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으셨나요?

“경전에는 깨달음이 마치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처럼 묘사가 되어 있지만 부처님께서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됐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으셨나요?
부처님은 출가 후에 스승을 찾아서 배움을 청했으나 본인이 가졌던 의문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탐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스승에게 배우는 시간은 습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스승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울 스승도 없고 자기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부처님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는 동안 피골이 상접하도록 용맹 정진을 했다는 점은 존경할 만합니다. 그러나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시행착오를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 과정에서 부처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쾌락도 수행의 장애가 되지만 고행도 수행의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쾌락을 통해서 해탈을 얻을 수 없듯이 고행을 통해서도 해탈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쾌락을 좇으면 과보가 끊임없이 따르기에 윤회를 할 수밖에 없었고,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을 하면 몸과 마음이 긴장이 되어 편안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어려웠습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모순을 발견하고 쾌락도 고행도 모두 버렸습니다. 즉 두 가지를 다 뛰어넘으셨어요.

부처님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브라만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신에게 빌어서 얻으려고 하는 ‘쾌락주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출가 사문들은 쾌락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욕망을 부정하는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고행주의’를 추구했어요. 부처님은 젊을 때는 브라만교의 가르침을, 출가 후에는 고행의 길을 갔지만, 완전히 해탈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떠나 제3의 길인 중도를 발견하셨습니다. 중도란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욕망이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거예요. 해탈을 얻은 뒤에만 편안한 것이 아니라 해탈을 얻는 과정도 편안한 것을 말해요. 결과만 좋은 것이 아니라 과정 또한 좋은 것을 말합니다. 욕망을 따르는 쾌락주의를 추구한 것도 아니고, 욕망을 참고 인내하는 고행주의를 따른 것도 아니고, 욕망이 욕망인 줄 알아차리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셨습니다. 욕망과 싸우지도 않고, 욕망에 노예가 되지도 않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제3의 길인 ‘중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중도를 발견한 후 부처님은 극심한 고행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네이란자라 강에서 가볍게 목욕을 하고, 수자타가 준 유미죽을 먹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길상초를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49일 동안 선정을 닦는 동안 부처님에게 세 가지 유혹이 나타났습니다. 첫째, 마왕의 세 딸이 유혹을 했어요. 이는 욕망의 뿌리가 남아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망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곧 괴로움임을 꿰뚫어 알고 그 욕망과 싸우지 않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둘째, 마왕의 군대가 나타나 부처님을 공격했어요. 부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켜서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셋째, 마왕이 직접 나타나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자재천왕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나는 바라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며 마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부처님이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해요.


이렇게 자기 내면의 욕망과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후 새벽별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안온해지고 모든 번뇌와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마치 봉사가 눈을 뜨듯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천하 만물은 다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자, 발에 밟히는 모래, 눈에 보이는 나뭇잎, 피부를 스치는 바람, 손에 닿는 차가운 물, 그 어떤 것도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나와 연관되어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라고 특정할 것도 없고, 천하 만물 중에 나 아닌 것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나와 자연의 합일 속에서 안온함을 느낀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7일 동안 법열을 누렸습니다. 마음이 들뜨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요 적정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음을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구나. 이것이 생겨나니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지는구나!’

12연기의 여러 관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지 않고도 알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지 않고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작용도 알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하면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알게 되고, 사람들이 어떤 원인을 지었기에 저런 과보를 받는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인도에서는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다 보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괴로움을 짓고 받으며 아우성치는 것을 모습을 보면서 연민을 느꼈습니다. 이 바른 법을 그들도 알게 된다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 좋은 법을 고통받는 중생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은 성도재일을 맞아 이런 부처님의 삶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계승해 나가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성도재일을 맞아서 불법의 요지인 연기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봤으면 합니다. 성도 이후에 부처님께서 이 법을 전하며 사셨던 모습을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정말 죽을 고생을 하지만, 부자가 된 후에는 큰 집을 짓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러 가지 유희를 즐기지 않습니까? 정치인도 지위를 얻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하지만 이룬 뒤에는 복락을 누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그분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각국 왕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수많은 부자들이 부처님을 지원했는 데도, 그분의 일상은 늘 분소의를 입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며 매일 아침 길거리에 가서 남이 먹다가 버리는 음식을 걸식해서 먹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45년 동안 숨이 멎을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와 같이 살았습니다. 재가 수행자들은 비록 세속에 살면서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더라도 부처님과 승가가 사는 모습을 보며 늘 검소하게 살았어요. 기본적인 생활만 유지하고 남은 것은 아낌없이 승단과 이웃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점점 더 존경하게 되었고, 불법에 귀의하는 불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요. 한 사람에서 시작한 불교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200년도 지나지 않아 인도 사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고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인도 남쪽 일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왕입니다. 아소카왕은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 불교도를 격려하고 그들이 제시한 방향대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왕이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불교를 믿고 받들었으며 인도 대륙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전법사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던 수행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자 무사안일에 빠져 타락의 길로 가기도 했지만, 붓다가 개척한 삶의 원형은 불멸 후 200년까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고 지켜졌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의 정신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 정토행자들은 우리가 정한 원칙을 200년은 고사하고 한 세대, 또는 우리 세대 동안만이라도 제대로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정토회가 처음 출발할 때는 가정집과 사무실, 식당에서 한두 명만 모여도 정성스럽게 법회를 열었습니다. 정토회도 세월이 흐르면서 대중이 늘어나고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불사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처음 출발할 때의 정신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천막을 치고 신앙대회를 하고, 비닐하우스에서 촛불을 켜고 깨달음의장을 진행하던 그 근본정신을 상황이 바뀌더라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요?

물론 정토행자들이 나이가 들고 기력이 떨어지면 그에 맞게 시설도 변경하고 삶의 방식도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붓다의 근본정신을 따르겠다고 한 우리가 스스로 붓다의 삶을 닮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한다고 해도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그저 30년이나 60년 반짝하다 사라져 버린 수많은 신흥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바른 길을 개척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법사님들과 전법활동가 여러분이 더 겸손한 자세로 수행 정진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야 해요. 정토회 회원의 수가 늘어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도부와 중심세력이 신심이 깊지 않고 가치관이 분명하지 않고 실천력이 없다면, 정토회도 그저 수많은 신흥세력 중 하나에 불과해지고 말 거예요. 우리가 이 좋은 부처님의 법을 전 세계로 전파하고, 먼 미래까지 지켜나가려면 지금부터 굉장히 정교하고 알찬 씨앗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부처님의 성도일을 맞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수행력과 전법의 관점을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배려를 한다는 명분으로 자꾸 편리나 안일함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세상과 다름없는 길로 가게 돼요. 기성 불교처럼 갈 바에야 무엇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길을 간다고 하면서 그 난리를 피웠겠습니까? 이미 있는 절의 스님 밑에 가서 공부하고 봉사하면 되지 무엇을 위해서 새삼스럽게 정토회를 만들었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도 늘 다른 종교, 다른 불교, 다른 절과 비교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거예요. 부처님의 제자들이 ‘브라만이 어떻더라’, ‘육사외도가 어떻더라’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고집불통으로 세상과 동떨어지게 살아서도 안 돼요. 세상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정화하겠다고 발원해 놓고 점점 세상에 물들어간다면 그런 발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국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젊은 세대도 그에 맞게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자신만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세대나 외국인들이 자란 환경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러나 수용을 한다고 해서 욕망을 수용하거나 성냄까지 수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공동체로서의 정토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요. 그것은 수용이 아니라 세속화의 길이고 타락의 길입니다. 유연한 태도로 많은 대중에게 전법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칙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속에 동화되어 버릴 위험이 있어요. 부처님은 당시에 엄격한 계급 사회 속에서도 깨달음을 통해 분명한 관점을 얻었습니다.

‘사람에게 귀천이 없다. 계급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남녀에 따라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성별에 의해서 귀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이 분명했기 때문에 세상의 저항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분명한 관점을 갖지 못하면 세상에 휘둘리게 됩니다. 정토행자라고 하는 사람이 굶어 죽는 사람을 돕자는 데 이념을 따지고, 전쟁을 막자고 하는데 이념을 따진다면, 부처님 당시에 계급제도와 성차별을 합리화하고 왕정을 합리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행자라면 세상의 관념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다면 무엇 때문에 수행자라고 합니까? 세상 사람은 원수의 아들이 망하면 기뻐합니다. 수행자는 원수의 아들이라도 그가 배고프다면 먹을 것을 줘야 하고, 그가 헐벗고 있다면 입을 것을 줘야 하고, 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학교에 보내 줘야 해요. 이것이 수행자의 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전법활동가라는 이름만 가질 게 아니라 무엇보다 수행자의 관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부화뇌동하거나 휩쓸리지 말아야 해요. 이런 점을 성도일을 맞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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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온, 십이처, 십팔계
1) 오온(五蘊)-오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하며 색온(色蘊), 수온(水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을 말한다.
① 색온은 물체의 형상이며,(모든 물체를 뜻함)
② 수온은 감각작용,
③ 상온은 사고작용,
④ 행온은 의지작용,
⑤ 식온은 인식능력을 말한다.
※ 온(蘊)이란 쌓아 모았다는 뜻이고 인간(人間)은 몸과 마음, 즉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로 구성(構成)됨


① 색온(色蘊) : 색에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인 사대(四大)가 있고 이 사대는 안으로는 우리의 몸에 있어서 사지, 백골, 오장, 육부, 눈, 귀, 입 등의 모든 기관이 되는 것이고, 밖으로는 단단한 것(地)과 물(水), 더운 기운(火)과 움직이는 기운(風)이 된다.


- 눈이 바깥 물색의 경계를 대하지 않거나 또는 바깥 경계를 대할지라도 주의하여 마음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의식작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 금촉 또는 지감(판단중지-가치관 등 관념에 의한 분별중지)
- 눈이 밖으로 경계를 대하면서 주의하여 마음의 분별을 일으킬 때에 비로소 의식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의 색을 색온이 라 한다.
- 스스로 변화하며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로 제각기 다른 형태와 색체를 가진 색, 성, 향, 미, 촉, 법을 총괄한 객관적 세계.


② 수온(受蘊) : 육근(六根)의 감각을 통하여 육경을 접해서 일어나는 감수작용으로 고, 락, 불고, 불락(苦, 樂, 不苦, 不樂)을 느끼는 마음을 수온이라 한다.


③ 상온(想蘊) : 감수작용으로 일어나는 느낌이 뇌리에 전달되어 일어나는 상상 [사고]작용을 상온이라 한다.


④ 행온(行蘊) : 사고작용의 결과, 의지작용으로 취하고 버리는 행동, 인식의 능동적 작용을 행온이라 하고, 업의 근원이 된다.


⑤ 식온(識蘊) : 그것을 인식하여 좋고, 나쁘고 하는 판단작용을 식온이라 한다-(선악미추호오)판단/분별작용


바깥 세계와 이 몸 내부의 모든 기관은 오온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인연으로 쫓아 나는 이치를 보는 자는 법을 볼 것이고, 법을 보는 자는 자연 인연생(因緣生起)의 이치를 볼 것이며, 오온은 인연생기의 법이므로 오온에 대해 탐욕과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이 고(苦)를 없애는 것이다. < 아함경 >


* 비유 : 꽃(色)을 보니 아름다워서(受) 애인에게 주려는 생각이 들어(想) 꽃을 꺾었는데(行) 한편으로 꽃을 꺾은 것이 마음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識).
5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인 것으로 영원불멸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설한 것이다. 즉 이들에게 정신 또한 실체가 없으며 연기된 것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2) 12처(十二處)
이 우주에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 관계와 객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주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6내입처이고 객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6외입처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모든 현상은 12처에 포섭된다.
십이처(十二處)ㅡ육근과 육경을 합친 것; 처(處)ㅡ들어오는 곳
육근(六根)ㅡ안, 이, 비, 설, 신, 의ㅡ6내처(六內處)
육경(六境)ㅡ색, 성, 향, 미, 촉, 법ㅡ6외처(六外處)


<6근>               <6경>
➊ 안계(眼界) ㅡ ➐ 색계(色界)
➋ 이계(耳界) ㅡ ➑ 성계(聲界)
➌ 비계(鼻界) ㅡ ➒ 향계(香界)
➍ 설계(舌界) ㅡ ➓ 미계(味界)
➎ 신계(身界) ㅡ ⓫ 촉계(觸界)
➏ 의계(意界) ㅡ ⓬ 법계(法界)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을 이루는 기본 요소는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체를 구성하는 12처도 모두 연기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3) 18계(十八界)
18계설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인식기관[6근(六根)]과 인식대상[6경(六境)], 그리고 인식작용[6식(六識)]으로 분류한다.
계(界)ㅡ구성요소, 영역, 종류
식(識)ㅡ인식작용


<6근>               <6경>              <6식>
➊ 안계(眼界) + ➐ 색계(色界) = ⓭ 안식계(眼識界)
➋ 이계(耳界) + ➑ 성계(聲界) = ⓮ 이식계(耳識界)
➌ 비계(鼻界) + ➒ 향계(香界) = ⓯ 비식계(鼻識界)
➍ 설계(舌界) + ➓ 미계(味界) = ⓰ 설식계(舌識界)
➎ 신계(身界) + ⓫ 촉계(觸界) = ⓱ 신식계(身識界)
➏ 의계(意界) + ⓬ 법계(法界) = ⓲ 의식계(意識界)-[오감 감정 생각]
18계설은 물질과 정신에 실체가 있어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설한 것이다. 이들에게 물질과 정신의 참모습인 연기성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8계설에서도 결국 정신이든 물질이든 모든 현상은 영구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연기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일체(세계)는 12처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일체(세계)는 18계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며, 일체(세계)는 5온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ㅡ일체유심조: 일체 만물은 오온(참나)의 작용-법공
* 12처 = 6경 + 6근
* 18계 = 6경 + 6근 + 6식
* 108번뇌 = 18계 x 2(좋고, 나쁨 분별) x 3세(과거, 현재, 미래)
108번뇌, 108염주, 108배 등 108이라는 숫자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인식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대함으로써 일어나는데, 육근이 육경에 대할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이 육식이다. 이렇게 육근, 육경, 육식이 모여 인식이 성립하는 것을 '근경식 삼사화합'이라 함.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다가 이런 질문을 했다. “비구들이여, 내가 물을테니 아는 대로 대답해 보라.
육체[色]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시시각각 변해서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라면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육체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것[我所]이며, 나[我]이며, 나의 본체[我體]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無我].”
“그러면 정신의 세계인 감수작용[受]과 개념작용[想], 그리고 의지[行]와 인식[識]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며, 즐거운 것이 아니며, 나의 것도 나의 본체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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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공

독립된 실제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존재의 원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화하므로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인데 이것을 무상공 이라하고
둘째 이것은 저것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어야 존재 할 수 있으므로서 서로 상관관계로 의지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연기공이라고 합니다
이때에 의미는 스스로 성품이 없다 (즉 자성이 없다 무자성) 확실하게 이것이다 하는 확실하게 저것이다라고 할 만한 그 무엇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모든 존재는 생기고 잠시 머무르고 변화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다라고 하며 무상이라고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설 풍습 윤리 도덕 모든 물질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컵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모양으로 보이겠지만 물리적으로 매 순간 미세하게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뿐 고정 불변은 아닙니다.

따라서 지금 보고 있는 컵은 과거의 보고 뇌에 인식된 기억속에 컵을 보고 있을뿐 겁을 형성하고 있는 소립자의 작용에 의해서 매 순간 미세하게 변하고 있는 지금은 컵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는 그 실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리를 통해서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실상의 허상 즉 가립된 존제를 보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는 것을 공을 보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변하기 때문에 항상 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공하다라는 의미의 공으로이므로 무상공이라고 합니다.

만상은 고정불변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는 것이 존재의 원리이기 때문에 무상을 보면 진리를 본다 진리를 취득한다는 뜻이 됩니다. 물체를 고정된 실제로 볼 때는 그 것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욕심을 일으켜 가지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무상으로 원리를 깨닫게 되면 잠시 존재하다가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므로 가지려 하는 욕심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거의 모든 고통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것은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기 공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의 관계로써 존재가 가능하므로 혼자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 할 수있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꽃을 해체해서 보면 이것과 저것이 모여 하나의 꽃이라고 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을뿐 꽃을 구성하고 있는 어느 것 하나도 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으며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는 씨앗 흑 비 태양과 같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조건만으로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접적인 원인으로 (인 씨앗) 간접적인 원인 (연 흑비 인간 태양등) 화합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인연생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물질이 인연따라 모이면 살아 있는 것이고 흩터지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70%는 물입니다 물을 먹으면 먹은 물은 내 몸의 구성 요소가 되어 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은 밖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나라고 할수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인연연기법으로 보면 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로서 존재하는 생명공동체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아서 어떤 물질적인 힘을 가해도 부서지지 않아야 하고 없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날 물리학에서 물체는 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소립자의 작용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그 작용에 의해서 물체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는 이것과 저 서로 상관관계로 영향력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생겨나고 흩어지고 없어진다라는 뜻으로써 모든 것은 전체로서 하나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의미의 공이므로 연기 공이라고 합니다 무상공과 연기공의 원리로 보면 만상은 있는 그대로 공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있는 것을 없애고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서 없음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보는 것이므로 공하다는 의미의 존재의 실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연기공의 원리로 보면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우주가 탄생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며 이것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적 윤회하는 과정에 이것은 저것에 들어 있고 저것은 이것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으며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상주 하는 것도 아니면 단멸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도 이와 같아서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죽는 가운데 죽지 않기도 하며 모든 것이 나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소립자는 온 우주에 에너지라는 형태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를 다른것들과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주간과 객관으로 나눠지기 때문에 내 것과 남의 것이 만들어져 서로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일어나 화를 자초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것들과 관계를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따라서 선별하고 차별하고 배척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되며 조건 없이 서로 나누지 않으면 상생의 관계가 끊어져 결국 자멸의 길로 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만상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공한 것이고 서로 상관관계를 의지하면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것은 제법은 있는 그대로 공하다 따라서 만상은 스스로 성품이 없으므로 무자성 즉 나라고 할 만한 영구불변의 실체는 없다 그래서 무아라는 말이 됩니다 무자성 원리는 빛의 이중성 즉 입자와 파동 양자물리학에서 밝혀짐으로써 더 확실해졌습니다

깨달음을 세계에서 말하는 것 같다 다르지 않다 사상이 그것입니다 무자생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나라고 할 만한 고정불변의 것은 없다라는 뜻이 어서 이 말은 무아라는 뜻인 되고 무아는 나라는 존재가 연기적 존재로서 있기는 하나 나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나 아닌 다른 요소 (오온 색수상행식) 로 나라는 존재로 있다. 즉 가립된 존재 허상 이라는 의미의이기 때문에 비아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함께 있는 생물 공동체 구성이기 때문에 나는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므로 모든 것을 하나로 보게되며 분별심 차별 저절로 없어지게 됨으로써 항상 전체를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독립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으니 나만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 그래서 깨닫고 나면 생명 공동 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필요하게 되어서 늘 한가하게 지내며 오직 나누는 일에만 충실 하게 됩니다. 연기공과 무아공 원리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자기 계발을 거의 끝났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자성 원리는 자기를 개발하는 원리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이 원리를 명확하게 알고 생활을 잘 활용하면 거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 원리를 우리 생활에 활용하기 위해서 항상 깨어있어 자신을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무아 무유정법 응무소주 재상비상 등 중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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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금도 일주도로

                                                   나로도 우주쎈타

팔영대교를 건면 바로 여수와 연결된다.

 

해남-영암-강진-장흥-노력도-금당도-녹동-소록도-거금도-날로도-팔영대교-낭도-여수-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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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도 일주도로변에서 바라본 바다는 온통 양식장이다.

 

 

                                                  울포항 여기서 배로 녹동항으로 떠난다.

 

 

 

 

 

 

                                            금당도를 떠나며 바라본 전경

하화도가 보인다.
왼쪽섬은 소록도 다리를 두고 오른쪽 섬은 거금도  보이는 다리는 거금대교
거금대교를 지나며

 

                                                   녹동항에서 먹은 백반

                                                 거금대교지나 거금도로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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