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금강경 제11분 무위복승분(無為福勝分)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무위(無為)의 행은 상도 짓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함이 없는 행을 말합니다. 반대로 유위의 행은 기대함이 있는, 함이 있는 행을 말합니다. 무위복승분(無為福勝分)이란 유위의 행으로 짓는 유루복에 비해 무위의 행으로 짓는 무루복이 더 수승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을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이 경 전체를 남을 위해 설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이 경의 아주 중요한 핵심을 뽑아놓은 사구게만이라도 남을 위해서 설해 준다면 그 복덕은 강가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히 채워 보시한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함이 없는 무위의 행으로 인해서 지어진 공덕은 함이 있는 유위의 행에 따른 공덕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거예요.

법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꿈속에서 부모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을 드렸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는 것과 내가 실제로 부모님께 물 한 그릇을 떠다 드린 것, 둘 중에 어느 공덕이 더 클까요? 후자는 비록 한 그릇의 물을 떠다 드렸다 하더라도 실제로 드린 것이고, 전자는 무수히 많은 공덕을 지었다 하더라도 꿈에서 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크기로 비유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제상이 비상인 줄 아는 것,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것,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법이 없는 줄을 아는 것, 정한 법이 없는 줄을 깨닫는 것이 ‘반야’입니다. 실제의 모습을 아는 깨달음은 우리가 어리석음 속에서 행하는 그 어떤 행위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법의 실상을 깨닫는 게 이만큼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눈을 뜨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설령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눈을 뜨고 꿈에서 깨면 그건 꿈속의 일입니다. 꿈속에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지만, 눈을 뜨면 그것은 다 꿈속의 일이에요. 이런 꿈속에서 벗어나야 세상일을 두고 좋은 일, 나쁜 일을 가리지 않고 항상 웃을 수가 있습니다.

금강경은 내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법에 대한 중요성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경을 수지독송한다는 것은 내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도 이 법을 만나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더더욱 공덕이 크다는 겁니다. 자기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일러 수행이라 하고, 이 법을 타인도 깨달아서 괴로움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을 전법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은 전법의 공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승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내가 체험하는 것, 즉 수지독송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고, 또 이 법을 타인에게 전하는 전법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외형적인 것은 세상일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비록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또 공덕이 된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세속적인 모양과 형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잠꼬대와 같은 일이라는 거예요. 우리를 진정으로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건 깨달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
다음 내용은 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라는 제12분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입니다. 여기서 바른 가르침이 뭘까요? 지금까지 금강경에서 배온 내용들을 뜻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

무유정법
(無有定法)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이 법을 얻은 바도 없고 설할 바도 없는 제법이 공한 도리를 말합니다. 이 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가장 높은 최상의 깨달음라는 뜻입니다. 가장 높은 최상의 깨달음이란 상을 짓지 않고 사물의 진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상을 짓지 않으면 집착할 일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집착을 놓아라 해도 집착이 잘 안 놓아집니다. 그 이유는 상을 짓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그렇게 듣고 내가 그렇게 알고 내가 그렇게 봤을 뿐이지 그게 진실은 아닙니다. 내가 인식한 것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그걸 주장해야 하고 강조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상을 짓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되면, 부처님이 법당에 계시는 게 아니라 부처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다 있어 처처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상을 짓기 때문에 불상이 있는 곳이 법당이고, 법당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상을 여의면 처처에 불상이라 부처님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사사에 불공이요. 하는 일마다 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이 됩니다. 과일을 사서 불전 앞에 올리는 것만 공양이 아니라 한 포기 나무를 심는 것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요, 죽어가는 생명 하나 살려주는 것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요, 병든 사람을 구하는 것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요, 모든 게 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

어디 가서 중생을 별도로 구제한단 말이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스님이 원효대사죠. 그런데 원효대사는 신라 시대에 한때 잘 나가다가 파계했다 해서 내쳐진 분이에요. 그러다 500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와서 화쟁국사란 이름으로 원효대사의 업적이 복권되었습니다. 요즘 말하면 승려 자격이 없어졌다가 500년 뒤에 자격을 다시 얻은 거예요. 10년 있다가 복권한 것도 아니고, 50년 있다가 복권한 것도 아니고, 사후에 곧 복권한 것도 아니고, 500년 뒤에 복권이 된 분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스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이 되었죠. 그분의 수행 과정을 이야기해 드릴게요.

원효대사는 부처님의 경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는 능력이 탁월해서 신라에서 아주 이름이 쟁쟁했어요. 그분이 쓴 글은 중국에까지 전해지고 일본에도 전해져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중국의 스님들은 원효의 글을 읽고 감동해서 원효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성인의 칭호를 받은 겁니다. 성인으로 불리면 그가 쓴 글에 ‘논’이라는 칭호를 줍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성인의 글을 ‘논’이라고 합니다. 고려 시대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 갔다가 그걸 보고 놀라죠. 원효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도 안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려로 돌아와서 원효를 복권시킨 거예요. 원효가 쓴 글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왕도 감동했는데, 결국 파계를 하게 되면서 그 이름이 묻힌 겁니다.

당시 신라에는 세속에 묻혀 사는 스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에 대안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은 늘 다니면서 ‘대안, 대안, 대안이로다’ 이렇게 말했어요. 대안은 ‘크게 편안하여지이다’ 이런 뜻입니다. 원효대사가 초야에 묻혀 사는 대안 스님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이 분이 ‘대사, 최근에 쓴 글을 봤는데 너무 감동했소. 그래서 내가 물어볼 게 좀 있으니까 나하고 얘기를 좀 합시다’라고 하니, 보통사람이면 초라하게 입은 거지 같은 스님을 무시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원효대사도 이미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안목이 있는 분이잖아요. 그래서 존중하는 마음을 내서 ‘예, 그러겠습니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대안대사가 간 곳은 천민촌이었어요. 분황사 뒤에 북천이 있고 북천을 건너가면 ‘부곡’이라고 천민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었어요. 귀족이었던 원효대사는 사람들이 더럽다 여기는 천민촌은 간 적도 없고 갈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민촌까지 따라갔어요. 그런데 대안대사가 그 천민촌 안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막으로 들어가면서 ‘주모, 여기 귀한 손님 왔소. 술 한 상 차려내시오’ 했습니다. 원효대사는 신라에서 유명한 스님이고 귀족이었습니다. 천민촌이면 평생 오지 않을 곳에 온 것이었지요. 도저히 주막까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대안대사가 ‘원효대사’ 하고 불러도 그냥 가버리니까 대안 대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대사!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모든 대승 경전에 보살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도 버린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 경의 글을 읽고 해설을 해서 일장 논문을 쓴 게 원효의 글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실제로 천민촌에 들어가는 게 꺼려졌고, 특히 주모가 있는 주막에 간다니까 더 꺼려져서 돌아온 겁니다. 대안대사가 그 뒤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한 거예요. 보통사람 같았으면 중이 헛소리한다며 무시했겠죠. 그런데 원효대사는 곰곰이 생각해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도 없이 중생 구제를 얘기하고 글을 쓰고 설법을 했는데 정말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도망친 거잖아요. 자기를 돌아보니 아는 건 있지만 체험된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가 수행을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고 분황사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학승들이 많은 절에 가서 부목으로 일을 했습니다. 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부목은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신라 시대만 하더라도 절을 유지하는 방식이 절에 훌륭한 스님이 계시면 왕이 그 절에 땅을 주고 그 땅을 경작할 종을 주었습니다.

부목이 된 원효대사는 스님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부엌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하인 중에 한 사람이 원효를 아주 심하게 구박을 했어요. 그래도 원효는 ‘나를 구박하는 그 하인도 보살이다’ 하면서 구박에도 개의치 않고 잘 견뎠습니다.

그 절에는 행색도 초라하고 키도 작고 약간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는 방울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항상 방울을 갖고 다니면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고 다녔어요. 이름도 없이 그냥 방울 스님이라고 불리는 분이었습니다. 방울스님은 항상 스님들이 밥을 먹을 때 와서 밥을 안 먹고 나중에 부엌에 와서 ‘행자님, 어디 누룽지 좀 없나요?’ 하고 누룽지를 얻어가서 먹었습니다. 그러면 부목들이 ‘왜 밥 먹을 때 안 먹고 지금 와요!’ 하고 구박을 했는데,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겨서 누룽지를 남겨놨다가 드렸어요. 그렇게 부목이 되어 하심을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본래 중생이라고 할 게 없구나
그런데 어느 날 그 절에 스님들이 ‘대승기신론’ 이라는 책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유명한 불경을 주면서 공부하라고 한 거예요. 요즘으로 말하면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자기들끼리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해석을 각자 내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효가 옆에서 마루를 닦으면서 듣자니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스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거요’ 이렇게 말을 해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잘 몰라서 헤매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종이 개입을 하니까 스님들이 ‘종놈 주제에 네가 뭘 아냐’ 하고 막 성질을 내고 난리를 폈어요. 그러자 원효가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입에서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판이 다 깨지니 제자들이 스승한테 찾아가서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까 스승이 원효대사가 쓴 ‘대승기신론소’라는 책을 한 권 턱 주는 거예요. 그걸 딱 읽어보니까 조목조목 쉽게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원효대사야!’ 하고 감동을 하면서 그 글을 읽어보니 조금 전에 청소하던 부목이 하던 얘기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 부목이 지금까지는 그냥 종으로만 보였는데 다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원효대사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밤에 아무도 몰래 절을 빠져나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모두 잠든 후에 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간방에 사는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효, 잘 가!’

그때 원효가 확 깨달았어요.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 거예요. 방울 스님을 부처나 도인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항상 방울 스님이 불쌍해서 도와줬는데, 오히려 방울 스님은 원효가 보살행을 한 번 해보겠다고 나름대로 수행하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방울 스님의 눈에는 원효의 수행하는 모습이 다 보였는데, 원효에게는 방울 스님이 안 보였죠. 마치 원효의 눈에는 그 절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수준이 다 보였는데, 그 스님들은 원효가 안 보였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 스님들은 원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원효에 대해서는 막 구박을 했잖아요. 이때 원효대사는 ‘여기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인고’ 하는 대안대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천민촌에 불쌍한 중생이 있는데 자신이 외면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언젠가 천민촌으로 가서 그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본래 중생이라고 할 게 없었던 거예요. 중생이라는 것 또한 어리석은 마음이 짓는 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정말로 방울 스님이 불쌍한 거였어요? 원효가 보기에 불쌍한 거였어요? 원효가 보기에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모양과 형색을 보고 불쌍하다는 상을 지었고, 또 그걸 구제한다고 노력했던 겁니다. 눈을 뜨고 보니 방울 스님은 불쌍하지도 않고 구제할 것도 없었던 거예요. 그것처럼 부곡에 사는 천민들은 불쌍한 중생이 아니었습니다. 원효는 크게 깨닫고 나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시 천민촌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명한 원효를 버리고 친구가 되기 위해
그런데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어요. 부곡에 사는 천민들이 원효대사 오셨다고 박수치고 떠받들어 버리니까 아무리 친구가 되려고 해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이건 누구 책임일까요? 내가 그들을 불쌍하게 본 건 내 눈이 어리석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이제 눈을 뜨고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갔는데 그들이 성인이 오셨다고 떠받들어서 친구가 안 되는 건 그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잖아요. 내 눈이 어두워서 부딪힌 건 내 책임이지만, 상대의 눈이 어두워서 나한테 와 부딪힌 건 상대의 책임이듯이요. 그러나 원효는 이것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유명한 원효라는 허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원효는 그 유명한 원효를 버려버렸어요. 즉, 요석공주와 물의를 일으키고 파계를 한 겁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원효대사를 추앙하던 모든 사람이 ‘훌륭한 줄 알았는데 순 엉터리였구나’ 하고 원효를 무시해 버렸어요. 세상에서 매장이 된 거죠. 그런데 부곡에 사는 천민들은 원효가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리니까 원효와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원효는 뽕따는 아낙네, 술 파는 사람, 천민, 뱀 잡는 땅꾼, 이런 사람들과 노래하고 춤추면서 그 노래와 춤 속에 걸림 없는 도리를 넣어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원효라는 모양과 형상이 없어지고 그들과 하나가 된 겁니다. 동시에 역사 기록에는 온 천지에 원효가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 어디를 가도 원효가 창건했다는 절이 있고, 동굴마다 원효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원효는 없어져 버렸고, 누가 원효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원효는 곳곳에 나타나는 대승보살의 화현이 되었습니다.

원효대사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상을 짓지 않는 길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도무지 꿈에서 깨어나 본 적이 없이 살아가거나, 설령 꿈에서 깨어나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꿈속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지금 여기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렇게 금강경에서는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 무유정법, 무주상보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중도의 원리, 연기법, 이런 법을 받아 지녀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복을 구하거나 상에 집착하게 되면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신심명

1

至道無難 지도무난- 도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다.

唯嫌揀擇 유혐간택- 오직 고르고 분별함을 싫어하니

但莫憎愛 단막증애-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洞然明白 통연명백- 분명하게 꿰뚫으리라.



2.

毫釐有差 호리유차-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天地懸隔 천지현격-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나니

欲得現前 욕득현전- 도가 앞에 나타남을 얻고자 하면

莫存順逆 막존순역-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마라.



3.

違順相爭 위순상쟁- 어기고 따름이 서로 다투면

是爲心病 시위심병- 이것을 마음의 병이라고 하니

不識玄旨 불식현지- 깊은 뜻은 알지 못하고

徒勞念靜 도로염정- 생각만 고요히 하려 애를 쓰네.



4.

圓同太虛 원동태허- 둥글기는 큰 허공과 같아서

無欠無餘 무흠무여- 모자라고 남을 것도 없으나

良由取捨 양유취사- 취하고 버리는 것을 좋아하는

所以不如 소이불여- 까닭에 한결같지 않다.



5.

莫逐有緣 막축유연- 인연이 있어도 쫒아가지 말고

勿住空忍 물주공인- 공에도 차마 머무르지 말며

一種平懷 일종평회- 한 생각이 바르면

泯然自盡 민연자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6.

止動歸止 지동귀지- 움직임이 그쳐서 멈추게 되고

止更彌動 지갱미동-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게 되면

唯滯兩邊 유체양변- 오직 양쪽止動끝에 막혀서

寧知一種 영지일종- 어떻게 한 가지인줄 알겠는가.



7

.一種不通 일종불통-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 양처실공- 두 곳에서의 공로를 잃을 것이니

遣有沒有 견유몰유-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從空背空 종공배공- 공함을 쫒으면 공함을 등진다.



8.

多言多慮 다언다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轉不相應 전불상응- 서로 응하지 못하게 되고

絶言絶慮 절언절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無處不通 무처불통-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9.

歸根得旨 귀근득지-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隨照失宗 수조실종- 비춤을 따르면 근원을 잃나니

須臾返照 수유반조- 모름지기 잠깐 돌이켜보면

勝脚前空 승각전공- 앞의 공함보다 더 뛰어나다.



10.

前空轉變 전공전변- 앞의 공함이 변하는 것은

皆由妄見 개유망견- 모두 망령된 견해 때문이니

不用求眞 불용구진- 참된 것을 구하지 말고

唯須息見 유수식견- 마땅히 망견을 쉬어라.



11.

二見不住 이견부주-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 신막추심- 삼가 쫒아가서 찾지 말며

纔有是非 재유시비- 조금이라도 옳고 그름이 있으면

紛然失心 분연실심- 본 마음을 잃고 어지러워진다.



12.

二由一有 이유일유- 둘은 하나 때문에 있으니

一亦莫守 일역막수- 하나 또한 지키지 말고

一心不生 일심불생-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萬法無咎 만법무구- 만법에 허물이 없다.



13.

無咎無法 무구무법- 만법에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고

不生不心 불생불심-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마음이 없으니

能隨境滅 능수경멸- 능함을 따라 경계가 없어지고

境逐能沈 경축능침- 경계를 쫒아 능한 것이 막힌다.



14

.境由能境 경유능경- 경계는 능함으로 인한 경계이고

能由境能 능유경능- 능함은 경계로 인하여 능함이니

欲知兩段 욕지양단- 두 가지 구분을 알고자 하는가?

元是一空 원시일공- 이것은 원래부터 하나의 공이다.



15.

一空同兩 일공동양-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齊含萬象 제함만상- 삼라만상을 모두 포함하니

不見精? 불견정추- 세밀하고 거친 것을 보지 않으면

寧有偏黨 영유편당- 어찌 한쪽에 치우침이 있겠는가.



16.

大道體寬 대도체관- 큰 도는 본체가 넓어서

無易無難 무이무난- 쉬운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으나

小見狐疑 소견호의- 좁은 견해와 여우같은 의심으로

轉急轉遲 전급전지- 급하게 할수록 더욱 느려진다.



17.

執之失度 집지실도- 도에 집착하면 법도를 잃고

必入邪路 필입사로-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며

放之自然 방지자연- 놓아버리면 자연스러워서

體無去住 체무거주- 본체는 가거나 머뭄이 없다.



18

.任性合道 임성합도- 도에 합하여 본성을 맡겨두면

逍遙絶惱 소요절뇌- 번뇌가 끊어져 한가롭게 노닐며

繫念乖眞 계념괴진- 생각에 매이면 참에서 어긋나고

昏沈不好 혼침불호- 혼미함에 빠져 좋지 않다.



19.

不好勞神 불호노신- 좋지 않음으로 정신이 피로하니

何用疎親 하용소친- 어찌 소홀하고 친함을 쓰겠는가.

欲趣一乘 욕취일승-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면

勿惡六塵 몰오육진- 육진을 미워하지 마라.



20.

六塵不惡 육진불오-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還同正覺 환동정각- 도리어 깨달음과 같아서

智者無爲 지자무위- 지혜로운 자는 함이 없고

愚人自縛 우인자박-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얽매인다.



21.

法無異法 법무이법- 법에는 다른 법이 없으나

妄自愛着 망자애착- 망령되게 스스로 애착하여

將心用心 장심용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豈非大錯 기비대착-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닌가.



22.

迷生寂亂 미생적란-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悟無好惡 오무호오- 깨달으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으니

一切二邊 일체이변- 모든 상대相對의 두 가지는

良由斟酌 양유짐작- 능히 헤아려 짐작하기 때문이다.



23.

夢幻空華 몽환공화- 꿈속의 허깨비와 허공 꽃을

何勞把捉 하로파착- 어찌 잡으려고 애쓰는가.

得失是非 득실시비- 얻고, 잃고, 옳고, 그름을

一時放却 일시방각- 일시에 놓아 버리고 쉬어라.



24.

眼若不睡 안약불수- 눈에 만약 잠이 없으면

諸夢自除 제몽자제- 모든 꿈이 스스로 없어지고

心若不異 심약무이-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萬法一如 만법일여- 만 가지 법이 한결같다.



25.一如體玄 일여체현- 한결같음은 본체가 깊어서  

兀爾忘緣 올이망연- 우뚝 인연을 잊고

萬法齊觀 만법제관- 만법이 모두 드러나면

歸復自然 귀복자연- 돌아오고 돌아감이 자연스럽다.



26.

若有歸復 약유귀복- 만약 돌아오고 돌아감이 있으면

在由異心 재유이심-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

泯其所以 민기소이- 그 까닭이 없어지면

不可方比 불가방비- 어디에도 비교 할 대가 없다.



27.

止動無動 지동무동- 움직임을 그치니 움직임이 없고

動止無止 동지무지- 그쳤다 움직이니 그침이 없어서

兩旣不成 양기불성- 이미 둘을 이루지 못했거니

一何有爾 일하유이- 어찌 하나가 있겠는가.



28.

究竟窮極 구경궁극- 끝에 가서는 결국

不存軌則 부존궤칙- 길이나 법칙이 있지 않고

契心平等 계심평등- 마음이 평등함에 계합하면

所作俱息 소작구식- 짓는 것을 모두 쉰다.



29.

狐疑淨盡 호의정진- 여우같은 의심이 다해 맑아지면

正信調直 정신조직- 바른 믿음이 곧바르게 되어

一切不留 일체불류- 일체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無可記憶 무가기억- 가히 아무 기억이 없다.



30.

虛明自照 허명자조- 자기의 빈 곳을 밝게 비추어

不勞心力 불로심력- 마음으로 힘들여 애쓰지 말고

非思量處 비사량처- 생각으로 헤아리는 곳 아니니

識情難測 식정난측- 뜻으로 판단해서 알기 어렵다.



31.

眞如法界 진여법계-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에는

無他無自 무타무자- 남도 없고 나도 없어

要急相應 요급상응- 빠르게 상응하기를 바란다면

唯言不二 유언불이- 오직 둘이 아님을 말하라.



32.

不二皆同 불이개동- 둘이 아니면 다 한가지로

無不包容 무불포용-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十方智者 시방지자- 시방의 지혜로운 자는

皆入此宗 개입차종- 모두 이 근원으로 들어온다.



33.

宗非促延 종비촉연- 근원은 빠르고 늦음도 아니며

一念萬年 일념만년- 한 생각이 만년 같아서

無在不在 무재부재-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으니

十方目前 시방목전- 시방이 바로 눈앞이로다.



34.

極小同大 극소동대-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忘絶境界 망절경계- 경계가 끊어짐을 잊어버리고

極大同小 극대동소-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不見邊表 불견변표- 그 겉과 가장자리를 보지 못한다.



35.

有卽是無 유즉시무- 있는 것이 곧 없음이고

無卽是有 무즉시유- 없는 것이 곧 있음이니

若不如此 약불여차-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不必須守 불필수수- 반드시 꼭 지키지 마라.



36.

一卽一切 일즉일체- 하나가 곧 일체고

一切卽一 일체일즉- 일체가 곧 하나이니

但能如是 단능여시- 다만 능히 이와 같다면

何慮不畢 하려불필- 어찌 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랴.



37.

信心不二 신심불이- 분명한 마음은 둘이 아니고

不二信心 불이신심- 둘 아님이 분명한 마음이니

言語道斷 언어도단- 말의 길이 끊어져서

非去來今 비거래금-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

 3강 나누기

어떻게 괴로운 마음을 극복해야 될까요

일체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다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 했다는 생각을 갖지마라

?

나의 괴로움은 바라는 마음이 있기때문에 즉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아상 때문이죠

그러므로 기대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배프는 마음으로 돌려라

즉 이기심의 욕망을 곧 자비심인 보시하는 마음으로 바꾸어라

내 마음을 부정적 사고에서 긍정적 사고로 바꾸면 나도 남도좋다,

경계가 없음으로 다툼이나 시비가 없어 서로가 좋으니 이것이 중도라 할수 있다

 

그러나 배풀되 배픈다는 티나 꼴을 내지마라 즉 상을 내지마라

티나 꼴을 내는 것은 상으로서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되 상이 없이 하라는 거지요.

모든 언어는 대비적으로 상반된 용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색이다 공이다, 나다 너다 ,

 

법성계에 "법성원융무이상"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모습이 없고,

그런데 우리는 생각이 대극적 경계선을 만들어 이원적사고를 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곧 전체이며 전체는 곧 나라는 것을 깨우라는 가르침이라본다.

이것이 중도와 연기 무아공의 이치를 설명한 것리라 니다.

여기서 아상을 떠나서 구하는 마음을 배프는 마음으로 써라,

6바라밀중 첫째가 보시 이듯이 아상을 비우데는 보시가 첫째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상이 없다면 항복 받을것도 없고 주는것도 없고 받는것도 없겠지요.

 

 

*4강 나누기

여기서는 상에 대해서 설명을 하셨는데요

"범소유상 개시허망"

무릇 있는바 상이라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란 우리의 생각으로 짓는 관념적 모양이나 또는 형상으로 있다고 여기는 것들 인데요

여기서 상이 있다는 것은 연기로서 설명을 해야 이해가 빠르다고 봅니다.

연기라는 것을 간단히 이해 하자면 여러가지 물질이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인연으로 결합되여진 상태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므로 허망한 것이다,

즉 꿈 환상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불 과 같다.(여몽 환포영 여로역여전)

그럼 허망하지 않는 것은 뭐냐

"제상이 비상 즉견 여래"

모든상이 실체가 없는 비상()으로 알면 여래를 본다 즉 괴로움이 없다.

제상은 색에 비유 할수 있고. 비상은 공으로 비유 할수 있습니다.

공이라해서 텅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것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을 상으로 알 것 같으면 공으로 보는 것이요

허망하지 않는 경지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중도 연기 무상 무아를 한 단어인 공으로 설명한 것이라 봅니다.

부처는 모양도 소리도 없는 것이다, (약이색견아 이음 성구아)

 

즉 상이 없는 것이 그이름 부처라는 것이다,(리일체제상이 증명제불)

이 세상은 상 과 비상으로 즉 색과 공으로 되여 있다는 것이다.

공가운데 더불어 색으로 존재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이면서 중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중생즉 부처)

텅빈 허공 가운데 온 우주가 동시에 공존하고있듯이 이게 바로 중도 연기라는 것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상을 분석해보면, 나는 연기로서 되여있기 때문에

즉 나 아닌 것들이 조건에 의해 결합 되여진 것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수있는 것이 없고.

내것이라 할수 있는 것이 없고.

내 생각을 고집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즉 무상이다

나는 곧 있으면서 없는것이다,

나는즉공이요 공은즉나다 나는 공과 다르지안고 공은 나와 둘이아니다 라고 할수 있다,

중생이 색이라면 부처는 곧 공이라는 것이다.

 

나는 즉 부처요. 부처는 즉 나다, 이런 논리가 되는 거지요.

불교는 무유정법 이라 합니다. 정해진 법이 없다, 이것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것도 아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 응무소주 이생기심/ 제상즉 비상/무유정법/ 중도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들입니다.

금강경은 곧 공(중도)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방편을 예로들어 이해를 돕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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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묘행무주분 여리실견분

나의 무지를 깨우치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소승불교 사상의 요지입니다. 반면 대승불교 사상의 요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을 내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소승불교는 나의 괴로움이 먼저 없어지고 난 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관점이고, 대승불교는 다른 사람을 돕는 마음을 내면 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관점이에요. 먼저 깨닫고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남을 돕는 마음을 내면 내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 수행법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회피하거나 이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이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괴로움을 극복한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승적 관점을 갖고 타인에게 베푼다 하더라도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베풀었다하는 생각을 하면 왜 괴로움이 생길까요? ‘고마워하겠지혹은 나중에 갚겠지하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도와줬다’, ‘내가 너를 구제했다이렇게 생각할 때는 늘 기대하는 마음이 뒤따르게 됩니다. 기대하는 마음은 곧 괴로움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래서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배울 내용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금강경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도와줬다는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에요. 도와줬다는 생각을 하면 기대가 생기기 때문에 도와줬다는 ()’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마음이나 생각으로 짓는 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을 짓는다고 표현해요. 즉 주관을 객관화한 것을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 눈에 빨갛게 보인다고 저것은 빨간색이다라고 생각할 때 상을 짓는다라고 합니다.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흔히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상()을 지어서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키가 170인 사람이 180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키가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키가 160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키가 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키가 170인 사람은 큰 사람도 아니고 작은 사람도 아닙니다.

 

나이가 50세인 사람이 60세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되고, 30세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늙은 사람이 됩니다. 50세라는 나이는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 객관적 사실입니다.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크다’, ‘작다’, ‘넓다’, ‘좁다’, ‘길다’, ‘짧다이런 인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관적 인식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가 일어나는 거예요. ‘크다’, ‘작다’, ‘넓다’, ‘좁다’, ‘비싸다’, ‘싸다하는 건 주관적인 것인데 이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상을 지었다라고 말합니다. 상을 지었다는 것은 주관을 객관화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상은 허망하다고 표현합니다. 작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고, 크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그 조건에서 그렇게 인식되었을 뿐이에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하니까, 그럼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는 뜻이냐고 물을 수 있겠죠. 그런 뜻은 아니에요. 우리는 항상 어떤 조건 속에서 인식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조건에서는 클 수도 있고, 어떤 조건에서는 작을 수도 있는 거예요. 어떤 조건에서 서로 비교했을 때 크다’, ‘작다하고 말할 수 있지만, 일괄적으로 크다’, ‘작다하고 말할 수 있는 실체는 없습니다. 인연을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거예요.

 

내가 베풀었다는 상을 짓게 되면

마찬가지로 남을 돕거나 베풀고 나서도 내가 베풀었다하는 상을 짓지 말라는 겁니다. 괴로움이 생기지 않으려면 얻으려고 하지 말고 베풀어야 하고,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고,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는 원리는 제3분에 대해 강의할 때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베풀고 나서 내가 베풀었다하는 상을 짓게 되면 또다시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 제4분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하고 물은 겁니다. 부처님의 대답은 상을 짓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묘행무주’(妙行無住)‘예요. 상을 짓지 않는 미묘한 행은 머문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30년 전에 미국의 어느 절에 있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절에 매일 와서 기도하는 노보살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기도를 절대로 빼먹는 법이 없고, 저보다 더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노보살님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생겨서 노보살님에게 어떻게 기도를 하루도 안 빠지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노보살님이 저는 하루라도 기도를 안 하면 못 살 것 같아서 이렇게 죽기 살기로 기도를 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노보살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랬습니다.

 

결혼해서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남편이 전장에 나갔는데 사망 통지가 왔답니다. 살 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아이 하나는 손잡고 아기 하나는 등에 업고, 절에 가서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기도를 했다고 해요. 믿음이 없었다면 살지 못했을 텐데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른 공덕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살아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도 덕택인지 장사를 하면서 조금씩 생활이 풀리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첫째는 서울대 의대를 가고, 둘째는 서울대 공대에 들어갔습니다. 둘 다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아들 둘이 미국으로 떠나고 혼자서 한국에서 가게 운영을 하고 살았는데, 미국에 사는 두 아들이 이제 자기들도 충분히 살 형편이 되니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미국에 와서 편안히 사셨으면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미국 가서 아들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혼자 장사하고 살았는데 점점 나이가 드니 몸이 불편해져서 가게를 싹 정리한 돈을 가지고 미국에 와서 그 돈을 아들에게 보태서 집을 사고, 아들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두 아들이 성공해서 평생 고생한 보상을 받는다고 주위에서 칭찬하고 그랬는데, 막상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생지옥이었습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과 며느리들 모두 일하느라 바쁘고, 본인은 혼자서 외출을 할 줄 모르니, 차에 실어서 이 집에 갖다 놓으면 이 집에 있고, 저 집에 갖다 놓으면 저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니까 숨이 막혀왔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절을 찾아온 거였어요.

 

남이 볼 때는 아들 둘 다 성공했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보시도 많이 하는 훌륭한 보살이었지만 속마음은 죽을 지경이었던 겁니다. 키울 때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웠는데 자기 일 바쁘다고 엄마를 팽개쳐두는 큰 아들에게 몹시 섭섭해서 작은 아들 집에 갔습니다. 작은아들도 똑같이 행동하니까 또 섭섭해서 큰 아들 집에 가고,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요즘은 이제 거의 절에 와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아들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밀어 올라요, 어떡하죠?

노보살님은 아들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며 저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한국 갈 때 자기를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자기가 평생 장사를 했기 때문에 비행기표는 한국 가서 돈을 벌어 갚겠다고 하면서요. 아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내 돈만 돌려주면 한국에 돌아가서 가게 운영하면서 살겠다고 했는데 아들이 왜 그 고생을 하려고 하냐면서 안 보내 준다는 겁니다. 이 분이 금강경을 매일 하루에 일곱 번씩 읽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보살님에게 물었습니다.

 

금강경에 무주상보시라는 걸 아세요?’

 

베풀고 나서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 낳고 키울 때 나중에 효도받으려고 키웠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아들한테 그렇게 섭섭한가요?’

 

내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안 키웠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부모한테 잘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보살님이 바라니까 섭섭한 거죠. 너희 둘이 잘 커서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면 왜 섭섭하겠어요.’

 

그래도 성공을 했는데 어떻게 부모를 이렇게 둘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살님은 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냥 관세음보살 부르는 소리만 내는 거예요. 절하는 건 다리 운동이지 그건 불법이 아닙니다. 보살님은 절에 헛다녔습니다.’

 

이 분이 신심이 굳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절에 헛다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님한테 동정을 좀 받아서 어떻게든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매몰차게 얘기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왜 절에 헛다닌 것인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보살님, 이렇게 절에 다닐 바에야 절에 안 다니는 게 나아요. 그러니 내일부터 오지 마십시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건 결국 나를 섭섭하게 한 저 두 아들에게 벌 좀 주라는 거 아닙니까? 설령 보살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살님의 속이 시원하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말고 아들만 보면 앞으로 저 자식 남이다이렇게 염불을 하세요.’

 

이 말을 듣고 진짜 충격을 받았는지 보살님이 그다음 날부터 절에 안 나오는 거예요. 저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절에 오는 게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했는데 절에 안 오면 이 보살님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저도 매몰차게 얘기는 했지만, 좀 찜찜해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전화도 안 받으신다는 거예요.

 

한 달이 조금 지났는데 이 보살님이 드디어 절에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보살님, 왜 그동안 절에 안 오셨어요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니까 부처가 꼭 절에만 있습니까하고 웃음을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법당에 앉아서 대화를 하는데 보살님이 예전보다 훨씬 화통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날 대화하고 나서 집에 돌아가니까 아들만 보면 더 화가 치밀었어요. 그 전에는 절에 와서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았는데 이제는 절에도 못 가겠고, 어떻게 보면 법사님도 얄밉고, 어떻게 보면 법사님 말이 맞는 말 같기도 했어요. 제가 평생 절에 다녔는데 절에 헛다녔다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아들이 문을 열고 탁 들어오는데 아들을 보자마자 열이 확 오르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저 자식 남이다이렇게 불렀어요. 그때 정말 아들이 남으로 보였습니다. 아들이 남으로 보이는 순간 가슴에 있던 화가 얼음이 녹듯이 싹 내려갔습니다. 큰아들 집에 있어도 고맙고, 작은 아들 집에 있어도 고맙고 절에 있어도 고맙기만 하니까 어디 있어도 감사하고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무주상보시의 한량없는 공덕입니다.’

 

남이라면 누가 이 할머니를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구경도 시켜주겠어요. 아들이 남이라고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고마운 사람들이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상을 버렸을 때 괴로움이 소멸되는 이치입니다.

 

상이 허망한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런 이치를 간략한 형식으로 요약한 금강경의 핵심 게송을 사구게(四句偈)’라고 합니다. 사구게 중에 하나가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상은 다 허망합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상이 허망한 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됩니다. 이 말은 진실을 알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금강경은 이렇게 상을 짓는 것을 타파해서 여실히 진실을 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잘못하면 금강경이 최고다하는 상을 또 짓게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많이 읽으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 사구게(四句偈)를 읽으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크다는 구절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금강경만 열심히 읽으면 복을 한량없이 받겠네하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벌써 복이라는 상()을 지어서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버린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도 상()을 짓기가 쉽습니다. 이런 상()을 법상(法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자님께서도 ()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하셨죠. 그 말은 이것이 도()이다하는 상()을 지어버리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이 이렇게 상()을 짓게 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가장 진보적이어야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것이 종교입니다. 진리라는 상을 쥐고 우상을 숭배하듯이 거기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뭔가 좋으면 또 그 좋은 것에 대해 상을 지어서 집착합니다. 언제나 상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늘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럴 때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3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 하여 생각하시며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보살이라는 말을 안 쓰고, 선남자 선여인이라는 보통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고, 어떤 사람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냈냐 안 냈냐, 원을 세웠느냐, 발심을 했느냐, 이것이 대승불교에서는 중요합니다. 머리를 깎았냐 안 깎았냐, 출신이 어디냐, 남자냐 여자냐, 이런 것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서 수행자의 기준은 발심을 했느냐 안 했느냐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습니다.

 

지금 제가 괴로워 죽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네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려면,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네가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혹 떼려다 혹 붙인 거죠. 내가 지금 짐이 너무 무거운데, 어떻게 하면 이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짐을 네가 다 짊어지겠다고 마음을 내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내 짐도 무거워서 어떻게 하면 이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무거운 짐을 네가 다 짊어지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마음을 항복받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해가 돼요? 여러분은 이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금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문자가 어려운 게 아니고 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대승사상의 핵심이라고 해서, 제목에 정종(正宗)’, 바르고 으뜸이 된다는 표현이 들어간 겁니다. 금강경 제1분이 부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말 없는 가운데 대승의 요지를 설명하고 있다면, 3분에서는 말로 표현해서 대승의 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내가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이 두 문장이 대승정종분의 요지이고, 대승사상의 으뜸되는 핵심입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여러분 중에 눈이 좀 번쩍 뜨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직 눈이 안 뜨여지니까 경전을 끝까지 봐야 되겠죠. 지금 눈이 바로 뜨인 사람은 책을 덮고 집에 가도 좋습니다. (웃음)

 

모든 번뇌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

일상생활의 예를 들어서 한번 살펴봅시다. 부부 지간에 혹은 부모 자식 지간에 보통 이런 표현을 자주 하죠.

 

우리 남편이 너무 답답해서 같이 못 살겠다.’

 

우리 애만 보면 답답해 죽겠다.’

 

답답하다는 말은 괴롭다는 뜻이죠. 왜 답답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애가 말을 안 들어서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요.’

 

상대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또는 아이에게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잖아요.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행복해 하고, 몰라주면 괴로워합니다. ‘당신이 왜 그런지 난 모르겠어!’ 이렇게 말할 때 답답합니다. 그런데 상대를 이해하면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 애가 그래서 그랬구나

 

, 남편이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이해해주면 내가 행복할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는데 마음의 작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이해할 때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이것이 마음의 원리예요. 이런 마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꾸로 하는 겁니다. 내가 남의 마음을 이해하면 내 마음이 시원해져요.

 

저기 산을 한번 봐. 멋지지?’

 

저기 단풍을 한번 봐. 예쁘지?’

 

이렇게 산을 좋아하고 단풍을 좋아하면, 내가 기분이 좋아요. 내가 꽃을 좋아하면 꽃이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생각이에요. 금강경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을 꺼야 그림자가 사라지는데, 불이 켜진 상태에서 계속 그림자를 피해 다니면, 어디를 가도 그림자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괴로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마음을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지지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이 갈수록 더 커집니다. 관점이 바로잡혀 있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해결된 것 같더라도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오히려 괴로움이 더 커집니다.

 

욕망을 갖고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그게 안 얻어질 때 괴로운 거예요. 여러분은 부부나 친구 지간에도 내가 얻는 게 많은가, 주는 게 많은가이렇게 모든 걸 다 계산하기 때문에 번민이 생기는 겁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순간적으로 기쁘죠. 그런데 다음에 더 많은 것을 주지 않으면 괴로워집니다. 또한 내가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면 기쁘긴 한데 그 사람 앞에 가면 내가 작은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 위축되고 비굴해져요.

 

그러나 내가 베풀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당당해지고 내가 주인이 됩니다. 길을 가다가 보니까 두 사람이 밭에서 김을 매고 있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주인이고, 한 사람은 일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누가 주인이고 누가 일꾼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럼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있죠?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돈을 주면 그 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얻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종이 되기를 원하며 산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원리를 금강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까?’ 하니 주는 마음을 내라’, ‘사랑하는 마음을 내라’, ‘이해하는 마음을 내라’, ‘베푸는 마음을 내라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해탈 열반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누군가를 제도한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발상을 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봅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지옥에 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게 아니라 지옥에 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내가 부처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대승 보살의 수행법은 상구보리 하고 하화중생 하는 것이 선후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길이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대승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대승의 수행은 번다한 세상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세속 가운데서 관점을 바꿔버림으로써 그대로 해탈합니다. 머리를 깎을 필요도 없고,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고, 이혼할 필요도 없고, 다시 결혼할 필요도 없고, 오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인간관계에서 괴로움이 오는 게 아니에요. 거꾸로 된 마음, 즉 어리석은 마음이 고뇌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을 바꾸는 것, 즉 관점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를 꿰뚫어 아는 것, 이게 바로 반야, 즉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문을 들어도 이해가 잘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이해했다 해도 일상에 가면 그렇게 안 되죠. 담배 피우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담배를 끊으면 건강이 좋아진다고 해도 그 좋은 담배를 끊기 싫으니까 이해가 잘되지 않고, 설령 이해하더라도 담배를 끊고 싶지도 않으니까 현실에서는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째, 이 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둘째, 체험을 통해서 증득해야 됩니다.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고 일부러 거지 옷을 입고, 일부러 구걸하고, 일부러 나무 밑에서 자면서 참고 견딘 게 아닙니다. 그 길이 바로 번뇌가 없는 길이고, 자유로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신 겁니다. 일부러 참으면서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아니라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 건강해지는 길입니다. 담배를 안 피우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경지입니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이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자가 없다

 

이 구절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다 도와줬는데 실제로 나한테 도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릅니까?’라는 질문에 첫 번째 과제는 괴로운 사람을 다 구제하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두 번째 과제가 주어진 겁니다. 그들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구제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두 번째 과제입니다. 해탈 열반에 이르려면 이 두 번째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남을 도왔다 하더라도 도왔다는 상을 짓지 말라

마음을 내고 행동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그 행동을 내가 했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내가 했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아니라는 것은 아직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마음을 내야 할까요? 내가 만일 너를 구제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결국은 상()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상이든, 인상이든, 중생상이든, 수자상이든, 상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생의 세계에서 윤회하게 됩니다.

 

여기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지식을 습득하고자 한다면 중요하겠지만 수행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상을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굳이 구분하자면, 아상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상이고, 인상은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입니다. 중생상은 생명 가진 것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이고, 수자상은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는 상입니다. 일체가 하나로 연기되어 있는데, 상을 짓고 분별하는 자세로 선을 긋고 분리하면 자기 팔과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돕는 마음을 내되, 그를 도왔다 하더라도 도왔다는 상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상을 짓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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