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많이 춥죠? 올 가을은 유난히도 따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한파가 몰려왔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평온한 삶을 살다가 이렇게 한파가 몰려오듯이 어느 날 인생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파는 얼마 있으면 또 지나가고, 날씨는 곧 평년 기온을 회복했다가, 또 더 추웠다가, 그러다가 대한, 소한을 지나면 다시 따뜻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날씨와 같은 우리들의 인생

사람들은 인생살이가 늘 이렇게 봄날 같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여름처럼 더울 때도 있고, 때로는 겨울처럼 추울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여름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겨울이 더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게 인생인 줄 알면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대응해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매일 봄날 같기를 원하지만 매일 꽃이 피는 하와이 같은 곳에 산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니에요. 사계절이 있으면 또 거기 나름대로 계절의 맛이 있습니다.

 

인생도 늘 평온하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바깥의 환경은 어찌 되든 내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주어진 조건이 어떻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사실은 별 일이 아닙니다. 늘 있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 겪는 일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과 좀 안 맞았을 때, 분하기도 하고, 원망도 생기고, 괴로움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내용을 대승불교사상, 특히 그 가운데 반야(般若) 사상 또는 공() 사상에서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문장을 배울 차례입니다. 스님이 맨 마지막 문장을 직접 읽은 후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苦提娑婆訶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는 뜻이 고설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확 깨달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야바라밀다주는 반야바라밀다의 진실한 말씀이라는 뜻이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말합니다. 이 구절은 반야심경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제아제는 한문을 우리말로 읽은 거예요. 인도말로는 갓떼 갓떼이고, 우리 말로는 가세 가세이런 뜻입니다. ‘바라아제에서 바라저 언덕이라는 뜻이고, 한문으로는 피안입니다. 그래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이런 뜻입니다. ‘저 언덕은 괴로움이 없는 세계 곧 열반의 세계입니다.

 

그동안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긴 시간 동안 배웠는데 이제 남은 과제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백 번 말해봐야 소용없잖아요.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깨달음을 이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바라승아제는 인도말로 빠라상갓데라고 읽는데, 빠라는 저 언덕이고, ‘갓데(아제)’ 앞에 ()’이 붙어서 가자의 완료형이 됩니다. ‘가자가 현재형이기 때문에 완료형이 되면 저 언덕에 도달하여이런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지보리(菩提, Bohdi)’를 우리 식으로 읽어서 모지가 된 거예요. ‘사바하(스바하)’하소서라는 뜻으로, 기도를 할 때 마지막 구절로 들어가면 뭐뭐 하게 하여 주소서이런 뜻이 됩니다.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굉장히 힘찬 표현입니다. 반야심경의 전체적인 경구를 다 이해하고 난 결론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전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3.1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먼저 세계사를 주욱 설명하고,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고 난 뒤에 맨 끝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하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반야심경도 결국 어떻게 하자는 거냐?’ 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마지막에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 문장은 힘 있게 읽어야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그 뜻을 모르니까 하기 싫은 사람이 억지로 하듯이 힘 빠진 소리로 읽는 경우가 많아요.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공약삼장처럼 아주 힘 있게 읽어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결론은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자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자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이 반야심경 전체를 이해한 사람이 도달해야 할 결론이에요.

 

 

네 가지 진리의 차원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화엄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신해행증에 기초해서 화엄경에서는 4가지 진리의 차원인 4법계(四法界)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첫 번째인 사법계(事法界)는 현상계를 말합니다. 두 번째인 이법계(理法界)는 본질계입니다. 세 번째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는 현상과 본질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차별 현상계에서 자유로워진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찌들고, 성질에 사로잡히고, 어리석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괴로움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것처럼 자업자득의 인생을 삽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만, 사실은 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자기의 고통을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사법계(事法界)입니다.

 

이런 걸 더 깊이 관찰해서 시류에 물들거나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은거를 하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자연인처럼요. 아니면 머리 깎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기도 하죠. 그것이 이법계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문제가 해결될까요? 자기가 물들지 않는 건 좋은데, 세상은 그냥 흘러가죠. 그리고 자기는 갇혀 있습니다. 새가 새장에 갇혀 있듯이, 물고기가 연못에 갇혀 있듯이,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서 배를 젓는 사람과 같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지는 일은 없지만, 그 배는 호수 밖을 나가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새장의 새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법계(理法界)입니다.

 

세상 속에서 걸림 없는 삶을 사는 방법

이사무애법계라고 하는 세 번째 세계는 보살의 세계입니다. 보살의 세계는 원을 갖고 큰 배를 만들고, 풍랑을 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바람을 이용하는 돛을 만들어서 바다를 항해합니다. 호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를 마음껏 항해합니다. 보살은 욕망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유유자적(悠然自適)하게 세상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활동을 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세계입니다. ()이 즉 공()이고, ()이 곧 색()인 이사가 무애한 세계죠.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절에 가면 일주문(一柱門)이 있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해서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해서 일주문(一柱門)이라는 말도 씁니다. 이것이 이사무애법계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이사(理事)가 무애(無礙)한 세계, 즉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 가면 사사무애법계가 나옵니다. 현상 속에 있으면서도 걸림이 없는 세계입니다. 삶이 그냥 이 세상 속에서 걸림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배를 갖고 바다를 항해한다 하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법계 는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세계이고, 이법계는 물에 안 빠지려고 호수에 사는 세계이고, 이사무애법계는 바다에는 가고 싶고 물에는 안 빠지고 싶어서 큰 배를 갖고 바다에 나가는 세계입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물에 안 빠지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물에 안 빠지는 게 좋은데 첫 번째는 물에 빠져서 괴롭고, 두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울타리를 치고 살고, 세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큰 배를 탑니다.

 

바다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고

그런데 사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안 해요. 어차피 바다에 있는 진주조개를 줍기 위해서는 내 발로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빠지려고 했는데 빠지면 고통이지만, 이 사람은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내 발로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물에 빠졌지만 본인은 물에 빠진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원입니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옥에 갔는데, 우리가 볼 때는 바보 같죠. 다른 사람은 지옥에 안 가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지장보살은 안 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발로 가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고

사사무애법계라는 경지는 이 세상에서 남이 울 때 같이 울고, 남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남들과 똑같이 삽니다. 남이 울 때도 안 울고, 남이 웃을 때도 안 웃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물듦으로 해서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법계는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물드는 존재, 이법계는 깨끗하게 살려고 더러운 곳에 가까이 안 가는 존재, 이사무애법계는 가까이 가도 물 안 드는 존재인데, 마지막 단계인 사사무애법계는 내가 물 들고 상대를 살리는 존재입니다. 내가 지옥에 가고 상대를 지옥 밖으로 내보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여요. 그런데 본인의 마음속에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현현(顯現)한다’, ‘천백억 화신(千百億 化身)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이렇게 말합니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잣대로 저 사람은 수행자이다이렇게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졌나, 안 빠졌나하는 잣대가 있는데, 사사무애법계는 기준이 없으니까 잣대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삶으로 해서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느냐?’

 

본인은 괴로워하느냐?’

 

이런 걸 봐야 돼요. 운다고 다 괴로운 건 아니에요. 남이 슬퍼하니 함께 슬퍼해 주고, 남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니 같이 가서 들어주고, 남이 감옥에 갇히니 같이 가서 감옥에 갇혀도 주지만 본인은 괴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표시가 안 납니다. 그것을 화작(化作) 또는 화현(化現)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아직 부처의 길과 보살의 길이 다릅니다. 보살은 아직 부처가 못 된 단계로 설정되어 있는데, 화엄경의 사사무애법계에 가면 보살은 이미 부처가 됐지만 부처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모습까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공부하는 것이 다음 시간에 배우게 될 화엄경입니다.

 

 

반야심경의 요지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주인공이 스님이 아니고 보살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원을 세운 선남자, 선여인, 누구든지 다 주인공입니다. 둘째, 이들이 행하는 수행은 반야바라밀다행입니다. 확 깨달아서 눈을 떠버리고 진실을 아는, 그런 수행입니다. 셋째, 그렇게 확연히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제법이 공하다하고 공을 체험합니다. 넷째, 실체가 없고 항상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니까 괴로울 일이 없어져 버려요. 반야심경 첫 문장에 이 네 가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반야심경은 한문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내용이 아주 짧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마다 이런 요지를 항상 마음에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란 ‘제법이 공한 실제의 세계는 어떠한가’ 이런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실제의 세계가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첫째,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생멸이 있습니다. 우주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별들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사람도 태어나고 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멸의 세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사람이 죽으면 슬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해가 뜬다, 해가 진다’라고 말합니다. 지구에 사는 내 눈에는 해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까 인식한 대로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태양계를 보면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고 지구가 자전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해가 뜨는 바도 없고, 지는 바도 없어요. 그것처럼 실제의 세계는 생하는 바도 없고 멸하는 바도 없고 여여합니다.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면 파도가 생겨나고 파도가 사라집니다.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물이 출렁출렁할 뿐입니다. 파도 하나만 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데, 바다 전체를 보면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바도 없습니다. 그냥 변할 뿐이에요. 개별로 볼 때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인식이 되지만, 전체를 보면 생겨났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졌다고 할 것도 없어요.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불생불멸이라고 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생불멸의 의미는 생한다고 하지만 생했다고 할 수 없고, 멸했다고 하지만 멸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생한 것도 아니고 멸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인식과 실제는 항상 일치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1차원은 수직선을 말해요. 수직선은 가운데가 숫자 ‘0’이고, x축만 있는 거예요. 오른쪽으로 갈수록 +1, +2, +3, +4가 되고, 왼쪽으로 갈수록 –1, –2, –3, –4 가 됩니다. 한마디로 파이프와 같은 거예요. 파이프 안에 구슬 하나가 이쪽에서 오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서 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구슬이 탁 하고 서로 부딪칩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이것이 1차원이에요.


그러나 2차원은 평면입니다. 그래서 x축과 y축이 있어요. x축의 제로에도 y축으로는 0 콤마 1, 0 콤마 2, 0 콤마 3, 0 콤마 4, 이렇게 y축이 있습니다. 또 밑으로도 0 콤마 –1, 0 콤마 –2, 0 콤마 –3, 이런 식으로 y축이 있습니다. 평면은 표시를 어떻게 할까요? x 콤마 y, 이렇게 점의 위치를 두 숫자로 표시하죠. 우리가 서 있는 여기를 동경 몇 도, 북위 몇 도, 이렇게 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1차원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두 개의 구슬 중에 하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서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차원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하나의 구슬을 y축으로 옮겨 놓으면 충돌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2차원에서는 ‘옆으로 갔네’ 하고 느끼는데, 1차원에서는 순간적으로 앞에 있던 게 금방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보이면 ‘다시 생겼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1차원에서는 생기고 사라지는 게 2차원에서는 그냥 이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3차원은 x축, y축, z축이 있습니다. 즉, 가로, 세로, 높이가 있는 세계입니다. 2차원에서는 건물을 1층밖에 지을 수가 없지만, 3차원에서는 같은 면적에 높이로 올라가면서 1층도 짓고, 2층도 짓고, 3층도 짓고, 4층도 지을 수 있습니다. x축 y축은 같은데 z축이 점점 달라지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개미는 2차원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높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면에 울타리를 쳐 놓으면 개미는 넘어갈 수가 없죠. 그런데 그 개미를 사람이 손으로 잡아 약간 위로 올리면, 평면의 눈을 가진 사람은 ‘없어져 버렸네’라고 생각할 겁니다.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다시 내려오면 ‘개미가 나타났다’라고 말하며 귀신같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처럼 2차원에서는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3차원에서는 그냥 이동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4차원은 어떨까요? 4차원은 가로 세로 높이인 xyz에 시간 축인 t가 추가됩니다. 방 안에 내가 갇혀 있으면 3차원에서는 방 안에 벽을 뚫어야만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4차원에서는 시간 축으로 이동을 하면 됩니다. 4차원에서 보면 그냥 단순히 시간 축의 이동에 불과한데 3차원에서 보면 그냥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요. 그러다 갑자기 연기처럼 탁 나타나는 겁니다. 3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4차원에 볼 때는 사람이 시간 이동을 한 거예요.

실제의 세계는 4차원의 세계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4차원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만큼 빨리 가는 로켓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로켓 안에서의 시간은 점점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 특수상대성 이론이죠. 이런 것처럼 차원에 따라서 달리 보입니다. 1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2차원적 사고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2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3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3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4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장벽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탁발을 나갔는데 어느 바라문이 ‘왜 육신도 멀쩡한데 일을 해서 밥을 먹지, 얻어먹느냐?’ 하며 욕을 했어요. 3차원에서는 상대가 나한테 욕을 하면 ‘쟤가 나한테 욕을 했어. 나쁜 놈이야’ 하며 화를 내는 식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데, 부처님은 욕하는 바라문에 대해서 참는 게 아니라 4차원적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그 바라문의 수준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를 한 거죠. 그 차원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 이해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부처님이 빙긋이 웃으니까 바라문이 또 ‘왜 웃냐?’ 하고 화를 냈습니다. 욕을 들으면 대응을 해야 하는 게 3차원의 세계인데, 부처님은 욕을 듣고도 웃으니까 바라문은 부처님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물었어요.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네’

‘선물을 가지고 옵니까?’
‘네’

‘손님이 가져온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은 누구 거예요?’
‘가져온 사람 거죠’

이 정도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건 왜 물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당신이 저한테 욕을 선물했는데 제가 웃으면서 안 받으면 그 욕이 누구의 것인가요?’

바라문은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고 3차원에 갇혀 있던 자기 생각이 탁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 실제의 세계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불생불멸의 뜻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둘째, 실제의 세계에서는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해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잖아요. 푸세식 화장실에 가보면 더럽죠. 더러운 곳에서 바글바글 사는 구더기가 불쌍해서 채로 건져서 깨끗이 씻은 후 하얀 그릇에 담아놓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깨끗해서 보기 좋잖아요. 그런데 구더기는 다 튀어나와서 다시 똥통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그들의 세계예요.


마약을 하는 사람은 마약이 몸을 병들게 해도 마약에 집착되어 있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데도 그 세계에서 기쁨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잖아요. 엄마가 볼 때는 지금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문제이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사실은 청결하고 불결하다고 말할 때의 위생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정확한 의미는 신성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신분적으로 브라만은 신성하고, 천민은 천하다고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천민 가까이 가면 부정 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브라만이라고 성스럽다 할 것도 없고, 불가촉천민이라고 부정하다 할 것도 없다’

참 굉장한 얘기죠. 당시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도 있잖아요. 가게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면 재수 없다고 한다거나, 인삼밭에 여자가 오면 재수 없다고 하거나, 배가 출항할 때 여자가 타면 재수 없다고 하거나, 이런 말들은 모두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생긴 모양이 다를 뿐이지 남자라고 해서 우월하다 할 것이 없고, 여자라고 해서 열등하다고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
셋째, 실제의 세계는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재산이 늘어났다’, ‘재산이 줄어들었다’, ‘몸무게가 늘어났다’, ‘몸무게가 줄어들었다’ 이런 말들을 늘 사용하는데, 왜 늘어나는 게 없고 줄어드는 게 없다고 할까요?

저울대를 놓고 왼쪽에 2kg 저울추를 두고, 오른쪽에 큰 바구니를 뒀어요. 큰 바구니 안에는 작은 바구니 2개를 넣어 두고, 이쪽 바구니에는 사과 5개를 넣고, 저쪽 바구니에는 배 5개를 넣어 두었다고 합시다. 이쪽 바구니에 있는 배를 하나 집어서 저쪽 바구니에 집어넣으면, 배 바구니는 하나가 줄고, 사과 바구니는 하나가 늘었죠. 그런데 저울추는 안 움직입니다. 2개의 작은 바구니 사이에서는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큰 바구니 안에는 사과 5개와 배 5개가 그대로 있잖아요. 좁게 보느냐, 넓게 보느냐, 짧게 보느냐, 길게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인식이 다르게 일어납니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으면 몸무게가 늘어납니다. 그때 비행기가 무거워졌을까요? 탑승객이 먹을 음식물이 가득 실린 비행기에서 그 음식물을 다 나눠줘서 싹 없어졌다고 해서 비행기가 가벼워질까요? 개개인으로 보면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비행기 전체로 보면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습니다.

부모와 두 명의 자식들이 명절에 카드놀이를 하면서 돈내기를 했다고 합시다. 아빠가 좀 따고, 엄마가 좀 잃고, 큰 애가 좀 따고, 작은 애가 좀 잃었어요. 그러면 애들은 싸웁니다. 돈을 잃었다고 화내고, 돈을 땄다고 좋아해요. 자기 돈 가져간 것 좀 달라고 하고, 자기가 땄는데 왜 돌려줘야 하냐면서 막 울고 싸우면, 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애들아, 그만 싸워라. 그 돈이 그 돈이잖니? 그게 어디 간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있는데 싸우기는 왜 싸워’

엄마는 집안 전체를 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자식들은 자기만 보니까 절대로 그 돈이 그 돈이 아닌 거죠. 이런 경험은 종종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돈이 그 돈인 줄 아는 사람은 그 일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너의 것과 나의 것이 따로 있는 사람은 땄느니 잃었느니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만 보거나 자기 가족만 보거나 자기 지역만 보거나 자기 나라만 보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로 봅니다. 만약에 한국과 일본이 싸웠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는 부처님께 한국이 이기게 해달라고 빕니다. 그 말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거잖아요. 일본 사람들도 자기 나라가 이기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어요.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이 사람 말 듣고 저 사람 죽이고, 저 사람 말 듣고 이 사람 죽이고, 이런 일을 하는 존재일까요? 이런 신앙이 어떻게 진리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눈을 조금 크게 떠야 합니다. 작게 보면 이기고 지는 것이 있지만, 크게 보면 이기고 지는 개념이 없어집니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게 없는 줄 알아야 해요. 본질의 세계에서는 부증불감이 진실입니다.

오늘 강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세 가지를 공부했습니다. 진리의 세계에는 세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을 ‘불일불이’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정지한 것도 아닙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것을 ‘무시무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오고 종말론이 나오는 거예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줄 알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어요. 변화만 있지요.”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는 오온(五蘊)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라고 하는 것, 혹은 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단독자가 아니고, 다섯 가지의 쌓임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출현할 당시에는 기존의 불교가 오온을 구성하는 각각을 실체(實體)가 있는 요소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요소설과 실체설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나’라고 작용하는 정신작용을 한 번 보세요. 눈으로 보고 안다, 귀로 듣고 안다, 코로 냄새 맡고 안다, 입으로 맛을 보고 안다, 손으로 감촉하고 안다, 머리로 생각해서 안다, 이렇게 외부에 무언가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내가 아는 것이 ‘색(色)’이에요. 그 대상을 알 때 어떤 떨림이나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수(受)’입니다. 느낌은 아는 작용하고 달라요. 느낌은 불쾌하다, 유쾌하다, 즐겁다, 괴롭다 하듯이 어떤 떨림 같은 감정입니다. 아는 것이나 감정을 기억했다가 다시 생각해내고 질서를 잡고 논리를 따지고 추론을 하는 작용이 ‘상(想)’입니다. 그 생각에 따라서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해야 된다’, ‘안 해야 된다’ 이렇게 행위를 유발하는 의지 작용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행(行)’입니다.


아는 작용(색), 느낌 작용(수), 생각 작용(상), 의지 작용(행)이 일어나면, 이것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쌓이게 되는데, 그것이 ‘식(識)’입니다. 식은 다시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선입관으로 작용을 해요. 사물을 볼 때 그냥 기계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식이 영향을 끼쳐요. 기분이 좋고 나쁜 데에도 식이 영향을 끼치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식이 오온의 맨 끝에 오지만, 어쩌면 식이 오온의 맨 앞에 올 수도 있습니다. 식은 마음작용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정신작용을 뭉뚱그려서 그냥 ‘나’라고 부르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분류해보면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 대상에도, 들리는 소리에도, 냄새에도, 맛에도, 감촉이나 생각에도 실체가 없고 늘 변합니다. 색에 따라 일어나는 느낌도 늘 그때그때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집니다. 하고 싶고, 하기 싫고, 해야 되고, 하지 말아야 되고, 이런 의지도 항상하지 않고 늘 바뀝니다. 식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늘 형성되고 바뀌는 겁니다.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여기서 ‘무(無)’는 ‘고정 불변하는 요소는 없다’, ‘실체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제법이 공하다는 차원에서 보면(시고 공중, 是故 空中), 색이라는 실체도 없고(무색, 無色),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실체도 없습니다(무수상행식, 無受想行識).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의 실체설을 부정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소승불교 교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12처설입니다. 12처는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안다는 게 별 거 아니에요. 앎이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형성되어진 것이라는 것이 12처설입니다.

그런데 당시 소승 불교인들은 12처설을 또다시 요소설로 이해한 거예요. 색이란 실체가 있고, 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 역시 각각 다 실체가 있는 걸로 생각한 겁니다. 세상 속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실체가 있다’ 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지만 밖에 나가 하늘을 처다 보면 해가 뜨고 해가 지니까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장은 12처 앞에 무(無) 자가 각각 다 붙어 있는 것인데, 무(無) 자가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12처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 문장은 18계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일체가 12처라면, 같은 것을 눈으로 보고, 같은 것을 귀로 들을 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알아야 되겠죠. 그런데 제가 지금 강의를 하는 중에도 여러분들이 똑같은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모습을 보지만 여러분들 각자 받아들이는 게 다르잖아요. 이것은 12처설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법륜스님 얘기를 듣고 알았고, 법륜스님 모습을 보고 알았다. 아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인식 기관과 인식대상이 만나서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12처설로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왜 사람마다 아는 것이 다른지는 12처설로 설명이 안 돼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결과가 똑같이 나오는 것 같지만, 흑백으로 찍는지, 칼라로 찍는지, 카메라 성능이 어떠한지에 따라 사진이 다르게 나오잖아요. 그렇듯이 사람마다 각각 인식을 할 때 그 바탕이 되는 ‘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알게 됩니다. 그걸 업식이라고 해요. 볼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들을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냄새 맡을 때도 업식이 작용합니다. 똑같이 된장찌개 냄새를 맡아도 업식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수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역겹게 느끼게 됩니다.

냄새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껴야겠죠. 이렇게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코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된장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각각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업식 역시 형성된 것입니다. 업식은 볼 때도 작용하고, 들을 때도, 냄새 맡을 때도, 맛볼 때도, 감촉할 때도, 생각할 때도 작용합니다. 그래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렇게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여기에 더해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까지 이렇게 18가지가 일체라고 보는 것이 18계설입니다. 오온설은 약간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면, 12처설은 약간 객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을 보완해서 나온 것이 18계설이에요.

대승불교가 일어날 당시 기존 불교는 18계설을 18가지 요소설로 이해했습니다. 요소설은 각각이 실체가 있는 근본 종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실체가 있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18계를 다 나열하지 않고, 첫 번째와 마지막 것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해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렇게 썼습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일체는 오온이다’, ‘일체는 12처다’, ‘일체는 18계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각각을 요소화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숯을 태우면 탄소와 산소가 만나서 이산화탄소가 나옵니다. 이런 화학변화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일정 성분비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여기에는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변의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돌턴의 원자설입니다. 원자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거죠. 근대 과학에서 만물은 92개의 원자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두 요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소승불교에서 일체를 5요소설, 12요소설, 18요소설로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 와서 소립자와 쿼크가 발견되면서 이런 요소설이 부정됩니다. 소승불교가 오온, 12처, 18계를 변하지 않는 요소로 이해한 것을 대승불교가 부정한 것처럼요.


부처님은 요소설을 부정했는데, 불멸 후 브라만교와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으로 어느덧 실체가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된 거죠. 요소설을 부정하기 위해 설명한 오온설, 12처설, 18계설이 다시 요소설로 받아들여지게 된 거예요. 당시 사람들에게는 요소설이 정통 불교였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학습을 했지만, 진리라는 법상을 지어버린 거죠. 이렇게 당시 불교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반야심경은 어디가 잘못됐는지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이 부분은 12연기를 요소설로 이해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12연기의 첫 번째가 무명이죠. 그다음에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이렇게 12가지 연관 고리를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무명부터 노사까지 12연기 각각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명이라 할 것이 없다. 이름하여 무명이지, 무명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르면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지 별도로 어리석음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무명의 실체가 없으니까, 또한 무명을 없앤다 할 것도 없다는 의미예요. 굉장한 얘기입니다. 그다음에 ‘내지’라고 적고 12연기의 중간 10개를 생략한 후 ‘노사’가 나옵니다.

‘노사라고 하는 실체도 없다. 그러니 노사를 멸한다고 할 것도 없다.’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를 오롯이 아는 것이 곧 지혜라고까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사성제도 부정합니다. 왜 사성제를 부정할까요? 사성제를 일종의 요소설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고(苦), 이것이 괴로움이다.
집(集),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멸(滅),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도(道),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다.

반야의 세계에서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실체도 없어요. 여러분이 밤에 자다가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고 합시다. 꿈속에서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강도입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강도를 피해야겠죠. 그래서 관세음보살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관세음보살님이 도와주셔서 살았어요. ‘아이고,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데, 눈을 딱 뜨니까 꿈이에요. 그럼 눈 뜬 소식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애초에 괴로움이라고 할 것이 없었고, 강도도 없었어요. 눈을 번쩍 뜨고 깨면 관세음보살도 없고, 관세음보살에게 구원받을 일도 없는 거예요. 이게 대승 불교의 관점입니다.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을 없애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직 눈 감은 소식에 불과해요. 잠이 덜 깬 소식입니다.

‘눈을 번쩍 떠버리면 본래 괴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 괴로움을 없앨 것도 없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 문장도 각 단어마다 ‘무(無)’자가 생략된 겁니다.

무고(無苦), 괴로움이라 할 것이 없으므로
무집(無集), 괴로움의 원인이라 할 것도 없고
무멸(無滅), 괴로움의 소멸이라 할 것도 없고
무도(無道), 괴로움을 없애는 길에 이른다는 것도 없다.

이어서 깨달음의 실체를 부정합니다.

무지 역 무득
無智 亦 無得

여기서 ‘무지(無智)’는 ‘깨달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또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아야지!’ 결심하고 평생을 거기에 묶여서 살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상을 짓고 매달리고 있는 겁니다. ‘신이 있다’ 하는 것처럼 깨달음이라는 실체를 상정하고 평생을 거기에 매달려서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무득’은 ‘얻음도 없다’라는 뜻인데 깨달음을 얻음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당연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죠.

이것은 모두 진리를 절대화시키는 바람에 중도와 연기에서 벗어난 것을 비판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당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공의 차원에서 낱낱이 비판한 후 이어서 대승불교의 위대함을 강조합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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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늙고 죽는다.



그렇다면 늙고 죽음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유사 이래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신에게 기도하기도 하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냉동인간이나 동물복제를 통해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병고에서 벗어나려면 병의 원인을 알아야하는 것처럼, 늙고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늙고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늙고 죽음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므로 ‘나의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결국 늙고 죽음을 극복하는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죽음을 ‘나의 사라짐’으로 생각하지만, 죽음은 단지 ‘내 몸’의 사라짐일 뿐이다. 몸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남아서 자신의 깜냥에 합당한 과보를 받는다. 베푸는 마음을 자주 연습했으면 부자가 되고, 화를 잘 냈으면 추하게 태어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 질투했으면 천박한 가문에 태어나는 것이다.



결국 몸은 물론 마음까지 사라져야 온전한 ‘나’의 사라짐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마음은 흔히 ‘생각’이라고 표현되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몸은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므로 굳이 없애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단지 마음만 쉬도록 해주면 된다. 그래서 ‘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비 분별하는 마음, 즉 생각을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붓다가 첫 번째로 권장한 방법은 바로 대면관찰(對面觀察)이다. 자신의 생각을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생각은 더 이상 ‘나의 생각’이 아니라, ‘닉네임의 생각’(아바타의 생각)이 된다. 어떠한 생각이든 ‘닉네임의 것’(아바타의 것)으로 객관화시켜 관찰하면, 정작 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가 바로 본 마음인 성품이다.



생각을 쉬는 두 번째 방법은 애초부터 이 성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생멸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생멸하지 않는다. 예컨대 종을 치면 그 소리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그 소리를 듣는 성품은 생겨났다 없어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자더라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보고 듣는다. 육신의 눈은 감고 뜨지만 성품은 감고 뜨지 않는다.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스스로를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거울과 같은 대상이 없이는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관찰자는 스스로 대상을 창조한다. 마치 푸른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창조해서 자신을 실감나게 알고 느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허공과 구름이 둘이 아니듯, 관찰자인 성품과 관찰의 대상인 몸과 마음 또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차원에 도달하게 되면, 늙고 죽음의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늙고 죽음을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늙고 죽음에 철저해지는 것이다. 철저히 늙고 철저히 죽는 것이다. 생(生)이 오면 생과 마주하고, 사(死)가 오면 사와 함께 한다.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죽을 땐 죽을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것 뿐! 이것이 분별 망상인 생각을 쉬는 세 번째 방법이다.



그러므로 선사들은 말한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잔다.’ 겉보기엔 범부들과 다름없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범부들은 밥 먹으면서 오만가지 번뇌 망상을 하며, 잠자면서 갖가지로 꿈을 꾼다. 몸과 마음이 나누어지고, 현상과 본성이 이원화된다. 하지만 선사들에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현상과 본성도 둘이 아니다.



결국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순해졌다. 태어날 땐 태어날 뿐!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아플 땐 아플 뿐! 죽을 땐 죽을 뿐!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완전 연소할 뿐이다. 이것이 현상에 철저하면서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법이다.



이렇게 시시각각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 자꾸 시비 분별심이 일어난다면, 얼른 대면 관찰을 해야 한다. ‘달마가 욕심을 일으킨다.’ ‘달마가 화를 내려한다.’ ‘달마가 근심 걱정 하는구나.’ 이렇게 닉네임을 붙여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면, 생로병사와 탐 진 치는 달마의 것이 되고, 정작 자신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는 한없이 크고 밝고 충만하다.



결국 참 나는 무아(無我)요, 무아는 대아(大我)이며, 대아는 시아(是我)다. 진정한 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완전 연소하는 것이 참다운 무아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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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세계의 현상, 성주괴공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가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붕괴되고,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우주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고 없는 무()에서, 어떤 존재가 인연을 따라 모여 형성되고(), 그것이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그러다가 붕괴하고(),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그래요.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다

오늘날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은 금성, 목성처럼 지구 가까이에 있는 행성(行星) 몇 개를 빼고는 대부분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恒星)입니다. 그러나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별로 보입니다. 행성인 달과 수성, 금성, 화성, 목성 정도는 지구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밤에 맨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망원경을 통하지 않으면 거의 안 보입니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 8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태양빛은 8분 전에 출발한 거예요.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제일 가까운 것이 4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4년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은하계의 크기는 지름이 10만 광년입니다. 빛의 속도로 10만 년을 가는 거리죠. 이 은하계 안에 태양계 같은 것이 약 1천 억 개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죠. 그런데 이런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닙니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면 뿌옇게 보이는 은하계의 별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은하계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 1천 억 개가 있다고 나왔는데, 요즘은 망원경이 더 좋다 보니까 그 열 배인 1조 개나 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더 발견될 수도 있겠죠. 은하계를 소우주라고 하는데, 대우주에는 이런 소우주가 1조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를 세계라고 한다면, 이런 세계가 천 개 모여서 소천 세계를 이루고, 소천 세계 천 개가 모여서 중천 세계를 이루고, 중천 세계 천 개가 모여서 대천 세계를 이룹니다. 이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고 합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삼천대천세계가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 강이 있고,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도 표현합니다. 옛날 인도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을 모르고 허풍으로 한 얘기라 하더라도, 실제로 오늘날 발견된 우주는 그 허풍보다도 더 큽니다.

 

대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소우주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소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태양계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태양계에서 보면 지구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지구에서 보면 나는 티끌 같은 존재예요. 그러니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또 원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예요. 그 작은 원자도 소립자의 관점에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다

별이 하나 형성되고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현재 태양을 기준으로 백억 년 정도라고 해요. 지구가 생긴 지 지금까지 46억 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46억 년의 세월에 비하면 만 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인간이 사는 백 년은 시간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인류 역사가 긴 것 같지만, 우주적 시간에서 보면 인간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 자체가 그냥 반짝하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원자핵 속에 마이너스 전기를 띈 파이 중간자가 중성자에서 튀어나와서 양성자로 옮겨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의 마이너스 23승 초라고 그래요. 그 시간에 비하면 1초는 우주적 시간입니다.

 

시간도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원자적 시간에 비하면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할 수도 있고, 우주적 시간에 비하면 밤하늘에 불꽃놀이보다 더 짧은 찰나의 인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주의 성간물질이 모여 지금의 태양 같은 주계열성(主系列星, Main sequence)이 되고, 주계열성이 나중에 팽창해서 거성(巨星, Giant star)이 되고, 거성이 폭발하면 백색왜성(白色矮星, white dwarf)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별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것을 일컬어 별의 진화라고 하는데, HR(Hertzsprung-Russell diagram)도를 보면 그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다 성주괴공을 똑같이 보여주는 현상이에요.

 

생명세계의 현상,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리 생명은 어떨까요? 유전자에 들어 있는 설계도에 따라서 물질이 세포를 구성하고, 그 세포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다세포 생물입니다. 세포는 계속 교체가 되기 때문에 6개월만 지나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다 바뀝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보면 6개월 전과 지금은 다른 사람입니다. 모양이 같을 뿐이지 부속을 계속 갈아 넣게 되는 거예요.

 

자동차 두 대를 놓고, 이 차는 내 차, 저 차는 네 차라고 합시다. 계속 양 쪽 부속을 서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은 문짝을 하나 바꾸고, 내일은 바퀴를 하나 바꾸는 식으로요. 자동차 부품이 2만 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하루에 천 개씩 바꾼다면 모든 부품을 서로 교환하는데 20일 정도 걸리겠죠. 20일이 지나서 모든 부품을 교환했다면, 저 차가 내 차고 이 차는 남의 차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이 차가 내 차라고 생각하죠. 우리들의 인식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 몸도 세포 차원에서 보면 계속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외형을 보면 그 형태를 유지하니까 오늘도 내일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이건 모든 생물의 현상입니다. 모든 생물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이것을 생로병사 한다고 해요.

 

정신세계의 현상, 생주이멸(生住異滅)

우리들의 정신은 어때요? 한 마음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한 생각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정신이든, 생명이든, 물질이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지형도 항상 하지 않고 변화합니다. 원지형(原地形)에서 유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쳐 준평원이 되고, 다시 또 융기해서 새로운 원지형이 되어 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걸 데이비스의 지형윤회설이라고 하죠.

 

암석도 마찬가지예요. 화산 폭발로 분출한 마그마가 굳어서 암석이 되거나, 흙이나 모래가 굳어서 암석이 되는데, 그것이 깨지면 바위가 됩니다. 바위가 깨지면 자갈이 되고, 자갈이 깨지면 모래가 되고, 모래가 깨지면 흙이 됩니다. 그것이 다시 녹으면 마그마가 되고, 마그마가 굳으면 암석이 됩니다. 마그마가 분출해서 화성암이 되고, 또는 모래나 흙이 굳어서 퇴적암이 되고, 열과 강한 압력을 받아 물리적 혹은 화학적 변화를 겪으면 변성암이 됩니다.

 

제행무상,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저 태양도 산도 바다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판게아(Pangaea)가 남반구에 곤드와나(Gondwana) 대륙과 북반구의 로라시아(Laurasia) 대륙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에 테티스 해(tethys ocean)라는 바다가 있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바다에 흙이 쌓이고, 그것이 습곡 작용으로 솟은 것이 지금의 알프스 히말라야 조산대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계속 지진이 나고 화산 폭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되고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꾸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잘난 척 하지만 별 거 아닌 줄 알고,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금방 죽는 줄도 알게 됩니다.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먹는 것이 좋은 일 같지만, 그것이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겁니다. 어떻게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부러워합니까? 그게 뭐가 좋다고 부러워해요? 남의 살코기를 베어서 구워 먹고 씹어 먹는 것이 뭐가 좋다고 그걸 부러워하며 사나요? 조금만 이런 이치를 알면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어리석게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화를 어떻게 참아야 되느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다 진실을 모르니까 눈을 감고 하는 소리예요. 눈을 감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뭘 어디에서 찾아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뜨면 한눈에 그냥 다 보여요.

 

제법무아(諸法無我), 고정된 실체는 없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무상과 무아 중에 무상(無常, 아니짜)은 그래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계절의 변화 등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무아(無我, 아나뜨)인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변하는 중에도 그 안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느냐하는 생각을 못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은 윤회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못 버리니까 윤회관이 나오는 거예요. 영혼이 지옥에 갔다가 아귀도에 갔다가 인간계에 갔다가 천상계에 갔다가 이렇게 윤회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뭔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실체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생각, 죽어서 영혼이 천당에 간다는 등의 생각, 이런 생각들은 다 유아(有我)적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무슬림이든, 인도의 어떤 사상이든, 모든 종교와 철학이 내가 있다는 아트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99.9퍼센트는 아트만에 근거를 둔 인식과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고, 현대 과학에 와서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까지 밝혀졌지만, 이런 것들이 이해가 안 되니까 무아마저도 그냥 아트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라고 할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은 다섯 가지 쌓임(오온, 五蘊)에 불과하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아트만적 견해로 돌아가서 그 다섯 가지는 불변하는 요소다이렇게 이해하는 거죠.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설명하고 따라 하지만, 철학적 기반은 뒤바뀌어 버린 거예요. 무아가 아니라 유아로 가버렸어요. ‘불성이 있다’, ‘불성을 찾아라’, ‘불성을 깨달아라이렇게 얘기하면 벌써 아트만론()에 빠져 버립니다.

 

누구나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성이 있다이렇게 설명하면, 다시 불성을 찾는다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어딘가에 참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불성이 있는 줄 알아요.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유아적, 아트만적 개념을 갖고 무아를 이해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니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본래 부처님 가르침의 의미가 바뀌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 신분 제도를 두면 불교도 거기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양반이 되고, 죄를 지으면 상놈이 된다이렇게 얘기하고, 세상이 가부장적 제도를 두면 복을 지으면 남자가 되고 죄를 지으면 여자가 된다이렇게 얘기하게 된 겁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봉건 질서에 부합하는 논리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하다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공이에요. 허공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색이에요. 꽉 찼어요. 그렇듯이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꽉 찼겠죠.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본다면 색이에요. 그런데 원자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공입니다. 텅텅 비었어요. 원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색입니다. 소립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공이에요. 그러니 색이라는 것과 공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거예요.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똑같은데, 멀리서 보면 색이고, 가까이 가서 보면 공입니다.

 

이렇게 오늘 강의에서는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것을 다시 정신현상, 생명현상, 물질 현상의 3가지 차원에서 설명했어요. 물론 반야심경은 물질 현상이나 생명현상을 갖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현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알 때, 눈으로 보고 알거나, 귀로 듣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감촉해서, 혹은 생각해서 압니다. 이게 색이에요. 색은 실체가 없고 항상 함이 없습니다.

 

색이 일어날 때, 기분이 좋거나 기분이 나쁜 느낌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볼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감촉할 때, 생각할 때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수()입니다. 색이 공하듯이 수도 또한 공()합니다.

 

아는 것(, )과 느낌(, )은 우리에게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꺼내서 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상도 실체가 없고 항상 하지 않고 변합니다. 공합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이거 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하는 의지 작용인 행()도 항상 하지 않고 실체가 없습니다. 담배를 하나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면,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지만, 가만히 있어보면 죽을 것 같다가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이것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에요. 이 사실을 직시해야 거기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지하는 것과 옳으니 그르니, 맞느니 틀리느니 하고 분별하는 식()도 다 실체가 없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어제 옳았던 것이 오늘 그른 경우를 경험하죠. 조선 시대 옳았던 것이 지금 보면 그른 것이 있잖아요. 식도 변하는 겁니다. 항상 옳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라고 할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소승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이 진리가 있다이렇게 주장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진리라는 실체가 없다라는 뜻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제법개공(諸法皆空 )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반야심경이고, 대승불교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표현 양식으로 보면 새로운 불교이고, 내용으로 보면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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