서 구속을 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본래 있으니까 나를 준 것이지 네 것을 주었느냐?」 하고 감정적(感情的)으로 말을 해도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비(是非)가 분분(紛紛)해집니다. 그래서 생사번뇌(生死煩惱)가 질펀하게 벌어져서 고통(苦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니 무신경(無神經)이 되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남에게 받기도 하고 해야 합니다.

 보시(布施)에 대해서 시수물삼륜(施受物三輪)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출가(出家)해서 처음 절에 들어가면 이것부터 배웁니다. 곧 수레는 여기 있는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도구(道具)로서 세 가지 바퀴는 첫째 시륜(施輪)·수륜(受輪)·물륜(物輪)의 셋입니다. 시륜(施輪)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뜻하고 수륜(受輪)은 주는 물건 받는 것을 뜻하고 물륜(物輪)은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받는 돈이나 밥이나 물건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함을 알아서 주고받는 자리가 없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갚을 사람이 생기고 빚 받을 사람이 생깁니다. 땅 위에 공공연(公公然)히 있는 물건을 도둑질해서 이쪽 물건을 저쪽으로 옮긴 것 뿐이니, 주는 생각 없이 주어야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내 것을 남에게 주었거니 하고 생각하면 이것이 지옥 갈 시초(始初)가 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도 아무개한테 무엇을 받았으니 큰 빚을 졌구나 하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보다 더 급한 사람 있으면 생각 없이 또 주기도 합니다. 은혜를 졌다 해서 고맙다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받으면 이 사람은 물건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수륜이 청정한 것입니다(受輪淸淨).

 천지(天地)에 공공연하게 있는 땅을 마음대로 금을 그어 놓고 압록강(鴨綠江) 이쪽은 중국 땅이니 못 온다 하여 국경(國境)을 만들고, 물건은 아무개 것이라고 소유권(所有權)을 인정하며, 농사를 지어 추수(秋收)해 자기 집 곳간에 쌓아 두고는 이것은 내 것이니 아무도 가져가지 말라합니다. 이런 것이 다 잘못이고 중생살이입니다. 그러지 말고 입 있는 사람 배고픈 사람 다 오라고 해서 농사를 지어야 바로 하는 농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잘못된 근본 생각이고 생사를 윤회(輪廻)하게 된 근본 착각(錯覺)입니다. 나를 내 세워서 소유권(所有權)행사를 하려하고 끝없는 욕심(慾心)을 내어 점령(占領)하려는 착각(錯覺)이 삼차전쟁(三次戰爭)을 일으키려는 근본망상(根本妄想)입니다. 천지(天地)에 공공연히 있는 청정한 물건을 아무 윤리(倫理)도 도덕(道德)도 없이 대포알이 한 개만 더 있어도 먼저 기습해서 점령하려고 하니 모두가 도둑의 심보입니다.

 그러므로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도리를 잘 배워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상 없는 무상(無相) 무소주(無所住)로 아무 생각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첫째 나부터 내 가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나절 일해 주고 밥만 한 그릇 달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시킬 겁니다. 옷은 쓰레기통에서 주어 깨끗이 빨아 꿰매 입을 요량(料量)하면 됩니다. 이것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를 배우는 태도입니다.



原 文 :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解 義] 남을 위해서 보시(布施)하는 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식보시(知識布施)이고 돈이나 재물(財物)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布施),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외로울 때,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시를 함에 있어서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조건 없이 불교의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보시(法布施), 재물로 남을 구제해 주는 재보시(財布施), 외로움 두려움을 보살펴 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의 보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은 좋다고 집착하고, 더럽고 거칠면 싫다고 미워하여, 좋아하는데 집착하든지 싫은데 집착하든지 합니다. 미인(美人)은 좋아하고 추녀(醜女)는 싫어하며 집도 크고 아름답게 지었으면 좋다고 집착하고 모양 없이 지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은 추하여 싫다는 생각에 집착됩니다. 이와 같이 눈을 통해서 집착될 수 있는 객관(客觀), 시각(視覺)의 대상(對象)으로 받아들이는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여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쓰는 빛색자(色)는 빛깔이나 물질의 모양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을 뜻하는 글자이니 부주색(不住色)이란 말은 곧 눈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聲)나 코로 맡는 향기(香)나 혀로 아는 맛(味)이나 몸으로 아는 촉감(觸)이나 어떤 사상·지식·도덕·윤리·신앙·종교 등의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성악(聲樂)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나는 성대(聲帶)가 좋다, 학급에서는 내가 제일이다.」하는 자존심(自尊心)·아만심(我慢心)을 가지고 남에게 노래를 들려주려면 잘 안 됩니다. 또 말을 잘한다고 해서 청중(聽衆)을 무시(無視)하고 강연(講演)을 해도 그것은 안 됩니다. 더구나 불법(佛法)을 설명하는 법사로서 「나 같은 법사 또 있을 수가 있나, 나 말고는 법사가 또 없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큰 탈입니다. 아상(我相)이 꽉 차서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 밑에 마당가에서나 설법을 하는 사람이지 방안에서 올바른 설법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가 좋다든지 말을 잘 한다든지 하는 등의 소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不住聲布施).

 또 의복(衣服)을 한다던가, 아들을 처녀한테 장가를 보낸다던가, 자기 딸을 어떤 총각한테 시집보낸다던가 하는 것을 다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좋은 촉(觸)을 수용(受用)하도록 해 준다는 뜻입니다(不住觸布施). 또 일체 만법(萬法)을 다 설명해서 세상 지식을 다 알고 불법도 다 알아 이런 것을 다 이해시켜 주지만 그 진리가 꼭 이런 것이라는 결정적인 고집(固執)을 버리고 그런 생각에 머물지 말고 가르쳐 주고 보시해 주라는 것입니다(不住法布施).


原 文 :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解 義]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를 해석할 때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기는 경우와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 고 풀이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의 해석은「보시하라」는 뜻이 있지만 뒤의 해석은 「보시하지 말라」는 뜻이 되므로 뒤의 해석에 따르면 중생을 제도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고 불법도 전할 자비심이 없는 독성나한(獨聖羅漢)이 되어 소승불교(小乘佛敎)에 가깝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證得)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불과(佛果)를 증득하지 못 하게 됩니다.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해석해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되고 잘했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까지 버리고 설명하는 동시에 「발심(發心)하라, 일일이 활동하라,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인 대승심(大乘心)을 가지고 대승행(大乘行)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앞에서처럼 새기면 소승이고 뒤의 해석대로 새기면 대승이 된다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새기든지 뜻은 바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는 말도 곧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고집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하므로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경문(經文)을 계속해서 새겨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빽빽이(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이와 같이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한 말씀이 분명히 있으니 앞의 구절도(句節)도 <보시하라>는 뜻으로 긍정적(肯定的)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原 文 :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若菩薩) 상에 머물지 않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이 집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도와주고 보시하면(不住相布施), 그 복과 덕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이니라(其福德不可思量)하셨는데, 가령 농사(農事)를 짓되 추수(秋收)를 해서 내 곳간에만 쌓아 두지 말고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 있으면 먼저 먹으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마침내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정말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 버립니다.

 금강경이 상하권(上下卷) 두 권인데 이 금강경만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경보는 힘이 생겨서 다른 경전(經典)을 볼 때에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경보는 눈이 열렸다고 하여 경안(經眼)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가들면 신랑 노릇 잘 할 수 있고 시집가도 요조숙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충신(忠臣)이 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게 됩니다. 금강경의 도리로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상대를 위해서 봉사했기 때문이고 나 없는 마음으로 인아산(人我山)을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에 그 복덕이 한량없어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므로 이 한 몸을 다 바쳐서 하나뿐 아니라 열 백 천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위해 보시할 수 있고, 생각 없이 하므로 상대의 뜻에 맞추어서 남을 가장 잘 위하는 방법으로 온 정성을 다 해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말씀을 해설해 주고 육신이 내가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갖 보살행(菩薩行)을 할뿐이므로 그 복덕이 한량없다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 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解 義] 부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하는 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허공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허공이 얼마나 되겠느냐? 허공의 끝이 있겠느냐(東方虛空 可思量不).」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허공은 제일 큰 공간(空間)이어서 그 크기가 무한대(無限大)입니다.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無限)이니 동쪽의 허공도 무한이고 서쪽의 허공도, 남쪽의 허공도, 북쪽의 허공도 무한입니다. 동남·서남·동북·서북의 간방(間方)도 그렇고 상하(上下) 아래위의 공간도 무한하여 끝이 간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방팔방만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렇게 평면적인 공간세계만을 말하지 않고 방위(方位)를 말할 때에도 입체적으로 생각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四간방(間方)에다 상하방(上下方)을 합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말합니다. 경문(經文)에 남서북방사유상하(南西北方四維上下)라고 한 말들이 곧 그 말씀인데 사유(四維)는 네 간방을 가리킨 말입니다. 허공의 크기가 본래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므로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으로 하는 도심(道心)은 헤아릴 수 없고, <나라는 생각(我相)>·<남이라는 생각(人相)>·<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이 없어져서 머무는 것 없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중생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은 무한대(無限大)의 허공처럼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解 義] 부처님께서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결론으로 「보살은 다만 가르쳐 준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菩薩但應如所敎住)」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께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청(請)하여 여쭈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云何應住) 어떻게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이까(云何降伏其心)」한 물음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십니다.

 부처님의 경전(經典)에는 언제든지 나중 물은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물은 것은 뒤에 대답하십니다. 마치 회의(會議)하는 규칙(規則)에 개의(改議), 재개의(再改議)가 나오며 재개의, 개의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문제를 낸 동의(動議)는 맨 나중에 결정하는 논리(論理)와 같습니다. 이 금강경에서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나중 물었으므로 잘난 체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없애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하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운하주(云何住)에 대한 말씀을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없애지 않고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머무는 일(住)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먼저 말씀하시고 운하주(云何住)를 나중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가지든 백가지든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말씀해 주셨으며, 49년동안 이 순서(順序)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3장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서 중생심(衆生心)을 가지고 내가 잘하거니 하는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설법(說法)을 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되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하는 방법이 「주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고 또 만일 「주하지 않는데 주한다.」, 그러면 그것 역시 주하는데 떨어진 것이 됩니다. 마음을 주한다 함은 우리말로 마음먹는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라.」하는 말도 마음먹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곧 열반을 향해서 보시를 꾸준히 행하라, 「내가 본래 부처이니 부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라.」는 것입니다.



[說義]


처음부터 끝까지 여시의 숙제

 금강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여시>(如是)가 자주 나옵니다. 이 「여시」가 어떤<여시>인가.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내가 묻기 전이라도 얘기하십시오. 경산림(經山林)을 다 마칠 때까지 이 여시(如是)가 숙제(宿題)가 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참말로 깨칠는지도 모릅니다. 뉴우톤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萬有引力)의 원리를 발견(發見)하듯이 법문 듣고 오고가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 깨친 얘기를 들어보면 닭 우는소리를 듣고 깨치고, 물 내려가는 소리 듣고 깨치고, 복숭아꽃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보고 깨치고, 사람들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치기도 하고 상여 나가는데 상주(喪主)가 「아이고」하고 우는소리 듣다가 깨치기도 합니다.

 이 「여시」에 금강경의 내용 전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숙제로 해서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뉴우톤처럼 자나 깨나 오거나 가거나 법문을 들을 때나 식사(食事)를 할 때나 이 숙제만 가지고 있으면 홀연히 깨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여시」를 완전히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다같이 눈 둘 있고 코 하나 있고 하니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설사 우리가 그 분이 도인(道人)인 줄 모르고 산다 하더라도 이런 분이 우리나라에 계신 것만 해도 우리한테는 큰 은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용심(用心)이나 행동이 나만도 못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보살(菩薩)이라 한 말은 보리(菩提)와 살타(薩埵)가 합해진 말인데 보리 곧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밑에 살타 곧 중생은 아직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니 용심이 이러니 행동이 저러니 하고 함부로 말하다가는 까딱 잘못하면 큰 죄를 짓기 쉽습니다.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았다 해도 중생 놀음하던 버릇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것을 당장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의 금강경 산림 가운데 정말 깨쳐서 <여시>에 대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생기고 경을 알고 대답할 사람이 생기면 참으로 경사(慶事)지만 그렇게는 못 된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의 분별로라도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을 혼자서만 보는 것보다는 남하고 이렇게 저렇게 토론(討論)을 하고 같이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강원(講院)에서도 나 혼자서는 밤새도록 보고 새벽에 보고 아침에 보고 낮에 보고 해도 이해가 잘 안되다가도 서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번쩍 나서 풀려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傲氣)로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주의(注意)를 집중하는 바람에 정신이 통일되어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신을 희미하게 가지니까 그렇지 정신을 일념으로 통일하여 마음자리에 가깝게 접근하면 <여시>의 지혜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견성해도 대승행 닦아야

 그래서 반야경(般若經)의 실상 반야(實相般若), 곧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布施)를 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다 행하라, 하는 것은 실상 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이런 잘못은 없습니다.

 요새 참선(參禪)하는 수좌(首座)들이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을 짓지 않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念慮)하여 六조대사께서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體得)했으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념(專念)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도하라. 제도를 하되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천당(天堂) 사람도 되고 태생(胎生)·난생(卵生)도 되고 지옥(地獄)도 되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내가 고쳤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지도(指導)했다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그런 것 느끼지 말고 저건 내가 제도한 중생이거니 저건 내 신도(信徒)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고 배우는 중생들에게도 듣고 배운 건 다 알고 나면 잊어버리고 들을 줄 아는 그것도 깨치도록 해서 지도를 받았거니 배웠다 거니 하는 아상·인상이 없어지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인욕(忍辱)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辱)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남이 욕한다고 야단 치고 보복(報復)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煩惱)의 생사심(生死心)만 늘지 언제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합니까?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근본이지만 반야를 깨친 다음에는 그래서 나의 업보(業報)·망상(妄想)을 쉬고 녹이는 데는 인욕(忍辱)이 중심이 됩니다. 남이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할 것도 없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서 반죽음이 되었어도 「왜 그러냐」고 한마디 따질 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도 이 모양이고 오늘도 이 모양이고 내일도 이 모양이고 여러 천만년 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成佛)한 뒤나 똑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른 건 모두 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갈팡질팡하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존재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이나 부처나 다 같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두루 다 평등한 것이므로 내가 깨우쳐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 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천하태평객(天下泰平客)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실패를 했다, 성공을 했다.」 그런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현실(現實)은 마음에서 생긴 꿈이니 이런 식으로 알고 내일부터라도 흉내 내어 살아 봅시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하면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어도 능률이 더 나고 근심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죽고 살고 흥망성쇠(興亡盛衰), 시간세계(時間世界)를 다 초월(超越)해서 망각(忘却)했기 때문입니다. 공포증(恐怖症)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있고 욕심이 앞서 있으면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정구장(庭球場) 앞을 지나치던 정구선수가 친구의 권유(勸誘)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보려는 생각으로 몇 번 친 것이 선수 생활 십년 동안에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볼을 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나 지면 큰 일 이라는 공포심이 없이 아무 생각 없는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처가 정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 한 근본 자성 자리에 합하기만 하면 이런 묘한 기술(技術)이 나옵니다. 권투나 축구나 검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연습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만능(萬能)하던 마음자리가 안심(安心)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옵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잘 써야 되겠다는 공포증(恐怖症) 때문에 잘 안 써집니다. 왕희지(王羲之) 같은 이도 어느 날 친구의 연회(宴會)에 초대되어 만취(滿醉)하여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 줄 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자기로서는 십년 백년이 걸려도 쓸 수 없는 명필(名筆)이 있어서 「어느 신선(神仙)이 와서 나를 깨우쳐 주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며칠 뒤에야 자기가 취중(醉中)에 썼다는 것이 기억(記憶)이 됐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글씨의 십분의 일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씨도 무심하면 자연히 명필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不住相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불입문자 교외별전의 자리

 그러면 머무른 데 없이 보시를 행한다(應無所住 行於布施)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시하는 것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말한바 있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생활, 육체 생활을 정리해서 하루 종일 나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차차 돌리고 탐욕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정리해서 참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돌리며, 오직 남만을 위해서 사는 보살행을 하라는 말입니다. 보살행은 본래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보리, 열반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니 보리라 함은 생사도 열반도 없고 시간도 공간도 남자도 여자도 부처도 중생도 초월하여 초월한 그것까지 없는 자리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보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내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얘기를 계속해도 피로가 안 오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글이나 지식으로 분별해서 알아질 수 없는 자리이므로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도리라 합니다. 말이나 문자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이심전심의 법으로 전법하셨으므로 교 밖에 따로 전했다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합니다. 또 이 자리는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간접적인 방편에 불과하므로 마음을 직접 가르쳐서 그 본성을 깨우치게 함으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도리로 성불하게 하는 법이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그래서 대선사(大禪師)에게 법문을 청할 때나 주요한 의식을 할 때면 늘 이런 게송(偈頌)을 외웁니다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개권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開卷無一字 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 이 경전이 있지만 그러나 이 경전은 종이나 먹으로 쓴 글씨거나 인쇄 제본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펴 봐야 한 글자도 없다. 이렇게 종이나 먹으로 된 책이 아니어서 한 글자도 없는 이런 경전이 나에게 한 권이 있는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항상 큰 광명을 발하여 전 우주를 환히 비추고 있다.」 이것이 곧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금강경의 믿음으로 보면 반야(般若)고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입니다. 이 반야, 마음을 얻어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할 때면 손이고 발이고 눈이고 목숨이고를 돌보지 않고 다 보시하는데 지기를 희생했다는 생각도 중생이 구제됐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것이 「응무소주」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제자들이 대개 청법을 해 오는데 무엇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때로는 열 가지 백 가지로 여쭈어 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처음 물은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물은 것부터 먼저 한 문제 한 문제 설명해 주십니다.

 금강경도 제2절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수보리존자가 먼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오며(應云何住)를 여쭈었고 나중에 「마음을 어떻게 항복하겠사옵니까(云何降伏其心)」하고 두 가지를 여쭈었는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제3 대승정종분에서 나중에 여쭈어 온 「마음 항복 받는 법」을 먼저 말씀하셨고 먼저 여쭈어 온 「마음 머무는 법」에 대해서는 제4 묘행무주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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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於法(어법)에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行於布施(행어보시)니 所謂不住色布施(소위부주색보시)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하되 不住於相(부주어상)이니 何以故(하이고)오 若菩薩(약보살)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其福德(기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東方虛空(동방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이라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의 無住相布施福德(무주상보시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남쪽·서쪽·북쪽과 네 간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第四 妙行無住分--머무름 없이 행하라.

 

[科 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불교의 오묘한 법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묘행(妙行)은 수행(修行)한다는 말이고, 무주(無住)는 마음을 닦을 때 어떤 조건 어떤 법에도 머물러서 집착하고 걸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대승의 진리인데 세번째로 묘행 무주의 도리를 말한다고 해서 제 사분(第四分)이라 한 것인데 그 내용의 요의(要義)를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성불(成佛)하고서야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고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당 지옥(天堂 地獄)의 윤회(輪廻)를 하고 돌아다니며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갖가지 몸뚱이를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기도 했지만 이 마음만은 문둥이도 아니고 재주 있는 것도 아니고 질량(質量)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계(現象界)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學問)·지식(知識)·돈·권력(權力)·육체 생활(肉體生活)등에 얽매어 아무리 애써서 죽도록 해봐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다 헛것입니다. 온 세계 권력을 가지고 세계 돈 다 모아 봐도, 또 도서관(圖書館)의 지식 다 알아봐도 제일 큰 인생 문제(人生問題)인 죽음만은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 밥 세 그릇 때문에 「밥 못 먹으면 죽는다. 육체가 죽으면 내가 죽는다.」고 착각(錯覺)을 하여 가지고 「하루 밥 세 그릇 가운데 한 그릇이라도 못 먹으면 영원히 못 먹는다, 죽은 뒤에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보살은 이런 마음을 다 쉬라는 것입니다. 세 그릇 먹든 거 두 그릇 먹고 나머지 한 그릇 배고픈 사람 주자, 배고픈 사람 배를 채워 주었으니 복이 되고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생명, 이것을 찾아 우주에서 자유로워 보자, 그래서 생사(生死)도 없어지고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면 이익 되고 저걸 버리면 손해가 클 테니 절대로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하는 등의 망상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지니기 때문에 소위 업(業)이란 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은 보고 듣는 거 꼭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심(無心)이 되어 생각이 없으면 하루 종일 다녀도 남과 싸우거나 장난을 하거나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어제 내가 저물도록 얘기해 놓고도 오늘 만나면 또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업(業)이 녹는 것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란 말은 비록 팔만사천 계율(八萬四千 戒律)을 다 지키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지만 그런 모든 걸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농사를 뼈 빠지게 짓더라도 그 농사지어 뭘 하겠다는 생각 버리고 그냥 농사만 지어라 장사를 해도 이 돈 벌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아무 잡념(雜念) 없이 뼈 빠지게 하라, 그래서 아껴 먹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에게 몽땅 다 베풀어 줘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씨와 그 공덕(功德)을 말씀한 것이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입니다.

 

原 文 :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또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법에든지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하심은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내 것을 주고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기분 내지 말고 사회봉사(社會奉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했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안 했다 해도 말이 안 되고 그저 중생을 위해서 노력한 것뿐입니다. 중생(衆生)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해서 잘 했다는 서투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니 자연히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성인(聖人)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법(於法)이라 함은 모든 법이란 뜻이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 어떤 환경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그런 말입니다. 남자건 여자건 노인이건 젊은이건 한국사람, 외국사람 가릴 것 없이 다 잘 살게 해 주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 주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 떠 주어도 은혜(恩惠)를 베풀어주었다 하여 공치사(功致辭)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굴레에다가 뒤집어 씌워서 구속을 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본래 있으니까 나를 준 것이지 네 것을 주었느냐?」 하고 감정적(感情的)으로 말을 해도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비(是非)가 분분(紛紛)해집니다. 그래서 생사번뇌(生死煩惱)가 질펀하게 벌어져서 고통(苦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니 무신경(無神經)이 되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남에게 받기도 하고 해야 합니다.

보시(布施)에 대해서 시수물삼륜(施受物三輪)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출가(出家)해서 처음 절에 들어가면 이것부터 배웁니다. 곧 수레는 여기 있는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도구(道具)로서 세 가지 바퀴는 첫째 시륜(施輪)·수륜(受輪)·물륜(物輪)의 셋입니다. 시륜(施輪)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뜻하고 수륜(受輪)은 주는 물건 받는 것을 뜻하고 물륜(物輪)은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받는 돈이나 밥이나 물건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함을 알아서 주고받는 자리가 없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갚을 사람이 생기고 빚 받을 사람이 생깁니다. 땅 위에 공공연(公公然)히 있는 물건을 도둑질해서 이쪽 물건을 저쪽으로 옮긴 것 뿐이니, 주는 생각 없이 주어야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내 것을 남에게 주었거니 하고 생각하면 이것이 지옥 갈 시초(始初)가 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도 아무개한테 무엇을 받았으니 큰 빚을 졌구나 하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보다 더 급한 사람 있으면 생각 없이 또 주기도 합니다. 은혜를 졌다 해서 고맙다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받으면 이 사람은 물건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수륜이 청정한 것입니다(受輪淸淨).

천지(天地)에 공공연하게 있는 땅을 마음대로 금을 그어 놓고 압록강(鴨綠江) 이쪽은 중국 땅이니 못 온다 하여 국경(國境)을 만들고, 물건은 아무개 것이라고 소유권(所有權)을 인정하며, 농사를 지어 추수(秋收)해 자기 집 곳간에 쌓아 두고는 이것은 내 것이니 아무도 가져가지 말라합니다. 이런 것이 다 잘못이고 중생살이입니다. 그러지 말고 입 있는 사람 배고픈 사람 다 오라고 해서 농사를 지어야 바로 하는 농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잘못된 근본 생각이고 생사를 윤회(輪廻)하게 된 근본 착각(錯覺)입니다. 나를 내 세워서 소유권(所有權)행사를 하려하고 끝없는 욕심(慾心)을 내어 점령(占領)하려는 착각(錯覺)이 삼차전쟁(三次戰爭)을 일으키려는 근본망상(根本妄想)입니다. 천지(天地)에 공공연히 있는 청정한 물건을 아무 윤리(倫理)도 도덕(道德)도 없이 대포알이 한 개만 더 있어도 먼저 기습해서 점령하려고 하니 모두가 도둑의 심보입니다.

그러므로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도리를 잘 배워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상 없는 무상(無相) 무소주(無所住)로 아무 생각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첫째 나부터 내 가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나절 일해 주고 밥만 한 그릇 달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시킬 겁니다. 옷은 쓰레기통에서 주어 깨끗이 빨아 꿰매 입을 요량(料量)하면 됩니다. 이것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를 배우는 태도입니다.

 

 

原 文 :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解 義] 남을 위해서 보시(布施)하는 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식보시(知識布施)이고 돈이나 재물(財物)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布施),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외로울 때,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시를 함에 있어서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조건 없이 불교의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보시(法布施), 재물로 남을 구제해 주는 재보시(財布施), 외로움 두려움을 보살펴 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의 보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은 좋다고 집착하고, 더럽고 거칠면 싫다고 미워하여, 좋아하는데 집착하든지 싫은데 집착하든지 합니다. 미인(美人)은 좋아하고 추녀(醜女)는 싫어하며 집도 크고 아름답게 지었으면 좋다고 집착하고 모양 없이 지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은 추하여 싫다는 생각에 집착됩니다. 이와 같이 눈을 통해서 집착될 수 있는 객관(客觀), 시각(視覺)의 대상(對象)으로 받아들이는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여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쓰는 빛색자(色)는 빛깔이나 물질의 모양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을 뜻하는 글자이니 부주색(不住色)이란 말은 곧 눈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聲)나 코로 맡는 향기(香)나 혀로 아는 맛(味)이나 몸으로 아는 촉감(觸)이나 어떤 사상·지식·도덕·윤리·신앙·종교 등의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성악(聲樂)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나는 성대(聲帶)가 좋다, 학급에서는 내가 제일이다.」하는 자존심(自尊心)·아만심(我慢心)을 가지고 남에게 노래를 들려주려면 잘 안 됩니다. 또 말을 잘한다고 해서 청중(聽衆)을 무시(無視)하고 강연(講演)을 해도 그것은 안 됩니다. 더구나 불법(佛法)을 설명하는 법사로서 「나 같은 법사 또 있을 수가 있나, 나 말고는 법사가 또 없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큰 탈입니다. 아상(我相)이 꽉 차서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 밑에 마당가에서나 설법을 하는 사람이지 방안에서 올바른 설법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가 좋다든지 말을 잘 한다든지 하는 등의 소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不住聲布施).

또 의복(衣服)을 한다던가, 아들을 처녀한테 장가를 보낸다던가, 자기 딸을 어떤 총각한테 시집보낸다던가 하는 것을 다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좋은 촉(觸)을 수용(受用)하도록 해 준다는 뜻입니다(不住觸布施). 또 일체 만법(萬法)을 다 설명해서 세상 지식을 다 알고 불법도 다 알아 이런 것을 다 이해시켜 주지만 그 진리가 꼭 이런 것이라는 결정적인 고집(固執)을 버리고 그런 생각에 머물지 말고 가르쳐 주고 보시해 주라는 것입니다(不住法布施).

 

 

原 文 :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解 義]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를 해석할 때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기는 경우와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 고 풀이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의 해석은「보시하라」는 뜻이 있지만 뒤의 해석은 「보시하지 말라」는 뜻이 되므로 뒤의 해석에 따르면 중생을 제도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고 불법도 전할 자비심이 없는 독성나한(獨聖羅漢)이 되어 소승불교(小乘佛敎)에 가깝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를 증득(證得)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불과(佛果)를 증득하지 못 하게 됩니다.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해석해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되고 잘했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까지 버리고 설명하는 동시에 「발심(發心)하라, 일일이 활동하라,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인 대승심(大乘心)을 가지고 대승행(大乘行)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앞에서처럼 새기면 소승이고 뒤의 해석대로 새기면 대승이 된다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새기든지 뜻은 바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는 말도 곧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고집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하므로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경문(經文)을 계속해서 새겨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빽빽이(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이와 같이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한 말씀이 분명히 있으니 앞의 구절도(句節)도 <보시하라>는 뜻으로 긍정적(肯定的)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原 文 :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若菩薩) 상에 머물지 않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이 집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도와주고 보시하면(不住相布施), 그 복과 덕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이니라(其福德不可思量)하셨는데, 가령 농사(農事)를 짓되 추수(秋收)를 해서 내 곳간에만 쌓아 두지 말고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 있으면 먼저 먹으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마침내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정말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 버립니다.

금강경이 상하권(上下卷) 두 권인데 이 금강경만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경보는 힘이 생겨서 다른 경전(經典)을 볼 때에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경보는 눈이 열렸다고 하여 경안(經眼)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가들면 신랑 노릇 잘 할 수 있고 시집가도 요조숙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충신(忠臣)이 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게 됩니다. 금강경의 도리로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상대를 위해서 봉사했기 때문이고 나 없는 마음으로 인아산(人我山)을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에 그 복덕이 한량없어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므로 이 한 몸을 다 바쳐서 하나뿐 아니라 열 백 천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위해 보시할 수 있고, 생각 없이 하므로 상대의 뜻에 맞추어서 남을 가장 잘 위하는 방법으로 온 정성을 다 해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말씀을 해설해 주고 육신이 내가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갖 보살행(菩薩行)을 할뿐이므로 그 복덕이 한량없다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 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解 義] 부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하는 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허공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허공이 얼마나 되겠느냐? 허공의 끝이 있겠느냐(東方虛空 可思量不).」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허공은 제일 큰 공간(空間)이어서 그 크기가 무한대(無限大)입니다.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無限)이니 동쪽의 허공도 무한이고 서쪽의 허공도, 남쪽의 허공도, 북쪽의 허공도 무한입니다. 동남·서남·동북·서북의 간방(間方)도 그렇고 상하(上下) 아래위의 공간도 무한하여 끝이 간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방팔방만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렇게 평면적인 공간세계만을 말하지 않고 방위(方位)를 말할 때에도 입체적으로 생각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四간방(間方)에다 상하방(上下方)을 합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말합니다. 경문(經文)에 남서북방사유상하(南西北方四維上下)라고 한 말들이 곧 그 말씀인데 사유(四維)는 네 간방을 가리킨 말입니다. 허공의 크기가 본래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므로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으로 하는 도심(道心)은 헤아릴 수 없고, <나라는 생각(我相)>·<남이라는 생각(人相)>·<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이 없어져서 머무는 것 없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중생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은 무한대(無限大)의 허공처럼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解 義] 부처님께서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결론으로 「보살은 다만 가르쳐 준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菩薩但應如所敎住)」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께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청(請)하여 여쭈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云何應住) 어떻게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이까(云何降伏其心)」한 물음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십니다.

부처님의 경전(經典)에는 언제든지 나중 물은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물은 것은 뒤에 대답하십니다. 마치 회의(會議)하는 규칙(規則)에 개의(改議), 재개의(再改議)가 나오며 재개의, 개의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문제를 낸 동의(動議)는 맨 나중에 결정하는 논리(論理)와 같습니다. 이 금강경에서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나중 물었으므로 잘난 체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없애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하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운하주(云何住)에 대한 말씀을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없애지 않고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머무는 일(住)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먼저 말씀하시고 운하주(云何住)를 나중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가지든 백가지든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말씀해 주셨으며, 49년동안 이 순서(順序)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3장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서 중생심(衆生心)을 가지고 내가 잘하거니 하는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설법(說法)을 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되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하는 방법이 「주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고 또 만일 「주하지 않는데 주한다.」, 그러면 그것 역시 주하는데 떨어진 것이 됩니다. 마음을 주한다 함은 우리말로 마음먹는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라.」하는 말도 마음먹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곧 열반을 향해서 보시를 꾸준히 행하라, 「내가 본래 부처이니 부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라.」는 것입니다.

 

 

[說義]

<처음부터 끝까지 여시의 숙제>

금강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여시>(如是)가 자주 나옵니다. 이 「여시」가 어떤<여시>인가.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내가 묻기 전이라도 얘기하십시오. 경산림(經山林)을 다 마칠 때까지 이 여시(如是)가 숙제(宿題)가 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참말로 깨칠는지도 모릅니다. 뉴우톤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萬有引力)의 원리를 발견(發見)하듯이 법문 듣고 오고가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 깨친 얘기를 들어보면 닭 우는소리를 듣고 깨치고, 물 내려가는 소리 듣고 깨치고, 복숭아꽃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보고 깨치고, 사람들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치기도 하고 상여 나가는데 상주(喪主)가 「아이고」하고 우는소리 듣다가 깨치기도 합니다.

이 「여시」에 금강경의 내용 전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숙제로 해서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뉴우톤처럼 자나 깨나 오거나 가거나 법문을 들을 때나 식사(食事)를 할 때나 이 숙제만 가지고 있으면 홀연히 깨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여시」를 완전히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다같이 눈 둘 있고 코 하나 있고 하니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설사 우리가 그 분이 도인(道人)인 줄 모르고 산다 하더라도 이런 분이 우리나라에 계신 것만 해도 우리한테는 큰 은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용심(用心)이나 행동이 나만도 못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보살(菩薩)이라 한 말은 보리(菩提)와 살타(薩?)가 합해진 말인데 보리 곧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밑에 살타 곧 중생은 아직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니 용심이 이러니 행동이 저러니 하고 함부로 말하다가는 까딱 잘못하면 큰 죄를 짓기 쉽습니다.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았다 해도 중생 놀음하던 버릇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것을 당장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의 금강경 산림 가운데 정말 깨쳐서 <여시>에 대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생기고 경을 알고 대답할 사람이 생기면 참으로 경사(慶事)지만 그렇게는 못 된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의 분별로라도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을 혼자서만 보는 것보다는 남하고 이렇게 저렇게 토론(討論)을 하고 같이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강원(講院)에서도 나 혼자서는 밤새도록 보고 새벽에 보고 아침에 보고 낮에 보고 해도 이해가 잘 안되다가도 서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번쩍 나서 풀려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傲氣)로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주의(注意)를 집중하는 바람에 정신이 통일되어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신을 희미하게 가지니까 그렇지 정신을 일념으로 통일하여 마음자리에 가깝게 접근하면 <여시>의 지혜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견성해도 대승행 닦아야>

그래서 반야경(般若經)의 실상 반야(實相般若), 곧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布施)를 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다 행하라, 하는 것은 실상 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이런 잘못은 없습니다.

요새 참선(參禪)하는 수좌(首座)들이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을 짓지 않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念慮)하여 六조대사께서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體得)했으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념(專念)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도하라. 제도를 하되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천당(天堂) 사람도 되고 태생(胎生)·난생(卵生)도 되고 지옥(地獄)도 되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내가 고쳤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지도(指導)했다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그런 것 느끼지 말고 저건 내가 제도한 중생이거니 저건 내 신도(信徒)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고 배우는 중생들에게도 듣고 배운 건 다 알고 나면 잊어버리고 들을 줄 아는 그것도 깨치도록 해서 지도를 받았거니 배웠다 거니 하는 아상·인상이 없어지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인욕(忍辱)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辱)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남이 욕한다고 야단 치고 보복(報復)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煩惱)의 생사심(生死心)만 늘지 언제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합니까?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근본이지만 반야를 깨친 다음에는 그래서 나의 업보(業報)·망상(妄想)을 쉬고 녹이는 데는 인욕(忍辱)이 중심이 됩니다. 남이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할 것도 없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서 반죽음이 되었어도 「왜 그러냐」고 한마디 따질 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도 이 모양이고 오늘도 이 모양이고 내일도 이 모양이고 여러 천만년 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成佛)한 뒤나 똑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른 건 모두 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갈팡질팡하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존재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이나 부처나 다 같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두루 다 평등한 것이므로 내가 깨우쳐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 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천하태평객(天下泰平客)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실패를 했다, 성공을 했다.」 그런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현실(現實)은 마음에서 생긴 꿈이니 이런 식으로 알고 내일부터라도 흉내 내어 살아 봅시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하면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어도 능률이 더 나고 근심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죽고 살고 흥망성쇠(興亡盛衰), 시간세계(時間世界)를 다 초월(超越)해서 망각(忘却)했기 때문입니다. 공포증(恐怖症)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있고 욕심이 앞서 있으면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정구장(庭球場) 앞을 지나치던 정구선수가 친구의 권유(勸誘)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보려는 생각으로 몇 번 친 것이 선수 생활 십년 동안에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볼을 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나 지면 큰 일 이라는 공포심이 없이 아무 생각 없는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처가 정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 한 근본 자성 자리에 합하기만 하면 이런 묘한 기술(技術)이 나옵니다. 권투나 축구나 검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연습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만능(萬能)하던 마음자리가 안심(安心)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옵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잘 써야 되겠다는 공포증(恐怖症) 때문에 잘 안 써집니다. 왕희지(王羲之) 같은 이도 어느 날 친구의 연회(宴會)에 초대되어 만취(滿醉)하여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 줄 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자기로서는 십년 백년이 걸려도 쓸 수 없는 명필(名筆)이 있어서 「어느 신선(神仙)이 와서 나를 깨우쳐 주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며칠 뒤에야 자기가 취중(醉中)에 썼다는 것이 기억(記憶)이 됐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글씨의 십분의 일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씨도 무심하면 자연히 명필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不住相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불입문자 교외별전의 자리>

그러면 머무른 데 없이 보시를 행한다(應無所住 行於布施)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시하는 것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말한바 있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생활, 육체 생활을 정리해서 하루 종일 나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차차 돌리고 탐욕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정리해서 참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돌리며, 오직 남만을 위해서 사는 보살행을 하라는 말입니다. 보살행은 본래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보리, 열반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니 보리라 함은 생사도 열반도 없고 시간도 공간도 남자도 여자도 부처도 중생도 초월하여 초월한 그것까지 없는 자리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보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내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얘기를 계속해도 피로가 안 오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글이나 지식으로 분별해서 알아질 수 없는 자리이므로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도리라 합니다. 말이나 문자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이심전심의 법으로 전법하셨으므로 교 밖에 따로 전했다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합니다. 또 이 자리는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간접적인 방편에 불과하므로 마음을 직접 가르쳐서 그 본성을 깨우치게 함으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도리로 성불하게 하는 법이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그래서 대선사(大禪師)에게 법문을 청할 때나 주요한 의식을 할 때면 늘 이런 게송(偈頌)을 외웁니다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개권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開卷無一字 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 이 경전이 있지만 그러나 이 경전은 종이나 먹으로 쓴 글씨거나 인쇄 제본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펴 봐야 한 글자도 없다. 이렇게 종이나 먹으로 된 책이 아니어서 한 글자도 없는 이런 경전이 나에게 한 권이 있는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항상 큰 광명을 발하여 전 우주를 환히 비추고 있다.」 이것이 곧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금강경의 믿음으로 보면 반야(般若)고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입니다. 이 반야, 마음을 얻어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할 때면 손이고 발이고 눈이고 목숨이고를 돌보지 않고 다 보시하는데 지기를 희생했다는 생각도 중생이 구제됐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것이 「응무소주」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제자들이 대개 청법을 해 오는데 무엇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때로는 열 가지 백 가지로 여쭈어 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처음 물은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물은 것부터 먼저 한 문제 한 문제 설명해 주십니다.

금강경도 제2절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수보리존자가 먼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오며(應云何住)를 여쭈었고 나중에 「마음을 어떻게 항복하겠사옵니까(云何降伏其心)」하고 두 가지를 여쭈었는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제3 대승정종분에서 나중에 여쭈어 온 「마음 항복 받는 법」을 먼저 말씀하셨고 먼저 여쭈어 온 「마음 머무는 법」에 대해서는 제4 묘행무주분에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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