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동안 명상 잘하셨습니까? 침묵을 하면서 편안한 가운데 다만 호흡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호흡에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죠? 몸은 이렇게 가만히 있지만 우리의 생각은, 시간적으로는 먼 과거로부터 먼 미래까지,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이 돌아다니는 마음을 코끝에 딱 잡아서 한 곳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 즉 지금 여기에 뚜렷이 깨어 있는 것이 명상입니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 괴로울 일도 없고, 화날 일도 없고, 슬퍼할 일도 없고, 초조하거나 불안할 일도 없고, 근심 걱정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고, 원망할 일도 없고, 그저 한가하고 조용합니다. 이것을 옛 선사들은 '적멸(寂滅)'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번뇌가 다 소멸하고 고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안 되죠? 명상을 하고 있으면 어쩌면 눈뜨고 생활하는 것보다 더 생각이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처음 연습하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정진해 나가면 조급함과 불안함이 놓아지면서 편안함과 한가함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번 명상수련을 통해서도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저런 증상이 나타났을 겁니다. 오늘은 그런 증상이나 의문들에 대해 한 번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통증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죠?

“통증을 그냥 지켜보는 평정심은 어떻게 키울 수 있나요? 명상 중 너무 심한 통증이 올라오는데 이것을 외면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명상을 하면 가슴을 쪼이는 것 같고 칼로 휘젓는 것 같은 그런 통증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리에 통증이 있으면 ‘다리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가슴이 아프면 ‘가슴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옆구리에 통증이 있으면 ‘옆구리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머리에 열이 나면 ‘머리에 열이 나는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뒷골이 당기면 ‘뒷골이 당기는구나’ 이렇게 알 뿐입니다. 그렇게 알 뿐 그냥 호흡에 집중하면 돼요. 그러면 통증을 피하려고 할 때보다는 조금 더 평정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갖고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셔서 그 연습을 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통증이 너무 심하니까 자꾸 외면하고 싶어 집니다.”


“평정심은 ‘가슴이 쪼이는 것 같구나’,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구나’, ‘머리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유지되는 겁니다. '아, 힘들어 죽겠어. 어떻게 하면 안 아프지?' 이러면 긴장을 하게 되기 때문에 평정심을 잃게 돼요. 다만 통증을 통증인 줄 알면 평정심이 유지가 되지만, 통증을 싫어하는 데에 끄달리면 평정심을 놓치게 됩니다.”

“네, 잘 알아들었습니다.”

“평정심이 유지되는 기술이 따로 없습니다. 어떤 통증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평정심을 잃은 것이고, 통증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싫어하거나 좋아하는데 집착하지 않으면 평정심은 저절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통증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지 못합니다. 통증이 오면 딱 싫어하는 감정이 앞서버리니까 마치 상대가 얘기할 때 기분이 탁 나빠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평정심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욕설이 나오는 거예요. 상대가 욕을 하더라도 '아, 저 사람이 화가 났구나' 이렇게 바라볼 수 있으면 부처님처럼 빙긋이 웃을 수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평정심이 유지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어떤 물건을 보고 먹고 싶은 생각이 탁 났다면 평정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코끝으로 냄새가 지나가서 먹고 싶은 욕망이 탁 일어났을 때 '아, 내가 냄새에 끄달리는구나' 이렇게 딱 알아차린다면 평정심이 유지된 것입니다. 그런데 통증이 너무 심하면 자동으로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 질문자처럼 대부분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요. 통증이 싫으면 그냥 다리를 펴버리면 되는데, 다리를 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다물고 참고 있으니까 평정심을 잃고 긴장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과정입니다. 처음 명상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리가 아프면 펴버리거나, 이를 악 다물고 참거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욕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초심자입니다. 상대가 욕을 하면 '아, 저 사람이 욕을 하네' 이렇게 보지 말고 '아, 저 사람이 화가 났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통증이 일어날 때도 '어떻게 하면 안 아프지?' 이렇게 보지 말고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만 봐야 합니다.

'이 통증은 자세를 평소에 이렇게 안 했기 때문에 생기는 몸의 자연스러운 증상일 뿐이다'

이렇게 신체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통증이 있더라도 점점 긴장을 덜하게 됩니다. 만약 칼로 도려내듯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못 참겠으면 다리를 좀 풀면 돼요. 다리를 푼다고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연습 기간이 더 길어져야 할 뿐이에요. 다리를 풀어버렸다는 건 그 고비를 못 넘어갔다는 겁니다. 만약 그 고비만 넘어가면 마음은 훨씬 편해집니다. 또다시 통증이 일어나도 예전보다는 훨씬 덜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참았는데 이 정도는 뭐'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마음의 긴장이 점점 완화됩니다.



단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밥을 안 먹으면 현기증이 나고, 그래서 쓰러지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평정심을 잃게 되거든요. 그런데 몇 번 이것을 경험하면 '배고픈 건 맞지만 그만한 일에 죽는 건 아니다', '현기증이 일어난 건 맞지만 그만한 일에 죽는 것도 아니고 아무 문제도 없다' 이렇게 됩니다. 신체의 원리를 탐구해보면 에너지가 공급이 안 되니까 현기증이 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3일 정도만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까요? 이것도 신체적으로 연구해보면, 밖으로는 음식을 안 먹지만 내 몸의 고기를 먹고 에너지를 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체중이 줄어드는 겁니다.

이렇게 신체에 대한 작용을 이해하고, 그런 현상을 몇 번 경험하게 되면, 배는 고프지만 마음의 평정심은 잃지 않게 됩니다. 절을 할 때나 등산을 할 때나 명상을 할 때 다리가 아픈 것은 신체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신체의 원리를 모르면 '이러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병이 나지 않을까?’, ‘몸에 열이 나는데 괜찮을까?' 이렇게 걱정하게 되는데, 몇 번 경험하고 나면 '아, 이건 그냥 몸의 반응이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몸에서 열이 난다고 해도 명상이라는 것은 육체를 움직이고 뛰는 게 아닌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요?



내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몸에 고장이 난 것이라면 원래 억제되어 있던 저항들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모르던 병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어요. 내가 무감각하고 예민하지 못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마음이 편안해지고 긴장이 풀어지고 예민해지니까 내분비 기관에서 일어나는 통증 같은 것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명상이 끝나고 검사를 해보면 몸의 이상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통증이 일어난다는 것은 신체적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좋은 일이에요. 통증이 없으면 우리 몸이 썩어도 모르잖아요.

'여기 문제가 있다, 고장 났다, 빨리 와라.'

통증은 이렇게 몸의 병을 알려주는 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막상 가보면 진짜 고장 난 것도 있고, 오류가 난 것일 수도 있는데, 다리 아픈 것 정도는 오류가 난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요. 길을 새로 포장하려고 길을 뜯어서 지금 고치고 있는 중인데, 그걸 잘못 보고 어떤 사람이 차가 다니기 힘들다고 신고할 수도 있잖아요. 지금 차가 다니기는 불편한 상황이지만 고치고 있는 중이니까 신고는 받되 개선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느끼는 통증은 그런 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명상을 할 때 왜 묵언을 하나요?

저는 명상을 할 때 묵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혼자 속으로 말을 하는 것은 묵언으로 봐도 되나요? 단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을 묵언이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거나 글로 써서 상대에게 표현하는 것도 하지 않아야 묵언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말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세요. (웃음) 말을 하면 관심이 밖으로 향하게 됩니다. 만약 산길을 혼자 걸으면 경치도 느낄 수 있고, 자기 자신도 돌아보게 되는데, 친구와 얘기하면서 걸으면 경치도 무심히 지나치게 되고, 자기 마음을 살피기도 어렵습니다. 명상은 오직 관심을 자기 내부로 두어서 호흡, 느낌, 마음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명상수련에서 묵언을 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말을 하면 관심이 밖으로 향하기 때문에 수행 차원에서 자기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중얼중얼하거나, 쪽지에 써서 전달하거나, 눈짓 몸짓 손짓으로 표현하는 것은 묵언의 본래 의미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묵언 중에는 모든 의사 표현을 중단해야 합니다.

 

둘째, 대중과 함께 수련할 때 묵언이 필요합니다. 내 말이 다른 사람이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으니 조용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때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을 뜻해요. 그런데 묵언은 조용히 하라는 뜻보다는 근본적으로 오로지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셋째, 묵언의 진정한 의미는 시비 분별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를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묵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비하는 마음으로 낸 소리가 아니라면 소리를 냈더라도 묵언을 한 것이 됩니다.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묵언을 어긴 것이 돼요.

 

이렇게 묵언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묵언을 한다면 눈짓, 손짓, 글로 써서 표현하는 것도 안 됩니다. 둘째, 대중과 함께 명상수련을 하기 때문에 조용히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눈짓, 손짓, 글로 써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셋째, 시비 분별하지 않기 위해 묵언을 할 때는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아도 마음으로 시비했다면 묵언을 어긴 것이 됩니다. 말을 했더라도 빗자루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등의 알리는 말을 한 것은 묵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묵언에는 세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있습니다. 대중이 모여서 명상을 할 때 묵언은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온라인 명상수련처럼 각자 개개인이 혼자 명상할 때의 묵언은 첫 번째 의미의 묵언을 지켜야 합니다. 한번 입을 떼면 자꾸 입을 떼고 싶기 때문에 명상을 하는 5일 동안은 묵언을 하고,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고, 입을 딱 닫고 살아보는 겁니다.”

 

, 잘 알겠습니다

 

 

온라인 시대, 법당이 모두 없어지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그런데 이제 온라인으로 전환이 되면 지역 법당이 모두 개인 법당으로 이전되기 때문에 지역 법당의 중요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개인 법당에서는 전법 활동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됩니다. 자기 수행을 비롯한 모든 수행을 개인 법당에서 하고, 모든 전법도 다 개인 법당에서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회원보다 인격적인 면이나 시간적인 면에서 조금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전법 활동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온라인 불교대학과 온라인 경전대학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으려면 그걸 진행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지기 때문이에요.또한 전법 활동가에 해당하지 않는 일반 회원들의 폭은 더 넓어져야 합니다. 회원은 광범위하게 참여하도록 하고, 전법 활동가의 기준은 더 높여서 온라인 불교대학과 경전반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해야 합니다.

 

 

전법 활동가와 광범위한 회원들

 

이렇게 바뀔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정회원 중에서 전법 활동가가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현재의 정회원 다수가 전법 활동가의 자격을 취득하게 되겠지만, 더 높은 수준의 봉사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회원으로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말에 열린 전국 대의원 회의 때까지 이 부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 통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이번 재편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새로 오는 사람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수행자를 지향하면 회원이 되면 되고, 시간적 여유가 되고 의지가 있을 경우 전법 활동가 신청을 해서 교육을 받으면 전법 활동가가 되면 되니까요. 다만 이번 재편 과정에서는 그동안 정토회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정회원들이 전법 활동가와 회원으로 분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어떤 절차를 거쳐서 진행할지가 가장 큰 쟁점이었던 겁니다.

 

만일결사준비위원회(이하 만준위)에서 제안한 방법은 현재 전법 활동에 의지가 있고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으로만 먼저 전법 활동가 모둠을 구성하고,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6개월간의 교육 과정을 거쳐서 합류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법 활동가와 회원, 두 가지로 분화되는 절차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준위가 그런 내용을 담은 1안을 제안했는데, 막상 공청회를 해보니 이 방식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2안을 냈습니다. 현재의 정회원 중에서 전법 활동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같이 가되, 6개월을 지나보고 본인이 의지가 없거나 자격 요건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사람은 그때 가서 빠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1안을 더 폭넓게 수용해서 나온 것이 2안입니다. 3안은 본인이 희망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현재의 정회원을 모두 전법 활동가 모둠으로 편성해서 출발하되 6개월 후에 재선거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안을 두고 투표를 했더니 4:4:2가 나왔습니다. 3안은 득표율이 가장 낮으니 일단 제외하고, 전국 대의원 회의에서는 1안과 2안을 갖고 다시 투표를 했습니다. 그 결과 원래 1안과 2안의 득표수가 40:42로 비슷비슷하게 나왔던 게 이번에는 55:44로 나왔어요. 1안의 득표수가 역시 더 많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의 3분의 2를 넘지 못했습니다.

 

 

전법 활동가의 자격이 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는 후속적으로 합류한다는 게 1안의 골자예요. 자격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원하는 사람은 다 같이 출발하자는 게 2안입니다. 2안의 맹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러다 중간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이 맡고 있던 부문에도 차질이 생기기 쉽다는 문제가 있어요. 둘째, 2안대로 한다면 이번에 편성하는 모둠의 구성원들이 선거까지 참여하게 되는데, 중간에 빠질 사람이 선거에 참여해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동안 정토회가 운영되어 온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안은 전원이 전법 활동가로 전환해서 간다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하면 2안과 같은 모순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방식으로는 6개월까지만 임시로 운영하고, 6개월 후에 다시 정식 편재를 하자는 것이 3안입니다.

 

 

1안과 3안의 공통점은 책임을 질 사람들로 편재를 한다는 거예요. 다만 1안은 지금 출발하고, 3안은 임시 편재했다가 6개월 후에 재편재를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2안과 3안은 지금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다 함께 가자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1안은 전법 활동가로 전환하기를 원하지만 당장은 자격 요건에 미달되거나 책임을 지기 어려운 사람은 나중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두 안과의 차이점입니다. 3안을 채택할 경우 1안과 2안의 공통점을 포괄할 수 있지만, 본인이 전법 활동가를 희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1안과 2안의 지지율이 80퍼센트나 되기 때문에 이런 대중의 의견도 고려해야 해요.

 

정리하면, 모두 함께 가자는 것이 3안입니다. 본인이 원해야 한다는 것이 2안이에요. 최종적으로는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1안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결합해서 결국 이렇게 수정안을 만들었습니다.

 

‘전법 활동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다 지금 출발하되 8월에 다시 재선임을 한다’

 

그 내용이 지난 전국 대의원 회의와 서원행자 회의에서 최종 통과가 된 겁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좋은 법을 전하기 위해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분 모두가 전법 활동가가 되는 교육에 참여를 하시라는 겁니다. 나는 도저히 못 하겠다는 사람은 빠지고, 몸이 안 좋거나 시간이 안 되는 사람도 빠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다 전법 활동가 교육에 참여하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8월까지는 전법 활동가가 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신속하게 진행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가 시간을 좀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5개월 동안은 임시 운영을 해볼 예정이에요. 뭐든지 시운전을 좀 해봐야 하잖아요. 약도 개발하려면 3차까지 임상실험을 하듯이 온라인정토회로 전환하는 것도 5개월 정도 시운전을 해보고 ‘오케이, 좋다’ 하면 그대로 가고, 수정을 좀 해야겠다고 하면 수정을 해서 8월에 정식으로 출발을 하고자 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 1년 반 정도 운영을 해보고 나서 부족한 부분은 더 수정을 해서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할 때에는 앞으로 30년 동안 운영될 시스템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에요

 

이렇게 1차 임상실험, 2차 임상실험을 거쳐서 최종적인 운영안을 마련하면, 조금 속도가 늦어지기는 하지만 안전하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온라인 시대에 새로운 의사결정 방식

 

“정토회에서는 모둠장, 지회장, 지부장, 전국 대표를 추천 방식으로 온라인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추천 단위가 어디이고, 선거 방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모둠원들이 모둠장을 선출합니다. 선출된 모둠장들이 지회장을 추천합니다. 추천된 후보를 놓고 전체 모둠원들이 투표를 해서 지회장을 최종 선출합니다.

 

지부장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회장들이 지부장을 추천하고, 모둠장들이 모여서 투표를 통해 지부장을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전체 회원이 모여서 결정된 지부장을 승인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전국 대표는 지부장들이 추천을 하고, 지회장들이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전국 모둠장들이 모여서 승인하는 절차를 거쳐 최종 결정됩니다.

 

추천하는 단위가 있고, 그 아래에 의결하는 단위가 있고, 그 아래에 승인하는 단위가 있는 겁니다. 중요한 안건은 마치 국민투표처럼 더 아랫 단위의 의사를 물어서 최종 승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동안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수평적 권력 분립이 아닌 수직적 권력 분립이라는 새로운 방식이에요.

 

 

이런 과정은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특별히 어려울 게 없습니다. 온라인 투표는 결정이 금방 나게 돼요. 후보 한 명이 추천되었을 때는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당선이 되고, 두 명 이상이 추천되었을 때는 누구든지 과반수를 얻으면 됩니다. 한 명을 추천했을 때는 선택권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찬반 투표에서 3분의 2를 얻지 못하면 부결되기 때문에 선택권이 있는 겁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3분의 1만 있어도 당선되지 못합니다. 절대 다수가 지지해야 당선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두 명 이상이 추천되었을 경우에는 선택권이라는 개념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투표 결과 낙선한 사람은 기분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정토회에서 하는 선거는 딱히 선거라기보다는 추대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두 명을 추천해주는 게 좋겠다고 할 때도 있고, 세 명을 추천해주는 게 좋겠다고 할 때도 있고, 한 명을 추천해주는 게 좋겠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다만 한 명을 추천할 때는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두 명 이상 추천할 때는 과반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어서 전법 활동가와 회원 사이의 이동 문제에 대한 질문도 나왔습니다.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회원 체제로 전환

 

“전법 활동가의 자격이 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회원으로 있던 사람이 다시 전법 활동가로 돌아오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절차가 있다기보다 예전과 달리 이동이 자유로워졌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불교대학 진행자 자격을 취득했는데 일이 있어서 그만두게 되었다고 합시다. 예전에는 실제 활동을 하지 않아도 자격을 그냥 계속 유지했는데 이제는 이동이 자유로워집니다. 불교대학 진행을 못하면 전법 활동가 모둠에서 빠졌다가, 본인이 또 할 수 있게 되면 다시 신청하면 돼요. 신청했을 때 다른 자격은 다 갖추어져 있다면, 그사이에 바뀐 부분에 대해서 점검 교육만 받으면 전법 활동가 자격이 바로 회복됩니다. 요즘은 불교대학 진행 관련 세부사항이 자주 바뀌니까 점검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꾸 들어왔다가 나갔다가를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준비가 확실하게 되었는지 좀 더 꼼꼼히 확인하는 정도의 작업이 있을 겁니다.

 

현재 정회원들은 일단 전법 활동가 자격을 취득하면 그걸 기본으로 해서 이동이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처음 자격을 얻을 때는 최소한 3년 동안은 불교대학 진행자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해요.”

 

“네,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정토회는 모든 것을 다 이렇게 자유롭고 투명하게 진행하려고 해요. 전법 활동가가 되는 것도, 서원행자가 되는 것도, 결사행자가 되는 것도, 법사가 되는 것도 이렇게 공고가 나가면 원하는 사람이 직접 신청하는 방식으로 갈 거예요. 필요할 때마다 공고가 나갑니다. 그러면 자격이 되는 사람은 신청하고, 신청을 했는데 자격이 안 되면 ‘이러저러한 것이 미흡하니 자격을 갖춰서 오세요’라고 안내를 받습니다. 미흡했던 부분을 채웠다는 확인이 되면 교육에 들어가고, 교육을 마치면 심사를 거쳐 자격을 취득하고, 활동을 못하게 되는 사정이 생기면 사표를 내고 회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면 또 전법 활동가 신청을 하면 돼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원 규정도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고 간단해집니다. 본인의 자발성에 기초해서 선택하되, 일단 선택을 하면 그에 대한 책임이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전번 활동가가 되면 당신에게 이러이러한 책임이 있습니다.’

‘스태프가 되면 당신은 이러이러한 역할을 최소 6개월 동안 책임져 줘야 합니다.’

 

이렇게 책임져야 할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해 줄 겁니다. 그것을 이수하기만 하면 자격이 갖춰지는 겁니다.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일인데, 억지로 하지 말고 좀 가볍게 해 나가자는 취지예요.

 

꼭 전법 활동가가 되지 않아도 회원으로서도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고 대우받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전법에 의지가 있어서 전법 활동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전법 활동가가 될 필요가 없어요. 기도를 열심히 한다거나 보시를 많이 하는 분들은 회원으로서 그분의 뜻을 굉장히 존중하고 기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법 활동가 모둠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법 활동가는 직접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진행해야 합니다. 전법 활동가란 진행자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시면 돼요.”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경문에 나오는 ‘문(門, skt. dvara)’은 출입문이란 의미보다는 따위, 부류, 그런 종류, 상태, 가르침 등의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문(門)’이란 그런 마음상태, 혹은 마음이 드나드는 문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문(門)이 곧 마음(心)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마명(馬鳴, 아슈바고샤/Asvaghoa, AD 2세기) 보살은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 즉 생멸심과 진여심이 있다고 했다.


• 생멸심(生滅心)이란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측면을 말한 것인데, 이 생멸심이 바로 중생심이다. 중생은 대상에 따라서 온갖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마치 죽 끓듯 일어나,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즉, 세간법의 세계를 말한다.


• 진여심(眞如心)이란 우리의 본래 마음으로서, 이 마음은 맑고 청정하다고 해 청정심(淸淨心), 부처님의 성품과 같다고 하여 불성(佛性), 여래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여래장(如來藏), 이 자리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고 해서 ‘이 뭣고’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마음의 참된 모습을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를 ‘언어를 떠난, - 언어를 초월한 말(離言眞如)’이라고 했다. 즉, 출세간법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원효(元曉, 617~686) 대사는 사람에겐 부처와 같은 마음과 속된 마음, 이렇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다. 부처와 같은 마음이 진여심이요, 속된 마음이 생멸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여심을 추구하는 가르침인 진여문(眞如門)은 모든 상대적 모습을 떠난 불변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생멸심의 가르침인 생멸문(生滅門)은 진여문의 반대말로서, 중생이 태어나고 죽게 되는 문, 중생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말한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은 일심이문(一心二門)을 말했다. 한 마음에 두 개의 문(심)이 있다는 말이다. 마음은 진리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그 마음의 문에는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로 가는 진여문(眞如門)과 중생세계로 가는 생멸문(生滅門)이 있다. 즉, 일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하는 것이 일심인데, 이 일심은 진여와 생멸의 두 측면을 가진다. 생멸문은 세간법이요, 진여문은 출세간법을 일컫는다.


진여문을 심진여문(心眞如門), 생멸문을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도 한다. 즉, 이문(二門)이란 진여문과 생멸문인데, 그 자체가 번뇌와 무명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진여문이고, 번뇌와 무명 작용에 유전해 가는 것이 생멸문이다. 생멸에서 진여로 나아가는 문이 진여문이고, 진여에서 생멸로 나아가는 문이 생멸문이기에 이문(二門)이 된다.

<기신론>의 법문을 보자.
“현시정의자 의일심자 유이종문(顯示正義者 依一心者 有二種門) - 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일심이라는 것에 의지해 두 가지 문이 있음이니,
일자 심진여문 이자 심생멸문(一者 心眞如門 二者 心生滅門) - 하나는 마음의 진여문이요, 둘은 마음의 생멸문이다.”


여기서 마음을 진여와 생멸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여문이라는 것은 진여(眞如), 즉 ‘참나’를 느껴가는 수행과정을 말하며, 생멸문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나타나고(生) 사라지는(滅) 생각들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함부로 움직여 타락돼가는 과정을 생멸문이라고 표현했다. 즉, 생멸문은 본래 고요함을 잃고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 - 번뇌가 들끓는 상태를 가리킨 것이다.

이른바 오온(五蘊)을 추구하면 색(色)과 심(心)이 있지만, 육진(六塵) 경계, - 육진을 초월한 경계는 필경 무념(無念)이다. 마음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시방으로 구해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오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하는데, 색을 제외한 나머지 수ㆍ상ㆍ행ㆍ식이 마음(心)이다.


육진(六塵)이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하는데, 이들이 6근(六根)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서 우리들 정심(淨心)을 더럽히고 진성(眞性)을 덮어 흐리게 함으로 진(塵)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육진 경계를 넘어서야 무념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일반 범부가 일상적으로 자아(自我)라고 여기는 것은 바로 심신(心身)의 ‘나’,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5온(蘊)의 ‘나’를 말한다. 물리적 존재인 신(身)이 곧 색이고, 심리적 존재인 심(心)이 곧 수ㆍ상ㆍ행ㆍ식이다. 이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무더기를 진제(眞諦, Paramartha, 499~569)는 ‘5음(陰)’으로 번역했고 현장(玄奘, 602~664)은 ‘5온(蘊)’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공(空)이라는 것이다. 색(色)이 곧 공(空)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중관(中觀)사상이고, 공으로 드러나는 진여가 곧 심(心)이기에, 색이 곧 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유식(唯識)사상이다.


유식에 따르면, 일체제법이 모두 다 심(心)의 변현(變現) 결과로서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나 마음 바깥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6진 경계는 찾을 수는 없다. 일체는 마음의 경계인 것이다.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도 포착되지 않기에 시방세계 어디에서도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미혹하기 때문에 동(東)을 서(西)라고 해도 방향이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무명으로 미혹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각[念]이라고 여겨도 마음 바탕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은 불가득(不可得)이지만 중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혹해서 동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해도 방향 자체가 실제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이 근저에 있기에 우리가 방향에 미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의 본래 마음인 진여성(眞如性)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떠올린 망념과 동일시하면서 그 망념에 끌려 다닌다 해도, 마음 바탕의 청정한 진여성이 사라지거나 망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여성과 그 본각(本覺)이 근저에 놓여 있기에 그 진여 본각을 알지 못하는 미혹이 미혹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관찰해 마음에 염(念)이 없다는 것을 알면,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 안의 마음 바탕을 관해 마음은 본래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곧 자신의 마음을 진여로 자각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멸하는 망념을 따라가지 않고 그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생멸문에서 몸만 돌리면 바로 그 자리가 곧 진여문이다.
생멸심과 진여심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마음이 아니라 마치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파도요, 파도는 바닷물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파도와 바닷물은 둘이 아니다. 또 푸른 하늘에 비유할 수도 있다. 하늘의 본바탕은 맑고 푸르다. 그러나 때때로 흰 구름ㆍ뭉게구름ㆍ먹구름이 낄 때도 있지만, 맑고 푸른 하늘의 본바탕은 변함이 없다. 여기서 맑고 푸른 하늘은 우리의 본래 마음이고, 구름 낀 하늘은 생멸심이다.


그리고 거울에 비유해 보자. 여기 거울이 하나 있다. 이 거울은 본래 맑고 깨끗했다. 그런데 이 거울에 때가 묻고 먼지가 끼면 물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코가 둘로 보이기도 하고, 한 쪽 눈은 작고 다른 한 쪽 눈은 크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때가 묻었다고 해서 거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맑고 깨끗한 거울이 우리의 진여심이라면, 때 묻고 먼지 낀 거울이 생멸심이다. 때 묻고 먼지 낀 거울도 깨끗이 닦아내면 맑고 깨끗한 거울이 될 수 있듯이, - 진여문에 들어설 수 있듯이 우리 중생도 열심이 수행정진하면 불심(佛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진여문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불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이 문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ㆍ무형의 사물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고 애착이나 집착을 놓아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세속적인 마음(생멸심)이 일심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되는 진여심 위에 세속적인 마음인 생멸심이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면서 일심으로 돌아가야 함, - 일심으로의 회귀해야 함을 말한다[회귀일심(回歸一心)].


일심(一心)이란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의미한다. 일심과 같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마음으로 정돈된 마음을 진여심(眞如心), 심진여문(心眞如門) 혹은 불심(佛心)이라 한다. 불심은 부처와 같이 깨달은 마음이다. 이 불심을 일심이라고 한다. 일심은 불교에서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이다. 일심은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어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서 그냥 ‘참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진여문과 생멸문은 분리될 수 없지만은 동일한 중생심을 양쪽에서 관찰한 것이다. 영원한 불심에서 이를 보면 심진여문이요, 생멸의 현상에서 이를 보면 심생멸문이다.
일심의 ‘일’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고, 개체가 그 안에서 진실로 살아 있는 조화로운 전체가 일심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 있고,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음을 말한다. 일심은 우주의 진리, 진여심을 말하는데, 이 일심이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이다.


그리하여 일심의 덕성은 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의 모든 대상 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춰주듯이 환하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고, 어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대승기신론>의 이러한 일심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독특한 사상으로 발전시킨 고승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으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和諍思想)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一心二門論)이다.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원효 대사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를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비록 두 가지 문이 있어서 다른 문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문이라는 것이 원효 대사의 사상이다. 일심은 중생의 마음이며, 그 문의 이름은 진여문인 동시에 생멸문으로 불린다는 것이 원효 대사의 대답이었다.

이와 같이 진여문과 생멸문은 같은 문으로 중생의 마음의 문이다. 일심은 비어있는 공(空)이며 누구나가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중생이 들어가더라도 항상 비어있다. 마음의 문은 우주 전체가 들어가도 닫히지 않는다                                                                                           

                                                                                                                   (이미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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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온라인 전환은 정토회가 처음 출발할 때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변화의 시기에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강조했습니다.

 

다시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로

 

“이제 정토회는 온라인이라는 기술과 결합하면서 ‘내가 사는 곳이 법당이다’ 하는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원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원칙에 더 맞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간을 마련하고 법당을 꾸미면서 어느덧 우리는 기존의 불교를 조금씩 닮아가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 아닌 스님이 되고, 절 아닌 절이 되는 구조로 점점 변화되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방향으로 오히려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수행자로서 자기 수행을 하면서 자기가 사는 주변부터 전법하는 이런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겁니다. 부처님의 전법 선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고 홀로 가라.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해라’

 

사회나 집단의 발전 정도를 평가하는 방법

여러분들은 정토회의 미래를 짊어진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오늘은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 나라가 처음 발전할 때, 한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릴 때, 한 나라가 쇠망할 때, 각각 지도력이 어떻게 다른가 살펴보겠습니다.

 

 

한 나라가 발전을 할 때는 지도자 그룹이 대중보다 앞을 내다봅니다. 그래서 대중이 지도자 그룹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도자 그룹은 미래를 보고 끊임없이 새로운 안을 제안하고 준비하는데 대중은 현실의 문제만을 갖고 계속 얘기하니까 여기에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절대적 지지를 받지는 못해요. 이렇게 지도자는 대중의 의사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뒤로 숨어서는 안 됩니다. 앞을 내다보면서 비록 지금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한 발 앞서 나가야 합니다. 사회지도층이 이렇게 할 때 그 사회는 성장하고 많은 부분이 재창조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어느 정도 성장을 하게 되면 대중도 의식이 올라오는 국면에 진입합니다. 그런 사회를 보통 태평성대라고 하는데 그때는 선각자들이 이루어놓은 성장의 과실을 먹고사는 거예요. 이때는 지도자가 대중의 뜻을 받들어서 대중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그래서 대중의 지지는 굉장히 높지만, 성장은 멈추게 돼요. 꼭 경제적 성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성장이 멈추고 사회가 정체됩니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쇠퇴할 때는 지도자 그룹이 대중보다 의식 수준이 떨어져서 대중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성장기에는 대중이 지도자 그룹에 불만이 있다가도 조금 있으면 해소가 되는 것을 반복했다면, 쇠퇴기에는 갈수록 불만이 커져요. 대중을 끌고 가는 힘도 없고, 심지어 대중보다 지도자 그룹이 뒤처집니다. 그래서 대중이 볼 때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지도자 그룹이 하게 됩니다.

 

꼭 경제적인 척도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자 그룹이 어떠한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지금 발전 국면에 있는지 정체 국면에 있는지 쇠퇴 국면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대중보다 앞서가는지, 대중과 같이 가는지, 대중보다 많이 뒤처지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면 됩니다. 대중이 봐도 이해되지 않는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쇠퇴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에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

 

그래서 여러분들도 대중의 여론을 항상 수렴해야 하지만 대중의 여론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반해서 가도 안 되지만, 거기에 안주해도 안 됩니다. 대중의 의사를 그대로 반영해서 할 바에야 대의제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전 회원이 투표해서 결정하면 되지 굳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뽑아서 대의제도를 둘 필요가 없잖아요. 또 회원들의 의사를 대변하라고 여러분들을 뽑아 놓은 것인데 여러분들이 거기에 반해서 엉뚱하게 간다면 그것 또한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중들의 뜻을 그대로만 반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중의 뜻을 고려하되 대중보다 한 발 앞서가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 국면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현재 우리가 하는 행위를 보면, 발전 국면에 있는지, 정체 국면에 있는지, 쇠퇴 국면에 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 또는 단체를 이끄는 리더들이 회원의 수준보다 조금 앞서가는지, 같이 가는지, 뒤에 가는지를 보면, 어느 국면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정토회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니까 어리둥절한 국면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가능하면 대중의 낙오가 적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변화 국면에서는 한 명도 낙오가 없도록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낙오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낙오를 최소화할 것이냐?’ 그리고 ‘안전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이렇게 접근해야지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갈 길을 못 간다면 변화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게 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여러분들이 회의를 하시면 좋겠어요. 충분하게 논의해보니 아직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면 변화를 보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방향이 정해졌고, 여론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서 결론이 났다면, 신속하게 재편하고 집행을 하는 것이 길게 봤을 때 더 좋게 평가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때 그렇게 재편하길 잘했다’, ‘빨리 재편하기를 잘했다!’ 이렇게 평가하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직위가 없어질까 봐 걱정이 된다면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 정토회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고 정토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니까 자기 개인의 거취나 개인적인 이해관계, 또는 살아온 습관에 너무 안주하면 진취적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내려놓고 어떻게 하면 정토회가 좀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공청회를 여러 번 해보니까 대중들 중에는 마음속에 마치 회사가 구조조정을 해서 실직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분들이 일부 있는 것 같아요.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딱 버리셔야 합니다. 원래 내가 정토회에 처음 참여할 때는 수행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두 가지예요.

 

첫째,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전법입니다. 다만, 어린아이들이나 장애우, 극빈자, 이런 사람들은 법을 배워서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전법을 넘어서서 그들을 보살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환경을 보존하는 활동을 비롯해 공동체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이 땅에 실현해야 할 사회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한가?’입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도 이 좋은 법을 만나서 행복하도록 내가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이 핵심에 추가적으로 사회적 정의가 붙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런 중간 간부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행정 체계가 잡히면서 직위라는 게 자꾸 생겨나게 된 거예요. 작금의 불교계를 보면, 심지어 출가를 한 스님들 사이에서도 돈이 되는 절과 그 절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주지라는 직위를 갖고 다툼이 계속 일어나지 않습니까?

 

 

코로나 사태와 온라인 전환으로 큰 변화가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이번 기회를 통해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간다는 그런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지부장이나 회계 역할이 필요해서 그 소임을 맡으라고 하면 기꺼이 ‘알겠습니다’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되, 그런 소임도 항상 한시적으로 하는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만든 법당도 용도가 없으면 과감하게 폐기하듯이 우리가 갖던 지위도 조직이 개편되고 용도가 다하면 당연히 가볍게 내려놓아야 해요. 항상 우리의 중심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의 핵심은 자기 정진과 전법 이 두 가지가 근본입니다. 거기에 추가로 환경 실천이라든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라든지, 평화라든지, 이런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활동도 함께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주어진 과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와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끼리 충분히 토론한 뒤에 내일 아침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점이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또 대화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고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재 법문이 끝나고 대의원들은 한 손을 들고 대의원의 다짐을 함께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준비된 안건에 대한 보고와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전국 대의원 회의의 주된 안건은 온라인 정토회 사업방향과 조직개편안을 심도 있게 심의하는 것입니다.

 

 

먼저 상임위원회 회의 결과를 보고 받은 후 행정처 사업 보고와 예결산 보고를 듣고 모둠 토론을 100분 간 했습니다. 이어서 2차 만일결사준비위원회로부터 온라인 정토회 사업방향과 조직개편안에 대한 발표를 듣고 다시 모둠 토론을 100분 간 했습니다.

 

오늘은 활발한 모둠 토론과 질의응답 시간만 가진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충분한 토론 후 중요한 의결 사항은 내일 진행될 예정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에는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200여 명의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가볍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2021년이 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오늘이 1월 마지막 법회네요. 어릴 때는 세월이 안 가는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빨리 가는 것 같아요. 연초에 일 년 중 언제 강의하고, 언제 수련하고 일정을 적다 보면 12월까지 하루 만에 다 가버리는 기분입니다.

 

현재 정토회는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정토회가 지역에 있는 법당 중심이었다면 온라인 정토회는 각자 사는 공간이 곧 법당이 됩니다. 이제 정토회 회원들은 전 부 다 지역 법당에서 개인 법당으로 이동을 해요. 이런 변화에 좋은 점도 있고, 또 안 좋은 점도 있어요. 좋든 싫든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같이 추운 날에는 개인 법당이 더 좋아요. 제가 있는 문경 수련원은 오늘 아침에 영하 15도까지 떨어졌습니다. 저는 머리털이 없으니까 지금 법문 하는데 머리가 선뜩선뜩 해요. 털모자를 쓰고 법문을 할까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보기 안 좋다고 말려서 모자를 안 썼습니다. (웃음) 그럼 이제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몸집이 왜소한 아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괴로워요

“저는 키가 작습니다. 몸집도 아주 작은 편입니다. 그런데 저희 아들이 저를 닮아서 키가 작고 몸집도 작습니다. 지금 대학생인데 제 눈에는 꼭 중학생처럼 보입니다. 아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무지 애를 쓰고 기도도 하지만, 막상 멀리 있던 아들이 집에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힘듭니다. 아들의 존재는 저에게 가장 큰 기쁨이기에 아들을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보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편안하고 기쁘게 아들을 볼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면 제가 깨우쳐주면 되는데 아는 데도 안 된다고 하기 때문이에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다음 생에는 키가 크게 태어나길 비는 수밖에 없네요. (웃음)

 

 

옛날에 산에 있는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 먹고 살 때는 모계 사회라고 해서 여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여자라고 불편한 것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노동을 하게 되니까 남자가 유리해졌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특히 요즘은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몸집이 작거나, 키가 작거나, 힘이 약하다고 해서 불리한 것이 하나도 없어졌어요. 몸집이 작다고 자판을 못 누르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 터치를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몸집이 작다고 해서 자동차 운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포크레인 운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여성들이 하등 불리한 것이 없어졌습니다. 아직도 큰 기계는 남자가 다룬다는 관습적인 문제가 남아서 그렇지 지금은 포크레인을 운전하든, 차를 운전하든, 기관차를 운전하든, 비행기 운전을 하든, 여성이라고 해서 못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하물며 사람이 키가 작다고 못할 일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자의 걱정은 힘이 중요한 사회, 소위 농경사회라면 좀 걱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을 걱정할 시대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어떡하겠어요? 그러니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방법이 있다면, 질문자가 정신을 차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런 불편할 이유가 없는데 과거의 관습에 의해서 불편하다고 생각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무슨 성씨냐 이런 것 때문에 불이익이 하나도 없는데 상놈 성을 가져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여자라고 해서 아무런 차별도 없는데 여자라고 불리하다는 얘기를 한다면 방법이 없잖아요. 지금 질문자는 과거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다리를 못 쓰거나 하면 병신이라고 차별을 했잖아요. 그리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장애는 어떤 징벌의 결과가 아닙니다. 다만 장애가 있으면 좀 불편할 뿐이에요.

 

더군다나 요즘은 불편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과학 기술을 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새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비행기를 발명했고, 호랑이보다 속도가 더 빠른 자동차를 발명했어요. 그런 것처럼 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앞으로 과학기술을 통해 전부 다 개선이 될 겁니다. 사고로 팔을 잃었다면 의수를 하면 되고, 다리를 잃었으면 의족을 하면 됩니다. 현재 기술력으로는 의수나 의족이 육체의 손발보다 기능이 못하기 때문에 핸디캡이 되지만, 앞으로는 의수와 의족이 훨씬 더 육체의 팔보다 힘도 더 세고 기능도 더 좋아질 거예요. 디지털 눈이 개발되어서 육체의 눈보다 훨씬 더 잘 보이게 되면, 보통 사람도 멀쩡한 눈을 빼고 디지털 눈으로 교체할 겁니다. 처음에는 사고가 나서 개선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보통 사람도 멀쩡한 팔을 자르고 의수를 하게 될 거예요.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성형이 그렇잖아요. 성형이라는 것은 원래 다쳐서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복원하기 위해서 나온 기술이에요. 그런데 성형 기술이 점점 발달하다 보니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얼굴을 예쁘게 하려고 너도나도 성형을 하기 위해 난리잖아요. 지금의 성형은 더 이상 의술이 아니라 미용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앞으로 이런 문제가 곧 생깁니다. 이런 인간을 ‘사이보그’라고 해요. 지금 사이보그 기술은 거의 실용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도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닙니다.

 

시골에 가 보면 관절이 좋지 않아서 다리를 못 쓰는 어르신들이 전동차에 앉아서 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분들은 제가 걷는 것보다 훨씬 빨리 갑니다. 다니는 데 아무 불편이 없어요.

 

이런 시대에 살면서 지금 그런 얘기를 하니까 제가 볼 때 좀 한심해 보이네요. 내일부터 정토회 오지 말고 어디 다른 절에 다니면 어떨까요? 정토회에 다니고 있다는 게 창피할 정도예요.” (웃음)

 

 

“저도 제가 좀 한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스님이 봐도 한심한데 본인도 그걸 알아야죠. 질문자의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해서 사는 사람이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절반입니다. 장애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장애인’이라는 말도 요즘은 쓰지 않고 ‘장애우’라는 말로 사용하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질문자가 너무 욕심이 많은 겁니다. 건강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해요. 만약 아이가 자신에 대해 너무 왜소해서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시대가 바뀌었다. 옛날 같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격려를 해줘야 해요. 아이는 멀쩡하게 잘 지내는데 엄마가 자꾸 그렇게 하면 결국 엄마로 인해 아이에게 열등의식이 심어지게 됩니다.

 

또 역사적으로도 한 번 보세요. 나폴레옹도 그 시대에 키가 아주 작았어요. 등소평은 150센티미터 수준이었어요. 그런데도 13억 중국을 호령했잖아요.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성공시킨 박정희 대통령도 키가 작았잖아요. 꼭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잘 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걸 가지고 논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질문자가 외모를 갖고 평가하는 잘못된 소비주의에 물들어서 괴로운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도 불법을 탁 듣고 나면 정신을 차려야죠. 불법이 무엇입니까. 불생불멸 불구부정이잖아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넓은 것도 없고, 좁은 것도 없습니다. 무거운 것도 없고, 가벼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비교에 의해서 그렇게 규정될 뿐입니다. 이렇게 불교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정신을 차리세요.” (웃음)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할 것도 없어요. 딱 한 생각만 바꾸면 됩니다.

 

‘아!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다 존엄하다.’

 

이번에 젊은이들을 위해서 나온 새로운 책이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열등한 것이 없어요. 그냥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양지 식물은 양지 식물대로, 음지 식물은 음지 식물대로, 다 서로 다를 뿐이지 모두 존엄합니다. 인종도 키가 큰 인종이 있고, 작은 인종이 있고 또 같은 인종 안에서도 키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질문자가 키가 작은 문제는 한국에서 좀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됩니다. 통일이 되면 남한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되는 북한 사람들은 키가 질문자의 아들만큼 작아요. 왜냐하면 북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양 부족으로 키가 남한의 초등학생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한 아이들은 직접 만나보면 굉장히 똑똑해 보여요. 겉보기에는 키가 작으니까 일곱 살, 여덟 살이겠구나 싶은데, 실제 나이는 열 두세 살이니까요.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가 참 똘똘해서 나이를 물어보면 벌써 고등학생 나이예요.

 

그러니 질문자가 지금 딱 깨달아서 해결이 안 되거든 하루빨리 통일이 되도록 모든 일을 제쳐두고 통일운동을 하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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