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바로 이 문장입니다. 우리는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천적 측면에서는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불교대학에서 일체는 오온이다하는 것을 배웠잖아요. 오온이란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쌓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합니다. 오온개공이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뜻이에요. 일체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일체가 공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체개공(一切皆空)’ 또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없는 이유

세상은 를 구분하죠. 그러나 부처님은 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각 작용마다 기분이 좋고 기분이 나쁜 반응이 일어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바로 인지하고 분별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는 의지 작용도 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며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이런 작용들이 그냥 있을 뿐이지 라고 할 실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자동차를 예로 들어볼게요. 자동차는 바퀴로 굴러가고, 소리도 나고, 불도 켤 수 있지만, 자동차라고 할 어떤 주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을 아무리 쪼개도 물이라는 성질이 계속 남아있을까요? 옛날에는 물이라고 하는 어떤 근본 요소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의 알갱이가 분자인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 분자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수소와 산소만 각각 놓고 보면 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물이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수소 2개와 산소 1개가 105도의 각도로 결합하면 물이라는 물질이 되는 거예요.

물의 작용이 있을 뿐이지 그 속에 물의 본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지만, 오늘날 과학 문명의 발달로 물의 본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런데 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더 발달해서 수소에 핵 변화가 일어나면 수소가 헬륨이 되듯이 다른 원자로 바뀐다는 사실을 새로 발견합니다. 이렇게 과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물질의 작용은 있지만, 그것의 실체는 없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더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텅 비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

오온이 공하다하는 말은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라고 할 실체는 없어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인연을 따라서 학부모라고 불리는 것이지 학부모라고 할 정해진 실체가 없습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인연을 따라서 엄마라고 불리는 거예요. 딸이 되면 인연을 따라서 딸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결혼을 하면 인연을 따라서 아내라고 불리는 것이지, 아내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인연을 따라서 잠시 생겼다가 인연이 사라지면 그런 작용도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이를 두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신기루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고 했습니다.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되죠. 현실에서는 늘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원시인이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으면 그 안에서 작은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시인은 TV 화면을 보면 그 안에 작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원을 꺼버리면 모두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온개공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 수준으로는 굉장한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오온개공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색수상행식의 각각은 변하지 않는 요소라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나라고 할 것은 없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무아는 인정하는데 무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는 유아라고 이해한 겁니다. 이것은 마치 처음에는 물의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하다가 물의 실체가 없다는 것까지 인정을 하게 되었는데, 물 분자를 이루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과 같아요. 과학계에서도 이런 오류가 반복되었듯이 불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됩니다. 수증기는 기체이고, 물은 액체이고, 얼음은 고체잖아요. 이렇게 상태가 다르니까 어린아이가 볼 때는 서로 다른 물질인 줄 압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찰해보면 같은 물질이거든요. 이런 물리적인 변화에서는 모양이 어떻게 바뀌든 물 분자의 구성은 똑같아요. 그래서 물의 실체는 물 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이 분해되는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물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물 분자를 구성하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는 그대로 있으니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원자는 그 실체가 그대로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요소설입니다.

이런 화학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돌턴이 원자설을 주장합니다. 물질을 이루고 있는 기본 알갱이가 원자이며,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죠. 이걸 전제로 해야 화학 변화가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화학 변화의 3대 법칙이 일정 성분비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질량 불변의 법칙입니다. 여기에는 원자는 불변하고,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톰슨에 의해서 전자가 발견되고, 러더퍼드에 의해서 양성자가 발견되면서, 원자는 더 작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자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원자도 변한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핵 변화입니다. 핵 변화가 일어나면 원자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질량 감소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핵에너지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 E=mc2(제곱)에 따르면, E는 에너지이고, m은 질량이고, c는 빛의 초속인데, 질량 감소에 의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오잖아요.

이렇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물에는 본질이 없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 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불변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돌턴의 원자설 같은 것이 바로 소승불교라는 겁니다.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 반야심경이에요. ‘일체는 오온이다라는 가르침을 통해 라고 하는 것은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것까지는 받아들였는데, 오온의 각각은 불변하는 요소라고 이해한 것이 소승불교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논리를 다 받아들였는데 그 바탕에는 요소설이 깔려있는 겁니다.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도 모두 실체가 없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산소도 수소도 다 실체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 표현이 바로 오온개공이에요.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각각이 모두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증명하려면 우선 색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문장은 색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장입니다. 무상과 무아는 부처님의 법이잖아요. 그다음에 수, , , , 역시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다음 문장입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무상하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것은 얼음이 항상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얼음하고 물을 다르다고 봅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아주 단단한 얼음으로 만든 구슬 세 개를 가지고 놀다가 놔두고 밖에 나갔다가 한참 후에 들어와 보니까 물로 변해 있으면 이렇게 말하겠죠.

엄마, 내 구슬 없어졌어, 대신에 물이 생겼어.’

이것은 변화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다 보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얘야, 그것은 구슬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긴 것도 아니야. 변했을 뿐이야.’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으니까 물과 얼음은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죠. 그렇다고 얼음과 물이 같다라고 말하기는 좀 곤란해요. 본질은 같지만 현상은 다르니까요. 그렇다고 얼음과 물이 다른 물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불이’, 즉 얼음과 물은 다르지 않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에서 불이는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니 얼음과 물은 다르지 않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니 물 또한 얼음과 다르지 않다

AB가 같음을 증명하는 방법

왜 이렇게 문장을 뒤바꿔서 말할까요? 이것은 AB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 방법입니다. AB가 같음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이면 B이고, B이면 A이다이것을 증명하면 됩니다.

‘A이면 B이다가 성립하면 AB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되고, BA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됩니다. 이 명제의 역인 ‘B이면 A이다역시 성립하면, 에 의해 A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고, BA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AB는 같다는 것이 성립하게 되죠.

이렇게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무상을 증명하는 논리입니다. 그다음은 색이 무아라는 것도 증명해야 하잖아요. 무상과 무아가 성립해야 연기법에 맞으니까요.

무아‘A 그대로 B이다이렇게 증명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과 논리가 똑같아요. A이면 B이다. 그 역이 성립한다. B이면 A이다. 그러므로 A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고, ‘A=B’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볼게요. 바람을 불어넣은 고무풍선을 이 방 안에 계속 집어넣는다고 합시다. 100개 집어넣고, 500개 집어넣고, 1000개 집어넣고, 10000개 집어넣으면 언젠가 이 방 안에 고무풍선이 꽉 차겠죠. 그 모습을 보고 방 안이 꽉 찼다이렇게 말합니다. 꽉 차서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또한 이 방 안은 텅 비었다고 말할 수 있죠. 고무풍선 표면을 중심으로 관찰하면 꽉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공기 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 안은 텅텅 비어 있어요. 만약에 더 이상 밖에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것 없이 바늘로 고무풍선을 다 터뜨려 버리면 이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꽉 찼다하는 것과 텅 비었다하는 게 같은 거예요. 꽉 찼다는 것이 A라면, 텅 빈 것이 B라고 합시다. 그 역도 성립하기 때문에 ‘A=B’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아주 크고 동그란 쇳덩어리를 봅시다. 이런 쇳덩어리는 철 원자인 Fe가 수도 없이 결합해서 원자와 원자 사이에 빈 곳이 없어요. 원자와 원자 사이 또는 분자와 분자 사이에 빈 곳이 있으면 수증기처럼 기체가 되는 건데, 쇳덩어리는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이것을 고체라고 합니다. 보어가 그린 원자의 구조도를 본 적이 있나요? 가운데에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돌고 있죠. 그런데 그 사이가 텅텅 비어 있어요. 원자의 지름은 약 10-8cm(1억 분의 1 cm) 정도입니다. 그런데 핵의 지름은 원자의 지름보다 훨씬 더 작아요. 마치 태양이 있고 바깥에 지구가 도는 것과 거의 모형이 비슷합니다.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도는 거예요.

 

꽉 찬 것이 텅 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구가 꽉 차 있는데 그 각각을 구성하는 원자의 전자는 무게가 없습니다. 전자를 떼 버리고 핵끼리만 딱 결합을 시키면 지구의 크기가 농구공만 해집니다. 그런데 무게는 똑같아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구의 속이 꽉 찼는데, 소립자의 눈으로 보면 밤하늘을 보듯이 텅텅 비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꽉 찬 것이 텅 빈 거예요.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도 질량이 곧 에너지이다이것을 증명한 거예요. 질량이라는 것은 꽉 찬 것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은 텅 빈 것입니다. 질량을 이라고 하면, 에너지는 이라고 할 수 있겠죠. 수소와 수소가 결합해서 헬륨이 되거나, 우라늄이 붕괴되어 다른 원자가 될 때는 질량이 감소하는데, 그 질량이 에너지로 바뀐다는 거죠.

 

색은 무아이므로 공하고, 색은 무상이므로 공하고, 그래서 색은 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상을 짓습니다. 같은 물건을 두고도 크다’, ‘작다하고 상을 짓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제상이 비상이다하고 표현하죠. 이 말은 반야심경에서 색이 공하다하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만 공한 것이 아니라 이때 일어난 느낌인 , 이때 남겨진 기억인 , 이때 일어나는 의지인 , 그때 인지하고 분별하는 , 하나하나 검증해보면 모두 공하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각각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입니다.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색이 공하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고, 같은 논법으로 수상행식 역시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서로 이 문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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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설법은 계속되고 있다.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깨닫게 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가라는 아상에 빠져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보살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주체가 없다.

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어찌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내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보살은 한없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단 한 명의 중생도 멸도에 들게 한 적이 없다.

보살이란 어떤 한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를 이름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멸도에 들게 했다라는 상에 갇혀 있다면,

중생을 구제했다는 법에 집착해 있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부처와 중생이 나누어져 있고,

생사와 열반이 나누어 져 있지만

이미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그 어떤 종류의 나뉨도 없다.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다 헛된 꿈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이미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이다.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의 씨앗 불성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성을 싹틔워야 한다는 말은 다 방편일 뿐이다.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깨달음에 이르게 할 중생도 없으며,

이미 깨달음에 이른 부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의 증득이 가져다 주는

대 해탈, 대 자유의 깨달음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삶과 죽음 등의

그 어떤 나뉨도 용납하지 않는 진리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무아법을 체득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을 가질 수가 없다.

구제할 중생이 없고, 구제할 내가 없으며,

그렇기에 구제라는 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깨달음의 회향인 중생구제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상구보리에도 머물지 않고

하화중생에도 머물러 있는 않는 이가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했는데 일체법, 즉 불법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 어떤 상도 용납되지 않는다.

즉 그 어떤 나다라고 하는 상도 용납지 않는다는 말이다.

 

깨달을 도 없고, 중생을 구제할 도 없다.

지혜를 증득할 도 없으며, 자비를 베풀 도 없다.

상구보리할 내가 없으며 하화중생할 내가 없는 이가 바로 보살이다.

일체법은 한 치의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하는 말이

그대로 스스로 보살이 아님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없고, 장엄할 불국토가 없으며, 장엄할 것도 없는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상에 머무를 수 있단 말인가.

 

무아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체 모든 법, 일체 모든 존재에

고정된 실체적인 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도 너도 없으며, 중생과 부처도 없고, 예토와 정토도 없다.

오염된 예토인 중생의 국토가 없고, 장엄된 불국토가 따로 없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분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깨달음일진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실질적인 그 어떤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엄인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경무아분의 핵심이며,

나아가 금강경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무아법의 통달이 바로

금강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법의 이해를 위한 설명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 또한

무아법의 통달을 위한 사구게다.

 

반야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이 바로 무아법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무아법이 바로 무자성, , 중도, 연기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모두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모습을 보인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깊이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연기적인 현상으로

잠시 꿈과도 같이, 환영과도 같이, 그림자와도 같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인연을 만났느냐에 따라

물이 소를 만나면 우유를 이루고,

독사를 만나면 독을 만들 듯

그렇게 인연따라 겉모습이 끊임없이 변화될 뿐이지

결코 고정된 실체인 것은 아니다.

 

또한 물은 계곡에서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흘렀다가

수증기로 변하고 구름으로 변하고

또한 인연을 만나 비로도 우박으로도 눈으로도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내린 눈비가 또다시 계곡을 지나면서

나무도 되었다가 식물도 되었다가 사람 몸으로도 변했다가

또다시 시내로 계곡으로 강으로 흘러 흘러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럴진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여

이것이 물의 실체다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연기법에 따라 겉모습을 바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다만 꿈처럼 신기루처럼

몸을 바꾸면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를 뿐인데,

어떤 하나를 붙잡고 집착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나다라고 고집하여 내 몸에 혹은 내 생각에 집착할 것인가.

 

내 몸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수화풍의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 몸의 지수화풍의 구성원들은

흘러 흘러 바다고 되고 강물도 되고 산도 되었다가

나무도 풀도 되고, 또한 짐승도 되고 풀벌레도 되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 몸에 집착할 것인가.

 

내 생각이라는 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불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라고 할 것인가.

 

모든 생각은 변화한다. 흐를 뿐이다.

이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생각도 관념도 가치관도

고정된 실체로써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학벌도, 배경도, 사랑도, 가족도,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머물러 집착할 것인가.

집착은 곧 괴로움을 불러올 뿐이다.

돈에 집착하면 돈으로 인해 괴롭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 그로 인해 괴로울 뿐,

결국에는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라는 것이 없는데,

어디에 내 것을 붙일 것이며, 집착할 것인가.

 

이 구경무아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설하고 있다.

구경에는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어떤 물질에도, 어떤 존재에도, 어떤 깨달음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사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다.

 

한 평생 잠시 왔다가 갈 뿐이다.

인연따라 잠시 어떤 한 몸으로 왔다가 갈 뿐이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몸을 바꿀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하며 살겠는가.

집착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과연 어디에 집착하며 살 것인가.

다만 인연따라 법계의 몸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돌려줘야 할 일이고,

인연따라 법계의 돈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회향시켜 줘야 할 일이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모두가 잠시 인연따라 응해 줬다가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인연이 다 해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놓아줄 수 있다.

붙잡고 조마조마 하며 살 것인가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 것인가.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 바로 무아법의 터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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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 따르면 이러한 《반야경》의 무상(無相) 법문은 

동아시아 불교, 특히 한국 불교에서 중시하는 

《화엄경》의 교지(敎旨)와도 다르지 않아 

두 경전은 동등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는 《대혜도경종요》에서 중국 교상판석의 시초가 되는 

이교오시설(二敎五時說)과 《해심밀경》에 의거한 법상종

(法相宗)의 삼시설(三時說)이 갖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대지도론》에 근거하여 《반야경》이 "논쟁할 여지가 

없는(無諍處)" 가르침이며 성문ㆍ연각ㆍ보살의 모든 

승(乘)을 위한 제3시의 요의법륜(了義法輪)적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다.[138]

또한 원효는 '생사와 열반, 어리석음과 지혜가 모두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다'는 《화엄경》의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보다 훌륭한 법이 있더라도 환(幻)과 같고 꿈과 같다'는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의 가르침이 일치한다고 말하였다. 

즉 원효의 해석에 따르면 반야교와 화엄교 모두 일체법의 

공(空)·무자성(無自性)·무생무멸(無生無滅)·본래적정

(本來寂靜)·자성열반(自性涅槃)·무자성성(無自性性)

을 설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두 전승 중 어떠한 것을 요의로 간주하더라도 

불성, 여래장, 열반, 법신 그리고 그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참 나" 또한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무자성, 

공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이기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 의 반야중관적 해석

이 노승이 30년 전 참선을 하기 이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山是山 水是水)’으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의 문턱에 

들어서고 보니, 이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山不是山 水不是水).’ 그러나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山祗是山 水祗是水)’.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만일 이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노승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허용하리라.

《속전등록(續傳燈錄)》(김종욱 譯)

송대(宋代) 청원 유신(靑原 惟信) 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공안은 공성과 연기의 

쌍운(雙運), 혹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제법실상

(諸法實相)을 표현한 공안이다. 

공안의 세 구절은 각각 다음의 인식들과 상응한다.

자성(自性)으로 성립한다고 여기는 세속의 전도(顚倒)된 

인식-공성삼매(空性三昧) 중 근본지(根本智)(=무분별지

無分別智)와 공성이 물에 물을 따르듯, 버터에 버터를 

따르듯 하나되어 일체의 차별상을 여읜 인식- 후득지

(後得智)를 통해 일체법이 신기루, 환(幻)과 같이 

자성으로 현현하는 것을 분별하는 인식[139][140]

김종욱 동국대 교수는 청원 유신의 공안을 하이데거와 

불교 양자의 관점에서 비교철학적으로 분석하였는데, 

그 중 (주로 반야중관에 입각한) 불교적 관점에서의 

해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다’ 또는 ‘산은 산으로서 있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자성(自性, svabhāva)이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있다(sva-bhāva)’는 측면에서는 

‘자기만의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을 뜻하고, 

‘언제나 있다(sarvadā-bhava)’는 측면에서는 ‘삼세의 

매 찰나마나 실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이 산으로서 있다’는 것은 설일체유부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색법으로서 자성적으로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저 산은 매 찰나마다 변화해 

가는 무상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특정한 모양과 색깔을 지닌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는 

점, 다시 말해 색법(色法, rupa-dharma)이라는 점에서는 

삼세에 걸쳐 실유하는 자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상한 변화 과정을 인정하면서도 그 배후에 

연속적으로 항유하는 기체적(基體的) 요소를 상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변화 현상 이면의 불변적 본체를 

존재자성이라는 형식으로 찾고자 한 서양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발상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삼세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과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은 산을 산으로서 있게 하는 근거와도 같은 것들이고,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기에 ‘산은 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

(山不是山 水不是水).’ 산불시산 수불시수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말은 ‘산은 자성적으로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소위 반야의 통찰에 의해 얻어진다. 

반야는 개념적 분별을 넘어선 직관적인 통찰이며 또한 

있는 그대로를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

ñāṇa-dassana)이라는 의미가 있다. 

분별을 넘어선 직관이기에, 반야는 주객 분리의 이원적 

사고가 극복된 무분별의 지혜(無分別智)이며, 그런 무분별적 

불이(不二)의 집중(samādhi, 三昧, 定)을 통해 주어지는 

근본적인 체험이다. 

또한 반야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으로 본다는, 일체법에 대한 

연생적(緣生的) 통찰을 의미한다. 

즉 반야의 시야 한가운데서 일체법의 총체적 모습이 

무상과 무아의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공(空)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이 공이 바로 자성

(自性)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자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 그것이 공(空, śūnyatā)이다. 

연기한 모든 것에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는 모두 공이다

(一切皆空). 이렇게 자성을 부정하여 ‘공을 설하는 

목적(空用, śūnyatā prayojana)’은 희론의 

적멸에 있다. 

희론(戱論, prapañca)이란 문자 그대로 허위의 쓸모없는 

이론을 말한다. 이처럼 지혜를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희론이란, 자성을 상정함으로써 일어나는 사유 구성, 혹은 

결정화되고 대상화된 분별(vikalpa), 한마디로 

자성적 분별심을 뜻한다.

분별하고 나서는 그렇게 분별된 것이 있다거나 없다라는 

양자택일적인 판단을 내린 다음, 그 극단적인 판단 

내용의 어느 하나에 집착하게 된다. 

무수한 조건들의 상호 작용하는 모습을 각 측면에 따라 

‘생(生)이다’ ‘멸(滅)이다’ 등으로 나누지만, 그것들 자신이 

어떠한 자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확정적으로 단정

지을 만한 생과 멸의 상(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생과 멸에는 애당초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을 부정하면 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이 부정되므로 

멸 또한 부정되어 불생 불멸이 된다. 

따라서 연기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어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한 것이므로(八不), 양극단의 어느 하나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中道)이다. 

이렇게 무자성(無自性, nihsvabhāva)이어서 무분별(無分別, 

nirvikalpa)이고 무집착(無執著, anabhiniveśa)인 중도에 

설 때, 희론은 종식된다.

3.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

(山祗是山 水祗是水)’ 시기시산 수기시수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것을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체를 철저히 공화(空化)시킴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 다시 말해 진공(眞空)이 곧 묘유(妙有)

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모든 현상이 공한 것이라면, 

일체를 허무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공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로서 다만 무자성의 

연기를 의미할 뿐이다. 

연기한 것을 공이라 하는 이유는, 연기한 것에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이 곧 연기한 것을 가리키는 이상, 

공이야말로 모든 것을 연기적으로 성립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의 이치가 있음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 

공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 곧 물질적인 것이다(空卽是色)’고 한다. 

오히려 공이기 때문에 공허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이 이렇게 일체를 성립시켜 주는 것이라면, 

공은 현상 이면의 절대적 본체가 아닐까 하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무자성의 공이 자성화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에 대해 용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응당 공한 것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공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어떻게 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즉 모든 것이 공이므로(一切皆空), 

공 또한 역시 공하다(空亦復空)는 말이다.

색과 공 모두 무자성의 공이므로 색은 곧 공이 되고 

공은 곧 색이 된다. 그리하여 색은 곧 공이라 하여 일체를 

철저하게 공화시키는 것(眞空)과, 공은 곧 색이라 하여 

그렇게 공화됨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妙有)이 둘이 아닌 것이 된다. 

즉 진공이 곧 묘유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정(眞空)을 통해 대긍정(妙有)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대부정(眞空)과 대긍정(妙有)에 

차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공이기도 하고 묘유이기도 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과 긍정의 어느 하나로 고정적으로 분별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같고도(如) 같다(如)고 할 따름이다. 

그저 ‘같고도 같은 것(如如, tathatā)'은 '진실로 같은 것

(眞如, bhūta-tathatā)'이며,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如實, yathā-bhūta)'이다. 바로 이런 진여가 일체의 

진상(諸法實相)인 것이다.




금강경에서 상을 짓지 말라, 무슨 뜻인가요


질문자 : 금강경 제31분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법문에서 ‘어떤 견해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시며 ‘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그 밑바탕에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지구를 위해 적게 먹고 남기지 않기’라는 수행 연습을 했는데, 이것이 지구 환경을 위해 좋다는 견해가 있고, 이에 동의하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견해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혼동이 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을 하기 위한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좋은 일이라는 판단도 상을 짓는 것이 아닌가요?

법륜스님 : 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언어로 표현된 것이 절대화 되면 폐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이 물건을 집으려면 손을 펴야 합니다. 그때 ‘손을 펴라’ 하고 말해서 손을 편 건 그 상황에 맞는 행동입니다. 즉, 이건 주먹을 쥐고 있을 때 그것을 뛰어넘는 자유를 향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손을 펴는 것이 진리라고 절대화 하면 이 사람은 오므려야 할 때 다시 못 오므리게 됩니다. 손이라는 건 필요에 따라 오므리기도 하고 펴기도 해야 물건을 집기도 하고 놓기도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집을 때는 손을 오므려야 하고, 물건을 놓을 때는 손을 펴야 합니다.

 물건을 집어야 하는데 손을 펴기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손을 오므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물건을 놓아야 하는데 계속 손을 오므리고 있으니까 이 상황에서는 ‘손을 펴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31분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은 누군가에게 손을 펴라고 말할 때 펴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손을 오므리라고 말할 때 오므리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둘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둘 중 어느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 ‘서울에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질문자의 경우 ‘금강경에는 상을 짓지 말라고 하는데 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느냐’ 하고 되묻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겁니다. 즉, 인천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가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동쪽으로만 가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인천에 있는지 수원에 있는지 현재 위치는 고려하지 않고 동쪽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을 짓는 거예요.

대부분의 종교는 성인의 말씀을 절대화 합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위대함은 부처님의 말씀도 절대화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이 질문한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말한 것은 동쪽으로 가도 되고, 서쪽으로 가도 되고, 남쪽으로 가도 되고, 북쪽으로 가도 되는데도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꼭 동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질문한 사람이 인천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이 수원에 사는 사람인 경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해서 진리에 맞는 대응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는 방향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는 말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즉, 어느 한 견해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견해를 고집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앞으로 누가 물어도 동쪽, 서쪽, 남쪽, 북쪽에 대해 말을 하지 말아야 된다’라고 이해한다면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새로운 상을 짓는 겁니다. 상을 짓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상을 또 짓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묻는데 ‘무유정법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갈 길을 묻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야 할 길을 묻는데 자꾸 정해진 길이 없다고만 하면 답답할 수밖에 없죠.

 금강경에서 ‘어떤 견해도 짓지 말라’는 말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상을 짓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되고, 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꾸 사람들이 ‘이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반대로 ‘저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다시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저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떤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저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아니다’라는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늘 주어진 상황에서 구체적인 방향이 나오는 것이지 미리 절대화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이고, ‘저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입니다. ‘이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며 읽지 않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이렇게 반응하기가 쉽습니다.
 

‘이게 아니면 저것이든지, 저게 아니면 이것이든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든지, 이렇게 무엇이라고 정해져야 하지 않느냐?’ 하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관념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유연해지고 늘 상황에 맞는 적절한 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고정화시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空)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공(空)이라는 상을 지으면, 누가 무슨 말만 하면 ‘공(空)이다’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로 공(空)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공(空)이라는 상을 지은 겁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어떤 견해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는 말은 정확히 표현하면 ‘어떤 견해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의미입니다.

스님은 금강경 제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을 읽은 후 한 문장씩 그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이 여래가 인욕바라밀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베이고 끊김을 당할 때 내가 그때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나간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이고 끊길 때에 만일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또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었을 때에도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 일체 상을 여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나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여기서 인욕바라밀이란 무엇일까요? 인욕은 참는다라는 뜻이에요. ‘화가 나는데 참는다’, ‘욕심이 나는데 참는다이럴 때 주로 사용합니다.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참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세 번 이상 못 참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게 세 번씩이나!’ 하고 터지거나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하고 보통 세 번째에 터집니다. 참을 때는 성질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내면에서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잠시 참을 수는 있지만 오래 참을 수는 없습니다. 참는 것은 모든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를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저 언덕으로 건넜다하는 뜻입니다. 저 언덕이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해요. 참아서는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욕바라밀이란 인욕으로써 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넜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여기서 인욕참을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을 것이 없을 때 진정으로 인욕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스트레스받지 않는 방법

말은 그럴듯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시어머니가 아들 집에 방문했어요. 음식을 해드리면 음식을 드시고, 구경을 시켜드리면 구경을 하시면 되는데, 시어머니가 잔소리가 많아요. ‘이거는 생으로 먹어야 하는데 구웠다’, ‘이거는 볶아야 하는데 삶았다’, ‘이거는 국 끓여야 하는데 찌개를 했다이렇게 만들어 놓은 음식에 대해서 잔소리를 해요. 음식뿐만 아니라 내 아들 옷을 다려줘야지 그냥 주면 어떡하냐하며 온갖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면 며느리가 듣기 싫겠죠. 그렇다고 일일이 다 말대꾸할 수가 없잖아요. 이건 참는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계시는 동안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만약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이때 참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중생이라고 하고, 참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현인이라고 합니다. 현인은 남한테 해는 안 되지만 자신은 괴로워요. 그래서 세상에서 착하다는 사람은 남에게는 좋은데 자신은 힘들어합니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대신에 본인이 살기가 힘들어요. 그렇다고 성질대로 살면 비난이 따릅니다. 꾹 참고 잘 견디면 효부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남편에 대해서 내가 더 잘 알까요, 시어머니가 더 잘 알까요? 당연히 시어머니가 잘 알겠죠. 왜냐하면, 핏덩이를 낳아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기저귀 갈고 30년을 넘게 키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성질이 어떤지, 옷을 어떻게 입는지, 다 압니다. 이 세상에 엄마보다 아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잘한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음식을 해놔도 잘 안 먹고, 옷을 빨아줘도 고맙다는 소리를 안 해요. 그래서 남편에게 맞추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을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시어머니가 오신 겁니다.

우리 남편에 대해서는 우리 시어머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

우리 부인에 대해서 우리 장모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이렇게 어머니에게 내 배우자에 관해 물어보면 척척박사가 따로 없어요. 보통은 물어도 가르쳐줄까 말까 한데 우리 어머니는 워낙 사람이 좋아서 내가 묻지도 않는데 다 알려줍니다.

우리 아들은 이 음식은 생으로 먹고, 이 음식은 삶아야 하고, 이 음식은 무쳐야 하고, 이 음식은 볶아야 해. 이런 꼬들꼬들한 밥은 우리 아들이 먹기 힘들어.’

밥이 꼬들꼬들한 게 좋은 줄 알고 해 줬는데 내 배우자는 그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죠. 얘기를 들어보면 식은 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부인은 남편을 위한다고 갓 지은 밥을 주는데 남편이 자꾸 식은 밥을 먹겠다고 하면 갈등이 생겨요. 부인은 남편이 식은 밥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시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통 속옷은 빨아서 그냥 입는데 우리 남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속옷을 다려서 입혔다는 걸 알게 되니까 남편이 왜 속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는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집에 어머니가 한 번 오실 때마다 배우는 게 많은 거예요. 아무런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가르쳐 달라고 하게 됩니다. 어떤 싫은 말도 내가 필요하면 잔소리가 아니고, 어떤 좋은 말도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잔소리예요.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어머니가 일주일을 계셔도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고 배우는 것만 많습니다. 이러면 참을 것이 없어요. 참을 것이 없을 때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웃에서 보면 이렇게 말하겠죠. (마음을 바꾸어라 나도좋고 시어머니도좋은 긍정(중도)적 마음으로 처세를하라)

그 집 며느리 잘 참는다. 저런 잔소리를 참아내는 거 보니까 대단하네.’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상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지요. 언젠가는 괴로움에 빠집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참을 것이 없어야 해요. 그래서 참을 것이 없는 참음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느니라. 수보리여! 만일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 운데에들어가 아무것도 볼수없는 것과같고,보살의마음 이 법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어 광명 이 비추어 여러 가지 모양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우리는 법상을 짓기가 아주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산이라고 알고 있다가 깨닫고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허상이에요. 헛된 것은 허상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사실은 실상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실상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비동비서산이다하고 다시 고집하게 됩니다. 이렇게 실상을 고집하면 반드시 상대되는 허상이 또 생겨요. 허상과 실상 두 개 중에 하나인 실상은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동산과 서산은 허상이고, 비동비서산은 실상이다라고 고집하면 진실과 헛됨이 갈등을 일으켜서 다시 둘로 나눠집니다. 진실은 실상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고, 실상과 허상을 분리하지 않는 그 너머의 얘기예요. 그래서 이것이 진리이다하는 순간 곧 진리라고 하는 상을 짓게 되는 겁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 상이군인

상을 짓는 것이 무엇인지 저의 수행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절에 들어가서 수행정진과 전법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했던 일은 청소년 포교였어요. 세상 밖에는 부처님의 법이 중생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서 머리를 기르고 법사가 되어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청소년 법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절에 법사로 있으면서 청소년 포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열 시쯤 법당에서 사시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누가 문을 쇠파이프로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어요. 신경이 쓰였죠. 그래도 한두 번 하다가 그만두겠거니 했는데 계속 문을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하다가 목탁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어요. 마음속에 짜증이 나서 누구냐?’ 야단을 치려고 딱 보니까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이 목발을 짚고 서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팔이 없으면 쇠갈고리로 의수를 했습니다. 상이군인이 그 쇠갈고리로 문을 두드리니까 안에서 듣기로는 쇠파이프를 갖고 문을 때리는 것처럼 들린 겁니다. 그래서 화를 내려다가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불공 중이니까 곧 오겠습니다.’

저는 상이군인의 모습을 딱 보자마자 동냥을 얻으러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불공 중이니 잠시만 기다리면 불공 마치고 동냥을 주겠다고 한 거예요. 다시 들어와서 하던 불공을 마저 하는데 또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짜증이 탁 나서 다시 말했습니다.

조금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보다시피 내가 지금 불공을 하고 있는데 당신한테 동냥을 주려면 저쪽 요사체에 가야 돈을 가져오든 쌀을 주든 할 거 아니오?’

그랬더니 상이군인이 내가 언제 동냥 얻으러 왔다고 그랬소?’ 이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혼자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었음을 깨닫고 속이 뜨끔했어요. 그래서 동냥 얻으러 온 게 아니라면 왜 왔냐고 물었더니 내가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스님이 되려고 왔소이러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팔이 하나 없고 다리가 하나 없는 나이 먹은 사람이 스님이 되겠다는 게 안 맞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차분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는 시내에 있는 포교당이고 학생들을 포교하는 곳이에요. 스님이 되려면 다른 절에 가보세요그랬더니 그 상이군인이 다른 절에 다 가봤는데 가는 절마다 다른 절에 가보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은 아이들을 포교하는 곳인데 어떻게 여기서 스님이 되겠소. 그런데 스님이 되려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면서 내가 가슴이 답답해서 스님이 되려고 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저는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어요. 교리를 물었으면 설명을 잘해주었을 텐데 가슴이 답답하다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슴이 왜 답답한지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결혼한 후 얼마 안 돼서 월남전쟁에 갔다가 팔과 다리를 다쳐서 상이군인이 됐어요. 그래서 집에만 있는데 살기가 어려우니까 부인이 장사해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았아요. 몸을 다친 것도 힘들었지만 혼자 집에서 온종일 부인을 기다리는 게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부인은 밖에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왔어요. 그럼 왜 늦게 들어오는지 저도 모르게 자꾸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부인이 내가 뭐 놀다 온 줄 아느냐고 하면서 성질을 냈습니다. 그러면 저도 성질이 확 나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술을 먹고 취해 자는 일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인도 집을 자꾸 나가게 되었어요. 집안이 제대로 되려면 내가 죽어야지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몇 번을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가 않았어요. 도저히 내 손으로 죽을 수는 없어서 절에 가서 중이 되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니까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가서 중이 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절마다 다른 데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 이유는 충분히 알겠는데 어디 산에 있는 절도 아니고 시내에 있는 포교당에 어떻게 왔소?’

그랬더니 상이군인이 누가 여기로 가보라고 했다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종이 하나를 턱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종이를 자기한테 주면서 여기 한번 가보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종이를 받아봤더니 전단지 맨 위에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어요.

 

마음이 답답한 자여, 이리로 오시오.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한 좋은 안식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 법회 시간이 주욱 적혀 있었어요. 그 종이는 바로 제가 시내에 뿌린 포교 전단지였습니다. 제가 시내에 뿌린 전단지를 보고 누가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는 상이군인에게 전해 주면서 가보라고 한 거예요. 그때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마음이 답답한 사람은 누구나 이 절을 찾아오라고 전단지를 2000장이나 뿌렸거든요. 그래서 진짜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저는 그 사람을 보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냥을 줘서 내보내든지 무슨 말을 해서 내 보내든지 오직 내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저 자신이 얼마나 웃기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졌습니다. 정말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는 빨리 내보낼 생각만 하고, 저를 찾아와서 한 번도 답답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는 법회도 열고 강의도 하고 있는 거잖아요. 학생들은 저에게 답답하다고 말도 안 했는데 너 답답하지? 답답할 때는 이렇게 해결하는 거야이러면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저 자신을 열심히 전법하는 사람, 누구보다 훌륭한 포교사라고 생각했고 자신감도 굉장했어요. 부처님 법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법을 하지 않는 기존의 스님들을 막 비난했어요. 그런데 정작 내가 한 말이야말로 거짓말이었고, 내가 한 행동이야말로 헛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 왔을 때는 몰아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마치 내가 없으면 안 될 것같이 다가간 거예요. 그때 저의 존재가치가 탁 무너져 버렸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혼이 빠져서 멍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래서 학생 때 기도하던 칠불암이란 절에 가서 기도를 하다 쓰러져 버렸습니다. 3일간 정신없이 쓰러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내가 그래도 전단지를 뿌리고 전법을 했기 때문에 나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아무것도 안 했으면 허상 속에 사는 나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번 일을 계기로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친 것이다.’

그 후 기존의 불교와 스님들을 비난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렸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들을 비판하지만 저 또한 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는 잘한다’, ‘나는 법대로 한다’, ‘나는 진실하다이런 상을 짓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법상입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이런 관점을 가져야 해요.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고, 믿음은 다를 수도 있고, 판단은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내 생각과 내 의견을 고집할까요? 내가 아는 것이 곧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놓아버리면 여러분들의 삶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어지고 갈등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순간순간 상을 짓고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괴로움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일에도 상을 짓고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좋은 일을 넘어서서 깨달았다는 상을 짓고 집착해도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것은 다 한밤의 꿈과 같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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