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제안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중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하면 진행을 안 해도 돼요. 그런데 온라인으로 개편하는 핵심은 전법활동에 전념하자는 거예요. 예전처럼 함께 하자고 붙들고 있으면 봉사할 마음을 내고, 그냥 놔두면 봉사할 마음을 안 내고, 이렇게 운영하는 방식으로 가지 말자는 겁니다. 억지로 봉사를 하도록 하지 말고, 항상 열어두고 자발적으로 신청을 받아서 운영하자는 거예요.

 

 

정토회에는 발심행자, 서원행자, 결사행자라는 회원 제도가 있습니다. 이것도 온라인 시대에는 발심행자 조건이 되는 사람을 찾아가서 ‘꼭 해봐라’ 하면서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인이 발심행자가 되겠다고 신청서를 내면 교육을 받아 발심행자가 되고, 서원행자도 위에서 추천하는 게 아니라 서원행자가 될 자격 조건이 되는 사람이 본인 스스로 신청하고 교육을 받아 서원행자가 되고, 결사행사나 법사도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이 일을 꼭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하지 말자는 거예요. 온라인 시대에는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신청자가 없으면 그냥 두고 가자는 겁니다.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포기하고 간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온라인 시대에는 자율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래야 창조성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법당을 버릴 수는 없었잖아요? 법당이 있는 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온라인 시대에는 법당이 다 없어지고 내 방이 법당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 봉사도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면 됩니다. 그렇게 조직을 가볍게 개편해서 가자는 거예요.

 

 

억지로 하는 봉사 vs 자발적으로 하는 봉사

앞으로는 봉사자 모집 공고를 내서 신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그들을 모으고 교육해서 일을 진행해나가면 됩니다. 정토회는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고 원(願)을 세운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발심행자가 되면 봉사를 하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일반회원이 되면 봉사를 안 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말고, 포기하고 가자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정토회를 그만두는 사람이 생긴다면 정토회의 활동이나 재정 수입이 줄어들겠지만, 대신 지출도 확 줄어들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내서 봉사를 해야지 억지로 보시하고 봉사하도록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봉사를 할 사람은 마음껏 하도록 해 주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되도록 하자는 겁니다. 일반 회원이 되면 누구나 법회를 들을 수 있고, 수행도 할 수 있도록 다 열어주되, 발심해서 더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더 할 수 있게 하자는 방향이에요. 전체 조직을 완전히 개방적으로 개편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본인이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듯이 인연을 맺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책임지기 싫으면 참여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죠.

 

일반 회원들을 팽개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자는 거예요. 그래야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어집니다. 일이 힘들어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 억지로 하는 것은 수행의 본분과도 맞지 않아요. 그런 관점에서 다시 한번 검토해보자는 것입니다.

 

정토회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돌아보면 상당수 활동가들이 힘들지만 여기까지 온 측면도 있어요. 그것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가지 말고 자발성에 기초해서 일을 해나가는 방향으로 개편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정토회에서는 대의원제도 또한 불필요합니다. 오늘 공청회를 하듯이 시시때때로 대중들의 의사를 받기 위한 공청회를 열어서 의결하면 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온라인 시대에 맞게 체계를 개편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초안도 이번 공청회가 끝나면 다시 수정해서 내려갈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다시 논의하고 수정해서 새로운 안을 만들어 가게 될 겁니다.

 

 

과거에 연연하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여기서 가장 큰 쟁점은 모둠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활동가와 비활동가를 같은 모둠으로 편성해서 함께 가자는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만약 여러분들이 이 의견에 찬성한다면 저도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그렇게 가도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진지하게 토론해봤으면 해요. 정말 그것이 효과적인지, 여러분들이 과거에 연연해서 제기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토론해보라는 겁니다.

 

토론을 충분히 해봤는데도 여러분이 그렇게 가기로 결정하면 그렇게 가면 됩니다. 온라인 시대이니까 진행해 나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다시 화상회의를 해서 바꾸면 돼요. 과거에는 한번 결정하면 3년은 간다는 원칙을 정했는데, 지금은 그 원칙도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 사태 때문에 지난해 정한 것을 1년도 안 돼서 바꾸려고 논의하고 있잖아요? 반대로 더 좋은 게 있다면 굳이 3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자는 게 아니라 정말 더 좋은 게 있다면 바로 바꾸면 된다는 거예요.

 

법당도 마찬가지예요. 법당을 좀 더 유지하고 싶으면 지역대의원회의에서 자율로 결정하면 됩니다. 법당의 용도가 있으면 3년을 유지해도 됩니다. 그러나 용도가 없으면서 집착 때문에 지키려고 하는 것은 수행의 관점에서 점검해보라는 겁니다. 만약 법당을 다른 용도로 쓰자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라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검토해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학대받는 아동을 보호하는 시설로 사용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죠.

 

온라인 전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

관점을 조금 크게 가지세요. 지금은 여러분들이 조금 어리둥절할지 모르지만, 방향을 바꿔서 막상 진행해보면 여러분들이 ‘그때 방향을 잘 바꿨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토회의 관건은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진행할 사람을 얼마나 많이 양성할 수 있는가입니다. 다른 만 가지를 포기해도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연세가 드셨거나 해서 이 일을 맡을 수 없는 분들은 이 일을 지원하는 기능을 하면 돼요. 지역별 수련원에 가서 불사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나머지 지원하는 역할들을 맡아주면 됩니다. 정토회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했더라도 굳이 전법 활동가 모둠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요? 활동가 모둠에 속하지 않더라도 정토회 회원으로서 아무 부족한 게 없습니다. 정토회 회원으로서 수련장에 와서 뭐든지 봉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온라인으로 모든 불교대학과 경전반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진행자가 굉장히 중요해집니다. 전법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불교대학 진행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아서 실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인격과 자격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래서 연수원에서는 그 일을 할 사람들을 훈련시키려고 합니다.

 

많이 연로하신 분들은 굳이 불교대학 진행자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건강이나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이 따라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굳이 과거에 공로가 있다고 전법사만 모이는 활동가 그룹에 소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2년만 더 지나면 1차 만일결사가 끝나고 2차 만일결사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결사행자들도 모든 지위가 해제됩니다. 그러면 재모집을 해서 2차 만일결사를 30년간 책임지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새로 결사행자가 되어야 해요.

 

이런 변화가 2년 앞당겨졌다 뿐이지 기본 계획에 다 있었던 것입니다. 2년이 당겨진 게 문제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2년을 당겨 시행하려니 준비가 조금 덜 돼서 혼란이 있는 거예요. 만약 2년 후라면 준비가 잘 돼서 바로 개편을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시간이 조금 당겨진 것뿐이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의기투합해서 신나게 일할 수 있을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효과적일까요? 질문자가 제기했듯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면 진지하게 논의해보세요. 스님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스님은 여러분들의 관념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고, 여러분들은 현실에 토대를 두고 이 문제를 살펴봐야 되겠죠. 그래서 모둠을 편성하는 문제는 다시 토론하거나 검토해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통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결론이 안 나면 2월 한 달 내내 토론을 더 해도 됩니다. 그러니 서두르는 게 아닙니다. 죽었으면 장례를 치르는 것을 갖고 서두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이 났으면 집행을 빨리 하는 게 낫고, 결론이 안 났으면 토론을 더 하는 게 낫다’

 

이렇게 관점을 갖고 충분히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계되는 것은 스님이 마음공부의 관점에서 바르게 지도하겠지만, 어떻게 운영하면 효과적인지에 대한 문제는 세속적인 일이기 때문에 스님이 앞을 내다보고 의견을 내지만 스님이 결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의논해서 결정을 내릴 일입니다.

 

지금 제일 많이 제기되는 것이 활동가와 비활동가를 같이 모둠에 편성하자는 것인데, 활동가와 비활동가를 함께 모둠에 편성하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활동가들이 힘들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 의기투합해서 해야 신이 나서 하고, 효과도 나고, 고생해도 재미가 있는데, 7명의 모둠원 중에 3명은 일하고, 4명은 아무것도 안 하면, 일하는 3명의 기운이 빠지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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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비워야 자유로와 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 - 도법 스님


중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도 아니고 이분법적 견해의 그 중간도 아니다. '너와 나', '선과 악', '옳고 그름',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적 견해에 얽매이거나, 그 두 개의 견해를 알맞게 절충하거나, 아니면 두 개의 견해 사이의 그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 중도는 단순히 극단적인 길을 피하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도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다.

중도는 '바른 견해'이고, '바른 생각'이다. 중도는 우선 '바르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르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을 달리 보거나 해석하는 것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그럼 사실은 무엇일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인과 연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연기적 존재' 혹은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개체는 없다. 당신은 당신의 부모, 조상들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음식, 물, 공기, 지구 그리고 우주의 어느 것 하나라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한 송이 꽃도 한 조각 구름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른 생각'도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결해를 버릴 수 있다.

예를 들면,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너와 꽃'이 다르지 않고, '꽃과 돌'이 다르지 않고, '돌과 집'이 다르지 않고, '집과 별'이 다르지 않고, '별과 연꽃'이 다르지 않고, '연꽃과 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무상하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도 없다. 무상은 무아이기도 하다. 무상, 무아, 괴로운 것이 인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연기하고 있는 이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자라서 소녀가 될 수 있고,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될 수 있다. 무아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비우면 채워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라고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들을 다 비우면, 하나의 견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견해를 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바른 견해'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고, 극단적인 시각과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만물의 본성은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인과 연에 의해 생성된다는 '연기법'을 따르는 것이다. ... 우리가 이러한 가르침을 잊고, 생각에 집착하고, 그리고 사물에 집착하면서, 또 그것들이 독립적이고 영원하다고 믿을 때, 우리에게 어려움들이 생기게 된다. 모든 만물은 상호 의존관계라는 본질을 받아들이고, 모든 극단을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더 평화롭고, 기쁨이 가득 찬 삶의 길을 걷을 수 있다.





'중도'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무명(無明 : 무지 혹은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충동이 있고, 충동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의식이 있기 때문에 명색(名色 : 정신과 물질)이 있고, 명색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 있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있고, 접촉 있기 때문에 감정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갈망이 있고, 갈망이 있기 때문에 집착이 있고, 집착이 있기 때문에 생성이 있고, 생성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이렇게 일어난다. 그러나 무명이 사라지면 충동이 소멸하고, 충동이 사라지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소멸하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사라지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사라지면 감정이 소멸하고, 감정이 사라지면 갈망이 소멸하고, 갈망이 사라지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사라지면 생성이 소멸하고, 생성이 사라지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결국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사라질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이 이렇게 사라진다. - 잡아함경 301(Samyukta agama 301)

'중도'는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관념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도는 극단적인 견해와 이분법적 사고를 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고, 잘못된 인식은 두려움, 화, 분별심, 절망과 같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 이런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모든 종류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잘못된 인식, 생각, 관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곳이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이다.

'잘못된 견해'라는 말 자체는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다. 잘못된 견해들도 상대적으로 시각을 달리하면, 그것이 옳은 견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심히 더 들여다보면, 모든 견해들은 잘못된 견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어떤 견해도 진리인 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어느 한 측면에서의 견해이다. 그래서 그것을 소위 하나의 '관점'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보게 되고, 그럼 우리가 처음 가진 견해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여러 견해들이 한 무더기로 모여 있는 견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 반대로 붓다는 잘못된 견해들을 하나씩 버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즉 견해가 아니라 실천이다. 질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견해들이 언제든지 향상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궁극적 실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른 견해'란 모든 견해가 부재한 상태, 즉 하나의 견해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갖는 견해들은 우리의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인식을 중국어로는 생각 '想'이라고 하는데, 한자 윗부분의 '相'은 표시, 기호, 또는 모양을 뜻하고, 한자 아랫부분의 '心'은 마음 혹은 정신을 뜻한다. 하나의 인식은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그 상은 마음으로 그려낸 환영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에게 우리가 인지하는 것으로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붓다는 우리의 대부분의 인식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많은 사례를 들어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괴로움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가 명확히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들로 인해 우리가 '바른 견해'를 갖는 데 방해를 받게 된다.

<금강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르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가르침도 버려야 한다." 당신의 관념과 견해들을 버리는 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유는 버리는 것을 실천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집착과 애착과 같은 정신적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아를 고집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

'중도'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이것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이 나타난다." '나타난다'라는 말은 '태어나다'라는 말보다 훨씬 맞는 말이다. 이것이 연기를 잘 표현한 말이고, 초기 경전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 "그것이 발현을 멈추기 때문에 이것이 발현을 멈춘다." "그것이 그렇듯 이것이 이러하다." 즉 이런 말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연기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마치 우리가 미소를 지으면, 거울도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그들도 우리에게 친절할 것이다.

붓다는 "가르침은 강 건너편으로 건너게 해주는 뗏목과 같다"고 말한다. 일단 강을 건너게 되면, 우리는 강가에 뗏목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두고 떠난다. 가르침도 뗏목과 같아 놓아두어야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에 "45년 동안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나는 한 마디도 한 게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많은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그는 제자들이 그의 말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가 무상, 무아, 연기적 존재라는 가르침을 올바른 견해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를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가르침이지, 그것은 이론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상함이라는 관념은 영원함이라는 관념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떠받들어야 할 진리가 아니다. 가르침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래야 그 가르침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습관의 힘은 수천 번씩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다. 습관의 힘은 우리를 쉬지 않고 달리게 하고, 늘 무엇인가를 하게 하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게 하고, 우리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비난하게 한다. 또한 습관의 힘은 지금 이 순간 누려야 할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가로막는다. 마음챙김 수행은 그런 습관의 힘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챙김은 우리 안에 내재된 그런 습관의 힘을 인식할 때마다 그런 습관의 힘을 멈추게 하고, 현재 이 순간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마음챙김의 힘은 우리 안에 내재된 습관의 힘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변화시키도록 돕는 최고의 에너지이다. 마음챙김의 힘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알아차리게 한다. 그리고 이 힘은 호흡하고, 걷고, 마시고, 먹을 때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마음챙기며 호흡하고, 걷고, 마시고, 먹는 실천으로부터 생겨난다. 마음챙김의 힘은 그 자체 안에 필연적으로 집중력이 따른다. 당신이 무언가에 마음을 모은다면, 그것이 꽃이든, 친구든, 한 잔의 차든, 마음챙김의 대상에 집중을 하게 된다.

 

집중력은 마음챙김의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만약 집중을 충분히 하게 된다면, 그 집중의 힘에는 또한 통찰력이 따르게 된다. 마음챙김, 집중력, 통찰력은 붓다가 되는 에너지들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에너지가 습관의 힘을 변화시켜, 치유와 양분을 이끌어 낸다. 며칠간의 마음을 챙기며 하는 호흡과 걷기만으로도 커다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그 수행은 즐거워야 하고,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숨을 들이쉴 때, 들숨에 주의를 돌려보라. "들숨아! 나는 내가 숨을 들이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들숨아!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를 알아차린다면, 숨 쉬는 것은 행복이다.

'바른 견해'와 '연기'에 대한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성공이나 실패를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 우리 자신의 행복과 연관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도 행복하지 않게 된다.

수행의 목적은 현상계라는 들판으로부터 본질의 차원, 즉 진여의 세계로 내면 깊숙이 내려가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관습적인 명칭들 - 부모, 아이, 나, 너, 꽃, 구름, 오다, 가다 - 에 의해 사로잡힌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관습적인 명칭들을 초월하는 중도의 차원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분노와 미움은 관습적인 명칭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그러면서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부모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자신 안에서 우리의 부모를 보게 된다. 우리가 그처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깊은 차원, 진여의 세계에 닿을 수 있으며,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습관의 힘에 계속 갇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마음챙김 호흡은 우리에게 안락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마음챙김은 이런 마음을 계속해서 지속시켜주려는 성향이 있다. "내가 숨을 쉴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또 내가 화가 날 때도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럼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우리의 모든 족쇄들을 깨부수는 데 도움을 주는 통찰력을 갖게 하고, 또 우리를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이끄는 지혜의 가르침, 즉 무분별심의 속으로 깊이 들어간 상태에 머물게 한다. 이는 수행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가장 위대한 열매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에 얽매어 있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중도에 대한 이해로부터 생겨난 통찰력은 습관의 힘을 부수고, 위대한 통찰과 사랑과 연민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런 에너지들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처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통찰력과 사랑을 미래 세대에게도 전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자유로 가는 순간이다. 이렇게 걷는 걸음은 걸음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세대들의 조상들과 수많은 세대들의 후손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우리가 붓다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고苦의 뿌리는 에고(ego:자아)의 생존욕에 있다. 그 생존욕은 '나'와 '나 아닌 것'이라고 갈라지고...., 이를 바탕으로 온갖 이분二分의 분별과 감정이 잇따라 일어나게 된다. 중생의 마음은 그 '이분'의 양쪽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므로 불안정하다. 안정되지 않은 마음 상태가 곧 '고'이다. 따라서 에고의 생존욕이 있는 한 '고'일 수밖에 없다. 결국 중생의 삶이란 에고의 만족을 위한, 에고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한 갈등에 지나지 않고, 에고의 올가미에 걸려든 그 삶은 탐욕과 불안에 휘몰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깨달음)는 에고의 죽음, 즉 '자아라는 생각'과 '자아에 대한 집착'의 소멸이다. - <금강경>, 곽철환, 살림, 2010, 3~4쪽

심층생태론, 인간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본래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얽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생태계의 근본적인 위기의 원인은 이 같은 사실을 무시한 결과이다. 모든 가치를 인간적 측면에서 평가하고,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원이나 물질로 파악하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고 서로 공생할 수 있는 생태적 세계관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분별심'은 타인과 나,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려는 마음이고, 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분별하려는 습관의 힘이 있는 것은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진실하고 깊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별지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긴다.

내가 과거에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 내가 미래에 존재할 것인지 존재하지 않을 것인지. 내가 지금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사람들이 물어보면, 때에 따라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다. .... 과거에는 내 과거의 존재가 현실이었고, 미래와 현재의 존재는 비현실이었다. 미래에는 나의 미래의 존재가 현실이며, 과거와 현재의 존재는 비현실이 될 것이다. 현재에는 나의 현존재가 현실이며, 과거와 미래의 존재는 비현실이다.(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1997, 106쪽'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또 일어날 것이지만 모두 정확하게 각자의 '바로 지금'에서만 일어난다. 보르헤스는 "인간이 쳇바퀴처럼 흘러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 그리고 유일하게 실재하는 시간인 현재를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가. '오늘'은 '오!늘常'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의상대사가 "과거 현재 미래가 찰나 속에 깃든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역시 모든 시간이 현재에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시간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친 사람중의 하나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그의 영혼이 무엇이 시간인지 알고 싶어 불타오른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날은 나날이 아니라 '오늘' 뿐이라고 하면서 영원으로 통하는 시간인 현재를 강조했다(보르헤스 외,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 김홍근 편역, 여시아문, 1998, 36쪽, 38쪽 참고)

원래 붓다가 가르치려는 길은 형이상학적의 길이 아니다. 해탈의 길이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는 철학과 신학, 자유와 이성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그리고 종교적인 권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훗날 붓다의 가르침은 점차 종교적 색채를 띠지만,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그 동안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참사와 끔찍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불교는 이교도 탄압, 종교 재판, 마녀 재판, 종교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이다(카를 야스퍼스, <위대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80~95쪽 참고)

구원으로 가는 결정적인 것은 믿음이나 희망이 아니라 오로지 올바른 방법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을 믿지만 잘못된 실천 방법을 취하는 사람은 "우유를 좋아하면서 쇠뿔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과 같다." "신념을 갖고 그렇게 하든 신념 없이 그렇게 하든, 그는 우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유를 얻는 올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젖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어도 우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방법이 구원으로 이끌어주며, 이때 믿음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1997,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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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란 무엇인가?

 

 

좋고 나쁨은 그대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난다. 중도는 그대의 마음에 들어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는 더 많은 분별심과 망상들을 짓게 된다.

 

나를 버리면 참된 나를 만나게 된다.(모양이 있는 나가 아닌 무아의 나)

 

자기 생각을 내려놓은 고요한 사람은 집착을 내려놓고, 평온과 순수한 앎의 길로 나아간다.

이 길이 수행자가 가야하는 올바른 길이다. 그 길이 중도다.

 

붓다의 중도(中道)는 강기슭의 두 물줄기로써, 두 물줄기 사이의 중간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최초의 선언인 새로운 길(New way), 참된 길, 바른 길의 천명이다.

 

새로운 길을 보여준 중도는 불교만의 독창적 사상철학이다.

 

유심(唯心)론과 유물(唯物)론의 양변에 떨어진 인도사상을 붓다는 유심과 유물의 어느 한쪽의 견해에 치우치지 않는 양변을 포괄한 중도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재조명했다.

 

고따마 싣다르타는 쾌락과 고행주의의 어느 한쪽의 양 극단을 취하거나 굴복 당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욕망에 사로잡혀 안일하거나 고행이 아닌 합당한 정진으로 나아가는 중도를 취하였기에 견성오도 하였다.

 

욕망과 탐닉, 들뜸과 괴로움, 화와 두려움, 불만족과 혐오라는 것은 수행자가 가는 중도의 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길이다 .

 

집착과 애착이 있는 곳은 양 극단이기 때문에 수행자가 가는 중도의 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길이다 .

 

중도는 강기슭의 양 물줄기를 말하는 것으로 선과 악이 통하는 것, ()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어중간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은 적중의 중으로 중간이나 편견, 변견이 아니다.

시비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가 있으면 비()가 있게 되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기 때문이다. 시비가 융합하면 시가 비가 되고 비가 시가 된다. 시비가 없기 때문에 모순 대립 투쟁이 벗어난다. 이것이 중도다.

 

중용(中庸)과 중도는 다르다.

 

중용이란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는 과유불급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지만 중도는 양변을 포섭한다.

 

가령, 유교의 중용철학은 오욕칠정을 겸양의 미덕으로 자제하거나 선비로서 과하지 않게 억제해야 하는 중간 도리를 취하게 하지만 중도는 그렇지 않다.

 

오욕칠정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에 즐기되 욕망을 추구하거나 탐착하지 마라.

 

 

*오욕칠정(五慾七情)

색욕(애욕),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과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노애락, 사랑·미움·욕심을 말한다.

 

 

불교적으로는 희노애락·우비고뇌(憂悲苦惱)을 유교사상과는 다르게 초연성을 갖는다.

 

즉 슬프면 슬퍼하라. 슬픔을 억누르지 않는다.

 

무엇이든 억지로 통제하면 병이 된다. 목석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하되 비탄에만 빠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중도는 중용과는 달리 양변에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달라진다.

 

 

사랑하되 애착하지 말라.

애착은 고통이다.

 

애착하지 않고 승화된 영혼의 사랑은 자유가 있는 참사랑이다.

재물을 가지되 소유하지 말라.

 

재물은 역사상 그 누구도 줄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무소유의 마음으로 나누고 보시하면 도리어 재물은 더 늘어나고 번창한다.

 

권력을 가지되 남용하지 말라.

군림하지 않고 공평무사하면 만인에게 칭송 받고 명예가 높아진다.

 

 

즐기되 탐착하지 말라.

탐착은 멈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탐착하지 않는 문화적 심취는 예술과 낭만의 삶으로 이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는 중도를 정의한다.

 

쌍차쌍조는 <영락본업경>에 나오는 용어로서 천태지의(智顗, 538~597)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 진보와 보수, 옳고 그름, 시비분별과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양변(兩邊)을 말한다. ()은 악의 상대적 관념에서 나온다.

 

 

쌍차는 각각 한 쪽으로 치우친 변견적 양변의 사고를 차단하는 의미이고, 쌍조는 양변을 비춘다는 것으로서 태양이 만물 전체를 공평하게 비추듯이 양변의 서로가 햇빛의 자양분을 골고루 받으면서 회통 융합되는 것을 말한다.

 

 

 

천태의 공··중 삼관(空假中三觀)에 대하여

 

()이라함은 형성된 물질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재는 하나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색즉시공이다.(형성된 물질은 곧 텅 비어있다)

 

()라고 함은 형성된 물질은 조건에 화합하여 잠시 드러나 있는 거짓의 모습으로 관찰하는 것을 가관(假觀)이라고 한다. 공즉시색이다. (텅 빔은 곧 물질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질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의미는 텅 비어 있는 듯 하지만 조건을 맞으면 언제나 물질로 드러난다.)

 

()이라고 함은 ·를 별개로 구분하여 양변을 치우쳐 보지 않고 하나의 동시적 현상으로서 관찰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한다. 이를 천태학에서는 중도실상이라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중도는 팔풍(八風)에 대한 초연함이다.

팔풍은 이((), ((), ()(), (()의 여덟 가지에 초연하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듯이 영향을 받는 심리적 현상 작동을 말하는데,

 

이익은 좋아하되 손해는 싫어하며(·),

 

명예는 좋아하되 치욕은 싫어하며(·),

 

칭찬은 받는 것은 좋고 비난받는 것 싫어하며(·),

 

인내심이 약하고 이기적이어서 힘든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좋은 것만 하려고(·)을 말한다.

 

 

<무쟁의 분석 경(M.139)>에 부처님의 중도에 대한 말씀이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 수행자는 그 어느 한쪽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 .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

쾌락의 탐착은 천박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

자신의 학대는 피로와 고통만 남길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난 것이 중도이다. 그것은 안목을 밝히고 지혜를 증진시키며 번뇌를 쉬고 고요하게 한다 ."

 

 

중도를 완성하는 길이 팔정도의 길이다. (중도 = 팔정도)

중도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하되 머물지 않는 마음)의 무심이다.(중도 = 무심)

 

 

만물은 상호연기적 관계로 존재하나 실체는 없다.

그래서 중도는 연기, 연기는 곧 공이다(중도=연기=)

 

무심은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함이 없고 의도가 없는 마음을 말한다. 이를 용심(用心, 화엄경의 善用其心)이라고 한다.

 

마음이 무심하면 감정이 없고 자비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 기쁨, 사랑, 분노, 신경질 등의 감정들은 느낌과 감흥이기 때문에 나와는 관계없이 상황에 따라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들에 물듦고 애닮음이 없다. , 상황에 반응하되, 그 마음은 작동(동요)하지 않는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사랑은 있되 애착·집착·소유욕이 없고, 사별과 실연 속에서 통곡과 애절함, 쓸쓸함은 있을지라도 비탄에 빠지는 일는 없다.

 

응무소주는 (사마타, )이며 진공(眞空)이요, 이생기심은 (위빠사나, )이자 묘유(妙有)이다.

 

정통 출가자는 아니지만,

대승불교의 거목인 용수 <중론(中論)>의 팔불(八不)에서도 중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고, 불멸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대상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오고 감이 없다)

 

 

중론의 팔불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중도의 표명이다.

 

()은 일체를 부정하고 염세적인 허무주의가 아니고, 없는 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을 초월한 유무가 서로 상생화합하는 원융무애의 공이다.

 

 

<화엄경>의 법성게는 중도의 압권이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아니다.

 

 

*()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듯이 마음의 본질은 원래가 원융무애한데, 스스로가 죄와 벌을 주고 중생이다 부처다 분별한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에 일체가 있고 모든 것이 하나로써,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와 일체라는 것은 양 변으로써, 하나와 일체에 국집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중도이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과 사와 열반 또한 그 자체가 함께하는 조화로운 하나이네.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이다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본래부터 부동이라 이름 하여 부처라 하네.

 

*중생심만 내려놓으면 본래가 부처로세*

중생심이란 분별심이다,분별심은 양변에 치우치는 것이니 중도 연기인줄 알면 실체가 없는 무아이므로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적으로 중도를 잘 드러낸 양나라 황제 무제와 달마의 문답이다.

 

 

양무제 : 무엇이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 마 :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여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소.(확연무성 廓然無聖)

 

양무제 : ?????!!!!!

 

 

성철스님의 중도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서구 세계에서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이 일찌기 중용사상을 펼쳤는데, 그들도 중간 사상을 가지고 중용사상이라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들의 이른바 중용사상은 양변을 완전히 버리고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사상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융합한다는 것은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도사상과 중용은 결코 혼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계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언뜻 보기에 불교의 중도사상과 비슷해보이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헤겔의 변증법(辯證法) 사상입니다. (), (), (),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정에서 반이 나오면 그것을 융합시켜서 합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논리는 중도와 비슷한 듯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는 헤겔의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변증법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괴테와 헤겔이 만났는데, 괴테가 헤겔에게 그 변증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헤겔은 그것은 모순의 논리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곧 정과반의 모순, 시와 비의 모순, 선과 악의 모순을 말하니, 이것은 양 변이 서로 모순이므로 서로 통할 수가 없으니 이 이론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사상이니, 팔만대장경 전체가 여기에 입각해 있으며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중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 불교를 설명한 많은 것들의 그 진위를 가리려면 중도논리에 위배되는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에 위배되는 사상은 결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각산스님의 말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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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산의 모습

갈촌 마을 입구 소나무

할아버지 할머니산소

갈촌 할아버지 할머니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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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시종 신학리 처가집 산소 
목포 해상 케이블카
유달산을 오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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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나는 만족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고민할 게 하나도 없어져요. 욕을 얻어먹어도 살아 있으니까 얻어먹는 것이고, 한 대 맞아도 살아 있으니까 맞는 것이고, 병에 걸려도 살아 있으니까 병에 걸리는 것이잖아요. 죽었다면 병들 일도 없고, 욕 얻어먹을 일도 없고, 굶을 일도 없어요. 이렇게 딱 관점을 바로 잡아버리면 모든 고뇌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법문을 할 때도 있잖아요.
‘즐겁고 괴로운 것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복 사고가 났다고 합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팔이 부러졌어요. 그런데 부러진 팔을 쥐고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사람은 다 죽고 나만 살았어요. 그러면 우리는 ‘아이고, 부처님의 가피구나.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나고 팔이 부러졌어도,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안 다치고 내 팔만 부러졌다면 어떨까요? ‘재수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재수 좋다, 재수 없다, 사실은 어떨까요?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재수 좋음과 재수 없음은 객관적인 게 아니에요. 늘 주변과 비교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재수 좋고 재수 없는 것은 믿을만한 게 못 됩니다.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팔이 부러진 상황은 똑같은데 어떤 경우에는 ‘다행이다. 부처님의 가피다’라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재수 없다. 나만 벌 받았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양쪽 모두 팔 하나가 부러진 것뿐인데요. 이게 중생의 복과 재앙입니다.
아마 그 교수님은 이런 식으로 위안을 받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는 뜻에서 문제 제기를 하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에게 달리 특별한 기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이치에 따라서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으면 그냥 상황이 벌어진 것일 뿐 그걸 갖고 재수 좋으니 재수 없느니, 좋으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마라’
팔이 부러졌으면 부처님의 가피라고도 하지 말고, 부처님을 안 믿어서 벌 받았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건 상대적으로 일어난 생각일 뿐이니까요.
팔이 부러졌으면 그냥 부러진 것이니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됩니다. 이걸 두고 재수가 좋으니 재수가 나쁘니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마음이 널뛰기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한 생각 일으켰다면
그런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할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선책도 있습니다. 어차피 마음을 일으킬 바에는 ‘재수 없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재수 있다’라고 일으키는 게 낫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지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이왕이면 ‘재수가 좋다’, ‘가피를 입었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낫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다고 합시다. 그럴 때 다친 다리를 부여잡고 ‘아이고, 부처님께 기도해도 소용이 없네!’ 이러면 자기에게 재앙이 생긴 것이 되고, 부처님도 원망하게 되잖아요. 그럴 때 이왕이면 마음을 다르게 가져보라는 거예요. 사실 부처님께 절하는 것과 계단에서 넘어진 것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다쳤으면 그냥 치료를 하면 돼요. 그러나 이왕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면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게 낫습니다.
‘아이고, 기도라도 했더니 그래도 한 다리만 부러지고 다른 다리는 안 부러졌네. 다행이다.’
마음을 이렇게 일으키는 것을 ‘긍정적’이라고 해요. ‘재수 없다!’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부정적’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일으키는 것은 나쁜 게 아니에요. 진리의 길은 애초에 이것을 좋고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한 생각을 일으켰으면 긍정적으로 일으키라는 거예요. 이왕에 마음을 일으킨다면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편이 본인에게도 좋다는 거죠.
수행의 목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되 평정심을 잃었다면 재빨리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리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으키는 마음의 90퍼센트는 부정적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우리의 까르마(습관)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문화적인 환경도 부정적인 심리가 작동되기가 쉽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 세대나 사회 전체가 어떤 일이 생기면 늘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도 어릴 때부터 보고 들으면서 그런 습관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긍정적으로 돌리려면 의식적으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천당과 지옥을 벗어난 해탈의 길
꿈으로 비유해 볼게요. 꿈은 안 꾸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런데 꿈을 꾸는 상황이라면 이왕 꿀 바에야 악몽을 꾸는 것보다는 좋은 꿈을 꾸는 게 낫겠죠. 그러나 수행적 관점은 ‘그것이 설령 좋은 꿈이라 하더라도 안 꾸는 것보다는 못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설령 그게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마음을 애초에 안 내는 것보다는 못한 거죠.
세상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만을 말하지만, 부처님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당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는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갔다고 좋아할 게 아닙니다. 천당 역시 불안정한 세계로 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해가 됐어요?”
(후기)
우리는 늘 분별심으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 있다 없다> 양변으로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번뇌 망상이라는 것이다, 양변과 변견을 떠나 중도로서 보는 지혜를 터득해야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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