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온라인 전환은 정토회가 처음 출발할 때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변화의 시기에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강조했습니다.

 

다시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로

 

“이제 정토회는 온라인이라는 기술과 결합하면서 ‘내가 사는 곳이 법당이다’ 하는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원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원칙에 더 맞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간을 마련하고 법당을 꾸미면서 어느덧 우리는 기존의 불교를 조금씩 닮아가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 아닌 스님이 되고, 절 아닌 절이 되는 구조로 점점 변화되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방향으로 오히려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수행자로서 자기 수행을 하면서 자기가 사는 주변부터 전법하는 이런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겁니다. 부처님의 전법 선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고 홀로 가라.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해라’

 

사회나 집단의 발전 정도를 평가하는 방법

여러분들은 정토회의 미래를 짊어진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오늘은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 나라가 처음 발전할 때, 한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릴 때, 한 나라가 쇠망할 때, 각각 지도력이 어떻게 다른가 살펴보겠습니다.

 

 

한 나라가 발전을 할 때는 지도자 그룹이 대중보다 앞을 내다봅니다. 그래서 대중이 지도자 그룹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도자 그룹은 미래를 보고 끊임없이 새로운 안을 제안하고 준비하는데 대중은 현실의 문제만을 갖고 계속 얘기하니까 여기에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절대적 지지를 받지는 못해요. 이렇게 지도자는 대중의 의사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뒤로 숨어서는 안 됩니다. 앞을 내다보면서 비록 지금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한 발 앞서 나가야 합니다. 사회지도층이 이렇게 할 때 그 사회는 성장하고 많은 부분이 재창조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어느 정도 성장을 하게 되면 대중도 의식이 올라오는 국면에 진입합니다. 그런 사회를 보통 태평성대라고 하는데 그때는 선각자들이 이루어놓은 성장의 과실을 먹고사는 거예요. 이때는 지도자가 대중의 뜻을 받들어서 대중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그래서 대중의 지지는 굉장히 높지만, 성장은 멈추게 돼요. 꼭 경제적 성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성장이 멈추고 사회가 정체됩니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쇠퇴할 때는 지도자 그룹이 대중보다 의식 수준이 떨어져서 대중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성장기에는 대중이 지도자 그룹에 불만이 있다가도 조금 있으면 해소가 되는 것을 반복했다면, 쇠퇴기에는 갈수록 불만이 커져요. 대중을 끌고 가는 힘도 없고, 심지어 대중보다 지도자 그룹이 뒤처집니다. 그래서 대중이 볼 때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지도자 그룹이 하게 됩니다.

 

꼭 경제적인 척도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자 그룹이 어떠한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지금 발전 국면에 있는지 정체 국면에 있는지 쇠퇴 국면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대중보다 앞서가는지, 대중과 같이 가는지, 대중보다 많이 뒤처지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면 됩니다. 대중이 봐도 이해되지 않는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쇠퇴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에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

 

그래서 여러분들도 대중의 여론을 항상 수렴해야 하지만 대중의 여론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반해서 가도 안 되지만, 거기에 안주해도 안 됩니다. 대중의 의사를 그대로 반영해서 할 바에야 대의제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전 회원이 투표해서 결정하면 되지 굳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뽑아서 대의제도를 둘 필요가 없잖아요. 또 회원들의 의사를 대변하라고 여러분들을 뽑아 놓은 것인데 여러분들이 거기에 반해서 엉뚱하게 간다면 그것 또한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중들의 뜻을 그대로만 반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중의 뜻을 고려하되 대중보다 한 발 앞서가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 국면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현재 우리가 하는 행위를 보면, 발전 국면에 있는지, 정체 국면에 있는지, 쇠퇴 국면에 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 또는 단체를 이끄는 리더들이 회원의 수준보다 조금 앞서가는지, 같이 가는지, 뒤에 가는지를 보면, 어느 국면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정토회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니까 어리둥절한 국면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가능하면 대중의 낙오가 적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변화 국면에서는 한 명도 낙오가 없도록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낙오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낙오를 최소화할 것이냐?’ 그리고 ‘안전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이렇게 접근해야지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갈 길을 못 간다면 변화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게 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여러분들이 회의를 하시면 좋겠어요. 충분하게 논의해보니 아직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면 변화를 보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방향이 정해졌고, 여론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서 결론이 났다면, 신속하게 재편하고 집행을 하는 것이 길게 봤을 때 더 좋게 평가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때 그렇게 재편하길 잘했다’, ‘빨리 재편하기를 잘했다!’ 이렇게 평가하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직위가 없어질까 봐 걱정이 된다면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 정토회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고 정토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니까 자기 개인의 거취나 개인적인 이해관계, 또는 살아온 습관에 너무 안주하면 진취적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내려놓고 어떻게 하면 정토회가 좀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공청회를 여러 번 해보니까 대중들 중에는 마음속에 마치 회사가 구조조정을 해서 실직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분들이 일부 있는 것 같아요.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딱 버리셔야 합니다. 원래 내가 정토회에 처음 참여할 때는 수행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두 가지예요.

 

첫째,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전법입니다. 다만, 어린아이들이나 장애우, 극빈자, 이런 사람들은 법을 배워서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전법을 넘어서서 그들을 보살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환경을 보존하는 활동을 비롯해 공동체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이 땅에 실현해야 할 사회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한가?’입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도 이 좋은 법을 만나서 행복하도록 내가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이 핵심에 추가적으로 사회적 정의가 붙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런 중간 간부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행정 체계가 잡히면서 직위라는 게 자꾸 생겨나게 된 거예요. 작금의 불교계를 보면, 심지어 출가를 한 스님들 사이에서도 돈이 되는 절과 그 절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주지라는 직위를 갖고 다툼이 계속 일어나지 않습니까?

 

 

코로나 사태와 온라인 전환으로 큰 변화가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이번 기회를 통해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간다는 그런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지부장이나 회계 역할이 필요해서 그 소임을 맡으라고 하면 기꺼이 ‘알겠습니다’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되, 그런 소임도 항상 한시적으로 하는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만든 법당도 용도가 없으면 과감하게 폐기하듯이 우리가 갖던 지위도 조직이 개편되고 용도가 다하면 당연히 가볍게 내려놓아야 해요. 항상 우리의 중심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의 핵심은 자기 정진과 전법 이 두 가지가 근본입니다. 거기에 추가로 환경 실천이라든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라든지, 평화라든지, 이런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활동도 함께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주어진 과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와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끼리 충분히 토론한 뒤에 내일 아침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점이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또 대화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고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재 법문이 끝나고 대의원들은 한 손을 들고 대의원의 다짐을 함께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준비된 안건에 대한 보고와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전국 대의원 회의의 주된 안건은 온라인 정토회 사업방향과 조직개편안을 심도 있게 심의하는 것입니다.

 

 

먼저 상임위원회 회의 결과를 보고 받은 후 행정처 사업 보고와 예결산 보고를 듣고 모둠 토론을 100분 간 했습니다. 이어서 2차 만일결사준비위원회로부터 온라인 정토회 사업방향과 조직개편안에 대한 발표를 듣고 다시 모둠 토론을 100분 간 했습니다.

 

오늘은 활발한 모둠 토론과 질의응답 시간만 가진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충분한 토론 후 중요한 의결 사항은 내일 진행될 예정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에는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200여 명의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가볍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2021년이 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오늘이 1월 마지막 법회네요. 어릴 때는 세월이 안 가는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빨리 가는 것 같아요. 연초에 일 년 중 언제 강의하고, 언제 수련하고 일정을 적다 보면 12월까지 하루 만에 다 가버리는 기분입니다.

 

현재 정토회는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정토회가 지역에 있는 법당 중심이었다면 온라인 정토회는 각자 사는 공간이 곧 법당이 됩니다. 이제 정토회 회원들은 전 부 다 지역 법당에서 개인 법당으로 이동을 해요. 이런 변화에 좋은 점도 있고, 또 안 좋은 점도 있어요. 좋든 싫든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같이 추운 날에는 개인 법당이 더 좋아요. 제가 있는 문경 수련원은 오늘 아침에 영하 15도까지 떨어졌습니다. 저는 머리털이 없으니까 지금 법문 하는데 머리가 선뜩선뜩 해요. 털모자를 쓰고 법문을 할까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보기 안 좋다고 말려서 모자를 안 썼습니다. (웃음) 그럼 이제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몸집이 왜소한 아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괴로워요

“저는 키가 작습니다. 몸집도 아주 작은 편입니다. 그런데 저희 아들이 저를 닮아서 키가 작고 몸집도 작습니다. 지금 대학생인데 제 눈에는 꼭 중학생처럼 보입니다. 아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무지 애를 쓰고 기도도 하지만, 막상 멀리 있던 아들이 집에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힘듭니다. 아들의 존재는 저에게 가장 큰 기쁨이기에 아들을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보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편안하고 기쁘게 아들을 볼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면 제가 깨우쳐주면 되는데 아는 데도 안 된다고 하기 때문이에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다음 생에는 키가 크게 태어나길 비는 수밖에 없네요. (웃음)

 

 

옛날에 산에 있는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 먹고 살 때는 모계 사회라고 해서 여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여자라고 불편한 것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노동을 하게 되니까 남자가 유리해졌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특히 요즘은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몸집이 작거나, 키가 작거나, 힘이 약하다고 해서 불리한 것이 하나도 없어졌어요. 몸집이 작다고 자판을 못 누르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 터치를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몸집이 작다고 해서 자동차 운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포크레인 운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여성들이 하등 불리한 것이 없어졌습니다. 아직도 큰 기계는 남자가 다룬다는 관습적인 문제가 남아서 그렇지 지금은 포크레인을 운전하든, 차를 운전하든, 기관차를 운전하든, 비행기 운전을 하든, 여성이라고 해서 못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하물며 사람이 키가 작다고 못할 일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자의 걱정은 힘이 중요한 사회, 소위 농경사회라면 좀 걱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을 걱정할 시대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어떡하겠어요? 그러니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방법이 있다면, 질문자가 정신을 차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런 불편할 이유가 없는데 과거의 관습에 의해서 불편하다고 생각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무슨 성씨냐 이런 것 때문에 불이익이 하나도 없는데 상놈 성을 가져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여자라고 해서 아무런 차별도 없는데 여자라고 불리하다는 얘기를 한다면 방법이 없잖아요. 지금 질문자는 과거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다리를 못 쓰거나 하면 병신이라고 차별을 했잖아요. 그리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장애는 어떤 징벌의 결과가 아닙니다. 다만 장애가 있으면 좀 불편할 뿐이에요.

 

더군다나 요즘은 불편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과학 기술을 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새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비행기를 발명했고, 호랑이보다 속도가 더 빠른 자동차를 발명했어요. 그런 것처럼 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앞으로 과학기술을 통해 전부 다 개선이 될 겁니다. 사고로 팔을 잃었다면 의수를 하면 되고, 다리를 잃었으면 의족을 하면 됩니다. 현재 기술력으로는 의수나 의족이 육체의 손발보다 기능이 못하기 때문에 핸디캡이 되지만, 앞으로는 의수와 의족이 훨씬 더 육체의 팔보다 힘도 더 세고 기능도 더 좋아질 거예요. 디지털 눈이 개발되어서 육체의 눈보다 훨씬 더 잘 보이게 되면, 보통 사람도 멀쩡한 눈을 빼고 디지털 눈으로 교체할 겁니다. 처음에는 사고가 나서 개선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보통 사람도 멀쩡한 팔을 자르고 의수를 하게 될 거예요.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성형이 그렇잖아요. 성형이라는 것은 원래 다쳐서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복원하기 위해서 나온 기술이에요. 그런데 성형 기술이 점점 발달하다 보니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얼굴을 예쁘게 하려고 너도나도 성형을 하기 위해 난리잖아요. 지금의 성형은 더 이상 의술이 아니라 미용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앞으로 이런 문제가 곧 생깁니다. 이런 인간을 ‘사이보그’라고 해요. 지금 사이보그 기술은 거의 실용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도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닙니다.

 

시골에 가 보면 관절이 좋지 않아서 다리를 못 쓰는 어르신들이 전동차에 앉아서 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분들은 제가 걷는 것보다 훨씬 빨리 갑니다. 다니는 데 아무 불편이 없어요.

 

이런 시대에 살면서 지금 그런 얘기를 하니까 제가 볼 때 좀 한심해 보이네요. 내일부터 정토회 오지 말고 어디 다른 절에 다니면 어떨까요? 정토회에 다니고 있다는 게 창피할 정도예요.” (웃음)

 

 

“저도 제가 좀 한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스님이 봐도 한심한데 본인도 그걸 알아야죠. 질문자의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해서 사는 사람이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절반입니다. 장애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장애인’이라는 말도 요즘은 쓰지 않고 ‘장애우’라는 말로 사용하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질문자가 너무 욕심이 많은 겁니다. 건강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해요. 만약 아이가 자신에 대해 너무 왜소해서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시대가 바뀌었다. 옛날 같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격려를 해줘야 해요. 아이는 멀쩡하게 잘 지내는데 엄마가 자꾸 그렇게 하면 결국 엄마로 인해 아이에게 열등의식이 심어지게 됩니다.

 

또 역사적으로도 한 번 보세요. 나폴레옹도 그 시대에 키가 아주 작았어요. 등소평은 150센티미터 수준이었어요. 그런데도 13억 중국을 호령했잖아요.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성공시킨 박정희 대통령도 키가 작았잖아요. 꼭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잘 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걸 가지고 논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질문자가 외모를 갖고 평가하는 잘못된 소비주의에 물들어서 괴로운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도 불법을 탁 듣고 나면 정신을 차려야죠. 불법이 무엇입니까. 불생불멸 불구부정이잖아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넓은 것도 없고, 좁은 것도 없습니다. 무거운 것도 없고, 가벼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비교에 의해서 그렇게 규정될 뿐입니다. 이렇게 불교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정신을 차리세요.” (웃음)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할 것도 없어요. 딱 한 생각만 바꾸면 됩니다.

 

‘아!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다 존엄하다.’

 

이번에 젊은이들을 위해서 나온 새로운 책이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열등한 것이 없어요. 그냥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양지 식물은 양지 식물대로, 음지 식물은 음지 식물대로, 다 서로 다를 뿐이지 모두 존엄합니다. 인종도 키가 큰 인종이 있고, 작은 인종이 있고 또 같은 인종 안에서도 키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질문자가 키가 작은 문제는 한국에서 좀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됩니다. 통일이 되면 남한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되는 북한 사람들은 키가 질문자의 아들만큼 작아요. 왜냐하면 북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양 부족으로 키가 남한의 초등학생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한 아이들은 직접 만나보면 굉장히 똑똑해 보여요. 겉보기에는 키가 작으니까 일곱 살, 여덟 살이겠구나 싶은데, 실제 나이는 열 두세 살이니까요.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가 참 똘똘해서 나이를 물어보면 벌써 고등학생 나이예요.

 

그러니 질문자가 지금 딱 깨달아서 해결이 안 되거든 하루빨리 통일이 되도록 모든 일을 제쳐두고 통일운동을 하세요.” (웃음)

 

아들은 뇌사 판정을 받고 하늘로, 저는 암 환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14살 아들이 뇌종양으로 투병 중 뇌압 상승으로 뇌사 판정을 받아 연명치료를 중지하고 하늘의 별로 보냈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니 잔인한 부모라는 생각에 고통스럽고, 이런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저 또한 아이가 투병 중에 유방암 4기 환자가 되어 자식도 잃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곧 아들의 생일이 다가와 더 그립고 보고 싶어 집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아픔을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참 힘드실 것 같아요. 먼저 위로를 드립니다. 여기 모인 대중들도 다 같이 함께 위로를 드리겠습니다.”

 

스님은 합장을 하고 잠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방청객들도 함께 두 손을 모았습니다. 질문자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자리가 불교인들끼리 모임이라면 제가 영가를 위해서 해탈주라도 독송해 드리겠는데, 오늘 자리는 종교적인 자리가 아니고 일반 국민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종교적인 의식은 하지 않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미 일어난 일이고,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운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빈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고, 돈을 많이 준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인데, 이걸 갖고 계속 슬피 울면 첫째, 나한테 큰 고통입니다. 둘째, 남편, 부모, 다른 자식들을 비롯해 나를 보는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2의 화살은 맞지 마라이런 말씀이 있어요. 아들이 병사한 것이 제1의 화살이라면, 그로 인해서 질문자와 가족들이 또 제2의 화살을 맞고 있습니다. 1의 화살은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2의 화살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슬퍼한다고 살아오거나, 괴로워한다고 살아오거나, 보고 싶다고 살아온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도 이 일은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라면, 지금부터 나라도 잘 살아야 됩니다. 나라도 잘 살아야, 남편이나 부모, 다른 자식들이 슬퍼지는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제 말이 맞는데, 지금 질문자는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제 말이 귀에 안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같은 슬픔이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도 계속 유지될까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 나아질까요?”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죠.”

 

그럼 아들이 살아와서 나아졌어요? 그대로인데 나아졌어요?”

 

그대로인데 나아졌습니다.”

 

그대로인데 3년 후에는 나아진다면, 3년 슬퍼하다가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요.”

 

그래요. 바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굳이 3년을 슬퍼한 뒤에 나아지는 것보다 지금 바로 나아지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 종교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이 빨리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보내줘야 됩니다.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죠. 종교에 따라 천당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극락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고도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 천당에 가든, 극락에 가든, 환생을 하든 빨리 어디론가 가야 되는데, 엄마가 계속 울면 미련이 남아 못 가겠죠.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면 무주고혼이 됩니다. 이것은 아들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빨리 가라고 보내줘야 돼요. 그래야 극락을 가든 천당을 가든 환생을 하든 할 거 아닙니까?

 

어떻게 돌아가셨든 돌아가신 분에 대해선 잘 가! 안녕하고 인사를 해줘야 돼요. 이것을 천도라고 합니다. 천도란 돌아가신 분을 빨리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것입니다. 지금 엄마가 해야 될 일은 우는 것이 아니고 빨리 가라고 아들을 떠나보내주는 겁니다. 아들을 미국에 유학을 보낼 때도 아쉽지만 떠나보내잖아요. 그곳이 좋은 곳이니까요. 그것처럼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아쉽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거예요. 딸이 시집을 갈 때도 아쉽지만 더 좋은 곳으로 가니까 떠나보내잖아요. 이렇게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헤어짐이 덜 슬픕니다.

 

만약 질문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우리 아들이 천당에 갔다라고 믿고, 불교인이라면 극락에 갔다라고 믿고, 윤회를 믿는 사람이라면 병든 몸 대신 건강한 몸을 받아서 환생한다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헤어짐은 아쉽지만 아들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엄마는 기뻐하면서 보내줘야 됩니다. 그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아들, 잘 가!’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아들, 잘 가!” (질문자 울먹임)

 

질문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계속 잡고 계실래요? 오도 가도 못하게 잡고 있기 때문에 무주고혼이 되는 거예요. 아들을 무주고혼으로 만드는 게 나아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게 나아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것이 낫습니다.”

 

엄마라면 잘 가라고 인사를 해야죠.”

 

질문자는 용기를 내어 큰 목소리를 인사를 했습니다.

 

아들, 잘 가!” (질문자 울음)

 

큰 목소리에 화면 속 방청객들이 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방청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딱 떠나보내고 울지 마세요. 울면서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은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는 자기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아들이 뇌사한 상태에서 산소 호흡기를 뗀 것이 엄마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존중이란 생명의 원리대로 살도록 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살리는 것은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뇌사를 했거나 이미 늙어서 죽었는데 산소호흡기를 사용해서 억지로 살리는 연명치료는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잘하신 거예요.

 

연명치료는 육신을 붙들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었으면 땅에 묻어야지, 내가 아직 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방안에 놔두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땅에 묻으면 안 되고 방에 놓아두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냄새나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아무리 사랑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장례를 치러야 됩니다.

 

뇌사를 했으면 산소호흡기를 떼주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도 좋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좋아요. 그것은 털끝만큼도 잘못한 일도 아니고,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질문자 자신도 암이라고 했잖아요. 보통은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같이 죽고 싶죠?”

 

.”

 

 

그렇다면 질문자는 안 그래도 같이 죽고 싶었는데 잘 됐잖아요. 죽고 싶다고 억지로 죽으려고 해봐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죽으려고 노력을 안 해도 가만히 있으면 죽게 돼요.

 

자살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인생은 자살할만한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하려면 일이 많잖아요. 약 사 와야지, 먹어야지, 괴로워해야지, 또 천장에 목을 매달려면 밧줄 사 와야지 걸어야지 일이 많아요. 살아 있는 것은 살게 해주는 것이 쉽지, 죽으려면 힘이 들어요. 반대로 죽을 때가 되었는데 살리려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때는 죽는 것이 쉬워요.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은 살아있을 때는 살게 하는 것이고, 죽을 때는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암에 걸린 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은 뒤에 생길까요? 살아있을 때 생길까요?”

 

살아있을 때요.”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질문자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1년을 살 지 10년을 살 지 모르지만, 암이 심하다면 자연수명에 비해서 좀 빨리 죽을 것 같아요? 더 오래 살 것 같아요?”

 

좀 빨리 죽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보다 짧게 살게 되겠죠. 그러면 그 짧은 인생을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살다 죽는 것이 나아요? 아니면 웃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다른 사람들은 좀 괴로워하더라도 인생이 기니까 괜찮지만, 나는 인생이 짧으니까 더 웃으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1년 안에 죽는다고 하면서 계속 울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아니면 하루를 살더라도 웃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웃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웃어요. 질문자는 남보다 빨리 죽을 사람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너는 암 걸렸다면서 왜 그렇게 웃냐?’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아무래도 내가 너보다 좀 짧게 살 거 같아서 그런다. 너는 성질 낼 시간도 있고, 울 시간도 있지만, 나는 지금 웃다가 죽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러니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고 오늘부터 웃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쉽지는 않아요. 그러나 제 말은 맞아요? 안 맞아요?”

 

맞아요.” (웃음)

 

 

인생이 짧을수록 웃어야 돼요. 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하루 종일 웃어야 돼요. 울고 성질 낼 시간이 없어요. 웃을 시간도 부족하니까요. 1년을 살더라도 늘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울 시간이 없어요.”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질문자가 1년 후에 죽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아들을 빨리 만날 수 있으니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을 일도 아니에요.

 

오래 살면 오래 산 대로 현재 있는 가족과 같이 보내서 좋고, 때가 돼서 하늘나라로 가면 아들을 만나게 되어서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다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금처럼 바보 같이 울면서 살지 말고 웃으면서 사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관점을 한 번 바꿔보세요.”

 

.”

 

대답을 하면서 웃어야지요. 대답을 안 해도 웃는 게 중요한 거예요. 두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첫째, 아들한테는 잘 가! 안녕인사를 해야 됩니다. 둘째, 나는 짧은 인생을 사니까 더 웃고 살아야 된다. 다시 한번 해볼까요? ‘아들아, 잘 가! 안녕해봐요.”

 

아들아. 잘 가! 안녕.’

 

. 그다음에는 짧은 인생 웃고 살자해봐요.”

 

"짧은 인생 웃고 살자!"

 

, 모두 손뼉 쳐 주세요. 질문자도 웃으세요. 이제 입가에 약간 미소가 도네요.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데,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어요.” (웃음)

 

스님도 크게 박수를 치며 질문자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실시간 댓글 창에도 질문자를 응원하는 댓글이 빗발쳤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노동으로 인한 소득이 아니라 불로 소득을 갖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자 수익, 주식 수익, 부동산 수익을 많이 갖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별로 문제의식이 없고, 그런 방식으로 자산을 늘려나가는 것을 정상적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춰 보았을 때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들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느냐는 질문에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 하는 것이 노동가치설입니다. 노동가치설은 두 가지 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자연환경이 생산하는 것을 무시하고 인간의 노동만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노동에 의한 이윤 창출이나 성장만을 가치로 보는 관점은 환경파괴의 주원인이 됩니다. 환경의 가치까지 계산하면 노동가치설은 맞지 않습니다. 둘째,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대부분의 업무가 자동화되면서 경제적 가치가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부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질문하신 문제는 노동가치설보다 부의 재분배 차원에서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불로소득이라는 관점보다는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노동가치설이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회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로봇이나 자동화, 인터넷 등에 의해 경제적 가치가 생산된다면 오히려 노동가치설은 소수의 창조적 사람에게 부가 과다하게 집중되는 것을 용인하는 결과를 빚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노동가치설을 얘기했던 당시에는 생산자에게 돈이 적게 가고 자본가에게 돈이 너무 집중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사회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의해서 돈이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의해 늘어난 부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노동해서 버는 월급보다 많다고 하잖아요. 이건 분명히 잘못됐죠.

 

 

부동산이나 주식에 돈이 몰리는 현상이 이미 투자의 범위를 넘어 투기가 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돈 있는 몇몇 사람들이 돈을 투기해서 번다’ 이렇게 이해했는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재벌만이 아니라 중산층과 심지어는 20대나 30대 젊은 층과 초등학생까지 주식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오르는 장세이니까 어떻게 투자해도 돈이 벌리기 때문이에요. 눈 감고 투자해도 돈이 벌린다는 거죠. 지금은 인구 10명 당 3명꼴로 주식 투자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즉문즉설에까지 계속 질문이 올라오거든요. 요즘은 벼락부자가 아니라 벼락 가난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니 자기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난뱅이가 되어있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이 오르는 현상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잖아요. 투기의 시작은 돈 있는 사람들이 했는데, 온 국민이 빚을 내서 따라붙은 겁니다. 부동산도 처음에는 강남 일부나 서울만 좀 오른다 하다가, 이제는 전국이 다 투기열풍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즉문즉설에서는 어떤 공무원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20년 넘게 월급을 저축해서 집을 사려다가 정부에서 사지 말라고 해서 안 사고 기다렸는데, 그 사이 두 배 넘게 집값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사정없이 하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분명히 이 상황은 투기입니다. 이런 투기 과열을 꺼트리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국민이 투기에 참여하면 정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투기 과열을 꺼트리려고 할 때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인플레이션(물가상승)으로 문제를 풀면 투기를 안 한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통화량이 늘어나고 물가가 상승하니까 내가 가진 돈의 가치가 줄어드니까요.

 

지금 투기 열풍이 부는 이유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이 막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내려가기 시작하면 폭락하게 됩니다. 그럴 때 투기한 사람 중에 이익이나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대부분 후발 주자들이 손해를 보죠. 그런데 지금은 투기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인플레이션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투기 바람이 일어나는 거예요. 인플레이션으로 간다면 현금 가치가 떨어지니까 그에 대비해서 땅이나 금, 부동산 등 무엇이든 물건으로 갖고 있어야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투기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코로나 사태로 어려워진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정부에서 돈을 엄청나게 풀었는데, 지금 그 돈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부 빚을 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것을 회수하면 서민들이 죽어나니까요. 지금 미국도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제로 금리 상태입니다. 거기다 계속 돈을 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돈을 푼다고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게 운영이 힘든 사람에게 천만 원을 지원해주면, 이 사람이 천만 원을 갖고 어떤 곳에 사용하느냐면 대부분 건물세를 냅니다. 정부가 푼 돈이 결국 건물주와 같은 돈 있는 사람들에게 다 가게 되는 겁니다. 풀린 돈이 한 번 돌고 나면 다 돈 있는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어요. 서민을 살리려고 지원을 해줬는데 돈은 돈 있는 사람이 버는 거예요.

 

가게가 망해야 건물주도 따라서 망하는데, 가게를 살리려고 하다 보니 건물주가 더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건물주는 그 돈을 갖고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은행은 금리가 낮으니까 투자할 곳이 주식과 부동산밖에 없는 거예요. 금리를 올리면 돈이 저축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만, 그러면 대출한 서민들이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잘못했다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에요. 결국 이 문제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긴 문제입니다.

 

 

사회정의 측면에서 보면, 부의 불평등이 빠른 속도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걸 개선하려고 노력하는데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죠. 온라인 관련 사업은 수요가 폭발하고 있고, 여행업이나 구멍가게는 망해갑니다. 아직은 물가가 안 오르고 있는데 곧 전부 오를 거예요.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라가야 되는데, 아직 안 오르는 이유는 손해를 보면서도 공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입니다. 짜장면 값도 아직 그대로인데 이런 품목은 공급하는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정부가 다 공급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벌써 채소값은 많이 올랐다고 해요.

 

이런 현상들을 보면, 사회적 정의란 개인이 아껴 쓰고 열심히 산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적 차원에서는 ‘세상이 그렇든 말든 나는 편안하게 산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면 되지만,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는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는 부를 재분배하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검소하게 살면 나에게 좋다

수행을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수행을 가르칠 때도 ‘검소하게 살면 다음에 부자 된다’ 이렇게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검소하게 살면 내가 좋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인연 과보를 인과응보로 잘못 알고, 수행을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하는 개념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불교가 사회 정의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겁니다. 검소하게 살면 내가 좋은 것이지 복을 받거나 부자가 되는 것과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변화의 핵심은

 

지금 변화의 핵심은 ‘온라인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정토회는 오프라인 정토회예요. 이제는 온라인 정토회로 바뀐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정토회의 이념과 목표는 그대로이지만 오프라인에서 실천하던 것을 이제는 온라인으로 실천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큰 방향입니다.”

 

스님은 지난 공청회에서 나온 의견들을 종합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충분히 설명을 했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전히 다양한 의문점이 질문으로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온라인으로 전환하면 전법 활동가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전법 활동가인지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온라인 전법 활동가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떼어놓고 가려는 것이 아닌지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되는 조건에는 ‘거기에 준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전법 활동가 역할을 능히 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 사람은 지금 불교대학 진행을 맡기면 바로 진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다만 업무상 그 일을 안 했을 뿐이다.’

 

이렇게 진행자 역할을 최근 몇 년 사이에 안 했지만 거기에 준하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하면 전법 활동가 모임에 편재를 하는 거예요. 정토회는 가능한 많은 사람과 같이 가는 걸 중요시하지, 떼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떼어내겠어요? 가능한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야죠.”

 

온라인 진행의 특성

 

그러나 오프라인 진행과 온라인 진행의 특성이 다르다는 점은 유념해야 합니다. 온라인 진행은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그 사람이 진행을 도맡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진행을 하게 하면 불상사가 생길 수 있어요. 또 진행이 너무 서툴면 학생이 떨어져 나가 버려요. 오프라인 법당에서 수업을 할 때는 진행이 좀 서툴러도 법당에 가면 총무님도 있고 대의원도 있어서 인격적인 감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통로가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에서는 학생이 만나는 사람이 진행자 한 명밖에 없어요.

 

이처럼 온라인 상에서는 진행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진행자를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되는 기준은 기존에 정회원이 되는 기준과는 달라요.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천일결사에 입재하고, 회비를 내고, 봉사를 하면, 정회원이 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인데, 자꾸 같은 것으로 생각하니까 이해가 어려운 거예요. 온라인 전법 활동가는 사람을 책임지는 활동가이고, 정토회의 얼굴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정토회의 대표와 다름없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정토회는 온라인 전법 활동가에게 대표의 역할을 전부 위임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런 중요한 역할을 사사로운 정을 갖고 결정하면 안 돼요.

 

한 명이라도 더 함께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보시를 많이 했다’, ‘이 사람은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를 한다’, ‘이 사람은 수련원에 와서 농사를 도맡아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꾸 온라인 전법 활동가 모임에 소속을 시켜 달라고 하는데, 그분들은 그것대로 정토회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들에게는 어떤 지위를 줄 것인지는 별도로 논의를 해야 됩니다.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들도 연수 교육을 시켜주고, 지위도 주자는 제안은 온라인 전법 활동가에 대한 논의가 끝난 다음의 얘기예요. 이런 회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완책을 세우면 됩니다.

 

지금 우선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온라인 전법과 온라인 전환이에요. 이제는 법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온라인이라는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에 맞는 시스템을 지금 도입하자는 얘기예요. 이미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왜 활동을 못하게 하겠어요? 활동가 한 명을 양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데요.”

 

 

인간관계에 갈등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직장에서 일 년에 한두 번씩 사람들과 갈등이 생깁니다. 스님께서는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하셨는데요. 상사, 동료, 후배들도 자기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지만 저도 제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가 있어서 주장을 합니다. 서로 인정할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간혹 제 생각이 옳다고 끝까지 주장할 때가 있어요. 서로 자기주장만 하다 보면 결국 갈등을 하게 되고 감정이 상해서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갈등 없이 슬기롭고 지혜롭게 인간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사람은 서로 믿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 다르기 때문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소소한 갈등 없이 살 수 있어요. 내가 보통사람이라면 소소한 갈등 정도는 웃으면서 그냥 ‘사는 게 다 그렇구나’하고 넘기면 돼요. 그런데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힘들고 살기가 어려울 정도라면 자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스트레스받지 않는 게 중요해요

 

사람은 서로 다를 뿐인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고 지나치게 고집하면 상대와 부딪칩니다. 결국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요. ‘내 주장도 일리가 있고 상대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라고 인정하면 갈등은 있어도 스트레스를 안 받습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다 양보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이번 휴가에 설악산 가자’라고 했는데 아내는 ‘제주도에 가자’라고 합니다. ‘너는 내가 산에만 가자하면 바다 가자고 한다’라고 짜증이 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예요.‘내가 산에 가고 싶어 하듯이 아내는 바다에 가고 싶어 하는구나’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으면 여러 가지 길이 있어요.첫째, 내가 산을 포기하고 ‘그래, 바다에 가자’ 이렇게 아내를 따라 주면 됩니다.둘째, 산에 가고 싶으면 ‘여보, 내가 진짜 산에 가고 싶다. 이번만큼은 당신이 양보해줘.’라고 사정을 하면 됩니다.

 

내가 양보하는 방법은 단번에 할 수 있어요. 상대에게 양보를 요구하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미리 겁내지 말고 일단 상대방에게 물어보면 돼요. 상대가 ‘싫어’라고 하면 ‘알았어요’ 하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바다로 가면 됩니다. 그래도 산에 가고 싶다면 한 번 더 얘기해보면 돼요. 이때 아내가 자꾸 이야기한다고 성질을 팍 내면 ‘알겠어요’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도 산에 가고 싶으면 또 얘기해보고요. 이럴 때 누가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나는 안 받아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지레 포기하게 되지만,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세 번 네 번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결론이 나도 좋고, 안 나면 휴가를 따로따로 갈 수도 있어요. 부부라고 휴가를 꼭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잖아요. 아이들한테도 ‘아빠는 산에 가고 엄마는 바다로 갈 건데 너희들은 어디로 갈래?’ 이렇게 물어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면 돼요.

 

이렇게 스트레스를 안 받아야 이런저런 해결책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화가 나서 지레 포기해 버리거나 상대를 미워하거나 싸우게 돼요. 핵심은 양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상대를 인정했는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내 주장대로 해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양보해 보기도 하고, 각자 자기 주장대로 해보기도 하면 돼요. 다양하게 해 보는 겁니다.

 

밀당이라고 들어봤어요? 인생살이라는 게 다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 사는 거예요. (웃음) 꼭 내식대로 다 되어야 좋은 것도 아니고, 뭐든지 다 양보해야 좋은 것도 아니에요. 싫어도 한번 양보해줘 보고, 양보할 마음이 있어도 한번 당겨도 보고 이렇게 재미있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놀이도 심각하게 하면 싸움이 되고, 싸움도 재미로 하면 놀이가 되잖아요.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사람들과 견해가 다를 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부부도, 부모 자식도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예요. 그런 현실 속에서 ‘다름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 것인가’가 모든 사람의 과제입니다. 차이를 놀이처럼 재밌게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문제를 양변에서 어느 한변에 치우치지말고 양변을 화합하여 중도로 해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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