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무엇인가. / 혜국스님

 

 

 

 

 

어떠한 것이 참나인가. 누가 참나인가.

 

여러분들은 라고 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몸에서 영혼이 나가면 눈이 떠집니까?

 

죽은 사람들은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눈이 있지요.

 

있는데 그 사람은 봅니까? 못 봅니까?

 

그럼 눈으로 보는 게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영혼이 다시 몸속으로 들어오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나입니까? 이 몸뚱이가 나입니까?

 

영혼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두 참구법입니다.

 

위궤양이나 간경화를 고쳐주면 의사선생한테 정말 고맙다고 하는데,

 

몸뚱이가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참나를 위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세요.

 

몸뚱이가 나인 줄 알고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했지만 몸뚱이가

 

나를 지켜 줍니까?

 

늙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늙지, 아프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아프지, 죽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죽지, 아무리 내 몸뚱이를 위해봐야

 

결국은 나를 배신합니다.

 

배신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몸뚱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

 

운명의 노예가 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라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내 몸뚱이 위한다고

 

보낸 시간은 많지만, 내 몸뚱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내 마음을 위해서

 

마음 농사짓는데 바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선 공부는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법문을 듣고 여러분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워야 합니다.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우려면 여러분들 안에 있는 욕망, 시기·질투,

 

번뇌 망상을 화두로 돌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두는 부처요, 망상은 중생이니 중생부처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이 부처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 몸뚱이는 60조 개나 되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에 무량겁(無量劫) 동안 살아온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기록돼 있습니다.

 

그 기록을 우리는 업장(業障)이라 합니다.

 

60조 개나 되는 세포에 기록된 모든 업장이 부처로 바뀌어 가는

 

기간을 교리적으로는 아승기겁이라 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요원하겠습니까.

 

내가 마음의 눈을 뜨면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쉽다고 하면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중생이 부처 되는 것을 쉽다고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 목숨 바쳐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도 벽이 있으니 이 방, 저 방, 아랫방이 있는 것입니다.

 

이 벽 다 허물어 버리면 법당도 없고 허공이 되어 버리지요.

 

그럼 그 허공은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허공은 변하지 않습니다.

 

허공은 조용필이 부르는 허공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는 시야까지를 허공이라 하는데 진짜 허공은 깨달은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내 성품이 허공이지요.

 

아인슈타인은 허공을 본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밖에 없다

 

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들어오는 허공을 허공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공 자체는 변함없습니다.

 

여러분 마음 부처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임제 스님도 그것을 깨치고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했습니다.

 

이것은 우주가 깨어지는 소리요, 중생이 부처되는 소리요,

 

참으로 우리를 모두 다 제도하는 소리입니다.

 

내가 깨달으면 천하가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첩첩산중이 다 부처님 도량이요,

 

만상의 소리가 부처님 음성입니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불국토가 사바세계인 것입니다.

 

너무 육신으로 가고, 너무 멀리 갔으니 마음의 고향으로 핸들을

 

돌려보자, 그게 화두참선법 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따라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누구냐? 나는 모른다.

 

모르면 어떻게 하는가.

 

내 마음 안에 있는 번뇌망상이 부처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 농사라 합니다.

 

매일 이뭣고하며 내 마음 농사는 얼마나 지었는가,

 

내 마음의 소가 남의 밭에 놀게 놔둔 일은 없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뭣고를 스승 삼아 이뭣고를 할 줄 아는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뭣고를 대지와 같은 벗,

 

어머니와 같은 벗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승사자를 만나도, 천둥벼락이 쳐도 이뭣고하는

 

이 것만큼은 어느 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침을 뱉어도 묻지 않고, 똥물을 끼얹어도 묻지 않는 허공과 같이 마음을 쓰면

 

누가들 나를 어찌 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 손가락을 태우면서

 

나 혼자 극락세계에 가지는 않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만약 제 법문을 들은 사람이 지옥에 가 있다면 그 사람을

 

업고서라도 부처님 회상으로 나와서 도의 길을 가게 할 것입니다.

 

내 얼굴 한 번 본 사람은 내가 반드시 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 벽만 허물어 버리면 여러분도 바로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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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봄

올 겨울이 유난히 추웠죠? 35년 만에 가장 추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따뜻한 미국 텍사스 주에도 영하 18도까지 떨어지는 한파가 몰아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는 봄은 막을 수가 없네요. 벌써 한국의 남부 지역에는 담장 밑에 난초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봄은 오고 있습니다.

 

 

봄이 왔건만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절은 봄이 되었는데, 마음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계절의 봄은 해가 점점 길어지면서 어김없이 오지만, 우리 마음의 봄은 수행정진을 해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계절의 봄과 함께 마음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공부를 좀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럼 마음공부는 어떻게 할까요?

 

괴롭지 않게 사는 길

부처님은 인생의 괴로움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왜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인생을 괴롭게 살아갈까?’

 

부처님은 깊은 탐구 끝에 결국 화내지 않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근심 걱정하지 않고,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괴로움 없이 편안한 상태를 인도어로 니르바나(Nirvana, 열반)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본인도 안온하게 사셨고, 또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그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를 해결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르침은 한쪽은 불교라는 종교로 흘러갔고, 다른 한쪽은 불교철학이라는 학문으로 흘러갔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어떤 것을 믿는 종교도 아니고, 사유하는 철학도 아니고, 바로 실천하고 체험해서 자기 삶을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마음공부는 내 마음을 다스려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무엇인지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지금보다 내가 조금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을 강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의 삶 속에서 좀 더 가볍게 살 수 있는 길을 한 번 같이 찾아보자는 뜻으로 대화를 해봅시다.”

 

이어서 8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하신 분들의 마음의 계절은 다 달랐습니다. 그중 감정 기복이 심한 남편 때문에 괴롭다는 분의 질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남편이 화가 나면 며칠 동안 말을 안 해요

“제 남편은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말도 많이 하고 농담도 하지만,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며칠이고 말을 안 합니다. 예전에 화가 나면 너무 오랫동안 말을 안 해서 제가 풀어보려고 말을 걸어봤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남편 성격을 알아서 화가 났다 싶으면 반발을 하지 않고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도 기분이 몹시 가라앉습니다. 며칠 지나서 남편이 화가 풀리면, ‘네가 어떻게 해서 내가 화가 났다’며 다시 말을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제 기분이 남편 기분에 따라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문자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죠?”

 

.”

 

 

질문자도 기분이 좋으면 좀 친절해지고, 기분이 나쁘면 말하기 싫어지잖아요?”

 

.”

 

본인이 그렇듯 남편도 똑같아요. 남편도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온갖 이야기를 다 하고, 기분이 나쁘면 며칠간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똑같긴 한데 남편이 너무 오래 동안 말을 안 하고 화를 내면 제가 많이 힘듭니다.”

 

오십보백보란 말이 있잖아요. 오십보 가나 백보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얘기예요. 기분이 좋으면 입 안에 있는 것도 내줄 듯이 하고, 기분이 나쁘면 줬던 것도 도로 뺏는 것이 사람입니다. 질문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개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사람이에요. 사람이니까 화를 낼 줄도 알고, 사람이니까 말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겁니다. 질문자도 사람이니까 감정이 올라오는 거예요. 질문자가 남편을 볼 때, ‘왜 그만한 일에 화를 내고 말을 안 하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 자주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 질문자를 보고, ‘왜 그만한 일에 괴롭다고 그러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 알겠습니다. 스님께서 예전에 한 즉문즉설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상사가 말을 하면 개구리가 운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남편을 개구리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안 괜찮죠.(웃음) 개구리 하고 같이 산다고 하면 질문자가 창피하죠. 질문자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개구리 하고 살 수준은 넘지 않아요?”

 

, 넘습니다.”

 

질문자가 남편을 개구리라고 하면 남편을 욕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 본인을 욕하는 셈이에요. 자기 가치를 좀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편을 볼 때 법륜스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웃음)

 

질문자가 매일 제 법문을 듣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남편 말을 제 말처럼 믿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웃음)

 

노력하면 안 돼요. 항상 이렇게 기도하세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

 

 

남편이 감정에 기복이 있는 것은 남편이 사람이라는 증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내가 원하는 수준은 안 되는 거예요. 남편은 특별히 훌륭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사람인데, 내가 남편에 대한 기대가 큰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마음이 좀 언짢은 거예요. 남편이 화도 좀 덜 내고, 갈등이 생겨도 빨리 풀고,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 주면 좋겠죠?”

 

.”

 

그런데 내 남편이 그만큼은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뭐든지 줄 것처럼 하고, 기분이 나쁘면 토라져요. 토라지는 시간이 조금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십보백보로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 첫째, ‘우리 남편은 사람입니다이렇게 생각하세요.

 

둘째, ‘남편은 사람 중에도 부처님이다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남편의 말을 부처님 말씀을 듣듯이 들으면 남편이 진짜 부처가 됩니다. 그 남자가 부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남편은 부처인 거예요. 남편을 부처로 보면 질문자도 덩달아 훌륭해집니다. 기독교인에게 불상은 부처일까요, 우상일까요?”

 

우상으로 볼 것 같습니다.”

 

불교인에게는 불상이 뭐예요?”

 

부처님입니다.”

 

그 불상이 부처인지 우상인지는 본래 정해져 있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면 우상으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겠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기독교인은 불상을 우상으로 봐도 상관이 없죠. 절에 안 다니니까요. 그런데 매일 절에 다니는 불교인이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면 본인이 불행하겠죠. 다른 사람은 질문자 남편을 나쁜 남자라고 해도 괜찮아요. 같이 안 사니까요. 그런데 질문자는 그 남자하고 같이 살잖아요.”

 

. 평생 같이 살 것 같습니다.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누구 손해예요?”

 

제 손해입니다.”

 

질문자가 남편과 같이 못 살겠다고 했으면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을 거예요. 남편 성격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것이 괜찮으니까 같이 사는 거죠?”

 

. 맞습니다.”

 

남편이 건강도 안 좋고, 돈도 못 벌고, 성격도 안 좋고, 애들한테도 잘 못 하고 다방면으로 나쁘다면, 저에게 이런 신세타령을 안 하겠죠. 스님한테 묻지도 않고 벌써 이혼해 버렸을 거예요.”

 

. 벌써 이혼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성격 빼고는 그래도 괜찮으니까 남편이 이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잖아요. 한 가지 고치려다가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부처로 볼 거냐 우상으로 볼 거냐 하는 문제와 같아요. 기독교인들이 우상 숭배라고 할 때, 왜 우상이냐고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는 것은 네 자유다. 그래 봐야 네 마음만 허전하지 나는 매일 봐야 되니까 부처님으로 본다라고 하면 돼요. 그처럼 질문자에게 남편은 내가 매일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잖아요. 아이들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인 게 좋아요, 나쁜 사람인 게 좋아요?”

 

훌륭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당신은 부처님입니다이런 마음을 내어보세요. 설령 아이들이 아빠 성격이 문제야이렇게 얘기를 해도, ‘성격 빼고는 다 훌륭한 분이다라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누구한테 좋다고요? 남편한테 좋아요, 질문자에게 좋아요?”

 

저한테 좋습니다.”

 

“‘훌륭한 남자하고 산다이런 관점을 가지면 자기에게 자긍심이 생기는 거예요. ‘남자가 성격이 나빠서 잘 삐지고 화를 낸다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오죽 못났으면 저런 사람하고 평생 살아야 되나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남편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성격은 나하고 좀 안 맞지만 다른 건 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세요. 나하고 안 맞는 거지, 그 성격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행복하려면 긍정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내면 질문자에게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고 남편에게도 좋아요.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도 좋은 거예요. 이 좋은 길을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결혼할 때 왜 상대의 성격이나 생활습관은 안 보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결혼할 때 주로 무엇부터 봅니까? 첫째, 인물을 보죠.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면 인물은 더 이상 안 봐요. 아침에 눈 떠서 남편이나 아내를 딱 보니 인물 때문에 진짜 구역질이 나서 같이 못 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능력을 보죠. 어느 대학을 나왔냐, 월급은 얼마냐, 재산이 얼마냐, 집안은 어떠냐, 이런 것들을 따지는 게 능력을 보는 겁니다. 물론 연애를 좀 오래 하면 성격을 보긴 합니다. 그런데 생활 습관은 아예 안 봐요.

 

그런데 같이 살아 보면 서로 제일 많이 부딪히는 것이 생활 습관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부딪히는 것이 성격이고 세 번째가 능력입니다. 인물은 아예 해당도 안 돼요. 그러니까 결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보는 조건과 살면서 부딪히는 조건이 정 반대입니다. 같이 살기 좋은 사람보다 보기에 좋은 사람을 골라서 결혼을 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같이 살려면 생활 습관이 잘 맞는지가 중요한데 다른 조건만 맞춰보고 결혼을 하니까요.

 

우리 일상도 그렇습니다. 경치 좋은 바닷가나 계곡에 가면 여기 집 하나 지어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잖아요. 한 번 살아봐요. 습기도 많고 바람도 많고 소리도 시끄럽고 여러 가지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보기에 좋다고 반드시 생활에 좋은 것이 아니에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을 때도 있습니다.

 

 

결혼 생활의 갈등은 대부분 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닌 다른 것을 자꾸 문제 삼기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상대를 선택했을 때 인물을 봤다면 평생 인물만 논하고, 능력을 봤으면 평생 능력만 논해야지, 정작 같이 못 살겠다고 불평할 때는 성격이나 생활 습관을 논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남편의 성격을 자꾸 논하지 말고, 남편의 그런 성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요. 남편은 그렇게 생긴 걸 어떡합니까. 남편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남편에게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서 정 못 살겠다면 저한테 이런 질문을 안 합니다. 묻기 전에 알아서 결정을 해버리죠. 저한테 물었다는 것은 남편에게 좋은 점이 많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이런 점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내 마음에 들도록 할까요?’ 이것이 고민이 되어서 묻거든요. 자기 힘으로 안 고쳐지니까 저에게 묻는데, 남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세요. 산에 가면 나무가 많지만 기둥하기에 좋은 나무는 드뭅니다. 목수가 가져와서 필요에 맞게 조금 다듬어야 됩니다. 결혼생활도 서로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지, 딱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결혼뿐만 아니라 룸메이트나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맞춰가며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을 개설한 이유

불교대학 공부를 마쳤다면 기본적인 수행에 대한 관점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브라만교라는 아주 오래된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주와 인생을 탐구하는 우파니샤드 철학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주 발달된 종교도 있었고, 아주 발달된 철학도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종교를 믿고 그런 철학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처님이 성 밖에 나가서 주변을 보니까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나 심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계급 사회, 즉 노예제 사회이다 보니까 인구의 90%가 노예였습니다. 상위 계급은 10%, 하위 계급이 90%인 사회였습니다. 노예는 병이 들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립니다. 늙어도 쓸모가 없어서 버렸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쓰레기를 갖다 버리듯이 시체를 숲에 갖다 버렸어요. 그래서 인도에는 큰 마을 또는 대도시 주위에 공동묘지처럼 시체를 갖다 버리는 숲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인도어로 시타림이라고 합니다.

 

 

늙으면 보호를 받아야 되는데, 병들었으면 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죽었으면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장례를 치러줘야 되는데, 그냥 방치되었습니다. 또 전쟁이 끝없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살상을 당하고, 식량부족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세상을 본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존의 종교인 브라만교에서는 브라만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브라만 신한테 기도하면 소원이 다 성취된다고 하는데, 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느냐?’

 

이런 삶의 현실을 버려 놓고, 인생이 뭐고 우주가 뭐냐를 탐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부처님은 깊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삶이 도대체 뭔지, 고통은 왜 일어나는지, 이런 것들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혼자서는 문제 해결이 안 돼서 스승을 찾았고, 스승에게 배운 것으로도 해답을 못 찾아서 다시 홀로 정진해서 본인 스스로 그런 고뇌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부처님은 종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물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라고 하지 않고, 철학이라고 하지 않고, ‘수행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어리석음, 자기의 욕망, 자기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 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간직하고 보존할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부처님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분이 높냐 낮냐는 계급을 가리지 않고, 늙었나 젊었나 하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피부색이 검으냐 희냐 하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경험을 했느냐는 과거에 상관없이,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가르침을 펼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부처님이 비판했던 복을 비는 종교로 한 무리가 흘러갔고, 부처님이 비판했던 관념론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와 불교라는 철학으로 나아갔고, 온전히 수행적 관점을 지키는 자가 드물어졌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대승불교가 일어났고, 그것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와 철학으로 변질됐습니다.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서는 선불교라고 해서 다시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지 내용은 이미 수행과 멀어졌습니다. 또 설령 내용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법의 가피를 입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도록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행이란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우리 생활과 멀뿐만 아니라 수행을 하려면 모든 걸 다 버리고 각오하고 결심해야 되는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부처님 당시로 돌아가서 부처님의 법을 나에게 적용시켜 아주 체험적으로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네가 눈을 감고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눈만 뜨면 그냥 여기 있는 거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쉽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가능하다.’

 

 

이런 가르침을 오늘 우리가 다시 현실에 맞게 살려내기 위해서 정토불교대학이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늘 정진을 해도 남자다 보면 남자의 까르마가 남아있고, 한국 사람이다 보면 한국 사람의 까르마가 남아있듯이, 정토회도 불교문화가 갖고 있는 까르마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종교적인 요소도 좀 남아있고, 일부 철학적인 요소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비는 종교가 목적이 아니고, 연구만 하는 철학이 목적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내 삶을 변화시켜 이 조건 속에서도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을 우리가 지금 가고자 하는 겁니다.

 

경험과 체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관념화됐을 때 우리는 그 진리라는 관념도 버려야 참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여 살아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이런 모습을 볼 때 진리라는 이름만 갖는다고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에 근거해서 진리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학문은 늘 과거로부터 전승된 것들을 근거로 진의 논쟁을 하지 않습니까?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서 검증을 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 의해서,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따르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경전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초기에 일어날 때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지를 공부하게 됩니다. 금강경, 반야심경, 육조단경을 공부해서 대승불교, 선불교를 일으킨 분들의 문제의식을 배우는 것은 수행에 많은 도움을 됩니다. 그러니 경전대학에도 한번 입학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것도 잘못 공부하면 심오한 철학처럼 받아들여서 불교 철학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자가 되려고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항상 그것을 내 삶에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수행적 관점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해야 할 일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봉사입니다. 제일 큰 봉사가 전법입니다. 불교대학에 다른 사람도 다닐 수 있게 인연을 맺어주는 게 제일 가벼운 봉사입니다. 어떤 분들은 스님, 감사합니다. 목도리 하나 짜드릴게요. 양말 선물드릴까요?’ 이렇게 말하는데, 양말이나 목도리보다 더 큰 선물은 마음이 괴로운 사람이 불교대학에 와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스님에게 고마움이 있다면 그 표시를 전법으로 해주셔야 스님이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마음으로 전법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권유했는데도 상대가 안 온다면, 그들을 위해서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기분 나빠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인연을 맺어 줄 뿐이고, 하고 안 하고는 언제나 그들의 자유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강제로 하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나서 지역 법당이 없어지는 대신에 광역자치단체마다 문경수련원이나 천룡사처럼 야외 공간을 가진 수련원이나 절이 하나씩 마련되었습니다. 주말에는 거기에 가서 마음껏 농사도 짓고, 꽃밭도 만들고, 절도 하고, 뭐든지 마음껏 하시면 됩니다.

 

법당을 도시마다 만든 이유는 불교를 가까이서 공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공부하러 멀리까지 가는 건 너무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집에서 걸어와서 불교를 배울 수 있게 생활공간 가까이인 읍면동에 수행 도량을 만들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시군구까지는 지역 법당을 만들었는데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그보다 더 가까운 자기 집에서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역 법당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기 방이 여러분들의 법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도시에 있는 법당은 철수하고 대신에 여러분들이 사는 데서 차로 1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수련원을 마련한 겁니다. 수업은 온라인으로 듣더라도 야외에서 실천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필요하니까요.

 

이제 불교대학을 졸업하시면 정토회 회원에 가입하셔서 정기법회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일결사 기도에 참여하셔서 매일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기 수행을 하면서 불교대학에 주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안내해 주세요. 그리고 경전대학까지 졸업한 뒤에 나도 정토회에서 불교대학을 진행하시는 분들처럼 다른 사람에게 좀 도움을 줘야 되겠다이런 마음이 드시면 전법활동가 신청을 하세요. 그러면 일정한 교육과 실습 훈련을 받은 뒤에 진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의 앞길이 열려 있습니다.

 

 

정토회는 100퍼센트 자원봉사로만 운영되는 모임입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거짓말 같지만 100퍼센트 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대학을 공부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월급 받고 가르치거나 도와준 게 아닙니다. ‘정말 이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하는 그 한 가지 염원으로 자기 시간을 내고 자기 재능을 기부하고 보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가능한 겁니다.

 

그러면 정토회 회원 신청을 하신 분들은 정기법회 때 보고요. 경전대학에 입학한 분들은 경전대학 입학식 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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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불교 안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있습니다.

나부터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종교로서의 불교는 믿음을 중요시하고,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이해를 중요시합니다. 반면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실천과 체험을 중요시합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 안에도 종교적인 요소와 철학적인 요소가 조금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을 하더라도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수행을 하더라도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철학으로서의 불교에 치우치게 되면 실천이 따르지 않고 사변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종교적인 불교는 믿음은 있지만 기복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복(福)을 비는 믿음이 아니라 법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라 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기초로 합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실천을 하고, 나아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또는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만 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나부터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면 우리 아이도 행복해지고, 내가 행복해지면 남편과 아내도 행복해집니다. 내가 자유로워지면 우리 부모님도 자유로워집니다.


나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나부터’ 하면 주위 사람들도 모두 좋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가족들이 하지 않더라도 남 탓하지 말고 나부터 행복하기를 해야 합니다. 또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앞으로도 꾸준히 정진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웃으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인생

한 세상을 사는 게 굉장히 긴 것 같은데 지나 놓고 돌아보면 눈 깜짝할 새에 지나온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지나온 시간이 짧고 남은 시간이 많다 보니 인생이 너무 긴 것 같이 느껴지지만, 연세가 많은 분들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일생이 너무 짧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인생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 놓고 돌아보면 인생이 너무 짧아요. 인생이 이렇게 짧기 때문에 화목하게만 지내기에도 부족하고, 웃으면서 살기에도 부족해요.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건 인생의 너무 큰 낭비입니다. 짧은 일생 동안 좋은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요. 남을 해치고 살만큼 인생이 길지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서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등 너무 순간순간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에는 좋았던 것이 지나 놓고 보면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고, 그 순간에는 어려웠지만 이겨내고 나면 오히려 큰 이익이 될 때가 많아요.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건 대부분 순간에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지나 놓고 보면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순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나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우리는 목숨을 걸 때가 많습니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해가 되어도 그 순간이 닥치면 과거의 방식대로 자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알고 있어도 행동으로는 잘 안 되죠. 그래서 늘 연습해야 하는 거예요. 평정심을 유지해서 순간에 끌려가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해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참으라는 게 아니라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서 자기를 잘 보존해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경전반을 졸업하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변화는 혼란이 아니라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이번 경전반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업의 절반을 법당에서 하고, 나머지 절반은 온라인으로 했습니다. 즉, 여러분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예요. 앞으로 새로 입학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으로만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하니까 원래부터 온라인인 줄 알 겁니다. 여러분보다 앞서서 경전반을 다녔던 사람들은 오프라인으로만 공부했으니까 계속 그런 줄 알 거예요. 여러분은 법당에서 오프라인으로 수업을 하다가 온라인으로 옮긴 경험까지 있으니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경험을 해서 혼란스럽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세대를 낀 세대라고 합니다. 나는 시집살이를 다 했는데 막상 며느리는 시집살이를 시키지 못하고, 회사에서도 선배를 하늘같이 모시는 시대에 살았는데 나는 그런 대접을 못 받는 세대예요. 이렇게 낀 세대는 아랫사람일 때는 전통적으로 다 해야 했고, 정작 본인이 어른이 되고 나면 대우를 못 받고 평등하게 지내야 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 불평을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두 가지 경험을 다해봐서 좋은 세대라고 봅니다. 어른들 모시고 사는 경험도 해보고, 평등하게 사는 경험도 해보았으니까요.

즉문즉설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스님은 어떻게 해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그렇게 잘 압니까?’ 하고 묻는데, 저는 두 가지 경험을 다 해봐서 그렇습니다. 저는 어릴 때 목화를 직접 심는 것도 보고, 거기서 다래 순을 따먹기도 하고, 목화로 물레를 돌려서 실을 뽑고 베를 짜서 옷을 해 입는 경험도 했습니다. 삼을 하나씩 찢어서 무릎에 비비고 실을 만들어서 삼베옷을 해 입기도 했어요. 이런 모습은 거의 신라시대 때 옷을 해 입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신라시대 삶의 방식을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요즘처럼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는 건 최첨단 기술을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젊은 세대는 앞으로 50년을 살아도 기술이 발달된 이후의 50년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육체적 나이는 비록 70살이지만 경험으로 치면 천 년을 산 것과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으니까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로 인도 불가촉천민 마을이나 필리핀 원주민 마을을 많이 다녔습니다. 거기에 가보면 300년 전 우리가 살았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 경험할 수 있어요.

이런 걸 경험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꾸 쉬운 것을 생각하면 어렵게만 느껴지고, 자꾸 질서를 생각하면 변화가 혼란스럽게만 느껴지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관점을 조금 달리 보면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앞으로 진행자가 되면 온라인 수업의 장점과 오프라인 수업의 장점을 모두 수렴해서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온라인만 경험한 사람은 온라인 수업의 경험만 갖고 있고, 오프라인만 경험한 사람은 오프라인의 경험만 갖고 있는데, 여러분은 두 가지를 모두 다 해봤으니까 경험이 풍부해서 더 좋아요. 이렇게 낀 세대야말로 아주 좋은 세대입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줄 알기


저는 어릴 때 농사의 경험도 해보고, 젊을 때 산업화 시기도 살아보고, 늙어서는 서비스업이 팽창하는 시기도 살아보고, 지금은 서비스업조차 사라지는 온라인 시대도 살아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보면 인생이라는 게 그때그때의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농사만 짓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오늘 같은 시대를 살아야 한다면 혼란스러울 거예요. 그러나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고, 혼자가 되면 혼자서도 살 수 있고, 둘이 되면 둘이서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혼자서 살 때의 습관 때문에 둘이서 같이 살면 힘들어합니다. 둘이서 같이 사는 게 연습이 안 되어서 그래요. 그래서 지지고 볶다가 결국 못 살겠다고 하면서 헤어집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먼저 죽게 되면 외로워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둘이서 같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혼자서 못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수행이란 혼자서 살아도 좋고, 둘이서 살아도 좋고, 걸어 다녀도 좋고, 차를 타고 다녀도 좋고, 오프라인으로 해도 좋고, 온라인으로 해도 좋고, 농사를 짓고 살아도 좋고, 공장에 가서 제품을 만들고 살아도 좋고, 장사하고 살아도 좋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봄도 좋고, 여름도 좋고, 가을도 좋고, 겨울도 좋은 삶이에요. 그것이 해탈입니다. 그것이 자유로움입니다.

여러분은 남편하고 못살겠다고 하다가 남편이 갑자기 병들거나 교통사고로 죽으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라고 하죠.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또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항상 지금이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행복해진 만큼 저절로 하게 되는 전법


이런 공부를 하면 자연스럽게 삶이 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인생이 행복해지고 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 법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듭니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전법하는 게 아니에요. ‘이 법을 알아서 눈 한 번 뜨고 나면 저렇게 아웅다웅 안 하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저절로 전법을 하게 되는 겁니다. 배가 아프다가 약을 먹고 나으면, 다른 사람이 배 아픈 모습을 볼 때 ‘이 약만 먹으면 다 나을 텐데’ 하는 마음에 그 약을 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전법에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먼저 공부를 해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느낀 좋음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불교를 믿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자비심과 연민의 마음으로 내가 경험한 것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응해도 좋고 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그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꼭 응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편안하게 이야기한 후에 이번에 안 하면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또 이야기를 해보면 됩니다. 만약 나를 위해서 전법을 한다면 상대가 응하지 않을 때 기분이 나쁘지만, 그를 위해서 전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응하는 것은 그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전법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수행도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수행도 마치 돈을 벌 듯이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에 부담을 갖고 하는 것 같거든요. 전법도 ‘아, 전법을 못해서 어쩌나’ 이러면서 하는데, 그러지 말고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교대학을 권유할 때도 너무 눈치 보지 말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경전반 졸업이 수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 법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깊은 이해가 남았습니다. 이해한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도 남았어요. 내가 받은 이익을 세상과 나누어 갖는 과정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다들 이사 준비하느라 바쁘시죠? 우리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할 건물도 가능하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 건물 짓는 기술까지는 갖고 있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전문가에게 위탁해서 건물을 짓긴 하였지만, 이사 가는 것은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가능하면 우리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기본 원칙
무엇보다 새로 지은 건물에서 사는 것은 수행자의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건물을 아예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해요.


수행자의 원칙에 맞지 않지만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이 많이 모일 공간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둘째, 외부 공간을 빌려 쓰니까 경제적으로 임대료가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공간을 빌려서 내는 월세를 계산해보니 건물을 짓는 비용이 오히려 적게 든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셋째, 정토회가 사회활동을 보다 활발히 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을 본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정토회의 본부는 문경 수련원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은 일종의 서울사무소 혹은 사회활동을 위한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도권에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공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건물의 용도로 보면 정토사회문화회관입니다. 가능하면 대부분의 공동체 대중들은 문경 수련원이나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고, 서울에는 꼭 필요한 최소 인원만 남고, 이 건물은 대중이 주로 쓰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새 건물은 정토회 본부라고 보면 안 되고 정토회의 사회활동에 필요한 공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검소하게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건물은 새로 지었지만 대신 책상이나 내부 시설은 일절 새로 구입하지 말고 쓰던 물품을 사용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불단이나 부엌 시설도 재활용을 하면 좋은데, 규격이 안 맞아서 몇몇 시설은 새 것을 구입해서 설치하게 됐습니다. 그 외에는 쓰던 것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재활용해서 배치해주시기 바랍니다.

160개 법당을 모두 철거하면서 두북 수련원에 이미 많은 물건이 들어와 있고, 앞으로도 많은 비품이 들어올 거예요. 그 물건들을 가져다 쓰면 됩니다. 모양이 안 맞으면 두북 수련원에 목공소가 있으니까 거기에서 규격에 맞게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사용하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크게 보면 우리는 이미 수행자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수행자들이 나무 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자꾸 오거나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니까 초막을 지었어요. 초막에도 또 문제가 생기니까 결국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2백 년 정도 지난 후에는 건물을 짓게 됐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나무 밑에 잘 수는 없더라도 초막 정도만 짓고 살아야 되는데, 세상에 발맞추다 보니 건물을 짓게 된 거예요. 대중성이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수행에는 단점도 됩니다. 자꾸 대중의 요구를 따라가게 되어 어느덧 나도 모르게 소비주의에 물들고 효율을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것을 늘 경계하면서 생활해야 됩니다.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 앞으로 공동체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더 검소하게 생활하며 더 정진에 힘쓰고, 세상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꼭 필요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들을 더욱더 많이 해나가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가
이렇게 새로 지은 건물에 대한 기본 입장이 분명해야 됩니다. 혹시라도 남에게 정토회를 자랑할 때 건물을 이야기하는 일은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자랑을 할 때 인물, 학벌, 돈, 건물,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콤플렉스의 소산이에요. 수행자는 항상 수행 정진해서 행복해지는 것으로 자랑을 삼아야지 숫자가 많다든지, 건물이 있다든지, 시설이 좋다든지, 세력이 있다든지, 이런 걸로 자랑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바르게 정진하는 사람이 수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고, 대중이 모여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은 대중들이 십시일반 보시해서 만든 건물입니다. 정부나 기업 등 외부의 돈을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정토회 회원들의 보시금으로만 만든 거예요. 그러니 이 건물은 대중을 위해서 지은 것이라는 인식을 꼭 해주세요. 혹시 대화를 하다가 마음 속에 건물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내가 소비주의에 물들고 있구나’ 이렇게 자각하고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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