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학교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앞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행복학교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공부해서 자기 나라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이렇게 창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복학교는 앞으로 전 세계적인 명품이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전 세계 사람들이 행복학교 프로그램을 배우고 벤치마킹해서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맞게끔 적용하는 시대가 올 거예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 업그레이드를 해나가게 될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세계 문명의 선도자, 앞서가는 사람의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한 시민이었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우리나라를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학교라는 좋은 모델을 만들게 되면, 전 세계가 이런 방향의 마음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 스스로 ‘한 발 앞서가는 사람이다’ 하고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그에 비해 가방을 뭘 들었는지, 화장품은 뭘 쓰는지, 귀걸이는 뭘 걸었는지, 옷은 뭘 입었는지, 이런 건 별로 안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님에게는 옷을 뭘 입었는지, 음식을 뭘 먹었는지가 별로 안 중요합니다. 그것보다 이런 행복학교를 창조하고 세상에 확산시키고, 또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것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둡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을 한 번 바꿔보면 어떨까요? 행복학교 마음편을 공부한 사람은 관계편으로 넘어가고, 관계편을 공부한 사람은 심화과정으로 넘어가고, 심화과정을 공부한 사람은 행복시민이 되고, 행복시민이 된 사람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고, 평화가 더 정착될 수 있게 적극적으로 실천을 해보면 어떨까요? 이런 제안을 드리면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참나가 없다면 불성도 없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비록 어리석어서 괴로움에 빠져 있지만 미혹과 무명을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성(佛性)이 있어서 그걸 발견하면 부처가 되고, 그런 불성은 영롱한 무언가라고 생각하면 이는 힌두교 사상이 됩니다.


모든 사물에는 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가령, 자동차는 움직이기도 하고, 불도 밝히고, 소리도 냅니다. 그런 자동차를 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동차에 어떠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차를 분해하고 나면 자동차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품을 다 모아서 정교하게 조립한 자동차는 움직이기도 하고, 불도 밝히고, 소리도 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마치 그런 작용을 하는 주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지(無智)입니다. 그렇게 착각해서 이 차는 A차, 저 차는 B차 이렇게 실체가 있는 것처럼 분류하지만, 실제로 분해해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부품들이 정교하게 조립되어서 거기에 움직이는 작용, 불을 밝히는 작용, 소리를 내는 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무아(無我)는 ‘자동차가 없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자동차는 존재합니다. 그런 것처럼 나에게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이때 실체가 없으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견(斷見)이고, 작용이 있으니까 여기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견(常見)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견도 아니고 상견도 아닌, 다만 작용이 있고 신의 분신인 ‘아’라는 작용의 주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확연히 깨달으면 괴로워할 일이 없습니다.

교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석을 달고 원리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설명은 주로 대화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언어를 고정화시키고, 언어로 표현된 것에 실체가 있다는 방식으로 사고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불법(佛法)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어떻게 부처가 되는가? 불성을 발견하면 된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마치 우리의 마음속에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어떤 불변적 실체 같은 게 있다는 방향으로 사고가 흘러가버립니다. 지금의 나는 허상이고 진짜 나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힌두교 방식의 믿음입니다.

‘불성’에 대한 질문자의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에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로서의 불교에서는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고, 이 역시 하나의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불성이 있다’ 하는 말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견주어서 해석하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하는 뜻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열반과 해탈에 이르는 것입니다. 열반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뜻하고, 해탈은 자유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누구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미국 사람도, 팔이 하나 없는 사람도, 어릴 때 성추행당한 사람도,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란 사람도 지금, 여기, 사실에 깨어 있으면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남을 위한 일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자기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알고서
자기가 할 일에 전념해야 한다.”

스님이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여기서 ‘남을 위한 일’이란 남을 돕거나 남을 칭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 일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가 할 일’이란 일상적인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수행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수행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
수행자에게는 자기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남을 돕지 말라거나 칭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이유로 자기 정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수행자로서 봉사활동을 해야 하고, 수행자로서 남을 도와야 한다’

제가 평소에도 늘 이렇게 강조하잖아요. 수행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남을 돕기만 하는 사람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괴롭다면 수행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그런 일을 괴로움 없이 해나가는 사람입니다. 괴롭더라도 자기를 돌이켜가며 괴로움을 줄여나가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남을 돕지 않지만 자기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기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은 범부중생입니다. 범부중생은 남에게 도움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남을 돕는 사람은 이보다는 나은 사람인데, 남을 도우면서 괴로워하거나 남에게 의지한다면 좋은 사람이라 불릴지는 몰라도 수행자는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항상 잘 단속하는 가운데 남을 위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소승(小乘)은 남이 수행을 안 하더라도 자기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이고, 대승(大乘)은 자기 수행에만 그치지 않고 남도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구제하는 정성이 얼마나 큰 지를 설명할 때 ‘내 수행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을 돕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내 수행을 안 하면서 남을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을 돕는 것이 내 수행에 지장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돕겠다는 뜻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대승이 갖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괴로워한다면 수행자의 자세를 제대로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면서 괴로워하거나, 결혼생활을 하면서 괴로워하거나, 도를 닦으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밖으로 백만의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장부이다.’

그러니 남을 위하는 일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기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 일’은 집안일이나 일상적인 업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수행’을 의미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수행의 관점을 놓친 것입니다. 항상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하는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수행자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해탈과 열반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 목표를 놓쳐가면서까지 무언가를 한다면 주객이 바뀐 겁니다. 즉 목적과 수단이 바뀐 상황입니다.

수행이란 절하고, 참선하고, 명상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괴롭지 않도록, 헐떡거리지 않도록, 들뜨지 않도록, 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이 수행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마음 관리가 되는 전제 위에서 다른 활동으로 폭을 점차 넓혀가는 것이 좋습니다.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세 단계
오늘 읽은 경전에 나온 표현인 ‘자기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바로 자기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의미합니다. 먼저 자기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 행복은 마음의 들뜸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가꾸는 일에 가장 큰 중심을 두고, 그런 후 다른 일에 의미 부여를 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이 좋아야 합니다. 밥을 굶는 것보다는 밥을 먹는 게 낫고, 집이 없는 것보다는 집이 있는 게 낫고, 옷이 없는 것보다는 옷이 있는 게 낫고, 가족에게 되도록 사고가 안 나는 게 낫고, 몸은 되도록 건강한 게 낫습니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이 불안정한 생활보다 낫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지금 내가 밥 먹고, 잠자고, 옷 입고, 건강하고, 사람들과 원만하게 살아간다고 끝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나중에 밥을 굶는 일이 생기거나, 옷이 없는 일이 생기거나, 집이 없는 일이 생기거나, 건강을 해치는 일이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좋은데 오히려 지금이 원인이 되어 미래에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건 잘못된 삶입니다. 지금의 좋음이 다음에도 좋음을 가져오는 삶이 되어야지, 지금의 좋음이 다음에 불이익을 가져오는 좋음이라면 이 좋음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선 지금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음에 지옥 가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됩니다. 즉, 나중도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유루복(有漏福)에 해당됩니다. 유루복은 언젠가 복이 다해서 바닥이 드러나고 맙니다. 이 두 가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 더 충족되어야 합니다.

셋째,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지고한 복이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끄덕 없고, 입을 것이 없어도 끄덕 없고, 잘 집이 없어도 끄덕 없고, 설령 건강이 안 좋아도 끄덕 없고, 가족 중 누군가 죽는다고 해도 끄덕 없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에 있는 1단계와 2단계는 이 세상에서 두루 원만한 삶입니다. 속세에서의 편안한 삶입니다. 지금이 좋은 줄 알고, 또 지금의 좋음이 다음에도 좋음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의 현명한 자입니다. 3단계는 출세간(出世間)의 삶입니다. 이건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뛰어넘는 삶을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뛰어넘는 길을 가는 지혜로운 자가 바로 수행자입니다.”

제사 때 밥 한 그릇만 올려도 되나요?
“어제가 시아버지 기일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장을 보고 음식을 혼자 하는 저에게 미안하셨는지 시어머니께서는 매번 ‘나 죽고 나면 제사를 따로 지내지 말고 아버님 제사 때 밥 한 그릇 더 올려서 지내면 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되는 건지 여쭙고 싶어서 질문 올렸습니다.”

“네, 그래도 됩니다.” (웃음)


“그렇습니까?”

“네. 자기 좋을 대로 하면 돼요. ‘그래도 시어머님 기일에 맞춰서 따로 지내드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따로 제사를 지내면 되고, 또 시어머니께서 유언을 하셨으니까 시아버지 기일 때 같이 그냥 지내도 됩니다. 귀신은 다 자기 알아서 찾아오니까요. 아무도 안 가르쳐줘도 다 알면 ‘귀신같이 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 말은 귀신은 모르는 게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장소를 바꿔도 알아서 찾아오고, 날짜를 바꿔도 알아서 찾아옵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특히 시어머니께서 제사를 따로 지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시어머니의 뜻이 그러니까 따르면 돼요. 다만 질문자의 마음이 어떤가가 중요하죠. 질문자가 따로 차리기 힘드니까 시어머니 말씀대로 해야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도 되고, ‘그래도 따로 제사를 차려야지’ 하면 따로 차려도 됩니다.

핵심은 정성입니다. 귀신이 실제로 밥을 먹고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추석이나 설은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차례상을 차리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나의 정성입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기일에 정성을 기울여서 그분을 추모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부처님 열반하신 날에 추모하는 것과 같아요. 또 부처님 태어나신 날, 부처님 깨달으신 날도 기념하잖아요.

‘돌아가신 부모님 생신까지는 못 챙기더라도 돌아가신 기일은 챙기고 싶다. 그날 가족끼리 모여서 밥도 같이 먹고, 부모님 은혜도 생각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따로 제사를 차려도 돼요. 그게 힘들면 제사를 하나로 합쳐서 지내고, 지낼 때 시아버지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시어머니도 같이 생각하면 되죠.

그런데 가족들이 모여서 파티처럼 음식을 약간 근사하게 차려서 먹을 때가 일 년에 몇 번 있겠어요? 원래 제삿날이라는 게 조상 핑계를 잡고 요즘 말로 하면 파티를 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신 날이라는 핑계로 집에서 음식을 좀 마련해서 부모님께 드리는 시늉 좀 하고는 가족끼리 둘러앉아서 파티를 하는 날이 제삿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파티할 때는 좀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하면서 제사만 왜 그리 힘들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파티는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드니까 힘이 덜 들고, 제사는 전통적으로 음식 종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힘든 건가요? 그러면 앞으로 차리는 음식의 종류를 좀 바꾸세요. 잘 먹지도 않는 옛날 음식은 차리지 말고, 우리 가족들도 좋아하는 음식 중에 옛날 격식에도 벗어나지 않는 음식 위주로 차려 보세요. 너무 상다리 부러지게 많이 차리지 말고 적절하게 차려서 가족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하고요. 옛날에는 대가족이니까 음식을 많이 차려서 제사가 끝나면 온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거든요. 요즘은 제사 지냈다고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나눠 주지는 않잖아요. 그러니 우리 가족이 먹을 양만 만들어서 부모님을 추모한 후 식사를 하면 돼요.

너무 허례허식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 음식을 3일 동안이나 만들 필요는 없어요. 만약 내일 제사 지낸다고 하면 시장은 오늘 봐 두고 당일 아침부터 좀 준비해서 지내면 되죠. 그렇게 좀 가볍게 생각하세요.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은 부모가 누가 있겠어요? 그건 부모님도 원치 않는 일이에요.”

“네. 저도 사실 제사 음식 준비하는 일이 스트레스이긴 하지만, 제가 만든 음식을 가족들이 모여서 맛있게 먹어주는 게 정말 뿌듯하고 기분이 좋긴 합니다.”

“뿌듯하고 좋은데 왜 스트레스를 받아요?”

“제사 음식 준비가 하루 가지고는 안 됩니다. 메뉴에 혹시 빠진 게 있는지 계속 검토도 해야 하고, 해물 장이며 나물 장 등을 따로따로 봐야 해서 정말 챙길 게 많습니다.”


“음식의 종류를 좀 축소해 보세요. 양도 조금 적게 사고요. 형식을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받으면서 힘들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음식을 조금 적게 차리더라도 ‘오늘이 어머님 돌아가신 날이지.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참 많이 베푸셨어’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는 게 더 중요한가요?”

“네, 정성을 기울이는 게 더 중요하죠.”

“음식보다는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야 해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삿날이나 생일날에 고기를 너무 많이 차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고 축하한다면서 남의 생명을 죽여가지고 생일잔치하는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자기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울면서 남의 생명을 죽여가지고 제사 지내는 게 뭐 그리 이치에 맞겠어요? 그러니 간소하게 차리되 정성을 기울이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돌아가신 부모님 핑계로 우리 가족이 파티를 한다’ 이렇게 좀 가볍게 생각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제사란 마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조상때부터 내려온. 풍습이며
문화이긴 하나 이것이 반듯이 해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다.
형편에 따라 조건에 따라 자기집
나름데로 풍습을 만들어 지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정이있어 지내기 어렵거나 지내기
싫어서 안지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옛날 전통이라 해서 꼭 그대로 지키거나 받아들일 이유는 이니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괴로운데 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이 괴로움이 왜 생겼고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것이 2,600년 전에 살다가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부처님은 전생이 어떻고, 내생이 어떻고, 죽어서 극락에 가는지, 다음 생에는 왕으로 태어나는지. 이런 것에 대해 일절 언급을 안 하셨습니다.

‘불교를 믿으면 복을 받고 다음 생에 좋은 곳에서 태어난다’ 이런 표현은 마치 우리가 자본주의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듯이 당시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당시 인도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끔 하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
그러나 정토불교대학은 지금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과제를 해결해서 앞으로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을 공부하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한 내용이 현실에서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TV에 나오는 야구 선수가 아무리 야구를 잘한다고 해도 나의 건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부처님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마당에 나가서 실제로 한 번이라도 공을 쳐야 내 건강에 도움이 되듯이, 불교대학에서 공부하는 내용도 실제로 경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이렇게 직접 경험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모든 회원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즉,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위해 정진합니다. 이는 남편을 위한 것도 아니고, 아내를 위한 것도 아니고, 재물을 위한 것도 아니고, 눈 뜨자마자 우선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밥을 먹든 남편을 챙기든 아내를 챙기든 아이를 깨우든 회사에 출근을 하든 자기 볼 일을 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매일 1시간 정진하기를 백일 동안 하면 내 모습을 알게 되고, 천일을 하면 ‘나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구나’ 하는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저희는 30년 동안 정진을 해왔습니다. 7월 18일이면 10차 천일결사 중 6차 백일기도를 시작합니다. 천일 중 500일이 지나고 남은 500일 정진을 시작하는 날이니까 여러분도 많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초심자는 혼자서 수행을 하려고 하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도반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미리 하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수행문도 읽고, 절도 하고, 명상도 하고, 그 소감을 도반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수업만 듣지 말고, 일상 속에서의 수행 연습을 꼭 함께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언어로 표현된 것이 절대화 되면 폐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이 물건을 집으려면 손을 펴야 합니다. 그때 ‘손을 펴라’ 하고 말해서 손을 편 건 그 상황에 맞는 행동입니다. 즉, 이건 주먹을 쥐고 있을 때 그것을 뛰어넘는 자유를 향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손을 펴는 것이 진리라고 절대화 하면 이 사람은 오므려야 할 때 다시 못 오므리게 됩니다. 손이라는 건 필요에 따라 오므리기도 하고 펴기도 해야 물건을 집기도 하고 놓기도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집을 때는 손을 오므려야 하고, 물건을 놓을 때는 손을 펴야 합니다.


물건을 집어야 하는데 손을 펴기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손을 오므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물건을 놓아야 하는데 계속 손을 오므리고 있으니까 이 상황에서는 ‘손을 펴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31분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은 누군가에게 손을 펴라고 말할 때 펴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손을 오므리라고 말할 때 오므리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둘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둘 중 어느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 ‘서울에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질문자의 경우 ‘금강경에는 상을 짓지 말라고 하는데 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느냐’ 하고 되묻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겁니다. 즉, 인천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가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동쪽으로만 가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인천에 있는지 수원에 있는지 현재 위치는 고려하지 않고 동쪽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을 짓는 거예요.

대부분의 종교는 성인의 말씀을 절대화 합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위대함은 부처님의 말씀도 절대화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이 질문한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말한 것은 동쪽으로 가도 되고, 서쪽으로 가도 되고, 남쪽으로 가도 되고, 북쪽으로 가도 되는데도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꼭 동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질문한 사람이 인천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이 수원에 사는 사람인 경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해서 진리에 맞는 대응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는 방향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는 말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즉, 어느 한 견해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견해를 고집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앞으로 누가 물어도 동쪽, 서쪽, 남쪽, 북쪽에 대해 말을 하지 말아야 된다’라고 이해한다면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새로운 상을 짓는 겁니다. 상을 짓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상을 또 짓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묻는데 ‘무유정법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갈 길을 묻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야 할 길을 묻는데 자꾸 정해진 길이 없다고만 하면 답답할 수밖에 없죠.


금강경에서 ‘어떤 견해도 짓지 말라’는 말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상을 짓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되고, 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꾸 사람들이 ‘이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반대로 ‘저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다시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저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떤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저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아니다’라는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늘 주어진 상황에서 구체적인 방향이 나오는 것이지 미리 절대화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이고, ‘저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입니다. ‘이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며 읽지 않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이렇게 반응하기가 쉽습니다. ‘이게 아니면 저것이든지, 저게 아니면 이것이든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든지, 이렇게 무엇이라고 정해져야 하지 않느냐?’ 하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관념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유연해지고 늘 상황에 맞는 적절한 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고정화시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空)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공(空)이라는 상을 지으면, 누가 무슨 말만 하면 ‘공(空)이다’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로 공(空)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공(空)이라는 상을 지은 겁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어떤 견해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는 말은 정확히 표현하면 ‘어떤 견해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의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경전의 내용은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유래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기원정사에서 철야정진이 있었다고 해요. 인도는 날씨가 더우니까 법회를 밤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철야법회가 있다’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초저녁부터 정진을 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밤이 깊어지니까 집에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고프다고 힘들어 못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졸려서 못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집에 가서 부인하고 잠자리를 해야 되겠다 하고, 이런 식으로 뭔가 이유를 대고 한 명 한 명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요.

원래는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하고, 또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했다는 거죠. 그리고 남은 사람들마저도 법문 할 때 계속 졸았습니다. 명상할 때도 졸고, 법문 할 때도 졸고, 이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게송을 읊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듣고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법문을 듣고 자기 양식으로 삼아서 생사고해의 바다를 건너서 열반의 세계로 나아간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옛날에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왜 2600년 전에만 출현하고, 지금은 출현하지 않나요?’


만약 부처님이 지금 출현하면 자신도 구제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거죠.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을 부처님인 줄 아는 분이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그냥 밥 얻어먹는 거렁뱅이 정도로 인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인 수행자인 줄로만 인식했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알아보지 못했어요. 소수이긴 하지만 부처님을 알아보신 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행해서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는 큰 이득과 공덕을 쌓았지만,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놓쳤습니다.

부처님이 처음 성도한 후에 어떤 브라만이 지나가다가 부처님께 ‘어떤 것이 성스러운 것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음이 청정한 자가 성스러운 자다’ 하고 대답하니까 그 브라만이 콧방귀를 뀌면서 “흥!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이렇게 말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또 숲을 지나가던 상인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는데, 오직 자기의 재물을 보호하고 자기 목숨을 보호하는 복만 얻으려고 했지 부처님께 법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또 가난한 뱃사공은 부처님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태워달라고 하니까 ‘나는 먹고살아야 되기 때문에 뱃삯을 주면 태워 주겠다’라고 해서 공덕을 쌓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너무 지식이 많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복을 너무 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가 목적하는 바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길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어요.

법문을 듣고 깨우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복을 주는 얘기를 하면 눈이 번쩍 뜨이지만,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지혜롭게 사는 길을 얘기하면 졸리고 잠이 옵니다. ‘여기 있느니 집에 가서 밥이나 먹고, 술이나 한잔 하고, 자는 것이 낫겠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되죠.

그래서 부처님이 오시더라도 부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자기 눈이 있어야 되고,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기 귀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는 눈이 없고 듣는 귀가 없으면 부처님인 줄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수없는 부처님이 내 앞을 지나갔고, 수없는 법문을 들었지만, 나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도 ‘내 아들이다’ 하는 그 생각에 빠져서 부처님의 법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왕은 ‘우리 아들이 훌륭하다’ 하고 자랑삼을 줄만 알았습니다.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잠을 어떻게 자는지, 세상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하는지,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처처에 부처님 아니 계신 곳이 없다
부처님을 알아보려면 어느 정도 자기 눈이 트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인생을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성인이 출현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거나, 스승이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에게 성인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돼요. 그게 없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늘 자기 생각에 빠져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줄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 중에도 어쩌면 그런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내 남편이다’, ‘내 아내다’, ‘내 자식이다’, ‘내 부모다’, ‘내 친구다’ 하는 이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짜증내고 성질낼 줄만 알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열리면, 망나니 같던 아들이, 술 먹는 남편이, 성질내는 아내가, 어느덧 여러분에게 나를 깨우치는 보살로 인식됩니다. 자기 마음이 열리면 천하 만물이 다 부처로 보입니다.

부처가 나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무지와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천하 만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곳곳마다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하는 일마다 불공 아닌 것이 없다)이 되어야 우리의 일상이 ‘평상심이 도(道)이다’ 하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자극에 긴장을 하거나 반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뭇잎이 바람 불면 흔들렸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멈추듯이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정진을 하는 겁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경전에도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을 할 때 마왕의 유혹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왕의 유혹이란 곧 욕망을 뜻합니다. 마왕의 유혹을 받았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문자풀을 입에 물것 같으냐!’

서양 문화에서 항복할 때 백기를 드는 것처럼 인도 문화에서는 ‘항복!’이라고 말할 때 문자풀이라는 것을 입에 무나 봐요. 이 말은 ‘나는 죽어도 항복 안 한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처럼 바로 그런 길에 들어선 겁니다. 자유와 행복을 향한 길을 불교 용어로 ‘해탈과 열반’이라고 해요. 괴로움이 없는 경지를 향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도전장을 내민 겁니다.


이중에 백전백패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90패 또는 80패를 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몇 번 패배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패배했다고 포기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해요. 열 번 넘어지면 열한 번째 일어나고, 백 번 넘어지면 백한 번째 일어나는 게 중요합니다.

명상원에 들어와서 명상을 할 때도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남의 시선에 속박을 받으며 명상을 하게 되는데, 집에서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여러분들은 자기가 자기를 제어해야 합니다. 집에서 혼자 명상을 하기 때문에 잔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잖아요. 자기가 자기를 감독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감독하는 것을 ‘자제'라고 합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을 ‘자각’이라고 합니다. 온라인 명상수련은 ‘자각’과 ‘자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명상원에 들어와서 명상하는 것보다 일시적인 효과는 떨어질 수 있어요. 왜냐하면 명상원에서는 강제로라도 해야 하지만 집에서는 스스로 자제를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도 명상을 지속적으로 하는 데에는 온라인 명상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라인 명상을 통해 혼자서 자기를 자제하는 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심자일수록 대중과 같이 명상을 해서 자기식대로 하는 것을 막아야 해요. 그러나 명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누구에게 의지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법륜 스님의 역할은 여러분들이 다리를 다쳤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와 같아요.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지팡이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다리를 다쳤는데 자기 혼자 걷는다고 지팡이를 집어던진다면 바로 넘어져요. 그러나 다리가 다 나으면 지팡이는 버려야 합니다. 다리가 다 나았는데도 고맙다고 지팡이를 계속 짚고 다니면 사람들이 환자로 알아요. 그러나 언젠가 버려야 할 지팡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지팡이를 버리고 혼자서 걸으면 뒤뚱거리는 움직임을 정상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
방금 아홉 명의 소감문 발표를 들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세 줄입니다.

‘힘들었다.’
‘포기하려다가 하다가 겨우 참았다.’
‘지나고 보니 좋구나.’

제가 소감문을 썼다면 딱 세 줄로 쓸 수 있는 얘기인데 여러분들은 장황하게 한 페이지를 쓰셨어요. (웃음)


여러분은 길들여진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하고, 내가 그 결과를 책임지고, 내가 나를 점검하는 그런 길에 도전장을 내밀고 4박 5일 동안 연습해 본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 갖고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연습해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법륜 스님의 법문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데에 참고 사항이지 법륜 스님의 노예가 되면 안 돼요. 이 모든 부처님의 말씀과 법륜 스님의 법문은 한 마디로 이겁니다.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라!’

법문이 훌륭하다고 해서 ‘나는 법륜 스님만 따라다니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항상 가까이 있어도 나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으면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졸렸네, 안 졸렸네, 됐네, 안 됐네,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연습을 한 번 해봤다는 것이 중요해요. 이번에는 명상 중에 다리를 폈다면 다음에는 안 펴고 해 보고, 이번에는 너무 졸려서 중간에 누워 잤다면 다음에는 졸리더라도 눕지 않아 보는 겁니다. 정신없이 자버리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는 눕지 않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음식이 입에 들어가 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는 음식을 정해진 양 이상을 먹지 않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는 말하지 않는 거예요. 이번에 실패한 건 다음에 또다시 해봅니다. 실패했다고 후회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이 간단하지는 않구나! 그동안 너무 노예로 살았구나!’

다만 이렇게 알면 됩니다. 이걸 알았으니 조금씩 도전해서 점점 주인이 되는 길로 나아가면 됩니다. 위축될 게 아니라 ‘그러니 정말 내가 제대로 해야겠구나!’ 하고 원을 세워야 합니다. 이번 4박 5일이 그런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이제부터 반야심경에 나타난 공(空) 사상의 본격적인 법문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서론의 핵심 사상인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의 이치를 보다 자세하고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는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이 만약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장난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반야경의 핵심만을 뽑아 놓은‘심경(心經)’에서 말이지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의‘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은, 모든 반야경에서 공의 이해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불(不)’이라는 부정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뒤의‘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즉(卽)’을 통해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시간적 관점에서 색이 공(空)하다는 무상(無常)을 설명했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간적 관점에서 무아(無我)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논리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화엄의‘사법계(四法界)’를 잠시 빌린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그리고 있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와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란, 지금은 물질들이 제각기의 인연으로 인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因)과 연(緣)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계, 책상, 혹은 내 사랑하는 연인 등의 물질적 색(色)의 존재도,지금은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반드시 인과 연이 다해 멸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즉,인연생이므로 인과 연이 다하면 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물질적 개념도 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색(色)으로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지금 당장에는 공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부정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이 바로 공이라는 것은, 시계가 공(空)이고, 책상이 공이고,
애인이 공이라는 것이기에 자칫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에서는, 완전히 같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다르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며, 언젠가는 다르지 않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언젠가는 공이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연기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색이라는것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색이란 우리의 사량으로 분별할 수 있는 현상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을 화엄의 사법계(四法界)에서는 사법계(事法界)라고 하며, 공이라는 것은 그 현상계를 유지하고 있는 바탕으로서의 이치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이법계(理法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것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걸림이 없다는 화엄의‘이사무애법계’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이법계와 사법계가 나뉘어 보이지만 즉,공과 색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법계와 사법계가 그리고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시간적인 개념에서 본 무상의 이치를 바탕에 깔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색불이공’만 이야기하면 될텐데, 다시 한번‘공불이색’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반야심경에서는, 색(色), 다시 말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하여, 공(空)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여 현상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부정만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한 쪽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에 다시 한번 현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반야라는 지혜의 안목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자니
우리 범부 중생의 사량으로 어려운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어쨌든, 색이 공이라고 부정을 하고, 그 부정인 공이 다시 색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긍정을 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모두의 극단을 떠난 절대 긍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다음에‘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강한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란 ?

“‘내가 있는데 왜? 무아(無我)’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물의 실체가 있습니까? ‘이게 물이다 ’ 라고 하는 근본 알갱이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의 실체, 즉 물의 근본 알갱이를 조사하려면 물을 한 방울 떠서 쪼개보면 되겠죠. 쪼개고 또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의 알갱이가 수없이 결합해서 물이 된다고
할 때 그 알갱이를 물 분자라고 부릅니다.

이건 더 이상 쪼갤 수가 없다고 했는데, 나중에 이것도 쪼갤 수 있는 방법이 나와서 쪼개보니 더 이상은 물이 아닌게 되어 버렸어요.
물 분자의 분자식은 H₂O인데 그걸 한 번 더 쪼개버리면 H₂와 O₂가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물이 아니에요. 물은 아무리 분해해도 물이어야 할 텐데, 물 아닌 것으로부터 물이 된 겁니다. 이럴 때 우리가 ‘물의 실체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의 작용은 있지만 물의 실체는 없어요.

물은 있지만 물의 실체는 없고, 산소는 있지만 산소의 실체는 없어요. 산소라는 원자가 단독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속에는 양성자가 있고 중성자가 있고 전자가 있었습니다 그걸 더 파고들면 소립자가 결합한 것이에요. 소립자가 지금은 이런 형태로 결합해 있지만 달리 결합해버리면 있던 양성자가 몇 개 밖으로 떨어져 나오거나 몇 개가 더 붙어서 다른 원자가 됩니다. 그것을 실험으로 증명한 게 원자량이 제일 많은 92번 우라늄을 붕괴시킨 거예요. 이게 원자탄에 쓰이는 핵분열입니다. 또 제일 작은 중수소 두 개를 융합시켜버린 게 수소폭탄에 쓰이는 핵융합에요.

고정불변한 원자가 결합하는 것은 화학법칙인데, 이 화학법칙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질량 불변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일정 성분비의 법칙 이런 거 기억나요? (청중 웃음)

그런데 이 핵의 변화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질량 감소가 일어납니다. 물리변화나 화학변화와는 차원이 달라요. 그 감소된 질량은 에너지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E=mc²’이라는 에너지-질량 등가 공식이에요. ‘작용은 하지만 그 안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은 물질계에서는 이미 증명이 다 되었어요.

그걸 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용은 하지만 실체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작용을 하니까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걸 정신세계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결혼해 아이가 있는 여성이 아이와 있을 때는 엄마라 불리고, 남편과 있을 때는 아내라 불리고, 부모님을 만나면 딸이라고 불리고, 절에 오면 신도라고 불리고, 가게에 가면 손님이라 불립니다. 인연에 따라 이리도 불리고 저리도 불려요. 엄마의 작용, 딸의 작용, 아내의 작용, 손님의 작용, 신도의 작용은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중 하나인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엄마 역할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엄마라고만 생각하고, 아내 역할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아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나는 더 이상 아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내 역할을 한 30년 하다가 남편이 죽으면 내가 계속 아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재혼해도 되는데, 자기가 아내라고 생각하니 결혼을 못 하는 거예요. 아내니 딸이니 하는 것은 모두 관계맺음에 의해서 불리는 이름입니다. 역할만 있지 ‘아내’라고 하는 실체는 없어요.

인도에서는 이런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 하늘에는 브라만(Brahman)이라는 신이 있고 내 속에는 아트만(Atman)이라는 작은 신이 있어서 이 둘이 만나 결합하는 것, 즉 범아일여(梵我一如)가 곧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나에게 그런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고 했어요. ‘아트만’에 ‘un’을 붙여서 ‘UnAtman’이라고 한 걸 한자로 옮긴 게 ‘무아(無我)’입니다.

질문자가 방안에 앉아서 ‘내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뭐가 있습니까? (청중 웃음) 몸뚱이가 있다고 대답하겠지만, 그 몸뚱이가 나입니까? 몸은 ‘내 몸’이라고 하지 ‘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생각 역시 ‘내 생각’이라고 하지 ‘나’라고 하지 않아요. 용어를 ‘나의 몸’,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물건’ 이렇게 쓰니까 ‘나’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여겨요. ‘나’라는 것이 있고 나서 그것의 몸, 그것의 생각, 그것의 느낌, 그것의 소유라고 해야 말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뭐예요?”

“모르겠어요.” (청중 웃음)

“그게 뭔지 연구해보세요. 그래서 유명한 선문답에 ‘Who are you?’라는 것이 있습니다.

‘너 누구냐?’
‘아무개입니다.’
‘아무개가 너냐, 너의 이름이냐?’
‘이름입니다.’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 너는 누구냐?’
‘딸입니다.’
‘딸은 네 엄마와의 관계다. 너는 누구냐?’
‘선생님입니다.’
‘그것은 너의 직업이다. 너는 누구냐?’ 

이렇게 우리가 추구해 들어가야 합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서 남편이되고 아들이되고 아빠가되고 손님이되고 기사가되고 일꾼이되고 사장이되고 고모부가되고 조카가되고 사원이되고 직업인이되고 엿장수가되고 할아버지가되고 친구가되고 이렇게 조건에 따라 무엇이든 가능하게 될수있는데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외 다른것이 될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도 연기 무아 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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