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바꾸면 웃을 수 있어요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좀 도움이 되셨나요?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수업까지 듣느라 더 바빴을 거예요. 게다가 돈 되는 일도 아니고, 시험에 도움 되는 일도 아니고, 승진에 도움 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시간 내서 이렇게 공부하려니 시간적으로는 부담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공부를 하면서 조금 도움이 됐다고 느낀다면, 세상살이가 힘든 이유가 꼭 일이 많아서라고만 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마음에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자꾸 일을 하다 보니 싫은 마음과 외적인 부담이 결합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공부가 도움이 됐다면 마음을 좀 가볍게 내고 기꺼이 일을 해보세요. 그렇게 해보면 힘든 일도 별 거 아닐 수 있어요. 여러분이 소풍이나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오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겁니다. 그런데 저처럼 농사짓는 사람 입장은 달라요. 모내기를 하거나 모종을 옮겨야 하는데 마침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일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물다가 비가 올 때는 비를 맞으면서 일을 해도 기분이 좋아요. (웃음) 비를 맞으면서 일도 하는데, 비를 맞으면서 노는 건 쉽지 않을까요? 비를 맞으면서 모내기하는 것보다 비를 맞으면서 산책하는 게 쉽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비를 맞으면서 노는 게 무슨 큰일이겠어요? 비를 맞으면서 일도 하는데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비까지 맞아가면서 놀 필요가 뭐 있어요? 그냥 안 놀면 되죠. 그러니 안 놀아도 별 문제가 없어요. 소풍 가기로 했다가 비가 오면 안 가면 되는 거예요. (웃음) 그게 스트레스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비가 와도 가고 싶으면 그냥 가면 됩니다. 비 맞고 일도 하는데, 비 맞고 노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이렇게 관점을 딱 바꾸면 사실은 일상이 별일 아닌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우리는 지금 그런 공부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부처님이 굉장히 큰 일을 겪으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웃으면서 그 어떤 일도 별 일 아닌 일로 만드셨잖아요. 우리는 누군가가 준 독성 있는 음식을 먹어서 토하고 죽게 되면 그 사람을 원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어차피 지금 나이가 여든이어서 죽을 때가 다 되어 가는데 그거 먹고 안 먹고 가 사실은 죽는 데 큰 차이가 없거든요. 일주일쯤 먼저 죽거나 늦게 죽는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런 일을 별 거 아닌 것처럼 생각하니까 웃으면서 상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거예요.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누구나 다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지금 그런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 거예요.”

이어서 오늘 주제에 대해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은 오늘 강의가 마지막입니다. 끝났다는 후련함도 있겠지만 스님이 이야기하는 부처님의 인격을 따라오면서 많은 감동을 받은 터라 더욱 강의에 집중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지난 시간에 부처님이 춘다의 공양을 받고 일종의 식중독 같은 급성 설사를 만났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안 그래도 몸이 쇠약해서 이미 열반을 선언한 상태였는데 식중독까지 일어났으니 어쩌면 열반이 며칠 앞당겨졌다고 볼 수도 있겠죠. 부처님은 카쿠타(Kakuta) 강에서 목욕을 하고 춘다를 위로해 준 뒤에 쿠시나가르(Kushinagar)로 향하셨습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이 ‘가자, 쿠시나가라로!’ 이러시고 마치 낡은 수레가 삐그덕 거리며 천천히 굴러가듯이 앞장서서 걸었다고 표현되어 있어요. 늙고 병든 몸으로 대중의 앞에 서서 당당히 걸어가신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겁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
해질녘에 쿠시나가라 마을에 도착한 부처님은 사라나무 숲에 자리를 깔고 누웠습니다. 사라나무는 우리나라의 미루나무와 비슷합니다. 느티나무처럼 옆으로 퍼지는 게 아니라 위로 쭉쭉 올라가는 나무예요. 느티나무나 보리수 같이 옆으로 벌어지는 나무라면 한 그루 아래에 여러 명이 앉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미루나무처럼 위로만 쭉쭉 자라는 나무라면 한 그루 아래 그늘이 지는 게 아니에요. 그루와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겠죠. 그래서 ‘두 그루 사이에’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사라나무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뜻이에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자리에 누우시자 사라나무에서 하얀 꽃이 피어났어요. 그때가 사라나무 꽃이 필 때가 아닌데 핀 거예요. 우리나라 같으면 ‘동짓달에 꽃이 폈다’, ‘겨울에 꽃이 폈다’, ‘눈 속에 꽃이 폈다’라고 할 만한 일이죠. 알고 보면 별일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약간 신비하게 느껴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입이 벌어진 사람들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는 말없는 의문을 담아 부처님을 바라봤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것은 저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의 열반에 임해서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이것은 제일의 공양은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일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도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가르침에 따라 자기 마음에 괴로움이 없도록 꾸준히 수행 정진하는 거예요. 이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입니다.

왜 이런 시골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아난다여, 나는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열반에 들리라. 그러니 아난다여,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오늘 밤에 여래가 입멸한다. 그러니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오늘 밤에 이곳으로 오라고 해라. 여래가 열반한 뒤에 부처님 살아생전에 뵙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이 없도록 마을에 가서 보고 싶은 사람은 오라고 해라.’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오늘 저녁에 쿠시나가라 숲 속에서 열반에 들겠다고 하니까 걱정스러웠어요.

‘세존이시여, 왜 이런 시골 외진 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부처님의 출가 제자, 재가 제자가 많은 왕사성, 바라나시, 바이샬리에서 열반에 드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난다여,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이곳은 네가 모르는 과거 역사 속에서도 성스러운 곳이었고, 앞으로 먼 미래에도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이 말은 성스러운 곳, 성스럽지 않은 곳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난다가 다시 물었어요.

‘그렇다면 왜 이곳 숲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말라족의 왕족이 사는 왕성에 가서 편안하게 열반에 드시면 좋지 않습니까?’

제자로서 충분히 의문이 들 만하죠.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내가 만약에 왕궁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한다면 왕족들만 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방이 트여있는 이 숲에서 열반에 들면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여래를 친견할 수가 있지 않느냐.’

왕궁에는 천민이 출입할 수가 없잖아요. 부처님께서 숲에서 열반에 들면 브라만이든 왕족이든 천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올 수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짐승들도 올 수 있고 하늘의 신들도 올 수가 있어요. 아무런 제한 없이 자기 마음을 내면 누구나 다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육신을 위해서 더 좋은 음식을 찾아 먹으려 하고, 더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더 편안한 잠자리를 찾느라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부처님을 만나러 오기에 차별이 없고 편안한 곳이 어디인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어요.


아난다는 마을에 가서 부처님께서 오늘 밤에 열반에 드시니 누구든지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사라나무 숲으로 오라는 얘기를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처님이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드신다고 생각하니까 슬픔이 막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가 막 복잡해졌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면 이제는 누구를 의지하고 수행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그래서 저 나무 뒤에 가서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어요. 부처님께서 아난다의 마음을 아시고 다른 사람에게 아난다를 불러오게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 말아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있으리라.’

이제 저희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아난다가 마음을 진정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을 의지하고 수행 정진해 왔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여쭈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념처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념처란 무엇일까요?

첫째, 관신부정(觀身不淨)입니다. 몸에는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더럽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몸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많잖아요.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화장하고 귀걸이하고 목욕시키면서 늘 몸에 끄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민은 부정하다’ ‘귀족은 성스럽다’ 이렇게 사람을 구분 지어 차별했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몸이라는 것은 부정하다고 할 것도 없고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 말은 집착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관수시고(觀受是苦)입니다.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잖아요. 그래서 기분 좋음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말을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즐거움과 괴로움의 반복이라는 뜻입니다. 고락(苦樂)의 윤회가 곧 고(苦)라는 것이 관수시고(觀受是苦)입니다.

셋째, 관심무상(觀心無常)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이 어떻고 네 마음이 어떻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죽 끓듯이 계속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무상한 것이라 믿을 게 못 돼요. 이것이 관심무상(觀心無常)입니다.

넷째,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이것은 진리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인연 따라 모이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일 뿐 모든 존재에는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에도 실체가 없고, ‘진리’라는 것에도 실체가 없고, ‘천하만물’에도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을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이 네 가지를 사념처(四念處)라고 합니다. 남방불교의 수행법을 ‘위파사나’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 존재의 참모습을 늘 새기고 있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가르침이 ‘위파사나’의 핵심이에요. 아난다가 또 물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누가 우리의 스승이 됩니까?’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나의 가르침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말씀이고, 계율이란 것은 바른말과 행동을 뜻합니다. ‘계율이 스승이다’라고 해서 이것을 이계위사(以戒爲師)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으면 나와 같이 있지 않아도 늘 나와 같이 있는 것과 같고, 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내 옆에 있다 하더라도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가 가진 의문이나 우려를 해소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위로의 말을 했어요. 그런데 아난다가 또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합니까?’

장례 절차에 관해서 물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장례 따위는 수행자들이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재가자들이 알아서 그들의 풍습대로 할 것이니 수행자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화장을 불교식 장례법이라고 말하는데, 화장은 문화적 관습일 뿐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인도에는 화장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도 화장을 한 거예요. 만약에 한국에서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면 매장하는 풍습에 따랐겠죠. 풍장 하는 풍습이었다면 풍장을, 수장하는 풍습이었다면 수장을 했을 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든 재가자들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대로 하도록 하고 수행자들은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스님들이 장례 치르는 일을 주업으로 삼다 보니 일반인들이 볼 때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일이 장례 치르는 일로 비춰지는 겁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지런히 수행정진해라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여래가 열반한 후에 '그때 물어볼 걸‘ 이렇게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다. 의문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대중들이 아무 대답이 없자 부처님께서 ‘어려워하지 마라. 벗이 벗에게 묻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물어라’ 이렇게 세 번을 말했지만 아무도 묻지를 않았어요. 그러자 아난다가 말합니다.

‘부처님, 이미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것을 저희는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직 모두 행하지는 못했지만, 그걸 부지런히 행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의문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어요.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한 마디로 옮기면 ‘불방일(不放逸)’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마치 불이 사그라들듯이 조용히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비록 수행을 많이 한 출가 수행자들이었지만 위대한 스승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가누지 못했어요. 마음에 격함이 일어나니까 천안제일 아니룻다가 일어나서 사념처관을 새기도록 격려합니다.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중합시다. 이 몸은 무상한 것입니다. 이 느낌은 괴로움일 뿐입니다. 이 마음은 항상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공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대중의 마음이 다 조용해졌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1990년쯤 현대택시에 같이 근무했던 형님 곽충근(85)형님을 30년만에 상봉했다

소통령 마을에서 옷닭 백숙 식사

남전약수

반암리 해변횟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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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연일 관광인파가 인산인해다 오늘 휴일이라서 더욱더 붐벼 내부는 줄지어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포기하고 경내만구경을하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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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부안 변산 월명암 내소사 개암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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