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중생을 구제한다는 마음을 어떻게 내죠?
“금강경 전체에서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마음을 먼저 먹어야 한다’라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 법문을 들을 때는 알 것 같다가도, 다시 돌아서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중생을 먼저 구원할 수 있을까? 내가 제일 먼저 구제되어야 하는 중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자꾸 돌아갑니다.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 앞에 꽃이 있죠? 꽃이 지금 예뻐요, 미워요?”
“예뻐요.”
“다시 물어볼게요. ‘그 꽃 참 예쁘다’ 이러면 꽃이 기분 좋아요, 내가 기분 좋아요?”
“제가 기분 좋아요.”
“다시 물어볼게요. ‘꽃이 뭐 이렇게 생겼어?’ 이렇게 짜증을 내면 꽃이 기분 나쁠까요, 내가 기분 나쁠까요?”
“제가 기분 나빠요.”
“이게 마음의 원리입니다. 내가 꽃을 미워하면 내가 기분이 나쁘고, 내가 꽃을 좋아하면 내가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기분 좋으려면 꽃을 예뻐하라는 겁니다. 그게 뭐가 어려워요?
네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행복하니까 남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남을 사랑하면 내가 행복해지는 거예요. ‘우리 아이 너무 좋다’, ‘우리 남편 너무 좋아!’ 이러면 남편이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
“질문자는 그러면 남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남편을 두고 ‘바람이나 피우는 저게 사람이야?’ 이러면 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싶으면 남편을 미워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기분이 좋고 싶으면 남편을 사랑하면 됩니다. ‘제가 행복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니까 ‘남을 사랑해라’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쉽게 비유하면 이런 뜻입니다. ‘저 인간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해가 안 돼!’ 이러면 내 마음이 답답해요, 시원해요?”
“답답해요.”
“그게 아니라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면 누구 마음이 시원해져요?”
“제 마음이요.”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남이 나를 사랑해야 내가 행복하다’ 이렇게 거꾸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사랑 안 해준다고 늘 괴로워합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면 내가 행복할 텐데.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행복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부처님, 어떻게 하면 제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지만 사실은 ‘어떻게 하면 남편이 나를 사랑해 줄까요?’ 이런 질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답은 그 반대입니다. ‘이러저러하게 하면 남편이 너를 사랑해줘서 네가 행복할 거야’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네가 남편을 사랑하면 네가 행복하단다’ 이렇게 대답한 겁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이해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이해하고, 이웃집을 사랑하고, 이웃집 사람을 이해하면, 상대의 괴로움이 아니라 내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마음작용의 이치이자 과학이에요. 실제로 해보면 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데 부처님이며 하느님이 왜 필요해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냥 남편을 사랑하고 이해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를 사랑해달라고 해도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부처님이며 하느님한테 ‘저 인간 나 좀 사랑하게 해 주세요’, ‘아이가 공부 좀 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빌어야 하는 거예요. 남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까 힘 있는 자에게 빌어야 하는 겁니다.
반면에 내가 먼저 사랑하는 건 내가 그냥 하면 되니까 남에게 빌 일이 없어요. 내가 사랑하면 내가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싫으면 미워하면 돼요. 부처님은 ‘사랑해라’, ‘미워하지 마라’ 이렇게 윤리를 가르치지 않아요. ‘네가 행복하고 싶으면 사랑해라’라고 할 뿐입니다. 괴롭고 싶으면 미워하라는 거예요. ‘미워하면 나쁘다’, ‘사랑하면 좋다’ 이런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 괴롭습니다.’
‘왜 괴로울까? 네가 남을 미워하니까 괴롭잖아.’
‘안 괴로우려면 어떻게 합니까?’
‘미움을 버려라.’
불덩어리를 쥐고서는 ‘아이고, 뜨겁습니다!’ 하고 있으니까 ‘놓아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따끈따끈하니 좋은데요’ 이렇게 말하는데 왜 놓으라고 하겠어요? 뜨겁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놓아라’ 하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을 사랑하고, 남을 도와주고, 남을 이해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에게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어요. 여러분이 지금 괴로운 건 사랑을 못 받아서 괴로운 거예요. 사랑을 받고 싶은데 안 해주니까 괴롭고, 도움을 받고 싶은데 못 받으니까 괴로운 겁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강제로라도 끼워 맞추면 될까요? 내 힘으로 안 되니까 ‘부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빌지만 그건 부처님도 해줄 수가 없어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됩니다.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 거꾸로 내가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면 됩니다.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 내가 먼저 사랑해주면 됩니다. 이해해 달라고 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내가 이해해 주면 괴로움이 싹 사라져 버립니다. 얼마나 쉬워요?
그런데도 질문자가 거꾸로 생각하는 이유는 오랜 습관 때문이에요.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에게는 담배 피우는 것보다 안 피우는 게 쉽습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 피우는 게 더 쉽습니다. 원래는 안 피우는 게 피우는 것보다 훨씬 쉬운 거잖아요. 안 피우는 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요. 돈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 없어요.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건 돈도 있어야 하고, 담배도 사 와야 하고, 빼 물어야 하고, 불 붙여야 하고, 빨아야 해요. 재떨이에 재도 털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담배를 안 피우는 게 훨씬 쉽고, 건강에도 좋아요. 그런데도 담배에 중독이 되면 담배 피우는 게 더 쉬워요. 담배 피우는 것이 습관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화내는 게 쉬울까요? 화를 안 내는 게 쉬울까요? 화를 안 내는 게 쉬워요. 그런데도 화내는 게 쉬운 건 화내는 것에 중독이 돼서 그래요.
행복하기가 쉬울까요? 괴로운 게 쉬울까요? 행복하기가 훨씬 쉬워요. 내가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하면 돼요. 사랑하고 이해하면 행복해지니까요. 행복해지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상대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태어나서 그렇게밖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아이고, 나는 담배 안 피우면 못 사는데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요.
부처님 법은 굉장히 쉬워요. 사실 딱히 무엇을 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다 어려워하는 이유는 담배 중독 환자나 아편 중독 환자처럼 탐, 진, 치 삼독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담배 피우면 네 건강에 나쁘다’ 이렇게 자비롭게 얘기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담배 피우면 여러 모로 좋지 않다.’
‘그래도 피우고 싶은데요.’
‘그래? 그럼 담배 피우고 일찍 죽어라.’
피우고 싶으면 피우라는 거예요. 본인이 피우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여러분은 ‘스님이 말을 왜 저렇게 하나’ 하지만, 본인이 하겠다는데 제가 어떡하겠어요? 담배 안 피우면 건강에도 좋고 돈도 안 들고 방도 깨끗하고 다 좋은데도 죽어라고 피우겠다는데, 그걸 어떡해요? 억지로 못 피우게 하면 인권침해라고 하거나 사생활 간섭이라고까지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인권을 존중해서 ‘그래, 피우고 죽어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웃음)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불경을 읽어봐도 사실은 모두 상식적인 얘기예요. 담배를 너무 피워서 목이 따갑다고 하면 담배 끊으라고 말하고,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안 되어 힘들다고 하면 앞으로는 조금 먹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을 읽어보면 다 이런 얘기들이에요. 그런데도 담배를 못 끊겠다고 하는 겁니다.
‘담배를 끊는 게 좋다.’
‘조금만 피우면 안 될까요?’
‘조금만 피우는 것도 나쁘다.’
‘그래도 조금만 피우면 안 될까요?’
‘그래도 건강에 나쁘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자꾸 길어지는 거예요. 원래는 금강경도 1장에 모든 내용이 다 담겨 있는데, 이해를 못해서 계속 설명을 하느라 32장까지 간 거예요. 이해가 됐어요?”
“네.”
“일체 중생을 구제할 마음을 내라는 말은 도움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 주려는 마음을 내라는 뜻이에요. 그러지 않고 ‘남편이 나를 이해 안 해주네!’ 이러니까 괴로운 거예요. 내가 남편을 이해하면 됩니다. ‘꽃이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이러지 말고 내가 꽃을 예뻐해 주면 돼요. 내가 바다를 보고 ‘바다 참 좋다!’ 이러면 내가 기분이 좋지 바다가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산 좋다!’ 이러면 내가 좋지 산이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우리 남편 훌륭하다’ 이러면 내가 좋아요. 훌륭한 사람하고 같이 사니 다른 사람도 나를 존중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 남편은 짐승보다 못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보게 돼요.
‘웃기네. 그럼 저 여자는 짐승보다도 못한 남자와 한 집에 같이 사는 걸 보니 짐승보다 못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네.’
이런 게 자기 얼굴에 침 뱉기예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훨씬 더 적나라하게 얘기해줄 수 있는데, 그러면 여러분이 다 도망가 버릴까 싶어서 그래도 조금 조심스럽게 얘기해 주는 거예요. 오늘은 질문자가 먼저 물었으니까 제가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부처님은 딱 직설적으로 얘기하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습니까?’
‘도움 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 주겠다는 마음을 내라.’
부처님한테 ‘구제해 주세요’ 하지 말고 본인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는 말이에요. 구제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도와주라는 뜻이에요. 남편을 이해하고, 아내를 이해하고, 아이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움을 주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내보세요. 그러면 괴로울 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사랑 안 해줘서’, ‘이해 못 받아서’, ‘도움 못 받아서’ 이런 이유로 상대를 미워하고 괴로워하면서 살아요. 사실은 누군가에게 빌 일도 없어요. 한 생각 딱 바꾸면 끝이에요. 부처님이 금강경 1장에서 말없는 일상으로 이것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수보리가 말로 표현해서 질문을 한 거죠. 부처님은 딱 한 마디로 얘기했어요. 그래도 못 알아들으니까 다시 두 마디를 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요. 그래도 못 알아들으니까 또 두 마디를 하고요. 이렇게 해서 금강경이 점점 길어진 거예요.
다시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가 꽃을 좋아하면 꽃이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제가 좋습니다.”
“그래요. ‘부처님, 제가 좋으려면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물으니까 부처님이 ‘꽃을 보고 예뻐해 줘라’ 이렇게 답하신 거예요. 이게 틀린 말이에요, 맞는 말이에요?”
“맞는 말입니다.”
“어려운 얘기예요, 쉬운 얘기예요?”
“쉬운 얘깁니다.”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이게 사실이에요?”
“사실입니다.”
“직접 해보면 바로 체험할 수 있어요, ‘아, 꽃 예쁘네!’ 이러면 내 기분이 좋잖아요. 바로 체험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나의 가르침은 눈 있는 자라면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눈만 뜨면 알 수 있는 것이지, 부처님 손에 숨겨진 어떤 비밀 같은 건 없어요. 본인이 눈을 감아서 못 볼뿐입니다. 눈만 딱 뜨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해보면 잘 안 되죠? 왜 그럴까요? 어려워서 잘 안 되는 걸까요, 담배처럼 중독이 돼서 잘 안 되는 걸까요?”
“중독이 돼서요.”
“그래요, 중독된 상태라서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더라도 안 되는 자기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자기를 보면 돼요.
‘내가 담배에 중독이 됐구나.’
‘내가 미워하는 게 습관이 됐구나.’
‘내가 화를 내는 게 습관이 됐구나.’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미워하고,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나도 모르게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습관이 돼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습관은 좀 버려야겠죠. 몸에 해로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안 먹어야 해요.
이런 중독된 삶에서 벗어나세요. 여러분은 지금 중독된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음식에 중독돼, 옷에 중독돼, 명품에 중독돼, 향수에 중독돼, 술에 중독돼, 담배에 중독돼, 차에 중독돼, 집에 중독돼, 사람에 중독돼, 얼굴 모양에 중독돼, 이렇게 중독된 상태에서 미쳐서 살아가기 때문에 끝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중독된 것을 한 번 놓아보라는 겁니다. 놓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 좀 차려라’ 이렇게 얘기해도 여러분은 ‘스님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 혼자 사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 이런 얘기나 하죠. 그래서 저도 물어보는 것만 대답하지 일체 간섭을 안 해요. 여러분이 물어보면 그때만 얘기해요. 오늘도 물으니까 할 수 없이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멍청한 물음이 법문이 되는 겁니다.
부처님 주위에 똑똑한 사람만 있었으면 부처님이 설법할 일이 없었겠죠. 다 못 알아들으니까 또 묻고, 그래도 못 알아들어서 또 물으니까 금강경이라는 경전도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부처님이 첫번째 장에서 보여주신 행동을 보고 바로 알아차려 버렸으면 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그렇게 물어준 덕분에 오늘 많은 사람이 법문을 듣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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