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수행일까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자유롭고 행복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자기 생각에 맞기 때문에 정토회를 좋아하는 거잖아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 생각에 맞으면 정토회를 좋아하다가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정토회가 싫어지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면 법륜 스님을 좋아하다가 내 마음에 안 들면 법륜 스님도 싫은 겁니다. 그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살고 있지요. 그러나 그 정도 갖고는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은 마음을 한결 같이 유지하는 거예요. 정토회에 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이유가 뭘까?’ 하면서 궁금해 할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문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수행자가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발전이 가능할까요?
스님의 역할은 대중들에게 정토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법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대중들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어려운 점을 호소하는 것이고요. 여러분은 이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가야 할 길만 너무 강조하면 현실을 외면하게 되고, 현실만 너무 강조하면 가야 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중과 함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길이 더 바른 길인지 항상 연구해야 해요. 그래야 발전이 가능합니다.”
주말에 정초법회를 더 해 본 후 쟁점사항에 대해 초안을 잡아보고, 다음 주 수행법회 때 전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까지 해보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법회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유 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뭔가 잊어버린 게 있다며 말했습니다.
“아참, 깜박 잊고 밥솥에 전원을 안 눌러 놓고 왔어요. 저녁을 굶게 생겼네요.” (웃음)
자취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며 한바탕 웃은 후 이어서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1100여 명의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은 따뜻해진 날씨 이야기를 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마치 봄날 같아요. 문경 수련원에 쌓였던 눈도 다 녹았고, 오늘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마치 봄비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게 매섭던 추위도 이렇게 몇 주 만에 봄날같이 따뜻해지듯이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힘들 때는 그 상황이 영원히 갈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별 일 아니에요.
그렇다고 추위가 다 지나간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봄이 왔나 싶지만 다시 매서운 추위가 또 몰아닥칩니다. 그래도 지난번 추위보다는 좀 덜해요. 지난번 추위보다 덜 하면 기분 상으로는 견딜 만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상황을 견디고 나니까 이제 영화 5도 정도는 아주 따뜻한 봄날 같은 그런 느낌이잖아요.
어려움이 닥쳐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이유
그래서 어려움을 겪어 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심한 어려움을 겪어 보면 오히려 인생살이가 아주 수월해집니다. 108배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3000배를 한번 하고 나면 108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녁에 명상 30분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4박 5일 동안 명상을 하고 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요.
그래서 어려운 것을 너무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움을 한번 극복하고 나면 ‘세상이란 게 참 별거 아니구나’ 하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어려워서 우리가 어렵다고 느끼는 게 아니에요. 망설이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실은 인생이 힘든 겁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 명이 먼저 죽거나 헤어져서 혼자 살게 되면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데, 사실은 힘들 이유가 없어요. 원래 혼자 살았잖아요. 우리는 늘 이렇게 순간순간 힘들어 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한여름 밤의 꿈과 같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면 인생살이가 별거 아니에요.
오늘도 힘들어 죽겠다고 질문들을 하실 텐데, 시작하자마자 스님이 인생살이가 별거 아니라고 해서 질문할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웃음) 그래도 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분노가 치솟는 것이 또 인생이에요. 그럼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이어서 6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빌려간 돈을 못 갚는 시동생에게 나쁜 마음이 일어난다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빌려간 돈을 못 갚는 시동생, 알거지가 되면 좋겠어요
“남편이 은행에서 대출한 삼천만 원을 시동생에게 빌려줬습니다. 그 돈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제가 갚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홀가분하게 그 대출금을 갚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한편으로는 그냥 제가 갚자는 마음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동생이 다음 생에는 알거지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나쁜 마음도 일어납니다. 이렇게 마음의 기복이 심한 저 자신도 싫어요.”
“만약 동생이 교통사고가 나거나 무슨 일이 생겨서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면, 남편이 돈을 줄까요? 안 줄까요?”
“줄 것 같습니다.”
“동생이 알거지가 된다면, 남편이 돈을 줄까요? 안 줄까요?”
“줄 것 같습니다.”
“질문자는 계속 시동생에게 돈을 더 줄 궁리를 하고 있네요. 질문자 본인은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얘기를 자꾸 하는데, 스님이 보기에는 돈이 더 나갈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삼천만 원 빌려간 사람이 돈을 벌어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안 갚으면 기분 나빠하는데, 사실은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어요. 잘 사니까 이제 더 이상 돈을 빌려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 사람이 못 살아야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잘 살면 기분이 더 나빠져서 그 사람이 못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떨까요? 만약 내가 삼천만 원을 빌려줬는데도 시동생이 계속 알거지로 산다면, 안쓰러워서 돈을 더 줘야 해요. 그러니 시동생이 빌려 간 돈을 갚든, 안 갚든, 지금 잘 사는 것이 나에게 이익일까요? 못 사는 게 이익일까요?”
“스님 말씀을 들으니, 그래도 시동생이 잘 사는 게 이익일 것 같습니다.”
“그래요. 시동생에게 삼천만 원을 빌려주어서 앞으로는 돈을 빌리러 안 오게 되었다면 그걸로 고마운 거예요. 그리고 시동생은 돈을 빌려 가서 안 갚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큰돈을 빌리러 못 옵니다. 만약에 한 번도 안 빌려 갔다면 급한 일이라면서 1억 정도 빌리러 올 수도 있고, 남편이 결국 빌려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한 번 빌려줬고, 그걸 못 갚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남편이 적은 돈을 줄 수는 있어도 큰돈을 빌려주지는 않을 거예요. 질문자는 더더욱 안 빌려주겠죠. 이렇게 더 큰 손실을 막았기 때문에 길게 보면 손해가 아닙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앞으로 더 큰돈을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있어서 시동생은 더 이상 요청을 못 할 것이고, 요청하더라도 빌려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시동생에게 돈을 줬다고 생각하고 끝내세요. 그게 결코 큰 손해가 아니라는 걸 아시면 됩니다. 삼천만 원에 집착해서 ‘망해라! 거지돼라!’ 하고 기도하는데, 만약 실제로 망하거나 거지가 된다면 돈을 더 줘야 해요. 이해하겠어요?”
“네. 이런 역전이 있을 줄 몰랐어요.” (웃음)
“이치를 알겠죠? 내 돈을 빌려가서 잘 되면 기분이 약간 나쁘지만 그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리고 잘하면 빌려간 돈을 받을 가능성도 조금은 생기게 되고, 안 받아도 더 이상 손해날 일은 없어집니다. 기분이 조금 나쁠 뿐이에요.
그렇다고 안 받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속으로는 ‘이제 손해날 일은 없겠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겉으로는 계속 ‘돈 갚아야지?’ 하고 가끔 말해야 해요. 그 말은 진짜 갚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다시는 빌려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이렇게 가끔 말하면 과거에 돈을 못 갚았기 때문에 빌려 달라는 소리를 다시는 못 하게 돼요. 이해하셨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라는 게 아니라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겁니다. 기분 나빠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면 더 큰 손해가 계속 이어집니다. ‘더는 손해날 일은 없다’ 하고 마음에서는 돈 받을 생각을 내려놓고, 대신에 가끔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하세요.
‘빌려 간 돈 갚는다고 해놓고 왜 안 주세요? 나 좀 힘든데 좀 주지?’
이 말은 돈을 달라는 얘기가 아니고 다시는 더 달라는 소리를 못 하게 하는 예방책입니다. 그러다 보면 혹시나 시동생이 알아서 돈을 조금씩 갚을 수도 있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돈을 갚으면 그때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합니다. ‘어려운데 안 잊어버리고 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인사를 해야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지, 싸우면 독심이 생겨서 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리고, 있어도 안 줍니다. 결국 돈도 못 받고 인심도 잃게 돼요.”
“네, 스님. 잘 알겠습니다. 솔직히 삼천만 원은 모으기 힘든 돈이라서 자꾸 그 크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돈을 빌려줬다는 것은 그 돈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여유가 된다는 말 아니에요?”
“대출해서 주었습니다.”
“대출을 했든 어떻게 했든 굶어 죽지 않고 산다는 말 아닙니까?”
“어쨌든 맞벌이하고 있으니까 굶어 죽지 않고 살고는 있습니다.”
“빌려준 사람은 이유가 어떻든 그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얘기이고, 빌려간 사람은 그 돈이 없어서 빌려간 것 아닙니까. 돈을 빌려가서 안 갚은 것만 따지면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나보다 형편이 더 어려워서 빌려간 거예요. 물론 백 명 중 한 명은 사기꾼인 경우도 있지만, 동생도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갚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남의 돈을 빌려 가면 대부분 그 돈을 갚지만, 형제지간에는 돈을 빌려가도 고맙게는 생각하지만 ‘이걸 꼭 갚아야 하느냐’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돈을 빌려주고 나서 원수가 되는 건 대부분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사이입니다. 남과는 원수가 잘 안 돼요. 남과는 반드시 영수증과 보증서를 쓰고 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간에는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걸 갖고 나쁜 놈이라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보면 인간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제간이나 친구 사이에는 돈거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을 주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거래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거래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은 괜찮습니다. 삼천만 원 빌려달라고 한다면 ‘삼천만 원 빌려줄 상황은 안 되고, 네가 어렵다고 하니 오백만 원을 줄게’ 하고 그냥 주면 됩니다. 형제간에는 대부분 빌려줘도 다시 갚기가 어렵고, 계약서도 주고받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중에 재판해봐야 근거도 없어요. 그리고 형제나 친구에게 빌리러 올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빌려봤지만 도저히 안 돼서 마지막에 오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갚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돈거래를 하지 말고 그냥 주라는 겁니다.
질문자도 그냥 주었다면 문제가 안 되는데 빌려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러니 그냥 줬다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겉으로는 가끔씩 ‘빌려간 거, 왜 안 주지?’ 하고 웃으면서 얘기하세요.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빌려달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 그렇게 얘기하세요.”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