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法可得分 第二十二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佛(불)이 得阿多羅三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爲無所得耶(위무소득야)이까 佛言(불언)하사대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我於阿多羅三三菩提(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乃至無有小法可得(내지무유소법가득)이니 是名阿耨多羅三三菩提(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은 것이 없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조그마한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第二十二 無法可說分--법은 얻을 수 없다

 

[科 解]

마음의 본성은 지옥 갔을 때나 천당 갔을 때나 변한 것이 없고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부처인 때나 중생인 때나 그 근본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므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닦아서 증득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가. 그것은 얻은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던 것을 다 없애어서 아무것도 얻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무법가득분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白佛言 世尊 佛 得阿多羅三三菩提  爲無 所得耶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多羅三三菩提 乃至 無有小法可得 是名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수보리존자가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말씀하실만한 법이 아예 없다」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듣고 또 부처님께 여쭈어 부처와 중생이 본래 둘이 아니고 따라서 부처님께서 본래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또 다시 거듭 확인하기 위해 여쭈어 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고 하신 것이 그게 참말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수보리존자의 그 말씀을 그대로 긍정하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아주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옳다, 옳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만 두고 조그만 법이라도 나는 얻은 것이 없다. 이렇게 얻은 것도, 깨달은 것도 없는 그런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마음에 얻었다는 생각이 하나도 없이 뚝 떨어진 것, 돈이나 명예는 그만 두고 진리나 불법을 구하는 마음까지도 다 없어져서 부처와 중생이 하나인 자리이므로 본래 얻을 것이 없는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합니다. 얻을 것이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불법이란 말은 수백 번 이상 중복해서 설명되었으므로 이상 생략합니다. 본래 이 대문은 다음의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으로 계속된 대문입니다. 정심행선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고하가 없고 아인중생수자의 사상(四相)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서 얻는 것」이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착보살님(無着菩薩)께서 지으신 금강경론(金剛經論)의 27단의법(二七斷疑法) 가운데는 이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과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을 한 대문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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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說所說分 第二十一

 

 

須菩提(수보리)야 汝勿謂如來作是念(여물위여래작시념)하되 我當有所說法(아당유소설법)이니 莫作是念(막작시념)하라 何以故(하이고)오 若人(약인)이 言(언)하되 如來有所說法(여래유소설법)이라하면 卽爲謗佛(즉위방불)이니 不能解我所說故(불능해아소설고)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說法者(설법자)는 無法可說(무법가설)이 是名說法(시명설법)이니라 爾時(이시)에 慧命須菩提(혜명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頗有衆生(파유중생)이 於未來世(어미래세)에 聞說是法(문설시법)하고 生信心不(생신심부)이까 佛言須菩提(불언수보리)야 彼非衆生(피비중생)이며 非不衆生(비불중생)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衆生衆生者(중생중생자)는 如來說非衆生(여래설비중생)일새 是名衆生(시명중생)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말하지 말라, 여래께서 「내가 설명한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리라」는 이런 생각 내지 말라. 왜냐 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설명한바 법이 있다」고 하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나의 말한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법을 말한다는 것은 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설법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다음 세상에 이런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이가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이다 중생이다 하지만 여래는 중생이 아닌 것을 중생이라 이름하여 말하느니라.』

 

 

第二十一 非說所說分--설법 아닌 설법

 

[科 解]

여래는 육신으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모양으로 볼 수 없고 여래의 법은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말이 아니고 설명할 법도 없는 것인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거짓으로 가정을 해서 법을 설하시어 팔만 사천 법문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설법은 설법하시는 주체인 부처님도 공하고 설하는 내용인 법 자체도 또한 공한 것이니 설법하는 말씀의 실체가 또한 공한 것이고 내지는 설법의 대상인 중생도 역시 공의 도리로 이끌어 오기 위한 대상이어서 부처님의 설법은 종일 말씀하셔도 한 말씀도 하신 것이 아니며 49년 설하신 것이 한 마디의 설법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설할 것도 없는 공한 자리에만 주저앉아서 중생 제도도 안 하고 설법도 안 하면 소승이고 역시 집착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한 마디의 설법도 없는 자리에서 큰 자비심으로 말이 아닌 말로 설법하신다는 뜻으로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 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解 義] 부처님께서 하시는 설법은 결정된 법이 있어서 설법하시는 것이 아니니, 곧 설법 없는 가운데 불생불멸하는 법, 참으로 진실한 법을 말씀하시지만 그 설법하는 법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설명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너는 여래께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곧 여래께서 「내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설법했도다」하는 생각을 하리라는 말도 하지 말고 그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참 거룩한 진리의 감로법문(甘露法門)을 우리에게 많이 해주셨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 여래의 법문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로다.』

우리가 지금까지 금강경을 배워 오는데 아공·법공·구공이 있어서 「깨달았다, 알았다」하는 생각이 붙어 있으면 똑 떨어진 적멸(寂滅)이 아닙니다. 구공이 된 적멸자리는 설법으로 할 수 없는 진리이고 보니 불법을 못 설(說)한 것입니다. 또 생노병사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도 참말로 있는 게 아니니 거짓말이고 소승법을 말씀하셨지만 그게 다 설법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임시로 가정(假定)을 해서 설명한 것에 불과 합니다. 말로도 어떻게 할 수 없고 글로도 어떻게 표해 볼 수 없는 것, 참으로 있는 이것 하나, 말 하고 말 듣는 이 자리 이것 하나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것이 먼 데 어디 높은 데 있는 것같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 데서부터 설법을 시작하려니까 생로병사도 있고 소승법도 있는 것처럼 말씀이 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차차 제 지식을 내어 버리게 하는데, 그러니까 「이게 옳은 것이구나.」하는 관념이 남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체(體)니 용(用)이니 하여 본성 자리인 체는 불생불멸하고 용은 생멸하는 현상계인 것처럼 설명해 놓으신 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체(體)가 용(用)이고 용이 체고, 또 체가 체가 아니고 용이 용 아닌 것으로 전부 떼어 버리는 설법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설명해 놓은 것이 모두 턱도 안 닿는 것으로 하여 중생들의 이런저런 소견을 다 떼어 버리고 마지막에는 불경도 덮어 버리고 ‘배고프면 밥 생각하고 밤이면 자고 낮이면 깨어나고 하는 이게 대체 무엇인가. 알고 생각하는 것이 확실히 내가 하는데 이게 무엇인가. 온갖 생각, 온갖 지식을 무한히 내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참으로 나의 진면목일 것인데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이것밖에 안 남게 됩니다. 이제까지 보고 듣던 것 우리한테는 쓸데없는 것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다 알아서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뭐니 뭐니하는 것들은 일체가 다 정리되고 오직 「이것 하나」 깨칠 때까지는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깨치면 사람 할 일 다 한 것이고 근심·걱정·생로병사 다 없어져서 마음 턱 놓고 낮잠 한 번 자도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큰 문제가 남아 있으니 낮잠 한 번 잘 수도 없고 배고프다고 음식 찾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는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니 오늘 가다가 죽을는지 내일까지 꼭 산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자리에서는 법을 설한 것이 없으므로 『법을 설했다는 것은 없는 법을 말한 것뿐이니 이것을 설법이라고 이름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설법해 볼 수 없는 이런 내용을 일러 주기 위해 40년 동안 설법하신 뒤에 이 금강경을 말씀하셨는데, 부처님 당시의 대제자들은 근기가 다 수승한 분들이고 40년을 배우고 닦은 분들이므로 부처님의 말씀을 십분 다 알아들었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근기가 나약할 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에 로켓처럼 달리다 보니 같은 말을 물어도 막히고 비슷한 경문이 나와도 설명을 듣고 보면 별것도 아닌데 그 뜻을 곧 알 수 없는 것은 말에 따라다니고 글에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마음자리에서 보면 설법할 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도 안 하면 아무 것도 안 하는 데 떨어진 것이고 공(空)에 떨어진 것이며 소승이 됩니다. 그러므로 설할 것 없는 법을 대비심을 일으켜서 설법하는 것을 설법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解 義] 그때 수보리존자님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기를, 『세존이시여! 이다음 말세에 사는 중생들이 그 업장이 두터워서 자성자리를 엿보기 어려울 터인데 이런 어려운 법을 듣고 신심을 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많은 법문을 가정을 해서 해 주셨지만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한 법도 설명하신 일이 없다는 이런 말씀을 듣고 신심을 내겠습니까?』라고 여쭙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말세중생들이 비록 두터운 번뇌망상 속에 살고 탐·진·치 삼독에 심히 취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 함은 중생이란 말도 아니고 중생이 아니란 말도 아니어서 중생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 하면 중생이다, 중생이다 하지만 여래는 중생이 아닌 것을 중생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법문을 듣고 배울 적에 어떤 선지식은 폭군이 되어가지고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이고 그렇지만, 이것이 다 참으로 중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해 자기의 화신(化身)을 미리 나투어서 그 나라의 중생으로 태어나게 했다가 가혹한 벌을 주어 보이십니다.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에 깊이 중독되어서 좀처럼 빠져나올 생각을 내지 않으므로 보살님네들이 여러 가지 방편을 가지고 중생들의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런 방편을 베풀지 않고는 아무리 법당 지어 놓고 금강경 강의한다고 해 봐야 잘 안 옵니다. 그래서 먼저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고 이 몸뚱이는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참다운 나>·<주인공>을 찾지 않고서는 정말 안심할 수 없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부터 넣어 준 뒤에 불법을 들려 줘야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고는 욕심 하나로만 꽉 차 있는 그 마음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보살님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만사에 뜻이 없는 가운데 아무 할 일 없고 말할 것도 없지만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여 일러주고 중생을 제도하고 그럽니다. 아무 것도 없이 법문 좀 해달라고 그러면 말해주고 하지만 누가 와서 나한테 법을 배워 갔거니 하는 것도 없습니다. 매일 와서 법문 듣고 그래도 그 선지식은 어떤 사람인지 처음 배우러 온 것같이 그렇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 보면 당장 되는데 저 사람이 지금 나한테 쓸모없을 사람인가 쓸모있을 사람인가 그걸 자꾸 점검을 해 가지고 보니까 얼굴이 익어집니다. 서울역에 하루 십만명이 내려도 아무 생각 없이 보면 한 사람의 얼굴도 모르게 됩니다. 중생들은 그 많은 남녀노소를 낱낱이 따져서 저건 좀 잘났다, 저건 아주 잘났다 저건 좀 못났다, 낱낱이 따져서 보내지 그냥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식색(食色) 두 가지 욕심이 머리에 차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애착이 많은 사람, 가령 음심(淫心)이 많은 사람은 제 눈에 좀 드는 사람이 있으면 며칠까지 그만 얼굴이 환히 나타납니다. 「아! 그 처녀 잘났더라. 그 총각 잘 났더라.」해서 그만 4, 5일씩 일주일을 눈을 감아도 환히 알게 됩니다. 백년이 지나서 만나도 「아이고 그 사람이로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보면 금방 만났다 돌아서 가지고도 또 처음 인사합니다. 그러니까 한 절에서 3년이나 같이 공부하고는 바랑 짊어지고 간다고 서로 떠나서 그 밑의 마을에 가서 만나면 처음 만난 사람처럼 초면인사를 하는데 그것은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세속 선비들에게 공부하는 이가 욕을 먹는 수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생겼더니 그 뒤에 1년 뒤에 가서 만나 보니까 영 모른 체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들이 무심한 마음을 배우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이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세속 사람들은 중이 음흉해서 그렇다고 욕하는 수도 있습니다. 공부 한참 하는 사람들끼리는 무심 공부에만 열중하다 보면 하루에도 한 두서너 시간씩 서로 법담(法談)을 주고받고 얘기한 사람도 다른 절에서 여러 사람 가운데 만나면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어디 있는 사람인 줄 모르겠다고 어리벙벙해집니다. 두 사람이 다 그러면 다행이겠는데 한쪽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저하고 얼마나 말을 많이 하다가 이제 겨우 열흘도 못 됐는데 「어디서 보긴 봤는데 어디 삽니까?」하고 물으니 거짓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가」하고 웃습니다.

그러니 이런 경지가 돼야 공부가 될 수 있지 그만 사사건건 걸려 가지고 칠전팔도(七顚八倒)로 이리 엎어지고 저리 자빠지고 하면 그런 사람은 공부가 좀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이제 탁 끊어 버리면 끊어집니다. 마음이 굳기만 하면 결정법이 아니고 잠깐 생각을 길들여서 업으로 그렇게 된 것이므로 한 생각 없이 청룡도를 내어서 딱 끊어 버리면 끊어집니다. 그런 애착이 남녀 간에 비교적 여성들이 남자들 보다 더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은 오백계를 받습니다. 애기 낳아 키우는 것만 보아도 남자의 천배 만배나 됩니다. 남자에게 애기 낳아서 키우라면 다 도망가고 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성불하려면 먼저 남자가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자도 마음씨를 대범하게 해야지 너무 간을 내어 먹일 듯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말세중생이 독한 탐진치에 취해서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욕심으로만 산다고 하지만 무심한 본 마음자리가 있는데 그 마음이 미해 가지고 지독한 중생놀음을 하는 것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실 때는 중생들이 중생놀음 하는 짓거리는 다 술 취한 주정뱅이 노름으로 보십니다. 술이 좀 덜 취한 중생도 있고 아주 곤드레만드레로 취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독주를 마시고 취한 사람, 좋은 고급술을 마시고 취한 사람도 있어서 그 취한 모양과 정도가 다른 것뿐입니다. 그러나 많이 취한 사람이나 좀 덜 취한 사람이나 술만 깨어서 제 정신을 차리면 다 멀쩡한 사람이 됩니다.

이와 같이 말세 중생을 술이 아주 심하게 취한 사람에 비할 수 있으니, 술이 취했다고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중생들도 탐진치 삼독주(三毒酒)에 취해 있는 부처고 보살일 뿐이니 이름만 중생이라고 지었을 뿐이지 불보살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술만 깨면 곧 성한 사람으로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이므로 말세중생도 중생이 아니라 한 것입니다.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서 같은 얘기가 나왔고 여러 번 중복된 얘기이므로 여기서는 이만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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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佛(불)을 可以具足色身(가이구족색신)으로 見不(견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色身(불응이구족색신)으로 見(견)이니이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具足色身(여래설구족색신)이 卽非具足色身(즉비구족색신)이요 是名具足色身(시명구족색신)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를 可以具足諸相(가이구족제상)으로 見不(견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여래)를 不應以具足諸相(불응이구족제상)으로 見(견)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諸相具足(여래설제상구족)은 卽非具足(즉비구족)이니 是名諸相具足(시명제상구족)이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한 육신이 곧 구족한 육신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한 육신이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몸매의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옵고 그 이름이 몸매의 구족이기 때문이옵니다.』

 

 

第二十 離色離相分--색상을 여의다

 

[科 解]

모든 부처님은 다 무위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부처라 하는 것이고 상호를 성취했기 때문에 부처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이 아무런 티도 없어서 모든 물건을 비칠 수 있는 이치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필경은 육신이 아닌 것이며 따라서 상호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상호 두 가지가 부처 아닌 것도 아니어서 법신을 여읜 것도 아니므로 여래는 색신이 아니라 법신이란 뜻으로 「색신이 아니라」했고 또한 색상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이름을 구족할 색신, 구족할 제상이라 한다.』고 하셨던 것이니 색상을 여읜 법신의 여래를 말씀한 대문이란 뜻으로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인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見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부처님은 가히 구족색신으로 볼 수 있느냐? 32상과 80종호가 구족한 그런 색신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거룩한 몸의 구족한 모습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구족색신이라고 설명하시는 것은 곧 그게 구족색신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아무리 부처님께서 거룩하셔서 눈썹사이에 백호상(白毫相) 금빛으로 된 몸이나 머리 위에 열 길의 광명이 항상 따라 있는 등의 거룩한 32상이나 80종호는 그것은 오직 육체적인 것이고 현상적인 것으로 구족한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구족색신이라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그것은 물질로 있는 것이고 환(幻)으로 있는 것이므로 그런 내용은 참으로 구족한 게 아니고 이 말 듣는 이 마음자리만이 참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환으로 부처님을 보려고 해선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구족색신이라고 설명하신 것은 그게 사실로 있는 구족색신이 아니고 불생불멸하는 구족색신이 아니므로 아무리 부처님의 몸일지라도 물질적 요소를 갖추면 있고 흩어지면 없고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신(法身)만이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보신(報身)이나 화신(化身)은 다 우리 중생 몸뚱이나 한가지로 생멸합니다. 그러니 환으로 봐서도 그렇고 모양으로 설명되는 것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존재이므로 그런 것으로는 부처님 비슷한 것도 볼 수 없습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見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를 가히 구족제상으로 볼 수 있느냐?』 아까는 몸뚱이를 말한 것이고 이것은 어떻게 묘하게 생긴 온갖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는 뜻이니 이것은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뜯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수보리존자는 『안될 말씀이옵니다. 여래를 구족제상으로는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눈은 어떻고 코는 어떻고 살결은 어떻고 손가락 발가락은 어떻고 낱낱이 모두 설명을 하셨는데 그런 구족상이란 참말로 있는 구족상이 아니옵니다. 참말로 눈이라고 할 만한 눈이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렇게 생긴 눈은 없고 그렇게 생긴 얼굴이라는 것도 없사옵니다. 그런걸 구족한 상이라 하옵니다.』

그렇게 별로 오래지 않은 왜정 때 한량으로 잘 놀고 하던 분이 출가했는데 이 이는 저녁 9시가 되어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밤새도록 노래를 부릅니다. 육자배기도 하고 온갖 노래를 밤새도록 하는데 아침에 깨어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 것도 심리학적으로 전부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전혀 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닌데 몸뚱이 저 혼자는 그렇게 못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몸이 아무리 거룩해서 광명이 나고 금빛으로 빛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육신 그것은 물질에 불과하고 허깨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니 그러므로 그 색상(色相)을 가지고 부처님을 볼 수는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중생들은 색상에만 떨어질 뿐만 아니라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법에도 걸립니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없는 그런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하면 중생들은 그 말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 말에도 떨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좋다고 눈에 걸려 넘어지고 귀에 걸려 넘어지고 맛에 걸리고 몸에 걸리고 전부 이럽니다. 그래서 자꾸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십니다. 우리의 신념, 사상이 확고부동해지고 어떤 방해에도 걸리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술 보면 마시고 싶은 사람은 벌써 술에 걸린 사람이고, 남녀끼리 서로 만나면 좋아지고 싶은 사람은 여자한테 걸린 사람이니 그러면 그 마음에 벌써 애착이 있어서 인과가 있는 사람이므로 인과를 초월한 무가애(無?碍)가 아닙니다. 술에도 밥에도 옷에도 남자한테도 여자한테도 명예에도 돈에도 무엇에도 뜻이 없고 세상만사에 뜻이 없는 것이 그게 무가애입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고기 생기면 고기 먹고 안 생기면 억지로 먹으려고 할 것도 없으며, 술도 생기면 마시고 안 생기면 안 먹고 이런 것을 무가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한테 하면 말씀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게 먹은 게 안 먹은 거고 사람을 죽여도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러니 화엄경(華嚴經) 53선지식 가운데 어떤 보살은 국왕인데 선재동자가 그분을 한 번 만나 보니 아주 폭군이 돼 가지고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목을 베고 하루에도 수백명을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선재동자가 보니 도무지 선지식이 아닌 것 같아서 「아무래도 마귀굴로 내가 잘못 찾아왔구나.」하고 의심하다가 먼저 선지식으로부터 「그렇게 의심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서 법을 물으라.」는 당부를 재차 듣고 할 수 없이 들어가서 절을 하고는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무량삼매를 깨달을 수 있는 큰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래 놓고 보니 참말로 선지식임을 깨닫고는 「그 중생 제도하는 데 가지가지 방법이 있겠지마는 어째서 보살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을 쉽게 죽여야 되겠습니까?」그러니까 그 보살님이 웃으면서 「너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내가 살인 안 하는 사람이다. 내가 금생 뿐 아니라 내생에도 과거에도 백천만생을 돌아다녀도 개미 한 번 밟아 본 적이 없느니라.」 「그러면 지금 이렇게 살생을 하시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일 년만 해도 사람이 여러 수십만 명이 죽는데 그래도 안 죽였다 하시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것은 모두 내 화신이다. 내 화신이 남의 집 아들로 태어났고 딸로 태어났고 그래서 80년 전에 태어나서 지금 80세가 된 것도 있고 그러하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한 자리니까 그 보살님으로 봐서는 지금 곧 하고 앉아 있는 건데 우리가 보기에는 남의 집 아들이 80년 되었으니까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 보살이 그렇게 화신을 보내서 역사적인 인간이 되어가지고 일만 저지릅니다. 부모한테 불효하고 국가에 위법하고 탐진치 해탈 안하면 그걸 잡아다가 사정없이 목을 베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중생들이 비린내 나는 피가 푹푹 쏟아지는 것을 보도록 만들은 눈가림입니다. 그러니 이게 다 환입니다.

불보살님 경계에서는 이와 같이 마음이 색상(色相)을 다 떠나 있기 때문에 육신이나 현상계를 자유자재로 전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 색상이 아닌 말 듣고 생각하고 하는 주체, 마음자리인 법신을 확실하게 깨달아서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를 참으로 본다는 것은 곧 자기의 법신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32상 80종호(種好)를 가지고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법신의 그림자이고 마음의 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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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若有人(약유인)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써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是人(시인)이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多不(득복다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此人(차인)이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得福甚多(득복심다)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若福德(약복덕)이 有實(유실)인댄 如來不說得福德多(여래불설득복덕다)니 以福德(이복덕)이 無故(무고)로 如來說得福德多(여래설득복덕다)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해서 받는 복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께서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할 것인데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 말 하느니라.』

 

 

第十九 法界通化分-법계를 통화한다

 

[科 解]

칠보를 보시한 인연으로 받는 복덕은 인간세상이나 천상에서 받는 유위적인 복을 말하며, 이에 대해 함이 없는 절대의 복덕은 범부와 성인을 초월하는 통화의 공을 말한다. 그러나 유위(有爲)의 상대적인 복이라 하여 그것을 버리면 공행(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무위법이 비록 참되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기대려 하면 성과(聖果)는 증득할 수 없다. 그러니 기대지도 말고 버리지도 않는 보살만행이라야 이것이 구경의 진리이고 성불하는 법이 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현상계와 본체계를 다 통하는 통화의 공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이라 했다. (청담스님의 설법이 누락되어 종경(宗鏡)선사의 제강(提綱)중에서 추림)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如是世尊 此人以是 因緣 得福甚多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다 보시했다고 하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해서 얻은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해서 얻은 복이 심히 많사옵니다.』

삼천대천이 숫자의 단위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이번에는 범망경(梵網經)에 있는 백억화신불(百億化身佛)의 말씀과 견주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삼천대천은 곧 백억이란 말인데 석가모니 한 부처님의 화신의 숫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한 부처님께서 성불하시면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세세생생으로 닦은 과보로 생긴 보신(報身)이 생깁니다. 만척이나 되는 신장에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보신>이 나타나는데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보신>의 천백억분의 하나인 화신(化身)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처님께서 나시면 연꽃자리가 생깁니다. 연꽃을 불교의 이상화로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 꽃은 더러운 썩은 물에서만 크지만 그 꽃과 잎은 더러운데 물들지 않으면서 향기가 좋고 활짝 깨끗하게 피는 뜻이 깊은 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꽃들은 비 한 번 맞으면 다 시들게 되지만 연꽃이나 잎은 물방울을 또르르 굴려서 떨어뜨립니다. 이와 같이 연꽃은 제일 더러운데서 생겨나서 더러운데 물들지 않고 제일 고귀한 꽃으로 피기 때문에 불보살이 중생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을 구제하지만 중생들의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이치와 같은 뜻을 지니기 때문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색구경천 하늘에 만척이나 되는 <보신>이 생기고 연꽃 천 잎에 당신의 일천 화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천불의 화신을 소집합니다. 범망경(梵網經) 심지품(心地品)에 자세한 얘기가 나와 있습니다. 보신인 노사나불이 천불의 화신에게 범망경의 보살계 십중48경계(十重四十八輕戒)를 설법하시면서 이 계를 가지고 가서 천당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 가르쳐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천 연꽃의 천 화신불이 또 낱낱이 백억화신이 나타나서 무수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으니 어서 가서 이 법으로 구제해 주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신 분 중의 한 분이 실달태자이시니, 일부러 발심 출가해서 6년 고행 끝에 성불하는 것도 보여 주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49년 동안 가르쳐 주셨으니 이것이 방편입니다. 그래서 절에서 예불할 때에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며, 이렇게 한 부처님께서 한 교구씩 맡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바세계를 맡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신자리에서 마음은 본래 무한대이어서 무한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공간을 부처님 마음에 비하면 허공에 뜬 구름 한 점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을 제자들을 중생하시려니까 삼천대천세계니 아승지니 무량아승지니 하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 한 그릇만 떠 줘도 큰 복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천백억 세계를 보물을 가득 채워서 보시했으니 그 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得福德多

 

[解 義] 『수보리야! 보배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중생을 위해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인 복덕이니 그것은 절대적인 복덕이 될 수 없고 마음의 복이 될 수 없다. 물질은 거짓된 것이고 마음의 그림자이므로 물질에 끄달린 복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복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수보리야! 만일 그 복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내가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복덕이 많다고 하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위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과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에서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참말로 있는 복덕이 뭘 가리키는 뜻입니까? 키가 작다 하면 크다 작다 하는 생각에 떨어지는 것이고 많다 적다하면 우리는 많다 적다는 생각에 그만 구속이 되어 머리가 자꾸 안 돌아갑니다. 여기 많다는 말은 안 많다는 말이고 작다는 말은 크다는 말이고 실제가 그런 것입니다. 복덕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若福德有實)하는 뜻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복덕일진댄」 그런 뜻입니다. 불생불멸하는 그런 자기 마음이 복이지 진복(眞福)은 복이라고 할 수 없으니 많다 적다는 말도 못합니다. 그래 놓고는 「그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 복덕이 많다고 한다.」하셨으니 앞에 말씀과 전혀 반대로 모순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이면서 같은 말씀입니다. 「복덕이 참말로 있는 복덕이라면 그게 정말 불생불멸하는 복이니까 그것은 진복(眞福)이고 그 진복은 내 마음 밖에 없고 자성자리는 어떻게 많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많다고 한다.」 그런 말씀이 얼른 껍데기 보면 그 뜻이 금방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말씀 같지만 정말 복덕이 아닌 복덕은 진복이고 자성자리이므로 많다고 할만도 한 것입니다. 이 복은 불생불멸하는 복이고 많다 적다를 초월한 복이며 항상 할 수 있는 복이니 많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많다는 말은 많다고 할 수 없는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쌀가마니나 돈 보따리처럼 있고 없는 것도 있는 복이 아니라 정말 이런 복덕이 없는 자성자리입니다. 지금 말 듣고 말하는 이 자리, 온 우주의 주인공 자리, 그게 참 복덕이지 복덕이 아니면 그런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정말 복덕이 많다고 할 만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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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體同觀分 第十八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오(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肉眼不(유육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肉眼(여래유육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天眼不(유천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여래)-有天眼(유천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慧眼不(유혜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慧眼(여래유혜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法眼不(여래유법안)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法眼(여래유법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佛眼不(여래유불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佛眼(여래유불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恒河中所有沙(여항하중소유사)를 佛說是沙不(불설시사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說是沙(여래설시사)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一恒河中所有沙(여일항하중소유사)히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하고 是諸恒河所有沙數(시제항하소유사수)로 佛世界(불세계)-如是(여시)하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爾所國土中(이소국토중)에 所有衆生(소유중생)의 若干種心(약간종심)을 如來悉知(여래실지)하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諸心(여래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이요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일새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육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법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아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불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해 부처님께서 그 모래를 말한 적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이 모래를 말씀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와 같은 수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의 모래와 같은 수의 불세계가 있다면, 참으로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 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께서 다 아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께서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第十八 一體同觀分--온갖 것 하나로 보다

 

[科 解]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일체의 현상계가 다 곧 마음 하나이므로 마음과 객관을 떼어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의 마음도 그 근본을 살펴보면 중생이 아니고 알고 보면 다 부처님의 마음과 같은 자리에서 나온 한마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다섯가지 신통도 따지고 보면 마음 하나고 중생들의 온갖 번뇌망상도 과거심·미래심·현재심도 다 한가지 마음일 뿐이므로 하나로 봐야 한다는 뜻에서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世尊 如來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世尊 如來有法眼

 

[解 義]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다섯가지 눈을 가지고 물어 보십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육안(肉眼)이 있느냐? 고깃덩이 눈, 짐승 같은 눈이 있느냐?』하고 물어 보십니다.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도 육안이 있으시옵니다. 마야 부인의 몸에서 받아 나온 그런 육안이 우리 같은 육안이 있으시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부처님께서 천안(天眼)이 있느냐?』 천당사람이 가진 눈은 땅 속도 들여다보고 극락세계도 보고 지옥도 보고 다 보는 눈입니다. 눈앞에 구슬을 들여다보듯이 삼천대천세계를 우리가 앞에 있는 물건 보듯이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 천안이 부처님한테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런 천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혜안(慧眼)이 있느냐?』 혜안이라 하는 것은 근본 자성자리를 통달해서 일체 만법이 둘이 아닌 것을 아는 지혜의 눈입니다. 있는 것 없는 걸 다 초월해서 아공·법공·구공까지 들어가면 없는 것 조차 없어졌고 부처님도 중생도 모두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자기 정신만 있어서 만법이 평등해진 근본지혜를 보는 눈을 <혜안>이라 그럽니다.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런 혜안이 있으시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법안(法眼)이 있느냐?』 <법안>이란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은 산이 아니며 촛대는 책상이 아니고 책상은 촛대가 아니며 안경이 시계가 아니고 시계도 안경이 아닌 그런 차별상을 잘 알아서 미한 건 중생이고 깨달은 건 부처고 그런 현상계의 차별원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아시는 밝은 눈을 말합니다. 만고 평등하여 구별이 없는 그 가운데 또 구별이 분명히 있어서 확실히 하나는 둘이 아니고 둘은 하나가 아니란 그런 걸 아는 눈을 <법안>이라 그럽니다. 그러므로 혜안으로 볼 때는 여자니 남자니 하는 구별이 붙을 데가 없고 그렇지만 현상계로 보면 남자, 여자의 확실한 구별이 있어서 육체조직부터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종소리를 듣는 경우에도 한국 사람은 댕댕으로 듣고 일본 사람들은 강강으로 듣고 하지만 그러나 종소리는 강강도 땡땡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댕댕으로 들으면 댕댕으로 들리고 강강으로 들으면 강강으로 들리지만 그건 사실 참다운 종소리는 아니며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강강도 아니고 땡땡도 아닌 참 종소리, 본래의 종소리를 들으실 줄도 아시지만 또 강강으로 우리가 들은 그대로도 들을 줄 아시니 틀린 대로도 알고 안 틀린대로도 아시어서, 본체계(本體界)의 진실일여상(眞實一如相)과 현상계의 만법차별상(萬法差別相)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는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으시옵니다.』그랬습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如來有佛眼

 

[解 義] 다섯가지 눈 가운데 마지막 눈인 부처님 눈(佛眼)에 대해서 물어보십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계시옵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눈, 곧 혜안·법안·천안·육안을 다 하나로 합한 것을 불안이라 합니다. 조각 조각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이면서 그렇게 차별이 있습니다. 만법을 다 차별로 알고 차별 아닌 것도 다 아는 근본 마음은 하나이지 눈이 여럿이 달린 것은 아닙니다. 육안이 불안이고 법안이고 혜안이고 천안이지 육안은 고깃덩어리고 흙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게 홀로 어떻게 무엇을 봅니까? 그러니 모두 부처님께서 되어 놓으면 육안·천안·법안·혜안·불안의 5안을 다 갖춥니다. 천당 사람들의 천안도 자기 공부한 만큼 그 한계만 보이고 그 이상은 못 봅니다. 그래서 천당에도 28천의 구별이 있게 되어있습니다. 신선이 돼도 정신통일해서 어느 정도 공부만 돼도 그렇고 정신통일한 사람도 그렇고 이 혜안, 법안이 다 있기는 있는데 그 능력이 얼마 안 됩니다.

부처님처럼 철저히 깨닫고 보면 우리가 과거에 잘못 생각했던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심지어 불법도 팔만대장경까지도 배운 것 다 잊어버립니다. 평등청정한 자성이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대로 돌아가면 쓸데없는 망령을 낼 필요가 없고 기억할 것도 없고 그러니 자꾸 무심해 갑니다. 중생은 꽁해서 듣기 때문에 천만년 가도 안 됩니다. 꽁한 그것만 내버리면 영감이 옆에서 아무리 욕을 해도 「제욕 제 마음대로 실컷 하고 욕만 해서 시원치 않으면 마음껏 때리시오.」하고, 꽁한 것만 없으면 그만 만사태평입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복 받고 집안이 조용하고 동네가 조용하고 세계가 평탄해집니다.

그러니 이 꽁해서 이 방정맞은 놈이 이것이 버릇이 되어 가지고 문제니 이걸 두드려 부숴야 합니다. 이 꽁한 생각이 나오거든 사정없이 쳐부숴서 이렇게 항복기심하는 것입니다. 이게 항복하는 방법이니 망상이 움직일 수 있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중이 남이 나를 욕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골을 내고, 신도들이 좀 잘해준다고 그게 내 신도라고 다른 절에 가지 말라 하고 남의 법문 소리 듣는다고 샘을 하고 그러면 그것은 중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는 것이며 승속 간에 이대로 번뇌망상을 다스려 나가야 올바른 신도가 되고 승려가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제망중중(帝網重重)의 현상계가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고 하나라 해도 안 되고 여럿이라 해도 안 되고 그런데 이런 제망중중의 촛대요, 시계요, 종이요, 목침이요 이런 것을 낱낱이 아시는 것이 육안이요, 법안이요 그런데 이게 혜안이요, 사실은 모두 불안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도 불안이 있어서 실제로는 마음 자신이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있느냐?』하시니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있으십니다.』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 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寧爲多不 甚多世尊

 

[解 義] 『수보리야! 네 마음에 어떠하냐? 여러 만리나 되는 항하 가운데 있는 강 모래를 부처님께서 그걸 모래라고 설명했느냐? 설명하지 안했느냐?』 『옳습니다. 부처님은 그걸 모래라고 하셨습니다. 항하에 한량없는 모래가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한 항하 강 가운데 있는 모래 수만 해도 한정이 없겠는데 그 모래 수와 같은 항하강이 또 있다고 하고 그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은 그런 부처님 세계가 있다고 하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것이냐?』 『예, 그 참 많사옵니다. 부처님, 그건 굉장하게 많습니다.』하고 수보리가 대답했던 것입니다.

 

原 文 :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解 義] 항하사수 모래와 같은 항하강, 이렇게 한량없는 이 많은 강에 있는 모래 수처럼 많은 세계 그 가운데 사는 중생들의 마음 씀씀이, 그 낱낱의 심리를 부처님께서는 한 몫에 일목요연 하게 탁 보면 다 알아 내십니다. 누구는 무얼하고 누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이 다 말로 되어 가지고 들리기도 하고 모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근본자리에서는 생각이 말이고 음성이 생각이기 때문에 말로도 들리고, 생각이 보이고 촉감처럼 느껴서도 다 아십니다. 밤에 꿈속에서 말하는 음성, 그게 목소리가 아니고 마음 소리이고 생각 소리입니다. 생각 그 자체가 소리로도 들리고 또 그 생각이 냄새로도 되어 알아집니다. 생각 따라서 욕심내서 나는 냄새가 다르고 또 진심으로 화를 내는 냄새가 다르고 그런 것이어서 한 마음이 냄새도 나고 소리도 되고 빛깔도 됩니다. 꿈을 보면 마음이 모두 눈도 되고 코도 되고 온갖 피부도 되고 동시에 코로 맡는 냄새도 되고 그럽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탐진치가 다 냄새로 되고 빛깔도 되고 소리도 되어서 다 아시게 되는데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한 한량없이 많은 모든 중생들의 온갖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한 두 중생의 마음만 해도 제8장식(第八藏識)에 붙어서 움직이는 미세한 번뇌망상의 용심(用心)만 다 세어서 알려고 하더라고 우리 중생이 다 달려들어서 여러 겁을 센다 하더라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분해한다는 것은 그건 곧 우주 전체의 분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물질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곧 우리 마음의 지적활동, 그 가운데 우리가 사는 그것이 이 지구덩이 하나만 없애 가지고 전자시대로 돌려보내더라도 그 수가 한 없이 많을 텐데 그것이 다 마음이 움직여서 만들어진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한 사람 망상만 해도 그러니 그 수없이 많은 무한 수의 우주세계에 가득 찬 온갖 중생의 굵은 생각, 미세한 생각 온갖 생각을 다 안다는 것은 정말 참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걸 다 아십니다. 그 이유를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解 義]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의 온갖 마음을 다 아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십니다. 「일체 중생이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는 건 그건 생각이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것을 곧 마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논법으로는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부처가 되면 온갖 중생의 마음, 망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보기도 하고 모양도 나타나고 냄새로도 알고 생각으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알고 남김없이 다 아시는데, 그것은 왜 그렇게 알게 되느냐 하면 그게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말씀의 조리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금강경을 천독 만독을 자꾸 하면 그 뜻이 풀어져서 이런데 걸리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온갖 생각이 아니라 물위에 떠 있는 파도나 한가지란 뜻입니다. 중생이 아무리 그 마음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멸(生滅)이 있어서 가령 「여기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게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껍데기 그림자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또 그런 사람이면서 그건 또 진실한 사람이란 말도 되고 부처란 말도 되고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큰 적멸(寂滅)에 드시어 대열반(大涅槃)에 계시니까 다른 중생은 다 부처님의 대열반의 마음이 바다 위에 떠 있는 파도처럼 드러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며, 내 몸 위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환히 알게 되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중생이 한생각도 까딱 안하고 모두 성불해 가지고 중생제도도 하지 않은 채 모두 본연자세 그대로만 있으면 부처님도 그걸 볼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아니고 모양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니까 일체가 다 떨어진 자리를 불불(佛佛)이 서로 볼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볼 수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은 벌써 어떤 형태의 존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진치의 생각에 얽매인 이 마음, 그것은 참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解 義]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일체 마음을 마음이 아니라고 한 것은 과거의 마음도 얻기 어렵고 현재의 마음도 얻기 어렵고 미래의 마음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마지막 결론을 하십니다.

과거심이란 아까 내가 무엇을 물었을 때는 묻고 싶은 그 마음을 가지고 물었지만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한 번 지나가 버린 그 생각은 다시는 거두어들일 도리가 없으니 과거는 현실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그 시간에 일어나서 그렇게 설명하고 다른 생각으로 넘어올 때 벌써 완전히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걸 생각하게 됩니다. 예컨대 경을 새기는 데 있어서도 한 자 한 자 새겨 내려가면 먼저 새기던 마음은 자꾸 과거심이 되어 없어지니 그게 불가득입니다.

또 현재심도 불가득입니다. 지금 현재 이렇게 설명하는 이 마음이 한 자 한 자 새길 적마다 과거심으로 자꾸 넘어갑니다. 과거심이라 하는 경우에도 과(過)하는 생각 다르고 거(去)하는 생각 다르고 이렇게 찰라 찰라 변하는 이것이 현재심입니다. 말을 열 마디 하면 생각이 열 번 지나가게 되니 마치 한강 물처럼 자꾸 흘러가는 것의 연속일 뿐이어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을 한강 물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한강에 흐르는 물은 인천 바다에 들어가느라고 흘러가는 동안 지금 잠깐 통과하는 것뿐이고, 이것이 한강 물이라고 할 만한 물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시아문(如是我聞)」 첫 번부터 금강경을 쭉 읽어 보든지 강의를 해도 역시 글자 한 자 한 자를 설명할 때 마다 그 뜻이 다르므로 그걸 우리가 소위 현재심(現在心)이라고 하지만 글자마다 뜻이 다르니 천 자나 만 자나 벌써 과거로 흘러서 현재·과거·현재·과거로 넘어갔으므로 어느 것을 지적해서 이것이 현재라고 할 만한 현재는 없이 과거로 되어 버립니다. 마음심(心)할 때도 ‘마음심’의 심까지 읽고 난 순간 벌써 과거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각 상(想)할 차례라면 생각 상은 아직 안 나왔으므로 미래이니 <마음 심>은 과거로 떨어지고 <생각 상>은 미래로 남아 있고 이러다 보니까 현재는 항상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범부가 생각하면 현재심이 있는 것으로 봤지 사실 <현재심불가득>이란 말은 지금 당장 이 마음도 잡아 쥐어 볼 수 없고 챙겨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과이부지(過而不止), 곧 자꾸 지나가고 머물지 않으니 지나간 마음, 아직 오지 않은 마음, 금방 현전해서 자꾸 지나가는 마음이니까 다음 생각 다음 말이 머리를 내 밀면서 붙잡을 수 없이 광선 모양으로 달아납니다. 그래서 현재심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미래심(未來心)은 마음이 나오기 전이니 예컨대 유심(有心)의 두 글자를 새기는 경우에 지금 위에 있을 유(有)자를 새기고 있으면 아직 마음심(心)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래 마음은 생기지도 않은 것이므로 그것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 곧 과거심·현재심·미래심의 삼세심(三世心)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說 義]

 

▶참 마음은 볼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서양 철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이 적어도 철인의 말이라면 심히 서글픈 일입니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나로부터 창조되어진 2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아닙니다. 당나라 때 인도에서 스님 한 분이 오셨는데 이 분이 모르는 게 없어서 뭐든지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일체중생의 마음을 다 알아맞히는 신통을 얻은 이입니다. 이것을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고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합니다. 그때 남양혜충국사(南陽慧忠國師)라고 육조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조사님이 계실 때입니다. 이 어른이 국사로 계실 적에 그런 소문이 나서 인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혜충국사 말씀이 「소문을 들으니 스님께서 타심통까지 하셔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데 사실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 마음 좀 알아맞혀 보십시오, 자 그럼 내 마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혜충국사는 강가에 배를 타고 놀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국사님께서는 지금 아무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십니다.」 혜충국사는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대선사님이시고 일국의 국사님이 어떻게 원숭이하고 같이 노십니까?」 그때 혜충국사는 창경원 같은데서 보던 원숭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이번에는 다시 마음을 대 선정에 두시고는 「지금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알아맞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혜충국사에게 귀의하여 정법(正法)을 닦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만 알아도 안 됩니다. 우리가 흔히 체니 용이니 하고 말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게 자기 근본성품이다. 이것을 발견해서 깨달아 가지고 나중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알고 있고 이 반야경도 그렇게 새겨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실제로 체득하신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시다가 「얻긴 얻었지만 참말로 얻은 건 아니다. 그게 무실무허한 법이라 실로 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무한 것도 아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 또 하신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과거·현재·미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는 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오후 6시라면 6시 1분 뒤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니 미래의 시간이고 5시 59분까지는 지나갔으니 과거라 하겠고, 그러면 5시 59분 1초부터 6시 0초까지는 현재가 되는데 그 1분을 60초로 나누어 생각할 때 59분 30초가 현재라면 59분 29초는 과거고 59분 31초는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1초를 현재라고 하더라도 1초의 시간을 만분의 1초 백만분의 1초로 나누어 생각할 때는 그것도 현재라고 지적할만한 시간의 표준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므로 흐름의 연속일 뿐 어느 순간도 정지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시간이 흘러갈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의 물질이어야 합니다. 최소한 에너지라도 되어 가지고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너지나 물질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의 운동법칙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치하는 표준이 없으면 같은 한 시간이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의 움직임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므로 어느 순간을 가리켜 현재라고 할 만한 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과거나 미래는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진실 그대로를 말한다면 삼라만유의 모든 존재가 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것입니다. 물질 그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억한다는 말이지만 작년은 이미 작년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작년 365일 다 흘러가 버린 것이므로 작년이라고 하는 사실은 다 소모되고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을 현실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현실 현실하고 현실주의를 내 세우지만 우리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그 내용을 따지고 보면 사실 그런 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있는 것만이 현실이지 지나가 버린 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추억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어제를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제라는 것은 생각뿐이지 어제란 확실한 시간이란 게 없습니다. 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바늘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한 바퀴를 돕니다. 죽순(竹筍)이 밤사이에 한 길을 크지만 크는 모습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순이 크는 속도나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속도가 최고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어느 정도의 속도는 볼 수 있지만 속도 이전의 움직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프로펠러가 처음 돌기 시작할 적에는 확실히 보이지만 빨리 돌면 차차 안 보이다가 나중에는 동그라미만 보이게 됩니다.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되어가고 있으니 현실을 볼 수 없고 1초라도 머물러 있는 순간이 없어서 과거나 미래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뿐이므로 현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 본래의 형태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게 돌아가는 시계 바늘이 어떤 장소에 잠시도 머무르지 않듯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꾸 커가고 나중에는 없는 데로 자꾸 돌아가는 한 개의 과정을 보는 것이지 현실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볼 수 있는 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객관세계인 이 우주에는 현실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이 절대존재가 아니라는 확실한 안목을 가지고 현실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염세철학(厭世哲學)이 되어서 「염세다. 우상이다. 무상이다.」하여 현실을 무시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것으로 있는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중생들은 자꾸 속아서 고해의 길을 세세생생을 잘못 살아가게 마련인데, 이런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현실을 바로 살게 하며 속지 않게 해서 복과 지혜가 원만한 정토(淨土)의 참다운 현실을 살게 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런 뜻에서 현실이란 무엇인가 하고 뚜렷하게 말하자면, 현실이라 할 수도 없고 무엇이라 대답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덕산화상과 삼세심(三世心) 불가득

당나라 때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던 덕산(德山)스님이란 유명한 조사스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고 했는데,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공부한 이들은 모두 제 나름대로 주석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간단하면서 뜻이 한량없이 깊기도 하므로 불법 전체의 대의를 금강경에서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여기에 붓대를 듭니다. 그래서 팔백대가(八百大家)나 되는 많은 이들이 금강경 주석을 해 놓았는데 주금강도 자신이 직접 주석하여 짊어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남방에 육신보살(肉身菩薩)이 한 분 나왔는데 일자무식한 나무꾼으로 견성을 해서 그 종지를 크게 떨친다는 소문을 들은 주금강은, 「여러 백천만겁 아승지겁을 닦아서 구공을 얻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고 일체 경전에 쓰여 있는데 땔나무꾼이 견성을 하다니 그리고 또 쉽게 성불한다고 하니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마구니가 왔는가 보다. 내가 한 번 가봐야겠다.」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팔백여가를 집대성하고 자기가 쓴 것이 제일 완전하게 됐다고 하여 항상 「금강경은 나한테 물어라.」하며 돌아다니는 판인데, 육조대사가 나와서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여 부처님 뜻에 어긋나는 내용을 가지고 수많은 제자가 있다니 이들한테 항복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짊어지고 남방 양양 밑에 광동(廣東)으로 수만리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한 노파가 길가에서 호떡을 팔고 있는 집을 보고 「점심을 좀 먹어야겠으니 호떡 좀 팔으시오.」했습니다. 그 노파 말이 「호떡은 팔기가 어렵지 않은데 스님 짊어진 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 대해서 내가 의심나는 게 있는데 물어 보면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 금강경이라면 다 잘 알고 있으니 무엇이나 물으시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그걸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지금 내가 설명한 것처럼 우리 모두 삼세심뿐인데 이름이 삼세심이지 과거심 미래심뿐입니다. 그러니 삼세심이 불가득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듣고 있던 노파가 묻기를,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삼세심이 불가득인데 점심이라 하셨으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합니까?」하고 추궁합니다. 점심이란 배고프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에 점을 찍는다. 잠깐 요기한다는 말인데, 그러니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금강경 대강주(大講主)인 주금강의 입이 탁 틀어 막혔습니다. 과거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현재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말도 실수고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라면 자기 혼자 하는 판인데 그야말로 무식한 호떡장수 할머니에게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 호되게 방망이를 맞은 주금강은 태도를 고치어 「이 근방에 어디 선지식이 계신 절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용담선사(龍潭禪師)라고 아주 큰 선지식이 있습니다.」하고 가리켜 줍니다.

그래서 자못 심각해져 가지고 거길 들어가서 여러 가지 얘기 많이 하고 금강경 펴 놓고 그 얘기를 저물도록 하다가 어두워서 자기가 잘 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용담스님이 등불을 하나 켜 줬습니다. 덕산스님은 고맙게 받아서 들고 문을 열고 막 나가려고 하는 찰나에 용담선사가 등이 깨지도록 쳐서 불을 홱 껐습니다. 그 바람에 덕산스님은 확철대오해서 그 이튿날로 자기의 손수 쓴 금강경주석을 뒷산에 올라가서 다 불 질러 버렸습니다. 「내가 큰 죄를 지을 뻔했다.」고 그러면서 문자법사니까 글을 잘 새기고 불법종취(佛法宗趣)가 이렇다 하는 정도지 견성한 이가 아닙니다. 실상반야 없이 문자반야란 말입니다. 문자반야도 그대로 잘하면 문자견성(文字見性)으로 그 조리를 잘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껍데기만 해석하는 데는 잘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견성하면 그렇다 하더라, 부처가 되니까 이렇다 하더라.」하는 정도였지 실제로 자신이 깨달아 보지는 못했는데 이제 참 깨치고 보니 참 굉장한 이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선방에 가면 선지식 같은 이가 혹 견성을 했다거나 뭣 좀 아는 것같이 하는 학인이 있으면 이것을 물어 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덕산스님이 그 노인한테 호떡을 얻어먹었겠느냐?」는 겁니다. 과거심불가득·현재심불가득·미래심불가득이고 모두 불가득인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 그걸 대답하면 내가 떡을 거져드리고 그걸 대답 못하면 떡을 안 준다는 그 노파의 말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시험합니다. 인제 어떻게 해야 떡을 얻어먹겠느냐는 겁니다. 여기 꼼짝 못하고 떡을 내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숙제가 하나 더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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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經功德分 第十五  (0) 2018.09.11



究竟無我分 第十七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되 世尊(세존)하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發阿?多羅三?三菩提(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면 云何應住(운하응주)하며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하리이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當生如是心(당생여시심)이리니 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하리라 滅度一切衆生(멸도일체중생)이되 而無有一衆生(이무유일중생)도 實滅度者(실멸도자)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이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이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於燃燈佛所(어연등불소)에 有法(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不(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하여는 佛於燃燈佛所(불어연등불소)에 無有法(무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득라뇩다라삼먁삼보리)하니이다 佛言(불언)하사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有法(약유법)하야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者(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일댄 燃燈佛(연등불)이 卽不與我授記(즉불여아수기)하사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야 號釋迦牟尼(호석가모니)련마는 以實無有法(이실무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새 是故(시고)로 燃燈佛(연등불)이 如我授記(여아수기)하사 作是言(작시언)하시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야 號釋迦牟尼(호석가모니)라하시니라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卽諸法如義(즉제법여의)니라 若有人言(약유인언)하되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면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佛得阿?多羅三?三菩提(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於是中(어시중)에 無實無虛(무실무허)하니라 是故(시고)로 如來說一切法(여래설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言一切法者(소언일체법자)는 卽非一切法(즉비일체법)이라 是故(시고)로 名一切法(명일체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譬如人身長大(비여인신장대)이니라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世尊(세존)하 如來說人身長大(여래설인신장대)는 卽爲非大身(즉위비대신)이요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도 亦如是(역여시)하야 若作是言(약작시언)하되 我當滅度無量衆生(아당멸도무량중생)이라하면 卽不名菩薩(즉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이 名爲菩薩(명위보살)이니 是故(시고)로 佛說一切法(불설일체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라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作是言(작시언)하되 我當莊嚴佛土(아당장엄불토)라하면 是不名菩薩(시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莊嚴佛土者(여래설장엄불토자)는 卽非莊嚴(즉비장엄)이요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通達無我法者(통달무아법자)면 如來說名眞是菩薩(여래설명진시보살)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이와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여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된 자가 없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것은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아는 바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곧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서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인데,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하셨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은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가운데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하기를 「일체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이름이 일체법이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아주 큰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이옵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일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노라.」하고 말하는 이라면 곧 보살이라 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도 두지 않는 것이 보살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살이>도 없고 <오래산다는 것>도 없다.」고 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노라.」하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곧 보살이 아니니, 왜 그러냐 하면 여래께서 말씀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없는 진리를 통달했다면, 여래께서 「참으로 이것이 보살이라」 말하리라.』

 

 

第十七 究竟無我分--마침내 나 없다

 

[科 解]

여기서는 처음에 선현기청분 제2(善現其請分 第二)에서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던 금강경의 최초의 문제이며 근본문제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심한 이가 「어떻게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냐」에 대한 법문을 다시 한 번 여쭈어 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법문을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되풀이하여 여쭈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은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한 번뇌망상 속의 범부들이므로 「마음을 가지는 법과 번뇌망상 항복하는 법」을 한두 번 말씀했더라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 요령과 핵심을 마음 깊이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거듭 여쭈어 본 것입니다. 수보리존자는 아공·법공·구공의 도리를 남김없이 완전무결하게 깨달으신 해공제일(解空第一)의 부처님 상수제자(上首弟子)이시므로 이미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의 닦는 길을 다 알고 계시지만, 그렇지 못한 당시의 대중과 미래 중생들을 위해 거듭 여쭈어 보는 것이며, 동시에 <항복기심>하고 닦는 자가 누구인가를 거듭 밝혀 주시기를 여쭈어 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량중생을 제도 하셨지만 한 중생도 제도되었음을 보지 않으시니 보살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의 대의를 말씀하시고,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일체법이 다 불법이어서 마침내는 불법이니 일체법이니의 구별이 없으며,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도 없다는 말씀을 차례대로 연결하여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말씀하신 금강경 상권을 종합정리해서 함축성 있게 말씀해 주신 것이 이 <구경무아분>입니다. 발심한 <나>도 없고 중생을 제도한 <나>도, <중생>도 없어서 이 <무아>의 진리를 통달해야 한다는 뜻으로 <통달무아분>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解 義] 그때 수보리께서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마음에 머물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하겠습니까?』하고 사뢰었습니다.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려면 이렇게 새길 수도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것을 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토를 그렇게 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려고 하면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며 어디다 그 마음을 두며 어떻게 우리가 한량없는 번뇌망상을 항복 받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나중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여쭈어 본 것으로 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범부로서 불교가 지금 어디가 붙었는지, 견성한다는 것이 무엇을 깨닫는 것인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묻는 소리인데 범부로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는 있습니다. 견성하기 전에 선지식을 만나고 훌륭한 법사스님을 만나 가지고 지도를 받아서 「아! 이 말하고 말 듣고 하는 이것이, 배고프면 밥 생각하는 이것이 영원불멸의 <참 나>의 존재이겠구나.」 이렇게 알아서 아직 깨치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그렇게 믿을 수 있도록 이론을 배웠다고 하면, 그래서 「사람이 다른 거 하는 것보다 견성을 해서 해탈해야 하겠구나.」하는 도리를 확실히 알았고 「지금 말하고 밥 먹고 남과 싸우고 온갖 짓을 다 하는 이것이 곧 이미 성불한 것이로구나.」하는 이런 이론에 아무 의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역시 범부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얻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것을 확실히 안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40여년 동안을 이렇게 횡야설 수야설(橫也說竪也說)로 해서 잠시도 쉴 새 없이 말씀을 해서 남겨 놓으신 것이 대장경(大藏經)입니다. 그래서 자꾸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설명하지만 못 알아차리니까 말씀을 하셔서 자꾸 여기까지 몰고 오는데, 이제 내가 어지간히 알기는 알았는데 한 부처님 뜻을 확실히 알아서 내가 부처님한테 배운 것도 없고 증득한 것도 없고 확실히 내가 그렇게 된 줄 알고 있는데, 그래도 행여나 싶어서 한 번 더 여쭈어 보는 겁니다. 내가 혹 어디 결점이 있나 하고 조심하는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정신자세가 돼야 할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수좌들은 완전히 알았다 싶어도 또 선지식한테나 도인 스님네 한데 또 물어 보고 물어 보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소리를 가지고 이리도 묻고 또 달리도 물어보고 같은 소리로 또 물어 보기도 하고 이런 것이 그게 참 조심성 있게 공부하는 태도입니다.

호리유차(毫厘有差)면 천리현격(千里懸隔)으로 약간만 틈이 있어도 천리가 멀어지는 것이니 부처님 성불하는데 그만 뒷걸음이 됩니다. 또 하나는 나는 위대한 법을 똑바로 알아듣고 깨달았지만 후세의 중생들이 내가 깨치듯이 깨칠 수 있을까? 그게 염려되어 또 물으시고 부처님께서 되풀이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은 다른 것 같아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시아문부터도 내내 그 소리가 그 소리인데 그게 모두 조금조금 달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렇게 법문을 들을 때는 그럴 듯해도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그냥 탐진치로 중생심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좋은 거 궂은 거 우리가 구별할 수 없는 건데 평소에 좋은 거라고 생각하던 게 앞에 나서니 관습적으로 좋다는 생각을 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 볼 때에 보기 싫다는 미운 생각이 앞에 나와 놓으면 미워하게 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산림을 하기 전이나 마찬가지가 되니 육두문자(肉頭文字)로 금강경 들으나 마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제자나 가르치는 스승이나 이 수보리존자처럼 이렇게 묻고 저렇게 대답하고 하여 철두철미하게 해야 합니다.

 

原 文 :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 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 已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解 義] 수보리존자가 마음 가지는 법과 번뇌 항복 받는 법을 다시 또 여쭈어 본 데 대해 부처님께서는 앞에서와 똑같이 대답하신 것입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마땅히 한 중생도 남기지 않고 일체 중생을 다 제도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 같은 분은 처녀 때 이런 법문을 듣고는 어디를 가다가 옷을 벗고 떠는 거지를 만나서 옷을 홀딱 벗어 줍니다. 그리고 자기는 벌거벗은 나체의 몸을 남한테 보일 수 없으니 땅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몸을 감추었다고 해서 <지장보살>이라고 합니다.

중생도진아성보리(衆生度盡我成菩提) 「중생을 다 제도해서 마친 뒤에라야 내가 대보리를 증득하리라」하는 원리입니다. 지장보살은 일체 사생육도(四生六道)의 분신(分身)으로 변화신(變化身)까지 나타내시어 제도하시지마는 치우쳐서 지옥을 많이 가십니다. 지옥 문 앞에 딱 섰다가 들어가는 중생보고 개심(改心)을 시켜서 알아듣고 착한 생각 내도록 해 가지고 도로 인간 세상이나 천당에 올라가게 하는데 그렇게 내 보내 놓으면 금방 눈 깜박할 사이에 또 되돌아오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문전에 지장보살이 눈물 마를 새가 없다고 합니다.

지장보살님처럼 우리도 보리심을 발했거든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다 제도하리라」고 마음먹고 또 「일체중생을 다 제도해 마치고 나서는 실로는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제도된 중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라.」 그러셨습니다.

대용맹심을 내서 인간적으로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되고 한 번 아무 생각 없이 되어 남보다 잘났다고도 안하고 뒤 떨어지려고도 안하고 무심경계에 들어가서 천지가 내 집이라 하는 게 도리어 약한 소리입니다. 천지가 그만 내 주머니 가운데 들어있는 이런 배짱으로 해야 합니다. 사실이 또 그런 것입니다. 밥은 아무데서나 얻어먹고 방방곡곡 다니며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일러 주어서 중생교화를 하지만 교화했다는 생각도 없고 교화한 중생도 없이 해야 합니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생각 없이 일하자」하는 간단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런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해서 마쳤지마는 다 제도된 걸 보고는 역시 「한 중생도 제도했거니」하는 생각을 안 합니다. 실제로 사실 중생이 제도 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解 義] 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했는데도 아무도 제도한 이도 없고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사람도 없는 까닭을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아상>이 있거나 <중생상>이 있거나 <수자상>이 있으면 이런 이는 곧 보살의 자격이 없는 때문이니,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이 없느니라.』

<아상> 하나만 있으면 밑에 삼상(三相)이 따라 나옵니다. 찰나에 연기법(緣起法), 곧 상대법으로 일어납니다. <나>라고 할 때 벌써 저쪽을 상대로 해서 또 저쪽 때문에 <나>라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저쪽과 동시에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생상>이 벌어지는 것이니 사람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단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서로 어울려 가지고 <중생상>으로 중생놀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또 칠팔십은 넘도록 살아야겠다고 또 살 것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 그게 <수자상>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까 아무리 견성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보살하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야 보살이라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그게 만일 아상이 있을 때에는 무생법인을 증득한 채 그대로 중생이고 깨쳐 놓은 그게 그만 사도(邪道)가 됩니다. 그러니 불법 깨친 게 아니라는 그말인데, 이런 것은 용심(用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금방 사도가 됐다가 번쩍 정도가 됐다가 들락날락하는 게 초심보살(初心菩薩)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수보리야! 「사실 어떤 법이 있어서 그런 발심을 할만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만한 그런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어떤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고 어떠한 발심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본래부터 보리심 발했다, 나중에 견성해야 보리심 발한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확실히 될 때에야 사실 보리심이 증득된 것이다」하는 말은 했지마는 사실 그런 법은 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 이유를 누가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대중대답생략>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 겁전의 과거세에 연등불(燃燈佛)한테 법문 듣고 발심해서 견성하고 수행해서 성불했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어떠냐?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에 대해 수보리존자는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이것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다.」하고 내세울만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석존께서 범부 때 처음으로 연등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적도 있지만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전이고 도깨비 소리를 도깨비가 들은 것이며 꿈 속에서 꿈 사람이 꿈 얘기 하는 것이니, 꿈 가운데 부처, 꿈 가운데 중생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닙니다.

석존께서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 전의 과거 연등불한테 법문 듣고 발심 수행하고 참선해서 견성했습니다. ‘일체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부처다. 그러니까 법문 하신 법문도 없고 법문 들었다고 하면 나는 벌써 도깨비 말을 들은 것이니, 도깨비 말 듣고 도깨비 사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한 가지는 정리가 되어야 할 판인데 이런 얘기는 뚝 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뚝 떨어진게 글자 한자 한자를 전부 다 그렇게 배우고 나면 자꾸 그 뜻을 외워야 합니다. 하루 한 번씩이라도 경책을 펴지 않고 외우게 되면 그때는 눈을 감고 앉아서 「여시아문하사오니」이렇게 죽 외워야 합니다.

이때 「여시는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고 이건 참 뭐라고 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 있겠다」하는 걸 배웠습니다. 그런 <여시>자 부터 끄덕이면서 읽어야 합니다. 「참 그렇다. 부처님한테 옳은 말씀 들었고, 세상 어디를 다녀 봐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몇 억만생을 살면서 오묘한 진리의 법문 처음 듣는 법문이로구나. 꼭 그렇겠구나.」 하면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原 文 : 佛告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 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是故 燃燈佛 如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解 義] 수보리존자의 대답을 들으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그렇고 말고, 옳은 말이다. 수보리야!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만일 내가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네가 참 불법을 바로 깨달았으니 이 다음 세상에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되어 팔만사천 법문의 법문의 장광설(長廣說)을 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고 <수기>(授記)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실로 얻은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불께서 나에게 예언하시기를 「네가 이 다음 세상에 많은 보살행(菩薩行)을 닦아서 무한한 공덕을 쌓고 사바세계에 나아가서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되어 그 첫 번째 법회에서 다섯 비구를 설법하여 도를 깨닫게 하고 또한 많은 중생을 제도 하리라」고 <수기>를 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왜 내가 얻은 게 없기 때문에 그 수기를 받게 됐다.」고 하겠는가. 내가 얻은 게 있으면 불법적멸(佛法寂滅)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니 수기를 줄 수 있습니까?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불법과는 십만 팔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저 밖에 일주문(一柱門) 안에는 못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테 보시도 안하고 지계 . 수행도 다 집어치우느냐 하면 그건 또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안 한다고 하면 복도 안 짓고 열반에만 주하는 나한이니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자기가 진보했다 하더라도 중생제도를 안 한 사람이므로 불법을 성취할 수 없고 또 그건 발심 못한 사람이며 이생기심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불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시 발심해야 하고 일체중생을 아무 생각없이 제도해야 합니다.

일체보살이 즉비보살 시명보살(一切菩薩 卽非菩薩 是名菩薩)로 모든 보살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는 것이며, 일체세계가 즉비세계니 시명세계(一切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곧 일체 우주는 곧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우주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래께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안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법신에도 육신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왔다 하면 법신에 치우치고 열반 . 적멸에 치우친 것이며, 안 왔다 하면 현상계 . 중생세계에 치우친 것이 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둘 다 분별 못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해서 성불하는 부처님한테도 뜻을 두지 말고, 또 그렇다고 해서 망상 탐진치에도 이끌리지 말라, 거기에도 뜻을 두지 말라, 만일 마음을 생사나 열반이나 어느 한곳에 주하거나 하면 그것은 한쪽에 떨어진 것이니, 하나는 없는 데 떨어지고 하나는 있는 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응무소주(應無所住)가 아닙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 如義

 

[解 義] 부처님께서 실무유법(實無有法)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여래>(如來)의 뜻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왜그러냐 하면, 여래 곧 불께서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있으면 수기를 안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래(如來)라 함은 같다는 뜻인데 한문 5만자 가운데 하필 왜 여(如)자를 놓았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글자는 같을 여(如)자 인데 같다는 말은 첫째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제도 그 모양, 오늘도 그 모양, 내일도 그 모양, 늙기 전에도 그 모양, 늙은 뒤에도 그 모양, 죽은 뒤에도 그 모양, 여기 사바세계에 있을 때도 그렇고 극락세계 갔을 때도 그렇고 성불해 놓아도 그것이어서 안 변한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게 같다는 말이고 같다 하는 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게 또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뜻입니다. <여래> 이 두 글자에 불법의 뜻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하고 많은 글자 중에 이 두자를 갖다 놓았을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꾸 같아서 참말로 같다는 말이니, 이 <여>라는 건 물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요, 엄연한 진공도 아닌 이 말 듣는 그 자리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이것도 움직일 수 없는 건데, 이건 허공 보다도 더 없는 겁니다. 그런데 래(來)는 <올래>(來)자이니 온다는 뜻인데 변동을 할 수 없는 그게 어떻게 오고가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는 것 같으면 오고가고 하겠는데 없는 것이 오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 그러고 보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고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이러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그게 그런걸 주장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기도 하고 앖어지기도 하니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니 여기 온거다. 그러니 오고가는 자체가 있어서 여기에 오는 게 아니라 와도 온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이 <여>는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말이니 이 온다는 말이 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는 게 곧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오는 거라고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래는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다」하셨는데, <여래>(如來)란 <여>는 모든 법이 <여래>(如來)하다는 뜻이므로 부처님께서 성불하셨기 때문에 성불해서 오되 그 <여>가 왔지 온 걸로 온 게 아니다. 그래서 일체법이 다 그와 같다(諸法如意)고 한 것입니다. 곧 모두가 불생불멸한 존재라는 뜻이니 이것도 이 초도 불멸(不滅)이라는 것입니다. 초를 여기다 켜 놓으면 한 치 이상 탔지만 하나도 안 탔다는 것입니다. 이 초는 공장에서 만들기 전에 여기 벌써 서 있는 것이고 공장에서 만든 초가 온 게 아닙니다. 여기서 타는 것은 본래 있던 게 타고 있는 것이고 타도 타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장에서 초를 가지고 온 것 같지만 사실은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착각으로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법여의이며 이번 금강경 살림을 통해서 그런 것 쯤은 누구나 쉽게 알 게 됐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금강경을 이렇게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또 되풀이하고 이러는 데 따라 한국 불교가 바로 됩니다. 이것이 참 기도이고 부처님께서 춤을 추실 것입니다.

 

原 文 : 若有人言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解 義] 부처님께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를 얻었느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그 법은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망한 것도 아니니라.』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시방세계에다 공포하고 떠들었지만 설사 내가 그렇게 선전하지 안했더라도 내가 깨달았다는 것 때문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다 아신다. 사실 또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없는데 그렇지만 또 얻긴 얻었지만은 얻은 그게 실지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라」고 하셨으니, 없다 해 놓고 있다고 했다가 하여 이리저리 잡아 떼십니다. 「실도 없고 허도 없어서 참말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 했으니 얻었다는 말씀도 이상한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말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셨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긴 얻었는데 그 얻은 것이 내용으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무인무과(無因無果)이니 그러기 때문에 또 일체만법이 그대로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됩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아무 쓸데 없는 경이니, 그러기 때문에 누가 경을 밟으려고 하면 우리가 밟지 못하게 말립니다. 가만히 있으면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니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내 목숨이 죽었으면 죽었지 경전을 어무렇게나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불법이 즉비불법이니 시명불법(一切佛法 卽非佛法 是名佛法)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는 얻었는데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헛 것도 아니다.」 하는 말씀은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얻었다는 말이 참 심원(深遠)한 뜻이 들어 있어서 깊다면 한량 없이 깊은 것이고 얕다면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이 깊이가 없는 도리입니다. 그러니 발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이름만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니 그것은 정법(正法)도 아니고 사법(邪法)도 아닙니다. 여기 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다 가실 줄 압니다만, 그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한다.」한 이 말씀은 또 엉뚱한 말씀이고 생소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은 염주 알을 차례대로 쭉 꿰듯이 그 조리가 딱 들어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알아 듣는 사람은 틀림 없이 성불합니다. 이런 사람은 머리깍고 중이 되거나 농사하고 장사하는 신도로 있거나 성불 안 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49년 설법하신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됐는데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는 말은 세속의 법도 불법이고 출가의 법도 불법이라는 말이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불법이고 초도 불법이라는 뜻이며 또 불법이란 그 말은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 됩니다. 근본 마음자리가 불교라는 그건 한쪽 얘기는 다 됩니다. 물이 파도고 파도가 물이라 해서 우리 탐진치 번뇌망상이 직접 보리와 열반이라 그런 말이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 다른 것이 아니며(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현상계와 본체계(本體界)인 마음의 경계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다운 것도 허망한 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설사 중생들이 싸운다 하더라도 싸우고 싶은 마음을 내는 그 자리는 변동이 없으니 그러므로 이 자리에선 싸운다는 것이 불세계에서 싸운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자리 하나만 얘기하는 데는 통과가 되는데 일체법(一切法)이라고 할 때는 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부처가 되는 불법과 생사법과의 두 가지를 말해 왔습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다 읽고 성경 . 도덕경(道德經) 아무리 해 봐야 그것은 다 생사법이고 세속법이어서 생사 안에 있는 일일 뿐입니다. 과학이니 심리학이니 철학이니 다 생사법이지만 오직 그렇지 않은 것은 불법입니다. 팔만대장경 어디를 펼쳐 보든지 생사 밖에 일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들은 게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얘기이고 확실히 선도를 행하는 근본 . 실상(實相) 자리이고 아무 생각없는 이것이 모든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성인이 될 마음으로 발심해서 중이 되도록 수도해서 불쌍한 중생제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늙은 때나 젊은 때나 변하지 않는 이 자리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자성자리가 착한 마음을 내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해서 복을 받고 악한 생각을 내 가지고 악한 행동을 해서 고생을 하니 인과가 다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선할 때나 악할 때나 한 사람이 하지 두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건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악도 선도 아니니 아무것도 안 하는 가운데서 악은 안 하고 선만 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풍(家風)이니 이렇게 해서 복과 지혜를 닦아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악한 생각을 내어 극악하게 되면 서울 사람 다 때려 죽이는 그런 짓을 능히 하는데, 이런 생각이 다른 데서는 나올 곳이 없습니다. 육체에서도 나올 수도 없고 나만 알지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면 무었이냐?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실재이고 실상 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문제이고 말로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체법(一切法)이라는 것은 유정무정(有情無情)을 다 통해서 하는 소리인데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것은 다 공한 것이고 실재(實在), 곧 실상자리의 그림자라고 하지만 이 초 대 현상계의 근본 도리를 이대로 불법이락고 할 때에는 조금 아름해집니다. 이것도 온갖 생각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나>로부터 나왔고 실상자리인 여(如)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듯이 만법 이대로 다 불법이라는 도리도 설명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논법 역시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解 義] 부처님께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소언 일체법자(所言一切法者)는 일체법이라 하는 것은 즉비일체법(卽非一切法)이니, 곧 그것이 일체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걸 일체법이라 이름했다.』 하셨습니다.

「일체법이 불법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삼단논법이 딱딱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비유로 그 실례를 하나 들면, 사람 몸뚱이가 굉장히 커서 9척 장신만하다든지 백두산만하다든지 그렇게 몸뚱이가 큰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비유도 이상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보리존자의 대답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뚱이가 큰 것을 보고 크다고 설명하신 것은 곧 몸뚱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을 큰 몸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과 수보리존자가 물으시고 대답하시는 내용이 시비사정(是非事情)에 척척 잘 들어맞습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결국 따지고 보면 물질적 요소로 묘하게 만들어진 구성체(構成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적 현상은 본체를 캐어보면 아무것도 없는 공한 것이므로 그것을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실체(實體)를 보지 못하고 거짓 모습인 겉만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또 크다는 것은 작은 것에 비유해서 하는 소리고 작다는 것도 큰 것에 비유해서 하는 소리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설사 지구만하고 우주만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수보리존자는 여래께서 크다고 하신 말씀은 큰 몸이 아니라 이름을 크다고 하는 것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다 비유로 하신 말씀이고 실제로 크다는 뜻은 아닙니다.

 

原 文 :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 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解 義] 『수보리야! 보살이 또한 이와 같아서, 보살의 사상 . 내용 . 정신 가짐 곧 소주지처(所住之處)가 이와 같고 마음 항복하는 법이 이와 같아서 만일 어떤 보살이 「내가 마땅히 한량 없는 중생을 제도 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곧 보살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보살의 용심(用心)을 설명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사실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성취해야 보살이다 할 만한 내용이 없다. 이렇고 이런 것이 보살이다, 초견성(初見性)을 해야 보살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체득해야 보살이다 그러는데 어떤 내용이 마하반야바라밀이냐 하면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법에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 살림살이>도 없고 <오래 살려니 하는 생각>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느니라.』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解 義] 부처님께서 또 보살이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세계를 이루는 것도 없는 가운데 무심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은 말을 하기를,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다. 자꾸 공부를 하고 정진을 하고 보시하고 지계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서 내가 사는 세상이 모두 극락세계처럼 되고 천상국토가 되어 장엄되고 있다. 지옥을 가도 불세계요, 천당을 가도 불세계요, 오탁악세도 불세계요, 우리 중생의 사바세계가 모두 불세계다. 내가 중생일 때에는 모두 험악한 세상이 되고 모진 고통과 불평과 불안과 고독함만 느끼던 험한 세상이더니 이제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건 보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부처님께서 불국토를 장엄하신다는 말씀은 곧 장엄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엄하는 생각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無心)히 체득되어 있기 때문에 생사나 열반에 주하지 않고, 불법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생법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지 그걸 발견해야 할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심하기 때문에 없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꾸 업장이 녹아 없어지는 동시에 중생되기 전 미하기 전에 본래 있던 불세계가 자꾸 드러나는데 이것이 굉장한 장엄입니다. 굉장한 화장찰해(華藏刹海)의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으면 절대 그런 화장찰해의 불세계가 안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장엄한다는 게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는 그걸 가지고 장엄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장엄도 아닙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장엄이 되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解 義] 부처님께서 이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의 결론으로 <무아>(無我)를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나>없는 진리를 확실히 통달하면 그래서 「육체가 내가 아니로구나」하는 진리를 통달하면 그것이 참된 보살이니라.』하셨습니다.

온갖 지식이나 사상이 모두 망상이고 과학자니 철학자니 하는 사람들 정신 빠진 사람들이어서 뭐가뭔지 모르고 도깨비 얘기하고 글 써 놓은 것이니, 만일 그것을 내가 배웠다면 그래서 내가 대학에까지 졸업하고 석사 . 박사가 됐더라도 그것은 모두 가질 바 지식이 못되니 다 포기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일자무식인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걸 내가 옳게 배웠다고 남에게 얘기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식도 버리고 버릴 것 다 내 버려서 버릴 망상이 없어진 상태의 번뇌장(煩惱障)이 아닌 소지장(所知障)까지 다 버리고 나면 이런 거 딱 떼어 놓고 보니 정말 참 통달무아(通達無我)입니다. 진실한 마음자리 이것은 <나>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또 불법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무아법(無我法)인데 그러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참선도 하고 경전도 보고 염불도 하고 모두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통달무아하면 그게 정말 진실한 보살이다. 틀림 없이 성불해 가는 사람이다. 정말 내 제자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 없이 공연히 머리만 깍아 가지고 「중입니다.」하고 「신도입니다.」 그래봤자 정말 큰 일 납니다.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집니다. 머리를 깎지 않아 껍질까지 다 깎았더라도 큰일납니다.

 

 

[說 義]

 

▶ 부주열반 부주생사

「그 마음을 어떻게 두고 어떻게 가져야 하며 번뇌 망상을 어떻게 항복 받느냐?」(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하는 데 대해서 이론적으로 「내가 꼭 불법을 체득해야 하겠다. 확실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증득해야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결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묻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또 실제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초심보살(初心菩薩), 곧 견성한 입장에서 묻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는 도리를 여러 백번도 더 말했지만 이것은 생사에도 주하지 말고 열반에도 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말 진실하게 발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까딱하다가는 열반에 주하지 않으면 생사에 주하거나 두 군데 다 주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가 대아라한(大阿羅漢)이니 욕심을 떠난 아라한 가운데 제일 가는 이욕아라한(離欲阿羅漢)이라」고 하셨듯이 수보리존자는 이미 팔만사천대겁(八萬四千大劫)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일초 동안에 지나간 것처럼 잠깐 지낼 수 있는 공부가 된 분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는 열반에 들어가 있지만 나는 나한이라는 생각도 없고 이런 걸 증득했다는 생각도 없고 생각 없다는 것도 없고 그런 줄 알고 앉아 있는데 그렇게 된 수보리를 지금 아상 . 인상 . 중생상이 있다는 걸로 부처님께서 몰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보고 저렇게도 말해 보고 갖은 짓을 다해 가지고 수보리가 알아챘습니다. 이제는 생사열반에 주하지 않고 그리고 나한들처럼 중생제도 집어치우고 염세주의자로 앉아 있지 않고 이제는 보살행을 해야 하겠으니 세상에 나와 보시도 하고 계행까지도 낱낱이 잘 지켜서 여자를 대하여서도 아무 생각이 없이 지킬 수 있는 분이 된 것입니다. 나한만 되면 일체 생각이 뚝 끊어지지만 이 현상계 생사고해에는 안 나가려고하여 열반에 애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진짜 열반이 아니다. 진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도 아니고 생사도 아니고 부주열반 부주생사(不住涅槃 不住生死)하는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게 어떤 것이냐, 한 생각도 없는 열반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망상 번뇌에도 머물지 않고 그러면 그런 보살의 주체가 어떤 것이냐? 그것은 지금 자꾸 따지고 캐내려는 게 그겁니다.

일체 중생이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중생이고 또 일체 부처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고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고 이러는 것이 지금 열반에도 주하지 않고 생사에도 주하지 않는 그걸 알아차리도록 하느라고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다.」 하는 말이 여기저기 도 주하지 않고 지도한다는 그 말인데 이 말이 어디로 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 자셔야 자신거죠

생각으로 아무리 생각해 봤자 될만큼 되고는 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러니저러니 망상 내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해라. 망하든지 흥하든지 집착할 것 없이 농사짓게 되거던 농사짓고 장사하게 되거던 장사해야 합니다. 흉년이 들던지 풍부하게 되려는지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볏단 거두어 놓고도 그렇고 타작 다 해서 곳간에 들여 놔도 그런줄 알고 하면 아무렇게 해도 안심이 되는 겁니다.

여기 인과를 믿는 기이한 얘기가 있습니다. 스님이 상좌를 하나 뒀는데 이 상좌가 꼭 스님에게 어겨서 반대로 말을 합니다. 무슨 뜻이 있는 말인데도 그렇게 합니다. 봄에 산 한쪽에 밭을 일구어 가지고 모밀을 갈았는데 그것을 갈아 놓고 와서는 「야, 야, 금년 가을에는 모밀은 실컷 먹겠다.」 그러면 그 상좌는 「자셔야 자신거죠.」하고 빗대서 대답합니다. 「네, 그렇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마음이 편할 건데 이것도 수양이 덜 돼서 그런 겁니다. 「저놈이 꼭 내가 말을 하면 긍정을 안하고 반대로만 하고 고약한 놈이다.」 속을 썩입니다.

그 뒤에 모밀이 꽤 커서 김 매고 거름을 뿌려 주고 나서 「이만큼 잘 됐으니까 가을엔 꼭 먹는가 보다.」 이러니까 이놈이 또 「암만 해도 자셔야 자신겁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은 옳아서 나무랄 수도 없고 속으로만 꽁해 가지고 그럭저럭 모밀이 다 익어서 다 베어가지고 와서 타작해 가지고 마당에 널어 놓고는 두들기면서 스승이 하는 소립니다. 「인제 내년까지는 잘 먹겠다.」 「암만 그러셔도 자셔야 자신거지요.」 그 말은 그렇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어른 대접을 하여야 할텐데 속이 상해서 빨리 말려 가지고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는 「오늘 저녁은 많이 먹어 놨구나.」하니 상좌가 또 「암만 그러셔도 자셔야 자신 겁니다.」 반죽을 하고 물을 뿌려 가며 연방 누루면서 「참 오늘 저녁에 냉면 한 그릇 잘 먹겠구나.」 「암만 그려서도 자셔야 자신 거지요.」 그래서 이놈 봐라 두고 보자 하고는 냉면을 실제로 좋은 동치미국에다 말아 놓고는 「너도 냉면 먹고 나도 이렇게 참 냉면 한 번 잘 먹는 게 아니겠느냐?」하니 역시 「그래도 자셔야 자」 거지요.」 그래서 냉면 그릇을 밀뜨리면서, 「이놈의 자식 어른을 놀리느냐?」 그러니까 「보십시오 자셔야 자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 말이 옳은 겁니다. 세상에 믿을 게 하나도 없는거지요, 그게 스님이 아이한테 딸리는 겁니다. 인격적으로 모자라고, 하는 것도 딸리고 생각도 딸리고 아이가 웃을 일입니다. 스님도 그런 줄 알고 말이 옳은 줄은 첫마디부터 알긴 알지만 내가 어른이라는 그런 <아상>이 있어서 그 <아상> 때문에 그러다 결국은 그만 국수를 못 먹었습니다. 「아 ! 거 네말이 옳구나.」 그랬으면 마음이 편히 지냈을 건대 서로 안 지려는 <아상> 때문에 둘이 똑같긴 같습니다. 나중에는 생기든지 말든지 사발이 깨질 때 깨지더라도 농사를 또 부지런히 지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누가 먹더라도 그것도 먹는거니 아무 생각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누가 먹도라도 그것도 먹는거니 아무 생각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장사를 하고 오고가는 데도 난리가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남이 뛰면 나도 뛰어서 피난간다고 가도 그게 죽으러 가는 건지 어떻게 압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갑니다. 중국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집 외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산에 들에 놀러 다니다가 좋은 천리마(千里馬)를 얻어서 기뻐하니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한테 와서 좋은 경사(慶事)라고 치하를 하러왔습니다. 그러니 그 영감도 「먹어야 먹는 거라」 는 사미 모양으로 「어찌 그게 화근(禍根)이 아닌 줄 알겠느냐」 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모두 인사 간 사람들이 싱거워졌습니다. 수천 냥짜리 좋은 말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타고 밤이고 낮이고 만날 좋다고 돌아다니다가 나무에 걸려 떨어져 가지고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동네 사람들이 「그 영감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다리가 부러질 것을 미리 알고 대답한 것 같았다.」 고 하면서 모두들 가서 「참 안 됐습니다.」 하며 위로하니까 그 영감 말이 「그것을 어찌 복의 근본이 아닌 줄 알 수가 있겠느냐?」 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 놈의 영감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말은 어찌 저렇게 하느냐고 투덜거리며 모두 돌아갑니다. 그 뒤에 난리가 나서 젊은 사람은 다 군대에 불려 나가는데 그 아들은 군대를 안 갔습니다. 이때는 다리가 부러진 게 덕이 됐습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때그때 어떻게 됐다고 해서 그게 아주 망하는 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거고, 지금 한참 잘된 것이 나중에는 큰 화근이 되어 백 년 살 것을 십년도 못 살고 죽는 일이 생겨 날지도 모르는 겁니다. 좋은 일이 아무리 생겨도 그것을 좋다고 생각 안 하고 아무리 지금 불행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도 나중에 복 받을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오히려 조작이 붙은 속입니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 도대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 무소주(無所住)입니다.

 

▶ 현실은 마음의 그림자

옛날 공자나 맹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장자 남화경(南華經)이나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많이 보든지 하면 마음이 벗어납니다. 이 인간 세상살이에 꽁꽁 얽매여서 그만 장아치로 사는 게 중생인데 이것을 털고 세상을 훨훨 살아 보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람이 일을 거칠게 하느냐 하면 안 그럽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일을 야무지게 합니다. 몸을 아끼지 않으니까 종일 일해도 피곤을 모르기 때문에 훨씬 잘 합니다. 또 억세다 하더라도 이제 무심한 사람처럼 억센 사람이 없습니다. 무심해야 이렇게 끝까지 나오는 기운이있지 무심치 못하고 무슨 조건이 붙어 가지고 있는 사람 같으면 그렇게 최후까지 큰 힘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무심한 사람이 되면 그 마음이 무한 동력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명대사(四溟大師)께서 처음으로 승려의용군(僧侶義勇軍) 육천명을 데리고 수십만 왜군을 평양서 부산까지 밀었습니다. 일본사람 가등청정(加藤淸正)이고 누구고 만나는 대로 칼을 다 빼 놓고 갑니다. 그런 이는 다 마음을 깨친 높은 도인이니까 생각하는대로 제대로 됐지만 대중 범부는 이런 금강경 법문을 듣고서 마음을 쉬어 버리면 훨씬 편해집니다. 조그마한 생각들 그 개미 생각, 개미 발톱 같은 생각, 오냐오냐 만날 해봐야 뭐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밤낮 해 봐야 나한테 돌아오는 것은 밥 세 그릇 뿐이지 아무 딴 것이 없습니다. 밥 세 그릇 옷 한 벌 밖에 아무것도 더 되는 것도 없는데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이 괜히 동네 사람이 다 굶어 죽어도 밥 한 그릇 안 내 놓으려 하고 거기에 애착이 돼 가지고 행여나 죽을까 싶어 그러니, 이렇게 사람이 궁색하게 비열하게 살 게 뭐 있습니까? 여기 중들이 걸망 하나 지고 돈 없이 다니는 그런 사람을 운수객(雲水客)이라 하는데, 구름 같고 물같은 손님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절도 내 집이 아니라 잠깐 여기 와서 공부하고 가는 곳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옆에 도반(道伴)이 감기 몸살을 앓든지 중병을 앓든지 하여 한달 두달 앓고 이러면 우리가 전부 약을 끓이고 혹시 어떻게 쓰려고 감추었던 돈 십원 . 백원 비상금을 모아서 한쪽에다 놓아 둡니다. 그래서 밤중이라도 약 지으러 가고 그래서 구원하게 됩니다. 약 지어 오면 내가 다리겠다고 제일 잘 다린다고 이러면서 하나같이 그럽니다. 그래 복 짓는 거고 내가 하심(下心)하는 것도 지혜를 닦는 거고 모두 이런 것입니다.

그래도 돈이 누구보다도 많은 건 누구인지 대중이 다 아는데 탐심이 많은 사람은 십원 한 장 없다고 안 내 놓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병이 들든지 그래도 남이 도울 수 없는 그런 장소에 가서 앓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비쳐 가지고 대중은 아무도 도와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옷도 한 두서너 벌 있으면 없는 사람과 나누어 입고 그런 사람은 아무데 나가서도 의식주 걱정이 안 됩니다. 또 서로가 그래집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 가운데서 인색하여 양말 한 켤레라도 떨어진거 꼭꼭 집어 넣어 쌓아 놓습니다. 당초 남한테 보이지도 않게 돌아앉아 일하고 남을 도울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은 평생 남의 덕을 못 봅니다. 인과는 틀림없이 그림자와 한가지입니다. 꼿꼿한 놈은 그림자도 꼿꼿하고 굽은 놈은 그림자도 굽듯이 꼭 그럽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어떤 귀부인들 스물 다섯명이 있었는데 인도 사람처럼 새까만 깜둥이고 눈도 코도 없고 무슨 흙으로 뭉쳐 놓은 것같이 이상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이 하나도 들리지 않고 거룩하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아 그게 인과가 있다. 과거에 저희들이 창녀들인데 그때 마침 어떤 나한이 바리때를 들고 다니는 길에 밥을 얻으러 그 집을 들르게 되었느니라. 그러니 창녀들이 되어 놓으니 남성 만났다고 놀리는데 얼굴이 못생겼다, 떨어진 누더기에다 거지처럼 꾸몄다, 아이고 얼굴도 못났지만 저렇게도 못났느냐 하며 온갖 흉을 다 봤습니다. 눈도 눈같지 않고 코도 코같지 않다고 하면서 갖은 욕을 다 했다. 그러다가 밥을 좀 달라고 그러니깐 복 지으려는 마음으로 공양은 서로 많이 줘서 바리때로 하나 가득 담아 올렸는데, 그러니 이 노장이 바리때를 들고 시방 삼보에 공양을 하고는 그 창녀들을 위해서 ‘오늘 나를 위해 공양한 인연으로 해서 죄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고서 마당 한 가운데서 바리때를 들고 공중으로 날라서 부처님 처소에 간 일이 있다. 창녀들이 그만 그 자리에서 놀래가지고 우리가 성인에게 잘못 했다고 하며 마당에 내려가서 무수히 배례를 하고 참회를 했다. ‘이제 그 과보(果報)로 한량 없는 지옥고(地獄苦)를 받은 뒤 그 나한 마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제가 죄짓고 자기발로 지옥에 들어가서 그 고생을 했고 아귀(餓鬼)가 되고 축생이 되어 돌아다니며 고생하다가 그래도 그때 참회를 하고 또 예배를 드리고 또 밥을 많이 올렸으므로 여럿이 나누어 먹었는데, 그 공덕으로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났고 참회한 공덕과 또 밥을 많이 시주한 공덕으로 이제 저 사람들이 부자로 사는 것이며 그때 나한을 비방했기 때문에 평생에도 내 얼굴울 보지 못한 것이다.』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던 대중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저 중생을 위해서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있다, 그때 그 나한이 대승불교를 해 가지고 보살이 되었으니 그때 나한으로 있던 그 이름을 부르고 백일기도를 하라. 그러면 나의 장륙금신(丈六金身)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이 참회를 하고서 곧 백일기도를 충실히 했더니, 기도 마치는 날 밤 꿈에 좋은 상서가 보이고 그 이튿날부터 부처님의 거룩한 얼굴을 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생의 죄업이 녹아서 마음의 나쁜 그림자가 사라져서 그렇다는 것인데, 이런 얘기가 마음을 항복 받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일체가 오로지 꿈

인생은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입니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 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입니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 입니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거지 성불 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입니다. 정말 실상(實相)자리에서 보면 본래 제대로 돼 있으니 누가 꿈꿀 사람도 없습니다. 조신대사가 눈 깜빡하는 사이에 눈 뻔히 뜨고 잠도 아니고 정신이 희미해진 것도 아니고 부처님 법을 배우려는 이 생각 그대로 팔십이 돼 버린 것입니다. 이건 깜빡 잠자는 순간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사실로 꿈에서 한 일이니 거짓말이고 헛일입니다. 그러므로 또 일초 동안에 꿈을 꾸어서 그 일초 동안에 했다는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했다는 것도 엮시 그런 내용이고 나중에 아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확실히 체득해서 부처가 됐다는 것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몽중지사(夢中之事)입니다.

그런데 몽중가외몽중몽(夢中可畏夢中夢)이라, 꿈 가운데 겁낼만한 꿈은 꿈 속에서 또 꿈꾸는 일입니다. 홋꿈도 겨운 일인데 꿈속에 또 한 겹 더 들어가서 또 꿈을 꾸니 언제 생사를 면할는지 그것 참 큰일 날 일입니다. 몽중막작몽중몽(夢中莫作夢中夢)하소. 꿈 가운데서 또 꿈울 꾸는 것은 아예 하지마소. 헛 꿈이나 꾸라는 것입니다. 일초에 일초돈파생사몽(一超頓破生死夢)하면 하루 아침에 몽땅 생사대몽(生死大夢)을 탁 부수고 나면 산하진처역무몽(山河盡處亦無夢)이라 산하대지 없어진 곳에 또한 꿈도 없어졌다. 전부 꿈만 가지고 마음 깨치는 글을 지은 시인데, 우리가 돌아다니는 이 현실이 모두 그런 형편이란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어떤 결정된 모양을 갖고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할 뭐가 있느냐?」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다 됐다고 하시지만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은 이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저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립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존재이고 제망중중(帝網重重)의 존재이고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완전합니다.

돌이 되고 바윗덩이가 되어 가지고 길 가에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돌이 아닙니다. 또 돌 중에도 완전한 돌이고, 바위 그대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그런데도 두들겨 부셔서 가루로 만들어 봐도 돌 가루지 그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망중중도 없고 그것도 하나의 신통(神通)입니다. 이미 중생이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있고 부처님도 역시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와 같이 아무리 나무를 쪼개 봐도 오동나무는 오동나무고 감나무는 감나무지 오동나무 속에 감나무 성질이 안들어 있고 돌은 돌이고 나무는 나무입니다. 우리 중생과 똑 같이 신통을 부립니다. 그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그게 단불(單佛)이냐 하면 단불이 아니고 제망중중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체가 곧 하나로만 보이고 하나가 일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 결정할 수 없는 법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또는 어떤 모양을 쳐들어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법이다 진리다.」 그렇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된 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결정된 법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말면 또 그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즉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러한 실재이고 실상자리입니다.

범부가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는데 그것을 얻어서 내가 성불해야겠구나, 견성해야 겠구나.」하는 이런 이론을 확실히 믿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런 생각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론을 의지해서 그런 개념을 얻어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으니 성불할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견성을 할 수 있고 참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시 성불하는 마음이지 딴 마음은 아닙니다. 도둑질 하는 마음도 아니고 협잡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성불하려는 마음이니까 그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닌 것도 아니고 범부로서 마음을 낼 수도 있는 겁니다. 또 그래 가지고 견성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것이 또 한쪽 견성(見性)이지만 보살초심(菩薩初心)까지 이룰 수 있겠다 생각하고 애를 쓰고 그렇게 견성을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떤 내용이냐 하고 정면으로 따져 들려면 또 범부가 처음에 이론으로 발심한 것도 딱 맞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그 발심을 가지고 근기(根氣)가 약해서 참선하다가는 미쳐 나가는 수도 있습니다. 뭐 어디 조그만 이상한 게 보이면 「아 이제 다 된 게 아니냐?」 이래가지고 방향없이 덤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 근사하게 발심을 가졌지만 그게 도깨비도 되고 미친 놈도 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견성한다.」 그렇게도 못 믿어 집니다. 이를테면 배우기는 똑같은 선생한테 똑 같이 배워가지고 열이 앉아서 참선 한다고 하더라도 열이면 열이 다 같이 옳게 견성을 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이면 아홉은 견성을 하고 하나는 잘 못 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다음 생에 어느때인가는 잘 못된 그 한사람도 견성해서 성불하는 날이 있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 법이 꼭 결정된 법이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금생에 성불해야 할 것이며 만의 하나라도 낙오자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기에도 달려있고 또 발심을 부족하게 한 데도 달려 있어서 그런 것도 알아야 합니다.

 

▶ 무실 무허(無實無虛)

이 금강경 三十二分의 말씀이 비슷비슷하여 같은 말씀 같은데 자세히 보면 약간씩 다릅니다. 약간 다른 게 아니고 많이 다르지만 나중에 결론을 맞춰 보면 똑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한소리를 되풀이 하지만 거기 있는 말의 조리가 각각 달라서 마치 서울역에서 하는 안내와 대구역에서 안내하는 말소리와 평양역에서 하는 안내소리가 조금씩 다르듯이 경문의 소리도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때는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있느냐?』고 물으시면 수보리 존자께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일이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런 법도 없고 사실 얻은 일도 없으십니다.』하고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사실 얻긴 얻었지만 그 얻은 법이 그건 무실무허(無實無虛)해서 실다운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부처님께선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조리는 결국 따지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게 어떤 걸 꼭 꼬집어서 「요것이다」 할 수도 없고 또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며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것을 몽뚱그려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렇게 말할 수도 없으며 또 「그것도 저것도 전부 아니다.」 그렇게 해도 안 맞고 이래도 안 맞고 저래도 안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물질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변동조화가 있는 무상의 존재일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변동하는 어느 한 모퉁이를 집어서 이거다 저거다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치 꿈을 깨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 허망이지만 꿈을 깨기 전엔 확실히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꿈을 꾸고 있을 때 꿈 가운데 있는 그게 참으로 있는 거냐 하면 그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닙니다. 꿈속에서도 전혀 허무한 것은 아니어서 사실 배가 부르면 배가 뿌듯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말로 진실한 불변의 존재냐 하면 또 그런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그런데 꿈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천지만물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무실무허한 것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시는 것은 범부가 「이 마음자리, 말하는 이것은 불생불멸의 존재구나 하는 원리를 의지해서 그걸 한 번 깨달아 봐야겠다.」고 확실히 인식이 돼서 하나서부터 열까지 목숨을 걸고 할 일이 이것뿐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작정이 되면 이것은 범부의 발심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정진해서 계행을 지키고 만행(萬行)을 닦아 점점 깊어져서 아공 . 법공 . 구공을 초월해서 뭐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르면 그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럽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나중에 일여(一如)하게 되어 구공의 일심을 체득했다고 해서 불법이 여기까지만 되고 말았다면 그건 소승불교 밖에 안 됩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외도(外道)까지라도 이 적멸(寂滅)하는 정도가 얕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도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지고 모양도 끊어지고 일체 것이 다 끊어진 그 속에 들어가 놓으면 팔만 사천 외도가 서로 모여 살며 너나 내가 똑 같다 하고 그 때는 다 실력행사합니다. 그렇지만 정도(正道) 앞에 사도가 꼼짝 못하는 것은 외도는 공을 얻어도 상대적인 내용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서 정도의 정력(定力)에는 비교되지 못합니다. 정도의 정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까지 떨어져서 그 신통이 비교도 안 되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마왕파순(魔王波旬)이 백만억 마구니 권속을 데리고 와서 온갖 짓을 다 해도 부처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요히 앉아 계셨는데, 마왕의 하는 꼴이 하도 안타까와서 부처님께서 마왕 파순에게 「네가 아무리 그래봐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네 신통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한 번 시험해 볼테니 네가 날 이기면 내가 너한테 항복하고 법문도 안 하고 그냥 내가 열반하마.」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물 떠 자시는 물병 같은 빈 수통을 촛대처럼 세워 놓으시고는 「너 혼자 하든지, 네 권속을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또 삼천대천세계 중생을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네 재주로 시방제불을 다 모시고 올 수 있으면 일체 부처님 보살님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이 통을 한 번 넘겨뜨려 보아라.」 마왕은 「뭐 그것쯤이야 가만히 앉아서 넘어가라 하면 넘어갈 텐데.」 생각하고는, 자기 신통을 다 발휘했지만, 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쇠줄 같은 것을 걸어가지고 마귀 권속을 다 데리고 와서 소 . 말 몰 듯이 채찍질해서 수억만명이 끌어도 끄덕도 안합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선 아무 생각도 없는 적멸을 증득했기 때문에 적멸 속에 들었을 그때에 어떤 생각을 해서 이것을 안 넘어 가게 한다든지 한 번 정해 놓으면 마음 전체, 우주 전체의 힘이 그렇게 하나가 되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부처님께서 한 번 마음에 정하면 시방제불(十方諸佛)이 다 와서 같이 힘을 합해서 하는 것과 같이 됩니다. 이것이 제망중중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든지 듣던지 하는 것이 온갖 망상의 틈바구니에서 요것도 하나 해보자 하는 일부의 쪼각 힘이므로 그것은 망상의 힘일 뿐입니다. 와도 이 병은 안 넘어 갑니다. 그러니 마왕 파순은 할 수 없이 필경에는 항복을 하고 맙나다.

우리 육체의 힘도 실제로 알고 보면 참는 데서 나옵니다. 금생에 많이 참으면 내생에는 아주 장사가 됩니다.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있다가 죽을 시간이 되면 앓지도 않고 돌아앉아 죽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정력을 얻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었다 하는 것은 즉시비득 곧 얻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所謂得法卽是非得).

 

▶ 일체 유심(一切唯心)

단유언설도무실(但有言說都無實)이란 말로만 있지 실제는 그런 일이 없다. 도무지 실다운 뜻이 없다는 뜻입니다. 연기법칙(緣起法則) 상대성 원리로 보아도 그렇게 됩니다. 많다고 하면 벌써 부분입니다. 정말 마지막 말로 전체를 많다고 하더라도 그건 하나뿐이니까 많은 것도 아니고 사실 또 하나도 아닙니다. 더구나 많다 적다는 안 됩니다. 벌써 많다고 할 때는 적은 것, 많지 않은 것을 이미 상대하고 있으므로 그건 전체에서 그만한 부분을 빼고 하는 말이므로 그것은 전체에 비하면 적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작다고 하는 그것이 작은 것도 아니고 작다 했으니까 그건 크다는 말도 되고 또 작지도 않다는 말도 되고 그런게 아니란 말도 되고 그럽니다. 그것은 다 환(幻)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선 꿈 밖에서 꿈을 깨어 가지고 「그대로 전체가 꿈 아니라」고 하신 그게 바로 무실무허(無實無虛)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말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환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망하다 실답다 하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것도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다가도 그 경지에 들어서 놓으면 참다운 것도 있고 허망한 것도 있고 그렇게도 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어진 그 경지는 시간을 여의어 일체 생각이 다 끊어진 때고 무분별지(無分別智) 본래의 실상자리인데 그러면서 거기서 내내 중생살림살이와 똑같고 하지만 보고 듣고하는 마음을 지어서 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무위(無爲) 무심으로 하는 겁니다. 그 경지에 가면 부처님 살림살이일 뿐이고 마음 하나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러는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一切唯心)이라 지을 조(造)자 하나를 빼 버려야 알기 쉽습니다. 「오직 마음 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그런 뜻이 됩니다.

주관이 곧 객관이고 거리가 없습니다. 거울 가운데 동서남북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빛으로 그림자로 거울 면에 나타난 것이지 거울을 뚫고 들어가서 동서남북 상하 중간이 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전체 그대로가 거리가 없는 거고 실제로 멀어 거리가 있으면서 또 그대로 없는 거고 그대로 전체가 마음이고 그러니 일체법이 개시불법(一切法皆是佛法)이고 무실무허(無實無虛)한 지경까지 하나가 되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주관 . 객관의 관념이 없어져서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없어지면 구공(俱空)인데 그래도 구공됐다는 잠재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공의 도리가 하나로 쉽게 활용되지 않다가 점점 닦아서 수치(修治)돼 들어가면, 참 그야말로 미세한 습기(濕氣)까지 전자가 움직이고 에네르기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미세한 폭으로 움직이는 그 <습기>까지 마음에서 다 끊어지면 그때는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체를 뭉뚱그려 한덩어리로 만들어 놓는 거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제망중중(帝網重重)의 도리로 그 가운데는 모래도 있고 흙도 돌도 있지마는 모래 한 알 그게 또 우주 . 인생 전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큰 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 먼지 한알이 그와 같아서 그 가운데 어떤 거 하나를 들추어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전제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면서 또 차별이 있고 고금이 있고 동서가 있습니다. 또 그대로가 없는 것이어서 고금이 아니고 현상이 아니고 모두가 아닙니다. 이 촛대가 모두 이렇게 섰는데 우주전체가 모두 이 촛대 선 자리에 같이 서 있습니다. 그 거리가 있는 게 아니고 이 촛대가 선 곳이 내내 모든 것이 선 자리이고 저기 선 것이 여기 입니다. 이와 같이 포개 있는 거리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불가사의한 신통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과학적 . 철학적 . 종교적으로 따져 가지고 그 실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도 끝이 안 납니다. 자기 실상 . 마음자리만 깨쳐 버리면 그게 참 진공묘유(眞空妙有)이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중생처럼 중생이 본 그런 자리 한바탕 있고 또 그러면서 원융무애한 그대로의 소식으로 제망중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란하냐 하면 조금도 그런 것이 없고 또 질서정연하냐 하면 또 거리가 없으니까 질서정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란 소리가 일체가 다 불법이란 소리와 한가지이니 일체법이 다 불법이고, 일체법이 다 불법이란 소리가 일체가 다 마음이라는 뜻이고 마음이 부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변해서 제망중중으로 이 초 하나에 한량없는 백성이 들어가 있는 그것이 한 번에 봐도 낱낱이 따로따로 보입니다.

오색물감을 물에 떨어뜨려 놓으면 그 빛이 무슨 물감인지 우리가 이름지을 수가 없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걸 낱낱이 보십니다. 또 부처님은 만고에 불변하는 중생의 근본불성도 보시고 중생의 이런저런 용심도 보시고 다 보십니다. 마음을 깨닫고 보면 제 자체가 그러는 게 아니고 전부 우리 관념이고 생각이며 우리 마음이 모두 그런 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얻은 게 아니라 실제로 얻은 게 아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됐다.‘ 그 말인데, 또 됐다 하는 것은 마치 무슨 작품을 만들 듯 새로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본래 그대로 부처였다는데 쓸데 없는 딴 생각을 한 번 냈던 것을 놓아 버리니까 제자리로 됐다, 본래 그렇더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그런 일체법이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것을 일체법이라 한다.”고 하신 것이니, 경전 다르고 촛대 다르고 접시 다르고 책상 다르고 그런 게 아니라 그건 모두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일체가 다 아니니까 하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또 그걸 이름해서 일체라 한다는 것입니다.

 

▶ 환으로 크고 환으로 작다

사람 몸뚱이가 크다는 말은 안 크다는 말이니 크다고 할 때는 벌써 작은 걸 상대로 해서 작은 걸 떼어 놓은 큰 것이므로 참말로 큰 것은 아닙니다. 또 사실로 현상은 환으로 있는 것이므로 정말 크거나 정말 작거나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그만 종지 속에 독을 집어 넣어도 종지가 넓어지지도 않고 독은 줄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독이 참말로 크냐 하면 환으로 큰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종지가 작은 게 아니라 작은 것같이 보이는 환이니까 정말로 큰 게 아닌 독이 정말로 작은 게 아닌 종지 속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고, 안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못 들어갈 수도 없는 겁니다. 또 종지가 깨지거나 터지면 터졌지 독을 그 안에 집어 넣을 수 없는 법도 있고 도대체가 모두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의 짓입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놓고 보니 크다 하면 벌써 큰 게 아니고 크다 할 수 있는 건 어떤 존재적 한계가 있는 것이므로 설사 우주 전체라 해도 우주 전체가 아닌 것을 상대로 전제한 관념이고 모자라는 것 제외해 놓고 크다는 뜻이며, 그러니 그건 정말로 큰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큰 것은 전체하나뿐일 때는 크다고 이름지을 수도 없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크다 하면 벌써 크지 않다는 말이고 전체도 아니란 말이고 또 실제가 환으로 된 것입니다.

손바닥만한 거울을 가지고 서울을 비치면 동서남북으로 이십리 이상되는 큰 서울이 입체적으로 다 들여다 보입니다.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손바닥만한 거울 안으로 서울이 들어가면 큰 빌딩이 깨알보다도 작게 축소해서 보여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손바닥만한 거울 안에 몇 억만배나 되는 서울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 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구애 없이 들어갑니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40년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익혀서 공의 원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현상계의 모든 존재가 다 환으로 있다는 진리를 부처님 다음으로 잘 아시는 수보리존자이므로 그 진리를 한 마디에 다 알아들으시고 몸이 큰 것은 큰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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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淨業障分 第十六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受持讀誦此經(수지독송차경)하야 若爲人輕賤(약위인경천)이면 是人(시인)이 先世罪業(선세죄업)으로 應墮惡道(응타악도)언마는 以今世人(이금세인)이 輕賤故(경천고)로 先世罪業(선세죄업)이 卽爲消滅(즉위소멸)하고 當得阿?多羅三?三菩提(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리라 須菩提(수보리)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하니 於然燈佛前(어연등불전)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하야 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하야 無空過者(무공과자)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能受持讀誦此經(능수지독송차경)하면 所得功德(소득공덕)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어아소공양제불공덕)으로 百分不及一(백분불급일)이며 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천만억분내지산수비유)로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有受持讀誦此經(유수지독송차경)하야 所得功德(소득공덕)을 我若具說者(아약구설자)댄 或有人聞(혹유인문)하고 心卽狂亂(심즉광란)하야 狐疑不信(호의불신)하리니 須菩提(수보리)야 當知是經(당지시경)은 義不可思議(의불가사의)며 果報(과보)도 亦不可思議(역불가사의)니라

 

『또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선세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천히 여김으로써 선세의 죄업이 곧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생각하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겁 전에 저 연등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나유타 수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그냥 지나쳐 버린 적이 없었느니라.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그 공덕은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 내지 어떤 수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어 독송하는 이가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 여우처럼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그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그 과보 또한 가히 생각할 수 없느니라.』

 

 

第十六 能淨業障分--업장을 밝힘

 

[科 解]

 

이 대문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으로 능히 지난 세상에 지어온 많은 죄업이 깨끗이 소멸된다는 뜻을 밝힌 대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남의 천대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남의 천대를 받는 일이 있게 되는가. 그것은 다 깊은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니 곧 그 사람이 지난 세상에 지은 죄업으로 장차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금강경을 읽어 외운 인연 공덕으로 그 무거운 죄업이 소멸되어 이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 받는 과보로써 그 지옥 죄과를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업을 가볍게 받는다고 하여 이것을 중업경수(重業輕受)라고 그럽니다.

왜 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운 공덕이 그처럼 신비로운가. 금강경은 모든 부처님의 최상승(最上乘)으로서 <나라는 생각>·<사람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조차 초월하여 주관적으로 나라는 관념이 텅 비고 객관적으로 법(진리)이라는 생각도 공하고 주관 객관이 다 공한 절대의 경계를 설한 경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경이 이러한 위대한 신력을 지닌 경전이므로 이 경을 모셔 둔 곳에는 부처님의 큰 제자나 부처님의 사리탑을 모신 것과 같다고 하였고, 이러한 위신력을 지닌 경이므로 능히 지옥에 떨어질 죄를 지었더라도 이 세상에서 사람의 천대를 받는 과보로써 대신한다고 하셨는 바 이것이 능히 업장을 맑힌다는 대문의 대의입니다.

 

原 文 : 復次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또한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도 하고 또한 남을 위해 해설도 잘 해 주는 어떤 사람이 남한테 천대를 받는 수가 있으니, 이 경전을 아수라 . 인간 . 천상 사람이 모두 호위를 하고 공경을 한다는데 도리어 역효(逆效)가 난다면 이것은 어찌된 것인가. 그것은 이 사람이 과거의 선세, 저 전생의 전생으로부터 지어 온 한량없는 죄업 때문에 삼악도(三惡道)에 저 깊은 지옥으로 갈 사람이니 이 몸뚱이가 죽고 나면 당장 그대로 곧 삼악도로 갈 것인데 이 경전을 읽는 공덕으로 해서, 인간 세상에서 천대를 받는 그걸로 해서 지옥으로 갈 죄를 면해 버리게 되느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는데 그 길로부터 금강경을 알고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금강경의 지취가 어디로 간다 하는 것, 곧 마음 씀씀이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벌써 짐작을 하게 되므로 결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게 되는 원인이 되느니라.』는 뜻이 됩니다.

법화경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아이나 어른이나 그저 남녀 노소간에 만나기만 하면 합장을 하고 절을 공손히 하고 「내가 당신 업신여기고 천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중생 그대로 부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대해서 어떻게 공손하지 않고 업신여기거나 천대를 하겠습니까?」 그럽니다. 사실 일체 중생이 즉비중생이니 시명중생(一切衆生 卽非衆生 是名衆生)입니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면서 부처란 말로 되어 있고 육체가 이대로 모두 다 환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사실 있는 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뜻도 있고 시명중생(是名衆生)이라 하면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중생이고 그런 굉장한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불경보살이 그렇게 하는데, 그 따위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도 또 하고 하니 이번엔 이 놈 매나 맞아라, 나중에 그런 소리 또 하면 때려죽인다고 하고 차고 밟고 그럽니다. 안 맞으려고 쫓겨 도망가고 또 따라오면 멀찍이 달아나서 서 가지고 안 따라오면 다시 합니다. 「내가 당신네들 공경합니다.」 이렇게 자꾸 합니다. 그럴수록 듣기 싫다고 매를 무수히 맞았습니다. 이 보살도 일종의 경천보(輕淺報)를 받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이 금강경을 읽어서 그 죄가 가벼워져서 경천보를 받는 것은 금강경을 읽어 복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원체 많은 사람은 금강경을 읽고 천대를 받는 것으로 면하는데 그 경천보를 받는 종류가 가지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일수록 내가 전생의 업이 무거운 것을 이제 경전보로 대신하는가보다 하며 조금이라도 해태해지면 신심이 부족하거나 정신이 모자라서 그런 줄로 알고 더욱 더 자꾸 읽어야 할 텐데,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금강경 덕을 못 봤다고 해서 그 경전 다 거짓말이라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섭섭해 하고 신심을 안 냅니다. 이런 사람은 금강경을 잘못 배운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我念過去 無量阿僧祗劫 於然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 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解 義] 『수보리야! 내가 또 생각해 보니 저 과거 무량 아승지겁 전에 그때 연등불이 계셨는데 내가 그 연등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셨느니라.』하십니다. 요새 우리 수자는 만까지는 열배하는 십진법이고 만부터는 만을 만하면 억이고 억을 만하면 조(兆)이고 조를 만배하면 경(京)하여 만배법(萬倍法)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하여 24단위 밖에 없지만 불교가 온 뒤에는 불교 숫자를 뒤에다 붙여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불교의 수는 구지(俱只)에서 부터 배수입니다. 인도의 낙차(洛叉)라는 숫자가 우리 수로 십만인데 십만을 백배로 하면 그게 구지(俱只), 곧 1천만입니다. 그 구지를 구지배로 하면 천만을 천만배로 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1아유타(阿由他)라 합니다.

또 아유타를 아유타배하면 나유타(那由他)인데 이렇게 해서 나간 수의 단위가 124자입니다. 그런데 아승지 이 숫자는 105번째 나오는 수의 단위이니 아승지라는게 우리의 일반수학 상식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그런 굉장한 수자입니다. 아승지수의 무량아승지라 했는데 무량도 숫자입니다. 아승지 바로 위에 있는 104번째 숫자입니다.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수의 부처님들을 연등부처님 불자로서 부처님 모시고 있는 동안에 다 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공부가 높고 신통이 많은 대 도인들은 시방에 한량없는 부처 여기 앉아 계신 것을 다 친견합니다. 최면술을 걸어 놓으면 여기 앉아서 동경가서 보고 얘기하고 그렇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만억 이런 지구를 직선으로 지나가서 우리 사바세계하고 똑같이 극락세계가 있다고 그랬는데 여기 이대로 앉은 채 찰라 사이에 십만억 세계를 지나가서 우리하고 얘기하듯이 아미타불을 친견(親見)하고 법문도 듣고 묻기도 하고 그럽니다. 본체 자리에서 보면 항상 시간도 공간도 아닌 조그만 초점 안에서 극락세계니 십만억 국토를 지나가느니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거 없이 가고 다 알고 보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연등불을 만나 가지고 연등불을 모시고 있는 그 동안에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내가 다 그 부처님에게 모두 음식도 올리고 옷도 올리고 향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온갖 시봉도 다 해서 공경 공양했고 도량청소도 하고 변소도 모두 소제해 드리고 부처님 제자를 시봉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한량없는 백천만억나유타 모든 부처님께 한분도 빠짐없이 공양 안 드리고 간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공양한 공덕을 그때 참 많이 지었지만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저 후오백세 말세에 지금(이 때입니다.) 혼란한 말세에 능히 이 경전을 받아 가지며 읽고 외우고 하면 내가 지은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억분의 일도 안되는 거고 내지 124자를 다 써서 비유를 한다 해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만억국토의 미진수분의 일도 안 됩니다. 부처님 세상에는 모두 선지식 천지이니까 아무나 할 수 있고 아무나 들을 수 있지만 이 말세에 이 금강경을 옳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금강경 학자가 나와서 일한다면 참 하늘에 별따기 같은 일이고 맹구우목(盲龜遇木)같은 참 희유한 일입니다. 그렇듯이 대단히 희유한 일이 되느니라. 그러셨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解 義]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저 말세에 사람들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고 또 이 경전을 수지독송한 공덕을 얻는 그걸 내가 만일 갖추어서 다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이 듣고 나면 마음이 미쳐서 혼란해 지고 미칠 것이다.』했습니다. 향적세계(香積世界)라는 불세계가 있는데 거기서는 말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시려면 향을 한 대 향로에 꽂아 놓으면 백년이고 천년이고 그 향내가 뻗혀 나갑니다. 그러면 그 불세계에 사는 중생들은 누구나 그 향내를 맡으면 그만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를 깨쳐 버립니다.

「아 ! 이 세상이 다 고로구나. 이 세상이 다 허망한 것이 모여가지고 거짓 있는 것이고 흩어져 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구나.」하고 곧 압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께서 주먹을 번쩍들어 보이면 그만 대중이 전부 다 깨달아 버립니다. 이건 말이 없는 불세계입니다.

이와 같이 향으로 하는데, 꽃으로 하는데, 또는 음식으로 하든지 그 교화 방법이 불세계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이 사바세계는 교체(敎體)가 무엇이냐 하면 음성교체(音聲敎體) 곧 음성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 문자만 가지고도 또 안되고 글로 된 경전이 있지마는 그것보다도 꼭 혀를 놀려서 가르쳐야 빠릅니다. 글도 역시 혀의 표현이긴 합니다. 그래도 여기는 어디까지나 음성이 교체가 되어 있고 향적세계 같은 데는 향이 교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석천천당에 올라가면 굉장한 복력으로 저절로 생긴 궁전이 있습니다. 우리도 꿈에 가면 큰 도시가 있고 우리 집도 있고 그런 것이 생각으로 저절로 생겨 가지고 있는 것이며 누가 목수를 데려다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듯이 제석천궁도 제석천의 복력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 궁전의 크기를 아주 줄이고 줄여서 우리 한국 땅덩이만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법당에도 바깥 천정에 비들기나 새들이 못들어가게 그물을 쳤는데 제석천궁은 새 똥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장엄으로 장식을 하느라고 진주·다이야몬드 같은 아주 좋은 보석으로만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이쪽 구슬이 저쪽 구슬에 비춰지고 하여 이 구슬끼리 전부 서로 통하여 비춰가지고 있으니 우리 한국만한 궁전이라고 한다면 그 구슬의 수가 몇 개나 되겠습니까? 그 많은 구슬이 한 구슬 속으로 그림자가 다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구슬 이것이 그 여러 억천만개나 되는 구슬의 그림자가 밑으로 보이고 동서남북으로 들어와 가지고 그 전체를 받아 가지고 그 옆에 구슬에 비추니까 이거는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전체로 보입니다. 이것을 받아 저쪽에 넘기고, 제 구슬의 것을 또 이쪽으로 넘기고, 저는 저대로 받아 있습니다. 제 그림자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 쪽을 비춰주고 또 저놈이 제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받고 이러면 복수(複數)로 자꾸 곱수로 됩니다. 이런 것이 한 시간만 되면 그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고 두 개 구슬로만 해도 무한의 수가 될 것인데 이것은 정말 아승지의 수자 보다 더 많습니다. 일백 스물 넉자라도 못 따라 갑니다. 이런데 그 구슬과 구슬 전체가 또 다 그러니 전체가 전체를 전부 포함한 그것이 여러 수 억만 불찰미진수 아승지 항하사 숫자 이런 게 모두 다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하고 제망중중(帝網重重)이라 합니다. 지금도 자꾸 그렇게 점점 비쳐 나갈 것이며 서로 반사가 될 것이니 그런 수를 누가 세겠습니까? 그렇지만 부처님은 그 제망 중중 구슬들을 서로 비쳐서 만년 아니라 몇 아승지 겁을 지나도 이 수를 다 아십니다.

부처님의 반야법문이 600권이라고 하지만 그 실제로는 미진수의 법문이 있다고 합니다. 21년간 말씀하신 것이 우리 인간만 듣는 게 아니라 천당 사바세계 할 것 없이 다 듣도록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셔도 여러 세계의 중생들이 각각 다 자기 말로 알아듣도록 하십니다. 이 금강경도 이제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다 되는데 상하 두 권이나 되는 것은 화엄경 같으면 하나만 물어도 몇 가지로 대답하시듯이 백 마디 물으면 천 가지가 나오고 만 가지가 나오고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게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제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 수가 모두 몇 권이나 되며 사실 그걸 다 펼쳐 놓으면 모두 얼마가 되겠습니까?」 물으니까 백억 세계를 두드려 무슨 미진수 전자수와 같이 많은 장수(張數)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중무진의 시방세계에서 불보살님까지 「저 사바세계의 석가여래께서 출세를 하셔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시느라고 마지막 법화경을 설하신단다, 금강경을 설하신단다.」 이래 가지고 막 모여옵니다. 그러니 허공이 가득차고 이러는데 또 제 몸을 포개고 또 그 보살이 보살을 포개가지고 중중으로 포개지만 하나도 머리가 안 아프고 밑에 깔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고 두루하고 그래서 서로 방해도 안 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그 희유한 경계를 상상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이런 희유한 도리를 다 설명하신다면 근기가 여간 높지 않아 가지고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의(狐疑)라는 말을 여호 같은 의심이라고 하는데 이런 의심이 있는 사람은 성불 못합니다. 사람들이 여호를 찾겠다고 쇠고기나 돼지고기나 그 속에다가 무슨 폭발물 같은 것을 넣든지, 무슨 독약을 넣든지 하고는 겉으로 냄새를 피우지 않게끔 잘 밀봉해서 여우 다니는 데다 놔둡니다. 이놈이 무엇 주워 먹으러 다니다가 돼지고기가 한 뭉치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게 이런데 떨어질 수가 없는 건데 필연 무슨 조화가 붙어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들고 요리저리 벼른 뒤에 여기 좀 맡아 보고 저리 맡아 보고 하다가 아무래도 못 먹겠다 하여 그대로 놓아두고는 한 댓 발 간다는 겁니다. 가다가는 그 놈이 또 아까와서 냄새라도 맡아 보고 가야지 하고는 다시 되돌아와 보고 하기를 열번 백번 하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어 먹어 버립니다. 까불다가 탁 터져 죽는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먹고 나서 몇 시간 뒤에 그만 죽기도 하는데 어떤 놈은 기어코 먹지 않는 놈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를 중생들 중에 제일 의심이 많고 제일 영리하다고 하고 사람도 호의(狐疑)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말로 들어 봐서는 꼭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참 그럴까」하고 괜히 그런 생각 저런 생각 갖다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의심 많이 하는 성질이 있어 군자를 만나도 도인을 만나도 의심을 많이 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렇게 호의증에 걸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장가가면 의처증(疑妻症)이 걸리고 또 의부증에 걸려서 영감을 의심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의심할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내버려 두고 그런 세상을 살면 편한데 의심을 하면 사람의 마음이 안 편해지고 의심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백사불성(百事不成)으로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만날 사사건건 의심만 붙어 있으니 무슨 일을 누구하고도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當知是經 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解 義]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전의 뜻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동시에 그 과보도 불가사의하느니라.』

이 경전을 읽고 나면 그때부터 금생에서부터 차차 이 경전 읽은 공덕을 받기 시작하여 두고두고 세세생생에 자꾸 견성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다 설명하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놀라서 기절할 정도로 그 뜻과 과보도 공덕도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번에 금강경 살림에 참여한 분들은 금강경의 이런 도리를 깊이 믿고 대게 그게 그럴거라고 십분 이해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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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經功德分 第十五

 

 

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初日分(초일분)에 以恒河沙等身(이항하사등신)으로 布施(보시)하고 中日分(중일분)에 復以恒河沙等身(부이항하사등신)으로 布施(보시)하며 後日分(후일분)에 亦以恒河沙等身(역이항하사등신)으로 布施(보시)하여 如是無量百千萬億劫(여시무량백천만억겁)에 以身布施(이신보시)어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聞此經典(문차경전)하고 信心不逆(신심불역)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하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황서사수지독송)하야 爲人解說(위인해설)이리오 須菩提(수보리)야 以要言之(이요언지)컨댄 是經(시경)이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量無邊功德(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량무변공덕)하니 如來爲發大乘者說(여래위발대승자설)이며 爲發最上乘者說(위발최상승자설)이니라 若有人(약유인)이 能受持讀誦(능수지독송)하야 廣爲人說(광위인설)하면 如來-悉知是人(여래-실지시인)하며 悉見是人(실견시인)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하리니 如是人等(여시인등)은 卽爲荷擔如來阿?多羅三?三菩提(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樂所法者(약요소법자)는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卽於此經(즉어차경)에 不能聽受讀誦(불능청수독송)하야 爲人解說(위인해설)하리라 須菩提(수보리)야 在在處處(재재처처)에 若有此經(약유차경)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의 所應供養(소응공양)이니 當知此處(당지차처)는 卽爲是塔(즉위시탑)이라 皆應恭敬(개응공양)하야 作禮圍繞(작례위요)하야 以諸華香(이제화향)으로 而山其處(이산기처)하리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한낮에 또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때에 또한 항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으로 거슬리지 아니했다면 그 복이 저보다 뛰어나리라.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남을 위해 해설해 줌이겠느냐?

수보리야! 요긴하게 말하면 이 경이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가히 헤아릴 수 없는 한없는 공덕이 있나니, 여래께서 대승을 일으킨 이를 위하여 설명한 것이요, 최상승을 일으킨 이를 위하여 설명한 것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능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일러 주면 여래께서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시는 바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끝없으며 가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공덕을 다 얻어 성취하리니, 이러한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 되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소승의 법을 좋아하는 이는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이라는 생각>·<오래살겠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읽고 외운다든지 남을 위해 해설하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어느 곳이나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을 모신 곳이어서 응당 모두 공경하고 예배하고 돌면서 모든 꽃과 향을 그곳에 뿌리느니라.』

 

 

第十五 持經功德分

 

[科 解]

 

제15 <지경공덕분>은 이 금강경을 지니는 공덕을 찬양한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아침결에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자기 몸으로 보시하고 한 낮되어 다시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자기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때에 다시 그렇게 보시하되 이렇게 무량겁을 두고 할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심으로 받아들이어 거슬리는 생각이 없다면 그 복이 저보다 더 수승하니라. 하물며 그 경을 쓰고 읽고 외며 사람들을 위해 해설하는 공덕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 경을 지니는 공덕이 그처럼 굉장한가. 이 경은 불가사의하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경으로 좇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성취하는 최상승공덕은 그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는 부사의한 공덕이 있으니 그것은 한량없는 몸과 목숨을 보시한 공덕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은 대승심을 낸 이를 위하여 설하며 최상승심을 낸 이를 위하여 설하신 것이니 곧 금강과 같이 다시 파괴할 수 없는 반야지혜를 성취하여 영원한 이상세계인 열반의 저 쪽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에서 가장 소중하고 최상의 값이 있는 것은 <금강반야>입니다. 삼세제불이 이 <금강반야>를 얻음으로써 부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금강반야>를 성취하는 길은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이 저 허공처럼 텅 빈 이치를 체득해야만 그 곳에 <금강반야>가 드러납니다. 금강경은 이러한 진리를 드러낸 경이므로 이 경전을 모셔 둔 곳에는 인간·천상·아수라가 다 공양드리게 되며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의 탑을 모신 것과 같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亦以恒河 沙等身 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解 義] 그때 수보리가 이 경 말씀하신는 것을 들어 그 뜻을 깊이 알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수보리야! 만일 착한 남자 . 여인이 있어서 초일분(初日分)에 항하사의 몸으로 보시한다면』하셨는데, 초일분이라는 건 오전입니다. 아침결 한 열시 전입니다. 초일분에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몸뚱이로서 보시를 한다는 것은 우리경계로는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몸뚱이가 하나뿐이고 몸뚱이 하나도 어려운데 한나절 동안에 무슨 항하사 모래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남을 위해 보시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중일분(中日分)이란 점심 한 때를 말하고 또 후일분후일분)은 오후 해질 때를 말합니다. 아침결에 보시했으면 점심때나 저녁때는 보시할 몸뚱이도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들 중생의 경계에서는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통(神通)이 있고 공부가 장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이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그런 분신(分身)으로 나타낼 수 있는 분들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런 신통이 있는 선남자 선여인이 한량 없는 몸을 나투어서 중생들을 위헤 보시를 해 주는데 아들도 돼주고 딸도 돼 주고 영감도 돼 주고 아내도 돼 주고 음식도 돼 주고 눈도 빼 주고 코도 떼 주고 손도 잘라 주는 이런 보시를 말합니다. 그래도 이것은 아무 생각없이 하는 거니까 그런 경지가 되면 활동사진에 사람이 노는 것 처럼 변화신(變化身)으로 하게 됩니다. 온갖 중생을 위해서 관세음보살 32응신(觀世音菩薩三十二應身)을 나투어 아들도 되고 딸도 되고 과부도 되고 국왕도 되고 하늘의 제석천(帝釋天)이 되고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습니다. 어떤 때는 불신(佛身)도 나투고 어떤 때는 천대장군신(天大將軍身)도 나투고 온갖 것이 다 된다고 그랬습니다.

이와 같이 항하사 수의 많은 몸뚱이로 온갖 궁색한 중생을 다 맞추워 주는데 거지가 혼자 얻어 먹기 어려우면 한 수백명 거지떼가 되어서 같이 동무가 되어 주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아침에 열시 쯤에 그렇게 하고 한나절 한시 두시에 또 항하사 수 한량없는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 때 오후 세시쯤해서부터 해가 지도록 항하사 수의 몸뚱이를 또 보시해서 이렇게 하기를 한겁 두겁도 아니고 무량백천만억겁을 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복이 한량없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흔히 겁(劫)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사회에서 많이 쓰는 영겁이란 말도 불교의 겁이란 말에서 온 것입니다. 겁니라는 소리는 그것도 하루다 한 달이다 한 해다 하는 시간 단위입니다.

그리고 겁에도 대겁(大劫)·중겁(中劫)·소겁(小劫)이 있는데 대겁은 지구가 한 번 이루워졌다가 무너져 없어지는 시간을 말하는 시간이므로 굉장히 긴 시간을 뜻합니다. 대겁은 4중겁이고 80소겁이 됩니다. 그러니 무량 백천만겁이라고 하는 것은 한량 없는 세월이 됩니다.

 

原 文 :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受 持讀誦 爲人解說

 

[解 義] 그런데 다시 또 어떤사람이 이경전을 듣고서 「아, 그럴 수 있겠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진리가 확실히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필경 생사를 면하고 해탈하여 참 자유한 인간이 한 번 되겠구나.」하여 이 금강경을 듣고서 마음에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면, 곧 완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서 확실한 신심만 낸다고 하더라도 그 복이 아까 무량백천만겁으로 하루에 삼항하사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중생을 위해서 보시한 복 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경전을 쓰기도 하고 또 요새 말로 하면 인쇄도 해서 여러 사람에게 보시하고 번역하고 강의도 하는 경불사(經佛事)도 하고 한다면, 요전에도 어떤 여신도(女信徒) 한 분이 자기 환갑(還甲)에 유마경(維摩經)을 번역만 해 놓고 출판하지 못했던 것을 큰돈을 들여서 천 부를 출판해 가지고 각계 각 학교 도서관에 전부 돌리고 선남·선녀와 불교 안 믿는 사람에게 까지 보시를 했는데 이것도 정말 큰 복입니다. 경을 전부 다 쓰면 말할 것도 없지만 손으로 써 보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4구게 한 줄이라도 다 쓰면 좋고 더욱 더 해서 손가락에 피극를 뽑아서 종지에 담아 놓고 흘린 피를 가지고 다 쓰고 짜고 짜다 피가 안 나오면 다른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또 짜 가지고 법화경 7권을 쓰고 화엄경 80권도 씁니다.

이렇게 금강경이나 대승 법문을 듣고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면 총명해서 그랬던지 신심이 지극해서 그랬던지 그 복이 아까 그렇게 한량없이 많은 몸뚱이로 보시해서 지은 복보다도 더 많다고 했는데 하물며 수지독송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법회산림(法會山林)을 하고 강의(講義)도 하고 경전 간행도 해서 얻어지는 복이야 더군다나 말할 게 있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 德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解 義] 부처님께서 결론으로 『수보리야! 대강 요긴한 것만 간략히 말한다면 이 경의 공덕이 가히 생각도 못하고 얘기할 수도 없고 이름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 불가칭량한 공덕이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금강경을 뜻도 모르고 자꾸 읽어도 그런 공덕이 생긴다고 그럽니다. 이 경 자체가 우주 인생의 근원이 여실히 표시된 문서이기 때문이니 구공·아공·법공(俱空 我空 法空)의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지만 이러한 인생의 근본면목, 우주의 본체, 참된 실상(實相)을 다른 곳의 어느 경에서도 들어 볼 수 없는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경책이 검은 것은 먹이고 흰 것은 종이지만은 이것이 또 그런 큰 공덕이 들어 있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경전이 그런 불가사의 불가칭량 무변공덕이 있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대승심(大乘心)을 일으키는 이」·「큰 마음을 깨치고 온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이」를 위해서 또는 「대승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를 위해서 설명하신 것이고 성불하신 뒤 40년 만인 이제야 처음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승심(大乘心)이란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체 중생을 모두 다 내가 제도하지만 제도했다는 마음 없이 하는 보살행을 말합니다.

 

原 文 :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 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만일 어떤 사람이 이미 이 경전을 수지독송도 하고 자기가 받아가지고 외우기까지 할 뿐 아니라 또 남을 위해서 좋은 법사가 될 수 있도록 금강경을 잘 알고 공부를 잘 해서 남에게 널리 설명해 주면 그리고 견성까지 하면 더욱 좋고 그러면 여래께서는 이 사람이 다 불가량 불가칭 무유변하여 가장자리가 없이 무한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다 아시고 다 그렇게 되는 것까지도 가만히 보시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책임질 수 있어서 중생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일체의 도사가 될 수 있으니, 「이 경을 듣고 배워서 받아 가지고 이 금강경의 진리에 의지하여 꼭 그와 같이 하겠다고 마음 속에서 진심으로 감동하여야 하겠습니다.」하고 마음으로 받아가지는 것을 수지(受持)라고 합니다. 또 수지 하면서 읽고 외는 데 하루에도 백독 천독을 하고 그저 잠 안 자고 자꾸 외고 합니다. 그렇게 한 번 읽어 다르고 두 번 읽어 다르고 자꾸 염념(念念)히 달라져서 깊이 들어 갑니다. 또 한 번 두 번 설명을 듣고 나면 자꾸 그 때마다 희유함을 느끼게 되고 몰랐던 것이 알아지고 마음의 골수에 박히고 몸뚱이 이대로가 금강경이 되어 피와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것입니다.

전에 법화경 읽는 어떤 스님이 밤에 경을 외우면 불이 꺼져도 방이 환히 밝아서 대중이 다 불을 안 키고 경을 보게 되고 한 이런 법사들이 있습니다. 견성까지는 못한 법사지만 그런 이가 있어서 평생 삼매에 들어서 금강경 또는 법화경이나 화엄경 읽는다고 하면 딴 잡념이라는 건 없어집니다. 그저 불보살님들이 모두 수행하시고 중생제도하시는 걸 보니 모든 잡념이 없어지고 법열(法悅)이 생겨서 중생들이 영화 보는 것보다 더 재미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서면 그렇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 뜻을 잘 알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준다면 이 사람은 마침내 구경(究竟)의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부처님께서 다 아시고 다 보시게 됩니다. 그것은 이런 사람은 곧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시고 갸륵하게 보십니다.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보살의 행을 하는 이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若樂所法者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解 義] 부처님께서 다음에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저 소승아함경(小乘阿含經)을 배워서 소승불교(小乘佛敎)만 배우고 거기에 마음이 만족해 있는 나한이 되었다고 하면 비유컨대 어디 요양 와서 좀 편히 쉰다고 해서 잠만 자는 것과 같은데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으면 그것이 훨씬 건강에 좋은 효과도 가져 오게 되는 것이고 또 아무리 일을 하고 종일 지껄이고 종일 노동하고 돌아다니고 종일 무슨 회담(會談)을 하고 아주 어렵고 까다로운 회의에서 까딱 한마디만 잘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전쟁이 일어날 회담을 하는 가운데도 보통 사람 같으면 여러 달을 연구해서야 대답할 수 있는 어려운 것도 번쩍번쩍 한두 마디 건너면서 다 따져 알고 말 한마디 실수 안 하도록 하여 정신노동이 굉장한 일을 하더라도 무심한 가운데서 하면 피로한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소승불교만 배워 놓은 사람은 홀가분하니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길게 이렇게 하다보면 결국 아견(我見)도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현상계는 무상한 거고 생사세계에서 성주괴공(成住壞空) .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나한열반(羅漢涅槃)에 앉아 있는 것이라 하여 그걸 한 없이 좋아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상대적인 열반이고 미세한 주관·객관 그런 것이 저도 모르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관은 아상(我相)이고 아견(我見)이며 그러니까 자기가 증득한 내용을 객관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 중생견·수자견이 일어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금강경 경전을 설명해 주면 일체 중생이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중생이고, 또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니 그래서 그게 불법이라는 소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소승불교의 논리로 모든 것을 보고 이런 말을 들으면 논리에 안 맞는 말이라 하여 이해가 안 됩니다. 있는 게 없는 거고 없는 게 있는 거고 이러니까 이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법문을 청수(聽受)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감당도 못하고 독송도 안 합니다. 그러므로 남한테 해설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어하고 보기부터 싫어하고 그런 건 불법이 아니라고 비방만 합니다. 요새 유물본위의 사상을 배운 남녀 청년들이나 노인들이 예비강의(豫備講義) 일주일을 거쳐서 들으시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힘이 덜 듭니다. 그래도 지금 상권만 설명하는데 20일(첫번법회) 걸렸는데 만일 이런 강의를 듣지 못하고 처음으로 금강경을 구해 본다면 그 말이 희안하고 군데군데 보면 무주상으로 보시하라는 내용이 있으니, 그러면 이것은 「상에 머무름 없이 주라는 말인가.」 이렇게 저렇게 생각대로 새기면서 좋다고 보기는 볼 겁니다. 그렇지만 바른 뜻은 모릅니다. 구공(俱空)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 그런 문장은 나오지도 않았으니 더구나 모를 것이고 「아라한이 아라한이라는 생각이 없다.」 이런 정도의 말도 알 수가 없는 소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만일 적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해서 이 경을 들어서 받아 지니지 못하고 독송하지 못하며 남을 위해 해설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所應供養 當知此處 卽爲是塔 皆應供養 作禮圍繞 以諸華香 而山其處

 

[解 義]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이 경전을 모셔 놓은 데가 있으면 재재처처(在在處處)에 금강경의 문자가 있는 곳마다 일체 세간의 천당 사람이나 인간 사람이나 아수라인등 세계에 사는 중생들이 마땅히 공양을 올려서 지극히 존경하고 꽃이나 향을 갖다가 사루고 뿌리어 공양하느니라.』 또 의복 음식까지 갖다 놓으라 한다고 법화경 같은 데선 그렇게 말합니다. 그건 아주 마지막 존경입니다. 이 금강경에서는 소위 형식적 . 의식적인 불교는 잘 안나옵니다. 근본 발심만 얘기하는데 이걸 지나서서 법화경에 가면 쌀도 갖다 놔라. 돈도 갖다 놔라. 절도 지어라.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그게 모두 금강경 사상 지나간 사람들이 법화경 사상을 알아 놓으니까 어쨌든지 모두 신심으로하는 행동이므로 복이 되고 공덕이 됩니다. 일체 행동이 요새 불공한다고 떡과 밥을 갖다 놓는데 그게 모두 복이 됩니다. 다만 이런 도리를 모르고 하는 것은 미신에 가깝지만 그래도 인연이 되는 정도의 복이 되지 죄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등상불(等像佛)에게 했다 하더라도 또 등상불이 부처님 모셔 놓은 것이지 등상불이 따로 있습니까? 전혀 헛일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같은 값이면 금강경을 알고 법화경을 들어서 그 뜻을 어느 정도 십분의 일이라도 좀 짐작을 하고 불공을 하면 여러 천만 억배의 공덕이 생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마땅히 알아라, 이 금강경을 모신 곳은 이것이 곧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이고 부처님 정신을 모신 탑이라는 것이니, 그래서 꽃을 공양하고 향을 사루고 예경하고 주위를 돌면서 공경하리라.』하셨습니다.

사리를 정골(精骨)이라 그러는데 10계·250계를 잘 지키고 참선 정진 잘해서 정신이 모인 결정(結晶)이라 그 말입니다. 몸뚱이 속에서 정신이 모여 생긴 것이 사리이므로 부처님의 사리는 부처님의 몸에서 부처님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을 모신 부처님의 사리는 부처님의 몸에서 부처님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을 모신 부처님 탑은 부처님 모신 것이고 부처님 법신을 모신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리탑인데 이 경전을 모신 곳도 법당에다 모셨든지 그 누가 자기집 어디 깨끗한 곳에 모셨든지 일본 사람들 처럼 부처님 모셔 놓듯이 경전 모시는 곳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경전을 모셔 놓든지 하면 곧 부처님 탑을 모신 거와 한가지 입니다. 그 곳에 향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흐트기도 하고 절도 하고 정례(頂禮)도 하고 금강경을 모시고 탑을 쌓고 그걸 돌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절에 가면 신도들이 탑 주위를 돌아가면서 예경하며 좋은 꽃이라는 꽃은 다 갖다 올리고 좋은 향사다 올리고 이래서 그 근방에 흐트기도 하는데 그게 불공이라는 겁니다.

태국에 가 보니까 음식은 물론 과일도 안 놓고 꽃과 향과 촛불의 세가지 밖에 안 놓습니다. 물도 여기처럼 다기(茶器)에 안 떠 놓습니다. 산에 있는 산 꽃을 많이 올리고는, 우리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전부 탑이나 법당에 들어가니까 향내가 진동을 했고 향 사르고 그저 생화 갖다 전부 장엄했는데 우리가 떡과 곶감 대추 갖다 놓는 것 보다 신성하고 좋았습니다.

 

 

[說 義]

 

▶하늘도 땅도 몸도 허망한 것

무량백천만억겁(無量百千萬億劫)이니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이니 하는데 겁에도 소겁(小劫) . 중겁(中劫) . 대겁(大劫)이 있습니다. 소겁을 먼저 말하면, 이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 천당 사람이 내려와서 사는데 그 때 수명(壽命)이 팔만사천세였고 몸도 날아다니고 그랬지만 차차 의식주를 생각하게 되는 데 따라 아무데나 자도 좋던 태평세월이 몸도 날지 못하게 되고 의식주 세가지가 점차 발달하므로 모든 것이 다 역시 점차 우리의 지식이 열림에 따라서 그렇게 됩니다. 마치 어린애들이 젖만 먹으면 자고 먹고 자고 늘 이러다가 차차 엄마하고 눈을 맞춰 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의식(意識)이 차차 생깁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배우고 그 문서(文書)를 배워서 기억해 가지고 말이 한 마디 두 마디 늘어 갑니다. 이렇게 늘어 가는 것이 모두 소위 번뇌가 늘어가는 것이고 망상이 하나씩 늘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팔만사천세(八萬四千歲)를 살던 사람들의 수명(壽命)이 백년 동안에 한 살씩 까먹는 정도로 차차 복잡해 집니다. 이렇게 줄어서 수명이 10세가 될 때까지 내려갑니다. 지금 우리가 한 70세 . 80세까지 살 수 있는 것도 나이가 이렇게 줄어서 내려가는 도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평균 연령이 통계적으로 위로 올라갑니다만 그것도 팔만사천세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얼마동안 어느 정도의 한계를 지나면 결국은 복과 목숨이 감해서 자꾸 내려가게 됩니다. 이것을 복도 감한다고 하여 감겁(減劫)이라 그럽니다. 이렇게 해서 차차 10세까지 내려가면 세 살 먹은 때가 한창 청년입니다. 아주 조숙(早熟)해져서 대여섯 살 먹어 놓으면 벌써 장년이 되고 일곱 여덟살 되면 요새 한 40, 50된 늙은이 턱이 됩니다. 아홉 살 열 살되면 아주 60, 70 노인처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수명이 자꾸 감해 내려갈 때는 복을 감하고 생존경쟁(生存競爭)만 치열(熾烈)해져 가지고 그야말로 사람이 일체 동물 가운데 제일 나쁜 동물이라는걸 우리가 요전에 얘기했습니다만 그 대표적인 현상의 인간사회가 됩니다.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는 것을 연구하는 게 사람이지만 그래도 짐승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일대 일로 싸우다가 하나가 지거나 하나가 이기거나 둘이 다 죽으면 끝날 뿐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 무기로 사람을 하나 이상 더 많이 죽일 수 없나 해서 이렇게 경쟁이 심해지고 죄업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극악무도(極惡無道)해지는 말겁(末劫)에는 삼재(三災)가 일어납니다. 사람의 나이가 20세 정명(二十歲定命)이 되면 첫째 기근겁(飢饉劫)이 와서 흉년이 자꾸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고 둘째는 질병겁(疾病劫)오는데 생전 이름도 내용도 알 수 없는 나쁜 전염병(傳染病)이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모두 앓는 사람 천지 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도병겁(刀兵劫)인데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모두 칼날같이 보이고 창같이 보이고 모두 죄업(罪業)으로 현상계가 그렇게 되어서 닥치는 곳 마다 몸을 상하게 되고 찔려서 죽기도 하고 모두 이런 것뿐이라는 겁니다.

죄업으로 지옥 같은 그런 무서운 업을 지으니까 인간 세상이 그렇게 점차로 나쁜 상태로 됩니다. 이것을 적은 삼재, 곧 소삼재(小三災)라 그럽니다. 이 소삼재 때에 거기에서 복이 제일 많고 마음씨가 아주 나쁘지 않은 얼마의 사람만이 뒷 세상까지 살아남았다가 그게 차차 번져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서 부터 다시 수명도 길어지고 복도 많아져 올라갑니다. 이것을 증겁(增劫)이라 하는데 100년에 1살씩 더 늘어서 11살씩 살던 세상이 100년이 지나면 12살 먹고 12살씩 살던 세상이 100년이 되면 13살이 되고 자꾸 이렇게 올라가서 팔만 사천세까지 올라갑니다. 이렇게 수복(壽福)이 불어 올라가서 팔만 사천세가 됐다가 다시 또 내려오다가 하는데 한 번 증감하는 걸 소겁(小劫)이라고 하고 일증감겁(一增減劫)이라고 합니다.

이 지구가 하나 생성하는 기간이 얼마동안 되느냐 하면 팔십번 증감을 해서 팔십 증감만 하면 지구덩이가 전자나 원자시대로 돌아가 버리고 현상은 다 흩어져 없어져서 허공으로 됩니다. 그래서 지구가 한 번 생겼다 꺼지는 기간을 팔십 소겁(八十小劫)이라 그럽니다. 이 지구가 없어지는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지금 물리학자들이 추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 안개처럼 있든지 안개 같은 그런 모양도 없이 아주 맑은 공기로 있게 되는데 그 비어 있는 기간이 20소겁(二十小劫)이라고 그럽니다. 곧 20증감을 할 만한 시간 동안 공간으로 텅 비어 있는데 이것을 비어 있는 시기라고 하여 공겁(空劫)이라 합니다. 20증감 후에 차차 수증기가 모여서 안개가 되고 안개가 차차 모여서 구름처럼 되고 구름이 차차 모여 물이 되고 이렇게 완전히 이루어지듯이 안개처럼 모이기 시작할 때 부터 완전히 이 지구의 형상이 산과 들 육지 바다 등의 형태가 이대로 되기까지 이십소겁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걸 성겁이라고 그럽니다. 지구가 이루어지는 시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십소겁이 걸려서 이 세계가 동물이나 식물이 생길 수 있도록 완전히 형성되는데 그때 천당에서 천복(天福)을 받을 만큼 다 받고 인간으로 내려가게 된 복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으로 내려 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팔만 사천세를 살고 사람들도 다 허공으로 날아다닐 줄 알고 옷도 입을 줄 모르고 그냥 완전히 나체시대가 됩니다. 그래 가지고 차차 20증감 동안을 이런 세계가 지나갔는데 이렇게 한 번 사람이 생기면 팔만 사천살에서 10세까지 내려 갔다가 팔만 사천세까지 올라갔다가 또 10세 까지 내려왔다가 올라갔다 하기를 그런 것이 20증감입니다. 이것을 주겁(住劫)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니 지구가 이루어지는 동안의 성겁(成劫)과 허공으로 있는 공겁(空劫)과 완성된 뒤에 이십 증감 동안 현상대로 있는 주겁(住劫)과 그 다음에는 차차 지구가 부서지는 시기가 있는데 이것도 역시 20소겁 동안 걸려서 다 무너지게 되는 이것을 괴겁(壞劫)이라 그럽니다. 이 지구가 형성된 채로 20소겁동안 머물러 있다고 해도 엄격히 따지면 변화가 없을 수도 없지만 전체로 봐서 지구의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시기이므로 이렇게 이름합니다. 무너지는 시기인 20소겁 동안의 괴겁 때에도 역시 태양이 폭파되어 큰 변동이 생기듯이 그런 변화도 있겠지만 차차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소겁을 설명할 때 소삼재(小三災)를 말했는데 지구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인 괴겁이 다하면 수화풍삼재(水火風三災)가 일어나서 지구가 다 없어집니다. 큰 폭풍 바람이 일어나서 땅을 부수고 돌을 날려버립니다. 지금 태풍 같은 것 몇 억배로 불면 돌 흙 낱낱이 날려서 없어질 겁니다. 이 대삼재(大三災)가 일어날때는 화재(火災)가 먼저 7번 일어나고 그 뒤에 수재(水災)가 1번 있고 다시 화재가 7번 일어난 뒤에 수재가 1번 있고 하여 이렇게 7번 수재와 49번의 화재가 있고나서는 다시 7번의 화재가 있고 풍재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 삼재(大三災)가 1번 있기에는 화재가 56번, 수재가 7번, 풍재가 1번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64번의 대재(大災)를 거쳐서 이 지구는 완전히 허공으로 돌아갑니다. 화재(火災)가 일어날 때에는 태양이 10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도 적도 같은 데는 뜨거울 때 사람이 나서면 머리가 막 벗겨질 지경인데 해가 10개가 나와 쪼이면 지구가 몽땅 불덩어리가 되어 다 타고 맙니다. 이렇게 하기를 화재가 7번이나 하고 나면 그 뒤에 상대적으로 수재가 1번 오는데 온 지구가 물로 뒤덮이어서 모든 물체는 다 썩어 무너집니다. 그리고 나면 다시 화재가 나서 태양이 10개나 나타나 가지고 태워서 온 천지가 뜨겁게 탑니다. 이렇게 하기를 7번 하면 수재가 1번 있고 이렇게 하기를 7번 하면 화재가 49번이 되고 수재가 7번이 되는데 그리고 다시 7번 화재가 있은 뒤에 풍재가 옵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모든 동물, 식물 다 없어지고 지구도 다 부서집니다. 이것을 대겁의 삼재(三災)라고 하여 대삼재(大三災)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지구가 다 없어지고 허공으로 되는데 이렇게 부서지는 동안이 20소겁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일대겁(一大劫)은 80소겁이 되는데 20소겁을 1중겁(一中劫)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지구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의 20소겁이 1중겁이고 지구가 머물러 있는 주겁(住劫)의 20소겁이 1중겁, 부서지는 동안의 괴겁(壞劫)이 20소겁이 1중겁, 다 부서져서 허공으로 있는 공겁(空劫)의 20소겁이 1중겁 이렇게 해서 1대겁은 4중겁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네 개의 과정을 통과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별이든지 해든지 달이든지 다 한가지 이치로 성겁이 있고 주겁이 있고 괴겁·공겁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성·주·괴·공의 무상이 있고 이 사람의 몸뚱이에는 생노병사가 있고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잘 생겼다고 좋다고 엎어질 듯 야단이더니 나중에는 슬그머니 권태증이 나 가지고 보기 싫어집니다. 날마다 한 시간도 안 빠지고 가더니 이제 이틀에 한 번씩 가기 시작하고 차차차차 나중에는 찾아 와도 보기 싫을 지경으로 됩니다. 그렇게 그 사람 좋아하던 마음이 딱 없어지고 그래 가지고 나중에는 미운 생각이 앞서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미운 생각이 차차차차 없어져 가지고 또 좋아하는 생각이 납니다. 「아이고 불쌍해라 너무했다.」 이렇게 변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한 생각이 생겨 가지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벼락같이 꼭 그대로 내가 죽어도 해야지 하고 글씨를 배운다, 문장을 배운다, 소설가가 된다 하고 죽어도 한다고 이렇게 서둘다가도 슬그머니 하기 싫어지는 때가 옵니다. 남녀간에 연애하는 경우에도 이렇게 처음에는 서로 좋아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그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남아 있는 동안을 주(住)라 하고 좋아하는 도수가 자꾸 식어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때를 이(異)라 하고 차차 서로 지조가 없어져 쳐다봐도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좋다는 마음이 하나도 없어진 때를 멸(滅)이라고 합니다.

중생의 마음에 생·주·이·멸 이것이 있기 때문에 몸에 생노병사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이지구와 세계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다 순전히 마음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에서 겁이라 할 때는 흔히 대겁(大劫)으로 칩니다. 그리고 지구가 성겁(成劫)·괴겁(壞劫) 때에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가만히 있는 20증감 동안의 주겁(住劫) 때에도 현상이 변화하고 수륙(水陸)이 갈리고 그럽니다. 지축(地軸)의 방향이 바뀌어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는 것이 다 그것입니다. 산꼭대기 높은 데 가서 조개껍질 같은 게 붙어 있는데가 더러 있습니다. 육지와 바다가 갈린다는 걸 부처님께서 늘 말씀을 해 놓으셨는데 그런 예로 봐서 이 지구가 항상 안전하게 있는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주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도 얘기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듯이 지구도 역시 그런 변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상계인 이 땅덩어리도 그렇게 믿을 수 없는 무상한 존재이고 몸뚱이도 믿을 수 없는 허망한 것입니다.

 

▶호법징계에서 포기된 중생

예전에 묘향산(妙香山)에 법사가 한 분 있었는데, 그 분이 다른 건 다 중노릇 잘하는데 한 가지 곡차(穀茶), 곧 술을 자십니다. 가끔 술집에 나가서 곡차를 한 잔씩 먹고 들어오고 그랬는데 한 번은 그 스님이 화엄경 강의를 하게 됐습니다. 그 곡차 팔던 노인도 법회에 참석했는데 평소에 자주 만나니까 서로 허물없이 농도 하는 그런 처지인 모양입니다. 그 노인이 한 번은 농으로 ‘곡차를 먹으러 왔을 때는 술주정꾼이더니 그 법상에 딱 올라가니 제법 부처 같네.’ 이러면서 놀려 줍니다. 그래 그 노장님이 그러지 말라고 그랬지만 노파는 계속해서 자꾸 농을 하므로 그러면 신상에 좋지 않다고 그랬는데 그만 사흘 만에 술장사하는 보살이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신장(神將)들이 호법(護法)한다고 그러지, 그 스님 마음이 나쁘거나 불보살님이 그러지는 않습니다.

해방 전 한일 합방한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도량에서 가사를 만드는 불사를 한다든지 탑을 조성(造成)한다든지 이런 경전을 인쇄해서 만든다든지 이런 도중에 승려나 신도 간에 개고기 먹고 모르고 들어갔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피를 토하고 엎어져서 죽습니다. 또 승려도 일주일 이상 밖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양치질하고 기도하고 들어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중이고 무엇이고 벌을 받습니다. 그렇던 건데 요사이 같아서는 다 때려 없애야 할 판이니 절에 남아 있을 사람도 없을 정도이므로 이제는 안 그럽니다. 그러나 언제 또 완전한 도량으로 되면 다시 그렇게 됩니다.

경상도 금천군 김장이라고 하는 데가 옛날 성주군(星州郡)인데 산꼭대기 올라가면 해인사 가야산(海印寺 伽倻山)이 앞으로 다 보이는 높은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한 절에서 아무렇게나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사탄 중들이 술 고기 먹고 이런 사람들이 들어가면 또 산신(山神)이 옹호(擁護)를 안 해서 감자든지 무 배추 갈아 놓으면 돼지가 와서 다 뜯어 먹고 밭곡식 해 놓으면 다 헤쳐 버리고 안 됩니다. 수행을 어렵게 하고 공부를 잘하고 중노릇 제대로 하는 이가 거기 있으면 산돼지가 옆에 새끼를 수십 마리씩 낳아 가지고 절 밭 옆으로 지나가면서도 밭에 들어올 생각도 안 합니다. 그 밑에 마을로 내려가서 무 감자 밭을 자꾸 뒤지고 일 년을 한결같이 그러다가 그 스님 떠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그때에는 또 뒤져서 먹어 버립니다. 이것은 순전히 산신이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설악산 봉정(雪嶽山 峰頂) 같은데도 6·25 사변에 부서져서 새로 지었는데 거기에 한 동냥중 땡추가 와서 주인이 되어 있을 적인데, 한 늙은 영감 신도가 백일기도한다고 가서 드러눕지 않고 백일 동안 잠을 안자고 아랫목에 딱 앉아서 정 고단하면 조금 졸고 백일 계속해서 기도를 한 사람이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때 봉정암의 이 중이 땡추가 되어 그저 동량해다가 술 고기 먹고 바람피우고 그럽니다. 냉면집에 가면 엎어 놔달라하여 밑에다 고기를 놓으라는 뜻입니다. 이 중이 어디를 가서 한 보름 있다가 들어오더니 저녁에 누워서 잠을 한잠 곤하게 자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에이! 꿈도 고약하다, 고약하다.」 중얼거립니다. 그래서 노인이 「무슨 꿈을 꾸었느냐?」 「아, 수염이 허연 영감이 오더니 나를 보고 대단히 나무라고 날더러 이제 네가 버릇을 안 고치면 우리 집 개를 보내겠다고 하며 대단히 꾸중을 했습니다.」 영감이 가만히 앉아서 들어보니까 이 이놈의 중이 어디 가서 나쁜 짓하고 온 것으로 짐작을 했습니다. 설악산 산신이 본래 참 영감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이튿날 아침을 먹고 앉아서 젊은 중에게 「당신이 암만해도 어디 가서 좋지 못한 짓을 한 모양이니 이제 아주 끊어야지 여기 설악산 산신을 그렇게 봐서 안 됩니다, 요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개를 보낼 것이니 조심하시오.」 그러니까 땡추중 말이 「꿈이라는 건 다 헛 건데 뭐 별 것 아닙니다.」 그러면서 인과도 모르고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한 달쯤 지난 뒤에 또 동량을 나간다고 하더니 한 보름 있다가 또 들어왔는데 저녁을 해 먹고 이러고 영감은 아랫목에 앉아 있고 그 중은 옆에 누워 자는데 밤 12시쯤 해서 문 밖에서 큰 벼락 치는 소리가 납니다. 산중의 절 문은 미닫이문 닫고 그 안에 보통 살문 닫고 그러고 방에 들어오면 또 살문이 있습니다. 산중이니까 문이 튼튼하게 짜서 대개 세겹인데 와지끈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탁 열리면서 그 중을 데꺽 집어 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영감님도 혼이 나가서 기도하던 정신도 없어져 가지고 가만히 앉아 멍청해졌다는 것입니다. 설악산이 음력 칠월 그믐께 팔월 초승만 되어도 상당히 춥습니다. 아무리 삼복중이라도 문을 안 닫고는 못 자고 햇볕이 잘 나는 날이 아니면 물을 따뜻하게 데우지 않고는 목욕을 못할 정도로 기후가 찹니다. 이 영감도 날이 새도록 문을 못 닫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해가 높이 뜨고서도 다리가 안 펴져서 나갈 생각도 못 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손부터 움직여 가지고 전신만신을 주물러 가지고 살살 다리도 뻗어 보고 한 나절 그런 뒤에야 나가서 식은 밥 있는 것 좀 데워 먹고 그랬는데도 겁이 나서 나갈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한참 뒤에야 보니까 마당 한쪽에서 위 탑으로 올라가는데 큰 바윗돌이 삐딱하게 누워 있는데 거기다가 턱을 탁 부딪쳤는지 피가 묻어 있고 대소변을 본 것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오세암이라는 큰 절로 수족(手足)을 벌벌 떨며 내려가는데 한 시오리쯤 내려가면 수석(水石)이 좋은 데가 있습니다. 거기를 내려오니까 땡추중의 목은 목대로 떼어서 바윗돌 위에 조각품 모양으로 얹혀 놓고 사지를 찢어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창자는 창자대로 여기 저기 나무에 걸어 놨더라는 겁니다. 하나도 먹지는 않았는데 그걸 본 이 영감은 그만 탁 주저앉아 정신을 못 차린 채 얼마를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그대로 오세암을 내려가는데 하루 종일 걸려 가지고야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화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봉에서 산을 넘어 한 오십 리쯤 내려가면 들 복판에 외딴 집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집이 있고 한 백석 하는 집인데 그 집 며느리와 동량중이 눈이 맞았던 모양입니다. 그날 저녁에 그 호랑이는 동냥중을 발기발기 찢어서 나무에 걸어 놓고는 그길로 그 집으로 가서 그 집 며느리가 누에고치로 실을 뽑는다고 앉아 있는데 뒤 창문으로 발을 집어넣어 머리채를 확 잡아채서 끌어내는 바람에 창에 걸려서 머리만 쏙 빠져 버렸습니다. 20년 전까지 그 노인이 80노인이 되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내가 청봉에 있을 때 그 곳을 지나가다 어느 정자나무 밑에서 쉬는데 웬 영감이 내가 청봉에 있다고 그러니까 저 집이 외딴 집으로 있던 거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해 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무꾼이나 채벌꾼들이 거기 가서 명태를 사다 먹든지 산돼지를 잡아서 솥에다 삶아 먹든지 하는 것은 그것은 또 속인이니까 내 버려둡니다. 그러니까 중노릇하기란 이렇게 어려운데 법을 차차 세워서 사찰정화가 되어 참으로 계행을 지키는 이런 이들이 있는 그때는 모두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모여 온다고 그럽니다. 천당에서도 오고 산에서도 오고 시방(十方)에서 와서 날마다 순시하고 그래서 잘못하는 게 있으면 일벌천계(一罰千戒)로 나쁜 한 사람 벌해 가지고 다른 천명이나 만 명 대중이 정신 차리도록 하느라고 특별히 그런 짓을 합니다.

요새 우리는 이런 호법징계(護法懲戒)에서 포기(抛棄)된 불쌍한 대중입니다. 그러니까 「길가에 앉아서 똥 누는 사람은 시비를 해야 하고 길 한복판에 궁둥이 내 놓고 앉아서 똥 누는 사람한테는 시비를 못한다.」고 그런 말과 같습니다. 길 가에 똥 누는 사람은 한쪽 어디에 조금 양심이 남아 있으니까, 꾸중하면 그 마음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나무라면 그만 옷을 올려 입고 도망갈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복판에 똥을 누는 사람은 각오(覺悟)가 있는 사람이고 양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듣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런 것 같이 영 그만 세상이 혼란해져서 마구잡이로 되면 다 지옥으로 떨어질 판이어서 응징해 봐야 별수가 없고 제 발로 걸어서 지옥 갈 판이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천신들의 서원

진주에 가면 송보살이라고 내가 어려서 봤는데 길가에 다니다가 만나서 우리가 「어디가십니까?」 인사를 하면 「응」하고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기만 하는 그런 여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내가 중이 된 뒤 그이가 거진 구십살이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집이 가난한 살림인데 절에 불공이 있으면 와서 거들어 주고 떡 부수러기나 얻어다 아이들 먹이는 이런 형편입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염불을 자나깨나 하고 있는 그런 보살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뒤에 내가 진주에 가보니까 시내 연화사(蓮華寺) 포교당(布敎堂)에 낮설은 탑이 하나 생긴 것을 보고 「이게 무슨 탑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애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송보살이 자기가 죽기 나흘 전에 진주 신도 다 찾아보면서 「내가 나흘 뒤 아무일 저녁을 먹고서 어둑해질 때 가겠으니 부디 염불 잘하십시오. 나는 먼저 극락세계 가니까 같이 거기 가서 만납니다.」 이런 인사를 하고 다니는데, 사람들은 아마 나이가 하도 많은 노인이라 망령이 들어서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모두 곧이듣지를 않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먹고 나서 손자고 누구고 식구들을 아무데도 못 가게 하고는 불러 앉혀 놓더니 「내가 오늘 저녁때 해질 무렵에 간다. 너희들은 부디 딴 짓 하지마라, 극락도 있는 거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는 줄 알고 또 사람이 부처가 되는 법이 있으니 잘 명심(銘心)하고 신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부를 하더라는 겁니다. 일념으로 마음이 통일이 되어 놓으니까 그 무식한 노인이지마는 밝은 마음의 혜가 열려서 무얼 알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오후가 되니까 가서 물 데워 오라고 해서 목욕을 하고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는 「너희들 밥 먹고 나서 아무데도 가지 마라. 저녁 일찍 해 먹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식구들은 할머니가 뭐 정신이 돌았거나 망령이 든 것 같지도 않게 태연하고 엄숙하니까 행여나 싶어서 식구들이 모두 시키는 대로 저녁 일찍 해 먹고 모두 아이들도 못나가게 하고 그랬는데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요를 펴라고 해서 요를 펴니까 요 위에 앉아서 또 얘기를 합니다.

「이 세상이 다 무상하고 여기는 고해고 불붙은 집이고 그러니 아예 방심하지 말고 네 일 좀 해야지 만날 육체, 몸뚱이 그렇게 가꾸어 줘 봐야 갈 때는 헛수고했다고 인사도 안하고 나를 배반하고 가는 놈이며 몸뚱이라는건 그런 무정한 놈이니 그 놈만 위해서 그렇게 살지 말아라. 나도 평생에 염불해서 이런 좋은 수가 있지 않느냐? 90장수(九十長壽)도 하고 병 안 앓고 꼬부라지지도 안하고 그리고 가는 날짜 알고 내가 지금 말만 떨어지면 간다. 곧 갈 시간이 되었어. 이러니 너희들도 그랬으면 좀 좋겠느냐? 두 달이고 일 년이고 드러누워 똥을 받아 내고 이래 놓으면 그 무슨 꼴이냐? 너희한테도 빌어먹을 것도 못 빌어먹고 모자간에 서로 정도 떨어지고 얼마나 나쁘냐? 부디 신심으로 염불도 하고 부디 그렇게 해라.」

이렇게 말한 뒤 살며시 눕더니 사르르 잠든 것처럼 가 버렸는데 그리고 얼마 있다가 그만 그 집에서 굉장히 좋은 향내가 나고 또 조금 있으니 서쪽을 향해서 환히 서기방광을 해서 소방대가 불났다고 동원이 되기까지 했다는 겁니다. 불교 신도들이 이 소문을 듣고 송보살이 예언 한 대로 돌아갔다, 열반을 했다, 이래 가지고 진주 신도라는 신도는 수천명이 모여 와서 송장에 대해서도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무수배례(無數拜禮)하고 마당에서 길에서 뜰에서 신도들이 꽉 차게 모여 가지고 절도 하고 돈도 내고 이래서 장사를 아주 굉장하게 화장으로 지내는데 사리가 나와서 사리탑을 지어 모셔 놓은 것이 연화사에 있는 낯선 저 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것만 불러도 이렇게 됩니다. 아무 뜻도 모르고 극락세계 갈 거라고 그것만 해도 공덕이 되고 정신통일이 되어 혜(慧)도 열립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상하권 되는 이 금강경을 죽 한 번 읽는데 좀 빠르면 30분 걸리고 남이 듣기 좋게 외우면 한 시간은 걸립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하루에 한 번씩 외도 처음에 외울 적에는 조금 힘을 들여야 하겠지마는 하루에 한 장 외고 그 다음에 또 한 장쯤 외고 그 다음에 연속해서 외우면 됩니다. 처음 배울 때부터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부터 자꾸 줄줄 따라 외기 시작하면 되는데 80노인들도 석달을 공부하고 반년이 걸려서 다 외운 이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법문 듣고 나면 좀 읽어 보고 싶고 외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먹칠해 놓은 종이부수러기지마는 그 내용이 이렇게 굉장한 것이기 때문에 천룡팔부(天龍八部)라든지 저 위에 28천(二十八天)·무색계천(無色界天)의 사람까지도 부처님 열반하실 때 전부 와서 부처님 법 옹호할 것을 서원(誓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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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聞說是經(문설시경)하시고 深解義趣(심해의취)하야 涕淚悲泣(체루비읍)하사 而白佛言(이백불언)하사대 希有世尊(희유세존)하 佛說如是甚深經典(불설여시심심경전)하심은 我從昔來(아종석래)의 所得慧眼(소득혜안)으론 未曾得聞如是之經(미증득문여시지경)이니이다 世尊(세존)하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信心淸淨(신심청정)하면 卽生實相(즉생실상)하리니 當知是人(당지시인)은 成就第一希有功德(성취제일희유공덕)이니 世尊(세존)하 是實相者(시실상자)는 卽是非相(즉시비상)이니 是故(시고)로 如來說名實相(여래설명실상)이니이다 世尊(세존)하 我今得聞如是經典(아금득문여시경전)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는 不足爲難(부족위난)이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歲(약당래후오백세)에 其有衆生(기유중생)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하면 是人(시인)은 卽爲第一希有(즉위제일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此人(차인)은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我相(아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인상중생상수자상)도 卽是非相(즉시비상)이라 何以故(하이고)오 離一切諸相(이일체제상)이 卽名諸佛(즉명제불)이니이다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不驚不怖不畏(불경불포불외)하면 當知是人(당지시인)도 甚爲希有(심위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來說第一波羅蜜(여래설제일바라밀)이 卽非第一波羅蜜(즉비제일바라밀)일새 是名第一波羅蜜(시명제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도 如來說非忍辱波羅蜜(여래설비인욕바라밀)일새 是名忍辱波羅蜜(시명인욕바라밀)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我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에 割截身體(할절신체)로되 我於爾時(아어이시)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아어왕석절절지해시)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應生瞋恨(응생진한)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又念過去於五百世(우념과거어오백세)에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하야 於爾所世(어이소세)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應離一切相(응리일체상)하고 發阿?多羅三?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니 不應住色(불응주색)하고 生心(생심)이며 不應住聲香味觸法(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生心(생심)이요 應生無所住心(응생무소주심)이니라 若心有住(약심유주)면 卽爲非住(즉위비주)니라 是故(시고)로 佛說菩薩(불설보살)은 心不應住色(심불응주색)하고 布施(보시)라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爲利益一切衆生(위이익일체중생)하야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니 如來說一切諸相(여래설일체제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又說一切衆生(우설일체중생)이 卽非衆生(즉비중생)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여래)는 是眞語者(시진어자)며 實語者(실어자)며 如於者(여어자)며 不?語者(불광어자)며 不異語者(불이어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法(여래소득법)은 此法(차법)이 無實無虛(무실무허)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心住於法(심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入闇(입암)하야 卽無所見(즉무소견)이요 若菩薩(약보살)이 心不住於法(심부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有目(유목)하야 日光明照(일광명조)에 見種種色(견종종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當來之世(당래지세)에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能於此經(능어차경)에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면 卽爲如來(즉위여래)--以佛智慧(이불지혜)로 悉知是人(실지시인)하며 悉見是人(실견시인)하나니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개득성취무량무량무변공덕)하리라

 

그때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알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참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이 경전을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예로부터 오면서 얻은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의 말씀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 생긴 것이오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줄로 마땅히 알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실다운 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실다운 상이라고 이름하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알아서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이 다음 세상 후오백세에 어느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고 알아서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이 사람은 <나라는 생각>도 없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살이라는 생각>도 없고 <오래 산다는 생각>도 없는 까닭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나라는 생각>이 곧 관념이 아니오며 <남이라는 생각> . <중생살이라는 생각> . <오래산다는 생각>도 곧 관념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일체의 온갖 상을 다 여읜 것을 부처님께서라 이름하는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인 줄 알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한 제일바라밀이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을 인욕바라밀이라 한다고 여래께서 말하였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뚱이를 베이고 찢기었을 적에 내가 그때에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었나니,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내가 지난 날 마디마디 사지를 찢길 때에 만약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마땅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또 생각하니 과거 오백세 동안 인욕선인이 되었던 저 세상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없었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중생살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오래산다는 생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이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마땅히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머물은 바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설사 마음에 머물은 것이 있어도 머물은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살은 마음을 물질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말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보시하나니, 여래께서 말한 일체의 상도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온갖 중생이라 한 것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진여의 말을 하는 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얻은 바 법은 이 법이 진실한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어두운 데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 같고,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밝은 눈으로 햇빛이 밝게 비칠 적에 갖가지의 온갖 물건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면 곧 여래께서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나니 한량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하느니라.』

 

 

第十四. 離相寂滅分-(초현상의 적멸 경계

 

[科 解]

 

이상적멸(離相寂滅)이라 함은 제상비상(諸相非相), 곧 모든 상이 상이 아니므로 그 상을 모두 떠나 버리면 적멸(寂滅)해진다는 뜻입니다. 마음 가운데 일체 죄악이 다 정적(靜寂)해지고 모든 혼란이 다 없어지니까 적멸하게 되고 일체 악한 생각이 다 무너져 없어지니까 적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적멸을 앞세우니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유생(儒生)들이 종래 욕해 왔었습니다. 허무적멸지도라고 욕을 하긴 했지만 한쪽만 보면 그게 옳게 말한 소리이기도 합니다. 금강경 이론을 듣고 「참 그렇겠구나」하고 좋아하며 쓸데 없는 번뇌·망상·지식을 청산합니다. 자꾸 청산해서 청산했다는 생각도 내면 안되고 「내가 부처가 되리라 해도 안되겠구나.」 하는 것도 번뇌이고 망상입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들어가면 점점 백척간두(百尺竿頭)로 마음이 깊어 들어 갑니다. 나중에는 송곳 끝도 올려 놓을 데가 없이 올라갑니다. 이렇게 자꾸 해서 실제로 번뇌를 해탈하고 초월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참말로 적멸이 현전(現前)해 집니다.

그러므로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은 모든 상이 상 아닌 도리를 사무쳐서 번뇌·망상·현상을 여의고 본체자리, 산 보면 높은 줄 알고 물 보면 깊은 줄 아는 마음자리만 오로지 남아서 드러나는 도리를 밝히는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적멸이라고 허공처럼 아무것도 없는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소승(小乘)에 떨어집니다. 「나 혼자 생사를 해탈했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됐으니 그만이지, 우주가 깨지거나 온 중생이 고해(苦海)에 빠졌거나 말았거나 나 하고는 아무상관없는 일이다.」 하여 적멸만 지키고 있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가 됩니다. 그러므로 대승보살(大乘菩薩)은 이러한 적멸(寂滅)만을 지키고 거기에 빠져서 혼자만의 안락(安樂)에 만족하지않고 무심(無心)한 그 자리에서 마음을 내어 남을 위해 온갖 것을 다 보시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라는 것입니다. 곧 응무소주(應無所住)하여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보살행(菩薩行)을 뜻하는 이상적멸(離相寂滅)이라야 합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 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 如是之經

 

[解 義] 그때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걸 듣고 그 이치가 거룩하고 묘한 데로 돌아가는 것을 깊이 잘 알고서는 감격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죽죽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흐느껴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기를, 『참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경전을 설명해 주신 것은 제가 40년 전부터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며 공부를 해서 얻은 저의 지혜 안목으로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전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40년 후인 지금에서야 금강경의 정체를 알아듣겠아오며 여지껏 이렇게까지 깊은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은 듣지 못했사옵니다.』하고 감격해서 사뢰었습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란 경전(經典)도 있고 염불(念佛)도 있고 계율(戒律)도 있지만 오조홍인(五祖弘忍)대사나 육조스님도 이 금강경을 가지고 단속을 해서 범부를 딱 벗기는 도리를 밝히셨습니다. 육조대사께서는 금강경에「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듣고 그 자리에서 견성을 했으니 이 금강경이 그런 것인데, 중생들은 문자를 잘 못 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절에서는 강당(講堂)에서 먼저 경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선방(禪房)을 만들어서 참선시키고 그랬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역시 그러셨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의 도인(道人)이라 하면 선교(禪敎)를 다 통해야 되는 것이므로 세계에서 제일 어렵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모두 자기 전문이 따로 있고 그 전문분야에 따라 절이 따로있습니다. 금강경 하면 금강경 잘하는 법사가 금강경만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당을 만들어서 그 금강경 전문강원(專門講院)에 학인(學人)들이 경책(經冊)을 싸가지고 다니게 마련입니다. 우리 한국 강사(講師)는 무엇이든지 잘해야 하고 또 견성(見性)까지 해야 선지식(善知識)이라 하게 됩니다. 이런 선지식네들의 말을 들어 보면 훨씬 티를 벗어서 탁 트입니다. 이렇던 한국 불교가 근래에 와서 잘못돼 가지고 「경전 보지 마라, 그걸 보면 사람 버린다. 그 경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공공연(公公然)하게 말하면서 「그 맛있는 고기를 무엇 때문에 안먹느냐? 먹기도 좋고 기도 나고 건강해져서 속히 성불(成佛)한다.」는 겁니다. 「시래기 산초나 뜯어 먹고 노랗게 시들어 앉아 있으면 그거 언제 성불할 수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변 했습니다. 경을 못 보고 발심이 잘못 되면 자기도 잘못 되고 남도 역시 그릇됩니다.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하는 이런 사람들의 과보(果報)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도 납습니다.

 

原 文 :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解 義]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을 얻어 듣고서 신심(信心)이 청정하면「틀림없이 그렇겠다. 꼭 그와 같이 해야 겠구나. 사실 그런 게 있다. 내가 그런 존재다. 이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로구나. 내가 듣고 앉아 있는 이 마음자리가 부처님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리겠구나. 단지 현상계를 보고 좋으니 나쁘니 하고 집착하는 그것이 허물이구나. 그러니 일체 생각만 내 버리면 되겠구나.」하는 실다운 상이 생길 것이옵니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나중에는「아아 이것도 틀렸구나.」하고 차근차근 밤 껍데기 벗기듯이 한겹 두겹 벗겨 들어갑니다. 밤 껍질 자꾸 깍다 보면 재미가 나서 나중에 밤도 어디로 가고 없어지도록 깎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영락없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이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참말로 철저하다는 말도 되고 때 없는 신심이니까 아무 것도 붙은 게 없는 것, 티 없는 옥과 같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즉 실상(實相)입니다. 곧 그 자리에서 그 사람한테는 실상자리가 생길 것이니, 실상자리만 남아서 즉견여래(卽見如來)하면 여래를 보고 곧 부처가 될 겁니다.

『마땅히 제일 가는 마지막 최후위 참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는 사람인 줄 알겠나이다. 그 법문을 이렇게 듣고 그 자리에서 실천해 가지고 실상자리까지 체득해 버리니 참 맹렬한 사람이오며 아주 약고 영리한 사람이옵니다.』 그러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이 실상이라는 것도 상이 아니고 있는 것이 아니오니 이름이 붙을 수 없는 자리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 실상이라 이름하셨아옵니다.』(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수보리존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조리가 논리에 맞는지 안 맞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것 다 정리해 버리고 즉견여래(卽見如來)한 자리입니다. 신심이 청정한 그 자리, 앉은 자리에서 얻어 낸 그 실상이라는 것을 무엇이든 얻은 것이 있다고 잘못 알까 염려하여 이렇게 또 그 잘못된 생각 . 덧붙이기 생각 . 가질 거 있는 것으로 아는 그걸 떼려고 하신 겁니다. 사실 그 이름을 실상이라고 했지마는 그것을 실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객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것이 실상이 아닙니다. 실상이라고 하는 인식을 일으키면 벌써 인식하는 주관이 있고 인식된 객관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게 실상도 아니고 실상이 아닌 것도 아니므로 그래서 이름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정리해서 번뇌 망상을 해탈하면 실상이 현전(現前)한다, 견성한다.』 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품이 다 드러나면 사실 그것은 성품자리도 아닙니다. 성품자리라고 하는 것은 견성하기 전에 내가 말하는 그 근본자리인데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지 아는 사람한테는 그것을 성품이라 하면 야단 벼락을 맞을 소리입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논리로는 「이것이 성품이 아닙니다. 성품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해서 실상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겁니다.」 이래야 논법에 맞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논법으로는 「세존이시여! 이 실상자리라고 하는 것은 곧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해야 할 것인데, 「실상이 아니므로 이것을 실상이라고 합니다.」했으니 이 말의 조리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공부하는 사람이 구공만 지키고 앉았으면 나한(羅漢)이고 소승이 됩니다. 그래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하는 데 범부처럼 보시한다는 생각에서 보시해도 안 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그러니 무주색(無住色)하고 보시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적멸(寂滅) 그것 하나만 자꾸 내세우면 그 구공(具空) 그것만 지키라는 말로 돌아가게 되는 데 이 금강경에서는 구공을 체득한 사람이거나,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응무소주해서 자꾸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른 점입니다. 이런 뜻에서 이름을 실상이라고 한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도 어긋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맞는 것인가 맞추어 보십시오.

우리가 견성하기 전이라도 견성할 수 있는 발심이 잘못되면 가령 몇 천만 겁을 선방(禪房) 한 복판에 앉아 참선만 해도 그 사람이 부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신심이 똑바로 발심(發心)되어야 합니다. 범부 때 불교를 무엇 때문에 믿는지 어느 곳으로 향해서 성불할 수 있는 것인지 발심이 바로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사신(邪信)이 앞서 있으면 참선보다 더한 방법으로 앉아 정진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 난 그때 부처님 마음이나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중생으로서 연등불한테 처음으로 발심한 그 때 초발심한 그 마음이나 다 무분별(無分別)입니다. 그 두 마음이 다르지 않고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처음 발심하는 마음과 마지막 성불하는 마음, 그 두 마음 가운데 처음 발심을 잘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글에도 「發心究竟二不別如是二心先心難(발심구경이불별여시이심선심난). 마음을 처음 낸 것과 마지막을 성취한 것과 그 둘이 다르지 않은데 이 두 마음 가운데 먼저 낸 첫 마음이 어려우니라.」라고 한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발심(發心)을 바로 해 가지고 화두(話頭)를 잘 드는 것 그것이 수좌(首座)이고 중이지 다른 것은 중생과 똑같습니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을 수 있고 남녀도 서로 알고 다른 것 똑같은데 화두(話頭) 드는 그것이 다릅니다.

 

原 文 :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 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解 義] 보살님네들은 팔지(八地) 이상 십지(十地)·등각(等覺)보살까지 부처님께서 거의 다 되신 이런 분들도 부처님께 법을 청하실 때에는 역시「앞으로 말세가 돼서 법이 해이(解弛)해지면 계정혜(戒定慧)삼학(三學)이라든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든지 보살만행을 닦을 적에 자기자신을 위해서 대도(大道)를 수행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둘째 셋째 넷째이고 단지 그날 그날 생활을 계획하기 위해 무량한 죄만 지어서 스물 네 시간을 심지어는 꿈에 나가서까지도 무량한 죄만 짓는 이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미리 좀 법을 설해 주십시오.」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청합니다.

이런 경문(經文)을 가만히 읽다가 생각하면, 현재 우리 목전에 세계 인류가 이렇게 도탄(塗炭)에 빠져서 참 그야말로 얼키고 설켜서 수백명이 물에 한꺼번에 빠져 가지고 서로 저만 살겠다고 남을 아래로 짓눌러 밟고 위로 올라서려고 하다가 그게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죽어 가는 판입니다. 오늘도 그렇고 옛날도 그랬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혼란(混亂)한 게 대한민국일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가운데 없는 사람 살아나갈 양식을 돌보지 않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 잘 살겠다고 긁어 모아서 한시간에도 몇 십만원씩 소비하고 그저 주색잡기에 두드리고 놀고 먹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한량 없을 겁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이런 것을 보고도 눈물은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고 삽니다.

그렇지만 2천년, 3천년 전에 보살님들은 오늘날 형편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불쌍한 중생들을 생각해서 부처님께 법을 미리 좀 설해 주시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청합니다. 마치 어린 귀한 자식이 몹쓸 중병에 걸려서 숨이 넘어 가려고 헐떡이고 신음하는 것을 보는 부모마음처럼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어서 애태워하는 불보살님의 대자비를 경을 읽다 보면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절대적으로 믿고 그걸 그대로 잘 알고 받들어 실천하고 지니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하오나 만일 당래세 후 오백세 2천 5백년 뒤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해수지(信解受持)한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그랬습니다.

 

原 文 :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 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 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解 義] 어째 그러냐 하면 이 사람은 곧 수보리처럼 금강경을 옳게 알아들은 사람일 것이니 아상(我相)이라는 주관(主觀)의 관념이 없어진 사람이고 남이라는 객관에 대한 관념, 곧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人相)이 없어질 것이고 다 허망한 존재이니까 시집간다 장가간다 살림한다 하는 중생살이(衆生相)하는 생각도 없고, 설사 시집가고 장가 간다하더라도 마누라니 남편이니 그런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우리 남편이라는 게 인상(人相)이고 내가 마누라라는 생각이 아상(我相)이고, 살림살이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곧 중생상(衆生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 살림살이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곧 중생상(衆生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 살림살이 차리는 그런 생각도 다 떨어져 버려서 내가 누구집 맏며느리인지 누구 맏아들인지 그런 것을 다 없애 버리고 나면 앞뒤가 끊어진 인간이 됩니다.

또 수자상(壽者相)이 떨어져서 이 몸뚱이가 죽고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니까, 이것이 사는 것이고, 죽을 수도 없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 그렇게 죽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아상이 즉시비상(我相卽是非相)이어서 아상이 곧 아상이 아니고, 맹꽁이를 가지고 아상(我相)으로 삼는 것처럼 몸뚱이를 가지고있는 그 당시에도 확실한 실체가 아니라 번개가 번쩍하듯 찰라의 도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 알아듣는 사람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다 안 끊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금강경을 똑바로 알아듣는 사람이 무슨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상·수자상이 즉시 비상(非相)이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상을 다 떠나 버리고나면 그것이 모든 부처님께서기 때문입니다.』(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이런 사람은 곧 부처님 경지에 들어섰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 사상(四相)이 완전히 녹아 없어지면 불과(佛果)를 증득한 셈입니다. 수보리존자 모양으로 구공(俱空)을 증득해서 아직 불과는 증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사상(四相)은 다 떨어졌으니까 구공 한 쪽으로는 부처가 다 된 셈이 아닙니까?

 

原 文 :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 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가 분명히 자신 있게 들어선 것을 보시고 참 고마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 그렇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금도 겁내거나 근심 걱정 다 없이 참 그렇겠다고 긍정을 한다면 그래서 청정한 신심을 내고 참다운 실상을 낸다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이 참 심히 희유한 사람이니라.』

이렇게 희유한 것을 맹구우목이요 침개상투라(盲龜遇木 針芥相投)라는 문자로 비유합니다. 아주 힘들다는 뜻입니다. 태평양 한 복판의 제일 험하고 깊은 곳에 두 눈이 다 먼 거북이가 하나 있었는데 삼천년 만에 한 번씩 물위에 머리를 내 밀고 떠올라 구경은 못해도 맑은 공기를 한 번 크게 호흡을 하고 들어 갑니다. 그런데 요행히 바다 가운데 거북이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 널판에 머리를 걸쳐 놓을 수 있어야 숨을 쉬게 됩니다. 목을 걸쳐 놓고 둥둥 떠서 헤엄칠 것도 없이 한참을 있다가 물속 생각이 나서 다시 고개를 빼고 내려가면서도 참 어쩌다가 평생에 이런 좋은 기회를 한 번 만났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삼천년 만에 또 올라왔는데, 구멍 뚫린 널판 또 만날 수는 없을는지 우리네 참선하듯이 간절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가 풍파에 시달려 태평양으로 갔다 대서양으로 갔다 인도양으로 갔다 북대서양으로 갔다 하는 판이므로 눈먼 거북이로서는 날마다 그것만 찾아서 몇 십만년을 헤멘다 하더라도 못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삼천년 만에 한 번 나올 때 우연히 썩은 나무 구멍에 목이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우므로 이것을 어려운 것애 비유하여 <맹구우목>이라 합니다.

침개상투(針芥相投)는 하늘 가운데도 맨 꼭대기 하늘인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바늘을 떨어 뜨려 이 땅 위에 지정된 곳에 겨자씨를 맞히는 것을 말합니다. 바늘 끝으로 겨자씨를 맞히기로 말하면 한 길위 한 미터 위에서도 어려울 것인데 높은 빌딩 위에서 맞히라 거나,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떠서 맞혀보라 하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초음속(超音速) 비행기나 인공위성(人工衛星)을 타고 몇 평생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하늘 꼭대기의 아득한 먼 거리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조계사(曹溪寺) 마당에 작은 접시를 놓고 그 위에 겨자씨를 담아 가지고 맞히라 하면 그것은 아마 불가능의 불가능이 될 것입니다. 겨자씨(芥子)는 식물 중에서 가장 열매가 작으므로 흔히 제일 작은 것에 비유해서 씁니다.

이 세상에 아주 드문일,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침개상투(針芥相投)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불경(佛經)에 종종 많은데 우리가 사람의 몸뚱이로 타고나기가 이렇게 어렵다고 그럽니다. 사람 중에서도 대장부 남자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또 남자로 태어나도 불법(佛法)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교 이론을 배운다 하더라도 참다운 정법을 배운다는 것, 가령 금강경을 연구한다고 하면 금강경을 문자로 생각으로만 배우지 말고 부처님 뜻에 따라서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떨어진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사신(邪信)이 앞서 놓으면 천하 없는 짓을 해도 성불할 수 없습니다. 참선이 아니라 우참선을 해도 근본으로 꼬부라진 생각이 붙어 놓으면 안 됩니다. 신심이 청정해서 한 생각도 없는 실상(實相)을 배워야 합니다. 그 이론을 똑똑히 알아 가지고 단지‘이 무엇인가.’하나만 남고 과학이고 철학이고 종교고 이런 것은 더 할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단지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다 돼 버리는 것으로 딱 들어서야 합니다.

그러니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불법을 만나도 모두 의식적(儀式的)으로 불공·시달림이나 하고 식은 밥이나 벌어 먹고 사는 그런 불법을 하기가 쉽습니다. 또 「다라니를 한다. 염불을 한다.」해도 모두 무엇을 구하는 생각에서 하기가 쉽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서 염불을 하던지 주문을 외우든지 참선을 하든지 하는 정말 성불하는 방법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정법을 성취한 선지식(善知識) 밑에서 배워서 연구를 하든지 염불 참선을 하면 가령 경을 안 봐도 눈먼 장님이 눈 뜬 사람한테 끌려가는 것 한가지로 바른 길로 바로 갈 수 있으니까? 이게 참 어렵고 난득(難得)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 羅蜜 是名第一波羅蜜

 

[解 義]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은 구공소식(俱空消息)을 말하고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을 말하니 성불하는 데 근본법이 됩니다. 이 <智慧波羅蜜>이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제일 끝이 되지만 성불하는 데는 지혜를 제일 앞세워서 바로 들어가는 성불의 첫째 조건이 되므로 이것을 제일바라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래께서 제일바라밀을 말한 것은 이것이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라고 하셨는데, 공했다는 생각까지 다 떨어져 버려서 완전한 실상만 남아 있는 것, 이렇게 해서 온전한 자기 정신만 자유자재하게 된 그때라야 자기가 자기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고 객관의 어디에도 의지한 데가 없는 때입니다.(自由) 영감한테도 의지하지 않고 아들한테도 의지하지 않고 이 천지에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부처님한테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실상을 깨달으면 곧 내가 여래께서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일바라밀>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제일바라밀을 설했다」라는 이 구공(俱空)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완전히 몰락(沒落)되고 탈락(脫落)해 버린 참 순수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합니다. 자기 정신이 오로지 자기로 말미암아 저 하나만이 있다는 뜻으로 자유자재(自由自在)라 하는데, 그렇게 자유자재하여 딱 자기 마음만 오똑할 뿐이니 이렇게 되면 그때는 만법(萬法)이 자유가 됩니다. 안팍으로 마음대로 되는데 안이 먼저 자유자재해야 밖으로 자유자재합니다. 여기서 제일바라밀을 설했다 함은 법공(法空)해서 그것까지도 공했다는 생각도 내 버리는 구공소식(俱空消息)이어서 참말로 자유자재한 그것을 <제일바라밀>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내가 그 경지를 소개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 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時 若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瞋恨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 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解 義] 인욕이라 함도 참는 겁니다. 욕을 해도 참고 때려도 참고 현풍 곽씨네 깡패 처녀 하나 데려다 발심시켜서 사람 만들려고 그 신랑이 지독하게 참듯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공자(孔子)님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만들어서 여자 내쫒는 법을 두셨는데, 그 신랑은 안될 뻔한 일을 해낸 것을 보면 암만해도 불경을 본 사람이었는가 생각됩니다. 이 사람이 전생에라도 불법을 닦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보살이 나와 가지고 그 여자 하나 제도하라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걸 인욕이라고 하는데, 욕되는 걸 참을 뿐 아니라 남이 날 나쁘다고 입으로 욕을 하든지 때로 때리든지 칭찬을 하든지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억지로 참는 것도 참는 것이지만 생각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인욕에 참 굉장한 얘기가 나옵니다. 『어째서 그것이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저 옛날에 가리왕(歌利王)이란 폭군에게 사지(四肢)와 몸뚱이를 찢겼지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어서 성내거나 원한이 없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가리라는 말은 포악(暴惡)이란 뜻인데 아주 포악한 성질을 가진 임금입니다. 중국의 걸주(桀主) 같은 포악한 임금이 역사상에 더러 있습니다. 이 포악한 가리왕이 깊은 산으로 사냥놀이를 갔다가 자기 궁녀들이 산 속에서 수도하고 있는 인욕선인(忍辱仙人)과 얘기하는 것을 보자 노하여 칼로 사지(四肢)와 온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인욕선인이 과거세의 부처님의 전신(前身)이니 석존이 전세에 참는 공부를 하는 도인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인욕선인 시절의 내가 온 몸을 찢기어 죽어 가면서도 그 가리왕에 대해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때 이미 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그때 배까지 잘라서 창자를 끄집어낼 때 내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그 즉시에 원한이 일어나고 성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때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아픕니다. 우리가 당장 코를 벨 때, 참으려 해도 눈을 찡그려도 됩니다. 참을 수 없이 아플 때 안 찡그릴 수 있습니까? 팔이며 다리를 떼어 놓을 때 그렇게까지야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지독한 사람은 참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픈 것을 억지로 참는 것입니다. 6.25사변 직후에 경남 고성(固城)에서 공산당 청년이 한 사람 붙잡혔는데 고성 경찰서에서 잡아 놓고 고문을 합니다. 그때는 빨갱이라고 하면 고생하던 일을 생각해서 대번에 모두 씹어 먹으려하고 참 지독한 원수를 갚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참 똑똑하게 생겼고 얼굴도 잘 생긴 대학 졸업생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때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억지로 참는 걸 본 일이 있습니다. 이런 청년이 길을 잘 못 들어서 그렇지, 길을 바로 들어섰더라면 큰 일을 할 수도 있는 청년인데 그렇게 일찍 오사(誤死)를 한 그런 청년을 보고 몹시 애석해 한 일이 있는데 이것도 참는 것으로 참는 인욕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말씀에는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닌 경지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마음이 공해 있어서 아공·법공·구공(我空 法空 俱空)이 드러나 있게 되니까 이 몸뚱이를 탁 잊어버리면 전신을 송곳으로 쑤시고 불에 그슬러도 하나도 뜨거운 줄을 모르는 겁니다. 마음이 무심경계(無心境界)에 들어가서 생각이 없으면 경계가 침범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도 침범을 못하고 불도 행세를 못합니다. 그래서 육조대사께서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전부 네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림자라는 것보다도 있는 채로 내 마음이고 전부 허공입니다. 그러니까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어서 모든 상이 상 아닌 겁니다. 이런 무심으로 참는 게 정말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내가 또 생각해보니 저 과거에 오백생 동안을 계속해서 인욕선인 노릇을 했는데 그때에도 내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오백 생을 계속해서 한 번도 아상을 일으키지 않고 무슨 잡념이란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었느니라.』하십니다.

말세에는 괜히 대중 간섭하고 살림살이 간섭하고 남 시비하고 이래가지고 공부룰 해서 좀 알아 놓고도 그만 뒷수습을 못합니다. 그래서 아나마나하게 배워 놓은 겪인데, 이것 참으로 애타는 일입니다.

 

原 文 :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解 義]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이니라.』(須菩提菩薩應離一切相發阿?多羅三?三菩提心) 하셨는데 일체 생각이 떠나 버렸으면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데 발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호통을 하고 그 자리는 한 생각 까딲만 해도 안 되고 거기다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 한다는 말이 어디 붙을 수 있느냐고 큰소리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은 한쪽 눈만 가지고 한쪽만 공부한 사람입니다. 적멸(寂滅)에 들어앉아서 적멸을 체득했다는 생각도 없는 그 지경에서 비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해야 하겠다고 발심해서 불과(佛果)가 나타나도록까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경전도 더 봐야 할 것이고 용맹정진(勇猛精進)도 해야 합니다. 그런걸 모르고 공부하면 그만 낭패 당하고 맙니다. 그러니 이생기심이 주장입니다. 응무소주하되 이생기심하는 겁니다. 거기가서 응무소주하여 거기서 온갖 서원을 다 세우는 겁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그것이 곧 이생기심입니다. 또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는 뜻은 아직 불과가 증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서원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안 하면 또 아무 생각 없는 적멸 속에 천만 겁을 앉아 있어 봐야 불과(佛果)를 얻을 수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없고, 그야말로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생길 수 없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한 절대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똑똑히 마땅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라(不應住色生心) 물질에 주하지 말고 생심을 해라. 보살행 육바라밀을 행하라.』하셨는데, 이것이 이생기심하고 똑 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마땅히 색에 주해서 마음을 내지 말라.」이렇게 새기면 마음을 내지 말라는 데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생심하라. 저건 산이다 물이다 보는데 무슨 허물이 있느냐?」 그게 생심이고, 또 보시도 하고 인욕·지계·정진 하는 게 그게 생심입니다. 그러니까 색에도 주하지 말고 부주성향미촉법심(不住聲香味觸法心) 내지 불법까지라도 열반까지에라도 어디에고 마음을 두지 말고 <이생기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주성향미촉법의 법(法)에는 보리·열반까지 부처님 법·중생의 세속법 할 것 없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데에도 주하지 말고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정진하라 그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경문 중간에다가 토를 하나 더 달아서 「불응주색하야 생심하고」(不應住色하야 生心하고) 「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생심하라」(不應住聲香味觸法하고 生心하라) 이렇게 새깁니다. 무소주심을 생하라(應生無所住心), 처음부터 끝까지 생하라는 것만 주장한 겁니다. 지금 나한들을 대승으로 끌고 올라가려는 것이니까 그렇게 돼야 할 것입니다. 현상을 떠나가지고 자꾸 고요한 것만 좋아해서 푹 잠들고 있는 모양으로 중생제도고 뭐고 천하가 다 망하거나 말거나 보살행 안 한다는 겁니다. 「그놈이 망하거나 말거나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래가지고는 성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새기는 게 좀 가깝지 않은가 합니다. 또 전혀 틀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새기나 저렇게 새기나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原 文 :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解 義] 만일 마음이 어디에 머물던지 생사번뇌의 망상심을 내고 앉아 있거나 그 마음이 무심한데 머물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심(有心)으로 몸뚱이를 내라고 하고 범부와 같이 현상에 머물거나, 생사에 머물다가 열반에 머물다가 하거나, 우리 본 마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기 있을 때나 또 그전 몸뚱이가 간섭해서 아프다고 생각하던 중생 때나, 열반을 아는거나 아픈줄 아는거나 아는 생명의 본체는 조금도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본래의 그대로 입니다. 이래도 알고 저래도 알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주하던지 그건 불법이 아닙니다. 열반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열반이 좋다는 마음이 있어서 낙착이 되면 거기는 벌써 온전한 열반이 아닙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그 가운데서 다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만일 마음에 머무는 게 있으면 유주(有住)하면 즉위비주니라. 이 비주라는 것은 「그릇된 주다」이렇게 새길 수도 있고 「주가 아니다」 이렇게 새길 수도 있는데 「주가 아니다.」로 새길 때에는 주(住)자 앞에 바를 정(正)자가 숨어 있는 것으로 「정주(正住)가 아니다」 이렇게 새겨야 합니다(若心有住 卽爲非住).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살이 심불응주색하고 보시하라, 마음에 머무는 것 없이 보시하라.」고 하셨습니다(是故 菩薩 心不應住色布施). 항상 보살을 보살심(菩薩心)이라 하여 마음심(心)자를 위로 붙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붙이면 조금 어색한 것 같습니다. 『이런고로 불설하시되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마음을 마땅히 물질에 주하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보시하라고 했느니라. 금을 주거나 밥을 주거나 옷을 주거나 옷이나 밥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보시를 하라.』 그런 뜻입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해 주기 위해서 마땅히 이와같이 보시할 것이니라』(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무심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익이 되고 나중에는 이 중생이 보리심을 발할 때가 있게 되고 그러면 그 중생도 또 나를 보고 남과 같이 무심히 받을 수가 있지, 나한테 밥그릇이나 얻어 먹었다고 나를 보면 그만 황공무지해서 고개를 못들고 뭣 좀 줬다고 그렇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아들 딸 낳아서 자꾸 무주상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주의 대통령이 되지 조그만 나라의 대통령쯤 해서 뭘합니까?

『여래께서 일체 모든 상이 곧 이것이 상이 아니라고 설명했고 또한 일체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내가 이제까지 설명하지 않았느냐?』(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卽非衆生) 더구나 말세중생들을 위해서 말을 지어 글을 만들어 놓으려니까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 말씀하시는 것인데 또 원체 어려운 말씀이고 들었다고 해도 돌아서면 중생들은 잊어버리니까 이런 까닭에 이렇게 설명을 하십니다.

 

原 文 :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於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解 義] 『수보리야! 여래는 진어자(眞語者), 곧 진실한 말을 하는 이 진리대로만 말하는 이고, 실어자(實語者), 곧 사실대로 말하는 이며, 여어자(如於者), 곧 조금도 변동이 없이 말하는 이니』 한 번 생각하고 말하면 마음을 변경하지 않아서 국가의 법률처럼 꼭 그대로 집행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진실의 실재를 법 그대로 된 걸 객관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지 중생이 부처님한테 잘못 했다고 해서 벌을 준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잘못해서 제가 제벌을 받는 거지 부처님께서 그 사람을 나쁘게 봐서 벌 줄 마음으로 곱사가 되게 하고 문둥이 되도록 하는 그런 심술을 하나라도 가지신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도를 한참 닦을 때나 처음 불교를 닦을 때에도 도할에양무심(塗割兩無心)으로 뼈를 부수고 사지를 찢을 때 가리왕(歌利王)에게나 몸을 원상복구시켜 준 제석천(帝釋天)한테나 두 군데 다 밉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벌써 아상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부처님께서 되시고 나서야 하물며 분별심·생사심(生死心)·생멸심(生滅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꼭 그와 같은 무심을 배워야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진리 그대로 변동이 없는 말씀만 합니다.

『불광어자(不狂語者), 곧 미치광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며, 불이어자(不異語者), 곧 이렇다고 하다가 저렇다고 하면서 자꾸 바꿔 가며 말하는 이가 아니니라.』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대승과 소승을 말이 다르게 하시지마는 그런데는 다를 수 있는 이유, 조리를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지 그 근본 마음자리의 실재는 항상 불변입니다.

『수보리야! 여래 소득법(所得法), 곧 여래께서 얻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이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어서 참된 진리란 법도 아니고, 그리고 허망한 법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없으며 허망법(虛妄法)이 있을 수도 없고 진실법(眞實法)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이니까 하나도 아니고 절대이니까 절대도 아니니 그러면 무엇이냐? 배고프면 밥 생각하는 게 무슨 허물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解 義]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마음을 어떤 것에 머물러 가지고 보시를 행하게 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깜깜한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보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장님 놀음과 같으니라. 만일 보살이 마음이 일체 법에 주하지 않고 불법에도 주하지 않고 내 자신에게도 주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는 데서 보시를 하면,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어떤 사람이 두 눈이 밝고 건전한데 또 가을 하늘 처럼 맑은 태양이 잘 비치는 가운데 모든 물체를 환히 볼 수 있어서 붉으면 붉은 대로 검으면 검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똑 바로 제대로 아는 것 같으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보시를 하면 똑 떨어진 보시가 됩니다. 그야말로 평등하고 청정해서 깨끗한 사람, 「참인간」하나 생긴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解 義] 『수보리야! 당래지세에, 곧 이 다음 세상에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기도 하고 외우기까지 했다면 여래께서 부처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다 아시기도 하고 다 보시기도 하느니라.』하십니다. 요새 여기 모이는 여러분은 선남자 선여인이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지루한 잔소리깨나 하는데 또 이렇게 어려운 얘기만 하는데 이렇게 앉아 배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십리길 동행하는 것도 오백 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하룻밤 함께 자는 것도 여럿이 함께 자는 것도 과거세에 천생 만생의 인연이 없으면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당히 오랜 시일을 두고 이렇게 부처님 법문 가운데 이 존중한 금강경 살림을 한 법당에서 한다는 것은 무한 겁래로 불법에 같은 인연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세에 또 불법을 만나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이 불법을 만나서 이 금강경의 한량 없는 공덕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說義]

 

▶신해수지(信解受持)

불교는 신해수지(信解受持)의 네 가지에 의지해서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첫째, 믿어야 하고 둘째, 그것을 이해하고 깨쳐야 합니다. 금강경 산림법회(金剛經山林法會)를 한다는데, 실달태자(悉達太子)님이 깨달으셨다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있다는데, 어떤 것인지 나도 좀 들어야겠다고 해서 들어서 이해하고 토론(討論)을 하고 연구를 하는 이것이 해(解)입니다. 이유 없는 믿음은 그건 미신(迷信)이고 사신(邪信)이 됩니다. 너는 생각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내 말만 들으라고 하는 식이 미신입니다. 기독교의 독신자(篤信者)는 감기가 들어도 약을 안 먹습니다. 쌍화탕을 먹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만큼 시련(試鍊)을 주고 고생을 주신 것인데 내가 약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盲目的)인 믿음이고 무조건적(無條件的)인 믿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신(信)을 앞세우고 해(解)가 뒤로 갑니다. 가령 불교에 처음 들어와서 여시(如是)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던 분들도 계셨을 것인데, 이번 금강경 산림(山林)에 나와서 자꾸 듣다 보면 캄캄한 밤중 같던 여시(如是)의 뜻이 요새는 조금 알듯말듯할 겁니다.

불교는 이렇게 믿음 뒤에 해가 따라가는 것이므로 무조건 맹목적 믿음의 미신과는 다릅니다. 그러데 또 뭣을 좀 따져서 알았다고 해서 예컨대 이번의 금강경을 조금 들어서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해서 신심(信心)이 없어지면 「불교가 별거 아니구나, 내가 부처인데 뭐 절에 갈 것도 없고, 내가 마음만 착하게 쓰면 안되겠느냐?」하고 맙니다. 이래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그 이상은 들어가지 못해서 수도가 되지도 않고 대도(大道)를 성취하지도 못합니다. 다 되지도 않았으면서 다 된 것 같기도 하고 안 된 것 같기도 하여, 남이 부처가 되려 해도 틀렸고 안 되려 해도 틀렸고 까딲하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산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거리고 물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거리고 하여 까딱 안 하는데 걸려가지고 건방져서 그야말로 입으로만 하는 구두선(口頭禪)입니다.

실상 비슷한 이런 원리를 좀 알았더라도 관조반야(觀照般若)를 철저히 알기위해서 또 다른 교리를 들어야 하고 그래서 삼장(三藏)까지라도 다 통해야 합니다. 칠식(七識), 팔식(八識)에 잠재해 있는 깊은 허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견성(見性)을 하고도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두루 익히고 오십이위(五十二位)의 보살행을 닦는 것입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신(信)이 앞잡이로 끌고 나가고 다시 그에 대한 이유를 자꾸 연구해서 그럴 수 있겠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아 들어가고 그렇게 돼야 철저한 수행을 할 뜻이 더해져서 잘 받들어 지니게 되므로 이렇게 하여 잘 수지(受持)하게 되면 마침내 실상(實相)을 체득(體得)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서 완전히 부처가 됩니다. 이것이 신해수지(信解受持)의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무나 몇 천명이라도 다 부처님을 만났으니까 신(信)할 수 있고 깨달아 질 수도 있고 했지만 말세(末世)의 혼란할 때에는 일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이 복잡하고 혼란해서 머리 속에 번뇌 망상이 왔다 갔다하고 들끓어대는 그러한 때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신해수지하면 참 그야말로 이 세상에 다시없는 제일 가는 희유한 일이라고 수보리존자께서 찬탄하셨던 것입니다.

구공(俱空)을 실제로 체득하신 대아라한(大阿羅漢)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의 아주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신 참 대자대비하신 이 지도한 생각이라도 그르칠까 잘못 들었을까 해서 이렇게 참 애를 써서 일러 주신 것을 제가 40년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법을 들었지마는 이렇게까지 남김 없이 조금도 아낌 없이 일러 주시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대아라한과(大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이니까 부처님은 아니지마는 성인입니다. 이런 분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처님께서 참으로 너무나 감사하시고 대자대비하시게 남김 없이 조금도 아낌 없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지도해 주실 수가 있는가 해서 자연히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이제 이런걸 우리가 한편으로 보면 이것이 역시 감사해서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겠지마는 그 수보리존자 편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호강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 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으로 허망한 세상을 부득이해서 그러나 저러나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할 수 없이 살던 우리가 이렇게 생사를 해탈하고 또한 생사에 자유로운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지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자기도 한쪽으로 감사를 느끼고 동시에 만약에 부처님같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될 뻔했느냐, 그저 멋도 모르고 전생(前生)이 있는지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앞으로 영원한 미래세(未來世)가 다하도록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헤매고 그 참 어디 호소할 데도 없이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제 죄를 제가 지어서 끝없는 고생을 할 뻔한 이 신세가 참 다행히도 이렇게 마지막 높은 도, 최후의 길을 걸어서 완전한 해탈을 얻게 된 자기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불교를 듣기 전에는 머리를 들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히 이렇게 생사를 초월하고 또한 우주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영원불멸한 자기의 생명을 건지게 된 것을 생각해 보니 과거를 회고(回顧)할 때 자연히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성불도 신해수지(信解受持)의 인과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뜰을 거닐고 계실 때입니다. 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매나 독수리한테 쫓겨 가지고 대중 앞에 탁 떨어졌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벌벌 떨고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사람한테 살려 달라고 오기는 왔지마는 사람 역시 어쩔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큰 짐승한테 쫓겨서 죽게 되면 꼭 사람 집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꿩 같은 것 한 마리 쫓겨 들어 왔다고 재수 좋다고 볶아 먹어 버립니다. 살려 달라고 들어오는 짐승을 잠아 먹으니 보통 사람은 인과(因果)를 모르니까 그렇지 반드시 좋지 않은 재앙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사리불존자 뒤에다 갖다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리불은 나한과(羅漢果)도 증득한 성인이니 안심할 것인데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떱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내 뒤에 갖다 놓아 봐라.’하셔서 부처님 뒤에 갖다 놓았더니 갖다 놓은지 얼마 안 돼서 꼬부리고 앉아서 꼬박꼬박 졸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성과(聖果)를 증득한 성인이시므로 거리가 얼마 아닐 건데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 이상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한을 증득하기 전의 과거세(過去世)에 그 살생하던 악의(惡意), 곧 남의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해롭게도 하고 살해하던 살해심(殺害心)이 덜 떨어져서 미세(微細)한 습기(濕氣)가 남아 있으므로 그래서 그 밑에 가서는 안심을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독한 그림자가 비치고 나쁜 냄새가 나고 하는 것을 짐승들이 촉감(觸感)으로 압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살인이라도 할 독한 마음을 품으면 대번에 오장(五臟)이 푹푹 썩는 냄새가 납니다. 입에서도 나고 정신으로 풍깁니다. 사리불존자가 「언제 부터 불법을 만나서 출가하여 중이 됐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지금 이 생까지 오백생을 살생한 일이 없느니라.」하십니다. 오백생을 계속해서 지금까지 쭉 연속해서 살생해 본 일이 없고 풀 한 포기도 밟아 본 일이 없는 수행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백생전에 살해하던 습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달이 멏 번씩 우리가 신도단체에서 방생불사(放生佛事)를 합니다. 죽게 된 것을 살려 주는 게 복가운데 가장제일 큰 복이 됩니다. 재산 . 지구덩어리를 다 줘도 그 사람의 생명을 살려 주는 것만 못합니다. 미꾸라지가 죽으나 사람이 죽으나 고기나 개미가 죽으나 생명이 죽기싫어하는 생각은 똑 같습니다. 또 부처님께 「죽기 싫어하는 이 비둘기가 언제나 비둘기를 면하고 사람이 되어서 또 이불법을 만나서 대법(大法)을 성취하겠습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로 십대제자들에게 물어 보라 하십니다. 그래서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가만히 천안(天眼)으로 보니까 언제까지나 자꾸 비들기로만 계속합니다. 비둘기의 몸 바꾸기가 좀처럼 어렵게 지독스런 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겁(一劫)만 해도 굉장한 세월인데 목련존자만 해도 여러 천만겁(千萬劫)의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는 신통입니다. 몇 천만겁 동안 어느 생엔 뭐가 되고 어느 생엔 뭐가 되고 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내생에도 비둘기로 태어나서 어디서 콩 먹고 저희끼리 어디가서 쌍쌍이 되어 사는 것까지 모든 현실이 하나하나 다 보이고 그러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의 몸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업이 한 번 막히면 어려운데 그 가운데도 남자가 여자되기 어렵고 여자가 남자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인제 몇 겁을 지난 뒤에 다른 뭐가 되어 가지고 언제 또 사람으로 인도환생(人道還生)하지만 불법을 만나지는 못한다. 그 뒤에 다시 삼악도(三惡道)를 왔다갔다하다가 얼마 뒤에는 다시 사람이 되어가지고 불법을 만나서 사리불 네가 후세에 성불하면 그때는 부처님의 호(號)가 무엇이고 그렇듯이 비둘기도 아득한 내세에 성불해 가지고서 필경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필경 성불을 다 하는데 그것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만큼 이 비둘기도 지금 오늘 우리에게 뛰어와서 숨겨주고 감춰 달라고 하는 그것도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필 우리가 나오자 이 시간에 독수리한테 쫒겨 가지고 여기와서 내 그늘에서 잠을 자는 게 이런 게 다 앞으로 사람이 되어 가지고 중이 되어서 수도를 철저히 해서 성불하는데 기초적인 인연을 밑천으로 더욱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법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한 인과(因果)도 필경 성불(成佛)할 인연이 됩니다.

초견성이 제일바라밀이 아니다.

이광수 선생이 법화경(法華經)을 번역한다고 해서 어떤 스님이 크게 걱정하며 나에게 가보라고 하여 겪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는 이광수 선생이 불교를 안 믿고 예배당에 다닐 시절인데, 그 분이 법화경을 보고 글이 좋고 내용이 매우 이상적으로 기록돼 있어서 소설적으로 불교를 보았을 뿐, 경문 그대로를 다 진리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 적입니다. 그러면서 그이가 세계 종교서적 가운데 완전한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법화경이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존께서 49년 동안 설명하신 것을 총합해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완비해 놓은 부사의한 경인데 춘원(春園)으로서는 소설적으로 들으면 구수하니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청년이 예술적으로만 보는 그런 소견으로 법화경을 번역해 놓으면 그 사람의 솜씨나 권위 때문에 좀처럼 다른 사람이 손을 대 봐야 잘 안될 터인데 이 한국 불교는 그만 망치고 말 것이니 내가 춘원을 찾아가서 설교를 해 가지고 불교 신도가 되도록 한 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와 춘원선생은 전부터 인연이 있어서 서로 안면(顔面)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춘원이 자하문(紫霞門) 밖에 집을 짓고 있을 때 입니다. 그 옆에 소림사(少林寺)에 춘원선생이 돈을 내 가지고 나를 있게 하면서 일 주일이고 한 달이고 한 번 토의 해 보자는 것입니다. 아침만 먹고 내려오면 깔 것 하나씩 들고 산이나 개울가에 앉아서 얘기하다가 둘이서 점심 때가 되면 올라가서 점심 먹고 또 개울이나 산이나 아무데나 가마니 하나 깔고 누워서 얘기하고 앉아서 얘기하고 이렇게 해서 나흘 동안까지는 자기는 자기 얘기하고 나는 내 얘기 하고 공산주의하고 자본주의 하고 유엔총회하듯이 그랬습니다. 이렇게 나흘이 되니 내가 한 쪽으로 슬그머니 분한 마음도 일어나고 또 한 쪽으로 내 부족을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닷새가 되는 날까지 얘기를 하니까 춘원선생 얘기는 다 끝이 났습니다. 그런 뒤에 내가 이렇게 저렇게 주장을 하면 말이 안된다고 질문을 하고 그러면 나는 대답하고 해서 하루 종일 얘기하고 밤새도록 얘기해서 엿새 이레까지 됐습니다.

그 때 마침 내가 법화경 육신통(六神通)을 말했는데 사람이 어떻게 육신통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 가운데 이상한 것 불교에서 말한 일체 부사의한 얘기는 낱낱이 묻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고 불경을 보는 태도가 전에 보던 것과 지금과는 차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술시(藝術視)했고 소설시(小說視)했으며 신화시(神話視)했는데, 이제는 글자 한 자만 빼도 안 되는 내용이며 그것이 다 온전한 참말이고 진실한 과학의 소리·철학의 소리며 완전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라도 잘못 됐다고 생각되는게 있으면 말하라.」하니까 「이제는 없다. 사실로 다 인정을 하겠다.」 이렇게 됐습니다.

심지어 조선 독립문제까지 불교적으로 나오고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가지고 자기가 주장했다는 얘기도 나왔는데, 사람의 근성(根性)을 가르쳐서 우리가 바르게 살도록 해야지 오백년 동안 나쁜 습성(習性)이 있어서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이니 일본이 차지 안했다면 소련이 차지했든지 중국이 차지했든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온 국민이 다 잘 살 수 있도록 복을 지어야 나라 운수가 왕성해져서 백전백승(百戰百勝)하게 됩니다. 이런 인과의 원리를 쭉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과연 그렇겠다고 민족의 잘못된 관념을 먼저 개조해야 한다는 데 합치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법화경을 펴 놓고 품품(品品)마다 평소에도 한 번만 보면 안 잊어버리는 기억력(記憶力)인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물어보면 설명을 하고 해서 법화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의심없이 경문(經文) 그대로 다 신해(信解)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앉아서 둘이 얘기하는데 몇 천만년이 지나갔다는 그런 소리 저런 소리 시공(時空)이 모두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된다는 얘기, 불교의 인과설(因果說) 십계 이백계를 꼭 지켜야 하는 까닭을 모두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법화경을 이렇게만 읽어 가지고 번역하지 마시오. 아직도 법화경 읽어 볼 때마다 모르는 게 또 나타날겁니다.」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가「제일바라밀이 곧 제일바라밀이 아닌 이것을 제일바라밀이라 한다」는 내용을 앞에서 백 번도 더 했고 오늘도 종일 내가 그 얘기를 했지만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각경(圓覺經) . 능엄경을 읽어 보라 했습니다.

원각경(圓覺經)은 상하(上下) 두 권으로 금강경의 몇 배나 될 겁니다. 그래서 원각경을 읽어 보고 법화경을 읽어 보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한 3년 후에 만났는데 원각경을 읽어 보고 또 새로 법화경을 읽어보니 법화경에 대해서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꾸 읽어 볼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전에 알았던 게 뭐라고 어떻게 알았었는지, 전에 알았던 생각도 다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때부터 불교의 독신자(篤信者)가 된 셈입니다. 한국 불교인으로 춘원 이 한분이 청년 남녀에게 불교 포교한 것이 대처승(帶妻僧) 7천명이 한 것보다 몇 10배나 더 됐습니다. 내가 그때 해방 전에도 그런 소리를 대처승에게 늘 했습니다. 그 뒤에 자기가 참선(參禪)도 하고 진실한 불자가 되고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가 되었습니다.

이 춘원의 경우처럼 이 구공소식(俱空消息) .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도 알 듯 하면서 자세히 보면 아직 덜 알았고 또 이것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 아는 것으로 알 수도 없습니다. 또 설사 깨달았다 그래서 초견성(初見性)쯤 했더라도 제일바라밀을 다 안 것은 아니며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보임행을 해야합니다.

신통은 반야가 아니다.

이 반야바라밀은 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절대(絶對)도 아니며 말로 할 수도 없고 생각을 어떻게 붙일 수 없는 실재(實在)입니다. 그런걸 어떻게 바라밀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벌써 바라밀이 아니고 바라밀이란 생각이 있을 뿐 그것이 바라밀은 아닙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만 생각하다보면 또 아무것도 아닌 걸로만 있는 것인가 보다 하는 데 떨어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바라밀이 무슨 바라밀이냐? 바라밀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하여 없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치우쳐서 응무소주(應無所住)에만 집착하고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도리는 빠뜨리게 됩니다. 아무데도 주한 데 없는 것, 어떤 생각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 그것에만 치우치게 되므로 제일바라밀과 그것이 제일바라밀이 아닌 것과 두 개가 뭉친 것을 뜻하여 「제일바라밀을 설한 게 그게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것이 제일바라밀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고 그런 뜻입니다. 중생들은 절대자성(絶對自性) 자리에서 듣지 않고 들으려 하여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분별심(分別心)으로 들으니까 허물이 생깁니다. ‘마음자리는 절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 한다고 하면 말로만 더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 놓고 보면 보통 문장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말로만 하는 사람은 깨치지는 못했지만 알기는 다 알았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로 비판해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할 때 이것은 한 번은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다 내 버린 없는 거라고 한 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말이고 보니 있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없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러는 거지 이것이 어째 실재의 면목(實在面目)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근사한 생각도 아닙니다. 그런 생각 내 버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어야 합니다. 있는 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言語道斷)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 곧 이것이 따져 볼 것 없이(心行處滅) 그렇게 듣는게 실체(實體)인데 그게 무어냐 하면 「반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다. 그게 근본이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그게 또 바라밀이라고 할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그러한 「바라밀이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바라밀이라」 해도 허물이 없고 「바라밀이 아니다」 해도 더 철저한 실재(實在)를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라밀이 아니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하고 바라밀이라고 해도 괜찮고 바라밀이 아니라고 해도 허물이 없고 그런 바라밀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지금 수보리 너하고 부처님 나하고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거를 자꾸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 것을 자꾸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소승불교가 염세주의(厭世主義)가 되어서 적멸(寂滅)만 자꾸 지키고 그것을 애착하고 인정도 모르고 없는 것만 애착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한 번은 진묵(震?)대사가 길을 가다가 강을 건너게 됐는데 얼굴이 참 예쁘게 생긴 사미동자(沙彌童子)가 나타났습니다. 애기 중이 나타나서 공손히 인사를 해서 「물이 깊어서 못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길을 아느냐?」 물었더니 「소승만 따라 오십시오. 제가 이 물을 잘 압니다.」「그래 그러면 앞에 건너가 봐라.」하고 따라 갑니다. 앞에 가는 사미승을 보니 물이 무름 밖에 안 차서 껑충껑충 건너갑니다. 진묵대사도 안심하고 따라가는 데 갑자기 물이 목까지 쑥 빠져 버렸습니다. 그게 나한(羅漢)이 나와서 그런 것인데 진묵대사가 대승 불교의 진리를 깨쳐서 반야바라밀을 알고 있지마는 신통(神通)은 아직 나한만 못합니다. 그래서 대승 보살 한 번 골려 먹느라고 나한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진묵대사 같은 이는 나한님을 모셔 놓은 법당에 가서 주장자를 가지고 머리를 똑똑 두들기면서 「아무개는 자식이 없다는데 이거 마지밥(佛供) 얻어 먹고 자식 하나 점지해 줘라.」하는 그런 식입니다. 신통이 없고 이래도 법이 높으니까 그래도 나한들이 꼼짝 못하고 나한들은 큰 스님 명령이니 할 수 없다고 또 아들 하나 점지 해 주고 그럽니다. 이것이 대승사상(大乘思想)과 소승사상(小乘思想)의 비교하는 예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제일 바라밀이 즉비 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이라는 말이 내내 「실상자 즉시비상 시명실상(實相者 卽是非相 是名實相)」과 똑 같은 논법(論法)이고 내용도 같고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막행막식은 바라밀이 아니다.

이런걸 모르는 무식한 선지식은 음주식육무방반야(飮酒食肉無妨般若)라고 막 놀아 납니다. 그래 가지고 중생까지 버려 놓고 나중에 공부하는 중들 다 버리고 그렇게 떠들던 분들이 해방이 돼서 이제 불교정화(佛敎淨化)가 됐지만 그렇게 우리 비구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수십명 있습니다. 무식하기는 해도 발언이 세고 주먹질 잘 하고 그렇게 불량하게 사는데, 소견이 비뚤어져서 불법이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무식하니까 마구잡이로 그런 사람들은 그런 패대로 젊은 수좌들이 해제(解制)하여 다니다가 만나면 마구잡이로 가르칩니다. 우리는 사월보름과 시월보름이 되면 모두 금족(禁足)을 하고 석달동안 전부 용맹전진합니다. 그걸 결제(結制)한다고 그러는데 구십일이 지나면 해제를 해서 동, 서, 남, 븍 모두 돌아다니다 사월초승께쯤 되면 그 절에 전부 다 모입니다. 공부하는 장소에 모이면 제가끔 공부하고 싶은 데로 가고 늘 이러는데, 그 날 처음 오는 날 식을 거행하고 금강경을 펴든지, 그걸 내 놓고라도 깨친 소식을 한 번 보여 주고 알아듣드지 말든지 그리고 또 깨치려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전부 가르쳐서 모두 정신 가다듬도록 만들어서 석달동안 용맹정진하도록 일러 주눈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큰 방으로 들어가서 술 먹으라는 겁니다. 술을 안 먹는 수좌가 있으면 저 놈 막걸리도 먹을 줄 모르는 자식이 무얼 하려고 그런다고 이러면서 막 쫒아내는 겁니다. 계를 지킨다고 틀어박혀서 소승불교(小乘佛敎)나 하고 그래 가지고 뭐가 되겠냐고 욱박지릅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이런 식으로 하면 그 사람은 결국 술이나 먹고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것도 그런 식으로 또 깨달은 것이 조금 있어서 남 못한는 다른 소리도 할 줄 알고 이래 가지고 모두 그 정신이 옳은가 싶어서 아리숭하게 만듭니다. 경전도 그만 똥걸레처럼 만들어서 이게 다 무엇이냐고 하여 확실히 그렇게 알도록 만듭니다. 이런 소중한 금강경 같은 것도 그렇게 만들고 성불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일승법(一乘法)을 뭣좀 아는 것 같다 해도 정법을 비방한 그 과보는 이제 세세생생 지옥고(地獄苦)를 몇 천만겁을 받는 법이고, 어쩌다가 아수라가 되어 가지고 지옥보다는 조금 났지마는 여러 백천만겁을 비둘기보를 면하지 못하듯이 축생계를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면 모두 문둥이 만신창이 생긴다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대처승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사오십년 동안에 몇 번씩 공적으로 사적으로 웃으면서도 싸우고,찡그리면서도 싸우고 한정 없이 싸웠습니다. 이래 가지고 수좌들이 그만 마구잡이로 행동했음이 불애보리요(行盜行?不碍菩提)요,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게 보리에 무슨 거리 낄게 있으며, 음주식육무방반야(飮酒食肉無妨般若),술먹고 고기 먹는 것이 반야세계에 무슨 장애가 될 게 있느냐? 「반야바라밀이 그게 뭔데 그게 어디가 걸리고 막히느냐?」 이래가지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했는데 듣고 보면 그 말이 어려운 법담(法談)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정법에 턱도 안 닿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이 그럴듯하고 어렵게 하는 수도 보여 유혹이 되고 대중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파 . 마늘 . 먹지마라. 중이면 이렇게 해야한다.」하면 몰아 세우고 어디가서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없이 됐습니다. 술 생기면 술 먹고 여자 생기면 계집질하는 것 이것 떼기보다도 파 마늘 안먹기라는 건 보통 정신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이제 마음이 약해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발심한 사람이면 항복기심(降伏其心)을 해 보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를 닦으라는 것입니다. 마음 한 번 항복 받기라는 게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게 그렇게 어렵구나 하는 이론을 자세히 치밀하게 알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

가리왕은 본래 폭군인데 따뜻한 어느 봄날 대신 장군들을 이끌고 큰 산으로 사냥을 가게 됐습니다. 이날은 특별히 궁녀들도 따라 갔는데 산에서 놀다가 가리왕은 몸이 좀 피곤해서 잠이 들었습니다. 임금이 잠이 들면 궁녀들이 옆에 있다가 행여나 개미라도 기어 올라갈까 염려되어 모두 시위를 하고 있는 법인데, 이 날은 대신과 장수들도 많고 그러니 궁녀들 수십명이 산 구경하자고 임금 곁을 떠났습니다. 궁 안에만 갇혀 있다가 모처럼 산에 오라오니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돼지 막처럼 지어 놓은 토굴(土窟)이 하나 있는 것이 눈에 띄어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사람이 하나 앉아 있는데 얼굴을 보니까 인간세상 사람은 아니고 백옥 같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사(道士)였습니다. 세상에서 욕심만 꽉 차고 심술이 꽉 차서 속된 욕심이 줄줄 흐르는 인간만 대하다가 욕심이 뚝 떨어진 신선(神仙)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범부 눈이라도 존경심(尊敬心)이 생겨서 「선생님,여기서 무얼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무엇 때문에 여기 앉아 계십니까?」이렇게 문답을 하는데 그만 시간이 간 줄 모르고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때 임금이 잠이 깨어 일어나서 궁녀들 수십명이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옛날에 나쁜 제왕(帝王)들이 시기 질투 많고 참 고약했습니다. 자존심만 많아 가지고 날 조금이라도 덜 좋아하는 눈치가 있는 여자 하나라도 있으면 당장 목숨이 달아나고 그렇게 지독합니다. 그런데 가리왕은 궁녀가 없어졌으니 그만 골이 잔뜩 나서, 여기 저기 찾다가 궁녀가 있는 곳으로 단 걸음에 달려와서 보니 조그만 초막 안에 거기 다 함께 들어가 있는데 극도의 시기심이 일어나 가지고 다짜고짜로 막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너희들 나 아닌 어떤 놈하고 얘기하느냐 싶어서 자세히 살펴 보니 얼굴이 그럴 듯 하게 잘 생긴 도인 남자하고 저희끼리만 앉아서 갖은 얘기 다 했을 것이라 생각해 보니까 당장 그 놈을 칼을 빼서 전부 목을 베어야 하겠지마는 거기까지는 너무 심한 것 같고 또 옷은 다 제대로 입고 있는 걸 보고는 훑어보기만 합니다.

궁녀들은 잠깐 한 십분 동안만 갔다 온다는 것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그만 임금이 잠이 깨도록 있었으니 이젠 죽었다 싶어서 뜰아래 꿇어 엎드려서 대죄(待罪)를 합니다. 가리왕은 그 신선에게 「네가 이런 산중에서 혼자서 뭘하느냐?」 「아무것도 아니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한다면 여기 무슨 재미로 있느냐?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뭐 하나 책임을 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산 중에 와서 도를 닦든지 뭐 하나 해야 할 것이 아니냐?」하며 이렇게 꼬집어 묻는데도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네가 아무것도 안 하느냐?」 이제 칼이 곧 빠지려고 하는 판인데 「제가 참는 공부를 좀 하고 있습니다.」 마지 못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네가 참는 공부를 했으면 잘 참느냐? 참는 거 몇 해나 공부했느냐?」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네가 어느 정도까지 참느냐?」 「참는 데까지 참습니다.」 극도로 노해 있는 국왕의 무서운 모습에도 아랑 곳 없이 냉정한 태도에 왕은 더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네 신체를 도려 내도록까지 참겠느냐?」 「글쎄요, 참는 데까지 참지요.」 그러자 왕은 칼을 쑥 빼어 가지고 한쪽 눈을 푹 도려내 버렸습니다. 피가 툭 터졌는데도 신선은 가만히 남은 눈을 꼼짝도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놈의 자식 항복도 않하고 이런 나쁜 놈이 있느냐고 또 한 눈을 마져 빼 버렸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않하고 찡그리지 않고 등상불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가리왕은 참는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말대접을 해서라고 항복을 해야 할 테인데 이 놈이 임금을 이기려고 한다고 더 화가 나서는 「네가 참는 데 까지 잘 참는다고 했으니 참아 봐라.」하고는 그만 양쪽 귀를 싹싹 오려 버립니다. 아,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양 볼을 다 베어서 서른 두 개 이빨이 다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도 신선은 아무 말도 안합니다. 요런 죽일 놈 보라고 두 팔을 짤라내고 두 다리를 짤라 내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몸뚱이 동체만 남았는데 그리고는 또 두 젖을 도려내고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도리천(?利天)하늘의 제석천(帝釋天)은 둘째 하늘의 천주(天主)인데 위에서 내려다 보니 가리왕의 소행이 하도 악해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곧 내려와 가지고는 태풍을 일으켰습니다. 뇌성벽력을 하고 바윗돌이 갔다왔다 산이 막 무너지는 판입니다. 그래 훍이 수 백길씩 올라갔다 내려치고 하니 가리왕이 겁이 나서 「아, 천벌(天罰)이 내리는구나.」하고 꿇어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빌고 대신들이고 궁녀들이고 돌에 묻혀 죽을 판입니다. 그런데 그 때 선인이 제석천에게 자기는 다 죽게 되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참는 이 인욕이 정망 인욕다운 인욕이거든 내 앞에 있는 가리왕을 해롭게 하지 마옵소서.」합니다. 이것이 참는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인욕 곧 참으려고 억지로 참는 게 아니고 인욕바라밀이 즉비 인욕바라밀입니다. 무심한 지경에 들어서서 하는 인욕입니다.

그러나 태풍이 싹 꺼지면서 앞에 참 거룩한 이가 하나 나타났는데 하늘에 옥황상제가 자기 본신(本身)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천동천녀(天童天女)를 함께 데리고 와서 무수한 절을 인욕선인에게 하면서 하늘에 전당포라는 신기한 약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팔을 갖다 붙이고 눈도 제자리에 붙이고 귀도 약을 발라서 붙이고 그리고 나니 그게 본래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당에서 미리 준비했던 음식으로 천공(天供)을 올리고는 미래세(未來世)에 성불하시거든 부디 저 부터 먼저 제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인욕선인(忍辱仙人)은 제석천에 대해서 고맙다는 생각도 없고 가리왕에 대해 아무 괘씸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도할에 양무심(塗割兩無心)이라 합니다. 전당포로 발라 줄 때에도 무심하고 할절신체(割截身體)로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찢어 놓을 때에도 무심했습니다. <전당포>를 발라 주는 제석천한테나 내몸뚱이를 잘라 낸 가리왕한테나 똑같이 양무심(兩無心)으로 아무 생각 없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하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부루나존자의 인욕

설법제일(說法제일)인 부루나존자(富樓那尊者)께서 체험하신 거룩한 인욕의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부루나 존자는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의 허무 함을 여실히 깨닫고 중될 사람 중 되어 철저히 수행하도록 하고 신도될 사람 있으면 특별한 신도가 되도록 설법을 제일 잘 하는 분입니다. 십재제자가 다 대아라한(大阿羅漢)이고 다 성인이시지만 수보리존자는 아공·법공·구공의 원리를 제일 잘 깨달은 해공제일(解空第一)이고 계를 잘 지키는 분이 우바리존자(優婆離尊者)시고 이렇게 각각 특별히 잘하는 분이 열입니다. 부루나 존자께서는 한 번은 아직 불교가 전도되지 외딴 지방에 가서 포교할 생각을 냈습니다. 그때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부처님께 반드시 다 여쭈고 실천했습니다. 부처님곁을 떠나는 것을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한테 하듯 지금 국민학교 학생이 선생님한테 하듯이 그랬습니다. 그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있으면 제자로서 그래야 할것이고, 부모가 있으면 아들 딸이 꼭 물어서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설사 제자가 스승보다 났다 하더라도 스승은 선각자(先覺者)이니 물어서 해야 하고, 부모가 설사 대학을 못 나오고 아들만 못하다 하더라도 나보다 경험이 많은 분이니까 상의하고 물어서 하면 부자간(父子間)이고 내외간이고 그 사이가 서로 이해하게 되고 달라 질 겁니다. 또 동네 노인들한테도 그래야 할 겁니다. 아무리 무식하고 농사만 짓고 있더라도 그래도 내가 평생 못한 경험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니 공경해야 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야 하고 그만큼 얌전해야 하고 틀림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아무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하고 싶은데 가도 되겠습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기는 가거라 마는, 그 지방 사람들이 불법이 없고 아주 강강난폭(剛剛亂暴)한 탐재호색(貪財好色)하는 중생들만 사는 곳이니 요새 말로 깡패 투성이의 우범지대(虞犯地帶)인데 거기 가서 전도하기 힘들 것이다. 만일 네가 가서 피땀 흘려서 아는 것, 공부한 것, 애써서 일러 주지만 한 사람도 잘 들어서 받들지 안하고 도리어 무슨 미친 소리인지 개 같은 소리 자꾸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나도 네 말 듣지 안하고 비방만 하면 어찌할테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래도 대단히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듣고 안 듣고간에 전도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면 욕만 하면 다행인데 봉변을 하고 몽둥이로 매질을 당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대단히 착하고 어진 중생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 사람을 때리고 돌질하고 병신 만들어 놓는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어질고 착한 중생이냐? 억지로 지어서 하는 소리 아니냐?」 「아니 올시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 하오면, 나에게 달려 들어 죽이는 것보다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 겠다. 그러면 그만 달려 들어서 사정없이 머리에 돌멩이질을 해서 죽게 하면 어찌할 것이냐?」

십대 제자 가운데 실제로 이렇게 포교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은 이도 있습니다. 신통이 제일 가는 목련존자가 그랬습니다. 태산도 뚫고 들어가고 바위 속에도 뚫고 들어가는 신통이 있는 이가 돌맹이에 맞아 죽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실은 바윗돌로 때려 봐도 허공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 때리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을 건데 그렇지만 맞아 죽는 법이 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루나 존자는 「그래도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사람을 죽인 중생을 어째서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하느냐?」 「부처님, 저희들이 억겁다생(億劫多生)으로 이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때그때 받아서 태어난 육신(肉身) 이것을 가지고 항상 <나>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중생이 이 생사를 못 면합니다. 그래서 중생이 죄업(罪業)을 제가 일부러 지어서 만들어 가지고 제죄 제가 받는 것이지 누가 어디 다른 사람이 하겠습니까, 그 죄의 원인은 단지 허망한 육신을 애착(愛着)하는 이것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생사고해를 허덕이는 것이오며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는 고생의 대가(代價)도 없는 없는 고통뿐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그만 두드려 깨 부셔서 해탈시켜 저의 법신(法身)·참나·진아(眞我)를 드러나게 해 주니 그것이 어질고 착한 대보살이고 부처님 행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고 어질고 착한 부처님께서라 믿고 아무 원한이 없겠습니다.」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서 「그래, 네가 전도할 자격이 있다.」고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법사(法師)라면 자신부터가 이만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각오부터 먼저 하고 그리해야 할 이유부터 이론으로 철저히 따져서 알고, 그런 다음에 오늘 실천을 못했지만은 내일은 기어코 실천하리라 결심하고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처님께서 전도하러 가라는 허가의 말씀을 안 하십니다. 네가 전도가 뭐야, 너도 안 배운 주제에 설법이 뭐냐고 그렇게 걱정을 하실 건데 부루나존자는 설법제일부루나(說法第一富樓那尊者)라고 아는 것도 많고 설법도 잘 하지마는 사실 설법할 자격이 되어 있고 참 머리 깍을만 했고 먹물 옷 입을만한 분이 되었습니다.

인욕을 하여 이렇게 까지 들어서면 적이 없습니다. 나를 죽이는 사람도 적이 아니요, 살리는 사람도 은인(恩人)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한테 원한(怨恨)을 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기가 막히게 죽자하고 그야말로 나를 숭배(崇拜)하고 나를 따르고 온갖 것 갖다 대접하고 그게 생명을 바쳐서 나를 위하려고 하고 나를 따르는 그런 이를 고맙게 안 생각하는 것이 맞아 죽어 가면서 원망 안하기 보다 참 어렵습니다. 날마다 황금을 한 말씩 갖다 주고 불사(佛事)에 보태쓰고 용돈 쓰라고 매일 그렇게 하는 신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겁니다. 누가 가져 왔는지도 몰라야지 사실 또 어디 가져온 사람 있습니까? 가져온 사람 있다고 생각해야 옳겠습니까? 그러면 비보살(非菩薩)이지 보살이 아닙니다.

조건부로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해서 도무지 살 수가 없지 앞으로는 우리가 무주상세계(無住相世界)가 될 겁니다. 그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이름을 고쳐서 무주상세계(無住相世界)라 그럴 겁니다. 이번 금강경 산림이 끝나면 우리가 금강경 부대(金剛經部隊)를 조직해 가지고 무주상세계로 개조(改造)하는 역군이 되고 독립군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렇게 배우는 것이 인간을 개조하는 공부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수 있겠다고 꿈에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아까 부루나존자처럼 그렇게 굉장한 인욕일지라도 그런게 인욕이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욕이 아닌데 그러나 억지로라도 하기는 해야 합니다. 참아야겠다. 참아야겠다. 이러며는 머리 끝까지 골이 올라와서 당장 때려 죽일 놈인데 그래도 「참아라, 참아라, 그래도 참아야지.」이렇게 하다보면 도인(道人)이 됩니다.

 

모든 것은 실상으로부터

이러한 인욕도 실상자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의 본체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상자리가 배고프면 밥 생각하고 산 보면 높은 줄 아는 것이니, 모든 것은 근본실상(根本實相)이 하는 일이고 무심체(無心體)가 아는 거지 생각이 따로 있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니 금송아지 얘기처럼 이 마음 자체가 무슨 관념이 있는 것이고 어떤 생각이 있는 존재라면 다른 것은 모릅니다. 제 생각이 벌써 하나 정해져 있어서 딴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일체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닥치는 대로 압니다.

산 보면 높다 물 보면 깊다고 아는 것은 높은 것도 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압니다. 거울에 먼지 투성이가 시꺼멓게 붙어 있으면 무엇을 비춰도 안 나타납니다. 중생 범부들은 탐심 . 치심 . 욕심덩어리의 온갖 먼지가 마음자리에 묻은 셈입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쉬운 예로 차려 자세를 해도 몸이 가만히 오래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이것도 그 마음에 때가 많이 묻고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부동자세를 잘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실상자리와 마음이 쉽게 계합(契合)할 수 있는 소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상자리인 마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게도 보이고 없게도 보이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유정 무정(有情無情)이라는 관념도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봐야 유정 무정이 다 부처가 돼 있는 내용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또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는데 있어도 있는 걸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는 걸로 없고 없는 걸로 있고 있는 것 그대로가 없는 것이니 그것이 곧 진공입니다.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참말로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이것이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현상이고 보니까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도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부르면 네 하고 똑똑히 대답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라고 시키면 그대로 가서 하고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있는 것이고, 또 그렇다고 해서 찾아 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방(十方)을 초월하고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부처도 중생도 아닌, 생사도 열반도 아닌 이것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없는 가운데서도 분명히 설법을 하고 여기 이렇게 듣고 앉아 있습니다. 듣는 것인 줄도 알고 말하는 것인 줄도 아니까 하는 말인데 부처님께서 가리왕에게 사지를 찢기고 마디마디를 찢길 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참았지, 만일 그때 내가 내라는 생각을 내든지 육체를 내라고 단정해 버렸다면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무심경계에 못 들어갔더라도 정말 발심을 했다면 아파 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죽지만, 남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교 이론을 확실히 알아 놓으면 원망해야 내 신세만 낭패고 죽어서 삼악도(三惡道)로 갈 텐데, 내가 맞아 죽는 것도 억울한데 남을 원망해서 삼악도 까지 가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단식하고 순교할 각오로 하는 것은 정법으로 죽는다는 게 마음입니다. 옳고 바른 생각 아무 생각 없는 데서 죽고 그리고 나를 죽이는 사람을 도리어 빌어 줍니다. 이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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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當何名此經(당하명차경)이며 我等(아등)이 云何奉持(운하봉지)리잇고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是經(시경)은 名爲金剛般若波羅密(명위금강반야파라밀)이니 以是名字(이시명자)로 汝當奉持(여당봉지)하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蜜(불설반야바라밀)은 卽非般若波羅蜜(즉비반야바라밀)이니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所說法不(유소설법부)아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如來(여래)-無所說(무소설)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三千大天世界所有微塵(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이 是爲多不(시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제언)하사대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諸微塵(제미진)은 如來說非微塵(여래설비미진)이라 是名微塵(시명미진)이며 如來說世界(여래설세계)도 非世界(비세계)라 是名世界(시명세계)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32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不可以三十二相(불가이32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三十二相(여래설32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名三十二相(시명32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으로 布施(보시)어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甚多(심다)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전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전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가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니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어떤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신 바가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먼지의 수를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심히 많사옵니다, 부처님께서시여.』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먼지를 먼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께서 말하는 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이름이 세계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오면 여래께서 삼십 이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라 이름을 32상이라 하시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몸과 생명을 가지고 보시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 내지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그 복이 심히 많으니라.』

 

 

第十三 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지니다

 

[科 解]

 

이제 오늘 저녁엔 제 십삼분(第十三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인데 부처님 뜻에 어기지 않도록 이 경전을 받아 가진다, 수지(受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의 문자(文字)를 받아 가지는 형편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이 문자이전(文字以前)의 실상(實相) 자리의 내용을 체득(體得)해서 수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완전히 성불(成佛)해 가지고 부처님을 수지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범부가 우선 부처님 흉내라도 내어야 할 것이니 먼저 근본적으로는 견성을 해라. 그래서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중간 보살이라도 되어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라.」 그것이며 나중에 필경에는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법을 지니는 것을 법답게 진리와 같이 이 경전(經典)의 정법(正法)인 부처님 법을 받아 가진다는 뜻으로 여법수지(如法受持)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 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解 義] 이제 수보리 존자께서 40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밤낮 없이 많이 듣기는 했지만 질서 정연하고 조리(條理)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지 배우기만 하면 제나름대로 깨닫고 했는데, 이번에 금강경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니 참 그야말로 대각세존(大覺世尊)이시라고 느껴졌고 마음이 기뻐서 「이 경전 이름을 뭐라고 저희들이 이름하여 받들어 모시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경 제목을 약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셨습니다. 이 금강경의 금강철퇴를 가지면 무엇이나 두들겨 부수어서 안 깨지는 것이 없고 다른 것을 가지고는 이것을 깨뜨릴 수가 없는 보물(寶物)입니다. 이것은 여물기만 해도 안 되고 날카롭기만 해도 안되며 굳세고 날카롭고 아주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면서 만사만능(萬事萬能)하며 환하게 통달해서 세간중생들 법이나 출세간의 성불하는 보살들 법이나 부처님세계 할 것 없이 하나 빠짐 없이 환히 다 통달한 지혜에 견주어 붙인 이름이 금강입니다. 말하는 이 자리 말 듣고 앉은 자리, 그 자리가 불멸의 존재고 영원불멸의 생명체인 동시에 만사만태(萬事萬態)를 다 통달해 가진 금강반야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금강에다 이 마음 자성자리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지혜이므로 반야라 한 것이니 반야는 곧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지식은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것으로 이런 지혜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본분(本分)을 망치도록 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을 결과적으로 지옥으로 보내고 꽁꽁 뭉쳐져서 생사에 윤회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뿐입니다. 금강과 같은 그런 존재가 있는데 말하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는 것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참된 반야고 지혜입니다. 이렇게 자성(自性)만이 오직 있는 참 구공(俱空)까지 된 그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인데 그러나 그 실상반야를 깨달아 가지고 거기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소승나한(小乘羅漢)이 되어 버릴 뿐이므로 그 때문에 성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행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복혜쌍수(福慧雙修)입니다. 그 방법은 곧,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여섯 가지인데 이 육바라밀(六波羅蜜) 중 마지막 바라밀인 지혜바라밀 하나만 빼 놓고는 앞의 선정하는데 까지는 전부 복을 닦는 수행입니다. 한량 없는 복 닦는 방법이니 우주를 점령해서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그만한 신통조화(神通調和)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 앞에 다섯 가지 복짓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지혜바라밀이 곧 복혜쌍수(福慧雙修)인 것입니다.

또한 이런 법을 다 듣고 그렇게 해야 하겠다고 깨닫는 그것이 반야이고, 필경 견성(見性)까지 해서 견성한 뒤에 하는 수도(修道)가 진짜 수도인데 그렇게 해 가지고 수지(受持)해 올라가야겠구나 하는 것도 내내 그 자리가 하는 것이고 수지 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야입니다.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이름하라 하셨고 이런 뜻으로 받들어 지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 羅蜜 是名般若波羅蜜

 

[解 義]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지어 가지고 가지라했느냐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반야바라밀 . 관조반야바라밀 . 실상반야바라밀의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이제까지 그게 실지로 말하면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서 이 문자반야는 어떻고 또 관조반야는 어떻게 살피는 것이라 했지만 실은 살필 것도 없다. 마지막 자성자리인 실상반야는 어떻고 어떤것이라 설명 했지만, 또 그래서 그것을 실천해서 바라밀을 해서 부처가 되고 하는데 지혜가 제일이니까 그랬지마는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닌 것이므로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긍정하시는 것 같으면서 부정하시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으로 언제나 같은 말씀 같은 그런 내용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 말씀하시는 구절(句節)에 의지해서 그 구절은 해결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여지껏 고구정령(苦口丁寧)으로 이십년 동안 설명하셨는데 이제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문자나 반야에 의지해서 걸려 있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보시하는 것이나 계행 가지는 것이나 인욕이나 다 잘하면 세상에 알려지고 저절로 밖으로 드러납니다. 또 정진하는 것도 모두 보고 알 수가 있고 또 선정한다고 앉아 가지고 며칠씩 먹지도 않고 하게 되므로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요새 미술가 들도 선정과 같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한 일 주일씩 안 먹고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구상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굉장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일 주일씩 어떤 땐 한 달씩 자기도 모르고 앉아서 구상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일종의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가면 자연히 지혜가 나옵니다. 이 여섯가지 바리밀 가운데 구경(究竟)에 들어가면 다 하나가 됩니다. 이금강경은 반야바라밀을 밝히는 경전이고 반야를 역설(力說)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복짓는 수행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수즉파파즉수(水卽波 波卽水)로 물과 물결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 처럼 복 짓는 것이나 지혜를 닦는 것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반야바라밀을 그렇게 애써 설명했지만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 해라.」 하신 말씀에 이해가 잘 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역시 같은 뜻입니다. 견성하기 위해 참선한다고 벽을 향해 돌아 앉아 있지만 그것은 초학자(初學者)가 금강반야(金剛般若)를 체득해야 하겠으니 이 마음자리를 깨닫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지, 실상금강이란 마음자리에서는 그것은 다 버려야 할 지식 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반야의 실체는 아니고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하느라고 이름한 것 뿐입니다.

바라밀이다, 도피안이다, 하는 말은 생사니 번뇌니 망상이니 하는 것이 떨어져서 불생불멸하고 영원불멸하는 생명체가 온전히 티 하나 없이 드러나면 도피안이고 이것을 성불했다, 생사를 해탈했다, 그럽니다. 그때 가면 일체가 무소부지(無所不知)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본체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걸 설명하느라고 금강이니 반야바라밀이니하고 또 부인(否認)하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마음 자체가 곧 반야바라밀이 다 되어 있습니다. 이미 말씀은 다 끝나신 것이지만 이것을 문자로 설명하면서 틀림없이 이론으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일을 위해 「불설 반야바라밀은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니라.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 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解 義] 『수보리야!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한 게 있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한 바 아무 법도 없으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시고 다녔지만 한 번도 입을 떼신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반야경을 네 곳에서 십 육회의 법회를 가지면서 설법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한 법이 있느냐?」 물으니까 「아니 올시다. 부처님께서 입 떼신 일도 없고 언제 누구 보고 법문한 말씀 못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지금 계속 얘기하시고 계시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실상반야는 말로나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고 문자로 기록 할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당신께서 소개하고 싶은 것을 소개하는 말씀이 아니라 필경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는 자리고 말로서는 소개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깨친다고 하는 것은 번뇌 망상을 제거해서 장난치던 그 사람이 장난 안 하고 앉아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당 지옥의 생각을 해서 꿈을 꾸고 돌아 다니다가 꿈 꾸는 생각을 걷어 버리니까 눈뻔히 뜨고 꿈꾸는 것이고 꿈을 깨 놓고 보면 잠 자본 일도 없고 꿈꾼 일도 없고 그렇습니다. 꿈속에도 그 사람이고 꿈 밖에도 그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실 부처님께서 당신 말씀하고 싶은 그 얘기를 한번도 얘기해 보지 못합니다. 꿈 속에서 꿈꾸는 사람한테 나도 꿈꾸는 몸뚱이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 꿈속에 들어가서 얘기를 실컷 하는 격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그저 헛말 하고 앉아 있는 것이고 잠꼬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잠꼬대를 가지고 얘기한다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보면 꿈속에서 하던 일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보리 존자 말씀이 「부처님께서 언제 무슨 말씀하셨습니까?」하고 반문을 했고, 부처님께서도 「네 말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몽중지사(夢中之事)니 꿈꾸는 중생들과 상대하는 얘기인데 또 다시 술에 취해 가지고 여기가 동쪽인지 남쪽인지도 모르고 헤메는 판이므로 이렇게 달래 주는 것이지만 턱도 안 닿는 얘기입니다. 비록 술이 취해서 정신의 착란을 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잠꼬대 같은 말을 가지고「내가 말한 일이 있느냐」고 하니까 「말이 안됩니다. 금강경이고 반야고 이걸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그게 무엇인지 그 주인공 주체를 찾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어떤 법도 금강경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 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解 義] 부처님께서 또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십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한 그 전자의 수가 많으냐 많지 않으냐?』 하셨는데, 수보리존자 경계로 봐서는 우리가 콩 한 개 보는 만큼 쉽게 압니다. 그래서『참 많습니다, 세존이시여.』하고 사뢰었습니다. 그러나 수보리 존자의 경계로 봐서는 엄청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일반 중생을 대신해서 하는 말씀이므로 「참 많으옵니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수보리야! 이 먼지 이 미진 그것을 부처님은 미진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미진이라고 내가 설명했던 미진이 그게 곧 미진이 아닌데 그것을 미진이라고 말하며, 여래께서 말하는 세계도 세계가 아니니 이 이름이 세계니라.」하셨습니다. 천백억 지구덩이 별세계가 모인 것을 사바세계라하고 극락세계도 무수한 불세계(佛世界)중 하나인데, 화엄경(華嚴經) 같은 데에서는 화장찰해(華藏刹海)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맨 밑에 무한대의 허공 가운데서 무엇 하나를 근거로 해 가지고 이십중광대찰(二十重廣大刹)이 이루어져서 스무 층의 세계가 벌어집니다. 이 한 층계 세계의 거리가 얼마냐 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열 배, 곧 백억의 지구의 열배에 해당하는 세계를 부순 먼지를 십중찰미진수(十重刹微塵數)라 하는데 이 미진수가 다하도록 별나라 하나에 먼지 하나씩 놓아서 이 미진수가 다 하도록 무한히 올라간 거리 그것이 화장세계의 한 계층의 거리입니다.

여기서 찰(刹)자는 절찰자로만 알지만 세계란 뜻입니다. 십중찰세계 곧 지구덩이 백억배에 해당하는 삼천대천세계의 열 배나 되는 지구덩이들을 전자나 원자로 환원시킨다면 그 수가 불가사의한 무한대의 수일 것입니다. 불보살이나 헤아릴 수 있는 이렇게 많은 수의 전자 원자를 가지고 지구덩이 하나 지나갈 때마다 한 개씩 놓고 올라가서 그 전자가 다하도록 수 없이 많은 지구를 일직선으로 통과해 올라갑니다. 이렇게 해서 십중찰세계의 미진수가 다 하도록 올라가서 이렇게 하기를 동서남북과 네 간방(間方) 상하방(上下方)의 사방으로 다 올라간 세계, 거기엔 부처님 계신 세계도 있고 안 계시는 세계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안 계신 세계는 범부 세계인데, 지금 우리 세계는 불세계 아닌 것으로 됐습니다. 그렇지만 대장경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아주 불세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십주찰세계의 전자 . 원자가 다하도록 한 것을 한 계층으로 해서 이렇게 이십층이나 올라간다고 그랬는데 이것이 하나의 화장찰해입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도 이렇게 광대무변한 세계는 측정(測定)하지 못했는데 부처님 께서는 그렇게 굉장한 세계를 설명해 놓으셨지만「그건 세계가 아니니 그래서 세계라고 하느니라」 그러셨습니다. 「미진은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하고 세계가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세계라 한다.」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32상으로, 부처님의 설흔 두가지 거룩한 특별한 상과 여든가지 뛰어나게 생긴 모양(八十種好)으로 여래를 친견(親見)할 수 있느냐? 부처님을 뵐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 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어째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32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이것이 상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삽이상>이라 하신 것이옵니다.』

부처님의 32상도 비록 육도 만행(六度萬行)을 하고 억만겁 동안 몸뚱이와 온갖 것을 남을 위해 보시한 공덕으로 얻어진 거룩한 상호(相好)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역시 세계나 먼지 처럼 상대적으로 있는 허망한 거짓 존재이며 따라서 상(相)이 아닙니다. 육체의 오장육부(五臟六腑)나 혈액(血液)과 신경(神經)등이 다 물질에 불과하고 그 물질은 곧 있는 것이 아니므로 32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2상 이라고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역시 다생겁(多生劫)으로 보살의 인행(因行)을 닦으면 그 정도에 따라서 상호도 거룩해지고 하나하나 갖추어지게 되며 그래서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밝힌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 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 他人說 其福甚多

 

[解 義] 『수보리야!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몸뚱이와 생명을 가지고 보시를 했다면 옷 없는 사람 . 돈 없는 사람 . 밥 없는 사람을 위해 돈도 주고 옷도 주고 재산 다 털어 주고 나서 더 줄 것이 없으면 코도 떼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기를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몸을 버려서 보시한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 가운데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잘 수지해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심히 많나니라. 삼천대천세계에 먼지 수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나면 그 복이 한량 없을 겁니다. 그러나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 했다 해도 그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니고,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몸만 남한테 보시 했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남에게 설명해 주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리불 존자가 공부하고 앉아 계시는데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부처님 제자이시죠. 부처님 제자는 다 대자대비 하시다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다 보시 할 수 있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스님 왼 눈이 하나 필요한데 빼 주실 수 있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눈을 빼 줍니다. 그 사람은 그걸 받아서 더럽다고 탁 침을 뱉아가지고 집어던지더니 발로 비벼서 짓이겨 버립니다. 남은 애써서 아픈 눈울 빼서 줬는데 필요 없어서 내 버리더라도 자기 안 보는 데 가서 했으면 좋을 텐데 그 빼 준 사람 앞에서 그러니 아무리 사리불이라 해도 마음이 동해서 고약한 놈이라고 속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아 스님이 발심을 덜 했습니다. 철저히 발심을 했으면 내가 그걸 갖다가 똥 속에 집어 넣거나 발로 밟아 버리거나 주는 것 뿐이요. 무심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안색을 보니까 속으로 마음이 동한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응무소주한 보시가 아닙니다.」 하면서 자기는 제석천(帝釋天)인데 스님을 시험해 보느라고 그랬다고 하면서 부처님 비슷한 제석천의 본신(本身)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나는 그것도 못합니다.」 사리불 존자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 깨닫기 전이라도 이런 경전을 읽고 배워서 마음을 조복을 받고 항복하는 법을 익혀 나가면 자기 목을 못 빼 준다 하더라도 이 목을 못 빼 줄 때 마다 마음이 아프고 참회가 되고 진실히 중 노릇을 잘 하고 인욕도 하고 보시도 하고 모두 잘 할 줄 알면 깨친 뒤에 훨씬 수월해 집니다. 경을 읽을 때 마다 하루에 열번 읽어도 읽을 때 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나고 꼭 이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지나가다가 개가 날 보고 짖으면 마음에 부끄럽고 부처님 뵙기에 황송하고 신도를 대하기에 얼굴이 화끈하고 이런 식으로 정진되어 올라가야 오늘은 안 돼도 내일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법문 들을 때만 그렇겠다 생각해 놓고는 개가 짖거나 말거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런 식으로 되어서는 천만 겁을 가도 큰 수행이 안됩니다. 내 것을 주고 내가 다 참아야 할 것을 남더러 주라 하고 참아 달라고 해도 안 되는 일이고 내가 참지 않으면 안 되고 내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설사 억만겁을 두고 몸뚱이를 보시하고 재물을 보시하고 큰 공덕을 지었다 해도 그것은 물질로 지은 복이고 몸뚱이라는 형상으로 지은 공덕인데 물질이나 몸뚱이 자체가 허망한 존재이고 상대적인 한계가 있는 존재이므로 그 공덕 또한 무한대한 절대적 공덕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또 상대적인 공덕으로는 생사를 해탈 할 수가 없고 자기 자성을 체득하지 못한 중생의 경계일 수밖에 없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는 자성을 깨달아 우주를 소유하고 주재하며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탈하여 영원불멸의 대성자인 부처님을 성취하는 비결(秘訣)이므로 그 복이 비교도 안되게 더욱 많다(其福甚多)고 하신 것입니다.

 

 

[說義]

 

문자반야는 곧 실상반야

반야라는 말은 우리말로 눈이 보배란 말이고 소견(所見)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소견이란 말은 역시 지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도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머리를 아무리 쓰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탐진치(貪嗔痴) 욕심만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사람이 제가 미친 줄 모르듯이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욕심을 더욱 더 부릴 따름입니다. 그러나 옳든 그르든 세상의 지혜도 반야는 반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경의 제목을 풀이할 때 반야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지만 관조반야(觀照般若) . 실상반야(實相般若) .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가 실상은 하나입니다. 문자반야인 이 경전이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실상반야 . 관조반야의 조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므로 이 뜻을 나중에 참말로 성취하고 보면 문자반야가 곧 실상반야고 그래서 문자가 곧 실상이고 문자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곧 마음자리입니다. 그 실상반야가 있다는 것도 문자가 소개해서 알고 관조반야를 옳게 가지는 방법도 역시문자가 지도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문자가 역시 참으로 소중해서 이 경전이 계시는 데는 곧 부처님께서 계시는 데고, 이 경전을 설명하는 분은 곧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라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래서 이 경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 조리가 어떤 것인지 똑 떨어져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산 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 아는 목전지사(目前之事)를 설명한 것이니까 수보리를 불러서 「개미나 굼벵이를 하나 놓고 이 자체가 금강반야바라밀이니라.」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굼벵이나 지옥 중생이나 천당 중생이나 누구든지 지도를 하면 전부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이니 이게 모두 그런 것을 설명 해놓은 말씀이고 사람이 모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금강경 본문울 말하기 전에 이것이 지금 완전히 꿈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자니 전자니 하는 것 그게 그대로가 환의 존재인데,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인 사실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자가 인식하듯이 그런 전자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진공이고 없는 존재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유정 무정 이것도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일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하면 금강경 설명 다 된 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러기 때문에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했다.」하셨으니, 이러면 설명이 다 된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강경 한 번 죽 들어서는 어느대문에 어떤 내용의 골자(骨字)가 있는지 기억에 잘 안 남지만 이것을 천독 만독(千讀萬讀)을 하면 확실히 내 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듭 거듭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이것이 문자반야바라밀이고 이 문자반야바라밀이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반야를 차차 자꾸 익혀서 실제로 알아지고 깨닫게 해 주는 공덕이 되기도 합니다.

혹 무한동력(無限動力)을 말하지만 아무리 물질절대론자(物質絶對論者)가 있다 해도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절대적 존재란 하나도 없는 것이 현상계인데 무한동력도 마음 내 놓고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이것만이 아무렇게나 해도 죽지도 않고 가만 있지도 않고 사실상 무한동력입니다. 제가 내었던 욕심을 만족하려고 할 때 가령 안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욕심은 무한인 만큼 남이 나를 죽이려고 해서 하나가 달려들면 하나 죽이고 둘이 달려들면 둘울 죽이고 백명이 달려들면 백명을 다 죽입니다. 또 27억이 다 달려 들어도 할 수만 있으면 27억을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악할 때는 무한히 무섭고 악하기도 하면서 또 가장 착하기도 한 존재이어서 착한 생각을 내면 이보다 더 착할 수 없는 짓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역설하셨고, 내가 그것을 또 어떻게든지 바로 인식하도록 하려고 애를 써서 이야기했습니다. 말 하고 있는 이 자리, 말 듣고 있는 이 자리가 실상입니다. 실존철학자(實存哲學者)들이 말하고 있는 바 그 실존 자리는 산 보면 높다 하고 물 보면 깊다고 알 줄 아는 자리, 공산당은 죽일 놈들이라고 서로 적대시하는 그 자리가 실상자리입니다. 허공도 그 생각 못 내고 물질도 그 생각 못 내는 것이니 이 실상자리 빼 놓고는 그런 생각 내 놓을 곳이 없습니다. 육체도 못 내고 아무 것도 못 내는데 오직 마음자리 이것 하나만이 그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밤에 켜 놓은 촛불처럼 항상 드러나 있고 이것은 숨을 곳도 없고 사라질 곳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리입니다. 깨달아야 하겠다는 생각, 견성해야 하겠다 또 무엇을 체득해서 증득을 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막히게 되고 그게 역시 장애입니다. 이 자리는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이 얘기하다가, 법문을 듣다가 깨치고 육조대사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법문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리는 게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어디 이론으로 설명할 정도로는 그렇게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을 어디까지나 깨쳐야 하겠다는 이것이 가장 큰 근본지장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견성하기가 아주 쉽다는 겁니다.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산 보면 높은 줄 알고 미운 것 보면 밉다고 싸우기도 하는 이것이 금강반야입니다. 또 보리심을 발해 가지고 닦는다고 하는 것이 금강의 용(用)인데, 실상이 용이고 용이 실상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깨달아 체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개념이나마 확실히 그렇겠다고 생각해야 이것이 불교를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신심(信心)이 튼튼해집니다. 범부로서 일으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곧 자성(自性)에 대해 그 존재가 어떤 거라고 개념으로나마 깨치기 전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처님께서 설명을 자주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사실 부처님께서 애써서 소개하시고 싶은 것은 말 듣는 그 자리, 일체 시비언설(是非言說)이 다 끊어져서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곧 이것이 없는 거로 있는 거고 있는 것으로 없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 논리를 초월한 자리이지만 부득이 억지로 말을 붙여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이므로 실상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소개하고 싶어하는 그 내용은 문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역시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마치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전체가 그대들 마음이라.」고 하신 육조대사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만들었지, 그 자체가 어디 이름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 아무리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그런 무슨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인식을 하고 그러지만 그 실상과는 멀리 어그러집니다. 그 실상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가진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붙이라고 하는 것이니 실지는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놈은 이름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얘기 듣고 추상(推想)할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고 생각조차도 아니란 뜻입니다.

 

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口頭禪)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회에 나간 말입니다. 선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 하는 것, 책임 없는 말, 실천 없는 말을 뜻하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서 장난에 정신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羊車) 사슴수레(鹿車) 소수레(牛車)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 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동안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 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자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박고봉(朴古峰)스님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스님인데 만공스님(宋滿空)제자입니다. 한번은 고봉 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굴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만공아, 네가 견성을 했어, 이 도둑놈아, 견성을 좀 내놔 봐라.」 이렇게 욕을 한 나절이나 퍼부어 놓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구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찧을 수도 없는 것인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이 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 밖에 없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 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 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는데, 만공스님 혼자 앉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서 갭니다. 우리가 평생에 만공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울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 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 오고 그랬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스님의 힘이 훨씬 셉니다. 그것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 까지 들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비구가 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 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 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스님은 「허 허」하며 돌아 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때리는데 바윗돌이 갈라져서 몇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도 없는 거고 칭찬도 할 수 없는 거고 껍데기가 욕을 할 거고 욕은 실제로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인데 화를 낸다는 것은 더 우스운 알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에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엔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래의 면목을 보면 그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간 잘못 하거나 시장을 돌아 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 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趙州)스님이라는 굉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리 밖 산 밑에 한 노인이 호떡 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조주 스님을 한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 행인은 바로 가는 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불러놓고는 아 그리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도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부터 바로 길을 가르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쪽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켜 주고 스님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조주스님이 당장 주장자를 들고 「오늘 이자를 타살(打殺)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리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地獄業報)를 적게 받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려 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럼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비뚜로 가르쳐 줍니다. 조주 스님은 가리켜 주는 대로 얼마를 가니까 또 불러서 잘못 됐다고 다시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난다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 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 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시오. 천번 만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窮極體)인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욱 분석이 돼서 전자니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 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성자로 보이고 어떤 때는 그게 또 그것도 저것도 아닌 에너지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강강도 댕댕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한 가지 입니다.

그러니 아인쉬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지 아닌 이 이치까지는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事物)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을 때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 똑 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을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로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마는 딱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를 해 가지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 놓은 그 시간 부터 숨쉬는 시간 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찰라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完成品)의 반만 만들었다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을 하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맡는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불자(佛字)도 안 들어보고 하는 소리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비세계(非世界)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학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닌 과학 . 종교가 아닌 종교 . 초과학 . 초 종교인 동시에 초(超)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 억만배 했다면 말이 안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뵈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막이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 지언정 이런 원리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미진 전자 같은 요소(要素)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라고 말하고 중생이라 말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지 자꾸 베껴 보면 껍데기뿐이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 처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 에너지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가서 소모되고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을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 산소 . 수소로 보면 보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천여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 칠십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 데 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색즉시공 공중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진공(眞空)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고 있은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이고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것도 거리낄게 없는데 괜히 쓸데 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 손이 통과 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 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건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도 그렇고 동시에 바다 . 물 . 보배다 하는 현상계의 존재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저거는 중공이다.」 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하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도 있는거고 만일 천지가 날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라고 하는 생명의 실재(實在)로 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고 얽히게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5천년 문화와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존재하는 것인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한 데서 잘못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재를 깨닫는 것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현인(賢人)이나 성인(聖人)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에도 못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이고 꿈이고 환(幻)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니 미진이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여주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 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인쉬타인은 수박겉 핥기로 조금 얘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 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 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 게 아니고 아무 쓸데 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물 삼자(施受物三者)가 청정한 것입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 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주고 하면 그 복이 한량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닌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 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겠지만 그러나 아까 조주스님(趙州)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打殺)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 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滿空)이 절구공으로 고봉(古峰)스님을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법 다웁게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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