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직장에서 한 지점에 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리더십 강의에서 섬기는 리더니 봉사하는 리더니 여러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들었는데 좋은 리더가 무엇인지 막연하게 느껴져요.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도 행복하고 저도 행복한 직장을 만들기 위해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에게 뾰족한 수가 있었으면 법륜스님 강의 열풍이 불어서 온갖 회사나 단체에서 저를 초빙했을 겁니다. 지금 오라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래도 질문을 하셨으니 제가 생각하는 리더에 대해 편안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의 책임자가 되면 책임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어요. 기본 역할은 업무를 사람들에게 분산해서 나눠주고, 그 성과를 수렴해서 상부로 올려주는 일입니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책임자를 세우는 거예요. 예를 들어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팀장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맡기고, 또 팀장들 중 한 명에게 과장을 맡고, 과장들 중 한 명에게 부장을 맡겨요. 이렇게 조직을 구성하는 이유는 백 명을 한 사람이 직접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잡아야 할 두 마리 토끼
책임자가 되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업무를 관리해야 하고, 둘째, 그 업무를 하는 사람을 관리해야 합니다. 업무관리와 인사관리라고 할 수 있겠죠. 책임자가 사람이 좋아서 사람들과 화합만 하다 보면 업무가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책임자가 업무의 효율만 중요하게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빡빡하게 일을 시키면 초기에는 성과가 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지쳐서 다 나가떨어져요. 거꾸로 업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업무도 효율적으로 하고, 사람들과 화합도 해야 해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효율과 화합의 중도를 찾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 비중이 높아지면 나중에는 결국 두 가지 모두 놓칠 수 있어요.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고 싶다면 항상 일의 분산과 수렴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부서원일 때는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책임자는 자기만 열심히 한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니에요. 부서원 전체가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누군가 책임을 져주면 안심을 하고 과감하게 일을 합니다. 반대로 자꾸 책임을 물으면 조심스럽고 소극적으로 일을 하게 돼요. 사람들이 공무원을 보고 복지부동한다고 하는데,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묻다 보니까 발생하는 현상이에요. 주어진 일만 적당히 하고 중간만 가도 되는데, 공연히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면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조직의 분위기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한 개인에게 책임을 너무 과하게 물으면 복지부동하기 쉽고 그렇다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부정부패로 나아가기 쉬워요. 여기에서도 중도가 필요해요.

그래서 책임자가 되면 외부의 바람을 막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서원이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책임자가 책임을 져주지 않고, 책임을 모두 부서원에게 돌려버리면 부서원들이 힘들어해요. 책임을 져주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좋은 의도로 하다가 잘못된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책임져주겠다.’

책임자가 이렇게 책임을 져줘야 사람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책임은 내가 져주되 성과는 부서원에게 돌려줘야 해요. 어떤 책임자는 부서에서 성과가 나면 다 자기 성과로 가져가서 자기가 승진하고, 자기가 상을 받아요. 이러면 부서원은 기운이 빠집니다.

‘우리가 죽어라고 일해 봤자 저 사람 좋은 일 시키는 것 밖에 안 되는구나.’

부서원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책임자가 항상 성과는 나누고, 책임은 짊어져주는 자세를 가져야 부서원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부서원들이 좋은 뜻으로 했는데 결과가 나쁠 때는 너무 문책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인생은 늘 실수할 수도 있고, 실수를 통해서 더 좋은 결과를 찾아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퇴하고 외롭지 않으려면
관공서에서 높은 자리에서 일하다가 은퇴했던 사람들도 가끔 즉문즉설에서 질문을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식 결혼할 때 자기 옛날 부하들이 아무도 안 찾아왔다고 해요. 그분이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앞에서 사람들이 굽신굽신 할 때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자리를 보고 숙이는 거잖아요. 이제 자리가 없어졌으니까 굽신거릴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책임자가 책임자로서 역할을 다 해야 하지만, 밥을 같이 먹거나 사석에서도 책임자로 굴면 안 되는 거예요. 사석에서는 부서원들과 친구가 되고, 공석에서는 딱 공적으로 업무를 해야 해요. 그런데 사석에서 친구처럼 지내다 보면 공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까지 사적으로 처리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사람들과 너무 공적으로만 지내다 보면 밥 먹는 자리에서도 공적으로 대하기 쉬워요. 그러면 나중에 외로워집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관계를 맺어야 나중에 지위가 없어져도 서로 연락을 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돕고 살 수 있어요. 이 정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회원의 활동방향은?


“일반회원의 활동 방향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모두 전환되면 ‘정회원’이나 ‘일반회원’이라는 말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정토회의 창립취지에 동의하면 ‘회원’이 됩니다. 정토회의 창립취지가 뭘까요?

‘우리는 수행자다. 수행자는 수행하고 보시하고 봉사한다.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뜨려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창립취지에 동의를 하면 누구나 정토회의 일원으로 참가할 수 있어요.

회원이 되면 누릴 수 있는 권리
온라인 시대에는 정토회 회원이 되면 ‘수행, 보시, 봉사하라’, 이렇게 권장은 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활동하면 됩니다.

우선 수행 차원에서는 정기적으로 법문을 들을 권리가 생기고, 필요하면 교육 연수를 받을 권리가 주어지고, 명상수련에 참여할 권리도 생기고, 천일결사에 참여할 권리도 생기고, 수련원에 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생깁니다. 이제는 이게 의무가 아니라 전부 권리사항이 됩니다.


회원의 비전
온라인 정토회에서 회원들의 비전을 굳이 말씀드리자면, 첫째, 자신의 수행에 관계된 법문을 온라인으로 집에서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가 원하면 뭐든지 정토회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하면 봉사도 할 수 있고, 원하면 보시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봉사가 권장사항일 뿐이지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셋째, 지역별 수련원에 가서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갖고 있던 ‘절’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확대가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수련원에 가서 숙박을 할 수도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는 등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넓어집니다.

전법 활동가가 되면 주어지는 의무
그렇게 활동하던 중에 ‘나도 전법 활동가가 되고 싶다’ 하고 원이 생기면 신청을 하면 돼요. 전법 활동가는 일정한 인격과 일정한 역량을 갖추고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진행하는 사람입니다. 신청하신 분에게는 전법 활동가에 필요한 자격 요건이 갖추어졌는지 확인합니다. 경전 대학을 졸업했는지, 깨달음의장을 다녀왔는지, 명상수련을 했는지, 천일결사 수행은 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면 교육 및 연수를 받고 나서 일정 기간 스텝으로 참여해서 경험을 쌓은 후 진행자의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진행자로 활동하다가 본인이 바빠서 활동을 못하게 되면 사표를 내면 됩니다. 전법 활동가는 마치 선생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정예화하는 훈련이 필요해요. 온라인 시대에는 지역 법당 중심에서 개인 법당 중심으로, 총무 중심에서 전법 활동가 중심으로 운영의 중심이 옮겨가게 됩니다.”


자발성만으로는 역부족이지 않을까요
“온라인 시대에 정토회는 더욱더 자발성에 기초해서 운영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의 경우를 보면 100퍼센트 저의 자발성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지는 않거든요. 가끔 물러서는 마음도 있었고,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힘이 있었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너무 자발성에만 맡겨두면 가능성이 있는 활동가들이 자칫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하지 않을까요? 활동가를 양성하려면 끌어주는 힘이 되어줄 장치를 마련하는 작업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이에요. 현실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은 오프라인과는 특성이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법당에 나와서 같이 일도 하고 고생도 하다 보니 중간에 활동하고 싶지 않았다가도 또 마음이 바뀌어서 활동을 계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그러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온라인에서는 활동가를 양성하는 방향이 달라져야 해요. 가령 불교대학의 경우, 오프라인에서는 10명이 입학하면 밀착 관리를 해서 5명이 졸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20명을 받아서 8명을 졸업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10명이 입학해서 5명을 졸업하면 50퍼센트입니다. 20명을 받아서 활동가 8명이 졸업하면 40퍼센트입니다. 그러나 졸업생 수를 놓고 보면 5명보다 8명이 훨씬 많죠. 이처럼 온라인은 효율은 조금 떨어지지만 접근성이 넓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손실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더 밀착해서 수행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도록 지원하고 함께하는 측면이 강했지만, 온라인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그중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요. 아무리 우리가 보완을 해도 온라인에서는 활동가를 키워낼 확률이 오프라인일 때보다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은 확률이 떨어지는 대신 양을 크게 늘리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도 전법 활동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컴퓨터를 한 번도 다뤄보지 않았던 60대 보살님들은 온라인 교육을 받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더욱 신경 써서 교육 기간을 늘린다거나 컴퓨터 기본 교육을 좀 받은 다음에 전법 활동가로 참여할 수 있게끔 하면 안 될까요?”

“옛날에 절에 가면 사찰예절을 배웠던 것을 기억나세요? 절은 어떻게 하고, 방석은 어떻게 놓고, 출입은 어떻게 하고, 향이며 초는 어떻게 켜고, 청수를 올릴 때는 어떻게 한다는 사찰예절을 배웠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정토회에서는 불교대학이든 봉사 활동이든 신청하면 온라인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컴퓨터 활용법과 에티켓을 배워야 해요. 어디를 클릭해서 어디에 들어가는지, 검색은 어떻게 하는지, 화상회의는 어떻게 하는지, 음소거는 어떻게 하는지, 이런 것을 전부 훈련받아야 해요.


그러니 아무리 신심이 있고 정토회에 애정이 있어도 이런 기술을 안 익히면 안타깝지만 진행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분들이 있다면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다른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로서 활동하려면 컴퓨터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나누기도 해야 하고, 안내사항도 전달해야 하고, 문서도 보내야 하니까요. 전법 활동가로서 활동하려면 컴퓨터 활용법을 익혀야 해요.

‘아이고, 내가 이 나이에 그거 익혀서 뭐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일을 맡아서 하면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라인 정토회로 바뀌게 되면 모든 기존의 조직을 다 해체되고 가능한 모두 전법의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온라인 현장에서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일이 정토회의 중심 활동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모둠장이다’, ‘내가 지회장이다’, ‘내가 지부장이다’ 이런 지위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가 전법 활동을 하는 것인데, 그중에 필요한 경우에 ‘아, 당신이 당분간 지부장을 좀 해주시오’ 이렇게 요청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는 직급은 큰 의미가 없고, 모든 활동가가 전법사의 역할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각 지부마다 충분히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진 후 마지막으로 스님은 회원들에게 얼마나 이해가 되었는지 물어보고 앞으로 남은 절차를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여러 선택지 중에 어떤 선택을 할 건지는 여러분이 결정하면 돼요. 그러면 방향은 이해가 됐어요? 이해가 됐으면 손으로 표시를 해봐요.”

모두 화면 속에서 오케이 표시를 했습니다.

“좋습니다.”


“충분히 토론하고 의견 수렴도 했으니까, 이제 다음 주에는 진행상의 여러 가지 선택지를 놓고 여러분이 투표를 해주세요. 현재 정토회의 시스템에서는 결정 권한이 전국대의원회의에 있어요. 그러니 대의원들이 대중의 여론을 수렴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우리의 의사를 투표를 통해 표시해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투표한 결과를 첨부한 제안서를 전국대의원회의에 올립니다. 대중의 여론을 참고해서 결정해달라는 뜻입니다. 아직까지는 결정 권한이 전국대의원회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온라인 방식으로 모두 바뀌면 사업의 많은 부분에서 활동 회원들의 결정권이 더욱 커집니다. 지금은 전국대의원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서원행자들이 승인하면 끝나는데, 앞으로는 지부에서 어떤 사업을 결정해도 그 아래에 지회장이나 모둠장이 그 결정을 승인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어떤 안건은 그 아래 회원들 전체의 승인을 받는 식의 절차를 거치도록 시스템이 바뀌게 돼요. 온라인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대중의 직접적 의견을 훨씬 더 많이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려고 합니다.


온라인 시대에 정토회는 전법 활동을 주로 하게 되기 때문에 의사결정이라고 해도 대부분 전법 활동에 관련해서 결정할 일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달리 결정할 게 별로 없어요. 지역별 수련원에서 농사를 어떻게 짓고 이런저런 일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주가 되어 수련원 단위에서 의사결정을 해나가면 됩니다. 회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구조는 지역별 수련원 단위에서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우리가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점차적으로 보충해 나가려고 해요.

 

온라인 정토회를 재창립한다는 마음으로
지금 우리가 의논하는 내용은 지금까지의 오프라인 정토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경험해 온 지역 중심의 정토회를 계속 생각하면서 ‘이건 어떡하냐, 저건 어떡하냐’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내용은 온라인 정토회라는 새로운 정토회를 재창립하는 작업입니다. 이념과 방향은 그대로이지만 모든 회원, 구조, 의무, 조직 방식, 의사결정 방식에서 온라인 정토회를 새로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시야를 좀 더 넓게 가져 주었으면 합니다.”


저녁 7시가 넘어 법회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 8시, 정초법회 (청년)
8시부터는 청년 정회원들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청년들이 모여 공청회를 한 결과를 발표하고, 스님에게 온라인 정토회 개편 방향에 대해 전체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청년은 청년들만 따로 모아 청년특별지부를 구성하지 않고 지역에 편재하면 청년부가 약해질 것 같다고 우려했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은 수행을 가장 우선해서 활동해야 한다고 짚어주었습니다.


“청년부 조건을 35세로 제한하니 여러분들은 답답할 수도 있을 거예요. 30세에 정토회 청년부 활동을 시작하면 정회원이 되었을 때 35세를 넘어버려서 청년부를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저도 그런 실정을 알고 있습니다. (웃음)


수행자들의 모임
그러나 여러분이 청년부에 앞서 한 사람의 수행자이고, 수행자의 모임인 정토회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방향 하에 그렇다면 청년들에게는 불법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해요. 청년부를 더 강조해버리면 정토회가 부차적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청년부 대표 역할을 했던 사람 중에 지금까지 정토회에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한 명의 수행자가 먼저 되는 게 아니고 그냥 활동하는 재미만 추구하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청년부 활동이 끝나게 되면 정토회 활동도 그만두어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수행자로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이고 수행자가 사회를 정화시키는 활동을 하는 것이지 사회 운동을 하기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우리는 수행이 목표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도 함께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읽는 경전에는 아시타 선인의 조카가 부처님을 찾아와 집 있는 곳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성인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깨달음의 길로 가려는 수행자는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런 상황이든 저런 상황이든 마음이 한결같아야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남이 비난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남이 칭찬한다고 해서 좋아서 우쭐대지 않는 것이 평정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가 비난하면 성질이 나고, 누군가가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서 우쭐댑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세 가지 지침
그러나 수행자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욕망을 멀리 떠나야 해요. 오늘 읽은 경전에는 수행자는 욕망을 떠나야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욕망을 떠나게 하기 위해서 수행자에게 부처님이 내린 지침이 세 가지예요.


첫째, 먹는 욕망은 참 뿌리가 깊습니다. 세상에 살 때는 맘껏 먹으니까 자기는 먹는 욕망이 없는 것 같은데, 단식을 하거나, 명상 수련 때 소식을 하거나, 수행공동체에 들어와서 정해진 음식만 먹으면, 무슨 수행자가 저러나 할 만큼 먹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먹는 욕망을 딱 끊어버리게 하기 위해 수행자들에게 걸식을 하도록 했습니다. 걸식을 하는 이유는 먹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입는 욕망입니다. 여러분들은 입는 데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입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수행자들에게 버려진 옷을 주워 입으라고 하셨어요. 음식도 남이 버리는 것을 주워 먹고, 옷도 남이 버리는 것을 주워 입어라는 거예요.

셋째, 자는 욕망이에요. 여러분들은 집 사고, 집 꾸미고, 침대 사는 것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렇게 사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지금도 그렇게 살라고 하면 더 어렵겠지요.

저도 여러분들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의 기준이 딱 여기에 있다는 것만 자각하고 살아도 우리는 삶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아무리 음식을 못 먹어도 얻어먹는 것보다는 낫고, 아무리 옷을 못 입어도 분소의보다는 낫고, 한 방에 여러 명이 자든 어떻게 자든 나무 밑이나 동굴보다는 낫잖아요. 이걸 알면 생활하는데 무슨 불만이 생기겠어요. 이런 자세를 기본적으로 딱 가져버리면 우리는 이 세속적인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유
우리의 삶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자기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과거의 자기 습관을 고집해서 힘든 겁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지금 경제가 더 어려워졌는데도 선진국 사람들보다 어려움을 덜 느끼고 있습니다. 원래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너무 걱정이 돼서 인도 불가촉천민인 둥게스와리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연락을 해 보면, ‘스님, 우리 마을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원래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코로나 사태 덕분에 정부 지원금이 지급되어서 살기가 더 나아졌다고 해요.

그런데 유럽이나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지금 난리잖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난리이고, 못 다니게 한다고 난리입니다. 이것을 보면 어떤 객관적인 상황이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대로 되지 않으니까 죽는다고 난리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렵다 할 때는 어제보다 어렵다는 얘기예요.

둘째, 남하고 비교해서 남보다 어렵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 자체는 큰 불편이 없는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힘든 거예요. 요즘 여러분들이 제일 많이 느끼죠. 지금 월급도 그대로 있고, 집도 그대로 있는데, 요즘 옆에서 ‘부동산이 몇 배로 올랐다’, ‘주식을 사서 어떻다’ 이런 소문을 들으니까 갑자기 본인이 가난해진 것 같잖아요. 주위에 벼락부자가 생겨나니까 나는 벼락 가난뱅이가 된 기분이에요.

이런 게 다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지난날과 비교해서 가난해진 거예요. 결혼 생활이 힘든 이유도 혼자 살 때보다 귀찮아서 그렇고, 이혼을 하거나 사별을 해서 힘든 이유도 같이 살 때보다 외로운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습관을 고집해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가 않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더 근본은 마음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즉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욕망이에요. 욕망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욕망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쁩니다. 좋고 싫음이 늘 있으니까 마음이 널뛰기를 하는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버리면 마음의 널뛰기가 줄어들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서 지금 널뛰기를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의 삶 속에서 오늘 널뛰기를 얼마나 했는지, 평정심을 얼마나 잃었는지, 이런 것을 돌아보면서 하루하루 정진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무엇이 수행일까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자유롭고 행복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자기 생각에 맞기 때문에 정토회를 좋아하는 거잖아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 생각에 맞으면 정토회를 좋아하다가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정토회가 싫어지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면 법륜 스님을 좋아하다가 내 마음에 안 들면 법륜 스님도 싫은 겁니다. 그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살고 있지요. 그러나 그 정도 갖고는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은 마음을 한결 같이 유지하는 거예요. 정토회에 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이유가 뭘까?’ 하면서 궁금해 할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문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수행자가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발전이 가능할까요?

스님의 역할은 대중들에게 정토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법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대중들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어려운 점을 호소하는 것이고요. 여러분은 이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가야 할 길만 너무 강조하면 현실을 외면하게 되고, 현실만 너무 강조하면 가야 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중과 함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길이 더 바른 길인지 항상 연구해야 해요. 그래야 발전이 가능합니다.”

 

 

주말에 정초법회를 더 해 본 후 쟁점사항에 대해 초안을 잡아보고, 다음 주 수행법회 때 전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까지 해보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법회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유 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뭔가 잊어버린 게 있다며 말했습니다.

 

“아참, 깜박 잊고 밥솥에 전원을 안 눌러 놓고 왔어요. 저녁을 굶게 생겼네요.” (웃음)

 

자취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며 한바탕 웃은 후 이어서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1100여 명의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은 따뜻해진 날씨 이야기를 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마치 봄날 같아요. 문경 수련원에 쌓였던 눈도 다 녹았고, 오늘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마치 봄비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게 매섭던 추위도 이렇게 몇 주 만에 봄날같이 따뜻해지듯이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힘들 때는 그 상황이 영원히 갈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별 일 아니에요.

 

그렇다고 추위가 다 지나간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봄이 왔나 싶지만 다시 매서운 추위가 또 몰아닥칩니다. 그래도 지난번 추위보다는 좀 덜해요. 지난번 추위보다 덜 하면 기분 상으로는 견딜 만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상황을 견디고 나니까 이제 영화 5도 정도는 아주 따뜻한 봄날 같은 그런 느낌이잖아요.

 

어려움이 닥쳐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이유

그래서 어려움을 겪어 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심한 어려움을 겪어 보면 오히려 인생살이가 아주 수월해집니다. 108배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3000배를 한번 하고 나면 108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녁에 명상 30분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4박 5일 동안 명상을 하고 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요.

 

 

그래서 어려운 것을 너무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움을 한번 극복하고 나면 ‘세상이란 게 참 별거 아니구나’ 하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어려워서 우리가 어렵다고 느끼는 게 아니에요. 망설이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실은 인생이 힘든 겁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 명이 먼저 죽거나 헤어져서 혼자 살게 되면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데, 사실은 힘들 이유가 없어요. 원래 혼자 살았잖아요. 우리는 늘 이렇게 순간순간 힘들어 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한여름 밤의 꿈과 같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면 인생살이가 별거 아니에요.

 

오늘도 힘들어 죽겠다고 질문들을 하실 텐데, 시작하자마자 스님이 인생살이가 별거 아니라고 해서 질문할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웃음) 그래도 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분노가 치솟는 것이 또 인생이에요. 그럼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이어서 6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빌려간 돈을 못 갚는 시동생에게 나쁜 마음이 일어난다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빌려간 돈을 못 갚는 시동생, 알거지가 되면 좋겠어요

 

“남편이 은행에서 대출한 삼천만 원을 시동생에게 빌려줬습니다. 그 돈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제가 갚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홀가분하게 그 대출금을 갚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한편으로는 그냥 제가 갚자는 마음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동생이 다음 생에는 알거지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나쁜 마음도 일어납니다. 이렇게 마음의 기복이 심한 저 자신도 싫어요.”

 

 

“만약 동생이 교통사고가 나거나 무슨 일이 생겨서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면, 남편이 돈을 줄까요? 안 줄까요?”

 

“줄 것 같습니다.”

 

“동생이 알거지가 된다면, 남편이 돈을 줄까요? 안 줄까요?”

 

“줄 것 같습니다.”

 

“질문자는 계속 시동생에게 돈을 더 줄 궁리를 하고 있네요. 질문자 본인은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얘기를 자꾸 하는데, 스님이 보기에는 돈이 더 나갈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삼천만 원 빌려간 사람이 돈을 벌어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안 갚으면 기분 나빠하는데, 사실은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어요. 잘 사니까 이제 더 이상 돈을 빌려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 사람이 못 살아야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잘 살면 기분이 더 나빠져서 그 사람이 못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떨까요? 만약 내가 삼천만 원을 빌려줬는데도 시동생이 계속 알거지로 산다면, 안쓰러워서 돈을 더 줘야 해요. 그러니 시동생이 빌려 간 돈을 갚든, 안 갚든, 지금 잘 사는 것이 나에게 이익일까요? 못 사는 게 이익일까요?”

 

“스님 말씀을 들으니, 그래도 시동생이 잘 사는 게 이익일 것 같습니다.”

 

 

“그래요. 시동생에게 삼천만 원을 빌려주어서 앞으로는 돈을 빌리러 안 오게 되었다면 그걸로 고마운 거예요. 그리고 시동생은 돈을 빌려 가서 안 갚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큰돈을 빌리러 못 옵니다. 만약에 한 번도 안 빌려 갔다면 급한 일이라면서 1억 정도 빌리러 올 수도 있고, 남편이 결국 빌려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한 번 빌려줬고, 그걸 못 갚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남편이 적은 돈을 줄 수는 있어도 큰돈을 빌려주지는 않을 거예요. 질문자는 더더욱 안 빌려주겠죠. 이렇게 더 큰 손실을 막았기 때문에 길게 보면 손해가 아닙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앞으로 더 큰돈을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있어서 시동생은 더 이상 요청을 못 할 것이고, 요청하더라도 빌려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시동생에게 돈을 줬다고 생각하고 끝내세요. 그게 결코 큰 손해가 아니라는 걸 아시면 됩니다. 삼천만 원에 집착해서 ‘망해라! 거지돼라!’ 하고 기도하는데, 만약 실제로 망하거나 거지가 된다면 돈을 더 줘야 해요. 이해하겠어요?”

 

“네. 이런 역전이 있을 줄 몰랐어요.” (웃음)

 

 

“이치를 알겠죠? 내 돈을 빌려가서 잘 되면 기분이 약간 나쁘지만 그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리고 잘하면 빌려간 돈을 받을 가능성도 조금은 생기게 되고, 안 받아도 더 이상 손해날 일은 없어집니다. 기분이 조금 나쁠 뿐이에요.

 

그렇다고 안 받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속으로는 ‘이제 손해날 일은 없겠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겉으로는 계속 ‘돈 갚아야지?’ 하고 가끔 말해야 해요. 그 말은 진짜 갚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다시는 빌려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이렇게 가끔 말하면 과거에 돈을 못 갚았기 때문에 빌려 달라는 소리를 다시는 못 하게 돼요. 이해하셨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라는 게 아니라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겁니다. 기분 나빠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면 더 큰 손해가 계속 이어집니다. ‘더는 손해날 일은 없다’ 하고 마음에서는 돈 받을 생각을 내려놓고, 대신에 가끔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하세요.

 

‘빌려 간 돈 갚는다고 해놓고 왜 안 주세요? 나 좀 힘든데 좀 주지?’

 

 

이 말은 돈을 달라는 얘기가 아니고 다시는 더 달라는 소리를 못 하게 하는 예방책입니다. 그러다 보면 혹시나 시동생이 알아서 돈을 조금씩 갚을 수도 있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돈을 갚으면 그때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합니다. ‘어려운데 안 잊어버리고 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인사를 해야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지, 싸우면 독심이 생겨서 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리고, 있어도 안 줍니다. 결국 돈도 못 받고 인심도 잃게 돼요.”

 

“네, 스님. 잘 알겠습니다. 솔직히 삼천만 원은 모으기 힘든 돈이라서 자꾸 그 크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돈을 빌려줬다는 것은 그 돈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여유가 된다는 말 아니에요?”

 

“대출해서 주었습니다.”

 

“대출을 했든 어떻게 했든 굶어 죽지 않고 산다는 말 아닙니까?”

 

“어쨌든 맞벌이하고 있으니까 굶어 죽지 않고 살고는 있습니다.”

 

 

“빌려준 사람은 이유가 어떻든 그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얘기이고, 빌려간 사람은 그 돈이 없어서 빌려간 것 아닙니까. 돈을 빌려가서 안 갚은 것만 따지면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나보다 형편이 더 어려워서 빌려간 거예요. 물론 백 명 중 한 명은 사기꾼인 경우도 있지만, 동생도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갚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남의 돈을 빌려 가면 대부분 그 돈을 갚지만, 형제지간에는 돈을 빌려가도 고맙게는 생각하지만 ‘이걸 꼭 갚아야 하느냐’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돈을 빌려주고 나서 원수가 되는 건 대부분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사이입니다. 남과는 원수가 잘 안 돼요. 남과는 반드시 영수증과 보증서를 쓰고 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간에는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걸 갖고 나쁜 놈이라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보면 인간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제간이나 친구 사이에는 돈거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을 주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거래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거래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은 괜찮습니다. 삼천만 원 빌려달라고 한다면 ‘삼천만 원 빌려줄 상황은 안 되고, 네가 어렵다고 하니 오백만 원을 줄게’ 하고 그냥 주면 됩니다. 형제간에는 대부분 빌려줘도 다시 갚기가 어렵고, 계약서도 주고받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중에 재판해봐야 근거도 없어요. 그리고 형제나 친구에게 빌리러 올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빌려봤지만 도저히 안 돼서 마지막에 오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갚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돈거래를 하지 말고 그냥 주라는 겁니다.

 

질문자도 그냥 주었다면 문제가 안 되는데 빌려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러니 그냥 줬다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겉으로는 가끔씩 ‘빌려간 거, 왜 안 주지?’ 하고 웃으면서 얘기하세요.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빌려달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 그렇게 얘기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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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절입니다. 절은 두 가지 종류의 절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목적을 가진 호법 사찰이 있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호국 사찰이 있습니다. 가령 사천왕사는 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직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지은 절이기 때문에 호국 사찰입니다. 이런 호국 사찰은 비록 사찰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종교적으로 보시면 안 돼요. 이런 절은 역사적으로나 국가적인 안목을 갖고 보셔야 합니다. 황룡사 9층 탑도 오직 호국을 위해 지은 겁니다. 주변 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탑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

천룡사도 그런 호국 사찰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때 중국에서 온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이 절을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라고 했다 합니다. 그 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반드시 이 절을 중창해 온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종교적인 목적으로 절을 지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차가 진입할 수 없는 이런 곳은 효용 가치가 전혀 없거든요. 게다가 코로나 사태 이후 정토회는 기존에 있던 법당도 모두 없애고 온라인 방식으로 전부 전환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절을 짓겠다고 할 이유가 없죠.

 

그러나 이곳은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용성 조사님의 예언에 의하면 앞으로 대한민국은 크게 융성하는 나라가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한 국운의 출발이 이곳 천룡사 복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년이 2025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희 은사 스님이신 도문 큰스님은 그 뜻을 이어받아서 이곳 부지를 매입해서 작은 절을 짓고 평생 천룡사 복원을 위해 노력해 오셨습니다.

 

그게 진짜냐 아니냐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기운이 옛부터 서려 있는 곳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호국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니까 혹시 종교적인 의미로만 이 절을 바라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종교적인 이유나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이 절을 복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져서 국운이 융창해질 수 있게 한다는 염원을 갖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스님이 하는 일을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런 뜻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자원봉사도 해주고 있고,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뜻있는 일에 동참한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조선시대 후기에 이 절에 계시던 스님들은 임금이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국의 의미를 담아 묘법연화경을 간행했다고 해요. 저 아래에 큰 창고 유지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단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불경을 간행하는 도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을에서 유생들이 올라와서 이 절에 불을 질러 버렸어요. 그래서 이곳이 폐허가 된 겁니다.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곳

당시에 이 절에 계시던 조실 스님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제작한 종을 보호하려다가 불에 타서 돌아가셨고, 조실 스님을 시봉 하는 스님은 조실 스님을 구하려다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살아남은 그 스님이 이 빈터에서 묵언 정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분을 용성 조사님이 시봉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개벽 사상이 이어져 내려왔던 곳이에요.

 

 

용성 조사님 이전에 그 스승인 혜월 화상은 수운 최제우 선생과 인연이 되어 동학을 창시하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제자인 손병희 선생님과 혜월 화상의 제자인 용성 조사님이 의기투합해서 3.1독립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3.1독립 운동에 기독교가 참여하게 된 것도 사실은 용성 조사님이 손병희 선생님을 설득한 결과입니다. 그 당시 교세로 보면 천도교는 300만의 신자가 있었던 반면 기독교는 아주 미약해서 천도교 입장에서는 기독교와 같이 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용성 조사님이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맙시다. 천도교 혼자서 하면 천도교의 독립운동이 되지 국민운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불교, 기독교와 같이 해야 국민운동이 될 수 있습니다.’

 

윗대 스승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손병희 선생이 용성 조사님의 제안을 선뜻 수용했던 겁니다. 그런 인연이 없었다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겠죠.

 

후손들을 위해 새로운 희망을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모두 숨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록이나 증거를 남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용성 조사님의 공적은 후대에도 그것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도문 큰스님은 평생 동안 용성 조사님의 유훈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이 땅을 구입하고 천룡사를 복원하기 위해 평생 노력해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그 누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이런 땅을 구입해서 보전하려고 했겠습니까. 아마 그 돈으로 절을 지었으면 엄청나게 큰 절을 지으셨을 겁니다.

 

 

저도 도문 큰스님으로부터 천룡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간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저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전법을 하려다 보니까 망설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서 깊은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을 복원하는 일은 우리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저도 결단을 내려서 이 일을 이어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하는 일에 부족함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세대가 후손들을 위해 ‘천룡사 복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징표를 하나 만들어 봅시다. 이곳에는 삼층석탑만 발굴이 되고 다른 것은 아무런 흔적이 없어서 참 안타까웠는데, 얼마 전에 대웅전 터가 발굴이 되면서 굉장한 일이 되었습니다. 발굴을 해보니 대웅전의 모양이 정방형이어서 신라시대 사찰이라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먼 길을 와 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천룡사 부지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산을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가파른데 길이 정비가 안 되어 있어서 좀 위험해요.”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올해 안에 잘 정비해 놓겠습니다.”

 

 

경주 남산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스님이 농사짓고 있는 농장을 함께 둘러본 후 손님들과 헤어졌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18일 행복학교 특강에서 있었던 즉문즉설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점집에 발길을 끊으니 안 좋은 일들이 생겨요

 

 

 

 

 

“저는 20년 넘게 무속인을 찾아다녔습니다.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고 모든 것이 제 어리석음인 줄 깨닫고 얼마 전부터 무속인 집에 발길을 끊고 스님 참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아들이 맹장수술을 하고, 작은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공황장애가 생기고, 남편 사업도 잘 안 풀려요. 집안에 안 좋은 일들이 생기니까 제가 무속인 집에 안 가서 그런가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저희 집 거실에 무속인이 차려놓은 업단지가 있는데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물을 갈고 108배 참회기도를 드립니다. 업단지를 없애자니 겁이 나요. 지금은 저희 집 사당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드리는데 괜찮을까요?”

 

“옛날에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다 하늘이 노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뭄이 들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본처를 놔두고 후궁에게 너무 마음을 뺏겨서 하늘이 노한 탓이니 참회를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가 많이 오거나 안 오는 것이 어떤 남자하고 어떤 여자가 관계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서 일어나는 걸까요? 며칠 전에 최저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져서 35년 만에 최고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관계를 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아니오.”

 

“임금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를 날씨와 연결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가뭄이 들었을 때 임금에게 그런 상소가 올라오는 것은 민심이 떠났다는 거예요. 임금이 평소에 선정을 베풀었다면 가뭄이 들었다고 임금의 행실을 문제 삼지 않았겠죠. 임금이 폭정을 해서 민심이 떠나면 가뭄이 임금 탓이 되는 거예요.

 

만약 남편 사업도 잘 되고, 부부 관계도 좋고, 모든 것이 원만한데 아들이 맹장 수술을 했다면, 그냥 ‘아프구나’라고 생각하지 다른 생각을 안 할 겁니다. 사업만 안 되고 다른 문제가 없다면 ‘경제가 안 좋아서 사업이 잘 안 되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두세 가지가 겹쳐서 일어나면 ‘뭐가 문제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해요. 이걸 징크스라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징크스나 운세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점을 치거나 굿을 하면 심리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굿을 하고 나면 ‘이제 좀 잘 풀리겠지’ 하는 믿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점이나 굿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로 일이 잘 풀리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심리 치료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들 맹장이 터졌으면 수술을 하면 되죠. 죽은 건 아니잖아요. 별로 큰일이 아니에요. 사업이 잘 안 되는 건 지금 사회 전반적으로 경기가 안 좋아서 그렇지 우리 남편 사업만 안 되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요즘 어떤 사업이 잘 된다면, 요행히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서 잘 되는 품목이어서 그렇지, 귀신이 도와주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작은 아들이 공황장애를 겪는다면 아들에게 불안한 심리가 있었기 때문에 발병한 거예요. 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나 어릴 때 엄마가 많이 불안하면 아이에게 이런 증상이 많이 생깁니다. 아니면 아이가 어떤 충격을 받았거나요.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별 거 아니에요. 누가 죽은 일도 아니고 집안이 망한 일도 아니에요. 문제를 삼으면, 신발이 하나 떠내려가도 ‘재수 없다.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길가다가 넘어져도 ‘운수가 안 좋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자가 ‘굿을 한 번 하면 마음이 안정되겠다’라고 생각하면 돈을 들여서 굿을 해도 괜찮아요. 또 굿을 안 해도 돼요. 그건 선택의 문제입니다.

 

저는 굿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거예요. 불상을 모시고 기도를 하나, 업단지를 모시고 기도를 하나, 십자가를 놓고 기도를 하나 아무 차이가 없어요. 불상을 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업단지를 미신이라고 해요.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불상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업단지를 놓는 사람은 십자가나 불상이나 다 외국에서 들어온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며 싸웁니다. 그런데 바위 밑에 가서 절을 하나, 바위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서 부처라고 이름 붙이고 절을 하나, 십자가를 그려 놓고 절을 하나 다 같은 돌이잖아요. 부처님 가르침은 그것이 다 같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업단지를 두고 절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업단지를 치워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업단지를 치울 수준이 안 된다는 거예요. 업단지를 치웠는데 내일 다리가 부러지면, 질문자는 업단지를 치웠기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다리가 부러지면 그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거예요. 다리 다친 것과 업단지를 연관시키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연관을 안 시키면 치워도 돼요. 그런데 질문자는 틀림없이 다리 다친 것을 업단지하고 연관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냥 두고 기도를 하라는 거예요. 업단지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없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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