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묘행무주분 여리실견분

나의 무지를 깨우치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소승불교 사상의 요지입니다. 반면 대승불교 사상의 요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을 내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소승불교는 나의 괴로움이 먼저 없어지고 난 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관점이고, 대승불교는 다른 사람을 돕는 마음을 내면 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관점이에요. 먼저 깨닫고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남을 돕는 마음을 내면 내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 수행법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회피하거나 이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이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괴로움을 극복한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승적 관점을 갖고 타인에게 베푼다 하더라도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베풀었다하는 생각을 하면 왜 괴로움이 생길까요? ‘고마워하겠지혹은 나중에 갚겠지하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도와줬다’, ‘내가 너를 구제했다이렇게 생각할 때는 늘 기대하는 마음이 뒤따르게 됩니다. 기대하는 마음은 곧 괴로움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래서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배울 내용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금강경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도와줬다는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에요. 도와줬다는 생각을 하면 기대가 생기기 때문에 도와줬다는 ()’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마음이나 생각으로 짓는 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을 짓는다고 표현해요. 즉 주관을 객관화한 것을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 눈에 빨갛게 보인다고 저것은 빨간색이다라고 생각할 때 상을 짓는다라고 합니다.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흔히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상()을 지어서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키가 170인 사람이 180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키가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키가 160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키가 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키가 170인 사람은 큰 사람도 아니고 작은 사람도 아닙니다.

 

나이가 50세인 사람이 60세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되고, 30세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늙은 사람이 됩니다. 50세라는 나이는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 객관적 사실입니다.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크다’, ‘작다’, ‘넓다’, ‘좁다’, ‘길다’, ‘짧다이런 인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관적 인식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가 일어나는 거예요. ‘크다’, ‘작다’, ‘넓다’, ‘좁다’, ‘비싸다’, ‘싸다하는 건 주관적인 것인데 이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상을 지었다라고 말합니다. 상을 지었다는 것은 주관을 객관화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상은 허망하다고 표현합니다. 작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고, 크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그 조건에서 그렇게 인식되었을 뿐이에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하니까, 그럼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는 뜻이냐고 물을 수 있겠죠. 그런 뜻은 아니에요. 우리는 항상 어떤 조건 속에서 인식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조건에서는 클 수도 있고, 어떤 조건에서는 작을 수도 있는 거예요. 어떤 조건에서 서로 비교했을 때 크다’, ‘작다하고 말할 수 있지만, 일괄적으로 크다’, ‘작다하고 말할 수 있는 실체는 없습니다. 인연을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거예요.

 

내가 베풀었다는 상을 짓게 되면

마찬가지로 남을 돕거나 베풀고 나서도 내가 베풀었다하는 상을 짓지 말라는 겁니다. 괴로움이 생기지 않으려면 얻으려고 하지 말고 베풀어야 하고,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고,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는 원리는 제3분에 대해 강의할 때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베풀고 나서 내가 베풀었다하는 상을 짓게 되면 또다시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 제4분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하고 물은 겁니다. 부처님의 대답은 상을 짓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묘행무주’(妙行無住)‘예요. 상을 짓지 않는 미묘한 행은 머문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30년 전에 미국의 어느 절에 있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절에 매일 와서 기도하는 노보살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기도를 절대로 빼먹는 법이 없고, 저보다 더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노보살님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생겨서 노보살님에게 어떻게 기도를 하루도 안 빠지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노보살님이 저는 하루라도 기도를 안 하면 못 살 것 같아서 이렇게 죽기 살기로 기도를 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노보살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랬습니다.

 

결혼해서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남편이 전장에 나갔는데 사망 통지가 왔답니다. 살 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아이 하나는 손잡고 아기 하나는 등에 업고, 절에 가서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기도를 했다고 해요. 믿음이 없었다면 살지 못했을 텐데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른 공덕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살아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도 덕택인지 장사를 하면서 조금씩 생활이 풀리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첫째는 서울대 의대를 가고, 둘째는 서울대 공대에 들어갔습니다. 둘 다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아들 둘이 미국으로 떠나고 혼자서 한국에서 가게 운영을 하고 살았는데, 미국에 사는 두 아들이 이제 자기들도 충분히 살 형편이 되니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미국에 와서 편안히 사셨으면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미국 가서 아들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혼자 장사하고 살았는데 점점 나이가 드니 몸이 불편해져서 가게를 싹 정리한 돈을 가지고 미국에 와서 그 돈을 아들에게 보태서 집을 사고, 아들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두 아들이 성공해서 평생 고생한 보상을 받는다고 주위에서 칭찬하고 그랬는데, 막상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생지옥이었습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과 며느리들 모두 일하느라 바쁘고, 본인은 혼자서 외출을 할 줄 모르니, 차에 실어서 이 집에 갖다 놓으면 이 집에 있고, 저 집에 갖다 놓으면 저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니까 숨이 막혀왔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절을 찾아온 거였어요.

 

남이 볼 때는 아들 둘 다 성공했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보시도 많이 하는 훌륭한 보살이었지만 속마음은 죽을 지경이었던 겁니다. 키울 때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웠는데 자기 일 바쁘다고 엄마를 팽개쳐두는 큰 아들에게 몹시 섭섭해서 작은 아들 집에 갔습니다. 작은아들도 똑같이 행동하니까 또 섭섭해서 큰 아들 집에 가고,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요즘은 이제 거의 절에 와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아들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밀어 올라요, 어떡하죠?

노보살님은 아들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며 저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한국 갈 때 자기를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자기가 평생 장사를 했기 때문에 비행기표는 한국 가서 돈을 벌어 갚겠다고 하면서요. 아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내 돈만 돌려주면 한국에 돌아가서 가게 운영하면서 살겠다고 했는데 아들이 왜 그 고생을 하려고 하냐면서 안 보내 준다는 겁니다. 이 분이 금강경을 매일 하루에 일곱 번씩 읽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보살님에게 물었습니다.

 

금강경에 무주상보시라는 걸 아세요?’

 

베풀고 나서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 낳고 키울 때 나중에 효도받으려고 키웠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아들한테 그렇게 섭섭한가요?’

 

내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안 키웠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부모한테 잘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보살님이 바라니까 섭섭한 거죠. 너희 둘이 잘 커서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면 왜 섭섭하겠어요.’

 

그래도 성공을 했는데 어떻게 부모를 이렇게 둘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살님은 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냥 관세음보살 부르는 소리만 내는 거예요. 절하는 건 다리 운동이지 그건 불법이 아닙니다. 보살님은 절에 헛다녔습니다.’

 

이 분이 신심이 굳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절에 헛다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님한테 동정을 좀 받아서 어떻게든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매몰차게 얘기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왜 절에 헛다닌 것인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보살님, 이렇게 절에 다닐 바에야 절에 안 다니는 게 나아요. 그러니 내일부터 오지 마십시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건 결국 나를 섭섭하게 한 저 두 아들에게 벌 좀 주라는 거 아닙니까? 설령 보살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살님의 속이 시원하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말고 아들만 보면 앞으로 저 자식 남이다이렇게 염불을 하세요.’

 

이 말을 듣고 진짜 충격을 받았는지 보살님이 그다음 날부터 절에 안 나오는 거예요. 저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절에 오는 게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했는데 절에 안 오면 이 보살님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저도 매몰차게 얘기는 했지만, 좀 찜찜해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전화도 안 받으신다는 거예요.

 

한 달이 조금 지났는데 이 보살님이 드디어 절에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보살님, 왜 그동안 절에 안 오셨어요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니까 부처가 꼭 절에만 있습니까하고 웃음을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법당에 앉아서 대화를 하는데 보살님이 예전보다 훨씬 화통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날 대화하고 나서 집에 돌아가니까 아들만 보면 더 화가 치밀었어요. 그 전에는 절에 와서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았는데 이제는 절에도 못 가겠고, 어떻게 보면 법사님도 얄밉고, 어떻게 보면 법사님 말이 맞는 말 같기도 했어요. 제가 평생 절에 다녔는데 절에 헛다녔다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아들이 문을 열고 탁 들어오는데 아들을 보자마자 열이 확 오르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저 자식 남이다이렇게 불렀어요. 그때 정말 아들이 남으로 보였습니다. 아들이 남으로 보이는 순간 가슴에 있던 화가 얼음이 녹듯이 싹 내려갔습니다. 큰아들 집에 있어도 고맙고, 작은 아들 집에 있어도 고맙고 절에 있어도 고맙기만 하니까 어디 있어도 감사하고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무주상보시의 한량없는 공덕입니다.’

 

남이라면 누가 이 할머니를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구경도 시켜주겠어요. 아들이 남이라고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고마운 사람들이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상을 버렸을 때 괴로움이 소멸되는 이치입니다.

 

상이 허망한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런 이치를 간략한 형식으로 요약한 금강경의 핵심 게송을 사구게(四句偈)’라고 합니다. 사구게 중에 하나가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상은 다 허망합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상이 허망한 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됩니다. 이 말은 진실을 알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금강경은 이렇게 상을 짓는 것을 타파해서 여실히 진실을 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잘못하면 금강경이 최고다하는 상을 또 짓게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많이 읽으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 사구게(四句偈)를 읽으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크다는 구절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금강경만 열심히 읽으면 복을 한량없이 받겠네하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벌써 복이라는 상()을 지어서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버린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도 상()을 짓기가 쉽습니다. 이런 상()을 법상(法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자님께서도 ()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하셨죠. 그 말은 이것이 도()이다하는 상()을 지어버리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이 이렇게 상()을 짓게 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가장 진보적이어야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것이 종교입니다. 진리라는 상을 쥐고 우상을 숭배하듯이 거기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뭔가 좋으면 또 그 좋은 것에 대해 상을 지어서 집착합니다. 언제나 상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늘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럴 때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3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 하여 생각하시며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보살이라는 말을 안 쓰고, 선남자 선여인이라는 보통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고, 어떤 사람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냈냐 안 냈냐, 원을 세웠느냐, 발심을 했느냐, 이것이 대승불교에서는 중요합니다. 머리를 깎았냐 안 깎았냐, 출신이 어디냐, 남자냐 여자냐, 이런 것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서 수행자의 기준은 발심을 했느냐 안 했느냐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습니다.

 

지금 제가 괴로워 죽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네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려면,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네가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혹 떼려다 혹 붙인 거죠. 내가 지금 짐이 너무 무거운데, 어떻게 하면 이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짐을 네가 다 짊어지겠다고 마음을 내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내 짐도 무거워서 어떻게 하면 이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무거운 짐을 네가 다 짊어지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마음을 항복받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해가 돼요? 여러분은 이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금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문자가 어려운 게 아니고 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대승사상의 핵심이라고 해서, 제목에 정종(正宗)’, 바르고 으뜸이 된다는 표현이 들어간 겁니다. 금강경 제1분이 부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말 없는 가운데 대승의 요지를 설명하고 있다면, 3분에서는 말로 표현해서 대승의 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내가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이 두 문장이 대승정종분의 요지이고, 대승사상의 으뜸되는 핵심입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여러분 중에 눈이 좀 번쩍 뜨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직 눈이 안 뜨여지니까 경전을 끝까지 봐야 되겠죠. 지금 눈이 바로 뜨인 사람은 책을 덮고 집에 가도 좋습니다. (웃음)

 

모든 번뇌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

일상생활의 예를 들어서 한번 살펴봅시다. 부부 지간에 혹은 부모 자식 지간에 보통 이런 표현을 자주 하죠.

 

우리 남편이 너무 답답해서 같이 못 살겠다.’

 

우리 애만 보면 답답해 죽겠다.’

 

답답하다는 말은 괴롭다는 뜻이죠. 왜 답답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애가 말을 안 들어서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요.’

 

상대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또는 아이에게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잖아요.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행복해 하고, 몰라주면 괴로워합니다. ‘당신이 왜 그런지 난 모르겠어!’ 이렇게 말할 때 답답합니다. 그런데 상대를 이해하면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 애가 그래서 그랬구나

 

, 남편이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이해해주면 내가 행복할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는데 마음의 작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이해할 때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이것이 마음의 원리예요. 이런 마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꾸로 하는 겁니다. 내가 남의 마음을 이해하면 내 마음이 시원해져요.

 

저기 산을 한번 봐. 멋지지?’

 

저기 단풍을 한번 봐. 예쁘지?’

 

이렇게 산을 좋아하고 단풍을 좋아하면, 내가 기분이 좋아요. 내가 꽃을 좋아하면 꽃이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생각이에요. 금강경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을 꺼야 그림자가 사라지는데, 불이 켜진 상태에서 계속 그림자를 피해 다니면, 어디를 가도 그림자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괴로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마음을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지지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이 갈수록 더 커집니다. 관점이 바로잡혀 있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해결된 것 같더라도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오히려 괴로움이 더 커집니다.

 

욕망을 갖고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그게 안 얻어질 때 괴로운 거예요. 여러분은 부부나 친구 지간에도 내가 얻는 게 많은가, 주는 게 많은가이렇게 모든 걸 다 계산하기 때문에 번민이 생기는 겁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순간적으로 기쁘죠. 그런데 다음에 더 많은 것을 주지 않으면 괴로워집니다. 또한 내가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면 기쁘긴 한데 그 사람 앞에 가면 내가 작은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 위축되고 비굴해져요.

 

그러나 내가 베풀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당당해지고 내가 주인이 됩니다. 길을 가다가 보니까 두 사람이 밭에서 김을 매고 있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주인이고, 한 사람은 일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누가 주인이고 누가 일꾼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럼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있죠?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돈을 주면 그 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얻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종이 되기를 원하며 산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원리를 금강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까?’ 하니 주는 마음을 내라’, ‘사랑하는 마음을 내라’, ‘이해하는 마음을 내라’, ‘베푸는 마음을 내라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해탈 열반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누군가를 제도한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발상을 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봅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지옥에 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게 아니라 지옥에 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내가 부처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대승 보살의 수행법은 상구보리 하고 하화중생 하는 것이 선후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길이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대승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대승의 수행은 번다한 세상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세속 가운데서 관점을 바꿔버림으로써 그대로 해탈합니다. 머리를 깎을 필요도 없고,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고, 이혼할 필요도 없고, 다시 결혼할 필요도 없고, 오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인간관계에서 괴로움이 오는 게 아니에요. 거꾸로 된 마음, 즉 어리석은 마음이 고뇌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을 바꾸는 것, 즉 관점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를 꿰뚫어 아는 것, 이게 바로 반야, 즉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문을 들어도 이해가 잘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이해했다 해도 일상에 가면 그렇게 안 되죠. 담배 피우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담배를 끊으면 건강이 좋아진다고 해도 그 좋은 담배를 끊기 싫으니까 이해가 잘되지 않고, 설령 이해하더라도 담배를 끊고 싶지도 않으니까 현실에서는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째, 이 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둘째, 체험을 통해서 증득해야 됩니다.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고 일부러 거지 옷을 입고, 일부러 구걸하고, 일부러 나무 밑에서 자면서 참고 견딘 게 아닙니다. 그 길이 바로 번뇌가 없는 길이고, 자유로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신 겁니다. 일부러 참으면서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아니라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 건강해지는 길입니다. 담배를 안 피우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경지입니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이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자가 없다

 

이 구절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다 도와줬는데 실제로 나한테 도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릅니까?’라는 질문에 첫 번째 과제는 괴로운 사람을 다 구제하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두 번째 과제가 주어진 겁니다. 그들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구제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두 번째 과제입니다. 해탈 열반에 이르려면 이 두 번째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남을 도왔다 하더라도 도왔다는 상을 짓지 말라

마음을 내고 행동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그 행동을 내가 했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내가 했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아니라는 것은 아직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마음을 내야 할까요? 내가 만일 너를 구제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결국은 상()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상이든, 인상이든, 중생상이든, 수자상이든, 상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생의 세계에서 윤회하게 됩니다.

 

여기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지식을 습득하고자 한다면 중요하겠지만 수행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상을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굳이 구분하자면, 아상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상이고, 인상은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입니다. 중생상은 생명 가진 것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이고, 수자상은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는 상입니다. 일체가 하나로 연기되어 있는데, 상을 짓고 분별하는 자세로 선을 긋고 분리하면 자기 팔과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돕는 마음을 내되, 그를 도왔다 하더라도 도왔다는 상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상을 짓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정토회에서 봉사를 좀 오래 하다 보니 소임이 점점 다양해지고 많아졌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저랑 좀 껄끄러운 관계가 되는 도반도 생기는 거예요. 제 수준으로는 한 도반이랑 잘 지내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안 좋은 상황이 됐습니다. 그 도반이랑 최대한 잘해보고 싶었는데 잘 안 되다 보니까 그다음부터는 그 도반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피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가 생기니 참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계속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요. 그때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고, 어떤 관점을 가지면서 수행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봤을 때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고, 약간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카르마가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이런 반응들이 생겨납니다. 거북한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북한 감정이 일어난다고 그 사람을 피하거나, 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수행적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불편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자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카르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느낌일 뿐이다.’


느낌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거든요. 저 사람에 대해선 나는 약간 부정적 느낌이 있구나, 저 사람에 대해서는 약간 호의적 느낌이 있구나, 이렇게 그저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의적 느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사랑해, 나하고 같이 살자’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자제를 해야 됩니다. 그것처럼 부정적인 느낌이 있다고 해서 다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느낌은 느낌대로 알아차리면서 그 사람과 함께 해나가야 하는 일은 그대로 하는 겁니다. 반대로 호의적인 느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하고만 밀착해서 일할 수가 없어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라’ 이런 말이 있어요. 오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이 있다고 배척하지 말고, 가는 사람에 대해 호의적인 느낌이 있다고 해서 붙잡지 말라는 겁니다. ’느낌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주어진 조건을 더 중요시해라’ 이것이 주어진 조건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수행적 관점이에요. 지금 제가 하는 얘기는 부정적 느낌이 일어나는 도반과 친해져라 또는 호의적인 느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에요. 부정적인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필요하면 관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부정적인 느낌이 있더라도 그 사람과 해야 할 일은 거부하지 말고 행해라.’

이것이 수행적 관점입니다. 수행적 관점을 가져야 하지만 지금 내 수준에서 그렇게 안 되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내 수준에서 안 되면 나를 반성해야지, 그 사람을 탓하면 안 됩니다. ‘정토회가 왜 저런 사람을 나한테 붙여주나’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수행자의 관점을 놓친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잘 안 됩니다.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실제로 안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도반에게나 지도부에 건의를 해야죠.

‘저는 저분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인 거부 반응이 늘 일어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이 잘 안 되니까 당분간 그분 하고는 접촉이 적도록 좀 조정해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거예요. ‘제 수행이 아직 부족하니까 이 문제는 좀 조정해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하고 나서 1년이든 2년이든 지나서 이제는 극복할 수 있겠다 싶으면 다시 요청하면 됩니다.

‘제가 이제는 누구라도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일부러 불편한 사람을 붙여줄 필요는 없지만 필요하면 함께 해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또 얘기를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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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바꾸면 웃을 수 있어요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좀 도움이 되셨나요?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수업까지 듣느라 더 바빴을 거예요. 게다가 돈 되는 일도 아니고, 시험에 도움 되는 일도 아니고, 승진에 도움 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시간 내서 이렇게 공부하려니 시간적으로는 부담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공부를 하면서 조금 도움이 됐다고 느낀다면, 세상살이가 힘든 이유가 꼭 일이 많아서라고만 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마음에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자꾸 일을 하다 보니 싫은 마음과 외적인 부담이 결합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공부가 도움이 됐다면 마음을 좀 가볍게 내고 기꺼이 일을 해보세요. 그렇게 해보면 힘든 일도 별 거 아닐 수 있어요. 여러분이 소풍이나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오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겁니다. 그런데 저처럼 농사짓는 사람 입장은 달라요. 모내기를 하거나 모종을 옮겨야 하는데 마침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일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물다가 비가 올 때는 비를 맞으면서 일을 해도 기분이 좋아요. (웃음) 비를 맞으면서 일도 하는데, 비를 맞으면서 노는 건 쉽지 않을까요? 비를 맞으면서 모내기하는 것보다 비를 맞으면서 산책하는 게 쉽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비를 맞으면서 노는 게 무슨 큰일이겠어요? 비를 맞으면서 일도 하는데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비까지 맞아가면서 놀 필요가 뭐 있어요? 그냥 안 놀면 되죠. 그러니 안 놀아도 별 문제가 없어요. 소풍 가기로 했다가 비가 오면 안 가면 되는 거예요. (웃음) 그게 스트레스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비가 와도 가고 싶으면 그냥 가면 됩니다. 비 맞고 일도 하는데, 비 맞고 노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이렇게 관점을 딱 바꾸면 사실은 일상이 별일 아닌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우리는 지금 그런 공부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부처님이 굉장히 큰 일을 겪으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웃으면서 그 어떤 일도 별 일 아닌 일로 만드셨잖아요. 우리는 누군가가 준 독성 있는 음식을 먹어서 토하고 죽게 되면 그 사람을 원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어차피 지금 나이가 여든이어서 죽을 때가 다 되어 가는데 그거 먹고 안 먹고 가 사실은 죽는 데 큰 차이가 없거든요. 일주일쯤 먼저 죽거나 늦게 죽는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런 일을 별 거 아닌 것처럼 생각하니까 웃으면서 상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거예요.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누구나 다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지금 그런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 거예요.”

이어서 오늘 주제에 대해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은 오늘 강의가 마지막입니다. 끝났다는 후련함도 있겠지만 스님이 이야기하는 부처님의 인격을 따라오면서 많은 감동을 받은 터라 더욱 강의에 집중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지난 시간에 부처님이 춘다의 공양을 받고 일종의 식중독 같은 급성 설사를 만났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안 그래도 몸이 쇠약해서 이미 열반을 선언한 상태였는데 식중독까지 일어났으니 어쩌면 열반이 며칠 앞당겨졌다고 볼 수도 있겠죠. 부처님은 카쿠타(Kakuta) 강에서 목욕을 하고 춘다를 위로해 준 뒤에 쿠시나가르(Kushinagar)로 향하셨습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이 ‘가자, 쿠시나가라로!’ 이러시고 마치 낡은 수레가 삐그덕 거리며 천천히 굴러가듯이 앞장서서 걸었다고 표현되어 있어요. 늙고 병든 몸으로 대중의 앞에 서서 당당히 걸어가신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겁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
해질녘에 쿠시나가라 마을에 도착한 부처님은 사라나무 숲에 자리를 깔고 누웠습니다. 사라나무는 우리나라의 미루나무와 비슷합니다. 느티나무처럼 옆으로 퍼지는 게 아니라 위로 쭉쭉 올라가는 나무예요. 느티나무나 보리수 같이 옆으로 벌어지는 나무라면 한 그루 아래에 여러 명이 앉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미루나무처럼 위로만 쭉쭉 자라는 나무라면 한 그루 아래 그늘이 지는 게 아니에요. 그루와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겠죠. 그래서 ‘두 그루 사이에’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사라나무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뜻이에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자리에 누우시자 사라나무에서 하얀 꽃이 피어났어요. 그때가 사라나무 꽃이 필 때가 아닌데 핀 거예요. 우리나라 같으면 ‘동짓달에 꽃이 폈다’, ‘겨울에 꽃이 폈다’, ‘눈 속에 꽃이 폈다’라고 할 만한 일이죠. 알고 보면 별일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약간 신비하게 느껴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입이 벌어진 사람들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는 말없는 의문을 담아 부처님을 바라봤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것은 저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의 열반에 임해서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이것은 제일의 공양은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일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도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가르침에 따라 자기 마음에 괴로움이 없도록 꾸준히 수행 정진하는 거예요. 이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입니다.

왜 이런 시골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아난다여, 나는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열반에 들리라. 그러니 아난다여,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오늘 밤에 여래가 입멸한다. 그러니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오늘 밤에 이곳으로 오라고 해라. 여래가 열반한 뒤에 부처님 살아생전에 뵙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이 없도록 마을에 가서 보고 싶은 사람은 오라고 해라.’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오늘 저녁에 쿠시나가라 숲 속에서 열반에 들겠다고 하니까 걱정스러웠어요.

‘세존이시여, 왜 이런 시골 외진 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부처님의 출가 제자, 재가 제자가 많은 왕사성, 바라나시, 바이샬리에서 열반에 드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난다여,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이곳은 네가 모르는 과거 역사 속에서도 성스러운 곳이었고, 앞으로 먼 미래에도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이 말은 성스러운 곳, 성스럽지 않은 곳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난다가 다시 물었어요.

‘그렇다면 왜 이곳 숲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말라족의 왕족이 사는 왕성에 가서 편안하게 열반에 드시면 좋지 않습니까?’

제자로서 충분히 의문이 들 만하죠.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내가 만약에 왕궁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한다면 왕족들만 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방이 트여있는 이 숲에서 열반에 들면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여래를 친견할 수가 있지 않느냐.’

왕궁에는 천민이 출입할 수가 없잖아요. 부처님께서 숲에서 열반에 들면 브라만이든 왕족이든 천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올 수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짐승들도 올 수 있고 하늘의 신들도 올 수가 있어요. 아무런 제한 없이 자기 마음을 내면 누구나 다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육신을 위해서 더 좋은 음식을 찾아 먹으려 하고, 더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더 편안한 잠자리를 찾느라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부처님을 만나러 오기에 차별이 없고 편안한 곳이 어디인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어요.


아난다는 마을에 가서 부처님께서 오늘 밤에 열반에 드시니 누구든지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사라나무 숲으로 오라는 얘기를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처님이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드신다고 생각하니까 슬픔이 막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가 막 복잡해졌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면 이제는 누구를 의지하고 수행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그래서 저 나무 뒤에 가서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어요. 부처님께서 아난다의 마음을 아시고 다른 사람에게 아난다를 불러오게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 말아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있으리라.’

이제 저희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아난다가 마음을 진정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을 의지하고 수행 정진해 왔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여쭈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념처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념처란 무엇일까요?

첫째, 관신부정(觀身不淨)입니다. 몸에는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더럽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몸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많잖아요.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화장하고 귀걸이하고 목욕시키면서 늘 몸에 끄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민은 부정하다’ ‘귀족은 성스럽다’ 이렇게 사람을 구분 지어 차별했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몸이라는 것은 부정하다고 할 것도 없고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 말은 집착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관수시고(觀受是苦)입니다.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잖아요. 그래서 기분 좋음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말을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즐거움과 괴로움의 반복이라는 뜻입니다. 고락(苦樂)의 윤회가 곧 고(苦)라는 것이 관수시고(觀受是苦)입니다.

셋째, 관심무상(觀心無常)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이 어떻고 네 마음이 어떻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죽 끓듯이 계속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무상한 것이라 믿을 게 못 돼요. 이것이 관심무상(觀心無常)입니다.

넷째,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이것은 진리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인연 따라 모이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일 뿐 모든 존재에는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에도 실체가 없고, ‘진리’라는 것에도 실체가 없고, ‘천하만물’에도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을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이 네 가지를 사념처(四念處)라고 합니다. 남방불교의 수행법을 ‘위파사나’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 존재의 참모습을 늘 새기고 있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가르침이 ‘위파사나’의 핵심이에요. 아난다가 또 물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누가 우리의 스승이 됩니까?’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나의 가르침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말씀이고, 계율이란 것은 바른말과 행동을 뜻합니다. ‘계율이 스승이다’라고 해서 이것을 이계위사(以戒爲師)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으면 나와 같이 있지 않아도 늘 나와 같이 있는 것과 같고, 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내 옆에 있다 하더라도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가 가진 의문이나 우려를 해소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위로의 말을 했어요. 그런데 아난다가 또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합니까?’

장례 절차에 관해서 물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장례 따위는 수행자들이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재가자들이 알아서 그들의 풍습대로 할 것이니 수행자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화장을 불교식 장례법이라고 말하는데, 화장은 문화적 관습일 뿐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인도에는 화장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도 화장을 한 거예요. 만약에 한국에서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면 매장하는 풍습에 따랐겠죠. 풍장 하는 풍습이었다면 풍장을, 수장하는 풍습이었다면 수장을 했을 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든 재가자들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대로 하도록 하고 수행자들은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스님들이 장례 치르는 일을 주업으로 삼다 보니 일반인들이 볼 때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일이 장례 치르는 일로 비춰지는 겁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지런히 수행정진해라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여래가 열반한 후에 '그때 물어볼 걸‘ 이렇게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다. 의문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대중들이 아무 대답이 없자 부처님께서 ‘어려워하지 마라. 벗이 벗에게 묻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물어라’ 이렇게 세 번을 말했지만 아무도 묻지를 않았어요. 그러자 아난다가 말합니다.

‘부처님, 이미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것을 저희는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직 모두 행하지는 못했지만, 그걸 부지런히 행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의문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어요.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한 마디로 옮기면 ‘불방일(不放逸)’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마치 불이 사그라들듯이 조용히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비록 수행을 많이 한 출가 수행자들이었지만 위대한 스승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가누지 못했어요. 마음에 격함이 일어나니까 천안제일 아니룻다가 일어나서 사념처관을 새기도록 격려합니다.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중합시다. 이 몸은 무상한 것입니다. 이 느낌은 괴로움일 뿐입니다. 이 마음은 항상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공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대중의 마음이 다 조용해졌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려움이 많죠.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걸 이루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으니까 괴롭단 말이에요. 그러면 첫 번째로 남한테 좀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살기 바쁘니까 나를 잘 못 도와주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이 해줄 능력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원하면 그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는 어떤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존재는 첫째,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전지전능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원하면 나를 도와줘야 해요. 이런 존재를 사람들은 신(God), 옥황상제, 브라만, 알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불교신자들은 부처님이라고 부르죠. 어떤 이름을 붙이든 관계없이 그분은 능력이 무한해야 하고, 내가 원하면 늘 나를 도와줄 정도로 자비심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이런 존재를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라는 뜻이에요. 이것이 종교의 발상이자 현재 종교의 형태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에이, 그런 존재가 어디 있어? 믿는다고 되나?’ 이렇게 안 믿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욕구를 채워서 행복해지는 길은 끝이 없어요.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내 욕구를 오히려 절제하고 만족할 줄 알 때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내 성질을 자제할 때 오히려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사람은 다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내 중심에서 바라보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면 시비 분별이 일어나죠. 그러나 서로 다르구나’,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할 때 시비가 사라집니다. 이게 다 내가 어리석어서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내 어리석음을 깨우치면 괴로울 일이 없어요. 세상에 수많은 일이 그냥 일어날 뿐이에요.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꽃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하고 맑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할 뿐입니다. 열 번을 원했는데 열 번이 다 될 때도 있고, 열 번을 원했는데 열 번 다 안 될 때도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생은 운명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신적인 존재가 조정하는 것도 아니고, 전생에 지은 과보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냥 일어난 일로 보는 거예요. 지금은 이 일이 굉장한 일 같지만 지나 놓고 보면 별일도 아니에요. 어릴 때는 대입시험에 떨어져서 재수한 게 굉장한 일이었지만, 30년이나 50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별일 아닙니다. 이래도 내 인생이고 저래도 내 인생입니다.

 

 

이렇게 좀 넓은 눈으로, 좀 멀리 보는 눈으로 바라보면 인생사에 별 차이가 없어요. 다람쥐가 여기 사나 저기 사나 토끼가 여기 사나 저기 사나 큰 차이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10년 전에 여행을 가서 여관에 묵었든, 호텔에 묵었든, 비싼 음식을 먹었든, 싼 음식을 먹었든, 지금 생각해 보면 다 한여름 밤의 꿈이에요. 그런데 그 순간에는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싫은 걸 하라면 죽을 것 같죠. 이처럼 순간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면 사는 게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런 도리를 알아서 지혜롭게 살면 크게 괴로울 일이 없어요. 그러면 내가 가진 재능과 에너지를 나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데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는 데 쓰게 됩니다. 나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신 거예요. 괴로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괴로울 일이 없는 목표를 향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한 발 한 발 괴로움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런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의 습관(까르마)이 앞을 딱 가리고 있습니다. 뭘 보고 뭘 생각하든 까르마가 작용을 해서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쳐요. 내가 가진 관념과 지금껏 나를 둘러쌌던 껍질을 좀 벗어나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줄을 알 수 있어요. 이게 수행이에요. 꼭 참선을 하거나 절을 해야 수행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본 관점을 가지고 좀 더 괴로움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법문도 듣고 절도하고 명상도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매일 눈뜨자마자 해야 하는 일

괴로움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여러분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자마자 나는 수행자다이걸 확인해야 해요. 밥 먹는 것보다, 직장 생활보다, 가족이며 남을 돌보는 것보다도 먼저 나를 위한 수행부터 해야 합니다. 수행적 관점을 가지고 밥도 먹고 아이도 돌보고 가족도 돌보고 직장도 가는 거예요. 내가 괴롭다면 가족이며 직장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직장도 나가고 가족관계도 유지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직장 때문에 괴롭다, 가족 때문에 괴롭다, 아이 때문에 괴롭다고 하소연합니다. 괴로우려고 살아요? 그러니 본인부터 먼저 챙기라는 거예요.

 

 

매일 정진을 해야 합니다. 정진을 해도 세상 속에 살다 보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자꾸 물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법문을 들어야 해요. 매주 수행법회에 참석하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매일 세수를 하듯 매일 정진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샤워를 하듯 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듣고, 1년에 한두 차례는 목욕탕에 가서 몸을 좀 불려서 때를 밀듯 수련에 참가해야 해요. 처음에는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그다음은 나눔의 장을 다녀오고, 둘 다 다녀온 사람은 1년에 한두 차례씩 명상 수련을 하는 거예요. 10, 20, 1시간, 이렇게 잠깐잠깐씩 명상하는 것만으로는 자기를 깊이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두 차례는 45일이든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딱 집중해서 자기를 알아차리는 정진을 해나가는 거예요.

 

먼저 수행자로서 삶의 방향이 딱 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뭘 하든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월급을 적게 받아도 괜찮고 많이 받아도 괜찮고, 다른 사람들은 같이 일 못 하겠다고 하는 상사도 나는 괜찮고, 다른 사람은 못 견디겠다고 하는 부하직원도 나는 괜찮고, 시어머니가 잔소리해서 다른 형제들은 다 힘들다고 해도 나는 괜찮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좋지 않을까요?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방법

여러분이 수행자라면 정신 차리셔야 해요.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직장에 의지해서 산다면 어리석은 겁니다. 그렇게 의지해서 사니까 배우자가 죽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자식이 죽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취업을 못해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정신을 못 차리잖아요. 의지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먼저 자립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결혼하는 상대를 보고 나의 반쪽이라고 표현합니다. 반쪽은 반원이에요. 배우자도 반원이고 나도 반원입니다. 둘을 합치면 동그란 원이 되긴 하지만 그 가운데에 금이 딱 가 있어요. 그러니 맨날 싸우는 게 당연하죠. 내가 온전한 원이 돼야 해요. 나도 온 달, 상대도 온 달인데 둘을 딱 겹치면 하나가 되는 거죠. 각자 완전한 상태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가 죽어도 다른 하나는 여전히 온전합니다. 상대가 죽든지 떠나든지 거기에 크게 영향받지 않아요. 하루쯤 섭섭할 수는 있어요. 같이 산 세월이 있으니까 약간은 섭섭하겠죠. 그렇지만 감정의 흔적은 없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흔적이 없는 분이에요. 우리는 흔적이 좀 남더라도 하루 이틀에 끝내야 합니다.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3일장을 하잖아요. 그 이유가 ‘3일까지는 슬퍼하는 모습을 봐주겠다라는 뜻이에요. 49제를 지내는 이유는 그래, 좀 늦게 잡아서 49일까지는 슬퍼하는 모습을 봐주겠다라는 뜻이고요.

 

자식에게 뭘 해주고 남편에게 뭘 해주고 아내에게 뭘 해주고 부모에게 뭘 해드리기 전에 우선 자기한테 잘해야 해요. 자기가 온전해야 어떤 부모, 어떤 자식, 어떤 배우자, 어떤 직장을 만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정작 자기가 여기 가도 못 견디고 저기 가도 못 견디면서 이 직장 탓하고 저 직장 탓하고, 이 사람 탓하고, 저 사람 탓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수행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수행적 관점이 잘 안 잡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이런 처방이 있는 겁니다.

 

하루 중 아침에라도 정신을 좀 차리자. 눈 뜨자마자 아침부터 헤매지 말고, 눈을 떴을 때만큼은 그래도 조금 총기를 유지해 보자.’

 

헤맬 때 헤매더라도 아침에 눈 떴을 때는 좀 총기가 있어야 해요. 아침부터 눈 뜨자마자 아이고, 일어나기 싫어 죽겠다. 직장은 어떻게 가지?’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어떻게 행복하겠어요? 아침에 눈 뜰 때 벌떡 일어나서 총기 있게 시작해도 하루를 지내면서 이거 보고 저거 듣다 보면 또 원래 내 습관대로 돌아갑니다. 하물며 아침부터 인상을 쓰고 흐리멍덩하게 하루를 시작하면 어떻겠어요? 그래서 매일 아침에 눈 딱 뜨자마자 정진부터 먼저 해라. 나부터 먼저 챙겨라라고 하는 거예요. 나부터 챙기고, 그런 다음에 아이도 챙기고 배우자도 챙기고 부모도 챙기고 직장도 챙기고 세상도 챙기는 거예요. 이걸 혼자 알아서 하면 좋지만, 혼자 못 한다니까 같이 하자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면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고, 키가 작아도 행복할 수 있고, 혼자라도 행복할 수 있고, 결혼해도 행복할 수 있고, 배우자가 병석에 누워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사별을 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불행해야 할 이유가 뭐 있어요? 둘이 살 때는 늘 갈등이 있어서 힘들었는데 이제 편하게 살 수 있게 됐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래도 누군가 같이 사는 게 더 나아 보인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되죠. 전에는 처음 만나서 좀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 한 번 살아본 경험도 있겠다, 욕심 안 부리면 갈등이 있을 이유가 뭐 있어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 않겠어요? 젊을 때도 같이 살았는데, 늙으면 살아본 경험도 있으니 못 살 이유가 더더욱 없잖아요. 눈 좀 안 보이면 어때요? 그동안 많이 봤잖아요. 귀 좀 안 들리면 어때요? 그동안 많이 들었잖아요. 뭐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야단이에요? 이런 관점을 딱 가지면 누구나 살아있는 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좋은 일도 자기가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일을 하면 됩니다. 무슨 대단하고 좋은 일을 하겠다고 또 욕심을 내서 못한다고 죄의식을 가져요?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내가 부족하고 어리석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은 조금씩 보완해 나가면 되고, 어리석은 건 깨우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 꾸준히 수행을 해나갑시다.”

 

선정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요건

선정이 되려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 번째, 마음이 편안해야 해요. 마음이 들떠도 안 되고, 침울해도 안 되고, 편안해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하려면 한가해야 해요. 사람의 마음은 한가할 때 편안해집니다. 한가하다는 건 할 일이 없다는 뜻이에요. 특히 명상을 할 때는 아무 할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 할 일이 없다. 할 일을 다 마쳤다.’

 

이런 마음이 되어야 뭘 해야지라는 욕구가 안 일어납니다. 할 일이 없어야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돼요. 아무 할 일이 없는 한가함 속에서 편안함을 유지하는 게 선정의 첫 번째 요소이자 선정의 바탕입니다.

 

그런데 한가하면 망상이 일어나거나 졸음이 와요. 그래서 두 번째, 마음이 한 군데에 딱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편안함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집중이라고 번역합니다. ‘독서삼매(讀書三昧)’라는 말처럼 아이들이 책 읽기에 집중하거나 게임에 집중하듯이 마음이 한곳에 딱 집중이 되어야 해요.

 

세 번째,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한곳에 집중이 된 상태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해요. 이걸 소소영영(昭昭靈靈)’이라고 해요. 분명히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가 멍한 거죠.

 

군대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은 시야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지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엄청나게 긴장을 해야 알아차림이 있죠. 그런데 선정은 이런 것과는 다릅니다. 군대에서 보초를 서는 경우 알아차림은 있지만 긴장이 되어 있어요. 마음이 편안하지가 못합니다. 그렇다면 잔디밭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편안하게 있는 게 선정일까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편안하긴 하지만 멍청한 상태입니다. 집중이 되어 있지 않고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예요.

 

그래서 선정이 되려면, 첫째, 편안한 가운데 한가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둘째, 한곳에 딱 집중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분명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명상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마음을 콧구멍 끝에 딱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집중한 상태에서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문지기가 편안한 가운데 성문 앞을 딱 주시해서 오가는 사람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과 같아요. 긴장한 가운데 알아차리면 그냥 문을 지키는 것일 뿐이고,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리면 문을 지키는 가운데 선정을 닦고 있는 겁니다.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는 어떻게 선정을 닦을 수 있을까요? 그냥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편안한 가운데 바다를 주시하면서 파도가 들어오고 파도가 나가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느끼는 감촉에도 끄달리지 않고, 지나간 과거 생각이나 미래 생각에도 끄달리지 않습니다. 생각에 골똘히 빠져 사색하는 게 아니에요. 생각에 빠지는 게 아니라 파도가 들어오고 나가는 걸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을 선정이라고 합니다. 크면 크고, 작으면 작고, 들어오면 들어오고, 나가면 나가고, 이 상태를 알아차리는 거예요.

 

생각을 멈추면 비로소 알아차려지는 것들

다른 말로는 생각을 멈춘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잘 안 멈춰져요. 수없는 연습을 해야 생각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면 책을 읽을 때 책에 딱 집중이 되고, 상대하고 대화할 때 상대의 대화에 딱 집중이 되고, 운전할 때 운전에 딱 집중이 되고, 일할 때 일에 딱 집중하게 됩니다. 고추를 딸 때 여러분은 빨간 것을 딴다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파란 것도 따고 그러잖아요. 집중을 안 하고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한곳에 딱 집중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선정을 닦는 방법은 마치 운전교습소에서 연습을 하는 것과 비슷해요. 연습할 때는 앉아서 연습하지만, 숙달이 되면 일상생활에서도 딱 집중이 됩니다. 허둥지둥 살면 산란하다이렇게 말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려고 늘 노력하고 애를 쓰면 선정을 닦는다이렇게 말하고, 애쓸 것이 없을 정도로 아무런 집착이 없고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관심을 두면 어디든지 딱 집중이 되고 분명한 알아차림을 유지하게 되면 선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선정바라밀이 되면 힘들다거나 쉬어야 한다는 것이 없어져요. 이것이 가장 잘 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선정을 닦는 것조차도 일삼아합니다. 일을 할 때 힘이 들 듯이 명상도 막 긴장해서 잘하려고 해요. 최고의 휴식이 명상인데, 명상도 일삼아하니까 명상이 끝나면 하루 종일 쉬어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변화가 많은 시대, 지금을 살아가는 방법

기본적으로는 모든 시대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특별히 심해지는 시기가 있어요. 바로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할 때입니다. 첫째, 기존의 일자리에 적합한 기술과 지식을 익힌 사람은 남아도는데 기존의 일자리가 줄어서 일자리가 부족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둘째,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는데, 그 새로운 일자리에 맞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일자리는 있는데 사람이 부족한 경우도 발생합니다. 일의 성격 때문에 사람은 많지만 일자리가 부족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일자리는 많은데 사람이 부족한 경우도 있어요.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에나 찾아볼 수 있어요. 다만 변화의 시대에는 일자리와 일자리를 찾는 사람 사이에 불균형이 더욱 심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변화의 시기입니다. 그렇다고 지금만 변화의 시기인 것은 아니에요. 지금부터 50년 전에도 역시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늘 있던 직업이 많이 없어집니다. 모든 직업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있던 직업이 일부 없어지고 나서 조금 지나면 새로운 직업이 또 생겨납니다. 있던 직업이 없어지니까 기존의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가 없어지고, 또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지만 그 직업에 준비된 사람이 아직 없기 때문에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면 바뀔수록 그 간극이 심해질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혼란을 더 크게 겪을 수밖에 없어요. 다만 그 고통을 줄이려면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즉 복지 정책을 펼쳐서 변화의 시기에 수반되는 일시적인 혼란을 최소화해야 해요. 그리고 변화하는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해서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 사회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과 훈련도 겸해져야 합니다.

미래에는 당연히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구 감소 현상을 보고 너무 불안해 하거나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고 여길 필요는 없어요. 이런 불안감은 과거의 직업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자동화가 심화될수록 기존의 직업은 빠른 속도로 없어집니다. 아이들이 적게 태어나긴 하지만, 아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보다 직업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일자리가 부족한 시기를 거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좀 더 시차를 두고 뒤따라서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생겨납니다. 일정한 혼란기가 지나면 사람들이 훈련과 교육을 받아서 새로운 일자리에 정착하게 돼요. 다만 그 ‘새로운 일자리’라는 게 어떤 일자리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안정된 직장에서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지만 정규직이 못 되거나, 조기 퇴직하거나, 쫓겨나는 것이 사회적인 이슈입니다. 즉, 일하고 싶은데 고용주 측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죠. 그러나 앞으로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정반대 상황이 전개될 겁니다. 회사에서 나가겠다는 사람을 잡는 것이 더 큰 사회적 이슈가 될 수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60세가 넘어서 은퇴하면 뭘 해보려고 해도 너무 늙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5년 정도라도 일찍 회사를 나와야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조기 은퇴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질 거예요. 앞으로는 이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면 나중에는 회사에 취직한 지 10년도 안 돼서 퇴직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자금만 벌면 자기 나름대로 평생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까 사람들의 평균 근무 기간이 짧아지는 거예요. 또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의 직업만 갖는 게 아니라 재택근무와 온라인 기술 덕분에 두 개 내지 세 개의 일을 파트타임으로 하면서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지금은 정규직 일자리가 없다고들 하지만, 10년만 지나면 정규직 일자리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 정규직을 맡아 일할 사람이 오히려 부족해질 거예요.

지금은 회사와 노조가 타협을 해서 동일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에게 저임금을 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이런 비정규직은 물론 없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규직으로 모두 전환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에요. 앞으로는 사회 전체적으로 정규직은 소수가 되고 비정규직과 시간제 노동이 다수가 될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직업에만 종사하는 게 아니라 서너 가지 일을 해서 소위 ‘투 잡’, ‘쓰리 잡’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이런 사회 변화가 꼭 불안정한 사회일까요? 과거와 비교하면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막상 비정규직과 시간제 노동이 일상적인 사회가 되면 하나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인식을 하기 때문이에요. 태어났는데 세상이 모두 이런 식이라면 누구나 그 세상에 적응하게 마련입니다. 변화가 심하게 일어날 때 기존의 것과 비교해서 ‘이게 좋다’, ‘저게 나쁘다’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지, 비교할 바가 없어지면 ‘좋다’, ‘나쁘다’ 하고 말할 근거가 없어져요. 좋고 나쁜 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다들 기후 위기를 말하지만, 과거의 기후에 비해서 나빠졌다고 말할 뿐이지 기후 자체만 보면 그냥 그대로 기후입니다. 다만 기존의 기후에 적응해 살던 인간 종이 기후가 변하면 굉장한 위기에 처하게 되는 건 맞아요. 반면에 변화된 기후에 맞게 진화한 새로운 종의 입장에서는 기후 변화일 뿐이지 기후 위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기후가 바뀌면 생태계를 주도하는 종이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것처럼 인간 사회도 급격한 변화에 따라 세상을 주도하는 그룹이 바뀌는 겁니다. 그러니 변화에 너무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어느 시대와 비교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작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형편이 못 해졌다고 평가할 수 있어요. 그러나 10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사회가 많이 좋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는 괜찮은 사회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사회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다 함께 이 사회를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들어요, 어떡하죠?

저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반야심경 수업에서 모든 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라고 하셨는데요.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 마련인 걸 떠올리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는 구절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둘째, 생이 있으면 멸이 있듯이 태어났으니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죽으면 슬프고,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을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지 않은 사람이요.”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죽음 때문에 두려운 걸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두려운 걸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두려움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 두려움은 사실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질문인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파도가 치는 바다를 떠올려보세요. 바다를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합니다. 파도를 하나씩 관찰을 해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맞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진다라고 말을 해도 되지만, 바다 전체를 보면 물이 출렁거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다 전체의 관점에서는 다만 물이 출렁거릴 뿐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좁은 관점에서 파도를 하나씩 관찰을 할 때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넓게 전체를 보면 생겨난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건 표현에 불과해요.

 

지구 전체를 보면 풀이 나고 죽고, 나무가 나고 죽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게 마치 바다 전체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넓은 관점에서 보면 다만 출렁거릴 뿐 태어났다, 죽었다고 할 게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의 차원, ()의 차원, 위에서 넓게 내려다보는 차원에서는 생긴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좁은 관점에서 보면 개체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넓게 보면 사실 생겨난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는 도리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안 생겨나고 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고 말은 하지만 넓게 보면 굳이 생겨난다고 말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말할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입학과 졸업이 있습니다. 한 과정을 놓고 보면 입학과 졸업을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중학교에 입학하고, 또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건 얼마 전에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크게 보면 이 학교에 다니다가 저 학교에 가고, 또 그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가는 것이지, 사실 입학과 졸업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일상적으로 한 과정에 들어갈 때 입학이라고 말하고, 한 과정이 끝날 때 졸업이라고 말할 뿐이에요. 이건 입학을 안 한다, 졸업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과정을 시작하고 마칠 때 입학과 졸업이라고 이름을 붙이긴 하지만, 크게 보면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옮기는 것일 뿐 입학이라고 할 것도 없고 졸업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이 방에 갔다가 저 방에 갔다가 할 때, 방 하나만 놓고 보면 사람 수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지만 집 전체를 보면 사람 수에 변화가 없습니다. 집 안에서 이 방에 갔다가 저 방에 갔다가 한 거예요. 그러니 좁게 보는가, 넓게 보는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고, 현상으로 보느냐 본질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집니다. 현상에서 보면 생멸(生滅)이라고 말하지만, 본질에서 보면 생이라고 할 것도 없고 멸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경전에서 불생불멸이라는 구절 앞에는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의 관점에서는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말은 모든 법이 공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생하다고 할 것도 없고 멸하다고 할 것도 없고, 깨끗하다고 할 것도 없고 더럽다고 할 것도 없고, 늘었다고 할 것도 없고 줄었다고 할 것도 없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렇게 공()의 차원이 아니라 현상의 차원, ()의 차원에서 보면 생하고 멸하는 게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간다, 온다고도 표현을 하지만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간다고 할 것도 없고 온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의 관점에서 보면 간다고 할 것도 없고 온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래(如來)’ 또는 타타가타(tatha-gata)’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간다, 온다고 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집에서 가족이 화투를 치다가 형이 동생의 돈을 따면 형과 동생은 서로 누가 돈을 잃고 땄는지를 따지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돈이 그 돈입니다. 부모는 집 전체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리니까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돈만 봐요. 자기 호주머니만 쳐다보면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지만, 집안 전체에서 보면 딴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의 관점은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는 말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돈을 잃었고 형이 돈을 땄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넓은 시선에서 보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는데도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적용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자꾸 좁은 범위로 바라봐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좁게 봐 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좁게 보는 거예요. 이런 도리를 배울 때는 알 것 같다가도 갑자기 일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시야가 탁 좁아집니다. 급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늘 지금까지 봐온 관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법문을 들을 때는 진정된 마음으로 넓은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현실에 부딪히면 탁 좁아져서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고 난 다음에 반드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현실 속에서도 자꾸 본질을 보고 넓게 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보리달마(Bodhidharma) 대사는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로 태어나 출가해서 반야다라를 스승으로 법을 계승했습니다. 기록에 따라 정확한 연도는 다르지만 6세기 초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달마대사는 중국 남쪽 광주에 도착했는데 그 당시 이 지역은 양나라 땅이었습니다. 양나라를 다스리던 무제는 인도에서 고승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마대사를 왕궁으로 초대했어요. 양 무제는 불교를 옹호했고 불사를 많이 해서 불교를 부흥시킨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양나라 사람들은 그를 중국의 전륜성왕 또는 중국의 아쇼카왕이라고 칭송했어요. 양 무제는 달마대사를 친견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일생동안 수백 개의 절과 탑을 세웠고, 수 천 명의 스님을 양성했으며, 수 만권의 경전을 번역하고 인쇄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사를 한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황제가 이렇게 물었으면, ‘공덕이 한량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이렇게 답했어요.

 

공덕이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공덕이 없다고 했을까요? 이렇게 지은 공덕은 인연과보로 언젠가는 사라지는 유루복(有漏福)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공덕은 깨달음의 지혜로 얻는 다함이 없는 무루복(無漏福)이에요. 달마대사는 모양과 형상에 집착한 불사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양 무제는 기분이 좀 나빴겠죠. 자신은 불교에 엄청난 지원을 했는데 복이랄 게 없다고 하니까요. 양 무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성스러운 진리는 무엇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가 뭐냐는 질문입니다. 달마대사가 말했습니다.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양 무제가 기가 차서 다시 물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그러자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不識, 불식)

 

우리말로는 모르겠다라고 번역하지만 생각으로 헤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양무제가 화가 나서 대사를 죽이려고 칼을 빼들었어요. 대신들은 외국의 고승을 해치면 황제의 명예에 흠이 된다며 겨우 황제를 말렸습니다.

 

양 무제와 달마대사가 나눈 대화가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런 대화 속에 선의 요지가 들어있어요. 선불교는 국왕의 지원으로 불사를 중심으로 융성했던 불교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다는 얘기죠.

 

달마대사는 양 무제를 만나고 이곳에는 불법이 없구나!’라고 탄식하며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북쪽에는 북위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달마대사는 소림사로 가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늘 벽만 보고 있었다고 해서 면벽 9년이라고도 해요.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달마대사를 찾아왔습니다. ‘달마 권법을 가르쳐 달라’, ‘범어를 가르쳐 달라’, ‘경전을 가르쳐 달라이런 식으로 뭔가 얻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전부였어요.

 

 

그러나 이 법은 구할래야 구할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침묵하고 있으니까 얻으려고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어요. 얻으려고 왔는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니까 다 가버린 거죠. 그런데 오직 혜가라는 승려가 9년을 말없이 같이 살기만 했습니다. 대사가 참선을 하면 같이 참선을 하고, 일을 하면 같이 일하고, 밥을 먹으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대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왜 왔느냐? 무엇을 얻으러 온 것이냐?’

 

저는 안심입명(安身立命)의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얻는다라고 표현했지만 다른 게 아니라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싶어서 왔다는 거예요. 대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네 마음이 어떤데?’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그래? 그럼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놔라. 내가 편안하게 해 줄게.’

 

불안한 마음을 내놓으려면 우선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경전을 뒤진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인도에 간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마음을 살펴야죠. 한참 뒤에 혜가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놓을래야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

 

 

이 문답에서 우리는 ‘눈을 밖으로 돌리지 말라’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법은 마음밖에 있는 게 아니에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란 자기 마음을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불안한 걸 내놓으라고 해서 살펴보니 불안하다고 할 실체가 없었어요. 달마 대사가 ‘내가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라고 해서 혜가 스님이 편안해진 게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을 때 이미 마음이 편해진 거예요.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수행이란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뭔가 지식을 쌓아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수행은 학문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수행을 중시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복을 빌고 선행을 닦는 종교로 발전했습니다. 또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으로도 발전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철학적 지식을 많이 알아도 괴로움이 없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에 치우친 교종을 비판하며 등장한 선()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쪽으로 기울었어요.

 

그래서 정토회는 불교의 본래 가르침인 수행으로 돌아가자라는 종지를 새롭게 세웠습니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대승의 원래 정신인 보살도로, 선의 원래 정신인 수행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수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철학을 공부하자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직접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걸식이 보편적 문화입니다. 수행자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늘 옮겨 다니는 유행(遊行)을 했어요.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이후 선종 제4대 도신대사에 이르러서 한 곳에 머무르면서 수행하는 문화가 형성됐습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인도 문화에 따르면 수행자는 집착을 놓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숲 속이나 산속에 머무르면서 수행을 하려면 음식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것과 마음을 닦는 선이 둘이 아니라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가르침이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선불교에는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노동과 수행이 일치하는 전통이 생겼고, 한국 불교에도 그런 전통이 전해졌습니다. 오늘날 절에서 하는 발우공양은 절 안에서 밥을 지어먹는 대신 얻어먹는 걸식의 형식을 빌려서 하는 공양 방법이에요.

 

대중의 보시에 의하지 않고 자기가 먹을 걸 자기가 생산하니까 선불교는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능하면 스스로 자립하는 선의 전통을 지키려고 해요. 이런 선의 전통은 테라밧다 불교의 전통과는 많이 다릅니다. 테라밧다 스님들은 일체 손도 까딱 안 합니다.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 때문이에요. 본래 부처님께서는 집착하지 않기 위해 걸식을 하라고 가르쳤는데 지금은 마치 양반처럼 어떤 일도 안 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세속살이가 되기 쉬운 위험이 있어요.

 

선종과 달리 교종은 국왕이나 부자들의 보시를 받아 화려하게 융성했어요. 그러나 국가가 불교를 탄압하자 교종은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반면 선사들은 크게 지장을 받지 않았어요. 원래 숲 속이나 지방에서 자급자족하고 살았으니까 불교를 탄압하든 하지 않든 크게 구애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는 오히려 선종이 불교의 주류가 됐어요.”

 

강의는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스님은 다음 시간에는 달마 대사 이후 육조 혜능대사가 어떻게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고 법을 전했는지, 후대에 선불교가 어떻게 전해졌는지 강의할 예정이라고 소개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이후에는 손님들이 연이어 두북 수련원을 찾아왔습니다. 오후 내내 미팅을 계속해서 가졌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30분부터는 육조단경 2강 수업이 이어졌습니다. 정토경전대학 학생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담긴 육조단경의 법문을 한 혜능 대사가 어떻게 출가를 했고, 어떻게 법을 증득했고, 어떻게 법을 전했는지, 전 과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그런 후 육조단경에 있는 문구들을 읽고 스님이 직접 그 뜻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사념(邪念)일 때 번뇌가 이는 것이며

정념(正念)이면 번뇌가 가시는지라.

()와 정() 모두 여의어 쓰지 않을 때

생멸 없는 청정지에 이르렀더라.”

 

이어서 그 뜻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육조단경은 무념의 종지(宗旨)를 가르칩니다. 삿된 생각이나 바른 생각이나 다 생각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각을 탁 놓고 무념(無念)이 되도록 하는 가르침이에요. 삿된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바른 생각도 번뇌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일반적으로 배워온 내용은 나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을 갖고, 나쁜 행동은 하지 말고 좋은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나쁘고 좋은 것이 어젯밤에 꾼 꿈과 같아요. ‘나쁘다’, ‘좋다’ 하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 버려야 됩니다. 이것이 무념의 가르침입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보리는 본래로 이 자성이니

 

스님의 해설이 이어졌습니다.

 

 

“보리란 본래 자기의 성품인데 한 생각 일으키면 그건 벌써 망념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명상을 할 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명상을 할 때 제가 늘 강조하잖아요. 몸도 멈추고, 생각도 멈춰라. 일으키는 생각이 다 망상이니 거기에 의미를 두지 마라.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둬라. 망상은 꿈같고 안개 같고 아지랑이 같은 것이니 오직 호흡에만 깨어 있어라. 호흡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느껴라. 모든 생각을 여의여야 한다. 이 구절은 그런 뜻입니다.”

 

그냥 읽으면 무슨 뜻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육조단경의 마지막 문구는 후대에 법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수평적으로도 널리 전해져야 하지만 수직적으로 후대 사람들에게도 잘 전해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먼 미래를 향해서 법을 이어가려면

전법은 수평적으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는 것과 수직적으로 먼 미래를 향해서 법을 이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수평적 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평적으로 널리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직적으로 저 미래를 향해 법을 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명예에 집착하거나 서로 이익을 다퉈서 근본 법이 훼손되면 대부분 법이 유지되지 않고 얼마 못 가서 대가 끊어져 버립니다. 정토회가 아무리 불사를 많이 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토회 회원이 되고, 정토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아무리 커져도, 근본을 놓쳐버리게 되면 이 법을 먼 미래로 전하지 못하고 30년도 못 가서 흐지부지 끊어져 버립니다.

 

 

당시에는 혜능을 따르는 사람이 소수였고, 신수를 따르는 사람은 백 배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100년을 못 가서 혜능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제자의 제자가 나왔고, 신수의 문하에는 오히려 대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혜능이 더 훌륭한 사람이 돼버린 거예요. 당시에 혜능과 신수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습니다. 혜능은 스승으로부터 계도받지 못하고 밤에 도망을 가야 했어요.

 

여러분들이 집중해야 할 일은 옆으로 전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옆으로 전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법을 미래로 이어갈 수 있도록 법의 종지를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해서 가도 되지만, 저는 그렇게만 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떻든 이 법의 종지를 지켜서 미래로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선종의 가르침입니다.

 

2600년 전 아주 오래된 새길

선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법은 모양과 형체가 없는 것이니까 가장 근본 알맹이는 유지하되 그 나라에 맞게 잘 포장해서 전법을 했다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선불교는 인도적인 문화를 걷어내고 동아시아적인 문화를 잘 수용해서 토착화했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선불교가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조사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불법의 근본을 오히려 잃어버린 게 아니냐고 비판합니다. 부처님은 세상의 평화를 말씀하시고, 계급의 차별을 부정하고,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고, 많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했는데, 선불교는 너무 자신들의 깨달음에만 치우쳐서 세상의 리더십과 중생의 교화력을 잃어버렸다는 거죠. 한마디로 오늘날 환경 문제, 평화 문제, 불평등 문제, 인권침해 문제 등에 대해 무관심하고, 사회적인 실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힘으로 투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회문제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 구체적인 실천을 했습니다. 그에 반해 선불교는 마음에 대해서는 굉장히 꿰뚫어 보는 눈이 있는데, 세상을 보는 눈은 거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불교의 장점은 살리고, 부족한 점은 보완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처님의 일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깊이 공부해야 해요. 부처님의 인격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사람들이 인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인도의 문화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굉장히 심플하게 법을 가르쳤지만,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이 인도 전통의 윤회 사상과 인과응보 사상을 그 속에 담아서 너무나 신비주의적으로 부처님을 묘사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선불교가 이런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걷어내 버렸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파격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정토회도 가능한 갈등을 안 일으키고 가려고 종교의식도 조금 수용하는 등 현실과 타협한 측면들이 있는데, 선불교는 적당하게 타협해서 가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어요.

 

멀리 가려면 법에 맞게 근본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중에게 널리 전하려면 현실을 좀 수용하면서 가야 해요. 이 두 가지를 중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너무 근본적으로만 가면 세상에서 고립이 되고, 너무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세속화되어 근본을 놓쳐버립니다.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조화시켜 나가야 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세상에 법을 전하는 일은 스님이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도 다 스님한테 맡기려고 하잖아요. 세상 속에 사는 여러분들이 전법을 해야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전법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먼 미래에도 이 법이 꽃피울 수 있도록 해나가는 역할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해요. 이렇게 서로 역할 분담을 좀 해야 합니다.

 

한 마디를 하더라도 네 소리를 해봐라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두 번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1의 불교 혁명은 대승불교의 혁명입니다. 대승불교의 혁명이 담긴 경전이 바로 금강경과 반야심경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나서 또다시 학문화되고 철학화되니까 새로운 혁명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2의 불교 혁명인 선불교입니다. 지금 시대는 제3의 불교 혁명이 일어날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문명까지 다 감안해서 인간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듣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자기화하고 경험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선불교는 특히 이것을 더 강조했습니다. 스승의 물음에 경전을 읽고 대답하면 그건 책에 있는 얘기다. 한 마디를 하더라도 네 소리를 해봐라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선불교의 요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명상하고 나서 다리가 아팠어요’, ‘졸렸어요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책에 있는 소리가 아니고 모두 자기가 경험한 소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런 얘기를 해도 스님은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예요. 자기가 경험한 소리를 하니까요. 그런데 어디 가서 들은 소리를 하면 망상 피웠네이럽니다. 선불교는 특히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한 번 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으셨나요?

“경전에는 깨달음이 마치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처럼 묘사가 되어 있지만 부처님께서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됐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으셨나요?
부처님은 출가 후에 스승을 찾아서 배움을 청했으나 본인이 가졌던 의문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탐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스승에게 배우는 시간은 습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스승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울 스승도 없고 자기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부처님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는 동안 피골이 상접하도록 용맹 정진을 했다는 점은 존경할 만합니다. 그러나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시행착오를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 과정에서 부처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쾌락도 수행의 장애가 되지만 고행도 수행의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쾌락을 통해서 해탈을 얻을 수 없듯이 고행을 통해서도 해탈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쾌락을 좇으면 과보가 끊임없이 따르기에 윤회를 할 수밖에 없었고,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을 하면 몸과 마음이 긴장이 되어 편안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어려웠습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모순을 발견하고 쾌락도 고행도 모두 버렸습니다. 즉 두 가지를 다 뛰어넘으셨어요.

부처님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브라만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신에게 빌어서 얻으려고 하는 ‘쾌락주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출가 사문들은 쾌락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욕망을 부정하는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고행주의’를 추구했어요. 부처님은 젊을 때는 브라만교의 가르침을, 출가 후에는 고행의 길을 갔지만, 완전히 해탈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떠나 제3의 길인 중도를 발견하셨습니다. 중도란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욕망이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거예요. 해탈을 얻은 뒤에만 편안한 것이 아니라 해탈을 얻는 과정도 편안한 것을 말해요. 결과만 좋은 것이 아니라 과정 또한 좋은 것을 말합니다. 욕망을 따르는 쾌락주의를 추구한 것도 아니고, 욕망을 참고 인내하는 고행주의를 따른 것도 아니고, 욕망이 욕망인 줄 알아차리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셨습니다. 욕망과 싸우지도 않고, 욕망에 노예가 되지도 않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제3의 길인 ‘중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중도를 발견한 후 부처님은 극심한 고행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네이란자라 강에서 가볍게 목욕을 하고, 수자타가 준 유미죽을 먹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길상초를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49일 동안 선정을 닦는 동안 부처님에게 세 가지 유혹이 나타났습니다. 첫째, 마왕의 세 딸이 유혹을 했어요. 이는 욕망의 뿌리가 남아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망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곧 괴로움임을 꿰뚫어 알고 그 욕망과 싸우지 않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둘째, 마왕의 군대가 나타나 부처님을 공격했어요. 부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켜서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셋째, 마왕이 직접 나타나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자재천왕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나는 바라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며 마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부처님이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해요.


이렇게 자기 내면의 욕망과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후 새벽별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안온해지고 모든 번뇌와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마치 봉사가 눈을 뜨듯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천하 만물은 다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자, 발에 밟히는 모래, 눈에 보이는 나뭇잎, 피부를 스치는 바람, 손에 닿는 차가운 물, 그 어떤 것도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나와 연관되어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라고 특정할 것도 없고, 천하 만물 중에 나 아닌 것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나와 자연의 합일 속에서 안온함을 느낀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7일 동안 법열을 누렸습니다. 마음이 들뜨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요 적정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음을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구나. 이것이 생겨나니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지는구나!’

12연기의 여러 관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지 않고도 알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지 않고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작용도 알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하면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알게 되고, 사람들이 어떤 원인을 지었기에 저런 과보를 받는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인도에서는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다 보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괴로움을 짓고 받으며 아우성치는 것을 모습을 보면서 연민을 느꼈습니다. 이 바른 법을 그들도 알게 된다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 좋은 법을 고통받는 중생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은 성도재일을 맞아 이런 부처님의 삶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계승해 나가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성도재일을 맞아서 불법의 요지인 연기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봤으면 합니다. 성도 이후에 부처님께서 이 법을 전하며 사셨던 모습을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정말 죽을 고생을 하지만, 부자가 된 후에는 큰 집을 짓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러 가지 유희를 즐기지 않습니까? 정치인도 지위를 얻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하지만 이룬 뒤에는 복락을 누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그분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각국 왕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수많은 부자들이 부처님을 지원했는 데도, 그분의 일상은 늘 분소의를 입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며 매일 아침 길거리에 가서 남이 먹다가 버리는 음식을 걸식해서 먹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45년 동안 숨이 멎을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와 같이 살았습니다. 재가 수행자들은 비록 세속에 살면서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더라도 부처님과 승가가 사는 모습을 보며 늘 검소하게 살았어요. 기본적인 생활만 유지하고 남은 것은 아낌없이 승단과 이웃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점점 더 존경하게 되었고, 불법에 귀의하는 불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요. 한 사람에서 시작한 불교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200년도 지나지 않아 인도 사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고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인도 남쪽 일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왕입니다. 아소카왕은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 불교도를 격려하고 그들이 제시한 방향대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왕이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불교를 믿고 받들었으며 인도 대륙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전법사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던 수행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자 무사안일에 빠져 타락의 길로 가기도 했지만, 붓다가 개척한 삶의 원형은 불멸 후 200년까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고 지켜졌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의 정신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 정토행자들은 우리가 정한 원칙을 200년은 고사하고 한 세대, 또는 우리 세대 동안만이라도 제대로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정토회가 처음 출발할 때는 가정집과 사무실, 식당에서 한두 명만 모여도 정성스럽게 법회를 열었습니다. 정토회도 세월이 흐르면서 대중이 늘어나고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불사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처음 출발할 때의 정신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천막을 치고 신앙대회를 하고, 비닐하우스에서 촛불을 켜고 깨달음의장을 진행하던 그 근본정신을 상황이 바뀌더라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요?

물론 정토행자들이 나이가 들고 기력이 떨어지면 그에 맞게 시설도 변경하고 삶의 방식도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붓다의 근본정신을 따르겠다고 한 우리가 스스로 붓다의 삶을 닮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한다고 해도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그저 30년이나 60년 반짝하다 사라져 버린 수많은 신흥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바른 길을 개척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법사님들과 전법활동가 여러분이 더 겸손한 자세로 수행 정진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야 해요. 정토회 회원의 수가 늘어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도부와 중심세력이 신심이 깊지 않고 가치관이 분명하지 않고 실천력이 없다면, 정토회도 그저 수많은 신흥세력 중 하나에 불과해지고 말 거예요. 우리가 이 좋은 부처님의 법을 전 세계로 전파하고, 먼 미래까지 지켜나가려면 지금부터 굉장히 정교하고 알찬 씨앗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부처님의 성도일을 맞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수행력과 전법의 관점을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배려를 한다는 명분으로 자꾸 편리나 안일함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세상과 다름없는 길로 가게 돼요. 기성 불교처럼 갈 바에야 무엇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길을 간다고 하면서 그 난리를 피웠겠습니까? 이미 있는 절의 스님 밑에 가서 공부하고 봉사하면 되지 무엇을 위해서 새삼스럽게 정토회를 만들었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도 늘 다른 종교, 다른 불교, 다른 절과 비교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거예요. 부처님의 제자들이 ‘브라만이 어떻더라’, ‘육사외도가 어떻더라’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고집불통으로 세상과 동떨어지게 살아서도 안 돼요. 세상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정화하겠다고 발원해 놓고 점점 세상에 물들어간다면 그런 발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국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젊은 세대도 그에 맞게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자신만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세대나 외국인들이 자란 환경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러나 수용을 한다고 해서 욕망을 수용하거나 성냄까지 수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공동체로서의 정토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요. 그것은 수용이 아니라 세속화의 길이고 타락의 길입니다. 유연한 태도로 많은 대중에게 전법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칙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속에 동화되어 버릴 위험이 있어요. 부처님은 당시에 엄격한 계급 사회 속에서도 깨달음을 통해 분명한 관점을 얻었습니다.

‘사람에게 귀천이 없다. 계급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남녀에 따라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성별에 의해서 귀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이 분명했기 때문에 세상의 저항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분명한 관점을 갖지 못하면 세상에 휘둘리게 됩니다. 정토행자라고 하는 사람이 굶어 죽는 사람을 돕자는 데 이념을 따지고, 전쟁을 막자고 하는데 이념을 따진다면, 부처님 당시에 계급제도와 성차별을 합리화하고 왕정을 합리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행자라면 세상의 관념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다면 무엇 때문에 수행자라고 합니까? 세상 사람은 원수의 아들이 망하면 기뻐합니다. 수행자는 원수의 아들이라도 그가 배고프다면 먹을 것을 줘야 하고, 그가 헐벗고 있다면 입을 것을 줘야 하고, 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학교에 보내 줘야 해요. 이것이 수행자의 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전법활동가라는 이름만 가질 게 아니라 무엇보다 수행자의 관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부화뇌동하거나 휩쓸리지 말아야 해요. 이런 점을 성도일을 맞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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