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많이 춥죠? 올 가을은 유난히도 따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한파가 몰려왔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평온한 삶을 살다가 이렇게 한파가 몰려오듯이 어느 날 인생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파는 얼마 있으면 또 지나가고, 날씨는 곧 평년 기온을 회복했다가, 또 더 추웠다가, 그러다가 대한, 소한을 지나면 다시 따뜻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날씨와 같은 우리들의 인생
사람들은 인생살이가 늘 이렇게 봄날 같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여름처럼 더울 때도 있고, 때로는 겨울처럼 추울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여름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겨울이 더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게 인생인 줄 알면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대응해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매일 봄날 같기를 원하지만 매일 꽃이 피는 하와이 같은 곳에 산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니에요. 사계절이 있으면 또 거기 나름대로 계절의 맛이 있습니다.
인생도 늘 평온하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바깥의 환경은 어찌 되든 내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주어진 조건이 어떻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사실은 별 일이 아닙니다. 늘 있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 겪는 일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과 좀 안 맞았을 때, 분하기도 하고, 원망도 생기고, 괴로움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내용을 대승불교사상, 특히 그 가운데 반야(般若) 사상 또는 공(空) 사상에서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문장을 배울 차례입니다. 스님이 맨 마지막 문장을 직접 읽은 후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苦提娑婆訶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는 뜻이 ‘고설’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확 깨달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야바라밀다주’는 반야바라밀다의 진실한 말씀이라는 뜻이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말합니다. 이 구절은 반야심경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제아제’는 한문을 우리말로 읽은 거예요. 인도말로는 ‘갓떼 갓떼’이고, 우리 말로는 ‘가세 가세’ 이런 뜻입니다. ‘바라아제’에서 ‘바라’는 ‘저 언덕’이라는 뜻이고, 한문으로는 ‘피안’입니다. 그래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이런 뜻입니다. ‘저 언덕’은 괴로움이 없는 세계 곧 열반의 세계입니다.
그동안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긴 시간 동안 배웠는데 이제 남은 과제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백 번 말해봐야 소용없잖아요.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깨달음을 이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바라승아제’는 인도말로 ‘빠라상갓데’라고 읽는데, 빠라는 ‘저 언덕’이고, ‘갓데(아제)’ 앞에 ‘상(승)’이 붙어서 ‘가자’의 완료형이 됩니다. ‘가자’가 현재형이기 때문에 완료형이 되면 ‘저 언덕에 도달하여’ 이런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지’는 ‘보리(菩提, Bohdi)’를 우리 식으로 읽어서 모지가 된 거예요. ‘사바하(스바하)’는 ‘하소서’ 라는 뜻으로, 기도를 할 때 마지막 구절로 들어가면 ‘뭐뭐 하게 하여 주소서’ 이런 뜻이 됩니다.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굉장히 힘찬 표현입니다. 반야심경의 전체적인 경구를 다 이해하고 난 결론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전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3.1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먼저 세계사를 주욱 설명하고,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고 난 뒤에 맨 끝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하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반야심경도 ‘결국 어떻게 하자는 거냐?’ 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마지막에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 문장은 힘 있게 읽어야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그 뜻을 모르니까 하기 싫은 사람이 억지로 하듯이 힘 빠진 소리로 읽는 경우가 많아요.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공약삼장처럼 아주 힘 있게 읽어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결론은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자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자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이 반야심경 전체를 이해한 사람이 도달해야 할 결론이에요.
네 가지 진리의 차원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화엄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신해행증에 기초해서 화엄경에서는 4가지 진리의 차원인 4법계(四法界)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첫 번째인 사법계(事法界)는 현상계를 말합니다. 두 번째인 이법계(理法界)는 본질계입니다. 세 번째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는 현상과 본질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차별 현상계에서 자유로워진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찌들고, 성질에 사로잡히고, 어리석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괴로움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것처럼 자업자득의 인생을 삽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만, 사실은 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자기의 고통을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사법계(事法界)입니다.
이런 걸 더 깊이 관찰해서 시류에 물들거나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은거를 하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자연인처럼요. 아니면 머리 깎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기도 하죠. 그것이 이법계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문제가 해결될까요? 자기가 물들지 않는 건 좋은데, 세상은 그냥 흘러가죠. 그리고 자기는 갇혀 있습니다. 새가 새장에 갇혀 있듯이, 물고기가 연못에 갇혀 있듯이,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서 배를 젓는 사람과 같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지는 일은 없지만, 그 배는 호수 밖을 나가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새장의 새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법계(理法界)입니다.
세상 속에서 걸림 없는 삶을 사는 방법
이사무애법계라고 하는 세 번째 세계는 보살의 세계입니다. 보살의 세계는 원을 갖고 큰 배를 만들고, 풍랑을 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바람을 이용하는 돛을 만들어서 바다를 항해합니다. 호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를 마음껏 항해합니다. 보살은 욕망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유유자적(悠然自適)하게 세상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활동을 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세계입니다. 색(色)이 즉 공(空)이고, 공(空)이 곧 색(色)인 이사가 무애한 세계죠.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절에 가면 일주문(一柱門)이 있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해서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 해서 일주문(一柱門)이라는 말도 씁니다. 이것이 이사무애법계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이사(理事)가 무애(無礙)한 세계, 즉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 가면 ‘사사무애법계’가 나옵니다. 현상 속에 있으면서도 걸림이 없는 세계입니다. 삶이 그냥 이 세상 속에서 걸림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배를 갖고 바다를 항해한다 하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법계 는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세계이고, 이법계는 물에 안 빠지려고 호수에 사는 세계이고, 이사무애법계는 바다에는 가고 싶고 물에는 안 빠지고 싶어서 큰 배를 갖고 바다에 나가는 세계입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물에 안 빠지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물에 안 빠지는 게 좋은데 첫 번째는 물에 빠져서 괴롭고, 두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울타리를 치고 살고, 세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큰 배를 탑니다.
바다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고
그런데 사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안 해요. 어차피 바다에 있는 진주조개를 줍기 위해서는 내 발로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빠지려고 했는데 빠지면 고통이지만, 이 사람은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내 발로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물에 빠졌지만 본인은 물에 빠진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원입니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옥에 갔는데, 우리가 볼 때는 바보 같죠. 다른 사람은 지옥에 안 가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지장보살은 안 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발로 가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고
사사무애법계라는 경지는 이 세상에서 남이 울 때 같이 울고, 남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남들과 똑같이 삽니다. 남이 울 때도 안 울고, 남이 웃을 때도 안 웃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물듦으로 해서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법계는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물드는 존재, 이법계는 깨끗하게 살려고 더러운 곳에 가까이 안 가는 존재, 이사무애법계는 가까이 가도 물 안 드는 존재인데, 마지막 단계인 사사무애법계는 내가 물 들고 상대를 살리는 존재입니다. 내가 지옥에 가고 상대를 지옥 밖으로 내보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여요. 그런데 본인의 마음속에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현현(顯現)한다’, ‘천백억 화신(千百億 化身)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잣대로 ‘저 사람은 수행자이다’ 이렇게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졌나, 안 빠졌나’ 하는 잣대가 있는데, 사사무애법계는 기준이 없으니까 잣대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삶으로 해서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느냐?’
‘본인은 괴로워하느냐?’
이런 걸 봐야 돼요. 운다고 다 괴로운 건 아니에요. 남이 슬퍼하니 함께 슬퍼해 주고, 남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니 같이 가서 들어주고, 남이 감옥에 갇히니 같이 가서 감옥에 갇혀도 주지만 본인은 괴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표시가 안 납니다. 그것을 화작(化作) 또는 화현(化現)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아직 부처의 길과 보살의 길이 다릅니다. 보살은 아직 부처가 못 된 단계로 설정되어 있는데, 화엄경의 사사무애법계에 가면 보살은 이미 부처가 됐지만 부처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모습까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공부하는 것이 다음 시간에 배우게 될 화엄경입니다.
반야심경의 요지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주인공이 스님이 아니고 보살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원을 세운 선남자, 선여인, 누구든지 다 주인공입니다. 둘째, 이들이 행하는 수행은 반야바라밀다행입니다. 확 깨달아서 눈을 떠버리고 진실을 아는, 그런 수행입니다. 셋째, 그렇게 확연히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제법이 공하다’ 하고 공을 체험합니다. 넷째, 실체가 없고 항상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니까 괴로울 일이 없어져 버려요. 반야심경 첫 문장에 이 네 가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반야심경은 한문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내용이 아주 짧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마다 이런 요지를 항상 마음에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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